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19:20:55

승화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e6bd0e, #f9d537 20%, #f9d537 80%, #e6bd0e); color: #6700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추존
국조 의조 세조
대종 안종
비정통
안경공 승화후 덕흥군
}}}}}}}}}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고려 비정통 국왕
승화후 | 承化侯
파일:전 왕온 묘.png
전 왕온 묘의 모습이다.
출생 1223년 이전(추정)[1]
고려
즉위 1270년 6월 20일
고려
사망 1271년 6월 23일(향년 48세 이상)
고려 전라도 진도
(現 전라남도 진도군)
능묘 전 왕온 묘
재위기간 고려 비정통 국왕
1270년 6월 20일 ~ 1271년 6월 23일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본관 개성 왕씨
온(溫)
부모 부친 청화후 왕경
모친 미상
형제자매
4남 중 장남 [ 펼치기 · 접기 ]
승화후 왕온(王溫)
단양백(丹陽伯) 왕서(王楈)
영녕공 왕준(王綧)
수사공(守司空) 왕정(王珽)
배우자 승화후비(承化侯妃)로 추정
자녀 1남
수사도 왕환(王桓)
작위 승화후(承化侯)
지지파 삼별초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대몽 항쟁2.3. 최후
3. 여담

[clearfix]

1. 개요

고려 후기의 왕족으로 이름은 왕온(王溫)이다.

현재의 전주시인 봉지인 승화(承化)로 즉 고려시대 당시 전주의 후작이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정간왕 왕기의 7대손이며 대령후 왕경의 외증손자면서 강종의 제2비 정강원덕태후의 아버지 신안후 왕성의 증손자이다.

동생으로는 영녕공 왕준과 사공(司空) 왕정[2]이 있다.

2.2. 대몽 항쟁

1270년 고려가 몽골에 항복해 여몽전쟁을 끝내고 개경으로 환도하고자 하였을 때 이를 반대하던 삼별초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리고 자신을 추대한 배중손노영희를 따라 전라도 진도로 이동하여 항전하였다.

이듬해인 1271년, 고려와 원나라[3] 연합군이 진도 공격에 나서서 삼별초가 패배했다.

2.3. 최후

囑煕,雍曰,若事捷,當救兄死
(왕준이) 왕희와 왕옹[4]을 불러서 말하였다. '만약 싸움에서 이기게 되면 마땅히 형의 죽음을 구하여야 한다.'
<<고려사절요>> 권19

당시 국왕이던 원종은 물론 동생 영녕공 왕준까지 그를 구하려 했는데, 특히 영녕공 왕준은 진도 공격에 종군한 두 아들 왕희(王熙)와 왕옹(王雍)에게 싸움에서 이기면 자신의 형을 죽음에서 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나 영녕공 왕준에게 적개심을 품고있던 홍다구가 지휘하는 몽골의 군대가 먼저 들어가는 바람에, 승화후 왕온은 아들 왕환(王桓)과 함께 침계리 인근에서 살해당했다.

3. 여담

진도군 의신면에는 '전(傳) 승화후 묘'가 있는데, 말 그대로 승화후가 묻혔다고 전(傳)해지는 묘라는 뜻이다. 구전에 의하면 승화후가 사망한 후 진도군민들이 그 자리에서 시신을 수습해 묻었다고 한다.

이후 이 지역은 삼별초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진설리(陳設里)라 불렸으며, 진도읍에서 의신면운림산방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는 왕무덤재(王墳峙)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5]

전(傳) 승화후 왕온의 묘 20m 아래에 묘가 하나 더 있는데, 승화후 왕온이 타던 말의 무덤이라고한다.


[1] 동생영녕공 왕준의 나이에서 추산했다.[2] 정간왕의 다른 후손들은 자손을 남기지 못하거나 조선 건국 후 성씨를 바꾸었으므로, 현재 모든 개성 왕씨 평양공파는 이 왕정의 후손이다.[3] 몽골은 1271년 쿠빌라이 칸이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치고 초대 황제가 된다.[4] 영녕공 왕준의 장남과 차남이다.[5] 진도읍에서 803번 지방도를 타고 의신면 방향으로 가는 고개이다. 고개를 넘어가던 나그네들이 중턱 암반 위에 돌맹이를 던져 원혼을 위로했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