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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혁명

헝가리 민주화 운동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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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혁명
1956-os forradalom
Венгерское восстание 1956 года[1]
Ungarischer Volksaufstand
Powstanie węgierskie 1956
Hungarian Revolution of 195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z%C3%A9tl%C5%91tt_harckocsi_a_M%C3%B3ricz_Zsigmond_k%C3%B6rt%C3%A9ren.jpg
반소 시민군이 파괴한 소련군의 T-34-85 전차. 1956년 10월 부다페스트의 모리츠 지그몬드 광장(Móricz Zsigmond körtér)에서 촬영.
기간
1956년 10월 23일 ~ 11월 10일
원인
헝가리 노동인민당[2]일당 독재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
장소
헝가리 전역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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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 및 지지 의사 표명 국가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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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흐루쇼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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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르 야노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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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지 임레|
파일:헝가리 반소 시민군기.svg
너지 임레
]]
병력
31,550명
전차 1,130대
결과
혁명 실패
소련군의 진압 성공
영향
너지 임레 처형
카다르 야노시 집권
피해
파일:소련 국기.svg 파일:헝가리 인민 공화국 국기(1949-1956).svg
772명 전사
1,540명 부상
'''
파일:헝가리 반소 시민군기.svg
'''
2,500~3,000여 명 전사
229명 처형
13,000여 명 부상

1. 개요2. 배경3. 전개4. 기타

[clearfix]

1. 개요

Avanti ragazzi di Buda!
Előre budai srácok!
일어나라! 부더의 청년들이여!

Avanti ragazzi di Pest!
Előre pesti fiúk!
기립하라! 페슈트의 청년들이여!

studenti! braccianti! operai!
Diákok! munkások! polgárok!
학생들이여! 농민들이여! 노동자들이여!

Il sole non sorge più ad Est!
Felvirradt a nap végre rátok!
태양은 더 이상 동쪽에서 뜨지 않는다!
- 민중가요 "일어나라! 부다페스트의 청년들이여!"
1956년 10월 23일부터 11월 10일까지 헝가리 노동자당 정권에 저항하여 일어난 헝가리 인민 공화국민주화 운동.

소련군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실패했다. 냉전 시기 동구권에서 벌어진 민주화 운동 중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사건이다. 소련은 체포된 시민군 229명을 교수형에 처했으며 약 20만 명이 해외로 망명했다.


2. 배경

1946년 소련에 의해 헝가리는 공산화되었고 라코시 마차시(Rákosi Mátyás, 1892~1971)가 스탈린주의에 입각한 폭압적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라코시는 자신을 스탈린의 수제자를 자칭하면서 당 내 반대파들을 티토주의자로 몰아 대규모 숙청을 벌였으며 최소 7000여 명에 이르는 당원들이 숙청된 것으로 추정된다. 라코시는 스탈린의 지지를 등에 업고 숙청과 산업 시설 국유화 및 농업 집단화를 추진했다.

1953년 스탈린 사망 후 집권한 니키타 흐루쇼프가 스탈린 격하 운동을 전개하면서 라코시는 힘을 잃게 되었다. 그의 과격한 스탈린주의 정책은 헝가리의 경제 위기를 가중시켜 민심을 이반시켰고 소련 정부는 동유럽 각국에 독재와 경제의 통제를 완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라코시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질책을 받고 개혁주의자이자 전직 NKVD 요원 출신으로 소련의 절대적 신뢰를 받고 있던 개혁주의자 너지 임레에게 수상직을 넘겨주게 된다. 그리고 그 자신도 서기장직을 폐지하고 제1서기로 한발 물러서게 된다.

이는 당연히 시민들의 반발과 눈치를 봐서 잠시 물러나 잠잠해지길 기다리고 꼭두각시를 내세운 것이었지만 너지 임레는 꼭두각시로 남아주지 않았다. 그는 개혁정책을 펼치며 헝가리의 경제를 빠르게 회복시켰다. 하지만 라코시는 곧 반격에 나섰고 결국 1955년 4월 너지를 수상에서 해임시키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그가 소련의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출당, 총살 등의 중징계는 내리지 못했다. 하지만 공산화 초기부터 라코시 정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던 헝가리인들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분노하기 시작했으며 헝가리 내의 긴장은 고조되기 시작했다.

1956년이 되자 헝가리를 위시한 공산권과 서방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하면서 소련의 압력에 의해 라코시는 7월 '형식적으로' 사임했지만 얼마 안 가서 복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해빙 분위기에 고무된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주로 반공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페퇴피(Petőfi)[3] 서클 등 각종 단체를 조직하여 노동자당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3. 전개

1986년 혁명 30주년을 기념하여 BBC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Cry Hungary: A Revolution Remembered'. 10년 후인 1996년 40주년을 기념하여 후속편이 제작되었는데 민주화 이후 체제 전환 과정에 있던 헝가리의 모습을 볼 수 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ole_in_flag_-_Budapest_1956.jpg
국기 가운데에 난 구멍은 시민군이 저항의 의미에서 공산당의 상징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가운데에 구멍이 난 헝가리 국기는 이후 혁명의 상징이 되었고 해마다 헝가리에서는 10월 23일이 되면 이 국기를 혁명 기념 공식 행사에서 게양한다. 이렇게 국기에서 공산당의 상징을 잘라내는 행위는 33년 후 동유럽 각국에서 공산당 독재 정권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재현되었다.
1956년 10월 6일에 1949년 라코시 정권에 의해 처형된 러이크 라슬로(Rajk László)의 장례식이 열리면서 혁명의 분위기는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러이크 라슬로는 전형적인 토사구팽의 표본격인 인물이었다. 비슷한 인물을 들자면 니콜라이 예조프가 있는데 러이크는 내무부 장관으로 있었으며 비밀경찰을 만들고 우익과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여론조작용 재판을 주도한 뒤 외무부 장관으로 영전했는데 라코시 정권은 러이크가 세를 얻자 그를 권력에 대한 위험으로 보고 1949년에 티토주의자, 서방의 스파이로 몰아 처형하였다.

1956년 10월 23일 오후 부다페스트에서 2만 명이 모인 가운데 스탈린 동상이 철거되었고 시민들은 동상의 머리를 부숴 거리에 끌고 다녔다. 같은 날 밤 8시경 라코시파 중의 하나인 제1서기장 게뢰 에르뇌(Gerő Ernő)[4]는 시위대의 민주화 요구를 거부하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고 1시간 반이 지난 후 시위대는 위와 같은 내용의 방송이 나간 라디오 부다페스트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게뢰는 해도 해도 안 되니 시위대들은 파시스트라는 선동도 해 봤지만 애초에 너지 임레는 공산주의자였던지라 씨알도 안 먹혔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가 총에 맞았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하면서 사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마침내 보안군에 의해 최루가스와 기관총을 동반한 유혈 진압이 이뤄지면서 첫 사망자가 발생하자 본격적 혁명이 시작되었고 다음 날 라디오 방송국이 점거되었다. 10월 24일 헝가리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이 부다페스트에 진입하면서 시민군과 소련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 일부가 시민군에 편입하면서 봉기는 격화되었다. 10월 25일에 들어서면서 봉기는 부다페스트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여러 주요 도시로 번졌고 다음 날 의사당이 시민군에 의해 점거되면서 라코시, 게뢰를 비롯한 강경파들은 소련으로 도망가고 소련은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은 너지 임레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너지 임레를 수상으로 옹립해 온건파 신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10월 28일부터 11월 4일까지 전투가 일시 중지되었는데 이 기간 동안 신정부는 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 개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일당제 폐지, 비밀경찰 폐지 등 매우 화끈한 개혁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소련 측은 당혹스러워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그만두는 것은 옳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소련 측은 너지를 신뢰했기 때문에 그가 실수한 것 정도로 여겨 그를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소련군의 잔혹한 진압으로 매일같이 헝가리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었고 너지는 소련 대사 유리 안드로포프, 소련 대표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소련군의 진압을 중지할 것을 요청했으나 소련 측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강경 진압에 분노한 헝가리인들도 계속 무장투쟁을 이어나가면서 상황은 겉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소련 정부에 환멸을 느낀 너지 임레는 헝가리의 중립 선포 및 바르샤바 조약 기구 탈퇴, 소련군의 헝가리 철수를 요구하면서 서방유엔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너지가 자신들을 배반했다고 여긴 흐루쇼프는 이를 거부하고 11월 4일 이반 코네프 휘하의 대규모 병력을 헝가리에 투입했다. 이미 그 전인 11월 3일에는 혁명 정부의 신임 국방장관 멀레테르 팔(Maléter Pál)이 휘하 사절들과 함께 부다페스트 근교의 퇴쾰(Tököl)에서 소련군에게 체포되었다. 4일 오전 3시에 부다페스트 방면에 소련군 기갑부대가 투입되었으며 뒤이어 이들은 부다페스트를 조각내어 버리고 모든 교두보를 장악했다. 소련군 전차와 대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포성이 부다페스트 전역을 뒤덮었다. 이날 오전 5시 20분에는 너지가 마지막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자유 헝가리가 소련군의 공격을 받고 있음을 헝가리와 전 세계에 알렸다.

헝가리 전역에서 헝가리군이 소련군에 무장해제되었다. 게오르기 주코프에 의하면 9일까지 헝가리군 12개 사단과 2개 기갑연대, 헝가리 공군 전체가 무장해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헝가리군은 종종 저항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소련군에 큰 피해를 입히지는 못했다. 헝가리군은 대부분 현실을 받아들였지만 혁명 진압에 참여하는 것은 거부하며 탈영했으며 소수는 시민군 사이로 스며들어 소련군과 전투를 벌였다.

부다페스트의 시민군은 몰로토프 칵테일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11월 11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약 2주 간에 걸친 혁명은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끝나게 되었다. 약 3,000여 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으며 부상자는 13,000~20,000여 명에 달했고 민간인 희생자는 1,569명이었다. 사망자 중 53%는 노동자였고 사상자의 절반 이상이 30세 미만이었다. 소련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어 699명이 전사하고 1,450명이 부상, 51명이 실종되었다.[5]

너지 임레는 이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으나 대사관을 잠시 나오던 중 소련에 체포되어 너지의 개혁정책에 큰 혐오감을 느끼던 스탈린주의자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지배하던 루마니아로 압송되었고 1958년 6월 16일 처형당했다. 前 헝가리 외무장관 예센스키 게저(Jeszenszky Géza)에 의하면 혁명 이후에 처형된 헝가리인은 350명이 넘었다.

너지의 시신은 비밀리에 매장되었고 공산 정권이 붕괴되던 1989년 정식으로 복권되어 6월 16일 부다페스트에서 31년 만에 정식으로 장례식이 열리며 안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운집했고 이는 혁명 발발 이후 33년 만에야 이루어진 헝가리의 민주화를 상징하는 순간이었다.

한편, 라코시 역시 '개혁을 거부하여 혁명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소련에게 버림받았다. 그나마 프롤레테리아 독재 등 공산주의를 어느 정도 유지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큰 처벌은 면했으나 소련으로 강제 망명을 당해야 했고 소련 관할이던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서 감시 속에 살다가 1971년 2월 5일에 79번째 생일을 한 달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6][7] 2000년대 와서야 시신이 헝가리로 이장되었다.

4. 기타



[1] восстание는 러시아어로 봉기이다.[2]헝가리 사회당의 전신인 헝가리 사회노동당의 전신[3] 19세기 헝가리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페퇴피 샨도르(Petőfi Sándor, 1823~1849).[4] 참고로 이 양반은 스페인 내전 당시 국제여단 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학살하고 다녀서 "바르셀로나의 백정"이란 별명을 얻었다.[5] 전사자 722명, 부상자 1,251명이라는 설도 있다.[6] 라코시가 소련의 말을 잘 들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니키타 흐루쇼프는 라코시의 스탈린식 폭압 통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코시를 정계에서 추방한 것이다. 애초에 너지 임레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세력이 다름아닌 소련 정부였다. 그런데 너지 임레를 처형한 이유는 너무 자유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당연하지만 동유럽 공산 공동체를 무너뜨릴 가능성이 높아서 그런 것이다.[7] 당시 소련의 집권자는 니키타 흐루쇼프로 당연하겠지만, 온건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소련의 체제 하에서 개혁하기를 원했고, 점점 스탈린식 권위주의 정치를 떨처내려고 하던 중 라코시는 스탈린주의를 강력히 고집했기 때문에 눈밖에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8] 다만 푸슈카시는 직접 혁명에 참여한 것은 아니고 스페인에 머무르던 중 혁명 소식을 듣고 스페인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9] 루카치는 너지와 그의 정권에 대해 애초부터 "부르주아/자유주의적 개혁 경향"이 있다며 비판적이었고 무엇보다 너지가 재집권 이후의 계획, 즉 "프로그램"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민중운동에 휘둘렸다는 것. 하지만 동시에 민중운동을 그나마 사회주의적 틀 안에서 유지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내각에 참여했다.[10] 루카치는 이에 대해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부인 토마시 마사리크1918년 헝가리 혁명에 대항해 헝가리에 무력 개입했던 역사적 경험과 관계가 있다고 술회했다. 민주화된 체코슬로바키아가 다시 헝가리의 인민공화국을 공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쁜 민주주의라는 견해였던 것. 프라하의 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서 탈퇴하지 않았는데, 루카치는 말년인 1971년 3월에서 5월 중 회고록 격인 인터뷰에서 제자 이슈트반 외르시(1931~2005, 헝가리 혁명에 참여하여 1960년 석방)가 이 대목을 지적하며 결국 바르샤바 조약기구 탈퇴는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위한 핑계가 아니었냐는 주장에 대해서도 체코는 상황이 달랐다고 부정했다. (출처: 삶으로서의 사유 : 루카치의 자전적 기록들-루카치 다시 읽기 02, 249쪽)[11] 다만 이에 대해서는 루카치가 1971년 죽을 때까지 '문화판 러이크 라슬로'로서 숙청당할 것을 우려하여 "노회한"(외르시의 표현) 입장을 취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러이크 라슬로는 헝가리의 전 내부무·외무부 장관으로, 골수 스탈린주의자였음에도 1949년에 '티토주의자'라는 핑계로 라코시에게 숙청되었다. 이후 헝가리 혁명 기간에 복권되었다.[12] 이 양반은 숙청당했지만 재판 중에 스탈린이 사망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13] 제2차 세계 대전 전후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 공화군 의용병처럼 타국의 지식인들이나 운동가들이 특정한 사상을 지지하기 위해 의용병으로 참전하는 것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던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