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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연합 공화국 초대 대통령 | |||
<colbgcolor=#c09300><colcolor=#fff> 이집트 아랍 공화국 제2-4대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جمال عبد الناصر | Gamal Abdel Nasser | |||
성명 | 가말 압델 나세르 후세인 جمال عبد الناصر حسين | ||
출생 | 1918년 1월 15일 | ||
이집트 술탄국 알렉산드리아 (現 이집트 아랍 공화국 알렉산드리아) | |||
사망 | 1970년 9월 28일 (향년 52세) | ||
아랍 연합 공화국 카이로 | |||
재임기간 | 제2대 대통령 | ||
1956년 6월 23일 ~ 1958년 2월 22일 | |||
제3대 대통령 | |||
1958년 2월 22일 ~ 1965년 3월 15일 | |||
제4대 대통령 | |||
1965년 3월 15일 ~ 1970년 9월 28일[1]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09300><colcolor=#fff> 정당 | 아랍 사회주의 연합 | |
사상 | 나세르주의 (아랍 사회주의) | ||
부모 | 아버지 압델 나세르 후세인 어머니 파히마 나세르 | ||
배우자 | 타히아 카젬 | ||
자녀 | 장남 칼리드 압델 나세르 | ||
국적 | 이집트 | ||
신장 | 185cm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직업 | 군인, 정치가 | ||
학력 | 카이로 대학교(법학) 이집트군사대학 | ||
군사 경력 | |||
국가 | 이집트 | ||
복무 | 이집트 육군 | ||
복무기간 | 1938년 ~ 1952년 | ||
계급 | 중령 → 대령 | ||
참전 | 1952년 이집트 혁명 아랍-이스라엘 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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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이집트 대통령(1956년 ~ 1970년)과 아랍 연합 공화국 대통령(1958년 ~ 1970년)직을 역임했다.
나세르는 아랍사회주의와 아랍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내세우고 범아랍주의를 추진하며 한 사상에 나세르주의라는 이명이 후렴되게끔 했던 세기의 정치가였다. 나세르 집권 기간 이집트는 주변 인접국에 대한 혁명 수출국의 반열로 격상됐으며[2] 그 뒤 이집트는 21세기까지 그런 역할이나 위상을 다시는 갖지 못한다. 즉, 이집트인들에게 있어 고대 ~ 중세의 찬란했던 이집트의 지위와 영광을 일정부분 다시 체험시켜준 인물이다. 또한 대중과의 소통 능력 또한 매우 뛰어난데다가, 실제로 공교육 보급을 통한 문맹 퇴치와 최저임금 인상, 토지개혁, 대규모 토목 사업 및 수에즈 운하 수입 확보 등으로 대다수 이집트인들의 생활수준이 어느정도 상승했던 시절인지라 이것이 나세르가 이전 국왕이나 이후의 대통령들보다 고평가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는 제1, 2, 3세계로 분극화된 질서있는 난세에 나세르란 개인의 외교적 기량으로 한 국가의 국제 지위에 변동을 주었다는 증거이다.[3]
이집트 북부 지중해 연안 출신으로, 그가 4살 때인 1922년 이집트 왕국은 법적 독립을 얻었으나 수에즈 운하를 영국이 소유하는 등 여러 모로 영국에 심하게 종속되어 있었다. 나세르의 친척 중에도 정치적 이유로 구속 수감된 사람이 있었다. 이래저래 제국주의 및 식민주의의 상흔이 강하게 잔존한 지역에서 안 그런 곳이 있겠냐만 그 중에서도 유독 나세르는 영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했고 표면상 자신도 반영 인사의 필두로 인지됐다. 친소 정책, 매진한 아랍 통일과 이집트의 산업화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사실 및 야당을 탄압했던 역사가 있는 등, 특히 진영논리적인 이유로 서구에서의 평가는 엇갈리지만 이건 당시도 지금도 개판인 아프리카, 중동, 서아시아의 정세를 기준으로 내려진 평가는 아니다.[4] 제1세계의 말석에 있고 북한의 수교국과는 교류치 않던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평가는 별로 다르지 않았지만 호스니 무바라크 이후 이집트 간의 관계 개선이 이뤄진 뒤 재평가됐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나세르는 1918년 이집트 북부의 지중해 연안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우체국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에서 독립했지만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흐름 속에서 어린 나세르는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을 꿈꾸며 자라났다. 1939년에는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과 이집트의 공동령인 앵글로-이집트 수단(Anglo-Egyptian Sudan)에서 근무했다.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나세르는 이집트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훗날 자신의 후임 대통령이 되는 안와르 사다트와 함께 영국과 싸우던 이탈리아의 첩보원 몇 명과 접촉했다. 그들은 이탈리아군이 이집트로 침공했을 때 영국을 몰아내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패배했고 나세르의 계획은 실패했다. 나세르는 쉽게 이집트를 독립시킬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영국에반영 성향 장교모임인 자유장교단에 참가했고, 그곳에서 핵심 인물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나세르는 소령 신분으로 아랍 연합군에 참가했고, 아랍 연합군이 패배하자 이집트로 돌아왔다. 당시 32세였던 이집트 마지막 국왕 파루크 1세는 돈을 물쓰듯 했고 사치에 열중했는데, 나세르를 포함한 자유장교단은 이를 기회로 삼아 쿠데타를 계획했다. 1952년 7월 23일 자유장교단은 쿠데타를 일으켜 장성들을 포박하고 정권을 획득, 1953년 왕정을 폐지한 후 제1차 중동전쟁에서 활약한 무함마드 나기브 장군을 수반으로 한 혁명지도평의회를 결성했다. 일련의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나세르는 이렇게 이집트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2.2. 임기 초기
1952년 나세르는 육군 대위였는데 이때 자신과 안와르 사다트 등의 자유 장교단이 지도력에 문제가 많던 파루크 왕정에 대항한 쿠데타를 일으켜 폐위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그의 아들인 푸아드 2세를 꼭두각시 왕으로 즉위시켰다가 1953년에 왕정을 폐지한 후 무함마드 나기브 장군을 대통령으로 추대했다.[5][6] 1954년 나기브를 퇴출시키고 나세르가 총리에 취임했다. 나세르는 국왕 일가의 망명을 허용했고, 파루크 1세 국왕은 와인 상자에 돈을 가득 채워 유럽으로 망명했고 유복한 생활을 누리다가 1965년 로마에서 점심을 먹던 도중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나세르는 국왕에 충성하던 군부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부 장교들을 재판에 회부시킨 것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제대 선에서 숙청을 마무리지었고 귀족들에 대해서도 귀족제도를 폐지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재산의 일부를 빼앗는 등의 조치를 취해 나라를 안정화시켰다. 나세르는 1952년 농지개혁을 추진하면서 구 왕정 치하의 정치, 경제 등에 대한 체제 개혁을 추진했다. 외교적으로는 범아랍주의를 내세우면서 이라크 시리아 등의 아랍국가들과 연대해 "바그다드 조약기구" 결성에 반대하며 아랍 각국간의 단결을 외치면서 아랍권의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다. 1955년에는 티토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지금은 크로아티아령인) 브리오니 섬에서 네루 인도 총리와 함께 3자회담을 가졌다. 그 이후 대표적인 제 3세계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1956년에는 대통령에 취임했다. 1956년 1월에는 팔레스타인의 가자지구 난민처리를 놓고 이스라엘과 극비회담을 진행했고, 이스라엘과 화해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지만 이집트로 팔레스타인 난민을 이주시키는 것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한편 미국을 비롯한 서방 및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에 동시에 접근하며 서방으로부터 아스완 댐 건설비용을 지원받았고 동구권에선 체코슬로바키아산 무기를 많이 들였다. 그런데 아스완 댐 건설에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었지만 동구권 무기를 들여오는 것에 자극받은 서방에서 건설 비용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세르는 열받아서 동구권에 상당히 기울어졌다. 같은 해 영국 소유이던 수에즈 운하를 전격적으로 국유화한다고 선언해 결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과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이것이 제2차 중동전쟁이다.
제2차 중동전쟁에서 나세르의 이집트는 전술적으로는 패배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은 국제사회에서 철지난 제국주의적 행패로 인식되었다. 제3세계에서의 지지를 노리던 소련이 이집트를 돕기 위해 핵무기 사용을 암시하고, 동맹국인 미국조차 영국과 프랑스에 경고함으로써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과거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 세계에 간섭하며 굴욕을 안겨줬던 영국과 프랑스에 한 방을 먹이는 데 성공한 나세르는 일약 아랍 민족주의의 거두로 떠올랐다.
2.3. 범아랍주의의 지도자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는 하나의 나라로 합쳐 아랍 연합 공화국이 됐다. 나세르 본인이 대통령이 됐다. 그런데 서로 다른 국가를 통합하여 운영하면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했고, 이집트 쪽이 인구수가 월등히 많고 면적과 인지도가 앞서서[7] 시리아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바람에 시리아측의 불만이 점점 늘어갔다.결국 1961년 시리아가 쿠데타로 독립을 선언하며 재분리해 3년 천하로 끝내 분열되었다. 그러나 다른 아랍 국가의 추가 가입 가능성을 의식해 아랍 연합 공화국의 국호는 한동안 계속 유지됐다.
대통령 재임 시절에는 범아랍민족주의와 제3세계 운동을 주도하였다.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가 발생하였을때 나세르의 행보는 상당히 흥미로운데, 흐루쇼프와 케네디에게 모두 친서를 보내서 어떻게든 둘을 달래서 상황을 조용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했고 유엔에서 3세계 국가들을 규합하여 1세계와 2세계 회원국들이 멋대로 결정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소련과 미국의 대결장으로 전락한 유엔을 어떻게든 사태 해결의 장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나세르의 균형있는 모습은 대 한반도 외교에서도 드러나는데 나세르는 북한과 남한과의 수교를 둘 다 거부했다. 하지만 북한이 북예멘 내전에서 나세르 편을 들자 북한과 수교를 하게 되는데,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남한에도 수교를 제안했지만 남한은 할슈타인 원칙을 지킬 때라서 오히려 카이로 총영사관까지 철수하니 마니 날뛰었다. 하지만 나중에 3세계와 아랍 국가들 맹주가 된 이집트와 수교하지 않았다고 아주 땅을 쳤다.
이스라엘에선 나세르를 상당히 호전적인 인물로 파악했고 모세 다얀이나 다비드 벤구리온을 비롯한 당시 이스라엘의 수뇌부는 나세르의 침공을 우려해서 예방전쟁과 도발을 통해서 여러 차례 그를 자극했다. 하지만 아랍 통합으로 아랍 내부의 영향력을 확보하려 했던 나세르는 이스라엘이나 가자 지구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수에즈 전쟁과 6일 전쟁으로 잇달아 이집트와 전쟁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이집트가 패배했다. 이 때문에 나세르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곳곳에서 나세르를 아랍을 재앙으로 밀어넣은 배신자로 저주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알제리에선 이집트 대사관이 공격당했고 튀니지에선 이집트 문화원이 파괴되었다. 카이로에서도 나세르를 괴수라고 저주하는 목소리가 가득했다.
제3차 중동전쟁의 재앙적 패배로 나세르는 심신이 모두 만신창이가 되었다. 흐루쇼프에게 시가를 빼앗긴 걸로 유명한 무함마드 하이칼은 10살은 넘게 늙어버린 듯한 나세르의 모습을 보고 대단한 충격을 받았고, 나세르는 노골적으로 권총자결을 암시하는 발언을 계속할 정도였다. 총사령관 압둘 하킴 아메르 원수는 쿠데타를 암시하면서[8] 국방장관 샴스 바르단을 후임 대통령으로 삼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나세르는 부통령 자카리야 무히에딘을 대통령으로 삼겠다고 아메르와 합의했다. 마침내 6월 9일에 나세르는 어차피 자기가 내려오지 않으면 군대가 끌어내리게 되어 있다면서 이집트 민중이 원한다면 자신은 총살대에라도 당당히 서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오후 6시 30분, 방송을 통해 패배는 미국과 영국의 음모 때문이었다면서도 자신이 모든 패배를 받아들이고 하야하겠다고 성명하였다.
제국주의 세력은 압델 나세르가 그들의 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분명히 해두고자 하는데 가말 압델 나세르가 아니라 모든 아랍 민족이 그들의 적입니다. 아랍의 단결을 위한 희망은 가말 압델 나세르 이전에 시작되었고, 가말 압델 나세르가 가더라도 계속될 것입니다. 살아남는 것은 민족입니다. 나세르가 그의 조국의 대의에 공헌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는 민중의 의지의 표현이었을 뿐, 절대로 그 창조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여자, 아이, 대학생을 포함한 수백만명의 이집트 국민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머리와 옷을 쥐어뜯으면서 "나세르여! 우리를 버리지 마십시오!"라고 통곡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후임 대통령으로 지목된 무히에딘은 대통령 승계를 거부하였고 국회의원, 지식인들이 대통령궁으로 몰려와 나세르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그리고 요르단을 비롯하여 아랍 국가들의 정상들이 모두 나세르의 하야를 만류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집트 국영방송은 나세르의 하야 성명을 전하면서 미국 6함대가 와서 이집트를 파괴할지언정 나세르를 잃을 수 없다고 통곡하면서 나세르 지지를 천명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당시 외신들은 대부분 나세르가 자신의 권좌를 지키기 위해서 수작을 부린 것으로 폄하했지만 르몽드 기자 에릭 룰로만은 수백만명을 몇 시간만에 동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이에 반박했고 각국의 지도자들이 나세르의 하야를 뜯어 말린 것이나 그가 죽었을 때도 전국적으로 슬퍼했던 걸 보면 이집트 국민들이 나세르를 지지한 것은 확실하다. 패전 이전에 토지개혁, 대규모 토목사업, 대규모 학교건설 같은 업적이 있던지라 패전이라는 상황이 닥쳐와도 여전히 지지했던 것이었다.
나세르조차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척이나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함마드 하이칼에 따르면, 나세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몇시간 동안이나 충격에 빠져 있었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하이칼은 국민은 나세르 외에 다른 지도자를 모르며, 비록 나세르에게 패전의 책임이 있지만 국민이 원하는 것은 나세르의 하야가 아니라 이 위기를 극복할 명예로운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결국 나세르는 국민의 목소리를 저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하야를 번복하고 이스라엘의 침략의 흔적이 박멸될 때까지 자리에 남겠다는 성명을 내보냈다. 뉴욕 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이 성명이 발표되자 다시 이집트 전체가 환호하는 군중으로 가득 찼다. 권좌를 유지한 나세르는 곧바로 아메르 원수를 체포했으며 아메르는 옥중에서 사망하였고 대외적으로 자살로 발표된다.
2.4. 임기 후기
야세르 아라파트(왼쪽)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의장을 접견하는 가말 압델 나세르(오른쪽). | 1966년 카이로에서 알리 사브리(오른쪽)와 함께 체 게바라(왼쪽)를 만난 가말 압델 나세르(중간).[9] |
1962년 북예멘 내전에 개입해 공화국 정부를 지지했고 많은 이집트 군대를 보내 공화파를 도왔다. 1967년 시리아와 대 이스라엘 포위진을 짰으나 많은 군대가 예멘에 묶인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선제공격으로 패배해 시나이 반도를 상실한다. 이것이 제3차 중동전쟁.
이후 나세르의 이집트는 이스라엘의 국가 승인 불가, 이스라엘과의 교섭 불가, 이스라엘과의 화평 불가, 팔레스타인인의 권리 회복을 내세우며 대이스라엘 강경노선을 택했다. 한편 나세르는 도피 중이던 나치의 전범을 보호하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업무는 이집트군과 정치기구의 양성, 그리고 반유대주의 선전물 작성이었다고 한다.[10] 때문에 1960년대 이스라엘 정부는 이집트가 독일군의 과학기술을 입수해 로켓 개발을 하는 것을 꽤나 우려했다고 하며, 나치의 과학자로 일하며 로켓 개발을 담당했던 자를 이집트에 스파이로 보낼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나세르는 나치에 적대적인 소련과도 우호 관계였기 때문에 나치 간부에게 그렇게까지 큰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소련과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같은 동구권 및 공산국가들의 협력을 얻어 아스완 하이 댐을 건설했지만, 국내에선 수에즈 운하의 수입이 줄어들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며 경기침체가 발상했다.
그러던 중 나세르는 1970년 9월 28일 불과 52살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나세르는 6일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로 이스라엘에 대한 근거 없는 우월감의 실체를 확인하고 실의에 빠졌으며 미국의 중재를 받아들여 이스라엘과 평화적인 해결을 도모하고 있었다.[11] 여기에 반발한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는 요르단과 레바논에서 대규모 테러를 자행하면서(검은 9월 참고) 이스라엘이 아니라 중동 전체를 개난장판으로 만들면서 나세르의 혈압을 올리고 있었고 나세르는 인생 말년에 중동 지도자들을 화해시키는 데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1967년 이래로 심장병을 앓아온 나세르는 이미 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음에도 무리하게 정상회담에 나서 아랍 정상들 간의 관계를 중재하느라 크게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리고 9월 27일,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PLO 등 아랍 각국의 수장들을 모아놓고 화해를 호소한 후 쿠웨이트 에미르 사바 3세(Sabah Al-Salim Al-Sabah)를 환송한 직후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다음날 사망한다.
그의 죽음에 이집트는 물론 아랍 전체가 광란에 가까운 슬픔에 빠져들었으며[12] 그의 장례식에는 아랍 각국의 지도자들이 몰려들어 바닥에서 뒹굴며 통곡했다. 요르단 국왕 후세인 1세와 이라크 대통령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는 어린아이처럼 울부짖었고 나세르를 자신의 정치적 스승으로 여겼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는 2번이나 기절했으며 나세르의 죽음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한 아라파트 PLO 의장 역시 계속 흐느꼈다. 하지만 나세르와 소련의 밀월을 불편하게 여겼던 서방 국가들은 그의 죽음을 무시했다. 반면 소련에서는 알렉세이 코시긴을 파견하여 조문했고, 다른 동유럽의 구 공산권 국가들이던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이집트 정부에 애도 서한을 보냈다. 이스라엘의 골다 메이어 총리는 그를 전쟁광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빈정대는 촌평을 남겼으나 이스라엘 내 아랍계 시민들의 애도를 허용했다. 그의 후임으론 안와르 사다트가 집권했으며 안와르 사다트는 갈고 닦은 이집트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회치기 위해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켜 상당히 선전했다. 이후 사다트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이스라엘과 평화 협상을 맺어 이스라엘을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시나이 반도를 돌려받자 흥분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사다트를 암살했고, 그 뒤는 호스니 무바라크가 잇게 된다.
3. 선거 이력
<rowcolor=#ffd700> 연도 | 선거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56 | 1956년 이집트 대통령 선거 | 이집트 | 국가 연합 | 5,499,555 (99.9%) | 당선(1위) | 초선 |
1958 | 1958년 이집트 대통령 선거 | 6,102,116 (100.0%) | 재선 | |||
1965 | 1965년 이집트 대통령 선거 | 아랍 사회주의 연합 | 6,950,098 (100.0%) | 3선 |
4. 평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크게 내세우고 있는 나셀이즘은 후진국 혁신세력들의 적지 않은 관심을 끌고 있음이 사실인데, 금후 후진지역의 여러 나라에서 어떤 형태의 나셀이즘이 대두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나셀이즘의 독재적 성격은 가급적 신속히 지양될 것이 요청되는 바이지만, 그의 일시적이고 과도적인 독재적 측면 때문에 나셀이즘의 진보적 성격을 부인하려고 함은 옳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나셀이즘이 조만간 그의 독재적 측면을 지양하고 민주적 사회주의에로 접근해 오게 될 것을 넉넉히 예견할 수 있을 것이다"[15]
- 명인 옥중기 이동화편, 희망출판사, 1966
- 명인 옥중기 이동화편, 희망출판사, 1966
5. 여담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가말 압델 나세르는 클레오파트라 7세 파라오 이후로 첫 순혈 이집트인 출신의 지도자이다. 실제로, 이집트 역사 이래 클레오파트라 7세 이후부터는 모두 외국인 혈통이 섞여있는 이집트인의 지도자가 통치를 했었다.# 그래서, 순혈 이집트인 출신으로만 지도자 계보를 작성해보면 클레오파트라 7세 다음으로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이 되는 셈이다. [16]
- 1980년대에 한국에서 출판된 해외 인물 위인전 시리즈에 등장한 인물이다. 저 당시만 해도 박정희 정권을 지낸지 얼마 되지 않았고, 뒤이어 집권한 전두환 정권 도중이었던 터라, 군인 출신의 강력한 지도자가 고평가받는 분위기여서 그랬을 것이다. 다만 박정희와 전두환이 보수우파 성향인 것과 달리, 나세르는 명백히 반미 좌파 성향에 가깝다. 저때 전두환 정권이 나세르의 위인전을 허가한 것도 그가 군사독재자여서 그런 것도 있지만 미국과 관계가 아주 원만하지는 않았고 좌익 계열이라는 사실도 그냥 숨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아랍의 봄이 성공했던 국가들의 지도자들 중 유일하게 제명되지 아니한 인물이다. 이집트 쪽에서도 지지자가 매우 많고 이집트 경제의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수에즈 운하와 시나이 반도를 이스라엘과 서방 국가들로부터 되돌려받은 인물이다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 개인적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흠모했는데, 이집트인들이 나폴레옹을 바라보는 인식이 좋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꽤 이례적인 케이스다. 사실 나폴레옹이 워낙 근현대 정복자의 대명사다 보니 군부 기반의 독재자나 "위대한 ~를 건설하자" 외치는 인물들이 나폴레옹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나폴레옹은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인 만큼, 나세르가 나폴레옹을 롤모델로 삼은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 아랍 사회주의를 표방했고 외교적으로는 소련과 친하게 지냈지만 공산주의에는 반대했다. 혁명에 함께한 동지라도 공산주의자로 판단되면 체포했으며 니키타 흐루쇼프가 이집트 내 공산당 금지령을 해제하라고 압력을 넣었을 때에도 이는 내부 문제일뿐 외국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며 거절했다. 시리아와의 통일에 대해 처음에는 경제적, 사회 문화적 이질성 등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시리아 대표단이 곧 공산주의 정권의 집권으로 시리아에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설득하여 찬성으로 돌아섰다. 통일 이후 그는 즉시 시리아 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엄격한 단속을 명령했다.
- 무아마르 카다피와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카다피가 리비아군 대위 시절부터 같이 산책을 했다. 원래 카다피는 나세르를 존경했고 혁명 후에 카다피는 나세르의 아랍 사회주의를 본받아 자마히리야 체제를 폈다.
-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는 나세르를 매우 높게 평가한 정치인 중의 한 명이다. 나카소네가 젊은 국회의원이었던 시절 이집트를 방문하여 나세르의 사저에서 나세르와 회담한 적이 있는데 그 검소함에 매우 놀랐다고 한다.
-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있는 골다 메이어는 이 사람이 죽자, "대체 그 자가 자기 국민들에게 전쟁 말고 준 게 뭐가 있지?"라며 날서게 후려깠다. 물론 골다 메이어는 당시 이집트와 적대하던 이스라엘 총리였으니 아랍 민족주의 지도자인 나세르에게 좋은 평가를 할 리가 없다.
[1] 1967년 6월 9일에 사임을 발표했으나, 의회에서 사표가 반려되면서 이틀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이틀 동안은 자카리야 모히에딘 부통령이 대행했다.[2] 한창 때는 아랍 전역과 제3세계에 있어서 엄청난 영향을 발휘하여 아랍 최고의 라디오 스타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정적인 연설로 이름을 날렸다. 그 때문에 요르단과 예멘에서는 라디오 몰수 조치를 할 정도였다.[3] 안와르 사다트는 나세르를 계승했지만 정책 전반에서 과격한 급진책으로 급반전하다 암살되고, 호스니 무바라크는 그 조율을 잘 이뤄내 나세르처럼 패업을 달성하진 않아도 국정과 외교의 실리를 획득한 끝에 장기집권하였다.[4] 당시 이집트처럼 아랍 사회주의 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경우 야당은 우익 이슬람 극단주의인 경우가 흔하다. 아랍의 혁명 정부들은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과 친(親)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반동의 정치적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5] 이때 하류층에서 지지가 많았던 무슬림 형제단과 많이 협력했다.[6] 이인태, '끝없는 테러공격: 테러리즘의 이해와 중동 테러 공격전술', 책과나무, 2016, p.109[7] 물론 시리아도 역사적으로 볼때 이집트에 버금갈 정도로 긴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유럽 어느 나라보다도 길지만 하필 이웃이 이집트 아니면 이라크니..[8] 막상 제3차 중동전쟁 첫날 이집트 육공군의 궤멸에는 아메르 원수의 책임이 가장 컸다.[9] 알리 사브리(Ali Sabri)는 당시 나세르 정권의 총리였다.[10] 이런 인물들로는 이집트 정보국에서 반이스라엘 선전을 담당한 전 나치당의 선전활동가 요한 폰 레르스(Johann von Leers), 이집트 국가정치국에서 활동한 전 게슈타포 간부 레오폴트 글라임(Leopold Gleim)이 있다.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진압했던 오토 에른스트 레머도 독일 사회주의 국가당이 정당해산 명령을 받자 이집트로 잠시 도피해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하였다.[11] 이원복의 가로세로 세계사 3권에서는 끝내 이스라엘을 못 꺾고 죽다니라고 원통해하면서 사망하는 걸로 묘사되지만 역사적으로는 정확하지 않다.[12] 나세르와 사담 후세인의 평전을 쓴 바가 있는 팔레스타인 출신 저널리스트 사이드 K. 아부리쉬는 당시 미국에 있다가 라디오로 나세르의 죽음을 듣고는 패닉에 빠져 길거리에 차를 세우고 울부짖었다고 한다. 경찰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방금 내 가족이 죽었소."라고 대답했다.[13] 이집트의 일본식 발음.[14] 당시 나세르는 군부 쿠데타에 의한 집권, 철저한 1인 지도자 권력 집중 모델, 사회주의 이념에 영향을 받은 정부 주도 경제 개발, 민족주의 이념을 토대로 한 수에즈 운하 국유화 결정 등의 노선으로 인해 여러 제3세계 개발도상국 군부 지도자들의 롤모델이 되고 있었는데, 당연히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또한 나세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경우였다. 흥미로운 지점은, 박정희 또한 자신의 부하이자 조카 사위인 김종필이 혹시라도 나세르처럼 본인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키지 않을까 하면서 자주 의심했다는 것이다. 김종필은 그 때마다 "각하는 저를 나세르로 보십니까? 왜 자꾸 저를 의심하십니까?"라면서 반발했다. 자세한 사항은 김종필의 일생 항목 참조.[15] 그러나 나셀이즘은 전세계 많은 군부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쿠데타에 이은 오랜 1인 독재 및 철권 통치로 이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심지어 이집트마저도 이후 호스니 무바라크의 장기 독재를 겪게 되었다.[16] 엄밀히 따지자면 클레오파트라 7세가 속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자체는 마케도니아 출신이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