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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18:12

양쩡신

파일:양증신.jpg
중화민국 신강성 정부주석
정체 楊增新
간체 杨增新
한국식 독음 양증신
영문 Yang Zengxin
정신(鼎臣)
출생 1864년 3월 6일
청나라 운남성 몽자현
사망 1928년 7월 7일 (향년 64세)
중화민국 신강성 우루무치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청나라 진사
직업 군인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신강왕으로서2.3. 제한적 근대화와 우민정치2.4. 소련과의 관계2.5. 갑작스러운 죽음
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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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말의 군인, 중화민국의 군벌. 1912년 이래로 17년 가까이 신강성을 안정적으로 통치했으나 부하들의 배신으로 암살당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64년 운남성에서 태어났다. 1889년 과거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으며 감숙중위지현(甘肅中衛知縣), 하주지부(河州知府), 감숙제학사(甘肅提學使) 겸 무비학당(武備學堂) 총판(總辦), 신강육군소학당(新疆陸軍小學堂) 총판(總辦), 도련공소(督練公所) 참의관(參議官) 등을 역임했다. 이후 감숙성 영하에서 도대와 지현을 역임했다. 감숙성에도 상당한 숫자의 무슬림들이 살고 있었는데 양쩡신은 이들과 대단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훗날 신강성에서 지배자가 되는 기반을 쌓게 되었다.

이후 적화도대 겸 제법사에 임명된 양쩡신은 1911년 신해혁명의 발발로 혁명파와 왕당파로 갈라져 내전이 벌어진 신강성의 성도 디화를 점령함으로 신강성의 지배자가 되었다. 양쩡신은 혁명군과 전 신강순무 위안다화의 싸움을 틈타 유형수인 마복흥을 포섭하여 그에게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2000명의 퉁간을 모집하게 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양쩡신을 신강도독 겸 포정사로 임명하여 그의 정권을 승인했다. 1912년 6월, 양쩡신은 위구르족 지도자들과 협상하여 이들에게 신강성 연립정부를 수립하게 했고 양짠수, 펑터민 등 기존 실력자들을 각각 카슈가르 제독과 외교사 총장에 임명함으로 신강성의 정치를 안정시켰다. 이후 양쩡신은 3년간 신강성에서 정권 기반을 확립하고 동향인 운남성 사람들을 불러들여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했다.

한편 하미의 위구르인들이 신강성의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키자 1913년, 양쩡신은 이수복을 특사로 파견하여 반란군 사령관 티무르와 협상했다. 이수복은 티무르에게 위구르인들이 산악 지역 밖으로 나오면 요역에서 해방시켜주겠다고 쿠란에 대고 맹세했으며 이에 위구르 반란 부대 500여명은 양쩡신에게 투항하여 우루무치를 수비하는 기병부대로 흡수되었다. 투르판의 위구르인들 역시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으나 투르판의 반란 지도자 목의등도 양쩡신의 회유에 그의 부하로 합류하였다. 허나 양쩡신의 회유는 어디까지나 말 뿐인 회유였고 대접이 좋지 않아 티무르와 목의등은 1913년 9월 다시 반란을 모의하였다가 적발되어 2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처형당했는데 이에 대해서 양쩡신이 조작한 일이라는 말이 있다.

2.2. 신강왕으로서

그러던 중 1915년 위안스카이홍헌제제를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에 공화제가 어울리지 않았다고 생각한 양쩡신은 이에 적극 호응하며 위안스카이의 칭제를 지지했고 그 대가로 일등백작에 봉해졌다. 허나 공화제를 지지하던 운남인 관료들이 양쩡신에 맞서 반란을 도모했고 이를 사천성 출신 관료 사문부가 밀고하였다. 그러나 양쩡신은 운남성 관료들을 불러모아 자신이 사문부에게 이러한 밀고를 들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이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운남인들이 양쩡신에게 당연히 충성을 맹세하자 양쩡신은 사문부를 처형하여 운남인들을 안심시킨 후 그들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운남인 관리들과 그 가족을 도독 관서 내로 이사하게 했다.

1916년 2월, 양쩡신은 이들을 도독 관아에서 열린 정월 대보름 연회에 초대하였다. 몇차례 술잔이 돌자 양쩡신은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내 운남인 관료들의 지도자인 마일, 이인, 하정 세 사람의 목을 베게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식사를 마쳤다. 연회가 끝난 후 양쩡신은 운남강무당 출신 장교 70명을 신강성에서 추방함으로 정권을 돈독히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집권 초창기에 큰 도움을 준 마복흥이 카슈가르에서 위구르족 미녀들을 모아 하렘을 만들고 지역 경제를 바탕으로 사익을 추구하는 등 축재를 하고 공포정치를 일삼아 민심을 동요하게 하자 1924년 2월, 쿠데타를 일으켜 마복흥을 체포한 후 처형했다.

교묘한 수단으로 정적들을 청소한 후 양쩡신의 신강 통치는 괜찮은 편이었다. 그는 위구르족 지도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안정적인 기반을 유지하였으며 과거 좌종당이 박탈했던 위구르인과 키르기스인, 회족 등 무슬림 토착민들의 자치권을 복구했으며 마적을 토벌하고 소련 및 서구열강과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민족 엘리트들을 후원하고 이들의 지역적 이권을 보장하였으며 투르크계 목축업자, 유목민 족장들, 위구르족 칸들의 전통적인 권리를 옹호하였다. 그리고 카자흐족, 몽골족, 위구르족이 서로 적대하게 하였으며 이들에게 자신이 그들의 보호자라고 생각하게 하였다.

2.3. 제한적 근대화와 우민정치

양쩡신은 신강 바깥과 신강의 연결을 엄격히 금지했다. 신강과 중국 내륙을 연결하려는 도로 건설 사업을 거부하였으며 우편물과 전신을 엄격하게 검열하고 중국과 소련의 신문 및 출판물의 유입을 금지했다. 또한 신식학교들을 폐교하거나 지원금을 끊어 몰락하게 만들고 오로지 전통적인 유교 교육만을 허용했다. 이슬람 학교들의 경우에도 새로 유입된 자디드파 학교를 폐교함으로 보수적인 무슬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래도 근대적 통치에는 근대적인 인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성정부의 재원으로 사범대학과 성립중학교, 러시아어 법정 전문학교를 개설했으나 100명 정도의 한정된 학생들만을 받았다. 이 때문에 양쩡신은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우민반동통치를 자행한 봉건적 군벌이라고 비판받는다.

청조 붕괴 이후 중앙의 보조금이 끊기자 재정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세제 개혁을 실시하여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으나 척박한 신강성의 재정 적자를 근절할 수는 없었으므로 4종류나 되는 지폐를 찍어냈다. 적자는 해결되지 않았고 1927년 시점에서 하이퍼 인플레이션이 신강성을 휩쓸었으며 5000만 인민폐에 달하는 성의 채무가 쌓였으나 양쩡신은 4종류의 지폐를 계속 발행하여 이들의 다른 환율을 이용하여 차익을 챙겼다. 그리고 신강성을 여행하는 상단과 여행자들이 가진 금을 신강성 지폐와 교환하도록 강제하여 얻은 금괴를 미국령 필리핀의 마닐라 은행에 저축하였다.

하지만 양쩡신이 현대화에 관심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양쩡신은 1915년부터 1918년까지 대대적인 관개시설 확충 사업을 벌였으며 덕분에 신강성의 곡물 생산량은 에이커당 40%나 증가했다. 그리고 신강성 내부의 자동차 도로망을 건설하고 자동차를 대대적으로 수입하였다. 허나 의료 시설은 도입하지 않았는데 1912년부터 신강성 남방에서 대대적으로 역병이 창궐하고 영국과 러시아가 압력을 넣고 나서야 1917년부터 의료 인력 양성에 들어갔다. 허나 철, 강철, 석유, 전력, 금, 구리 등의 채굴이나 방직공업을 비롯해서 현대적인 기술과 자본이 필요하고 외부와의 접촉이 필수적인 산업은 방치하여 양쩡신의 지배 기간 동안 현대적인 산업은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 양쩡신이 주목했던 분야는 군사 분야로 1927년 시점에서 신강성 예산의 72%가 군사분야에 사용되었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카슈가르 영국 총영사를 지낸 퍼시발 스크라인 경은 양쩡신이 세율을 낮추고 법과 질서를 유지했으며 유럽인들이 신강을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도록 했다며 높이 평가했고 래티모어는 양쩡신이 텐진과 마닐라에 개인 재산을 몰래 축적하고 있었지만 어쨌거나 오랜 관료적 기준의 의거해 볼때 정직하고 유능한 관리였다고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위에서 본 듯이 우민정치와 아주 제한적인 현대화에만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전형적인 군벌에 불과했다고 평가가 박한 편이다.

2.4. 소련과의 관계

한편 러시아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신강성은 외부 정세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붕괴 이후 몽골에서 젭춘담바 후툭투 8세가 집권하자 몽골인들은 신강성 변경 지역인 호브도(현재 몽골의 도시)를 공격해 중국인들을 학살했고 양쩡신은 이 기회에 얄타이 지역의 방어를 강화함으로 자신의 통제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헌데 러시아 제국의 정책에 밀려난 카자흐 족 수만명이 신강성으로 유입되고 1917년 러시아 내전과 이후 수립된 소련의 집산화 정책에 반발한 여러 유목민족들과 러시아 백군들이 줄줄이 넘어오면서 신강성은 대혼란에 빠졌다. 1917년 시점에서 3~4만명에 달하는 백군과 러시아인들이 몰려와 중가리아에 정착했으며 이들은 소련에 대한 전쟁을 준비하여 신강성과 소련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양쩡신은 초기에 백군이 신강성 국경을 넘지 못하게 하려 했으나 국경 통제에 실패하자 백군 지도자 안넨코프 장군을 우루무치로 초청하여 구 러시아 제국 조계지에 정착하게 했다. 그리고 기습적으로 안넨코프를 체포하여 소련에 송환하였고 안넨코프는 처형당했다. 그리고 또 다른 백군 지도자 바키치 장군을 처리하기 위해서 소련과 직접적으로 연락, 붉은 군대를 불러들여 타르바가타이의 바키치 부대를 공격하게 했다. 박살난 바치키는 얄타이로 퇴각했고 붉은 군대의 2차 공격에 패해서 몽골로 달아났다. 백군을 섬멸한 소련 군대는 다시 신강성 바깥으로 철수했다.

한편 신강성은 러시아와의 무역관계가 깊은 곳이었는데 러시아 혁명으로 루블화가 붕괴되면서 1919년 즈음에는 러시아와의 교역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이 때문에 러시아 제품의 유입이 중단되어 신강성 경제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에 양쩡신은 소련과 1920년 중러 이리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하여 소련과 관계를 진전시켰다. 이때는 중화민국 정부가 아직 러시아 제국만을 인정하고 있을 때였다. 이로부터 소련으로부터 관세 면제, 치외법권 등의 제국 시절 특권을 회수한 양쩡신은 러시아 제품에 대한 관세를 물려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이는 한때 신강성 재정수입의 23%를 차지하기도 했다.

1924년, 중화민국 정부가 카라한 선언을 계기로 소련과 국교를 맺자 양쩡신은 소련 영사관을 쿨자, 타르바가타이, 우루무치, 카슈가르, 샤라수메에 설치하였으며 정식으로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이어 알마아타, 타슈겐트, 세미팔라틴스크, 안디잔, 자이산에 중국 영사관이 설치되었고 1928년 시점에서 신강과 소련의 교역량은 2400만 루블 어치에 달했는데 이는 신강과 중국 내륙의 교역량의 10배에 달했다.

2.5. 갑작스러운 죽음

한편 양쩡신은 운남성 인맥을 숙청한 후에는 감숙성과 섬서성의 한족 관료들을 측근으로 삼았다. 양쩡신이 총애하는 감숙, 섬서 파벌에 맞서서 호남과 호북 파벌은 리위안훙 총통이 파견한 판야오난을 중심으로 뭉쳤다.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정부를 옹호하는 판야오난은 우루무치 도윤에 올랐으나 중앙에서 신강을 장악하기 위해 파견한 인물이라서 양쩡신의 견제를 받았다. 판야오난은 양쩡신이 자신의 정적들을 참혹하게 죽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차례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양쩡신은 이를 모두 반려했다. 이는 판야오난이 베이징에 돌아가서 자신에 대한 적대적 여론을 조성하지 못하게 하려는 양쩡신의 포석이었다.

그러던 중 1927년 장제스가 영도하는 중국국민당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했다. 국민혁명군은 삽시간에 중국 남방을 대부분 장악했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을 거행하여 6월에 베이징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했다.이로서 중국의 대권이 더 이상 장쭤린봉천군벌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안 양쩡신은 베이징 함락 직후인 6월 11일, 국민정부에 대한 복종을 선포하였으며 그 대가로 신강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었다.

양쩡신은 제때에 편을 갈아탄 것으로 보였으나 중앙으로의 통치권을 집중시키려는 난징 국민정부의 출범은 판야오난의 야심을 부추기게 되었다. 판야오난은 국민당의 지지를 바탕으로 양쩡신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1928년 7월 7일, 러시아어 법정 정문학교 졸업식을 기념하는 연회에 참석했다. 식사 도중 판야오난은 술이 있느냐고 물어보았고 그의 동료가 그렇다고 대답하며 술병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군인들이 나타나 양쩡신에게 총탄을 발사하여 양쩡신을 살해했다. 그렇게 신강왕 양쩡신은 62세를 일기로 허망하게 사망했다.

하지만 판야오난도 신강의 지배자가 되진 못했다. 양쩡신의 부사령관이자 신강 민정청장이었던 진수런이 판야오난을 처형하고 신강성 정부주석 겸 신강성 사령관에 취임함으로 신강성의 지배자는 진수런에게 넘어갔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