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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2 02:35:28

신동파

SBS 농구단 역대 감독
창단 신동파
(1992~1994)
김동광
(1994~1997)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신동파
申東坡
파일:attachment/신동파/mple.jpg
출생 1944년 9월 2일 ([age(1944-09-02)]세)
함경남도 안변군[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서울수송국민학교 (졸업)
휘문중학교 (졸업)
휘문고등학교 (졸업 / 55회)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상학 63[2] / 학사)
포지션 슈팅 가드
신체 사이즈 190cm[3], 90kg, A형
실업 입단 1967년 기업은행 입단
소속 구단 기업은행 농구단 (1967~1974)
국가대표 아시안게임 2회 출전 (1966, 1970)
FIBA 아시아선수권 6회 출전
(1963, 1965, 1967, 1969, 1971, 1973)
유니버시아드 1회 출전 (1967)
지도자 태평양화학 코치 (1976~1978)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 코치 (1977~1979)
태평양화학 감독 (1978~1987)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0~1982)
여자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7~1988)
태평양화학 감독 (1989~1991)
SBS 농구단 감독 (1992~1994)
수상내역 유니버시아드 준우승 1회 (1967)
FIBA ABC 우승 1회 (1969)
FIBA ABC 준우승 2회 (1967, 1973)
1966 방콕 아시안 게임 동메달
1970 방콕 아시안 게임 금메달

1. 개요2. 선수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지도자 경력5. 이후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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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신동파/Example.jpg 파일:attachment/신동파/슛도사들.jpg
국가대표 시절. 슛도사들의 만남, 오른쪽이 이충희다.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출신 감독.

2. 선수 경력

어린 시절에는 야구에 관심이 많아 야구 명문인 휘문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농구부에 가입했고, 이후 휘문고등학교(55회)와 연세대학교에서 제법 활약을 보였다. 1962년 휘문고등학교 3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되었고 최종 선발을 거쳐 19세의 나이로 최종 합격, 당시 최연소로 국가대표에 들어갔다. 1967년 실업팀인 기업은행팀에 입단해 1974년까지 통산 750게임을 뛰어 3만점[4]을 기록했다.

3. 국가대표 경력

1964 도쿄 올림픽,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1967년 유니버시아드에서 국가대표로 뽑혀 대활약을 펼쳤고 1970년 유고슬라비아 선수권 대회에서는 8경기에서 평균득점 32.6득점으로 득점왕에 올랐다. 또한 1969년 필리핀에서 있었던 아시아선수권대회 결승전에서 혼자서 무려 50득점을 넣는[5] 대활약을 펼쳐 오늘날에도 필리핀 농구의 우상이 될 정도였다.[6]

과거 전성기 시절 필리핀에서 신동파 선수의 인기는 대단해서 "주필리핀 한국대사로 보낼 적임자가 없으면 신동파를 보내면 된다"는 농담이 있었으며 90년대에 필리핀을 방문한 분의 증언에 따르면 "택시기사가 묻더라, 한국에서 왔느냐? 그렇다. 그럼 미스터신(신동파)을 아느냐? 물론 안다 대학 동창이다. 라고 밝히자 택시기사가 택시비를 받지 않더라"라는 증언이 있고, 현재도 신동파 감독은 필리핀 공항에서 검색대를 그냥 통과하게 해주더라는 목격담도 있다.

60, 70년대에 선수 활동을 했기에 안타깝게도 국내에는 신동파의 경기 관련 영상은 전무하고, 필리핀에 있지 않을까 추정만 되고 있다.

4. 지도자 경력

1976년부터 태평양화학 농구단이 창단하면서 코치로서 정세훈 감독을 보좌하다 1978년부터 감독으로 승진하여 1987년에 자신을 보좌했던 김동욱 코치에게 감독직을 물려주고 농구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러다가 1989년부터 또다시 감독직을 맡아 1991년에 팀을 떠났다.

이 외에도 1977년부터 2년간 여자농구 대표팀 코치를 맡아 정주현 감독을 보좌하다가 1980~1982, 1987~1988년까지 두 차례 감독을 역임하고 1992년SBS 농구단의 초대 감독을 2년간 역임하다 1994년에 김동광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총감독으로 앉아있다가 1996년을 끝으로 지도자 일선에서 은퇴했다.

5. 이후

SBS 농구단 감독직을 그만둔 이후 SBS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다 2002년부터 현재까지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6. 관련 문서



[1] 현재는 북한 측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강원도로 편입되었다.[2] [3] 그의 현역 시절 국가대표팀 평균 신장이 183cm였고 주전 센터이던 박한의 키가 190cm였다. 즉 신동파는 센터급의 키를 가진 장신 슈터였다.[4] 경기당 평균 40득점이다. 게다가 당시엔 3점슛도 없던 시절... 흠좀무[5] 신동파 본인은 3점슛이 없던 시절이니 자신이 70점대를 넣은거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근데 득점의 80%가 외곽슛이었어야 겨우 70점인데.. 신동파의 회상에 따르면 당시엔 팀파울이 없어 신동파에 대한 파울 작전이 자유로웠다. 3점슛+팀파울 자유투가 있었다면 70점이라고 말한 것. 물론 그때보다 현재 팀득점이 쩜오배로 오르지 않은 것만 생각해도 당시의 50점을 현재의 70점으로 갖다붙이기는 무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는 에이스의 수비가담이 매우 적었고 외곽에서의 압박은 없는 수준이었기에 오히려 특정 선수에게 공격이 몰빵되기 쉬운 구조였고, 이러한 점에서 신동파의 70점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렵다.[6] 필리핀에 TV 생중계되었던 그 경기에서의 활약이 필리핀에 엄청난 충격을 준 덕분에, 신동파의 소속팀 기업은행 농구팀은 그후 5년간 필리핀에 매년 초청되어 8경기씩 친선경기를 벌였다고 한다. 8차전이 끝나면 필리핀 관중들이 경기장에 내려와 신동파의 운동복, 신발, 양말을 가져가려고 난투극을 벌일 정도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