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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2 16:58:27

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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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왕정복고 이후 즉위식을 거행하는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스페인 국왕[1]
王政復古 | Restoration of the Monarchy
1. 개요2. 실제 사례
2.1. 왕정복고 후 현재까지 지속 중인 사례2.2. 일시적인 왕정복고 사례2.3. 논의는 있으나 실행되지 않은 사례
3. 왕정복고의 조건4. 창작물

1. 개요

외국군에 의한 침략 혹은 나라에서 벌어진 쿠데타시민 혁명 등으로 합법적인 군주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주정이 강제로 종료된 나라에서 폐지되었던 군주제를 부활시키는 일.

반드시 옛날에는 군주정이었던 나라가 군주정이 폐지되어 공화정이 된 상태에서 군주정으로 회귀하는 경우에만 왕정복고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 기존의 왕가가 다른 가문에게 왕위를 뺏길 경우에는 찬탈이라고 하는데, 기존 왕위를 찬탈한 신왕가를 무너뜨리고 다시 구(舊)왕가를 복고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복벽(復辟)이라고 표현[2]해야만 하는데, 복벽은 왕정복고라는 개념을 포함하기 때문에 현대에는 왕정복고와 복벽이란 단어를 딱히 구분해서 쓰지 않는다.

전근대 시대에는 군주정이 기본이었으나, 1차 세계대전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군주들이 혁명[3]이나 외국 군대에 의하여 퇴위[4]당하였고 냉전이 시작된 시절부터는 공화정이 주류가 되었다.[5] 하지만 원래 정당한 군주가 없는 경우[6]를 제외하고 군주를 쫓아내고 군주정을 폐지 했으나, 군주가 쫓겨난 빈권좌를 두고 각 세력이 서로 싸우는 경우나[7], 혹은 공화정부가 너무 극악으로 일을 못하거나[8], 공화정부가 외세에 너무 휘둘리는 경우[9] 등으로 기나긴 내전이나 내분으로 정치적이나 경제적으로 파탄되는 파국이 지속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심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그래도 기본은 해줬던 옛날의 왕정 체제로 회귀를 원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나라 중에서는 실제로 군주정이 복고된 나라들이 있는데, 프랑코의 독재를 무너뜨리고 군주제를 복원한 스페인이나 크메르 루주킬링필드로 개판된 캄보디아에서 1970년 론놀의 쿠데타로 쫓겨났었던 시아누크 전 국왕을 다시 옹립한 경우가 있다. 그 밖에도 아프가니스탄이나 리비아 같이 군주제였다가 군주제가 폐지된 이후 독재와 내전, 내분 등으로 개판이 된 나라들 중에서도 군주제 복원 얘기가 나오고 있다. 각 나라별로 군주제 복원 이야기가 나오는 동기에 대해선 공화국의 군주주의복벽주의 참고.

20세기 중반 들어 민주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보편적인 정치이념인 만큼 복고를 주장하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는 공화국을 입헌군주제로 복고하려는 것이지, 전제군주제로 복고하자는 주장은 거의 없다.

2. 실제 사례

2.1. 왕정복고 후 현재까지 지속 중인 사례

2.2. 일시적인 왕정복고 사례

2.3. 논의는 있으나 실행되지 않은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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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왕정복고의 조건

국민들이 왕정복고를 열렬히 지지한다 하더라도 해당 국가의 실권자들이 원해야 한다는 조건이 전제되어야 한다.[16] 노골적으로 말해서, 어지간한 근왕주의자가 아니라면 국민들 여론이야 어떻든 자기들이 돌아가며 국가원수 해먹을 수 있는데 미쳤다고 왕정을 복구하겠는가? 캄보디아만 해도 실세인 훈센 총리가 왕정복고를 지지했고, 스페인도 프랑코 총통이 직접 왕정복고를 결정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 정권이 세워지거나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던 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 등의 나라들은 20세기 중후반기 공산당 정권, 군사 정권을 몰아내고 민주화 혁명으로 집권한 민주화운동 지도자들이 다당제 공화정을 선호하고 왕정복고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17] 한국에서도 해방 이후 실권을 잡은 이승만이 대한 황실을 자신의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하고 적개심을 표출하여 과도한 견제를 하면서 공화국이 수립되었다.[18]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선정을 펼쳤던 왕가에 대한 향수가 대단하여 왕정복고가 인기가 높고 전 대통령으로 10년을 집권한 카르자이도 원래 왕정복고파였지만 권력을 잡고 생각이 바뀌었는지 왕정복고를 이행하지 않았다.[19]

왕정복고를 하려면 왕실로 옹립하기에 걸맞은 자격을 가진 가문이 존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대부분 동유럽 국가들의 경우 피아스트 왕가나 아센 왕가 등의 가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수백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 등 열강들의 지배를 받아 수백 년간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왕실의 맥이 끊겨, 토착 왕가란 개념이 사라져버렸다. 이 때문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는 아예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할 당시 국체를 공화정과 군주정, 어느 쪽으로 할지 논의 없이 곧바로 공화국을 선포했다. 다만 발칸반도 일대의 그리스나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에서도 현지 토착 왕가의 혈통이 이미 끊어진 상태였기는 하지만, 왕국으로 독립하였는데 이는 열강들의 간섭 하에 독일이나 덴마크 등지의 다른 나라 왕가나 귀족 가문의 사람을 모셔와 옹립한 것이다. 이들 신생 왕국들의 사례를 진정한 의미의 왕정복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해당 국가들의 사학자들 중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외국계 왕조가 통치하던 왕정체제를 폐지함으로써 제대로 된 민족주의 정체성을 되찾았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대체적으로는 일단 국민들이 "군주를 다시 모시자"는 공감대를 형성할 만큼 나라의 정세가 좋지 않아야 한다. 현 공화정 체제에서 실책을 거듭해 국민들의 신뢰를 잃고, 과거의 왕정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의미에서 복벽운동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이는 이전의 왕실에 대한 국민 다수의 지지가 있어야지 가능하다. 만약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왕정복고는 불가능하다. 그런 나라의 국민들은 왕정복고 이전에 민주화 또는 정치 개혁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한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 등에서 왕정복고는 현재 당사국 정치인들 사이에서 논의조차 되지 않고, 복벽운동을 표방하는 정당도 없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웃나라, 해당 국가에 큰 영향력이 있는 배후국의 지지가 있어야 한다. 군주에게 주권이 있는 군주국의 존재는 생각보다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이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오스트리아에서도, 심지어 근왕파가 내전에서 승리한 헝가리에서도 복고되지 못한 것은 만약 합스부르크 왕조가 복고되면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 주변국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르티 미클로시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들이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를 외면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에도 탈레반 정권의 1차 붕괴 이후 열린 부족회의에서는 파슈툰족을 중심으로 왕정복고의 의견이 우세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탈레반을 박살내고 아프가니스탄에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 수립되는 모습을 연출하고 싶었던 미국이 호응하지 않으면서 카르자이를 수반으로 하는 신공화국 수립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중국의 홍헌제제장훈복벽의 경우에도 주변국이 모두 반대했다.

드문 사례로 해당 국가의 실권자 스스로가 왕위에 올라 복고된 사례가 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3세, 위안스카이, 조구 1세 등이 여기에 속하며, 거의 대부분 공화정이 아직 완전히 대세로 자리잡지 않았고, 왕정이 아직 유력한 정치체제로 남아 있던 상황에서 결정된 것이다. 공화정이 시대의 흐름이 된 현재는 거의 불가능한 방법이다.

4. 창작물


[1] 중간에 각각 부인 소피아 왕태후와 아들 펠리페 6세 현 스페인 국왕, 딸 엘레나 공주와 크리스티나 공주도 있다.[2] 복벽'옛 왕조를 다시 세운다.'는 뜻이고 왕정복고는 '왕(군주)의 통치를 복구한다.'는 뜻이라서 엄밀하게 둘은 구분된다.[3] 공산주의 혁명으로 군주정이 무너진 러시아 제국이나 킬 군항의 반란으로 시작된 독일 11월 혁명으로 무너진 독일 제국이 여기에 포함된다.[4] 1차 대전의 패전으로 오헝제국이 공중분해되어 군주위를 상실한 합스부르크 왕가붉은 군대에 왕실이 강제로 축출당한 불가리아 왕국루마니아 왕국이 여기에 해당한다.[5] 이는 식민지 상태에서 독립된 나라들 상당수가 군주제가 아닌 공화제로 국가를 출범시킨 것 때문도 존재한다.[6] 신생 독립국 중에는 정당한 왕가 자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아프리카의 신생독립국들이 이러했다.[7] 유능한 군주정 정부를 몰아내고 인민공화정을 세웠다가 나라가 파슈툰, 타지크, 하자라, 우즈베크 등 각 민족별로 분열되어 개판난 아프가니스탄이 대표적인 경우로 왕정복고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8] 대표적으로 캄보디아에서는 공화정부가 사람을 너무 죽여서 자신들 손으로 쫓아낸 국왕을 다시 데려오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졌다.[9] 조지아는 러시아의 침략이나 내정간섭 등으로 국정이 불안해지자 복벽주의가 강세된 바가 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10] 실제론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있다.[11] 장남은 태어난 다음날 죽어 실질적으로 장남이었다.[12]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 이후엔 나폴레옹에게도 접촉했지만 거부당했다.[13] 프랑스 국내 뿐만 아니라 독일 제국 내부에서도 해리 폰 아르님 주불 독일 대사를 비롯한 보나파르트 제정복고를 주장하는 세력도 있었다. 그러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공화국으로 남아 있어야 프랑스를 포위하는 군주국들간의 대불 동맹이 성립되기 쉽다고 하여 이를 거부했다.[14] 가장 가시적인 이유로는 당시 소 협상국이라 불리며 연합한 이웃나라들인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 왕국·유고슬라비아 왕국이 합스부르크 왕가에 극도로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카를 1세가 부다페스트로 진군하면서 왕위 복귀 직전에 이르렀을 때 체코와 유고에서는 아예 자국군을 헝가리 국경으로 배치하여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면 침공하겠다는 무력시위를 하였다. 카를 본인도 이를 감안해서 프랑스의 지지를 얻은 상태에서 이를 통해 주변국의 반발을 꺾겠다는 논리를 폈지만 프랑스 정부가 부인하면서 무산되었다. 실제로 다소 복잡한 정치적 계산이 얽혀있었지만 서방 강대국들도 대체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복귀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았다.[15] 프랑코 역시 1947년 이후부터 왕 없는 왕국의 섭정으로 스페인을 통치했고 사후에 후계자로 키운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사전 작업을 해두었다.[16] 다른 모든 조건은 거의 갖춰졌는데 이 조건 하나만 충족이 안 돼서 왕정복고를 못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이다. 21세기인 2000년대 기준으로도 명망이 매우 높아서 지지율이 높고, 제1차 세계 대전의 전범국이라지만 1차 세계대전의 특성과 발발 원인으로 인해 왕정복고를 요구할 정당성도 매우 높았다. 그러나 실세인 오스트리아 공화국 정권이 재산을 몰수하고 황위 계승권을 포기해야 오스트리아로 돌아올수 있게 하는 등의 여러 가혹한 조치를 취하면서 황후인 지타,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백기를 들게 만들었다.[17] 특히 루마니아는 국민 대다수가 군주에게 실권을 주지 않는 입헌군주제 형식으로 왕실 복구를 강하게 지지하지만, 아직도 정치권에서는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복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18] 다만 꼭 이승만 때문이 아니더라도 미군정의 의향도 있었고 대한제국 황실은 일제 지배에 협력했던 데다가 독립운동가들 중에서도 복벽사상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탓에 설령 이승만이 아니었다고 해도 대한제국 황실이 다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거기다 구황족 스스로도 복고를 원하지 않았다.[19] 끝임없는 내전이 발생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사실상 군주제가 되돌아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세계의 추세가 공화제인 점과 쿠데타로 국가붕괴를 겪은 것이 치명타가 되어 왕당파들이 왕정복고를 스스로 포기했다. 이때 왕당파들의 선택이 오히려 치명적인 실수였다는 평가가 있다. 민족과 종교가 하나로 묶이지를 않은 상황에서 이들의 구심점 역할을 할 군주가 없어 국민을 단합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도 내전은 끊임없이 이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