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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23 13:06:29

크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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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태동, 모닌과 전기 크루이스3. 실험, 가이나와 중기 크루이스4. 전설, 가이나와 후기 크루이스5. 해체, 이후 후일담6. 디스코그래피

1. 개요

От кого мы ждём ответа...?
누구의 대답을 우린 기다리는가...?
- 전기 크루이스의 리더 알렉산드르 모닌
Рок Навсегда...!
록은 영원하다...!
- 후기 크루이스의 리더 발레리 가이나

크루이스(Круиз, '순항')은 소련/러시아록밴드이며, 1980년 창설된 소련 인민을 위한 선전용 관영 그룹에서부터, 1986년부터 동구권 모두를 전율케한 소련의 괴물 3인조,[1] 스피드 메탈스래쉬 메탈로 밴드 컨셉을 변경, 가히 폭주라고 언급할 수준의 연주실력을 보여주며 짧지만 정말 강렬한 전설을 남긴 그룹이다.

밴드 컨셉이 80년대에 3번이나 바뀐 묘한 그룹이라 초기 크루이스, 중기 크루이스, 후기 크루이스로 나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초기와 후기 크루이스에 대해서 기억한다. [2]

밴드 상징은 붉은 별, 다만 이것은 1986년부터 쓰인 상징이며, 이전에는 별다른 상징을 쓰지 않았다. 심심하게 크루이스라고 적어놓고 돌아다니던 시절이 더 길다(...). 1986년, 1987년 1989년 엘범 자켓에 쓴 붉은 별과 가이나의 기타에 그려진 별, 소련을 상징하는 브랜드라서 즐겨 사용한 듯하다. 몇몇 팬들은 가이나의 붉은색의 깁슨 커스텀에 별이 그려진 이유가 기타의 악마를 소환하는 것이 아니냐며 농담하기도 한다. [3]

2. 태동, 모닌과 전기 크루이스


크루이스는 탐보프의 작은 VIA(ВИА, 보컬-기악합주단, 쉽게 말해 관영 음악밴드라고 생각하면 된다.)에서 시작되었다. 1978년 VIA '영 보이스'(몰로디예 골로사, Молодые голоса)던 시절부터 활동 하였던 마트베이 아니치킨과 몰도바 3인조, 알렉산드르 모닌과 세르게이 사리체프가 모여서 영 보이스를 당시 소련 정부가 허락한 새로운 장르인 '록' 그룹으로 개편 했으며, 젊은이의 목소리들은 순항이라는 의미의 크루이스로 변신했다. [4]

구 영 보이스 멤버들은 전국단위로 공연을 하면서 다녔고, 낙후된 지역마저도 공연을 감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티-만시 자치구 [5] 부터 하바롭스크나 북부지방에서 눈보라와 영하 56도 하던 곳에서 전기도 없이 공연도 하던, 그야말로 생고생의 연속으로 소련의 당시 문화정책인 벽촌 문화 계몽 및 선전 투어을 이행하고 있었다. [6]

썰매에다 장비를 싣고 다니고, 오지에 가기 위해 헬기를 타고 방문해서 연주를 하였으며, 공연 장소가 없으면 마을 회관 연단이라도 쓰고 전기도 안되면 마을 발전기라도 빌려 연주를 하는 등 질박함 그자체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 처참한 모습에 측은히 여긴 주민들의 반응은 호의적이였고 음악도 매우 좋아했다고, 하지만 도시사람이 오는게 더 신기해서 음악보다 바깥세상 소식에 더 궁금해 했다고 한다(...) 환상향 주민들과 경계를 넘어온 순박한 밴드의 전원밴드생활 [7]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으로 무장하고 탐보프 필하모닉 앙상블로 위장(?) 한 크루이스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음악의 길을 나서기 시작했으며, 하드록부터 디스코까지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는 신개념 밴드로 모스크바부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부르는 곳이 있으면 공연을 강행하였다. 즉 고생하는 것은 동일하나 범위가 대도시로 확장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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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1982년 당시 멤버, 좌로부터 세르게이 사리체프, 알렉산드르 모닌, 발레리 가이나, 브셰볼로트 코롤류크, 알렉산드르 키르니츠키

1980년 당시 당시 멤버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매력인 메인 보컬 알렉산드르 모닌(Александр монин), 사라토프 VIA에서 날아온 멋쟁이 키보드 연주가 세르게이 사리체프(Сергей Сарычев)[8], 몰도바 출신 3인방, 기타리스트 발레리 가이나(Валерий Гаина), 드러머 및 백보컬 브셰볼로트(세바) 코롤류크(Всеволод Королюк), 베이스 알렉산드르 키르니츠키(Александр Кирницкий)로 구성되었다.

당시 크루이스는 공식적으로는 당시에 유행하던 록-오페라를 연주하며 [9] 뒤로는(...) 라이브 공연을 뛰며, 팝 음악에 점령당한 라디오나 TV를 대신해 녹음실에서 녹음 후 카세트 형식으로 된 해적판을 뿌리는 형식으로 자신들의 음악을 퍼트렸다. 그 해적판(?)이자 이후 정식 엘범으로 나온 대망의 1집이 1981년 Крутится Волчок (팽이는 팽팽팽), 세르게이 사리체프가 작곡한 동명의 곡의 이름이자 전기 크루이스의 전무후무한 히트곡이 된 곡이다. 디스코풍의 중독성있는 비트와 도입부 베이스가 엄청난 인기를 끈 곡,


팽이는 팽팽팽(Крутится Волчок, 1981), 이 곡은 전소련에 퍼졌고, 소련 춤판인 디스코텍부터 아프가니스탄 전쟁 속의 소련군도 즐겨 연주하던 곡이다.

팽이외에 인기를 끈 곡은 하드록 풍의 순항을 위한 비자(Виза для Круиза), 스페이스 록풍의 열망(Стремения) 등이 있다.

당시에 동일한 관영밴드로서 인기를 끌고 있던 제믈랴니예와 함께 무대를 뛰기도 했고, 전 소련이 아는 히트곡을 불러 인지도를 높여나가던 크루이스는 1982년 2집 '잘들어라 인류여!'(Послушай человек!)을 또 불법으로 내놓기 시작했고, 가이나가 작곡한 이 사회비판을 찰지게 하는 곡[10]도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사리체프가 내놓은 놀라운 '팽이'와 함께 크루이스의 인지도를 높였다.
И мы заметили совершенно непонятную реакцию зала – как только мы начинали эти песни играть, публика тут же сходила с ума. Ни с того ни с сего. Этих песен тогда не знали - не было записей. А они устраивали фурор на концертах. Тогда ведь люди ходили практически на любые группы. "Молодые Голоса" тоже работали по два, по три дня в каком-нибудь городе. И на второй-третий день обычно разносились кассы. Потому, что по городу успевала пройтись молва, что эта группа вставляет так, что мало не покажется! И мы для себя сделали выводы очень быстро, что в этом направлении и надо идти. Вот наша дорога, вот наша музыка, которую мы должны на сегодняшний день исполнять.

우리는 관객석의 그 이해못할 정도의 반응을 느꼈죠. - 연주를 하자마자 사람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으니까요. 심지어 당시에 그 노래들은 알려지지도 않았어요. 아직 녹음판도 없었거든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완전 열광했다니까요! 당시에야 사람들은 모든 그룹 공연에 다녀갔고, '영 보이스'도 당연히 어느 도시던 2~3일만 공연 뛰고 그랬는데, 이게 점점 2~3일째 되는날에 매표소부터 입소문이 널리 퍼지는거죠. 왜냐면, 도시에서 이런 말이 떠돌면서 말이죠. "우리가 생각했던 초라한게 아니다. 얘낸 뭔가 보여준다!" 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린 엄청 빠르게 결론 내렸죠. 이게 우리의 음악이고, 우리의 방향이며 우리가 지금 무조건 가야할 할 길이라고..

1982년 이후 멤버 교체가 있었으며, 사리체프는 인기는 크게 끄나 외부의 압력이 가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크루이스를 떠나 모스크바에 자리잡아 자신만의 그룹인 알파(Альфа)를 창설했으며, 드러머 코롤류크와 키르니츠키도 떠났다. [11] 그래서 대체 멤버가 들어오기도 하고, 떠났던 인물들이 돌아오기도 하는 등의 유동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새로 늘어난 자리는 세컨드 기타리스트 그리고리 베즈굴리가 들어갔고, 멤버들이 생각하던 기타음이 첨가되어 더욱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이후 아니치킨과 모닌은 새로운 스타일을 가미한 라이브 공연인 '열기구로 떠나는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на воздушном шаре)을 성황리에 마치고, 뉴웨이브 풍의 장르에도 발을 들여놓게 된다. 귀만 즐거울 것이 아닌 레이저쇼, 모형 열기구를 띄우는 등 색다른 볼거리도 제공하여 관객들에게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을 전달하는 것을 선택했고, 많은 호응을 얻게 된다. 하지만 이 방향을 주로 가려던 크루이스는 83년 스타일을 계승한 새로운 엘범인 (P.S Продолжение следует)을 만들며 1984년에 그 당당히 소개할 준비를 마치던 중 [12]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맞이하게 된다.

그 충격적인 소식이란, 소련 문화부의 그룹 해체 결정, 당시 체르넨코 서기장 시절, 사회가 자유화의 시류를 타고 있음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와중 크루이스가 인기를 끌자, 반-공산당 운동의 시초가 될 것이라는 우려어거지로 인해 파시스트적 음악을 연주함으로 선동을 한다는 사유로 해체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13]

소련 대중문화계 인사들이 이를 막기 위해 탄원서도 보냈으나 결국 명령은 효력을 발휘해, 크루이스의 멤버의 전원은 공연은 물론 카세트판 판매도 불가능해지고, 감시도 당하니, 이런 탄압에 참지 못한 모닌과 다수의 멤버는 딴살림을 차리기 위해 크루이스를 떠났으며, 당시 순식간에 모든 걸 날려버린 아니치킨 곁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멤버는 가이나 뿐이였다. 가이나는 당시에 떠나려고 하는 멤버들에게 남자고 설득을 하였으나, 베즈굴리와 모닌은 다른 것에 익숙해지고, 이것이 우리의 '순항'이라며 떠났고, 이후 EVM(러시아어로 컴퓨터의 약자)을 창설해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14]

가이나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나 싶어 고민에 빠져 있었고, 고민을 끝내자 절친한 친구들인 3인조 중 두명인 코롤류크와 키르니츠키를 폐허뿐인 크루이스에 다시 불러들이기 시작했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서였다.

3. 실험, 가이나와 중기 크루이스

1984년 여름 이후 풍비박산이라고 해도 모자를 격변을 겪고도 멘탈을 겨우 잡은 아니치킨, 남아 있던 가이나와 돌아온 코롤류크, 키르니츠키는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다.[15] 이들은 상호간의 음악적 감성을 인정하고, 어느 한 군데에 컨셉을 맞추지 않고, [16] 그냥 자기 좋은대로 음악을 해보자! 해서 새로운 곡들을 만들다 1985년부터 본격적인 음반 제작을 시작한다.

자유로운 실험이자 삼인방의 특색을 조화를 이뤄보겠다는 것을 기반한 이 프로젝트는 '키코가브바'(КиКоГаВВА)라는 다소 묘한 이름으로 지어졌으며, 이 키코가브바는 삼인방 알렉산드르 키르니츠키(Александр Кирницкий), 프셰볼로트 코롤류크(Всеволод Королюк), 발레리 가이나(Валерий Гаина)의 이름과 성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17] 이렇게 실험주의적인 엘범을 만들면서, 생계를 위해(?) 탐보프를 떠나서 공연을 허가해 주는 곳을 찾아다니다 우크라이나도네츠크 필하모니 측의 초대를 받아 공연을 재개하게 된다.


1985년 엘범 '키코가브바'의 전곡 모음, 이 엘범은 당시에 공식적으로 풀리지는 않았고, 또다시 카세트판으로 알음알음 유통되었다. 공식적으로 재발매된 것은 무려 1995년의 일이었다.

1983년 시도하던 뉴 웨이브가 더 첨가된 느낌의 곡들이 많으며, 당시 키르니츠키, 코롤류크, 가이나가 구상한 신비주의적 구상은 - 불교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동방의 느낌이였고, 이를 음악에 표현한 곡이 많다. 특히 마지막 곡인 '민담'(Баллада)는 이게 전-후기 들어본 청자들도 크루이스 곡 맞나 싶을 정도의 낮섬도 느껴질 것.

앨범의 마지막 3곡(Усталость, Много Нас, Баллада)는 로베르트 로제스트벤스키(Р. Рождественский)[18]의 시에 가이나가 멜로디를 붙인 노래들이다. 군대 노래(Военные Пения)로 분류된 이 곡들은 (물론 본인들 마음에 들어 선택한 것이긴 하겠으나) 당시에 소련 문화부가 내세우던 선전 메세지인 '반전'[19]을 담고 있다. 당시 기강을 잡던 시기에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다 삽시간에 반지하그룹 신세가 된(?) 크루이스를 복권 시키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로 수록한 것이기도 한테, 안타깝게도 통하지 않았다.

이렇게 새로운 엘범을 만들고, 우크라이나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 크루이스는 45일동안 123번의 콘서트를 소화하며 다시 인지도를 쌓기 시작했다. 도네츠크 지방에서 살인적인 콘서트 초대로 근면함(?)과 실력으로 인기를 끌던 그 시간동안 알파 리더이자 옛 친구 사리체프와 무대에서 만나 협업하기도 하고, 다른 인물들과도 협업하기도 하는, 실험과 새로운 경험으로 성숙해져가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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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의 멤버들, 사실 3인방을 제외하고는 세션 멤버라고 봐도 좋다.


(0분~3분 8초사이의 영상, 예피모프 합류한지 얼마 안된 시기)

그렇게 옛 영광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던 중 새로 낸 곡 중 하나인 기죽지 말라구!(Не падай духом!)가 전국 방송[20]을 타고, 인기를 타기 시작하면서, 다시금 사람들이 크루이스가 아직 살아있구나! 라는 열광을 보내왔다, 방송에서 프로듀서인 마트베이 아니치킨은 이때 관객석에 나온 질문인 "너무 강렬하게 연주하는거 아닙니까?"라는 질문에
Мы планируем ещё утяжеляться!
우린 더 강렬하게 할 계획입니다!

라고 즐겁게 대답했다. 이때부터 실험은 좀 더 강렬한 노래를 추구하게 되었으며, 이후의 컨셉을 결정하는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가이나도 사리체프와의 만남에서 알게된 야망 넘치는 드러머 세르게이 예피모프가 코롤류크 대신 크루이스에 합류하게 되고[21] 서로 더 어렵고, 강렬한 음악을 해보자는 의도가 딱 맞아 떨어지게 되면서 1985년의 그 결정은 이후 전설을 낳게 된다. 소련 괴물 3인조, 크루이스 트리오의 서막이 시작 된 것이다.

4. 전설, 가이나와 후기 크루이스

1985년 중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하드를 넘어선 헤비를 추구하게 된 크루이스. 가이나와 아니치킨은 새로운 멤버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예피모프가 굴러들어와 강렬한 드럼 사운드는 확보했고, 가이나의 기타 사운드는 전재산의 반을 날려 산 깁슨과 펜더, 크루이스 창설 이후로 계속해서 성장해 엄청난 수준이 되었고, 이제 남은 것은 베이스와 보컬이였다.

가이나는 자신의 앳된 소년같은 목소리는 강렬한 음악을 추구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을 것이라고 당시에 생각했다. [22] 그래서 옛 친구인 사리체프에도 부탁해보고, [23] 다양한 멤버들을 영입하려고 했었으나 실패하고, 결국 란마 같은 자신의 목소리로 가기로 한다.

이렇게 멤버를 재편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예피모프와 가이나의 강렬한 느낌을 살리기 위한 곡들을 1984~6년부터 부른 곡들을 마개조하거나 새로 만드는 식으로 스타일을 바꾸고, 새로운 음악은 더욱더 강렬하게 만들게 되는데. 이 곡들은 모은 엘범이 바로 전 소련을 강타한 록은 영원하다!(Рок Навсегда!) 였다.


전환기의 1986년 라이브 공연 녹음본, 구 크루이스 곡부터 후기 크루이스 곡까지 섞여있는 이 공연에서 확인 가능한 것은 1986년의 아직까지 완벽하게 컨셉이 잡히진 않았지만, 더 강렬하고, 템포가 빠르며, 좀 '헤비'하네?! 하는 느낌도 나기 시작한다는 것. 1986년 이후에는 아예 키보드도 빼버린다.

이렇게 공연을 하면서 개편할 준비를 하자, 멤버가 두명 뿐인(...) 시절도 있었다. 예피모프랑 가이나, 이 두명만 남은 시절도 존재한다. 이때는 가이나가 베이스도 직접 치면서 곡을 제작하는 근성을 보여주며 결국 록은 영원하다! 가 완성이 되어,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아'에 제출한다. 이쯤 되면 당연하게 카세트 테이프판도 뿌리고 말이다. 이 뿌린 판들이 퍼지면서, 난리가 난다. 아니 시발 그 디스코 풍 노래 내던 크루이스가 낸 엘범인데 이 미친 사운드를 듣고 소련에 이런게 존재한다고? 라고 사람들은 흥분했다.

물론 1986년, 당시에는 아리야초르니 코페, 레기온 등과 같은 대중적 메탈 밴드는 이미 존재했고, 이중 아리야나 쵸르니 코페는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아리야는 굴러들어온 볼샤코프의 그 유명한 의지와 이성(Воля и разум)이 히트를 치고, 이에 질세랴 쵸르니 꼬페는 신성메탈을 컨셉으로 민족성을 띄는 메탈 곡인 블라디미르 루스국(Владимирская Русь)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기교와 연주 스타일이 완전히 색다르고, 누구보다도 빠르고, 누구보다도 현란하며, 누구보다도 '자신만의 색'이 있는 크루이스의 등장은 서양 메탈을 접하던 안하던 강렬한 록에 목말라 하던 소련 청년들에게 또다른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크루이스에 열광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 라이브 무대의 현란한 퍼포먼스였다. 가이나와 예피모프는 누구보다도 쇼맨십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고, 이를 거침없이 뽐내는 것을 즐겼다. 이에 관객들도 더 미쳐 날뛰게 된 것.



후기 크루이스 엘범 '록은 영원하다' (1986) 전기 크루이스, 중기 크루이스의 모양새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변화를 느낄수 있고, 이 강철로의 변화는 소련 전국에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24]

이중 가장 유명해진 곡은 우리랑 함께 가세(순례자)(Иди же с нами)이다. 스페인 시인 레온 펠리페(León Felipe, 1884-1968)의 동명의 시(Ven con nosotros)를 번안한 해당 노래는 초반의 가이나의 현란한 기타 연주가 분위기를 극한까지 이끌고, 중간부터 예피모프와 바실리예프가 가세하면서 화합을 이루는 서사시적 명곡이라고 할 수 있으며, 1988년 동독에서 열린 군인 음악 페스티벌에 참가한 팀이 커버해 부르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끈 곡이다.

또다른 히트 곡은 최후의 여명(Последний рассвет), 엄청난 스피드(약 278 BPM)의 강렬한 음으로 미래에 일어날 모든 전쟁을 저주하는 곡. 처절한 목소리와 세기말적 사운드가 압권. 사실 전기 크루이스의 미친놈들아의 최종진화판이다.

이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얻자, 본격적으로 베이스를 찾기 시작했고, 구 쵸르니 코페 베이스 연주가인 표도르 바실리예프가 1986년 후반에 합류했고, 3인조 체제로 확고히 하고 전 소련 투어을 시작했다. 모닌 시절의 크루이스 때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그때보타 더한 인기를 끌면서, 소련에 헤비메탈을 하는 큰거 있다! 라는 소문이 퍼지며 세계적인 인지도도 늘어나게 되었고, 결국 현란한 공연을 직접 본 서독스콜피온즈의 프로듀서가 접촉하여, 해외 공연 예정도 잡히기 시작했다.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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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크루이스의 3인조

1987년 멜로디아에서 출판된 '크루이스-1'(록은 영원하다! 의 정식발매판)가 공식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중적으로도 알려지고, 해적판이 아니라 정식판도 쉽게 구할수 있어지니 더욱더 인기는 높아지고, 반대 급부로 이를 이 수요를 맞추기 위해 살인적인 스케줄이 맞춰지게 된 것. 이 덕분에 작지만 큰 사건이 발생 계기가 된다.

큰 성공 이후 멤버들은 라이브 투어를 위해 소련 방방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볼고그라드 공연이 잡히게 되었는데, 당국과 공연 일정을 조율하며 영하의 온도에서 스타디움에서 공연하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것이 조건이였는데, 공항에 나오자 마자 한파가 치고 있었고, 옛 악몽이 생각나는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거기에다 무대는 스타디움으로 유지해 버린 상태였다.

이미 엄청난 스케줄에 피로가 쌓여있던 가이나와 멤버들도 분노하고, 비협조적인 지역 당국의 무능함 덕에 무대 일정이 꼬이면서 크루이스 공연을 들으러 왔다 눈보라에 파묻히게 생겼고 더군다나 원래 계획된 2일 공연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빡쳐버린 15000명의 관중들이 폭도로 변해 현장을 지키던 경찰 5000명에게 병과 불덩이를 던지면서 시작된 충돌이 이후 도시에 대규모 폭동으로 이어져 40대의 트롤리버스를 전소시키고, 열차역에 정차한 열차를 부수는 등의 피해를 끼쳤다 [26]

이 당시에 가이나는 공연 하는 도중에 공병과 화염병(...)이 무대에도 날아오자 노래하다 말고 그만 좀 싸우고 우리 노래를 들어! 라고 외치는 등 그야말로 개판이라는 말이 모자를 광기의 현장이였고, 가이나의 인생에 아직도 기억에 남는 추억(????)이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이때 신문에 실렸는데, 크루이스가 그 폭동을 조장한 선동가라고 이름이 났었다고.



이런 저런 소동이 있으면서도 1987~1988년에는 2집 '무쇠철 록'(Железный рок)을 내놓고, [27] 동구권은 물론, 스페인, 서독, 네덜란드, 스웨덴 등 다양한 서방 국가에서 공연을 하면서 좋은 반응을 이끌게 된다. 생소하지만, 현란한 연주 실력을 보여주는 모습에 해외에도 먹혀 들었던 것.

1988년 이후로 해외의 프로듀서(WEA, 현 워너 뮤직 그룹 )를 두게 되면서, 해외 활동을 본격적으로 나서려고 했으나, 주요한 조건이 있었다. '노래를 영어로 부를 것', 가이나는 영어를 억지로 하게 되면서 알아 들을 수 없는 영어를 구사하니 해외 주요 음악지에서도 "다 좋은데 영어로 말하려고 하는게 문제임" 이라는 지적을 할 정도로 어색하게 들리는 것이 단점이 되었다. [28]

그래도 새로운 무대에서 열심히 뛰어 보겠다! 라는 마음에 소련갔다 서독갔다 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에도 '미친듯이' 무대를 뛰었고, 예피모프의 재치있는 '미스터 고르바초프' 드럼, 가이나의 광속 기타, 바실리예프의 묵직한 베이스가 최대효과를 발휘하며 무대를 달구었다. [29] 얼마나 살인적인 스케줄이였냐면, 가이나가 뮌헨 라이브 공연일때 고열(당시 40도)로 쓰러지기 일보직전 까지 무대를 뛰었다고 회고를 할 지경.

하지만, 이렇게 크루이스는 해외에서 순조롭게 성황리에 무대를 뛰고 있는 와중에, 1989년 프로듀서의 결정에 반발하는 예피모프와 이를 조정하려는 가이나간의 입장차가 깊어지면서, 해체 위기를 겪게 된다. 프로듀서는 새 엘범에는 전자음악 풍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싶었고, 음악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겠다고 하는 것도 그렇고 온 사방에 무대 뛰라고 보내서 무자비하게 부려먹는 것도 서러워 죽겠다고 예피모프는 강하게 반발했고, 가이나는 이렇게 갈갈이 화를 내는 예피모프를 달래다가, 이렇게 부려먹히는 것보다 내가 새로운 그룹을 만들어 직접 프로듀서를 하는게 낫지 않을까? 라는 딴 생각(...) 을 품게 되었고, 1989년 마지막 3집인 컬쳐 쇼크를 내고, 소련으로 복귀해 2시간의 거대한 공연을 마지막으로 1990년에 해체를 하고 만다.

가이나는 서독에 있는 동안 프로듀서로써 맡은 첫번째 그룹이 있었는데, 그 그룹이 바로 안톤 가르시야가 이끌던 스레쉬 메탈 그룹인 였다. 당시 주목받는 베이스 기타리스트인 아나톨리 크룹노프[30] 를 새로 영입한 후 크루이스와 같이 활동하며, 서독에서 다양한 무대를 펼쳤다. 이 성공적인(?) 경험이 가이나의 프로듀서의 꿈을 키운듯(...) 이때 누구도 미국 이민 후 양준일 노래를 만들거라고 예상 조차도 못했을 것이다.


3집 컬처 쇼크(Culture Shock, 1989) 곡 분위기 자체가 또 달라진 것을 알 수 있을 건데, 이건 당시에 가이나가 준비하던 미국 진출을 위해서 컨셉을 좀 더 바꾼 것. 3집에서 크루이스 멤버들이 자주 연주했던 곡은 Child of Pride,

5. 해체, 이후 후일담


1990년, 크루이스 해체 이후 가이나의 새로운 록 그룹 프로젝트인 '게인'(가이나의 영어 발음. 미국 진출을 목표로 했었다.)이 불발로 끝나고, 날마나 나빠지는 환경과 소련의 내부 불안이 심화되면서, 이곳에 있는 것 보다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기로 결심하고, LA로 이민을 간다. [31]

이민 이후로는 가이나는 발 가이너라는 이름의 프로듀서로 더 알려지고, 양준일의 음악 작곡도 하면서 한국과도 인연이 생기게 된다. 한국에서 가이나라는 이름은 몰라도 발 가이너라는 이름은 2000년대 양준일의 댄스음악 시절인 V2을 안다면 들어는 봤을 것.[32] 그외에도 미국의 중소 밴드 프로듀싱도 하고, 같이 LA로 이민온 사리체프[33]와 같이 조용하게 음악 산업에서 생업을 유지(?) 하고 있다.

세르게이 예피모프는 다양한 그룹을 진전하면서 드러머로 활동하였고, 세션일을 하며 고향 볼고그라드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다. 수염이 인상깊은 드럼 잘 치는 영감님

표도르 바실리예프는 고향 쵸르니 코페[34]로 돌아가 베이스로 활동하고, 지금도 세션으로써 활동하고 있다. 크루이스 시절의 산발 머리카락은 엣저녁에 자르고, 깔끔한 스타일로 변신하여서, 80년대 표도르와 비교하자면 오히려 더 젊어 보이는 기적을 보여주고 있다.

3인조가 뿔뿔히 흩어지자, 1992년 EVM에서 활동하던 모닌과 베즈굴리가 갑자기 크루이스의 귀환을 선언하고 구 크루이스의 스타일로 돌아간다~ 라는 컨셉으로 러시아에서 무대를 뛰기 시작한다. EVM 스타일과 구 크루이스의 짬뽕인 새 엘범도 내기도 하며, 구 크루이스를 추억하는 사람들에게 소소한 인기를 구사하며, 모닌이 사망할 때 까지 멤버를 유지하다, 사망 이후 새로운 멤버를 영입하기도 하나 모닌의 브랜드로 이끌던 크루이스는 그의 죽음 이후로 이전의 폭발력이나 시대를 휘어잡을 곡은 내놓지 않고 있다. 사실상 이름만 유지된 채 아예 다른 그룹이라 보아도 무방할 지경.



거의 30년만에 3인조에 의해 다시 연주된 '불 속으로!(В огонь!)'

이때, 3인조는 2015년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다가, 팬들의 지극한 요청으로 결심이 선 가이나,예피모프,바실리예프가 다시 의기투합해 3인조가 재결성, 평균연령 60세 2016년 새롭게 공연을 시작하였다. 아직 죽지 않은 3명의 현란한 연주에 팬들은 그시절로 돌아간것 마냥 만족했고, 거의 30년만에 다시 만났는데도 생각보다 합이 잘맞은 3인조는 아직 우리를 기억해주는 팬들을 보며, 다시 3인조의 부활을 알리며 새로운 아이템, 이름하여 효도메탈관광 더 많은 콘서트와 새 엘범도 만들 준비를 하였으나..

이번에는 간판만 뗀 크루이스를 아직도 이끌고 있는 마트베이 아니치킨[35]통합 러시아당의 의원이자 당시 주거관리부 장관이였던 미하일 멘 등[36]의 압력으로 크루이스라는 밴드의 권리를 상실하고, 다른 무대를 뛰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사실 아니치킨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크루이스[37]가 인기를 끄는 것은 그들에게 매우 불쾌한 반응을 보여주었고, 처음에는 그저 세션으로 활동하겠지 하고 공연을 허가 해줬더니 3인조 반응이 예상외로 더 좋고, 인기를 끌게 되자 마자 이런 속좁은 행보를 보여준 것. [38]

결국 알력으로 인해 두 콘서트를 끝으로 화려한 부활은 짧게 끝나게 되었고, 가이나와 다른 멤버들도 아쉽게 생각하며 다시 훗날을 기약했다. 자신들의 음악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그날을 기다리며...

6. 디스코그래피


[1] 기타 및 보컬 발레리 가이나, 드러머 세르게이 예피모프, 베이스 표도르 바실리예프의 1986년 후반, 3인조 체제가 확립되었다.[2] 그렇게 된 이유가 중기 크루이스는 실험주의와 신비주의 컨셉으로 1984~6년 초기까지 이어졌고, 그이후론 완전히 메탈 컨셉으로 변경했기 때문.[3] 가이나는 예나 지금이나 기타 수집광이라 펜더, 깁슨등의 기타를 수집했으며. 자기 재산의 반을 박아 펜더를 구입한 일화는 현지 기타 덕후들의 유명한 이야기.[4] 이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것은 사리체프, 우리 한번 다른걸 해보자! 라는 제안에 모닌도 호응했고 아니치킨이 최종적으로 결정하자마자 이렇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5] 지금이야 유전등으로 발달했으나 당시에는 이세계 소설에서 튀어나올 법한 수준의 촌이였다. 심지어 공연하던 당시를 회고하던 가이나 왈, 대조국전쟁은 계속 되고 있나? 하고 물어보던 주민들도 있었다고.[6] 당시에 VIA가 난립하던 이유도, 이런 낙후된 촌락지역에도 문화생활을 영위하게 만들겠다는 목적이였다. 지역 계몽 겸 선전을 노린 것. 제대로 전기도 안들어오는 곳에서?[7] 현지 사냥꾼과 친해져서 만나면 물물교환도 하기도 했다 한다.[8] 러시아 음악에 일가견이 있으면, 이 이름을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80년대 초중반의 전소련 청소년 갬성을 날려버린 알파의 리더,[9] 당시 연주하던 곡은 별의 방랑자, Звездный скиталец[10] 자연을 소중히 여기지 못하는 그대들아! 라는 자연보호 하자는 곡이다. 화자가 나무다[11] 몰도바 3인조중 코롤류크와 키르니츠키는 크루이스에 유동적으로 참여하고 나가길 반복한다.[12] 안타깝게도 그 공개할 공연은 취소되었다. 유리 안드로포프 장례식으로 인한 취소, 그리고 이후에 나올 이유로 아예 공개도 못하게 된다.[13] 아프간전에 열중하려던 체르넨코 정권시기에 미친새끼놈들아!(Безумцы!) 같은 반전곡을 부른 것이 화근이였다는 소문도 있다. 이 말도 안되는 냉전 속에서도 전쟁을 외치는 정신나간 놈들은 계속 늘어난다는 강도높은 비판적인 곡을 듣기에 높으신 분들은 매우 거북했을 것.[14] 이후로 가이나는 매우 실망했고, 이후 구 크루이스 멤버 - 특히 모닌과 사이가 매우 소원해진다.[15] 정확히 말해 3인방으로만 활동한 건 아니고, 키보디스트 세르게이 오스타시코프(Сергей Острожков) 등과도 활동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다만 3인방을 제외한 인물들은 사실상 세션 멤버에 가까웠다.[16] 컨셉자체는 있었다. 키르니츠키와 코롤류크는 색다른 음악을 하고 싶다! - 그치만 강렬한 음악보다는 좀더 감미로운 신비주의(...) 로 가보자! 라는 것이였고, 가이나는 콜 때린 결과가 85년 엘범.[17] 키(Кирницкий)-코(Королюк)-가(Гаина)-브(Валерий)-브(Всеволод)-아(Александр)[18] 뭔 듣보잡이여 해도, 몇몇 사람들에게 우리는 인민의 군대의 작사가라면 아! 할 소련의 유명 시인이다.[19] 당시 반전 선전을 많이 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반미와 반서방을 선동해 내부결속을 노리는 전략. 재미나게도 이걸 위해서 맨발의 겐도 파격적으로 수입해 틀어주던 시절이다. 이유야 당연히 전쟁은 끔찍하다. 그리고 미국이란 놈들은 수틀리면 핵으로 모두를 쓸어버린다 라는 공포를 심어주기 위함이였다.[20] 당시 음악 코너인 뮤직-링,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쇼! 음악중심이라고 생각하면 된다.[21] 1986년에 열린 전 소련 록 페스티벌인 록 파노라마(Рок-Панорама 86)에서 코롤류크는 사리체프와 협업했다. 당시 코롤류크는 키코가브바 앨범의 수록곡이자 자신이 작곡한 노래 원천(Родник)을 직접 불렀는데, 아주 훌륭한 퀄리티를 보여준다. 들어보기(한국어 자막 포함) 심지어 음질도 아주 훌륭한 편이다. 분명히 관제 페스티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록 파노라마 86과 87은 전체 중 일부만 저음질 부틀랙 혹은 VCR 영상으로 남아 있는데, 당시 알파는 상당히 인기를 끌던 밴드였기에 이 정도로 질 좋은 녹음본이 남아 있을 수 있었다.[22] 가이나 보컬은 얼굴만 안보고 들으면 청소년급의 목소리라 지금도 가이나는 기타실력은 신이 확실하나 보컬은 구리다라는 평도 가끔 나온다. 메탈이라면 굵거나, 높거나, 그로울링, 샤우팅 등의 기교를 부려야 한다!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가이나 목소리는 안돼! 라고 외친다. (...)[23] 사리체프는 자신의 목소리에 안맞을 거라고 더 강렬한 음악은 거부했다고 한다.[24] 가끔 유투브에서 볼 수 있는 댓글에 적힌 일화를 보면 당시 아버지가 옛 크루이스를 기대하고 팽이는 팽팽팽 들으러갔다가 기겁한 적도 있다고.[25] 당시 이런 움직임을 허가 한 것은 고르바초프시기에 소련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경쟁력 확보의 일환이였다. 실력 있는 밴드들 몇몇이 해외 공연을 나가기도 한다. 이중 크루이스는 첫 선봉으로 보면 된다.[26] 당시 증언에 따르면 2차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일어난 마냥 개판이였다고 한다. 대체 어떻게 만든지도 모르는 폭발물도 던졌다고.[27] 정확하게는 2집은 노어판과 영어판으로 나뉘며, 크루이스(Kruiz)와 Iron Rock으로 내놓은 버전이 존재한다. 둘다 서독에서 출판. 러시아판은 불법판으로 돌다가 2000년대 들어서야 공식으로 재발매된다.[28] 해빙 분위기와 함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많은 러시아의 락 밴드들이 자신의 음악을 해외에 알리고자 자신의 노래를 영어로 번안해 발표하는 등 해외 활동을 추구했다. 해외 공연의 경우는 일정 반향을 이끌어내기도 했으나 앨범 발매는 빈말로도 좋은 결과를 이끌지는 못했다. 키노의 Blood Type 번안, 아크바리움의 Radio Silence 앨범, 마스테르의 Talk of the Devil 앨범 등이 그 사례. 유일하게 성공했다고 할 수 있는게 MTV에 진출한 고르키 파크(파르크 고리코보)의 노래 Bang!인데 이마저도 냉전의 끝과 함께 SNL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29] 이때 서독 사람들은 처음에는 얘내 그냥 컨셉만 소련놈이지 사실 서방 밴드 아니냐고 오해를 했다 한다.[30] 쵸르니 오벨리스크의 리더, 이때 샤에서 몇년 뛰다가 소련으로 복귀해 쵸르니 오벨리스크를 다시 조직해서 활동한다.[31] 얼마나 상황이 나빴냐면, 살던 동네에 폭발음이 계속 들리고, 집에 강도가 든 적도 있고, 자신이 보유하고 있던 라이브 녹화본들도 다 털어가버렸다고.[32] 그러나 이듬해인 2002년 V2가 공중분해 되면서 양준일과 마찬가지로 가이나 또한 근황을 알 수 없었으나, 양준일이 슈가맨 3 이후 20여년만에 가수 활동을 재개하면서부터는 아내인 얼마 자우버(Irma Zauber)와 양준일의 음반 작업을 함께 하고 있다.[33] 사리체프도 거의 동일한 시기에 이민을 왔다. 소련이 개판나는 걸 보면서 여긴 답이 없다 생각한 모양.[34] 재미나게도, 90년대 당시에 쵸르니 코페도 혼란과 야만에 사로잡힌 소련과 러시아을 피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35] 현재도 "마트베이 아나치킨의 크루이스"(Группа КРУИЗ Матвея Аничкин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소련 당국에 해체되기 이전에 부른 1집 및 2집 노래만 가지고 우려먹고 있는 수준이긴 하지만. 2021년에는 옛 노래들을 다시 커버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36] 유명 정교회 인사인 알렉산드르 멘의 아들.[37] 사실상 1986년 3인조 결성 이후로 크루이스는 가이나/예피모프/바실리예프의 공동 운영이 되고 있었고 아니치킨은 사실상 영향력이 없는 독립적인 밴드였다.[38] 실제로, 표도르와 가이나는 초대받아 구 크루이스에 세션으로 참가했다. 이후로 불거진 문제 때문에 가이나는 빠져버렸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