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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10:58

청나라/대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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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북원4. 명나라5. 조선6. 러시아7. 일본8. 몽골9. 그 외

1. 개요

청나라의 대외 관계를 정리한 문서이다.

2. 상세

대외 관계에서 주목할 만한 점으로 러시아 제국과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에는 만주어와 러시아어로 체결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 청조(淸朝)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기록에 만주어를 원본으로 삼은 것에 대해 국내 학자가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의 내용을 분석해 가설을 제시한 책이 있다. 이에 따르면 네르친스크 - 캬흐타 조약(이하 청 - 러 조약)은 청과 러시아가 서로 대등한 위치를 가지고 조약을 맺은 것인데, 많은 이들이 아편 전쟁 후의 '불평등 조약 체제'에 집중하기 때문에 '평등 조약'인 것에 주목하지 청 - 러 조약이 왜 만주어로 기록되었는지는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 청 - 러 조약의 기록을 만주어로 남긴 이유는 청 - 러 조약이 평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화이(華夷)개념에 따르면 '오랑캐'인 러시아와 맺은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어야 한다. 천자의 나라인 중국이 상위, 러시아가 하위인 조약이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준가르 몽골 문제의 해결에 쫓기던 청나라는 러시아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할 수 없었다. 이는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당시 러시아 차르이던 표트르 1세와 이복 누나 소피야 간의 대립으로 내부가 시끄러웠기 때문에 군사적으론 유리했으나 청에게 이전에 획득한 영토를 내주는 등 불리한 내용으로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청 - 러 조약은 평등 조약이 되었다.

평등 조약이라는 것은 중화사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조약이 된다. 이 때문에 청 - 러 조약의 기록은 중국어, 즉 조약문에는 만주어로만 기록되었으며, 만주는 한자 문화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리상으로 북방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남쪽에있었던 한족이 개입할 여지가 적었고 한문으로 적을 이유도 없었다. 네르친스크 조약에 참여했던 통궈강의 경우는 한족 출신이지만 팔기에 편입되어 있었고 1688년 만주족으로 변경을 하게 된다.[1]

3. 북원

원나라명나라에게 대도를 뺏기고 북쪽 내몽골 및 만주 지역으로 물러가서 북원을 세웠다. 그 후로 명나라중국 대륙을 빼앗기 위해 많은 전쟁을 벌였다. 그래서 실제로 알탄 칸 때는 경술의 변을 통해 거의 원나라 부활 일보직전까지 성공했기까지 했으나 알탄 칸의 사후 약체화되었고, 외몽골의 오이라트와도 고비 사막을 경계로 툭하면 전투를 벌여 쇠약해진 상태에서 후금이 팽창하자 북원의 후신 차하르 칸국의 에제이가 대원진국옥새를 후금의 홍타이지 칸에게 바치고, 후금은 대원옥새를 바탕으로 중국의 황제를 선포,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연호를 숭덕이라 하여 황제국을 선포한다.[2]

이후 청나라는 북원의 영역인 내몽골과 만주 흥안성을 복속시키고 내몽골 왕공들을 대거 팔기군에 합류, 막강한 기병 전력을 갖고 명과 조선을 털어버리며 특히 조선에게는 희대의 굴욕을 주기까지 했다. 차하르는 청나라와의 연합으로 실질적으로도 내몽골 최강 세력이 된다. 그러나 청나라는 다른 몽골인들을 매우 탄압하였는데, 유목민인 그들에게 영역을 정해주고 그 영역을 벗어나면 심각한 처벌을 내렸다.# 이러한 몽골인 탄압이 정점에 이른 게 준가르를 멸망시킬 때였으며, 이때문에 오이라트인들은 몽골계 민족 중에서 청나라의 탄압을 가장 혹독하게 받은 민족이 되었다.

4.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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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청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옛 명나라의 유신들 때문에 꽤나 골머리를 썩혔다. 한족은 그 특유의 중화사상 때문에 '야만족'이 세운 청나라를 공식적인 중화의 계승자로 인정하지 않았으며, 만주족이 명나라를 도와준다고 사기를 치고 천하를 낼름 빼앗아 갔다고 여겼다. 청나라 옹호자들은 만주족이 사실은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얻은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무너뜨린 이자성을 치고 그의 손에서 천하를 빼앗아왔다고 주장하지만 그래봤자 한족의 입장에는 마찬가지였다.

청 말기의 쑨원 같은 민족주의 혁명가들이나 반청 복명 인사들은 청나라와 '중국(명)'의 관계를 식민지라고 주장했다.

5.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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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러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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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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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몽골

외몽골의 경우 1691년 돌론노르 회맹에서 칸들이 강희제에게 분명한 신속의사를 포명함으로써 청나라에 복속, 청의 외몽골 지방이 된다. 그러나 청이 멸망한 뒤 외몽골은 독립을 추진. 복드 칸국으로 독립하고 1924년 다시 몽골 인민공화국을 세우게 된다. 물론 자력은 아니고 러시아 내전 당시 소련군의 도움으로 독립했고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위성국이 된다. 반면 일찍이 대원전국옥새를 바치며 청 황실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계속 청과 호흡을 같이 하다 티베트와 함께 서구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중국사에서도 전무후무한 병력을 징집할 수 있게 된 한족들에게 일방적으로 병합을 당해 내몽골 자치구로 이어진다. 병자호란 때 한성을 약탈한 자들이 바로 이 내몽골의 외번 몽골군이다. 이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몽고병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 같은 사례들을 분석해보면 인구가 많은 국가들에 민족주의가 퍼질 경우 주변을 침공하거나 하는 걸로 봐서는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예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3]

몽골족과의 관계에선 만몽 연합 정권을 내세웠고 실제로도 내몽골의 보르지긴(보르지기트) 일족은 황실의 외척으로서 황족의 권리를 누렸다. 그리고 청의 통치 영역이 아닌 외몽골의 할하 유목민은 회유책을 썼고, 청의 통치에 저항하던 오이라트인은 무력으로 응징해 버렸다. 그 외에 17세기에 러시아 남부로 이주했던 오이라트의 분파인 칼미크인의 일부는 러시아와의 불화로 인해 옛 준가르의 땅으로 돌아와 청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4]

9. 그 외

오늘날에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동튀르키스탄과 티베트가 중국에 속하게 된 것 또한 청대의 일. 동튀르키스탄의 경우 북방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무역 수입 및 생필품 공급지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 제국의 흥기를 경계하던 중화 왕조들은 종종 이 지역을 침공하였다. 오이라트의 잔당인 준가르가 다른 몽골 부족들과의 싸움에서 밀려 서쪽의 동튀르키스탄으로 도망쳐 준가르 칸국을 세웠으며 이후 청나라의 복속 시도에 계속 저항했다. 하지만 국력 차로 인해 준가르 칸국은 1757년 건륭제 때 멸망하였고, 서역 원정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고 생각했던 건륭제는 후환을 없앤다는 취지에서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대량 학살을 실시했다. 준가르족은 노예 납치 및 주변 민족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수탈로 원성이 높았기 때문에, 탈주가 봉쇄당한 상태에서 학살당했다. 청은 점령한 동튀르키스탄에 새로 정복한 곳이란 뜻에서 '신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남쪽에 있던 위구르인과 동쪽에 있던 후이족들을 이주시켜 유목민들이 다시 정착하지 못하도록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둔전과 요새를 건설하였다.

티베트의 경우 오랫동안 중원정권과 무관한 독립국이었으나, 1717년 준가르 칸국이 티베트 달라이 라마 계승 문제에 개입하자 1720년 강희제가 친청파 티베트군과 함께 원정군을 파견하여 준가르를 몰아낸 후 티베트를 복속시켰다. 청 말기 청이 쇠락하고 이 지역에서 봉기가 계속 일어났음에도 청은 계속해서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결국 티베트는 외몽골처럼 신해혁명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청에게서 독립하여 사실상 독립국처럼 행동했으나, 암도와 캄 지방은 중화민국 영향 하에 있었다. 1950년 중국을 평정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침공하여 중국의 지배 하에 든다.

영국, 프랑스 등은 교역을 하러 왔으나 청은 교역에 별 관심도 없었고 청나라 지식인들 중 서양 언어를 구사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교역이 확대되는 것도 원하지 않은 반면 영국에서는 은이 자꾸 청으로 흘러들어가 경제 문제를 일으키게 되었다. 교역 문제로 점점 고조되어 가던 양측의 갈등은 결국 아편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오늘날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신장성은 신해혁명 이후 양쩡신, 반독립적으로 행동한 성스차이[5]와 같은 친소 성향 한족 군벌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러시아 제국 또는 소련과 많은 교역이 이루어졌으며 문화적, 정치적으로도 밀접한 관계였다. 중화민국이 신장을 직접 통제하려 할 때마다 강압적인 통제에 반발하여 위구르인들과 카자흐인들이 봉기하였는데, 결국 소련이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을 버리면서 신장 위구르 자치구로 개편되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동시대 남아시아 최대 제국이였던 무굴 제국과는 별 분쟁없이 무역만 하고 지냈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 사이에 지구상에 가장 높은 산맥인 히말라야산맥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충돌이 아예 없진 않았다. 무굴제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이후 청나라 령이었던 티베트를 침공했는데 티베트가 청나라 조정에 구원을 청했고 이에 청나라가 군대를 파견해 맞붙었다. 청나라가 나라 상태가 멀쩡했다면 히말라야를 넘어온 인도군을 물리칠 수 있었겠지만 알다시피 당시는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서 지진 않았지만 이겼다고 하기에도 뭐한 전투 이후 인도가 그냥 퇴각한다.

조선 외에 조공국으로 베트남, 미얀마, 그리고 코칸트 칸국카자흐 칸국이 있었다. 다만 코칸드 칸국의 경우 완전히 청나라의 조공국이 되기 전까지는 청나라의 변방을 약탈하여 한족, 만주족, 위구르족 등 청나라의 민족들을 포로로 끌고 가기도 했다. 이 때 코칸드 칸국으로 잡혀온 한족들의 후손이 오늘날 구소련 국가의 둥간족이다.


[1]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구범진, 민음사) 4장 청 제국과 러시아 편 참조.[2] 즉, 이 아닌 을 계승해서 황제국을 선포한 것이다.[3] 특히 일대일로 방향은 중화사상 같은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옛날부터 진출하려고 했던 곳들이라 고전적인 느낌까지 있다.[4]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돌아가지 않고 유럽에 남은 칼미크인들은 훗날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인 칼미키야 공화국을 이루게 된다.[5] 독소전쟁 초반 소련이 패배하자 소련을 배신하였다. 후에 소련이 승기를 잡자 스탈린에 접근하다가 장제스에게 해임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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