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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3344b><colcolor=#ffffff> 1964 도쿄 올림픽 | |
제18회 올림픽 경기대회 第18回オリンピック競技大会 1964年夏季オリンピック 1964 도쿄 올림픽 경기대회 Games of the XVIII Olympiad™ Tokyo 1964 | |
대회기간 | 1964년 10월 10일[1] ~ 10월 24일 |
개최국 | [[일본|]] 일본 도쿄도 |
참가국 | 93개국 |
참가선수 | 5,151명 (남자: 4,473명 / 여자: 678명) |
경기종목 | 19개 종목 (163개 세부 종목) |
개회선언 | 히로히토 일본 천황 |
선수 선서 | 오노 다카시[2] |
성화 점화 | 사카이 요시노리 |
개·폐회식장 | 국립 카스미가오카 육상 경기장 |
[3] |
[clearfix]
1. 개요
Olympic Flame & Opening Ceremony |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하계 올림픽이다. 본래 1940 하계 올림픽을 도쿄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중일전쟁으로 개최권을 자진 반납했고 이후 24년이 지나서야 겨우 올림픽의 개최권을 얻어서 개최할 수 있었다.[5]
현대 일본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준 행사이자 전후 일본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6][7] 일본 경제 부흥의 시발점이며, 현대의 서구 문화권에 자리잡은 일본의 이미지는 대부분 1964 올림픽을 기점으로 생겨났다. 도카이도 신칸센 개통을 필두로 여러 부분에서 일본의 경제 부흥을 세계에 알렸다. 또한 최초로 정지 궤도 인공 위성을 통해 미국 전역에 실시간으로 중계되거나, 컬러 텔레비전을 지원하고, 신칸센이라는 상용운전속도 200km/h급 고속철도[8]를 세계 최초로 선보이고 올림픽 최초로 텔레비전 녹화 중계가 이루어지는 등 기술적 발전이 두드러진 올림픽이다.[9]
1964 도쿄 올림픽 이후 아시아에서는 대한민국의 1988 서울 올림픽, 중국의 2008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었으며, 2020 도쿄 올림픽이 다시 개최되었다. 단 2020 도쿄 올림픽은 실제로는 2021년에 열렸다.
2. 유치 과정
<rowcolor=#ffffff> 국가 | 도시 | 1차 |
일본 | 도쿄 | 34 |
미국 | 디트로이트 | 10 |
오스트리아 | 빈 | 9 |
벨기에 | 브뤼셀 | 5 |
3. 진행
대회 전의 이슈는 신흥국 경기 대회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신흥국 경기 대회 참가선수에 대한 자격정지처분을 둘러싸고 논란중이었던 북한과 인도네시아를 참가시키기 위해 대회 위원회에서 노력을 하였지만 결국 두 나라는 대회 개최 전날에 불참통보를 내리면서 올림픽을 참가하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이른바 "가네포 사건"#으로 자국의 주요 선수들이 출전을 박탈당했다. 이 때문에 북한의 첫 출전은 국호 문제 등이 겹쳐 1972 뮌헨 올림픽까지 미뤄진다.또한 중국과 대만간에도 논란이 일어났는데, 당시 중국이 IOC를 탈퇴한 상태였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참가하지 않았고 대신 대만이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당당히 앞세우고 출전했다.[10]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시행중이었고 이게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IOC로부터 제명당해서 강제로 불참했다. 이후 남아공은 28년 뒤,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고 나서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되어서야 올림픽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nicovideo(sm24657490?ref, width=640, height=360)][11]
대회 개회식에는 당시 일본 덴노인 쇼와 덴노가 참석, 개회 선언을 했다. 옥음방송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의 항복을 선언한 지 19년 만의 공개 육성 연설[12]이었다. 또한 개막식의 절정을 장식하는 성화봉송 최종주자는 1945년 8월 6일[13] 히로시마에서 태어난 사카이 요시노리(坂井義則)라는 청년이었는데, 이를 두고 일본의 침략 및 전쟁범죄 책임을 희석시키고, 전쟁의 피해자라는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담은 것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4] 개막식 당시 원폭 피해자에 대한 묵념을 전 관객과 선수들에게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올림픽 도중 중국이 항의성 차원에서 1964년 10월 16일에 핵실험을 실시하여 일본측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일본에서 인기가 높았던 유도와 배구가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으며, 일본은 유도에서 3개의 금메달과 여자 배구에서 금메달을 따오게 되었다.
1960 로마 올림픽에서 맨발로 뛰면서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는 이번에는 운동화를 신고 뛰어서 세계신기록을 내면서 올림픽 2연승을 달성했다. 급성 충수염 때문에 수술을 해서 훈련량이 줄었음에도 자신이 세운 기록에서 3분을 앞당기면서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 그런데 수술을 받고 바로 뛸 줄은 몰랐던 탓인지, 대회 조직위에서 그만 시상식에서 에티오피아의 국가를 준비하지 않아서[16] 기미가요를 틀고 대충 시상식을 마무리하는 촌극을 빚었다.[17] 이 일로 일본이 비판을 받은 건 당연지사였다.
그 외에 야구와 무도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대회이기도 하다. 소련의 체조 선수인 라리사 라티니나는 이 대회에서 금 2, 은 1, 동 2개를 획득하여 올림픽에서만 총 메달을 18개(금 9, 은 5, 동 4)를 가져갔으며 그녀는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를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2012년 마이클 펠프스에 의해 깨질 때까지 48년 동안 보유한 올림픽 메달 신기록이기도 했다.
선수촌에서 불가리아 선수들끼리 결혼식을 올렸으며, 이것은 사상 최초의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올림픽 대회에 픽토그램[18]이 최초로 정식 도입된 대회이기도 하다. 이후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이를 활용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당시 선수촌으로 쓰이던 건물들은 1965년부터 문부성 소관법인 국립올림픽기념청소년센터[19]로 넘겨졌고, 2001년에 개조한 덕에 개최 이후에도 놀리지 않고 나름 잘 써먹고 있는 편이다. 시설 내에는 한때 도쿄 배낭여행객에게 인기가 높았던 요요기 유스호스텔이 꾸려지기도 했으며 2012년까지 운영되었다.
코바야시 리츠의 미소녀 마작만화 <사키 -Saki->에서 키요스미 고교의 숙소와 경기장으로 등장한 바 있으며 현실에서는 2011년과 2012년에 국제청소년연합(IYF)이 청소년 캠프를 개최하기도 했던 장소다.
[nicovideo(sm24764686, width=640, height=360)]
마지막 경기였던 승마 경기가 끝나고 금일에 바로 폐회식을 시작했다. 올드 랭 사인이 울려퍼짐과 동시에 사람들이 촛불을 흔들며 올림픽을 떠나보냈다. 그리고 경기장 전광판에는 'SAYONARA'[20]문구가 출력되며 다음 올림픽인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다시 만나길 고했다. 여담으로 잠비아는 개막식 입장때 북로디지아로 참여했지만, 폐막식 입장때가 마침 독립한 날이라 새로운 국가의 플랜카드와 現 잠비아 국기를 들고 입장했다.
4. 특징 및 의의
20세기 일본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히며, 일본의 경제 발전과 재건의 신호탄을 알린 대회이다.세계 최초의 고속철도이자 일본 최초의 신칸센인 도카이도 신칸센은 이 올림픽 개막 아흐레 전인 1964년 10월 1일에 개통되었다.
이때 건축된 올림픽 경기장은 여러가지로 유명한 건축물. 일본 스포츠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도쿄국립경기장[21]이나 일본의 건축 영웅 단게 겐조의 작품인 요요기국립체육관은 일본의 현대 건축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그래픽 디자인 분야에서도 도쿄 올림픽의 홍보물을 통해 일본의 수준높은 디자인 능력을 세계에 알리게 된다. 태평양 전쟁의 패전국이자 서구의 흉내만을 낸다고 평가절하 받던 것이 기존의 일본과 그 디자인이었다면, 올림픽 이후로 독특한 일본색을 가진 독자적인 그래픽 디자인 문화를 가졌다고 평가받으며 그 위상이 재정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올림픽 포스터[22]를 담당한 가메쿠라 유사쿠 등 세계적인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알려지게 되는 데에는 이 도쿄 올림픽이 계기가 되었다.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인 올림픽의 몸값에서도 다루어진 일인데,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날생선 먹는 국가에서 올림픽을 치르는 건 말도 안된다'는 서구 국가들의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이후 회와 초밥을 국제화하는 데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고, 그 결과 현재 유럽과 미국에서 이들 음식의 위상은 상류층이 즐기는 별식 수준으로 높아졌다.
일본은 8년 후 1972 삿포로 동계올림픽과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도 개최하는 등 동·하계 모두 2번이나 개최하는 사례를 남겼다.
그리고 56년 뒤인 2020년에 다시 도쿄로 올림픽이 돌아오게 되었다. 다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전세계 대확산 사태로 인해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
그리고 한국 역시 24년 후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이 당시 일본이 누린 것과 같은 이미지 약진 효과를 톡톡히 누리게 된다.
5. 경기 종목
- 근대 5종
- 농구
- 레슬링 - 그레코로만형, 자유형
- 무도 - 가라테, 검도, 궁도, 스모, 오키나와 테 [시범]
- 배구
- 복싱
- 사격
- 사이클 - 도로, 트랙
- 수영 - 경영, 다이빙, 수구
- 승마 - 마장마술, 장애물, 종합마술
- 야구[시범]
- 역도
- 요트
- 유도
- 육상
- 조정
- 체조 - 기계체조
- 축구
- 카누 - 스프린트
- 펜싱
- 필드 하키
6. 대한민국 선수단
- 대한민국 참가 현황 : 임원 59명, 선수 165명 참가[25]
- 근대 5종: 최귀승
- 농구: 김무현, 김승규, 김영기, 김영일, 김인건, 김종선, 문현장, 방열, 신동파, 이병구, 정진봉, 하의건
- 레슬링: 강두만, 김봉조, 김익종, 신동의, 신장식, 윤대기, 이기열, 장이현, 장창선, 정동구, 최병섭, 최영길
- 배구: 남자(김광수, 김성길, 김영준, 김인수, 김진희, 박서광, 서반석, 손영완, 오평길, 이규소, 임태호, 정선흥) 여자(곽룡자, 김길자, 문경숙, 서춘강, 오순옥, 오청자, 유춘자, 윤정숙, 이근수, 정정은, 최돈희, 홍남선)
- 복싱: 김덕팔, 박구일, 서분남, 석종구, 이금택, 이홍만, 정신조, 조동기
- 사격: 남상완, 박남규, 박삼규, 서강욱, 신현주, 안재송, 안정근, 이종현, 추화일, 허욱봉
- 사이클: 안병훈, 위경용, 이선태, 조성환, 홍성익, 황창식
- 수영: 김봉조, 송재웅, 임금자, 전옥자, 정순자, 조창제, 진장림
- 승마: 김문식, 김영노, 김철규, 서명원, 안덕기, 이일규, 조형원
- 역도: 김해남, 양무신, 유인호, 이명구, 이종섭, 이형우, 허창범, 황호동
- 유도: 김의태, 김종달, 박길순, 박청삼, 서상철, 이학래
- 육상: 김병기, 김복래, 김연범, 박수권, 박영숙, 박희숙, 송양자, 이상훈, 이학자, 이혜자, 임동실, 임호근, 장종길, 정교모, 정기선, 주형걸, 한명희, 한죽희, 황정대
- 조정: 김규산, 김헌종, 박신영, 안종득, 유혁근, 윤영웅, 이상우, 이은산, 지덕한, 천성태, 최신일, 한영준
- 체조: 강수일, 김광덕, 김충태, 서재규, 이광재, 이덕분, 정봉순, 정이광, 최영숙, 한수희
- 축구: 김덕중, 김삼약, 김영배, 김정남, 김정석, 김찬기, 김홍복, 박승옥, 우상권, 유광준, 이우봉, 이이우, 정영환, 조성달, 조윤옥, 차경복, 차태성, 함흥철, 허윤정
- 펜싱: 김만식, 신광숙, 신두호, 한명석
- 대한민국 참가 성적 :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 획득. 종합순위 26위.
- 은메달 : 레슬링(자유형 플라이급) 장창선
- 은메달 : 복싱(밴텀급) 정신조
- 동메달 : 유도(미들급) 김의태
당시 남·북한은 공동 출전을 논의하고 있었다. 한국은 <아리랑>을, 북한은 남한 애국가와 북한 애국가를 25초식 붙인 50초짜리 짬뽕 국가를 주장했다. 간신히 <아리랑>으로 결정됐는데 이번엔 북한이 남•북한 국기를 양면으로 붙여서 쓰고 나가자고 해서 결렬되었고, 게다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북한이 출전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남북의 대결은 그 뒤의 올림픽에서도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이는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비로소 완화된 편이다. 그러나 단일팀으로서의 출전은 없었고, 공동 입장만 두 차례[26] 있었다. 하지만 종목별 대회에서는 두 차례 단일팀 출전이 있었다. 그리고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사상 첫 올림픽 단일팀이 성사되었다.
휴전 이후 최초의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던 대회다. 신흥국 경기대회에서 북한 대표로 금메달을 수상한 육상 선수 신금단[27]이 올림픽 참석을 위해 도쿄까지 갔다가 북한의 불참 결정으로 돌아갔다. 사실 신금단은 1.4 후퇴 때 월남한 아버지 신문준과 헤어진 이산가족이었다. 딸의 올림픽 출전 사실을 알게 된 신문준이 도쿄까지 갔지만 북한의 올림픽 불참 결정으로 북한 선수단이 귀국을 위해 니가타행 열차를 타기 직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다. 시간은 7분 남짓이었고, 이후 신문준이 딸을 다시 만나지 못한 채 19년 후인 1983년 12월에 사망하면서 이것이 신문준-신금단 부녀의 생전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이 부분은 2017년 4월 2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한국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기고, 일본에 사는 많은 동포들의 한국 지지를 이끌어 내며, 민단과 조총련 사이의 대결에서 민단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1964년 당시의 나라 살림치고는 상당히 과할 정도인 임원 59명, 선수 165명이라는 대규모[28]의 선수단을 꾸려서 일본으로 건너갔다.[29] 그러나 선수단의 규모에 비해 영 좋지 못한 은메달 2개와 동메달 1개, 종합 27위의 결과를 냈다. 복싱의 정신조와 레슬링의 장창선이 은메달을, 재일교포 출신인 유도의 김의태[30]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꽤나 공교로운 것은 한국이 메달 딴 3개 세부 종목의 우승자가 모두 일본 선수였다는 것이다. 그래도 당시로선 최고 성적이었다. 기대를 못 따라가서 그렇지. 무엇보다 4년 전 로마 대회의 노메달 수모를 설욕하는 효과는 있었다. 그리고 이때 레슬링과 유도에서 최초로 메달을 획득하면서 그 이전 올림픽에서는 오로지 복싱과 역도에서밖에 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던 한국에게[31] 메달 저변 다각화의 가능성을 비친 첫 대회였다고 할 수 있다. 즉 당시 레슬링의 장창선과 유도의 김의태는 각각 한국의 첫 레슬링, 유도 메달리스트인 것이다. 또한 이때 제기된 종합 스포츠 훈련 시설의 필요성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 바로 태릉선수촌이었다. 장창선은 올림픽 이후 세계 레슬링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축구에서 한국은 아랍 연합 공화국(현재의 이집트)[32]에 무려 0:10이라는 대패를 당했고, 브라질에게는 0-4, 체코슬로바키아에게 1-6으로 지면서 3전 전패 1골 20실점으로 참가국 14개국 가운데 꼴지를 차지했다. 이 10실점은 1948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에게 0:12로 진 뒤로 한국 축구 역사상 국제 대회 2번째 최다 실점패 기록이었다. 아랍 공화국은 브라질을 제치고 조 2위로 8강에 진출해 가나를 5:1로 이기며 첫 4강에 올라갔지만 금메달을 받은 헝가리에 0-6으로 지고 3, 4위전에서 독일(사실상 동독팀)에 1-3으로 지며 4위를 기록했다.
바로 옆 동네 일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당시 선진국 문턱이던[33] 일본과는 정반대의 빈국이었던[34] 우리나라는 외화 사정으로 인해 일반 국민들의 올림픽 구경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원래 도쿄 올림픽 조직 위원회 측에서 대한 올림픽 위원회에 9,000매에 가까운 관람권을 보냈다. 그러나 이를 구입하기 위해선 첫 번째로 올림픽 기간 동안 도쿄에 체류할 장소가 있어야 하고, 참관권을 암시장이 아닌 정당한 외화로 구입해야 하며[35] 여권 수속이 필요하다는 조건이었다. 일단 여권은 그렇다 치더라도 외화를 국내에서 정식으로 구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고, 당시 일본은 미수교국이었으며 해외여행이라는 개념도 정립되지 않은 시기라서 일반인의 올림픽 참관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뉴스에 따르면 3,000여 명 정도가 이런 방법을 통해 참관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체육계 사람들이나 재일교포 친지를 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나마 50년이 지난 지금이야 해외여행이 보편화되고 외화는 물론이고 올림픽 입장권도 개개인이 직접 구매할 수 있다는걸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020년에 닥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 19로 인하여 2020 도쿄 올림픽은 1년 연기되었고 코로나 감염 방지를 위해 외국인의 입국이 제한되었으며, 결국 도쿄도 내에서 열리는 모든 경기가 무관중 경기로 치러지게 되어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번에도 도쿄 올림픽 직관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7. 주요국 메달 집계
1964 도쿄 올림픽 메달 집계 최종 집계 | |||||
<rowcolor=#f3344b,#ffffff> 순위 | 국가 | 메달 | 합계 | ||
금 | 은 | 동 | |||
1 | [[미국|]] 미국 | 36 | 26 | 28 | 90 |
2 | [[소련|]] 소련 | 30 | 31 | 35 | 96 |
3 | [[일본|]] 일본 | 16 | 5 | 8 | 29 |
4 | [[독일|]] 독일 단일팀 | 10 | 22 | 18 | 50 |
5 | [[이탈리아|]] 이탈리아 | 10 | 10 | 7 | 27 |
6 | [[헝가리 인민공화국|]] 헝가리 | 10 | 7 | 5 | 22 |
7 | [[폴란드 인민공화국|]] 폴란드 | 7 | 6 | 10 | 23 |
8 | [[호주 자치령|]] 호주 | 6 | 2 | 10 | 18 |
9 |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 | 5 | 6 | 3 | 14 |
10 | [[영국|]] 영국 | 4 | 12 | 2 | 18 |
26 | [[대한민국|]] 대한민국 | 0 | 2 | 1 | 3 |
8. 여담
-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주제로 한 노래가 있는데, 제목은 <東京五輪音頭>(도쿄 올림픽 온도)였다. 여기서 '音頭'(おんど, 온도) 는 일본의 전통 가락 중 하나로 우리나라로 보면 강강수월래 같은 둥글게 서서 추는 춤에 쓰이는 리듬이다. 그리고 이것이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응원가인 <도쿄온도>의 유래가 되었다. 당시 일본의 중장년층에게 큰 인기가 있었던 가수 미나미 하루오(三波春夫, 1923 ~ 2001)가 부르고 작곡가인 코가 마사오(古賀政男, 1904 ~ 1978)가 작곡하여, 당시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36] 그리고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둔 2016년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후쿠다 코헤이(福全こうへい)가 이 노래를 불렀다. 1988 서울 올림픽 당시의 "<손에 손잡고>"처럼 1964년 도쿄 올림픽을 상징하는 노래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2017년에 2020 도쿄 올림픽 홍보를 위해 대회 조직위원회에서 리메이크했다.
- 일본경제연구센터(JCER)가 2018년에 발표한 《1964년과 비교한 2020년 도쿄 올림픽 경제 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1964년 당시 대회 시설과 인프라 투자에 9,870억엔을 썼다고 한다. 이는 1964년 일본 명목GDP(31조 5,670억엔)의 3.1%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이는 2020년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들어간 투자액이 GDP 대비 0.5% 안팎임을 고려할때, 무려 6배 이상의 규모에 해당한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의 대규모 인프라 투자는 1960년대 일본 경제의 빠른 성장에 걸맞은 물류 및 교통망 확충 필요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두 번의 도쿄 올림픽, 일본의 도약과 쇠락
- 일본의 시계 메이커인 세이코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공식 타임키퍼로 선정된 세이코가 시간 측정용으로 쿼츠로 동작하는 정밀시계를 내놓았던 것이다. # 이 시계는 3kg이나 나가는 물건이었으나 5년 뒤 세이코는 이 시계의 손목시계 버전을 출시하는 기염을 토함으로써 스위스 시계 업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흔히 이야기하는 쿼츠 파동이 이 사건이었다.
- 세이코 역시 쿼츠 시계의 가격이 급속도로 낮아지는 바람에 크게 재미는 못 봤지만, 이 일로 스위스 시계 업계는 아주 초토화되었다. 인력이 4분의 1 토막으로 감원되고, 유수의 시계 회사들이 망하거나 다른 그룹의 산하로 들어가게 된 것이 이 시기였다. 고급화 전략으로 어찌어찌 살아남기는 했지만 아직도 스위스 시계 회사들 중 독립 회사는 그리 많지 않다.
- 덕질하는 사람들에게도 의미가 있는 올림픽이기도 하다. 하나는, 수영 경기 당시 미국팀에서 가슴 사이로 고인 물이 빠져나가게끔 설계한 수영복을 처음으로 선수용 수영복으로 도입했다. 이것에 영향을 받아 일본에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구형 스쿨미즈이다. 다른 하나는, 정부에서 올림픽 게최에 맞추어 새로이 여학생용 학교 체육복을 지정했으며, 이때 나온 것이 당시 여자 배구 유니폼으로도 사용하였던 블루머이며, 여기에 일본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이 금메달을 획득하고, 각종 매체에서 여자 배구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여학생 체육복으로 이미지가 고정화 되었다.
- 올림픽 개막을 열흘 앞둔 1964년 9월 30일에는 당시 쇼와 덴노의 작은아들인 마사히토 친왕[37]이 츠가루 하나코와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과 함께 히타치노미야(常陸宮) 궁가를 창설했다. 당시 일본에서는 전후에 처음 창설된 궁가였던데다가 올림픽 개최와 신칸센 개통 등의 사회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일본의 전후 부흥을 확실하게 체감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사히토 친왕과 하나코 비는 자녀를 두지 못해, 히타치노미야 궁가는 마사히토 친왕 1대만으로 단절될 처지에 놓였다.
- 2019년 1월부터 방영한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는 1964년 도쿄 올림픽을 배경으로 일본의 마라토너였던 카나구리 시조의 실제 이야기를 다루었다.[38] 주연으로는 아야세 하루카, 나카무라 칸쿠로, 아베 사다오가 출연했다.
- 도쿄 올림픽 때 스타디움을 짓기 위해서 건물을 헐었는데, 무려 3년 동안 꼬리가 못에 박힌 채로 살아간 도마뱀이 발견되었다. 이 도마뱀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로 다른 도마뱀이 먹이를 물어주어서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올림픽이 끝난 지 55년이 지나서 공식 라이선스 게임이 제작되었다. <마리오와 소닉 AT 2020 도쿄 올림픽> 참고.[39]
- 픽토그램이 처음 도입된 대회였다.
- 이 올림픽에서 마라톤 동메달을 획득한(일본이 이 대회 육상에서 딴 유일한 메달) 츠부라야 고키치(円谷幸吉)는 4년 후 오래 사귄 연인이 다른 남자와 결혼하자 상심해 자살했다.[40]
- 전쟁 중이던 남베트남 또한 이 올림픽에 참가했다.
- 이 대회에서 쓰던 경기장 일부는 57년 뒤에 다시 올림픽이 열리면서 재활용되었다.
9. 같이 보기
[navertv(39500764)]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5부 - 도쿄 ·꿈과 환상의 1964년中[41][42] |
[1] 이후 일본에서 체육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부터 해피 먼데이 제도가 적용되어 10월 둘째 주 월요일로 변경되었다.[2] 체조 선수[3] 인터넷이 개발되기 훨씬 전이라 한국어 관련 홈페이지(입장권, 스토어, 안내, 뉴스 등)는 원래 없었으며, 올림픽 위원회 공식 홈페이지가 만들어져 있다.[4] 왜 가을에 열렸나 궁금할 수도 있지만 일본의 10월은 한국은 10월과 다르다. 오히려 한국의 9월 초증순과 비슷한 날씨를 보일 때가 10월 초~중순이다. 1964년 당시 4월부터 시작된 이상 고온 현상이 한여름인 7~8월에 들어 폭염으로 발전해 올림픽을 치를 만한 날씨가 되지 못 했다. 당시 도쿄에선 폭염으로 인해 물 부족 사태가 발생해서 급수 중단 결정까지 내리다가 폭우로 해결됐을 정도. 또한 당시에는 일본도 에어컨이 고급 백화점,신칸센,대도시 관공서에만 있었다는 걸 감안해야 된다.[5] 참고로 같은 해에 예정되어 있던 동계 올림픽도 원래는 삿포로에서 개최할 예정이었다.[6] 대한민국의 1988 서울 올림픽이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 못지 않게 1964 도쿄 올림픽이 일본에 미친 영향이 컸다. 1988 서울 올림픽과 1964 도쿄 올림픽 모두 개최국의 수도권에서 열렸으며, 개최 이후 각 국가가 선진국으로 급격히 발전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한국은 서울 올림픽 개최로부터 14년 후인 2002년(사실 실질적으로는 1994년 선진국 경제 수준에 이르렀으나 얼마 안 가 IMF 외환위기로 고꾸라졌다), 일본은 도쿄 올림픽 개최로부터 10년도 안 지난 1970년대 초반에 선진국에 진입했다. 마침 서울 올림픽 직후인 1989년 한국의 1인당 GDP가 세계 평균의 1.5배(한국 5817달러, 세계 평균 3896달러)로 도쿄 올림픽을 개최한 1964년 일본과 비슷한 포지션이기도 하고.[7]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응답하라 1988, 즉 1988 서울 올림픽을 추억하는 세대가 존재하듯 일본에서도 1964 도쿄 올림픽을 추억하는 도쿄 올림픽 세대가 존재한다.[8] 사회간접자본의 올림픽 연계는 전통적 현상이다. 특히 상용운전속도 200km/h를 최초로 돌파한 철도라는 점에서 철도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다.[9] 다만 당시 일본 내에서도 컬러 TV로 도쿄 올림픽을 본 사람은 그리 많지는 않다. 하나다 소년사를 보면 알 수 있듯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산다는 일본에서도 컬러 TV는 1~2년치 봉급에 비교당하는 수준으로 굉장히 비싸고 사치스러운 가전제품이었고 컬러 송출 자체도 대도시(도쿄도, 오사카부, 아이치현 나고야시)와 그 근교지역에서나 이뤄지고 있었던 상황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1966년까지 일본의 TV 보급률은 0%대에 그치는, 사실상 엄청난 부자가 아니면 집에 들여올 엄두도 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물론 주요 거리나 주요 기차역, 백화점 등에 설치된 컬러 TV를 통해 올림픽 경기를 컬러로 본 사람은 꽤 있지만, 그나마도 대도시와 그 근교지역에서나 볼 수 있었고 지방도시나 시골의 경우에는 흑백으로 봐야했다.[10] 일본어로는 중화민국(中華民国)으로 표기되었으나 영어로는 대만(TAIWAN)으로 표기.[11] 당시 개막식 라디오 중계 영상이며, 무려 풀버전이다.[12] 히로히토는 2차 대전 패전 이후에는 공개 육성 연설을 매우 자제했다. 전후에 딱 3번 공개 육성연설을 했다. 아키히토와 나루히토는 히로히토보다 재위 기간이 짧음에도 공개 육성 연설 기록은 더 많다.[13]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날은 태평양 전쟁 말기 광기로 치닫던 일본 제국의 전쟁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린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다.[14] 사카이는 도쿄 올림픽 당시 19세로 3단뛰기 종목의 육상 선수이기도 했는데, 성화봉송만 거행하고 올림픽 출전은 하지 못했다. 2년 후 계주(이어달리기)로 종목을 바꾸어 올림픽은 아니지만 1966 방콕 아시안 게임에서 400m 금메달을 수상했고, 은퇴한 후에는 후지 테레비의 스포츠 전문 기자로 활동하다가 2014년에 향년 69세를 일기로 사망했다.[15] 당시 유도는 지금보다 체급이 적어서 3개였다. 남자부 체급별 경기와 체중에 관계없이 출전할 수 있는 무제한급이 열렸다. 3개 체급을 모두 일본이 싹쓸이했는데, 무제한급 경기에서는 헤싱크가 결승에서 일본 선수를 누르고 우승한 것이다.[16] 지금은 미리 연주해둔 국가를 녹음해서 틀어주지만, 198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시상식에서 국가를 직접 연주했다.[17] 당시 수상 영상을 보면 완전히 굳어버린 표정의 아베베의 모습과 앞에 있는 영국 선수가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미가요가 아니더라도 올림픽 찬가라도 틀 수 있었을 것이다.[18] 간이 아이콘. 예를 들면 신호등에 있는 사람 모양의 그래픽 같은 것. 다만 도쿄 이전 1936년 베를린, 1948년 런던 대회에도 장식용으로 사용되었으며, 1968 멕시코 대회에서는 사람이 아닌 사물 형태의 픽토그램이 사용되었다가 그 다음 1972 뮌헨 대회부터 사람 형상으로 고정되었다.[19] 해당 기관은 1980년부터 문부성 직속기구로 개편됐다가 2001년에 문부과학성으로부터 독립행정법인으로 분리하여 2006년에 '소년 자연의 집'을 합쳐 '국립청소년교육진흥기구'가 되었다.[20] 일본어로 작별을 뜻하며,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는 상대에게 쓰는 말이다. 2020 도쿄 올림픽 폐막식에선 이 문구를 오마주해 고맙다는 뜻의 '아리가토' 문구를 내보냈다.[21] 정확히 말하면 당시 명칭은 (메이지)진구외원경기장으로서 1940년 올림픽을 대비하여 이미 지어진 상태였다.[22] 이 포스터는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에도 등장한다.[시범] 시범 경기 종목[시범] 시범 경기 종목[25] 출처 국제스포츠정보센터[26] 2000 시드니 올림픽과 2004 아테네 올림픽.[27] 금메달 수상이 유력했지만, 신흥국 경기대회에 나갔기 때문에 올림픽 경기 출전이 금지됐다.[28] 선수 수만 놓고 보면 60년 후인 2024 파리 올림픽(143명)보다도 많았다.[29] 전 대회인 1960 로마 올림픽은 임원 31명, 선수 36명이었고, 다음 대회인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은 임원 21명, 선수 55명이었다.[30] 일본식 이름은 야마모토 요시야스(山本義泰)로 이쪽으로 찾는 편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31] 다만 레슬링의 경우는 이전 대회들에서 4위 입상자를 배출할 만큼 한국이 가능성을 보이던 종목이기는 했다.[32] 아랍 연합 공화국은 1958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시적으로 합병하고, 북예멘과도 느슨한 연방 비슷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일종의 아랍 연합 국가였다가 시리아의 반발로 1961년 다시 찢어졌다. 그러나 이집트는 시리아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고 하여 1971년까지 이 국호를 유지했다. 즉 1964년 당시는 사실상 이집트 대표팀이었다.[33] 도쿄 올림픽 당시인 1964년 일본의 1인당 GDP는 약 845달러로 세계 평균(561달러)의 1.5배 정도였으며 미국(3574달러)의 1/4 미만, 한국(124달러)의 약 7배였다.[34] 1964년 당시 한국 국민들의 경제력 및 생활 수준은 필리핀과 태국은 커녕 캄보디아만도 못하고 나이지리아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한국이 중진국 대열에 들어서며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한 국가가 된 것은 수출 100억 달러를 돌파한 1977년이었으며, 선진국에 진입한 것은 그로부터 사반세기 뒤인 2002년(이 해 역시 한일 월드컵이 열린 해이다)의 일이었다.[35] 이를 만족시키는 방법은 외국에 거주하는 친지나 지인이 외화를 보내주는 수밖에 없었다.[36] 이 노래는 바로 전해 홍백가합전에서 모든 출연자들이 엔딩곡으로 불렸다. 참고로 미나미 하루오는 1970 오사카 엑스포의 테마송인 <세계의 나라에서 안녕하세요>도 불렀다. 오사카 엑스포가 이 도쿄 올림픽과 더불어 당시 일본의 고도 성장과 국력 신장을 상징하는 양대 행사 중 하나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일본 가요계에서 그가 가지는 위상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37] 아키히토 덴노의 남동생, 즉 현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숙부가 된다.[38] 일본의 마라토너 카나구리 시조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마라톤 완주 기록을 세운 선수로 유명하다. 자세한 것은 마라톤, 1912 스톡홀름 올림픽 문서를 참고하자.[39] 이 게임이 제목처럼 2020 도쿄 올림픽이 메인이긴 하지만 1964 도쿄 올림픽도 같이있다.[40] 다음 대회인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앞두고 약혼을 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소속된 자위대 체육학교(한국의 상무 체육부대에 해당한다. 고키치는 육상자위대 중위이기도 했다)의 상관들이 올림픽 이전에는 안된다며 반대했고, 기다림에 지친 연인측에서 파혼을 한 것이다. 여기에 부상으로 인한 성적 부진 등으로 장래를 비관하다가 1968년 1월, 자신이 도쿄 올림픽에서 받은 동메달을 손에 쥔 모습으로 목숨을 끊었다.[41] 2020년 1월 3일 방송[42] 20세기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의 유치와 진행과정 그리고 기반 시설들의 공사 등을 달력 형식으로 차례 차례 다룬 다큐멘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