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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베를린 | 1948 런던 | 1952 헬싱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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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 스톡홀름 올림픽 | ||
제5회 올림픽 경기대회 Den V olympiadens spel™ Olympiska sommarspelen 1912 1912 스톡홀름 올림픽 경기대회 Games of the V Olympiad™ Stockholm 1912 | ||
[1] | ||
<colbgcolor=#b2a770> 대회기간 | 1912년 6월 29일 ~ 7월 22일 | |
개최국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스톡홀름 | |
참가국 | 28개국 | |
참가선수 | 2,409명[2] | |
경기종목 | 14개 종목, 102개 세부 종목 | |
개회선언 | 구스타프 5세 스웨덴 국왕 | |
개·폐회식장 | 스톡홀름 올림피아스타디온 |
[clearfix]
1. 개요
1912년 6월 29일부터 7월 22일까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제5회 하계올림픽. 전 대회보다 참가국 수가 늘어서 이번에는 아프리카(이집트)와 아시아(일본 제국)에서도 참가하는 등 대회사상 처음으로 5대륙 모두에서 참가했으며 나라별로 통일된 유니폼을 입고 입장한 최초의 대회다.개최국 스웨덴은 전국에서 선수를 뽑아 사상 최초로 합동 강화 훈련을 실시하여 미국과 똑같이 금메달 24개를 차지하는 뛰어난 성적을 거둠으로써 대표팀 합숙 훈련의 역사를 열었고 참가 선수의 증가로 인해 한 종목에 한 나라가 3명의 선수만을 출전시키는 제한 규정이 채택되었으며 사진 판정과 전자 계시기의 출현으로 공정한 판정의 획기적인 진전을 가져왔다.
요컨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국가 대항전 성격의 국제 스포츠대회로서의 올림픽은 이 스톡홀름 대회가 시초인 셈이다.
2. 경기 종목
3. 특징
올림픽에서 도금메달이 아닌 순금메달을 준 마지막 올림픽이다. 메달이 순금이라 선수들이 이것을 팔아넘기기 시작하자 IOC에서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1920 안트베르펜 올림픽부터는 금도금이 된 금메달을 지급하게 된다.육상에서는 전자시계와 사진측정기가 도입되는 등 판정 방법의 혁신이 일어났던 대회다.
수영과 다이빙에서 최초로 여자종목[6]이 열리게 되었고 여자 수영 최초의 금메달은 자유형 100m에 우승한 호주의 파니 듀락(기록 1분 22초 4)이 차지한다. 권투는 개최국인 스웨덴의 요구로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근대5종경기가 최초로 정식종목화되었으며 다시 야구가 시범종목이 된 것을 제외하고는 종목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공식 종목은 아니었지만 예술 종합대회도 개최했다. 메달 시상까지는 했지만 이것이 공식경기로 집계되지는 않았다고...
이 대회까지 공식적인 선수단이 필요없었다고 하는데 지역의 팀 단위로 참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올림픽때부터는 공식적인 선수단이라는것이 생겼다.
이 대회 이후 원래 1916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올림픽이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결국 개최가 불발되었다. 이후 독일 베를린은 원래 열리기로 한 1916년에서 20년이 지난 1936년에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다.[7]
이 올림픽 이후 스웨덴은 현재까지 어떠한 올림픽도 유치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동계올림픽은 7번 도전했다가 7번 모두 실패하는 불운을 맛보았다. 2022 동계 올림픽은 차라리 하지 말자는 반대 의견이 압도적이라 그냥 포기했는데 처음부터 포기한 게 아니라 돈만 많이 들어간다고 올림픽 개최에 대하여 부정적인 여론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일본이 처음으로 참가한 하계 올림픽이기도 하며 최초로 예술 종목 경기가 치러진 올림픽이기도 하다.[8]
올림픽 최초의 정치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식민지였던 핀란드는 독립출전 지위를 인정받아 '핀란드'라는 이름으로 출전할 수 있었지만 국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핀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깃발을 거부했지만 입장식에는 국명이 쓰여진 팻말밖에는 허가되지 않았다. 그로 인해 1980 모스크바 올림픽처럼 동유럽 국가들의 잔치가 되었다.
4. 메달 집계
1912 스톡홀름 올림픽 메달 집계 최종 집계 | |||||
<rowcolor=#000,#ffffff> 순위 | 국가 | 메달 | 합계 | ||
금 | 은 | 동 | |||
1 | [[미국|]] 미국 | 25 | 19 | 19 | 63 |
2 | [[스웨덴|]] 스웨덴 | 24 | 24 | 17 | 65 |
3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영국 | 10 | 15 | 16 | 41 |
4 | [[핀란드 대공국|]] 핀란드 | 9 | 8 | 9 | 26 |
5 |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 7 | 4 | 3 | 14 |
6 | [[독일 제국|]] 독일 | 5 | 13 | 7 | 25 |
7 | [[남아프리카 연방|]] 남아프리카 연방 | 4 | 2 | 0 | 6 |
8 | [[노르웨이|]] 노르웨이 | 4 | 1 | 4 | 9 |
9 | [[캐나다 자치령|]] 캐나다 자치령 | 3 | 2 | 3 | 8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헝가리 | 3 | 2 | 3 | 8 | |
11 |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 3 | 1 | 2 | 6 |
12 | [[호주|]] 호주 자치령 | 2 | 2 | 3 | 7 |
13 | [[벨기에|]] 벨기에 | 2 | 1 | 3 | 6 |
14 | [[덴마크|]] 덴마크 | 1 | 6 | 5 | 12 |
15 | [[그리스 왕국|]] 그리스 | 1 | 0 | 1 | 2 |
16 | [[러시아 제국|]] 러시아 | 0 | 2 | 3 | 5 |
17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 0 | 2 | 2 | 4 |
18 | [[네덜란드|]] 네덜란드 | 0 | 0 | 3 | 3 |
5. 기타
아마추어 개념을 명확히 정의한 대회인데 그 희생양이 바로 후술할 미국 원주민인 사크와 여우족 혼혈인 짐 소프다. 그는 5종과 10종에서 금메달을 수상했지만 생활고로 잠시 프로야구에서 뛴 것이 밝혀져 모든 영광을 반납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선수들의 대부분이 가명으로 프로에 참가하고 있었으며 애석하게도 짐 소프는 아마추어 규정을 피해갈 줄 몰랐을 뿐이다. 이후 IOC는 실재하지도 않는 '아마추어리즘'을 지키기 위해 소모전을 벌여 왔다. '특정 스포츠에 숙달되어 부자가 된다면 그 선수의 고결함은 훼손'될 것이라고 경고했던 쿠베르탱 자신도 1,2회 대회 때 프로 대접을 받고 있던 펜싱 선수들의 참가를 허락한 바가 있다.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IOC에 대한 규정 때문에 수많은 '사이비 아마추어'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은 가명을 쓰거나 이력을 날조하였다. 1925년에 열린 제23차 프라하 총회에서 IOC는 '어떠한 스포츠 종목에서도 전문적 직업선수가 되어서는 안되며, 한번 직업선수가 된 선수는 다시 아마추어로 복귀할 수 없고 올림픽에 참가한 일정 동안 손실 된 봉급 역시 보상받아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발표되기는 했지만 당시 기준에서도 실효성이 없었다.짐 소프는 이후 프로선수로 계속 활동했지만[9] 말년에는 막노동으로 벌어먹으면서 비참하게 살다가 가난 속에 1953년에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올림픽에서 프로 선수들의 참여가 허용된 건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였다. 그러나 당시 이 결정은 숱한 논란을 야기했고 결국 국제올림픽위원회에서는 그가 죽은지 30년 뒤인 1983년에야 자녀에게 메달을 돌려주기는 했지만 돌려주고 나서도 이것을 정식 메달로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인정하지 않았다.[10] 공교롭게도 짐 소프가 출전한 바로 그 종목에 나중에 IOC위원장으로 아마추어리즘을 강력히 옹호하게 되는 에버리 브런디지가 출전하여 5위에 입상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선수라는 극찬을 받았던 짐 소프가 만년에는 모국에서 열린 32년 LA올림픽도 구경할 여력이 없는 비참한 삶을 살았던 반면 브런디지는 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사임할 때 까지 평생 올림픽 귀족으로 존경받았다. 2022년 7월 15일 마침내 소프의 금메달이 IOC로부터 인정되면서 무려 110년만에 명예 회복이 되었다.
전 대회에서는 도란도의 비극이 일어났더니만 이 대회에서도 마라톤 경기에서 포르투갈 선수인 프란시스쿠 라자루가 마라톤 경기 중 탈수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몸이 햇볕에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왁스를 발랐던 것이 땀 분출을 지연시켜 유동성 전해 불균형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 마라톤 경기도 더운 날씨로 인해 68명 중 겨우 절반을 넘는 36명만 결승선에 들어올 수 있었다.
레슬링 그레코로만에서는 올림픽 역사상 좀처럼 나오기 힘들 진풍경이 나왔는데 중량급 준결승 경기에서 러시아의 마틴 클라인과 핀란드의 아시카이넨이 11시간 동안 레슬링 경기를 진행해 버린 해프닝이 발생한 것이다. 30분에 한 번씩 쉬고 했음에도 11시간 동안 승부가 나지 않았으며 겨우 승리를 거둔 클라인은 너무 지쳐서 결승전을 기권했다.
(비록 금메달은 박탈되었지만) 미국의 올림픽 사가들은 초기 올림픽의 영웅으로 거의 예외없이 짐 소프를 꼽지만 유럽의 사가들은 최초의 '날아다니는 핀란드인(Flying Finns)' 한네스 콜게마이넨(Hannes Kolehmainen)을 지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는 마라톤을 제외한 장거리 4개 종목. 즉 5,000m와 10,000m 그리고 8,000m 크로스컨트리와 같은 종목 단체[11]를 모두 석권했다. 그의 출현은 바로 올림픽 육상의 가장 위대한 주자인 파보 누르미, 그리고 72년 장거리 영웅 리세 비렌으로 이어지는 핀란드의 영광의 연대기의 시작이었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의 속국이었던 조국의 현실은 그가 시상대에 섰을 때 러시아 깃발을 올려야 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조국의 깃발 대신 러시아 깃발이 올라가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우승을 안 하는게 나을 뻔했다고 약소국의 설움을 탄식했다. 36년 베를린에서의 손기정의 아픔은 이미 24년 전에 선배를 가지고 있었다.
1911년 오스만 제국이 IOC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최초로 참가한 올림픽인데 오스만 제국에서는 선수 두 명을 보냈다.[12] 이 두 선수는 바흐람 파파지얀(Vahram Papazyan)과 므그르드츠 므그리얀(Mıgırdıç Mıgıryan)으로 둘 다 아르메니아계 튀르키예인이다. 3년 후에 일어날 비극적인 사건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두 선수들 중 파파지얀은 학살 중에 도망가 레바논을 거쳐 미국에 정착했고 므그리얀의 이후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미국 장군 조지 S. 패튼이 근대 5종 경기 선수로 참가해 300m 자유형 수영에서는 37명 중 6위를, 에페 펜싱에서는 29명 중 3위를, 크로스컨트리 장애물 경마에서는 퍼포먼스는 완벽했으나 시간이 약간 뒤쳐져서 3위를, 4킬로 크로스컨트리 경주에서는 골을 45m 남겨두고 걸어들어올 정도로 체력이 소진돼 15명 중 3위를 차지했다. 권총 경기에서는 32명 중 20위를 차지했다.
러시아가 '러시아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다. 이 올림픽 이후 벌어진 1차 대전 중 러시아 제국은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성립된 소련은 전간기에 올림픽에 참가하지 않았고 1948 런던 올림픽 때는 초대를 거절했다가 1952 헬싱키 올림픽에서야 소련이라는 이름으로 40년 만에 복귀하였다.
이집트는 아메드 하사네인이 펜싱 선수로 개인 에페와 플뢰레에 등록은 되어있으나 참가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록이 인정이 되는가로 논란이 된다.
5.1. 세계에서 가장 긴 마라톤 기록
마라톤 역사상 세계에서 가장 오래 걸린 마라톤 완주기록을 갖고 있는 올림픽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 제국에서 참가한 2명의 선수 중 한 명[13]이었던 카나쿠리 시조(金栗四三)[14]는 경기 중 일사병과 탈수증상으로 쓰러져 26.7km 지점에서 경기를 중단하고 인근 농가에서 치료를 받았다.당시 40℃에 육박하는 더운 날씨로 인해 68명의 마라톤 출전자 중 완주자는 딱 절반인 34명에 불과했고 주최측에서는 완주하지 못한, 즉 낙오한 나머지 34명을 수색했는데 이 사람만 발견하지 못해서 행방불명으로 간주하고 경찰에 수색을 요청했다. 하지만 경찰도 시조를 찾아내지 못하여 최종적으로 실종자로 처리되었으나, 시조는 실종된 것이 아니었고 도움을 받은 농가에서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다음날 아침이어서 끝까지 완주를 못 했다는 생각에 너무 창피해서 바로 일본으로 귀국해 버린 것이었다.[15]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1967년 스웨덴 올림픽 위원회는 스톡홀름 올림픽 개최 5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식전의 개최를 준비하다가 당시 시조의 기권 의사가 주최측에 전달되지 않아 '경기 중 실종'이 되었다는 기록을 발견했고, 올림픽 위원회는 기념식전으로 시조에게 골을 시키기로 하여 "그 때 못 뛴거 마저 뛰셔야죠?"라면서 직접 초대를 하고 경기장 내에 준비된 골테이프를 잘랐다.[16] 이로서 카나쿠리 시조는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었으며 54년 8개월 6일 8시간 32분 20.3초의 기록으로 파란만장한 마라톤 경주를 완주하게 되었다. 골인하는 순간 경기장에는 “일본의 카나쿠리 선수가 지금 골인했습니다. 기록은 55년. 이것으로 제5회 스톡홀름 대회의 전 일정이 마무리되었습니다.”라는 아나운서 멘트가 흘렀다. 시조는 골인 후 인터뷰에서 “참으로 긴 코스였습니다. 그 사이에 손자가 다섯이나 생겼을 정도로요.”라며 유머러스하게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세계 마라톤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장기록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게 되었으며 기네스 세계 기록으로도 인정되었다.# 이 때 이미 카나쿠리는 75세였다.[17]
이후 그는 고향 구마모토현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83년 11월 13일 향년 92세로 눈을 감았다. 그는 일본 마라톤계의 대부라고 불리는 인물로, 오늘날의 일본 마라톤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키고 기초를 닦은 인물로 추앙받는 사람이다. 그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오사카시 주오구 도톤보리에 위치한 글리코 광고판인데 1935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교체되지 않고 광고모델로 쓰이고 있으며 쿠마모토현민종합운동장의 애칭인 ‘KK 윙’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1920년부터 개최된 일본의 신년 최대 스포츠행사 ‘하코네역전마라톤’의 창시자이기도 하며, 그의 출신지인 나고미정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단축 마라톤 대회[18]도 열리고 있다.
시간이 흘러서 마라토너 카나쿠리 시조의 실제 이야기가 2019년에 방송된 NHK의 58번째 대하드라마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제목은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로, 전반부가 카나쿠리 시조를 중심으로 한 당시 일본 선수단 이야기이고 후반부가 1964 도쿄 올림픽을 배경으로 한다. 카나쿠리 시조 역에는 나카무라 칸쿠로, 미시마 야히코 역에는 이쿠타 토마, 카노 지고로 역에는 야쿠쇼 코지가 각각 출연했다.
[1] 공식 엠블럼으로 인정되진 않는다.[2] 남자: 2,352명, 여자: 57명[시범] 시범 경기 종목[시범] 시범 경기 종목[비공식] 비공식 경기 종목[6] 100자유형 , 400m 자유형 릴레이, 하이다이빙 여자 종목이 열렸다.[7] 우리나라에게도 의미가 있는 것이 이 대회에서 마라토너인 손기정 선수가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땄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남승룡 선수도 손기정 선수와 같이 출전해 동메달을 수상하며 같은 종목에서 메달리스트 2명이 한국인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다만 이때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라 일장기를 달고 뛰어야 했으며 그래서인지 금메달을 받고도 침울해하며 일장기를 묘목으로 가린 손기정 선수의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남승룡 선수의 모습도 상당히 침울하다.)이후 이 사진에서 일장기를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에서 말소하며 일장기 말소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8] 예술 종목은 1948 런던 올림픽까지 개최되었다.[9] 여러 종목을 잘해서 야구와 미식축구도 했다.[10] 1984년 미국에서 열린 LA 올림픽을 앞두고 논의된 것이다. 현재 공식 기록상으로는 당시 2위 선수와 공동우승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건 미국측 자료이고 정식 메달은 2위를 차지한 개최국 스웨덴 선수로 인정된다.[11] 단 8,000m 크로스 컨트리 단체에서는 동료들의 부진으로 금메달을 받지는 못했다.[12] 1908년 런던 올림픽에 육상선수 알레코 물로스(Aleko Mulos)가 오스만 제국을 대표해 참가하긴 했지만 당시 오스만 제국은 IOC에 가입하지 않았다.[13] 나머지 한 사람은 단거리 육상 경주에 출전한 미시마 야히코(三島弥彦). 서민 출신인 카나쿠리와 달리 미시마는 귀족 집안 출신.[14] 이름 표기가 '시조'와 '시소'로 혼용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의 고향인 타마나시(실제 출신지는 이웃한 나고미정)가 채택한 '시조'로 통일하기로 한다.[15] 물론 혼자서 멋대로 귀국한 것은 아니고 미시마와 선수단장인 카노 지고로(嘉納治五郎)와 상의해서 내린 결정이었다.[16] 실제로는 못 뛴 부분부터 뛴 것은 아니고 그냥 운동장 한 바퀴를 돌았다. 정말로 못 뛴 거리 다 뛰게 하려면 15.5km를 뛰어야 하는데 아무리 마라토너 출신이라도 75세 노인에게 그 거리를 뛰게 하는 것은 무리이거니와, 행사 측면에서도 오랜 시간이 걸려 의미가 없다. 그리고 따지고 보면 기록상 카나쿠리 시조는 평생을 계속 마라톤 경기를 진행하고 있었던 셈이라 이동한 거리는 42.195km를 한창 넘기고도 남았던 셈이기도 하다.[17] 다만, 카나쿠리 시조가 이 대회에만 출전한 것은 아니다. 이후 1920 안트베르펀 올림픽에 출전하여 2시간 48분 45초의 기록으로 16위로 골인했고 1924 파리 올림픽에도 출전했지만 32.3km를 뛰고 의식을 잃어 기권했다.[18] https://kanakuri-shiso-marathon.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