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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세다대학/출신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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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과 조직
정경학부, 창조이공학부·연구과,
국교학부 SILS
입학 후 대학 생활 정보 동문 교우회 도몬카이
[稲門会]

출신 인물
캠퍼스 관련 상세 정보
와세다-게이오 라이벌 정기전 소케이센 [早慶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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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세다 한인 동문
1.1. 한인 교수
2. 와세다 일본 현지 동문
2.1. 일본인 교수
3. 그 외 국가의 동문
3.1. 중화권 동문3.2. 작품

1. 와세다 한인 동문

早稲田大學韓国校友會
WASEDA University Korea Alumni Association
주소: 서울특별시 강남구 강남대로 유니온센터빌딩 1710호[1]
와세다대학 한국교우회[2]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와세다 메인 캠퍼스 안에 한국 전통양식의 “한종각(韓鐘閣)” 및 내부에 성덕대왕신종[3]의 복제인 “한국의 종”을 설치하기도 했다. 1982년 개교 100주년을 맞아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 김창성 전방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등 한국인 동창회원들이 제작해 기증한 것으로 와세다대학 캠퍼스 공원 내 설치돼 있다. # 당시 와세다 한인동문들은 “마치 독립운동을 하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고 소회 2000년대 삼성 이건희 회장, 롯데 신격호 회장 등이 수십억원의 와세다대학 모교한인장학금 기부를 하기도 했다. 2023년 기준 약 1만여명의 한국인이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것으로 파악된다.
“와세다대학 교우회의 해외 지부 중 하나로서 자리매김하고,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교우회는 2017년에 7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와세다대학 총장과 본교 교우회 대표 간사를 비롯한 대학·교우회 본부의 대표가 기념식에 초대되었습니다.” 와세다대학 - 한국교우회 창립 70주년 기념식 개최
한국교우회와 마찬가지로 1947년도에 만들어져 2021년부터 대학 공인 서클로 인정받은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와세다대학 한국인학생회도 있다. #
파일:376FF130-359A-4A10-96B3-4E6DC7ABE3C8.jpg
“와세다 출신 중 시가총액 1위 기업의 경영자는 누구일까요?” 일본 와세다대학 비즈니스스쿨 (경영대) 수업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 교수가 있다. 학생들은 유니클로를 이끄는 야나이 다다시(柳井正) 패스트리테일링 회장이라고 대답했지만, 교수의 대답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었다. △고(故) 이건희 회장은 1961년에 와세다대 상학부에 입학해 1965년 졸업했다. 2010년엔 와세다대로부터 대학원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2014년 와세다대는 정치경제학술원연구도서관과 정치경제학술원학생도서관의 간판을 ‘이건희 기념도서관’으로 변경해 개관했다. △“본 대학 동문인 이건희씨가 철학과 인덕을 겸비한 경영자로서 인류사회에 공헌하고, 일본과 한국의 우호 관계 증진을 위해 힘써온 일은 와세다의 큰 긍지이다.” 와세다대 홈페이지엔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한 이유가 적힌 결의문과 함께 박사모를 쓴 이건희 회장의 기념사진이 걸려 있다. # #

1.1. 한인 교수

"이 대학이 나에게 주신 영예를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특히 존경하는 정치선배였던 신익희, 김성수 선생이 공부한 바 있는 이 대학에서 명예로운 학위를 받게 된 것을 더욱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 저를 와세다 동창의 한 사람으로 맞이해 준 데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형설의 노력 끝에 학위를 받은 졸업생 여러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나는 야당 정치인 시절인 1985년에 이 대학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방문기념으로 「대도무문」이라는 글을 써 주었습니다. 당시 대학 관계자들은 와세다 대학에 교문이 없는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했습니다. 나는 그때 이 대학에 문이 없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와세다 정신은, 당당하고 떳떳하게 나가면 거칠 것이 없다는 「대도무문」이라는 나의 좌우명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로부터, 저는 와세다人과 정신적 同志[11]라는 생각을 가져 왔습니다. 그때 쓴 글이 아직도 이 대학에 비치되어 있는데 대해 저는 대단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 대학의 창립자 오쿠마 시게노부(大 畏重信) 선생은「학문의 독립」과 「정신의 독립」을 강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와세다人들은 높은 이상을 추구했으며,진취적 정신을 지녔습니다. 그리하여 이 대학 출신들은 日本 近代化의 役軍[12]이 되었습니다.전쟁의 폐허 위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대국을 건설하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가장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와세다를 선택했던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13][14] - 1994년 고야마 츄마루(小山宙丸)총장 등 대학관계자들의 영접을 받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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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와세다 일본 현지 동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자신의 모교인 와세다대에서 후배들을 상대로 강연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돌아가는 길의 연속이었다"고 술회했다. 기시다 총리는 원래 도쿄대학을 목표로 대학 시험을 3번이나 봤지만 떨어져 결국 포기하고, 와세다대 법학부에 입학한 이른바 'N수생' 출신이다. 현직 총리가 와세다대에서 강연한 것은 2012년 노다 요시히코(와세다대 정치학과 졸업) 당시 총리 이후 11년 만이라고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전했다. 와세다대 'N수생' 기시다, 모교서…"난 실패 거듭했던 인간"

2.1. 일본인 교수

3. 그 외 국가의 동문

3.1. 중화권 동문

니혼게이자이신문 중문판 - 와세다(早稻田)[18]대학과 중국과의 인연은 1899년(메이지 3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와세다는 청나라 정부의 3명의 공비 유학생을 받아들이고 일본어 교육을 시작했다. 1914년(다이쇼 3년)에는 중국인 리다자오가 와세다의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했다. 리다자오는 후에 중국공산당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같은 창립 멤버이자 첫 번째 총서기로 선출된 천두슈도 일본에서 유학했으며 와세다를 졸업했다. 이렇게 두 명의 중국공산당 핵심 멤버가 일본에서 유학하고 와세다대학에 진학한 사실은 중국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1998년 장쩌민과 2008년 후진타오 이 두 명의 당시 국가주석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특별히 와세다 대학에서 강연을 했으며, 이는 중국에서도 널리 보도되었다. #
중국 언론에서는 이전부터 와세다대학과 중국의 깊은 연관성에 대해 보도해 왔다. 메이지 시대에 청국에서 정부 장학생 13명을 받아들여 일본어 교육을 제공하였고, 1913년(다이쇼 2년)에 후에 중국 정부 및 집권당의 창립 멤버가 된 리다자오(李大釗)가 입학했다. 같은 창립 멤버이며, 첫 대표로 선출된 천두슈(陳獨秀)도 와세다에서 학습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1998년에는 장쩌민 주석, 2008년에는 후진타오라는 두 명의 국가주석이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특별히 와세다를 방문했다.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는 일본의 메이지 개혁에 대해 가르치며, 메이지 정부에서 활동한 것은 와세다의 창립자,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였고, 그곳에서 학습한 유학생들이 중국 국가 및 집권당을 창립했던 것이 중국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인용 기사
2021년 중국 당 창립 100주년에 주목…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한 주요인물 2명은

하기는 편의상 한어병음 및 한국 한자 직독을 추가하였다.[19]#

3.2.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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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세다 한국교우회가 매입함[2] 한국동창회에서 2003년 명칭 갱신[3] 일명 에밀레종[4] 당시 직함명은 주무이사였다.[5] 명예[6] 파일:D64D1B7E-67B8-421C-8C97-545829FA6943.jpg 2019년 협찬 내역을 공개하기도 했다. 정경 학사, 이학 학사, 문학 학사, 상학 학사, 상학연구과 (석사), WBS MBA 등 동문이 기부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7] 한국 미술사의 허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수준 높은 유물을 다수 수집하였다. 이 사람의 수집품 중 현재까지 지정문화재만 50점(국보 12점, 보물 32점, 서울시 지정문화재 4점. 특히 훈민정음 해례본과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 신윤복 필 미인도 등이 유명하다) 가까이 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간송미술관을 만들었으며, 1945년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8] 특명교수란 특정학부에 소속되지 않고 대학본부에 직접 소속돼 연구 또는 강의하는 교수를 말하는 것이지 특임교수가 아니다.[9] 김 전 대통령의 와세다에서의 마지막 강연은 2009년 10월 27일. 일본어가 굉장히 능통했다. 2분38초부터 김 전 대통령 인터뷰 참조.[10] 김영삼 전 대통령은 와세다대 교우회 규칙 제2장 정회원 제 6조에 의해 교직원 교우 및 4에 해당한다. 와세다의 정식 동문이 맞다. Waseda Alumni[11] 동지[12] 일본 근대화의 역군[13] 김영삼 대통령은 와세다 학위복과 학위모를 착용하고 총장 안내로 한국 동문들의 종을 구경했다. 1,2층에 있던 약 1천2백여명의 재학생과 졸업생 학부모 학교직원들은 기립해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14] 와세다 고야마총장은 인사말을 통해 "金대통령은 취임이후 한국정치의 개혁과 발전을 위해 훌륭한 공적을 남겼다"면서 "이같은 업적은 와세다대의 창립자인 오쿠마 시게노부 선생이 일본의 막부 말기 격동시대 때 두번이나 수상에 재직하면서 일본의 개혁을 위해 노력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김 대통령을 높이 평가했다. 김영삼 대한민국 대통령은 한국과 일본은 더욱 가까워 지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면서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 모두가 편견을 버리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양국국민은 과거의 편견을 씻어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역사의 진실을 솔직히 인정하고 역사의 교훈을 용기있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15] 와세다대학 최악의 흑역사 2[16] 130회 아쿠타가와 상 수상작[17] 영국 귀화 출신이다.[18] 와세다 대학의 중국어 발음은 “자오다오톈(Zǎodàotiān)”. 한국어로도 20세기에는 한자 그대로 조도전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19]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전 청나라 및 중화민국 인물에 대해서는 한자 직독으로 기재하는게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