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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노(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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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7월 29일

1983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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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유리 카스파랸, 빅토르 초이, 게오르기 구리야노프, 이고르 티호미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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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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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기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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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결성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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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1981년 레닌그라드
활동 기간 1981년 여름~ 1991년 1월 12일
재결성: 2019년 10월 ~
데뷔 앨범 45
멤버 빅토르 초이 (보컬, 기타)
유리 카스파랸 (리드 기타)
게오르기 구리야노프 (드럼)
알렉산드르 티토프 (베이스)
이고리 티호미로프 (베이스)
장르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 쟁글 팝, 포크 록, 러시안 록
레이블 AnTrop, Yanshiva Shela, Melody, Moroz Records, Maschina Records
링크 파일:키노(밴드)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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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밴드 역사
2.1. 초기 시절 (1970년대 - 1980년대 초반)2.2. 중기 시절 (1980년대 초반 - 1980년대 중반)2.3. 후기 시절 (1980년대 중반 - 1990년)2.4. 빅토르 초이의 사망 및 밴드 해체2.5. 재결성 및 투어
3. 음반4. 음악성5. 멤버6. 여담7.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키노(Кино)[2]

1982년 레닌그라드에서 결성되어 1990년까지 활동한 러시아의 록 그룹. 장르는 포스트 펑크, 뉴웨이브, 쟁글 팝(Jangle Pop), 포크 록. 지금도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락의 전설로 불린다.[3] '키노'는 러시아어로 영화(cinema, film)를 의미한다.

2. 밴드 역사

2.1. 초기 시절 (1970년대 - 1980년대 초반)

키노의 전신을 1979년 레닌그라드에서 결성된 락 밴드 '제6병동(Палата № 6)'[4]으로 보기도 하지만, 키노의 주체였던 빅토르가 이 밴드에서 보컬이 아닌 베이스 기타를 맡았기에 전신이라 보기엔 약간 미묘한 면이 없지 않다. 빅토르 초이가 시콜라(Shkola. 한국의 초/중/고등학교 과정을 합친 과정) 도중 학교 친구였던 파시코프 및 스미르노프와 결성했는데, 이 사건과 그전의 성적 불량이 문제가 되어 초이는 시콜라 8학년 과정에서 결국 퇴학당했다.[5] 이 외에 소련의 펑크 락 뮤지션 안드레이 파노프(Андрей Панов, 1960-1998)[6]가 1979년 결성한 '자동으로 만족하는 자들(아프토마티체스키예 우도블례드보리텔리, Автоматические удовлетворители - 보통 АУ(아우)라고 줄여 부름)'이라는 밴드에서도 초이가 잠시(1980년-1981년) 베이스 기타를 맡은 적이 있기에 간간히 언급되는 편이다.

1981년 여름, 서로 친구 사이였던 빅토르 초이, 알렉세이 리빈(Алексей Рыбин), 올렉 발린스키(Олег Валинский)[7]는 함께 크림 반도로 여행을 갔다. 이곳에서 그들은 밴드 '가린과 쌍곡선(Гарин и Гиперболоиды)'를 결성했다. 이 이름은 러시아의 SF 거장 알렉세이 톨스토이의 소설 '가린의 쌍곡선(Гиперболоид инженера Гарина[8])'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가린과 쌍곡선은 여러 크바르티르니크[9]에서 활동했다.[10] 같은 해 가을, 올렉 발린스키가 군에 징집되면서 밴드를 떠나게 되었고[11], 가린과 쌍곡선은 '레닌그라드 락 클럽(Ленинградский рок-клуб[12])'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82년 봄, 초이와 리빈은 밴드 이름을 '키노'라고 바꾸었다.[13]

이후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키노는 첫 번째 콘서트를 가지는데, 당대 최고의 밴드로 불리던 아크바리움(Аквариум[14])과 함께 공연을 했다. 당시 언더그라운드에서 영향력이 있던, 그리고 아크바리움의 리더였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Boris Grebenshikov)가 프로듀서로 나서 주었기에 가능했었다. 이 즈음 밴드는 '키노'라는 이름으로 완전히 자리잡았다.

1982년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지만, (이후의 명성과는 달리)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15] 이후 키노는 첫 번째 앨범인 '45[16]'를 출시한다. 그레벤시코프와 트릴로프의 도움으로 '45'는 아크바리움의 멤버들인 프세볼로트 가켈(Vsevolod Gakkel, 첼리스트), 안드레이 로마노프(Andrei Romanov, 플루티스트), 미하일 페인스타인-바실리예프(Mikhail Feinstein-Vasilev, 베이시스트)와 함께 공동으로 작업했었다.[17]

앨범 '45'는 가볍고 활기찬 곡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초이가 작곡한 곡[18]들의 가사는 도시의 낭만이나 시적 언어의 사용 등, 초기의 소비에트 바르드 음악과 유사한 점이 돋보였다. 당시 키노는 잘 알려지지 않았었고,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크게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이후 초이는 녹음의 질이 조악했으며[19], 좀 더 제대로 녹음했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엘렉트리치카(Электричка)', 앨범 '45' 수록
다만 수록곡 중 '엘렉트리치카(Электричка)'는 상당히 유명해졌다. 엘렉트리치카는 통근열차로 사용되는 러시아의 일종의 광역철도로, 개인의 삶을 보장하지 않는 전체주의체제의 부조리를 짧고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노래였다. 가사는 자신은 어젯밤 늦게 잠들어 간신히 일어났으며, 의사에게 가야 할 것 같지만 통근 기차가 자신을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내용이다. 당시 초이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끌려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정신병자 행세를 하며 정신병원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이 당시 경험이 투영된 곡이라고 한다. 그 때문에 발표 직후 소련 당국에 의해 공연을 금지당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이는 와전된 사실이다. 빅토르 초이와 키노는 데뷔 이후부터 해체 직전까지 한 번도 금지령을 겪은 일이 없으며, 당국의 탄압을 받은 일도 없다. 언더그라운드 밴드에 대한 탄압이 절정을 달리던 1982-1984년경에는 말 그대로 '아는 사람만 아는' 수준의 밴드였던지라 탄압이나 규제의 대상이 되지도 못했고, 1985년 이후에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으로 인해 탄압 강도가 매우 느슨해졌기 때문이다.[20]

1982년 말에서 1983년 초, 키노는 리빈과 드러머 발레리 키릴로프(Valery Kirillov), 음향 엔지니어 안드레이 쿠스코프(Andrei Kuskov)와 두 번째 앨범을 내려고 시도했지만 초이가 흥미를 잃어 녹음이 중단되었다.[21] 겨울에 그들은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몇 번 공연을 했고, 아크바리움의 드러머인 표트르 트로센코프(Pyotr Troschenkov)와 공연을 하기도 했다. 리빈은 간혹 리허설용 베이시스트였던 막심 콜로소프(Maxim Kolosov) 혹은 후기 키노의 전속 기타리스트가 되는 유리 카스파랸(Юрий Каспарян)으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레벤시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카스파랸은 처음에는 실력이 정말 형편없었으나 갈수록 잘하게 되었고, 이후 키노의 2인자 포지션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콜로소프 및 카스파랸과 함께 키노는 두 번째 콘서트를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개최한다.

하지만 1983년 3월, 원년 멤버인 초이와 리빈 사이의 해묵은 갈등이 터진다. 원래 초이는 음악을 작곡하는 역할을 주로 했고, 리빈은 콘서트 준비나 리허설, 레코딩 준비 등을 맡는 식으로 역할이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데 초이는 리빈이 자신의 곡이 아닌 리빈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 것이 불만이었고[22], 리빈은 초이의 리더십에 반감을 드러냈다. 이 갈등은 결국 리빈의 탈퇴로 끝난다. 이후 둘이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며(어쩌다 공연장에서 몇 번 마주치긴 했는데 서로 말도 걸지 않고 못 본 체 했다고 한다.), 초이 사후 감정이 좀 풀린 건지 리빈은 추모 콘서트(2001년)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으며 이후 관련 인터뷰에서도 몇 번 등장한다.

2.2. 중기 시절 (1980년대 초반 - 1980년대 중반)

1982년부터 후기 키노가 자리잡는 1984년 사이 초이와 리빈은 활발히 음악 활동을 했는데, 당시 곡들을 담은 데모 앨범[23] '46'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46'은 초이가 작곡한 데모 곡으로 이루어져 있는데[24] 대부분은 45의 낭만성을 그대로 가지고 왔지만 톤이 좀 더 어두워지 편이다.
'손님(Гость)', 앨범 '캄차카의 지배인(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 수록
1984년, 키노는 아크바리움 멤버들과 공동으로 (공식) 두 번째 앨범인 '캄차카/캄차트카[25]의 지배인/지도원(Начальник Камчатки)'을 발표한다. 여기서도 그레벤시코프는 프로듀서로 나서 주었다. 당시 참여 인원으로는 카스파랸(기타), 알렉산드르 티토프(Alexandre Titov, 베이스), 세르게이 쿠리오힌(Sergei Kuriokhin, 키보드), 표트르 트로센코프, 프셰볼로트 가켈, 이고르 부트만(Igor Butman, 색소폰), 안드레이 라드첸코(Andrei Radchenko, 드럼)가 있다. 그레벤시코프 본인도 작은 키보드를 연주했다. 전반적으로 미니멀리즘 스타일에 카스파랸의 퍼즈 이펙트가 간간히 들어가 있었다. 이후 초이는 이 앨범에 대해 '앨범은 전반적으로 일렉 계열이었으며, 음향과 구조에서 전위적이었다. 소리나 스타일이 우리 생각대로 나왔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실험적인 측면에서는 흥미로웠다'라고 평가했다.[26]

앨범의 완성 이후 초이는 카스파랸을 리드 기타로, 아크바리움의 티토프를 베이스 기타로, 이 외에 게오르기 구리야노프(Георгий Гурьянов)를 영입해 타악기 주자로 배치했다. 티토프는 프렛리스 베이스가 특기인데, 같이 참여한 '이건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 등의 앨범에서 특징적이고 멋진 프렛리스 베이스 라인을 감상할 수 있다.

1984년 5월 이후, 키노는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주최하던 제2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이 당시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비핵화 지대로) (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라는, 대놓고 반전/반핵 사상을 드러낸 곡으로 화제가 되었다.[27] 같은 해 여름, 아크바리움 및 기타 인기 밴드들과 함께 모스크바의 교외인 니콜리나 고라(Nikolina Gora)에서 (공안의 감시 하에) 공연을 했다. 키노의 전성기는 이때부터로, 소련 전체에서 키노가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 앨범 '이건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 수록
1985년 초, 키노는 안드레이 트로필로(Андрей Тропилло)의 지휘 하에 앨범 '밤(Ночь)'을 녹음했으나, 앨범 작업에 대한 트릴로프의 지나치 간섭과 사운드에 대한 멤버들의 불만족으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앨범 밤(Ночь) 프로젝트가 무산된 이후 키노 멤버들은 알렉세이 비시냐의 스튜디오에서 새로운 앨범을 녹음하기 시작했다.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단 2주만에 앨범 '이건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가 탄생했다. 이 앨범은 밤 프로젝트 과정 중 지친 멤버들이 기존 초이가 작곡한 곡들을 가지고 만든 앨범이었다. 그래서인지 45/46 못지않게 가사가 활기차고 멜로디 또한 밝은 편이다. 9월에 앨범 '이것은 사랑이 아니야(Это не любовь)'를 발매했다.

11월, 티토프(당시 아크바리움과 키노에 공동으로 속함)는 두 밴드에서 동시에 활동하기 벅차했기에 키노를 떠나기로 했고, 재즈 기타리스트 이고리 티호미로프(Игорь Тихомиров)로 대체되었다.[28] 이후 키노는 해체 전까지 쭉 이 멤버로 가게 된다.
'별들이 여기에 떨어질 거야(Звёзды останутся здесь)', 앨범 '밤(Ночь)' 수록
1986년 1월, 트로필로는 당시 미완성된 앨범 '밤(Ночь)'을 무단으로 발매했다.[29] 이 앨범은 20만 장이나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키노는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멤버들은 이 '미완성작'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이었고, 언더그라운드 락 기사들도 이 앨범에 대해 비판했다. 이후 봄에 있었던 레닌그라드 락 콘서트 4회에서 이들은 'Дальше действовать будем мы(이제부터 우린 행동할 거야)'라는 노래로 대상을 차지했다.

한편 이 시절 초이가 세르게이 쿠료힌과 손을 잡고 이른바 '새로운 날'(Новый день)이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는 이야기가 간혹 러시아 웹에서 언급된다. 이에 따르면 쿠료힌과 초이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짬짬이 '새로운 날'이라는 이름 아래 여러 노래를 작곡했으나 정부의 검열로 인해 공식 발매는 물론 마그니티즈다트로도 제대로 유포되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 유튜브나 얀덱스 등을 뒤져보면 '새로운 날'의 이름을 단 5시간 분량의 음원 자료가 발굴되긴 하나, (안타깝게도) 이는 거짓이다. 쿠료힌과 초이가 팝-메하니카를 통해 같이 활동한 것은 맞지만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한 적은 없고, 이 음원을 들어보면 84년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라기에 초이의 보컬은 너무 어둡고 가사 또한 단조롭고 일관적이기 짝이 없다. 이 음원의 정체는 보컬인 이반 쿠르나예프(Иван Курнаев) 등이 결성하여 1989년부터 1996년까지 모스크바 지역에서 활동한 키노의 이미테이션 밴드인 '새로운 날'의 앨범 수록곡 모음이다.[30][31][32]

이후 여름, 그들은 세르게이 리센코(Sergei Lysenko)와 영화를 찍기 위해 우크라이나 키예프로 여행을 간다. 7월, 그들은 모스크바에서 아크바리움과 알리사(Алиса[33]) 등과 모스크바 문화 궁전에서 대규모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후 이 세 밴드는 스트란니예 이그리(Странные игры)[34]와 함께 'Red Wave'라는 컴필레이션 앨범을 내놓는다.#[35] 이 앨범은 캘리포니아에서 약 만 장 정도 팔렸으며, 서방에 출시된 첫 번째 러시아 락 앨범이었다.

1986년부터 88년까지 초이는 '휴가의 끝(Конец каникул)', '긴급구조대(Асса)', '록(Pок[36])' 등 많은 영화에 등장했으며, 와중에 키노를 위한 곡도 작동했다. 이 영화들 중 가장 유명한 영화가 바로 '이글라(Игла, 바늘, 정확히는 마약 주사의 바늘이라는 뜻)'로, 2012년 다시 리메이크되었다.

2.3. 후기 시절 (1980년대 중반 - 1990년)

그리고 1988년, 키노는 '러시아 락 역사상 최고의 앨범 중 하나'라고 불리는 앨범 '혈액형(Группа крови)'를 내놓으며 명성의 정점을 찍는다.[37] 이 앨범은 1989년에 미국의 유명 비평가 로버트 크리스트가우(Robert Christgau)를 통해 미국에서도 출시되었다.[38] 키노는 소련의 중앙 TV에서 공연했으며, 1987년 초이가 러시아 락에 대해 다룬 영화 'Assa'에서 '나는 변화를 원한다(Перемен)!"라고 외치는 퍼포먼스로 유명해졌는데[39], 이는 영화 맨 마지막에 나온다. # (다만 빅토르 본인은 이 영화나 엔딩의 퍼포먼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이후 이 곡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리믹스 앨범 '마지막 영웅'에 수록된다.

이후 키노는 동구권을 포함한 외국 순회 공연에 나선다. 덴마크에서는 당시 아르메니아 지진에 대한 구호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으며(1989년 1월), 부르주(Bourges)에서 개최된 프랑스 최대의 락 페스티벌에서도 공연했다. 1989년에는 미국 뉴욕에서 영화 '이글라'의 시사회와 소규모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했다.[40][41]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앨범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수록
1989년, 밴드는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앨범을 내놓는다. 어둡고, 우울한 톤의 노래가 주를 이룬다. 이후 키노는 러시아 유명 프로그램인 우즈글랴드(Vzglyad)에 출현하고, 몇몇 비디오도 찍는다. 초이는 이걸 상당히 꺼렸지만, 이 비디오는 TV에 자주 상영되었다. 또한 이 당시 밴드는 가벼운 노래와 초이의 심오한 노래[42]를 구분하기 위해 독립된 팝 밴드를 세우기로 계획했다고 한다.
재결성 이전 마지막 공연인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 라이브, 1990.06.24.
1990년, 키노는 인기의 절정을 맞이했다. 당시 키노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위치한 러시아 최대 경기장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대규모 단독 콘서트를 열었는데, 이 때 경기장에 모여든 관중들은 공식 집계로 62000여 명에 달했고, 심지어 모스크바 올림픽 때나 볼 수 있었던 성화까지 점화되는 등 전설적 이벤트를 연주했다고 한다. 참고로 당시까지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성화가 올라간 적은 딱 네 번 뿐이며, 이들 모두 국제적인 페스티벌이었다. 이후 7월, 마지막 콘서트를 마치며 초이는 '이번 가을에 출시할 앨범도 기대해 달라'라고 말했으며, 8월 무렵 키노는 라트비아의 스튜디오에서 새 앨범의 녹음을 대부분 마쳤다.

2.4. 빅토르 초이의 사망 및 밴드 해체

그러나 신작 앨범의 녹음이 얼추 마무리 된 1990년 08월 15일, 자차로 낚시를 하고 돌아오던 빅토르 초이가 버스와 충돌하며 사망하는 사건이 터진다. 이에 당시 소련은 그야말로 충격에 빠졌다.[43] 이후 12월 키노의 나머지 멤버들과 프랑스 스튜디오의 인원들[44]이 손을 본 앨범이 발표되었다. 공식적으로 이 앨범의 제목은 없는데, 이 앨범을 부를 이름이 있을 때면 "키노"라고 부르거나[45] 올블랙 앨범 커버에서 따와 '검은 앨범(Чёрный альбом)'이라고 부른다.[46] 이후 나머지 멤버들과 초이의 관계자들은 키노의 해체를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가지며 키노는 막을 내리게 된다.
2015년 유-피테르의 공연 영상. 연주곡은 키노의 대표곡인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 노래 부르는 사람이 부투소프. 영화 '이글라 리믹스'에 삽입된 유-피테르의 곡 '시간의 아이들(Дети минут)'. 곡은 부투소프가 썼으며, 가사는 초이의 유고에서 가지고 왔다.[47]
기존 멤버들 중 이고르 티호미로프와 게오르기 구리야노프[48]는 음악활동을 접었으며, 유리 카스파랸은 1997년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고. 2001년에는 러시아의 또 다른 전설적인 락밴드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Наутилус Помпилиус)'[49]의 리드싱어 뱌체슬라프 부투소프와 함께 그룹 '유-피테르(Ю-Питер[50])'를 결성, 음악 활동을 재개했다.[51]
2012년 '아타만(Атаман)' 뮤직비디오. [52]
이후 2012년, 빅토르 초이의 50번째 생일을 맞아 밴드는 잠시 재결성해 미공개곡 '아타만(Атаман)'을 공개하였다. '아타만'은 원래 '검은 앨범'에 들어가려던 음악인데, 초이가 스튜디오 녹음을 하지 않아[53] 실리지 못했으나 남은 멤버들이 편곡을 거쳐 공개하였다. 편곡이 되지 않은 어쿠스틱 버전은 공개되지 않았으나 이후 2018년 12월 마시나 레코드(Maschina Records)에서 싱글 앨범 '아타만'을 발매하며 공개되었다.

이후 2013년 7월 20일, 드러머 게오르기 구리야노프는 C형 간염 및 췌장암 등의 질병으로 52세에 사망했다.[54], 카스파랸이 소속된 유-피테르도 2017년 활동 중단을 선언한다.


드러머 게오르기의 하관 영상. 배경 음악은 앨범 혈액형에 수록된 'Спокойная ночь'의 피아노 버전이다.[55]


카고첼이라는 러시아 제약회사 측의 이벤트. 연주되는 곡은 키노의 '네 여자친구가 아플 때.' 곡에 맞춰 실제로 아픈 여자친구를 위해 남자친구가 이벤트를 열어준다는 방식. 곡 후반부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나타나 흰색 Jazzmaster 기타를 들고 독주하는 사람이 카스파랸이다.

2.5. 재결성 및 투어


2019년 10월, 키노의 공식 유튜브 채널이 개설되었고, 공연 티저가 공개되었다. 초이의 사망 이후 처음으로 키노의 이름 하에 진행되는 콘서트이다.
리드 기타에 카스파랸, 베이스에 티호미로프 및 티토프, 프로듀서에 알렉산드르 초이가 올랐으며, 보컬은 기존 마스터 테이프 녹음본을 재활용하고 드럼과 리듬기타를 담당할 세션 뮤지션도 구했다.

원래 2020년 상트페테르부르크[56] 및 모스크바[57]에서 진행할 예정이었으나 전세계적인 코로나 발병으로 인해 2021년으로 연기되었다.


이후 2021년 성공적으로 투어를 마무리하였고, 이 중 세프카벨(Севкабель)[58] 공연 실황은 "Кино в Севкабеле"라는 제목으로 크라우드펀딩을 거쳐 앨범 발매되었다.


2021년 05월 15일 모스크바 공연(ЦСКА Арена, Москва)의 일부. 키노 공식 채널에 올라온 클립이다.


2022년 03월 공식 채널에 올라온 "나는 나의 집을 선언한다(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дом)"[59] 뮤직비디오. 보컬은 기존 녹음본을 그대로 사용하였고, 음악은 재녹음하였다.
18 мая 1984 года песней «Безъядерная зона» группа КИНО открывала II фестиваль Ленинградского рок-клуба. Композиция была признана лучшей антивоенной песней фестиваля. Марианна Цой рассказывала, что «сам фестиваль имел в качестве девиза какую-то патриотическую фразу, причем всем группам предложили спеть по одной песне, связанной с этим девизом. Что-то там про борьбу за мир, кажется. Цой взял и написал «Безъядерную зону». И тут одумавшееся жюри решило открыть фестиваль этой песней в сольном исполнении Цоя, а само выступление группы поставили последним на фестивале».
1984년 05월 18일 키노는 "비핵화 지대"라는 곡으로 제2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60]의 개막을 알렸습니다. 이 작품은 해당 페스티벌의 최고의 반전 노래로 선정되었습니다. 마리안나 초이의 말을 빌리자면, "이 페스티벌은 무언가 애국적인 모토를 띠고 있었고, 참여하는 모든 밴드들은 이 모토에 걸맞은 노래 하나를 불러야 했습니다. 무언가 평화를 위한 투쟁 같은 것 말입니다. 초이는 여기서 "비핵화 지대"를 작곡하였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심사 위원들은 페스티벌을 키노의 단독 공연 하에 이 노래로 개막하기로 결정하였고, 키노의 공연은 페스티벌의 마지막에 배치되었습니다."
- MV와 함께 올라온 설명. 시기가사를 고려해 보았을 때 어떤 의도로 기존에 존재하지도 않던 MV를 만들어 올렸는지 알 수 있다.
Саша, запретите Гагариной исполнять Кукушку. Вчера она пела ее в Лужниках.
사샤[61], 가가리나가 "뻐꾸기" 노래 좀 못 부르게 해 줘요. 어제 그 여자가 루즈니키에서 그 곡을 불렀단 말입니다.[62]
- 유튜브에서 가장 많이 추천을 받은 댓글
그리고 지금도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침묵하고, 누군가는 너무 행복해요.
누구는 정말 너무 행복해요...[63]
고마워요 비탸. 당신이 죽은 지 한참이 지났지만 당신의 말은 아직 살아 있네요.
- '엄마, 우린 전부 중환자예요'의 2020년 리메이크 버전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 해당 댓글은 2022년 3월, 즉 러시아의 침공이 벌어진 직후 작성되어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받았다. 위 곡은 소련의 황혼기를 살아가는 젊은 세대의 심정을 표현한 곡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22년 시점에도 그 핵심 주제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 반전/자유주의적 러시아인들이 그동안 변하지 않은 조국의 상황을 얼마나 암담하게 바라보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러시아 정부의 블랙리스트에는 올라가지 않은 건지[64] 2022년에도 공연 일정이 잡혔다. 2022년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시작으로 다시 러시아 전역을 순회했다.

2022년 12월 22일, 기존 키노의 곡들을 현대적으로 재녹음한 '12_22'를 공개했다.

2023년 12월, 새로운 콘서트 프로그램인 '이 세상의 이야기(Историю этого мира)'를 발표했다. 기존 공연에서 들어볼 수 없었던 곡들을 세트리스트에 포함시키고 조명, 영상, 컨셉 등에 있어 전체적인 변화를 줄 예정이라 밝힌 바 있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초이 생전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노래인 "질문"(Вопрос)의 가사 일부이다.[65]

2024년 3월 15일, Это не любовь(이건 사랑이 아니야의 리메이크 버전을 공개했다.#

2024년 5월 24일, 모스크바 VTB 아레나 공연을 시작으로 '이 세상의 이야기(Историю этого мира)' 프로젝트의 첫 발을 내딛었다.

3. 음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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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음악성

초기의 몇몇 곡을 제외하면 키노의 음악은 전부 빅토르 초이가 작곡하였으며, 초이의 음악은 초기와 후기 간 차이가 큰 편이다. 후기 시절 곡들이 압도적으로 유명하다보니 한국은 물론 러시아 현지에서도 초이 그리고 키노에 대한 평가가 한쪽으로 치우친 경향이 있다.
전반적으로는 소련에 이런 저런 방식으로 유입되던 서구의 락과 아크바리움/주파르크같은 선배나 동년배 러시아 록 선구자들, 비소츠키와 오쿠자바 등으로 대표되는 러시아 특유의 바르드 전통을 잘 혼합해 러시아 록의 새로운 표준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 멤버

이름 포지션
유리 카스파랸 기타
빅토르 초이 보컬, 기타
게오르기 구리야노프 드럼
이고르 티호미로프 베이스 기타

6. 여담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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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결성 부터[2] 발음은 /kʲɪˈno/[3] 자유진영에 비틀즈가 있다면 공산진영에는 키노가 있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러시아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록 그룹이었다. 실제로 빅토르 초이존 레논의 팬이었다고 한다.[4] 체호프의 단편 '제6병동'에서 따온 이름이다.[5] 이 '제6병동'은 2006년 당시까지 살아있던 파시코프와 스미르노프가 재결성했는데, 빅토르의 유명세를 빌리려는 의도가 있는지 매번 공연 때마다 빅토르의 초상화를 걸고 공연한다. 이들은 1980년 여름 '코끼리'라는 제목의 앨범을 녹음했는데 아는 친구 집에서 녹음해서 그런지 음질이 아주 엉망이다. 그래도 들어보고 싶으면 여기로. 대놓고 커버에 초이 사진을 박아놨다. 그땐 아무도 이 '베이스 기타'가 소련 음악계의 별이 될 줄은 몰랐겠지.[6] 영화 '레토'에서 신스틸러로 등장한다. 영화 내에서 Psycho Killer(토킹 헤즈 원곡) 등의 노래를 불렀는데, 가로 줄무늬 티셔츠와 삐죽한 머리가 인상적인 그 사람 맞다.[7] 리빈과 발린스키가 원래 알던 사이었고, 리빈이 초이에게 발린스키를 소개해 주었다고 한다.[8] '가린과 살인광선'이라고도 번역하며, 자신이 만든 살인광선(일명 '쌍곡선')으로 세계의 독재자가 되려는 엔지니어 가린의 이야기다[9] Квартирник, 당시 소련의 아파트나 가정집에서 이루어진 소규모 콘서트를 가리키는 고유명사.[10] 당시 라이브 음원이 '첫 번째 녹음(Pervye Zapisi)'이라는 제목의 앨범으로 나와 있다. 들어보기 여담으로 리빈은 2019년 "가린과 쌍곡선" 밴드를 재결성했으며, 이 이름으로 앨범도 하나 발표했다.[11] 1982년 발린스키 앞으로 영장이 떨어졌고 어쩔 수 없이 입대해야 했다. 영화 레토에서는 마치 아프가니스탄에 끌려가는 듯 묘사했는데, 실제로는 당시 "꿀보직" 중 하나로 손꼽히던 쿠바 주둔군 소속이 되어 쿠바에서 2년 동안 복무하게 되었다. 발린스키는 이후 음악계에서 완전히 떠났고, 제대 후 철도 업계에 몸을 담아 2016년 러시아 철도의 부국장까지 올라갔다. 이 쪽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성공했다면 성공한 인물이다.[12] 1981년 루빈스타인 거리에 세워진 공연 장소로, 당시 러시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락이 허용된 장소였다. 물론 KGB 감시 하에. 영화 레토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말이 '락 클럽'이지 마치 극장처럼 엄숙하게 앉아서 '경청'해야 했으며, 하다못해 플래카드 하나 들어올리는 것도 금지되는 그런 곳이었다(...).[13] 초이와 리빈의 증언에 따르면, 밝게 빛나는 영화 사인을 보고 나서 짓게 된 이름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멤버들은 이 이름이 짧고 '인공적으로 들려서(synthetic)' 좋다고 호응했으며, '키노'라는 이름이 고작 2음절이고 발음이 쉽다는 걸 자랑스러워한다고 증언했다.[14] 수족관이라는 뜻. 영어의 아쿠아리움(Aquarium)과 어원이 동일. 1970년대 결성한 러시아 록 밴드로 벨벳 언더그라운드 같은 개러지 록과 캣 스티븐스 같은 포크 록에 영감을 받아 시대를 앞서간 음악을 들려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15] 사실 1980년대 초반 키노의 명성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1985년 정도는 되어야 이들의 이름이 좀 알려지기 시작했고, 이들이 전 소련을 강타하는 대인기 밴드가 된 것은 1988년 "혈액형"의 대성공 이후이다.[16] 이 제목은 전체 음악 길이가 약 45분이라는 것에서 나왔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45의 데모판이 약 44분 30초 정도 된다. 현재 가장 보편적인 1996년 모로즈 레코드 판본 기준(초기 발매에서 빠진 마지막 트랙 '아스팔트'까지 들어간 판본)으로는 약 42분 정도 된다.[17] 이때 드러머가 없어서 드럼 머신으로 녹음을 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이 '드럼 머신'은 45 앨범의 특징으로 간주된다.[18] 키노는 약 90여개의 곡을 발표했는데, 거의 대부분의 곡은 초이가 직접 작사, 작곡한 것이다[19] 아무래도 언더그라운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다 보니 질이 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질 좋은 녹음을 원했다면 소련 유일의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로 갔어야 했을 건데, 그 쪽에서는 '반동 분자들이나 할 법한' 락을 취급하지 않았으며 또 당시의 키노는 무명 밴드였기 때문. 이 '음질'과 관련된 이야기는 영화 레토에서도 등장한다. 초이: 즈부크 가브노(음질이 꽝이야)[20] 관영 밴드가 아니면서 인기를 너무 끌았다는 이유로 해산 직전까지 몰린 AOR 계열 밴드 크루크, 같은 이유로 실제로 해산당하여 한동안 고생한 크루이즈, 공연 한 번 하고 강제 해체당한 안드레이 볼샤코프의 지그재그, KGB의 사주를 받은 언론에 다굴당한 데데테의 유리 셰프추크와 마찬가지로 틀딱 비평가들에게 다굴당한 주파르크, 살기 위해 KGB에 협력해야 했던 모스크바 지역의 밴드 데카(DK)의 리더 세르게이 자리코프, 반체제적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당한 예고르 레토프, 레토프의 동료로 불건전한 음악을 했다는 이유로 강제 입대를 당한 콘스탄틴 랴비노프와 이고리 제프툰 등 1984년까지 소련 음악가들의 수난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키노 정도면 상당히 커리어가 잘 풀린 축에 속한다.[21] 당시 빅토르가 내려고 했던 앨범은 '마지막 영웅(Posledniy Geroy)'인데, 1989년 리믹스 앨범 '마지막 영웅'과는 다르다. 두 종류의 녹음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들어보려면 여기로(완성된 1-4번 트랙 + 라이브 녹음에서 가지고 온 나머지 트랙들) 이것도 있다(1-4번 트랙+녹음하다 만 5번 트랙). 1-5번 트랙은 리마스터링을 거쳐 1992년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 앨범에 수록되었다.[22] 영화 레토에서 이 갈등이 간접적으로 암시되는데, 리빈이 초이의 곡을 바꿔 연주하자 '왜 꼭 내 노래를 가지고 바꾸려는 건데?'라며 불만을 제기하고 결국 둘은 싸운다.[23] 사실 '앨범'이라고 하기도 뭣한 게, 원래 키노 측에서는 이걸 앨범으로 찍어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음반사가 돈을 벌기 위해 찍어내 판매했다. 이 때문에 초이는 이 앨범을 '단순 연습곡'이라 칭하며 좋게 보지 않았고, 키노 측에서도 이를 공식 앨범으로 보지 않았다. 다만 팬들 대부분은 이걸 두 번째 앨범으로 인정하는 편. 여기에 실린 '연습곡들' 대부분은 편곡되어 이후 앨범들에 수록된다. 물론 «Без десяти(10분 전)»처럼 이후 찾아볼 수 없는 곡도 존재. 1996년 재판에서는 보너스 트랙 3개가 더 추가되었는데, 이 곡들은 이후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를 다 뒤져도 다시 연주한 기록이 없다.[24] 그래서인지 '45' 못지않은 초이의 '날백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Я хочу быть кочегаром(난 보일러공이 되고 싶어)»은 '회사 가기 싫으니 난 보일러공로 일해야겠다! 일 주일에 세 번만 일하면 되니까!'라는 내용이다. 소련에서 보일러공은 24시간 4교대였는데 보일러공의 특성상 특별히 육체적인 일이 없어서 월급이 낮아도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보조제도가 구비된 소련에서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Без десяти»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출근 10분 전이잖아? 거기다 일단 아침부터 먹고 출근해야 하지 않겠어? 제기랄, 욕하고 싶으면 욕하라 그래, 난 아침 먹어야 해!'라는 내용이다. '혈액형'이나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 등 후기의 난해하고 은유적인 가사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25] 러시아의 캄차트카 반도 맞다. '아주 먼 장소'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속어인데, 당시 초이가 일하던 곳에서는 보일러공이라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이 보일러 공장(일명 Kamchatka House)은 현재 작은 술집 겸 빅토르 초이 박물관이 되어 있다. 락 밴드의 가수로는 돈을 벌기 힘들었던 당시 소련에서 초이는 보일러공으로 일했다. 이 외에 1967년 소련 코미디인 'Начальник Чукотки(추코트카의 지배인. 추코트카는 캄차트카 근처에 위치한 반도)'에서 가져온 이름이기도 하다.[26] 재밌게도 이 앨범 또한 발매 과정에서 삭제된 곡이 존재한다. 14번 트랙인 '사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곡은 1996년 모로즈 레코드 판본에도 수록되지 않았다.[27] 이 곡은 세 번째 앨범 '이건 사랑이 아니야'에 수록되었으나, '비핵화 지대'라는 말은 빠졌다.[28] 티토프는 유튜브에 'Alexander Titov'라는 이름으로 계정을 가지고 있는데, 키노의 당시 곡들 중 몇몇 곡들을 연주하는 영상을 올렸었다. 지금은 활동이 뜸하지만.[29] 이 앨범은 1988년 소련의 유일한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Melodiya)에 의해 제대로 된 앨범으로 다시 출시되는데 저작권이 미비했던 소련답게 키노 멤버들에게는 단 1코페이카도 주지 않는 흠좀무한 일이 있었다.[30] '노비 덴'은 초이가 살아있던 1989년 시절부터 키노의 이미테이션 밴드로 활동하였다. 스튜디오에서 앨범을 녹음하고 공연을 뛰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 1996년 해체되었다. 2008년 쿠르나예프 중심으로 재결성되었으나 더 이상 키노의 이미테이션 밴드로는 활동하지 않고 있다. '키노'의 미공개 노래로 오해받은 이들의 노래는 그 명성(?) 덕분에 상당히 잘 알려져 있으며, 녹음 환경이 좋지 못했고 카세트로만 앨범이 유통되었기에 현존하는 음원의 질은 상당히 낮은 편이다.[31] 키노의 노래를 좀 들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84년부터 작곡했다기에 초이의 보컬은 '혈액형' 앨범 시절 수준으로 낮은 편이며, 쿠료힌과 같이 협업했다고 하기에 쿠료힌 특유의 피아노 반주나 악기 활용 등이 전혀 드러나고 있지 않다. 또한 가사를 보면 일관적이고 단조로우며, '혈액형' 이후로 각인된 초이의 '변화를 외치는 투사' 혹은 '자아성찰' 이미지가 과하게 투영되어 있다. 이 외 키노의 나머지 멤버들이 이 '프로젝트'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은 점이나 안트로프, 모로즈, 마시나 레코드 등 키노 앨범을 자주 발매하거나 복각, 재판한 음반사들이 이 녹음물에 대해서는 전혀 참고하거나 언급하고 있지 않는 점 또한 참고할 만하다.[32] 이와 관련해 '쿠르나예프와 노비 덴 멤버들이 어떠한 경로로 이 미공개 프로젝트의 녹음본을 손에 넣었고 이걸 자신들의 노래처럼 공개했다'라는 정체 불명의 뒷이야기가 첨부된 경우도 있는데, 이 또한 신빙성이 떨어진다. 물론 강도가 집에 당당히 들어와 비공개 녹음물 및 자신들의 실황 녹음 자료를 털어갔다는 발레리 가이나(크루이스)의 사례처럼 1990년대 소련의 막장 환경을 생각하면 아예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위성이 상당히 떨어지는 게 사실.[33] 레닌그라드를 중심으로 활동한 러시아의 유명 락 밴드.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34] '이상한 밴드'라는 뜻으로, 현재까지 활동하고 있는 러시아 락 밴드.[35] 참고로 키노와 같이 노래를 부른 '조안나 스팅그레이(Joanna Stingrey)'는 가수이자(키노와 같이 부른 노래도 있다. 라이브 녹음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 키노의 멤버인 카스파랸의 아내다. 1991년 이혼.[36] 당시 유명 영화감독인 알렉산드르 우치첼 작품[37] 이 앨범은 기술적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키노의 앨범들 중 가장 음질이 좋은 앨범이다. 카스파랸은 미국인인 아내 조애나 스팅그레이를 통해 야마하 MT-44 등 유럽과 미국의 더 나은 장비들을 들여올 수 있었다.[38] 정확히 말하자면, 원래 초이는 이 앨범을 캐피톨 레코드를 통해 미국에서만 발매하고 소련에서는 발매할 생각이 없었다. 1987년 제5회 레닌그라드 락 페스티벌에서 해당 앨범 수록곡들을 거진 공개하긴 했지만. 허나 "이건 사랑이 아니야"의 프로듀서이자 키노의 동료 음악가였던 알렉세이 비시냐가 이를 소련 내에 유출한 것. 소련 내에서 앨범은 대박을 쳤지만, 이로 인해 초이와 비샤나 간 관계가 서먹해졌다.[39] 참고로 Assa에서 빅토르 초이는 그냥 특별출연한 것에 불과하다. 근데도 개봉 당시에는 마치 주연이라도 맡은 양, 당대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초이를 마케팅 차원에서 전적으로 앞세웠다(...). 소련 해체도 되기 전에 불어온 자본주의의 바람 이 영화의 진짜 주연 배우는 러시아의 아티스트인 아프리카(본명은 세르게이 부가예프)다.[40] 이후 1990년 1월 미국 유타 주에서 개최된 선댄스 영화 페스티벌에서도 참가했다. 당시 음원[41] 당시 크루이즈, 고르키 파크, 아크바리움 등 많은 러시아 락 밴드들은 미국 등지의 서양에 진출하고자 했으나 이들의 행보는 무관심 속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서구 사람들은 '러시아 하면 체호프나 차이코프스키 정도 있는 줄 알았는데, 이 곳에도 락이 있네?' 정도의 태도로 일관했지 이들의 음악 세계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 고르키 파크나 보리스 그레벤시코프 등이 활동하긴 했으나, 냉전이 끝난 뒤 이들은 잊혔다. 이에 초이와 마이크 등은 실망했다는 태도를 드러냈다. 이는 영화 레토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42] 45, 46 앨범을 들어보면 알겠지만 원래 초이는 비유하자면 '활기찬 20대 백수'처럼 노래를 했는데 후기 앨범으로 들어가면서 점점 가사에 은유적 표현이 많이 삽입되고 음 자체가 낮아지기 시작했다.[43] 확실치는 않지만, 이 사건에 KGB가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 빅토르 최 의문사 사건 참고.[44] 1989년 키노는 프랑스의 발 도르주(Val d'Orge) 스튜디오에서 리믹스 앨범 '마지막 영웅'을 녹음했는데 이 인원들이 마지막 앨범의 녹음을 마무리했다. 초이 사망 전부터 이 프랑스 인원들과 합작할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45] 구리야노프 등 키노의 나머지 멤버들은 이 앨범을 굳이 부를 필요가 있을 때 "키노"라고 부르자고 말한 바 있다.[46] 원래 앨범 제목과 앨범 아트 또한 초이의 몫이었는데 이를 정하기 전에 사고를 당했으니.[47] 초이가 남긴 원고를 보면 멜로디를 붙이지 않은 가사들이 많이 남아 있다. 가사와 별개로, 해당 곡의 리듬이나 멜로디가 나우틸루스 폼필리우스의 또다른 곡 '[[https://www.youtube.com/watch?v=2Bv2KQrgt70&list=PLj0_JB_sY6g3QISBOupRrNYL2Q7vmvg&index=3|물 위를 걷다(한국어 자막 포함]])'의 자기표절이라는 평도 찾아볼 수 있다--[48] 구리야노프는 이후 미술가로 활동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신 미술 아카데미에서 1993년부터 명예 교수로 활동했다. 그는 동성애자(혹은 동성애적 성향을 가진 사람)였기에 그의 그림에서는 동성애적 성향이 간간히 드러나는 편이다.[49] 1983년부터 1997년까지 러시아 예카테린부르크를 중심으로 활동한 포스트 펑크/뉴웨이브 계열 락밴드. 영화 브라트 1편의 OST 대부분을 맡은 걸로 유명하며, 영화에 리더 부투소프가 출연하기도 했다. 대표곡으로 '굿바이, 아메리카(Гуд-бай, Америка)' 등이 있다.[50] 러시아어로 목성을 의미한다.[51] 이들은 키노 및 나우틸루스 폼필루스 당시의 노래들과 자작곡들을 공연했으며 2017년 활동을 중단했다.[52] 후기 키노의 나머지 멤버들이 다시 모였으며, 인상적인 인트로 기타 부분은 카스파랸이 직접 작곡한 부분이다. 스튜디오 밖 조정실에 있는 사람(팔에 문신이 새겨진 사람)이 빅토르의 아들인 알렉산드르 초이.[53] 곡은 완성이 되었으나, 당시 레닌그라드의 동료 음악가였던 킨체프(락밴드 "알리사"의 리더)의 스타일과 너무 흡사하다고 판단해 스튜디오 녹음을 유보했다고 한다. 초이와 킨체프는 서로 친한 사이였으며, 서로 음악에 영향을 주고받던 사이였다고 한다.[54] 여담이지만 그의 사망 몇 주 전 러시아에서는 동성애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이 통과되었다. 지못미[55] 1분 1초 즈음에 나오는 선글라스를 착용한 사람이 유리 카스파랸이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이고리 티호미로프이다.[56] 2020년 10월 31일, 레도비 궁전(Ледовый дворец)[57] 2020년 11월 21일, BTV 아레나(ВТБ Арена)[58] 상트페테르부르크 해안가에 위치한 컨벤션 센터[59] "나는 나의 집을 비핵화 지대로 선언한다(Я объявляю свой город безъядерной зоной)"라고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원체 직설적인 제목이라 그런지 앨범이나 MV나 뒤의 "비핵화 지대"를 뺀 제목으로 올라갔다.[60] 레닌그라드 루빈슈테인 거리 13번지에 위치한 레닌그라드 락 클럽에서 개최하던 페스티벌. 해당 락 클럽은 정부의 감독 하에나마 당시 규제되던 언더그라운드 음악을 마음껏 공연하고 관람할 수 있던 몇 안 되는 장소였다. 해당 페스티벌은 1983년부터 1995년까지 개최되었으며, 키노는 제2회부터 제5회 페스티벌까지 꾸준히 참가하였다.[61] 알렉산드르의 애칭. 알렉산드르 초이를 말한다. ’46‘과 ’이건 사랑이 아니야‘에 수록된 동명의 곡도 있는데, 해당 곡에서 지칭하는 ’사샤‘가 알렉산드르 초이라는 설도 있다.[62] 2022년 03월 러시아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크림 반도 합병 기념 행사인 "Zа мир без нацизма"(나치즘 없는 세상을 위하여)가 열렸다. 블라디미르 푸틴을 위시한 많은 정치인들이 참여해 선동을 하였고, 덤으로 몇몇 친정부 가수들이 노래를 불렀는데 여기에 폴리나 가가리나가 등장해 초이의 "뻐꾸기"를 불렀다. 가가리나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2015년 영화 "세바스토폴 전투(Битва за Севастополь)"의 OST로 이 노래를 부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에도 해당 곡을 원곡과는 정반대로 애국주의적으로 편곡했다는 비판이 있었는데, 이번 공연으로 그 평가가 현실화되었다. 초이의 정치적/사회적 견해는 본인이 확실하게 밝히지 않은 이상 속단할 수 없겠지만, 초이 본인이 반전주의자이며 이런 식으로 자신의 곡을 노래하는 것에 반대했으리란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63] '엄마, 우린 전부 중환자예요'의 가사이다. 해당 가사의 뒷 부분은 '엄마 우린 모두 중환자예요, 엄마, 우린 알아요, 우린 모두 미쳤다는 걸!'이다.[64] 2022년 03월을 기점으로 러시아 정부의 주도 하에 예술인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져 보리스 그레벤시코프 등 반전/반푸틴 메시지를 드러낸 많은 가수들의 공연이 거부당하고 있다.[65] Расскажите мне, историю этого мира(나에게 말해줘, 이 세상에 이야기를).[66] 제작 중 초이의 결정으로 엎어졌다. 현재 수록곡 목록은 남아 있으나, 총 12개 트랙 중 4개(+불완전한 1개)만 녹음되어 남아 있다. 이들은 '알려지지 않는 노래들' 앨범에 수록되었다.[67] 이 앨범은 3개의 판본이 존재한다. 1-13번 트랙까지 있는 판본 / 14번 트랙('사샤')이 존재하는 판본 / 1-13번 트랙 + 캄차트카 하우스에서 녹음한 3개의 미공개곡이 수록된 판본(1996년 모로즈 레코드 판본)[68] 아래의 '밤' 앨범을 만들다 지친 키노 멤버들이 기분 전환겸 만든 앨범. 실제로 녹음하고 찍어내는 데 고작 2주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69] 제작 중 초이의 결정으로 엎어졌는데, 위의 '마지막 영웅(1983)'과 달리 녹음한 트랙이 한 10개 정도 나왔기에 당시 프로듀서였던 트로필로가 국영 음반사 멜로디야와 손잡고 무단으로 찍어내 팔았다. 약 20만 부가 팔려나갔지만 키노 측에 돌아간 돈은 1코페이카도 없었기에 당시 논란이 되었고, 초이 본인도 앨범의 판매에 대해 부정적이었다.[70] 제작 중 엎어졌다. 단 몇몇 곡은 '알려지지 않은 노래들' 앨범 및 1996년 모로즈 레코드 전집 보너스 트랙으로 공개되었고, 당시 마스터 테이프는 인터넷에 (좋지 않은 음질로나마) 풀려 있던 상황이었다. 이후 2020년 마시나 레코드에서 리마스터링해 몇몇 라이브와 함께 출시하였다. 원래 5월 출시 예정이었고 프리오더를 받고 있었으나 마지막 과정에서 앨범에 수정을 가하고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며 7월 말-8월 초부터 배송이 시작되었다.[71] 안트로프(AnTrop) 등 배급사가 있는 다른 앨범들과 달리 이 앨범은 배급사가 아예 없다. Discogs 등지에서도 'Not on label'로 분류된다.[72] 제목이 아예 없다. 즉 정말로 공식적인 제목은 '무제' 다. 원래 앨범 아트나 제목은 초이의 몫이었는데 이걸 정하기도 전에 사망해 버렸기 때문. 멤버들 사이에서는 '키노' 라고 부르자고 말했으나, 이 이름은 정말 가끔 보이는 편. 밴드 이름과 혼동의 여지도 있고, 빅토르 초이의 유작이기도 하고, 쌈빡한 검은색의 표지로 인해 대신 검은 앨범(Чёрный альбом) 이라는 이름으로 훨씬 더 잘 알려져 있다. '무제' 라고 부르는 경우는 찾기 매우 힘들다. 스포티파이에도 "검은 앨범" 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73] 1996년 모로즈 판본에서 미공개곡 2개가 더 수록되었다.[74] 원래 그냥 연습곡을 녹음해 둔 거였는데 레코딩 회사 측에서 초이 동의 없이 찍어낸 앨범이라 생전 초이는 이 앨범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팬들은 2번째 앨범으로 인정하는 듯.[75] 원체 리믹스, 컴필레이션 앨범 등이 많아 중요한 것만 수록[76] 초이 본인이 직접 관여한 리믹스.[77] 라이브에서 부른 노래와 만들다 엎어진 1983년 '마지막 영웅' 녹음본 등 수록.[78] '이글라', '휴가의 끝', '아사(АССА)' 등 키노가 참여한 영화에 수록된 키노의 음악 수록[79] '검은 앨범'과 색깔만 반대된 앨범 아트로 인해 '하얀 앨범(белый альбом)'이라고도 불린다. 미공개곡 'Вопрос'(오리지널+데모) 및 'Смотри - это КИНО' 수록.[80] 키노의 전신인 '가린과 쌍곡선' 시절 라이브 녹음 수록[81] 마시나 레코드 발매. 위의 '아타만'과 달리 초이가 직접 녹음한 보컬+어쿠스틱 판본 / 2012년 리믹스 / 2012년 리믹스 데모 총 3개 트랙으로 구성한 싱글.[82] 러시아의 주요 음악 장르 중 하나인 "바르드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 평가받는다. 바르드 음악의 특징에는 기교를 부리거나 화려하지 않은 어쿠스틱 기타 반주와 운율을 딱딱 맞춘, 시 낭송과 유사한 점이 많은 가사 등이 있다.[83] 듀란 듀란과 같은 앨범을 녹음하고 싶었다는 초이의 증언이 남아 있으며, 키노의 곡 중에서는 더 큐어더 스미스의 표절이라고 볼 수 밖에 없는 곡들도 많다.[84] 사실 정치적 메시지라고 하기도 뭣한 것이, 이 곡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평화"를 외친 곡이다.[85] "혈액형" 시절까지는 더 큐어의 이미지가 남아있는 등 두 시절에 애매하게나마 걸쳐 있는 느낌을 주기는 한다.[86] 이 시절 곡들은 다크 웨이브에 가까울 정도로 어두운 음색이 특징적인 곡들이 많다. 키노가 딱히 고딕 컬쳐와 관련있는 밴드는 아니었지만, 이로 인해 현대 러시아/구소련권 두머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 보면 키노 곡들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시대적 간극을 넘어 몰찻 도마(Molchat Doma)나 플로호(Ploho) 등등 구소련권의 레트로 다크 웨이브 밴드들에게 큰 영향을 준다고 평가받는다.[87] 물론 예외는 있다. 마지막 앨범의 "네 여자친구가 아플 때면"의 경우 (그나마) 음색이 좀 더 밝은 편이며 가사 또한 (그나마) 간단한 편이다.[88] 한국은 물론이요 러시아/구소련권 현지에서도 그런 이미지로 소비되는 측면이 있다. 당장 벨라루스나 러시아 반정부 시위에서 "변화를 원한다!"가 민중가요마낭 울려퍼지는 일이 드물지 않다.[89] 정말로 초이가 이러한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투영시키고 싶어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정부나 사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말을 아꼈을 수도 있지만, 초이가 사망한 이상 이에 대해 확답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다.[90]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다른 도시에도 있는데, 아르바트 거리의 벽이 제일 유명하다.[91] 그런 이유도 있겠으나, 생전에 빅토르 초이가 엄청난 골초였기때문에 그를 추모하는 의미가 더 강하다. 그가 출연한 유일한 영화인 이글라에서도 허구헌 날 빅토르가 담배를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