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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니지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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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의 방아쇠가 된 혁명.
BBC 다큐멘터리 WikiLeaks: The Secret Life of a Superpower에서

1. 개요2. 재스민 혁명?3. 배경4. 발단5. 혁명6. 추이7. 영향8. 관련 문서

1. 개요

2011년 1월 14일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주화 혁명. 튀니지의 민중이 23년간 독재 체제를 구축해온 벤 알리 대통령 정권을 전국 반독재 민주화 시위로 퇴진시킨 사건.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2. 재스민 혁명?

튀니지나 아랍 시민들, 그리고 아랍권 언론들은 재스민 혁명이란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 명칭은 시위대 내부에서 나온 것이 아닌 서구 언론이 이전부터 계속해온 색깔 혹은 꽃 이름을 따다가 인위적으로 붙이는 혁명 명칭법[1]에 따라 만든 것이기에 거부감이 있다. 무엇보다도 튀니지 내부에선 1987년 벤 알리가 정권을 잡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이미 재스민 혁명이라고 칭해오고 있었다.

대신 시위가 처음으로 점화되었던 지역명을 따서 시디 부지드(Sidi Bouzid) 혁명이라고도 하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건 역시 '튀니지 혁명'.

3. 배경

튀니지는 이슬람 대다수 나라 중에서도 그래도 꽤 개방적이고 세속적인 정책을 취했는데 이슬람 과격파를 견제하고자 종교 세속 정책을 고르고 친미 정책을 취했다. 그래서 미국은 이 독재자가 저지르는 인권 탄압은 나 몰라라 했다. 결정적인 문제는 벤 알리 독재 정권의 실패한 경제 정책. 대학생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나고 물자 유통이 마비되어 도시에서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벤 알리 정권하에서 튀니지는 14%가 넘는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렸고 덤으로 정부의 부정부패까지 만연한 상황이었다.

4. 발단

파일:attachment/uploadfile/mohamed-bouazizi-movie.jpg

대학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모하메드 부아지지(Tarek el-Tayyib Mohamed Ben Bouazizi)(위 사진의 주인공. 26세)는 경제 악화로 일자리를 찾지 못하자 노점에서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무허가 노점 단속을 하던 경찰에게 팔고 있던 과일과 채소, 저울, 수레 등을 모두 빼앗겼고 이에 민원을 제기했으나 소용없었다.[2] 부아지지는 항의했지만, 돌아온건 구타뿐이었고 결국 2010년 12월 17일 주정부청사 앞에서 휘발유를 몸에 끼얹고 분신 자살을 시도했으며 전신화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1월 4일 숨졌다.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튀니지 국민들은 거리로 나서게 된다.

위키릭스의 튀니지 독재 정권의 호화 생활 폭로로 튀니지 국민들이 실상을 알게 되면서 그동안의 분노가 폭발한 것도 한 몫 했다.#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의 재산 중 일부. 이쯤 되면 튀니지 국민이 폭발하지 않는게 이상할 정도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위키릭스의 독재 부패의 대한 폭로보다는 미국 외교관의 개인적인 발언이 혁명의 씨앗이 되었던 것. 튀니지 국민들은 독재 부패에 대해서 항상 불만에 차있었지만[3] 독재자인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는 미국을 포함한 많은 서방국가들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 따라서 혁명을 일으키면 미국이 개입해 나라가 쑥대밭이 될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4] 하지만 미국 외교관의 독재에 대한 비판과 비난이 위키릭스를 통해 폭로되었으며, 그로 인해 국민들은 미국이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를 버렸다고 생각했고[5] 여기에 한 청년의 분신자살이 혁명의 불씨가 됐다.

5. 혁명

12월 18일 학생들의 주도로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다. 이에 튀니지 정부는 무장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에 대해 강제 진압에 나선다. 최소 219명이 죽고 510명이 부상당했다.[6] 결국 벤 알리 대통령은 이듬해인 2011년에 부패각료 경질과 대선 재출마 포기, 내각해산, 총선 재실시와 같은 조치들을 내놓으며 수습에 나섰지만 튀니지 전 국민들의 분노와 반정부 시위의 규모는 크게 확산되었다. 결국 궁지에 몰린 벤 알리 대통령은 군부에게 시위 무력 진압/총기 발포 명령을 내렸지만, 군부는 끝내 대통령의 시위 진압 명령을 거부하였다.[7] 결국 민심도 잃고, 군부마저 등을 돌리며 정치적으로 고립무원에 빠진 벤 알리 대통령은 정권 유지를 포기하고 동년 1월 14일 사우디아라비아로 도주, 망명하였다. 1987년 무혈 쿠데타로 집권한 뒤 개헌 등을 통해 23년간 지속됐던 독재 정권은 결국 붕괴되었다.

이 시위가 성공을 거두어 아랍권 전체에 저항의 불길을 지폈다.

2021년 3월에 혁명 10주년을 맞아 사망자가 129명이며 부상자는 634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6. 추이

모든 힘을 잃어버린 벤 알리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도피한 상황이며 과도 정부가 출범하여 6개월 안에 새로운 총선과 대선을 실시할 것을 약속했으나 기존 정권의 인사들이 상당수 그대로 각료로 유임되어 있어서 아직은 정국이 불안정하다. 튀니지인들의 반정부 시위 또한 완전히 멈추지 않은 상태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른다. 이것이 진정한 시민 혁명으로 거듭날지, 새로운 독재 정권의 수립으로 좌절될지는 미지수.

벤 알리 대통령이 망명하긴 했지만 대안 세력의 부재 등 악재가 많다. 또한 여전히 반정부 시위는 멈추지 않아 2월에도 여기저기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로 사상자가 생기고 있다. 과연 언제쯤 안정적인 민주 정부가 수립될지...

과도 정부를 이끌고 있는 벤 알리의 측근이었던 모하메드 간누치 총리에 대한 불만으로 연속해서 시위가 발생하고 있다. 시위 중에는 진압 경찰과의 투석전으로 4명이 사망하기도 했으며 목 부분에 총을 맞고 숨진 19세의 소년이 나오기도 했다. 25일 주말 내내 수도 튀니스 시내에는 통행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그리고 결국 27일 국민들의 거센 반대로 간누치 총리가 사임하였다. 전 외무장관(베지 카이드 엘 세브시)이 임명되었다.

7월 15일에 제헌의회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10월 23일에야 선거를 끝마쳤다. 알 문시프 알 마르주키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보수 이슬람 극단주의인 살라피즘 신봉자들이 나서면서 정부 및 반살라피즘 민중들과 갈등이 깊어지고 있다. 2012년 8월 14일에는 살라피즘 신봉자들이 요구하던 여성은 남성을 무조건 따라야하는 헌법안을 두고 반시위대들이 시위를 벌였고 19일에는 이슬람 극단 살라피즘은 시대를 모르는 테러범이라고 거리에서 충돌이 벌어져 살라피즘 신봉자 1명이 돌에 맞아 죽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신봉자들은 샤리아 도입을 지지하며 호텔을 습격하고 술 판매를 금지하는 일을 빚으며 계속 마찰을 빚고 있다.

7. 영향

그동안 튀니지는 이스라엘에 대해 긍정적인 제스쳐를 취했다. 덕분에 모사드가 자주 출몰하여 팔레스타인(PLO) 간부들을 여럿 암살하기도 한 나라였기에 벤 알리 정권[8]의 붕괴로 미국에선 친미, 친이스라엘적이었던 이 나라에 과격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오바마는 일단 긍정적인 발언을 했지만 이스라엘은 연속적인 아랍의 상황에 전전긍긍하는 상황.

과격 이슬람 정권의 수립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과거 튀니지를 통치했던 부르기바와 벤 알리 등 역대 대통령 두 명이 이슬람력을 폐지하고 라마단을 비판할 정도로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을 펼친 탓에 아랍권에서 가장 세속적인 국가라는 평가. 심지어 아직까지도 공산당이 제헌의회에 대표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의미 있는 정치 세력으로 남아있을 정도. [9]

제헌의회 선거에서 1위를 한 엔나흐다의 정책도 샤리아를 헌법에 반영하지 않겠다는 것과 기존 정책의 유지이다. 지도자인 라체드 간누치는 자신의 당이 40%로 압도적으로 1위[10]를 거두었음에도 다른 세속주의 정당들과 함께 연정을 구성하겠다고 밝히기까지 한 상황이었지만 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계속되는 살라피즘 신봉자들의 득세와 같이 샤리아적인 법안 통과까지 이뤄질뻔했기에 미국과 이스라엘로선 좌불안석으로 지켜볼 뿐이다.

튀니지 혁명의 불똥은 사방으로 튀어서 지중해 건너 알바니아, 한 다리 건너 이집트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며 시위대와 경찰이 무력 충돌을 벌이고 있다. 튀니지 혁명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이 상황에 가장 똥줄이 타는 초조해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 나라는 바로 옆에 붙은 알제리다. 알제리의 사회 상황이 혁명 전 튀니지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독재자 압둘아지즈 부트플리카는 정권을 유지하여 2019년까지 임기를 법적으로 보장받아, 1999년 이래 최소 19년 동안 알제리를 다스리게 됐다. 부정선거 논란을 뒤로 하고.

그밖에 리비아에선 친미 벤 알리 정권이 무너진다고 고소해하는 분위기로 볼 듯 싶었지만 결국 리비아에서도 민중혁명으로 인한 리비아 내전이 벌어지면서 독재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도 고향인 시르테에서 죽었다. 2011년 예멘 통일 이후 17년 더 독재를 하였던 예멘 독재자 살레 또한 정권이양을 하여 물러나게 된다.

반대로 튀니지는 독재정권 축출 이후에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이 정권을 잡지 못하여 여야 정당 간의 민주적인 권력분배가 이뤄지고, 어느정도 안정을 유지하고 있어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여담인데 벤 알리의 재산이 한국에도 투자되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후로 시위로 인한 사회적 혼란 등 불구하고 내전, 군사 쿠데타 등이 일어난 적 없다는 점에서 주목받을 만하다.

하지만, 사회적 혼란을 이용해서 대통령 중심 독재체제로 가면서 혁명의 의의가 퇴색되고 있는 상황이다.

8. 관련 문서



[1] 카네이션 혁명이라든지 오렌지 혁명이라든지[2] 정확히는 압수품을 찾으려면 돈을 내야 했는데, 부아지지한테 그런 돈이 있을리가 없었다. 그리고 무허가 노점 단속도 그냥 표면상의 이유지, 까놓고 말해서 실상 이유는 장사하고 싶으면 우리한테 돈 내라.였다.[3] 물론 폭로된 심각성과는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4] 후에 일어난 일을 보면 오히려 미국이 혁명을 도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아랍의 봄 초반에 중동에 대해 미국이 바라던 것은 혁명으로 인한 불안정보다는 독재정권이 존재하는 안정이었다. 정확히는 미국을 지지하는 독재자가 군림하는 것. 이래서 이집트라든지 여러 친미 독재자들을 오냐오냐하던 미국은 항상 비난받았다.[5] 실제로는 혁명 이후에도 도움을 줘 국제적으로 욕을 쳐먹었다.[6] 2월 1일 유엔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집계 결과.[7] 실제 튀니지는 중동 아랍권에서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매우 약한 나라다.[8] 엄청나게 막장 독재자는 아니었지만, 장기 집권을 위하여 반대파에게 가혹했고 자신은 역시나 사치스럽게 살아왔다. 한국 여행자가 튀니지 여행을 가서 멀리서 봐도 꽤 웅장하고 큰 성이 보이기에 쌍안경으로 보려고 하니까 가이드가 기겁하고 말린 적이 있단다. "저긴 대통령이 사는 곳인데 함부로 그렇게 보다간 당신도 위험해요!" 그런 후에 그 가이드에게 몰래 "당신은 대통령을 어찌 생각하세요?" 이야기하자 말없이 차이를 마시더니만 "아까 당신에게 하던 말을 보면 알 거에요" 한마디만 했다고... 결국 이번 일을 보면 민심이 그동안 많이 참았던 걸 알 수 있다.[9] 다른 아랍 국가의 공산당은 그야말로 씨가 말랐다.[10] 과반 의석은 아니다,[11] 튀니지 혁명 이후 튀니지를 다시 독재의 길로 이끌고 있다는 평을 받고있는 튀니지의 현지도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