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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1:57:29

무아마르 카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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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혁명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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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640><colcolor=#fefcdf>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초대 총인민회의 서기장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초대 혁명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
معمر القذافي | Muammar Gaddafi
파일:Qaddafi.webp
다른 모습 ▼
파일:DlqXk2BU0AA3ia3.jpg
30대 후반 모습[1]
이름 무아마르 무함마드 아부민야르 알카다피
مُعمّر محمد أبو منيار القذّافي
Muammar Muhammad Abu Minyar al-Gaddafi
출생 1942년 6월 7일
이탈리아령 리비아 시르테[A]
사망 2011년 10월 20일 (향년 69세)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 시르테[A] 인근
재임기간 제2대 혁명평의회 의장
1969년 9월 1일 ~ 1977년 3월 2일
제12대 총리
1970년 1월 16일 ~ 1972년 7월 16일
초대 총인민회의 서기장
1977년 3월 2일 ~ 1979년 3월 2일
초대 혁명지도자[4][5]
1979년 3월 2일 ~ 2011년 10월 20일
제7대 아프리카 연합 의장
2009년 2월 2일 ~ 2010년 1월 31일
총인민회의 서기장 (권한대행)
2011년 8월 24일 ~ 10월 20일
서명 파일:무아마르 카다피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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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640><colcolor=#fff> 신체 183cm, 80kg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6]
종교 수니파 이슬람
배우자 사피아 파르카시
학력 리비아 대학교 (졸업)
벵가지 군사학교 (졸업)
복무 리비아 왕국군
1961년 ~ 1969년
리비아 아랍 공화국군
1969년 ~ 1977년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군
1977년 ~ 2011년
최종 계급 대령 (리비아 육군)
주요 참전 제4차 중동전쟁
이집트-리비아 전쟁
리비아-차드 전쟁
제1차 라이베리아 내전
제1차 리비아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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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주요 행적3. 이름 표기4. 생애5. 평가6. 사상
6.1. 세속, 반공주의자6.2. 아랍 사회주의
7. 가족관계8. 저서9. 여담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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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카다피 군복.webp
거리에 시위대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리비아의 온 국민이 나를 사랑하니까 말이다.
리비아군인 출신 독재자.

2. 주요 행적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후 2011년 축출될 때까지 무려 42년간 리비아철권 통치했다.[7] 상당한 기간 동안 권력자로 있으면서 다양한 행적을 보였으며, 현재도 아프리카독재자라고 하면 이디 아민, 로버트 무가베 등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고 대외적으로도 많이 알려져있다.

생전에는 반미아랍 사회주의를 상징하는 정치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말년의 막장행보와는 별개로 석유국유화 행보는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는 중동에 민주주의가 정착된 나라가 별로 없었고, 또한 쿠데타 이전 기존 왕실은 서방과 결탁하였었기에 부의 분배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었으며, 미국은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행보를 보였었기 때문에 그 반작용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기존에 서방국가들이 산유국들에게 한 짓거리라고는 이스라엘을 지원하면서 현지 고위 권력층과 결탁해 자원을 값싸게 후려치는 짓 따위였으니 그에 대한 반발도 심했고, 당시 아랍사회주의 국가들 가운데서 카다피의 리비아는 독보적으로 국민소득 수준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8] 국민들의 생활수준도 석유국유화 덕으로 크게 향상되었으니 그와 함께 카다피가 높게 평가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높게 평가받았냐면 그것 역시 결코 아니었고 실상 아랍권에서도 호불호가 격렬히 갈렸던 인물이었다.

1969년, 리비아 육군 중위로 복무 중 27살의 나이로 쿠데타를 일으켜 리비아의 국가원수, 국가평의회 의장(국회의장), 총리, 국방장관 등 입법부와 행정부의 요직을 모조리 독점하며 국가 운영에 필요한 모든 권력을 혼자서 행사했다. 이후 1977년 이슬람주의, 범아랍주의를 주창함과 동시에 다시 헌법의회를 폐지하고 자칭 자마히리야[9] 체제를 선포하여 전제적 독재권력을 행사했다.[10]

과거 중동 일대에서 강경 반미 성향 지도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이 과정에서 테러 등도 서슴없이 강행하다보니 서구권으로부터 '사막의 미친개', '아랍의 망나니'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으로 불렸으나 2000년대 이후로는 미국과 관계 회복을 어느 정도 이루어내서 많이 사그라들었다. 2009년 UN 연설 때 말한 것처럼 자신을 아프리카의 왕중왕으로 자칭했다. 리비아 내의 타민족 간의 통합 및 한국 건설회사를 통한 리비아 대수로 건설[11]경제 발전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부족주의 전통이 강한 북아프리카-중동의 다른 독재자들[12]이 으레 그랬듯 해당 과정에서도 자기네 부족을 더 우대하고 친지들을 요직에 배치하며 세습제 국가를 만들려는 시도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2011년,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으로 반대세력의 저항에 직면했다. 전차와 전투기를 동원한 전면전이자 살육전으로 맞대응했으나 이로 인해 카다피 정부군과 시민군 간 내전이 촉발되었고 같은 해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의 무력 개입인 오디세이 새벽 작전으로 인해 2011년 8월 정권이 무너지면서 리비아 정국을 장악한 반카다피 시민군 세력들을 피해 이곳저곳을 피해다니는 처량한 도망자의 신세가 되었다. 2011년 10월 20일 그의 고향이자 마지막 거점인 시르테(Sirte)에서 나토군의 공습에 이은 시민군의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였다.

한국 입장에서는 1970년대 한국 기업들이 석유붐을 타고 중동에 진출하기 시작했을 때 카다피 정권의 리비아도 한국기업들에게 '대수로 공사' 등을 발주했고, 그 때문에 한국기업이 70년대에 이미 리비아에 진출했다. 덕분에 중동 건설 붐이 일때 한국 언론에도 종종 등장하여 그때부터 한국에서도 인지도가 있었다.

3. 이름 표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c642f3123a34a2b7372d0ff0a9e57c4.png

아랍어라틴 문자로 옮겨쓰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고, 또 아랍어권 국가·지역마다 발음이 똑같은 게 아니라서 그의 이름을 'Gaddafi', 'Kaddafi', 'Qadhafi' 등으로 통일되지 않게 표기하고 있다. 위 그림에서와 같이 무려 34,560가지의 서로 다른 표기가 가능하다.

먼저 카다피의 이름인 مُعَمَّرْ اَلْقَذَّافِيّ(Muʿammar al-Qaḏḏāfī)의 현대 표준 아랍어 발음은 [muˈʕamːar alqaˈðːaːfi](무암마르 알카다피)이다. 다만 이름인 Muʿammar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같은 자음이 겹칠 때 겹쳐 적지 않는 경향 때문에[13] 관용적으로 무아마르라고 표기한다. 성인 Qaḏḏāfī의 경우 리비아 아랍어에서는 [ɡəˈðːaːfiː](동부) 혹은 [ɡəˈdːaːfiː](서부)처럼 q를 /ɡ/로 발음하기 때문에 '가다피'란 표기 역시 근거가 없는 표기는 아니다.

실제 사용례를 보면, 트리폴리 남부 바브알아지지야(باب العزيزية)에서 발견된 카다피의 여권과 녹색서에서는 'M. Al Gathafi'로 적혀 있었으며, 한국의 경우 2003년 12월 55차 외래어 심의회에서 국립국어원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Muammar al Qaddafi)'로 규정했다. 해외에서는 Gaddafi로 명칭이 암묵적으로 통일된 듯 하다.

영문 표기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설명하면 원래 언론의 경우 뉴스통신사가 있어 모든 분야를 커버하고, 신문사나 잡지, 방송사 등에서 통신사와 계약하고 그 기사들을 쓴다. 그런만큼 통신사들의 글 스타일은 다른 언론사들의 기준이 되는데, 통신사들 중에서도 카다피의 스펠링은 거의 다 다르다. 예를 들어 미국의 AP는 Gadhafi, 영국의 Reuters는 Gaddafi, 프랑스의 AFP는 Kadhafi로 아직까지 사용하고 있다. 보통 AP가 가장 넓은 분야를 커버하고 대중적인 미국 영어를 쓰기에 많은 영어권 언론사들이 AP스타일을 따른다.[14] 이 경우 영어권 언론에서 스펠링이 가장 간단한 Gaddafi가 대중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4.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무아마르 카다피/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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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평가

27세라는 어린 나이로 집권하여 42년 동안 장기집권하면서 리비아라는 후진국을 중견국으로 성장시킨 유능한 지도자라는 평가와, 강압적 통치로 국민들을 탄압하고 기행과 부정부패로 나라를 혼란에 빠트린 독재자라는 평가가 공존하며, 리비아 내에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전세계로 범위를 넓혀봐도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전 세계 독재자들 중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독재자라고 하면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새뮤얼 케니언 도와 함께 가장 우선적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쿠데타를 통해 27세에 국가 최고지도자에 오른 카다피는 석유 기업들을 국영화한 뒤 오일머니를 이용해 국민들을 위한 복지 제도를 도입했다. 리비아 곳곳에 도로, 학교, 병원 등을 지었고, 노동자의 최저임금도 인상했다. 국민의 문맹률을 낮추기 위한 교육 사업에 주력해 리비아 국민 문맹률을 90%에서 10%대로 낮추었다. 당시 400만 명이 조금 넘는 리비아 총 인구 가운데 140만 명이나 무상으로 대학 교육까지 받게 했으며 여성을 문교장관과 문공차관으로 임명하는 사회적 개혁 정치를 성공적으로 시행했다. 제3의 진로이론이라는 리비아식 사회주의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계급철폐론을 외치는 마르크스식 사회주의와는 달리 계급의 차이를 인정하되 그 격차를 줄여나가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중간쯤에 위치한 이론이었다. 물론 카다피 일가가 리비아 재정을 삥땅치고 상당히 사치스러운 생활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중동의 왕가들과 독재자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15] 또한 이슬람주의식 정책을 펼치기는 했지만 나세르주의의 영향 또한 받았기 때문에 이슬람권이면서도 남녀공학이 실시되었으며, 무상교육뿐만 아니라 학용품, 식비까지 모두 무료인데다가 해외유학비도 국가에서 지원할 정도였다. 이러한 혜택은 저유가와 경제 제재로 재정이 나빠졌던 90년대에도 지속되었기 때문에 당시 리비아는 극심한 빈부격차에 시달리는 타 아프리카 국가와는 빈부격차 문제는 덜했고 생활수준은 아프리카에서 1위를 기록했다.

카다피는 농업부문에 있어 자급자족 수준으로 끌어올림과 동시에 노동인구 20%를 차지하던 농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농업발전 계획을 수립했다. 그는 농민들이 자력으로 경작할 수 있는 만큼의 땅을 배분하여 모든 농부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도록 했고, 만약에 한 사림이 자기 개인적 소유를 위하여 농장을 건설하기 원한다면 그렇게 할 자격을 부여했다. 1970년부터 시행된 카다피의 계획으로 관개용지, 목초지 개발, 대수로 공사, 현대적 영농기법 개발을 포함하여 전체 개발예산의 1/6이 농업 개발에 투자됐다. 이러한 생산량은 향상되었고, 1970년 2만 7000톤이었던 밀 생산이 1983년에는 21만 3000톤에 이르렀다. 그 사이 채소 생산은 10.8%가 증가했고, 보리와 과일, 채소, 육류, 계란, 우유 등의 수요 또한 증가했다. 1969년을 시작으로 카다피의 리비아는 산업다각화를 통해 경제 성장을 촉진했으며, 여기서 카다피는 공업부문에서의 노동착취를 종결시키고, 노동자를 생산순환 구조에서 파트너로 간주하는 새로운 협력관계를 확립했다. 1981~85년의 5개년 개발 계획 동안 리비아는 산업 생산의 연간 22.6%의 성장률과 산업생산품 수출의 연간 2.4% 증가 그리고 석유산업 분야 노동자 수 연간 11% 증가를 보여줬다. 이러한 카다피의 사회주의 정책은 전제군주 시대보다 리비아 사람들의 경제적인 몫을 향상시켜 보다 잘 살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또한 장래 석유 같은 지하자원이 고갈될 때를 대비하고자 오일머니로 사막을 가로지르는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실시, 리비아에 농업을 확충하여 농업국으로 발돋움하려고 했다. 이 공사의 1단계는 한국이 수주했으며, 이 공사를 위해 리비아와 한국과 직항편이 설치될 정도였다. 북아프리카 지역은 로마 시대까지 곡창지대였다. 실제로 북아프리카는 기후가 변해 사막이 되어버려서 그렇지 토질은 여전히 좋은 편이기 때문에 관개만 제대로 된다면 농업이 충분히 가능하다. 즉, 카다피가 마냥 공상적인 계획을 들고 나온 게 아니라는 소리.[16] 최원석동아그룹 회장에 의하면 당시 리비아의 정치가들은 "대수로 공사를 할 돈이면 리비아 국민들이 1년 내내 먹고 살 수 있다"며 반대했지만, 카다피는 "대수로 공사만이 식량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며 대수로 공사를 추진하였다고 한다. 카다피는 최원석 전 회장을 만날 때마다 리비아인을 대규모로 고용해달라는 요구를 하였고, 최 회장은 자국민의 일자리를 신경쓰는 카다피의 모습을 보며 왜 그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지 짐작하였다고 한다.[17] 천만명의 인력과 오백만대 분량의 중장비가 동원된 대공사 끝에 한국의 동아건설은 성공적으로 대수로 공사를 완공하였고 리비아는 한반도 면적의 8배 이상의 땅을 농지로 얻게 되었다. 대수로 공사의 통수식 날 메마른 사막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신기한 광경에 리비아 국민들은 열광하였고 카다피는 이처럼 성공적인 대수로 공사를 세계 8대 불가사의라며 자랑하기도 하였다.

반미를 내세우면서 범아랍주의를 내세웠고 아프리카의 통합을 주창했다. 1980년대 초반, 서방국가들이 ANC를 이끌던 넬슨 만델라를 테러리스트라며 외면할 때 만델라를 지원하기도 했고. 카다피의 지원은 ANC가 백인정부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우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만델라는 항상 이에 대해 카다피에 고마움을 표해왔고, 남아공 대통령이 된 후 서방국가들과 리비아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을 정도였다.

우간다에 3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모스크를 건립했고, 우간다의 여러 기업들에 4천억원 가량을 투자하여 경제활성화에 일조하였다. 돈이 없어 정부청사조차 짓지 못하던 가난한 나라 말리는 카다피의 지원에 힘입어 국영tv 방송국과 정부청사를 지을 수 있었는데, 말리는 카다피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정부청사의 건물이름을 '카다피 행정동'이라 지었다.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을 목격한 후엔 서방과 화해하는 것만이 리비아가 살 길이라 생각하여 대량살상무기의 폐기를 선언한다. 그로인해 유엔과 미국이 리비아에 내린 경제제재의 해제를 이끌어내었고, 자국경제를 해외에 개방하여 해외투자를 적극 유치하였다.

1979년엔 최고지도자의 신분임에도 리비아 우조비행장 건설공사 현장에 나타나 그곳에 텐트를 치고 14일간 머물며 한국기업의 건설현장을 살펴보기도 하였다. 카다피는 한밤중에도 불을 켜고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열의와 근면함에 찬사를 보냈고, 공사에 불편함이 없도록 적극 지원하였다.

같은 반미국가였던 김일성과의 관계는 독특한데 이집트의 무바라크와 다르게 카다피더러 전두환이 파견한 한국 노동자들을 내쫓으라고 요구했지만 카다피는 '한국 노동자 싫으면 너부터 나가면 되잖아.' 라고 냉담하게 반응했다.[18]

한국과 리비아는 이념과 체제는 달랐지만, 카다피의 한국기업 밀어주기 덕분에 한국과 리비아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최필립 당시 리비아 대사의 증언에 의하면 카다피는 한국업체들에게 특혜를 베풀었고, 공사대금도 한 번의 차질 없이 정확히 지불하였다고 한다. 덕분에 한국업체들은 편하게 리비아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집권 후반기인 2000년대 중반부터 시작한 학생 대상 노트북 전면 배급과 실각 이후 중단된 구형 노트북 교체 사업, 인터넷 통신 대부분 무료화 실시는 서방에 파격적인 영향을 주었다.

2000년 8월 필리핀의 이슬람 반군에 납치당한 서양인 인질 여섯명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국제사회의 찬사를 받은 바 있다.# 카다피는 반군측에 인질 1명당 1백만달러의 몸값을 지불하겠다고 합의하여 인질들을 풀려나게 하였는데, 풀려난 인질들의 모국인 독일과 프랑스 정부는 카다피에게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2004년에는 2차례에 걸쳐 북한에 특사를 파견하여 핵을 포기하도록 설득하였으며, 2006년에는 한명숙 총리의 요청을 받고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중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카다피는 북한에게 "국민들의 고통을 막기 위해선 핵을 포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2010년 6월 한국의 국정원 요원이 리비아의 국가원수 및 가족, 정부요인, 무기 보유 현황에 대한 첩보활동을 벌이다 들켜 추방된 사건이 있었다. 이로인해 한국과 리비아는 단교직전까지 갔으나 특사로 파견된 이상득 국회의원과 접견한 후 카다피는 해당사건을 종료시키고 양국간 외교관계를 원상복귀시켰다.

사실 카다피 개인은 독재자이고 지탄받아 마땅한 인물일지 모르나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보았을 때 한국은 카다피 정권 시절 리비아에게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당시 리비아는 한국의 건설업체 해외수주 규모 3위에 해당되는 교역상대국이었다. 카다피는 이상득 특사와의 면담에서 "한국은 리비아를 통해 막대한 이득을 챙겼음에도 교과서나 언론에서 나를 왜 그렇게 비하하느냐?"며 서운함을 표시하기도 하였다.

카다피가 실각하고 피살된 후 리비아는 정파 세력들간의 갈등과 내분으로 수많은 극단주의 단체가 난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같은 지속된 정치·경제 혼란으로 지친 리비아 국민들 사이에선 "카다피 시절이 더 좋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리비아인들의 인터뷰에 의하면 카다피 통치 하에 죽었던 사람보다 카다피가 실각한후 들이닥친 리비아의 혼란기에 죽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한다. 물론 카다피의 통치때도 문제가 많았지만 최소한 일상생활을 위협하는 문제들은 없었다고 한다. 카다피 통치기인 2010년 리비아의 GDP는 1만1417달러로 어지간한 중진국 수준이었지만 카다피 실각한 후인 2020년에는 3282달러로 3분의 1 이하로 급감했다.# 혁명 이전에는 단 한명의 카다피가 있었지만, 리비아 혁명 후엔 수백만명의 카다피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며, 지역이나 마을 단위로 쪼개져 내전을 벌이는 리비아의 현실에 대한 개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심지어 리비아 혁명에 첫날부터 참여한 청년조차도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며 죽은 카다피의 열렬한 팬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오프라인 뿐만이 아니라 온라인에서도 해외에 나가있는 리비아인들을 중심으로 카다피에 대한 향수가 불고 있다. 유튜브에 카다피 관련 영상의 반응만 해도 당시의 혁명을 후회한다거나 카다피를 그리워하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이런 목소리를 등에 업고 카다피의 둘째 아들인 사이프 알이슬람이 정계복귀를 노리고 있다.#

한편 카다피 축출 이후 혼란에 빠진 현 리비아 정국에 개탄하고 있는 몇몇의 리비아인들은 그렇다고 예전의 카다피 시절로 역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카다피 정권으로부터 숙청, 탄압당한 경력이 있었고, 최근 리비아 내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리비아 국민군(LNA)의 칼리파 하프타르(Khalifa Haftar) 최고 사령관을 지지하기도 한다. 다만 서방과 아랍권의 외교계 일각에서는 하프타르 역시 카다피와 별 반 다를 것 없는 독재자가 될 것이라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28세에 정권을 장악하여 장기집권을 펼쳤던 카다피와 다르게 하프타르는 이미 70대 고령이라서 리비아의 내전 상황을 종식시키고 리비아의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카다피처럼 종신 독재자가 되지 못 하고, 대신 과도 정부에 가까운 통치를 펼치다 다른 LNA 인사들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줄 것이라는 예상도 있다.[19]

이외에도 자신은 아랍인이었지만, 흑인 민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80년대 넬슨 만델라아프리카 국민회의가 서방에서 테러리스트와 테러조직으로 몰릴때 유일하게 지원한 국가가 리비아였으며, 로디지아의 반정부 무장세력 또한 지원하였다. 또한 아프리카 정상이 모인 자리에서 아랍의 노예무역에 대해 직접 사과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나토의 리비아 공습에 대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극렬히 반대했고, 특히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리비아 혁명 당시 망명을 제안하기도 했고, 현재도 카다피의 비자금을 숨겨주고 있다. 미국 흑인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미국 흑인의 이중국적 취득에 큰 도움이 되었고, 흑표당을 지원하기도 하는 등 미국 흑인 민권 운동에도 깊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미국 흑인 래퍼의 적지 않은 수가 나토의 리비아 공습을 비난했다. 특히 Run The Jewels의 래퍼 킬러 마이크(Killer Mike)[20]는 대놓고 레이건과 이후 대통령들을 비판하는 노래로 카다피를 지지했다. 카다피에게 직접 밟힌 리비아의 래퍼들은 전혀 아니었지만.#[21]

물론 독재정권이긴 했지만 카다피 통치 하의 리비아가 일방적인 독재국가였다고만 이야기하기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자세한 부분은 자마히리야 항목 참조. 사회주의자답게 카다피는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를 보였고 그 결과 의외로 발전된 선거제도와 지방자치제도가 자리잡았다. 자미히리야(인민의회) 의원 중에서도 상당수가 여성과 소수민족이었던 만큼 지역간 갈등 완화나 소수자 인권 보호에도 꽤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마히리야가 어느정도 공정성을 보였는가 하면 기초 인민 회의에서도 전직 고위 관료가 일반 국민에게 밀려 낙선하는 경우가 허다했을 정도. 이는 미국 등 1세계 국가들에서도 인정하는 사실이며 서방과 리비아가 관계를 개선하던 당시 조명되기도 했다. 어찌보면 직접민주주의의 장단점이 함께 드러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었다. 독재정권이라기엔 꽤나 민주적인 모습을 갖추었지만, 중심축이 무너지자 삽시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테러 이야기가 나오면 이야기가 살짝 달라진다. 카다피는 테러는 약자가 강자에게 저항하는 수단이라는 자신의 사상에 기초하여 좌우를 막론하고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한 전 세계의 테러리스트를 후원했는데, 좌익이든 우익이든 중립국이든 민족주의 조직이든 이슬람 극단주의든 사상 없는 도적떼든 간에 가리지 않고 무조건 지원하거나 선제공격하여 세계 각지의 분쟁들을 심화시킨 것으로 악명 높았다. 카다피는 테러를 자신의 권력 수단 및 국가적인 권위를 높이는 수단으로 적극 이용하였고 캐나다에서부터 영국, 이집트, 이스라엘, 인도네시아를 거쳐 필리핀을 찍고 누벨칼레도니에 이르기까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세계 각지의 테러리스트 단체와 무장단체, 반군들을 지원하는 한편 리비아 항공이나 리비아 정보부 등 자국 권력을 이용해 UTA 772편 폭파 사건팬 아메리칸 항공 103편 폭파 사건같은 직접 테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래서 카다피가 사망했을 때 이들 테러 사건의 피해자 유족들은 카다피의 죽음을 천벌이라며 축하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제 테러 면에서 카다피는 자신의 사상 설파와는 반대로 소위 '제국주의적 행보'를 일으키는 서구 권력층 중심 인물들 대신 불특정 다수 민간인을 더 많이 노리는 비열한 모습을 보였고 정작 자신 역시 석유패권에 눈이 멀어 한 때 혁명 동지였던 이집트테러를 하고 국경에서 시비를 걸었다가 깨지거나, 리비아 외교관들이 런던 한복판에서 망명자들을 향해 총기난사를 벌인 끝에 애꿎은 영국 경찰 한 명을 죽이거나, 서독 나이트클럽을 폭파시켜 참다 못한 미국에게 리비아 공습을 당하거나[22], 찰스 테일러혁명연합전선을 선동하여 시에라리온 내전라이베리아 내전을 부추겼고, 자국보다도 한참 약한 차드를 상대로 리비아-차드 전쟁을 벌였다가 또 된통 깨지는 등 예상만큼 테러로 세계에 큰 설득력을 주진 못했다. 심지어는 자국과 별 관계도 없는 뉴질랜드마오리족 사람들을 선동하려다 실패로 돌아가거나 호주에서 외교관들이 뇌물 공세를 하다가 걸려 쫓겨나고 외교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다. 장 베델 보카사[23] 같은 누가 봐도 제 정신이 아닌 자를 지원하기도 했고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인종 학살을 지지하여[24] 이슬람 국가들에게 원성을 샀다. 또한 테러 정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적이라고 선포한 동구권이나 프랑스 등과 얼마든지 손을 잡았다가 모른체 하고를 반복하여 불신을 자초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카다피는 80년대 내내 온갖 국가들에게 단단히 찍혀 있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서방, 이집트 등 이슬람권과의 관계 개선을 겸해서 테러 노선을 사실상 포기하게 되었다. 상술한 영국 경찰 살해 사건에 대한 보상이나 로커비 테러 용의자들을 넘겨준 것 역시 이 때 이루어진 것이다. 서방 국가들과 이집트는 이에 대한 보상으로 리비아와의 외교 관계를 다시 복원해주었고, 넬슨 만델라코피 아난 등이 서방, 이집트와 리비아의 화해를 도왔다. 물론 겉으로는 그랬다는 거고 속으로는 다시 PKK, FARC, 자유 파푸아 운동과 오마르 알바시르, 무사 다디스 카마라 등을 물밑에서 안 들키게 지원했다.

어찌됐던 카다피의 이런 태도 덕분에 진영논리에 의해 영국, 캐나다, 이스라엘, 프랑스, 인도네시아 등 마음에 안 들었던 친서방 반공진영에 엿을 먹이겠다는 일념 하나로 IRAPFLP, ETA, PLO,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 페루투팍 아마루 혁명 운동, ANC민족의 창, 남 말루쿠 공화국 망명 정부, 자유 파푸아 운동, 자유 아체 운동, 혁명연합전선, 찰스 테일러의 사병 세력인 NPFL, 필리핀 신인민군, 필리핀 공산당, 빛나는 길, 후티,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 프랑스 극좌단체 악시옹 디렉테, 붉은 여단, PKK, FARC,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 전선, 바더 마인호프, 오스트리아네오나치투아레그 반군 등 세계 각지의 수많은 단체들이 생각지도 못한 지원을 얻었고 FRETILIN이나 자유 카낙 인민해방전선, 남서아프리카 인민기구, 투파마로스, 폴리사리오 전선, 흑표당 등 여타 흑인 민권 운동 단체들처럼 딱히 테러 단체도 아닌 세력까지 진영논리의 수혜를 받아 얼떨결에 도움을 받기도 했다. 자국의 반대파들을 향한 테러 역시 성행했으며 반카다피 인사들은 카다피의 시절을 이웃 나라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집권기를 일컫는 '적색 테러'와 카다피의 대표적인 저서 녹색서를 합쳐 녹색 테러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카다피의 테러 노선은 이웃 수단 공화국오마르 알바시르가 그대로 배워서 써먹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된 2000년대 즈음에 박수칠 때 떠났다면 이 꼴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25][26] 다만 그랬다 해도 카다피가 완전히 무사했으리라고 보장할 순 없는데, 카다피가 지명한 후임자가 카다피보다 못하다면 결국에 카다피에게도 화살이 날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독재의 단점이 지도자 일인에게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해당 지도자가 아니면 정권교체만으로 국가체제 자체가 바로 흔들려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카다피의 리비아 역시 마찬가지였다.[27] 부탄의 국왕처럼 아예 지도자부터가 "내 권력 내려놓더라도 민주주의 반드시 도입하겠다" 수준으로 소위 '자원봉사'를 하는게 아닌 이상은 독재자에게만 맞춰진 국가체계로 계속 가다가 결국 독재자 유고시 혼란기에 들어서는 과정이 빠질 수가 없다.[28] 상기한 부탄 국왕부터가 "스스로 권력을 내려놓은 절대지도자"인, 세계사에 손꼽힐 정도로 극히 예외 중에서도 예외일 뿐이었으니 다른 독재자들은 안봐도 뻔할 것이다.

6.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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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세속, 반공주의자

카다피는 미국으로 대변되는 기독교 세력을 적으로 규정하고 이에 저항하며, 이슬람 세계가 결집해야 한다는 범아랍주의, 범이슬람주의를 내세웠으나 정작 본인은 세속주의자를 자처했다. 종교를 배척하는 사회주의를 추종한 것도 이와도 연관성이 있다. 대체로 자신이 독점한 전제적 권력을 유지하고 종교 지도자들을 배척하려는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세속주의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세속주의자이지만, 바트당이나 터키 케말 아타튀르크, 다른 북아프리카의 국가들인 튀니지모로코, 알제리마그레브 3개국[29] 같은 이슬람권 나라들의 세속주의는 아니었다. 같은 이슬람권의 세속주의라도 카다피가 영향을 받은 나세르주의는 세속주의치고는 이슬람 색채를 강하게 띤다. 아예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정치로 술 판매도 금지했을 정도였다. 말하자면 현재 인도와 인도네시아, 미국,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가 정교분리/세속주의 국가를 표방하고 있지만, 국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개신교도, 카톨릭교도들의 비율 때문에 사회적으로 힌두교 중심주의, 이슬람 중심주의, 개신교 중심주의, 가톨릭 중심주의를 띠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다피 정권 시기의 리비아는 이란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쿠웨이트, 오만 등과는 달리 이맘 등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과 이슬람 법계인 샤리아가 철저히 정치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며.[30] 카다피 시절 리비아는 국교조차 없었다.

카다피는 이슬람 극단주의와는 은근히 상성이 맞지 않았던 인물이라, 자신에게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경우가 아니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지원은 거의 하지 않았다.
우리는 공산주의, 무신론을 말하는 병자들, 서방 국가들을 선전하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모든 병자들을 숙청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감옥에 가둘 것이다.
1973년 문화혁명(Cultural Revolution) 중
우리는 물질주의적 자본주의와 무신론적 공산주의를 모두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새로운 길이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그것을 제3국제이론이라고 부른다. 바르샤바나토의 위험한 대결을 혐오하는 전 세계인의 길이다. 신의 통치 아래 세계 만민이 형제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의 저서 녹색서 중 일부.
반미의 선봉장이었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인물이었던지라 카다피가 공산주의에도 호의적이었을거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는 앞서 언급했듯이 일단은 이슬람교 신자였으며 따라서 무신론을 기조로 하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일 리는 없었다. 카다피 시기의 리비아가 제2세계의 일원이 아니었던 것도 그가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도 적대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31].

외교적으로 그는 1971년 인도-파키스탄 전쟁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인도에 대항해 파키스탄의 손을 들어주었으나, 1974년 오일 쇼크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경기 침체가 닥친 이후 자본주의적 정책들을 철회하고 국유화 정책을 강화하는 한편 소련과 가까워지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적극적 국유화정책과 친소정책은 당시 인디라 간디가 집권하던 인도 등 비공산주의 비동맹 국가에서도 흔히 보이던 일들이라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실제로 1945년 창당되었다가 리비아 왕국 정부에 의해 1952년 금지된 리비아 공산당은 1969년 카다피의 집권 이후에도 부활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탄압은 계속되었다. 1971년 그는 가파르 니메이리에 의해 추방된 친소파 수단 공산주의자들의 입국을 금지했고 다시 돌려보냈으며 1973년 정권은 카다피의 집권 4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공산주의에 대한 거룩한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요즘 인간이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공산주의 이론"이라는 공식 문서를 발표했다. 카다피가 주도한 문화혁명(Cultural Revolution)공산주의, 바트주의, 파시즘, 보수주의, 무신론, 무슬림 형제단, 자본주의에 대한 탄압을 목적으로 했다.#

또한 카다피 정권 하에서 독립적인 노조는 금지되었으며 파업 역시 금지되었고, 국가가 통제하는 관제 노조만이 허용되었다. 1975년 작성된 그의 저서 녹색서에서는 공산주의의 기본 이론인 계급투쟁을 사회를 발전시키는 열쇠로 보기보다는 계급투쟁을 위험한 일탈로 보는 '이슬람식 버전'의 사회주의를 제시했다.

단 외교적으로는 꾸준히 공산권과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특히 해외 테러 노선을 지향할 때 소련, 동독,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등 구 공산권 유럽 국가들의 지원을 많이 받았고 PFLP, 바더 마인호프, 붉은 여단같은 극좌 적색테러 조직들도 많이 지원했다. 단 이는 어디까지나 반미 정책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손을 빌린 것이였지 카다피 본인이 공산주의자라서는 아니었다.

6.2. 아랍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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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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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살아남은 인물들 대부분은 오만으로 망명한 상태이다.

8. 저서

9.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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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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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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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흔히 알려진 60대의 늙은 카다피의 얼굴을 생각하면 정말 의외이지만, 젊었을 적 카다피의 외모는 꽤나 준수한 편이었다. 다만 40대부터 급격히 노화가 진행되어 굉장히 못생겨지게 되었다.[A]리비아 시르테 주 시르테[A] [4] 정식 명칭은 '대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의 혁명의 형제애적인 지도자이자 안내자(Brotherly Leader and Guide of the Revolution of the Great Socialist People's Libyan Arab Jamahiriya)'. 보통 그냥 '지도자'라고 호칭했다. 카다피 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직함이며 축출될 때까지 해당 직함을 유지했다. 이는 2009년 래리 킹이 카다피와 한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 카다피는 '국가'를 지도하는 것과 '혁명'을 지도하는 것을 구분해서 봤으며, 리비아는 자신의 '혁명' 아래 세워진 '국가' 이므로 그 국가가 존속하는 한 혁명은 지속되며, 본인은 그 '국가'가 아닌 '혁명' 그 자체만을 지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직책 이름이 '혁명지도자' 인 것이다.[5] 간혹 카다피의 호칭을 잘 모르는 사람들, 특히 국가원수=대통령인 한국을 비롯한 나라들에서 카다피를 '리비아 대통령'으로 호칭하는 사례가 있다. 국내 제도권 언론과 나무위키 등에도 그런 사례가 가끔 보이나, 카다피는 혁명지도자를 제외하면 집권 초기 잠시 총리와 혁명평의회 의장, 총인민회의 서기장을 역임한 것이 전부이며 단 한 순간도 '대통령'이었던 적은 없다.[6] 실질적으로는 리비아군 소속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하였다.[7] 사망 당시 시점에서는 피델 카스트로, 장제스, 김일성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오래 집권한 독재자였으며, 2023년 기준으로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바소고에 밀리긴 해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오래 집권한 독재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8] 비슷한 시기의 아랍사회주의 국가들을 본다면 이라크가 리비아처럼 석유로 인해 득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1인당 국민소득은 리비아의 반도 안되는 4,000달러 언저리 이내였고, 알제리가 2,100달러대였다, 시리아나 이집트, 북예멘, 남예멘 등은 당시에도 잘 살지 않았는데 시리아는 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이집트는 산업화에 실패해서 500달러대에 머물렀고, 북예멘 남예멘은 막대한 석유자원에도 국가발전에 처절하게 실패해서 1인당 국민소득이 당대기준으로도 하위권이었다.[9] 인민 공동체, 인민권력이라는 뜻.[10] 이로 인해 카다피 정권 시기 리비아의 정치체제는 대통령제를 택했던 주변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차이가 컸다. 밑의 생애 문서 참조.[11] 그 건설회사 중 하나가 동아건설인데, 이놈들은 나중에 부실공사로 한강 다리가 붕괴되게 만든다. 동아건설의 모기업인 동아그룹1997년 외환 위기 때 부도가 나서 해체되었다. 그 동아그룹의 계열사 중에는 한 택배회사가 있었다. 참고로 전성기인 1984년에는 2만 명의 인부가 건설에 참여해 무려 37억 달러, 당시 GDP의 3%를 따내기도 했다. 77년부터 한국이 따낸 건설 수주만 총 366억 달러로 지금 GDP로도 넉넉히 1/7이 되고 1984년 GDP로는 30%나 된다. 동아그룹최원석 회장,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과도 친했다. 최 회장은 카다피를 카 선생이라고 불렀고 카다피는 그와 만난 자리에서 서투르지만 한국어로 헤잔님(회장님)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 정부는 좀 배은망덕이란 드립이 나올 수도 있다.[12] 아사드, 후세인, 벤알리, 무바라크, 살레 등등. 다만 벤알리가 집권했던 튀니지와 무바라크가 집권했던 이집트의 경우 아랍권에서도 부족주의가 약하다.[13] 외래어 표기법의 기타 언어의 표기 일반 원칙에 따르면 발음상 같은 자음이 겹치더라도 겹쳐 적지 않지만, mm, nn은 예외이므로 '무암마르'가 원칙상 맞는다. 그러나 우리에게 친숙한 영어, 독일어 등 많은 언어에서 mm, nn과 m, n의 발음 차이가 없기 때문에 관용적 표기에선 mm, nn도 m, n과 구분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14] 위에 언급된 연합뉴스의 영문판이 AP스타일을 그대로 따라하며, 한국의 영어언론들은 대부분 연합뉴스-AP스타일을 따라간다.[15] 다른 나라들은 똑같이 복지제도를 시행한답시고 국가의 재정을 삥땅치며 국가의 기반을 무너뜨릴정도로 사치를 일삼았기도 했다.[16] 미국 캘리포니아주나 뉴멕시코 주, 애리조나 주, 멕시코 바하 칼리포르니아 반도, 칠레 아타카마, 이스라엘 네게브, 오스트레일리아 대찬정 지대와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같은 지역들도 원래는 황량한 사막이었지만 지금은 지하수 자원 확보와 수로 건설, 바닷물 담수화를 통해 물을 끌어다가 농업이나 목축이 가능한 농업지대가 되어서 식량 자급자족은 물론 수출까지 한다.[17] 그러나 리비아인들은 한국인들만큼 열심히 일을 안해서 카다피의 요구만큼 채용하진 않았다고 한다.[18] 북한이 냉전시대때 사고를 치는 행동을 보였으니 카다피 입장에선 좋게 볼리가 없었다.[19] 하지만 리비아 현지에서는 하프타르가 이끄는 리비아 국민군(LNA)의 군인과 민병대들이 반대자들을 겨냥한 대규모 학살과 참수를 자행한다는 현지인들의 증언도 있어 만약 하프타르나 혹은 하프타르 휘하의 LNA 고위 인사가 리비아의 지도자가 되거나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면 이전의 카다피보다 더 잔인한 강압적 통치를 견지할 가능성도 아주 높다.[20] 당시에는 RTJ가 아니었지만[21] 실제로 카다피가 흑인 용병을 고용했다는 소문이 돌자 리비아 내 흑인들이 집단린치를 받기도 했다.[22] 이 사건은 탑건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23]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디 아민조차 거른 인간이다.[24] 당시 밀로셰비치의 영향을 받은 세르비아 군벌들은 세력이 제일 약한 보슈냐크인들을 타겟으로 잡아 인종청소를 진행중이었다. 그리고 이 보슈냐크인들은 대다수가 무슬림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학살에 경악한 사우디아라비아 등지의 일부 무슬림들이 탄압받은 무슬림 형제들을 도와야 한다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그랬듯 무자헤딘을 결성하여 참전하기도 했다.[25] 아마 박정희 이상으로 명암이 뚜렷한 지도자로 평가받았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하지만 말년에 자신의 업적들을 모두 초기화시키면서 이조차 무의미한 가정이 되었다.[26] 이러한 면에서는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셰이크 하시나와도 유사하다.[27] 심지어 이런 체계는 독재자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반드시 만들어진다. 애초에 독재자 일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데, 그게 수십 년동안 이어지면 그런 방식으로 국가체제가 개편되는게 당연하다. 국가가 아니라 훨씬 작은 민간 기업마저도 구성원 하나가 능력자여서 "그 사람 나가면 회사 망해", "그 사람 없으면 이 부서가 안돌아가" 같은 상황이 연출되는데, 독재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28] 당장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후 10년 후 유고슬라비아내전에 빠지고 6~7개의 소국으로 분할된 걸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29] 이 국가들은 이슬람 종교권이면서 돼지고기 판매도 가능했고 맥주나 와인 같은 술도 만들거나 판매하는 나라들이다. 물론 이들 나라들은 관광업을 통한 외화벌이가 주산업인 것도 있긴 하지만...[30] 리비아에서 샤리아 등 이슬람 법계가 국법으로 지정된 건 카다피 정권 몰락 이후부터였다. 하지만 동성애에 대한 태도는 다른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다르지 않았고 아예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처럼 동성애자들에 한해서 샤리아를 적용시켜 사형시켰다. 사실 동성애에 대한 탄압은 자본주의, 사회주의, 기독교, 이슬람교 등 이념과 종교에 관계없이 존재해 왔던 것이 현실이다.[31] 애초에 사회주의자라고 해서 무조건 공산주의자거나 공산주의에 우호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편견이다. 좌파 사상 간의 내부총질은 그 역사가 매우 유구하다. 일례로, 2024년 현재 사회주의 사상 중에서는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내놓았던 사회민주주의만해도 19세기에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좌파 사상가들이 규합하면서 생겨난 사상이었고, 이 사회민주주의가 서유럽에서 정치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게 된 후에는 서유럽 국가들 대부분이 오히려 더 철저하게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 국가들에게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32] 친모 파티하 알-누리[33] 이 점은 시리아의 바샤르 알 아사드랑 비슷하다.[34] 사실 카다피도 축구광으로 알아줬다. 유벤투스를 완전 인수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다. 그래도 2011년까지 무려 30%의 유벤투스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이탈리아 프로축구계에 뭘 던져주었는지는 몰라도 유벤투스가 참가한 2002년 이탈리아 슈퍼컵 경기가 리비아 트리폴리에서 열리기도 했다.[35] 당시 나이는 30살[36] 실제로 당시 리비아는 AU 내에서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서 카다피가 의장이 되기 전까지 본회의에 단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37] 새뮤얼 케니언 도도 카다피보다 나이가 많은 만 28세에야 (육군 상사 신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다.[38] 이와 비슷하게 대한민국의 군사독재자들인 박정희/전두환도 44세(빌 클린턴보다 2살 어린 나이에 집권했다)/49세(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된 나이와 1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집권했으나 역대 대통령 중 최장기 집권(18년)/두 번째로 장수한 것(90세)으로 인해 젊은 대통령 이미지가 옅다[39] 비슷한 케이스로 메이지 유신 이전 일본의 쇼군이 있다. 원래 쇼군은 이민족들을 토벌해 동화시키는 부대의 지휘관이나, 쇼군이 천황을 제치고 일본의 지배자가 되자, 자연스럽게 일본의 국왕이라는 고유명사처럼 불리게 되었다.[40] 하지만 라이베리아나 여러 나라에선 독재자가 소령으로 멈춰선 채로 권력을 차지하던 것도 있다...[41] 아랍권 왕족들은 아예 빅리그 축구 구단들을 아예 사유품처럼 쓰기도 한다.[42] 하이라이트의 슬로건이 'My life is so bright' 즉, 내 미래는 너무 밝다는 뜻이다...[43] 정작 이후에 알제리가 10년간 내전 상태에 빠지고 반대로 리비아는 경제력이 하락하기는 했지만 그런대로 안정세를 유지하면서 참으로 미묘한 발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사실 알제리 내전의 근본적인 원인은 집권여당에 연줄이 있었던 군부의 선거불복에 있기는 했지만.[44] 냉전 시기 여성 공산당원들은 자신들의 입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남성 당원들보다 더 급진/강성 성향을 띠거나 위험한 임무를 자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또 당시만 해도 남성이 혼자 가장이 되어 가족을 먹여살리는 경우가 압도적이었기에 여성 당원/요원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가족들이 굶어죽을까 하는 우려를 할 필요가 적어 가족을 이용한 회유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구 공산권/제3세계에선 여성이 (가족으로 협박이나 회유하기 쉬운) 남성보다 더 충성심이 있다는 고정 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물론 카다피 사후 이 경호원들이 모두 도망간 걸 생각해보면 딱히 남성들보다 더 충성심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45] 하지만 이런 주장의 출처는 (영어위키에 출처로 지목된 책들) 대부분 카다피와 매우 사이가 나빴던 1980년대 레이건 시절 출판된 책들 혹은 카다피의 정적들이며, 카다피 류의 항상 흑색선전이 따르는 것은 감안해야한다. 거기다가 그런 소스를 인용한 영어위키에서도 단정적으로 쓰지 않고 "~ reported to be a womanizer"라고 썼다. 말하자면 "호색한이라는 주장이 있었다"는 뜻이다.[46] 나중에 스티븐 콜베어의 토크쇼에 나온 반기문에 의하면 통역사가 통역을 해주다가 지쳐 졸도했다고 한다.[47] 연설 내용은 "골목길을 구석구석 뒤져서 시위대를 찾아 죽이겠다"라고 한다.[48] 리비아에 가보면 지금이 아프리카의 중심이라며 자기 사진 속에 아프리카 나라들 국기가 크게 배경으로 자리잡은 홍보판이 여기저기 있었다고 한다[49] 알제리의 초대 대통령, 독립운동가. 소련으로부터 연방영웅 칭호도 받았으나 군사 쿠데타로 실각[50] 콩고 민주 공화국의 초대 총리[51] 가나의 초대 대통령, 독립운동가[52] 말리 연방의 초대 지도자, 독립운동가[53] 잠비아 초대 대통령, 독립운동가[54] 탄자니아의 국부[55] 기니의 초대 대통령, 독립운동가[56] 코트디부아르의 초대 대통령, 독립운동가[57] 세네갈의 초대 대통령[58] 실제로 이들 이슬람권의 독재자들중 죽거나 실권한 뒤에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다시 힘을 얻기도 했다.[59] 카다피의 선핵폐기 후 발생한 시민혁명에서 체제 보장은 커녕 시민군을 지원해버려 비참하기까지 한 최후를 맞이한 카다피를 보고 미국의 약속에 불신하는 결과를 낳았다.[60] 김정은이 카다피와 다른점이라면 장성택, 김정남같은 정적을 숙청한 후 비핵화처럼 포장된 핵개발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카다피는 핵을 포기하였고 그 결과 시민혁명까지 이르게 되었다.[61] F2000과 같은 최신예 벨기에산 무기들이 중동에 속출하는것도 기분탓일지도?[62] 사실 황금 무기는 아랍 군주들이나 독재자들이 많이 가지고 있다. 사담 후세인도 황금으로 도금된 AK-47가 있었고 사우디아라비아 국왕에게도 미국에서 도금 총기를 선물해준 적이 있다.[63] 김정일 경호원 출신의 탈북자에 따르면 은빛으로 도금된 AK를 지급받아 근무한다고 한다. 총 자체도 원 오브 사우전드라고... 는 하는데 원 오브 사우전드라는 말 자체가 허황된 거라 그냥 잘 만들어졌고 관리된 총을 과장해서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단순히 잘 만들어진 은도금 AK일 것이다.[64] 안정환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6강전 이탈리아 전에서 그저 골을 넣었다면서 쫓아낸 인물으로 악명이 높다. 그리고 그 구단주는 후에 많은 범죄 행위들이 밝혀지면서 감옥에 갔고, 또한 페루자는 지금은 2~3부리그나 오르락내리락하며 하위권에서나 노는 아주 한심한 팀이 되고 말았다.[65] 우유나 영양유 외 다른 가축의 젖을 식품으로 지정하지 않은데는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