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동전들[1] |
말 그대로 청나라 시대의 중국에서 발행되어 유통되었던 엽전 형태의 동전이다.
1867년부터 1874년 초까지 약 7년간 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이 외국 동전인 청전이 상평통보와 병용되어 유통된 바가 있다.
당백전이 1866년(고종 3년)부터 발행되어 상평통보 위주인 조선의 화폐경제를 박살낸 사건 이후, 당백전의 경제적인 폐해를 급히 수습하려는 방편 중 하나로 당시 환투기 등의 목적으로 다량이 밀수되어 있었던 청나라 동전인 '청전'의 유통을 1867년(고종 4년)부터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1874년까지 약 7년간의 기간 동안 공식적으로 외국 동전인 청나라의 동전이 상평통보와 병용되어 쓰였다.
조선 말 당시 들어와서 유통되던 청전이 상평통보보다 평균적으로 조금 작고 가벼운 것의 비율이 어느 정도 있기는 하지만[2] 돌아다니는 말처럼 소재 가치가 3배도 넘게 차이난다 이런 것까지는 아니었고, 상평통보를 찍어내는 것보다 청나라 동전을 수입해 사용하는 것이 한참 싸게 먹힐 정도로 원가 자체가 많이 차이났다.
고종이 친정을 시작하고 초기에 진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청전 유통을 폐지하는 것이었다.
청나라 돈의 통용을 폐지시키다
전교하기를,
""청나라 돈을 당초에 통용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날이 갈수록 물건은 귀해지고 돈은 천해져서 지탱할 수 없다고 한다. 민정(民情)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으니 즉시 변통하는 것은 또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는 청나라 돈을 통용하는 것을 전부 혁파(革罷)하라. 묘당(廟堂)에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의 정월분 공납(公納)은 모두 청나라 돈으로 특별히 봉납(捧納)하도록 하고 2월분부터는 관례대로 상평전(常平錢)으로 봉납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고종 11년(1874년) 1월 6일자 기사
그러나 악화였던 청전은 양화였던 상평통보 대신 조선 정부의 국고에 세입으로 가득 차 있던 상태였고, 이 상황에서 청전 유통을 폐지해 버리니 결국 고종 친정 초기 조선의 재정은 파산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전교하기를,
""청나라 돈을 당초에 통용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는데, 지금에 이르러 날이 갈수록 물건은 귀해지고 돈은 천해져서 지탱할 수 없다고 한다. 민정(民情)을 생각하면 비단 옷과 쌀밥도 편안하지 않으니 즉시 변통하는 것은 또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제부터는 청나라 돈을 통용하는 것을 전부 혁파(革罷)하라. 묘당(廟堂)에서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각영(各營)과 각사(各司)의 정월분 공납(公納)은 모두 청나라 돈으로 특별히 봉납(捧納)하도록 하고 2월분부터는 관례대로 상평전(常平錢)으로 봉납하도록 분부하라."
하였다.
고종 11년(1874년) 1월 6일자 기사
백성들은 상평통보로 세금을 냈지만 관리들은 청전으로 중앙에 바치는 행태가 이미 오래되어 있었다.
하교하기를,
"당초에 이미 본 고을에서 상평전을 받았다면 어째서 청나라 돈을 가져다가 바치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 자세히 물어본 뒤에 구별해서 처리하겠습니다."
고종 11년(1874년) 2월 5일자 기사 중
"당초에 이미 본 고을에서 상평전을 받았다면 어째서 청나라 돈을 가져다가 바치는가?"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 자세히 물어본 뒤에 구별해서 처리하겠습니다."
고종 11년(1874년) 2월 5일자 기사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