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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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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조(三曹)
조조 조비 조식
<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조위 태조의 황자
조식 | 曹植
파일:고개지 낙신부도.jpg
고개지(顧愷之) 《낙신부도(洛神賦圖)》
출생 192년
사망 232년 12월 27일[1] (향년 40세)[2]
재위 기간 후한의 평원후(平原侯)
211년 ~ 214년
후한·조위의 임치후(臨菑侯)
214년 ~ 221년
조위의 안향후(安鄕侯)
221년 ~ 221년
조위의 견성후(鄄城侯)
221년 ~ 222년
조위의 견성왕(鄄城王)
222년 ~ 223년
조위의 옹구왕(雍丘王)
223년 ~ 227년
조위의 준의왕(浚儀王)
227년 ~ 228년
조위의 옹구왕(雍丘王)
228년 ~ 229년
조위의 동아왕(東阿王)
229년 ~ 232년
조위의 진왕(陳王)
232년 2월 ~ 232년 12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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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8b><colcolor=#ece5b6> 성씨 조(曹)
식(植)[3]
부모 부황 태조
모후 무선황후
형제 25남 6녀 중 5남
배우자 최씨[4]
자녀 아들 조묘(曹苗)[5]
아들 조지(曹志)[6][7]
조금호(曹金瓠)[8]
조행녀(曹行女)[9]
자건(子建)
작호 평원후(平原侯) → 임치후(臨菑侯) → 안향후(安鄕侯) → 견성후(鄄城侯) → 견성왕(鄄城王) → 옹구왕(雍丘王) → 준의왕(浚儀王) → 옹구왕(雍丘王) → 동아왕(東阿王) → 진왕(陳王)
시호 사왕(思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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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조조 치세
2.1.1. 후계자 경쟁2.1.2. 후계자 탈락
2.2. 조비 치세2.3. 조예 치세
3. 평가4. 기타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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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황족이자 문인으로 는 자건(子建), 시호는 사왕(思王).

조조무선황후 변씨의 아들, 조비, 조창의 친동생이자 조웅의 친형이다.[10] 아내는 최염의 조카딸인 최씨.

2. 생애

2.1. 조조 치세

재기발랄한 성품으로 특히 문재가 유독 뛰어나 아버지 조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의 뛰어난 재주를 아낀 조조가 장자인 조비를 제쳐놓고 그를 후계자로 삼을 것을 고민하였을 정도.

2.1.1. 후계자 경쟁

조식은 조비와 함께 후계자 경쟁을 하게 된다. 아직 후한까지는 장자 상속제가 확고하지 않은 시대였고[11] 조식은 뛰어난 재능으로 이름 높았다.

조식의 주위에는 양수 같이 뛰어난 인물들이 있었고, 순욱의 아들인 순운이나, 정의, 정이 형제들도 조식의 파벌이었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비는 가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재능이 아니라 효심을 보여 조조의 마음을 얻으려 했고, 조식은 자유분방한 성품에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을 자주 보여 구설수에 오르는 등 처신에 문제가 있었다. 특히 조식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양수가 너무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조조에게 미움을 받기 시작했는데, 후계자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해 조조의 마음을 더 거스르게 된다.

가후뿐만 아니라 모개도 원소의 예를 들어 조비를 후계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조카딸을 조식에게 시집보냈던 최염도 장자 계승을 이유로 조비를 후계자로 삼아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즉, 여러 인물들이 장자 계승 원칙을 주장해야 했을 만큼 조조는 재능 있는 조식에게 마음이 가 있었던 것이었다.[12]

모개나 최염 등이 장자 계승 원칙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13] 조식의 행실 문제가 지적되면서 조조는 결국 조비를 태자로 삼았다. 조비가 태자가 된 이후에도 조식은 제법 지지 세력이 남아 있었고 조조도 조비를 태자로 삼음과 동시에 조식에게는 식읍 5천 호를 더하여 총 1만 호의 식읍을 주는 등 총애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술에 취해 천자가 가는 길을 통해 궁문을 열고 나간 사건이 이슈화되면서 대노한 조조에게 문책받는 것을 계기로 점차 조조 총애를 잃었고, 이 무렵 조조가 조식의 세력이 너무 큰 것을 견제해 양수와, 평소 조식과 친하게 지내던 정의, 정이 형제를 죽였기에 조식은 항상 불안한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2.1.2. 후계자 탈락

결정적으로 219년, 조인관우에게 포위당했을 때 조조는 조식을 남중랑장, 정로장군 대행으로 임명해 구원군을 지원하라고 불렀으나, 이때 조식이 술에 취해 조조의 명령을 받들 수 없었기 때문에 조조의 진노를 사 완전히 총애를 잃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씨춘추》에서는 이때 조비가 조식에게 억지로 술을 먹여 조조의 왕명을 받지 못하게 한 것으로 나온다. 《위씨춘추》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조식은 조비의 음해 공작에 희생된 것인데, [14] 조조가 앞뒤 사정도 안 살펴보고 그대로 관직에서 내쫓았던 것이나 이미 이전 태자 책봉 무렵 때부터 조식의 음주벽에 대한 비판이 여러 차례 나왔던 것을 봤을 때 여러 번 술 문제로 조조의 속을 썩였을 가능성이 높다.

정사에서는 조식이 평소에 음주를 절제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글로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면 조식의 알코올 중독은 무척 심각했던 모양.

2.2. 조비 치세

한편 조조는 죽기 직전 장안에 주둔하고 있던 차남 조창을 급하게 부르는데, 조창이 도착하기 전에 죽고 만다. 조창을 견제한 조비가 절차를 생략하고 황급히 왕위에 오르는데, 뒤늦게 도착한 조창은 "왕께서 나를 부르신 것은 너를 후계자로 삼기 위함이다."라는 말로 조식을 부추기지만 조식은 원씨 형제의 말로를 직접 지켜보지 않았냐는 말로 조창의 제안을 거부한다.

위왕에 오른 조비는 조식의 측근이었던 정의, 정이 형제를 죽이고 왕의 사자를 대하는 태도가 무례하다는 이유로 조식까지 죽이려 하지만 조식이 이른바 칠보시(七步詩)를 지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 칠보시 자체는 후세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세설신어》에서는 이 칠보시를 완성한 조식에 대해 세간에서 그를 수놓은 호랑이라고 품평했다고 한다.

한가지 특기 사항으로는 소칙전의 기록에 후한 헌제가 조비에게 선양하려 하자 이를 슬퍼하여 소칙과 함께 상복을 입고 곡을 했다는 기록이다. 주석 위략에는 소칙은 헌제가 죽임을 당했을 거라 생각하여 곡을 했는데, 조식의 경우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조조의 총애를 잃은 것을 한탄하면서 곡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럴 거면 굳이 상복까지 입고 곡을 할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건 한의 신하로서 그랬건 진의가 어찌 되었던 건에 조비는 이를 매우 불쾌하게 여겼고, 이후 조식은 조비의 집요한 견제를 받으며 봉지를 임성에서 옹구로 옮기며 불우하게 사는데, 조비에게 자신을 등용해 줄 것을 요청한 글이 남아 있다. 그러나 조비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조식은 이 글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하고 무력하게 늙어가는 자신을 한탄했는데, 내용이 매우 불쌍하다.

2.3. 조예 치세

조예가 제위에 오르고 나서 조식과 계속해서 서신을 주고받으며 그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견제는 오히려 조비 때보다 더 심해져, 227년에 준의로, 228년에는 다시 옹구로, 229년에는 동아로 봉지가 바뀌었다가, 232년에 진으로 바뀐다.[15]

조식은 항상 자신의 재능을 펼치지 못함을 분개해 했으므로 228년에 표를 올려 자신을 임용해 줄 것을 청한다. 병졸로 싸우며 죽을 각오도 보였지만 조예는 조식을 임용하지 않았다. 231년, 조식은 다시 상소를 올려 친척의 안부를 묻고 그 자신의 생각을 서술했다.

친척들과도 교류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 조씨들에 대한 압박[16]을 풀어줄 것을 부탁하고 황제가 질문하는 것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맡겨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꿈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생각이라며 자신을 임용해 줄 것을 청한다. 조예는 이를 보고 제후국 간의 교류를 금지하는 법은 원래 없었으며 이를 시정하겠다고 답장하였지만 역시 임용해 주지는 않았다. 조식은 다시 상소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일에 대해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의견을 대신들 앞에서 시험해 줄 것을 청하지만 조예는 좋은 문장으로 화답할 뿐이었다.

232년, 조예는 조식을 진왕으로 봉하고 식읍을 하사했다. 조식은 항상 조예를 혼자서 만나 당시의 정치적 득실을 말하고 임용받고 싶어했지만 끝내 허락받지 못했다. 결국 근심에 젖어 살다가 그해 40세의 나이로 죽는다.

상술했듯이 봉지 이동이 모두 조식에 대한 견제 의도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오히려 조식을 배려하여 옮겨준 경우도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예에게 의견을 피력할 수 있었다는 점을 보면 조예는 아버지에게 박대받는 삼촌을 인간적으로는 나쁘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지만 직계 혈족의 정치 참여를 차단한 선대의 방침을 거스르면서 조식을 중용할 생각은 없었다. 본인의 황권에 위협이 되는 인물이기도 했고.[17]

조예 시절 사마의가 오군을 내륙으로 유인하여 섬멸한다는 전략을 수립하자 사마의에게 편지를 보내 이 전략을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사마의 본인이 직접 당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조휴가 석정에서 참패한 것을 봤을 때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조휴가 패하면서 조식의 선견지명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런 과정을 보면 조식은 실세에서 밀려난 후에도 나름대로 여러 루트를 통해 정치, 군사상의 주요 동향을 열심히 파악하며 정세를 분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은 천재적인 문장력에 가려서 그렇지 조식의 군재도 뛰어난 편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예도 끝내 조식을 기용하지 않았기에 조식은 그의 재능을 펼칠 수 없었다.

경초 연간(237년 ~ 239년), 조예는 조서를 내려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조식의 죄상을 탄핵하려던 문건을 회수하여 모두 폐기하도록 하고 조식이 지은 부ㆍ송ㆍ시ㆍ명ㆍ잡론 모두 백여 편을 초록하여 궁궐 안팎에 간수하도록 하였다. 비록 조예가 끝내 조식을 기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의 명문장들이 현존하는 데에는 조예의 공이 크다고 할 수 있다.

3. 평가

213년 조식은 조조의 고향인 초현 주민들의 궁핍해진 생활과 황폐한 도시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의 부(=귀사부)를 지어 발표한 적이 있는데 고고학적 발굴의 결과 당시 조조는 초현을 대규모 군사 기지화 한 상태였고,[18] 그 규모상 1, 2년의 수탈로 완성될 정도의 수준이 아니기 때문에 조식이 묘사했던 것처럼 초현의 지역 사회는 박살 나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조식이 이 귀사부를 발표한 것과 같은 해에 조비는 초현의 아름다운 경치를 찬미하는 임와부라는 부를 지어 발표했다는 것. 시적인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는 예술적 관점의 차이도 있겠지만, 한없이 막장스러운 인간성의 조비가 비판을 받는 21세기의 추세에 더해 조식은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 자체부터 조비와 극명히 달랐다는 점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다만 이 문제가 잘 부각되지 않은 이유는 초현의 군사 기지는 무슨 동탁마냥 개인의 사치와 향락을 위해 만들어진 요새가 아니라 1240년 홍수로 매몰되기 이전까지 군사용으로 계속 유용하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조조 생전에 이 일대는 거대한 군사 요새였던 셈인데, 지배자 개인의 안락함을 위해 축조한 동탁의 미오성과 달리 어디까지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시절에 요새를 건설한 것으로 국가 안보를 위한 행위에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다고 해도 정상 참작의 여지가 있다는 것. 거기에 후대에까지 거의 천 년이 넘게 군사기지로서 효용을 발휘하고 있었다면 이는 이 지역의 군사 기지를 세워 천 년 동안이나 사용한 것을 보면 언젠가는 군사 기지가 되어야 했을 요충지 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단지 너무 서두르는 바람에 백성이 수탈당했다는 점이 아쉽다는 것이다.

조조가 조식을 총애한 것이 단순히 재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 사례가 몇 가지 있다. 조조 사후 한 일만 봐도 그렇다. 군사 기지는 뭐 그렇다 쳐도 조비가 황제에 오른 후에 초 땅이 자신이 고향이라면서 백성들을 척박한 초로 강제로 이주시켜 둔전을 시행해 고향을 번영시키려고 하자 노육은 그곳에서의 백성들의 빈곤한 생활을 보고 표를 올려 그들을 비옥한 양 땅으로 옮길 것을 건의하는데, 조비는 그의 말에는 따랐으나 크게 실망하고 마음속으로는 노육을 원망한다. 그리고 조비답게 그를 좌천시켜 이주한 백성들을 관리하게 하고 수양전농교위에 임명한다. 또 조비의 뒤를 이었던 조예는 초기는 잘하나 싶더니 후기로 가면 지나친 사치를 부렸다. 여러 이유가 겹쳐서 위 3대 동안 백성들은 상당히 고생했을 것이다. 조식은 시골을 전전하며 백성들의 곁에서 그걸 직접 보고 겪었으니 제법 공감이 갔을 것이다.

반면 조식은 조비 시절 자신의 봉국 내 영지를 지역 농민들에게 나눠 주고 같이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의 토지가 부족해 필요한 만큼 수확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표를 올려 농부들에게 땅을 하사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고, 조예가 봉국의 장정들을 마구잡이로 차출해 가자 이를 반대하는 표를 짓기도 했다. 이 모두가 가뜩이나 위태로운 입지가 더욱 좁아질 것을 감수하고 벌인 일이라, 기본적으로 아랫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며 매사 안하무인으로 방자하고 치졸했던 조비와는 인격 자체부터가 달랐다는 것. 조조 사후 조창의 부추김을 단칼에 거절한 것도 조식이 이토록 상식적인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는 주장이다. 딱 봐도 비슷한 입지에서 왕위에 오른 세종이 연상되는, 매우 영민하고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군주상이 아닌가.

조조가 원가의 몰락을 보고도,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천재, 제왕의 인품, 그리고 의외로 대국적인 안목과 수준급 군재까지[19] 겸비한 조식을 장자이지만 문제점이 많았던 조비를 제끼고 후계자로 세우려고 한 것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조비를 밀어줘야 했다. 결국 조식은 장남이 아니었다. 당대에 개인적인 총애 등 여러 이유로 장남이 아닌 그 이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은 유표, 원소, 손권 등의 경우엔 후대가 막장이 되었고 조비의 아들인 조예 역시도 조방이라는 근본을 알 수 없는 사람을 양자로 삼아버린 탓에 후대가 막장이 되었다. 즉 장자 계승이라는 명확한 원칙을 어기고 계승을 시키려는 것은 굉장한 무리수이며 이게 문제없이 통하려면 장남에게 절대로 계승해선 안 될 문제점이 있고 장남을 대신할 확실한 대안과 그 대안에 납득할 만한 공감대가 있어야 가능할 일이다. 허나 조비는 조식보다 처지고 인격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후대 시대(오호십육국시대, 남북조시대)의 막장 황제들만큼 문제가 심한 건 아니고 그 나름대로도 지지자들도 많아서 자칫 잘못했다가는 조조 세력도 원소 세력처럼 분열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이미 원소와 유표의 사례를 본 이상 조조 입장에서는 안전빵인 조비가 더 나은 선택지가 될 수밖에 없던 것. 당장에 처신에는 엄청나게 능했던 가후가 조비 편에 섰으니, 이는 당연히 가후가 조비를 황제로 만들어주려는게 아니라 황제는 어차피 조비가 될거라는 이유였다.

다만 밀려난 이후에도 네임 밸류 자체는 워낙 거물급이었기에 행보를 쉽게 예상하기 어렵지만, 하안을 필두로 조비, 조예 시대에 핍박받던 인물들이 7년 뒤인 239년, 조예 사후의 격변을 틈타 정권을 잡고 사마의와 대립각을 세웠던 것을 봤을 때 41세라는 이른 나이의 죽음은 너무 빠른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조예 사후에도 살아있었으면 근왕 세력의 거두[20]로써 사마씨의 찬탈을 막을 수 있는 만약의 가능성을 짙게 남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조예는 조비처럼 대놓고 조식을 비롯한 다른 황족을 갈구지 않았다 해도 의심병은 아버지 못지않게 심했다. 뭔가 제대로 홀렸는지 이해가 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예는 조방의 약한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후계로 밀려는 아집을 [21] 감안하면 더욱더 그렇다. 숙부이자 조씨 황실을 대표할 수 있는 조우와 어릴 적부터 매우 친밀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막판에 조우가 정통성이 약한 후계자에게 위협 인물이라고 단정 지어서 숙청하고 차라리 방계인 조상과 권신인 사마의에게 뒤를 맡길 정도였다. 조식은 조우의 형이자 한때 조비를 앞질렀던 후계 유망주였는데 절대로 그런 실력자를 조예가 차라리 숙청하지 뒤를 맡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

물론 완벽한 인간은 없듯이 조식에게도 큰 단점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위에 언급했던 음주벽. 조비의 음해 공작에 보기 좋게 한 번에 걸려든 것도 이 음주벽이 발목을 잡았다. 그렇게 총애하던 자식이 겨우 한 번의 술 실수로 바로 쳐냈을 가능성은 낮은 만큼, 그전부터 이 문제로 조조의 속을 꽤나 썩였을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高樹多悲風(고수다비풍) : 높은 나무에 슬픈 바람 자주 일고
海水揚其波(해수양기파) : 바닷물은 그 물결 드높아라
利劍不在掌(이검부재장) : 날카로운 칼 내 손에 없으니
結友何須多(결우하수다) : 친구인들 어찌 반드시 많으리오
不見籬間雀(불견리간작) : 보지 못했는가, 울타리의 참새들
見鷂自投羅(견요자투라) : 새매 보고 스스로 그물에 걸리는 것을
羅家得雀喜(라가득작희) : 그물 친 사람 새 얻고 좋아하나
少年見雀悲(소년견작비) : 소년은 새보고 슬퍼하여
拔劍捎羅網(발검소라망) : 칼을 뽑아 그물을 끊어주니
黃雀得飛飛(황작득비비) : 참새는 자유로이 훨훨 날아가는도다
飛飛摩蒼天(비비마창천) : 훨훨 푸른 하늘에 닿아
來下謝少年(내하사소년) : 내려와 소년에게 감사하는구나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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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화 6년(232년), 경인일, 진사왕인 조식이 죽었다(庚寅,陳思王植薨。)." - 《삼국지》 위서 〈명제기〉[2] "⋯늘 울울불락하였기에 결국 병에 걸려 죽으니 41세였다(常汲汲無歡,遂發疾薨,時年四十一。)." - 《삼국지》 위서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만 나이로는 40세다.[3] 현재는 이 조식(曹植)과 한국사 조선시대의 조식(曺植)이 성씨의 획수를 구분해서(曹와 曺 - 세로획 개수가 다름) 표기되고 있으나 사실 옛 문헌을 보면 에는 曹와 曺는 같은 글자의 이체자라 통용되는 걸 볼 수 있다. 오늘날 曺씨로 알려진 수많은 인물들이 조선 시대 문헌에 曹로 적혀 있거나 반대로 중국의 曹씨들이 중국 옛 문헌에 曺로 돼 있는 일이 허다했다. 과거에는 같은 한자에 모양이 다른 여러 이체자가 통용이 됐고 지금보다 그런 글자들의 사용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상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과 한국 조선시대의 조식은 한자까지 같은 동명이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 한국에서는 曺-한국의 성씨에 사용, 曹-중국의 성씨 또는 기타 어휘에 사용한다는 표기 원칙이 세워졌으니 적어도 한국어에서 한자를 표기할 때는 여기에 따라 구분을 지어주는 게 좋긴 하다. 참고로 현재의 중국어일본어에서는 曺 자가 사용 가능한 한자로 채택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의 조씨들도 전부 曹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4] "조식은 최염에게는 형의 사위였다(植,琰之兄女壻也。)." - 《삼국지》 위서 〈최모서하형포사마전(崔毛徐何邢鮑司馬傳)〉[5] "조서에 따라 신의 아들 조묘가 고양향공에 봉해졌고, 조지가 목향공에 봉해졌습니다(詔書封臣息男苗爲高陽鄉公,志爲穆鄉公。)." - 《조자건집(曹子建集)》 8권 〈봉이자위공사은장(封二子為公謝恩章)〉[6] "막내아들 조지는 가업을 이으려 생각했었다(以小子志,保家之主也,欲立之。)." - 《삼국지》 위서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7] 자는 윤공(允恭)이다. 사마염 대에 견성공(鄄城公)에 봉해졌으며, 낙평태수(樂平太守), 장무(章武)태수, 조군(趙郡)태수, 산기상시(散騎常侍), 국자박사(國子博士), 박사좨주(博士祭酒)를 역임했다. 사마유가 산동으로 부임했을 때, 이를 한탄했다가 사마염의 노여움을 사 면직되었다. 이후 산기상시로 복직되었으나, 모친의 상중에 병을 얻어 태강 9년(288년)에 죽었다. 시호는 정공(定公). - 《삼국지》 위서 〈임성진소왕전(任城陳蕭王傳)〉 배송지 주석 《조지별전(志別傳)》[8] "금호는 나의 첫째 딸로, 비록 말은 하지 못했으나 본디 이미 얼굴빛을 전해줘 마음을 알았다. 태어나 190일에 요절했고 이에 이 애사를 지었다(金瓠,予之首女,雖未能言,固已授色知心矣。生十九旬而夭折,乃作此辭。)." - 《조자건집》 9권 〈금호애사(金瓠哀辭)〉 서문[9] "행녀는 늦가을에 태어났고 초여름에 죽었다. 3년의 사이에 두 자식이 나란히 죽었다(行女生於季秋,而終於首夏。三年之中,二子頻喪。)." - 《조자건집》 9권 〈행녀애사(行女哀辭〉 서문[10] 이복형인 조앙, 조삭까지 따지면 다섯째 아들이다.[11] 후한 황제 중에 장자 출신은 몇 없다. 광무제부터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다.[12] 사실 원소 항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담은 무인으로서의 능력은 나름대로 입증했지만 통치 능력에 있어서는 낙제 평가를 받았고 아무런 지지 기반이 없던 원상이 어린 나이에도 원담을 격파하고 조조를 일시적으로 물리치는 능력을 선보인 것으로 봐서는 원소의 원상 후계자 선택은 능력이라는 면에서는 딱히 틀린 선택은 아니었다. 유표의 경우는 유종을 후계자로 택한 이유가 유종의 뒤에 있는 채씨 가문의 강대한 위상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고. 단지 그들의 문제는 원소의 경우 원담을 배제하기로 작정했다면 호적에서까지 파버린 시점에서 아예 청주 지배권까지 박탈하는 등 후계자 구도를 확실히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원담이 자체 세력을 유지하게 만듦), 유표의 경우 유종 선택은 내부 호족 세력들의 후계자 구도 정치 싸움상 유기가 도저히 승산이 없어서 그랬다는 결론에서 나온건데 그 호족 세력들이 조조를 막을 능력은 또 없었다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다.[13] 아이러니하게도 저 말을 한 두 사람은 조조에게 있어서 공신급 인물들인데, 조조는 위왕 즉위 이후 거슬린다며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최염을 처형하고, 모개를 면직시켰다. 위의 내용이 연의라지만 가후만큼의 처세라도 있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가후는 조비 라인이었고.[14] 대군사 사마의에서 이 설을 채택하여 이 장면을 각색했다.[15] 다만 이 중엔 조식의 편의를 위해서 옮겨준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이런 봉지의 변경이 모두 조식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던 것은 아니다.[16] 비록 왕후의 명칭이 있을지라도 평민 남자와 같았다. 조정에서 10리만 떨어져도 조빙의 예는 없었고, 이웃 나라와 회합하는 제도도 없었다. 제후가 산으로 놀러 가거나 사냥을 나갈 겨우에도 30리를 벗어나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또 그들을 감시하고 나라를 방비하는 관리를 설치하여 살폈다.[17] 조예 즉위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조의 적자이자 자신의 친숙부였고, 조조 생전에 자신의 아버지와 후계를 놓고 다투기도 했으니 제일 경계 대상이었다. 당장 한국 역사에서도 숙부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결국 살해당한 케이스가 있다.[18] 동서 8km 규모의 거대한 지하 땅굴이 발굴되었고, 발견된 것 외에 매몰된 부분이 더 있어 최대 12km 규모로 보는 주장도 있다. 이 땅굴은 군사용으로 송대까지 쓰이다 홍수로 매몰되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땅굴과 약간의 건물터뿐이지만, 그 규모에 걸맞은 성벽과 군사 주둔지, 도로 등의 부대 시설을 감안하면 조조 생전엔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채였을 것.[19] 바로 위 형 조창의 압도적인 무인 포스 때문에 대조적으로 문약한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로 사마의의 대오전략을 비판할 정도로 문에 치우치지만은 않았고 심지어 조조가 만인지적 관우를 상대로 조식을 총사령관으로 형주에 급파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으니 적어도 지속적인 전쟁 삽질을 한 큰형 조비보다 군략 또한 훨씬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20]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조상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물이 했으니 사마씨한테는 최고의 빈틈이 생긴 것.[21] 조방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부터 불확실한 상황에서 조예는 그런 짐덩이를 양아들로 세우는 자충수를 두었다.[22] 다만 진짜 조식의 창작인지는 불명이다.[23] 참고로 한국에도 번역된 책이다.[24] 하백의 아내이지만 예와 바람이 나서 하백이 예와 싸우다 한쪽 눈을 잃게 만들었다. 아름답지만 방탕한 이미지가 짙다.[25] 서울대교수 전인평 저 동북아시아 음악사(출판사 아시아음악학회) 143쪽 참조. 구체적 출처는 양나라 승려 혜교(AD 497~557)의 저서 법원주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