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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5:19:14

공화국의 군주주의


1. 개요2. 복벽주의3. 이유4. 사례
4.1. 지지 여론이 상당 부분 있거나 진지하게 고려 중인 사례
4.1.1. 불가리아4.1.2. 루마니아4.1.3. 알바니아4.1.4. 세르비아4.1.5. 몬테네그로4.1.6. 조지아4.1.7. 네팔4.1.8. 리비아4.1.9. 아프가니스탄4.1.10. 이스터 섬
4.2. 한때는 군주주의 지지가 강했으나 현재는 진지한 논의조차 되지 않는 사례
4.2.1. 이라크4.2.2. 오스트리아4.2.3. 헝가리4.2.4. 이란4.2.5. 독일4.2.6. 이탈리아4.2.7. 러시아4.2.8. 이집트4.2.9. 브라질
5. 관련 문서

1. 개요

공화국 내부에서 일어나는 군주주의 운동. 현대는 전제군주제가 사실상 사장되는 입장인데다 민주주의제와 양립할 수 없는 체제이므로 보통 국가의 상징으로 민주주의와 양립하는 체제인 입헌군주제 지지가 거의 대부분이다.

오늘날 많은 공화국은 군주국이었으나 혁명, 쿠데타, 내전으로 군주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되었거나, 혹은 강대국들의 식민지였다가 식민지에서 독립 이후 공화정을 채택한 나라들이다.

공화국 대부분은 하나의 정치 운동으로서 군주주의 활동 자체를 보장하지만[1][2], 독재국가[3]의 경우 활동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운동이 벌어지는 대부분의 나라들은 과거 군주국이었으나 모종의 이유로 공화국으로 전환된 나라가 대부분이다. 물론 건국 시점에서부터 순수 본 공화국에서도 군주주의 운동은 있는데 2021년 기준 미국의 군주주의 지지율은 무려 5%씩이나 된다.# 다만 단순히 군주주의에 대한 지지율이 5%라는 것이며, 과거 영국 국왕을 다시 모시자는 복벽주의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반대되는 개념으로는 군주국의 공화주의가 있다.

2. 복벽주의

복벽주의 운동이란 과거 존재했던 구 왕실 혹은 왕조를 복귀시키고 상징으로서의 입헌군주제를 세우자는 운동을 말한다.

복벽주의와 군주주의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공화국의 군주주의자들 중 많은 이들이 복벽주의자이긴 하지만, 모든 공화국의 군주주의자가 복벽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즉, 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구제적으로 과거 존재했던 구 왕실 혹은 왕조 복귀의 목적보다는 군주의 존재 자체의 목적인 경우도 있다. 가령 급진적인 우파 자유지상주의자인 한스헤르만 호페같은 경우 계몽군주에 의한 통치가 오히려 공화정보다 자유를 보존하는데 더 유익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그가 적극적으로 이전에 존재했던 특정한 왕조로 되돌아가자는 것에 열정적인 복벽주의자는 아니다. 보나파르트주의자들에 의해 프랑스 제1공화국에서 프랑스 제1제국으로 바뀐 것도 이전의 나폴레옹 가문이 황제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복벽주의가 아니다.

3. 이유

이러한 의견이 나오는 대표적인 이유는 이라크, 세르비아, 루마니아, 조지아, 리비아, 아프가니스탄, 에티오피아처럼 군주정이 폐지된 이후 집권한 공화정부가 독재자들의 만행과 실정, 이후의 정치 혼란으로 군주정 시절보다 더 최악의 통치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구 체제에 대한 향수로 입헌군주정으로 복벽을 바라는 염원이나 주장들이 상당하거나 간혹 나오기도 한다.

단순한 자유민주적인 제도 성립만으로는 갈등 통합이 어렵다는 걸 느끼기에, 편당적이고 부패한 정치인이 아닌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줄 군주라는 구심점을 갈구하는 것이다. 군주정이란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국민 통합의 상징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사례

1차 대전 종전 직후 유럽의 폐위된 군주들이 모여 공산주의를 저지하는 유일한 방법은 왕정복고에 있다고 왕정복고를 호소하는 '폐위된 군주들의 모임'을 개최한 적이 있었지만 세간의 반응은 싸늘했다.

이외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그리스, 조지아 등 발칸반도 및 동유럽 국가[4]와 네팔, 라오스 등 일부 아시아 국가[5] 같이 오래 전에 왕정이 폐지된 나라들에서도 전 왕태자나 전 국왕 등 옛 왕실 가문 인사들이나 일부 정치 세력들, 지식인, 일부 반정부 세력들을 중심으로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4.1. 지지 여론이 상당 부분 있거나 진지하게 고려 중인 사례

군주제 도입 가능성이 높거나, 혹은 가능성이 높지는 않더라도 군주주의를 주장하는 여론이 현재도 어느 정도 남아 있는 나라.

4.1.1. 불가리아

불가리아의 국왕이었던 시메온 2세의 경우에는 민주화 이후에 왕정복고를 위해 국왕 임기제까지 제안하며 동분서주했지만 왕정복고엔 영 뜨악한 반응이라 실패했다. 대신에 그는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아 총리에 당선되어 공화국의 수장이 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정책이 시원찮았는지[6] 국민의 인기를 잃어 그의 내각은 몇 년 만에 끝났다.

4.1.2. 루마니아

루마니아에선 미하이 1세차우셰스쿠 독재의 반동으로 루마니아 국민들의 인기를 모았지만, 차우셰스쿠의 후임인 일리에스쿠가 왕정복고를 두려워하며 미하이 1세를 추방함에 따라 왕정복고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현재는 미하이 1세가 다시 루마니아로 귀환하여 옛 왕궁에서 사는 등 사실상 국왕으로 대접받고 있고, 정부 차원 뉴스에서도 폐하라는 경칭을 사용한다. 국민들의 미하이 1세와 그 가족들에 대한 지지가 매우 커서 현행 공화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헌하자는 의견들이 종종 나오고 있다.

하지만 반대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은데, 현재 루마니아의 정치권과 지식인들 상당수는 피 흘려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일군 루마니아 현 민주공화정 체제를 뒤엎고 나라를 망친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7], 차우셰스쿠 등 공산당 독재 세력들에게 집권의 빌미를 주었던 이전의 왕정 체제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며 왕정복고 여론에 대해 결사반대하는 중이다.

4.1.3. 알바니아

알바니아에서도 조구 1세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왕정복고가 꽤 강하게 대두되었지만, 21세기 들어서는 시들해졌다. 과거 왕정복고에 대한 국민투표를 한 적이 있었는데 개표결과 부결되었다. 당시 총리였던 살리 베리샤는 2011년 문제의 투표는 '공산주의 반란을 막기 위해' 조작되었다고 밝혔다.

4.1.4. 세르비아

세르비아도 왕정복고가 인기를 얻고 있지만, 진지한 논의는 아직까지 없다. 일단 왕정복고에 대한 지지율은 64%에 달한다. 그리고 세르비아 왕정 복고운동이라는 정당도 있지만 크게 지지를 받고 있지는 않다.

4.1.5. 몬테네그로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의 영향에서 탈피하고, 경제를 부흥시키는 것이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에 왕정복고 같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는 논의조차 제대로 못 이루어지는 실정이다. 심지어 몬테네그로의 페트로비치녜고시 왕가도 왕정복고에 적극적이지 않은 입장이다. 하지만 몬테네그로인들의 왕정복고에 대한 지지율은 높은 편이다. 이웃나라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출범을 이유로 몬테네그로 왕실을 강제로 축출했기 때문에 왕정복고 여론이 나쁘지 않다. 심지어 현재 몬테네그로 왕실은 사실상의 궁전 역할을 할 개인 아파트를 짓는 것도 허가받았고, 대통령과 함께 외국 귀빈을 맞는 일도 하는 등 사실상 비공식적인 국가원수 대접을 받고 있다.

사실 몬테네그로나 루마니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같은 동유럽 발칸 국가들에선 자국에서 왕정복고 여론이 높지는 않지만[8]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렇듯이 현재 공화정이긴 해도 총리에게 권력이 집중된 내각책임제 형태여서 상징적인 직책에 불과한 대통령의 지위를 국왕으로 바꾸기만 하면 되므로 왕정 전환은 절차적으로 어렵지 않은 편이다.

4.1.6. 조지아

조지아에서는 역대 행정부의 실책이 쌓이면서 바그라티온 왕가의 왕정 복고에 대한 2007년 여론조사에서 긍정적이라는 응답이 40%가 나왔다. 2013년에는 80%까지 나왔다.

4.1.7. 네팔

비교적 최근인 2008년에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으로 바뀐 네팔의 경우, 왕정복고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는 군주주의 성향의 야당인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당(RPP-N)이 활동하고 있는데 현재 원내 4당 정도의 위치를 갖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갸넨드라 전 국왕이 복위를 하되 전제군주로서 네팔 정치에서 저지른 만행들을 감안하여 실권이 없는 상징적 군주로 두고, 총리의 권력이 강력한 일본이나 유럽 왕국들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왕정복고가 어렵다면 2008년 공화국 수립 이후 현재 관광지로 개조된 왕궁과 별궁 등 몰수된 왕가 재산을 구 왕가 사람들에게 반환이라도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현재 집권여당이 네팔 공산당이고 현 네팔 총리인 푸슈파 카말 다할 또한 군주제에 부정적이기에 현 정권 내에 복고될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다. 그럼에도 2001년 이전까지만 해도 절대적인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었고, 폐지된 지도 그리 오래되지 않아 네팔 국민들의 왕실에 대한 향수가 아직 많이 남아있다.[9] 현 집권당이 민심을 잃어 퇴진한다면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네팔 내전 당시 왕국 정부군의 전쟁범죄에 가족이나 친지가 목숨을 잃거나 피해를 입었던 네팔 국민들은 갸넨드라 전 국왕의 복위에 대해 반대하고 있어 실제로 왕정의 복귀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4.1.8. 리비아

리비아 역시 1969년 카다피의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는데 2011년에 리비아 내전이 발발하자 카다피 정권 붕괴 이후 혼란이 커질 경우 과거 카다피의 쿠데타로 축출당해 국외로 망명한 이드리스 1세 전 국왕의 손자를 국왕으로 추대하여 입헌군주국으로 전환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내전 당시 과도국가위원회(NTC)등 반카다피운동을 주도했던 반정부 세력들은 입헌군주제가 아닌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공화제를 채택했다.[10] 하지만 카다피 정권이 붕괴된 이후 리비아의 정국 상황이 악화되자 리비아 내부에서 다시 왕정복고가 거론되고 있다. 시대착오적이라 반대하는 자들도 있지만 헌법복구파나 수니파 민병대들 중에서 지지하는 사람이 꽤 되는 듯하다.

현재 미국에 망명 중인 리비아의 알 세누시 舊 왕가는 국민의 부름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반색하고 있다. 만약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면 카다피 정권 하에서 농업부 장관을 지낸 적 있는 모함메드 알 세누시[11]가 유력한 국왕 후보로 보이며 아랍권에서 왕정이 폐지된 나라들중 유일하게 왕정이 복고된 국가가 될 가능성도 있다.

4.1.9.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의 경우 1950년대에서 1960년대까지는 왕국이었다가 1973년 군주제 폐지 이후 소련 침공과 소련군 철수 이후 부족, 군벌, 정부군, 탈레반간 내전으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나가는 막장 헬게이트 상태에 빠져 지금도 정치적으로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때문인지 60년대 평화로웠던 왕정 시절이 그립다고 하소연 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고 하고,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옛날 왕정 통치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6,70대 노인층들을 비롯하여 젋은 세대들도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들의 영향을 받아 왕정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일각에선 이 나라도 캄보디아처럼 UN 등 국제기구의 개입, 감시하에 왕정 복고를 추진해보면 어떻겠냐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2007년 모하메드 자히르 샤 전 국왕이 서거하였고 사망한 고 자히르 샤 전 국왕의 아들들이 굉장히 많은데다 만일 왕정복고를 한다면 전 왕조 바라크자이 가문의 일족들 중 누구를 아프가니스탄 새 국왕으로 옹립하여 왕정복고를 할것인지에 대해서 아프가니스탄 현지에서도 논란이 오가는 상황이다.

공화정 시절의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전국의 영토와 분열된 국민들을 통합하지 못하고 통치조차 못할 정도로 개판이라 2021년부터는 아예 탈레반이 재집권한 상황이며 이 과정에서 아슈라프 가니 등 민주 정부 지도부가 보인 추태로 인해 반대급부로 최근 다시금 바라크자이 왕조로의 왕정복귀를 거론하는 주장도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다.

4.1.10. 이스터 섬

칠레령 이스터 섬(라파누이)의 분리주의자들도 이스터 섬이 독립국가로 독립할 경우 생존 중인 라파누이 족 마지막 국왕의 손자를 국왕으로 추대하는 입헌군주제를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4.2. 한때는 군주주의 지지가 강했으나 현재는 진지한 논의조차 되지 않는 사례

군주주의가 한때는 진지한 시도나 진지하게 논의가 되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고 극히 비주류적인 소수 세력으로만 남아있는 나라들. 그럼에도 한때는 복고 여론이 있었다면 이 문서에 기재하고 처음부터 복고여론이나 복고 시도가 전혀 없었다면 기재하지 않는다.

4.2.1. 이라크

이라크 역시 왕정복고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실제로 이라크의 경우 1932년 이라크 왕국이 수립되어 하심 가문 통치 아래 왕국으로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하였으나 1958년 군사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었는데, 2003년 미국과 영국이 사담 후세인 정권을 상대로 이라크 전쟁을 감행하자 당시 미군 밑 영국군 수뇌부들 사이에선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을 대체할 새 이라크 정부로 1958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어 국외에 망명 중인 옛 이라크 하심 가문 출신 인사를 새 정부의 지도자로 앉혀 이라크를 왕정복고시켜 사우디아라비아나 바레인, 모로코 같은 다른 아랍 친미 왕국들처럼 만들자는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망명 반후세인 인사들이[12] 왕정복고에 대해 서방에 빌붙어서 백성들 착취한 하심 왕조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고, 심지어 왕정복고가 될바에 후세인 정권이 유지되는 것이 더 낫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결국 후세인 축출 후 들어선 새 이라크 정부는 공화정으로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8년 왕정 폐지 이후 오랜 쿠데타와 독재, 테러, 내전, 다에쉬의 준동 같은 혼란상을 겪으며 그나마 이라크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던 1940~50년대 당시 하심 왕정 시절에 대한 노스텔지어 분위기가 이라크내 시아파 무슬림과 수니파 무슬림등을 막론하고 이라크 내부에서 하심 왕조 시대에 대한 향수심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현행 이라크 정부가 공화정이지만 실질적으로 대통령에게는 실권이 없고 총리에게 권력이 집중된 의원내각제라서[13] 일각에서는 대통령직을 없애고 영국에 거주중인 이라크 하심 가문의 수장인 샤리프 알리 빈 알 후세인을 이라크로 모셔와 새 이라크 국왕으로 추대하고, 권력 기반이 허약한 공화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헌하자는 주장들이 일부 나온다. 실제 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2005년도에 군주제 복귀를 주장하는 일부 정치인 후보자들이 선거에서 출마했을 정도였다.#

다만 왕정복위 주장이나 팔라비 왕조나 알 세누시 왕조 등 왕정 시절에 대한 향수심이 가끔씩 나오거나 힘을 얻기도 하는 이라크의 옆나라이자 전통적 앙숙관계인 이란이나 저 멀리 왕정 체제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42년 동안 장기 종신 집권을 하던 독재자 카다피가 축출당한 리비아 등 다른 중동권 국가들과는 달리 이라크는 1958년 왕정 폐지 이후에 쿠데타와 내분, 전쟁, 독재 정치 등의 정치적 혼란들을 거치면서[14] 하심 왕조 시기의 잔재들 대부분이 사라져버렸고[15] 아랍의 봄 이후에 IS와의 전쟁 등을 거치면서 어느 정도 정국이 다시금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지라 폐지된 왕정이 복고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게다가 2011년 카다피 독재 정권이 카다피 정부군과 반카다피 시민군과의 내전에서 붕괴된 이후에 알 세누시 왕정 시대 때 쓰던 예전 국기#와 국가#를 다시 제정했던 리비아와는 다르게, 이라크는 2003년 이라크 전쟁으로 사담 후세인 독재 정권이 축출된 이후에도 하심 왕정 시기 때 쓰던 옛날 국기#와 국가#를 다시 제정조차 하지 않았고. 국가 역시 새 국가인 나의 조국(Mawtini)으로 바꾸고, 국기 또한 왕정 폐지 이후인 1963년에 제정되어 후세인 정권 시절때까지 사용하던 적백흑의 가로 3색기 국기에서 녹색 별 3개를 삭제, 1991년 후세인 정권 시기에 추가된 '알라는 위대하다'라는 아랍어 문구만 남기고 개정하는 선에서 그쳤다.

왕정복고의 가능성은 현재로선 낮지만[16] 현재 영국에 거주중인 이라크 하심 가문들과 이라크 국내의 소수 근왕파 세력들을 중심으로 군주제를 복귀시켜 1958년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이 일으킨 군부 쿠데타로 전복된 왕정을 다시 재건하자는 주장도 종종 나오거나[17] 현재 영국에 거주 중인 구 왕가의 이라크 귀국을 허용해줘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4.2.2.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복위는 영국까지도 지지했던 문제였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다. 윈스턴 처칠은 다뉴브 지역은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황제가 되어 통치하는게 맞다고 주장했지만, 미국과 소련이 지지하지 않았고, 늙은 사자의 지지만으로는 어려워 흐지부지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복원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나마 오스트리아에서만 왕정복고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유력 인사들은 세계 각국의 왕실들이 잘 대접해줄 테니 와서 살라는 제의를 했고, 심지어 스페인의 왕위를 내주겠다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카우디요가 제안을 하기도 했다.[18] 그러나 이러한 제안들을 모두 거절했다. 결국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1966년에 제위 주장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왕정복고의 가능성은 사라졌다.[19]

4.2.3. 헝가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한 후 제국의 마지막 황제 카를 1세가 헝가리의 국왕 카로이 4세로서 헝가리 왕위 복위를 시도했으나, 헝가리 왕국의 섭정이었던 호르티 미클로시가 카로이 4세의 입국을 막아버려 실패했다. 호르티는 카로이의 아들인 오토나 다른 인물을 국왕으로 추대하지 않은 채 왕 없는 왕국의 섭정으로 국가를 통치하다가 독일에게 쫓겨났고, 공산화 후 명목상의 왕정까지 완전하 폐지되었다. 공산당이 무너지고 나서 합스부르크 가문 복위가 진지하게 논의되었으나 왕정복고 시 왕위에 올라야 할 당사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공산당 붕괴 이후 부다페스트를 방문한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열렬한 환영을 받자 합스부르크 왕가를 복구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들이 나왔는데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헛소리라며 일축했다.

4.2.4. 이란

1979년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친미 성향의 팔라비 왕조가 붕괴되고, 혁명 후 호메이니와 하메네이 등 이슬람 혁명을 주도한 이슬람주의 세력들이 현재 집권하며 반미국가로서 미국과 대립하고 있는 이란 역시 이란 국가 평의회(National Council of Iran)와 이란 왕국의회, 이란 입헌당처럼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고와 미국 등 서방국가들에 망명중인 팔라비 왕실 인사들의 환국을 주장/지지하는 망명 단체들이 프랑스와 미국 등 서방 각국에 거점을 두며 활동하고 있다. 특히 이란 국가 평의회는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가 2013년에 창설하였는데 현재 레자 전 황태자가 이 단체의 대표로 재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레자 팔라비 전 황태자는 왕정복고의 여부를 이란 국민의 결정에 맞기거나, 아예 불가능하면 왕정복고 주장을 포기하고 이란 정부와 협상을 통해서 이란으로 귀국할 수 있다며 왕정복고 주장의 일변도에서 다소 벗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란도 과거 제정이었다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라비 왕조가 붕괴되고 이슬람주의 성향의 공화국 정부가 세워졌는데, 현재 이란의 이슬람 신정주의 정권에 반대하는 일부 세속주의 반체제 인사들과 이란 혁명 이후 서방으로 망명한 레자 시루스 팔라비 황태자 등 황족 인사들을 중심으로 현 이란 정부를 타도하고 옛 팔레비 왕조 체제로의 제정 복귀를 목표로 하는 망명 단체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팔라비 2세가 근대화와 경제발전 등 치적들은 둘째치고 사치와 폭력적인 통치로 민심을 잃었으며 혁명 이후 이란 현지에서도 암군, 폭군 취급을 받는 군주인데다 현재 이란을 막장으로 만드는데 가장 큰 비판을 받고 있어 이란은 제정복고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대부분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 때문인지 최근에는 팔라비 가문도 제정복고에 대한 어려움을 느꼈는지 팔라비 왕조 망명 정부를 해산하고 왕정복고와 이란 이슬람 공화국 정부에 대한 모든 반체제, 반혁명 활동을 중단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국외에 망명 중인 팔라비 가문 사람들의 이란 귀국을 현 이란 정부에게 줄기차게 요청한다.

하지만 현 이란 정부는 현재 서방 등 해외에 망명 중인 레자 시루스 팔라비 왕세자를 비롯한 구 팔레비 왕족들이 이란으로 돌아온다면, 곧바로 검거해서 팔라비 왕조 시기 팔레비 2세 전 국왕이 저지른 독재와 부패, 반인륜적 행위를 물어 사형을 시키겠다는 입장이다.[20] 축출당한 레자 시루스 팔라비 왕세자와 파라 팔라비 전 왕비 등 팔라비 가문 인사들이 이란으로 돌아올 경우 이들을 검거해서라도 처벌하겠다는 강경한 자세를 고수하므로 망명 팔라비 왕조 가문 인사들은 이란으로 귀국하지 못한다.[21] 구 팔레비 왕가는 이란 귀국 시도가 번번이 좌절되자 가망조차 없는 왕정복고를 주장한다. 2018년 최근 이란 반정부 시위에서 일부 시위대가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귀를 주장하는 반정부 구호를 외치기도 했었다.

이란의 현 신정체제에 적대적인 미국의 일부 매파 외교관들은 이런 주장을 한다. 과거 팔레비 2세 전 국왕이 저질렀던 폭정들이 있으므로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복원시키되 1993년 왕정복고 이후의 캄보디아나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일본처럼 왕의 정치 개입을 완전히 금지하고, 레자 팔레비 왕세자를 팔레비 3세로 즉위시켜 실권 없는 상징적 군주로 삼으며, 총리가 실질 권력을 휘두르는 의원내각제 형태 입헌군주제 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왕정 폐지 이후 정권을 장악했던 론놀이나 폴포트 등이 독재와 폭정을 휘둘러 국민들이 그들을 증오하며 차라리 그리워하는 여론이 있었다. 또한 캄보디아에선 훈센, 헹삼린 등 국내 권력 실세들이나 망명 반정부 세력들 사이에서도 왕정복고 여론이 있었지만, 이란에선 이슬람 근본주의에 입각한 폭압적 통치에 반발하는 여론과는 별개로 현 이슬람 공화국 정부를 국민들이 상당히 지지한다. 또한 국민들이 옛 팔레비 왕조와 팔라비 2세 전 국왕과 그의 자녀들을 상상 이상으로 미워하거니와,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고를 지지할 만한 국내의 정치 세력이나 해외 망명단체들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실현 가능성이 낮다.[22]

게다가 이란에선 팔라비 가문뿐만 아니라 팔라비 가문이 저지른 쿠데타로 축출된 카자르 가문 역시 붕괴된 카자르 왕조의 왕위 계승권과 왕정복위를 주장한다. 그러나 카자르 왕조는 5000년 이란 역사상 최악의 국가로 평가받는다. 우선적으로 왕실에서 아제르바이잔어가 주로 통용되었고, 일부 샤들은 페르시아어를 아예 구사하지 못했다. 그리고 카자르 조의 왕공들은 성직자 계급과 결탁해 백성들을 착취하여 부패가 만연했고, 대외 무역에 실패했으며, 외세에게 연패를 거듭하여 반쯤 식민화되었고, 일부 왕자들은 고대 페르시아 군주들의 무덤을 도굴하는 반달리즘을 벌이기도 하기도 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현대 이란에서 카자르 조는 (이란 혁명과 상관없이) 매우 비난받는다.[23] 단, 이란 혁명 이후 국외로 도피, 망명 중인 팔라비 황족들에 대해 현 이란 정부에서도 귀국이나 입국 허용조차 불허하고 있는 팔라비 왕가와는 달리 카자르 구 왕가의 후예들은 이란 정부에서도 정치적 탄압을 가하지 않고 이란 국내에서도 자국 시민권자로 생활한다.

4.2.5. 독일

독일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군부를 장악한 프로이센 귀족들이 대부분 제정 복고를 지지했지만 협상국의 살기어린 눈치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고 1933년에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가 군주정 혐오자라서 끝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바이에른 왕국비텔스바흐 가문에는 호의를 사려 했는거나 개인적인 호감이 있었는지 바이에른의 왕정복고를 시도하긴 했지만 정작 왕위 후보자였던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이 반대해 무산됐다. 그리고 2차대전 이후 왕당파 귀족들이 히틀러와 협력하다 패전으로 인해 권력을 상실하면서 군주제 여론은 힘을 잃었다.

2차 대전 종전 직전까지 독일은 프로이센 왕국의 주도로 형성된 나라였던 만큼 프로이센의 힘이 절대적이었고, 이 프로이센은 농경지를 기반으로 한 융커들이 대지주, 즉 귀족으로서 실권을 쥐고 있었다. 하지만 종전 이후 독일이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즉 프로이센 왕국의 기원 중 하나인 프로이센 공국의 발상지와 주 영역을 영구히 상실하면서 융커들은 서부로 피난하거나 소련군에 살해됐고, 그나마 독일에 남은 프로이센 땅도 대부분 공산주의 동독에 있어서 융커들의 권력 기반은 철저히 끝장났다. 이후 독일은 남부 지역과 라인 강 유역 공업도시들을 중심으로 재건되면서 정체성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런데 2022년 12월 7일 로이스 공가의 하인리히 13세독일 극우세력, KSK를 비롯한 일부 독일 연방군 인사들이 왕정 복고 및 독일 제국 수립을 꾀한 쿠데타가 적발되는 사상 초유의 사건이 터졌다. 독일 연방헌법수호청독일 연방경찰, 독일 연방검찰은 이들 세력을 16,500명 규모로 보고 연방결성 이후 최대 규모의 대테러작전을 개시하며 극우 왕정복고 세력과 이들과 영합한 극단주의 세력을 일망타진 중에 있다.

4.2.6. 이탈리아

이탈리아 왕국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사보이아 왕조의 군주정을 유지할 것인지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개헌할 것인지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고 왕정 폐지 찬성 54% 왕정 유지 45%라는 결과로 왕정이 폐지되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되었다. 현재는 왕정 이탈리아 - 별과 왕관이라는 원외정당이 사보이아 왕조의 왕정복고를 주장하고 있지만 별다른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4.2.7. 러시아

현재 2012년에 창당되어 로마노프 왕조의 복고를 주장하는 러시아 군주당이라는 원외정당이 있고 러시아 자유민주당에도 당내에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세력이 일부 있다. 러시아의 군주주의도 참고. 그러나 실제 러시아에서 군주제가 복고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특히 러시아 구황실 가문인 로마노프 왕조의 후계자인 마리야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이 러시아의 적국인 독일 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의 손자 프란츠 빌헬름과 결혼했고 차기 계승권은 이들의 아들인 게오르기 대공에게 넘어갈 예정이라, 반독일 감정이 극심한 러시아 국민들이 독일 제국 황제의 직계 증손자를 러시아의 군주로 인정할 가능성은 없다시피하다. 한국으로 치면 조선 왕실의 후계자가 일본 천황가의 황족과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고, 조선 왕실의 후계자가 일본 천황의 증손자가 되는 격이다.

4.2.8. 이집트

이집트 역시 1952년 가말 압델 나세르와 무하마드 나기브가 주도하는 군부 쿠데타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국이 되었는데 2011년 아랍의 봄을 전후하여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면서 극소수이지만 나세르의 쿠데타로 축출된 무하마드 알리 왕조를 복위시켜 왕정복고를 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다만 국민들 과반수가 압도적으로 공화정 현 체제를 지지하고 있는데다 무하마드 알리 왕조 가문에 대한 이미지가 극도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왕정복고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4.2.9. 브라질

브라질은 마지막 황제인 페드루 2세가 워낙에 성군이었던 데다가 왕정을 공화정으로 대체한 이후 브라질이 독재와 부패에 시달린 나머지 왕정이 폐지된 지 100년이나 지난 1990년대에 갑자기 대대적인 군주제 복원이 주장되었다. 실제 왕정복고를 할 것인지 결정하는 국민투표까지 시행되었지만 부결되어 결국 무산되었다.

5. 관련 문서



[1] 반대인 경우도 마찬가지다.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 국가들과 유럽 입헌군주국은 공화주의를 대놓고 주장해도 정치의견의 자유, 표현의 자유로 여겨서 괜찮다. 심지어 호주는 고프 휘틀럼 총리 이후 대부분의 총리가 공화주의자이다.[2]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예시로 든 국가들은 어디까지나 무늬만 군주국인 공화제 국가들이고 만약 전제군주국인 경우라면 공화정에 대해 탄압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대표적으로 태국이나 사우디같은 경우.[3] 당연히 독재 공화국인 경우가 많다. 독재국가가 아니라도 터키나 오스트리아 같이 세속주의를 강하게 지향하는 나라 역시 활동금지 처분이나 처벌 같은 엄벌이 내려지긴 하다.[4]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공산당 독재 정권 수립, 군부 쿠데타등에 의해 왕정이 폐지당했다.[5] 파테트라오, 네팔 공산당 등 국내 좌익 반군들과의 내전에서 패망.[6] 사실 시메온 2세는 불가리아가 시장경제 전환이 실패하고, 국민들의 빈익빈 부익부는 심각했으며, 부패가 만연한 시점에서 총리로 당선되었다. 그래서 불가리아 국민들이 그를 최후의 희망으로 여겼지만, 성과는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이나 개혁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건 사실이다. 개막장 상태였던 불가리아 경제는 그가 총리 퇴임을 할 시기에 실질 GDP 성장률이 5.5%로 호전되기도 했다.[7] 후임자인 차우셰스쿠의 스케일에 가려져서 그렇지, 이 사람도 공산주의 독재자로서 잔악하기로 만만치 않았다.[8] 이유는 국가마다 다르다. 몬테네그로루마니아는 각각 세르비아소련 등 외세로 인해 왕실이 억울하게 쫓겨난 경우라 왕정복고를 지지하는 여론은 높지만,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아 왕실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당장의 복위를 승인하지 않은 상태다. 반면,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는 경제사정도 별로 좋지 못하지만 2차 대전 때 왕실이 무력하게 나치에 굴복하여 민심을 잃어버렸다. 반대급부로 대전 동안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서 반나치 파르티잔을 이끈 티토와 지프코프 같은 자국 내 공산당 세력들이 전후 국민들의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으며 정권을 공고히 했다. 그래서 사실상 왕실이 복권되다시피 한 루마니아몬테네그로와는 달리, 불가리아의 왕실 인사들은 국내 거주와 입국 허용을 허락받은 것도 감사해야 할 수준이다. 그나마 불가리아의 마지막 군주 시메온 2세는 총리를 역임했고, 옛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태자였던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는 왕궁에서 거주중이다.[9] 특히 네팔이 이웃한 대국 인도에 흡수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도 현 네팔 일대를 통합한 네팔 초대 국왕 덕이었으니 국민통합의 구심점 명분은 확실히 존재한다.[10] 다만, 국기는 1950,60년대 왕정 시절 적흑녹 3색기로 되돌렸다.[11] 리비아의 마지막 국왕인 이드리스 1세의 조카의 아들.[12] 문제는 이 망명 반후세인 인사들 대다수가 이라크 내부에 인지도도 없고 능력도 없고 오로지 수니파에 대한 증오와 권력욕에만 불타고 네오콘 비위나 맞추는데 유능했던 막장 인물들이 대다수였다는 것. 대표적인 인물이 딕 체니도널드 럼즈펠드를 구워삶는데 성공한 아흐메드 찰라비나 이야드 알라위, 누리 알 말리키 같은 인물들이었는데 이들의 사바사바로 인하여 이라크의 인적 기반이 거의 전멸해 버리고 이라크 내전이 터져 각지 곳곳에서 미군과 친미 이라크 정부에게 대항하는 저항 반란군들이 봉기하고 테러와 전투가 끊이지 않는 개판이 되어버린다. 물론 이들 저항군들은 미군과 이라크군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후세인 축출 후 권력을 장악한 다수 시아파 세력들의 수니파에 대한 보복과 억압이 지속되어 열악한 정세 상황마져 개선되지 않고 악화됐고 2011년 아랍의 봄의 여파로 이웃나라 시리아에서 내전이 일어나면서 이후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라는 최악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단체 무리들이 이라크와 시리아 내륙 전 지역을 장악하는 최악의 상황까지 벌어졌다.[13] 후세인 정권 붕괴 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전환했다.[14] 리비아는 카다피가 1969년 군부 쿠데타로 알 세누시 왕조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42년 동안 장기집권을 했었지만, 이라크는 1958년 하심 왕조를 쿠데타로 축출시키고 정권을 장악했던 압둘 카림 카심 장군의 군부 독재 정권이 1963년 바트당의 쿠데타로 무너져 카심과 그의 일파 세력들이 그 과정에서 군부 반란 세력들에 의해 총살되는 등 군부의 쿠데타에 의해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가 성립된 이후에도 거듭되는 쿠데타와 정권 전복으로 정치적 혼란이 반복되어 리비아의 전 독재자였던 카다피처럼 장기 통치를 한 군부 독재자가 없다. 그 유명한 사담 후세인조차도 군인이 아닌 민간인 출신이었는데다 독재자로서 집권한 기간이 거의 20년 남짓 밖에 안 된다.[15] 마치 조선왕조 이후에 일제강점기와 일본 식민지배에서 해방 이후에 6.25 전쟁과 반독재 민중혁명, 독재 정치 등을 거치면서 조선 왕조 시절의 구습 잔재들 대부분이 없어져버린 한국과도 비슷한 양상이다.[16] 군주제가 폐지된지 거의 사반세기 남짓 밖에 안 되는데다 군주국 시대를 경험하였던 기성세대들이 현재까지도 남아있어 모국이 군주국이었던 예전의 모습을 기억하거나, 왕정복원에 대한 목소리가 간혹 또는 공공연히 터져나오기도 하는 이란(1979)이나 아프가니스탄(1973), 리비아(1969) 등 다른 이슬람권 지역 국가들과는 달리,(당장에라도 페르세폴리스로 유명한 이란 태생의 프랑스 만화가인 마르잔 사트라피도 팔라비 왕조 시대와 이란 혁명을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인물이었다.) 이라크는 군주제가 군부 쿠데타로 폐지된지 거의 60년이 넘은데다,(1958년) 군주국 시대를 겪었던 이전 세대들이 대거 사망하거나, 사회의 주류에서 도태 되어버렸기에 군주제 시대에 대한 자국민들의 기억마져 희미해져버린 상태이다.[17] 반면 이라크의 현 원내정당인 이슬람 다와당, 이라크 공산당, 알 사이룬 연합과 이전 집권정당이었던 이라크 바트당 등은 공화제를 지지하고 있다.[18] 카를로스 1세 이래로 스페인의 황금 시대를 이끈 왕조가 합스부르크였다. 보르본 왕가로 왕관이 넘어간 계기는 카를로스 2세의 유언 때문이다.[19]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 오스트리아 공화국 정부의 압박도 한몫 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20] 이란 혁명 직후 국외로 도주한 팔라비 왕가에게 궐석재판으로 선고했던 사형판결이 아직도 이란에서 유효하다.[21] 정말로 팔라비 가문 인사들이 해외 망명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이란으로 귀국해 돌아온다고 해도 현 이란 정부가 팔라비 가문 일족들을 잡아다 사형이나 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군주국이었다가 공화정으로 바뀐 나라들의 사례들 중 왕정 폐지 후 왕조 때 저지른 과오의 책임을 물어 전 국왕이나 왕족들을 사형시키거나 죽이는 사례가 없진 않다. (예: 프랑스 루이 16세, 영국 찰스 1세, 이라크 파이살 2세, 에티오피아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등) 그러나 대부분은 한국의 조선 왕조 전주 이씨 가문이나 네팔 갸넨드라, 불가리아 시메온 2세 전 국왕처럼 왕위를 잃은 뒤에도 법적 처벌을 받거나 사형당해 목숨을 잃지 않고 일반 국민으로 멀쩡하게 자기 나라 모국에서 사는 사람들도 많다.[22] 외려 현 이란 신정체제에 반대하는 이란의 해외 망명 반정부 단체들조차도 팔라비 왕조의 왕정복위보다는 터키나 튀니지처럼 세속주의적 공화정 정부 수립을 주창하는 공화주의/좌파 세력들이 더 많다.(사실 팔라비 1세도 원래 공화정 수립을 원했으며, 그가 황제로 즉위한 것은 이슬람 신학자들과 영국의 반발로 인한 차선책이였다.) 이들 대부분은 이란 현 신정체제가 붕괴할 경우 팔레비 왕조 일가들이 철저히 배제된 공화국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세력들이 과연 팔라비 왕조 왕정복구를 지지할 리 만무하다. 결정적으로 캄보디아의 훈센 현 총리같이 왕정복구를 도와줄 만한 인물이 이란 팔레비 왕조에겐 없다.[23] 그나마 팔라비 왕조는 이란 내에서도 그때가 현 이란 정부 보다 나았다고 하소연하는 분위기라도 있지, 카자르 왕조는 그것도 없다.[24] 이쪽도 공화국의 군주주의에 해당되겠지만 이는 군주국으로의 체제 전환이 아닌 공화정 체제 하에서 국가원수(대통령 등)와 별도로 분리된 군주로 복원하는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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