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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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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과 호칭3. 생애4. 여담5. 도덕경
5.1. 사상적 특징5.2. 기타5.3. 외부 링크
6. 가족7. 관련 고사성어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제자백가의 시초격인 인물로, 당대 최초로 사람이 지향해야 하는 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道)에 대한 통찰을 제시한 인물이다. 대표 저서로는《도덕경[3]이 있으며, 이 때문에 도가의 창시자로 불린다. 도교에서는 신격화하여 태상노군이라고 부른다.

노자의 사상은 '백성들을 시켜 억지로 뭘 하려고 하지 말라'는 '무위자연'[4]과, '권력과 재산을 더 가지려고 무리하게 애를 쓰지 말라'는 '공수신퇴'[5]로 요약되는데, 이는 《노자 도덕경》이 백성들의 입장에서 쓴 글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장에서 쓴 처세술임을 알 수 있다.

처세술을 요약하자면, '남을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말고, 나를 가득 채우려고 하지 말아라'는 뜻이며, 오늘날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힘을 '매번' 100% 쓰지는 말라는 것이 된다.[6] 인생의 꼭대기(peak)를 만들어 놓으면 내려갈 일밖에 없으므로, 70~80%의 힘으로 오래가는 것이 인생을 사는 참 지혜라는 것이다. 그러니 권력을 잡고 부와 명예를 얻었다 싶으면 자리에서 내려올 줄도 알고, 가진 게 많으면 주변에 적당히 나눌 줄도 알아야 한다고 노자는 조언한다.

그는 중국에서 우주의 만물에 대해 최초로 생각한 사람으로, 그가 발견한 우주의 진리를 (道)라고 이름지었다. 이러한 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도교'라 하며, 그는 우주 만물이 이루어지는 근본적인 이치가 ''라고 설명한다.

2. 이름과 호칭

<사기> '신한노장열전'에 따르면 본명은 이이(李耳), 는 담(聃)이다. 도교의 태상노군 전설에도 이씨라고 나온다. 노자(老子)라고 불리는 이유는, 모후 선천태후의 뱃속에서 70년을 태아 상태로 있다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옆 오얏나무를 가리키며 '이 나무를 나의 성씨로 해 주시오'라고 요구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이 오얏나무 '李'(리)가 되고, 이후에 성장하면서 귀가 컸기 때문에 이름은 '耳(귀 이)'자가 되었다. 중국의 설화집인 《태평광기》에 따르면 본명은 이중이(李重耳) 자는 백양(伯陽)으로 초나라 고현 곡인리 사람이라고도 전해진다.

현대에는 노자의 원래 성이 노(老)씨라는 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역사학자 카오헝(高亨)은 저서 《노자전전증(老子傳箋證)》 에서 춘추시대에는 노씨성이 있었으나 이씨성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노자의 본래 성은 노(老)라고 주장했다.노자의 성씨가 李인가 老인가

3. 생애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매우 부족하여, 여러 전설이 전해져오고 그런 연유로 노자로 추정되는 고대인물들도 많다. 그나마 믿을 수 있는 기록이 사마천의 사기인데, 노자는 초나라 출신으로[7] 주나라에서 도서관장[8]을 지냈으며, 공자가 주에서 잠깐 머무를 때 노자에게 배움을 받은 적이 있다고도 한다. 노자와 공자는 서로에 대한 평가를 남겼는데 이게 극과 극으로 차이가 난다. 노자는 공자에 대해 사기꾼이자 위선자와 같다고 비판한 반면, 공자는 노자를 가리켜 처럼 변화무쌍하고 감히 접할 수 없는 인물이라며 극찬했다.[9]

노자는 이후 소를 타고 함곡관 밖으로 가 종적이 묘연해졌다 하는데, 출관하기 전에 문지기인 윤희(尹喜)[10]에게 5000자로 된 책을 전수하니, 이것이 '도덕경'이라고도 불리는 《노자》[11]이다. 이대로면 노자는 춘추 시대 말엽의 사람이 되나, 문제는 함곡관이 지어진 것은 전국 시대인 진(秦)나라 효공 시대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위의 설화는 후세에 창작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사기》〈노자한비열전〉에는 이 외에도 전국 시대의 인물인 태사담(太史儋)이 노자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논해진다. 이 때문에 노자가 한나라 이후 창조된 가공의 인물로 보는 학자들도 있었으나, 기원전 3세기 초 이전으로 추정되는 시기의 노자 사본이 발굴되어 이 설은 힘을 잃는 등 여전히 정확한 생존여부를 비롯한 실체 자체가 불분명하다.

4. 여담

5.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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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사상적 특징

노자의 사상은 '억지로 하려함이 없이 스스로 그러하게 놔두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마음가짐과 '이름을 알리려하지 말고 혹시라도 명성을 얻더라도 위상이 커질수록 자신을 낮추어야 된다'는 공수신퇴(功遂身退)의 처세술이라 할 수 있다. 명성이나 재물을 가득 채우면 이후에 잃어버릴 일만 남게 된다고 하여 '비어 있음'을 강조하였고, 모두가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은 더 이상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여, 미추(美醜)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인데 이를 굳이 구분해서 판단하는 것은 오히려 어리석은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하였다. 노자는 어떤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비웃을 것이라 하였는데, 노자는 도리어 '뛰어난 재주는 오히려 서툴게 보인다'고 말하면서, 비웃음을 받지않으면 도(道)라 하기 부족하다고 하였다.

또한 노자는 상선(上善)은 물과 같다고 말한다. (上善若水) 물은 조건없이 모습을 바꾸며 손쉽게 적응한다. 또한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데로 흘러가 거기에 머물며, 약하고 순할지언정 공격해도 꿈쩍 않는다. 물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것이지만, 오만하지 않고 겸손하다. 이렇기에 물을 소중히하고 존중하며 물처럼 살면 인생 전체의 행복이 크다고 주장했다.

왕필본으로 대표되는 《노자》는 일반적으로 반 유가적이면서 역설적인 격언을 담은 문헌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는 특히 《장자》가 갖는 성격과 연동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의 출토 문헌은 그러한 이해에 대하여 의구심을 던져주고 있다. 가령 왕필본의 "絶聖棄智, 民利百倍(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로움을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란 문장이 "絶智棄辯, 民利百倍(지식을 끊고 변론함을 버리면 백성의 이로움이 백배)"라는 내용으로 바뀌어 있으며[17], 왕필본의 "國家昏亂, 有忠臣(국가가 혼란해져야 충신이 생긴다)"란 문장도 "邦家昏亂,安有貞臣(나라가 혼란해지면 어디에 바른 신하가 있겠는가)"으로 바뀌어 있어 반유교적인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18] 오늘날 이러한 문제는 학자들 중에서 치열하게 토론되고 있는 중이나, 지금까지 이해했던 노자의 모습은 최초의 노자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를지도 모른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기초하여 《노자》의 사상에 대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언어, 개념, 인식의 상대성을 강조하고, 서로 대립되는 것들의 관계에 주목한다. 특히 강함, 단단함, 높음, 그리고 채움에 대비하여 약함, 부드러움, 낮음, 비움, 그리고 겸손함을 강조한다. 억지로 그리고 작위적으로 무엇인가를 함을 반대하고 명예와 이익에 대한 추구 그리고 지나친 욕망 등을 비판하고, 마음을 깨끗하고 고요하게 하여 일이 자발적 또는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게끔 함을 주장한다. 통치자의 욕심으로 인하여 국가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결국 백성들에게 여러 가지 피해가 되니, 통치자는 헛된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통치자는 여러 가지 복잡한 명령과 법률을 시행할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율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문장이 있다. 또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맞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이 오래 사는 것이라는 문장도 있다. 이렇게 통치자와 관련된 구절이나 유, 무에 대한 구절들에 주목하여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왕필 등이고, 뒤의 '오래 사는 것'(장생불사)에 주목하여 양생론적, 종교적으로 보는 쪽이 하상공 그리고 도교의 노자에 대한 해석 그리고 입장이다. 이밖에 노자의 정치 철학은 소국과민()이다. 이는 나라는 작게 하고 백성은 적게 하라는 말로써, 노자는 원시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여긴다.

여기에서 간과되기 쉬운 사실은, 노자의 사상은 유가법가와는 확연히 다른 수단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통치자가 지향해야 할 바를 논한다는 점이다. 노자 사상의 이른바 도교적, 양생론적 측면을 주목하는 입장에서는 노자 사상의 이러한 통치 규범적 측면을 크게 신경쓰지 않는 경향이 강했으며, 그래서 노자와 장자의 사상이 "도가"적이라고 묶이게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도덕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19]과, 장자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 등을 종합하여 노자의 상대성, 자연, 부드러움 등에 대한 태도가 결국 "부드러운" 형태의 통치술을 논하기 위한 하나의 비유라고 보는 시각 역시 존재한다. 특히, 한비자의 "해로" 부분이나, 황로학파 등은 아예 노자가 유가, 법가, 묵가 등보다도 더 섬세한 고도의 통치술을 이야기한다고 보았으며, 이 때문에 후대의 왕필본에서는 이게 권모술수에 대한 서술인지, 자연적 원리에 대한 서술인지 애매하게 읽히는 부분들이 나온다. 실제로 이렇게 애매한 몇몇 부분들은 죽간본에는 없다. 대표적으로 36장. 다만, 죽간본에 있는 부분들만 놓고 봐도 유가와는 대비되는 통치 기술서로 읽을 여지가 없는 게 아니다.

이런 면을 보면, 왜 한비자가 노자에 주석을 달았고, 병법가, 무술가들이 은근히 노자에서 영감을 얻거나 비유를 들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한 초기, 특히 한문제는 '무위지치의 도'라고 해서 노장사상의 이념으로 국가를 통치했고, 그의 부인인 효문황후 때문에 한무제 초기까지도 통치이념으로 남았다. 억지로 의도를 내비치면 상대가 반발할 것까지 미리 예상하고, 시의적절한 때에 몇 수 앞을 읽어 행동하는 교활한 통치자나 전략가야말로 도에 맞추어 사는 사람일 수 있으니까.

병법서에서도 거국적인 외교술을 다룬다. 격투기나 무기술에서도 음양수라고 해서, 실로 허를 치고, 허로 실을 치며, 허를 드러낸다. 도덕경을 이러한 맥락으로 읽을 가능성도 충분이 있음이 도덕경의 묘미이다. 당연하지만 말 그대로의 자연에 가까운 사회를 이상사회로 긍정적으로 평하는 학자들은 노자를 '권모술수를 담은 책'이라 부름을 싫어한다. 둘 다 노자를 정치, 사회적인 맥락에서 읽은 관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5.2. 기타

다른 제자백가의 사상서들과는 달리 시적 운율이 중시되어 상당히 많은 구절에 압운이 되어 있고, 역사상의 고유 명사가 단 하나도 출현하지 않는다. 저작 연대나 작자를 파악하기 어렵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5.3. 외부 링크

관련 링크 왕필본 한글 번역

6. 가족

당나라 황실이 노자의 후손을 자처하고 그의 부모와 노자 본인을 황제(皇帝, Emperor)로 추존함으로서 본인의 가문도 황가(皇家)가 되었다.

7. 관련 고사성어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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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width=100%><tablebgcolor=#3d414d><width=33%><rowcolor=#ffffff> 61권 「백이열전(伯夷列傳)」 ||<-2><width=33%> 62권 「관안열전(管晏列傳)」 ||<-2><width=33%> 63권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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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楚 苦縣 厲鄉 曲仁里[2] 영어 위키백과엔 허난성 저우커우시 루이현으로 나온다.[3] 《도덕경》을 《노자도덕경》, 또는 《노자》라고 하기도 한다.[4] 무위자연(無爲自然): 억지로 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그러하게 놔두라는 뜻.[5] 공수신퇴(功遂身退): 공을 이루고 나면은 이내 물러나야 한다는 뜻.[6] 또는 남의 힘을 100% 사용하게끔 강제하지 말라는 뜻.[7] 지금의 안휘성에 해당한다.[8] 정확히는 문서 기록을 담당하는 관직. 당시 이 관직의 명칭이 '사'(史)였는데, 이것이 후에 '역사'를 뜻하는 글자로 쓰이게 된다. '史 記事者也 從手持中 中正也(사(史)는 일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글자의 형태는 손 수(手)를 따르고 가운데 중(中) 자를 잡은 모양이다. 가운데 중(中) 자는 바르다는 뜻이다.) 고대 중국에서 中은 제법 중요한 글자 중 하나인데 대강 얘기하자면 올바르게 균형을 잘 잡고 있다 정도로 얘기할 수 있다. - 허신(許愼)의 설문해자. 역사 교육학 배우면 한번 이상은 꼭 지나치는 기록이다.[9] 용은 가상의 동물이므로, 공자가 노자의 사상이 허무맹랑하다며 비판했다 볼 수도 있지만, 대체로 공자 자신이 가진 제한된 인식과 실천 수단을 초월하는 식견을 가진 인물로서 노자를 높이 평가했다고 해석된다. 참고로 사기 본문의 해당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공자는 돌아와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새가 잘 날아 다닌다는 것을 나는 알고, 고기가 잘 헤엄치는 줄 알며, 짐승이 잘 달리는 줄 안다. 달리는 것은 그물로 잡을 수 있고, 헤엄치는 것은 낚시줄로 잡을 수 있으며, 날아다니는 것은 화살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용에 이르러서는 나는 능히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바람과 구름을 타고 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노자를 만났는데, 그는 용과 같았다."'[10] 중국 주나라와 전국시대 진나라의 도가 철학자이다. 그가 맡았던 관직의 이름을 따서 관윤(關尹)이라 부르기도 한다. 관씨 연원에 따르면 윤희가 관직 이름을 따서 관(關)을 성으로 지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사기》에 의하면 노자가 주나라가 쇠락한 것을 보고 주나라를 떠나려고 함곡관에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이었던 윤희에게 부탁받아 도덕경 5천여 자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이 관령 윤희가 곧 관윤(關尹)으로 노자의 제자가 된다고 한다. 《장자(莊子)》의 〈천하편(天下篇)〉에 관윤의 말이라 하여, "사람은 아집(我執)을 버리면 자연스럽게 동작이 발휘된다"는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움직이기가 물과 같고, 그 고요함이 거울과 같으며, 고요함이 맑음과 같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고 있다. 잡가(雜家)의 대표작인 《여씨춘추(呂氏春秋)》 〈불이편(不二篇)〉에는 "관윤(關尹)은 맑음을 귀히 여긴다"고 평하고 있다.ㅡ위키백과.[11] 사실 노자가 그와 친분이 있어서 미리 준 것은 아니고 노자가 은둔하기 위해 관문을 떠나려 할 때 문지기인 윤희가 "선생님께서는 이제 곧 은거하실 테니 쉬운 부탁은 아니겠지만 떠나시기 전에 소인을 위해 글을 남겨주고 가십시오."라고 부탁했는데 평소에 언어를 통해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며 글 자체를 남기지 않았던 그도 윤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 문지기를 위해 자신의 유일한 저서를 집필한다. 사실 노자는 학문이나 책 자체를 그가 주장하는 도에 정반대되는 개념으로 보고 아주 몹쓸 것으로 여겼다. 도덕경만 봐도 이미 책읽고 공부한 학자(혹은 지자 = 똑똑한 자)라는 인간들을 평범한 사람들 상대로 '(인)위'(현혹이나 선동에 가까운 것들을 의미한다.)하려 하는 자로 간주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음모에 맞서 도를 거스르지 않는 방법은 백성이 무지하고(無知) 바라는 게 없는 것(無欲), 즉 무위라 봤다. 참고로 여기서 무지(無知)는 기존의 서술과 같이 무식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나 작위적인 것의 부재를 의미한다. 그러나 근현대적인 의미의 작위라는 것도 부족한 설명으로, 노자의 '무위'에서 핵심이 되는 관점은 '세상 무엇과도 비교, 판단할 기준을 두지 않는 것'이다.[12] 김경일 교수의 「유교탄생의 비밀」[13] 장자는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거피취차 정신, 즉 저것(=먼 것, 어려운 것)을 거부하고 이것(=가까운 것, 쉬운 것)을 취한다는 정신을 여러 이야기를 통해 여러 상황에 적용되는 예로써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라 평가되기도 한다. 어찌보면 매우 보수적일 수도 있는 이데올로기.[14] 불교사에서는 꽤 유명한 승려다.[15] 실제로 노자는 사기에서 한비자와 함께 실렸다. 법가가 도가와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이 당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6] 노자만 그런 것은 아니고 다른 중국 철학자나 고대 서양의 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운율이 담긴 말을 많이 했다. 공자는 한술 더 떠 '군군신신부부자자'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17] 성과 지라는 한글자가 바뀌었는데 뜻이 바뀐다. 글씨 일부만 조금 지워져도 둘이 모양이 헷갈리는 형태의 글자라[18] 기존에는 반유가적인 성격이 많이 부각되었다. 군사 정권 시절 다석 류영모, 함석헌 등 군사 정권에 반대하는 사상가들이 노자 연구를 많이 했던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물론 노자에 반유교적인 모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한 측면이 발전되고 부각됐을 뿐이다.[19] 왕필본 이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백서본, 죽간본 출토의 영향이 컸다. 그리고 함축적인 운문 형태인 노자 텍스트의 특성상 한 글자만 다르게 읽어도 뜻이 천지 차이로 벌어지는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