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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법화 | 2011년 3월 1일 | ||
당대표 | 라셰드 간누시(راشد الغنوشي, Rached Ghannouchi)[2] | ||
사무총장 | 알리 라라예드[3] | ||
국회의원 | 52석 / 217석 (23.96%) | ||
시장 | 131석 / 350석 (37.43%) | ||
당 색 | 파란색 (#0066cb) | ||
이념 | 사회보수주의 이슬람 민주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 ||
스펙트럼 | 중도우파 ~ 우익 | ||
공식 사이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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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나흐다는 튀니지 혁명 이후 튀니지의 정치를 이끈 온건 이슬람주의 혹은 이슬람 민주주의 성향의 정당이며, 한때는 연립정부를 주도했던 정당이다.[4]당명인 '엔나흐다'는 아랍어로 '부흥'을 뜻하는데, '부흥당'이라고 번역하는 곳도 있고[5], '르네상스 운동당'이라고 번역하는 곳도 있다.[6]
2. 성향과 역사
현재 모습을 보면 믿기지 않겠지만 이 정당은 본래 아불 알라 마우두디[7]와 이집트의 민주화를 물거품으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주의자 라셰드 간누시(راشد الغنوشي, Rached Ghannouchi)에 의해 1981년 창당됐다.[8][9]간누시가 엔나흐다를 창당한 이래 현재까지 대표직을 맡고 있다. 간누치는 벤 알리 정권 시절인 1989년 총선에서 엔나흐다를 이끌어[10] 제1야당으로 만들었지만 위기를 느낀 벤 알리에 의해 극단주의 단체라는 혐의로 모든 활동이 불법화되고 본인도 추방당하면서 22년간의 망명생활을 하게된다.
처음에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들의 영향을 받아 만든 정당이었지만 탄압을 당하면서 엔나흐다는 다른 이슬람권의 원조 극단주의 단체들에 비해서는 매우 온건한 성향으로 변모한다.[11]
그리고 튀니지 혁명의 영향으로 2011년 3월 1일, 엔나흐다는 다시 합법화되어 정치활동을 재개한다. 간누시도 망명지에서 귀국해 제헌의회 총선거를 이끌었고, 엔나흐다는 89석을 획득해 제1당의 지위에 올랐다.
그러나 신헌법 제정은 지지부진했고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샤리아를 헌법에 추가하자는 주장을 하자 엔나흐다 역시 의심의 눈초리를 받기 시작한다. 2013년 2월과 7월에 세속주의 정치인 두 명이 암살되는 사건도 일어나는 바람에 엔나흐다는 입지가 위축되었다.
결국 엔나흐다는 버티지 못하고 튀니지 공화국 신헌법에 이슬람 원리주의나 샤리아는 절대로 안 넣겠다는 선언을 한다.
이후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하면서도 세속주의와 양성 평등[12]의 가치를 담은 민주적인 신헌법이 2014년에 제정됐고, 같은해 총선에서 엔나흐다는 세속주의 정당 니다 투니스[13]에 밀려 제2당으로 전락한다.[14]
그래도 과반 이상을 차지한 정당이 없었기 때문에 엔나흐다는 니다 투니스와 연정을 통해 연립정권으로나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6년부터 엔나흐다는 정교분리를 지향하기 시작함으로써 당의 성향을 더욱 온건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2018년에는 혁명 이후 처음으로 튀니지에서 지방선거가 실시됐다. 이 때 엔나흐다는 전체 350개 지자체 중 131곳에서 승리했다. 덤으로 수도 튀니스에서 수아드 압데라힘을 시장으로 당선시켜 튀니스 최초의 여성 시장이라는 기록도 세웠다.[15] 덕분에 엔나흐다가 가졌던 보수적인 이미지도 개선할 수 있었다. 정작 세속주의를 지향하던 니다 투니스에서는 여성의 정치참여에 반대하는 발언이 나와 논란이 됐다는게 아이러니. 사실 이는 따지고 보면 거의 동서고금 빠짐없이 현대 튀니지 같은 혁명적 과도기 상황에서 원래는 여성참정권 같은 세속적 의제를 주장했던 일반적인 진보 세력들이 마주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전세계 대부분 문화권에서 전통적으로 어머니들이 가정생활과 가족의 정신적 케어를 담당했다보니 19-20세기 유럽과 아시아의 각종 혁명과 체제전환기때 막상 뚜껑 까보면 페미니즘이나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소수였고 해당 사회의 여성 절대 다수는 오히려 남성보다도 더 열렬한 종교 생활을 하던 신자였던 경우가 굉장히 많고, 지금 튀니지도 그런 문맥에서 보면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슬람 정당 특성상 성소수자 권리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듯하다. 주요 정치인들이 성소수자 권리 단체에 대한 해체를 주장하거나, 동성애를 정신질환인 냥 발언해서 국제 인권단체들의 빈축을 사기도 한다.
2019년 총선에서 엔나흐다는 17석을 더 잃어 52석이 됐지만 다시 1당의 지위에 오른다. 그리고 이전의 니다 투니스가 그랬던 것처럼 엔나흐다 역시 세속주의 정당들과의 연정을 구성했다. 그러나 카이스 사이에드 대통령이 의회를 해산시키고[16], 사법부까지 장악한 상태에서 이원집정부제를 대통령제로 바꾼 개헌안을 일방적으로 국민투표에 부치자 이에 반발하여 엔나흐다를 비롯한 여러 정당들이 투표에 보이콧하고, 이후의 총선도 보이콧하면서 의석을 잃게 된다.
3. 2021년
정작 연정을 주도하는 정당임에도 과반수에 못 미치는 의석 탓에 자당 소속 총리를 배출하지 못 했다가 2020년 7월,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자마자 총리가 사임해서 다시 자당 소속의 총리를 배출할 가능성이 생겼었다.그러나 사이에드 대통령이 무소속의 히셈 메시시 내무장관을 신임 총리로 지명하면서 엔나흐다의 총리 배출은 이번에도 무위로 돌아갔다.
그런데 저 총리 사임 건이 악재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파크파크 전 총리를 흔든 것이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지키려고 벌인 일이라는 인식을 유권자들에게 주는 바람에 지지율이 떨어진 것이다. 여기에 2013년처럼 이슬람주의 정당이라는 점 때문에 또 이미지가 안 좋아져서 다른 이슬람주의 정당들의 지지율까지 같이 하락한 것은 덤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악재가 닥쳤다. 당대표이자 국회의장인 라셰드 간누시에 대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정당들까지 가세해 불신임 투표를 실시하기로 한 것. 간누시와 엔나흐다가 정치적 불안을 조장했다는 것이 이유인데, 불신임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전체 217명 중 109명의 찬성표가 필요하다.# 설령 불신임안이 부결되더라도 엔나흐다로서는 빨리 정부를 구성하려면 연립정부 구성 정당들을 다시 회유해야된다는 문제가 생겼다.
천만다행으로 간누시에 대한 불신임은 실패했다. 이제 남은 것은 엔나흐다가 기존의 연정 대상들을 어떻게 달래주느냐에 달려있을 것으로 보인다.#
4. 2022년
그러나 2022년, 카이스 사이에드 튀니지 대통령의 쿠데타에 가까운 의회 해산과 대통령 중심제 헌법 개정으로 튀니지 혁명 이후 간신히 자리잡은 튀니지의 민주주의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엔나흐다를 비롯한 다른 정당들도 사이에드 대통령의 행보에 반발하는 중이고, 국민투표 거부 운동을 한 결과 헌법 개정 투표율도 27.5%에 그치는 등 국민들도 어느정도는 엔나흐다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 하지만 개헌을 막을 순 없었고, 이후 이어진 총선에도 엔나흐다와 니다 투니스 등이 보이콧을 선언하면서 모든 의석을 상실했다.5. 2023년
4월 18일, 당의 설립자인 라셰드 간누시가 경찰에 의해 체포당하고 당 본부도 경찰이 급습하고 봉쇄했다. # #5월 15일, 튀니지 법원이 라셰드 간누시에게 징역 1년형을 선고했다. #
[1] Hizbu Ḥarakatu n-Nahḍah[2] 이 당의 설립자이자 전 튀니지 국회의장[3] 전 튀니지 총리[4] 연합뉴스 VOA코리아 한국경제, 여성신문, 시사IN 등 수많은 국내 언론에서 온건 이슬람, 온건 이슬람주의, 온건 이슬람 민주주의 정당으로 언급한다.[5] 외교부에서 만든《2018년 튀니지 개황》은 이 당의 이름을 '부흥당'이라고 번역했다.[6] 후자의 경우 영어, 불어, 독어 등 여러 언어판의 위키백과에서 원어 명칭인 엔나흐다를 문서 제목으로 했으면서도 본문에서 엔나흐다의 다른 이름으로 르네상스를 제시한 것을 볼 수 있다. 참고로 스페인어판 위키백과는 아예 '르네상스당'이라고 직역을 했다.[7] 악명높은 탈레반의 사상적 원조이다.[8] 간누시는 지금에 와서는 현실주의 노선으로 방향을 틀었지만 부르기바, 벤 알리 독재정권 당시에는 이란 혁명 직후의 이란처럼 이슬람 종교지도자가 국가 원수가 되는 이슬람 공화국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9] 물론 마우두디는 문맹 퇴치 반대 행동 및 탈레반의 사상적 원조로 흑화하기 이전에는 촉망받던 천재학자였고, 무슬림 형제단은 지금이야 개막장 근본주의 집단이지만 과거 사이드 쿠틉에 의해 극단주의화 되기 이전에는 창립자 하산 알 반나의 극단주의 성향을 단원들이 뜯어말리는 등 최소한 자정 능력은 갖춘 단체였었다.[10] 참고로 벤 알리는 엔나흐다 후보들이 출마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11] 당대표인 간누시도 독일 슈피겔과의 인터뷰에서 "샤리아를 실시할 생각은 없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와 자유"라고 언급한 바 있다.[12] 모든 선거에서 남녀 동수 공천을 의무화했다.[13] '튀니지의 외침'이라는 뜻.[14] 무려 20석을 잃었다.[15] 여담으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슬람주의 정당 소속임에도 베일도 안 쓰고 정장 차림이다.[16] 여기까진 튀니지 헌법상 대통령의 권한이 맞았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