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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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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寧
158년 ~ 241년
1. 개요2. 생애
2.1. 초창기2.2. 요동 시절2.3. 조비 시절2.4. 조예 시절
3. 일화4. 평가

[clearfix]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인물이며 는 유안(幼安)으로 청주 북해국 주허현 사람. 요동 공손씨 정권위나라의 신하로 관중의 후예 관소경의 9대손이라고 한다.

화흠, 병원과 함께 일룡이라 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의 꼬리라 불렸으며[1], 많은 내용이 《정사 삼국지》가 아닌 전자라는 곳에 기록되어 있다.

8척이 넘는 키를 가졌고 용모까지 수려했다.

2. 생애

2.1. 초창기

16살 때 아버지를 잃으면서 소년가장이 되어 장례를 치르게 되니 친척들은 가난한 데다가 고아가 된 관녕을 가엽게 여겨 장례비용과 옷을 보냈지만 관녕은 하나도 받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만으로 장례를 치른다.

그는 자신과 같이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병원과 뛰어난 능력을 가진 화흠과도 서로 우정을 나누는데, 이 때의 일화 중 다음과 같은 것이 《세설신어》에 전해진다.
둘이 밭일을 하다가 금덩이가 나오자 관녕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화흠은 한 번 집어 보고 던져버렸다. 후에 둘이 한자리에 앉아 글을 읽던 도중 귀인의 수레가 지나가자 역시 관녕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지만 화흠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 수레를 구경했다. 관녕은 화흠이 권력, 재물욕에 사로잡혀 있으며, 그와 함께 학문하는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앉은 자리를 자르며 "우리는 벗이 아닐세"라 했다(割席絶交)[2]
과연 위의 사건 때문인지는 몰라도 관녕은 다른 봉국으로 유학을 가 병원이 선배로 섬기기도 한 진식을 만나 스승으로 섬기게 된다.

2.2. 요동 시절

얼마 지나지 않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 천하가 큰 혼란에 휩싸이자 관녕은 왕렬, 국연, 병원 등과 같이 요동으로 피난을 갔으며, 왕렬과 병원, 관녕이 한꺼번에 자신의 영지로 오니 감격한 공손도는 관역으로 달려 나가 그들을 접대할 정도였다. 관녕은 공손도를 만나 경전에 대한 말을 했을 뿐으로 세상사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아 공손도는 내심 실망한다.

하지만 관녕이 공손도를 만난 다음 영지의 북쪽의 산으로 들어가 초가집을 짓고 굴을 파서 방으로 만드니 공손도는 감격하는데, 그것은 청주 사람들이 요동으로 대거 이주해 오기는 했지만, 이는 공손도가 다스리던 요동이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에 말 그대로 전란을 피해 임시로 피난할 곳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으로, 이 때문에 모두 요동반도의 남쪽 해안가에 거주하여 난이 진정되면 바다를 건너 고향인 청주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녕이 북쪽에 자리를 잡아 고향으로 돌아갈 의향이 없음을 나타내자 유민들을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하여 세력을 팽창시킬 야망을 지녔던 공손도에게는 반가운 행위로 난리를 피해 바다를 건넌 난민들도 대부분 관녕이 사는 곳으로 몰려왔으며, 10개월 만에 제법 큰 마을을 형성해 공손도로써는 감사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관녕은 그들을 대상으로 시경서경을 강론하면서 조두[3]를 펼쳐놓고 엄숙하게 의식을 진행하고 예양을 밝혀서 가르치자 배움을 청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이런 그의 현명함을 보고 공손도는 마음이 편안해지고 백성들은 그의 덕에 감화되었다. 하지만 성품이 강직하고 사물에 이치를 연구한 것으로 높고 깨끗한 언론을 전개하기로 이름 높은 그의 친구 병원은 공손도의 유정을 대하는 태도에 분노해 그를 감싸주면서 공손도를 가르치려 들자 그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느낀 관녕은 병원에게 이런 조언을 한다.
잠룡은 성덕을 보이지 않으니 시의에 적절하지 않은 말은 모두 화를 초래하게 된다네.
그 말을 들은 병원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이 점점 높아져 중원에도 알려지자 사공으로 있던 조조의 귀에도 들어가자, 공손도의 서자 공손강에게 은밀히 사람을 보내 관녕을 서쪽으로 보내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공손강은 공손도가 죽으면 자신이 요동을 차지할 야망을 품고 바깥으로는 장군태수라 부르면서 요동 안에서 왕노릇할 야망을 품고 있었으며, 그런 그의 야망에 자신을 도와주는 관녕의 존재는 필수적이었으므로 조조의 명을 발설하지 않으니 공손강의 관녕에 대한 존경심과 꺼림이 이 정도였다.

시간이 지나 중원 지역이 다소 안정되자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지만 오직 관녕만이 처음에 보여줬던 의향대로 그곳에서 평생을 지낼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런 인재를 조씨 일가는 놔두지 않았다.

2.3. 조비 시절

공손도의 뒤를 이은 공손강도 죽고 공손공이 요동을 장악하고 중원 또한 조비위나라황제에 오른 223년에 조비는 화흠에게 고상한 지조를 가진 군자를 천거하라고 했는데, 이 때 화흠은 자신의 옛 친구인 관녕을 추천하니 조비는 편안한 수레를 관녕에게 보내 그를 초빙한다.

그 때 관녕은 공손강의 적자가 없어 유약한 동생인 고자 공손공이 뒤를 이었으나 공손강의 서자인 공손연이 상당한 준재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세우면 아랫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 이는 환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된다.
고 말하고는 가솔을 이끌고 바닷길을 통해 자신이 36년간 있던 요동을 떠나기로 결심하며, 공손공은 그를 남쪽 교외까지 환송하고 재물을 선사하지만 관녕은 거꾸로 자신이 공손도, 공손강, 공손공 3부자에게 받아 쓰지 않고 모아둔 모든 재물을 밀봉해 공손공에게 돌려주고 떠난다. 관녕이 돌아오자 조비는 관녕을 조서를 내려 태자태부로 임명하지만 관녕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2.4. 조예 시절

조예의 대에 노육사도의 직책으로 관녕을 추천하지만 명제(조예)는 이를 거부했으며, 233년에는 화흠 또한 태위의 자리를 병을 핑계로 물러나려고 하면서 자신의 직위를 관녕에게 넘기려고 했지만 조예는 이를 거부하고 관녕을 광록훈에 임명해 부르도록 하지만 관녕은 자신을 초망지신(草莽之臣)이라 부르면서 이를 사양한다.

그 후에도 여러 번 관녕을 부르는 사신이 청주자사 정희를 통해 왔지만 관녕은 이를 사양했으며, 241년맹관, 손옹, 왕기 등이 추천해 특히 노인을 위한 수레를 보냈지만 수레가 도착할 때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3. 일화

그가 요동에 있을 때의 일화로 황보밀의 고사전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개의 일화가 있다.

또 관녕은 세상이 무너지고 어지러워지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씨를 바꾸는 현상을 보고 각 성씨의 근원과 세보를 적은 씨성론(氏姓論)을 지었는데, 내용은 혼인과 친구 관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어 각 지역의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을 기록해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보고 서로를 보살피도록 하였다.

또 관녕은 50년 동안 나무 평상에 앉으면서 한 번도 다리를 뻗는 일이 없었다고 하며 그로 인하여 평상 위의 무릎 닿는 곳이 모두 뚫어졌다고 한다.

처음에 관녕의 가 죽었을 때 주위 사람들이 재가를 하라고 하자 관녕은
나는 매번 증자(증삼)와 왕준의 말을 생각하고 마음으로 항상 그들을 좋아했는데, 어떻게 내가 똑같은 일을 만나고 나서 나의 본심을 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하고는 재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아들 관막은 관녕이 죽을 때 낭중으로 임명되어 박사까지 승진한다.[4]

4. 평가

소년 시절 병원과 함께 고결한 품행으로 칭송받았으며, 요동으로 피난 갈 때 왕렬보다 명성이 낮았으나 진수가 평하길 다정하고 고상하며, 확실하게 절개를 지켰다.

전자에서 말하길 "자식들에게는 효도를, 형제들에게는 우애를, 신하들에게는 충성심을 가르쳤으며. 행동거지는 공손하게 하도록 하고, 말은 순리적으로 하도록 하여, 그의 행동을 관찰해도 조상에게 부끄러움이 없도록 했다.

그는 사람됨이 부드럽고 온순하면서 선으로 이끌기가 쉽기 때문에 당장은 어렵더라도 조금씩 노력하면 누구나 교화를 시킬 수가 있다고 했다. 관녕이 죽자 천하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고 있었던 사람이나 몰랐던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가 슬퍼했으며, 그가 자신의 덕으로 세상을 순화시킨 공이 이와 같았으니 지극하지 않았다고 누가 말하겠는가?"라고 했다.


[1] 화흠이 용의 머리(용두), 병원이 용의 배(용복), 관녕이 용의 꼬리(용미)였다.[2]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설화는 조선에 흔히 전해 내려왔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기묘사화의 주역이었던 남곤조광조가 등장하는 야사이다. 둘이 산책을 하던 도중 미녀가 지나가자 조광조는 그 모습을 보고 산책하는 도중에도 계속 뒤돌아봤으나 남곤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걸어갔다. 이를 부끄럽게 여긴 조광조는 어머니여흥 민씨에게 이것을 말하며 자책했으나 여흥 민씨는 오히려 남곤을 냉정하고 무서운 인물로 여겨 조광조에게 남곤을 멀리하라고 했고, 심지어 남곤의 집에서 먼 곳으로 이사까지 했다.[3] 제사(祭祀) 때, 신 앞에 놓는 나무로 만든 그릇의 한 가지이다.[4] 비교적 오래살았다는 것. 박사가 되기 위해서는 50살이 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