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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동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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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인도 철학
2.1. 브라흐마나 & 슈라마나2.2. 힌두교2.3. 근현대
3. 동아시아 철학
3.1. 중국 철학3.2. 불교 철학3.3. 한국 철학
3.3.1. 근대 이전
3.3.1.1. 삼국시대/남북국시대3.3.1.2. 고려시대3.3.1.3. 조선시대
3.3.2. 근대 이후
3.3.2.1. 서양철학의 유입3.3.2.2. 독일/프랑스철학3.3.2.3. 영미철학/과학철학3.3.2.4. 그리스철학/중세철학3.3.2.5. 동양철학
3.3.2.5.1. 전통 한국철학3.3.2.5.2. 중국철학3.3.2.5.3. 도가사상3.3.2.5.4. 불교철학
3.3.2.6. 기타
3.4. 일본 철학
4. 이슬람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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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양철학사를 다룬 문서. 특히 인도한자문화권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전통을 중심으로 다룬다.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논의에서 나타나듯 이른바 '동양'이라는 이름으로 상이한 지적 전통들이 도매금으로 묶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압바스 왕조 시대의 이슬람 철학이나 페르시아 문화권의 철학(falsafa)적 전통이 소위 '서양 철학사'에 자리매김하는 점을 고려하거나, 아니면 아프리카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아니아 문화권의 지적 전통까지 고려하게 되면 문제는 더더욱 복잡하게 된다.

따라서 아래에 서술된 분류는 어디까지나 편의상 이루어진 것일 뿐 이를 근거로 동양 철학의 범위를 규정해서는 안 된다.

2. 인도 철학

2.1. 브라흐마나 & 슈라마나

인도 문화권 철학은 크게 브라흐마나 계통과 슈라마나 계통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데, 브라흐마나 계통의 철학은 브라만 교의 성전인 베다의 권위를 바탕으로 그 뜻을 밝히고 보존, 계승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슈라마나 계통의 철학은 베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브라흐마나 계통의 사상은 브라만 교의 사제인 브라만 계급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브라만 계급의 특권을 합리화하는 카스트 제도의 계급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특별히 엄선된 제자들에게 비의적으로 전수되었는데, 그들의 사상은 베다의 부록인 브라흐마나, 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 슈라마나 계통의 사상은 非 브라만 계급 출신의 자유 사상가들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베다의 권위 및 브라만 계급의 특권에 도전적 태도를 취했으며, 각지를 떠돌면서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는데, 이러한 흐름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아지비카[1]의 선구자인 아지타 케샤캄발라, 자이나교의 개조인 바르다마나(마하비라), 그리고 불교의 개조인 석가모니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브라흐마나 계통의 사상과 슈라마나 계통의 사상은 공통적으로 종교적, 탈세속적, 출세간적 경향을 나타냈고, 이러한 경향은 인도 철학의 고유한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석가모니 붓다가 입적한 후 붓다의 가르침은 경(經), 율(律), 논(論) 삼장으로 결집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 교단은 상좌부(테라바다)와 대중부의 분열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분열을 겪게 된다. 이들 부파들은 제각각의 삼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팔리어로 기록된 상좌부 불교의 삼장(니카야)이다. 초창기 부파불교는 출가자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출가자만이 열반이 가능하며, 평신도는 여러 차례 환생을 거치고 출가자가 되고 나서야 열반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출가 수행 문화에 익숙하던 인도인들에게는 이런 교리가 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새로 유입되던 유목민 및 인도-그리스 왕국 출신 그리스인들에게는 불교 진입에 큰 장벽이 되었다. 대승 불교는 출가자와 평신도 사이의 차등 계율을 완화하고 평신도의 열반, 성불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진입 장벽을 낮추고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들에게 활발한 포교를 시작하였다.

불교 부파들 가운데 특히 사상적으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부파는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하던 설일체유부로서, 이 부파의 논사들은 '발지론',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아비달마 구사론' 등 주요 논서를 저술했다. 이들은 대체로 '무아(無我)'를 인정하면서 법(法)의 고정 불변성, 실재성 또한 인정하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이러한 경향은 자연히 교리의 배타성, 경직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팔리어 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자면, 법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면서 상속한다. 따라서 이런 논쟁이 벌어질 이유도 없다. 법은 연기하면 상속한다. 이 점은 언제나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었다. 다만 역사적 상황에 따라 종파들이 강조하는 점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아래 서술한 용수 역시 법이 너무 강조되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 무아, 공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에 2~3세기 경 나가르주나(용수)는 당시 흥기한 대승불교의 흐름에 따라 자아는 물론 법 역시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니 법이니 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이름으로써 가립된 것(名言所立)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절대적 공(空) 사상을 주장함으로써 대승 불교의 이론적 바탕을 정립했다. 이후 바수반두(세친)는 나가르주나의 절대적 공 사상을 발전시켜 마음 밖에 그 어떠한 실재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마음이 유일한 실재라는 유식(唯識) 사상을 정립한다. 바수반두 이후 인도 불교는 니야야, 상키야, 미망사 등 브라만 교에 기초한 사상들의 도전에 맞서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고, 디그나가(진나), 다르마키르티 등 탁월한 논사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밀교로서 명맥을 유지하던 인도 불교는 10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입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반면 불교와 경쟁하던 자이나교는 밀교화를 피하고 현재도 인도에서 살아남았다. 슈라마나 철학이 발전은 자이나교 존속에 국한되지 않고 이후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시크교가 발생하는데 영향을 준 것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수피 철학과 교단 구성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다만, 후기 인도불교는 티베트로 계승되어 상당량의 논서와 전통이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티베트 불교는 밀교적 성격을 가지면서, 교학적으로는 나가르주나 이후의 중관학 전통을 주로하고 있다. 이는 삼예의 종론의 영향인데, 중국 선승 마하연과 인도승 카말라실라(Kamalasila)간의 대론에서 카말라실라가 승리해[2] 중관학 전통이 지배적이 되었기 때문이다.[3] 이후 티베트불교는 총카파 등에 의해 독자적 발전을 이루었다. 현대에는 서구권에 성공적으로 전파되었고 현대과학과 종합을 추구하는 경향도 발견된다. 티베트 불교는 후기 인도불교의 계승자로서 현대불교학에서도 중요한 연구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다.

2.2. 힌두교

한편 브라만 교는 불교와 자이나 교의 도전에 직면하여 대대적인 혁신을 단행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쉬바 신앙과 남근(링가) 숭배, 요가 등 드라비다 민간 신앙적 요소들이 브라만 교에 편입되었고, 인도의 고전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의 일부분인 '바가바드 기타'가 경전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브라만 교는 인도아리아인의 민족 종교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범 인도적 종교인 힌두교로 개편되기에 이른다.

힌두교의 사상가들은 이전의 비의적 방식에서 탈피하여 공개적 방식으로 가르침을 설파하는 한편, 불교, 자이나 교 및 브라만 계열의 다른 학파들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그들의 이론적 허점을 공격하고 자신들의 이론의 우월성을 선양하고자 했는데,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학파들이 아래의 여섯가지 학파이다. 이들을 한데 묶어 육파 철학이라고도 한다.

니야야와 바이셰쉬카는 이들 육파 철학 가운데 형이상학적으로 다원론적, 원자론적 경향을 대표하며, 이성적 추론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보고 그에 따라 정교한 논리학을 개발했다. 한편 상키야와 요가는 세계는 다수의 자아(푸루샤)와 단일한 원질(프라크리티)의 결합으로 생성되며, 자아는 원질로부터 파생된 지성(붓디)을 통해 외부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 지성이 이그러지거나 혼탁해지면 대상이 있는 그대로 인식될 수 없으므로, 요가 수행을 통해 지성을 항상 맑고 교요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미망사는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바탕을 니야야, 바이셰쉬카와 대체로 공유하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및 유사성의 원천을 과거 및 전생의 경험이 아닌 선험적인 보편상에서 찾는다는 점 등에서 서로 구별된다.

베단타는 유일무이한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으로부터 현상 세계가 산출되었다는 일원론적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브라흐만과 현상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따라 샹카라의 절대적 일원론과 라마누자의 제한적 일원론으로 구분된다. 샹카라는 불교의 유식 사상을 수용하여 브라흐만을 고정 불변하며 어떠한 작용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현상 세계를 브라흐만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보는 반면, 라마누자는 브라만 교의 전통적인 전변설에 기초하여 브라흐만을 세계의 궁극적 원인으로 간주하고 현상 세계는 브라흐만으로부터 산출되어 나온 것으로 본다. 이들 학파들은 서로 자신들이 베다, 브라만 교 사상의 이론적 정통임을 강조하면서 브라만 교의 다른 학파들 및 불교 등 비 브라만 사상과 논쟁을 별였으며 그 결과 니야야는 바이셰쉬카와 연합하고 베단타는 상키야, 요가, 미망사를 흡수한다.

라마누자 이후의 베단타 철학은 종교적 색채가 한층 강화되면서 철학이라기 보다는 힌두교 신학에 가까운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게다가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후 이슬람이 침입하여 그 빈 자리를 대체하게 되는데, 이들은 비록 무력으로 인도를 정복했지만, 정교한 교리보다 독실한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적 특성상 불교와 같은 이론적 철학적 파괴력을 몰고 오지 못했다. 힌두교 신앙은 비슈누 신앙과 쉬바 신앙이 대표적인데 쉬바 신앙은 비슈누 신앙에 비해 대중적이었으나 철학적으로 그다지 두드러진 활동을 나타내지 못한 반면, 비슈누 신앙은 비록 대중적이지 못했으나, 마드바, 님바르카, 발라바, 차이탄야, 라마크리슈나 등 걸출한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라마난다, 카비르 등의 사상가들은 힌두교 전통을 거부하고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과 샹카라의 절대적 일원론을 절충하여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회통을 도모했고, 이러한 정신은 시크교의 개조인 구루 나나크 및 무굴 제국의 왕자였던 다라 쉬코에 계승되었다.

2.3. 근현대

이후 영국이 인도에 침입하여 쇠퇴기에 접어든 무굴 제국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강성한 시크교국과 마라타 동맹마저 제압한 데 정신적 충격을 겪게 된 인도의 사상가들은 힌두교의 개혁을 두고 서구화와 전통의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데, 람 모한 로이는 서구 문화를 수용하여 힌두교 전통을 개혁하고자 했던 반면, 다야난다 사라스와티는 힌두교의 개혁이 서구화가 아닌, 전통을 재발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고대에 인도로부터 불교가 유입되었던 스리랑카의 경우 싱할리족이 주로 믿는 상좌부 불교가 영국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의협을 받있으나 파아나두라 대논쟁에서 상좌부 불교계가 기독교 선교사들을 논파하면서 불교의 부흥이 이루어졌다. 일본 불교계 역시 파아나두라 대논쟁에서 불교계의 승리에 고무되었으며 이는 상좌부 불교 경전과 교리가 일본에서 연구, 재해석되는 계기가 된다.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인도 민족주의는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간디는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을 인도 철학이 전통적으로 지향해 왔던 해탈과 연결시킴으로써 정치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했다. 그 밖에 라마크리슈나의 제자인 스와미 비베카난다,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슈리 오로빈도 고슈, 인도 대통령을 역임한 라다 크리슈난 등이 근대 인도의 주요 사상가로 꼽힌다. 그리고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만년에 인도에서 오랫동안 그 명맥이 단절된 불교를 서구식 무신론,불가지론과 결합시키며 현대화인 방향으로 부흥시키는 운동을 폈다.

3. 동아시아 철학

3.1. 중국 철학

고대 중국에서는 황하유역에서 문명이 발달했으며, 사계절이 존재하고 자연현상 및 재해로부터 자연의 힘 앞에 무력한 인간을 보며 공포와 불안감 등을 느끼면서 자연을 바탕으로 미신을 믿어왔고 거북이 등가죽 등으로 점괘를 치는 등의 행위로 어느 정도 자연이 신격화 된 미신의 종교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이는 반복관찰 및 누적경험 등으로 터득된 현상법칙으로 인간의 힘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견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적정한 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후에 농경사회로 접어듦에 따라 관측이 중요해졌고 정착생활과 집단생활을 하다보니 자연적으로 인간관계와 물질에 대한 개념이 생기면서 사상과 정치제도가 발달하였다.

서주가 중국의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 중국 대륙은 윤리 도덕이라곤 없는 희대의 막장 상태였다. 고사성어를 공부해 본 사람들은 이 당시에 얼마나 많은 막장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를 알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죽이고 국가들은 민초의 고생과는 상관없이 전쟁을 계속했으며 신의는 박살나고 윤리는 죽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현실에 지옥이 도래해버렸다.

이 시대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맹자의 비판이 이렇다.
땅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통에 사람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성벽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통에 사람 시체가 성안에 가득하다.
『맹자』 중

이 시기 제자백가라는 집단이 나타났다.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이렇게 막장이 된 중원의 혼돈을 멈추고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였다. 즉 그리스 철학이 세상에 대한 '왜?'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면, 중국 철학은 '어떻게 이 지옥을 끝장낼까?'라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서 출발한 학문이다.[4] 그리고 이 지옥을 끝내기 위해서 부국강병, 정교하고 강력한 법 시스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지식인들의 정치공동체, 백성에 대한 보편복지, 권력의 정당성을 백성에게서 찾는 움직임, 침략전쟁에 대한 적극적 반대 등 온갖 대안들이 나오게 된다.[5] 그러나 어떻게 질서를 자리잡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자백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는 인의와 덕에 의한 통치를, 노자를 비롯한 도가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도에 의한 통치를, 법가는 법에 의한 통치를, 묵가는 겸애 사상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를 주장했다. 장자, 묵자, 양주 등은 아예 통치 개념과 국가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현대의 아나키즘에 가까운 주장을 펼치기도 하였다. 이들의 후학들은 제 왕조 직하학사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당시의 유가 및 법가 사상가들과 열렬한 논쟁을 주고받았으나, 전한 왕조의 통일 이후 이들에 대한 기록은 상당수 소실되었고, 그나마도 상당히 비판적으로 서술된 것만 남았다.[6]

처음에는 상앙, 이사의 법가식 통치에 의해 질서가 잡혀 강성해진 진나라가 통일왕조를 세우면서 법가가 대세를 타는 것처럼 보였지만, 진시황과 이사의 냉혹한 법가식 통치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진 왕조와 함께 단명했다. 이후 한나라가 건국되면서 초기에는 도가적 무위 통치가 시행되었으나, 동중서 이후 관학화를 거친 유가가 중국의 주요 통치 철학으로 자리매김하였다.[7] 결국 유학이 춘추전국시대부터 이어진 지옥을 끝내고 질서를 확립하면서 제자백가 중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대륙의 민중과 심지어 귀족층에게까지 도교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 역시 매우 많다. 한대 유학의 대세인 동중서의 유학조차도 어느 정도 '정치 권력과의 타협 + 유학이 다루지 않는 자연세계를 설명하기 위한 도교와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나라 시기에도 유학은 그 위치가 굳건했으나, 이 시기부터 중국이 국제교류를 활발히 하고 불교 같은 외래종교가 유행하면서 철학계의 새로운 경쟁자로 떠올랐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또다시 난세가 오자 유학은 위기를 맞이하는 듯했으나, 송 시기 고전 찾기 운동과 주희주자학 창시로 다시금 불교를 주류에서 밀어냈다. 그러나 주희의 주자학은 동시기 심즉리설을 주장한 육상산에게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며 명 시기에 왕양명도 육상산을 계승한 양명학을 창시하였다. 그리고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유교는 형이상학적인 기존 학풍을 버리고 고증학 시대에 접어들었다.

청 말엽 아편전쟁이 벌어지면서 중국 철학은 역사의 격동에 휩쓸렸다. 처음에는 '중체서용' 정신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그럼에도 중국은 서구 열강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근현대 중국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유학이 서양 철학에 비해 열등해서 이렇게 된 것이니 유학을 버리고 서양 철학으로 무장하자!'는 주장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수의 학자들이 유학과 서양 철학의 공통점을 찾으며 유학을 아주 버리자는 건 너무 지나친 주장 아니냐며 반박해보기도 했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중국 유학이 다시 재조명을 받는 데에는 긴 세월이 걸렸으며, 무엇보다 일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이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한편 중국은 기존의 유학을 폐기하고 중국인들을 이끌 새로운 사상으로 어떤 것이 좋은지 찾기 시작했다. 영미권의 철학자들이 중국에 와서 강연을 하기도 했으나 영국은 아편 전쟁으로 국민 감정이 남아 있었고 당시 중국은 침략받던 현실이였기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이때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중국으로 수입되었고, 공산주의의 반제국, 반계급 사상은 당시 중국의 현실과 맞물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8]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소련이 중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모조리 파기하는 등 공산주의 확산에 노력을 기울이고 천두슈, 리다지오 등을 적극 지원하면서 공산주의는 중국 지식인들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중국은 공산주의 이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를 맞았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중국에서 과연 과거 유학을 무조건 타파한 것이 옳은 것이었나 하는 회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중국 대륙이 중국 전통 유학에서 철저히 이탈해버린 것과 대조적으로 홍콩이나 대만에서는 계속 유학을 연구했는데, 현재는 중국도 과거 자신들이 버렸던 중국 철학을 다시 복원, 연구하고 있다. 다만 홍콩이나 대만의 유학이 심성유학 중심인 것과 달리 오늘날 중국의 유학은 정치유학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여담으로 현대 중국 철학을 비롯한 중국 학문의 중심지는 베이징에 있는 베이징대학이다. 베이징대학의 위상은 5.4 운동의 중심이 되면서 공고해졌고 대부분의 중국 지도자들이 이곳 출신이기도 하다.

3.2. 불교 철학

불교는 석가 족의 왕자인 석가모니가 우파니샤드를 기본으로 기존 브라만 교의 카스트 제도 등을 부정하며 만들어진 종교이다. 초창기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왕의 지원으로 인도 전역을 지배적인 종교로 급 성장하고 쿠샨 왕조 시대에 카니슈카 왕의 지원에 힘입어 중앙아시아로 전파된 이후, 상인들의 열렬한 지원에 힘입어 동아시아로도 전파되기 시작한다.

특히 쿠샨 왕조 시절 대승 불교는 과거 출가자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하던 기존 부파 불교를 개혁하여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이는 5호 16국 시대 중국에 유입된 유목민들도 대승 불교 교리를 적극 받아들이는 요인이 되었다. 유목민 지배자들은 한족이 비한족보다 우월하다는 중화주의를 대체할 목적으로 불교를 적극 보급하였고, 여기에 잦은 전란으로 염세주의 성향이 강했던 당시 한족 지식인들의 불교 교리가 크게 어필하면서 불교는 단순한 외래 종교를 넘어 동양 전통에 한 부분이 되었다. 특히 당시에는 이미 유교의 영향력이 축소되고 도가사상이 크게 유행하였는데 불교와 도가사상의 유사성으로 인해 불교의 유입이 더욱 쉬웠다.[9] 5호16국시대 이전에는 불교가 주로 장안과 낙양 및 서역 교역로 위주로 점과 선 형태로 퍼져 있었다면, 5호 16국 시대 이후로는 유목민족이 불교를 보급하고 불교를 믿는 한족이 계속 강남으로 남진하면서 불교가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동양 불교 교리와 철학의 발전은 불경 번역과 함께 발전했다는 점이다. 인도 문화권과 중국 문화권은 단순히 언어만 다른 차원을 넘어 문자 체계도 판이하게 달랐으며, 세속주의 성향의 중국 고대 전통 가치관과 내세지향적인 불교 사이에도 많은 간극이 있었다. 그러나 쿠마라지바현장 법사같은 여러 학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을 통해 불경 상당수가 한문으로 성공적으로 번역되면서 교종 불교는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교상판석을 거치며 여러 중국불교 종파가 성립하는데 특히 천태종과 화엄종이 특징적이다. 이후 교종 불교에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달마를 중심으로 선종 불교[10]가 발전하면서 중국 불교계의 발전은 중세 쇠퇴 일로를 걷던 인도 불교를 넘어선 고유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중국 불교의 발전은 이후 화북지방에서는 정복 유목왕조인 요나라 때도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 강남 지방에서 불교를 대체할 목적으로 유학의 일파인 성리학이 발전되면서 지식인들이 북방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이던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중국 불교는 지식 계층과 상공업 계층이 선호하던 사상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민간 기복 신앙으로 전락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교종, 선종, 정토교, 백련교 문서 참조

3.3. 한국 철학

한국 철학은 근대 이전엔 유불선의 강력한 영향하에 있었으며, 한국의 전통 철학사상은 이러한 불가나 유가 때로는 도가 사상을 배경으로 한국 특유의 독립된 교학적 발전과 체계화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 저변에 한국 고유의 신화, 종교(무속), 사상이 흐르긴 하였으나, 독립된 그리고 배타적인 하나의 종교적 사상적 철학적 흐름으로 체계화되지 못하거나 제한적으로만 이루어졌다. 근대전환기에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한국 고유의 사상들을 체계화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한국은 근대화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서양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학습하는 과정을 겪었으며, 학계는 물론 사회 전반에 걸쳐서 서양철학사상을 전면적으로 내면화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전통 철학사상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대체로 산발적으로 이루어지는 단계이며 통합적 연구는 과도기적인 연구성과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11] 이와 별개로 근현대 한국 철학사는 서양철학사상과 긴밀하게 연계되며 전개되었으며, 각각의 서양철학사상의 한국적 전개와 변용을 체계화해 정리하는 것 역시 필요한 작업이기도 하다.

3.3.1. 근대 이전

3.3.1.1. 삼국시대/남북국시대
삼국시대가 되면서 고대 왕국이 성립되자 기존의 토속 신앙들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의 수입이 시작되었다. 고구려는 삼론학[12]이, 신라는 유식학[13]과 화엄학이 발전하였다. 통일신라기에는 원효같은 독자적 불교사상가나, 의상같은 화엄종의 주요 인물이 신라에서 배출된다. 이후 통일신라 말에는 호족세력의 힘을 입어 선종이 유입 확산된다. 불교는 삼국시대에 한반도에 유입된 이후 오랜기간 한반도의 사상을 지배하게된다.[14]

삼국시대에도 유교 경전을 연구하고 교육하였는데, 삼국사기 같은 역사 기록이나, 금석문, 출토 목간[15] 등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유교 교육은 대체로 정치, 법률, 시, 문장 등 실용적 목적이 컸다. 다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다수의 천문 관측 기록을 보건데, 전한대 동중서가 정리한 천인감응설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16] 그러나 한당유학은 당대 불교에 비하면 철학적 깊이가 부족했기에 철학적 사상적으로 불교를 전면적으로 대체하긴 어려웠다.

삼국시대 도가의 영향과 관련해선 단편적인 기록이나 유물이 존재할 뿐이나, 노장사상, 도교, 외단술, 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 영향들 찾아볼 수 있다.[17][18] 백제나 신라[19]에서는 도교가 주도적인 사상이 되지는 못하였으나,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당나라의 힘을 빌려 도교를 강화하려 하기도 했다.[20] 이 과정에서 반발한 승려들이 고구려를 떠나버렸고, 얼마안가 고구려가 멸망하여 크게 의미를 갖진 못하였다.[21]

발해는 자체 기록을 찾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도교와 관련된 발해인 이광현의 자체 저서 4권을 예외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22] 이광현의 저술은 외단술[23]과 내단술을 아우르는 참동학적인 내용을 보여준다.
3.3.1.2. 고려시대
고려시대 불교교종선종이 갈등하게 되는데, 이를 천태종의 맥락에서 화합시키려 한 것이 의천이고, 화엄선의 맥락에서 종합한 것이 지눌이다. 이런 지눌의 정혜쌍수적 맥락은 오늘날 한국 불교에까지 이어진다. 원간섭기를 거쳐[24] 고려말에 이르면 불교는 세월이 지나면서 세속화되고 부패해 폐단이 늘어났다. 이에 대해 정치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불교계를 개혁을 하기 위해 지눌, 요세 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결국 성리학에 주도권을 상실한다.

고려의 유학은 과거제 실시후 더욱 본격화되기는 했으나,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보다 글이나 시를 짓는 제술 중심으로 발전했으며, 무신정변 이후 유학은 침체기에 들어선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경학 중심의 진흥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안향이 원나라를 통해 성리학을 받아들인다. 고려말에 들어서 유학자들이 정치적 주류로 들어서면서 부패한 불교를 몰아내자는 운동을 시작했고, 결국 조선이 세워지면서 유교 국가가 성립한다. 성리학은 도가사상과 불교 철학의 여러 측면을 흡수한 총체적인 철학사상이었기에, 기존의 불교 중심의 철학적 사상적 흐름을 대체할 수 있었고, 조선왕조를 거치며 외부로부터의 탄압과 내부로부터의 정체[25]로 인해 불교의 세는 약해진다.

고려에서는 도교 재초의식[26]이 국가차원에서 존재하였다.[27] 또한 죽림고회의 활동에서 노장사상과 위진현학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죽림고회와 가까웠던 이규보동국이상국집에서도 도가/도교적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28][29]
3.3.1.3. 조선시대
조선조에는 유교이념이 체계화 및 정리가 되었으며 성리학이 융성했다. 전기에는 현실 중심의 개혁을 강조한 관학파들과 도학 중심의 인간내면과 현실을 중시한 사림파들에 의해 조선유학이 발전하기 시작한다. 사림파의 집권 이후 성리학은 도학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많은 성과물을 내었다.[30] 이황의 뒤를 잇는 퇴계학파, 이이 이후의 율곡학파간의 논쟁, 그리고 율곡학파 내부의 여러 논쟁들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31] 그러나 이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이 쇠퇴하게 하는 반작용을 낳기도 하였으며, 이는 양난과 기근으로 시련을 겪었던 17세기에 성리학의 경직화로 두드러진다. 후에 기존 성리학의 지나친 이론화에 의한 경색을 비판한 사상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 이미 들어와 있던 양명학을 공부하는 강화학파, 성리학의 실천적 모습을 상실한 것을 비판하며 등장한 성호학파북학파,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종합한 정약용의 등장과 더불어 청의 고증학이 유입되기도 했다. 서학의 유입으로 카톨릭신학과 과학사상이 유입되어 조선성리학과 습합되기도 하였는데, 정약용이나 홍대용, 최한기 등에서 이런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이들은 전반적으로 주류가 되지는 못하였다.

조선조 불교학은 선종 중심으로 통합된 조선 불교 하에서 크게 융성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교학이 사장된 것은 아니어서 화엄학이 강설되었으며, 불교 내부에서 선법을 두고 논쟁 등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김시습 조선 후기에는 김정희와 같이 불교학에 관심을 갖는 유학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조 도가사상에 있어서는 도덕경이나 장자에 성리학적 관점에서 주석을 다는 경우가 있었고, 용호비결 같은 자체적인 내단학 저서를 유학자가 쓰기도 하였다.[32] 19세기 말에는 왕실 주도로 도교 권선서가 언해본으로 출판 및 보급되기도 하였다.

구한말에 이르러 조선은 서구 근대와 마주하게 되고, 이에 철학사상적 대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성리학의 계승을 기치로 내세운 위정척사파[33]이며 하나는 개화파다. 이 중 개화파는 그 안에서도 동도서기를 내세우는 온건개화파와 변법적 개화론을 내세우는 급진개화파로 나뉜다. 1905년 을사조약[34]체결 이후엔, 애국계몽사상을 기초로 자강을 추구하는 애국계몽운동이 일어나는데, 이는 당대 동아시아에 유입되어 유행하던 사회진화론의 논리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대안을 모색한 것이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움직임과 별개로, 아래로부터는 민족주의적인 신흥종교[35]에 기초한 움직임 역시 동시기에 발생한다.

3.3.2. 근대 이후[36]

3.3.2.1. 서양철학의 유입
한국사에서 서양철학이 최초로 유입된 시기는 서학의 형태로 17세기 조선에 천주교가 유입된 시기로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유입된 서양철학은 기독교와 습합된 중세철학, 그 중에서도 예수회의 관점이 반영된 것[37]이었다. 근현대철학이 유입된 시기는 더 이후의 일로, 구한말에 이르서다. 유학자들이 중국의 서책을 참고해 서양철학[38]을 소개하는 책들을 썼으며,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철학이 교육되거나 개화파 인사들에 의해 미국을 거쳐 철학이 소개[39]되기도 하였다. 1920년대엔 독일 유학파들이 독일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엔 경성제국대학[40]에서 철학 학위를 받은 인물들이 나왔으며, 이들에 의해 한국인 중심의 자체적인 학술적 서양철학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러한 학술적인 철학연구와는 별개로도 세계를 풍미하던 다양한 서구 정치사상이 한반도에 유입되었고[41], 이는 독립운동의 전개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다양한 정치철학적 경향들은 해방공간의 복잡한 상황 속에서 폭발하게 되는데, 결국 국내외의 복합적 요인으로 남북으로 나라가 나뉘게 된다. 이후 북한은 마르크스주의를 거쳐 주체사상으로 이어지며 사상적으로 경직된다.
3.3.2.2. 독일/프랑스철학
반면 한국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사상적으로 좀 더 유연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초기에는 독일철학이 지배적이었다. 1950~60년대 한국은 독일 관념론[42]실존주의[43]가 철학계 주류를 차지했으며, 이외에 현상학[44]도 상당히 연구되었다.[45] 1950년대 일민주의가 일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며, 1960년대 국민교육헌장은 독일관념론(헤겔, 피히테)과 성리학의 영향하에 작성되었다. 1970년대에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비판이론이, 1980년대에는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이 유입되기도 한다.[46] 1990년대에는 신합리주의[47], 포스트 마르크스주의[48], 후기구조주의 등이 새로이 유입된다.

프랑스철학의 경우, 한국에서는 80년대 말~90년대에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문학이론과의 연관속에서 주로 주목받았다.[49] 또한 소위 사회변혁운동 진영에서 대안이론으로 주목[50] 하면서 수입하기도 하였고, 2010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철학적 논의가 지속되었다. 2010년대엔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사상이 폭넓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에 개관적 서적이 많이 출판되었고, 연구 역시 늘어서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사상가[51]들에 대한 개별 연구 역시 양적으로 증가했다.[52]

2020년대 초 들어선 후기구조주의 이후 사상으로 신유물론이 하나의 담론이 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와 함께 포스트휴머니즘이나 사변적 실재론 계통의 사유가 언급되는 모습을 보인다.[53]
3.3.2.3. 영미철학/과학철학
영미철학의 경우,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유입되지 않았고[54], 1960~70년대에야 연구가 시작되었다.[55] 1980~1990년대에 들어선 영미철학 전공자들이 자리를 잡으며 영미철학[56] 연구가 본격화되며[57], 2000~2010년대 들어선 전문 학술지 발간으로 양적으로 더욱 확대되었다. 2010년대 전체 서양철학 논문에서 영미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31~38% 정도로 독일/프랑스철학이 차지하는 49~52%와 비교하면 다소 적지만 규모상 비교는 해볼 수 있는 수준이며, 인식론, 형이상학, 심리철학, 윤리학, 사회철학[58], 언어철학, 논리철학 등 다양한 하위분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에서의 과학철학의 경우 1940년대 후반 영미 유학파 학자들의 강의가 있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으로는 1970년대 후반 분석철학 연구가 활성화되면서 그와의 연관속에서 과학철학이 하나의 연구분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과학철학에서의 관심은 주로 토마스 쿤[59]의 것이 주목받았고, 논리실증주의와 포퍼의 과학철학관 역시 참조되었었다. 1980~1990년대에는 과학철학 분야의 연구논문이 급속히 증가[60]하였다. 2010년대 한국 과학철학계의 연구는 크게 일반 과학철학[61] 연구, 특정 개별과학과 관련된 연구, 과학기술과 사회와의 관계[62]와 관련된 연구로 나눠볼 수 있으며 세 부문 모두에서 연구가 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이 외에 과학철학으로 분류될 여지가 있는 수학철학과 STS(과학기술학)의 경우, 수학철학은 논리철학의 한 분야로서 연구되는 편이고, STS는 기존 과학철학과는 연구자 구성과 활동이 구별되는 모습을 보인다.
3.3.2.4. 그리스철학/중세철학
그리스철학의 경우, 본격적으로 연구된지는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았다. 과거에는 개론 정도만 소개하고 알고 넘어가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본격적 연구는 박홍규 교수가 1970년대[63]에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80년대에 그 제자들이 자리를 잡으면서야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고전 번역도 2000/10년대 들어서야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64] 헬레니즘로마 철학의 경우는 서양도 20세기 후반에야 본격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진 케이스로, 한국도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들어서야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020년대 들어선 이 시기와 관련된 여러 책이 번역중인데 키케로 전집이 대표적이다. 연구 측면에선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에 대한 연구는 이루어지고 있으나, 회의주의나 신플라톤주의는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부족한 편이다.

중세철학/기독교철학의 경우, 초기교부 분야에선 1987년부터 출간된 분도출판사의 교부문헌총서에서 주요 교부들[65]의 라틴어 원전 번역이 꾸준히 나오고 있으며, 2010~20년대 기준 타 출판사에서도 초기 교부들의 저작을 번역 출간하고 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연구는 개신교 신학계의 영향도 있고 하여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다만 동방교부 전통의 원전 번역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으며, 정교회 출판사에서 정교회 교부총서 형태로 동방교부들의 전기가 나오는 정도다. 초기 스콜라철학[66] 분야는 간간히 연구가 이루어지고는 있으나 연구분야로서는 소외된 편이다. 전성기 스콜라철학 분야에서는 출판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 2023년 기준 39권까지 출간되었으며,[67] 대이교도대전이 2015년 이후로 번역중에 있고, 그 외의 보나벤투라의 몇 작품들도 원전 번역이 이루어졌다. 2010년대 이전까지 한국 중세철학 연구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편이기에 이 시기에 대한 연구는 그래도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고 할 수 있다. 후기 스콜라 철학 분야는 2010년대 들어 중세철학의 연구 범위와 주제가 확대되는 대상이 된 시대[68]로, 오컴, 쿠사누스,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의 저작들이 번역되었으며, 스코투스, 오컴, 쿠사누스, 에크하르트에 대한 여러 연구가 이루어졌다.
3.3.2.5. 동양철학
현대 한국에서 전통 철학사상에 대한 연구는 '동양 철학'이라는 이름하에 이루어지고 있다.[69] 여기에는 주로 중국 철학과 한국 철학이 연구되고 일본사상[70]은 상대적으로 잘 연구되지 않는다.
3.3.2.5.1. 전통 한국철학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근대적 학제가 체계화되는 과정에서 한국 철학의 전통이 이어지지 못하면서[71] 1950년대에 동양 철학은 침체기였다. 1960년대에는 그래도 주목할만한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72]했으나 다소 훈고학적 경향에 치우쳐있었다.

1970년대 민족문화, 민족 주체성에 대한 담론이 등장하면서야 이전의 개괄적 연구에서 벗어나 각론적 연구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에 퇴계학 붐이 일기도 했다. 다만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같은 서양철학 틀에 맞춰 한국전통철학(주로 성리학)을 연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 당시 철학계를 주도하던 한국철학회[73]에서는 적극적으로 한국 철학의 정립과 탐구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으며[74], 서양 철학 전공자들이 한국 철학과의 비교철학 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1980년대에 이르면 연구자가 증가하며 학회와 연구소가 생기고, 특정 학자[75] 개인에 대한 연구소들도 생기기 시작한다. 또한 연구 범위에서도 고려 이전 유학, 조선 후기 유학, 서학과의 관계 등에 대한 연구로 확대되며, 연구 방법론 차원에서도 기존 훈고학적 연구 경향에서 탈피할 뿐 아니라, 서양철학 개념에 의존한 기존 연구에서도 벗어나 독자적 연구방법론과 분석 틀을 모색하는 모습을 보인다.

1980~1990년대엔 이미 증가한 동양 철학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한자투 번역으로 인해 대중화에 한계가 있었는데, 김용옥의 등장으로 방송에서 일상어로 동양 철학이 강연되며 크게 흥행하였고 동양 철학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된다.[76] 이후 1990년대에는 일반 대중을 위한 입문서들이 다수 출간되기 시작한다. 1990년대에 이르면 유학사상에 한정해서도 박사학위 논문이 매년 20여편이 나올 정도로 연구가 양적으로 팽창한다.[77] 이 시기엔 유학사상의 현대적 의의를 논하는 경우가 늘어나며, 동아시아 국가들의 빠른 경제발전에 대해 설명하는 '아시아적 가치'라는 유학 담론이 한 예다. 90년대 후반엔 국제화, 생태주의, 페미니즘과 연관 속에서 유교를 논하는 경향도 등장한다.

2000년대 들어선 주요 철학자의 문집[78] 정본화와 번역이 진행되어, 2010년대 초부턴 성과가 출간되기 시작하였다. 2010년대엔 실학 분야 연구가 두드러지는데, 2012년 이후 실학 분야에서 연구총서가 꾸준히 출간되었으며, 논문[79]에서도 전통적으로 연구 비중이 높던 한국성리학 부문을 2018~2020년엔 한국실학 부문이 그 수에서 앞질렀다. 또한 한국철학사의 여러 시기/주제에 대한 철학사 서적들[80]이 출간된 시기이기도 하다.
3.3.2.5.2. 중국철학
1950~1995년 기준 유가 철학과 불교 철학 연구 비중은 4:1 정도로 유가 철학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진 편이며, 유가 철학 중 한국성리학이 1/3 정도를 차지하고, 나머지 2/3인 중국 철학은 주로 선진유학 연구 중심이다. 그 뒤를 송명유학이 뒤따르며, 한대유학이나 청대유학은 연구비중이 낮다.[81] 2010년대 기준 동양철학 내부 분야별 비중은 한국철학[82] > 중국철학[83] > 불교철학[84] > 기타[85]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중 중국철학 분야 연구는 중국철학의 주요 인물[86]들과 전통적 주제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는 있으나, 신진학자들에 의해 주목받지 못하던 인물들과 주제가 주목되는 추세다.

소위 '동양철학' 연구는 그 특성상 중국과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1960년대엔 중국 대륙과는 냉전이라는 이념적 대치상황이었고 또한 당시 중국은 마르크스주의가 전면화되어 전통이 억압받던 상황이었던 이유로, 중국어권 유학파들은 주로 대만으로 유학을 가 공부하게 된다. 이들 동양철학 유학파들이 받은 영향은 주로 대만의 현대신유학자들[87]의 것이었다. 중국 대륙과의 관계는 많은 경우 마르크스주의적인 것이었으며, 1980년대 사회 분위기 변화와 더불어 한국에서 마르크스가 읽히는 과정에서 중국 대륙의 유물론적 관점의 중국사 저술이나, 마오쩌둥의 저술이 유입되어 읽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개방이 시작된 이후 중국 사상계에도 변화가 일었는데, 이로인해 80년대에 발생한 중국 대륙의 문화열이나 90년대에 발생한 국학열 같은 당대의 흐름이 소개되기도 하였으며[88], 2010년대 이후로는 대륙신유가의 새로운 경향[89]들이 비판적으로 소개되었다.
3.3.2.5.3. 도가사상
도가 철학과 관련해선, 1970년대 이전까지는 도가철학 전문 연구자가 거의 없었는데, 이는 동양철학 하면 유가를 중시하는 전통의 영향이었다.[90] 따라서 전문적 연구는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시작[91]되었으며, 1980년대 들면 어느정도 면모[92]를 갖추게 된다. 1990년대에는 서양 철학 분야에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 계통의 사유가 유입되면서 이 둘의 유사성에 주목하는 연구들이 다수 나온다. 2000년대엔 기존의 도가사상을 노장사상에 한정해 보던 관점에서 벗어나 잡가적 혹은 황로학적 인물과 텍스트[93]를 도가의 분류 하에 연구하게 되었다.[94] 또한 다수의 노자와 장자 주석서들이 번역되었으며[95] 마왕퇴 백서노자와 곽점 죽간노자에 바탕한 새로운 문헌학적 연구가 진행되었다. 주제면에서 노장사상은 과거부터 근대 물질문화 비판에 대한 맥락에서 많이 연구되어왔고 2000년대에도 이러한 맥이 이어졌으나, 이와 별개로 노장사상을 정치사상으로 보고 연구하는 경향이 이 시기에 대두되었다.
3.3.2.5.4. 불교철학
불교 철학은 주로 선학, 화엄학, 유식학, 중관학 연구 중심이다.[96] 60년대까진 학자들이 일본에서 수학해 일본의 불교학 영향이 컸다.[97] 70년대에 서구에서 불교학이 주목받고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서도 불교와 불교학에 관심이 커지기 시작하였다.[98] 70년대까지 한국 불교학은 서구에서 근대 불교학을 배워온 제한된 수의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전반적으론 일본풍 불교학의 영향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 이후로는 연구의 양적 성장과 함께 일본불교학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99]의 박사논문이 나와 급격한 양적 팽을 보여준다. 70~80년대에는 사회적 분위기 변화와 더불어 민중불교 이론이 나오기도 하였고, 80년대 불교계에선 성철에 의해 돈점논쟁이 일어난다. 90년대에는 불교고전의 한국어 번역이 이루어져[100] 2001년 318권의 한글대장경이 나왔으며, 2007년부터는 한국불교전서가 번역되고 있다.[101] 2000년대부턴 유럽[102]에서 수학한 이들이 고전어(산스크리트어, 빨리어, 티베트어)를 토대로 초기불교, 인도불교, 남방불교, 티베트불교를 다양하게 연구하게 되었다.[103] 또한 이 시기에는 그동안 침체기로만 평가받던 조선시대 불교가 연구가 증가하며 재조명되기도 한다. 2010년대엔 지난 20~30년간의 여러 불교학 내부의 논쟁들이 재검토 되었고[104], 2015년에는 원효전서 번역총서가 정리되어 출간되기도 하였으며, 불교철학 분야 연구에서는 유식학파[105], 아비달마불교[106], 중관학파[107]에서 여러 연구성과가 나왔으며, 불교인식논리학 분야 연구도 축적되어 가는 추세다.[108]
3.3.2.6. 기타
동양 철학에서 인도 철학 분야[109]는 연구가 미진한 편이다. 그 외에 이슬람 철학도 거의 연구가 되지 않으며, 동서양 이분법에 들어가지 않는 다수 지역의 철학이나 사상에 대한 연구도 미진한 편이다.[110]

한편 전통적인 한국 철학에서 유교와 불교에 모두 반대하는 사람들이 동학을 중심으로 하여 비유교, 비불교 전통 한국 철학을 종합하여 대안적 제3의 노선으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3.4. 일본 철학

일본의 철학사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비슷하게 따랐으며 한국의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통해, 삼국시대가 끝나갈 때는 견수사, 견당사를 보내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다.[111] 고려말~조선 중기까지는 왜구의 난리와 임진왜란으로 한반도와의 교류는 소원했으나 임진왜란 후 통신사를 통해 문물을 전해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동아시아에서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가장 활발하게 받아들였다.

일본으로 들어온 사상이나 철학들은 원래의 내용과 상당히 달라지는 모습을 보인다. 예컨데 형이상학적인 주자학에서 일본의 주자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부정했고 맹자에서는 역성혁명 부분을 빼버렸다.[112] 또한 일본에서는 기독교도 원래 서양 기독교 신도들이 보기에는 이질적으로 변질되었다.

다만 일본의 불교 전통은 타국의 불교 전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보인다. 신불습합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나, 이런 습합적 요소는 어느 지역의 불교든 보이는 모습이기 때문에 일본만의 특성이라 보긴 어렵다. 동아시아 타 지역에 비해 밀교가 특히 발달한 점이 특이할 뿐이나 교리나 사상적으로 유별나지는 않다.[113] 일본은 전근대부터 팔만대장경에 대한 관심을 보여온 모습에서나, 초기근대에 불교학 연구를 활발히 한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정통불교에 대한 관심이 컸다. 최근에도 근대 불교학 연구가 일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고 이들이 불교학 연구에서 상당히 주류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일본불교가 유별나게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많은 일본의 사상이나 문화의 기저에는 불교 철학이 저층에 흐르고 있다. 앞에서 언급된 주자학이나 기독교 수용 과정에서의 변용도 실은 불교의 영향이 상당하다. 즉, 우리가 '일본화'라고 생각하는 것 상당수가 물론 소위 '일본 고유 사상'의 영향도 있겠으나 '불교화'의 결과인 부분도 상당함을 고려해야 한다.[114]

후대로 갈수록 중국인도의 영향을 적게 받은 고유 사상[115][116]이 체계화된다. 중세시대에 엔노 오즈누슈겐도를 설립했는데, 그에 일부부 영향을 받아 신토가 체계화 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본 고유사상의 체계화는 전국시대 즈음 계속된 전쟁으로 발전이 둔화 되었다. 하지만 다시 에도 막부 시대에 국학이 발전하며 일본 고유의 사상이 다시 체계화 된다.[117] 메이지유신 전후로 유교식 근왕주의가 이와 결합하여[118] 훗날 일본군국주의화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낳기도 했다.

서구문물을 일찍부터 접하면서 서양 철학 책도 일찍부터 번역했다. '철학'[119]이라는 단어부터 좀 더 전문적인 개념들까지 다양한 한자어 철학 개념이 일본에서 번역어로 조어되고 선택되었다. 특히 일본이 독일을 근대화의 롤모델로 삼으며 독일관념론이 중시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서양 철학에서 독일 철학 외에도 영미 철학, 프랑스 철학 등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마루야마 마사오가라타니 고진 정도가 자주 읽히는 편이다.

4. 이슬람 철학

고전 그리스 학문은 이슬람 황금기 가운데 중흥을 맞이했다.[120] 이슬람 제국에서는 '알고리즘'으로 알려진 알 콰리즈미, 알 파라비 등을 비롯해 뭇 학문 분야에서 뛰어난 학자들이 출현했다. 논리학, 형이상학 등에서 큰 업적을 남긴 이븐 시나는 이후 유럽 철학에 큰 유산을 남겼다. 비록 이븐 시나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철학은 이슬람의 가르침과 부딪히는 점 등으로 인하여 알가잘리 등 여러 이슬람 철학/신학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이후에도 이어져 '(아리스텔레스의 유일무이한) 주석가'로 불리기도 하는 이븐 루시드 같은 철학자[121]를 통해 알안달루스를 거쳐 결국엔 서유럽에도 도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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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전에서는 사명파(邪命派), 사명외도(邪命外道)로 나와 있다.[2] 단, 중국측 문헌에서는 마하연이 서간으로 대론을 이어간 끝에 승리했다고 주장한다.[3] 단, 닝마빠 및 까규빠 등에서는 마하연의 주장에 일부나마 동의하는 의견을 표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족첸 수행법 등의 예가 있다.[4] 물론 중국 역시 '왜?'라는 의문을 중시한 학파들이 있었으나, 전쟁이 끊이지 않는 판국에서는 아무래도 설득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사그러들고 말았다. 이후에도 이런 경향은 부의 축적, 과학과 기술의 발달, 아름다움의 추구 등에 대해서, 그래서 그것들이 선하고 어진 것보다 중요하느냐? 사람들의 풍속에 그런 거 필요없다! 하는 물음과 주장을 던져 데꿀멍시키게 만드는 흐름으로 나타난다.[5] 이러한 현실적 이유 때문에 이 시기 철학들은 인식론이나 형이상학보다 윤리학, 사회 철학에 더 전문성을 보인다. 또한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보니 이들의 서적은 2000년 전의 서적임에도 기초적인 배경지식만 갖추면 쉽게 읽을 수 있다.[6]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판적 기록들은 춘추전국시대 당대에 이들 사상이 어떤 특징과 인기를 가졌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사료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맹자는 묵자와 양주를 함께 비판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 글 덕분에 후세의 연구자들은 당대에 묵자의 겸애론과 양주의 위아론이 가진 위상과 그 특징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7]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의 기록과 사마천 본인의 사기를 대조하면 이 헤게모니의 변화를 간단히 알 수 있다.[8] 이건 중국뿐 아니라 대부분의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에게서 일어났던 현상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이 시기 공산주의 세력이 커졌다.[9] 이런 현상은 초기 중국불교가 격의불교의 형태를 보인 것에서도 나타난다.[10] 선종은 중국불교가 도가적 사유와 융합된 것으로 진정 중국적 불교라 평가받는다.[11] 학계차원에서 1990년대 '한국사상사대계'(6권)가 출간된 바 있으나, 논문집에 가까웠다. 최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이를 계승하여 '사유의 한국사'라는 이름으로 한국철학사를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나 10년 기획이므로 완간까진 아직 먼 이야기다.[12] 승랑이 유명[13] 원측이 유명[14]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를 받아들이고 공인한(372년) 이후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이 건국될 때(1392년)까지 무려 1천년이 넘는다.[15] 평양(낙랑), 인천(백제), 김해(신라 혹은 가야) 등지에서 논어 목간이 출토되었다.[16] 백제의 오경박사 경우를 보아도, 중국의 오경박사가 동중서 이후에 등장한 것을 고려하면, 삼국시대의 한대유학 유입 경향을 추측해 볼 수 있다.[17] 삼국사기 기록에는 백제의 군인 막고해도덕경을 직접 인용한 케이스를 찾아볼 수 있으며, 고구려의 군인 을지문덕여수장우중문시도 해당 인용과 같은 맥락에서 해석되곤 한다. 일본 의서 의심방에는 백제 의서 1권(백제신집방) 신라 의서 3권(신라법사방, 신라법사유관비밀요술방, 신라법사비밀방)에서 총 6번의 인용을 하고 있는데 도교적 관념을 찾아볼 수 있다.[18]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발견되는 약사발에 붉은 액체가 담긴 그림, 천마총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주사와 운모는 고구려와 신라에서 외단술이 유행했음을 보여준다. 신라 고분에서 발견된 재료들은 갈홍의 포박자에서 제시된 연단술 재료들과 상당히 겹친다. 또한 양나라 도홍경의 기록에 따르면 금은 그 독성때문에 잘 연단하지 않으면 죽지만, 고구려에서 연단한 금은 먹어도 괜찮다고 하였다. 오늘날 순도 높은 금은 공진단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조금 먹어도 큰 이상이 생기지는 않는데, 고구려의 제련술이 그만큼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금을 먹는 것은 갈홍 계열의 연단파인 금사파에 기초한 것인데 고구려에도 이 계통의 연단술이 유입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금사파는 황금과 단사를 복용했는데, 연홍파, 유황파와 함께 연단파의 대표적 세 조류 중 하나다.[19] 신라인 입당유학생인 김가기같은 도사의 경우 신라로 귀국했다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다시 당으로 돌아간다. 다만 최치원이 남긴 도가사상에 대한 기록들에서 보듯이 신라에서 도가사상이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 또한 아니다.[20] 기록상으론 이때 도교가 들어온 양 서술되어 있으나, 유물을 보면 이미 이전에 도교가 유입된 흔적이 발견된다. 이시기의 도교 강화는 당시 도교를 국교로 삼던 당나라와의 유화책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21] 김윤경. 『한국도교사』 참고하여 작성[22] 도교판 대장경이라 할 수 있는 '도장'에서 20세기 말에 발견되었다.[23] 이광현은 납과 수은을 중심으로 하는 연홍파 계열을 지지한다.[24] 당시 원나라 황실이 티베트 불교를 신앙했고 고려도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 500년과 근대화를 거친 현대 한국불교에도 건축, 탱화, 진언 등에 티베트불교의 흔적이 부분적으로나마 남아있으니, 고려말 당시에는 영향이 더 컸을 것이다. 원말 황실에서는 '헤바즈라 탄트라' 같은 소위 좌도밀교 성전의 의례들이 행해지기도 했는데, 원나라 불교가 고려 불교에 영향을 미친 부분을 고려하면, 고려말 불교의 부패라는 것이 이러한 측면과 연관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신돈이 숙청당할 당시 기록에도 이런 추측을 가능케하는 내용이 남아있다.[25] 동아시아 불교가 전반적으로 그러했다. 예를 들어 중국도 송나라 이후로 동아시아 불교에 새로운 사상적 흐름이나 수행론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는 발원지인 인도에서 불교가 영향력을 상실하고 내외적 요인으로 소멸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후 서양이 불교를 재발견하였고 서양철학도 불교를 포함한 인도철학의 영향을 일부 받게 되는데, 동아시아에서도 근대 들어 불교의 철학적 면모로 인하여 서양철학에 대응할 전통으로서 불교가 새로이 주목받고 연구된다.[26] 초제 자체는 태조때부터 구요당에서 행해졌다.[27] 예종 시기에 고려에 최초로 도관인 복원궁이 세워졌다. 북송의 휘종에게 도사를 요구해 도관을 세웠으므로 북송 휘종대 도교의 영향이 있었다 볼 수 있다.[28] 참동계를 언급하기도 하고, 노자와 장자에서 직접적 인용을 하기도 하며, 구체적으로는 단약, 내단, 도교 신격, 도가사상(무위無爲)에 대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29] 북한에서는 유물론/관념론 도식으로 철학사를 기술하므로 한국철학 전통에서 유물론적 철학 논변을 한 최초의 인물로 이규보를 꼽아 중시하기도 한다. 조선시대 철학자들 중에서도, 서경덕이나 최한기같은 기(氣)중심의 철학을 전개한 인물들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런 기(氣)중심 철학은 사실 마르크스주의적 유물론과는 상당히 다른 도가적 차원의 논변이며, 유물론/관념론 도식이 강조되는 구도에서 나오는 철학적 맥 찾기에 가깝다.[30] 이에 '주자학은 중국에서 나와 조선에서 완성되었다.'는 평까지 있었을 정도이다.[31] 조선성리학 주요 논쟁으로는 태극논쟁, 사단칠정논쟁, 인심도심논쟁, 호락논쟁, 심설논쟁 등이 있다.[32] 용호비결은 별권으로도 존재하나 책 해동전도록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한국 도가의 맥을 세우는 도가서들이 등장하는데, 17세기에 이르러 등장한 해동전도록, 청학집, 해동이적 같은 책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당대 선불교나 성리학이 법통이나 도통을 세워 강조하는 경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성립될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소위 선도사서들의 내용이 온전히 사실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다만 조선대 한국 도가가 그 맥을 어디에서 찾았느냐는 살펴볼 수 있다. 해동전도록은 조선 내단파의 기원을 종리권에서 찾고 있는데 이는 중국 전진교에서 그 근원을 찾는 경향을 보여준다. 청학집은 그 맥이 광성자(삼황오제대 신화적 인물)에서부터 시작해 환인, 환웅, 단군을 거쳐 내려온 것으로 그리고 있으며, 해동이적(전기집 형태)에서는 그 원류를 단군에서부터 기술하고 있다. 후자의 경향들은 조선 단학파가 성장하면서 이전시대 신선 내지 소위 선파仙派 인물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자신들의 원류를 이에서 찾는 과정에서 이들 선파계 인물들이 도맥에 합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해동이적은 한국 선파를 중국과는 다른 기원을 갖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33] 이들은 대체로 조선성리학의 주리파적 경향에서 유래한다.[34] 을사늑약, 혹은 제2차 한일 협약[35] 이 신흥종교 흐름은 동학에서 큰 영향을 받는다.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 무속, 서학등 당대 조선의 다양한 사상적 조류들의 영향을 받아 성립되었다.[36] 스탠포드철학백과사전 Korean philosophy 항목, "영미철학의 수용방식과 우리철학의 가능성" (이유선, 2018), "한국철학계의 동향과 특성" (김종명, 2010), "한국의 학술연구 제1집(철학,교육학,심리학,화학)" (대한민국학술원, 2000), "학문연구의 동향과 쟁점 2집(철학,심리학,교육학)" (대한민국학술원, 2012), "학문연구의 동향과 쟁점 12집(철학,미학,종교학,심리학,교육학)" (대한민국학술원, 2022), 중국 고전 철학의 이해 (세창출판사, 2022), 한국 불교학의 연구방법 특성과 한계 (불교평론, 2021) 등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음[37] 대표적으로는 천주실의가 있다.[38] 이정직, 이인재 같은 인물들이 칸트철학이나 그리스철학을 소개하였다. 이들은 주리파에 속하는 인물들이었고, 조선의 전통적 유학자들도 서양철학에 관심을 두었음을 보여주지만, 그 수용 방식은 성리학 중심의 비판과 절충에 가까웠다.[39] 대표적으로는 유길준서유견문[40] 1924년 설립[41] 아나키즘, 마르크스주의, 자유주의, 파시즘 등 다양한 정치사상이 유입된다. 이 경우 유입경로는 일본에만 제한되지 않았으며, 미국, 중국, 소련 등을 통해서도 유입된다.[42] 주로 칸트와 헤겔[43] 여기서는 니체, 하이데거, 야스퍼스를 주로 의미[44] 대표적으로 후설[45] 이 시기까지만 해도 일본의 독일철학 연구 전통과 연속선상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말 이후로 독일 유학파들이 증가하면서 일본철학계의 영향에서 점점 벗어나게 된다. 또한 소수 주요 철학자에 집중하는 경향에서도 점점 벗어난다.[46] 군사정권의 세가 약해지며 억압되었던 마르크스주의 계통의 사유가 재유입된 것.[47] 롤즈, 포퍼 등을 의미. 이 시기에 하버마스도 재조명된다. 하버마스는 그 자체 철학의 영향도 있으나, 군사정권 시절엔 마르크스주의로 넘어가는 매개적 역할을, 동구권 몰락 이후인 90년대에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이탈하는 매개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48] 좁은 의미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 속하는 라클라우나 무페가 이 시기에 논의가 되었고, 넓은 의미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로 분류되는 철학자들 여럿도 이 시기에 소개되었다. 후자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90년대 중반 한국에 처음 소개된 지젝이 있다.[49] 다만 오늘날 '프랑스철학'이라고 규정되는 특정 조류들은 막상 80년대 프랑스에서는 '신철학자' 집단의 등장 이후 하락세에 있었다. 소위 '프랑스철학'이라는 철학적 경향은 실은 미국에서 연구 계승 발전된 측면이 크며, 한국에도 미국이 주된 유입경로였다. 프랑스에서 '프랑스철학'의 약세는 20세기 말까지도 이어졌으나, 21세기 들어서는 이러한 철학적 경향이 재유입되기는 하였다. 다만 여전히 프랑스사회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크롱이 '프랑스철학'에서 유래한 정치운동을 '미국적'인 운동으로 규정하는 발언을 한 것은 이러한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50] 당시 '프랑스철학'은 마르크스주의를 전체주의적 함의를 갖는 것으로 비판하면서 자유주의로 나아가는 경로가 되었다. 반면 이에 반대해 '프랑스철학'과 마르크스주의의 소통과 융합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51] 들뢰즈, 푸코, 라캉, 데리다, 알튀세르 등. 들뢰즈의 경우 출판물로 나온 연구 성과가 많이 나온 점이 특징적이다. 또한 이들과의 연관 속에서 스피노자에 대한 주목도 이 시기에 이루어진다.[52] 본격적인 연구물이 다량 출현한 것은 2000년대 부터이나, 201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증가추세를 보였다.[53] 전반적으로 이들 철학적 경향은 소위 '대륙철학'에 더 가까운 것으로 분류될 수 있으나, 일부를 제외하면 막상 영미권 철학자들의 비중이 더 큰 것이 특징적이다.[54] 강의가 아예 없지는 않았고 사립대 위주로 있기는 하였다.[55] 1960~70년대에도 연구가 서서히 시작된 것이지 주류는 아니었다. 1960~70년대 독일철학 논문이 450편 나올 때 영미철학은 52편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영국경험론에 대한 연구는 극소수였다.[56] 주로 분석철학(주로 언어/논리철학과 과학철학)과 영국경험론. 실용주의는 교육학에서 주로 논문이 나오고 철학으로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은 편이다.[57] 영미권 철학자로는 이 시기 이전에는 듀이, 러셀, 비트겐슈타인 정도가 관심을 받았으나, 이 시기에 포퍼, 콰인, 프레게 그리고 영국 경험론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였으며, 좀 더 최근 철학자들인 퍼트남, 크립키, 데이빗슨, 헴펠, 괴델, 설, 로티, 굿맨, 반 프라센, 라일, 포더, 루이스 등의 철학자들이 새로 소개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외에 화이트헤드도 상당히 연구되는데 화이트헤드는 그 사변적/형이상학적 특성상 일반 영미철학 연구자 그룹들 보다는 관심있는 일부 연구자들에 기댄 것이었다.[58] 윤리학과 사회철학 분야의 경우, 롤즈가 90년대에 이르러 (번역을 통한 수용 시기는 70년대까지 올라간다.) 긍정적으로 검토되었고, 영미권에서 80~90년대에 진행된 자유주의-공동체주의 논쟁이 한국에도 90년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후 이들 영미권 철학이 대중적으로 영향을 갖게 된 계기는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2010년에 흥행하면서이고, 2020년대 초에도 샌델의 타 저서가 다수 번역/판매되는 모습을 보였다.[59] 당시 세계 과학철학 분야에서 큰 변화를 불러왔던 것이 유입된 것이다.[60] 이러한 활성화의 배경에는 장회익, 김용준 등 과학 분야 인물들의 현대과학의 성과와 그 사회적 함의에 대한 논의와 토론의 영향도 있었다. 한국과학철학회의 경우 1995년에 장회익을 회장으로 창립된다.[61] 논리학, 언어철학, 분석형이상학과 관련되는[62] 이 시기 이 부문은 주로 인공지능이 문제가 되었다.[63] 70년대까지만 해도 그리스철학 연구는 서너명이 그 맥을 이어온 정도였다.[64] 박종현 교수, 정암학당 등이 대표적[65] 아우구스티누스 포함[66] 9~12세기 에리우게나, 안셀무스, 아벨라르두스 등의 인물이 활동한 시대[67] 1985년 정의채 신부에 의해 번역이 시작되고, 2016년 후로는 이재룡 신부가 전담 하 한국성토마스연구소차원에서 번역이 이루어지는 중이다.[68] 이전까지는 스코투스 연구가 이루어진 정도였다.[69] 2010년대 철학논문에서 61~66% 정도가 서양철학을 주제로한 반면, 동양철학은 2011년 34% 2015년 36% 2020년 39%의 비중을 차지하며, 서양철학에 비해 비중은 낮으나 꾸준한 증가추세에 있다.[70] 일본 내에서도 철학연구 전체에서 '일본사상'이라는 라벨로 연구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일본제국의 발생과 전개가 한국의 역사 전개에 영향을 미쳤기에 이 시기의 일본사상은 타 시기에 비해 연구와 번역이 이루어지는 편이다.[71] 그렇다고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20세기 말까지만 하더라도 가학 등으로 한학을 공부한 사회인들을 볼 수 있었다. 정규 학제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또한 1970~90년대에 개별 유학자 중심으로 한국 철학 연구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각 문중의 영향력이 연구에 미치기도 하였는데, 이로 인한 부정적 측면이 소위 "문중유학"이라는 이름으로 비판받기는 하였으나, 달리 말하면 과거와 일정한 연속성이 존재하기는 하였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72] 이 시기 성리학 중심의 연구 기풍이 시작되며, 당시 역사학계 중심으로 주도되던 실학 연구 - 실학의 재발굴/재출간은 일제강점기 1910년대부터 있었던 조선학운동으로부터 유래한 것으로, 대표적 케이스로 1930년대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간행이 있었다. 이에 대해 실학 개념을 두고 논쟁이 일기도 했다. 또한 북한에서 조선유학사 책을 내면서 이에 자극을 받아 최한기에 대한 연구도 시작된다.[73] 막상 서양철학 전공자가 다수였다.[74] 이는 1970년대 '한국철학연구'(논문집 형태, 상중하 3권), 1980년대 '한국철학사'(상중하 3권) 발간으로 이어진다.[75] 이황, 이이, 조식 같은 학자들.[76]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그 수준이나 상업성에 대해 비판적 의견들이 나오며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77] 1950~60년대 총 4편, 1970년대 14편, 1980년대 33편에 비하면 비약적인 증가다.[78] 퇴계 이황의 퇴계전서, 율곡 이이의 율곡전서, 성호 이익의 성호전서,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79] 한국유학 전체 기준 2016년 이후 매년 200편 이상의 논문이 나오고 있다.[80] 한국유학사(2012), 한국도교사(2022), 한국근대사상사(2016), 현국현대철학사론(2012) 등. 물론 그 이전에도 시기/주제별 한국철학사 서적들이 출간되어 오기는 하였다. 조선유학사(1949), 한국유학사(1974), 한국유학사(1987), 한국유학통사(2006, 2022개정) / 한국도교철학사(1987) 등이 있는데, 아무래도 이전까지는 유학사 중심이었던 감이 있다.[81] 상대적으로 중국 대륙에서는 한국보다 한대유학이나 청대유학에도 관심이 많은데, 이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중국 대륙에서는 한대나 청대의 기철학적 경향을 중국 전통 유물론적 사유로 보고 접근하기 때문이다.[82] 2011년 41%, 2015년 43%, 2020년 50%[83] 2011년 36%, 2015년 30%, 2020년 27%[84] 2011년 11%, 2015년 12%, 2020년 9%[85] 2011년 12%, 2015년 16%, 2020년 14%[86] 주희, 공자, 맹자, 장자, 양명, 순자, 노자. 이들만으로 전체 인물관련 논문의 65%에 달한다.[87] 이들에게 영향을 받은 이들은 당시 대만철학계의 영향으로 정신주의적인 측면에서 동양 철학에 접근하고, 서구문명의 병폐의 대안이라는 관점에서 동양 철학을 논하게 된다. 또한 동양 철학의 복수의 전통을 그 차이에 관심을 두기보다 통합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전반적 경향은 20세기 초 중국 현학파의 문제의식과 연속선상에 있다고 이해할 수 있다.[88] 이러한 사상적 변화 과정에서 90년대 말 중국에선 자유주의와 신좌파 간 논쟁이 있기도 하였다.[89] 주로 신보수주의적 성향을 보이며 그 직접적 뿌리는 90년대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20세기 초중반의 현대신유가들과는 여러모로 구분되며, 이들의 흥기는 00년대 중국에서 슈미트나 스트라우스 같은 서구 보수주의 철학자들의 논의가 주목받은 것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90] 1950~60년대에는 도가철학 연구라 하면 대체로 한학 전공자들의 부수적 관심사 정도였다. 1960년대에는 석사학위 취득자들은 나왔으나 학계에 남지는 못했다.[91] 특히 이 시기 한국철학사 서술을 위한 과정으로써 한국 도교와 도가철학이 조망(그 이전까지는 이능화의 조선도교사 이후 새로 개척된 바가 적었다.)받은게 전기가 된다. 이 시기 도가와 도교를 구분해 접근해야한다는 문제의식이 주류로 받아들여지게 된다.[92] 70년대 시작된 과업의 결과로서의 한국도교철학사가 이때 나온다.[93] 회남자나 여씨춘추같은[94] 도교, 도가, 노장을 구분해서 연구하게 된 셈이다. 다만 이와 별개로 도교와 도가를 구분하는 태도는 이전부터 있었으며, 단순히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을 넘어 연속성을 강조하는 경향의 연구까지 되고 있다.[95] 왕필, 하상공, 성현영 같은 중국 인물들은 물론 이이 박세당 서명응 홍석주 같은 조선 유학자의 주석서도 번역되었다.[96] 다만 중심이라는 것이지 당연히 전부는 아니다. 근본불교, 천태학, 정토학, 계율학, 밀교, 아비달마불교, 불교인식논리학 등 다양한 분과 연구들이 존재한다.[97] 현대 한국 불교 철학 연구는 19세기 중반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불교학 전통을 기원으로 한다. 해당 연구 전통은 빨리어 원전 바탕의 불전 연구 중심이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 전통을 수용하였고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불교학 연구가 앞서나가다 보니, 한국도 그 영향을 받아 근대적 불교 철학 연구를 수행하게 되었다. 이런 근대 불교학 연구는 주로 문헌을 토대로 한 교리, 철학 연구가 기본이 된다. 또한 빨리어 원전에서 연구가 시작되다보니, 대승불교에 대한 회의로 나아가기도 했는데, 대승비불설같은 경우가 바로 이러한 영향하에서 나온 것이다.[98] 로버트 버스웰의 회고의 의하면, 70년대에 본인이 한국에서 승려가 되었을 당시 다수의 한국 승려들이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의 영향으로 출가한 사실에 예상치 못한 서양불교학의 영향에 놀랐다고 한다.[99] 81년~90년에 석사논문 499편 박사논문 79편이 나왔으며, 91년~2000년에는 박사논문 258편, 2001~2010년에는 박사논문 534편, 2011~2021년에는 1200편 이상이 나오며 급격한 양적 성장을 보여다. 다만 현시점에 이르면 철학으로서의 불교를 넘어 불교문화 전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므로, 모든 논문이 불교 철학에 대한 것은 아니며, 상당비중이 불교문화나 응용분야에 대한 연구임은 고려해야한다.[100] 시작은 60년대에 이미 되었다.[101] 2022년 현재 100권이 넘게 번역되었다.[102] 영국과 독일 등 불교학이 발전한 나라들[103] 이 과정에서 초기불교, 남방불교와 관련된 여러 논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104] 빨리어 근본주의 논쟁, 사띠 논쟁(2000년대 초반/후반), 무아·윤회 논쟁(1990~2010년대), 돈점논쟁(1980~1990년대)[105] 안성두 교수를 중심으로 한 산스크리트어 원전 번역과 주석이 대표적[106] 권오민 교수의 경량부 연구가 대표적[107] 김성철 교수 승랑 연구가 대표적[108] 이에 2022년엔 세계 불교인식논리학회가 한국에서 열리기도 하였다.[109] 인도불교철학까지 포함한다면 연구가 적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나, 불교철학을 벗어난 분야는 연구가 미비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인도 정통 육파철학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연구가 크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2010년대 한국에선 하타요가와 샤이바딴뜨라 분야에서 의미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이나교나 현대요가 전통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지고 있다.[110] 비슷하게 서양 철학의 경우도, 중세 철학은 종교계나 신학의 측면에서 주로 연구되는 면이 있다. 또한 독일 영국 프랑스를 제외한 타 유럽 지역(이탈리아, 스페인, 러시아 등)에 대한 철학적 사상사적 연구도 활발하지 못한 편이다.[111] 일본사상사와 불교사에서 중요한 구카이가 이때 인물[112] 사실 에도시대 일본은 조선과 달리 주자학말고도 양명학의 비중이 컸다.[113] 티베트 불교도 밀교가 베이스이며, 동아시아 타 국가들도 밀교가 주류가 아니었다 뿐이지 군소종파로나 타 종파에 습합되어서나 꾸준히 존재해왔다. 다만, 일본은 종파불교가 지배적이며, 특정 종파의 개조와 전통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일본 불교의 특이성을 찾아볼 수 있다. 교학적으로는 일본 정토교 신란의 악인정기설같이 특이한 논리나, 타력구원을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모습 등을 특이한 요소로 꼽을 수 있다.[114] 예를 들어 교토학파의 니시다 기타로만 하더라도 불교의 영향이 매우 크다.[115] 다만 이를 '철학'이라고 부르길 꺼리는 경향이 일본 내에서부터 있다. 일본 고유 사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주로 신화, 소설(fiction), 시, 미학에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시인추방론'을 주장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현대 반철학자들이 문학이나 미학과 깊은 관련을 보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런 일본 전통 사유는 철학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의도적으로 '철학'이라는 표현보다 '사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116] 대학에 따라 메이지 유신 이후 들어온 서구 철학과 그 이후 영향을 받은 사상만을 '철학'이라고 하여 일본 전통사상과는 따로 구분한다. 이 '철학' 학파는 크게 교토대파와 도쿄대파로 나뉜다.[117] 허나 국학에는 어쩔 수 없이 국수적인 면이 존재했으며, 이에 일본제국 시기 일본이 보여준 행보의 뿌리를 이 시기에서 찾기도 한다.[118] 신토, 유교, 불교, 독일관념론이 섞여들어가며 소위 천황제 파시즘의 조류가 형성된다. 국체론등이 주요 이슈.[119] 니시 아마네에 의해 조어된 어휘. 이 시기에 '철학'과 경쟁하던 번역어로는 philosophia의 음차어나, '이학理學'(본래 성리학을 의미하는 용어였으며, 성리학과의 유사성 속에서 철학을 인식하고 명명한 것)이 있었으나 결국 철학이라는 조어가 선택된다. 理學에 비해 哲學이 유학과의 단절을 강조하는 역어로서 선택된 것이기는 하나, 철哲자 엮시 유교적 배경에서 따와 조어된 것이다.[120] 물론 서유럽 사람들이 멍청해서 그리스 문화를 유실한 것은 아니고, 언어의 문제 때문이다. 서방의 라틴어 문화권에서 고전 그리스 학문을 공부하려면 번역을 거쳐야 했기 때문. 오히려 이슬람 문화권의 경우, 해당 지역에 많은 그리스인들이 살았기에 이런 방면에서 제약이 적었다. 반면 서유럽은 라틴어 문헌의 보존에서 강점을 보였는데, 일례로 키케로의 국가론(De republica)은 현대에는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지만, 아우구스티누스가 인용한 부분들 덕에 그 원본을 추정하는 데 도움을 받고 있다.[121] 영어 식으로 'The Commentator'. 같은 맥락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유일무이한) 철학자', 즉 'The Philosopher'라고 불렸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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