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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40:26

제후/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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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후라는 것은 상고 중국주나라를 비롯한 중국의 개념이었으나 전근대에 많은 중국의 제도가 한국사의 국가들에게 들어온 것처럼 제후제도 역시도 통용되었다. 다만 한국사 왕조들이 중국의 천하관인 조공, 책봉체제에 들어가 군주위를 중화사상 체계속 황제(皇帝)의 제후 중 하나인 (王)으로 선택한 이후에는 한국사 왕조의 군주는 서열상 중국 천자의 제후 중 하나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제후란 사실 왕으로 있는 군주들 자신이었다. 그래서 유교관념과 제후제도의 이론상으로 제후는 천명으로부터 권능을 부여받은 천하와 인간세계의 주인인 천자만이[1] 제후를 봉할 수 있는 것으로 천자가 아닌 천자가 임명한 제후 스스로 자신을 대리할 제후를 또 책봉한다는 것은 사실 유교적 예법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주나라의 유교적 예법상으로는 천자는 지방의 대리통치를 봉한 '국(國)'의 우두머리에게 제후의 작위오등작을 내리고 제후는 제후국에 소속된 '가(家)'의 가신에게 내리는 작위군(君)을 내린다.

그러나 조선시대 이전에는 한국사의 왕조들에게 유교적 가치관이나 중화사상은 그다지 엄밀하지 않았고 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자체적으로 제후를 봉하기도 하였다. 이는 외왕내제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황제의 고유권한을 행사해 황제노릇을 했으니 말이다. 특히 고려 왕조에서 이것이 절정에 달하였다. 하지만 조선 왕조에 들어서는 이전 왕조들보다 더 고도화된 유교적 가치관의 확립과 중화사상의 수용으로 태종이 제후국의 제도로 자체적인 제후를 책봉하는 것은 예법상 맞지 않다고 한 이후 황제에게 책봉받은 작위인 조선왕 왕작(王爵) 하나만을 제외하고 중국 황제가 아닌 한국 왕이 자체적으로 임명하는 일체의 공후백자남 작위를 없애 버린다. 그리고 오로지 제후가 가신에게 봉작하는 작위인 군(君)만 신하들에게 내렸다.[2] 이후 조선에서는 공(公)에서 작위의 의미가 제거되고 단순히 성씨나 시호 뒤에 붙는 존칭의 의미만 남았다. 또한 왕도 묘호를 붙였다.

그 후 거의 오백년 뒤에 고종대한제국을 건국하고 칭제건원하여 황제가 된다. 이때는 고려 왕조처럼 불완전한 체계가 아닌 완전한 황제국을 표방하여 이 대한제국의 약 13년 동안은 한국사에서는 가장 주나라 예법에 가까운 거의 완벽한 천자국의 제도를 갖추게 된다. 그래서 고려시대처럼 왕에 오르고 황제처럼 취급하는 게 아닌 명실상부한 황제에 오르고 완편된 제후 작위들을 갖추어 황실 직계왕족(王族)으로, 방계는 공족(公族)으로 임명한다. 그래서 한국사에 유래가 없던 친왕 작위들도 최초로 봉작되었는데, 대중적으로 유명한 의친왕, 영친왕의 작위도 이때에 만들어진다.[3] 그러나 대한제국은 기반이 튼튼하지 않은 나라였고 금세 일본 제국에 병탄당한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제후들은 나라는 없어졌지만 왕공족조선귀족으로 살아남았으나[4] 1945년 일본의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연합군 점령하 일본 시기에 1947년 일본국 헌법의 시행으로 지위를 박탈당했으며 1948년 한반도에서도 별다른 제정복고의 움직임도 없이 남북에서 각각 자유민주주의인민민주주의의 공화정체가 들어서서 복벽이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서 신분제는 타파되고 한국사 왕조들의 군주들도 포함되었던 작위인 과 다른 공후백자남의 작위들도 이로써 역사에서 최종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2. 목록

※ 한국사의 군주들은 대부분이 (王)으로서 중국 황제(皇帝)에게 책봉 교서를 받은 경우는 '왕작'(王爵)으로 정식 임명된 제후에 해당하지만 여기서는 기본적으로 한국사의 군주가 아니면서 한국사 군주에게 제후 작위를 수여받은 신하의 경우만 왕, 공, 후, 백, 자, 남과 시대순, 가나다순으로 작성하고 군주는 제후 작위가 한국사에서 특이 사례인 경우만 예외적으로 작성하고 '(군주)' 표시로 군주임을 병기. 또한 작위는 아니나 시호성씨, 별칭인 경우는 '(시호)', '(성씨)', '(별칭)'로 따로 표시.

2.1. 왕작(王爵)

2.1.1. 고조선

2.1.2. 고구려

2.1.3. 백제

2.1.4. 당나라

2.1.5. 아스카 시대 일본

2.1.6. 돌궐

2.1.7. 신라

2.1.8. 탐라국

2.1.9. 우산국

2.1.10. 발해

2.1.11. 후백제

2.1.12.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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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3. 원나라[19]

2.1.14. 대한제국

2.1.15.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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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공작(公爵)

2.2.1. 당나라

2.2.2. 발해

발해의 경우 기록이 적긴 하나 분봉지+오등작 아니면 직책+오등작으로 쓰인 흔적이 있다.

2.2.3. 고려

2.2.4. 조선

2.2.5. 대한제국

2.2.6.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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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후작(侯爵)

2.3.1. 고조선

2.3.2. 고구려

2.3.3. 백제

2.3.4. 고려

2.3.5.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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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백작(伯爵)

2.4.1. 고려

2.4.2. 조선[32]

2.4.3.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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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자작(子爵)

2.5.1. 발해

2.5.2. 고려

2.5.3. 일본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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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남작(男爵)

2.6.1. 발해

2.6.2. 고려

3. 관련 문서



[1] 이럴때 흔히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이 '억조창생의 주인'이다.[2] 조선 건국 직후에는 고려의 오등작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대표적 예로 봉화백 정도전, 청해백 이지란이 있다. 태종 이방원의 경우도 원래의 작위는 정안대군이 아닌 정안공이였다.[3] 고려시대의 역사기록에 친왕이라는 단어가 나오기는 하나, 이는 고려가 군주를 황제가 아닌 왕으로 하면서 부르기는 황상, 폐하 등의 황제국 용어로 부른 것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고려사에 왕자가 친왕으로 임명된 사례는 없었고 왕자들은 공이나 후로 임명되었다. 물론 이것도 제후는 제후니 조선시대보다는 격이 높고 제후를 임명하는 것은 황제의 고유권한이니 외왕내제의 한 예로 의미가 있다.[4] 단 일본제국에는 천황화족이 존재하고 있었던만큼 합방 당시 황제였던 순종은 창덕궁 이왕으로, 상황이었던 고종은 덕수궁 이태왕이 되고 친왕들도 공이 되고 공들은 조선귀족으로 한 단계식 강등당했다. 그리고 조선귀족은 오등작 중 최고위인 공작에 임명된 이가 없었으며 오로지 그 아래의 후작부터 남작까지만 봉작받았다.[5] 책봉이 아닌 자칭인데 전국시대주나라 천자권위가 떨어지자 각지의 군웅들이 왕을 자칭하는데 이때 역왕(易王)도 자칭 왕이 되었다. 그러자 바로 과 경쟁관계였던 인접국 고조선조선후도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왕을 자칭하고 연을 치려하였으나 대부 례가 말려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6] 조선왕 1세가 왕을 칭한뒤 왕위가 계속 내려온것으로 보인다.[7] 고구려 멸망 이후 보장왕의 후손들은 당의 수도장안에 머물며 고구려 유민들을 대표하여 고려조선군왕(高麗朝鮮郡王)의 작위를 세습하였다.[8] 백제멸망 이후 당나라는 부여융과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을 대방군왕(帶方郡王)으로 봉했다. 참고로 식민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의 7주 중 하나도 이름이 같은 대방주(帶方州)였다. 흑치상지는 행대방주장사(行帶方州長史)로 임명되었으며 구당서 현종본기의 태산 봉선의식의 조회하러온 내신 번국에 '백제 대방왕'이라는 기사가 있다.[9] 보장왕고구려부흥운동을 꾀하자 보장왕을 검남(파촉)으로 유배보내고 손자인 고보원을 충성국왕으로 삼아 요동을 관할하게 했다. 충성국왕의 충성은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충성의 그 뜻이다. 하지만 고보원도 충성하지 않고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키려 하였으며 소고구려로 자립하였다.[10] 삭탈.[11] 정확히는 천황에게 하사받은 작위가 아니라 사성(賜姓) 받은 성씨다. 백제멸망 이후 일본에 있었던 백제유민들의 대표자였던것으로 추정된다.[12] 안승문무왕에게 임명받은 제후왕의 작위이다.[13] 살아있을 때의 작위는 아니고 시호로서 대상자는 김유신이다.[14] 백제와 신라에게 입조하였다.[15] 신라에게 입조하였다.[16] 견훤이 925년 후당장종(莊宗)에 입조하고 봉작받은 작위로 백제왕 뿐 아니라 관직 등의 여러 칭호도 함께 받았는데, 다 합치면 '검교태위겸시중판백제군사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행전주자사해동사면도통지휘병마제치등사백제왕식읍이천오백호'으로 상당히 길다.(...)[17] 1281년(충렬왕 7년) 음력 3월 20일에 원세조충렬왕에게 하사한 작위의 이름이다.[18] 정식작위는 아니고 윤시우충정왕외척으로서 측근에 있으면서 권세를 누려 그 권세가 높아 민간에서 불려진 별칭이다. 다만 정식으로 받은 작위가 아님에도 감히 왕(王)이 들어간 별칭을 함부로 쓸 수 있었다는것 자체가 왕권이 강했던 조선시대 같으면 실로 상상도 못할일로서 원 간섭기 당시 고려가 조선과는 체제가 달랐다는것을 의미한다.[19] 원나라는 중국사몽골사에 속하나 역사적으로 한국사와도 접점이 많았는데 심왕이 대표적이다.[20] 기자오의 진작된 작위로 급이 높은 일자왕(一字王)의 작위다.[21] 신돈원나라 작위이다. 고려왕과 같은 왕작으로서 형식상으로는 동급인 작위이었다. 더구나 일자왕(一字王)이다.[22] 원래는 심양왕이었으나 충숙왕이 원나라의 권세가가 되면서 더 급이 높은 일자왕(一字王)인 심왕으로 격상되었다.[23] 기황후의 3대조까지를 추증할 때 기자오가 받은 작위다.[24] 김인문에게 당고종이 하사한 작위로 봉지 임해군은 백제의 서해안 지방에 해당한다.[25] 김유신당고종으로 부터 하사 받은 작위이다. 뿐만 아니라 관작과 식읍도 받았는데 봉상정경(奉常正卿)과 식읍 2,000호 이다. 그래서 합쳐 부르면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식읍이천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이다. 다만 김유신에게 내려진 영지인 평양을 신라나 김유신의 가문이 실효지배하지는 못한것으로 보이며 당과 신라, 이후에는 발해, 신라의 완충지가 되었다. 참고로 고구려를 무너뜨린 설인귀의 작위는 평양군공(平陽郡公)으로 고구려멸망에 큰공을 세우고 안동도호부도호로 임명되어 고구려 지방을 다스린 적이 있으므로 고구려의 수도 평양의 작위라 헷갈리기 쉽지만 설인귀 작위 평양의 양(陽)자가 한국 평양의 양(壤)자와 다르고 중국어 독음도 다르다. 설인귀 작위의 평양(平陽)은 현재의 중국 산시성에 위치한 다른 지역으로 서로 다른 지역이다.[26] 왕서(王恕)의 작위로 정화궁주의 조부이다.[27] 홍군상(洪君祥)의 진봉된 작위[28] 공예태후의 아버지 임원후(任元厚)가 정안후(定安侯)에서 진봉된 작위다.[29] 홍군상(洪君祥)의 작위[30] 공예태후의 아버지 임원후(任元厚)의 작위다.[31] 제주고씨 장흥백파의 시조인 고중연의 작위로 홍건적의 난 시기 공민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에 임명되면서 받은 작위이다.[32] 초기의 잠깐 동안만 백작을 봉했다.[33] 여기서 의는 버금가다는 의미로 의개국남은 남작에 준한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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