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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5:53:13

중세/정치사/전기/브리튼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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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브리튼섬
2.1. 잉글랜드
2.1.1. 이교도 대군세 이전까지의 게르만족들의 칠왕국2.1.2. 웨일스를 제외한 브리튼 내의 로만 브리튼인들의 세력들
2.1.2.1. 둠노니아2.1.2.2. 옛 북부
2.1.3. 이교도 대군세
2.1.3.1. 데인로2.1.3.2. 웨식스를 제외한 머시아, 노섬브리아(밤버러 일대)(데인로 이후) 일대2.1.3.3. 웨식스→잉글랜드 왕국2.1.3.4. 잉글랜드에 남은 로만 브리튼계 국가들
2.2. 웨일스
2.2.1. 포위스2.2.2. 궨트2.2.3. 귀네드2.2.4. 데헤이바쓰2.2.5. 롱 구이 아 하브렌2.2.6. 기타 소왕국들
2.3. 스코틀랜드
3. 아일랜드

1. 개요

4~5세기경 이민족이 국경 전역을 강타하자 국력이 급속도로 감소한 로마 제국속주의 군대들을 전부 소집해 제국을 방어하고자 했다. 일부 군대가 남아 있었지만 407년 콘스탄티누스 3세가 황제를 참칭하며 브리타니아 주둔군을 이끌고 갈리아를 침공했고, 그곳에서 전멸하는 바람에 본토는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410년 서로마 황제 호노리우스가 브리타니아로 편지를 보내 스스로를 지키라고 명령하며 로마 제국은 브리타니아 속주에서 전격적으로 철수되었다.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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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인 픽트족
브리튼인
(로만 브리튼)


이에 남아 있던 로마인과 로마화된 켈트족들인 로만 브리튼들은 현재의 스코틀랜드에 거주하던 픽트족들의 침략에 노출되었다. 결국 446년에 브리튼인들의 지도자 보티건(Vortigern, 왕이라는 뜻에서 유래)은 색슨족을 용병으로 불렀는데 주트족 이주민들은 처음에는 브리튼인들과 함께했지만 꾸준히 브리타니아의 항구들을 확보해나가는 등 점차 더 많은 토지와 재물을 요구하면서 분쟁이 일어났다. 수도자 길다스(Gildas), 넨니우스(Nennius)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건은 색슨족의 족장 헹기스트(Hengist)와 호르사(Horsa) 형제와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헹기스트의 딸 로웨나(Rowena)와 결혼했으나 헹기스트 형제가 보티건을 배신하여 잔치 자리에서 참석한 브리튼인 귀족 전원을 학살했고 보티건의 왕권을 강탈, 켄트 왕국을 세웠다.

보티건의 아들들인 보티머(Vortimer)와 카티건(Catigern)이 맞서 싸워 호르사를 죽였으나 이들도 결국 헹기스트와 로웨나에게 살해당해서 브리튼인은 색슨족에게 복속되었다. 이후 색슨족에 이은 앵글족, 유트족의 공격으로 수많은 브리튼인들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430년 전후에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Ambrosius Aurelianus)라는 지도자의 지도 하에 브리튼인은 한 세대 정도 앵글로색슨족의 침공에서 버티다가 물러났는데, 이 시대를 배경으로 생겨난 전설이 바로 아서 왕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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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세기 브리튼어 화자들의 이주

그러나 그 잠깐의 승리 이후 결국 브리튼인들은 스코틀랜드, 웨일스, 콘월, 그리고 바다 건너편의 브르타뉴로 밀려나야 했으며, 이후 켄트 왕국만이 잉글랜드 남동부에 자리잡았고,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476년까지 있었으나 이후 477년에 그 빈자리로 그리고 뒤이어 같은 게르만계 민족인 앵글족, 색슨족, 프리지아족 등 게르만 대병력이 자신들의 가족들을 데리고 와 비집고 들어왔다. 477년 색슨족의 서식스를 시작으로 519년 웨식스, 521년에 앵글로족의 머시아, 527년 미들색슨족의 에식스, 571년 앵글로족의 동앵글리아와 마지막으로 653년에 노섬브리아를 세우는 등 잉글랜드 곳곳에 자신들의 왕국을 건국해 로마 제국의 보호가 없는 브리튼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2. 브리튼섬

2.1. 잉글랜드

2.1.1. 이교도 대군세 이전까지의 게르만족들의 칠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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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왕국의 통상적인 강역도

잉글랜드의 경우 5세기경 초인 410년 로마군이 철수한 후 북쪽의 픽트족의 침공이 두려워 나머지 트족 용병 대장 헹기스트, 호르사 형제를 고용해 함께 침략자들과 맞서 싸웠으나 곧 주트인들이 비옥한 땅 브리튼 섬을 탐내게 되어 본토 북해 연안 일대에서 대군을 호출해 본격적인 정복 전쟁을 펼쳤다.

주트린들은 겐트 지방에 켄트 왕국을 세웠고, 이후 같은 게르만계 민족인 색슨족, 프리지아족, 앵글족도 이 정복 활동에 동참해 나가, 섹슨족들은 엘레를 왕으로 하는 서식스를 건국했고,뒤이어 체르디치를 국왕으로 하는 웨식스, 애셀와인을 국왕으로 하는 에식스 등을 건국한다. 앵글로족은 뒤늦게 이겔을 왕으로 하는 머시아의 건국을 시작으로 6세기 중반 위하 왕이 동앵글리아를 마지막으로 노섬브리아가 건국이 되면서 칠왕국이 성립되었고, 한편으로 제일 강력한 세력들이 앵글족과 색슨족이었기에 앵글로색슨 시대로도 불리고 있다.

7왕국 초기는 당대 기록이 없어서 형성 과정이 명확하지 않으며 이들의 경계도 서서히 생겨났다. 잉글랜드인들은 대체로 서로를 정복하기보다는 가장 강력한 왕에게 복종하는 방식을 택했는데 가장 강력한 종주국 왕을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처럼 브리튼의 지배자라는 의미로 '브레트왈다'(brytenwalda)로 불렸다. 브레트왈다와 종주국은 나머지 왕국들을 명목상 종속국으로 삼았고, 각 왕국들에게 봉토를 수여하는 형태로 각 소왕(小王)들의 봉지를 인정해주는 대신 주종 관계를 유지했지만 브레트왕다의 자리는 대략 100년 단위로 번갈아가며 차지하는 국가가 바꿔져 갔다.

초창기인 5세기에는 남부 서식스로 초대왕인 서식스의 엘라가 최초의 브레트왈다로 언제 브레트왈다로 불렸는지는 불명이다. 다만 해당 낱말 자체가 9세기 후반에 쓰인 웨식스의 여러 역사서들, 즉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처음 등장하는 용어이다. 5~9세기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7왕국의 지배자들 중 다른 앵글로색슨 왕들을 압도하는 권력을 가진 브리튼(잉글랜드)의 패왕(覇王), 대군주들을 역사가들이 선정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한마디로 춘추전국시대의 주도권을 쥔 5명의 군주를 뜻하는 단어인 춘추오패와 비슷한 용어로, 엄밀히 말하면 직위가 아니다. 정작 7왕국의 각축이 한창이던 5~8세기의 앵글로색슨 군주들이 이 용어를 썼다는 증거는 없다. 브레트왈다 목록 작성의 원조가 되는 8세기의 인물인 성 베다(Bēda)도 브레트왈다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다.

역대 브레트왈다의 목록에는 7세기 이전까지 남부 제(諸), 7세기 후반에는 북부의 노섬브리아가 잉글랜드의 패권을 차지했다는 점이 반영되어 있다. 단, 8세기에서 9세기 초반까지는 중부의 머시아가 패권을 장악했지만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는 머시아 군주들이 브레트왈다로 평가받지 못한다. 머시아는 웨식스의 숙적이었으므로 웨식스의 관점에서 작성된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저자들은 머시아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9세기 말 남서부 웨식스가 데인족들의 점령지들을 탈환하고, 머시아를 합병하는 등 최종 승리를 거두어 브레트왈다 목록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게르만족들의 칠왕국의 정치 구조는 마지막으로 건국된 노섬브리아가 세워진 7세기 중엽을 기준으로 형성제 사회를 보면 대강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사회는 가장 큰 단위인 왕국을 지배하는 왕(대군주)와 그 하위 지역을 지배하는 귀족(earldorman이라고 불림) 또는 독립적으로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부족 지도자가 있었고, 그 밑에는 자유민(ceorl)과 노예로 구분되었다. 자유민은 앵글로색슨인 평민들로 구성되었고, 노예는 절대다수가 로만 브리튼인들의 후손들로, 이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데인인의 침공으로 사회가 초토화되기 이전까지 매우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상인이나 수도자와 같이 이에 속하지 않는 계급들은 왕의 보호를 받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체올(ceorl)이라 부르는 자유민은 기본적으로 게르만 부족사회에서 유래한 것으로, 후스카를처럼 한 개의 대가족의 수장이었으며, 그의 가문과 그에 속한 가문원들은 가장(자유민)에게 속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들은 필요할 때 자체적으로 무장하였으며, 왕국의 법의 적용을 받았다. 물론 재판을 걸 수도 있었다.

반면, 농지를 경영하는 농부들은 이런 체올들과는 별개로 여겨졌는데, 앵글로색슨의 토지는 내야-외야 토지로 구분되었으며 농부들은 대게 외야 토지를 경영했다. 그들은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가졌으며, 대군주(왕)에게 지대와 몇몇 의무들을 지불, 또는 수행하여야 했다. 농부들은 이를 통해 자신이 속한 친족 및 문화적 집단 내에서 유대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 다음으로는, 이들과 별개로 각 왕국들 내에서 자치를 유지하는 부족들이 7왕국을 통틀어 35개 존재했다. 이들은 Tribal Hidage라고 불렸는데, Hidage는 하이드세를 뜻하는 단어로 토지 1하이드(Hide) 단위로 왕에게 바치는 세금을 뜻한다. 이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각 왕국별로 이들 부족들의 영토와 부족원의 수를 측정하고 세금을 매기기 위해 1하이드 단위로 쟀기 때문이다. 이 각 부족들의 족장들은 자신들이 통치하는 지역에 있어서 왕가가 통치하는 지역과 동등하게 여겨졌으며, 공물이나 세금도 따로 냈다. 이 부족들 대부분은 6세기에서 늦어도 7세기까지는 각 왕국들에 통합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앵글로색슨인이었지만 예외적으로 브리튼 부족들이 그대로 자치권을 인정받은 경우도 있었다. 한편 이 Tribal Hidage에 속하지 않는 반독립적인 부족들도 존재했다. 이 부족들은 Tribal Hidage에 포함되기에는 너무 크지만 그렇다고 독립적인 왕국을 이루기에는 애매한 부족들로, 때때로 그들이 속한 왕국이 혼란에 빠지거나 힘이 약해졌을 때 왕을 자칭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머시아 동남부 동앵글리아국경에 인접한 중앵글족(Middle algles)이나 동앵글리아의 귀르워스(Gyrwas)족, 서식스의 해스팅가스 또는 하에스팅가스(Haestingas)족 등이 있다.

중앵글족은 머시아와 동앵글리아 국경에 끼인 앵글족들을 이르는 말로, 이들 이외에 밑에 남앵글족(South Angles)나 북쪽에 북앵글족(North Angles)도 있었으나 이들은 독립적인 단위를 이루지 못하고 소멸했다. 중앵글족 역시 독립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7세기 머시아의 펜다 왕 통치 기간에 머시아에 병합되었으나 이후로도 머시아의 일부가 아니라 독립적인 영토 단위로 간주되어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으며, 교회 교구도 따로 설치되었다. 한때는 머시아 교구와 중앵글리아 교구가 동등한 단위로 주교를 각기 임명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늦어도 8세기까지는 독자의식이 희미해지고 머시아의 일부로 완전히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귀르워스족은 앵글로색슨족이 주변에 가득한 상황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로만 브리튼계 부족으로, 어떻게 살아남았냐면, 그들이 사는 지역은 현재 케임브리지셔 구역과 정확하지는 않으나 얼추 일치하는데, 당시는 이곳이 육지가 아니라 늪지대였다. 앵글인들은 굳이 그 지역까지 진입하는 것을 꺼렸기에 브리튼계이면서도 거의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앵글로색슨어로 Gyr는 깊은 늪지대라는 뜻으로, 깊은 늪지대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들 부족은 각각 머시아와 동앵글리아에 분할 점령되었다.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하에스팅가스족은 오늘날 헤이스팅스 지명의 어원이 된 부족으로, 바로 그 유명한 헤이스팅스 전투가 그들이 사는 영역에서 발발했다. 하에스팅가스라는 이름은 하에스타라는 족장의 부족이라는 뜻이다. 한때 이들이 프랑크족이라는 가설이 제안되었으나 현재는 켄트 왕국의 주트족과 동계라고 본다. 6세기 또는 늦어도 7세기에는 정착했으며, 686년 켄트가 웨식스에게 국경지대 영토를 할양했을 때 이들도 웨식스령으로 넘어갔으나, 771년 머시아의 오파 대왕이 에식스, 켄트, 서식스, 웨식스를 개발살 내놨을 때 이들도 오파에 맞섰으나 대패하고 이후로는 서식스에게 귀속되었다. 이들은 무려 11세기까지 독자성을 유지했다고 한다. 참고로 7세기 말~8세기 초에 켄트와 서식스가 모두 개판일 때 거의 완전한 독립을 누렸는지, 서식스에서 이 부족의 지도자를 '왕'이라고 자신들과 동등하게 언급하는 서신이 존재한다.

앵글로색슨 사회에서 엘리트적인 귀족 가문의 존재는 상당히 중요했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내 패자를 뜻하는 브레트왈다는 본래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의 지도자를 부르던 명칭이라고 하며, 이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지역 게르만 부족왕국들이 그랬듯 전쟁에서 싸우는 전사에 가까웠고 왕권의 기반 또한 전쟁이었다. 이들은 자신이 워딘(오딘)의 후손이라 주장하며 신화적인 가계를 만들어냄으로써 자신의 왕국에 속한 이들에 대해 '친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지배했다. 왕은 군대를 소집해 전쟁을 벌일 수 있었으나 대신 음식이나 숙소, 무기를 병사들에게 지원해주어야 했던 의무관계였다. 또 왕은 자유민들로부터 식량을 빌렸으며, 약탈에 나서 획득한 약탈품들을 통해 잉여가치를 만들어냈다.

한편 앵글로색슨족은 7세기를 기점으로 매장이 쇠퇴하고 무덤을 만들게 되는데, 동시에 무역을 위한 무역소들이 설치되고 약탈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물품들을 생산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소 또한 설치되었다. 그 결과로 이전에 약탈에 의존하던 시절보다 수지가 크게 개선되었고, 잉여생산물이 증대됨으로써 왕들은 무덤에 화려한 귀금속과 같은 것들을 같이 묻을 수 있게 되었다. 또 동시에 사회적 부의 재분배 또한 이전보다 크게 활발해져, 사회적 계층 형성이 뚜렷해지고 토지 및 영토에 대해 더 수월한 관리가 가능해졌다. 또 브레트왈다의 정의가 명확해지고 전체 앵글로색슨 권역이 단순한 regnum(왕국)들의 집합체가 아닌 하나의 imperium으로 이해되기 시작하면서, 각 왕국들 간의 정치적 역학관계도 변화했다. 머시아의 펜다나 오스위우, 오파 같은 왕들이 브레트왈다로서 주변국들에게 삥을 뜯고 내정에 간섭하며 사실상 속국으로 삼았던 행위들은 이러한 관념의 변화를 상징한다. 한편 오스위우는 북부의 픽트족이나 컴브리아인처럼 앵글로색슨의 권역에 포함되지 않는 부족들에 대해서도 통제를 시도했다. 이 시도는 결과적으로 실패했으나 훗날 전체 브리튼 섬을 통합한 단일 국가라는 관념이 이미 이 시기에 아주 미약하게 싹텄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경제적 발전의 결과로 독립을 누리던 부족들이나 군소 왕국들은 서서히 더 큰 왕국들에게 통합되었고, 최종적으로 9세기 즈음에는 잉글랜드를 통틀어 5개의 나라만이 멀쩡히 독립을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는, 단순히 사회적인 변화를 통해 군사적으로 정복함으로써 영토를 단순히 확장하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베오울프 서사시에서 표징되는 것처럼 더 강한 세력을 가진 왕이 더 약한 세력을 가진 부족/소왕국들을 '보호'한다는 관념에 가까웠다. 위에서도 설명했듯 7왕국에는 여러 부족들이 자치와 명예를 누렸고, 이들은 왕국에 종속된 것이 아닌 보호를 받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물론 서서히 왕국 그 자체에 통합되어 이런 의미가 퇴색된 경우가 상당수이기는 하나, 서식스 왕국의 경우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서식스는 멸망할 때까지 합병한 부족들의 자치와 권역을 그대로 보존했기 때문이다.

한편, 색슨족에게는 '위태나게모트'라고 불리는 독자적인 의회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 이것의 본질적인 역할은 왕에 대한 조언 정도였지만, 이들은 실제로는 더 강력한 영향을 발휘해 토지 소유나 전쟁, 교회 문제 등 더 복잡한 사안을 처리했으며 때때로 웨식스의 경우처럼 왕위 승계에 관여하기도 했다. 한편 서식스 같은 경우는 고대 게르만족의 고유한 의회였던 '팅그'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초반에는 이들은 불과 수백 명 단위가 간편한 장소에 모여 회의하는 것에 불과했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점 이들의 위상이 올라가 지방행정조직 간의 정기적인 만남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 법원의 역할도 수행했다.

한편, 9세기에는 최초로 '사제', '전사', '노동자(농민)'으로 구성된 세 계급이 언급되었다. 이는 왕이 자신의 통치를 펼치기 위해 이 세 계급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에서 나온 것으로, 이에 따르면 이 세 계급의 협조를 얻지 못하는 왕은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없었다. 또 바이킹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알프레드 대왕은 왕국의 방어에 대한 책임을 다한다는 명분을 들어 이 세 계급이 통치에 협조해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는데, 그는 이를 통해 단순히 자신의 통치권을 정당화하는 데에서 멈추지 않고 지주나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들을 적극적으로 회수하였다. 이전까지 토지 증여는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되었으나, 이제는 영구적인 소유권 이전을 의미했다. 그는 이 토지를 교회에 증여했고, 이를 통해 교회의 권위를 확립함과 동시에 새로운 형태의 토지 소유를 퍼트렸다. 또, 이러한 개념의 도입은 토지의 세습을 정당화했으며, 곧 그 토지에 부속된 작위의 세습까지도 인정되었다. 이전 앵글로색슨 시대에는 대륙의 백작에 해당하는 지방행정관 earldorman은 세습되는 작위가 아니었으나, 이제는 세습되는 대륙식 백작 또는 공작과 유사해졌다. 이로써 고전적인 부족적 전통에 기반해 있던 앵글로색슨 왕국들은 봉건제기독교에 기반한 중세적 국가로 재편되었다.

다만 편의상 칠왕국이라고 부르지만 동시에 건국된 것도 아닐뿐더러 또한 일곱 왕국만 있던 것이 아니라 위흐트아라, 메온와라, 서리, 린데세게,흐위체, 마곤새테, 펜케르새테, 팬츠새테, 우레오첸새테, 톰새테, 헤이스팅가스, 기르와스, 사우섬브리아와 같은 소왕국들이 존재했으며, 왕국 수준은 아니지만 여러개의 군장 국가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2.1.1.1. 켄트
켄트 왕국의 영토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 헹기스트는 생존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의 476년 이후의 행적을 다룬 연대기들 마다 그의 죽음을 달리 서술하고 있다. 앵글로색슨의 입장을 반영한 <잉글랜드 교회사>와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선 그의 죽음이 기록되지 않고, 473년 로만 브리튼으로부터 승전했다는 것 밖에 없는 반면 로만 브리튼의 입장을 반영한 <브리튼의 역사>,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경우 브리튼인들과 싸우다 죽었다고 하는데, <브리튼의 역사>에서 브리튼인들이 성 게르마누스를 사령관으로 세우자 성 게르마누스가 보티간 성에서 3일 저녁 기도를 바쳤다. 그러자 하늘에서 불길이 떨어지고 성을 삼켜, 보티건이나 헨기스트의 딸, 그 외 많은 아내들과 거주자를 소사시켰다고 하고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는 암브로시우스 아우넬리아누스가 지휘한 브리튼 군대에게 붙잡혀 처형되었고, 그의 손자인 옥타와 에오사는 아우렐리우스에 항복하고, 스코틀랜드와의 국경 근처의 토지를 주어져, 아우렐리우스와 계약을 맺었다고 하는데, 켄트 왕국의 위치가 잉글랜드 동남부에 위치했던 만큼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내용은 오류이기는 하지만 헹기스트는 488년 사망했는데, 477년 원래 땅에서 부대끼며 살고 있던 색슨족의 일파가 족장인 엘라와 세 아들인 퀴멘(Cymen), 울렌킹(Wlenking), 치사(Cissa)와 함께 세 척의 배를 이끌고 퀴멘소라(Cymensora), 즉 지금의 웨스트 서식스의 셀시(Selsey) 해안에 상륙했다. 부자가 켈트 브리튼 인들을 죽이자 원주민들은 Andred's leag이라 불리는 숲으로 달아났고, 엘라는 서식스를 건국한다.

488년 헹기스가 죽자 그의 아들인 오이스크가 켄트의 다음 왕이 되었다. 512/516년 동안 통치한 것 외에 오이스크의 대한 기록은 알려진 것이 없으며, 오이스트가 죽자 그의 아들인 옥타가 뒤를 잇는다. <브리타니아 열왕사>에서 조부인 헹기스트가 죽자 암브로시우스에게 함복해 스코틀랜드와의 국경 근처의 토지를 얻은 것과는 달리 옥타는 친척인 에오사와 함께 암브레시우스가 이끄는 브리튼인들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으나 옥타는 색슨족이 아우렐리우스의 가신으로 브리튼 북부에 머물 것을 인정하는 휴전 협정을 협상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우스의 사후, 옥타와 에오사는 조약에 구속력이 없어진 것으로 간주하여 그의 동생 우서 펜드래곤과 교전을 재개한다.

새로운 브리튼인의 왕인 유서 펜드래곤은 군대를 이끌고 야습으로 옥타와 에오사가 이끌던 켄트 왕국군을 패주시킨다. 옥타와 에오사는 포로가 되지만 결국 탈주하여 독일로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군대를 고용한 후 대군을 이끌고 534/540년에 귀환하고, 유서는 다시 그들과 싸우고, 옥타와 에오사는 마침내 죽게 되었고, 옥타의 아들로 추정되는 에오멘릭이 뒤를 잇는다. 589년까지 통치한 것까지 외엔 치적이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애델베르흐트[1]가 켄트의 새로운 왕이 되었다.

시기 미상이나 애델베르흐트는 왕자 시절 파리-프랑크 왕국을 통치하고 있던 카리베르 1세의 딸 베르타를 왕비로 맞아 당대 서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동맹을 구축했다. 이당시만 하더라도 켄트 왕국은 게르만족 토착 신앙을 갖고 있었지만 동맹인 프랑크인들은 이미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고 베르타도 마찬가지였다. 베르타의 영향력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Cantuariensis)를 켄트 왕국으로 파견해 가톨릭 포교를 시작했고, 국왕 애델베르흐트는 아내의 조언인지 아우구스티누스가 세니트섬에 도착하자 마자 개종하였고, 주트족 대부분이 왕을 따라 개종했다. 애델베르흐트는 자기 왕국의 수도 캔터베리에 새 교회를 지어 주었는데, 이것이 먼 훗날 영국국교회의 아성이 되는 캔터베리 대성당이 되었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면서 켄트 왕국은 기독교 국가로 발전시켰다.

또한 애델베르흐트의 치세에 각종 벌금제도를 규정한 에설버트 법전이 편찬되었는데, 이것은 게르만어파 언어로 쓰여진 법률서로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후대의 머시아오파와 웨식스의 이네 또한 애델베르흐트의 법전을 참고한 자신들만의 법전을 만들었다. 유럽 대륙과 가까웠던 켄트는 에설버트의 치세 하에 프랑크 왕국과의 교역으로 번영했다. 켄트와 프랑크 사이에는 사치품 무역이 있었고, 매장 유물에는 프랑크의 문화적 영향을 반영하는 의복, 음료, 무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켄트의 매장지는 인근 앵글로색슨 지역의 수입품보다 더 다양한 수입품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그 빈도가 큰 것으로 보이지만 문헌 등을 조사하면서 애델베르흐트는 귀족들이 사적으로 해외 교역을 하는 것을 통제하고, 왕실이 해외 교역을 주도하게끔 해 왕실 재정을 확보하는데 주력했는데, 켄트의 특산품은 유리 컵과 보석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류로 인해 앵글로색슨인의 브리타니아 정착 이래 처음으로 켄트에서 화폐가 다시 유통되기 시작했다.

애델베르흐트의 대외 정책의 시작은 604년 직후 조카인 에섹스의 세베르트를 굴복시켜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시킨 것이었고, 뒤이어 동앵글리아래드왈드 역시 애델베르흐트의 세력의 들어가 두카투스(ducatus), 즉 자신의 백성에 대한 군사 지휘권을 유지했으며, 레베르트와 래드왈드는 애델베르흐트가 살아 있는 동안 켄트에서 명목상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애델베르흐트의 치세 동안 켄트 왕국의 세력은 험버 강 남쪽의 잉글랜드 전역을 지배했고, 이후에는 현재의 서리(Surrey)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해 브레트왈다의 칭호를 받을 정도로 강성해졌지만 머시아와 노섬브리아, 웨섹스를 세력권에 넣는 것은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어재든 그의 치세동안 켄트는 잉글랜드에서 4번째로 부유해졌다.

말년에 애델베르흐트는 자신의 아들인 애드볼드를 공동 왕으로 세웠다. 또한 왕비인 베르타가 사망하자 이름 불명의 여성과 재혼했다. 문제는 애드볼드가 부모와는 다르게 여전이 전통적인 이교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616년 애델베르흐트가 사망하자 애드볼드가 켄트의 단독왕이 되었다. 단독왕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애드볼드는 반기독교 정책과 함께 다시 이교신앙으로 회귀할 반동 정책을 실시하면서 자신의 계모와 결혼하려고 했다.

하지만 애드볼드의 종교 반동 정책은 얼마 가지 못했다. 베다에 따르면 애드볼드는 불신심 때문에 '빈번한 광기의 발작'과 '악령'의 빙의[2]로 고통을 받았고, 결국 619년쯤에 이교를 버리고 첫번째 왕비 즉 아버지의 후처와 이혼한다. 이후 624년까지 죽은 켄터베리의 2대 주교 멜리투스를 봉헌 교회를 세웠고, 3대 주교인 유스투스는 교황 보니파시오 5세에게 편지를 보내 애드볼드의 개종에 대해 보고한다.

이후 애드볼드는 두 번째 결혼으로 외가쪽 친척인 이메와 결혼한다. 이는 켄트와 프랑크 왕국의 강한 연결이 왕의 개종의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나아가 캔터베리의 선교사들이 프랑크인의 지원을 받고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 620년, 애드볼드의 여동생 에젤버그가 켄트에 왔지만, 아이들을 프랑크 왕국의 다고베르 1세의 궁정으로 보냈다. 외교상의 연결 외에도 프랑크인과의 무역은 켄트에게 중요했다. 프랑크인의 압력이 애델베르흐트를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도록 설득하는데 영향력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고, 애드볼드의 개종과 이메와의 결혼은 외교상의 결정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625년 노섬브리아의 전신인 데렌 왕국의 에아드위네에게 누이인 애설부르흐와 결혼하여 켄트와의 결혼동맹을 맺은 것과 자신의 자식들을 다른 왕국들의 왕족들과 혼인 시킨 것을 제외하면 아버지와 달리 브리튼 섬의 게르만족 국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브레트왈다의 칭호 또한 매부인 에아드위네에게로 넘어 갔다. 이후 640년 사망하고 켄트의 왕위는 아들인 에오센베르트가 물려 받는다.

베다(HE III.8)에 따르면, 에오센베르트는 이교의 "우상"을 파괴하고 사순절을 지키라고 명령한 최초의 앵글로 색슨 왕이었다. 이 명령은 애델베르흐트가 시작한 켄트의 법전의 전통에 따라 공식적으로 문서화되었을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러한 문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캔터베리 대주교 호놀리우스가 죽은 후, 에오르센베르트는 655년에 첫 색슨인 대주교 데우스 데디트를 임명했습니다.

에오르센베르트는 동앵글리아의 왕 안나의 딸, 엘리의 섹스부르가와 결혼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에그베르트와 할로테라는 두 아들이 있었고, 각각 켄트의 왕이 되었고, 두 딸은 결국 열성되었다. 성 에오르센 고타는 대륙의 팔렘티에 수도원의 수녀가 되었고, 성 에르메닐다는 이리의 여자 수도원장이 되었다. 664년 에오센베르트가 죽가 장남인 에그베르트가 켄트 왕위를 잇는다.

즉위할 당시 에그베르트는 아직 미성년자였기에 어머니인 섹스부르가가 섭정으로 통치했다. 성년이 된 후 친정을 하면서 에그베르트의 궁정은 로마 교황청과의 외교나 성직자와의 교류가 활발한 것 같다. 그는 윌프리드와 베네딕트 비스코프를 맞이했고, 갈리아로 여행을 떠나는 시오도어 대주교와 캔터베리의 아드리안 수도원장의 호위를 맡았다.

켄트 왕가의 전설의 다양한 버전에 따르면, 그는 고문인 투노르의 부추김으로 사촌인 에셀레드와 에셀벨트를 죽이고, 그 때문에 그들의 누이인 돔네이프에게 두사람의 핏값(Weregild)를 지불해야 했고, 그녀가 사넷에 수도원을 지을 수 있었다. 이것은 에오센베르트의 혈통을 가진 왕족들 싸움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살해당한 두 명의 왕자는 나중에 헌팅던셔의 람지 수도원에서 성인으로 숭배되었다. 칙허장에는 샐리의 처치 수도원의 수도원에 대한 에그베르트의 비호가 기록되어 있다.

673년 에그베르트가 사망했는데, 그의 자식들인 에아드리치와 위트래드가 어렸기에 들인 동생인 할로테가 켄트 왕위를 이어받는다. 676년 마시아 왕 에셀래드가 켄트에 침공하여 큰 파괴를 일으켰다. 베다에 따르면 교회와 수도원조차도 피해를 입었고 로체스터는 황폐했다. 피해가 컸기 때문에 로체스터 주교 푸타는 사임했으며 후임인 쿠위헬름도 주교구의 빈곤 때문에 사임했다.

그러나 할로테는 이 맹공격을 살아남았다. 할로테는 에그베르트 1세의 아들 조카 에아드리치이 장성한 후 공동으로 통치했으며, 시기 미상이나 두사람의 이름으로 기존의 애델베르흐트의 법전을 개정한 할로테와 에아드리치의 법전이 반포되었다. 반포된 법전으로 주로 살인과 관련된 보상 및 재산 상속과 부동산 취득에 대한 내용이 적혀져 있었다.

하지만 얼마안가 권력 다툼으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고, 685년 에아드리치는 서식스로 망명하고 서식스의 공동 국왕이자 사촌인 베르둔과 안둔의 원조를 받고 켄트를 공격해 숙부인 할로테와 싸워 이겼고, 할로테는 전쟁에서 입은 부상이 악화되어 얼마 안 가 사망했고, 에아드리치가 켄트의 단독왕이 되었다.

그러나 곧 웨식스의 패왕 캐드왈라의 공격으로 에아드리치는 축출되고, 캐드왈라의 동생 물(Mul)이 왕위를 차지한다.[3] 그러나 물의 통치는 1년도 못 가 켄트인들이 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고, 그와 그의 추종자들을 지역 교회 근처 건물로 달아났지만 반란군들이 그들이 숨은 장소에 불을 질려 태워 죽였다.

캐드왈라는 해당 봉기를 진압했으나 688년 돌연 퇴위하고, 로마로 순례를 떠났고, 이때 켄트의 왕위는 에식스 출신의 스웨프허드와 스웨프베르흐트, 그리고 켄트 왕실의 후손으로 보이는 오스와인이 공동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스웨프허드와 스웨프베르흐트는 켄트의 서부를 오스와인이 켄트 동부를 분할 통치했다. 689년 7월의 오스와인은 세인트 피터스 대성당과 하드리아누스 수도원장에게 켄트 주 리민의 왕궁에 속해 있던 철광석을 포함한 토지 1 술룽(아라트룸)을 준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치적에 대한 기록이 없었으며, 스웨프허드를 제외한 나머지 두 왕은 69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켄트의 다음왕으로 에아드리치의 동생인 위트래드가 켄트의 왕으로 즉위한다.

다만 그의 즉위 자체가 이전 왕들과의 권력 투쟁으로 얻은 것으로 보이는데, 베다에 따르면 위트래드의 즉위에 대해 그가 '정당한' 왕이자 '헌신과 근면함으로 나라를 외국 침략으로부터 해방했다'고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위트레드는 스웨프허드와 한동안 켄트를 공동으로 통치했다. 692년 7월 베오르트발트가 캔터베리 대주교에 선출되었다는 베다의 보고서에는 스웨프허드와 위트레드가 켄트의 왕이었다고 적혀 있지만 스웨프허드에 대해서는 이날 이후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694년까지 위트레드가 켄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것 같지만, 위트레드의 통치 중에 아들 에셀베르트가 서켄트의 소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위트레드에는 3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첫번째 아내는 쿠네시스에게 불렸다 그러나 696년의 헌장에서는 에셀버가 왕실의 배우자 및 재산의 공동 증여자로 나온다다. 이전 배우자는 단기간에 사망 또는 이혼했음을 여겨진다. 그의 통치가 끝나자 새로운 아내인 워버가 남편과 아들 알릭과 함께 증여자가 되었다.

위트레드가 웨식스의 왕 이네와 평화를 맺은 것도 694년이었습니다. 이네의 전왕 케드왈라는 켄트를 침공하여 동생인 물을 켄트의 왕에게 세웠지만, 그 후 켄트인이 반란을 일으켜 물을 태워 죽였다. 위트레드는 살해에 대한 보상에 동의했지만 이네에 지급된 금액은 알 수 없으며, 대개 3만 파운드 가량으로 추정되고 있다.

695년 기존의 할로테와 에아드리치의 법전을 개정했고, 새 법전은 주로 교회 내부와 교회에 대한 범죄, 교회의 권리와 절도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이후 725년 사망하기까지 별 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으며, 죽기 전 세아들인 알릭과 애드베르트, 애델베르흐트가 켄트를 공동으로 통치하게끔 했다.

알릭은 즉위한지 1년도 안되어 사망했고, 748년 애드베르트가 아들 에아드울프를 남기고 사망했고, 이후 애델베르흐트는 조카 에아드울프와 함께 켄트를 공동 통치했다가 762년 사망했다. 그러다가 764년 머시아의 오파(offa)가 켄트를 침공했고, 에아드울프는 오파에게 굴복했다. 764년에 Offa는 로체스터에 자신의 이름으로 토지를 부여했으며 에아드울프를 왕좌에서 축출한 후 애델베르흐트 2세의 아들 애드베르트 2세와 시거드란 인물을 명목상 켄트의 왕으로 임명하지만 얼마 못가 오파에 의해 퇴위되거나 죽었는지 이안문드가 켄트의 새로운 왕이 되었고, 이후 헤베르트에서 에그베르트에 이르기까지 22년간 머시아의 속국으로 있다가 에그베르트 2세가 머시아와 오파를 상대로 독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고, 머시아와 켄트의 군대는ㄴ 현재 켄트 주의 오트포트에서 격돌했다. 승장에 대한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켄트가 수년 동안 독립된 상태를 유지한 것으로 보아 켄트측의 승전으로 보고 있다. 이후 에그베르트 2세는 780년경까지 켄트의 왕으로 있다가 사망했다. 이후 애그베르트 2세가 사망하자 웨식스 출신인 에알흐문드가 켄트의 왕이 되었다. 이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친족이 없는 애그베르트가 부득이하게 웨식스 출신의 에알흐문드를 불려 공동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고 있거나 아니면 에알흐문드의 출신이 웨식스가 아닌 켄트로 보고 있다.

에알흐문드가 켄트의 합법적 계승자라는 사실은 784년 발행된 칙허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그의 통치는 1년을 넘기지 못했으며 머시아의 오파에 의해 축출되었고, 사제였던 애드베르흐트 3세를 환속시켜 켄트의 명목상 왕으로 세워졌으며, 오파는 796년 죽기 전까지 켄트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오파가 죽자 애드베르흐트는 머시아의 속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친머시아파인 캔터베리 대주교 애셀하트는 반란 중에 도망쳤다. 머시아의 쾬울프는 당시 영국의 교회 상황에 대해 교황 레오 3세와 서한을 주고 받았고, 그 과정에서 레오에게 머시아가 켄트를 정복하기 위해 애드베르흐트가 전직 사제였다고 밝혔고, 레오는 애드베르흐트를 파문하면서 머시아가 켄트를 정복하는 것에 대해 동의했다. 교황의 승인을 얻은 쾬울프는 켄트를 재정복했다. 그는 동생을 그 자리에 맡기고 798년에 애드베르흐트를 잡았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쾬울프는 "켄트를 정복한 후 왕인 애드베르흐트를 붙잡고 머시아로 데려갔다"고 말했다. 연대기 이후의 설명에서 애드베르흐트는 양손을 잘라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웬도버의 로저는 쾬울프의 자비로 어느 시점에서 애드베르흐트가 해방되었다고 추측했다.

이후 켄트는 완전히 머시아의 종속국으로 전락했다. 쾬울프의 동생으로 분국왕으로 임명된 커스레드는 통치 기간 동안 리치필드 대주교구는 803년 10월 12일 클로베쇼 공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캔터베리 대주교구는 머시아의 오파가 박탈하려고 했던 지위를 되찾았다. 커스레드의 통치 중에 바이킹에 의한 첫 습격도 일어났으며, 수도 켄터베리가 직접적인 공격을 받았다. 807년에 그가 죽은 후, 쾬울프가 직접적으로 켄트를 통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811년 켄트의 군대가 섀피 제도의 바이킹 요새를 공격했다.

한편 7~9세기 사이 켄트에서 유럽 본토의 문화와 기술 등이 들어왔다. 종교의 중심지, 교회를 포함한 대성당은 많은 자원과 무역의 연결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일반 거주지보다 훨씬 큰 경우가 많으며, 사넷 대성당은 3척의 무역선을 소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7세기에는 앵글로 색슨의 영국에서 석공이 재도입되어 주로 교회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가장 오래된 교회는 "켄트 그룹"이라고 불리며, 그 디자인은 이탈리아와 프랑크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 초기 예로는 캔터베리의 성 어거스틴 수도원을 비롯해 성 판크라스, 성 메리, 성 피터와 성 폴, 로체스터의 성 앤드류스, 리민지의 성 메리 등의 수도원들이 석조로 개축되었다.

7세기 후반에는 가장 오래된 칙허장이 등장했고, 영지의 경계를 나타내고, 원섬 해협과 롬니 습지에서 가축용 토지를 개척한 것을 나타냈다. 서부 켄트의 그레이브 센드 근처에 있는 에브스프리트 수차 오두막은 700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경관의 새로운 이용법을 반영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하지만 캔터베리는 7세기에 켄트의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도버와 로체스터에서도 대규모 개발이 이루어졌다. 캔터베리와 로체스터 모두 이 시대에 주요 조폐소가 있었고, 주로 은화를 제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7세기 이후 켄트의 왕이 왕국의 경제구조에 대한 지배를 확립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8세기부터 9세기까지 왕국 간의 잦은 전쟁으로 당대에 켄트 왕국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으로 토벽으로 된 요새화된 장벽들이 만들어졌으며, 특히 원즈다이크(Wansdyke)와 오파즈다이크(offa'sdyke)가 건설되었고, 이러한 군사화의 증거는 790년대에 문서화된 로체스터 다리의 부담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부담은 메드웨이 강에 걸리는 로마 다리를 유지할 의무가 규정되어 있으며, 켄트군이 강을 건너는 데 필수적이었다.

821년 쾬울프가 죽자 체올울프 1세, 베오른울프(Beornwulf)가 차례대로 켄트를 통치했는데, 베오른울프 시기에 발행된 켄트의 동전에 발드레드라는 이름으로 화폐가 발행된 것으로 볼 때 당시 머시아의 왕위 분쟁을 이용해 켄트 내에서 독립적인 화폐 발행권을 가지고 반자치적인 통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802년 오파에 의해 꼭두각시 왕으로 세워진 베오르흐트리치가 802년 사망하자 에알흐문드의 아들인 에그버트가 웨식스의 왕이 된 상태였다. 이후 20년 뒤인 826년 결국 머시아와 웨식스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고, 결국 머시아가 패배하자 켄트는 서식스와 함께 웨식스의 속국이 되었고, 발드레드 또한 에그버트가 부왕으로 파견한 그의 아들 애설울프에 의해 추방되었다. 그리고 839년 에그버트가 죽자 부왕이었던 애설울프가 웨식스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켄트를 아들 중 한명인 애설스탠[4]을 부왕으로 임명했다. 애설스탠은 켄트뿐만 아니라 에식스와 서식스 등을 통치했다.

851년 애설스탠과 엘더만 엘히레는 켄트주 샌드위치 앞바다에서 바이킹의 함대와 군대를 격파했고, 후대의 역사가인 프랭크 스텐턴은 이를 "기록에 남는 영국 사상 최초의 해전"이라고 평가했다. 에셀스탄은 851년 이후에는 언급되지 않았고, 아버지 부재 중에 왕국의 통치의 약정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에셀울프가 855년에 로마에 가기 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853년, 엘히레는 바이킹에 의한 켄트와 서리의 참패로 사망했지만, 애설스탠이 전투에 참가하고 있었다고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그 무렵에는 이미 사망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켄트의 통치는 조카 애설버트가 물려 받지만 웨식스 왕위를 물려받았던 형 애설볼드가 2년만인 860년에 사망했다. 본래 애설울프는 웨식스와 켄트를 분할 상속과 함께 영구적으로 양국을 분할하고자 했다. 하지만 애설볼드가 2년만에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급사하면서 애설울프의 계획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켄트에는 어떠한 분국왕 및 부왕 등을 따로 두지 않았기에 웨식스에 영구적으로 웨식스에 귀속되었다. 시간이 흘러 865년 애설버트가 후사없이 죽고 동생인 애설레드 1세가 즉위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노섬브리아의 왕 엘라 2세가 전설적인 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를 죽이자 스칸디나비아에 있던 그의 아들들인 이바르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이 그소식을 듣고는 이교도 대군세가 시작된 시기였다.
2.1.1.2. 서섹스
서식스의 영토

두번째로 건국된 브리튼섬의 서계르만계 왕국으로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후 1년 뒤인 477년 엘라라는 섹슨족 족장중 한명이 세 아들인 퀴멘(Cymen), 울렌킹(Wlenking), 치사(Cissa)와 함께 세 척의 배를 이끌고 퀴멘소라(Cymensora), 즉 지금의 웨스트 서식스의 셀시(Selsey) 해안에 상륙했다. 부자가 켈트 브리튼 인들을 죽이자 원주민들은 Andred's leag이라 불리는 숲으로 달아났다.

485년에 엘라는 Mercredesburne에서 브리튼인들과 싸웠다. 490년에 엘라와 그 아들 치사가 안드레드(Andred) 시[5]를 공격해서 그곳의 모든 자를 죽여 그곳에는 그 뒤로 브리튼인이 남지 않았다.

이후 엘라의 기록은 끊긴다. 그가 언제 죽었는지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헌팅든의 헨리(Henry of Huntingdon)라는 인물이 추측해서 남긴 바가 있다. 흥미롭게도 엘라의 행적이 사라진 때가 아서 왕의 등장 시기로 비정되는 무렵과 얼추 비슷하다. 따라서 아서 왕에게 엘라가 패배하여 죽었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아서 왕은 실존이 입증되지 않은 데다 실존 가능성이 높은 엘라조차도 기록이 매우 부실해서 진실은 저 너머에.[6]

8세기의 노섬브리아 수도자이자 역사가였던 성 베다(Bēda)는 엘라를 앵글로색슨족의 패왕 중 하나로 기록했다. 이는 후세에 이어져 엘라는 브레트왈다 중 하나로 평가받기에 이른다. 앵글로색슨족브리튼 섬에 대한 정복을 개시하던 초창기에 엘라가 그중 가장 세력이 컸거나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라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부족해서 가상인물이라는 의혹을 받았으나 고고학적 발굴 결과 5세기에 서식스 지역에서 이후 머시아가 세워지는 지역 바로 턱밑까지[7] 단기적인 확장이 일어났다는 것이 증명되면서 그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고고학적 조사 결과 앵글로색슨 연대기를 비롯해 서식스의 역사를 기록한 중세 앵글로색슨 연대기들이 주장한 477년 건국설은 근거가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으며, 최근에는 고고학적 조사 결과 5세기 초반에 건국되었다는 설이 떠오르고 있다. 이게 사실이라면 켄트 왕국보다도 이른 최초의 앵글로색슨 왕국인 셈이다. 고고학적 조사 결과 서식스 동부 지역에서 우즈 강 근처에 5세기 초의 색슨족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이게 5세기 초의 무덤인 이유는, 부장품에서 로마 동전과 로마식 공예품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서식스 지역의 5세기 앵글로색슨 정착지는 이것이 유일하며, 만약 서식스가 5세기에 건국된 것이 맞다면 이것이 초기 서식스 시대의 유적일 수밖에 없다. 한편, 위에 나온 대로 또 다른 고고학적 증거들은 서식스의 엘라가 실존인물이며, 잉글랜드 남부를 단기간에 재페하고 브레트왈다, 그것도 초대로서 군림했다는 것이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다만 491년부터 기록이 아예 없는 걸 보면 그리 오래가진 못한 듯하다.

514년쯤에 엘라가 죽고 아들들 중 한 명인 치사가 서식스의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제는 치사가 567년까지 왕위에 있었다는 것 외에는 491년에서부터 607년까지 어떠한 역사적 기록도 남아있지 않다. 이 시대의 절반 정도는 ‘바돈 산의 전투’로 알려진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족의 격돌 결과 앵글로색슨이 대패하여 더이상 브리튼 섬 내륙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평화가 유지되었던 시대인데, 이 바돈 산의 전투가 일어난 날짜를 보통 5세기 말로 추정하는 걸 고려해 엘레가 바돈 산의 전투에서 앵글로색슨족을 이끌었고 대패하는 바람에 향후 약 100년간 암흑기를 맞은 게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다만 이를 격하게 부정하는 학자들도 아직 많은지라 단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607년 웨식스의 체올울프(Ceolwulf)가 서식스를 위협하자 머시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은 7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는데, 660년경에 에델웨알흐(Æthelwealh)가 연대기상 기록에 등장하게 되었다. 이당시 웨식스는 햄프셔 남부와 와이트 섬까지 세력을 확장한 상태였기에 서식스는 머시아와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노섬브리아에서 성 윌프리드(Wilfrith)가 방문해 기독교를 설파했다고 전해지며, 에델웨알흐 또한 켄트 국왕인 애델베르흐트 다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673/4 에델웨알흐는 켄트의 왕권 분쟁에 개입했는데, 당시 켄트는 할로테와 그의 조카이자 전국왕의 장남인 에아드리치가 공동으로 통치했으나 얼마 안가 둘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자 에아드리치가 서식스로 망명했고, 이에 에델웨알흐는 에아드리치를 앞세워 켄트를 공격할 준비를 하지만 685년 서식스를 침공한 웨식스의 왕자 캐드왈라에게 살해당했다.

캐드왈라는 애드울프와 애드왈드라는 인물들을 앞세워 서식스를 지배하려고 했으나 서식스의 엘더만이었던 베르둔(Berthun)과 안둔(Andhun)에 의해 웨식스로 물려나야 했고, 이후 베르둔과 안둔이 공동 왕으로서 서식스 왕국을 다스렸다. 이들은 에델웨알흐가 시행하지 못한 계획에 따라 686년 켄트 왕국을 침공해 왕위 계승권자인 사촌 에아드리치(Eadric)를 왕위에 올렸다.

하지만 에아드리치의 통치는 곧 울프헤레(Wulfhere)의 머시아가 급성장함으로 끝났다. 이때문에 북쪽으로 영토 확장을 하지 못하던 웨식스는 둠노니아와 켄트를 대신 정벌했고, 웨식스의 왕 캐드왈라(Cædwalla)의 침공으로 켄트의 에아드리치가 축출당했다.[8] 캐드왈라는 이어서 서식스까지 침공해 베르둔과 안둔이 전사했고, 서식스는 웨식스에 합병당했다. 캐드왈라는 성 윌프리드를 불려들어 자신의 고문으로 임명했고, 686년 셀시(Selsey) 교구는 인체스터에 있는 웨식스 교구에 흡수되었다. 서식스는 현세적인 문제에서는 웨식스 왕들의 지배를 받았고, 교회적인 문제에서는 윈체스터 주교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강제 통합당한 서식스는 오랜 세월 동안 웨식스에 의해 강제 노역에 부려지는 등 착취를 당했다. 그러던 와중 710년 웨식스의 군주 이네(Ine)가 서쪽의 둠노니아(Dumnonia)로 원정을 떠났을 때 서식스는 노드헬름(Nothhelm) 왕을 옹립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722년 웨식스의 군대가 침공했지만 4년간의 전쟁 끝에 서식스는 완전히 독립했다.

하지만 서식스의 왕권은 분열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692년에 노드헬름으로부터 영토를 나타내는 기재가 없는 칙허장에 와트라는 이름의 또다른 왕의 이름이 서명하고 있었고, 와트 역시 서섹스 엘더만 브루니가 세르지 수도원장 이드바트에게 4 하이드를 주는 칙허장에 서명했다. 이 칙허장에는 날짜의 기재가 없지만, 이드바트가 705년 또는 그 조금 후에 주교로 임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이 칙허장은 705년 또는 그 조금 전에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와트는 노드헬름과 함께 칙허장의 증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한편으로 와트가 헤이스팅가스의 왕이라는 추측이 있기도 한다. 한편 상술한 엘더만 브리니 또한 왕은 아니었지만 노드헬름, 와트와 함께 공동으로 서식스를 지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700년경에 와트와 브리니가 죽고 710년경에 오스릭이 노드헬름과 공동으로 서식스를 통치했고, 714년 노드헬름이 죽었는데, 죽기 전에 남긴 헌장에 또다른 공동 통치자로서 애설스탄이란 인물이 등장하는 등 서식스는 단일 왕권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다.이후 740년까지 서식스의 통치자의 이름과 치적에 대해선 기록이 단절되다가 애설버트라는 이름의 왕이 등장한 것 외엔 별다른 정치적 상황이 언급되지 않았다. 이후 760년경에 오스문트, 오스라크, 앨프발트, 엘드울프, 그리고 시기 미상이나 오스왈드가 차례대로 서식스의 왕위에 올랐는데, 문제는 이들 다섯 모두 공동왕이었던 상태였다.

그러다가 771년에는 머시아의 오파가 헤이스팅가스를 정복했다. 오파는 이미 지배했던 켄트 왕국에서 서식스에 침공했던 것으로 보이며, 서섹스 왕국 전체를 정복한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오파는 또한 에델베르트의 두 칙허장을 확인했고, 772년에는 서섹스 엘더만으로 강등된 오스왈드를 필두로 오스문드, 엘프발트, 오스라크 등을 증인으로 서섹스를 자신의 토지로 선포하고 서섹스 왕국을 병합했다.

오파는 776년부터 785년에 걸쳐 지배를 유지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후 지배권을 되찾은 것 같다. 796년에 오파가 사망한 후, 서식스를 지배하고 있던 마시아인 귀족들의 세력은 약화되었고, 남색슨인은 독립된 정치적 존재로서 다시 나타났으나 오파가 죽은 이후 머시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796년 서식스는 왕국 내의 머시아 세력을 축출하고 독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825년 웨식스의 에그버트가 정복전쟁을 펼쳤고, 머시아를 쓰러뜨린 후 곧바로 서식스를 굴복시켰다. 그 후 서식스는 백작령으로 남아 있었으나 860년경에는 완전히 통합되어 사라지게 되었다.
2.1.1.3. 에식스
에식스 왕국의 영토

527년 에스크와인이라는 동색슨족의 부족장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하며, 이후 주변의 군소 부족이나 왕국들을 잡아먹으며 성장하다 현재의 영국의 수도인 런던 일대의 현 미들섹스 주에 살던 미들색슨족을 복속시키고 국경을 완성했다.

앵글로색슨 7왕국 중 압도적으로 공기 비중에 역사 기록도 부족한 나라로, 물론 서식스마냥 100년간의 역사기록이 통째로 날라가는 대참사는 없으나 기록이 매우 불완전하고 훼손이 심하며, 심지어 나라의 시조조차 기록마다 다르다. 앞서 527년 에스크와인이라는 동색슨족 부족장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했는데, 그건 9세기에 웨식스가 편찬한 정사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나온 기준이고, 다른 기록에는 584년(추정)에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 에스크와인의 아들로 비정된 슬레드라는 왕이 건국했다고 되어있는 곳도 있다.

심지어 527년이라는 숫자조차 기록마다 달라서 추정치이다. 그런데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기록이 뻥일 가능성이 높은 게, 에식스 왕들은 앵글로색슨 연대기가 시조라고 주장하는 애스크위네(AEscwine) 이외에는 죄다 S로 시작하는 것이 특징이며, 왕 이외의 인명에도 S로 시작하는 인명이 많다. 게다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는 애스크위네가 584년까지 60년간 재위했고 다음 왕이 슬레드라고 되어있는데, 슬레드는 아버지가 60년간 재위해고도 이후 20년간 재위했으니 이건 뭐…

어째든 영문 위키백과에서 슬레드가 604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세베르트가 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604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파견한 그레고리오 선교사들 중 한명인 멜리투스가 런던에 도착한 후 선교를 하기 시작했고, 얼마 안가 런던에 교구를 설치하는데 성공했다.세베르트는 멜리투스로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했다.이후 610년 멜리투스는 주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귀환했고, 교황의 서한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616년 세베르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들인 섹스래드와 세워드가 에식스의 공동왕이 되었다.

이들은 기독교로 개종한 아버지와 달리 여전히 게르만 이교 신앙을 신봉했고, 성찬식에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만 흰빵을 주고, 이교도인 자신들과 그추종자들에게는 흰빵을 주지 않은 것을 문제를 삼고, 베데와 멜리투스를 런던에서 추방시켰다. 이후 623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웨식스퀴네길스와 전쟁을 하다가 이들이 이끈 에식스의 군대는 패전했고, 두 왕 또한 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세워드의 아들인 시게베르흐트가 왕위를 승계받는다. 시게베르흐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게르만 이교 신앙을 신봉했고, 635년 같은 이교도였던 머시아펜다와 동맹을 맺었다. 653년 시게베르흐트가 사망하고 동생으로 추정되는 시게베르흐트 2세가 에식스의 왕이 되었다.

시게베르흐트는 왕위에 오르기 전 훗날 노섬브리아의 왕이 되는 오스위그와 만나 그와 친구이자 동맹이 되었고, 서로의 궁정에 드나들면서 교류를 했다. 둘의 동맹의 머시아의 펜다를 견제할 목적을 갖고 있었다. 이때 시게베르흐트는 동앵글리아가 기독교로 개종한 것과 함께 오스위그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받게 되었다. 결국 653/4년 시게베르흐트는 부하들과 함께 오스위그의 사유지 중 하나인 Ad Murum에서 아일랜드 수도자인 린디스판의 피난으로 부터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한다.

이후 시게베르흐트는 오스위그에게 선교사들을 자신의 나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그 요청을 받은 오스위그는 세드를 비롯한 선교사들을 파견해 에식스에 다시 기독교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도 게르만 이교 신앙을 신봉안 기득권 세력들은 왕의 행보에 대해 자신들에 대한 적대적 및 배신 행위로 보기 시작했다. 660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시게베르흐트는 스위드헬름과 스위드프리드와 다툼이 있었는데, 이때 다시 기독교로 국교로 들어서면서 기독교 가치관에 반하는 결혼을 아직 이교도였던 이들이 한 것에 대해 시게베르흐트가 질책했는데, 일단 결혼인 만큼 시게베르흐트는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했는데, 이때 파견된 선교사인 세드가 결혼식에 참석한다면 분명 죽게 될 것이라 경고했지만 시게베르흐트는 세드의 경고를 무시하고 결혼식에 참석하나 두 형제는 왕의 반대 세력과 함께 시게베르흐트를 죽일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결국 결혼식장에서 시게베르흐트는 살해되었고, 스위드헬름이 에식스의 왕으로 즉위한다.

스위드헬름은 기독교도들에게 적대적이었으나 662년에 그는 동앵글리아의 왕 애설발드의 설득을 받아 기독교로 개종했다. 664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사촌인 시게레(Sighere)와 세비(Sebbi)가 그의 뒤를 이었다. 시게레와 세비와 에식스의 왕위에 오른 당시 에식스는 게르만 이교 신앙과 기독교 신앙으로 양분된 상태였고, 이는 두 공동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세게레의 경우 게르만 이교 신앙을 고수한 반면 세비의 경우 기독교도였다.

그들은 곧 권력 및 종교 문제로 대립했다. 시게르는 웨식스에, 세비는 머시아에 동맹자를 발견했다. 그들의 라이벌 관계의 결과, 머시아의 울프헤레는 에식스의 패자로서 지위를 확립하고, 시게르를 설득해 자신의 조카로, 샐리의 머시아의 부왕 프리츠월드의 딸인 오스기스와 결혼시켰고, 이때를 기점으로 에섹스는 머시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머시아의 주교 자르만은 울프헤레로부터 에식스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임무를 받았다. 673년, 시게르는 오스기스와 이혼했고, 오스기스는 노스 엘햄의 베드위누스 주교의 보호하에 도망쳤다. 이에 세비가 에식스의 단독 지배자가 되었다.

686년 세비는 웨식스의 캐드왈라와 함께 켄트를 침공했고, 에아드리치를 몰아낸 후 켄트 서부를 지배했으며, 694년 세비는 왕위에서 물려나 수도원으로 들어갔고, 그의 아들들인 시게하르트와 스웨프레드 2세였다. 705년, 그들은 웨섹스 왕 이네의 왕의 경쟁자를 받아들인 것에 대해 그와 소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브렌트퍼드 교회 회의에서 그들은 이네 왕이 에섹스를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하기 위해 그의 라이벌을 에섹스에서 추방하기로 합의했다

시게하르트는 머시아의 코엔레드와 함께 헤리퍼드의 주교 티르텔, 런던 주교인 발데레로부터 풀럼의 구매를 확인했다. 스웨프레드는 수녀원 설립을 위해 나징의 토지와 관련된 두 개의 헌장을 발행했지만 이 헌장은 이후 사본에서만 남아 있다. 그는 뎅기 반도의 토지와 관련된 추가 헌장을 발행했다. 트위크넘의 토지와 관련된 헌장은 그에게 귀속되었다.

둘 중 시게하르트가 먼저 사망했고, 스웨프레드 2세는 705년부터 사촌이자 쫓겨난 시게레의 아들인 오파와 709년 죽기 전까지 공동으로 통치했다. 이후 오파가 단독 왕이 되었지만 그 역시 얼마 안가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나다가 그곳에서 머시아의 왕 코엔레드와 함께 수도자가 되었고, 결국 에섹스의 왕위는 슬래드의 후손인 세일레드와 미들섹스를 통치하던 스웨프베르흐트가가 승계하며, 스웨프베르흐트는 738년에 사망했고, 세일레드의 경우 746년에 사망했고, 시게하르트의 손자인 스위드드가 왕위를 승계했다. 이후 758년 사망하자 아들인 시게릭이 에섹스의 왕이 되지만 798년 왕위에서 물려나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고, 아들인 시거드가 승계받지만 812년 머시아의 왕인 코엔울프에 의해 엘더만으로 격화되었다.

825년 웨식스의 왕 에그버트가 머시아의 베오른울프(Beornwulf)를 상대로 엘렌둔(Ellendun)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로 머시아의 권위가 실추되자 머시아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서식스와 켄트는 웨식스의 속국이 되었고, 시거드는 자신의 통치권을 에그버트에게 양도했다.
2.1.1.4. 동앵글리아
동앵글리아의 영역

정확한 건국 연도는 알 수 없지만 6세기 중반인 571년 위하(Wehha) 왕이 프리지아 지방에서 이주해 건국했다고 한다. 위하 왕은 우핑 왕가로 건국부터 794년까지 이어졌다. 다만 위하 왕은 571년, 그 아들인 우파(Wuffa)왕은 571년부터 578년까지 통치, 그리고 그 아들인 티틸라 왕은 578년부터 616년 까지는 재위했다는 것 외엔 연대기로 통해 이름과 통치 기간만이 전해질 뿐 통치 전반에 대한 기록이 없기에 전설로 여겨지며, 실존했음이 확실한 왕은 수도사 베다의 기록에서 교차검증되는 4대 래드왈드 왕부터이다.

래드왈드는 599년경부터 624년경 죽을 때까지 통치했으며, 치세 초기에는 켄트의 애설버트브레트왈다로 인정하여 종속되었다. 더욱이 585년 머시아의 왕 크레오다(Creoda)는 톰툰에 수도를 건설했고, 잉글랜드 북부에서는 데이라와 버니시아를 앨라(Ælla) 왕이 통합하여 한창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7세기 초 애설버트가 기독교인이었던 프랑크 왕국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그 역시 기독교로 개종했고, 때문에 래드왈드는 605년 이전에 애설버트의 궁정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동앵글인의 왕들 중 최초의 기독교인이 되었다. 616년 데이라에서 에아드위네가 동앵글리아로 망명해 왔다. 당시 버니시아 왕이었던 애델프리드(Æthelfrith)가 버니시아-데이라 통합왕국에서 데이라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래드왈드는 에아드위네에게 국빈 대접을 하며 매우 환영했다.

그러자 그 소식을 들은 애델프리드가 동앵글리아에 상당한 금액을 주며, 에아드위네를 암살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래드왈드는 거절했고, 이후에도 애델프리드가 여러 번 엄청난 선물을 전해줬지만 래드왈드는 전부 거절했다. 오히려 에아드위네와 함께 애델프리드를 정벌하기 위해 북쪽으로 진군했고, 아이들강 전투에서 데렌리체 왕위를 손에 넣어 북방의 강자로 떠오른 베오르니체 국왕 애설프리스와 싸워 이겼다. 이 전투에서 애설프리스와 래드왈드의 아들 래건헤레가 전사했다. 래드왈드는 애설프리스의 처남이자 데렌리체의 왕자인 에아드위네를 데렌리체와 베오르니체의 왕으로 꽂았고, 패자로서 자신의 권위를 강제했다.

616년을 전후하여 래드왈드는 훔버강 이남의 앵글로색슨인 군주들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베다 베네라빌리스에 따르면 그는 남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 왕국들의 패권(임페리움)을 잡은 네 번째 군주로서 켄트 지방을 제외한 험버 강 남쪽 땅을 점령했다고 보고있으며, 에아드위네를 노섬브리아의 왕을 세웠기에 북쪽의 노섬브리아에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브리튼의 게르만 왕들 중 가장 력한 왕이었다. 그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브리타니아의 패자인 브레트왈다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치세에 동앵글리아에는 게르만 토착종교의 신전들이 파괴되지 않고 유지되었다. 당대의 패자였던 래드왈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덕분에, 동색슨인들과 켄트가 각각 세게베르트, 에설버트가 사망한 후 이교도였던 후계자들에 의해 토착종교로 재전향하는 동안 동부 잉글랜드에서 기독교의 명맥이 지켜질 수 있었다.

624년 래드왈드가 죽자 에오르프왈드가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에오르프왈드 또한 동시기 켄트와 에식스의 왕들처럼 아버지와 달리 이교도였다. 그러다가 에오르프왈드 즉위 이후 일어난 내분의 도중에 동생인 시게베르트가 동앵글리아에서 갈리아로 도망하고, 새왕의 이교 신앙이 왕국의 기독교파와 이교도파 사이에 긴장을 낳고, 그 결과, 그의 영향력이 약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627년, 새로운 브레트왈다로 부상한 에드윈은 노샘브리아, 린지, 이스트 앵글리아 사람들의 개종에 착수했고, 베다에 따르면, 그의 권고에서 에오르프왈드는 “기독교의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되었다”. 펠릭스 드 부르고뉴가 이스트 앵글리아의 주교직으로 일했다고 여겨지는 해를 고려하면, 이 사건은 627년에 일어났다고 추측되고 있다. 대조적으로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에오르프왈드의 세례가 632년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에오르프왈드가 이스트 앵글리아, 노섬브리아, 켄트 중 어느 세례를 받았는지는 불분명했지만, 당시 상급 통치자 에드윈이 그의 후견인으로 동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얌은 동앵글리아에는 적절한 성당이 없었기 때문에 노샘브리아에 있는 에드윈의 권력의 중심에서 파울리누스에 의해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시사하고 있다. 에오르프왈드의 개종 방식으로 그는 종속적인 왕이었고, 에드윈이 그의 군주임을 알 수 있다.

세례 후, 에드윈의 노섬브리아의 기독교 사제들은 에오르프왈드의 왕국에서 이교의 관습을 억제하고 동앵글리아인을 개종시킬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이 개종은 에섹스를 제외한 노섬브리아에서 켄트까지의 동해안 전역을 에드윈과 그 기독교 동맹자의 지배하에 두는 정치적 이익을 가져왔다.

에오르프왈드의 개종은 왕국에 주교좌를 설치하는 등 교회의 기초의 확립에는 이어지지 않았다. 베다는 에오르프발트가 개종 직후 리베르트라는 이교도에 의해 살해되었고, 살해 후 왕국은 3년간 이교도의 지배로 돌아갔다고 보고 있다. 이후 629년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했던 시그베르트가 돌아와 친족인 에그릭과 함께 동앵글리아의 공동왕으로 즉위했다.

시그베르트는 에그릭과 함께 기독교가 동앵글리아에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우선 부르고뉴 출신의 펠릭스를 던위치의 주교로 임명했고, 켄터베리 대주교호노리우스 또한 동앵글리아의 선교 활동에 동참했다. 또한 프랑크에서의 망명 생활을 바탕으로 라틴어의 독해를 위한 학교를 설립했으며, 교직원들로는 켄트 출신의 사제들이 기용되었다.

하지만 634년 시그베르트는 에그릭에게 자신의 반쪽짜리 왕권을 양도한 후 돌연 수도사로 은퇴한다. 다만 이때 에그릭은 아직까지 이교도였던 것으로 보이며 후대에 남겨진 문헌 등에서도 에그릭이 기독교도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없었다. 다만 이전의 이교도 왕들과는 달리 종교 반동 정책을 펄치지 않고 아일랜드 선교사들의 개종 활동에 대해 간섭하지 않았다. 한편 시그베르트가 퇴위하기 1년 전 노섬브리아의 왕 에드윈이 귀네드 왕의 커드왈론(Cadwallon ap Cadfan)과 연합한 머시아펜다 왕에 의해 사망하고 에드윈의 가족과 주교가 요크에서 켄트로 망명하면서 브리튼 섬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펜다의 통치하에 머시아는 공격적인 확장 정책을 펼쳐갔다.

결국 에그릭이 단독으로 통치한지 2년이 흐른 636년, 머시아는 동앵글리아를 침공했으며, 단독왕인 에그릭의 친정과 함께 수도원으로 은퇴했던 전왕인 시그베르트까지 반강제로 참전했으에도 불구하고 동앵글리아의 군대는 머시아의 군대에 패전했고, 에그릭과 시그베르트를 죽였다. 이후 새로운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티틸라의 손자인 안나(Anna)가 즉위한다. 처음부터 머시아의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졌는지는 불명이나 안나는 평생을 걸쳐 머시아와 대립했다. 안나는 자신의 딸 섹스스버를 켄트의 왕 에오센베르트와 혼인시켜 켄트와의 결혼 동맹을 성사시킨다.

하지만 641년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왈드가 머시아와의 전쟁에 패전해 전사하면서 노섬브리아는 둘로 분열되었고, 645년 웨식스의 첸왈흐가 펜다의 누이인 왕비와 이혼한 것에 대해 머시아의 침공을 받아 동앵글리아로 망명하게 되었다. 이때 첸왈흐는 동앵글리아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안나의 군사 지원을 받고 648년 웨식스를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동앵글리아의 서쪽 끝은 엘리섬을 둘러싼 습지대에 접하고 있었지만, 651년에 딸의 에셀트리스가 사우스길웨의 왕자 톤드바트와 결혼한 것으로 안나의 지배력은 강화되었다.

안나는 통치 중 크노버스버그의 수도원에 호화로운 건물과 물건을 기증했다. 이 수도원은 동앵글리아에 도착한 퍼시에 의해 633년경에 지어졌다. 이윽고 왕국에 대한 공격에 지친 퍼시는 동앵글리아를 떠나 수도원을 동생 포이란에 맡겼다. 651년에 펜다가 수도원을 공격했을 때, 안나와 그 부하가 도착해, 마시아군을 막았다. 이에 따라 포일란과 그 수도사들은 책과 귀중품을 가지고 도망칠 시간이 생겼지만, 펜다는 안나를 생포한 후 아마 슈롭셔 서부 마곤사에텐의 메레왈 왕국으로 추방했다. 안나는 653년경에 동앵글리아로 돌아왔다.

653년, 펜다가 아들 페아다를 미들 앵글족의 지배자로 만들었다.[9] 직후, 머시아군에 의한 동앵글리아의 공격이 반복되었다. 펜다와 안나의 군대는 서퍽의 브리즈버러 근처의 불캄프에서 대치했다. 동앵글리아군은 패배했고, 안나 왕과 그 아들 저르민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전사했다. 전사한 안나의 뒤를 이어 새로운 동앵글리아의 왕이 된 이는 방계 왕족인 애설헤레가 속국왕으로 내세워졌다. 브레드왈다인 펜다가 이교도 왕임에도 불구하고 동앵글리아 내에 기독교는 용인된 것으로 보인다.

655년 애설헤레는 펜다의 주도하에 노샘브리아를 공격했다. 후대 역사가의 견해로 에설헬레가 펜다를 도와 노섬브리아를 공격한 계기가 동앵글리아에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펜다의 내정간섭을 줄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펜다는 브리튼인의 대부대를 포함한 30명의 왕실사령관(duces regi)을 이끌어 노샘브리아에 침공했다. 펜다는 로이디스 지구의 마스 가이에서 오스위그를 포위했다.

오스위그는 평화의 댓가로 보물을 내밀었지만, 베다에 의하면 거부되었다.[10] 어쨌든, 펜다는 노섬브리아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오스위그의 군세는 훨씬 적었지만, 그 귀네드의 카드펠 왕이 이끄는 웨일즈군은 전투 전날 밤에 철수했고, 펜다의 동맹자인 데이라의 오텔발트는 결과를 기다리기 위해 방관했다.

655년 11월 15일 윈웨이드 강 해안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윈웨이드 강의 물은 폭우로 인해 수위가 높아지면서 주변의 토지를 침수시켰다. 노샘브리아 군대가 승리했고, 머시아 군대는 학살당했고, 그 대부분이 도주 중에 익사했다. 펜다 자신도 오스위그에 대항한 동앵글리아군을 이끌고 있던 동앵글리아의 에설헤레를 포함한 동맹왕들과 함께 전사했다.

애설헤레가 전사하자 새로운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안나의 동생인 애설왈드가 즉위한다. 이름과 통치 기한 외에 에설왈드의 치적에 대해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당시 브리튼 섬은 펜다의 전사 후 격변기였다. 강력한 이교도 왕이었던 펜다의 전사 후 브리튼 섬 내의 게르만족 왕국 안으로 기독교가 점차 교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크노버스버그에 세인트 퍼시 수도원과 세인트 포일란 수도원이 있는 동안 동앵글리아에서 켈트 의식의 영향은 강했다. 동앵글리아의 기독교 권위는 캔터베리에 종속된 도목의 동앵글리아 주교구에 아직 있었다. 성보틀프는 안나가 부르캄프 전투에서 죽은 해인 653년경 알데 강의 시오시마에 있는 이켄에 수도원을 세우기 시작했다.

오스위그는 에식스의 시게베르트 2세를 설득하여 세례를 받게 하는데 성공했고, 에이단의 노샘브리아인 제자인 세드는 피더의 지휘하에 미들 앵글인에게 노샘브리아의 선교에서 전향 그리고 이스트 색슨인의 주교가 되어 사람들을 개종시켰다. 세드는 남부 틸베리와 북동부 에섹스의 현재 브래드웰 온 시에 있는 고대 로마 요새가 있던 이산 카에스터에 수도원을 세웠다. 시게베르트는 자신의 형제들에 의해 암살되어 에섹스의 이교도 스위드헬름이 찬탈했다. 세드는 그에게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고, 베다에 따르면 세드의 세례는 렌들샴에서 에설왈드 왕의 면전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오스위그의 아들인 에그프리스가 안나의 딸인 애설트리스와 결혼하면서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의 결혼 동맹이 형성되었다. 한편 펜다의 아들인 울프헬레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켄트의 왕 에오센베르트의 딸 에르메닐다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브리튼 섬의 게르만 왕국들은 한 동안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애설왈드가 사망하던 해인 664년에 오스위그와 브리튼 섬 내의 주교들의 주도하에 열린 휘트비 총회에서 아일랜드 선교사들의 켈트 기독교식이 아닌 로마식을 지지하여 통치하기로 결정, 곧 로마 총대주교의 통제를 받게 되지만 얼마 후 전염병이 브리튼 섬을 들이닥쳤고, 애설왈드 또한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조카인 엘드울프가 즉위했다. 713년 사망하기 전까지 엘드울프의 치적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가 즉위할 당시 여전히 전염병이 브리튼섬을 강타한 상태였다. 게르만 왕국 내의 교회 세력 또한 여러 교구로 분할되었고, 늘어난 주교들은 앵글로색슨의 7왕국 내에서 점차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또한 엘드울프 시기에 동앵글리아 또한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그의 통치 중 브리튼 섬 화폐의 발행과 사용은 켄트에서의 발전을 이루었으며, 660-670 년대에는 금, 실링 또는 트림사가 제조되었으며, 그 후 프랭크 화폐의 금 품질 저하 과 관련된 품위의 감소로 인해 다양한 종류의 은 셰이터 또는 페니가 제조되었다.

화폐의 지위는 아직 진정한 통화가 아니었고, 또 공개적으로 왕권을 잡는 것이 아니었다. 동앵글리아산으로 여겨지는 화폐는 주로 켄트, 에식스, 프리슬란트 또는 네델란트산과 함께 발견되어 이들 중심지와의 외부 교류를 반영하고 있다.

693년, 교황 세르지오 1세는 엘드울프를 비롯해 머시아의 에셀레드, 노샘브리아의 알도프리스에게 편지를 보내 캔터베리의 테오도르의 후계자로 레클버의 벨트왈드를 받아들이도록 촉구했다. 713년 엘드울프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엘프왈드가 왕위를 이었다.

엘프왈드 또한 749년 사망하기 전까지 고고학적 발굴 외의 문헌 내에서 자세한 치적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았다. 716년 머시아에 애셀발드가 왕위에 오랐고, 이후 736년 자신을 전 브리티니아의 왕이라고 자칭했다. 그리고 그의 통치기에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베오울프가 수도사들에 의해 문헌으로 쓰여졌다. 그밖에도 엘드울프가 실행한 동앵글리아의 기독교 및 화폐 경제의 정착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749년 엘프왈드가 사망하자 동랭글리아의 왕위는 세명의 왕들인 베오나와 알베르트, 훈이 공동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 역사상 최초로 화폐에 이름과 직위를 세긴 왕들이었으나 760년까지의 치적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발굴된 화폐들을 보았을 때 이들 또한 선대와 마찬가지로 동앵글리아 내의 화폐 사용의 보편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시기 미상이나 베오나와 알베르트, 훈이 사망하고 애설래드 1세를 거쳐 에델베르트가 779년쯤에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653년 애설헤레로부터 시작해 에델베르트가 즉위하기까지 명목상의 왕권은 머시아로부터 존중받았지만 엘드울프때부터 동앵글리아 또한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해 베오나와 알베르트. 훈에 이르면서 화폐에 자신들의 이름과 지위를 세기면서 독자성을 유지하려거 하자 머시아의 왕인 오파는 동앵글리아의 행보에 대해 이들이 독립할 것을 우려, 결국 동앵글리아 왕실의 화폐 주조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했다.793년 린디스판 수도원이 바이킹들에 의해 약탈하면서 동부 해안의 취약성이 드러났고, 1년 후인 794년 몽크웨어마우스-재로우 수도원까지 공격받게 되었다.

이에 에델베르트는 지역 방위의 강화 및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화폐에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를 상징하는 암늑대를 세기면서 라틴어인 REX를 화폐에 세겨 발행했다. 하지만 에델베르트의 행보에 대해 오파는 그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왕비인 키네스리스와 모의해 자신의 딸 엘프스리스와의 약혼을 미끼로 헤리퍼드셔의 왕가의 영지인 서튼 혹은 인근 마덴으로 에델베르트를 불려들인 후 참수형을 선고해 처형당하면서 우핑 왕가가 단절되었고, 오파가 796년 죽을 때까지 동앵글리아를 통치했고, 그의 통치는 강압적이라 오파 사후 머시아의 단독왕이 된 엑크프리스가 얼마 못가 사망하면서 동앵글리아는 에드월드라는 인물을 내세워 잠시나마 독립하는데 성공하나나 2년 뒤인 798년에 코엔울프에 의해 재정복되었고, 825년까지 머시아의 왕들이 동앵글리아의 왕위를 겸하게 되었다.

이에 동앵글리아는 끊임없이 머시아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821년 머시아의 코엔울프가 사망하고 동생인 체올울프 1세가 머시아를 비롯해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즉위하지만 2년만에 베오른레드의 친척인 베오른울프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는데, 이후 웨식스와의 전쟁에서 머시아가 대패하자, 825년 동앵글리아의 애설스탠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베오른울프의 머시아군과 싸워 승리한 후,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웨식스가 주변 지방을 흡수하며 강대국으로 거듭나던 시기와 겹쳤기에 웨식스의 에그버트(Ecgberht) 왕과 머시아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음으로써 국가의 안정을 도모했고, 827년 루데카의 침공마저 방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애설스턴은 845년까지 동앵글리아를 통치하다가 죽은 후 애설워드가 즉위한다.

애설워드의 통치에 대한 내용은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도 언급되지 않지만 그의 이름으로 발행된 주화만이 그의 실존을 입증하고 있으며, 854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에드문드가 14세의 미성년자로서 동앵글리아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865년에 데인족에 의한 침략이 개시된다.
2.1.1.5. 머시아
오늘날 덴마크 남부와 북부 독일의 일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 해당하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에 앵글족들이 521년까지 살고 있었다. 노섬브리아 출신의 기독교 수도사로, 신학자, 역사가, 연대기 학자인 성 베다는 앵글족들이 그레이트브리튼섬으로 이주하기 이전에는 앙굴루스(Angulus)라는 곳에 살았으며, "그곳은 유트족과 색슨족의 영토 사이에 있으며,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 채로 내버려있다."라고 언급했다. 유사한 증거가 《브리튼인의 역사》에 남아있다. 앨프리드 대왕과 연대기작가 애설웨어드는 그 장소를 슐레스비히(슬레스비) 지역인 앙겔른 반도로 인식했고 (그럼에도 그 당시에는 그곳은 더욱 큰 영역이었을 것이다), 이 인식은 비드가 나타낸 것과 일치했다. 에오와가

노르웨이의 여행자 홀로갈란드의 오데어의 오를로피오르에서 슐레스비히까지 이틀간의 여정에 대한 기록에서, 그는 배의 우현에서 육지를 기록했고, 앨프리드 대왕은 수기에 "그들이 이곳에 오기 전에, 이 섬들에 앵글족들이 살았다."라며 첨부했다. 이에 대한 대한 내용은 머시아 왕가가 후손임을 주장했고 업적들이 앙겔른, 슐레스비히, 렌츠부르크와 연관되어 있던 이들인 베르문드, 앵글족의 오파 등 두 명의 왕과 관련한 덴마크와 잉글랜드의 전승에서도 확인된다. 덴마크의 전승은 프로우위누스(Freawine)와 위고(wig), 슐레스비히의 관리자이자 부자(父子)지간인 두 명에 대한 기록들을 간직하고 있으며, 웨식스 왕가가 이들의 후손임을 자처했다. 5세기 동안에, 앵글족들은 브리튼섬을 침략했고, 그 후 이들의 이름은 튀링겐인들이 공포한 법률인 Lex Anglorum et Werinorum hoc est Thuringorum을 제외하곤 유럽 대륙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머시아의 초대 왕은 대륙 앵글족의 마지막 왕이였던 에오메르의 아들인 이켈로 알려져 있다. 489년 앵글족의 왕이 된 이켈은 어떠한 이유로 515년 다른 앵글족 집단 및 이웃한 섹슨족과 함께 먼저 주트족들이 넘어와 정착하던 브리튼 섬으로 이주해 템스 강 북쪽에 정착한 후 동앵글리아를 통해 머시아 지역의 브리튼인들을 쳐부순 후 머시아를 세웠다고 한다. 머시아인들의 조약에 따르면 초기의 국경은 더비셔, 레스터셔, 노팅엄셔, 노샘프턴셔, 스태퍼드셔를 비롯한 북부 지역을 포함했다. 535년 이켈이 죽자 그의 외아들인 크네바가 머시아의 왕으로 즉위하는데, 크네바-퀴네왈드에 이르기까지 49년 동안 왕들의 이름이 연대기에서만 전해진채로 치적에 대한 기록이 없는 시기로 있게 된다.

이후 584년 크레오다가 실존인물임이 확인된 첫 왕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는 탬위스에 요새화된 왕궁을 세웠고, 593년 사망하자 아들인 피바가 뒤를 잇는데 606년까지 통치하며 서부로 영토를 확장한다. 이후 피바가 사망했는데, 이때 어떠한 이유로 이켈 왕조 내에 마땅한 후계를 찾지 못한 것인지 피바의 외척으로 보이는 이름은 '투박한'이라는 뜻을 가진 체오를이 머시아의 왕이 되었다. 체오를에 대한 기록은 베다의 연대기에만 등장하며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등장하지 않았다.

체오를이 왕위 오를 당시 북쪽의 데이라와 버니시아 두 왕국이 긴 전쟁을 멈추고 화해 무드로 바뀌었을 때였다. 당시 버니시아의 왕이던 애델프리드는 약화된 데이라를 속국으로 두었다. 애델프리드는 당시 데이라의 왕자로 자신의 처남이기도 한 에드윈을 경계했고, 이에 에드윈은 자국에서 도주할 수 없었는데, 처음 망명지는 브리튼인들의 영역인 웨일스의 귀네드 왕국이었다가 같은 앵글족 왕국인 동앵글리아로 망명지로 옮겼야 했는데. 610년경 동앵글리아로 가기전 들린 머시아에 체류했는데, 이때 체오를은 자기 딸인 쿠엔부르흐을 에드윈과 결혼시시켰다.

616년 버니시아와 웨일스의 포위스와 귀네스의 칸프레프인 로스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는데, 승자는 버니시아였다. 이때 이 전쟁에 머시아 또한 참전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626년 머시아의 왕위는 체오를에서 피바의 아들인 펜다(Penda, 재위 626~655)로 갑작스럽게 바꿔졌는데, 후세의 많은 사학자들은 펜다가 체오를을 죽이고 머시아의 왕이 되었다고 믿고 있다.

잉글랜드의 초기 역사를 기록한 성 베다(Bēda)에 의하면 펜다는 머시아의 왕들 가장 호전적인 왕이었다. 633년 노섬브리아의 왕 에아드위네(노섬브리아의 에드윈)를 브리튼족 왕국인 웨일스의 귀네드 왕국과 현재의 요크셔 일대에 있던 엘메트 왕국과 연합해 격파하고, 브리튼의 패권을 차지한 에아드위네와 아들인 오스프리스를 죽여 노섬브리아를 굴복시켰다. 에아드위네의 아들중 한명인 엘드프리스는 포로가 되었다.[11] 에아드위네의 뒤를 이어 즉위한 오수왈데(Osuualde, 오즈왈드)는 머시아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에아드위네의 사망후 노섬브리아내의 버니시아와 데이라로 다시 분멸되면서 노섬브리아는 펜다에게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635년 펜다는 늘어날 영토를 감당하지 못해 자신의 동생인 에오와를 머시아 북부의 분봉왕으로 임명했다.

한편 636년 펜다는 시선을 동앵글리아로 돌려 그곳을 침공한다. 동앵글리아의 왕 에그릭과 수도원으로 은퇴했던 공동왕인 시게베르트가 펜다의 침공에 대응하려 했으나 결국 전투에 패배해 두 왕 모두 전사하고 만다. 한편 오수왈데는 펜다가 동앵글리아로 신선을 돌린 사이에 에아드위네 사후 분열된 노섬브리아를 통일한 후 다시 군사를 일으켜 머시아의 북쪽을 침공했다.

이에 펜다는 웨일스의 포위스 왕국을 우군으로 삼아 642년 메이서필드 전투에서 오수왈데와 자신을 배신한 에오와를 상대로 승리하고, 오수왈데를 죽여 그의 신체를 잔혹하게 훼손시켰고, 노섬브리아를 종속국으로 삼았다. 당시 펜다는 앵글로 섹슨 이교 신앙을 믿었던 반면 오수왈데는 기독교도였기에 후세인으로 부터 순교자로 숭상받게 되었다. 그리고 메이서필드에서 오수왈데에게 붙으다가 같이 전사한 동생인 에오와의 죽음을 확인한 후 머시아 북부의 통치권을 다시 회수한다. 이후 645년 매부인 웨식스의 왕 첸왈흐가 자신의 누이를 버리자 분노해 웨식스를 공격해 손에 넣었다. 648년 평화 협정을 인정하고 나서야 웨식스에서 물러났다. 이후 수많은 전투를 벌이며 머시아를 패자국으로 만들어 브레트왈다의 칭호를 받았다.

653년 자신의 아들 페아다를 머시아 남부의 분봉왕으로 세웠다. 또한 이시기는 머시아에도 기독교가 유입되었다. 펜다 본인은 죽을 때까지 기독교로 개종은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가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았다. 남부의 분봉왕이었던 페아다 또한 오스위그의 딸 엘프레드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기독교로 개종한다.[12] 그러나 655년 노섬브리아의 다음 왕인 오스위그(Ōswīg, 오스위우)가 재차 침공을 감행했고, 이에 양측의 군대는 현재의 요크셔 콕 벡의 원와드에서 격돌했고, 전투 도중 펜다가 전사함에 따라 머시아의 패전으로 끝났다.

펜다가 전사한 후 그의 아들 페아다(Peada)가 655년 머시아의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한때 노섬브리아를 압도했던 머시아는 원와드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많은 국력을 소진한 상태로 노섬브리아의 지배력은 회복되었다. 머시아는는 남북으로 분할되어 북부는 오스위그가 완전히 차지하고 남부는 페이다가 수중에 남았지만 이듬해(656) 페아다가 병으로 사망해[13],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그가 머시아를 보호국으로 삼아 3년간 지배했지만 머시아인들은 펜다의 아들이자 페이다의 동생인 울프헤레(Wulfhere)를 지도자로 세우고 658년 반란을 일으켜 노섬브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며 울프헤레가 머시아의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울프헤레는 다른 남매들과 달리 개종은 하지 않았던 상태였다. 하지만 일부 변두리 지역을 제외하면 게르만족들이 정착해 세워진 왕국 내에서 기독교가 자리잡아가기 시작했고, 머시아의 귀족들의 추대도 받았기에 왕권을 강화하려면 신흥 세력으로 떠오르는 기독교 세력과 제휴할 필요성이 있었고, 무엇보다 적대적인 기독교도 왕인 오스위그와도 데탕트의 일환으로 개종을 피할 수 없었다. 다만 울프헤레의 개종 시기와 장소, 그리고 세례를 주관한 사제의 이름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없으나 앵글로 섹슨 연대기에서 660년 중·후반에 울프헤레가 형이 페이다가 착공한 메데스 햄스테드의 대수도원을 완공시켰고, 봉납식에 당시 켄터베리의 주교인 데우스디데트와 머시아 대주교인 알만이 참석했다.

한편 머시아의 부활은 남부의 섹슨족 왕국들에 있어서 엄청난 압박으로 다가왔다.660년대 초반에는 서색슨인 도체스터 주교구가 분할되어 윈체스터에 새로운 주교구가 설립되었다. 이 결정은 머시아가 서식스의 전통적인 중심지로 진출해, 도체스터가 국경에 위험할 정도로 가까워진 것에 대한 반응이었다고 추정되며, 결국 661년 울프헤레는 서식스의 애쉬다운을 습격한 후 몇 년 안에 도체스터 주교구는 버려졌다.

애쉬다운 공격 외에도 울프헤레는 661년에 와이트섬을 공격했다. 그 후 그는 와이트 섬과 와이트 섬의 북쪽 대륙, 메온 강을 따라 메온웨어의 영토를 모두 이름의 남쪽 색슨인 왕 에젤위얼에게 주었다. 와이트섬 정복 후, 울프헤레는 사제 에오파에게 주민들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명령했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것이 기독교 세례가 섬에 전해진 최초의 시간이었다.

664년 에식스의 스위드헬름이 죽고 그의 사촌인 시게레와 세비가 에식스의 공동왕으로 즉위했다. 문제는 시게레가 앵글로 섹슨 전통 신앙을 고수한 반면 세비는 기독교도였고, 종교 문제로 반목이 반목이 생기더니 급기야 에식스의 단독왕 자리를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 에식스는 노섬브리아의 영향력 하에 있었기에 울프헤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비와 울프헤레 둥 중 누가 먼서 서로에게 전급했는지는 불명이나 울프헤레는 세비를 지원해 시게레를 몰아냈고, 그결과 세비가 에식스의 단독왕이 되면서 에식스는 머시아의 영향력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또한 울프헤레는 머시아의 하급왕인 서리의 프리투발트의 딸이자 동시에 자신의 조카인 오스기스를 시게레와 혼인시켜 사실상 에식스를 장악하는 것에 성공한다. 그리고 리치필드의 주교인 자르만을 파견해 에식스에 남아 있던 앵글로 섹슨 전통 신앙을 뿌리채 뽑았다. 이로 인해 에식스에 대한 노섬브리아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670년 오스위그가 죽자 노섬브리아에서 내전이 발생했고, 자연스레 머시아는 브리튼 섬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672년 웨식스 첸왈흐가 울프헤레의 군사활동에 의한 스트레스 때문에 사망하고 그의 왕비인 그의 왕비였던 색스부르흐가 왕위에 올라 여왕으로서 웨식스를 1~2년간 통치했는데, 이에 하위왕(underking)들과 귀족들이 반발하며 웨식스는 약 10년간 분열하여 하급왕에 의해 통치되게 되었는데, 머시아는 이기회를 노치지 않고, 남쪽으로 점차 세력을 확장했다.[14] 그리고 웨식스의 발생한 하급왕들의 반란을 반면교사로 삼아 머시아에게 속해 있는 위체, 서리, 린지등의 하위 왕국들을 강하게 구속하기 시작해 하급왕들이 머시아의 권위에 반발하지 못하도록 강하게 압박해 나갔다.

한편 울프헤레는 켄트의 왕인 에오샌베르트의 딸인 에르메닐다와 결혼했는데, 664년에 에오센베르트의 아들 에그베르트가 켄트의 왕위를 계승했지만 673년 에그베르트가 사망했을 때 켄트의 상황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에그베르트의 형제인 흐로스헤레가 왕이 되기 1년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 울프헤레는 에르메닐다와의 결혼을 통해 에그베르트의 두 아들 에아드리치와 위트레드의 외삼촌이었기 때문에 계승에 관심이 있었을 수 있다. 울프헤레는 에그베르트의 죽음과 흐로스헤레의 통치 기간 동안 켄트의 종주자 노룻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4년에 울프헤레가 오스위그의 아들 에즈프리스를 공격했을 때 머시아 내의 하위 왕국들을 표면상 길들이는데 성공했으며. 켄트, 동앵글리아. 에식스, 서식스, 웨식스 등을 거느리는 브레트왈다로 군림한 상태에서 공격했다. 하지만 에그프리스는 울프헤레를 격파해 역으로 린지를 빼았고, 공물을 받치도록 했다..

울프헬레는 패배를 살아남았지만, 그 결과 남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배력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675년 웨식스의 왕인 에스크와인이 비단헤흐데에서 울프헬레와 싸웠습니다. 이 싸움이 어디에서 행해졌는지, 누가 승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울프헬레는 675년 후반에 병으로 사망했다. 울프헤레에게 아들들이 있었지만 미성년자들이었는지 결국 동생인 애델레드(Æthelred)가 머시아의 왕위를 계승했다. 애덜레드는 형의 통치기 막바지에 노섬브리아와의 전쟁의 패배로 무너진 남부 왕국들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해야 했다.

676년으로 애덜레드의 군대가 켄트를 황폐화시켜 서 켄트의 주교의 거성인 로체스터를 파괴했다. 공격의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울프헤레에 의해 최근 머시아의 세력권에 끌려온 서리를 켄트의 왕 프로스헤레가 다시 지배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 내지는 켄트의 에오르멘레드의 아들들의 살해에 대한 복수의 일환이었는지 모른다. 왕자들에 대한 살해는의 주동자는 프로스헤레의 형제인 켄트의 에그버트로 추정되며, 에델레드는 살해된 왕자들의 외삼촌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밖에도 켄트인이 동색슨인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려던 최근의 시도에 응하여 에식스의 왕들이 침략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프로스헤레는 아마 에델레드의 지배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로체스터 주교구에 대한 피해는 엄청났고, 현직 주교의 푸타는 교구에서 은퇴했다. 그의 후계자로 임명된 쿠위헬름도 '재정적 빈곤' 때문에 주교구를 포기했다.

에델레드의 통치 초기, 캔터베리 대주교의 시어도어는 머시아 교회의 상당한 재편성을 시작했다. 675년, 그는 윈프레드를 리치필드 주교의 지위에서 해임하고, 그 후 4년간 광대한 머시아 교구를 레스터, 리치필드, 우스터, 도체스터, 헬레포드의 5개 교구로 나누었다.

에델레드는 경건한 왕으로 '전쟁의 솜씨보다 경건한 성격'으로 유명하며 테트베리, 롱 뉴턴, 서머퍼드 케인즈의 토지 기부를 포함하여 확대하는 교회에 몇 가지 토지를 선물했다. 에델레드가 옥스포드셔 남부 아빈돈 수도원 창설에 관여했다는 전승도 있다.

에델레드는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그의 딸 오스리스와 결혼했지만 노섬브리아가 지속적으로 머시아의 패권을 훼방하면서 처가임에도 불구하고 노섬브리아에 적대적이었다. 결국 679년 머시아와 노섬브리아는 스태퍼드셔 비둘프무어에 위치한 트랜트 강에서 충돌했다.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 같은 영문 위키백과의 내용들마다 상이하게 다르게 나오고 있다. 영문 위키백과의 에즈프리스의 문서에서 노섬브리아가 승리해 린지를 계속 지배했다고 방면 영문 위키백과의 에델레드 문서에서는 머시아가 이켜 린지를 되찾는 것과 아울러 영국 남부에 대한 노섬브리아의 개입을 효과적으로 종식시키는데 성공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어찌되었던 간에 남부에 대한 노섬브리아의 개입은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막을 내렸다.

한편 요크의 윌프리드 주교와 교회와 세속의 권위와의 갈등으로 윌프리드는 노섬브리아에서 추방되었고, 광대한 교구가 분할되었고, 윌프리드는 에델레드에 대항하여 에즈프리스 측에 붙었다. 685년에 에크프리스가 픽트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후, 대주교 세오도어는 윌프리드와 에즈프리스의 후계자 알도프리스와의 화해를 거론했지만, 692년에 알도프리스와 윌프리드는 화해시키는데 실패하여 윌프리드는 머시아로 돌아갔다.

에델레드는 그간의 있었던 불화를 잊고 윌프리드를 받아들이고, 그를 미들 앵글의 주교로 임명했고, 702년경 오스터필드 공의회에서는 그를 옹호했다. 이 공의회에서 윌프리드는 캔터베리 대주교 벨트왈드가 이끄는 주교회의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말했다. 에델레드가 윌프리드를 지지함에 따라 그는 캔터베리와 노섬브리아 모두와 논쟁에 휘말렸고, 그의 동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윌프리드의 수도원 중 일부가 머시아 영토에 있었다는 사실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681년의 두 가지 칙허장은 에델레드가 테트베리 부근의 토지를 수여한 것을 보여준다. 테트베리는 현재 글로스터셔와 윌트셔의 경계에 있다. 이것은 에델레드가 울프헤레가 이전에 했던 것처럼 머시아의 영향력을 웨스트 색슨인의 영토로 넓힐 수 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웨스트 색슨인은 685년부터 688년경까지 웨섹스 왕이었던 캐드왈라의 통치하에 군사적으로 크게 부활했지만, 케드왈라가 로마 순례에 출발했을 때, 후계자의 이네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내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케드왈라는 서섹스와 켄트의 왕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고, 그의 퇴위는 이후 몇 년 동안 남동부의 불안정한 역사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켄트에서는, 동부 켄트만이었지만, 오즈윈이 왕으로서 대두했다. 왕국의 서쪽 절반은 에섹스 왕 세비의 아들 스웨프허드에 의해 통치되었다. 에델레드가 스웨프허드와 오즈윈의 종주왕으로 군림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증거로 에델레드가 켄트에서 실시한 토지의 부여를 확인하는 칙허장이 남아 있고, 676년의 에델레드의 켄트 침공은, 전통적인 켄트 왕가에 대한 그의 반대를 나타내고 있다.

691년 스웨프허드의 칙허장도 에델레드가 켄트를 침공했음을 보여주기 때문에 흥미롭다. 에델레드는 윌프리드를 캔터베리의 대주교 자리에 맡기려고 했지만 실패했거나 머시아와 10년 이상 독립했던 에식스로부터의 켄트에서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지도 모른다.

그 후 몇 년 동안 에식슨는 머시아의 세력권으로 복귀했다. 693년에서 704년 사이에 에델레드가 런던 주교 윌드히어에게 땅을 준 것으로 기록되었으며, 704년에는 에델레드가 스웨프허드에 의한 땅의 양도에 동의했다. 후자의 칙허장은 머시아가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지방관, 즉 현지 관리를 배치한 것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머시아가 남동부에 관여했다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델레드가 남쪽으로 확장주의적인 야망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거의 없다. 케드왈라와 이네의 지휘하에 웨식스가 세력을 늘리고 있었기 때문에 머시아는 그 방향으로 싸울 기회는 한정되어 있었을 것이다.

노섬브리아는 더 이상 방해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트렌트 전투 이후 햄버강 북쪽에서 봉쇄되어 685년 픽트인과의 전쟁에 대패한 뒤 더욱 위협이 아니게 되었다. 가능한 설명은 에델레드가 웨일스와의 전쟁에 집중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 시기에 푸위체족이 보다 확실히 머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갔다.

왕의 칭호를 얻은 마지막 위체족의 통치자는 685년에 사망한 오셰르로 670년대 중반부터 에델레드에게 토지 부여에 대한 동의를 구했고, 에델레드는 그를 하위왕으로 간주했다. 에델레드가 위체족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그가 위체족의 영토인 그로스터셔의 수도원에 토지를 부여하는 칙허장이다. 이 칙허장은 일반적으로 날조라고 생각되지만, 이전의 신뢰할 수 있는 자료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697년 애델레드의 왕비인 오슬리스가 살해되었다. 다른 연대기에선 이유는 불명하다. 베다에 따르면 왕비를 시해한 범인들이 '머시아의 귀족들'이었다.베다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머시아 내에 반 노섬브리아 감정이 팽배해져 있다는 것을 반증하고 오슬리스는 린지의 버드니 수도원에 묻혔다. 그곳은 그녀의 권유로 삼촌 노샘브리아의 오스왈드의 유물이 보관되어 숭배된 수도원이지만, 버드니에서 오스왈드 숭배에 저항한 증거도 양왕국의 관계가 나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704년, 에델레드는 퇴위해 버드니의 수도사 겸 수도원장이 되어 왕위를 조카의 코엔 레드에게 양도했다. 다만 에델레드는 죽기 전까지 왕실에서의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성 윌프리드의 전기에는 그가 코엔레드를 소환하고 교회의 계층과의 갈등으로 윌프리드를 지지하는 것을 맹세한 모습이 적혀 있었다. 그 밖에도 조카인 코엔울프를 내세운 것은 아들인 체올레드가 노섬브리아 왕실의 혈통을 이어 받은 것은 물론이고, 아직 미성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코엔레드의 통치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지만 구슬락의 전기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저자 펠릭스는 머시아인의 왕 코엔레드 시대에는 브리튼인이 공격, 약탈, 사람들의 파괴로 브리튼인을 압박했다고 한다.

코엔 레드의 통치 중에 현존하는 칙허장의 일부는 그가 동색슨인의 통치자의 군주였음을 보여준다. 코엔 레드와 그 후계자는 런던 주교 발드헤레에 대한 토지 수여도 인정하고 있으며, 런던이 마시아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증거이다. 나중에 머시아 왕은 런던을 하급 왕이 통치하는 주가 아니라 직접 소유하는 땅으로 취급했지만, 코엔레드는 거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헤레포드셔의 페레부르크라는 수녀에게 토지를 수여한 기록은 현존하고 있으며, 코엔레드의 이름으로 세인트 폴 대성당과 이브샴 수도원에 특권을 주는 위조의 칙허장도 남아 있다.

코엔레드의 통치 중에도 켄트의 마시아의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704년 또는 705년에 쓰여진 현존하는 편지에서는, 런던 주교 발트헬레가 캔터베리 대주교 벨트왈드에, 코엔레드가 「엘프트리스의 화해에 대해」 개최되는 회의에 그를 초대했다고 전하고 있다.

발트헤레는 이 문제에 대한 벨트왈드의 의견을 몰랐기 때문에 초대를 거절했다. 분명히 중요한 문제였지만, 이것에 대한 다른 언급은 남아 있지 않다. 이 편지는 에식스과 웨식스의 왕을 중재하기 위해 브렌트 포드에서 개최되는 회의를 기술한다. 역사가 프랭크 스텐턴의 견해에서 이 편지는 "공통 영주가 없었던 당시 남부 영국인의 혼란스러운 관계"를 밝혔다.

코엔레드는 매우 신앙심이 깊은 왕이었던 것 같다. 베다는 코엔레드의 신화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코엔레드는 회개하고 개심하도록 간청했지만 그 신하의 죄로 인해 코엔레드는 지옥으로 떨어질까봐 두려워했다. 709년 코엔레드는 로마에서 수도사가 되기 위해 종형제 에젤레드의 아들 체올레드에게 양위했다. 체올레드는 머시아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케올레드는 에젤레드의 아들이지만, 그의 어머니는 에젤레드의 유일한 아내로 기록된 오슬리스가 아니다. 그는 즉시 당시 아직 어렸을지도 모른다. 체올레드에 대해 기록된 많은 것들은 매우 부정적이며 범죄와 부도덕을 비난받는 내용이 전부로 교회에 대한 부당한 취급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715년, 체올레드가 이끄는 머시아인은 "워덴스 버로우"에서 이네가 이끄는 웨식스에 대하여, 또는 그들과 함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적, 브리튼인으로 추정되는 세력과 싸웠다. 이 전투의 결과는 기록되지 않았다. 이듬해 체올레드는 독살로 의심되는 사인으로 사망했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체올레드가 연회에서 광란 상태가 되어 “악마와 놀고 하나님의 사제를 저주하면서”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체올레드의 동생으로 알려진 체올왈드가 왕위를 계승하지만 1년도 못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추방되었던 방계 왕족인 애델발드(Æthelbald)가 돌아와 왕위를 계승한다.

에델발드의 통치는 마시아의 세력의 부활을 상징하고 8세기 말까지 계속 되었다. 731년까지 에델발드는 함버강 이남의 영국 전역을 지배하에 두었다. 에델발드와 그에게 종속된 다른 앵글로색슨의 왕들과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거의 없으나 칙허장으로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에델발드와 같은 군주에 종속된 왕은 여전히 ​​왕으로 간주되지만, 독립성은 몇 가지 측면에서 제한되었다. 칙허장은 이 관계의 중요한 증거원입니다. 칙허장은 종자나 성직자에게 땅을 주는 문서이며, 땅을 주는 권한을 가진 왕에 의해 증명되었다.

종속왕의 한 영토에 토지를 주는 칙허장에서는 칙허장에 첨부된 증인 목록에 군주뿐만 아니라 왕의 이름도 기록될 수 있다. 이러한 증인 목록은 예를 들어 이스메아 디플로마에서 볼 수 있다. 이 칙허장에서 왕에게 주어진 칭호도 시사가 풍부할 수 있다. 왕은 하위왕으로 표현될 수 있다. 에델발드가 남부의 두 왕국, 웨식스와 켄트에 영향력을 확대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충분한 정보가 남아 있다.

에델발드의 통치 초기에, 켄트와 웨섹스는 모두 강한 왕, 각각 위트레드와 이네에 의해 통치되었다. 켄트의 위트레드는 725년에 사망했고, 당시 가장 강한 통치자 중 한 명이었던 웨섹스 이네는 726년에 퇴위했고, 로마에 순례를 떠나 그곳에서 수도사로서 살았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이네의 후계자인 에설허드는 그 해 오스왈드라는 이름의 왕족과 싸웠다. 연대기에는 웨섹스의 초기 왕인 세아우린의 후손임을 나타내는 계도가 기재되어 있다.

에설허드는 궁극적으로 이 왕위 싸움에서 승리한 후 머시아의 권위에 따라 통치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므로 에델왈드는 에설허드와 739년에 에설허드의 뒤를 이은 동생 쿠드레드의 지위 확립에 공헌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720년대 초에 남색슨령이 서식스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증거도 있으며, 이는 이 지역에서 에젤발드의 영향력이 높아진 것을 나타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웨식스의 지배력을 약하게 하고 있던 것은 머시아가 아니라 켄트의 영향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켄트에 관해서는 켄트의 칙허장에서 에델발드가 켄트 교회의 수호자임을 알 수 있다. 에델발드가 켄트의 토지 부여에 동의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켄트의 왕인 에델베르트와 에드베르트의 칙허장은 에델발드의 동의 없이 토지를 부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에델발드의 군주권을 묘사하는 칙서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 결과 켄트에서 에델발드의 영향 범위를 직접 보여주는 증거는 아니었다.

에식스에서의 사건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런던이 에식스가 아닌 머시아 왕국에 속하게 된 것이 에델발드의 통치기였다. 에델발드의 전임자 3명, 에델레드, 코엔레드, 체올레드는 각각 런던 주교 발드헤레에게 토지를 양도해 주는 에식스의 칙허장을 승인하고 있었다.

켄트의 칙허장에서 에델발드가 런던을 지배하고 있던 것을 알고 있어 에델발드 시대 이후 머시아인의 지배로의 이행은 완료된 것 같다. 헤일로 근교의 토지를 주는 오파의 초기 칙허장에서는 증인 리스트에 에식스 왕의 이름조차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사우스 색슨에 대해서는, 칙허장의 증거는 거의 없지만, 켄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토지의 수여에 에델발드의 동의가 필요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없다. 증거가 없다고 해서 결국은 동시대의 연대기작자인 베다가 731년의 잉글랜드의 상황을 남쪽 잉글랜드의 주교를 열거했다.

에델발드가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을 해야 했다는 증거가 있다. 733년에, 에델발드는 웨식스에의 원정을 실시해, 서머턴의 왕령을 점령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740년에 에설허드와 웨식스의 왕위를 계승한 쿠드레드가 "머시아의 왕 에델발드에 대해 대담하게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도 적혀 있다. 736년 에델발드는 자신을 전 브리타니아의 왕으로 자칭했다.

3년 후인 743년, 쿠드레드와 에델발드는 웨일즈인과 싸웠다고 한다. 이는 머시아가 쿠드레드에 ​​부과한 하위왕의 의무였을지도 모른다. 이전의 왕들도 7세기의 강력한 머시아 지배자였던 펜다와 울프헬레를 똑같이 지원했었다.

740년, 픽트인과 노섬브리아인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으로 보고되었다. 픽트인 왕 오엥스와 동맹을 맺은 것으로 보이는 에델발드는 에드버트가 노샘브리아를 떠난 것을 이용하여 그의 영토를 망치고 아마 요크를 태웠다.

한편 이시기에 에델발드와 머시아의 교회 세력과 갈등이 발생했다. 745년부터 746년까지 독일의 주요 앵글로 색슨 선교사 보니파티우스는 다른 7명의 주교와 함께 에델발드에게 교회 수입을 가로채고 교회 특권을 침해하며 성직자에게 강제 노동을 부과하고, 수녀와 간통한 등 많은 죄를 비난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내림과 하나님의 왕국에 의해 당신의 은혜를 간청합니다. 만약 당신이 이 악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회개에 의해 당신의 삶을 바꾸고,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당신 안에 창조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색욕으로 사악한 악마의 이미지와 닮은 모습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얼마나 비열한가를 명심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자신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요로운 은혜로 왕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지금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악령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에머턴 "편지"105 페이지.

보니파티우스는 먼저 요크 대주교의 에그버트에게 편지를 보내고, 부정확한 점을 정정하고, 올바른 점을 강화하도록 요청했다. 또한 에델발드가 한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성직자인 헤레플리스에게 편지를 왕에게 직접 읽고 설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보니파티우스의 편지는 에델발드의 믿음과 행사를 칭찬하지만, 그 비판은 이후의 에델발드에 대한 평가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9세기 글로스터 수도원의 기부 리스트에는 에델발드가 머시아의 수녀원장의 친족을 “자살, 혹은 때려 죽였다”는 주장이 있어, 이것도 에델발드의 평판에 악영향을 미쳤다.

에젤바르드는 타트윈, 노셀름, 카스버트[15]의 역대 캔터베리 대주교의 임명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보니파티우스의 강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에델발드가 교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졌다는 증거가 있다. 그 후 보니파티우스가 캔터베리 대주교 카스바트에게 보낸 편지는 프랭크인 교회 회의, 특히 747년에 개최된 회의에 관한 많은 정보를 기재하고 있으며, 그 결의도 보니파티우스는 그 편지에 포함하고 있다.

보니파티우스는 커스버트에게 자신도 교회 회의를 열어야 한다고 분명히 시사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보니파티우스의 의도였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그 후, 크로베쇼(현재 그 장소는 불명)에서 회의가 개최되어, 에델발드가 참석해 의장을 맡았을 것으로 보인다. 회의는 교회와 세속세계와의 관계에 관심을 갖고, 성직자들의 많은 과도를 비난했다.

회의는 수도사와 일반 신도의 관계를 제한하고 수도사에게는 세속적인 활동이 허용되지 않는다고 재판했다. 세속적인 사업과 세속적인 노래는 모두 금지되었고, 특히 '애가'는 금지됐다. 그 2년 후인 749년, 갬레의 교회 회의에서 에델발드는 교회령을 요새와 다리의 건설 의무를 제외한 모든 의무로부터 해방하는 칙허장을 발행했다. 요새와 다리의 건설 의무는 삼위일체 의무의 일부로 모든 사람에게 부과되었다. 이 칙허장은 머시아의 주교만이 증인이 되어 머시아 이외에서는 효력이 없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보니파티우스에서 영감을 받고 크로베쇼에서 추진된 교회개혁의 일부였을 가능성도 있다 .

752년, 에델발드와 쿠드레드는 다시 대립했고, 사본의 한 버전에 따르면, 쿠드레드는 버퍼드에서 "그 에젤바르드를 패주시켰다". 에델발드는 죽을 때까지 서쪽 색슨인에 대한 권위를 다시 주장했던 것 같고, 이후 서쪽 색슨인 왕 퀴네울프가 757년 그의 통치 초기에 에젤바르드의 칙허장을 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757년, 에델발드는 탐워스 왕궁 근처 워릭셔 주 세킨턴에서 살해되었다. 베다의 '교회사'의 속편에 따르면 그는 "야간에 자신의 호위병이 배신해 살해되었다"고 되어 있지만 그 이유는 기록되지 않았다.왕이 사라진 머시아에서는 내전이 발발했다. 머시아의 테인중 한명인 베오른레드가 왕위에 오르지만 얼마 못가, 오파(Offa)가 베오른레드를 몰아내고, 머시아의 왕이 되었다.

오파의 치하에서 크게 번영한 머시아는 통치 초기인 760년에 웨일스의 로만 브리튼 세력인 포위스 왕국과 전쟁을 벌였고, 이후에도 위체와 마곤새테, 린지와 같은 미드랜드의 소왕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중 린지의 왕위까지 얻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762년 이후 켄트의 불안정한 상황을 이용한 것 같다. 켄트에는 공동 왕권의 긴 전통이 있었고, 동 켄트와 서 켄트는 별개의 왕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보통은 한 왕이 우세했다.

762년 이전에는 켄트는 에델베르트 2세와 에드벨트 1세에 의해 통치되었다. 에드벨트의 아들 에아드울프도 왕으로 기록되었다. 에델베르트는 762년에 사망했고, 에드벨트와 에아드울프가 마지막으로 언급한 것은 같은 해이다. 그 후 2년간의 칙허장에서는, 시게레드, 에어문드, 히버트 등, 켄트의 다른 왕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764년 켄트를 복속했고, 자신의 명의로 로체스터의 교회에 땅을 기증하였다. 켄트를 복속시키면서 직접 지배가 아닌 꼭두각시 왕을 내세워 간접 지배를 했다. 켄트의 또 다른 왕인 에그버트는 히버트와 함께 765년의 칙허장에 등장한다. 그 후, 이 칙허장은 오파에 의해 승인되었다.

서식스의 경우 760년경부터 오스문트, 오스라크, 앨프발트, 엘드울프, 그리고 시기 미상이나 오스왈드가 차례대로 서식스의 왕위에 올랐는데, 문제는 이들 다섯 모두 공동왕이었던 상태였다. 결국 771년에 오파가 이끈 머시아의 군대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서식스 왕국을 점령했고, 772년에는 서섹스 엘더만으로 강등된 오스왈드를 필두로 오스문드, 엘프발트, 오스라크 등을 증인으로 서섹스를 자신의 토지로 선포하고 서섹스 왕국을 지배하는데 성공했고, 이후 차츰 머시아인 귀족들을 서식스에 심어 직접 통치를 하려고 계획했다.

하지만 776년 켄트인들이 머시아에서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켰고, 오트포트에서 양측이 격돌하나 머시아군은 봉기를 진압하는데 실패한다. 780년대에 그는 자신의 딸 에아드부흐와 결혼한 웨식스의 베오르트리치와 동맹을 맺어 브리튼 남부 대부분에 머시아의 패권을 확장하여 웨식스와 동앵글리아를 거의 속국으로 둘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대한 왕국이 되면서 785년 켄트를 재정복하면서 켄트, 서식스을 포함한 남동부의 완전한 통제권을 되찾았다.

동앵글리아의 경우 664년 이후 엘드왈프시기부터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해 749년 엘프왈드가 사망하자 동랭글리아의 왕위는 세명의 왕들인 베오나와 알베르트, 훈이 공동으로 가지게 되었다. 이들은 영국 역사상 최초로 화폐에 이름과 직위를 세긴 왕들이었으나 760년까지의 치적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발굴된 화폐들을 보았을 때 이들 또한 선대와 마찬가지로 동앵글리아 내의 화폐 사용의 보편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시기 미상이나 베오나와 알베르트, 훈이 사망하고 애설래드 1세를 거쳐 에델베르트가 779년쯤에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653년 애설헤레로부터 시작해 에델베르트가 즉위하기까지 명목상의 왕권은 머시아로부터 존중받았지만 엘드울프때부터 동앵글리아 또한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해 베오나와 알베르트. 훈에 이르면서 화폐에 자신들의 이름과 지위를 세기면서 독자성을 유지하려거 하자 머시아의 왕인 오파는 동앵글리아의 행보에 대해 이들이 독립할 것을 우려, 결국 동앵글리아 왕실의 화폐 주조에 대해 간섭하기 시작했다.

794년 바이킹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인해 왕권이 약해진 동앵글리아의 애설버트 2세는 지역 방위의 강화 및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화폐에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를 상징하는 암늑대를 세기면서 라틴어인 REX를 화폐에 세겨 발행했다. 하지만 에델베르트의 행보에 대해 오파는 그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해 왕비인 키네스리스와 모의해 자신의 딸 엘프스리스와의 약혼을 미끼로 헤리퍼드셔의 왕가의 영지인 서튼 혹은 인근 마덴으로 에델베르트를 불려들인 후 참수형을 선고해 처형당하면서 우핑 왕가가 단절되었고, 오파가 796년 죽을 때까지 동앵글리아를 통치했고, 그의 통치는 강압적이었다.

웨식스의 경우 퀴네울프가 757년에 웨섹스의 왕위에 머물렀고, 서식스로부터 정복한 국경지역의 대부분을 되찾았다. 오파는 779년에 벤징턴 전투(옥스포드셔)에서 퀴네울프에게 대승리를 거두고, 템스강을 따라 토지의 일부를 탈환했다. 이 날짜 이전의, 확실히 진정한 칙허장으로, 오파의 이름과 함께 퀴네울프가 하위왕으로 기록되어있었던 것은 나타내지 않고, 오파가 퀴네울프의 상위군주가 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786년, 퀴네울프 살해 후, 오파는 개입하여 베오르흐트리치를 웨식스의 왕위 오르게 압력을 가했다. 오파가 베오르흐트리치의 주장을 지지하지 않더라도, 그 후 곧 베오르흐트리치는 오파를 어느 정도 상위군주로 인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오파의 통화는 웨식스 왕국 전체에서 사용되었고, 베오르흐트리치는 오파의 사후에 처음으로 자신의 화폐를 주조했다. 789년, 베오르흐트리치는 오파의 딸인 이드바와 결혼했다. 연대기에는 두 명의 왕이 협력하여 에그버트를 '3년간' 프랑크 왕국으로 추방하고, '베오르흐트리치가 오파의 사위였기 때문에 오파를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가 중에는 연대기의 '3년간'은 잘못되어 '13년간'이라고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에그버트의 망명은 789년부터 802년까지 계속된 것이지만, 이 읽는 방법에는 이론이 있다. 이드바는 알프레드 대왕의 전기를 쓴 9세기 수도사 어서가 언급하고 있다. 어서는 이드바는 "왕국의 거의 전역에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말했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따라 폭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웨섹스에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권력이 무엇이든, 그것은 확실히 아버지인 오파의 의지와 관계가 있었다.

오파가 웨섹스에서 우위를 차지한 것은 779년에 퀴네울프를 꺾었을 때였다면 강 남쪽에서의 성공이 남동부 개입의 필수 조건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견해에서는, 784년경의 켄트의 에그버트의 죽음과 786년의 퀴네울프의 죽음이, 오파가 켄트를 지배해, 베오르흐트리치를 자신의 세력권에 편입하는 계기가 된 사건이다. 이 사건의 해석에서는 역사가의 일부가 믿고 있듯이 764년부터 765년 이후에는 오파가 켄트를 지배하지 않았던 것도 상정되고 있다.

오파의 혼인 관계는 792년에 딸 엘프레드가 캐터릭에서 노샘브리아의 에델레드 1세와 결혼했지만 노섬브리아는 오파의 세력권 밖에 있었다. 한편 760년 시작된 웨일스의 포위스 캄브리아 편년사에
따르면 778년, 784년, 796년까지 포위스를 비롯한 웨일스의 로마 브리튼족 왕국들과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때문에 오파는 즉위 당시인 757년부터 796년까지 오파의 제방이라 불리는 방어 구조물을 머시아와 웨일스 사이의 경계선을 따라 토벽으로 축조된 해자가 있는 방벽을 축조했다.[16]

오파는 기독교인의 왕으로 통치했으며, 카롤루스 대제의 고문인 엘퀸으로부터 그 경건함과 '신의 가르침을 백성에게 가르치는' 노력을 칭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캔터베리 대주교 옌베르트와 대립했다. 옌베르트는 켄트의 에그버트 2세의 지지자였지만, 그것이 오파가 켄트에 개입했다고 여겨지는 760년대에 갈등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다. 오파는 에그버트가 캔터베리에게 준 토지의 양도를 취소한 것 외에 오파가 소유하고 있던 쿠컴 수도원을 옌베르트가 요구한 것도 알려져 있다.

786년,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교황 특사를 잉글랜드에 파견하고, 교회의 상태를 평가하고, 브리튼 섬들의 왕, 귀족, 성직자의 지침이 되는 교회법을 정했다. 이것은 597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앵글로 색슨인을 개종시키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한 이후 교황이 영국에 파견한 최초의 사절단이었다.

사절단은 오스티아 주교 조지와 토디 주교 테오필락트였다. 그들은 먼저 캔터베리를 방문했고, 그 후 오파의 궁정에서 맞이했습니다. 오파와 서색슨 왕 쿠네울프는 사절단의 목적이 논의된 회의에 참석했다. 그 후 조지는 노샘브리아에 갔고, 테오필락트는 마시아와 '브리튼의 일부'를 방문했다. 사절단이 교황 에드리안에게 보낸 사절단의 보고서에는 조지가 노샘브리아에서 개최한 회의와 거기에서 발행된 성직자 법전의 세부사항이 기재되어 있지만, 테오필락트의 사절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거의 남아있다. 하지 않습니다. 북부 회의 이후 조지는 남부로 돌아와 오파와 옌베르트가 참석한 또 다른 회의가 열렸고, 거기서 성직자 법전이 발행되었다.

787년 오파는 리치필드에 대항하는 대주교구를 설립하여 캔터베리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문제는 786년에 교황사절단과 논의되었음에 틀림없지만, 현존하는 기록에는 그 일은 적혀 있지 않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787년에 첼시에서 '논쟁이 많은 교회 회의'가 열려 새로운 대주교구 설립이 승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교회 회의는 사절단이 열린 제2회 회의와 같은 집회였다고 여겨지지만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이미 리치필드의 주교였던 히게바트는 새로운 대주교구의 최초이자 유일한 대주교가 되어 788년 말까지 로마로부터 권위의 상징인 팔륨을 받았다.

새로운 대주교구에는 우스터, 헬레포드, 레스터, 린제이, 도목, 엘름햄 주교구가 포함되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중부 앵글리아의 영토였습니다. 캔터베리는 남부와 남동부의 주교구를 보유했다.

새로운 대주교구 창설에 관한 몇 가지 기록은 오파의 통치가 끝난 후 거슬러 올라간다. 사건의 두 가지 버전은 오파가 죽은 직후 머시아의 왕이 된 쾬울프와 798년 교황 레오 3세 사이의 서신의 형태로 나타났다. 쾬울프는 편지에서 오파가 새로운 대주교구의 창설을 원했던 것은 옌베르트에 대한 적의로부터였다고 주장하지만, 레오는 교황청이 창설에 동의한 유일한 이유는 머시아 왕국의 규모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코엔울프와 레오 모두에게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있었다. 코엔울프는 레오에게 런던을 유일한 남부 대주교구로 삼으라고 간청했지만, 레오는 쾬울프의 제안을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파의 영토의 넓이와 옌베르트 및 켄트의 관계는, 확실히 오파가 새로운 대주교구의 창설을 요청한 요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코엔울프의 버전은 독립적인 뒷받침이 있고, 엘퀸이 에델하드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캔터베리 대주교구가 "아무래도 합리적인 고려가 아니라 권력에 의해 분할된 것 같다"는 의견이 담겨있다. 에델하드 자신은 나중에 리치필드에게 팔륨을 수여한 것은 "기만과 오해를 초래하는 시사"에 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리치필드에 대주교구가 설립된 또 다른 이유는 오파의 아들인 엑크프리스와 관련이 있다. 하이게베르트가 대주교가 된 후, 그는 엑크프리스를 왕으로 서임했습니다. 이 의식은 하이게베르트 승격 후 1년 이내에 이루어졌다. 옌베르트는 의식 집행을 거부했고, 오파는 그 목적을 위해 대체 대주교를 필요로 할 수 있었다.

이 의식 자체는 두 가지 이유로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록에 남아 있는 앵글로 섹슨의 왕의 서임으로서는 처음이며, 다른 하나는 엑크프리스가 아버지의 생존 중임에도 왕위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것으로 오파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피핀과 루이가 교황 하드리아노에 의해 왕으로 서임되었음을 알았을 것이며, 아마도 프랭크 왕궁의 당당한 위엄을 모방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른 전례도 존재했다. 마시아의 에델레드는 생전에 아들 코엔레드를 왕으로 지명했다고 한다.새로운 대주교구가 창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옌베르트는 국내 수석 성직자의 지위를 유지했고, 휴게벨트는 그의 지위를 양보했다.

옌베르트가 792년에 사망하자 에델하드가 후임이 되었고, 이번에는 상급 성직자가 된 휴게벨트에 의해 서임되었다. 그 후, 에델하드는 칙허장의 증인으로 등장해 휴게벨트 빼고 회의를 주재하고 있기 때문에 오파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권위를 계속 존중한 것 같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카롤루스 대제에게 오파에 대해 언급하는 편지가 남아 있지만 발신 날짜는 알 수 없다. 784년경일지도 모르고, 791년경일지도 모른다. 이 편지에서 하드리아노는 그에게 도착한 소문을 말한다. 오파가 카롤루스 대제에게 하드리아노를 퇴위시켜 프랑크인 교황을 선출하도록 제안했다고 한다. 하드리아노는 그 소문을 전혀 믿지 않지만, 그가 우려했던 것은 분명하다.

하드리아노는 소문의 근원으로 꼽고 있는 오파와 카롤루스 대제의 적의 이름은 들려지지 않았다. 이 편지가 786년의 사절단의 파견 시기와 관계가 있는지는 불명하다. 만약 사절단 이전이라면, 사절단은 부분적으로 화해를 목적으로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편지는 사절단 뒤에 쓰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오파는 교회의 관대한 후원자로 성 베드로에게 바쳐진 교회와 수도원을 여러 개 설립했다. 그 중에는 아마도 그가 790년대 초에 설립한 성 앨번스 수도원이 있다. 또한 그는 로마에게 매년 365 만쿠스를 주겠다고 약속했다.[17] 종교 시설의 관리는 당시 통치자가 가족을 기르는 방법 중 하나이며,이 목적을 위해 오파는 자신의 사후에도 아내와 자손들의 소유물 되도록 했다. 종교 시설을 세속적인 재산으로 취급하는 이 정책은 많은 헌장이 그 땅을 일반인에게 양도하는 것이 아니라 소규모 성직자의 설립과 기부를 보여준 8세기 초부터의 변화를 나타냈다.

770년대, 에젤불이라는 이름의 여자 수도원장[18]이, 위체의 영토에 있는 종교 시설의 복수의 임대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인수는 "투기자들이 포트폴리오를 모으는 것"이라고 평가 받았다. 에젤불이 이 땅을 소유한 것은 키네스리트에 의한 종교적 땅의 지배를 기조하고 있었고, 이 패턴은 9세기 초에 코엔울프 왕의 딸인 쿠웬리스에 의해 계승되었다.

오파나 웨섹스의 이네가 로마에 스콜라 색소눔을 설립했다고 전통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스콜라 색소놈은 로마에서 봉사한 색슨인 민병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지만, 결국 로마를 방문하는 영국인을 위한 여관으로 발전했다.

상술한대로 오파는 카롤루스 대제와 교류했는데, 양자의 교류를 시작한 시점은 오파의 통치의 마지막 12년간에 한한 것 같다. 780년대 후반 또는 790년대 초반의 편지에서 엘퀸은 오파가 교육을 장려한 것을 축복하며 오파의 아내와 아들인 키네스리스와 엑플리스에게도 안부 인사를 편지로 전하고 있다. 다만 후술할 내용으로 인해 그 관계는 매우 불안정해보였다.

789년경, 또는 그 조금 전에, 카롤루스 대제는 아들 카를과 오파의 딸중 한명과의 결혼을 건의했다. 오파는 이에 맞서 아들 엑크프리스도 카롤루스 대제의 딸 베르타와 결혼하도록 요구했다. 카롤루스 대제는 이 요구에 분노했고, 영국과의 접촉을 끊고, 머시아의 선박이 자신의 항구에 상륙하는 것을 금지했다. 엘퀸의 편지에서 790년 말까지 분쟁이 아직 해결되지 않았고, 엘퀸이 평화협상에 협력하기 위해 파견되기를 원했던 것이 분명하다. 결국, 외교 관계는 회복되었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세인트 밴드릴의 수도원장 게르볼트의 중개에 의한 것이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794년 프랑크푸르트 공의회에서 잉글랜드 교회의 지원을 요구했지만, 거기서는 787년의 제2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통과된 규범이 부정되어 스페인의 주교 펠릭스와 엘리판두스의 이단이 비난되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796년 오파에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현존하고 있으며 오파가 카롤루스 대제에 보낸 이전 편지를 언급하고 있다. 이 두 왕의 서한은 잉글랜드의 외교사에서 현존하는 최초의 문서가 되었다.

이 편지는 주로 대륙에서 앵글로 섹슨 순례자의 지위와 외교상의 선물에 관한 것이지만, 앵글로 섹슨인과 프랑크인의 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밝히고 있다. 카롤루스 대제는 오파를 '형제'라고 부르며 대륙에서 브리튼 섬으로 보내진 검은 돌이나 브리튼에서 프랑크족에게 보내진 외투(혹은 천)의 거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카롤루스 대제의 편지에는 잉글랜드의 망명자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켄트의 왕족인 에드버트 프랑과 같은 인물로 보이는 오드버트의 이름도 포함되어 있다. 웨섹스의 에그버트도 오파에서 도망쳐 프랑크족의 궁정으로 망명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카롤루스 대제의 정책에는 오파에 반대하는 세력에 대한 지원이 포함되어 있던 것은 분명했고, 에그버트와 에드버트를 보호한 것 외에 노샘브리아의 에델레드 1세에게도 선물을 보냈다.

796년까지 남부 브리튼에서의 사건은 오파와 카롤루스 대제의 싸움으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양자의 힘의 차이는 엄청났다. 796년까지 카롤루스 대제는 대서양에서 헝가리 평원까지 퍼지는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그에 비하면 오파는 분명히 일국의 군주이기는 하나 그가 통치하는 머시아는 카롤루스의 프랑크 왕국과 비교하면 국력차가 너무 컸다.

다만 머시아의 국력이 강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머시아의 왕권 겉은 강하면서 화려하기만 할 뿐 실상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과도 같았다. 펜다 사후 체올레드와 애델발드 1세, 베오른레드의 사례처럼 왕위가 얼마든지 찬탈이 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이는 펜다가 정복한 지역의 지배권을 자신의 친족에게 나눠주었기 때문으로 현지 권력 기반을 가진 친족 그룹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싸웠을 가능성도 있다.

위체, 톰세테, 정체 불명의 가이니와 같은 소왕국은 그러한 권력 기반의 예이다. 혼인에 의한 동맹도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헌장에서 '독스' 또는 '프린셉스'라 불리는 경쟁하는 유력자가 왕위를 찬탈할 가능성이 높았으며, 때문에 머시아 왕은 지도적인 귀족에 불과했다. 오파는 아들 엑플리스의 라이벌을 배제하고 신하의 왕의 지위를 낮추고 때로는 왕위 계승자의 지위로 낮추어 마시아 왕권의 안정성을 높이려고 한 것 같다.

오파가 일련의 방어용 요새 도시, 즉 라고 불리는 요새화된 마을을 건설했다는 증거가 있다. 그 위치는 일반적으로 일치하지 않지만, 베드포드, 헬레포드, 노샘프턴, 옥스포드, 스탠포드 등이 포함될 수 있다. 이 성채 도시는 방어 목적 외에 행정의 중심지이기도 하고, 지역의 시장으로서 기능하고, 마시아 경제가 미들랜드의 사람들의 집단으로서의 기원으로부터 변화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버는 1세기 후에 알프레드 대왕이 덴마크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성공적으로 실시한 방어 전술의 주요 예가 되었다.

그러나 오퍼는 버와 관련된 경제 변화를 반드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버의 이점을 모두 가정했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749년, 마시아의 에델바르드는 요새와 다리를 건설할 의무를 제외한 모든 의무로부터 교회령을 해방하는 칙허장을 발행했습니다. 이 의무는 트리노다 네세시타스의 일부로 모든 사람에게 부과되었다.

오파의 켄트 칙허장은 그가 같은 부담을 거기의 보조금 수급자에게 부과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는 의무가 마시아 밖으로 퍼져 있다는 징후일 수 있다. 이러한 부담은 '이교도의 선원'의 위협에 대한 오퍼의 대응의 일부였다.

오퍼는 자신의 이름으로 법을 발행했지만 그 세부 사항은 남아 있지 않았다. 이 법은 알프레드 대왕이 자신의 법전 서문에서 언급한 부분에서만 알려져 있습니다. 알프레드는 오파, 웨섹스 이네, 켄트의 에델베르트 법률을 '가장 공정하다'고 여겨 자신의 법전에 도입했다고 언급하고 있다.

한편 머시아의 화폐는 8세기 초, 유통하고 있던 세타였다. 세타는 작은 은화였으며 주조자와 주조 된 왕의 이름은 새겨지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동시대 사람들에게 페니라고 불리며, 웨식스 이네의 법률에서 언급되었다.

이 경량 화폐는 아마 760년대 후반부터 770년대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두 번째 중간 중량 화폐는 790년대 초반 이전에 확인되었다. 이 새로운 중간 중량 화폐는 대체 된 페니보다 무겁고 폭이 넓고 얇고 당시 카롤링거 왕조의 통화 개혁에 의해 새롭게 주조되었다.

새로운 페니에는 오퍼의 이름과 화폐의 주조원인 주조자의 이름이 거의 예외없이 새겨져 있었다. 화폐개혁은 오파 자신의 조폐국을 넘어 퍼진 것 같고, 동앵글리아, 켄트, 웨식스의 왕들은 이 시기에 새로운 무거운 동전을 주조했다.

오파의 통치의 동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옌베르트, 그리고 792년 이후에는 에델하드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옌베르트의 동전은 모두 나중의 중간 동전이 아니라 가벼운 동전이었다. 또 780년대 혹은 그 이전에 런던 대주교였던 에드벨트가 동전을 발행했다는 증거도 있다. 오파는 옌베르트와의 논쟁으로 에드벨트에게 동전 주조권을 인정했을지도 모르지만, 리치필드 주교구가 대주교로 승격했을 때 그 권리는 박탈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중동화에는 당시 프랑크 왕국의 통화를 웃도는 예술성이 높은 디자인이 꾸며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오파의 동전 초상화는 "앵글로 색슨의 화폐 주조의 역사 전체 중에서도 유례없는 섬세한 표현"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동전에 그려진 오퍼의 초상화는 볼륨있는 컬 헤어의 "인상적이고 우아한" 초상화와 앞머리와 꽉 컬 헤어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를 입고있는 동전도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묘사는 오파의 몰드 장인이 다양한 예술적 원천으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오파의 아내 키네슬리스는 화폐 주조업체 에오바가 주조한 일련의 주목할 만한 페니 중에서 동전에 이름이 붙여지거나 그려진 유일한 앵글로 색슨의 왕비이다. 이들은 아마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노스 6세 통치의 동시대 동전에서 파생된 것 같습니다. 콘스탄티노스 6세는 어머니인 후 황후 이레네의 초상화를 그린 시리즈를 주조했지만 동로마 화폐에는 이레네의 옆모습이 아닌 정면의 흉상이 그려져 있기 때문에 직접 모델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792년에서 793년 사이에, 엔베르트가 사망하고, 에델하드가 후임이 되었을 무렵, 은화는 2번째의 개혁이 행해졌습니다. 이 "무거운 동전"에서는 페니의 무게가 다시 증가하고 표준화 된 초상이 없는 디자인이 모든 조폐국에서 도입되었습니다. 이 동전에는 옌베르트와 키네슬리스 동전은 한 장도 보이지 않지만 에델하드 동전은 모두 새로운 무거운 무게입니다.

대부분의 금화에는 주조자의 이름이 지정되어 있지만 각 금화가 주조된 조폐국은 표시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파가 사용한 조폐국의 수와 장소는 알 수 없습니다. 현재의 견해에서는 캔터베리, 로체스터, 동앵글리아, 런던의 4개의 조폐국이 있었다고 추정되고다.

오파는 796년 7월 29일에 사망했고, 아들인 엑크프리스 또한 재위 5개월 만인 141일이 흐른 12월에 갑작스럽게 죽자 오파의 칙허장에 몇번이나 언급된 엘더만으로 추정되는 커스버트의 아들인 쾬울프(Coenwulf)가 머시아의 왕위에 올랐으며, 전통 이켈 왕조의 직계가 아니었기에 C왕조의 개창자라고 볼 수 있다. 앵글리아 컬렉션에 따르면 그는 펜다의 여동생과 웨식스 왕 첸왈흐의 자손으로, 펜다와의 혈연적 연관성을 들어 왕위를 차지했다고 나온다.

일단 왕위에 오른 쾬울프는 오파가 마무리하지 못한 대교구 증설을 해결하려고 했다. 쾬울프는 798년 교황 레오 3세에게 서한을 보내 대교구 증설의 이유에 대해 오파가 옌베르트에 대한 적의로부터였다고 주장하지만, 레오는 교황청이 승설에 동의한 유일한 이유는 머시아 왕국의 규모라고 대답하고 있다.

쾬울프와 레오 모두에게 상황을 이렇게 표현한 이유가 있었다. 쾬울프는 레오에게 런던을 유일한 남부 대주교구로 삼으라고 간청했지만, 레오는 쾬울프의 제안을 무시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켄트가 머시아의 세력권에 이탈하자 쾬울프는 머시아를 재정복할 필요성이 느꼈다. 당시 켄트는 사제였던 애드베르흐트 3세가 왕으로 있었는데 쾬울프는 애드베르흐트가 사제가 되었기에 더이상 켄트의 왕위 계승자가 아니라고 밝히며 교황 레오 3세에서 인정받지 않는 한 켄트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킬 생각은 없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캔터베리에서 주교구를 해체하고 런던을 남부 대주교구의 소재지로 삼는 것을 검토하도록 요구했다. 쾬울프의 이유는 켄트에 대한 마시아의 지배력의 상실을 포함했을 가능성이 높다. 레오는 대주교구를 런던으로 옮기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같은 편지에서 애드베르흐트가 이전에 사제로 서품되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자격이 없다는 데 동의했다.

허가가 내리자마자 쾬울프는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머시아인은 애드베르흐트를 잡고, 두 눈을 뽑아내고, 양손을 잘라내고, 사슬로 묶은 후 머시아에 끌고다. 나중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애드베르흐트는 쾬울프의 가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종교 시설인 윈치콤에 투옥되었다.

늦어도 801년까지 쾬울프는 동생인 카스레드를 켄트의 왕으로 세웠다. 카스레드는 807년에 사망할 때까지 통치하고, 그 후 쾬울프는 명실상부 켄트를 지배했다. 쾬울프는 809년의 칙허장에서 스스로를 '머시아인과 켄트의 왕'(rex Merciorum atque provincie Cancie)이라고 칭했다.

오파에 의한 에섹스 왕국의 지배 또한 쾬울프에 이르려 마무리 되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에섹스의 시게릭 왕은 798년에 로마로 순례를 떠나면서 시게레드에게 왕위를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시게레드는 811년 쾬울프의 칙허장 2통에 에섹스의 왕으로 등장하지만, 그 후 그의 칭호는 처음에는 하위왕에서 이후 엘더만으로 차례되로 격하되었다.

동앵글리아에 대한 정책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에드워드의 화폐 주조는 중지되어 805년경까지 쾬울프에 의한 새로운 화폐의 발행이 개시되었기 때문에, 쾬울프가 머시아의 지배를 강제적으로 회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베오르흐트리치의 통치하에서 웨식스와의 우호관계는 베오르흐트리치가 사망하고, 웨식스의 왕위가 카롤루스 대제의 궁정에 망명하고 있던 에그버트에게 넘어가는 것으로 끝이 나게 된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에그버트가 왕위에 머물렀던 같은 날, 위체의 에테르문드라는 이름의 영주가 켐프스포드에서 템스 강을 건넜지만, 역시 영주인 웨오스탄의 지휘하에 있는 윌트셔의 사람들에게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크로니클에 따르면, 에그버트는 켄트의 왕위를 주장했을지도 모르지만, 쾬울프의 통치 중에 왕위를 탈환하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에그버트는 통치 초기부터 머시아와 독립된 것으로 보였고, 웨식스의 독립으로 인해 쾬울프는 오파와 에젤바르드에 속한 남쪽 영국 패권을 주장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한 칙허장에서 '황제'의 칭호를 주장했지만, 이것은 10세기 이전에 그러한 유일한 앵글로 색슨 왕이었다. 796년 또는 797년에 웨일스인은 르드란에서 머시아군과 교전했다. 798년까지 쾬울프는 반격하는 입장이 되어, 귀네드왕 칼라독 업 메이리온을 살해했다.

810년대의 위네즈에서의 내전은 816년 또는 817년에 히웰 압칼라독이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끝나고, 쾬울프는 다시 침공해, 이번에는 스노도니아를 황폐시키고, 로스 근처의 웨일즈의 작은 영토이다 루프니오그를 지배하에 두었다. 817년 또는 818년에 앵글시에서 기록된 전투에 머시아인이 관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음 해 쾬울프와 그 군대는 다비드를 황폐시켰다.

노샘브리아 왕 에델레드는 796년 4월에 암살되었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후계자인 오스발드는 아르울프에게 왕위를 넘겼습니다. 800년, 알드울프는 알프문드를 살해했다. 알프문드는 765년부터 774년까지 통치한 노섬브리아의 왕 알프레드의 아들이었다. 알프문드의 죽음은 순교로 간주되었고, 그 후 머시아령의 더비에서 그의 성인 숭배가 발전했다. 이는 당시 머시아가 노섬브리아 정치에 관여했음을 시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쾬울프는 노샘브리아에서 추방된 알드울프의 정적을 환대했고, 그 결과 알드울프는 801년 머시아를 침공했다. 그러나 침공은 결착이 되지 않고, 대등한 조건으로 평화가 성립했다. 쾬울프는 알드울프가 왕위를 잃게 된 806년의 쿠데타 뒤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알드울프가 808년에 복귀 한 후에도 알드울프의 적을 계속 지원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한편 792년에 장벨트의 뒤를 이은 린지의 라우스에 있는 수도원의 원장이 된 에델하드는 802년 1월 18일, 교황 특권을 받았고, 캔터베리 대주교구뿐만 아니라 리치필드 대주교구의 모든 교회에 대한 권위를 다시 확립했다. 에델하드는 803년 10월 12일에 크로베쇼에서 공회의를 열고 결국 리치필드에서 하이게베르트의 대주교의 지위를 박탈했다. 그러나 하이게벨트는 수도원으로 물려난 상태였고, 하이게벨트는 머시아 교회의 대표로서 크로베쇼 회의에 참석했지만 수도원장으로 서명했다.

에델하드 대주교는 805년에 사망했고 울프레드가 뒤를 이었다. 울프레드는 뒷면에 쾬울프의 이름을 새기지 않는 화폐를 주조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받았으며, 이는 울프레드가 머시아 왕과 좋은 관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쾬울프와 울프레드는 808년에는 분명히 어떤한 이유로 사이가 나빠졌다. 교황 레오 3세부터 카를루스 대제에 향한 편지에는 쾬울프가 아직 울프레드와 평화를 맺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 후, 울프레드가 종교 시설의 일반 신도들의 통치를 공격하는 평의회를 주재한 816년까지, 추가 불화는 언급되지 않았다.

첼시에서 개최된 평의회에서 레오 3세와 그 전임자인 교황 하드리아노 1세는 오파와 쾬울프에게 서임권을 주었지만, 쾬울프에는 수녀원과 수도원에 대한 임명권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쾬울프는 당시 딸 쿠웬리스를 민스터 인 서넷의 여자 수도원장으로 서임한 지 얼마 안 됐다. 레오는 816년 사망했고, 그 후계자인 스테파노 4세도 이듬해 1월 사망했다. 새교황 파스칼 1세는 쾬울프의 특권을 인정했지만, 이것으로 다툼은 끝나지 않았다.

817년 울프레드는 쾬울프가 우스터 주교 데네바트에게 토지를 수여한 두 개의 칙허장을 보았으나, 그 후 울프레드가 쾬울프의 통치의 나머지 기간 동안 대주교를 맡았다는 기록은 없다. 한 기록에 따르면 울프레드와 쾬울프의 싸움으로 울프레드는 6년간 그 직장을 박탈당했고 그동안 세례는 하지 않았으나 이는 과장이었고 정직기간은 4년이었을 가능성 높다.

쾬울프가 사망한 821년, 런던에서 회의가 열렸고, 쾬울프는 대주교가 300하이드의 땅을 반환하고, 국왕에게 120파운드를 지불하지 않으면 울프레드를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울프레드는 이 조건에 동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 싸움은 쾬울프의 사후에도 계속 뒤따랐고, 울프레드와 쾬울프의 딸 쿠웬리스 사이에서는 826년이나 827년에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고 보였다..

쾬울프의 화폐는 오파와 그 동시대인 하에 확립된 광범위한 은화의 형태를 따르고 있다. 그의 첫 번째 화폐는 오파의 마지막 3년 동안 주조 된 무거운 화폐와 매우 유사했으며, 캔터베리와 동앵글리아 조폐국은 각각 에드버트 플레인과 에드왈드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초기 화폐는 런던 조폐국의 제품이었다.

798년 이전에는, 중앙에서 교차하는 3개의 방사형 선으로 구성된 디자인을 가진 새로운 3연식 화폐가 등장했습니다. 삼연식 화폐의 디자인은 당초 런던에서만 도입되었지만 켄트의 반란군에게 런던을 빼앗기면서 조폐소를 캔터베리로 이전한 후 재생산되었다. 동앵글리아에서는 주조되어 있지 않지만, 켄트의 부왕 카스레드의 이름을 딴 삼연식 화폐가 있다. 805년경, 남부의 3개 조폐국 모두에 새로운 초상화 화폐가 도입되었다. 810년경부터 다양한 뒷면 디자인이 도입되었지만, 그 중 일부는 많은 또는 모든 화폐 주조업체에 공통적이었다. 동시기 켄트의 로체스터에 새로운 조폐소가 있었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쾬울프는 821년 플린트셔의 홀리웰 근처의 베이싱베르크에서 웨일스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다가 사망했고, 동생인 체올울프 1세가 뒤를 승계했고, 형인 쾬울프가 진행하려 했던 웨일스 공격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캄브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822년 귀네즈의 요새가 체올울프의 군대에 의해 공격받아 파괴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무리한 귀네드 왕국 원정으로 국력이 크게 쇠퇴해지면서 이에 불만을 느낀 머시아인들이 823년 5월 26일, 체올울프를 추방시키고 이켈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하지만 그 가계는 불명한데다가 지위도 높지 않았던 베오른울프(Beornwulf)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고, 후세 역사사들에 의해 B왕조의 시조로 보게 된다. 즉위 직후 베오른울프는 성 베드로 수도원[19]을 재건했고, 824년과 825년에 캔터베리 대주교 울프레드와 함께 크로페쇼[런던]에서 두 번의 공회의를 주재했다. 하지만 825년 엘렌둔(Ellendun)[21]에서 웨식스의 에그버트 왕의 군대와 대치했다. 자세한 것은 불분명하지만, 이 싸움은 머시아의 비참한 패배로 끝나고 역사가는 이것을 이른바 머시아 패권의 종말로 간주하고 있다. 같은 해 에그버트의 아들 애설울프는 켄트를 침공하여 친머시아파의 왕인 발드레드를 몰아내 켄트를 정복한다.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남잉글랜드에서의 머시아의 우위는 급속히 무너져 갔다. 에섹스와 서섹스는 에그버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같은 해 동앵글리아는 에그버트에게 머시아인에 대한 보호를 요청했다. 베오른울프는 동앵글리아의 반란을 진압하려 했으나 그과정에서 전사한다. 베오른울프에게 후계자가 있는지 불명이나 그의 뒤를 이은 왕은 이켈 왕조의 혈통조차 이은지 불명의 루데카로 왕으로 세워지기 전까지 베오른울프이 군사 사령관이였다.

루데카 또한 다음해인 826년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동앵글리아를 무력으로 복속시키려고 했으나 다섯명의 엘더만들과 함께 전사하였고, 그결과 머시아의 군사력은 더 약해졌다. 그의 뒤를 이어 위즐라프가 머시아의 왕위에 오르며 W왕조를 개창한다.

하지만 3년 후 829년 웨식스의 에그버트가 머시아를 침공하여 위그래프를 왕위에서 쫓아냈다. 에그버트는 830년의 어느 시기까지 머시아를 지배했고, '머시아 왕'을 의미하는 'Rex M'의 칭호를 새긴 동전을 런던에서 주조해 발행했다.

이후 연대기에는 830년에 위즐라프가 "머시아의 왕위를 회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즐라프의 왕위 복귀는 역사가에 의해 일반적으로 에그버트의 머시아 지배의 종말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특히 역사가 프랭크 스텐턴은 연대기의 문언에서 위즐라프가 왕국을 탈환했을 가능성이 높다. 836년의 헌장도 당시 위즐라프가 독립된 통치자로서 행동하고 있던 증거로서 인용되고 있다. 거기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와 11명의 주교가 참석한 레스터셔의 크로프트에서의 공회의가 기록되어 있다.

위즐라프는 공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을“내 주교, 총독, 행정관”이라고 부르며, 이는 자신의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남부 교회에 대한 어느 정도의 권위도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머시아인의 속국이었던 에식스는 머시아인의 지배하에 되돌려졌을 수 있습니다. 위즐라프의 엘더만으로 여겨지는 에식스의 시게릭은 829년부터 837년 사이에 하트퍼드셔에서 칙허장을 발포했습니다. 에그버트가 조폐국의 지배권을 잃었다고 생각되는 런던은 위즐라프의 두 번째 통치 이후에도 머시아인의 마을이었다. 버크셔도 마시아인의 지배하에 돌아온 것 같지만, 이것은 위즐라프의 통치 후까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웨섹스의 새로운 세력을 감안할 때, 아마도 더 놀라운 것은, 게위스인(9세기의 웨스트 색슨 국가의 선구자)의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던 템즈강 중류역의 영토가, 확실히 머시아인의 손에 남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부에서는 위즐라프 또는 후계자인 베오르흐트울프가 853년 이전의 어느 시점에 머시아에 대한 반란이 기록된 시점에서 웨일스를 머시아인의 지배하에 되돌렸다..

위즐라프가 “내 두 번째 통치의 첫 해”라고 부르는 831년의 칙허장은, 드로이트위치 근처의 윅볼드에서 발행되었다. 위즐라프가 권력 회복으로부터 1년 이내에 발행한 이 칙허장에서, 에그버트의 통치권을 언급하지 않았다.

동앵글리아에서는 에셀스탄 왕이 아마 827년경에 화폐를 주조했을 것입니다만, 머시아에서 위즐라프가 권력을 회복한 것으로 에그버트의 영향력이 약해진 후의 830년경일 가능성이 높다. 동앵글리아 측의 이 독립 표현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베오른울프와 루데카 모두의 패배와 죽음의 원인은 아마 에셀스탄에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820년대 후반 웨섹스의 갑작스런 권력의 상승과 그 후의 이 지배적인 지위 유지의 실패는 근본적인 원인을 찾고 있는 역사가에 의해 조사되어 왔습니다. 머시아의 붕괴의 원인으로 왕조의 불안정성이 시사되고 있다. 820년대는 확실히 왕가의 불안정한 시대이었다.

머시아와 웨섹스의 통치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론을 평가하기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웨식스가 안정적인 공납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성공의 요인이었거나, 웨식스의 색슨인과 브리튼인의 혼혈 인구, 자연의 국경, 유능한 행정관이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시사된다.

이 해의 사건에 대한 또 다른 설명으로, 웨식스의 운명은 어느 정도 대륙의 카롤링거 왕조의 지원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 있다. 라인 강과 프랑크의 상업 네트워크는 820년대 또는 830년대 어느 시점에서 붕괴했고, 830년 2월에는 황제 루도비쿠스 1세에 대한 반란이 발발했다. 이것은 830년대 이후에도 계속된 일련의 내분의 최초의 것이었다.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루도비쿠스가 에그버트 왕을 돕는 능력이 저하되었을 수 있다. 이 견해로는 프랑크의 원조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으로, 동앵글리아, 머시아, 웨식스는 외부로부터의 원조에 의지하지 않는 힘의 균형을 유지했을 것이다.

현 잉글랜드 남부에 대한 위즐라프의 권위는 회복이 완전하지 않았다. 에그버트의 영향력이 830년 이후로 저하된 것은 확실하지만, 머시아는 에섹스를 제외하고 남동부의 지배권을 되찾지 못하고, 동앵글리아는 독립한 상태였다.

에그버트의 승리 당시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울프레드는 머시아에 충성을 계속 맹세한 것 같다. 울프레드의 화폐 주조는 에그버트의 켄트의 화폐 주조 개시와 함께 종료되어, 838년의 칙허장에서는 에그버트가 캔터베리의 교회에 재산을 반환하는 것에 동의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가 그 전에 교회에서 재산을 압수하고 있던 것은 보인다.

에그버트의 아들 에델울프는 아버지의 통치 중에 켄트의 왕이었고, 켄트의 머시아인의 영향력이 계속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캔터베리의 크라이스트처치에게 영지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후 위즐라프는 839년쯤에 사망하였다. 아들인 위그만드는 공동왕이었고, 아버지가 살아있는 시기의 어느 시점에서 체올울프 1세의 딸 엘프레드와 혼인해 아들을 둔 상태였고, 이는 W왕조와 C왕조의 결합을 의미했다.

하지만 1년동안 단독왕으로 통치하다가 840년경 사망하였고, 아들인 위그스탄이 뒤를 잇지만 얼마 안가 위그스탄은 왕위를 거절하고 대신 수도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대신 위그스탄의 대 숙부라고 생각되는 베오르트울프가 왕이 되었다. 하지만 12세기 영국의 연대기 작가인 맬스버리의 윌리엄과 동시기의 인물인 수도사 우스터의 플로렌스는 베오르트울프의 아들 베오르트프리스가 위그스탄의 어머니인 엘프프레드와의 결혼을 원했지만 근친 관계가 너무 깊다고 생각한 위그스탄이 반대를 표하자 양심을 품고 위그스탄을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머시아 왕위에 오른 베오르트울프는 그 시작부터가 순조로웠다. 카틸 또는 사이페이리오그 전투에서 그는 귀네드의 왕 멜핀 플리히를 살해했고, 그가 북부 웨일즈를 정복할 수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841년 현재 링컨을 중심으로 한 머시아 린지주를 포함한 영국의 남해안과 동해안에 대한 바이킹의 습격이 기록되어 있다. 머시아 무역의 중심지인 런던시는 이듬해 공격을 받았다. 연대기에는, 런던에서 「대학살」이 있어, 이 때 대량의 화폐가 시내에 묻혀 있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버크셔는 840년대 후반의 어느 시점에서 머시아의 손에서 떠나 웨식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 844년 버크셔의 판본에 따르면 레스터 주교 체올레드는 베오르트울프로부터 토지를 받았기 때문에 그 시점에서 이 지역은 여전히 ​머시아의 수중에 있었다.

버크셔는 이전에 웨식스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지만, 베오르트울프의 즉위 이전에 두 왕국 사이에서 영토가 분할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변화의 본질이 무엇이든,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머시아의 엘더만인 에셀울프는 그 후에도 지위를 유지하다가 평화적으로 벜셔를 양도한 것으로 보고 있다.

836년에 위그래프가 크로프트에서 개최한 성직자 회의에 베오르트울프도 참석했다고 추정되는데, 이것은 머시아의 국왕이 소집한 마지막 성직자 회의였다. 베오르트울프의 통치와 그 이후로, 웨식스 왕국은 캔터베리 대주교를 옹호했고, 머시아보다 더 영향력이 있었다.

840년의 칙허장은 베오르트울프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칙허장은 원래 오파가 우스터셔의 브레돈 수도원에 준 토지에 관한 것이다. 이 땅은 우스터 교회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베오르트울프가 다시 이 땅의 소유권을 거둬들었다. 헌장에서 베오르트울프는 교회의 땅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만, 대신 주교로부터 많은 조세를 강요했다. "매우 뛰어난 말 4마리, 30개의 맨커스 반지, 능숙하게 만든 3파운드짜리의 접시, 4파운드 은 뿔피리 2개, 좋은 말 2마리, 파운드짜리 잔 두 개, 2파운드짜리 금박을 입힌 잔 하나를 왕에게 지불하게끔 되었다.

우스터 교구가 유일한 예가 아니었다. 당시 머시아왕이 교회와 재산을 싸웠다는 헌장은 그 밖에도 있다. 예를 들어, 849년 헌장에서 베오르트울프는 우스터 주교로부터 토지 임대를 받고, 그 보답으로 "주교와 그 커뮤니티의 더 확고한 친구"가 되고, 역사가 패트릭 워몰드의 말을 빌리면 "앞으로는 그들로부터 과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약속했다.

워몰드는 이 냉혹한 행위가 수도원에 많은 토지를 주었기 때문에 토지 소유지를 찾기가 어려워졌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이 문제는 1세기 이상 전에 베다에 의해 언급되었으며 요크 대주교 에그버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귀족과 노련한 왕족의 아들이 땅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전혀 없다”고 불평했다. 있습니다.

베오르트울프가 부정 행위를 인정한 것은 그가 그러한 의견의 차이로 귀족의 지지를 기대할 수 없었음을 시사하고, 왕권이 불안정했음을 나타낼지도 모른다.

토지 소유자는 면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 왕의 가족을 지지할 의무를 왕에게 지고 있었다. 840년대 후반의 착허장에 의해, 언덕 위의 브리든 수도원은, 베오르트울프의 소사나 사자(왕가의 매, 사냥꾼, 말, 및 그 종자를 포함한다)에게 음식이나 숙박 장소를 제공하는 의무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 이 면제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고, 수도원을 모든 부담으로부터 해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근 왕국과 해외에서 온 사자에게 식사를 제공할 의무는 면제에서 제외되었습니다.

851년, 바이킹군이 당시 아직도 섬이었던 사넷에 상륙해, 거기서 월동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350척의 배로 구성된 두 번째 바이킹군이 캔터베리와 런던을 습격하여 "머시아 왕 베오르트울프와 그 군을 패주시켰다"고 되어 있다. 바이킹은 에셀울프와 그 아들인 에셀스탄과 에셀바르드에게 패했지만, 런던에서의 머시아 화폐의 유통은 851년 이후 매우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영향은 컸다고 생각된다.

베올트 울프의 죽음을 기록한 동시대 자료는 현존하지 않았지만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후계자인 부르그레드는 22년간 통치했고, 874년 바이킹에 의해 왕위를 쫓기기 때문에 베오르트울프는 852년에 사망했다고 추측된다. 부르그레드의 칙허장에서 그의 통치는 852년 7월 25일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베오르트울프와 부르그레드 사이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아네레드라는 왕이 단기간 통치했을 가능성이 시사되고 있다. 그 증거는 'EANRED REX'로 새겨진 은화 1장이다. 이 은화는 베올트울프와 에셀울프의 은화의 일부와 유사점이 있으며 850년 이후에 제조된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왕, 아네레드는 노섬브리아를 통치해 840년에 죽었다고 생각되고 있지만, 이 모순을 해소하는 노샘브리아 왕의 다른 연대기가 제안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은화는 "남의 왕국의 무명의 통치자"의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아네레드가 베오르트울프의 뒤를 이은 것으로는 상정할 수 없다.

어째든 852년 베오르트울프의 친척으로 부르그레드가 머시아의 왕위에 올랐다. 853년의 부활절 이후에, 부르그레드는 웨식스의 왕 애설울프의 딸 애설스위드와 혼인했다. 이 혼인은 웨식스의 치프넘에 있는 왕궁에서 거행됐다. 이는 머시아가 웨식스의 패권을 사실상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853년에 부르그레드는 애설울프에게 전령을 보내, 머시아 서쪽의 웨일스인들이 자신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복속시키는 데 그의 도움을 구했다. 즉시 애설울프 왕은 부르그레드와 같이 웨일스인들에게 달려들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부르그레드가 웨일스의 반란을 진압한 지 12년 뒤인, 865년에 이교도 대군세가 도착하게 되면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2.1.1.6. 노섬브리아
노섬브리아는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 사이에 있었으며, 칠왕국 중 가장 늦게 세워진 국가로 원래는 버니시아(Bernicia)와 데이라(Deira)[22]라는 두 개의 왕국에서 기원되었다. 버니시아는 동부 요크셔 일대를 기반으로 했고, 데이라는 북부의 뱀버러, 린디스판, 컴브리 지방을 차지하고 있었다. 두 왕국 모두 처음에는 해안가 지방만을 통치했으나 차차 브리튼인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영토를 내륙 지방까지 넓혀갔다.
버니시아의 건국자 에사로 500년경에 버니시아를 세운 후 20년 동안 재위했으며, 그의 아들인 에오파가 547년까지 통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연대기에 이름으로 나와 있기에 실존 가능성에 대해서 후대 역사가들에 의해 의심받고 있으며, 이다(Ida)가 실질적인 건국자로 보고 있다. . 이후 559년에 이다가 사망하였는데, 버니시아 왕족들의 계보에도 없던 글리파가 즉위해 1년 동안 버니시아를 통치하다가 560년에 사망하였고, 이다의 장남으로 보인 아다가 즉위해 8년 동안 통치하다가 568년에 사망하고 그의 동생으로 보이는 애델릭이 뒤를 이어 4년 동안 통치하다가 572년 사망하고 테오도릭이 7년 동안 통치했는데, 이기간 동안 브리튼 세력인 북쪽의 레게드 왕국의 유리엔과 같은 북쪽에 위치한 스트라스클라이드 왕국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브리튼계 소왕국들을 통치한 그왈로그 압 렌노그, 모르칸트 불크, 그리고 웨일스의 귀네드 왕국의 오웨인 압 우리엔 동맹을 맺고 린디스판 섬을 3일간 포위했다.
이에 테오도릭은 이들과 싸웠으나 아르고에드 르위파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579년에 사망하였고, 글리파와 동일하게 이다의 계보에도 없던 프리투발트가 왕위에 올라 6년간 통치하다가 585년에 사망하고 계보가 모호한 후사가 왕위에 오른다.통치 중의 어느 시점에서, 레게드와 브리손 왕국의 스트라스크라이드, 엘멧의 연합군이 후사를 포위시킨 후 브리튼 섬으로부터 쫓아내는 데 거의 성공했다. 그러나 동맹은 브리튼의 다양한 부족들 사이의 분열로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590년경 레게드 왕 우리엔이 한때 동맹자 모르칸트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588년 데이라와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때 애델릭의 아들인 애델프리드(Æthelfrith)가 데이라의 왕 엘라를 죽였다.
593년 후사가 죽자 애델프리드가 버니시아의 왕으로 즉위했고,전임 왕인 후사의 친족의 추방시켰다. 애델프리드는 즉위와 함께 정복 전쟁을 시작했는데, 그대상은 섬의 선주민이었던 로만 브리튼인들로 600년경 지금의 노스 요크셔 캐더릭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도딘 왕국과 특정할 수 없는 앵글로 색슨족들 간의 전투인 카트레스 전투의 실체였을 가능성이 높다.
603년 지금의 스코틀랜드 서쪽에 있던 계일인 왕국인 달 리어타의 왕인 아단 막 가브란이 애델프리드에게 추방된 후사의 아들인 헤링을 앞세워 거진 대규모로 편성된 정예 부대를 이끌고 버니시아를 기습 공격했다. 베다에 따르면, 애델프리드는 열세의 군대를 이끌고 있었지만, 덱사스탄이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아단 막 가브란의 군대의 대부분은 죽이고 아단 자신도 도망했다. 아단의 아들 도망가르트는 전사하였지만 애델프리드에게도 희생이 컸다. 베다는 애델프리드의 형제 테오도바르도가 "지휘하고 있던 거의 모든 군대와 함께 궤멸되었다고" 기술되었고, 이후 버니시아와 달 리어타는 화의를 하게 되었다.

이후 604년 데이라를 공격해 애델릭을 죽이고, 데이라의 왕을 겸했다. 애델릭의 동생들은 저마다 이웃 국가들로 피신해야 했고, 애델프리드는 웨일스의 귀네드로 망명하면서 살아남은 다른 처남인 에아드위네(Ēadwine, 노섬브리아의 에드윈)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이후 애델프리드는 에아드위네는 머시아를 거쳐 동앵글리아로 망명했다.

애델프리드는 통치 후반, 아마 613년에서 616년 사이에 포위스 왕국을 공격하고 체스터 전투에서 그 군대를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포위스의 왕 세리프 살프가다우가 살해되었고, 세툴라라는 또 다른 왕도 살해되었다. 세투라는 아마도 로스의 카드와르 크리스반이었다.
또한 기도로 브리튼인을 돕기 위해 모인 뱅고온디 코에드의 수도사들도 학살했다. 베다는 그들이 무장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해 그를 반대했기 때문에 공격을 결심했다고 전하였다. 사망한 수도사의 수는 약 1200명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50명이었다고 한다.
애델프리드는 브리튼인을 불의하고, 수도사를 지키기 위해 계획을 변경시킨다는 전략적인 이유로 이를 살육한 것은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우선 수도사를 살해한 후, 애델프리드는 적군에게 승리했지만, 베다는 애델프리드의 부대도 상당한 손해를 입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와중에 데이라의 망명자 헬레릭은 엘멧의 왕 케레틱의 궁정에 있는 동안 독살되었다. 이 살해는 애델프리드의 공작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헤레릭의 죽임 이후 애델프리드는 에아드위네마저 처리하려 했다. 당시 에아드위네는 귀네드 왕국에서 나온 후 머시아를 거쳐 동앵글리아로 망명한 상태였기에 애델프리드는 동앵글리아의 왕 래드왈드(Rædwald)에게 여러 차례 뇌물로 에아드위네의 암살을 청탁했으나 래드왈드는 이를 거부했고, 616년, 되려 레드왈드는 에아드위네를 앞세워 북으로 진군했다. 베다는 이 전쟁은 단순히 에드윈의 건을 둘러싸고 싸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 전쟁은 두 명의 지배자 사이의 권력과 영토의 문제를 동반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델프리드는 레드왈드가 이끄는 군대에게 아이돌강의 싸움(아이돌강의 동쪽)에서 패해 죽였다. 베다는 레드왈드가 전군을 집결할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애델프리드의 군대는 열세였다고 말했다. 애델프리드가 죽은 후, 에드윈은 데이라뿐만 아니라 베르니시아의 왕이 되었고, 애델프리드의 아들인 에안프리드, 오수왈데, 오즈위그는 북쪽으로 도망쳐 달 리어타로 망명한다. 이후 에아드위네는 16년 동안 버니시아를 지배하며 레드왈드의 권유로 기독교로 개종했기에 버너시아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하지만 에아드위네는 632년 머시아펜다 왕과 그와 동맹을 맺은 웨일스의 소국중 하나인 귀네드 왕국의 캐드왈론 압 캐드판와의 전투 중 전사했고, 달 리어타와 픽트족들 사이로 전전하며 망명 중이었던 애델프리드의 장남 에안프리드가 돌아와 버니시아의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한다.[23]
당시 에안프리드는 켈트 기독교로 개종한 상태였으나 버니시아로 돌아온 후 다시 앵글로 섹슨 이교 신앙으로 회귀했다. 당시 버니시아는 16년 동안 기독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수의 기독교도들이 있어 주교구가 성립된 상태였기에 베다는 그의 귀환을 불쾌하게 여겼다. 애안프리드는 당초 펜다와 캐드왈론에 협력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가 D.P. 커비는 에안프리스가 에아드위네의 죽음을 곧바로 이용한 것이 분명했다는 것을 지적하고, 펜다, 캐드워론과 애안프리드를 포함한 '광범위한 동맹'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 당초 우호 관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베다는 634년에 애안프리드가 평화협상을 위해 “선택된 12명의 병사만 데리고” 카드와론으로 향했지만, 카드와론에게 죽었다고 전하고 있다.
애안프리드의 사망으로 동생인 버니시아의 오수왈데(Osuualde, 오즈왈드)가 왕이 되었다. 그 후, 오스왈데는 북쪽의 동맹자, 스코틀랜드인 및/또는 픽트인의 도움을 받아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헥섬에 가까운 헤븐필드에서 카드와론과 싸웠다. 전설에 따르면 전투가 벌어지기 전, 오수알데는 나무 십자가를 쳐들고 무릎을 꿇은 뒤 십자가를 땅 속 충분히 깊숙히 박아 세웠다. 그는 기도를 올리고 군대에 자신을 따를 것을 명했다.

아돔나누스 히엔시스가 쓴 콜룸바 성인전에는 좀더 긴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이오나 수도원장 세게너 막 피어크니가 오수알데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오수알데는 전투 전날 밤 성자 콜룸바의 환영을 보았으며, 콜룸바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강인할 것이며 남자답게 행동하라. 보아라, 내가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13] 이 밤이 지나면 막사에서 나가 전장으로 향하라. 주님께서 나에게 허하신 바 이번에 그대의 적들은 달아날 것이요 그대의 적수 카드왈론은 그대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임이요 이로써 전투에 승리한 그대는 행복하게 다스리리라.

오수알데는 자신의 환영을 신하들에게 이야기했고, 신하들은 전투가 끝난 뒤 자신들도 모두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헤븐필드 전투에서 브리튼인들은 수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패주했으며, 카드왈론 본인도 전사했다.

에아드위네가 버니시아, 데이라를 통틀어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군주였으나 노섬브리아에서 종교를 전파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오수왈데였다. 왕이 된 직후 그는 달 리아타의 아일랜드인들에게 자신의 백성을 개종시키기 위해 주교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처음에 "엄숙한" 주교를 보냈지 만 그는 선교 사업에 실패했고, 그 후 에이단을 보냈는데, 그는 더 온화한 접근 방식을 제안했다. 오스월드는 린디스판 섬을 에이단에게 주교좌로 주었다. 에이단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베다는 에이단이 설교할 때 오수왈데가 그의 통역자 역할을 했다고 언급했는데, 에이단은 영어를 잘 몰랐고 오스월드는 망명 중에 아일랜드어를 배웠기 때문이다.

헤븐필드에서의 승리 후, 오수왈데는 노섬브리아를 재통합하고 에드윈에 의해 중단된 버니시아의 패권을 회복했다. 베다는 오수왈데가 통치한 8년간은 패권을 쥐고 있었다고 말했다.[24]

오수왈데는 널리 군주로 인정받았던 것 같지만, 그 권한의 범위는 불명하다. 베다는 오수왈데가 "브리튼 섬의 모든 국가와 주를 지배하에 놓았다"고 주장한다. 베다가 지적했듯이, 브리튼 섬은 언어에 의해 잉글랜드인, 브리튼인, 스코틀랜드인, 픽트인들 사이에서 분할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다른 곳에서 픽트인과 스코틀랜드인을 공물로 한 것은 오수왈데의 형제인 오스위그였다고 말하면 베다는 자신의 주장을 약화시키고 있는 것 같다. 아일랜드의 자료인 티가낙 연대기에는 오수왈데의 통치 초기에 앵글로 색슨인이 단결해 오수왈데에 대항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 실패한 햄버 강 이남의 오수왈데의 패권을 끝내려는 시도를 보여줄지도 모른다.

633년 에아드위네의 패배에 참가한 머시아인은 햄버강 이남의 오수왈데의 권위에 장애를 가져온 것 같지만, 헤븐필드의 싸움 후, 오수왈데는 어느 정도 마시아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다. 펜더가 생포한 에아드위네의 아인 에드프리드를 죽인 것은 오수왈데와의 우호를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지만, 펜더가 살해에 독자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던 가능성도 있다.

오수왈데의 유골을 린지의 수도원으로 옮겼다는 베다의 이야기를 증거로 하면 오스왈드는 린지 왕국을 지배하고 있던 것 같다. 베다는 오수왈데가 외국 왕으로 그들을 지배했기 때문에 수도사들은 원래 유골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북방에서는 오수왈데가 고드딘을 정복한 것으로 추정한다. 아일랜드의 연대기에는 고드딘의 왕가의 거점이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에든버러의 포위가 638년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이 왕국의 종언을 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포위가 오수왈데에 의해 행해진 것은, 650년대에 그 지역을 오스왈드의 형제 오즈위그가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오수왈데는 웨식스와 좋은 관계에 있었던 것 같고, 그들의 왕 퀴네길스의 세례의 보증인이 되어 퀴네길스의 딸과 결혼했다. 그녀의 이름은 12세기 다람의 레지날드가 쓴 'Vita S. Oswaldi'라는 유일한 자료에만 기재되어 있으며, 그에 따르면 그 딸은 키네부르가였다고 하며 오수왈데에는 에델왈데라는 아들이 한 명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것이 퀴네부르가와의 결혼으로 태어난 아들인지 이전 관계에서 태어난 아들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에델월데가 데이라를 통치하기 시작한 것은 651년이기 때문에, 이 결혼에서 태어난 아들은 당시 이 지위를 맡기기에는 너무 젊었기 때문에, 오수왈데가 망명 중에 얻은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오수왈데의 치세는 펜다가 이끄는 이교도 머시아와의 충돌로 끝이 났다. 642년, 오수왈데는 머시아가 동앵글리아를 경략할 동안 머시아 북부를 공격했고, 펜다가 머시아 북부의 분봉왕으로 세운 에오와가 오수왈데의 편에 선다. 이에 동앵글리아를 굴복시킨 펜다는 군대를 이끌고 오수왈데를 요격했고, , 이때 머시아뿐만 아니라 웨일스의 포위스 왕국도 머시아의 우군으로 참전했다. 그결과 오수왈데는 오즈웨스트리의 메이저필드 전투에서 머시아의 군대에 맞써다가 에오와와 함께 죽었다.[25] 전투 후 펜다는 오수왈데의 시신을 잔혹하게 훼손시켰다. 베다는 오수왈데가 죽을 것을 직감하고 군인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여“기도하는 도중에 인생을 마쳤다”는 말을 언급하고 있다.

메이저필드 전투에서 전사한 오수왈데의 뒤를 이은 사람은 오수왈데의 동생인 오스위그(Ōswīg, 오스위우)였다. 오스위그는 즉위한 직후인 642년에서 644년 사이에 켄트에 망명 중이었던 아버지의 숙적이었던 에아드위네의 딸 에안플레이드를 왕비로 맞이했고, 그의 통치 초반인 642년부터 655년까지 브리튼의 대부분을 지배해 다른 앵글로 섹슨 왕들을 세우거나 폐위시킬 수 있는 패권을 지닌 펜다에게 거의 종속되었다.

오스위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미래의 노섬브리아 왕국은 여전히 ​​두 개의 다른 왕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티즈 강에서 포스 만까지 퍼진 북쪽 버니시아 왕국은 오스위우에 의해 통치되었다. 노스 요크 무어와 햄버강 사이에 있는 데이라 왕국은 오스위그의 통치 7년 동안 데이라는 라이벌인 데이란 왕가에 속한 배교자 오슬릭의 아들인 독립 왕 오스윈에 의해 통치되었다. 오스윈과 오스위우는 651년경에 충돌했습니다. 베다의 기록으로 전투가 시작하자 오스원은 병력 열세를 느끼고, 군대를 해산시킨 후 톤히레라는 병사만 데리고, 인근의 엘더만인 훈발트의 집에 숨었지만 훈발트의 배신으로 오스원은 오스위그의 프리펙투스인 에틸원에게 처형되었고, 데이라는 오스위그의 조카인 오데발트에 의해 통치되었다. 653년에 노섬브리아 왕국의 건국을 선언, 통일 국가인 노섬브리아가 건국되었지만 완전한 통일은 아직도 멀었다.

오스위그와 펜다의 관계는 642년에서 655년 사이 완전히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베다는 651년과 린디스판의 주교 에이단의 죽음 전 언젠가 펜다가 버니시아에 대규모 공격을 걸어 밤버러의 문에 도달했다고 한다. 아일랜드 연대기에 기록된 '펜더에 대한 오스위그의 전투'이라는 650년경의 기술은 이 작전을 가리키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펜더와 오스위그의 관계 개선은 650년대 초중반에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오스위그의 아들인 엘프리스(Ealhfrith)는 펜더의 딸 시네버(Cyneburh)와 결혼했고, 딸의 에일프레드(Ealhflæd)는 펜더의 아들 피다(Peada)와 결혼했다. 피다는 에이단의 후계자 피난(Finan)에 의해 하드리아누스의 장성 지역에 있는 애드 무룸(Ad Murum)에서 세례를 받았다. 페다와 엘프레드는 세드와 디우마를 포함한 선교사단을 데리고 그들의 땅에 교회를 설립했다.

655년 베다는 펜더가 대군을 이끌고 버니시아에 침공했다고 보고했다. 베다는 오스위그가 “평화의 대가로 헤아릴 수 없는 양의 왕관과 선물”을 제안했지만 펜더는 거부했다고 말했다. 오스위그는 승리가 인정되면 딸의 에르프레드를 교회에 바치고, 12개의 수도원을 창설하는 것을 맹세하고, 에르프리스에게 도움을 받고, 로이디스, 즉 리즈 지방에서 행해진 윈웨이드의 싸움으로, 작은 군대를 이끌고 펜더와 교전했다. 그는 승리했고, 펜더는 동앵글리아의 왕 에델헬레를 포함한 많은 동맹자들과 함께 살해되었다. 에일프레드는 펜더를 지원했지만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브리튼의 역사는 다소 다른 설명을했다. 여기에서는, 오스위우의 화의의 제의가 받아들여져 이우데우라고 하는 장소의 포위와 관련되어 있다. 이때, 애그플리드는 인질로서 펜다의 왕비 쿠네위스에 인도된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는 펜다의 동맹자의 대부분이 브리튼의 왕이었음을 시사하고, 카다파엘 압 쿠네위스가 오델발트에 합류하여 싸움을 피했기 때문에 카드메드(싸움을 피하는 사람)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쓰고 있다. 결전은 「가이우스의 들」에서 행해졌다.

그동안 우세했던 펜다의 뜻밖의 패배와 동앵글리아의 왕 에델헬레의 죽음에 의해, 오스위그가 브레트왈다가 되었다. 윈웨이드 전투에 이른 작전 중인 애델왈드의 애매한 처세가 이때 기록에서 모습을 끄는 것으로 이어진 것 같다. 한편 오데발트는 펜다와 남몰래 동맹을 맺고 655년 원와이드 전투에서 펜다를 편을 든 죄로 데이라 하위왕 자리에서 박탈되어 노스 요크셔의 수도사가 되면서 오스위그는 오수왈데의 아들인 알프리드를 데이라의 왕으로 삼았다. 펜다의 아들 페이다는 남쪽 머시아의 왕으로 자리잡았고, 오스위그는 왕국의 북부를 지배했다. 다른 종속 통치자는 머시아의 다른 곳에 정착한 것 같다.

또한 남쪽에서는 애델헬레의 형제 애델왈드가 오스위그의 원조와 혼인에 의한 친족인 켄트의 에오르센베르트 왕의 원조를 받아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 펜다의 여동생과의 결혼을 포기했기 때문에 펜더에 의해 영토에서 쫓겨난 웨식스의 첸왈흐도 이 시기에 오스위그의 원조를 받아 권력을 회복했을 가능성이 있다. 에식스인 선량왕 시게벨트는 오스위그의 동맹자였다. 오스위그 조카로 에안프리스의 아들 타로르칸도 이 시기에 픽트인들 사이에서 유력한 왕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스위그의 지배는 불과 3년 정도의 짧은 기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직접적인 원인은 아내에서 오스위그의 딸 에어풀레드에 의해 독살되었다고 하는 페이다의 죽음이었다. 이것은 아마 656년 부활절에서 일어났고, 오스위그는 머시아에게 주지사와 종속 국왕을 임명했다. 아마 659년 후반, 혹은 657년, 3명의 머시아 귀족들인 이민, 이타, 에드버트가 이끄는 반란에 의해, 펜다의 아들 울프헬레가 머시아의 왕으로 즉위해, 오스위그의 지지자를 머시아 밖으로 몰아냈다. 오스위그는 여전히 모를 수 없는 세력이며 공공연한 전쟁이 아니라 정치적 화해에 의해 위기는 해결된 것 같다. 오스위그의 친족인 툴룸헬레가 울프헬레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울프헬레는 머시아의 영향력과 권위를 남부 브리튼으로 확대했지만, 오스위그의 우위성을 계속 인정한 것 같다.

웨일스의 자료에 따르면 오스위그는 650년대 후반에 웨일스에서 군사 행동을 일으켜 전투를 피한 귀네드의 왕 카다파엘 등 이전에는 펜다의 동맹자였던 웨일스 소왕들에게 공물을 부과했다고 한다. 남부의 다른 지역에서는 오스위그의 동맹자였던 에식스의 시게벨트가 살해되었고, 형제인 스위스헬름이 대신 왕위를 차지했다. 스위스헬름은 기독교인으로 남아 있었지만, 오스위그와 아일랜드 노샘브리아 교회에서 거리를 두고 있었고, 스위즈헬름은 동앵글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660년 660년에 오스위그는 그의 아들 애그프리드를 전 동앵글리아 왕 안나의 딸인 애델프리드와 결혼시켰습니다. 664년, 휘트비의 공회의에서, 오스위그는 로마 교회의 관습을 받아들이고, 켈트 교회 소속이었던 린디스판의 코르만 주교는 노섬브리아를 떠났다. 비드는 이 논쟁은 윌프리드의 권고에서 로마 관습을 채택한 오스위그의 후계자 알프리드에 의해 정점에 도달했다고 썼다. 알프리드에게는 아일랜드계 노샘브리아의 관습이 침투하고 있다. 있었다고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비드가 쓴 것처럼 665년은 “1년에 2회 부활절이 축하된 해이며, 왕이 사순절을 마치고 부활절을 축하했을 때 여왕과 종자들은 금식 를 계속하고 가지의 주일을 경축하고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669년 새로이 켄터베르 주교로 부임한 타르수스의 테오도르를 접견한 오스위그는 그와 함께 로마로 순례하길 원했고, 이에 대한 준비를 1년 넘게 세웠으나 그러나 그는 병에 걸려 670년 2월 15일에 58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애그프리드가 왕위를 계승한다.

671년, 투리버스 전투에서, 에그프리드는 픽트족에 의한 기회적 반란을 진압했고, 그 결과 노샘브리아가 그 후 14년간 픽트족들을 지배했다. 같은 시기에 에델트리드는 에그프리드를 떠나 수녀가 되기를 원했다. 결국, 672년경에 에델트리드는 에그프리드를 설득하여 수녀가 되었고, 콜딩엄에 있는 에그프리드 왕의 이모인 에베가 수녀원장으로 있는 수녀원에 들어갔다. 1년 후, 에델트리드는 이리의 초대 수녀원장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베일을 쓰면서 요크 주교 윌프리드와의 긴 싸움이 일어났고, 윌프리드는 성회의 주교좌에서 추방되었다. 에그프리드는 두 번째 아내로 에오르멘부르크(또는 이우르민부르크)와 결혼했다. 그녀와 윌프리드 주교는 격렬한 적대 관계가 되었다.

674년, 에그프리드는 머시아 왕 울프헬레를 격퇴하고 린지 왕국을 탈취했다. 그리고 이시기에 에즈프리드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왕국에서 베네딕토 비스코프의 선교 활동을 지원하고 674년에 성 베드로에 바치는 수도원의 건설에 착수하기 위해 웨어 강 하구 근처의 토지 70 하이드를 그에게 주었다. 679년, 에그프리드는 토렌트의 싸움에서 이번에는 울프헬레의 형제로 자신의 매부이기도 한 에델레드의 지휘하에 마시아 군대와 다시 싸웠다. 에그프리드의 형제이자 데이라의 하위왕인 엘프윈은 이 전투에서 죽었고,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도르의 개입으로 린지는 머시아에게 돌려주어졌다. 엘프원의 사망으로 애그프레드는 데이라에 하위왕을 세우기보다는 직활 지배를 하기로 하면서 버니시아와 데이라는 노섬브리아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데이라는 쥬트족의 켄트와 같은 시기에 건국된 왕국이었지만 559/560년 이전까지의 왕들의 이름조차 이파라는 왕을 제외하면 어떠한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가 치적이 기록으로 남겨진 최초의 왕으로 엘라가 등장한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엘라가 560년에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는 오필로, 그의 왕국의 이름은 노섬블리아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당시 이 지역은 데이라와 베르니시아로 나뉘어져 있었다. 엘라의 왕국은 베다의 언급으로 의해 데이라로 여겨진다. 노섬브리아라는 국명의 사용은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앵글리아 왕이 그 칭호를 주장한다는 전통에 기초할 수 있다.
엘라는 확실히 이교도였다.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로마의 노예시장에서 두 명의 청백색 피부인 영국인 소년을 만났을 때, 그는 그들이 “앵글리아인이 아니라 기독교인이라면 천사다”고 말했다. 이후. 데이라의 왕이 엘라라고 알면 그는 “그 땅에서는 할렐루야를 노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엘라의 죽음의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혼란이 있다. 연대기에서는, 그는 588년에 「죽었다」라고 보고하고 있지만, 후의 자료에서는, 그는 버니시아의 왕자인 에델프리드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고 있다. 이 설명은 베다에 의해 모순되었으며 베다는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브리튼 섬에 온 597년 당시 엘라는 여전히 왕이었다고 말했다. 어쨌든, 엘라가 죽은 후, 아들 이후중 한명인 애델릭이 데이라의 국왕이 되었다. 이시기쯤 엘라의 딸인 아차가 에델프리드와 결혼하였다. 이후 5년 간의 통치 끝에 604년 에델프리드가 데이라를 침공해 처남인 애델릭을 살해한 후 왕국을 장악했기 때문에, 그의 동생인 에아드위네는 웨일스의 브리튼인들의 왕국중 하나인 귀네드로 망명해야 했다.

초기 망명 생활에 대해 더럼의 레지날드와 몬머스의 제프리는 에아드위네가 카드판 압 이아고가 통치하던 귀네드로 망명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후 체오를이 통치하던 머시아로 망명지로 옮겼고,610년대까지 머시아에 머물며 체오를의 딸인 쿠엔부르흐와 첫번째로 결혼했다.

이후 중반 어떠한 이유로 머시아를 떠나 래드왈드(Rædwald)가 통치하던 동앵글리아로 망명했다. 에아드위네는 동앵글리아에서 래드왈드의 환대와 응접을 받게 되었고, 이후 래드왈드의 권유로 브리튼 북부 앵글로 색슨 지배층들 중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하게 되었다.

한편 데이라까지 차지한 애델프리드는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지속적으로 동앵글리아의 래드왈드에게 여러 차례 뇌물로 에아드위네의 암살을 청탁했으나 래드왈드는 이를 거부했고, 616뇬, 되려 에아드위네를 앞세워 북으로 진군했다. 베다는 이 전쟁은 단순히 에아드위네의 건을 둘러싸고 싸웠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이 전쟁은 두 명의 지배자 사이의 권력과 영토의 문제를 동반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델프리드는 레드왈드가 이끄는 군대에게 아이돌강의 싸움(아이돌강의 동쪽)에서 패해 죽였다. 베다는 레드왈드가 전군을 집결할 시간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애델프리드의 군대는 열세였다고 말했다. 애델프리드가 죽은 후, 에드윈은 데이라뿐만 아니라 베르니시아의 왕이 되었고, 애델프리드의 아들인 에안프리드, 오수왈데, 오즈위그는 북쪽으로 도망쳐 달 리어타로 망명한다. 이후 에아드위네는 래드왈드의 덕으로 데이라의 왕위를 되찾는 것은 물론이고 나아가 애델프리드의 버니시아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레드왈드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레드왈드가 죽기 전까지 그의 두 왕국들은 동앵글리아의 영향을 받아야 했지만 동앵글리아에 대해 반항적이지만 않았다면 에아드위네의 정치적 행보는 자유로운 편으로 616년이나 626년에 애델프리드가 살아있던 당시 형제인 헤레릭이 브리튼의 소왕국으 엘멧의 궁정에 망명하던 도중 급사하자 그 사실을 빌미로 엘멧의 왕 케레틱을 몰아내고 엘멧을 차지한다.

이후 에아드위네의 첫왕비였던 쿠엔부르흐가 사망하였고, 켄트의 에드바르드는 당시 동맹 관계에 있었고, 에아드위네는 에드바르드의 여동생 에델부르그와 재혼을 준비했다. 베다는 에드바르드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경우에만 에아드위네와 여동생의 결혼에 동의했다고 말합니다. 에드바르드의 메로빙거 왕조 출신이었던 어머니 벨타의 결혼은 켄트의 개종을 가져왔듯이 에델부르그의 결혼은 노샘브리아에서도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다른 연대기 작가인 요크의 폴리누스는 626년 부활절에 요크에서 웨식스의 퀴첼름의 대리인에 의해 암살이 미수로 끝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별개의 내용이 있다.

에아드위네의 서쪽으로의 확장은 그의 통치 초기에 시작되었을 수 있다. 620년대 초반에 에아드위네와 아일랜드의 우레이드족의 왕, 다르나라이디족의 피아쿠나에 맥 바에타인과의 사이에서 전쟁이 이루어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 피아크나에의 색슨인에 대한 작전을 말하는 잃어버린 시가 존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일랜드의 연대기에는 623년부터 624년에 걸쳐 버니시아의 밤버러가 포위되거나 습격된 것이 기록 되었다. 이것은 아마 에아드위네가 우레이드족의 표적이었던 맨섬을 노리고 있던 것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626년에 피아쿠나에는 같은 이름의 다르 피아택족의 피아쿠나에 맥데마인에 의해 살해되었고, 2대째의 피아쿠나에도 1년 후에 다르리아타족과의 싸움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아일랜드해 지방에서의 에아드위네의 정복이 용이해졌다고 추정된다.

에아드위네의 시대는 공물, 복종, 노예를 얻기 위해 이웃 국가들과 정기적으로 아마 매년 전쟁을 하는 것이었다. 에아드위네가 죽을 때까지, 이러한 매년 일으키는 전쟁은 주로 보고되지 않았지만, 햄버강과 머지 강에서 북부 서던 업랜드와 체비엇까지 노샘브리아 왕국을 확장했을 수 있었다.

왕실은 정기적으로 왕실 마을에서 다음 마을로 이동하여 공물로 주어진 음식과 왕실 영지의 산물을 소비하고 정의를 집행하여 국가에서 왕권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에아드위네 시대의 왕실 유적에는 목조 원형 극장의 흔적이 발견된 버니시아 예버링이 포함되어 있다. 이 '로마'의 특징으로 에아드위네 앞에 기수가 '투파'(고대 그리스어로는 thuuf, 날개 달린 구체였을지도 모른다)를 가지고 있었다는 베다의 주장은 고물 수집가의 호기심 이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습관의 모델이 로마인지 프랑크 왕국인지는 불명하다. 다른 왕가의 유적에는 엘멧의 캄포두눔, 데이라의 상톤, 그리고 베다에 따르면 이교의 고승 코이피가 우상을 파괴한 굿맨햄 등이 있다. 에아드위네의 영토에는 한때 로마의 도시였던 요크와 칼라일이 포함되어 둘 다 7세기에 어느 정도 중요했다고 생각되지만, 이 시대에 도시생활이 계속되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상술한대로 에아드위네의 기독교 개종 시기가 베다가 기록한 연대기와 폴리누스의 연대기와 교차되지 않는데, 베다의 설명의 전반적인 특징은 에아드위네를 결단력이 없는 왕,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은 왕, 개종할지 여부를 결정할 수없는 왕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사건과 함께 에아드위네의 프랑크 출신의 왕비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또한 베다가 재현한 교황 보니파시오 5세가 에아드위네와 에델베르그에게 보낸 편지는 아마 그 밖에 유례가 없는 것이다. 켄트는 프랑크인의 영향하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베다는 선교의 기원이 '로마'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프랑크인은 작센족의 개종과 권력과 영향력의 확대에 관심을 가졌다. 베다는 627년 4월 12일 에아드위네와 그 가신들의 세례에 대해 설명하면서 동시에 에아드위네의 열의가 레드왈드의 아들 에오르프왈드가 개종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베다의 개종에 대한 설명은 잘 인용되어 있다. 파울리누스가 기독교 교리를 설명한 후, 왕은 고문들에게 새로운 교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에아드위네의 궁정사제 코이피는 그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대답한다. 결국, 그만큼 우상숭배자들의 신들을 존경하고 헌신한 사람은 없으며, 헌신으로부터 아무 혜택도 받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 후 이름 없는 고문이 일어나 새로운 믿음의 혜택을 깨달은 왕에게 말을 건다. 코이피는 다시 말해 지금까지 숭배했던 우상과 사원을 파괴해야 한다고 발표합니다. 에아드위네 왕은 동의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뒤이어 코이피 자신이 우상을 태우고 "참된 신은 하나님이라 주장하며 나머지는 거짓된 우상이라"라고 선언하고 뒤이어 에아드위네에게 말과 창과 갑옷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후 무장한 체로 에아드위네의 말을 타고, 앵글로 색슨족의 신상이 따로 모셔진 신전으로 가서 그곳을 불질렀다.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에아드위네의 통치에 대해 베다는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당시 브리타니아는 매우 평화롭고, 에아드위네 왕의 권력이 확대될 때마다, 오늘까지 속담에도 있듯이, 갓 태어난 아이를 데리고 온 여성이 섬 전체를 바다에서 바다까지 걸어 가려고 해도 ,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만 후술할 에아드위네의 사후 다시 앵글로 섹슨 신앙으로 회귀하려는 반동에 대한 움직임만 봐도 버니시아와 데이라에 기독교화가 더디었음을 알 수 있다.

에아드위네에 대한 다른 경쟁자들의 도전의 시작은625년의 여름에 캔터베리에서 체결된 켄트와 혼인 동맹의 직후에 일어났다. 와이트 왕 등의 하위 왕을 보호함으로써 에아드위네는 웨식스의 퀴첼름의 야망을 저지했다. 퀴첼름의 대응은 이미 말했듯이 암살자를 보내는 것이었다. 에아드위네는 이 모욕에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지만, 반응할 수 없다고 느꼈거나, 우유부단한 통치자로서의 베다의 묘사가 정확하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암살이 실패한 후, 에드윈은 퀴첼름에게 승리하는 것만을 조건으로 기독교로 개종했다.

627년경부터, 에아드위네는 앵글로 색슨인 중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 되어, 버니시아, 데이라, 동 머시아의 대부분, 맨섬, 앵글시 섬을 지배했다. 켄트와의 동맹, 웨식스의 복종, 그리고 최근의 성공은 에아드위네의 권력과 권위를 늘렸다. 베다가 말하는 에아드위네의 제국은 나중에 9세기에 서식스의 왕들이 발명한 개념인 브레트왈다의 개념과 동일시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성공은 에아드위네의 패권을 확고하게 하고 실패는 그것을 약화하게 된다.

에드윈의 의형제로 여겨지는 카드와론 압 카도판은 629년경 기록에 등장했지만, 카드와론은 패배하여 에아드위네의 권위에 복종했다. 카드와론의 패배로 인해 632년부터 633년에 걸쳐 머시아의 펜다와 카드와론이 반란을 일으킬 때까지 에아드위네의 권위는 수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에아드위네는 632년이나 633년 가을, 햇필드 체이스 전투에서 펜더와 카드와론에게 패배해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은 잠시 동안 셔우드 숲의 에드윈스토우 마을이 된 곳에 숨겨졌다. 그의 머리는 결국 요크에 묻혔고 나머지 시신은 휘트비에 묻혔다. 그의 두 아들 중, 오스프리드는 해트필드에서 사망했고, 에드프리드는 펜더에 잡혀 살해되었다.

에아드위네의 죽음 후, 노섬브리아는 다시 버니시아와 데리아로 분열해 버니시아는 애델프리드의 전사 후 북쪽으로 망명했던 아들들 중 한명인 애안프리드가 돌아와 차지했고, 데이라는 에아드위네의 사촌인 오슬릭이 승계한다. 베다에 따르면 오즐릭은 에앙프리스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인이었지만 권력을 잡으면 이교로 돌아갔다.[26]

그러나 카드와론은 데이라에 대한 침략을 계속했고, 버니시아의 애안프리드 또한 카드와론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베다에 따르면 오슬릭은 '견고한 마을'에서 카드워론을 포위했지만 캐드워론은 '전군을 이끌고 갑자기 기습해 오슬릭과 그의 군대를 괘멸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그 틈을 타 애안프리드의 동생인 오수왈데가 자신의 옛 망명지인 스코트인이나 픽트인 등 북방인들 출신들로 구성된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헥삼 근교 헤븐필드에서 카드왈론과 대치한 후 카드와론의 귀네드 왕국의 군대를 비롯한 브리튼인 세력들을 격파한 후 주인을 잃은 데이라의 왕위까지 찾지한다.

그러나 642년 머시아의 펜다를 상대로 메이저필드 전투에서 오수왈데가 전사하자 동생인 오스위그가 왕위를 승계하나 2년 뒤 데이라인들이 오슬릭의 아들인 오스원을 왕으로 내세워 7년 간 오스위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후 오스윈과 오스위우는 651년경에 충돌했습니다. 베다의 기록으로 전투가 시작하자 오스원은 병력 열세를 느끼고, 군대를 해산시킨 후 톤히레라는 병사만 데리고, 인근의 엘더만인 훈발트의 집에 숨었지만 훈발트의 배신으로 오스원은 오스위그의 프리펙투스인 에틸원에게 처형되었고, 데이라는 오스위그의 조카인 오데발트에 의해 통치되었다. 653년에 노섬브리아 왕국의 건국을 선언, 통일 국가인 노섬브리아가 건국되면서 버니시아와 데이라의 끝없는 갈등은 표면상으로 막을 내렸고, 데이라는 노섬브리아의 하위 왕국으로 격하되었다.

이후 오데발트는 숙부로부터 독립할 생각이었는지 머시아의 펜다 와 동맹을 맺고 655년 펜다가 노섬브리아를 침공할 때 그를 도왔다. 하지만 오스위그와 펜다의 군대가 11월 15일 윈웨이드 전투에서 맞닥트렸고, 펜다의 군대가 오스위그의 군대에 패배, 펜다는 전사하였고, 오스위그는 오데발트를 데이라 왕위에서 끌어내린 후 자신의 아들인 알프리드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오스위그의 간접 통치에 대한 데이라의 저항은 알프리스 아래에서도 계속되었고, 알프리드는 그 저항을 이용해 독립을 주장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프리드도 당초 아버지를 따라 캔터베리 주교와 대륙 유럽이 지지하는 관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관습을 실천하는 켈트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켈트의 관습을 우선하는 아버지의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658년경 알프리스와 동맹을 맺고 있던 센와르는 유럽에서 배우고 로마의 관습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던 노샘브리아의 성직자 윌프리드를 알프리스에게 소개했다. 그 후 알프리드도 켈트의 관습과 아버지의 정책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 664년, 오스위그는 휘트비 공회의를 소집하고, 노섬브리아가 어떤 기독교 형태를 따르는지 결정했다. 알프리드는 윌프리드와 로마 제도의 중요한 제창자가 되었고 결국 승리했다.

알프리드는 윌프리드를 데이라의 주교로 임명하도록 요청했고, 아마 요크의 주교로 임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윌프리드는 오스위그의 동의를 얻어 갈리아에 가서 서층을 받았다. 그는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주교가 효과적으로 서계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666년경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660년대 중반, 알프리드는 베네딕트 비스코프와 함께 로마에 순례에 가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오스위는 그것을 금지했다. 알프리드는 그 후 역사의 기록에서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되었는데, '잉글랜드인 교회사'에서 베다는 알프리드가 아버지를 "공격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커비는 알프리스가 오스위그에 대한 반란에 참가해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시사한다. 이는 그들의 종교적 차이가 계속되었고, 알프리스가 이모형제인 애즈플리드의 대두에 위기를 느꼈고, 오스위그가 군사적 야망을 품고 남쪽의 데이라에서 노섬브리아 북부로 시선을 옮긴 것을 기회로 삼았는지 모른다.

이후 애즈프리드가 데이라의 왕이 되었다가 670년 오스위그가 사망하자 노섬브리아와 버니시아의 왕위에 오르면서 데이라의 왕위를 자신의 형제인 엘프와인에게 넘겨준다. 당시 엘프와인은 여전히 ​​소년이었고,이 칭호는 그를 어린 아이가 없는 에즈프리드의 후계자로 지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679년 토렌트 전투에서 마시아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전쟁의 격화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드르의 개입에 의해 추가 분쟁은 회피되었고, 머시아의 에델레드 왕은 엘프와인의 죽음에 대한 보상으로 에즈프리드에게 배상금을 지불했다.

베다는 이렇게 썼다.“애즈플리드 왕의 통치의 9년(679년), 토렌트 강 근처에서 그와 머시아의 왕 에델레드 사이에 대전투가 일어나 애즈플리드 왕의 동생으로 양쪽 군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던 엘프와인이 18세의 젊은 나이에 전사하였다.

그의 죽음으로 데이라는 노섬브리아의 하위 왕국으로 두는 것보다는 직활 통치를 하는 것이 낳다는 애즈프리드의 판단하에 버니시아와 완전히 합병되어 노섬브리아의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졌다.
679년 버니시아와 데이라가 노섬브리아 왕국으로 완전히 통합된 후 684년 6월, 에그프리드는 장군 벨트의 지휘하에 아일랜드의 브레가에 습격대를 파견하여 수많은 노예를 잡아 많은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했다. 이 습격의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에그프리드는 리폰의 에즈브르트의 경고에 반하여 행동했으며, 이 습격은 베다나 다른 성직자에 의해 비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문인지 그는 성 바울에 바치는 자매 수도원의 설립을 위해 쟈로의 타인 강을 따라 토지 40 하이드를 두 번째 기부했다. 이 두 수도원은 웨어머스와 쟈로의 수도원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수도원은 학자 베다에 의해 유명해졌다. 베다는 7살 때 웨어머스의 베네딕토 비스코프에 맡겨졌고, 그 후의 생애를 수도사로 보냈다. 베다의 '잉글랜드인 교회사'는 731년 거기서 완성되었다.

또한 이시기에 노섬브리아 또한 화폐 경제에 진입했다. 다른 앵글로 섹슨 왕국들은 프랑크 왕국의 주화를 모델로 페니를 발행하고 있었고, 애즈프리드 또한 페니를 발행했는데, 애즈프리드가 발행한 페니는 셰이터라고도 불리며 두껍게 주형으로 주조되어 대량으로 발행되었다.

685년, 린디스판의 커스버트의 조언에 반하여, 에그프리스는 종형제의 브리데이 맥빌리가 이끄는 포트리우의 픽트족을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이끌었으나 5월 20일, 댄 넥틴의 전투라고 불리는 앵거스의 단니첸이나 배데녹의 던악턴에서 픽트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산으로의 도망을 치나 붙잡혀 40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이 패배로 에그프리드의 군대의 대부분이 상실되고, 북부의 노샘브리아의 세력은 현저하게 약화되고, 베다는 노샘브리아 왕국의 쇠퇴의 시작을 에그프리드의 죽음으로 정하고, 에그프리드의 사후, “잉글랜드 왕국의 희망과 힘은 “ 흔들리고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다』라고 적었다. 노샘브리아는 679년에 잃은 중앙 브리튼의 지배권도, 685년에 잃은 북부 브리튼의 지배권도 두 번 다시 되찾지 않았다. 애즈프리드의 뒤를 이은 사람은 오스위그와 아일랜드 출신의 핀 사이에서 태어나 사제 수업 중이었던 알드프리드가 계승했다.

베다는 웰기리우스의 말을 바꿔 말하며, 애즈프리드의 사후 "잉글랜드 왕국의 희망과 힘은 '흔들리고 점점 후퇴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노섬브리아는 679년에 잃은 중앙 브리튼의 지배권도, 685년에 잃은 북부 브리튼의 지배권도 되찾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이킹 시대까지 계속 브리튼과 아일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다.

알드프리드는 그 통치 기간 동안 버니시아와 데이라 모두를 지배했지만, 두 부분은 별개로 남아 있었고, 9세기 후반에 바이킹에 의해 다시 분할되었다. 버니시아의 중심은 나중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 부근에 있었고, 린디스판, 헥섬, 밤버러, 예버링은 중요한 종교와 왕실의 중심지였다. 에즈프리드의 사후에도 버니시아는 현대의 스코틀랜드 남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덤버에는 왕실의 중심지, 콜딩엄과 멜로즈에는 종교의 중심지가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잉글랜드 북서부와 스코틀랜드 남서부 중세 초기의 세부 사항은 불분명하지만, 알드프리드의 통치 직후에 휘트혼의 주교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크, 캐터릭, 리폰, 휘트비는 데이라의 중요한 장소였던 것 같다.

노섬브리아와 머시아의 남쪽 경계는 잉글랜드를 가로 지르고 동쪽은 햄버에서 우즈 강과 돈 강을 따라 서쪽은 머지 강까지 뻗어 있었다. 고고학적 증거로서 현대의 셰필드 근처에 있는 로마 시대의 리그 제방은 경계에서 멀어진 곳에 큰 토루가 있어 방어된 경계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국왕, 왕족, 유력한 귀족과 함께, 교회는 노섬브리아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 관계자는 정신적 권위자일 뿐만 아니라 대지주이자 도시나 마을이 없는 땅에서 대교회나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무역도 지배하고 있었다. 린디스판의 주교직은 알드프리드의 통치 시기에 카스버트가 맡았다. 카스바트의 뒤를 이은 것은 아일랜드에서 교육을 받은 이드바트이며, 이드바트는 나중에 아이오나의 수도원장이 되어 부활제 논쟁에 종지부를 쳤다.

그 후 린디스판의 복음서 저자 이드프리드가 이어졌다. 린디스판의 주교는 헥삼의 주교좌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알드프리드의 통치 중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도르의 제자로 후계자의 비벌리의 존이 유지하고 있었다. 요크의 사교직은 685년에 보사가 맡았다. 윌프리드는 687년에 주교좌에 착석햇지만, 691년에 해임되었고 보사는 요크로 돌아왔다. 681년에 트랑와인 주교를 위해 창설된 아바콘 주교좌는 오래 가지 못했지만, 에즈프리드의 사후, 최초의 휘트혼 주교로 알려진 인물이 체올울프 왕의 지명으로 임명되었다. 중요한 수도원은 휘트비[27], 몽크웨어 매스 자로, 및 리폰에 있었다.

알드프리드는 이복형제인 엘프레드와 매우 존경받았던 카스버트 주교 등 지도적인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고 있던 것 같다. 그는 나중에 웨식스 남서부의 앵글로 색슨 왕국의 샤본 주교가 된 알드헬름의 손에 의해 견신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알드헬름도 아일랜드의 교육을 받았지만, 그것은 잉글랜드의 말름즈베리에서 일했다. 두 사람 사이의 서한은 현존하고 있으며, 알드헬름은 알드프리드에게 숫자 7에 관한 수비술에 관한 논문 '에피스트라 애드 아실키움'을 보냈다.

알드프리드는 우주론에 관한 원고도 소유하고 있으며 베다에 따르면 그는 그것을 몽크위아 마우스 자로우의 수도원장 케오르프리스에서 8 하이드 상당의 토지와 교환하여 구입했다. 알드프리드는 679년부터 아이오나의 수도원장이었던 아담난의 친한 친구이며, 그의 밑에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680년대, 알도프리스는 684년 벨트의 원정에서 잡힌 아일랜드인 포로의 해방을 요구해 온 아드무난과 두 번 만났다. 포로들은 해방되었고, 아드무난은 알도프리스에게 성지,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의 순례지를 설명한 논문 '성지에 관하여'의 사본을 주었다. 베다는 알도프리드가 아드무난의 저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회람했다고 보고했다.

베다는 알도프리스를 학자로 표현하고 그의 학문에 대한 관심은 펜더 등의 초기 앵글로 색슨 전사왕과는 대착점을 이루고 있다. 아일랜드의 자료에서 그는 "사피엔스"로 표현된다. 이것은 특정 교회와 일반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학자를 가리키는 라틴어 "현명한"이라는 단어에서 나온다. 이것은 어느 정도의 학식과 지혜를 의미하고 역사가 피터 헌터 블레어는 알도프리스를 플라톤의 철학자 왕의 이상과 비교했다. 베다는 또한 알도프리드 시대의 교회가 수도원에 대한 일반 신도의 통제에 좌우되지 않았으며, 그 관습은 알도프리드의 죽음부터 시작되었음을 밝혔다.

그러나 알도프리드와 교회의 관계는 반드시 순조롭지는 않았다. 그는 당시 교회의 중요한 인물인 윌프리드와의 어색한 관계를 엑플리스로부터 계승했다. 요크의 주교 윌프리드는 애즈플리드의 아내 에델트리스에게 거룩한 독신을 계속하라고 설득했기 때문에 애즈플리드에 의해 추방되었다. 686년 대주교 시어도어의 권고에서 알도프리드는 윌프리드의 귀국을 허용했다. 알도프리드와 윌프리드의 관계는 거칠었다. 두 사람 사이의 적의는 알도프리스의 망명 생활의 결과인 켈트 교회에 대한 충성심의 원인이었다. 보다 심각한 싸움의 원인은 윌프리드가 677년에 시어도어가 광대한 노샘브리아 교구를 분할한 것에 반대한 것이었다. 윌프리드가 망명에서 돌아왔을 때, 알도프리스와의 화해에는 윌프리드가 북부 전역의 주교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에 대한 알도프리스의 지지는 포함되지 않았다. 691년 또는 692년까지, 그들의 불화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윌프리드의 성인 전작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잠시 동안 현명한 알도프리스 왕과 거룩한 주교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더 이상 행복한 상황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후 다시 악의가 끓어오르고 상황은 역전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수년간 서로 우호적 관계를 맺거나 잃으면서 마침내 그들의 싸움이 정점에 이르렀고, 왕은 윌프리드를 노섬 브리아에서 추방했다.

윌프리드는 망명 중을 머시아에서 보내고 거기서 에델레드 왕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다. 702년 또는 703년에, 알도프리드는 노섬브리아의 남쪽 국경에 있는 오스터필드에서 회의를 소집했고, 캔터베리 대주교 벨트왈드와 많은 주교가 참석했다. 윌프리드의 노샘브리아로의 귀환 문제는 격렬하게 논의되었고 주교들에 의해 거부되었다. 리폰의 스테판에 따르면 알도프리스 왕은 윌프리드에게 결정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해 군대를 사용할 것을 제안했지만, 주교들은 윌프리드에게 통행 안전을 약속했음을 상기시켰다. ​​머시아로 돌아온 후, 윌프리드는 주교들 중에 적대했던 자들에 의해 파문되었다. 그는 이에 부응하여 로마로 여행했고 교황 요한 6세에 직접 호소했다. 교황은 그에게 알도프리스에게 윌프리드를 직무로 복귀시키라고 명령하는 편지를 건네주었지만 알도프리스는 편지 수신을 거부했다.

알도프리스의 통치는 8세기 말까지 계속된 노샘브리아의 황금 시대의 시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시대에는 도서예술이 노섬브리아에서 개화하여 알도프리ㅅ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는 린디스판 복음서, 베다 학문, 대륙에 앵글로 색슨의 선교의 시작이 시작되었다.

린디스판 복음서는 698년부터 린디스판의 주교였던 린디스판의 에드프리스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들은 알도 프리스 시대에 현존하는 유일한 노 삼블리아 장식 사본이 아닙니다. 7세기 후반 린디스판에서는 '더럼 에히타나하 서예가'로 알려진 필사자가 활약하여 더럼 복음서와 에히타나하 복음서를 저술했다. 아미아티누스 사본은 몽크웨어 마우스 자로우의 작품으로, 아마도 알도프리스의 사후 10년 이내에 수도원장 세올프리드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노섬브리아에서 출토된 두 가지 중요한 보석이 현존하고 있다. 1977년 리폰 대성당 경내에서 발견된 리폰 보석은 연대를 파악하기가 어렵지만, 그 웅장함과 발견 장소에서 리폰 교회의 화려한 가구가 기록에 남아 있는 윌프리드 주교 와의 연결을 볼 수 있다. 카스바트 주교의 가슴 십자가는 알도프리스의 통치 중에 687년 사망 시 또는 698년 재매장 시에 그와 함께 매장되어 현재는 더럼 성당에 있다. 이 시대의 건축물과 기념물의 유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뷰 캐슬 십자가, 라스웰 십자가, 헥섬 십자가는 아마도 알도프리드 시대부터 1세대 또는 2세대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에스콤 교회는 7세기 후반에 지어진 당시 노샘브리아 교회 중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교회로 모아캄 만을 내려다보는 헤이샴의 폐허가 된 예배당은 그보다 조금 후의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노섬브리아의 화폐 주조는 알도프리스의 통치 중에 시작된 것으로 간주됩니다. 교환 수단으로서 실용적이지 않은 금화인 트림사를 대신하는, 셰이터라고 불리는 초기의 은화가 등장했다.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알도프리드의 화폐에는, 아일랜드의 앤셜체로, 화폐 주조자의 이름이 아니고, 알드프리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대부분의 화폐에는 꼬리를 올린 사자가 그려져 있었다.

알도프리스는 웨섹스 왕 이네의 여동생 카스바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알도프리스는 앵글로 색슨 시대의 영국에서 가장 권력있는 왕 중 한 명과 동맹을 맺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알도프리스와 카스바는 헤어졌고 카스바는 윈본 민스터에 수도원을 설립했고, 거기서 여자 수도원장을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알도프리스에는 적어도 두 명의 아들이 태어났지만 카스바가 그 어머니인지 여부는 기록되지 않았다. 알도프리스는 죽기 전에 한동안 병을 앓고 있었다고 하며 704년 또는 705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8세기경의 노섬브리아의 최대 영토

오스레드는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아직 아이였고, 결국 이복형으로 추정되는 애드울프 1세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초기에 애드울프 1세는 로지안과 포스 강을 따라 버니시아 북동 국경의 영주로 추정되는 벨트레드의 아들인 벨트프리스의 지원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곧바로 위기가 생겼다. 알도프리드에 의해 추방된 주교 윌프리드는 노샘브리아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애드울프 1세는 주교를 추방한 채로 하려고 했지만, 벨트프리스는 윌프리드의 귀환을 지지한 것 같다. 밤버러의 포위전에서 끝난 짧은 내전은 벨트프리드, 윌프리드, 그리고 오스레드의 지지자들에 의해 승리했고, 오스레드는 노샘브리아의 유왕으로 복위했다.

그러나 오스레드는 여전히 아이였고, 정부는 권력을 가진 주교 ​​윌프리드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벨트레드의 아들 벨트프리스 등의 영주의 지원을 받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스레드는 이때 윌프리드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709년 윌프리드의 죽음은 당시 불안정을 가져오지 않았던 것 같았고, 이는 에드울프의 급속한 상승과 더욱 급속한 몰락과 함께 8세기 초의 노섬브리아 내의 오스레드의 통치보다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711년 영주의 벨트프리스가 포스 강 상류역의 픽토족에게 대패를 했지만, 오스레드의 통치는 정치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다양한 교회 자료에서 오스레드는 방탕하고 타락한 젊은이, 그리고 수녀를 유혹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다. 베다는 오스레드를 새로운 요시아라고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에델울프의 9세기 초 시인 '아바티브스에 대해서'에서는 오스레드는 행동과 말에 정력적이고 무력이 뛰어나 힘에 대담하다 라고 표현되고 있다. 에델울프는 또한 오스레드를 무모하고 어리석고 욕망을 통제할 수 없는 인물이며, 많은 정적을 수도원에 강제적으로 넣은 폭군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오스레드는 715년 또는 716년에 살해되었다. 그의 사인은 알 수 없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서는 그는 '국경의 남쪽'에서 살해되었다고 한다. 후대의 역사가들은 문제의 국경은 남픽트인의 국경이며, 픽트인이 오스레드를 살해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오스레드 사후 왕가의 직계 혈통이 단절된 탓에 방계인 코엔레드가 노섬브리아의 왕으로 즉위한다.

13세기 연대기 작가인 포단의 존은 그가 전대왕인 오스레드를 살해했다고 주장하지만 앵글로 색슨 연대기는 그것을 "남쪽 국경"의 어딘가로 하고 있다. 머즈베리의 윌리엄은 그를 은유적으로 젊고, 정력적이며 방탕하고, 잔혹하고, 대담한 남자라고 표현했다.

그의 치세는 2년밖에 가지 못했는데, 사인은 알 수 없다. 얼스터 연대기에는 색슨인 왕 퀴딘(쿠투와인)의 아들이 718년에 사망한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것은 거의 확실히 코엔레드를 가리키고 있다. 코엔레드의 후계자는 오슬릭이었다.

더럼의 시몬은 그를 노샘브리아의 알도프리드의 아들이라고 부르며, 오슬릭은 오스레드의 형제, 또는 이복형제로 봤거나 혹은 데이라의 에알프리드의 아들로 오스레드의 사촌이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베다는 오슬릭의 통치에 대해 거의 보고하지 않았지만, 729년 그의 죽음에 혜성이 보이는 것에 대해 불길한 징후라고 기록했다. 멜즈베리의 윌리엄은 코엔레드의 형제 체올울프를 후계자로 입양하는 오슬릭의 결정을 칭찬했다.

왕위에 오른 체올울프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베다의 조언을 받았다. 베다는 체올울프의 신념을 칭찬하는 한편, 체올울프의 통치 능력에 대해 약간의 우려도 표명했다. 체올울프는 수도원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인물이었고, 아마도 국정에는 그다지 적합하지 않았다. 베다는 731년에 '영국교회사'를 체올울프에 바쳤다. 체올울프의 통치의 시작은 파벌 싸움과 반란으로 혼란스러워, 같은 해 그는 정적에게 잡히고, 수도사의 면도를 강요당했다. 그는 단기간에 퇴위했지만 곧 복권했다. 쿠데타에 대한 상세 내용은 불명하다. 헥섬의 주교 아카는 주교좌를 박탈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그가 체올울프의 반대파를 지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체울울프는 732년경에 종제의 애즈베르트를 요크의 주교로 임명했다.[28]

체올울프는 아일랜드에서 시간을 보냈을 가능성이 있으며, 아마도 종교에 입문하기 위해 공부했을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왕으로서 그는 린디스판의 수도원에게 많은 특혜를 주었습니다. 그는 수도사들에게 물과 우유만의 음료로 제한하는 켈트 관습과는 달리 맥주와 와인의 소비를 허용하는 특별한 면제를 주었다. 737년, 체올울프는 사촌인 애드베르트에 양위하고 린디스판에 은거했다.

에드브르트는 그 통치 중 계속 적대하는 일족으로부터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던 것 추정된다. 아마도 에드울프 왕의 아들이었고, 미래의 에드울프 왕의 할아버지인 아드와인은 740년에 살해되었다. 750년에는 알도프리드 왕의 아들 오파가 린디스판의 성역에서 끌려와 처형되었다. 한편, 오파를 지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린디스판의 주교 시네울프는 해임되어 요크에 구류되었다. 노섬브리아의 정치 투쟁과 일족 간의 확집에서 종교적 기반이 중요했던 것은 분명하며, 아드와인의 일족은 리폰과 오파, 그리고 체올울프는 린디스판과 관계가 있었고, 헥삼은 린디스판 공동체와 대립하는 왕이나 귀족을 지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요크 대주교의 형제였던 에드베르트는 노샘브리아의 최고 주교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에드베르트의 통치에는 노상브리아 화폐에 큰 개혁이 이루어졌고, 일부 화폐에는 에드베르트 왕과 에그바르트 대주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역사가 커비는 “에드버트가 왕국에 새로운 번영을 가져왔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후가 있다”고 결론 내렸다. 교황 바오로 1세가 에드베르트와 에그바르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포스레드 수도원장에서 다루어져 동생의 몰[29]에게 주어진 토지를 반환한다. 그렇게 명령하고 에드베르트의 통치는 이전 통치에 교회에 주어진 광대 한 땅의 일부를 되찾기위한 시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이시기 노섬브리아는 북부 영토의 회복에 대한 야망이 노골적으로 들어냈다. 에드베르트가 이 영토를 재건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기록은 앤윈이 사망한 740년에 나타난다. 픽트인과 노섬브리아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보고되었고, 그 동안 머시아 왕 에델바르드는 에드베르트의 부재를 이용하여 그의 영토를 공격했다. 전쟁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울프는 그것이 앤윈의 살해와 관련이 있다고 시사한다. 앤윈의 아버지는 705년부터 706년의 내전에서 패한 후 북부로 망명했고, 픽트인의 왕 오엥거스, 에델바르드, 또는 둘 다가 그를 노샘브리아의 왕위를 노리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750년, 에드베르트는 카일 평원을 정복하고, 756년에는 오엥거스 왕과 함께 알토 크루트의 브리튼인들과 싸웠다. 이 전역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신의 화신의 해인 756년, 에드버트 왕은 통치 18년째에, 픽트인의 왕 우누스트와 함께 던버턴의 마을에 군대를 이끌었다. 거기서 브리튼인은 8월 1일에 거기서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같은 달 10일에는 그가 이끄는 오우아니아에서 니완빌리그까지 군대의 거의 전원이 사망했다.

후대에 들어서 오아니아가 고반인 것은 지금은 확실히 확실하지만, 뉴앰빌리그의 장소는 그렇지 않다. 뉴버그는 다수 있지만, 선호되는 것은 헥섬 근처의 뉴버그 온타인이다. 756년의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제창되고 있다. 그것은 뉴앰빌리그를 마시아 왕국의 리치필드에 있는 뉴버러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에젤바르드의 마시아인에 의해 에드버트와 오엥가스가 패배한 것은 세인트 앤드류스 창설 전설의 주장과 일치하고 있다. 그것은 퍼거스의 아들인 오엥거스라는 왕이 머시아에서 패배한 후 구해준 성 앤드류스에 대한 감사로 이 땅에 교회를 창설했다는 것이다.

애드베르트는 758년에 퇴위하여 요크 대성당에 부속된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의 아들인 오스울프가 왕위에 오른다. 오스울프는 숙부가 요크 대주교인 애그베르트가 뒷배를 두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집권한 지 1년 만에 759년 7월 24일 마켓 웨이튼 에서 그의 가족, 하인 또는 경호원에 의해 살해당했는데, 암살의 배후로 애델왈드 몰로 추정되며, 애델왈드가 노섬브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759년 7월 24일, 오스울프 왕은 자신의 가신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 국왕 살해는 '에델왈드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은 범죄'였다. 에젤월드는 759년 8월 5일 노샘브리아 왕에 즉위했다. 그의 통치는 반대자 세력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베다의 '앵글로 색슨의 교회사'의 속편에는 761년에 오스윈이라는 인물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와 달람 시메온의 '왕권사'에는 더 자세한 정보가 있으며 '가장 고귀한 애설링'인 오스윈이 761년 8월 6일에 에일돈 구릉에서 에델발드와 싸워 살해 되었음이 기록되었다.

에델발드는 765년 10월 30일 폐위되었지만 핑칸힐에서 열린 귀족과 고위 성직자의 회의에 의해 폐위되어 강제로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왕위는 마찬가지로 방계 왕족이자 에드베르트의 사위인 알레드가 잇게 되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알레드가 왕이 되어 그 후 774년에 폐위되어 추방되었다는 단순한 사실 이외에 알레드의 통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지만 프랭크 스텐턴은 알레드와 대륙의 영국 선교단과의 연결을 지적했다. 브레멘 대주교구의 설립으로 이어진 세인트 윌레하드의 선교는 알레드가 소집한 종교 집회에 의해 허가되었다. 웨섹스 출신의 마인츠 대주교 성 루루에게 보낸 알레드의 편지도 현존하고 있다. 다럼의 시몬이 쓴 '잉글랜드 왕들의 역사'에는 알레드의 마지막 통치에 대해 기록했는데, 어떠한 이유로 왕위를 찬탈당해 픽트족의 왕국으로 도망쳐 거기서 키니오도 왕의 영접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섬브리아의 왕위는 에젤발트 몰의 아들 에델레드가 차지하게 되었다. 즉위 다음해 에델왈드의 폐위에 관계된 것으로 보이는 엘더만 중 한명인 애드울프의 살해를 지시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지 5면만에 오스울프의 아들인 엘프발드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하고 추방되었다. 그러나 엘프발드 또한 788년 엘더만인 시크가에 의해 실르루넘에서 살해되었고, 노섬브리아의 왕위는 알레드의 아들인 오스레드 2세가 잇게 되었지만 국외 추방을 당했던 애델레드가 왕위를 되찾기 위한 암투를 벌였고, 790년, 애델레드가 승리한 후 오스레드 2세는 수도사로서 강제로 삭발된 후 멘 섬으로 추방되었고, 애델레드는 다시 노섬브리아의 왕이 되었다.

왕위를 되찾은 에델레드는 엘더만 애드울프의 살해를 재차 명령했지만, 애드울프는 노섬브리아 밖으로 도주했고, 엘프발드의 아들 엘프와 엘프와인은 에델레드의 명령에 의해 791년에 살해되었다. 이듬해 강제 삭발 후 멘 섬으로 추방된 오스레드는 왕위를 되찾으려 했으나 792년 9월 14일에 패배하고 잡히고 살해당했다. 1년 후, 린디스판은 바이킹에게 약탈되었고, 알퀸은 에델레드에게 이 사건은 에델레드와 그 귀족의 죄 때문이라고 하는 편지를 보냈다.

792년 9월 29일, 에델레드는 캐터릭에서 머시아의 오파의 딸 엘프프레드와 결혼했다. 그러나 796년 4월 18일, 에델레드가 콜브리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그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일단의 귀족들이 암살 음모를 계획해 그를 살해했다. 그 결과 에델레드의 전 고문으로 알퀸의 친구로 왕실 직영지의 관리였던 오스발드가 왕이 되었지만 왕위에 앉아 있기에 오스발드는 매우 폭력적이었고, 왕위에 오르기 전인 780년 1월 9일에 엘프발드의 아들인 베아른을 화형으로 죽였고, 그의 친구인 알퀸이 보낸 편지에서 탐욕스러운 행동, 사치스러운 옷차림, 이교도적인 머리 스타일 등으로 인해 노섬브리아인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해 결국 27일 이내에 퇴위해 린디스판으로 도주한다.

이후 노섬브리아인들은 애델레드에 의해 두차례나 목숨을 위협받았던 엘더만 애드울프를 새로운 왕으로 옹립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796년 5월 26일에 요크 대주교 에앙바르드 1세, 에젤베르트, 비드 울프, 휴게발드의 각 주교에 의해 요크 대성당에서 서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애드돌프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결혼한 것 같고, 알퀸은 대관 직후에 아내를 버리고 정부를 들인 것에 대해 비난했다. 이것이 새로운 대주교 에안바르드 2세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에안바르드 1세는 애드울프의 대관의 해에 사망했다. 알퀸은 교회에 대한 세속적인 억압을 비난하면서도 대주교 에안바르드가 여행을 떠나는 동안 군인을 포함한 많은 수의원을 동반하여 왕의 적을 맞이하고 보호한 것에 놀라움을 주었다. 에안바르드는 재산을 둘러싸고 애드울프와 대립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애드울프의 왕위를 둘러싼 라이벌들을 지원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높다.

에델레드는 애드울프의 적이었지만, 에델레드의 살해자들도 아드울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대적임이 판명되었다. 798년, 에델레드 왕을 살해한 사람 중 한 명인 와다라는 이름의 엘더만이 오즈발드를 왕위로 복귀시키려는 요량으로 애드울프에게 반란을 일으켜 랑카셔주 월리 근교의 빌링턴 무어에서 싸웠다. 와다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 도망쳐 머시아에게 망명했다. 오즈발드의 복위에 대한 욕망이 계속되었던 증거는 아마 798년에 알퀸이 오즈발드에 쓴 편지였으며, 그 중에서 알퀸은 오스발드에게 노샘브리아의 정세에 대한 추가 개입을 마음껏 멈추려고 했다. 알퀸의 주장은 성공한 것 같고, 오스발드는 799년(사망이 기록된 해)까지 수도원장이 된 것으로 알려져 야망을 버렸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 후 2년간 애드울프에 대한 추가 도전이 두 번 기록됐지만, 모두 분명히 지난 수십년간 왕위를 다투어 온 귀족의 가계로부터의 것이었다. 799년 몰이라는 이름의 엘더만이 아애드울프의 '긴급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몰의 이름에서 그는 에델레드 왕의 친족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30] 이듬해 애드울프의 부하에 의해 "알레드 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 알크문드가 살해되었다. 알크문드는 이웃 나라 머시아 왕국의 더비에서 성인으로 기억되어 있다.

머시아의 왕 코엔울프는 불운한 알크문드를 지원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더럼의 시메온은 801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노샘브리아 왕의 애드울프는 적에게 은신처를 주었기 때문에 마시아 왕 코엔 울프에 대하여 군대를 이끌었다. 그는 또한 군대를 모으고, 다른 주에서 매우 많은 원군을 얻었고, 그들 사이에서 긴 원정을 갔다. 최종적으로 양진영의 앵글로 색슨인의 주교와 수장의 조언을 얻어 앵글로 색슨인의 왕의 친절에 의해 평화가 성립했다.

이 화해에 의해 공연의 전쟁은 종결했지만, 애드울프는 806년에, 이유는 불명하지만 폐위되었다.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 레오 3세 사이의 서한은 코엔울프가 애드울프의 퇴위에 관여했음을 시사한다. 13세기 연대기작자 로저 오브 웬도버에 따르면, 애드울프 왕의 왕좌는 엘프발트 2세로 대체되었지만, 엘프발트 2세에 대해서는 문헌으로부터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다만, 애드울프의 망명 당시의 정황은 많은 편으로 상술한 대로 카롤루스 대제와 교황 레오 3세는 서로 서한을 주고 받으며, 브리튼 제도 내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습득했는데, 이들은 머시아의 오파와도 서한을 주고 받았기에 브리튼의 정세에 대해서 어느 정도 유추할 정도의 정보력을 갖추고 있었다.

애드울프는 역대 노섬브리아의 왕들과 달리 북쪽의 픽트족에게 망명하기 보다는 남쪽으로 내려가 영국 해협을 건너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해 2년 동안 카롤루스의 궁정에 머물게 되었고, 이후 카롤루스와 레오의 도움으로 노섬브리아의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하나 얼마 못가 사망하였고, 왕위는 아들인 에안레드가 잇게 되었다.

에안레드에 대해 자세한 기록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서이 시대의 노섬브리아 사람들에 대해 언급된 것은 829년 웨식스의 에그버트가 "노섬브리아로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웨식스 조건을 제시하고 노섬브리아가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귀국했다. 이로 인해 적어도 일시적으로 에그버트의 패권이 브리튼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웬도버의 로저는 에안레드가 810년부터 840년까지 통치했다고 밝혔으며, 12세기 더럼 교회 역사에서는 33년간의 통치가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근 발견된 에안레드의 화폐는 양식상의 이유로 850년경의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 노섬브리아 역사의 혼란을 감안할 때, 이렇게 긴 통치 기간에는 어떤 중요한 인물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에안레드의 사후 1세대도 지나지 않아 노섬브리아의 앵글리아 왕국은 붕괴되었다.

에안레드의 통치에는 스티카(styca)라는 새로운 스타일의 화폐가 등장했다. 이것은 이전 스키트(sceat)를 대체했다. 이 스티카는 은의 함량이 적었고 나중에 가서는 실질적으로 황동으로 주조되었다. 요크에서 이 동전이 대량으로 주조된 것이 남아 있고, 현존하는 동전에는 복수의 주조자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대량으로 주조된 것을 알 수 있다. 하이암은 유통하고 있던 스티카 동전이 수십만이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발견된 동전의 분포로부터, 동전의 주요 용도는 대외 무역이었고, 세금을 지불하는 것 이외에는, 노섬브리아인의 대다수는 일상 생활에서 동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840년경 에안레드가 죽자 애델레드 2세가 새로운 노섬브리아의 왕으로 즉위했다. 애델레드 2세의 통치기에 대해 남아있는 문서 기록에서는 그의 통치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는 844년 레드울프에게 왕위를 찬탈당해 추방되었지만 레드울프는 같은 해 바이킹과 싸워 살해당해 애델레드가 복권되었다. 애델레드 2세는 4년 뒤인 848년에 암살되었지만 살해의 세부 사항은 알 수 없다.

아버지의 통치에 시작된 새로운 스티카 화폐, 은을 거의 포함하지 않고 아연을 많이 포함하는 작은 황동 화폐는 애델레드의 통치에도 인수되었다. 그의 스티카 화폐는 다수 발견되었고, 요크에서 몇 명의 화폐 주조자가 주조했다. 이 시기에 활약한 화폐주조자인 아드울프는 화폐학에 관한 오래된 저작 가운데 에델레드의 할아버지인 아드울프 왕과 혼동되기도 했다.

애델레드 2세가 암살되자 출신 미상의 오스베르트가 노섬브리아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였다. 오스벨트의 통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더럼의 시몬은 “오스벨트는 그 교회에서 베르체우르데와 틸레뮤테를 빼앗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성 커스버트의 역사에는 이러한 땅의 몰수를 오스벨트의 죽음 1년 전이라고 했다. 오스벨트는 862년경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엘라에게 왕위를 양도했다. 대부분의 자료에서는 엘라는 폭군이며 정당한 왕이 아니라고 설명되어 있지만, 어떤 자료에서는 그는 오스벨트의 형제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교도 대공세 이전까지의 앨라의 치세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연대기작자 더럼의 시메온 수도사는 앨라가 교회의 땅인 빌링검(Billingham), 일레클리프(Ileclif), 위게클리프(Wigeclif), 크레케(Crece)를 공격했다고 기록했다. 대부분의 문헌에서 앨라는 폭군에 정의롭지 못한 왕으로 묘사된다.

864년 악명 높은 바이킹 군벌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브리튼 섬을 털다가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앵글로색슨 7왕국 중 하나인 노섬브리아의 해안에 좌초했다. 여기서 라그나르는 노섬브리아의 왕인 앨라 2세(Ælla II)와 생애 마지막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라그나르는 생애 처음으로 패배하면서 결국 붙잡혔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사가》에 따르면 라그나르는 토라를 구할 때 사용했던 거대한 창과, 아슬라우그가 만들어준 어떤 무기도 꿰뚫을 수 없는 옷을 갖추고 참전했지만 결국 머릿수가 딸리는 바람에 앨라 2세의 노섬브리아 군대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홀로 살아남아 생포당한 라그나르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라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고, 이에 앨라 2세는 심문을 위해 그를 뱀굴에 쳐넣었다. 뱀굴에 빠진 라그나르는 무적의 옷 덕분에 처음엔 무사했으나, 옷의 마법을 간파한 앨라 2세가 그걸 벗겨냈고, 주변에서 맴돌기만 하던 뱀들은 그 즉시 라그나르에게 달려들어 그를 휘감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31] 라그나르는 죽음을 예감하고 유언을 남겼는데…
"새끼 멧돼지들이 늙은 아비의 죽음을 안다면 어떻게 꿀꿀거릴까?"

헌데 앨라 2세는 라그나르를 죽이기는커녕 생포할 계획이었지만[32] 정작 그 바이킹들 중에서 라그나르가 누구인지 몰랐기에 자신들이 생포한 유일한 바이킹이 라그나르인지 확신할 수 없었고, 결국 심문 도중에 죽여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뱀굴에 쳐넣은 죄수가 자신이 라그나르임을 밝히기만 하면 바로 꺼내주려 했지만, 라그나르가 끝까지 자신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33] 죽을 때까지 그곳에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34]

라그나르가 남긴 유언을 듣고 그제서야 자신이 처형한 포로가 라그나르임을 깨달은 앨라 2세는 아들들의 반응을 떠보기 위해 그들에게 전령을 보냈다. 이를 통해 라그나르의 죽음을 안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대군을 일으키니 이것이 역사상 이교도 대군세(Great Heathen Army)라고 불리는 바이킹 대침략의 시작이었다.
2.1.1.7. 웨식스
잉글랜드에 칠왕국이 있었던 시대에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왕국 중 하나로 중심지는 오늘날의 햄프셔, 도싯, 윌트셔, 서머싯주, 에이번주 남부에 해당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체르디치가 햄프셔에 상륙하여 건국했다고 전하며, <앵글로색슨족 연대기>에 따르면 495년에 아들 킨리치와 함께 5척의 배에 무리를 이끌고 지금의 햄프셔 해안에 상륙했다. 그가 상륙한 땅을 그의 이름을 따서 Cerdic's-ore라고 이름지었다.[35]

체르다치의 실존에 관해 의문이 많이 있으나 실존 인물이라는 가정하에 체르다치를 비롯한 웨식스 왕가에 대해 앵글로 섹슨 연대기에 기록된대로 신화적으로 오딘까지 거슬려 올라가기에 오랫동안 서섹슨계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대가 점차 변하면서 체르다치의 이름으로 인해 그가 게르만계가 아닌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체르다치의 이름이 게르만어가 아닌 브리튼계 켈트어나 로만 등의 이름 중 하나라고 추측하고 있다.

한 가설에 따르면 체르다치이라는 이름은 예전의 켈트어의 이름이었던 Caratīcos나 Corotīcos에서 유래된 것으로, 웨식스를 건국한 것이 게르만족이지만, 체르디치는 게르만어가 아닌 켈트어의 이름을 사용한 것이다. 이는 체르디치가 원래 영국에서 살았고, 체르디치의 왕조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성장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는 체르디치의 손자로 추정되는 체울린과 그 아래의 후손 몇 명은 게르만족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켈트에서 많이 사용하는 이름을 차용했던 것이 이를 증명해준다.

또한 체르다치는 독자적인 부족 세력의 수장이라기 보다는 서식스에 속한 엘더만으로 추정되는데,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보들리언 도서관의 사서이기도 했던 존 노웰 린튼 마이어스는 체르디치와 킨리치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처음 등장하는 495년에 그들은 엘더먼(Ealdorman, 왕이 임명한 영토를 다스리는 관리)으로 묘사된다고 언급하였다. 엘더먼(Ealdorman)은 당시에는 그리 좋은 직급이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마이어스는 덧붙여 "기원이나 어떤 흔적도 찾아보기 어려운 데다가 침입자였던 체르디치의 흔적, 혈통, 칭호등을 찾기 위해 연구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도 했다.

또한 519년이 되어서야 체르디치와 킨리치가 왕을 "재위하기 시작한다"고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는 이들이 519년이 되어서야 신하나 올더먼을 그만하게 되고, 자신의 권리에 따라서 독립적인 나라의 왕이 되었음을 암시한다고 마이어스는 언급하였다.
...따라서 체르디치를 색슨 쇼어의 서쪽 끝에 영토를 가지고 있는 귀족 가문의 우두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체르디치는 로마가 망해갈 즈음에 위임이 되었거나, 로마의 국방을 책임지는 자로 위탁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는 후에 앵글로색슨의 올더먼으로 묘사될 수 있는 사람이다. ... 만약 체르디치 같이 어떤 종족이 이미 색슨 쇼어의 끝에 있는 원주민인 색슨족, 주트족과 혈연관계를 발전시켰다면 로마의 권위가 희미해질 즈음에 당시보다 더 빨리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을지도 모르고, 나탄레오드 같은 서로 경쟁하는 영국 내의 타국들로부터 살아남기 시작해 508년부터 재위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마이어스 챕터 6

508년 체르디치와 킨리치 부자는 나탄레오드(Natanleod)라는 브리튼의 소왕과 5,000명을 죽였다. 후에 그 땅은 죽은 왕의 이름을 따 네틀리 마시(Netley Marsh)라는 이름이 붙었다. 519년 체르디치는 웨식스의 왕을 칭했다.[36] 같은 해에 체르데포르드(Cerdeford, 체르디치의 여울)에서 브리튼인들과 싸웠다.

527년 Cerdic's-ley에서 브리튼인들과 싸웠다. 530년 와이트 섬(Isle of Wight)을 점령하고, 캐리스브룩(Carisbrook)의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영토는 템스 강 북쪽부터 서쪽의 데번 주, 콘월 주에 이르렀다. 534년 체르디치가 죽고 그 아들 킨리치가 왕위를 이었다. 다만 앵글로 섹슨 연대기에 체르다치와 킨리치 사이에 크레오다라는 인물이 웨식스의 왕으로 있었다는 내용이 있는데, 연대기에서는 크레오다가 체르디치의 아들이며, 킨리치의 아버지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연대기의 본문에서는 크레오다와 관련되어 있는 어떤 언급도 다 생략이 되어버린 채 킨리치를 체르디치의 아들이라고 묘사했다. 크레오다는 체르디치가 죽은 직후 잠깐 동안은 웨식스를 통치했을지도 모르지만, 대개 학자들은 크레오다가 연대기의 서문에 잘못 표기가 된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킨리치의 재위기간 중이던 538년, 540년 일식이 있었다. 552년 올드 새럼(Old Sarum)에서 브리튼인들과 싸워서 물리쳤다. 556년 현재 바버리 캐슬(Barbury Castle)로 확인된 베란부르흐(Beranburh)에서 아들 체울린과 함께 브리튼인들과 싸웠다. 560년 킨리치가 사망하고, 아들 체울린이 지위를 물려받았다. 568년 위반둔(Wibbandun)에서 체울린과 그의 형제 쿠다(Cutha)가 켄트의 애설버트와 싸워 그를 켄트로 몰아내고, 두 앨도르만[37]인 오슬라프(Oslaf)와 크네바(Cnebba)를 죽였다.

571년 배드켄포드에서 벌어진 브리튼인과 웨식스 출신으로 알려진 카우울프와 전쟁에서 개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577년 데오르함(Deorham, Dyrham)에서 브리튼인들과 싸워 콘마일(Conmail), 콘디단(Condidan), 그리고 파린마일(Farinmail) 세 왕을 죽이고, 글로스터(글레붐), 사이런세스터(코리니움), 바스(아쿠아 술리스)의 세 도시를 차지했다. 이 전투는 그 이전까지는 육지로 이어져 있었던 웨일스의 지역적인 분리를 불러왔다. 584년 페단 레아그(Fethan leag)에서 체울린과 쿠다가 브리튼인들과 싸웠고, 쿠다가 전사했다. 격노한 체울린은 여러 마을들과 수많은 전리품을 빼앗은 후, 자신의 영토로 돌아갔다.

이러한 전복과 파괴로 인해 체올린을 브레트왈다로 보는 인식이 생겼다. 731년경 노샘브리아의 수도사이자 역사가이기도 한 베다는 '잉글랜드의 교회사'라는 저작을 저술했다. 이 저서는 주로 세속적인 역사가 아니었지만 베다는 앵글로 색슨의 역사에 대한 많은 정보를 제공했는데, 베다가 말하는, 역사의 초기에 7명의 왕의 목록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베다의 잉글랜드의 교회사는 일곱 왕에 대해 언급하면서 「imperium」을 언급했는데, 제국이란 의미보다는 「overlordship」을 가르키고 있다. 베다는 체울린을 목록의 두번째로 꼽고 있습니다만, 철자는 「Caelin」으로, 「동포 사이에서는 체울린이라고 불리고 있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베다는 또한 체울린이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밝혔다. 베다는 나중의 왕인 켄트의 에델바르트를 '천국에 들어간 첫 왕'으로 꼽았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의 827년 항목에서는 베다의 목록이 반복되고, 웨식스의 에그버트가 더해지고, 또한 그들이 「브레트왈다」, 즉 「브리튼의 통치자」라고 알려져 있었던 것도 언급되고 있다 . 이 말의 의미에는 많은 학자들의 주목이 모여 있다. 이 말은 '찬미시'라는 용어로 설명되어 왔지만, 군사 지도자로서의 명확한 역할을 암시하고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베다는 이 왕이 '함버 강 남쪽'에 권위를 가졌다고 말했지만, 적어도 초기 브레트왈다의 지배 범위는 아마도 이보다 좁았을 것으로 보인다. 체울린의 경우, 지배 범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만, 베다가 체울린을 제국을 잡은 왕의 목록에 포함하고, 그가 승리했다고 기록된 전투 목록에 포함하는 것은 그는 템스 강 상류역을 거점으로 주변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잠시 남부 브리튼인의 패권을 잡은 정력적이고 성공한 지도자임을 보여주고 있다. 체울린의 군사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북부 정복은 반드시 유지할 수 없었다. 마시아는 템스 강 상류역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571년에 획득한 북동부 마을은 켄트와 마시아의 다른 시기에 지배된 영토의 일부였다.

베다의 이 패자들의 힘의 개념도 8세기의 그의 견해의 산물로 간주되어야 한다. 『교회사』가 쓰여진 당시, 햄버강 이남의 잉글랜드는 머시아의 에델바르드 왕이 지배하고 있어, 베다의 역대왕에 대한 견해는, 당시의 잉글랜드의 정세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다 . 엘이나 체울린과 같은, 그 이전의 왕족에 대해서는, 베다의 기술에 시대착오의 요소가 다소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베다가 언급하려고 한 것은 앵글로 색슨 왕국에 대한 권력뿐이며 현지 브리튼인에 대한 권력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체울린은 베다의 명부에서 두번째 군주였다. 그 후의 브레트왈다는 연속해서 계속되었지만, 최초의 브레트왈다인 서섹스의 엘라와 체울린의 사이에는 50년의 간격이 있다. 나중에 브레트왈다의 군주의 지위에 간격이 없는 것은 체울린의 연대가 이후의 설명과 상당히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논의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 분석에 따르면, 다음 브레트왈다인 켄트의 애델베르흐트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601년에 그에게 편지를 썼을 때 이미 유력한 왕이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레고리우스는 하급왕에게 편지를 썼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연대기에 따르면, 체울린은 568년에 애델베르흐트를 꺾었다. 에델베르흐트의 통치는 논쟁적이지만, 최근 학자들의 합의에서 그의 통치는 580년보다 일찍 시작되지 않았다. 위반둥 전투의 568년이라는 날짜는 웨식스의 왕위 계보 일람의 다양한 판으로 체울린의 통치는 7년 또는 17년 계속되었다고 주장되어 있기 때문에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된다.

이 싸움이 에델베르흐트가 강력한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기 전의 590년경으로 된다면, 체울린의 패배와 죽음에 관한 그 후의 연대기는, 올바른 일자에 상당히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에델베르흐트와의 싸움은 590년 전후 몇 년 이상은 없었다고 생각된다. 한편, 엘라와 체울린 사이의 격차는 길더스가 '데 엑시디오'에서 말한 몬스 버드닉스에서의 브리튼인의 승리 후 1세대 이상 지속된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간주되어 있다.

켄트의 에델베르흐트는 체울린 뒤를 이어 왕위 계승자 목록에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통치는 다소 중복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의 평가에서는, 체울린의 통치는 아마 581년부터 588년, 애델베르흐트의 즉위는 589년경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이러한 분석은 어디까지나 학자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592년에 아마 체올에 의해 행해진 체출린의 몰락이, 애델베르흐트가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애델베르흐트는 597년까지 유력한 앵글로 색슨의 왕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델베르흐트의 대두는 더 일찍 있었을지도 모른다. 584년의 연대기는 승리를 기록하더라도 연대기에서의 체울린의 마지막 승리이며, 그 후의 기간은 애델베르흐트의 대두와 체울린의 쇠퇴의 시기였을 가능성이 있다.

592년(기록에 따라 591년) 워드네스베오르게(Wodnesbeorge)[38]에서 브리튼인에게 대패했다.[39] 그 후 체울린은 쫓겨나고 그 해에 죽었다. 그 후 (체울린에게는 조카가 되는) 쿠다의 아들인 체올이 뒤를 이었다.

그러나 체울린의 아들인 커스와인이 자신의 근거지인 템스강 상류 유역으로[40] 도망쳐 항거를 계속하자 그의 힘을 빼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으나 전부 실패했고, 체올계와 체울린계의 경쟁이 시작되게 된다.

체울은 597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쿠스위네가 너무 어렸기에 그의 형제 체올울프가 다음 왕이 되었다. 연대기에 따르면 체올울프는 "잉글랜드인, 브리튼인, 픽토인, 스코틀랜드인과 끊임없이 싸우고 싸웠다" 강력한 통치자였지만, 머시아 너머에 있던 픽트인과 스코틀랜드인과 싸웠을 가능성은 낮다. 기록에 남아 있는 그의 유일한 싸움은 607년 사우스 색슨인과의 전투에서 아마 와이트 섬과 남 햄프셔의 지배권을 둘러싼 싸움이었지만, 그는 아마도 남쪽과 서쪽 브리튼인과 색슨인 에 대한 웨식스의 영토 확대의 기초를 구축했다. 그는 웨식스를 구성하는 그룹들 사이에 지역적 패권을 구축하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611년 체올울프가 죽자 퀴네길스(Cynegils)가 잇는데, 630년 웨식스가 기록에 확실하게 처음 등장하게 되기 이전까지의 치세에 대해 611년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이 해 퀴네길스가 웨섹스의 통치권을 계승하고 31녀에 걸쳐 통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간결한 설명과 모순되어 614년 항목에는 "이 해 퀴네길스와 쿠위첼은 빈단에서 싸워 웨일즈인 2,046명을 살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베다는 626년 노샘브리아의 에아드위네 왕 암살 미수는 웨식스 왕 퀴네길스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고 썼다.

628년, 퀴네길스와 쿠위첼은 사이렌 세스터에서 펜다 왕과 싸웠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승리가 적혀 있었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아마 펜더가 승리했다. 이 무렵에는 퀴네길스와 쿠위첼은 노샘브리아의 에아드위네에게 종속되어 있었던 것 같고, 닉하임의 히다게족의 기원에 관한 생각이 옳다면, 10만의 피혁이라는 막대한 공물을 담고 있었다.

이후 630년을 기점으로 웨식스의 이름이 유럽 국가들의 사서에 언급되는 해로 그계기는 성 비리노(Birinus) 주교가 630년 교황 호노리오 1세의 명령으로 웨식스에 선교하러 간 뒤 635년 웨식스 왕 퀴네길스를 가톨릭으로 개종시킨 사건이었다. 이 때문에 비리노는 도체스터(Dorchester)에 주교좌 성당을 세울 수 있었다.[41] 퀴네길스는 당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머시아펜다(Penda)를 견제하기 위해 북쪽의 노섬브리아 왕 오수왈데(Osuualde, 오즈왈드)와 동맹을 체결했다.

하지만 그들의 연합에도 불구하고 머시아의 펜다(Penda) 왕은 여러 번에 걸친 노섬브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오수왈데 왕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한창 세력을 떨치던 노섬브리아를 한풀 꺾은 머시아는 남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펜다(Penda)의 공격적인 확장 정책에 웨식스는 크나 큰 압박을 받았다. 642년 퀴네길스가 죽고, 그의 아들인 첸왈흐(Cenwalh) 왕[42]가 웨식스의 왕이 되었는데, 그는 머시아 국왕 펜다의 누이를 왕비로 맞이했는데, 문제는 왕이 된지 3년이 지나 왕비를 버린 것으로 인해 645년 머시아의 군대를 끌고온 펜다에 의해 왕위를 잃었고, 펜다가 3년 동안 웨식스를 지배했다. 첸왈흐는 안나가 왕으로 있던 동앵글리아로 망명해야 했고, 망명 중 647년 성페트릭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648년 펜다가 평화 협정을 인정한 뒤에야 웨식스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템즈 강과 에이번 강 남쪽으로 웨식스의 세력이 크게 밀려났다.

왕국을 되찾은 후 첸왈흐가 한 일은 도체스터 온 템스의 주교를 맡고 있던 프랑크족 추신의 아길베르트의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베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색슨족의 말 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왕은 그 주교의 야만적인 말에 지쳐, 마침내 프랑스에서 서임된 위니라는 이름의 자국 출신의 주교를 이 지방에 초대했다. 그리고 이 지방을 2개의 주교구로 나누고, 이 마지막 주교를 윈체스터시[43]의 주교좌로 임명했다.

한때 주트족에게 속해 있던 땅[44]에 있는 새로운 윈체스터 주교구는, 장래의 웨섹스의 중심에 있었다. 661년경, 펜다의 아들 울프헬레가 게위스족의 원래 땅에서 애쉬다운을 공격한 것은 이 움직임이 색슨족에 대한 머시아인의 지속적인 압력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울프헬레는 와이트 섬으로 남쪽으로 나아갔고, 메온 계곡을 첸왈흐의 왕국에서 분리하고, 그의 이름을 지닌 남쪽 색슨인 왕인 에델바르에게 주었다. 이 무렵, 머시아의 왕자 프리투월드가 샐리와 버크셔를 통치하고 있었다. 674년에 에그프리스에게 패한 울프헬레는 남쪽의 왕국을 머시아인의 지배에서 해방했지만, 이듬해 울프헬레는 에스크와인이 이끄는 웨식스에게 패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의 658년 항목에는 첸왈흐와 브리튼인의 싸움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첸왈흐는 페오남에서 위아라족과 싸우고, 그들을 팔레트까지 놓쳤다." 영국 남서부로의 진출은 불분명하지만, 첸왈흐와 브리튼인과의 관계는 균일하게 적대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도셋 주 샤본의 영국 수도원에 기부금을 기부했다고 전해졌지만, 초기 앵글로 색슨 선교사 성 보니파티우스는 데본 주 크레디톤에서 태어났고, 엑서터 근처의 한때 영국이었던 수도원에서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고있다.

첸왈흐가 웨섹스에서 단독으로 통치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전 왕들은 통치권을 공유한 것 같고, 장래의 캐드왈라의 아버지인 첸베르흐트(Cenberht)는 단순히 부왕이었던 것이 아니라 첸왈흐와 함께 통치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665년부터 668년에 걸쳐, 첸왈흐는 머시아 왕 울프헬레에게로 망명한 주교 위니와 대립했는데, 울프헬레의 영향의 징후로 간주하고 있다. 이때까지 도체스터의 주교는 마시아 왕의 지원을 받은 아틀라였고, 템은 울프헬레의 소유지였다.

672년 첸왈흐가 죽고 그의 왕비였던 색스부르흐(Seaxburh)가 웨식스의 왕위에 올랐다.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에서 여성이 나라를 통치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고 그녀는 왕위에 오른 유일한 여성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베다는 첸왈흐 사후에 "하급왕이 스스로 그녀를 상급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자신들의 지배지역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결국 674년 색스부르흐가 죽자 웨식스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어버린다.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유명한 수도자 베다에 따르면 첸왈흐가 죽은 672년부터 약 10년간 웨식스는 나라가 여러개로 쪼개지는 등 난장판이었다고 하는데, 색스부르흐 사후 첸왈흐의 형제인 첸트위네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방계 중의 방계[45]인 그가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는지는 불명이나, 정황상 보아 체울린계의 적통인 캐드왈라가 아직 10대로 어린 상태에서 그를 지지했던 애스크위네와 그의 아버지 첸푸스가 대신 권력을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일부 사가에는 아버지 첸푸스가 왕이었다고 기록하는데, 보통 현대에는 앵글로색슨족 연대기에 따라 애스크위네가 왕이었다고 인정한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브레트왈다였던 머시아의 왕 펜다의 아들 울프헤레가 웨식스를 쳐들어왔고, 그는 맞서 싸웠으나 675년 대패한다. 그러고도 1년 더 왕위를 지킨 것으로 보아 울프헤레가 왕위는 빼앗지 않고 복속시킨 것으로 만족한 듯한데, 울프헤레 사후인 첸트위네 때부터 웨식스머시아에 반격을 가해 엄청난 속도로 확장을 시작한다.

676년 사망했으며, 아들이 없었는지 체올계이자 첸왈흐의 형제[46] 첸트위네가 왕위를 이었다. 첸트위네의 재위기간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은데, 얼마 없는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그는 전쟁을 통해 왕권을 바로 세우려 한 듯하다. 후임인 캐드왈라의 측근이 될 성 윌프리스의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세 개의 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때문에 현대의 학자들은 캐드왈라웨식스를 완전히 평정하기에 앞서 그의 대에 어느 정도 웨식스가 안정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이전 왕들이 2년이나 3년 단위로 짧게 재위한 것에 비해 9년이라는 상당히 장기간을 재위한 것으로 보아 더욱 타당성이 보인다.

챈트위네는 개인적으로는 전통적인 신앙을 믿었지만, 기독교에도 우호적이었는지 교회기독교를 보호하겠다고 맹세했다. 실제로 그의 딸은 수도자가 되었고, 사후 성인으로 추증되기도 했다.

685년 사망했으며,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기에 그의 죽음으로 체올계는 완전히 단절된다. 왕위는 체울린계의 캐드왈라에게로 넘어갔고, 이로서 10년 가까이 이어진 웨식스의 혼란기가 '''캐드왈라를 기점으로 일단락되기 시작했다.

첸트위네가 왕위에 오를 당시 캐드왈라는 추방중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준에 추종 집단을 군사화시켜 서식스를 공격해 서식스 왕 에델웨알흐(Aethelwealh)를 죽였다. 그러나 서식스의 영주(Ealdormann) 베르둔(Berthun)과 안둔(Andun)의 반격을 맞고 내쫓겨 서식스를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686년 서식스의 공동 국왕이 된 베르둔과 안둔이 켄트를 침략해 자신들의 사촌이었던 에아드리치(Eadric)를 왕위에 앉혔다. 그러자 캐드왈라가 다시 켄트를 침략해 에아드리치를 축출하고, 자신의 동생인 물(Mul)을 왕위에 앉힌 후, 이어서 서식스를 침략해 베르둔과 안둔을 죽여 서식스를 완전히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47]

이어서 그는 게르만 이교를 믿던 왕국 와이트 섬을 침략해 주민들을 모두 죽이고, 웨식스인들의 식민지를 세웠다. 와이트 섬의 마지막 군주였던 아르왈드는 살해되었고, 그의 두 형제는 도주했으나 이내 햄프셔의 스톤햄에서 발견되어 붙잡혔고, 캐드왈라는 그들 역시 살해했다. 하지만 성직자들의 설득으로 그들은 죽기 전 세례를 받았다. 이 전쟁에서 웨식스가 승리했지만 국왕 캐드왈라 역시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687년 켄트의 주트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캐드왈라가 내세운 물을 비롯한 12명의 웨식스인들을 태워 죽였다. 이에 캐드왈라는 688년 다시 켄트를 침공해 초토화시켰다.이후 칙허장에서, 파넘에게 수도원의 땅을 주었는데, 케드왈라가 서리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또한 686년 켄트를 침공하여 메드웨이와 템즈 강 사이에 있는 로체스터의 북동부인 푸에 수도원을 건설했을 가능성이 있다. 허나 와이트 섬 침략 당시 입었던 부상 탓인지 얼마 못가 돌연 퇴위하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왕위는 이네(Ine)가 이었다.

이네의 즉위를 전후로 이네와 그의 지지자들은 애스크위네첸트위네를 단순 찬탈자, 혹은 하위왕 정도로 격하했다. 이네가 재위하던 시절에 편찬된 베다의 기록에는 두 왕의 이름이 빠져있다.

이네의 통치 초기에 웨식스의 영토 범위는 꽤 잘 알려져 있다. 템즈강 상류역의 양안은 오랫동안 게비세인의 영토였지만, 캐드왈라는 이네의 즉위 전에 강의 북쪽 영토를 머시아 왕국에 빼앗겼다. 서쪽에서는 웨시스 체울린이 100년 전에 브리스톨 해협에 도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웨식스는 그 이후 반도 남서부를 더 남쪽으로 확대하여 브리튼의 돔노니아 왕국과의 국경을 닿았다. 돔노니아 왕국은 현재의 데본주와 콘월주에 거의 해당했다. 웨식스의 동쪽 국경에는 런던과 현재의 서리 주를 포함한 애식스 왕국이 있었다. 남동쪽에는 와이트 섬의 동쪽 해안을 따라 사우스 색슨인이 있었다. 서섹스 저편에는 켄트 왕국이 있었다. 이네의 전임자인 캐드왈라는 이 남부 왕국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템즈 강 상류를 따라 머시아인의 침공을 저지할 수 없었다.

이네는 와이트 섬의 지배권을 유지해 둠노니아에서 더욱 전진했지만, 캐드왈라가 서섹스, 샐리, 켄트에서 획득한 영토는 이네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모두 잃었으며, 특히 켄트의 경우 새로운 켄트의 왕인 위트레드가 687년 주트족의 반란으로 죽은 몰의 대한 배상금만 내는 조건으로 독립시켰다.

이네는 686년에 캐드왈라가 정복한 사우스 색슨인을 일정 기간 복종시켰다. 서섹스 노스헬름 왕은 692년의 칙허장에서 이네의 친족[48]으로 언급되었다. 710년 서섹스는 여전히 웨식스의 지배하에 있었고, 노스헬름은 이네와 함께 서쪽에서 돔노니아와 싸웠다고 기록되고 있다.

한편 켄트의 위트레드가 이전에 반포된 법률 체계를 발전시켰던 것처럼 이네 또한 694년경에 켄트의 애즈베르흐트의 법전을 참고한 웨식스의 법률을 만들어 반포한다. 이네는 최근 몰의 죽음에 대한 보상에 대해 위트레드와 평화적인 조건에서 합의하고 있으며, 두 통치자들이 법전 작성에 어느 정도 협력했다는 징후가 있었다. 시기 일치 외에도 두 법전에 거의 같은 형식으로 나타나는 조항이 하나 있습니다. 협력 관계의 또 다른 증거는 위트레드의 법률이 켄트어 '에오르쿤드' 대신 고귀한 사람을 의미하는 웨식스어 '게시스'를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이네와 위트레드는 양 왕국의 혼란 이후에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위신을 나타내는 행위로 법을 제정했을 수 있었다.

이네의 법률이 남아 있는 이유는 알프레드 대왕이 자신의 법에 덧붙였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본이며, 유일한 완전한 사본은 케임브리지의 코퍼스 크리스티 칼리지와 대영 도서관의 수장고에 소장된 코덱스의 일부만 현존하고 있다.

이네의 법률은 7세기의 원래 형태로 남아 있지 않을 수 있다. 알프레드는 법의 서문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이전 법을 거부했다고 언급했다. 어떤 법률을 생략했는지는 명시하지 않았지만, 그 시대에 더 이상 관련이 없는 법률이라면 인네 법률의 기존 버전이 완전하다고 가정 할 수 없다. 잉그리드 이바르센은 법률이 원래 라틴어로 작성되었으며 고영어로 번역되었음을 시사했다.

이네의 법률 서문에는 그의 고문의 목록은 세 사람이 이름을 따왔다. 주교의 에오르센 발드와 헤데, 그리고 이네의 아버지로 하위왕중 한 명으로 보이는 첸레드였다. 이네는 기독교인의 왕이며 기독교를 장려하는 의도는 법률에서 분명했다. 예를 들어, 성체 친교의 선서는 비기독교인의 맹세보다 더 중요하다고 선언되었으며, 세례와 종교 의식에 대해서도 다루어진다. 민사문제에도 당시 켄트주의 법률보다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었다.

법률 중 하나는 공유지가 여러 체올[49]에 의해 둘러싸일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다. 다만, 자신의 지분을 둘러싸지 않고 자신의 소를 타인의 밭에 헤매게 한 세올은, 손해의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은 토지가 공유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각 세올은 자신을 지원하는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왕의 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법률은 체올의 준수를 얻는 지역 영주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법과 다른 법률로부터, 소작인이 영주로부터 토지를 보유하고 있던 것은 분명합니다. 왕의 밀접한 참여는 영주와 소작인의 관계가 왕의 통제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길을 잃은 소를 다루는 법은 평지 농업 시스템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서 증거를 제공합니다. 그들은 쌀 시대에 웨섹스에서 노지 농업이 실천되었음을 보여주었으며, 아마도 이것은 잉글랜드 중부 전역과 북동쪽의 린지와 데이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농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웨섹스 전부에서 이 시스템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데본에서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토지의 '야드'에 대해 언급하는 법은 그 단위에 대해 처음으로 문서화된 것입니다. 야드는 1 하이드의 4분의 1과 같은 토지 단위로 하이드는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120 에이커[50]까지 확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의미에서 야드는 나중에 중세 농부의 표준 소유지가 되었고 빌 게이트로 알려져있다. 한 역사가는 "장원 경제의 시작은 이네의 법률에 명확하게 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

국왕을 위해 병역에 취할 의무인 필드를 게을리하지 않은 경우의 벌금은, 귀족의 경우는 120실링, 체올의 경우는 30실링으로 정해져 있고, 세올은 군대에 종군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다 일이 밝혀졌습니다. 학자들은 체올의 군사적 가치에 대해 의견이 나뉘어져 있지만, 패배는 노예가 되는 것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자유인이 싸우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다른 법률에서 살인죄로 고발된 자는 적어도 한 명의 고위인이 '선서조수'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었습니다. 선서 조수는 피고인을 대신하여 선서를 하고 범죄의 혐의를 받는다. 이네의 요구는 농민만이 맹세한 맹세를 그가 믿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것은 친족이 선서에서 피고인을 지원할 것으로 예상되었던 이전 시대의 큰 변화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법률은 이네의 영국인과 브리튼인의 신민에 대해 별도의 규정을 마련하고 전자를 후자보다 우대했다. 브리튼인에게 지급되는 웰길드는 같은 사회계급의 색슨인에게 지급되는 금액의 절반이었고 그들의 선서도 그다지 중시되지 않았다. 이 법이 양민족의 불완전한 통합을 나타내는 증거는 지명의 역사, 종교시설의 역사, 현지 고고학의 연구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으며, 법률이 발포된 당시 웨섹스의 서부에는 신참 게르만인이 드문드문 정착한 것을 알 수 있다. 색슨왕국의 색슨왕에 의해 발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법률에서 이네의 게르만 인신민을 정의하는 데 사용되는 용어가 "잉글랜드"인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이른 시기에도 브리튼 섬의 모든 게르만 민족을 포괄하는 공통의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한편 서리는 독립 왕국이 될 수 없었지만 이네의 통치 이전 몇 년 동안 켄트, 마시아, 에섹스, 웨섹스 사이에서 지배권이 옮겨졌다. 에식스에는 런던도 포함되었고, 런던 주교구에는 서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이 705년에 서리가 윈체스터 주교구로 이관될 때까지 이네와 애식스와 머시아의 왕들 사이의 마찰의 원인이 된 것 같다. 이네가 서리를 초기에 지배하고 있던 증거는 그의 법률의 서문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네는 런던 주교의 에오르센발트를 '내 주교'라고 부른다. 그 후의 이네와 애식스의 관계는 704년이나 705년에 런던의 윌드히어 주교가 캔터베리 대주교 브리트월드에 쓴 편지에 의해 밝혀진다.

그 편지는 "웨식스의 왕과 우리나라의 통치자 사이에서" 생긴 "분쟁과 불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윌드히어가 언급한 통치자는 애식스의 시게하드와 스웨프레드였고, 불화의 원인은 애식스가 웨식스으로부터 망명자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이네는 망명자를 추방하겠다는 조건에서 평화에 동의했다.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브렌트포드에서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 시점에서 서리는 분명히 웨식스의 지배하에서 벗어났다.

상술한 대로 705년 서리에 대한 관할권이 원체스터 주교구로 이관할 당시 이네는 기독교 왕으로 교회의 수호자와 보호자로 통치했다. 그의 법률 서문에는 런던 주교 에오르센발트와 윈체스터 주교 헤데와 같은 그의 고문의 이름이 포함되었다. 이네는 법이 “모든 영주, 국민의 최고 고문, 하느님의 종의 대집회”의 조언과 지도를 받아 제정되었다고 스스로 밝혔다. 법률 자체가 이네의 기독교적 신념을 나타내고 있으며, 유아의 세례나 충분한 세금의 납부를 게을리하지 않은 경우의 벌금을 규정하고 있다. 이네는 705년에 윈체스터 주교구에서 분리된 새로운 샤본 주교구를 중심으로 종교 시설을 후원함으로써 교회를 지원했다. 이네는 캔터베리의 파문 위협을 무시하고 이 분할에 반대했지만, 헤데 주교가 사망했을 때 이에 동의했다.

최초의 웨식스의 수도원은 이네의 통치 중에 이네의 친족으로 센트와인 왕의 딸인 바가와 이네의 여동생으로 남편인 노섬부리아 왕 알도프리드와 이혼 후 어느 시점에서 웜본 수도원을 설립했던 카스바에 의해 설립되었다. 705년에 알도헬름 주교의 제안으로, 이네는 나중에 웰스 대성당이 되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또한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쌀이 글래스턴 베리에 성당을 세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글래스턴베리에는 이미 영국 수도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추가 건물이나 재건을 가리켰다.

이네는 웨식스에 조직된 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이것이 그의 주도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또한 그는 웨식스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공회의와도 관련되어 있으며, 스스로 그 회의를 주재하고 모인 성직자들에게 연설한 것 같았다.

또한 이네의 통치기는 웨섹스의 엘더만과 엘더만이 다스리는 셔(shire)에 대한 최초의 언급이 나타난다. 웨식스를 햄프셔, 윌트셔, 서머셋, 데본, 도셋 등의 현재 주에 가까운 것으로 분할한 것은 이네였을지도 모르지만, 이전의 행정상 경계도 이러한 경계에 영향을 미친다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 주들은 왕족들 사이에서 왕국을 분할한 것으로 시작되었다고도 한다.

이네의 통치 중기 710년경까지 햄윅의 무역 마을이 잇첸 강의 서쪽 해안에 확립되었다. 이 장소는 현재 현대 사우샘프턴시의 일부가 되었다. 이 항구에서 거래된 상품에는 유리 용기가 포함되어, 동물의 뼈가 발견된 것으로부터, 피혁의 거래가 활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석구, 숫돌, 도기 등의 수입품이 발견된 것에서도 무역의 증거를 볼 수 있다. 마을에서 발견된 화폐에는 프리슬란트의 동전도 포함되어 있다. 마을에서 열린 전문 산업에는 직물 만들기, 대장장이, 금속 가공 등이 있다. 이네가 햄윅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여부는 불분명했지만, 그가 선호한 상품의 일부, 사치품 등은 거기에서 수입되고 있으며, 상인들은 아마 왕의 보호가 필요했을 것이다. 햄윅의 총 인구는 5,000명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이 인구의 많음 자체가 이네의 관여를 시사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식사와 주거를 준비할 수 있었던 것은 왕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700년경 이후 무역 확대와 병행하여 당시 일반적인 동전인 스키타의 유통지역이 템스강 상류역까지 확대했다. 최초의 웨식스의 동전은 이네의 통치 중에 주조되었다고 생각되지만,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은 발견되지 않았다.

다시 서식스의 지배권에 언급하면 베다에서는 이네가 '수년간' 서식스를 지배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722년에 에어르드바트라는 망명자가 서식스로 도망쳐 그 결과 이네가 서식스를 침략했다. 3년 후, 이네는 다시 침략해, 이번에는 에어르드바트를 살해했다. 서식스는 분명히 이보다 앞서 웨식스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에르드바트는 이네의 아들, 또는 벼의 형제 잉길드의 아들이 아닐까 하고 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710년에 이네와 노스헬름은 돔노니아의 겔란트와 싸웠다. 우스터의 존은 겔란트가 이 전투에서 죽었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이네의 확장 정책에 의해, 현재의 데본을 지배하고, 돔노니아와의 새로운 경계는 타마르 강이 되었다고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후속 사건, 예를 들어 헤힐 전투와 애셀스턴이 이스카(엑서터)에서 브리튼을 쫓아 버린 것과는 일치하지 않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10세기 연대기인 캄브리아 편년사에서는 722년에 브리튼인이 헤힐 전투에서 적을 격파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적'은 이네로 추정된 것외에는 장소는 특정되어 있지 않다. 역사가들은 콘월과 데본 모두의 장소를 제안했다.

이네는 715년에 워덴스 배로우에서, 체올레드가 이끄는 머시아인과, 또는 그들과 함께 한 무명의 적과 싸웠다. 그 결과는 기록되지 않았다. 워든의 분묘는 윌트셔의 알튼 프라이어에 있는, 현재 아담의 무덤으로 불리는 고분이다. 이네는 이전 왕의 밑에 서식스에 속한 템스 강의 북쪽 땅을 회복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남쪽 해안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687년의 칙허장에 따르면, 그는 템스 강을 따라 거리와 근처 바질동 교회에 땅을 주었다.

721년 연대기에는 이네가 쿠네울프라는 인물을 살해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인물에 대해서는 그 밖에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이름으로부터 웨식스 왕가와의 연결이 엿볼 수 있다. 그 후 곧바로 왕실에서 싸움이 일어난 것 같고, 연대기에 따르면, 722년에 이네의 왕비 에젤버그가 남편이 통치 초기, 710년경에 건설한 톤턴을 파괴했다.

726년 이네는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는 채로 퇴위했는데, 베다에 따르면 아내 에젤버그와 함께 로마로 순례를 떠나 그곳에서 죽었다.그의 퇴위로 비어버린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이네의 왕비 에젤버그의 동생으로 추정되는 애설허드와 오스왈드 사이에 쟁탈전이 발생했는데, 앵글로 섹슨 연대기에 따르면 오스왈드가 체올린의 후손으로 계승에 대한 정당성을 갖고 있었으나 머시아의 왕 애델발드의 지원을 받은 애설허드가 웨식스의 왕위에 오른다.그 후 그는 애델발드의 지배하에 놓였으며, 에델발드는 733년에 웨섹스로부터 소머턴의 왕령지를 비롯한 상당한 영토를 할양받았다.

이후 737년 로마로 순례를 떠났으며 740년 사망했고, 왕위는 친척으로 추정되는 쿠드레드가 승계했다.쿠드레드는 머시아가 최성기였을 때 왕국을 계승했습니다. 쿠드레드 통치의 처음 3년 동안 두 왕국이 자주 싸웠지만, 웨식스는 머시아에게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743년에 에델발드는 쿠드레드로 하여금 ​​웨일스인과 싸우도록 강요했다.

쿠드레드의 통치는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748년, 쿠드레드의 아들인 에설링인 킨릭은 아버지를 폐위하려 했으나 살해당했습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에델발드는 킨릭에게 반란을 권유했다고 한다.

750년, 엘더만 에젤훈이 반란을 일으켜 승리를 눈 앞에 둔 상태에서 중상을 입고 실패했고, 쿠드레드의 용서를 받았다. 752년, 쿠드레드는 이제 충실한 에젤훈의 도움을 받아 버퍼드의 배틀 에지에서 에델발드에 대한 정치적 독립을 성공시켰고, 나머지 통치 동안 머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유지했다. 또한 753년에는 콘월인과 싸웠다.

쿠드레드는 756년에 사망했지만 더 강력하고 독립적인 웨식스를 남겼다. 그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먼 친척으로 여겨지는 시게베르흐트였다. 그러나 1년간 통치한 뒤인 757년 시게베르흐트는 불법행위의 죄로 고발되어 귀족의 평의회인 위탄에 의해 권력을 박탈당했고, 퀴네울프가 새로운 왕으로 웅립되었다. 시게베르흐트는 햄프셔의 지배권을 받았지만 거기서 살인죄로 고발당하고 추방되어 결국 살해되었다. 이것은 머시아의 에델발드의 영향 하에서 일어났을 수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델발드는 암살되어 머시아는 왕위를 다투는 왕족들간의 분쟁으로 단기간의 혼란에 빠졌다. 퀴네울프는 웨식스의 정치적 독립을 주장할 기회를 얻었다. 758년경 그는 머시아인으로부터 버크셔를 탈취했다. 그 밖에도 웨일스인들과도 자주 전쟁을 하였다.

779년, 쿠네울프는 벤징턴 전투에서 머시아의 새로운 왕 오파에게 패했고, 오파는 버크셔를 탈환했고, 아마도 런던도 빼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패배에도 불구하고, 퀴네울프가 그 후 오파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증거는 없다.

786년, 퀴네울프는 폐위된 시게베르흐트의 형제인 퀴네하드에 의한 마튼에 위치한 정부의 집에서의 기습 공격을 받고, 살해되었고, 이윽고 퀴네하드 또한 퀴네울프의 근위병에 의해 살해되었다. 쿠네 울프는 윈체스터에 매장되었고, 비어버린 웨식스의 왕좌를 두고 이네의 동생이라고 알려진 잉길드의 후손인 켄트의 왕인 에알문드의 아들인 에그버트와 출신이 불명한 베오르흐트리치가 분쟁을 벌였는데, 머시아의 왕인 오파가 웨식스 왕위 분쟁에 개입했는데, 자신의 지배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으로 캔트를 통치해왔던 에알문드에게 거부감을 지녔던 오파는 에그버트 대신 베오르흐트리치를 지지하면서 베오르흐트리치가 웨식스의 왕위에 올랐고, 에그버트는 바다 건너 프랑크 왕국으로 망명해 카롤루스의 궁정에 의탁해야 했고, 카롤루스와 교류하면서 그의 동생인 레드버가와 결혼했다.[51]

787년 베오르흐트리치는 오파와 공동으로 첼시 공회의를 개최했고, 789년에는 오파의 딸 중 한 명인 이드바와 결혼했다. 마찬가지로 789년 베오르흐트리치의 통치 중에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영국에서 웨식스 최초의 바이킹 습격이 기록되었다. 바이킹은 포틀랜드 섬 근처의 도셋 해안에 상륙했고, 거기서 현지의 샤이아리브인 비더하드를 살해했는데, 비다하드는 바이킹을 상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전통적으로 머시아와 웨식스의 경계에 있던 땅은 오파와 그 아들 에즈플리드의 헌장에서 볼 수 있듯이 머시아의 궁정에 의해 관리되었다. 웨식스는 오파의 화폐를 사용한 것 같다. 중세 초기 단일 동전의 최근 조사는 오파의 페니가 템스 강 상류에서 베오르흐트리치와 관련된 곳인 웨어햄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오파가 796년에 사망한 후, 브리튼에 대한 머시아의 권력은 약해졌고, 이 시기에 베오르흐트리치는 보다 독립성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있다. 베오르흐트리치의 통치 중에 현존하는 웨식스의 동전은 2장만으로 이 시기에 제조되었기 때문에 그가 새로운 조폐소를 설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동전 중 하나는 1854년 앤드버에서 2마일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 몇 년 안에 오파의 후계자인 쾬울프가 머시아의 지위를 회복했다. 799년 이후 베오르흐트리치와 머시아의 관계는 오파의 사전 상황과 비슷했던 것 같다. 802년 베오르흐트리치가 사망했다.[52]

오파와 베오르흐트리치가 죽은 것을 알게 된 에그버트는 카롤루스의 지원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 웨식스의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당시 쾨ㅣㄴ울프는 어떠한 연유로 인한 것인지 에그버트의 귀환을 막지 못했으며, 이후 825년이 되는 동안 에그버트가 어떻게 웨식스를 통치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815년부터 에그버트는 웨식스 왕국의 서쪽 지역인 둠노니아를 정벌하는 데 주력했는데, 공격적인 행동가였던 머시아의 베오른울프는 이를 기회로 삼아 825년 군대를 이끌고 에그버트의 왕국을 치러 나섰다. 양쪽의 군대는 웨식스 왕국과 머시아 왕국의 경계에 위치한 엘란둔[53]에서 맞닥뜨렸다. 웨식스를 정복하려 했던 베오른울프의 야심찬 계획은 에그버트의 오랜 통치 경력과 전투 경력 앞에 무력화되었고, 머시아 군대는 에그버트의 군대에 대패하였다.

그런데 엘란둔 전투에서 에그버트의 승리는 단순히 베오른울프를 무찌른 것에 그치지 않았다. 엘란둔 전투에서 대패한 머시아 왕국은 잉글랜드 내에서 우세했던 지배력을 잃게 되었고, 반면 에그버트는 이번 승리를 계기로 웨식스 왕국의 동쪽인 켄트 지역을 비롯해 머시아 왕국에 종속되어 있던 동앵글리아, 나아가 노섬브리아까지 영향력을 뻗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엘란둔 전투는 앵글로색슨 역사에서 잉글랜드 내 왕국들의 판세를 뒤바꾼 가장 결정적인 전투로 기록되었다.

엘란둔 전투에서 승리한 에그버트는 머시아 왕국의 세력이 약화된 이 기회를 틈타 머시아의 영향권에 속해 있던 켄트 지역에 대규모의 군대를 파병하였다. 이 군대의 지휘관으로는 에그버트의 외아들 애설울프, 셔번의 주교 에알스탄, 그리고 햄프셔의 영주가 있었다. 에델울프를 선두로 한 에그버트의 군대는 켄트의 통치자 볼드레드를 몰아내어 켄트를 장악하였고, 이와 더불어 에식스, 서리 그리고 서식스에 이르는 웨식스 왕국의 동쪽 지역 전체를에그버트의 왕국에 종속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에그버트의 영토 확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엘란둔 전투 이전까지 잉글랜드 내에서 최고의 권력을 자랑했던 머시아 왕국이 에그버트에게 그 세력을 빼앗기게 되자, 그동안 머시아 왕국에 종속되어 있던 다른 지역들은 에그버트를 지지하며 그들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하여 4년 뒤인 829년에는 한때 머시아 왕국에 종속되어 있던 다른 지역들까지도 에그버트가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새롭게 왕위에 오른 머시아 왕국의 위글라프 왕이 에그버트에게 복수하려 했지만 그것마저 실패하면서 에그버트가 머시아 소속이었던 런던 동전 주조소까지 통제하게 되었고, 잠깐이지만 에그버트를 머시아인들의 왕으로 새긴 동전이 발행되기도 했다.

이로써 험버 강 남쪽까지 세력을 떨치자 에그버트는 브레트왈다가 되었다. 더 나아가 에그버트는 머시아 왕국의 최북단 국경선까지 진격해 노섬브리아 왕국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리고 셰필드 근처의 도레에서 노섬브리아인들이 에그버트에게 복종하기로 약속하면서, 비록 오랜 시간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노섬브리아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에그버트의 업적을 바탕으로 그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주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에그버트는 남부 지역을 모두 웨식스 왕국의 영토로 종속시키면서 정치적 통일을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다. 에그버트가 켄트 지역을 장악한 이래로 웨식스 동쪽의 이 지역들은 웨식스 왕국과 분리되지 않았다.

또한 838년에는 애설울프를 켄트의 부왕으로 임명함에 따라 켄트 지역에 또 다른 통치자가 탄생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함과 동시에 에델울프가 웨섹스 왕국의 후계자로 공고히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 후에 애설울프가 아버지 에그버트를 계승하여 웨식스의 새로운 정식 통치자로 즉위하자마자 애설울프는 그의 첫째 아들인 애설스탠을 켄트의 부왕으로 임명하여 아버지의 현명한 통치제도를 관습화하였다.

에그버트는 캐드왈라 이래로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성공적 치세를 펼친 왕으로 기억된다. 에그버트가 대대로 그의 후손들에게 웨식스 왕국을 물려주고 자신이 장악한 잉글랜드 남부의 영토를 그대로 보전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잉글랜드의 정치적 발전에 있어 중요한 단계로 손꼽힌다.

802년 베오르흐트리치의 서거 후 에그버트가 웨식스 왕국의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프랑크 왕국의 원조와 교황의 지지 덕분이었다. 에그버트가 재위 기간 동안 웨섹스 왕국을 넘어 노섬브리아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도 프랑크 왕국에서의 군사적, 정치적 원조 덕분이었다. 그러나 830년에 프랑크 제국에서는 루도비쿠스 1세가 후계 문제를 엉망으로 하면서 이에 반발한 첫번째 황후 소생이었던 로타리우스 1세루트비히 2세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면서 안정적이었던 상황에 균열이 가게 되었고, 이는 곧바로 에그버트의 통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 무렵 에그버트를 뒷받침했던 프랑크 왕국의 군사적 원조가 철회되자 머시아 왕국과 노섬브리아 왕국에 뻗쳐 있던 에그버트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고, 머시아 왕국에는 새로운 통치자인 위글라프가 즉위하였다. 그러자 머시아는 다시 엘란둔 전투 이전처럼 웨섹스 왕국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그버트의 통치 말기인 830년대 중반부터는 잉글랜드 남부의 왕국들이 다시 예전처럼 웨섹스 왕국, 머시아 왕국, 이스트앵글리아 왕국으로 분리되어 서로 힘의 균형을 이루며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에그버트는 죽기 1년 전인 838년에 힝스턴 다운 전투에서 콘월의 군대를 패배시킴으로써 잉글랜드 남부에서의 그의 권력을 강화하였다. 또한 이 전투의 승리로 그는 브리튼인과 바이킹들의 거점이었던 콘월 지방을 마침내 잉글랜드의 일부로 포함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에그버트는 839년 윈체스터에서 숨을 거뒀고, 켄트의 부왕이었던 유일한 후계자였던 애설울프가 웨식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웨식스의 새로운 정식 통치자의 위치에 오르자마자 첫째 아들 애설스탠을 켄트의 부왕으로 임명함으로써 이러한 계승 제도를 관습화해 정식 왕이 웨식스 왕국의 전통이 살아 있는 중앙과 서쪽 지역을 차지하고, 후계자를 켄트의 부왕 자리에 임명하는 제도를 반복하면서 왕권을 확고히 하여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웨식스 왕국을 보전하고 권력을 강화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애설울프 왕이 통치하던 800년대 중반 무렵은 바이킹이 더욱 수위를 높여 침략과 약탈을 강행했던 시기이다. 이전의 바이킹은 조선 기술, 항해술, 일기 예측에서 그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근거리에 있는 작은 섬들만을 약탈했던 반면, 그들이 수세기에 걸쳐 점차로 기술을 터득하자 800년대 중반에는 영국 전역과 유럽까지 항해하며 침략과 약탈을 일삼았다. 특히 런던과 켄트 지방은 바이킹의 반복적인 침략 탓에 점차 황폐해져갔다.

바이킹의 침략이 심해져가는 가운데 애설울프 왕은 왕국의 정세를 살피고 다스리는 일에도 충실했다. 특히 그를 보좌하던 윈체스터의 세인트스위던과 셔번의 에알스탄, 두 보좌관은 그의 통치가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세인트스위던은 그가 속세에 절어 방탕하지 않고 천상의 미덕을 추구하도록 조언한 반면, 에알스탄은 그가 전쟁에 함몰되지 않고 동시에 왕국을 다스리는 일에도 소홀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그를 자극하고 조언했다. 애설울프 왕은 이렇게 훌륭한 보좌관들을 옆에 두면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고민을 함께 나누었다.

바이킹의 침략이 일상화되어 간 탓에 애설울프 왕은 바이킹을 상대로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 예컨대 840년, 그는 이전보다 규모가 상당히 증가한 배 35척의 데인족 무리에 맞서 서머셋의 카햄튼에서 전투를 했고, 그 이후로도 거의 매해 공격에 맞서야만 했다. 여러 차례의 전투 중 851년 아클레아 전투와 샌드위치 해상 전투는 에델울프 왕 치세 때의 가장 성공적이고 유명한 전투로 남아 있다.

851년, 350척에 달하는 바이킹의 무리가 템즈 입구로 쳐들어와 캔터베리와 런던을 공격했다. 이때 머시아의 왕 베르흐트울프가 런던으로 원조를 나갔다가 패배하자, 바이킹은 기세를 몰아 서리에 쳐들어왔다. 이에 애설울프 왕은 둘째 아들 에델볼드와 아클레아에서 바이킹에 맞섰고, 첫째 아들이자 캔트의 부왕인 애설스탠과 샌드위치에서의 해전에서 바이킹을 완패시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비록 애설스탠의 죽음을 그 대가로 치르긴 했지만, 당시 애설울프 왕과 두 아들은 대규모의 바이킹을 완전히 격퇴시키면서 웨식스 왕국이 바이킹뿐만 아니라 주변 왕국에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힘을 지니게 했다. 이로써 웨식스 왕국에는 일시적인 안정이 찾아왔다.

851년의 전투로 애설울프 왕의 전투 능력은 주변 왕국에서도 인정했다. 머시아의 왕 버그레드는 즉위 1년 후인 853년 웨일스인들을 예속시키기 위한 군사 작전을 수행할 때 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두 왕은 합심하여 웨일스의 킹겐 아프 카델을 물리침으로써 웨일스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웨식스 왕국은 머시아 왕국과 때로는 적대관계, 때로는 동맹관계를 유지해왔는데 이를 계기로 애설울프 왕은 버그레드 왕과 자신의 딸인 애설스위스를 맺어줌으로써 머시아 왕국과의 동맹관계를 확실히 맺는 데 성공했다.

결론적으로 애설울프 왕은 통치 기간 동안 대내외적으로 훌륭한 왕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외부의 침략에도 잘 대응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을 머시아의 왕과 결혼시켜 머시아 왕국과의 영속적인 동맹관계를 형성했다. 또한 로마의 교황 및 주교들에게는 매해 공물을 바치고 성당을 복원하는 등 성공적으로 주변 왕국들과의 소통 수로를 개방했다. 주변인들과 적대적인 관계보다는 깊은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에델울프 왕의 정치적 전략은 훗날 알프레드 대왕에게도 크게 영향을 미쳐 그가 대대로 인정받는 왕으로 거듭나는 데 초석이 되었다.

855년에 로마로 순례 여행을 떠났는데, 그동안 웨식스를 차남인 애설볼드가 대리 통치했다.그동안 애셀울프는 여행 중에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 왕으로 불리던 고종 사촌인 샤를 2세의 딸인 쥐디트(주디스)와 결혼했기에 대리 통치를 하고 있던 애셀볼드 입장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졌기에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고, 서머셋의 엘더만인 에안울프, 셔본의 주교 에알스탄을 끌여들었는데, 이는 에델볼드가 왕족 출신의 어린 부인을 새로 맞아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또 다른 경쟁자를 낳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든 것에 대해 큰 위기감인지를 잘 알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856년 애설울프 왕은 로마에서 다시 웨식스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부재 동안 섭정을 했던 둘째 애설볼드가 서머셋의 에안울프, 셔본의 주교 에알스탄과 함께 그를 내쫓기 위한 음모를 알게 되었다. 이들의 반란을 마주한 그는 전쟁을 일으켜 애설볼드와 공모자들을 처벌할 능력이 있었지만 유혈 사태와 시민의 불화를 피하기 위해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애설울프 왕이 선택한 해결책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으나 웨식스 왕국 권력의 중심이자 웨식스 왕국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중앙 및 서쪽 웨식스를 섭정을 하던 애설볼드에게 양보하고, 그는 아버지 에그버트 왕의 재임 시절 그의 직위였던 켄트의 부왕 자리로 돌아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최근 이 기록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역사학자들이 등장했는데, 그 이유는 애설울프 왕이 바이킹과의 큰 전투에서도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만한 전사였으며 대머리 샤를 왕이 딸 주디스를 맡기고 웨식스로 보냈다는 점, 그리고 주디스가 여왕으로 등극하여 그와 나란히 섰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그가 웨섹스 통치의 중심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애설볼드 왕의 동전이 발견되지 않고 그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만 발견된다는 점 역시 최근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대신 그는 평화적으로 사태를 마무리할 수 있는 하나의 방안으로 애설볼드에게 웨식스의 제일 서쪽 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로 임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하여 웨식스 중앙과 서쪽을 다스리는 왕, 동쪽의 켄트를 다스리는 부왕으로 나뉘어져 왔던 웨식스 왕국의 왕위가 예외적으로 애설울프 왕의 마지막 치세 기간 동안에는 제일 서쪽을 다스리는 애설볼드까지 추가되어 서쪽, 중앙, 동쪽 이렇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각각 애설볼드, 애설울프, 애설버트가 통치하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애설울프 왕의 희생적인 면모를 돋보이게 한다. 그는 반역하는 그의 아들을 대접하는 데 동의하고 웨식스의 귀족들의 회의에 타협안을 회부하며 그를 따르는 지지자들의 애설볼드를 향한 공격성을 누그러뜨렸다. 이는 모두 그의 독실한 기독교적 정신이 국가적 평화를 위해 권력과 명망을 희생하고 이를 감수해 자신의 위신을 지키기 위해 왕권을 놓고 아들과 전쟁을 한 것보다 더 낳다고 여겼을 것이다, 만일 가족 간의 분쟁이 계속되었다면, 그 전쟁은 곧 에그버트 가문의 존속 기반 자체를 위협했을 것이며 웨식스 왕위는 다른 분가의 차지가 되거나 혹은 여전히 브리튼 내의 앵글로 섹슨의 패권을 노리던 머시아와 노섬브리아의 침략을 받고 굴복했었을지 모른다.

애설울프 왕은 858년 1월 13일에 서거했는데, 서거 몇 달 전 유언을 남기며 가난한 자들의 고통을 경감하기 위한 조항을 포함시켰다. 그는 가난한 자에게는 음식, 음료 그리고 숙소를 제공하도록 후계자에게 조항을 남김으로써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보살핌이 후대에도 계속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기 전,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한 계획을 강구했다. 애설울프 자신은 유일한 후계자였던 터라 아버지 에그버트 왕으로부터 비교적 수월하게 왕위를 계승받았다. 그러나 애설울프 왕은 일찍 죽은 첫째 애설스탠을 제외하고도 후계자로 삼을 만한 아들이 네 명이나 되어 자칫 아들들 사이에서 후계자 자리를 놓고 전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그는 각각의 자식들이 형제간의 경쟁의식을 지니지 않도록 순서대로 왕권을 차지하게 함으로써 왕위 계승으로 인한 자식들 간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 그는 알프레드를 가장 좋아했지만 그를 자신의 뒤를 잇는 후계자로 지목하지 않고, 둘째인 애설볼드가 왕위를 계승받아 왕국을 통치하도록 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왕위에 오른 애설볼드는 계모가 가진 서프랑크 왕국 공주로서의 지위가 너무 탐이 났기에 엄청난 일을 감행한다. 왕비, 즉 그의 새 어머니와 결혼한 것이다. 당연히 이에 대한 엄청난 반대가 있었다. 후에 동시대 인물이자 애설볼드의 막내 동생인 알프레드의 측근이 된 애서 대주교는 애설볼드가 죽었을 때 그와 그의 통치에 대해 그를 "사악하고 탐욕스럽고,2년 반 동안의 무법 상태로서, 왕의 오만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반란을 일으킬만 했다"고 악평을 했을 정도였다.

애설볼드의 통치에 대해서 남아 있는 기록이 없으나 두개의 칙허장을 통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는데, 858년은 스위잔이 퍼넘의 주교령을 왕에게 평생에 걸쳐 주었으며, 바바라 요크의 견해에서는 에설볼드가 윈체스터 주교의 영지를 몰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예이다. 860년, 에설볼드가 윌트셔의 테폰트에 있는 14 하이드를 오스만드라는 이름의 귀족에게 준 것이다. 둘 다 유디트에 의해 입증되었으며 그녀의 높은 지위를 보여줍니다. 9세기의 웨식스 왕의 아내는 보통 여왕의 자리를 주지 않았고, 칙허장을 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결혼과 증명은 에설볼드가 왕위 계승을 형제가 아니라 자신의 아들에게 건네줄 생각이었다는 증거이다. 다른 칙허장은 요새화 공사에 대한 기부를 의무화한 현존하는 웨식스의 칙허장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주디스의 측근이 이 해당 공사에 관여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또한 바이킹의 약탈이 계속 되었는데 한 무리의 해적이 사우스햄튼에 도착하여 윈체스터 일대를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왕의 군대가 이들을 무찔러 캔트의 싸넷으로 퇴각시켰고 해적들은 거기서 겨울을 나게 되었는데, 그들은 주민들이 베풀어준 호의에 보답하기는커녕 오히려 휴전을 파기하고 그 지역을 통째로 약탈하기에 이르러 소집된 군사들이 이들을 내쫓게 되었다.

860년 애설볼드가 죽자 켄트의 부왕이었던 애설버트가 새로운 웨식스의 왕으로 즉위한다. 그의 치세는 내치적으로 평화로워 보였으나 외치로 볼 때는 전혀 아니었다. 바이킹들이 다시 브리튼 섬을 침략했고, 켄트 지역 동부를 개발살내고, 당시 수도격이었던 윈체스터까지 넘볼 정도였다. 애설버트는 만일을 의해 자신이 일찍 죽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동생인 애설레드를 후계자로 지정했으나 그러나 열 살 정도 차이 나는 에델레드가 너무 어린 탓에 그가 에델볼드의 뒤를 이어 웨섹스의 중앙 및 서쪽 지역의 통치권도 계승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에델버트의 치세 때 가장 기록적인 일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웨섹스 왕국이 단일한 통치자에 의해 다스려지는 통일된 왕국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그가 에델볼드의 왕권을 물려받으면서 아래 동생에게 캔트의 왕 자리를 넘기지 않았으며, 그리하여 웨섹스 왕국의 역사상 최초로 웨섹스의 서쪽 지역과 동쪽 지역 전체를 한 명의 왕이 다스리는 체제가 구축된 것이다. 에델베르흐트의 이러한 위대한 업적은 훗날 역사가 데이비드 덤빌에 의해 ‘대웨섹스(Greater Wessex)’로 일컬어졌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띠르면 애델볼트의 통치는 '조화와 큰 평화'와 '평화와 사랑과 명예' 속에서 통치했다.'라고 기술되어 있었으며, 그는 동생들과 사이가 좋았던 것 같았는데, 861년의 칙허장에서는, 수도원장이 그, 에설레드, 알프레드에 충성을 맹세하는 대신에, 캔터베리의 성 어거스틴 수도원에 토지를 주었고, 이에 대해 일부 역사가들은 3명의 형제가 각각 차례로 왕위를 계승하기로 합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862년과 863년의 두 가지 칙허장에서는 에설레드가 웨식스의 왕으로 땅을 주었으며 에설버트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았다. 케인즈의 견해에서, 에설 버트는 아마 자신의 부재 중에 웨섹스의 권력의 일부를 위임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863년 12월 에설버트의 척허장은 에설레드와 알프레드에 의해 왕의 아들(filius regis)로 증명되었다. 에설 버트는 아버지 에설울프와 형제 에설볼드의 영혼에 경의를 표하며 샤본 교회에게 왕실과 사법의 봉사로부터 면제를 주었다. 라틴어로 작성된 대부분의 칙허장과는 달리, 이 칙허장은 고대 영어로 작성되었으며 역사가들 사이에서 법적 문서를 기록하는 데 더 적합한 모국어 사용 증가 추세 를 반영하고 있는지, 혹은 알프레드가 871년에 왕위에 갔을 때 라틴어 지식이 비참하게 쇠퇴하고 있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지는 의견이 나뉘어져 있다.

에설버트의 통치는 바이킹의 습격으로 시작되어 바이킹의 습격으로 끝났습니다. 860년 바이킹 집단이 잉글랜드로 항해하여 윈체스터를 약탈했지만 햄프셔와 버크셔에서 패했다. 아마 864년 가을, 또 다른 바이킹 무리가 사네트에 진입해, 평화의 보상에 금전을 약속되었지만, 약속을 깨고 켄트 동부를 황폐시켰다. 이 공격은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거의 정복한 에설버트의 사후 사건에 비해 작은 것이었다.

865년에 에설버트는 죽었고 그의 왕위는 동생인 애설레드가 이어받았다. 문제는 즉위 첫해부터 위기가 닥쳐왔다. 바로 바이킹들이 이전과 다른 규모로 연합군을 결성하여 브리튼 섬으로 대대적으로 침략해 온 것이다. 이 사건은 역사상 이교도 대군세(Great Heathen Army)로 알려져 있다.
2.1.1.8. 기타 소왕국들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칠왕국말고도 여러 개의 소왕국들이 존재했었다. 현재의 햄프셔와 와이트 섬에 정착한 주트족들인 메온와라(Meonwara)와 위트와라를 시작으로 앵글로·섹슨족들이 6~7세를 전후로 독자적인 세력들을 구축했다. 허나 7세기를 전 후 버니시아와 데이라가 노섬브리아라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될 당시 켄트, 서식스, 웨식드, 애식스, 동앵글리아, 머시아 등의 강대국들이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면서 나머지 소왕국들은 그대로 일곱개의 왕국들 중 노섬브리아와 머시아, 동앵글리아, 웨식스에 굴복해야 했고, 이후 8세기를 전후로 인접한 강국들에 의해 흡수되었다.
서로마 제국 붕괴 직후 켄트 지방에 있던 주트족들 중 일부 집단들이 켄트를 벗어나 서쪽으로 이동했다.이중 일부가 햄프셔 지방에 정착해 메온와라를 자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메온와라의 군주들에 대해서는 앵글로 섹슨 연대기에 건국자가 Port라는 남자와 그의 두 아들 Bieda와 Maegla였다는 것 외에는 기록은 없으나 의결체인 위탄의 구성원들을 공동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이며, 웨식스에 병합되기 전까지 기독교가 전파되지 않거나 미약한 수준으로 여겨지고 있다. 6세기 후반부터 섹슨족들이 현재의 잉글랜드 남부에 진출하면서 세력을 확장하는데, 실패했으며, 베다의 저서 '잉글랜드 교회사' 속에서 661년경 서식스 왕 에젤위얼이 머시아의 울프헬레 왕에게 맘영한 후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때 울프헬레는 애설웰흐에게 와이트섬과 메온웨어 지방을 주었는데, 이때 메온와라 지방이 머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에온와라를 지배하면서 머시아는 서식스에 대한 종주권을 획득함으로써 웨식스에 대한 압력이 강해지고, 웨식스는 북쪽과 동쪽의 두 측면에서 위협에 노출되게 되었다. 와이트 섬과 메온웨어의 영토는 울프헬레의 죽음 이후 680년대에 웨식스의 캐드왈라에 의해 정복되어 그 후 웨식스에 영구적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잉글랜드 남단에 위치한 와이트 섬에 세워진 주트족들의 국가로 이 왕국의 이름과 와이트 섬이라는 이름은 로마 시대에 이 섬을 웩티스(Vectis, 지레)라고 부른 데서 유래됐는데,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선 다른 민간어원을 제시한다. 위흐트가르(Wihtgar)라는 사람이 왕국의 초대 국왕인데, 위흐트와라라는 이름도 위흐트가르의 백성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선 위흐트가르가 스투프(Stuf)라는 자와 공동왕이었고, 웨식스체르디치의 조카들이었다고 전해진다. 베다의 『앵글인의 교회사』에선 그들이 512년부터 왕이었다고 하고,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선 534년에 킨리치에게 땅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7세기의 마지막 유트인 왕 아르왈드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의 왕들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른 앵글로색슨 왕국들처럼 와이트 섬의 기독교화는 좀 늦었는데, 661년 머시아의 왕 울프헤레(Wulfhere)가 웨식스를 정벌하면서 이 섬을 빼앗았고, 메온와라와 함께 속국이었던 서식스의 왕 애델웨알흐(Æðelwealh)에게 주어 와이트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울프헤레가 떠나자 추방되었던 캐드왈라가 군대를 모아 서식스를 침략해 애델웨알흐를 죽이고 섬이 다시 해방되자 그들은 오딘을 섬기는 게르만 신화로 돌아갔고 20여년 뒤 완전히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신앙을 유지했다.

마침내 7세기 후반 머시아웨식스의 경쟁자들을 모두 무찌르고 웨식스의 유일한 왕이 된 캐드왈라는 베다의 기록에 따라 곧 686년 서식스켄트를 정복하고 와이트 섬을 침략하여 멸망시켰다. 섬의 주민들은 모두 살해당했고, 마지막 군주인 아르왈드는 처형되었으며 도주했던 그의 두 형제도 본토에서 발각되어 주살당했다. 대신 아르왈드의 누이가 살아남았다고 하는데, 이름이 전해지지 않지만 그녀는 켄트의 왕 에그버트 1세(Ecgberht I, 에즈베르흐트)와 결혼하여 후대 왕 위흐트레드(Wihtred)를 낳아 모후가 되었다고 추측되는데, 위흐트레드는 알프레드 대왕의 가까운 조상이다.
하이에스팅가스는 페벤지의 동쪽, 색슨 해안의 요새 안데리탐 건너편, 하구와 늪지를 중심으로동쪽으로 켄트. 북쪽으로 에식스, 서쪽으로 웨식스. 남쪽으로 서식스에 둘러싸인 소국으로 대략 6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헤스팅가족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들은 사우스 색슨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믿어졌다. 그러나 5세기에서 8세기 사이에 서섹스의 그 지역에 앵글로 색슨인이 거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중세 자료와 지명의 증거는 8세기 후반까지 사람들이 거기에 살기 시작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서식스 왕국의 색슨인의 칙허장 중에는, 서섹스에 2개의 별개의 왕조가 존재했다는 것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서섹스를 통치한 노셀름 왕의 칙허장은 와트(또는 왓스)라는 이름의 두 번째 왕의 존재를 정기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역사가 C.T. 슈발리에는 왓이 헤스팅가족을 통치하고 있던 것이 아닐까 암시한다. 이는 와트 또는 와트라는 지명이 헤이스팅스 지역에 있지만 서섹스 서부에서는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설은 다른 역사가들로부터도 그럴듯하다고 여겨진다. 슈발리에는 또한 헤이스팅가족이 프랑크족의 기원일지도 모른다고 제안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이것을 부인하고 지명 증거의 잘못된 해석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8세기 말 무렵, 켄트에는 확고한 지도자가 없었고, 웨식스 왕국은 캐드왈라의 지휘하에서 확장주의적인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결과, 켄트는 웨식스에 의한 빈번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686년의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케드왈라가 형제의 물과 함께 켄트를 황폐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듬해, 켄트 사람들이 형제의 물을 "태워 죽이는"것으로 살해하고, 케드왈라가 켄트를 제압했다 "라고 기록되고 있다. 688년, 캐드왈라는 로마로 순례를 떠나 이후 체류 중에 사망했다. 그 후 켄트는 새로운 왕 위트레드의 통치하, 또 이네가 웨섹스 왕이 된 것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켄트 사람들은 몰의 생명을 빼앗은 것에 대한 보상을 웨섹스에게 지불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 합의에는 국경 영토의 할양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 협약의 일환으로 헤스팅가스의 영주권이 이네에 할양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남부의 왕국은 그 후 25년간 비교적 평화로 살았다.

이 평화는 머시아인의 세력의 상승에 의해 무너졌다. 연대기작자인 더람의 시메온은 771년 마시아의 오파에 의해 헤스틴골름 일족(헤이스팅스의 사람들)이 패배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머시아의 패권은 825년 에란단 전투에서 웨섹스의 애즈베르흐트에게 패한 것으로 끝났다. 애즈베르흐트는 에식스, 켄트, 서리, 서식스의 영토를 병합했고, 이 시점에서 헤스팅스가드는 서식스에 흡수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1011년에 헤이스팅스가드가 덴마크인에게 습격당한 것이 기록되어 있으며, 헤이스팅스 가드가 11세기까지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의 링컨셔에 있었던 앵글로족의 소국으로 현재와는 달리 당시에 습지 지역으로 이지역에 정착한 앵글족 집단은 현지에 잔존한 로만브리튼인들과 공존했고, 이로 인해 링컨과 린지 자체와 같은 주요 정착지가 부분적으로 켈트어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의 일부 역사 학자들은 일부 공동체가 8세기까지 브리튼어를 계속 이야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린지가 유명해진 것은 역사 시대 이전 베오울프 사가의 배경이 되는 시기로 5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자체적인 왕들이 있지만, 점차 외부의 영향을 받아 데이라, 노섬브리아, 그리고 나중에는 머시아의 하위 왕국으로서 지배권이 변동이 심했으며, 바이킹들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독립을 잃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Wrocen에 사는 사람들"들로. 영국의 역사가인 N.J. Higham은 이것을 Wroxeter, 즉 이전의 코르노 위의 도시를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 도시는 코르노비아의 후계 영토 단위였던 이 초기 로마 제국의 정치의 중심지이었다. 그는 "이것은 우선 왕궁 자체를 구체적으로 가리킬 수 있으며, 그 연장으로 궁정이 관리하는 영토를 가리킬 수도 있다"라고 생각했다. Wrekin의 언덕의 요새는 현재까지 로마, 로마 제국의 오래된 통치자, 또는 앵글로 색슨의 거주지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를 아무것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브로켄사에테라는 이름은 옛날부터 사용되어 왔고, 최초로 부족 히다주(통상은 7세기에 거슬러 올라가는 공납 리스트)에 등장해, 마지막에 기록된 것은 855년에 바이킹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하는 머시아의 주 또는 지구인 브로켄 사툰이었습니다.

왕국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부족 히다주에는 7,000히드라고 기재되어 있어 애식스 왕국과 서식스 왕국에 필적하는 넓이였다. 증거로부터, 브레킨셋은 웨일즈에 접한 3개의 큰 마시아의 종속왕국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해, 그 남쪽에 마곤세테, 가장 남쪽에 위체가 위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된 장소는 한때 로마 제국의 빌로코늄 코르노비오름 (현재의 브록세터)에서, 코르노비족의 한때 도시에서 더 브레킨으로 알려진 언덕 요새 근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왕국은 현재 체셔, 슈롭셔의 대부분과 동북 웨일즈, 렉섬, 덴비셔, 플린트셔까지를 덮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웨일즈와 브레오센세이테의 경계는 오파의 장벽이였다고 생각된다.

인접한 마곤세테와 마찬가지로, 브레오센세이테의 영토에는 몇몇 작은 부족과 왕국이 포함된 것 같다. 지명으로부터, 훨씬 작은 메레세테와 리우세테가 브레오센세이테의 영토내에 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과 마곤세테의 보다 남쪽의 예는 웨일즈와의 국경선을 따라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있는 것 같고, 마시아왕이 경계를 정하고 지키기 위해 만든 인공적인 기원일 가능성이 제안되었습니다.
마곤세테는 머시아의 소왕국으로 헤리퍼드 교구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영국령 펑웰은 656년에 머시아인의 군주였던 노섬브리아의 오스위그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 후, 벵웰른 서부는 앵글인 그룹에 의해 점령되었다. 한 그룹은 고대 로마 마을 마그나에 또는 고 웨일스어로 케어 마곤(현재 헬레포드 인근 켄체스터)에 기반을 두고있었다.

서부 헤카니의 소왕국은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에 존재하며, 메레와르, 밀드프리스, 메르켈름의 3명의 통치자가 알려져 있습니다. 8세기 후반까지, 이 지역은 머시아에 재편입된 것 같았고, 아마 웨스타나로, 9세기까지 마곤세테로 알려지게 되었다. 마곤세트족의 더 작은 지족에는 헬레포드 근처의 테메르세이트족과 라드로 근처의 할세이트족이 포함되었다.
수단힘브레는 머시아 북부에 위치한 소국으로 이 국명의 어원은 머시아인이 사용한 것이 아니며, 데이라나 버니시아가 자신의 노섬브리아 왕국에 대한 영토적 반응으로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서는 코엔레드 왕이 702년에 수단힘브레의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가 머시아인 전체의 왕이 되기 2년 전으로 코엔레드 왕이 머시아 왕 울프헬레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수단힘브레가 머시아의 하위 왕국임을 시사한다.

보다 일반적으로, 수단힘브레는 특히 잉글랜드가 통일되기 전의 시대에 햄버강의 하구보다 남쪽의 앵글로 색슨의 영국 전체를 가리키기 위해 현대 역사가에 의해 편의적으로 사용되었기에 노섬브리아에서 유래된 어원이 아닐 수도 있다.
앵글족은 6세기 초에 동앵글리아와 워시에서 미들랜드에 침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초로 지배권을 확립한 이들은, 미드딜 엔그리(미들 앵글인)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영토는 현재 레스터셔와 이스트 스태퍼드셔를 중심으로 했지만, 케임브리지셔 고원과 칠턴 산맥까지 퍼져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들은 머시아와 잉글랜드 전체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와트 링 스트리트와 포세웨이의 큰 육로와 토렌트 강과 그 지류 인 테임 강과 솔 강의 주요 하천을 모두 지배했다.

미들 앵글은 펜다의 통치 이전에 머시아 왕국에 편입된 것 보인다. 펜다는 그들의 영토에 거점을 두기에 충분히 안전하다고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펜다 왕은 장남의 페이다를 부왕으로 미들 앵글의 관리했다. 베다는 페이다가 받아들인 4명의 기독교 선교단의 대상으로 중부 앵글인을 지정하고 있었다. 페이다는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그의 딸 알크플리드와 결혼하기 위해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이 선교단은 653년에 도착했으며 세인트 세드도 참가했습니다. 페이다가 개종하고 노섬브리아에서 세례를 받은 것은 머시아 국내에 불통일감과 지역주의가 계속되고 있음을 나타낼 수 있다. 머시아 왕국의 전략적 및 정치적 중심지에서 중부 앵글인의 현지 지원이 없었다면 페이다는 아버지와 그다지 다른 길을 걸을 수 없었다. 655년 펜다의 패배와 사후, 그리고 1년 뒤 노섬브리아 출신의 아내의 의한 페이다 시해 후, 오스위그는 머시아를 지배 할 수 있었다. 그는 선교사 중 한 명인 아일랜드인 디우마를 미들 앵글과 머시아의 주교로 임명했다. 베다는 사제의 부족으로 인해 두 민족에게 한 명의 주교를 임명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것은 미들 앵글과 머시아 왕국의 중심이지만, 머시아인 본국과는 명확하게 구별되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고, 머시아이라고 하는 호칭은, 더욱 북쪽과 서쪽에 정착한 사람들 때문에 에 유보된 것 같다. 디우마는 단기간이지만 성공한 선교활동 이후 미들 앵글에서 사망한 것 같다. 그의 후계자인 또 다른 아일랜드 선교사 세오락은 베다가 이유를 명시하지 않았지만 곧 돌아왔다. 그 후 툴룸헤레와 잘만이 이어졌다.

펜다의 또 다른 아들인 울프헬레는 계속해서 미들 앵글에서 머시아의 통치를 행하고, 왕실의 중심지를 탐워스에 두었다. 669년, 자르만의 사후, 울프헬레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새로운 주교를 파견하도록 요청했다. 이 주교는 세드의 형제인 차드였다. 베다에 따르면 차드는 '머시아와 린지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경우 미들 앵글이 머시아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은 틀림없다. 광대한 지역 전체 교회의 중심지는 미들 앵글의 영토에 설립되었다. 울프헬레는 차드가 수도원을 건설할 수 있도록 탐워스에서 조금 떨어진 리치필드에 토지를 기증했기 때문이다. 머시아 내 민족 간의 구별은 서서히 희미해지고, 그들 모두가 머시아인으로서 묘사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이 차드 시대의 이해를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는지 아니면 8세기 초의 베다의 이해를 보다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서로마 붕괴를 기점으로 위체가 있던 지역은 1세기 넘게 브리튼의 영토 내에 있었다. 하지만 앵글족들이 위릭셔의 에이번 강을 거슬려 유입되면서 점차 앵글족의 영역에 잠식되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577년 데오람 전투에서 체울린이 이끄는 게위스(서쪽 색슨인)가 3명의 브리튼인들의 왕을 살해해, 글로스터, 사이렌 세스터, 바스를 점령했다. 그러나 웨식스에 의한 이 지역의 점령은 오랫동안 계속되지 않고, 584년에는 일찍 종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연대기에 의하면 해는 페탄 리그 전투가 있었던의 해로, 이 싸움에서 쿠사가 전사한 것 외에 체우린은 막대한 전리품으 얻고 귀국했다. 그리고 베다에 따르면 성 어거스틴이 위체와 서식스의 경계에 있는 어거스틴 오크에서 잉글랜드 주교들과 회의를 연 603년까지 확실히 끝났다.

앵글족은 628년에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때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웨식스인들이 머시아 펜더와 사이렌 세스터에서 싸웠고, 그 후 평화를 맺었다. 펜더는 분명히 승리했지만 아마도 현지 지도자와 동맹을 맺었을 것으로 보인다. 위체의 속한 부족에는 푸스메라족, 스토핀가스족, 웨오르고란족 등 여러 가지 부족 그룹이 포함되어 있었다.

위체의 첫 번째 왕으로 여겨지는 사람은 에앙헬레와 에안프리드 두 형제였다. 베다는 이페 여왕은 “자신의 나라, 푸위체 왕국에서 세례를 받고 있었다. 이를 통해 에안프리드와 에안헬레는 왕족이었고 그들의 왕국은 기독교 국가라고 추측할 수 있다.

위체족이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선교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켈트계 기독교인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베다는 그레고리오 1세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위체족의 개종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지명으로부터 앵글로 색슨인의 거주지가 이 지역에 퍼져 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만, 이교도의 매장지가 그다지 퍼지지 않은 것, 또 로마 브리튼 교회를 반드시 나타내는 2개의 에클 지명으로부터, 기독교는 유입을 살아남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스터 대성당과 글로스터의 세인트 메리 드로드 교회 아래에는 아마 기독교 매장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들어온 앵글로 색슨 사람들은 기존 교회에 흡수된 것 같습니다. 위체족의 지배 왕조는 아마도 이 과정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앵글리아인과 브리튼인의 유력한 일족의 결혼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추론의 연쇄에 의해, 에안히아는 노샘브리아의 오스위우의 딸 오스리스와 결혼해, 오스릭, 오스왈드, 오스셰레라는 아들을 낳았다고 추측할 수 있다. 오슬리스는 마시아의 애델레드의 아내로 기록되었다. 에안히아와의 이전 결혼은 오슬릭과 오스왈드가 에델레드의 후계자로 기술된 이유를 설명할 것이다.

오슬릭은 후위체족이 독자적인 주교를 얻기를 갈망했지만, 679년부터 680년에 걸쳐 우스터 주교구가 창설된 배후에는 오스셰레의 영향이 보였다. 아마 오슬릭은 그때까지 죽었다. 위체족의 첫 주교에는 위트비의 타트프리드가 선정되었지만, 서임 전에 사망하고, 보젤이 후임이 되었다. 12세기의 우스터의 연대기작자는, 우스터가 주교의 거성으로 선정된 것은, 거기가 위체의 수도였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셰르의 후계자는 아들 에셀하드, 에셀워드, 에셀릭이다. 오파의 통치 초기에, 왕국은 에앰버트, 우트레드, 알드레드라는 세 형제에 의해 통치되었다. 마지막 2명은 780년경까지 살아 있었다. 그 후, 왕의 칭호는 포기된 것 같다. 그들의 후계자 에셀문드는 802년에 웨섹스에 대한 전투에서 엘더만으로만 기술되었다.

이 지역은 머시아 왕국이 멸망 할 때까지 머시아의 통치자의 소유였습니다. 머시아는 잉글랜드령 머시아의 나머지 지역과 함께 877년부터 883년경에 엘더만인 에델레드의 지휘하에 알프레드 왕에 복종했다. 에델레드 자신도 아마 후위체족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영국의 피크 디스트릭트 지역의 중앙부와 북부에 위치한 소국으로 이 지역은 브리간티아의 남부에 있으며 브리손 부족의 영토였다. 이탈리아어 위키백과에서는 에크사에탄인들이 앵글족과 로만 브리튼족의 혼혈로 보고 있다. 초기의 정착지는 서앵글족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 부족은 6세기 북부 정복 도중 다웬트와 다브 강의 계곡을 올라갔다. 이 지역은 현지에서는 펙사탄, 피크 세트 또는 피크 사람들의 땅으로 알려져 있다. 나중에 그들의 영토는 머시아의 북부 변경을 형성했고, 848년에 머시아의 위테나게모트가 레프톤에 개최되었을 때 완전히 머시아에 병합되었다.
톰세이트는 500년경부터 잉글랜드의 웨스트 미드랜드에 있는 테임 강의 계곡에 살았으며 머시아 왕국의 존속 기간 동안 톰 워스 주변에 살았던 앵글로계 마켄스족이다. 849년 앵글로 색슨 헌장에서는 버밍엄 남쪽에 있는 리키힐스의 콥톤 해켓 지역을 '톰세이테와 펜서세테(Pencersæte)의 경계'로 표현하고, 835년의 다른 헌장에서는 햄버트를 '톰세이테의 프린셉스'로 표현 하고 이 집단이 머시아에 흡수된 후에도 오랫동안 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톰사에테와 펜서세테의 경계에는 후기 철기 시대의 언덕 요새가 많이 존재해, 영토의 산물의 집적지로서도 기능하고 있었다. 머시아의 일부인 톰사에테는 중심지에 정착한 중요한 초기 집단으로 여겨졌다.
미들 섹스에 관한 첫 기록은 704년에 ​​에식스의 스웨프레드 왕, 퇴위한 머시아의 에델레드 왕과 후임인 코엔레드 왕 사이에서 교제된 칙허장에서 언급되었으며, 미들세악스라고 불리는 지방의 트위칸햄(트위크넘)의 와르헤레 주교에게 땅을 줬다.

이 칙허장에는 초기 런던의 정착지, 랜든윅, 그리고 아마도 미들 색슨 영토의 '남부'인 서리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 켄트 서부에 미들 색슨인이 정착하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증거도 몇가지 있다.

이 이름은 이 민족이 서식스, 애식스, 웨식스의 중간에 위치하며, 북쪽의 앵글인과 구별되는 상황을 반영한다. 이웃 국가들과는 달리, 미들 색슨 사람들은 자신의 나라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 G. F. Bozworth (1913)에 따르면 "미들 섹스가 원래 독립적 인 왕국이었다는 증거는 없었고 상당한 확신을 가지고 Essex 왕국의 일부를 형성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그러나 F. M. 스텐턴 (1971)은 미들 색슨의 "원래 독립은 적어도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 지역은 7세기 초반에 애식스 왕국의 일부였지만, 9세기(825년)에 머시아에 양도되었습니다.

미들 색슨인은 원래 이교도였지만 7세기 중반에 기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독자적인 고영어의 변종을 말했지만, 글쓰기에는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2.1.2. 웨일스를 제외한 브리튼 내의 로만 브리튼인들의 세력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당시 현재의 잉글랜드는 주트족들이 차지한 잉글랜드 남동부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477년 섹슨족 집단중 하나인 서식스 세력이 오늘날 치체스터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우 후부터 앵글로 섹슨족들이 점차 브리튼 섬으로 진출하면서 점차 서쪽으로 밀려나기 시작해 519년 웨식스의 건국으로 콘월 반도의 브리튼 세력이 다른 지역과 육사으로 분리되었고, 560년을 기점으로 동쪽으로 주트족을 포함한 앵글로 섹슨족 집단이 서쪽으로 브리튼인들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는 동안 브리튼인들은 정치적으로 내우외한이었는지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따르면 5세기, 브리튼의 왕이자 로마황제의 후손인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왕이 픽트족에게 암살당했다. 그에게는 세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인 콘스탄스(Constans)는 속세를 떠나 수도승이 되었고, 차남인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Aurelius Ambrosius)와 삼남인 우서(Uther)는 아직 어린아이들에 불과했다. 당연히 누가 왕위를 계승할지에 대해 논란이 발생했고 이때 당대의 권력자인 보티게른[54](Vortigern)이 나서서 첫째 왕자인 콘스탄스를 왕으로 옹립했고 콘스탄스는 수도원을 나와 왕위에 올랐다. 보티게른은 실권을 가지고 모든 국정을 자신의 의지대로 처리했으며 보티게른은 선왕을 암살한 픽트족을 배척하기는 커녕 오히려 기용하였다. 따라서 픽트족 사이에서는 콘스탄스가 아니라 보티게른이 왕이 되었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어느 날 밤, 콘스탄스 왕은 침실에서 암살당했다.

콘스탄스 왕이 암살당한 이상 그의 어린 두 동생들도 안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어린 두 왕자들,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와 우서는 신하들에 의해 브르타뉴[55]로 피신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게 되었고 더 이상 경쟁자가 없어진 보티게른은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보티게른은 픽트족을 이용해 왕위에 오르자 껄끄러운 피트족을 축출해냈고 이에 같은 픽스족인 스코틀랜드인들이 남침했다. 외세의 침략이 잦았었던 만큼 용병이 필요하다 생각한 보티게른은 이민족 용병을 왕국에 받아들였다. 이후 이들과 보수문제로 마찰이 생겨나자 보티게른은 용병들을 막아낼 또다른 이민족 용병들을 불러들였고 이민족들은 전쟁이 끝나도 돌아가지 않고 머물려 갈등이 지속됐다. 이도교를 믿는 이민족들은 브리튼인들을 약탈, 학살하고 공격했으며 결국 반란이 일어나 보티게른 왕은 여러 개의 도시와 요새들을 이민족들에게 넘겨주고 간신히 목숨만 건져 도망쳤다.

도망친 보티게른 왕은 캄브리아(Cambria)에 정착해 요새를 건설하려 했으나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건축의 기초를 놓자마자 밤새 땅이 그것을 삼켜 버리고, 결국 다음날이 되면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하는 것이었다. 사제들은 아버지가 없는 소년을 찾아 제물로 바치자고 하였고 한 소년이 잡혀져온다. 그 소년의 이름은 바로 멀린(Merlin)이었다. 잡혀온 멀린은 "일꾼들에게 명령하여 저 땅을 파게 하소서. 그리하면 건축의 기초를 삼켜 버린 연못을 발견하실 것이고 그 연못의 물을 전부 퍼내면 그 바닥에 두 개의 텅 빈 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라고 예언하였다. 멀린의 말대로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자 두 개의 돌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돌이 흔들리면서 그 안에서 두 마리의 용이 나와 맹렬히 싸우기 시작했고, 결국 적룡[56] 멀린은 적룡브리튼인들을 뜻하고 백룡은 색슨인을 뜻한다고 고한다. 멀린은 곧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와 우서 형제가 선왕에 대한 복수하기 위해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짐작한다.

멀린의 예상대로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 왕자와 그의 동생 우서는 1만 군대를 이끌고 밀려들어왔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들이몰려들어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아우렐리우스는 즉시 왕으로 즉위했다. 보티게른은 도망쳐서 성으로 들어갔고 그 지역 영주인 글로스터 공작은 아우렐리우스 왕의 편에 섰다. 새 왕의 군대는 보티게른이 들어간 을 무너뜨리려 했으나 여의치않아 작전을 바꾸어 성에 불을 질렀고 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색슨족등 이민족 정벌에 나섰고 아우렐리우스 왕은 너그럽게 이들의 항복을 받아들였다. 새 왕은 전사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기념물을 세우고자 하여 멀린을 수소문하여 찾는다. 멀린은 이에 동의해 아일랜드에 있는 거인의 춤(Giant's Dance)이라 불리는 거대한 바위들을 가져와서 브리튼에 영원히 기억될 기념물을 만든다. 그것이 스톤헨지이다.

전쟁도 승리했고, 역사적인 기념물도 세웠으나 아우렐리우스 왕의 치세는 생각보다 일찍 끝나고 만다. 보티게른의 아들 파센티우스(Pascentius)가 색슨족과 동맹을 맺고 침략해왔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 왕의 동생인 우서 왕자가 적들에게 맞서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떠났으며 멀린도 고문으로서 우서와 동행했다. 색슨족은 자객을 아우렐리우스 왕에게 보냈고 왕은 독살당하고 말았다. 왕이 숨진 바로 그 순간, 밤하늘에는 혜성이 등장하여 어둠을 가로질렀고 우서 왕자는 군대를 이끌고 행진하던 중 이 혜성을 보고 공포와 놀라움을 느꼈다. 멀린은 이 드래곤 머리 모양의 혜성을 보자마자 아우렐리우스 왕이 죽었다는 사실과 이제 우서가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우서가 혜성에 대해 묻자 멀린은 이렇게 대답한다 "저 별과 불타는 드래곤은 왕, 바로 폐하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갈리아의 해안을 향해 쏟아지는 빛줄기는, 폐하께서 매우 위대한 아들을 갖게 되리라는 사실을 상징하며 그의 통치는 저 빛줄기가 미치는 곳까지 닿을 것입니다." 우서는 용의 머리를 닮은 혜성이 그의 즉위를 알렸다는 사실에 기반하여, 우서 왕은 두 마리의 황금 용을 제작하여 하나는 교회에 놓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들고 다니는 상징물로 삼았다. 그리고 "용의 머리"라는 뜻으로 펜드래곤이라는 칭호를 널리 사용하였다.[57]

우서는 자신의 통치에 반발하던 무리의 대장격인 콘월의 공작과 대립하고 있었으며 부활절 축제에서 콘월의 골로이스 공작 부부와 마주치며[58] 콘월을 공략하기로 결심을 굳힌다. 우서는 군대를 끌고가 콘월을 함락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틴타겔 고상에 칩거한 이그레인과 멀린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결혼해 콘월과 화친을 맺는다.[59] 멀린은 결혼에 도움을 주며 우서왕에게 태어나는 아들을 멀린에게 넘겨줄 것을 제안했고 우서 왕은 받아들인다. 아서가 왕이 되기도 전에 정적들에 의해 제거당할 것을 염려한 멀린은 아기를 안전하게 키우기위해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이그레인과 우서는 금슬이 좋았으며 둘은 아서와 안나 남매를 가지게 된다. 멀린은 장차 태어나게 될 우서의 아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예지하고 아기를 데려다가 충직한 기사인 엑터 경에게 맡겨 자라게 했다.[60]

우서는 이그레인과 혼인해 행복한 부부 생활을 보냈지만, 어느 날 개에게 물려 병에 시달렸고 그가 약해진 틈을 타 색슨족이 침략한다. 우서는 색슨족을 막아내지 못하고 도망친 기사들을 꾸짖고 약해진 몸을 이끌고 직접 군대를 이끌었는데, 색슨족은 반송장인 왕이 뭘 할 수 있냐고 방심했다가 대패를 당한다. 하지만 이 싸움 이후 우서의 병세가 깊어져서 더 이상 전선에 나설 수 없었다. 이 소식을 들은 색슨족의 전의가 되살아났고, 이번에는 우서에게 독을 먹여 암살하겠다는 계략을 꾸민다. 우서가 베룰람에 누워있던 틈을 타 색슨족이 사람을 보내어 우서가 마시는 우물에 을 탔다. 다음날 우서를 포함해 우물물을 마신 백명의 사람들이 고통에 몸부리쳤다. 우서는 죽기 전 사람들에게 자신의 아들 아서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유언을 남긴 후 눈을 감는다. 우서의 시신은 그의 형이었던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우스의 곁에 안치되었다.

이후 브리튼인의 왕위는 아들인 아서까지 이어졌다고 하나 문제는 아우렐리우스부터 아서까지는 전설상의 인물이였다는 점이었다. 몇몇 기록에서는 500년경으로 추정되는 시기 바돈 산 전투때 브리튼인의 지휘관이 아서 왕이었다고 전해진다.

동시기의 브리튼인 역사가 길다스(Gildas, 450/500-570?)가 쓴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De Excidio et Conquestu Britanniae)>에서 바돈 산 전투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아서 왕이 언급되지는 않는다.

9세기에 웨일스인 넨니우스(Nennius)가 쓴 <브리튼 부족사(Historia Brittonum)>는 아서 왕이 바돈 산 전투의 사령관이라고 주장한 현존하는 최초의 사료이다. 그는 아서를 왕(Rex)이 아닌 둑스 벨로룸(Dux Bellorum)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 "960명이 아서의 공격에 희생되었다. 아서 자신이 그들을 괴멸시켰다."라고 적고 있다.

10세기에 웨일스 서부 더베드(Dyfed)에서 작성된 <캄브리아 편년사(Annales Cambriae)> 역시 아서를 바돈 산 전투의 브리튼인 지휘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12세기에 <브리타니아 열왕사>를 쓴 몬머스의 제프리는 바돈 산 전투가 바스 근처에서 일어났다고 저술했다. 이는 9세기의 넨니우스(Nennius)가 바스의 온천을 "발네아 바도니스"라고 묘사한 것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기 역사가들은 바스 근처 아본 계곡을 전쟁터로 제안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세기에 <아서 왕 연대기>를 쓴 버나드 콘웰도 바스이스턴 바로 서쪽의 리틀 솔즈버리 언덕(Little Solsbury Hill)을 바돈 산으로 비정했다.

이외에도 보우덴 언덕(Bowden Hill), 배드버리(Badbury)의 리딩튼 성(Liddington Castle), 배드버리 링스(Badbury Rings), 링스버리(Ringsbury), 웨일스 메스터그(Maesteg) 근처의 머니드 바이단(Mynydd Baedan) 등 많은 곳이 바돈 산의 후보로 거론된다.

아서왕 전설은 제쳐두더라도 545년경 이름 미상의 브리튼인의 왕을 마지막으로 잉글랜드의 브리튼인들의 세력이 약해졌는지 이후 브리튼인의 왕위는 웨일스 귀네드 왕국의 마글로쿠누스를 시작으로 여러 지역의 그나마 강했던 브리튼인 소왕들에게 거쳐 갔다.

종교적으로 서로마 제국의 붕괴를 기점으로 켈트 교회와 수도원은 이 시기에 영국 지역에서 번성한 것 같았고, 글래스턴베리의 교회와 수도원이 그 예이지만, 대부분은 6세기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인구수는 지속적으로 급감했는데, 로마 시대 이후 브리튼 섬의 인구는 150만에서 300만명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마도 고대 말기의 소빙기와 같은 환경의 변화, 페스트와 천연두 때문일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544년이나 545년에 처음으로 브리튼 제도에 퍼진 유스티니아누스 대역병의 유입으로 인해 크게 줄어드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환경의 변화 및 역병의 유행으로 인해 급감한 브리튼인 인구수로 인한 것과 7세기경부터 시작한 머시아노섬브리아의 세력 확장으로 인해 640년경에 웨일스 지역과 현재의 캄브리아와 스코틀랜드 남부에 해당되는 옛 북부라고 불리는 헨 오글레드 지역이 완전히 육로길이 끊어졌지만 이때 어느 정도의 소강 상태에 들어갔으며, 돔노니아의 경우 577년 웨식스의 체울린이 데오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돔노니아의 브리튼인들은 웨일스 동맹군과 육로로 단절되었고, 이후 웨식스의 공격으로 점차 영토를 점진적으로 상실해 가다가 8세기말 웨식스에 의해 데번 지역이 섹슨족의 영역이 되면서 브리튼 섬 내에서 돔노니아의 강역은 콘월 지역으로 한정되었고, 이윽고, 9세기 애즈베르흐트에 의해 굴복해 웨식스의 하위 왕국으로 전락되었다.
2.1.2.1. 둠노니아
오늘날 영국 남서부, 콘월 및 데번 대부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브리튼계 소국으로 서기 78년 로마 제국이 현재의 잉글랜드 지방을 정복한 이후 몇몇 켈트 부족 왕국들과 함께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다만 둠노니아의 군주들에 대한 이름과 행적들은 현존하는 연대기들마다 교차 검증되지 않는 내용들이 많다는 점으로 대체로 구전되는 아서왕 전설과 후대의 연대기에 위지해야 했기 때문에 콘월의 역사가들조차 돔노니아의 역사를 제구하기에 문제가 많은 실정이다. 410년 로마 제국이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후 남하하는 픽트족들을 막기 위해 바다 건너 유틀란드 반도에 거주하던 헹기스트(Hengest)와 호르사(Horsa) 형제의 지도하에 주트족 집단이 로만 브리튼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브리튼 섬으로 건너왔지만 얼마 못가 450년경 브리튼 섬을 차지하기 위한 야욕을 들어낼 당시 에르빈이 왕으로서 통치하에 독립을 유지했다.

에르빈은 웨일즈의 마비노기온의 세 가지 로맨스 중 하나인 겔란트와 에니드에 등장하는 브리튼계 왕으로 크루프와 오르웬의 로맨스에서 그는 게란트, 디웰, 아미드의 아버지로 나온다. 후자의 두 사람은 아서의 궁정인 세리위그에 배속된 기사들로 기재되어 있다. 웨일스의 '성인의 계보'에 따르면, 성 사이비는 사이비의 아버지로 5세기 후반의 고대 웨일스 문서, 성인의 삶 , 지역 및 아서 왕 전설에 기록죈 콘월의 솔로몬의 후손이며 에르빈의 증손이다.

마비노기온에서 그는 적으로부터 공격받는 영토를 가진 노왕으로 등장한다. 그는 아들을 알투왕의 궁정에서 다시 불러 전쟁에 협력시켜 둠노니아의 권력을 회복한 후 480년 아들인 게라인트에게 양위한 후 얼마 안가 사망했다.

게라인트는 아서왕 전설에도 언급되는 인물로서 옛 부북의 고노딘 출신의 전쟁시인인 아네이린 작품으로 여겨지는 시 『이고드딘』에는, 카트레스 전투에서 「남쪽의 게라인트」로 언급되었으며, 그밖에도 웨일스의 삼인조인 '브리튼 섬의 세 명의 선원' 중 한 명으로도 언급되고 있다.

롱보스 전투에서의 게라인트의 공적은 아마 10세기나 11세기에 쓰여진 시 '에르빈의 아들 게라인트'로 칭찬받고 있어 전통적으로 리왈치 헨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델렉 브라이스는 다른 학자들에게 모방되었고,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시에서 롱보스 전투와 관련하여 칭찬받는 실제 전사는 나중에 역사적인 710년경의 인물인 돔노니아의 게라인트일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브라이스는 롱보스를 710년에 게라인트와 웨식스의 왕 이네 사이에서 일어난 싸움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스트라스크라이드에는 동시대에 게라인트와 에르빈이라는 이름의 지배자가 있어, 로마 브리튼 시대의 이 지역의 담노니족을 따서 담노니아라고도 불려 왔기 때문에, 댐노니아/데본과 혼동되기 쉽다고 여기고 있다. 더욱이 성 위녹의 전기에서 언급되는 둠노니아의 통치자들의 목록에서 게라인트 대신 리웰이란 인물이 510년부터 둠노니아를 통치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성녀 테일로의 전기 에 따르면, 549년 당시 브리튼을 휩쓸고 있던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을 피하기 위해 테일로는 소수의 수도사들과 함께 란다프를 떠나 브르타뉴에 있는 돌의 삼손과 합류했다 . 둠노니아를 지나 그들은 딘 제라인에서 게라인트 왕에게 환대를 받았다. 감사의 표시로 테일로는 왕에게 죽음의 순간에 영적 도움을 약속했다. 7년 후, 테일로는 왕에게 마지막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돌아왔다다고 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서는 "포트와 그의 두 아들 비에다와 메이글라는 포츠머스 라는 곳에서 브리튼으로 와서 매우 고귀한 젊은 웨일스인을 죽였다"고 언급했다. 학자들은 시 "에르빈의 게라인트 아들"에 언급된 롱보스가 연대기 항목의 포츠머스이며 게라인트가 그곳에서 죽은 "젊은 웨일스인"이라고 믿고 있다.

어째든 514년 게라인트가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카도르가 새로운 둠노니아의 왕이 되었다. 다만 카도르의 실존성에 대해서는 거의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아서왕의 전설에 의지해야 하는데, 아서왕의 전설에 대해서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데다가 제각기 여러 음유시인들에 의해 변형이 되어 교차 검증을 하기에도 문제가 있어 그의 전반적 생애에 대해서 유추하기 힘드나 게라인트가 아서의 친구이자 또한 웨일스의 소왕국중 하나인 구엔트의 왕인 카라독의 친구였다고 한다. 카도르의 전투에 대해 아서왕 전설의 전투들을 기록한 '브리튼인의 역사'에는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작품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는 요크로 향하는 도중에 색슨인의 침략군과 싸우고, 격파하고, 그 후 요크를 점령했다. 색슨인은 항복하고 평화를 맹세하고 철수했다. 나중에 그들은 맹세를 깨고 아서와 색슨 사람들 사이에 다른 전투가 일어났고, 카도르는 색슨 사람들의 지도자인 첼릭을 살해했다. 그 후, 일부 작은 싸움 (로마 전쟁 등) 후, 카도르의 다음 전투는 캄블랑에서 발생했으며, 그는 부하의 일부와 함께 시체가 되어 발견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카들 전투가 아마 알프레드 대왕이 쓴 앵글로 색슨 연대기를 통해 볼 수 있다고 추측한다. 거기에는 영국군의 지휘관으로서 보티건 밖에 이름이 오르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은 앵글로 색슨 연대기와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시대표를 비교 검토해, 카도르의 정당성을 평가해 왔다. 요크 전투와 캔터베리 런던 가도를 따라 3,000~4,000명의 영국군과의 전투 등 양 전투에는 많은 유사점이 보인다. 두 버전 모두 아서 왕과 영국군은 런던으로 철수한다. 카도르의 다음 전투로 여겨지는 장소는 사넷으로, 어느 텍스트에도 그 일이 기록되어 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등장하는 무명의 영국군 지휘관은 유사점이 많기 때문에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카도르가 아닐까 하고 있다.

그 밖에도 12세기 중엽에 활동한 연대기 작가인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브리타니아 열왕사에도 카도르가 언급되었는데, 해당 연대기에서의 카도르는 공작(dux)과 왕(rex)으로 불렸다. 그는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기록된 요크와 사넷섬 전투에서 영웅적 행위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카도르가 이 전쟁에 관여한 사실성은 지금도 학자들에 의해 의문시되고 있다. 그는 두 싸움을 모두 이기고 요크 군대를 손쉽게 처치했고, 사넷 섬에서는 색슨인의 지도자인 첼릭을 살해했다. 아서의 가장 성공적인 포위전인 바돈의 싸움은 사넷섬의 싸움에 선행하고 있지만, 시대상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비논리적으로 보인다. 색슨인이나 영국인 역사가들은 6세기 이전에 그 지역에서의 싸움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싸움은 문학상의 목적으로 완전히 날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도르는 아서와 친척 관계에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다양한 텍스트로 그렇게 부르기 때문다으로 영국의 시인 레이아몬은 아서가 “카도르, 우리는 혈연관계라고" 말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일부 작품에서는 카도르의 아들 콘스탄틴은 아서의 사촌이며, 카도르은 혈연자가 아니라 혈족의 연장자로도 볼 수 있다.

제프리의 '역사'와 기타 문헌에서 아서의 미래의 왕비 귀네비아는 카도르의 보호하에 자랐다고 한다. 카도르도 로마의 혈통이라고 한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은 캠란 전장에서 병에 빠진 아서 왕으로부터 브리튼 왕위를 받았다. '브뤼트 티시리오'에서 번역자는 카돌이 고로와의 아들이며, 아마 이글레느의 아들이자 아서왕의 어머니의 이모형제라고 덧붙였다. 이 이야기는 리처드 하딩의 '크로니클'에도 등장했고, 카도르는 아서왕의 '어머니의 형제'로 여겨지고 있다. 레이아몬의 '브뤼트'에서 카도르는 고를로이스가 우서왕의 군세를 공격했을 때 지휘관으로 등장했고, 우서왕은 틴타젤에서 이그레인과 은밀하게 자고 있다. 그러나 영어의 두운법의 Morte Arthure나 말로리의 Le Morte d'Arthur 등, 후기의 작품의 대부분에서는, 카도르를 아서의 종형제로 여겨지고 있지만, 두운법의 텍스트에서는 아서는 그를 자신의 누이의 아들이라고 부른다.

윌리엄 우스터는 1478년 콘월로 여행했고, 그 여정에 "아서의 어머니의 남편인 콘월 공작 타도르가 성 안 디나스 에서 살해당했다"고 기록했고 이것은 카도르로 직접 해석 될 수 있으며, 일반적으로 카도르와 고를로이스의 혼동으로 해석되지만, 고를로이스가 이그린의 남편이라는 유일한 근거는 Historia 따라서 지역의 전통을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마비노기온과 관련된 중세 로맨스인 '로나부이의 꿈'에서 카도르는 "싸움과 충돌의 날에 왕에게 무기를 주는 임무를 맡은 콘월 백작 카도르", 즉 작가가 세반 강 상류 근처에 설정한 바돈힐 전투의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게라인트와 마찬가지로 카도르 또한 성 위녹의 기록된 둠노니아의 통치자들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없는데, 카도르의 통치 초반기는 리월이 520년까지 통치했다고 하며 통치했다고, 그의 아들 데로크가 520~535년까지 통치, 데로크의 아들 이오나가 언급되었다.

530년 카도르가 죽자 그의 아들인 콘스탄틴이 둠노니아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6세기 수도사 길더스는 저서 '브리타니아 정복과 정복'의 28장과 29장에서 콘스탄틴을 언급합니다. 콘스탄틴은 저자가 비난하고 성경 짐승에 비유한 5명의 브리튼 왕 중 한명이다. 길다스는 콘스탄틴을 "담노니아의 더러운 암 사자 폭군의 아들"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대한 언급이며, 그의 어머니에 대한 모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둠노니아는 일반적으로 현재 잉글랜드 남서부에 있는 둠노니아 왕국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로이드 레인과 레슬리 알콕과 같은 학자들은 길더스가 둠노니족[61]의 영토를 의도했을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지만, 토마스 D. 오살리반 등 학자는 이것이 있을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길다스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속임수와 폭정을 거절하겠다는 맹세에도 불구하고 수도원장의 로브로 변장하고 교회 제단 앞에서 기도했던 '왕가의 젊은이' 2명을 공격하고 그들과 그 동료를 살해했다. 길다스는 콘스탄틴이 합법적으로 결혼한 아내를 버린 뒤 '많은 간통'을 저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틴의 죄는 이전에도 다방면에 걸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길다스는 당시 아직 살아 있던 콘스탄틴에게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에 빠진다고 권하고 있다. 살인은 야심찬 삼촌에게 살해당한 두 명의 젊은 왕자인 세인트 드레데나우를 기리는 6세기 브르타뉴의 컬트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길다스의 콘스탄틴을 돔노니아 왕의 계도에 등장하는 인물, 쿠스테닌 골노우 또는 쿠스테닌 콜노우(콘월의 콘스탄틴)와 동일시하고 있다. 쿠스테닌은 산문 로맨스 '게라인트와 에니드'의 '본스 이세인트' 및 개정 후 '지자스 칼리지 MS 20'의 계도에서 에르빈의 아버지, 영웅 게라인트의 할아버지로 언급되어 있다. 계보도에 있어서의 쿠스테닌의 위치에 근거해, 토마스 D. 오살리반은, 콘스탄틴의 탄생을 520~523년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역사적인 돔노니아의 콘스탄틴은 남서 잉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로 알려진 왕위를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었다고 여겨지는 성 콘스탄틴에 관한 후의 전승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콘월과 웨일즈의 전통은 특히 길다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으며, 특히 콘스탄틴에 회개하도록 명령한 길다스의 가르침이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비난은 궁극적으로 효과가 있었다고 믿어졌을지도 모른다.

성 콘스탄틴 숭배의 두 가지 주요 중심지는 콘월에 있는 콘스탄틴 교구의 교회와 세인트 멜린 교구 (현재 콘스탄틴 만)의 세인트 콘스탄틴 예배당이었다. 전자는 적어도 11세기까지 설립되어 리기팔크의 11세기 '성 다윗의 생애'에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는 성직자 커뮤니티를 지지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후 세기에는 단순히 교구 교회였다. 콘스탄티누스 만의 예배당에는 거룩한 우물이 있어 독자적인 소교구의 중심이었다.

웨일즈 연대기[62]와 알스터 연대기에는 콘스탄틴의 개종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콘월의 성인, 즉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언급일지도 모른다. 성 데이비드의 생애에서 콘월 왕 콘스탄틴은 왕위를 포기하고 메네비아의 세인트 데이비드 수도원에 입신했다고 한다. 베드로의 생애에는 성 베드로가 콘스탄틴의 부유한 남자에게 사냥되었던 수사슴을 보호하고 콘스탄틴이 궁극적으로 개종하여 수도사가 된다는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콘스탄틴은 왕이라고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를 언급하는 12세기 문서 "기적"에서는 콘스탄틴이 왕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으며, 개종시에 페트로크에 상아의 뿔 그것이 성인의 주요 성유물 중 하나가되었다고 덧붙였다. 영국 전역에서 확인된 다른 많은 전승에서는 콘스탄틴의 성인 또는 왕에 대해 언급되어 있으며, 다양한 인물의 혼란과 융합을 시사한다.

콘스탄틴이라는 이름의 인물과 연관된 영국 남서부의 다른 장소에는 데본의 밀턴 애봇 교회가 있다. 데본 주 던터턴 인근 예배당과 콘월 주 일로건 예배당이다. 데본의 두 곳은 콘스탄틴 대제에 바쳐진 것일지도 모른다. 현지 교회는 콘스탄틴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에게 바쳐진 타비스톡 수도원의 지배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웨일즈에서는 두 교회가 콘스탄틴에 바쳐졌다. 랑기스테닌(콘위)과 웰시 빅너[63]이다. 현재의 스코틀랜드에 있는 교구, 고반의 교회도, 성 콘스탄티누스에 바쳐진 것이다.

다만 성 위녹의 생애에 기록된 둠노니아의 통치자들의 기록에서 콘스탄틴의 통치 초반기에 해됭되는 시기부터 이오나가 540년까지 통치했고,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Judual이 코노모르의 섭정을 받앗으나 545년 왕위를 찬탈당했고, 이후 코노모르가 555년까지 둠노니아를 지배했다고 하는데, 고대 웨일스 문서, 성인의 삶 , 지역 및 아서 왕 전설의 기록에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등장하는 마크로 비정되었으며, 코노모르 사후 왕위는 유드왈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어째든 560년 콘스탄틴을 죽고 게렌이 둠노니아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해 598년까지 통치했는데, 그 역시 성 위녹의 전기의 기록된 둠노니아의 통치자 목록에 이름이 없고, 대신 게렌의 통치 초반기는 유드왈이 580년까지 통치했고, 이후 그의 아들인 유다엘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한편 게렌의 치세중인 577년 웨식스의 체울린이 데오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둠노니아의 브리튼인들은 웨일스 동맹군과 육로로 단절되었지만 해상 여행이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손실은 아니었다.

이후 12세기 잉글랜드의 연대기 작가인 멜스버리의 윌리엄은 우르간이란 인물이 둠노니아의 왕이었다고 보고 있으며, 그가 601년에 글래스턴베리의 "오래된 교회"에 토지를 수여했다고 한다. 다만 성 위녹의 생애에 기록된 둠노니아의 통치자들의 기록에서 그의 이름 대신 유다엘이 대신 들어 있다.

이밖에도 17세기 초 '콘월 백작'의 조상으로 언급된 둠노니아의 통치자들의 목록에서 또다른 왕의 이름으로 블레드릭 압 쿠스텐닌이라는 인물이 거록되는데, 실제 지위와 실재는 데본셔 및/또는 콘월의 '왕', '공작', '군주'로 알려진 오래된 웨일즈 문헌에 많이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확인하기가 어렵다. 603년경에는 콘월 공작, 그리고 북웨일즈의 왕들의 동맹자로 기술되어 있다.

블레드릭의 생애에 관한 가장 상세한 설명은 제프리 오브 몽마스의 의사 역사서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있으며, 그 중에서 그는 전설적인 콘월 공작 중 하나로 꼽힌다. 이곳에서 콘월 공작 블레드릭은 613년 벌어진 뱅거 이즈 코에드 전투에서 북쪽 웨일스의 카도반 왕[64]과 남쪽 웨일즈의 마가두드 왕[65] 포함한 브리튼족의 동맹군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1200명의 수도사를 살해한 노샘브리아의 에델프리드의 군과 싸우고, 에델프리드를 부상시키고, 앵글로족을 치는 데 성공했지만, 자신은 전사했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클레멘이 뒤를 이었다.

물론 역 성 위녹의 생에의 기록된 둠노니아의 통치자들의 몰록에서 그의 이름 대신 유다엘과 함께 605년 즉위한 그의 아들 하엘록이 610년까지 통치 이후 성 유디카엘이 언급되었다.

클레멘은 브리튼인이 614년에 비안둔 전투[66]에 참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이때 웨식스의 쿠네길스와 그 아들 퀴첼름이 둠노니아를 침략했다. 614년은 그레비시그(그리위싱)의 국경에서 평화가 끝난 해이기도 했고, 둠노니아는 당시 구웬트와 그리위싱을 지배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니니오 아푸에르브 등의 남웨일즈의 왕들과 연계하여 싸웠다는 것을 시사했다.

웨식스는 2,065명의 브리튼인을 살해했다고 하는데, 현대 역사가들이 조사를 하면서 이 숫자는 의심했다. 피터 말렌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노르만인 사상자는 약 2,000명이었다고 추정했으며, 이는 당시 가장 큰 싸움 중 하나로 대규모 다국적군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웨식스가 이만큼의 인원수를 살해한 것은 완전한 승리였던 대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652년에 첸왈흐가 브래드포드 어폰 에이번에서 브리튼인일 가능성이 높은 알 수 없는 적과 싸운 것을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변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클레멘은 제프리 오브 몽마스의 '브리타니아 열왕사'에 따르면, 630년부터 632년에 걸쳐, 머시아의 펜다가 엑서터를 포위하고, 추방된 귀네드의 카드와론이 도착해 머시아인을 쓰러뜨렸다고 될 때에도 통치하고 있었다고 추정된다. 3명의 왕은 동맹을 맺고 당시 귀네드를 점령했던 노섬브리아 군대와 대치하기 위해 북진했다고 한다. 엑서터는 둠노니아 왕국에 있으며, 카드와론은 돔노니아의 귀족과 동맹을 맺었다고 하지만 클레멘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오늘날의 평판이 높은 역사가들은 이 포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이 포위를 '브리타니아 열왕사'의 다른 부분과 함께 몬머스의 제프리의 많은 색채 풍부한 창작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

클레멘은 630년에 귀네드와 마시아와 동맹을 맺고 노샘브리아의 지배에 대해 세픈 디골 전투(귀네드의 웰슈풀 근처의 롱 마운틴)에서 싸웠을 가능성이 있다. 그 후 몇 년간 노섬브리아를 황폐시킨 브리튼인들의 연합군에 둠노니아가 참가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후 클레멘은 633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페트로크 발라드르델트가 새로운 둠노니아의 왕이 되었다. 성 위녹의 생애에 수록된 둠노니아의 왕들의 전기에 클레멘과 페트로크의 이름 대신 성 유디카엘이 기입되어 있다. 다만 리왈을 시작으로 성 유디카엘에 이르기까지의 계보가 실은 잉글랜드 남부의 둠노니아 왕들의 계보가 아닌 프랑스 브르타뉴 반도에 위치한 돔노네 왕들의 계보로 보고 있는 추세다.

페트로크의 치세에 대해 알려진바가 없으나 웨식스의 침략이 지속된 시기였고, 결국 652년 벌어진 웨식스와의 전투인 브래드포드-온-에이번 전투에서 웨식스의 첸왈흐에게 패배해 죽었고, 도식과 서머싯이 웨식스에 편입되었다. 이후 659년에서 661년까지 통치한 컬민과 700년경까지 통치한 도냐르트에 대해서 알려진 내용이 전무하며 그 이후의 왕들에 대해서도 '바글란의 책'에서 이델(710~715년)-디프냔왈(730년경)-카우드롤리(750년경)-오스왈트(770년경)-헤르남(790년경)-홉킨스(810년경)-모르다프(830년경)-퍼퍼딘(850년경)-도냐스에 이르기까지 이름외에 치적에 대한 내용은 현존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나 700년경부터 앵글로 섹슨족들의 기록에서 게라인트의 이름이 다시 거론되었다.

셰르본의 주교인 알드헬름이 게라인트에게 보낸 길고 다소 신랄한 편지가 남아 있는데, 부활절 문제 와 삭발의 형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7세기 후반 콘월과 데번의 브리튼인들은 여전히 ​​로마 가톨릭의 관행 과는 달리 영국 교회가 계산한 날짜에 부활절을 지켰다 . 게라인트는 궁극적으로 알드헬름과 이 문제에 대해 로마의 관행을 따르기로 합의했다.

원체스터의 존에 따르면 게라인트는 웨식스의 이네가 지휘하는 웨식스 군대의 승리로 절정에 달한 일련의 전투 이후 710년에 사망했다. 아마도 이 무렵 웨식스가 데번을 차지해 엑스터를 점령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게라인트가 죽은 후 이네는 서쪽의 콘월로 더이상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캄브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722년에 콘월인들이 웨식스에 대항하여 헤힐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하며 콘월 왕국이 150년 더 생존할 수 있었지만 대신 콘월과 데번의 분열이 공고해졌다.

825년, 아마 돔노니아의 브리튼인과 웨식스 사이에서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우리는 가플 포다 (아마 서쪽 데본의 가르포드)에서 윌러스(콘월인)와 데프너스(데본인)와 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 이겼는지, 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838년에 일어난 또 다른 반란에서 '서부 웨일즈인'이 덴마크 군대의 지원을 받았지만 힝스턴 다운 전투에서 애즈베르흐트에 의해 진압되었다.
2.1.2.2. 옛 북부
옛 북부(Yr Hen Ogledd)는 중세 초기에 로마 제국 이전의 브리튼에 살았던 브리튼인들이 살았던 역사적 지역으로 , 지금은 북부 잉글랜드어ㅣ 남부 스코틀랜드 저지대에 속해 있다. 이곳 주민들은 캄브리아어로 알려진 브리튼어의 한 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고대 웨일스어의 방언은 아니더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 웨일스인들과 옛 북부인들은 자신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여겼으며, 둘 다 브리튼어 단어 combrogi 에서 유래한 Cymry ('동포')로 불렸다. 옛 북부인들은 픽트족, 앵글로 색슨족, 스코티족이 살았던 브리튼의 다른 지역과는 달지만 후술하지만 옛 북부의 왕국들은 6~7세기를 전후로 서로 반목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옛 북부의 주요 왕국은 엘멧, 고도딘, 레게드, 스트라스크라이드 왕국이었다. 더 작은 왕국에는 아에론과 칼크 피니드가 있었다. 에이딘, 루디니아운, 마나우 고도딘은 분명히 고드딘의 일부였다. 나중에 앵글로족 왕국인 데이라와 베르니시아는 둘 다 브리튼어 유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원래는 브리튼인의 왕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스트라스클라이드를 제외한 옛 북부의 모든 왕국은 800년경까지 점차 신흥 앵글로 색슨 왕국인 노섬브리아머시아, 게일계 스코틀랜드 왕국, 픽트족 왕국들에 의해 통합되거나 흡수되었다. 영국 북서부의 브리튼 지역은 7세기에 앵글리아 노섬브리아에 흡수되었지만, 300년 후 남부 캄브리아로 재등장하여 북부 캄브리아와 통합해 스트라스클라이드 왕국이 등장했지만 결국 11세기에 부상하고 있던 중부 아일랜드 어권의 스코틀랜드 왕국에 편입되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전쟁은 종종 내전이었고, 브리튼인은 방어자이자 침략자였으며, 앵글족, 픽트족, 게 일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앵글로족과 싸우는 브리튼인을 이야기하는 옛 북부에 대한 웨일스의 이야기에는 반대편에서 들려주는 대응 이야기가 있다. 옛 북부의 몰락에 대한 이야기는 두 개의 해안 왕국에서 험버 강 북쪽과 클라이드만과 포스만 남쪽의 브리튼에서 최고 세력이 된 노섬브리아 왕국의 부상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시대 왕국들의 이익은 바로 근처에 국한되지 않았다.동맹은 같은 민족 집단 내에서만 맺어지지 않았고, 적대감도 근처의 다른 민족 집단에 국한되지 않았다. 아르프데 리드 전투에서 브리튼인 동맹이 다른 브리튼인 동맹과 싸웠다. 달 리아타의 아에단 막 가브레인은 북부인의 가계도 중 하나인 보네드 그부르 이 고글레드에 등장했다.

브리튼의 역사에 따르면 노섬브리아의 왕 오스위그는 픽트족 혈통이 있었을 수 있는 브리튼인과 결혼했다. 노섬브리아와 픽트 왕족 간의 결혼으로 픽트 왕 탈로건 1세가 탄생했다. 아에단 막 가브레인은 브리튼인의 동맹으로 노섬브리아인에 맞서 싸웠다. 귀네드 왕국의 캐드와론 압 캐드판은 머시아의 펜다와 동맹을 맺어 노섬브리아의 에드윈을 물리쳤다 .

헨 오그레즈의 기억은 웨일즈의 함락 후에도 강하게 남아 있었고, 실제로 이 말은 북부의 브리튼 왕국의 멸망 후에 웨일즈에서 태어났다. 웨일즈의 전통에는 구부르 이 고글레즈, 즉 북쪽 남자들의 계도가 포함되어 있으며, 몇 가지 중요한 웨일즈 왕조는 그 계보를 그들에게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탈리에신, 아네일린, 밀딘 윌트, 신페일드 시인 등 북쪽 남자들에 의한 중요한 초기 웨일스어 텍스트가 많이 있다. 우리엔, 오와인 마브우리엔, 콜 헨 등 북쪽 영웅과 그 후손은 웨일즈 시와 프러데인섬의 삼제시에 등장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북부인의 조직은 부족적 이었고, 대가족의 친족 집단을 기반으로 했으며 , 지배적인 "왕실" 가문에 충성을 맹세했고, 때로는 주종 관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충성을 맹세했으며, 그 대가로 보호를 받았다. 켈트족 의 경우, 이 조직은 수백 년 후에도 여전히 유효했으며, 아일랜드의 브레혼 법, 웨일스의 하이웰 다 법, 스코틀랜드의 브렛 및 스코트 법에서 알 수 있다. 앵글로색슨 법은 문화적으로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켈트 법과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 켈트 법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전통에 기반을 두었으며, 로마의 영국 점령에 대한 눈에 띄는 빚은 없었다.

주요 왕궁은 "수도"로 유지되었지만, 현대 사회의 관료적 행정 중심지도 아니고 로마 통치의 정착지나 도시도 아니었다. 왕국의 통치자이자 보호자로서 왕은 영토 전역에 여러 개의 궁정을 유지하며, 권한을 행사하고 정의를 내리는 것과 같이 국민의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궁정을 이동해야 했다. 정의를 내리는 이 고대 방식은 헨리 2세 (재위 1154~1189)의 개혁으로 법률 행정이 현대화될 때까지 왕립 절차의 일부로 남았다.
로마가 브리튼 섬을 정복할 당시 현재 잉글랜드 북부에 위치한 브리튼계 부족국가인 보타디니의 후신 부족국가로 언제 건국되었는지는 미상이며, 영토에 대해서 추정이나 현재의 스코틀랜드 중부의 스털링 지역에서 버니시아까지, 그리고 현재 스코틀랜드 동부의 로지안 및 스코티시보더스 지역과 서쪽은 브리튼 왕국 스트라스클라이드, 북쪽은 픽토족의 영역까지 닿았을 것으로 보인다. 북쪽 웨일즈의 귀네드 왕국의 전설적인 창시자 쿠네다는 5세기에 남서쪽으로 이주한 마나우 고드딘족의 군벌로 알려져 있다.

전설상 고도딘의 건국왕은 루둔 압 카들레우이며,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아서왕의 전설에 등장하는 원탁의 기사에 속해 있던 가웨인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상술한 귀네드의 건국자인 쿠네다 역시 단순한 군벌이 아닌 고도딘의 왕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476년 당시 고도딘의 왕은 쿠네다의 장남으로 알려진 티비온이 고도딘의 왕이엇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5~6세기의 왕으로 티비온의 아들인 메리타운이 기록되었다.

6세기, 남쪽 방면에 앵글로족 집단이 침략 후 정착해 버니시아로 세우면서 고도딘 왕국은 버니시아와 대치하게 되었는데, 당시 버니시아는 북쪽으로 진군을 계속했다. 이때 왕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메리타운의 아들인 이스기란이었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는 547년 앵글로족들에게 멸망한 브리네히트의 왕인 모르칸트가 560년부터 고도딘의 왕을 자처했는데, 그에 대한 내막이 상충되어 있어 가웨인의 사망 후 고도딘의 왕위가 공위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설상의 인물인 가웨인을 제쳐두고 모르칸트가 고도딘의 왕이라는 것에 대해 이견이 없을 시의 가정에서 당시 북 레게드의 힘이 강했기에 앵글로족 왕국에 대항하기 위한 브리튼족 연맹을 결성할 때 북 레게드의 왕인 유리엔이 수장이 되었고, 이 연맹에 알트클리트의 왕인 리드더치 하엘과 엘멧의 왕 그왈로그 압 레노그, 그리고 당시 고도딘의 왕이었던 모르칸트가 참여했다. 그들의 군대는 체비엇 산맥을 넘어 밤버러에 거점을 두는 앵글로인들을 공격했다. 590년경, 브레튼의 소왕들은 버니시아의 중심지인 린디스판을 포위하고 밤버러를 점령한 후 버니시아의 해안에서 앵글로 색슨인을 몰아내고, 이 지역에서 그들의 세력을 거의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브리튼인의 역사'에 따르면 유리엔의 군사적 성공에 질투한 모르칸트는 부하 중 한 명인 로반 또는 로판 라우 디프로(즉, 무국적의 손을 가진 로반)에게 율리엔을 죽였다.허나 모르칸트의 질투로 벌어진 사건은 곧 브리튼 연합군의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앵글로인들에게 패배하고 만다.

암살된 유리엔의 뒤를 이어 아들인 오와인이 뒤를 이었다. 그는 패전의 원인의 제공자이자 아버지의 원수인 모르칸트를 죽이기 위해 고도딘을 공격해 모르칸트를 죽여 복수를 하는데 성공한다. 오와인의 목적은 아버지의 원수인 모르칸트의 죽음이었기에 고도딘을 정복하지는 않았고, 모르칸트의 아들인 클레도크가 고도딘의 왕위를 잇지만 당시 미성년자였기에 성년이 되기까지 섭정이 대신 통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다른 기록의 계보에서 클레도크의 이름 대신 마이니독 므윈파우르가 이스기란의 뒤를 이어 고도딘의 왕이었다고 한다. 클레도크, 혹은 마이니독의 기록에서 600년경, 고드딘은 300명 정도의 군세를 모아 알트클리트, 둠노니아와 함께 노스 요크셔의 카탈릭에 있는 앵글로족의 거점인 카트레스를 공격했다. 그러나 전투는 브리튼인들에게 비참한 결과로 끝났고, 이 전투는 시 'Y Gododdin'에 기록되어 있으며, 마이니독의 행방에 대해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이 없지만 동생인 키난이 고도딘의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638년, 계보에 차이에 따라 둠나구알 압 미니토그 혹은 모르칸트 압 콜레독이 왕으로서 통치할 때 현재의 에든버러인 에이딘은 포위되어 앵글로족의 손에 떨어졌고, 고도딘은 버니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현지 주민들이 어느 정도 비율이 바뀌거나 동화했는지는 불분명하다.
500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 브리튼계 부족 국가로 한때는 캄브리아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스코틀랜드 남부의 갤러웨이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초대왕은 메리치온 굴로 웨일스에서 작성된 Bonedd Gwŷr y Gogledd에서 전설상의 브리튼인의 왕인 콜레의 손자라는 것 외엔 알려진 바가 없다. 535년으로 추정된 해에 사망했는데, 이때 레게드가 남북으로 분할되어 킨바르크가 북부를 엘리디르가 남부를 통치했다.
535년 북 레게드의 왕이 된 킨바르크는 레게드의 모든 것을 상속하지 않았다는 불만을 품고 왕국의 경계를 북쪽으로 확장하기로 결심했다. 550년경, 킨바르크는 브리튼 섬과 아일랜드 사이에 위치한 맨 섬과 갤러웨이의 왕인 세닐트 왕을 추방했고, 그 영토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으로겨 했다. 그러나 곧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전신인 알트클리트의 왕 투드왈 투드클러드에 의해 쫓겨났다. 킨바르크는 570년에 사망했고, 아들 유리엔이 왕위를 이었다. 유리엔은 통치 기간은 버니시아의 영토 확장에 저지하기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문제는 이때 옛 북부의 왕국들 또한 분쟁 상태로 573년 알트클리트의 왕인 리드더치 하엘과 현재의 요크를 중심으로 하는 에브라우크의 왕으로 추정되는 페레두르의 동맹군과 그리고 아르프데리드의 왕 그웬돌루 압 세이디오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했는데 이 분쟁에서 그월둘루가 죽었고, 훗날 웨일스 삼부작에서 무의미한 전투라고 평가할 정도로 버니시아, 데이라 등의 앵글로족 국가들에 대항하기 위한 힘의 약화를 불려왔다,

당시 유리엔은 케어 리브리드[67]를 중심으로 북 레게드를 통치했는데, 이때 북 레게드의 영토는 현재의 캄브리아 전역을 통치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대인 12세기 웨일즈의 전통에서 영국 북서부를 '레게드의 땅'인 틸레게드라고 부르고 있었다. 율리엔은 고듀를 통치하고 있었다고도 한다. Godu는 셀 커크셔의 숲 지역과 관련될 수 있다. 또한 루위 웬드[68]도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었고, 이는 580년대 중반까지, 클라이드에서 슈롭셔까지, 영국 북서부의 거의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79년 유리엔은 버니시아의 테오도릭과 전쟁을 벌여 아르고에드 르위파인 전투에서 승리했고, 테오도릭은 유리엔의 아들인 오와인과의 일대일 대결에 패해 죽었다. 이후에도 렉 웬 전투에서 어스트라스클라이드의 리드더치와 동맹을 맺고 픽트족과 싸웠고, 베르윈 전투에서 테오드릭 왕의 동생인 버니시아의 프리투발트 왕을 물리쳤다.

이후 북 레게드의 힘이 강했기에 앵글로족 왕국에 대항하기 위한 브리튼족 연맹을 결성할 때 유리엔이 수장이 되었고, 이 연맹에 알트클리트의 왕인 리드더치 하엘과 엘멧의 왕 그왈로그 압 레노그, 브리나이히의 왕였고, 당시 고도딘의 왕이었던 모르칸트가 참여했다. 그들의 군대는 체비엇 산맥을 넘어 밤버러에 거점을 두는 앵글로인들을 공격했다. 590년경, 브레튼의 소왕들은 버니시아의 중심지인 린디스판을 포위하고 밤버러를 점령한 후 버니시아의 해안에서 앵글로 색슨인을 몰아내고, 이 지역에서 그들의 세력을 거의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브리튼인의 역사'에 따르면 유리엔의 군사적 성공에 질투한 모르칸트는 부하 중 한 명인 로반 또는 로판 라우 디프로(즉, 무국적의 손을 가진 로반)에게 율리엔을 죽였다.허나 모르칸트의 질투로 벌어진 사건은 곧 브리튼 연합군의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앵글로인들에게 패배하고 만다.

암살된 유리엔의 뒤를 이어 아들인 오와인이 뒤를 이었다. 그는 패전의 원인의 제공자이자 아버지의 원수인 모르칸트를 죽이기 위해 고도딘을 공격해 모르칸트를 죽여 복수를 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오와인은 몇 년간 나라를 통치했다. 그는 아버지의 오래된 적들로부터 큰 압력을 받았다. 오와인의 형제 엘핀은 엘멧의 와 그왈로그 압 레노그에게 공격을 받어 죽었다. 오와인과 그의 형제 파스켄은 고 모르간트의 동맹인 북 페나인 산맥(듀노팅)의 왕 디노드와 싸워야 했고, 597년에 벌어진 전쟁에서 오와인이 전사하고, 아들인 엘핀이 그 뒤를 이었다. 오와인의 죽음으로 북레게드는 쇠퇴해지기 시작했다.

북 레게드의 동쪽 국경까지 진출한 버니시아의 앵글로족들에 의해 카틀레이스를 빼앗긴 것 외엔 엘핀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전무한 편으로 엘핀은 후계를 두지 못한 상태에서 616년에 사망했는데, 원래라면 그의 동생들 중 다음 왕을 세워야 했지만 그의 사촌인 로이드 압 린이 북 레게드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로이드 또한 638 혹은 645년년까지 통치한 시기 동안의 치적이 불명이며, 그 사이에 버니시아의 왕인 오스위그에게 딸인 리안펠트와 결혼시키기로 약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로이드가 죽자 오스위그는 리안펠트와 결혼한 후 북 레게드를 버니시아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레게드의 남부를 통치하게 된 엘리디르는 햔재의 랭커셔 일대를 중심으로 남 레게드를 지배했다. 웨일스의 법으로 알려진 하이웰 법에 따르면 엘리디르는 귀네드의 왕인 룬 압 마멜귄의 누이와 결혼했고, 이후 이를 명목삼아 귀네드의 왕위를 주장하기 위해 귀네드로 방문했을 때 클리노그 근처 아르본 칸트레브에서 살해되었다. 그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엘리디르와 친분이 있었던 알트클리트의 왕인 리드더치 하엘과 에이던의 왕인 클러드노 에이던이 동맹을 맺었고, 이들 북방군은 바다를 통해 귀네드로 쳐들어가 아르본을 약탈했으나 룬의 군대에 격퇴되었다. 룬 히르는 러데르흐를 역공하여 포스강까지 북쪽으로 쳐들어갔다.

어째든 엘리디르의 사후 그의 아들인 리위치 헨이 남 레게드의 왕위에 오른다. 580년대 후반에 그는 버니시아의 앵글로족에 대항하여 그의 사촌 유리엔과 연합을 맺었다. 590년경, 유리엔을 맹주로 하는 브레튼의 소왕들은 버니시아의 중심지인 린디스판을 포위하고 밤버러를 점령한 후 버니시아의 해안에서 앵글로 색슨인을 몰아내고, 이 지역에서 그들의 세력을 거의 완전히 파괴했다. 그러나 '브리튼인의 역사'에 따르면 유리엔의 군사적 성공에 질투한 고도딘의 왕 모르칸트의 부하 중 한 명인 로반 또는 로판 라우 디프로(즉, 무국적의 손을 가진 로반)에게 유리엔을 죽였다. 허나 모르칸트의 질투로 벌어진 사건은 곧 브리튼 연합군의 분열로 이어졌고, 결국 앵글로인들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후에도 리워치는 5촌 조카 오와인과 동맹을 유지하다가 590년 버니시아의 침략을 받고 웨일스의 포위스 왕국으로 도주했고, 남 레게드는 버니시아에 의해 합병된다.
현재 영국 북부 요크셔 서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다른 브리튼 북부 왕국의 남쪽, 현재 웨일즈의 동쪽에 위치했다. 엘멧이 어떻게 설립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중반 전설적인 왕인 코엘 헨이 통치하고 있던 더 큰 왕국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역사가 알렉스 울프는 엘멧 지역은 로마 시대 이전에는 명확한 부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로마의 지배가 붕괴 된 후에 다시 나타났다고 추정하고 있다. 다만 할레이 가문의 족보에서 엘멧의 왕들의 계보에 따르면 476년 서로마 제국의 붕괴 당시 왕으로 마그위드 글로프가 495년까지 통치했으며, 이후 아들인 레노그가 6세기 후반까지 엘멧을 통치했으며,그의 아들인 구와로그가 그 뒤를 이었다.

이후 6세기 말에 엘멧은 확장된 앵글로 색슨 왕국 데이라와 머시아의 압력을 강화하게 되었다. 엘멧의 군대는 590년 북쪽으로 대규모 침공을 하고 있던 버니시아에 대항하기 위한 북 레게드의 왕 유리엔을 중심으로 한 옛 북부 왕국들의 동맹에 참가했다. 구와로그는 밤버러와 린디스판을 직접 공격해 상당한 성공을 거뒀으나 , 레게드의 유리엔이 공적을 시기한 고도딘의 모르칸트에 의해 살해되고 동맹에 참가했던 왕들 사이에 불화가 터지면서 북부 동맹은 붕괴되었다. 이후 구와로그는 북 레게드의 왕 오아인의 형제인 엘핀을 공격해 그를 살해했다. 이후 구와로그가 죽자 그의 아들인 세레틱이 엘멧의 왕위를 잇게 되었다.

앵글로 왕국 노섬브리아의 통일 후, 노섬브리아의 에드윈 왕은 엘멧 침공을 이끌고 616년 또는 617년에 정복했습니다. 베다의 '잉글랜드의 교회사'에는 노섬브리아의 귀족으로 노섬브리아 왕가의 추방된 귀족인 헬레릭(힐더 오브 휘트비의 아버지)이 엘멧의 케레틱 왕의 궁정에서 살았을 때 독살 되었다고 쓰여졌다. 헬레릭이 호스트에 의해 독살되었을 경우, 이것이 침공의 이유였는지, 에드윈 자신이 헬레릭을 독살했을 경우, 노섬브리아에 의한 엘멧 병합의 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브리튼의 역사서에는 에드윈이 “엘멧을 점령하고 그 나라의 왕인 세레틱을 추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레틱은 일반적으로 웨일스의 문헌에서 엘멧의 왕으로 알려진 케레디그 압 그왈로그와 동일한 인물로 추정된다. 세레틱의 선조는 웨일스의 문헌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탈리에신의 시의 하나는 6세기 말 무렵 엘멧을 통치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 아버지의 그왈로그 압 레노그에게 바쳐진 것이다. 베다는 “그 후의 왕들은 로이디스[69]라고 불리는 그 지역에 자신들의 집을 세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문헌은 엘멧이 실제로 노섬블리아와 평화적으로 병합되었고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없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엘멧의 병합 후, 627년의 부활절에 그 영토는 노섬브리아에 편입되었다. 그 후 그 사람들은 엘멧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7세기 후반 Tribal Hidage에 600 하이드의 작은 영토 주민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들은 Tribal Hidage에 기록된 가장 북쪽 그룹이었다. 아마도 앵글로색슨 시대의 대부분 동안 독특한 브리튼 켈트족 부족으로 지속되었을 이 부족은 노섬브리아를 침략하고 633년에 그 지역을 잠시 점령했을 때 귀네드의 캐드왈론 압 캐드판과 공모했을 수 있습니다 .

베다에 기록된 655년 기사에서 노섬브리아와 머시아 사이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인 윈웨이드 전투가 로이디스 지역 어딘가에서 벌어졌다고 전한다 .

메츠의 카트로의 생애는 스칸디나비아 요크 의 노르스인 과 이스트라드 클루드(스트라스클라이드) 왕국의 켈트 브리튼 인 사이의 경계로 로이다무 시비타템을 언급합니다 . 이는 엘멧 왕국이 노섬브리아가 원래 합병한 직후(베드는 에드윈의 죽음 이후 노섬브리아의 분열을 언급함) 또는 그 이후에 독립을 되찾았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아에론은 재 스코틀랜드 남서부에 있는 에어 강 지역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로마 제국이 현재의 잉글랜드 지역을 완전히 정복하기 이전부터 존속한 것으로 보이며, 7세기에 노섬브리아 왕국이 이 지역을 정복하기 전 또는 그 중에 소멸한 것으로 보이며, 최초로 언급된 문서는 '탈리에신의 책'의 레게드의 왕 유리엔을 찬양하던 시에서 나왔다.

아에론이 거기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 스코틀랜드 남서부 지역에 대한 가장 이른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로마 브리튼을 연구하는 고고학에서 나온 것으로, 이 지역에 요새가 건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요새가 땅에 많이 건설되었던 스코틀랜드 남부와 영국 북부의 로마인들의 행동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이 지역 주민들이 로마인들과 우호적인 이해관계(혹은 불평등한 동맹)에 도달했고, 결과적으로 부족이나 왕국으로 계속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로마인들이 이 지역 주민들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아에론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에 대한 가장 초기의 역사적 언급은 150년경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에 나와 있다. 그는 이곳이 나중에 어스트라스클라이드 왕국으로 알려진 담노니족의 영토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아에론과 어스트라스클라이드 사이의 연결을 암묵적으로 시사하는 후기 왕족 계보는 이것과 일치하지만 이것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아에론은 7세기를 넘어서는 왕국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노섬브리아 왕국이 우세했고, 얼마 안가 클라이드 만과 포스 만 남쪽의 스코틀랜드 전체를 정복했다 . 결정적인 해는 7세기 중반으로, 머시아의 펜다가 머시아의 군대는 물론이고, 귀네드 북부의 Cymry, 동앵글리아, 데이라의 동맹군을 이끌고 버니시아에 맞섰다. 펜다는 655년 윈와이드 전투 에서 패배하고 죽었고, 동맹은 끝났고 버니시아가 영국 중부와 스코틀랜드 해협 사이의 영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버니시아는 다시 데이라와 연합하여 그 시대의 최고 군사 강국인 노섬브리아를 형성했다. 어스트라스클라이드는 곧 독립을 회복했지만 솔웨이 퍼스 만 북쪽의 다른 모든 브리튼계 왕국은 영원히 사라졌다.
옛 북부의 브리튼계 왕국들 중 위치가 확인되지 않은 국가로 국명은 6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했던 Cadrawd Calchfynydd의 칭호에 남아 있었다. 웨일스의 자료에서 Cadrawd는 Gwyr y Gogledd, 즉 "북부 왕국들"의 하나로 여겨지며, 이 지역이 영국 북부의 어딘가에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윌리엄 포브스 스킨은 남쪽 스코틀랜드의 케르소(구명 Calchow)와 동일시하는 것을 시사하고, 레이첼 브롬위치는 옛 북부의 어딘가일 가능성이 높은 것에 동의하고 있다. 알리스터 모팻은 켈소의 역사에서 이 견해를 지지하고, "Chalchou", 백아 지역, Chalkheugh Terrace에 대한 초기 언급을 인용하고 있다. 존 모리스는 칼치피니드가 북 레게드 영토의 남쪽에 중 한 곳인 석회암 또는 백악의 언덕은 코츠월즈 또는 칠턴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칼치피니드는 5세기 말 페나인 산맥 일대를 지배하던 아르투이스 압 모르의 영토였다. 그러다가 495년, 아르투이스가 죽고 왕국이 세 아들들에게 분할되면서 칼치피니드가 위치한 지역은 킨블린이란 이름의 아들이 받고, 통치하게 되었다고 하며 이후 510년 혹은 515년에 죽은 후 아들인 신위드가 칼치피니드를 530년까지 통치했다가 죽고, 아들인 카드로우가 560년까지 칼치피니드를 통치하다가 죽고 이스위스 칼치피니드의 왕이 되었다. 그의 통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암브로시우스 아우렐리아누스 시대에 살았던 또 다른 이스위스와 혼동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571년 베드퍼드 전투에서 웨식스 캐드울프에게 패한 후 죽었다. 이후 아들인 마난이 칼치피니드의 왕으로 즉위했는데, 그의 치세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으며, 이후 610년 혹은 630년 머시아에 속한 앵글로족 집단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에이던은 고대 말기에서 중세 초기에 걸쳐 오늘날의 에든버러 주변에 존재했던 지역이다. 중심지는 오늘날의 캐슬록으로 추정되는 딘 에이던(Din Eidyn)으로,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는 에든버러 주변에 요새화된 거주지가 등장한 것을 기점으로 보고 있다. 브리튼의 초기 로마 시대에, 이 지역은 브리나이히의 영토의 일부로 기록되었다. 브리나이히족은 대체로 독립적이었지만 2세기에 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143년경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브리나이히의 땅 북쪽과 나중에 에이딘이 되는 지역에 안토니누스 성벽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동쪽 끝은 아마 칼리덴으로 보고 있다. 브리나이히족은 로마의 종속 왕국이 되었고, 픽트인과 스코틀랜드인으로부터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에이딘을 브리튼의 북쪽 국경으로 만족으로부터 보호한다는 생각은 수백 년 동안 널리 받아 들여졌습니다.

로마 시대 이후, 6세기경 앵글로족의 침입으로 브리나이히의 모르칸트는 고드딘 왕국으로 피신해 그곳의 왕이 되었다. 고드딘과 옛 북부 전반에 있어서 에이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중세 초기 시 'Y Gododdin'에 증명되었다. 이 작품은, 기원 600년경, 폴란드 세계 각지로부터 1300명의 저명한 전사가 카트레스의 전투를 위해 딘 에이딘에 집결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시의 난해한 말과 복잡한 역사 때문에, 작품의 배경에 있는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것은 어렵다. 이폴 윌리엄스의 해석에 따르면, 전사들은 아마도 고도딘의 통치자인 미니도크 에이딘에 의해 소집되어 카트레스를 점령하는 앵글로인들을 공격했다. 전사들은 원정에 출발하기 전에 1년간 연회를 열고 그 사이에 거의 전원이 살해되었다. 존 코흐와 그레이엄 포테이즈 등의 후대 학자들은 이 해석의 일부에 이의를 제기하고 미니독을 통치자가 아니라 산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해석했다. 코흐는 에이딘의 통치자는 본문에서 언급된 우레이 또는 그왈게트 고드딘이라고 제안했다.

다만 할리 족보서와 북방인의 계보, 와운의 흑색서에서 에이던의 왕이 클러드노라고 적혀져 있으며 특히 귀네드 측 기록인 와운의 흑색서에서는 클러드노를 비롯한 북방 군주들이 오늘날의 북웨일스의 귀네드를 한 차례 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북방의 군주 가운에 하나였던 엘리디르 무언바우르(Elidir Mwynfawr)가 귀네드에서 살해되자 그 복수를 명목으로 알트클리트 국왕 러데르흐 하엘이 군사를 일으켰고 누드 하엘(Nudd Hael), 모르다브 하엘(Mordaf Hael)이라는 다른 두 왕과 함께 클러드노도 합류했다고 한다. 북방인들은 아르본을 노략질하고 불태우다가 룬 압 마엘군이 이끄는 귀네드군이 도착하자 패퇴했다고 한다. 다만 이탈리아어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클러드노가 525년경의 군주이며 미니도크가 550년경의 군주로 표기되었다.

7세기 고드딘 왕국이 쇠퇴했는데, 당시 에이딘은 고도딘 내의 소왕국이었을 가능성이 있었고, 영주들은 고드딘 전토가 아니라 자신의 영토만을 지배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알스터 연대기에는 638년의 「에틴의 포위」가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앵글로족 집단이 로디언을 마지막으로 정복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이것은 에이딘에 대한 비교적 확실한 역사적 언급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에이딘은 그 후 3세기의 대부분, 앵글로족의 손에 남아 있었던 것 같지만, 역사적 및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하고, 딘 에이딘에 요새가 남아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크론막 노이즈 연대기에는 잉글랜드의 아제르스탄이 934년에 '에든버러 왕국을 약탈했다'며, 당시 어떤 요새가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서는 스코틀랜드 인들이 954-962년 통치했던 인둘프 왕의 통치 하에 에이딘과 요새를 정복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무렵에 귀족의 영지가 그곳에 지어졌고, 11세기에 왕궁을 짓는 길을 열렸다.
마나우 고드딘은 옛 북부의 브리튼계 왕국이었다. 오늘 알로아로 알려진 지역, 중앙 스코틀랜드의 몰리드 포스 근처에 위치한 고도딘 왕국의 하위 왕국이었다. 딘 에이딘은 왕국의 주요 요새이며 아마도 미니도크의 궁정이 있었던 곳입니다. 마나우 고드딘은 아네이린의 유명한 초기 시 "Y Gododdin"에서 언급되었다.

네니우스는 저서 '브리튼인의 역사'에서 마나우 고드딘에 대해 언급하고, 귀네드 왕국의 창시자인 쿠네다는 “페르군이 통치를 시작하기 146년전에 마나우 구오토딘(마나우 고드딘)이라고 불리는 장소에서”북쪽 웨일스 왔다고 언급하고 있다.

할리 사본 3859에서 볼 수 있는 쿠네다의 아들의 이름 목록, 즉 아크레사우 할리에 따르면, 쿠네다의 장남인 티피안은 “마나우 구오도틴(마나우 고드딘)이라는 지역에서 사망하고 아버지와 형제와 함께 여기 (웨일스)에 온 것이 아니다.

역사가들은 마나우 고드딘을 오타디니 땅과 연관시킵니다. 오타디니족은 하돌리아누스 장성과 안톤 장성 사이에 있는 땅의 동쪽에 살았던 켈트족입니다. 이 토지는 현재 스코틀랜드 남동부에 해당된다. 이름의 '마나우'는 맨섬의 '마나우'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마나우는 아일랜드어의 마낭과 같은 어원이지만 마나우 고드딘의 경우 이름의 의미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아일랜드와의 연결은 있을 수 있다[70]

북쪽에는 픽트인이 살고 있었다. 캐스 마난도의 싸움과 캄포 마난도(맨 요새)에서의 픽트인과의 대전투는 아일랜드의 자료에 기록되어 있다.

지역사적으로 봤을 때 마나우 고도딘이 존재했던 당시 포스 퍼스(Firth of Forth)지역에 대한 가장 이른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로마 브리튼 의 고고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담노니(Damnoni)와 노반테(Novantae)와 마찬가지로 보타디니(Votadini)의 고향에는 로마의 요새가 건설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 지역의 사람들이 로마인과 우호적인 이해(불평등 동맹 등)에 도달했음을 암시하지만(확인하지는 못함) 결과적으로 이러한 부족이나 왕국은 로마 시대 내내 계속 존재했습니다 . 로마인이 이러한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 적이 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현재 픽트족 으로 알려진 더 북쪽의 사람들과 자주 전쟁을 벌였으며 , 그들의 군사적 통신 노선(즉, 도로)은 잘 요새화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데레 거리의 북쪽 끝인 마나우 고도딘을 통과하는 도로가 포함되었다 .

북부 브리튼 사람들에 대한 가장 이른 신뢰할 수 있는 역사적 참고 문헌은 서기 150년경의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이다. 그는 이곳이 오타디니(즉, 보타디니)의 영토였다고 언급했다. 이 들은 나중에 고도딘 왕국(즉, 보타디니 왕국)으로 알려졌다. 그들의 땅은 스코틀랜드 남동부와 영국 북동부의 해안을 따라 있었고, 포스만을 따라 북쪽과 남쪽에 있는 땅이 포함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150년에 다몬니족과 오타디니족이 모두 포스만 북쪽과 테이만 남쪽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언급했다. 픽트족은 끊임없이 남쪽으로 밀고 들어갔고, 3세기 초에는 로마 황제 세베루스가 그들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원정을 벌이지 못했다.당시 마이아타에로 알려졌던 이 지역의 픽트족은 결국 남쪽으로 포스만과 그 너머까지 밀고 들어갔고, 7세기에는 북쪽으로 확장하고 있던 앵글로족의 버니시아까지 마나우 고도딘을 비롯한 고도딘 왕국 전체를 위협했다.

고도딘도 마나우 고도딘도 7세기 이후에는 왕국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노섬브리아 왕국이 우세했고, 클라이드만과 포스 만 남쪽의 스코틀랜드 전역을 정복했다. 결정적인 해는 7세기 중반으로, 머시아의 펜다가 머시아를 비롯해 귀네드의 북부 칸드레드와 동앵글리아, 데이라와의 동맹군을 이끌고 버니시아에 맞섰다. 펜다는 655년 윈드레드 전투에서 패배하고 죽었고, 동맹은 끝났고 버니시아는 영국 중부와 스코틀랜드만 사이의 영국 전역을 장악했다. 버니시아는 다시 데이라와 연합하여 그 시대의 최고 군사 강국인 노섬브리아를 형성했다. 어스트라스클라이드는 곧 독립을 회복했지만 솔웨이와 티네 북쪽의 다른 모든 브리튼계 왕국들은 노섬브리아에 의해 병합되었다.
5세기경에 브리튼인들이 헨 오글레드 지역(오늘날의 스코틀랜드 남서부 및 잉글랜드 북서부 일부)에 세워진 왕국으로 9세기 이전까지는 알트클리트로 불렸다. 알트클리트 왕들의 계보는 할리 족보서, 북방인의 가계 등의 연대기에서만 교차검증이 가능한 왕들이 일부이며, 대부분은 각각의 연대기들에 따라 중구난방으로 다르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476년 당시에 에르빈이란 이름의 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480년 에르빈이 죽고 커누이드가 뒤를 이었다. 할리의 족보서에서는 커누이드를 케레틱 굴레틱의 아들로 비정하고 있다. 같은 출전에서 커누이드는 둠나괄 헨의 아버지라고 지목된다.

그보다 후대의 「북방인의 가계」(Bonedd Gwŷr y Gogledd)에서는 둠나괄의 아버지가 커누이드가 아니라 이드너우에트(Idnyuet)라고 하며, 이드너우에트는 막센 울레딕의 아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북방인의 가계」에도 "커누이드 커누이디온(웨일스어: Cynwyd Cynwydion)"이라는 인명이 등장하는데, 에이던 국왕 클러드노의 조상으로 비정되어 있다. 또 여기에 달린 삼제시에는 "북브리튼의 3대 군벌"로 커누이디온, 코엘 헨, 컨파르흐 오에르를 들고 있다.

어째든 485년 커누이드가 죽자 더픈왈 1세 헨이 뒤를 이었다. 그 생애에 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으나, 헨 오글레드의 여러 왕가의 중요한 조상으로 비정된다. 마찬가지로 정체는 불분명한데 족보상 중요한 북브리튼인 군주로 코엘 헨이 있다.

할리의 족보서에 따르면 더픈왈은 케레틱 굴레틱의 아들 커누이드의 아들이다. 같은 출전에서 더픈왈에게 세 명의 아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세 아들이 각각 하나씩 왕가를 이루었다. 첫째 클러녹은 더픈왈을 계승하여 알트클리트 국왕이 되었고, 구이드노는 나중 왕 네이손을 낳았으며, 마지막으로 컨펠런(Cynfleyn)은 에이던(오늘날의 에든버러)의 왕이 되었다.

「북방인의 가계」에서는 이것과 좀 다른 족보를 전하고 있다.:256-257에서는 더픈왈은 이드너우에드(Idnyued)의 아들이고, 막센 울레딕의 손자다. 후손 쪽을 보자면, 더픈왈을 후대의 알트클리트 국왕 러데르흐 1세 하엘의 증조부로 놓고 있다는 점은 「북방인의 가계」와 할리의 족보서가 같지만, 그 외의 부분은 매우 다르다. 「북방인의 가계」에서는 구이드노를 더픈왈의 아들이 아닌 증손자로 놓고 있으며, 이 구이드노의 정체가 탈리에신의 양부 구이드노 가란히르라고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매우 복잡한 추적 끝에 더픈왈은 6세기의 달 리어타 국왕 아단 막 가브란의 조상이 된다. 그 밖에도 영문 위키백과의 어스트라드클리드의 문서에서는 게라인트라는 왕이 480년에서 490년까지 존재했었다고 한다.

이후 할리의 족보서를 기준으로 클러녹이 계승했다고, 하는데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커누이드와 클러녹 사이에 투타구알이란 왕이 490년에서 495년까지 존재했었고, 이후 카우라는 왕이 495년에서 501년까지 통치하다가 폐위되었고, 도갈이라는 왕이 501년에서 508년까지 통치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후 클러눅이 508년에서 540년까지 통치했고, 그의 아들인 투드왈이 왕위를 이었다고 하는데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두 왕 사이에 신벨린이란 왕이 540년에서 558년까지 통치했다고 기술되었다. 투드왈은 할리 족보서, 아돔나누스 히엔시스의 『콜룸바 성인전』, 그리고 『북방인의 계보』에 따르면 투드왈은 러데르흐 1세 하엘의 부친이라 하며, 아마 그 선왕이었으로 보인다. 할리 족보서들은 투드왈이 클러녹의 아들이며 클러녹은 둠나괄 헨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아마 클러녹이 투드왈의 선왕이었을 것이다.

작자 미상의 『너니아 주교의 기적』(8세기), 아엘레두스 리아에발렌시스의 『성자 니니안 전기』에 나오는, 남픽트인의 사도 성자 니니안과 동시대인이었다는 폭군이 투드왈일 가능성이 있다. 『기적』에서는 그 폭군의 이름을 투두아엘(Tuduael), 투우아헬(Thuuahel)이라고 기록했으며, 『전기』에서는 투드왈두스(Tudwaldus), 투두발루스(Tuduvallus)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역사학자 Alan MacQuarrie는 투드왈이 니니안과 동시대인이라면 니니안의 생몰연대에 관한 다른 증거들과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후 580년 투드왈이 죽고 그의 아들인 러데르흐 1세 하엘이 뒤를 이었다. 그는 알트클리트와 옛 북부에서 가장 유명한 왕들 중 하나로, 후대의 웨일스어 및 라틴어 중세작품들에서 자주 등장했다.

할리 족보서 및 아돔나누스 히엔시스의 콜룸바 성인전에 따르면, 러데르흐 1세는 알트클리트 왕 투드왈의 아들로, 부왕을 계승해서 즉위했다. 9세기의 「니니안 주교의 기적」, 「성자 니니안의 삶」에 "투두아엘(라틴어: Tuduael)", "투드왈두스(라틴어: Tudwaldus)"라는 이름의 폭군이 나오는데, 러데르흐 1세의 부왕을 가리키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러데르흐 1세의 족보는 그 조상이 더픈왈 1세 헨이라고 한다. 이런 족보들을 제외하면 러데르흐의 친족관계에 관해서는 웨일스어 문헌들에만 기록되어 있는데, 대개 프러데인섬의 삼제시 같은 영웅시가에 파편적으로 남아 있다. 친족 중에 세널트 하엘(Senyllt Hael)이라는 이는 「어 고도딘」에서 인색하지 않고 후덕한 것으로 이름났다고 한다. 세널트의 아들 누드 하엘(Nudd Hael)은 "프러데인 섬의 3대 관대한 남자" 삼제시에 러데르흐와 함께 등장한다.

12세기 웨일스의 법전서 『와운의 흑색서』에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러데르흐가 북방의 다른 군주들과 함께 남쪽의 귀네드로 원정을 갔다는 이야기다. 또다른 북방 군주 엘디르 무인파우르(Elidir Mwynfawr)는 귀네드 아르본 칸트레브에서 죽임을 당했고, 러데르흐가 에이던의 왕 클러드노, 상술한 누드 하엘, 그리고 달리 알려진 정보가 없는 모르다브 하엘(Mordaf Hael) 등과 합류하여 귀네드 왕 룬 히르 압 마엘군에게 복수하러 쳐들어갔다는 것이다. 이들 북방군은 바다를 통해 쳐들어가 아르본을 약탈했으나 룬 히르의 군대에 격퇴되었다. 룬 히르는 러데르흐를 역공하여 포스강까지 북쪽으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그 내용이 워낙 불확실하여 이 아르본 원정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런 내용은 실제로 6세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기보다, 룬 히르의 후손인 웨일스 왕들이 룬 히르의 위대함을 윤색하기 위해 그전부터 이미 웨일스 전통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러데르흐 1세를 그 적수로 갖다붙여 지어낸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웨일스 전통사에서 러데르흐 1세는 베오르니체의 앵글로색슨인들과 초기 항쟁을 벌인 북부 브리튼인 왕들 중 하나로 기록한다. 『브리튼인의 역사』 제63장에서 러데르흐 1세가 6세기 말의 여러 베오르니체 왕들의 적이었다고 묘사하지만, 어느 전역에서 그들과 맞섰는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레게드 왕 우리엔, 및 다른 브리튼계 왕 모르칸트 불크와 동맹하여 베오르니체 왕 테오도리쿠스와 싸웠는데, 우리엔이 린디스판 섬을 삼일 밤낮 봉쇄하면서 승세를 잡은 적도 있었으나, 우리엔의 군재를 시기한 모르칸트가 그를 암살하면서 내분이 일어나 망했다.

러데르흐 1세가 참전한 주요 전쟁으로는 베오르니체의 앵글로색슨인과의 항쟁 외에도, 게일인 왕국 달 리어타의 아단 막 가브란이 알트클리트에 쳐들어와 맞서 싸운 것이 하나 더 있다. 아단은 알트클리트의 수도에 쳐들어와 먹을 것과 마실 것은 물론 짐승 한 마리 살려두지 않고 쑥대밭을 만들었다고 콜룸바 히엔시스가 기록해 놓았다. 콜룸바의 기록을 제외하면 이 브리튼인과 게일인 사이의 전쟁에 관해서 기록한 문헌은 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알트클리트와 달리어타는 후로마 시대 이레 중세 초기까지 이웃나라로서 여러 차례 싸우지 않았다고 볼 증거도 없어 보인다. 달 리어타는 당대 브리튼 정치의 상대적 뉴커머였지만, 그 일대 지역에 살던 스코트인들은 보르티게르누스 시대부터 하드리아누스 방벽 주위의 브리튼인 왕국들에 쳐들어오곤 했다. 또한 아단 막 가브란은 픽트랜드에서 노섬브리아에 이르기까지 전선을 확대하고 다닌 공격적인 군주였다.

이런 웨일스어 문헌들을 제외하면, 러데르흐 1세에 관한 주요 정보원으로는 라틴어로 쓰인 기독교 성인전들이 있다. 특히 글래스고의 수호성인인 성 뭉고는 6세기 사람응로 러데르흐 1세 및 아단 막 가브란과 동시대인이었다. 12세기에 이오켈리누스 데 푸르네스가 쓴 뭉고 성인전은 그 내용 전반이 보존되어 있다. 여기서 뭉고에게 우호적인 후원자로 "레데레크(Rederech)"라는 왕이 나온다. 레데레크 왕은 뭉고에게 글래스고의 땅을 주어 어스트라드클리드 일대의 주교좌를 마련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왕의 왕좌부는 파르틱에 있었다고 한다.

러데르흐 1세가 언제 죽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뭉고 성인전에서는 뭉고와 같은 해인 614년에 죽었다고 하고, 웨일스 편년사서들에서는 612년에 죽었다고 한다. 역사학자들은 614년으로 조정했다. 610년대에 죽었다면 이것은 아돔나누스 히엔시스가 러데르흐 1세가 콜룸바 히엔시스와 동시대인이라고 한 것과 부합한다. 아돔나누스는 러데르흐 1세가 전쟁터에서 죽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액면 그대로 믿을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러데르흐 1세의 사후 그의 아들로 알려진 콘스탄틴이 뒤를 이었다. 조슬린에 따르면, 콘스탄틴은 리델크와 그의 왕비 랑그오레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고명한 아버지가 죽은 후 흔적을 이어받았지만 나중에 성직자가되기 위해 물러났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콘스탄틴이라는 이름의 리델크의 아들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는 할리의 족보서와 '북방인들의 계보도'의 북부 브리튼 왕의 계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조슬린 이야기의 무대인 글래스고 주변에서는 세인트 콘스탄틴이 숭배되었고, 근처의 고반 마을의 초기 교회는 그에게 바쳐졌다. 그러나 12세기까지 성 콘스탄틴의 전기는 불명확해졌기 때문에 콘스탄틴 왕은 수수께끼에 싸인 초기 인물에게 이야기를 제공하기 위해 창작된 문학상의 창작일 가능성이 높다.

'대시낙서리스트'로 알려진 정교회의 성인전집성에는 스트라스크라이드의 성 콘스탄틴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공휴일은 3월 11일로 되어 있다. 또한 성 코룸바에 의해 기독교로 인도되어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신앙의 전도사가 되어 640년경에 사망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알트클라이트와 고반의 성 콘스탄틴은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가 인정한 성인입니다. 그의 존재에 관한 확고한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그는 612년에 스트라스크라이드의 왕위를 퇴위해, 수도사가 되어, 후에 사제가 되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성 코룸바에 의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도 한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가 없는데도, 612년이라는 날짜는 고반 교회의 묘지가 기독교인이 점거한 날짜와 같은 시기의 기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고고학 조사는 고반 교회의 묘지가 5 세기에서 6 세기에 걸쳐 기독교인에 의해 사용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유물을 담았다고 일반적으로 믿어지는 석관은, 양식적으로는 9세기부터 10세기의 것입니다. 이것은 석관이 후세에 만들어지고 이전 성인의 시체 또는 시체의 일부를 수용 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성 유물 숭배가 행해진 중세 시대에는 일반적이었습니다. 라틴어로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스코틀랜드의 후대 왕은 3명이지만, 모두 알트클라이트의 리델하엘와 관련된 전설의 인물의 수세기 후에 통치했습니다.

다만 문제점은 동시키기에 현재의 프랑스 브르타뉴 반도에 건국된 브리튼계 국가였던 돔노네에 동일한 이름과 행적을 갖고 있던 왕이 존재했던 것만큼 현대 역사가들은 후대의 익명의 연대기 작가에 의해 가탁된 왕으로 보고 있으며, 할리의 족보서를 기준으로 네이톤을 알트클라이트의 진짜 왕으로 보고 있다.

할리의 족보서에 따르면, 네이톤는 더픈왈 1세 헨의 아들인 구이드노의 아들이었다. 알프레드 스미스는 그가 픽트족의 위대한 왕인 네흐탄, 혹은 얼스터 연대기에 621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된 카누의 아들 네흐탄과 동일 인물이라고 시사하고 있다. 알바인의 역사에서는 달 리아타 왕 아에단 맥 가블린의 아들 가트나이트가 카노라는 아들을 낳았음을 보여주지만, 할리의 족보서를 무시하지 않는 한 가트나이트와 더픈왈 · 헨은 가트나이트와 구이드노의 각각의 아버지로서 동일 인물이 된다. 그러나 픽트랜드의 왕좌에 오른 알트클라이트의 브리튼인이나, 알트클라이트의 왕좌에 오른 픽트인으로서 그의 가계가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픽트 왕 목록에서 그가 '네흐탄, 네포스 웰브'라고 불리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픽트랜드에서 중요했던 것은 웰브의 후손이었고, 그의 중요하지 않은 아버지 구이드노 / 카누가 아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앨런 올 앤더슨은 웰브는 아마 펠브(속격은 페일베)의 픽트어의 여성형이라고 지적했다. 앨런 맥왈리는 네이톤이 확실히 픽토인의 왕 네흐탄이었다고 시사하고 있지만, 구이드노/카누 문제에 대해서는 어떠한 입장도 취하지 않았다.

621년 네이톤이 죽고 알트클라이트의 왕위는 벨리가 잇게 되었다. 할리의 족보서에서 베리는 전왕 네이톤의 아들로 픽트족의 왕인 브리다이 3세의 아버지 베리와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아일랜드 출신의 선교사인 성 아돔나누스 히엔시스가 쓴 '부루이드 맥빌리의 애가'에 따르면 브리다이가 ‘알트클라이트 왕의 아들’로 불리기 때문이다. 브리튼의 역사에서, 브리다이는 노섬 브리아의 애즈플리드 형제, 즉 어머니의 종형제이었다고 여겨졌고, 베리의 아내는 노섬브리아의 귀족 내지는 애안프리드의 딸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어 위키백과 기준으로 638년 북 레게드의 로이드 왕이 버니시아 왕가와 결혼 동맹을 맺으면서 옛 북부에 앵글로족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우려한 벨리가 북 레게드를 공격했다고 한다.

다만 브리다이가 포르토리우의 왕이되기 위해서는 픽트인과 어떠한 연결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캄브리아 연대기의 기원 627년의 항목에서는, 베리·네이턴과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되는 베린이라고 하는 인물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다. 아일랜드의 문헌에서 알트클라이트의 왕 오앙 또는 호안[71]이 스트라스 캐론 전투에서 싸웠다고 기록 된 642년까지 통치하다가 그는 확실히 죽었고, 아들인 이웨인이 뒤를 이은 것으로 보인다.

할리의 족보서에 따르면, 이웨인은 전대 왕 베리 1세의 아들이었고, 나중에 통치한 엘빈의 아버지로 기록되었지만 얼스터 연대기와 티거낙 연대기에는 알트클라이트를 통치하고 694년에 사망한 단나구알이라는 또 다른 아들의 기록이 있다. 이웨인은 단 네히타인 전투에서 승리한 픽트인의 왕 브리다이 3세 형제 또는 이복 형제로 간주된다.

얼스터 연대기에는 브리튼인의 왕인 호안 또는 오앙이 642년에 스라스 칼인(스트라스캐론)이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다르리아타의 돔널 브렉을 이기고 죽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단순히 스트라스 캐론의 전투로 알려진 구절 "Y Gododdin"에 삽입 된 구절은 이러한 사건을 언급하며 "누위슨의 손자"(즉, 알트클라이트의 네이톤의 손자 이웨인의 군대가 펜틸(킨타이어 또는 다르 리아타)의 지배자인 디훈와르 프리히(Dumnal Breck)에게 승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웨인의 사망일은 불분명하지만, 얼스터 연대기에 기록된 알트클라이트의 또 다른 왕, 쿠레토의 사망이 기록된 658년 전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쿠레트에 대해서 계보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웨인의 형제나 아들이었을지도 모르며, 그가 사망한 후 이웨인의 아들인 엘빈이 알트클라이트의 왕이 되었다.
엘빈은 얼스터 연대기에 693년에 브루이드의 아버지 빌리(즉, 픽트인의 브리다이 3세)와 함께 몰렸다고 기재되어 있는 알빈의 아버지 네이톤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 이 네이톤은 알트클라이트 왕의 네이톤이며, 할리 계보에서는 엘핀 계보가 잘못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네이턴은 이웨인 1세 할아버지이자 620년경에 몰린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이 동일시는 알토크루트의 다른 왕의 연대 결정에 중대한 모순을 일으킨다. 알프레드 P. 스미스와 같은 학자들은 엘핀은 두 명이고, 한 명은 이웨인의 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네이톤의 아들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앨런 맥아리는 엘빈이 한 명 있었지만, 얼스터 연대기에서는 아버지 이웨인의 이름을 증조부 네이톤으로 대체하고 네이톤의 후손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것을 반영한 오류일 가능성 있다고 제안하고 있다.

제임스 E. 프레이저는 엘핀이 엘리윈 m. 퀼프와 동일시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엘리윈 m. 퀼프는 카노의 아들 코나마일과 함께 잡힌 것으로 얼스터 연대기인 673년에 기록되었다. 이 해석에서 m 퀼프는 라틴어 nepos Uerb에 해당하는 오래된 아일랜드어 moccu Irp의 오역으로 보고 있다. 이 아버지, 또는 아마도 별명 인 것은 픽트 왕 네이탄과 동반되었으며, 알트클라이트의 네이톤과 동일시 될 수 있으며, 따라서 엘빈의 증조부였을 가능성이 있다.

티거나흐 연대기에는, 678년에 펠처르 포타가 이끄는 케넬 로아른으로 알려진 달 리아타의 군대가 티리우라고 불리는 장소에서 브리튼인에게 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엘빈은 당시 ​​알트 클라이트의 브리튼인의 왕위 후보자로 유일한 인물이었고, 승리의 주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673년의 연대기가 엘빈에 관한 것으로 해석된다면, 케넬 응가블린 왕 돔날 브렉의 아들인 도만가르트가 살해당한 해에 그는 달 리아타에서 예전부터 활동했던 것 같다. 그와 함께 포로가 된 코나마일은 스카이 섬을 거점으로 하는 친족 케넬 응가렛 나이트의 카노 가르브(로맨스 소설 '스케라 카노 메이크 가르트나인'의 주인공에 이름을 준 인물)의 아들이다. 라고 생각된다. 엘빈은 682년 마그라인(현재 란 근처의 평원)의 러스 모어에서 알스터의 쿠르틴을 깨고 그들의 왕 카타삭을 살해한 브리튼인을 이끌었을 가능성도 있다. 엘빈은 693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뒤를 이어 둠나구알 2세가 알트클라이트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으나 1년 밖에 통치하지 못하고 죽었고, 할리 족보서에서 엘빈의 다른 아들로 알려진 벨리 2세가 즉위했다.

벨리 2세는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추구했습니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초에 걸쳐 알트클라이트 전사들은 아일랜드에 대한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697년 얼스터와 동맹을 맺고 라우스에서 무르탐을 패배시켰고, 702년에는 브레가의 왕 이르가라흐 맥 코닝 퀴레를 살해했다. 그러나 아일랜드에 대한 전투는 머그 클라인 전투에서 브리튼 인의 패배로 끝났다.

벨리는 그 후 달 리아타에게 눈을 돌렸다. 704년, 리벤 계곡에서 브리튼인과 달 리아타의 게일인들 사이에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습니다. 711년, 브리튼인은 로그 에클레이스에서 승리했고, 717년에는 미누일크의 바위에서 패배했다. 이로 인해 북쪽으로의 확장 시도가 끝났다. 벨리 2세는 722년에 사망하였고, 테우데버가 뒤를 잇는다.

테우데버의 통치는 피트족과 노섬브리아와의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유명한 픽트족의 왕, 앵그스 맥 퍼거스의 통치와 겹쳤기에 그의 침공을 받아야 했다. 알트클라이트는 픽트인에 의한 공격을 두 번 받고 있으며, 744년에서 750년에는 노샘브리아의 앵글로족까지 함께 공격했었다. 캄브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750년에 브리튼인이 뮤게다우크에서 픽트군을 격파했는데, 이때 앵거스는 노섬브리아의 왕 애드베르트와 동맹을 맺고 같이 공격했던 상태였다. 티거나흐 연대기에 따르면, 거기서 앵그스의 형제 타로르겐이 죽었다. 뮌게 다우크는 덤버튼 셔와 스털링 셔의 경계에 있는 현대 머그독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동일성은 확실하지 않다. 티거나흐 연대기에는 테우더버가 752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테우데버가 지휘한 브리튼인의 승리였던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캄브리아기에는 테우드워가 전투가 이뤄진 750년에 사망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그는 거기서 전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 애드베르트가 카일 평원을 차지했다고 한다.

이후 알트클라이트의 왕위는 로드리가 이었으나 치적에 대한 기록도 없이 754년에 사망했다고 하며, 그의 뒤를 이어 더픈왈 3세가 알트클라이트의 왕이 되었다. 더럼의 시메온에 따르면, 더픈왈 3세의 왕국은 픽트인 왕 앵거스 1세와 노섬브리아의 왕 에드베르트에 의해 침략을 받았다. 같은 자료에 따르면, 756년 8월 1일, 그들은 알트클라이트(던버튼 록, 단나구알의 수도)에 도착하여 브리튼인의 경의를 얻었다. 하지만 9일 후, 노섬브리아 왕의 군대는 와니아에서 니완비릭까지 진군 중에 습격을 받고, 거의 대부분이 괴멸했다. 더픈왈은 보통 이 시기의 알트클라이트의 왕으로 여겨지지만 노섬브리아 군을 파괴한 것은 오엥스였다는 설도 있다. 필리모어에 의한 캄브리아 연대기의 재구성에서는 더픈왈이 전투로 사망한 것은 760년으로 되어 있다. 그의 죽음 후에도 알트클라이트 영토는 픽트인 또는 픽트인과 앵글로족의 노섬브리아의 공동 지배하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된다.

할리의 족보서에 따르면 760년경에 더픈왈 3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이웨인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그 자신이 왕으로 통치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픈왈은 756년 픽트인 엥거스 1세와 노섬브리아의 에드베르트 왕의 연합군에 복종한 군주로 추정되고 있기에 이 사건 이후, 알트클라이트 는 두 세력 사이의 세력하에 있었던 것 같고, 왕가의 혈통은 1세기 이상에 걸쳐 할리의 족보서를 통해서만 알려져 있으며, 리드더치 2세와 더픈왈 4세, 아스갈까지 이어졌는데, 이중 더픈왈 4세는 알바왕들의 연대기의 849년 기사에서 브리튼인들이 달 리어타의 던블레인을 불태웠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 옛 북부의 브리튼계 국가들은 알트클라이트를 제외하면 전무 남쪽의 머시아와 동쪽의 노섬브리아에 의해 병합된 상태였기에 더픈왈 4세가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870년경에 아스갈이 알트클라이트의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860년대 초중반 바이킹 군벌 중 한명이었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노섬브리아의 왕 엘라 2세에게 붙잡혀 죽으면서 그의 아들인 이바르를 중심으로 그의 아들들이 다른 바이킹들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선동해 브리튼 제도로 쳐들어 오는 이교도 대군세가 진행되는 시기였다.
2.1.3. 이교도 대군세
이교도 대군세의 대외적 원인으로 가장 강력한 바이킹 군벌이었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브리튼 섬을 털다가 폭풍을 만나는 바람에 앵글로색슨족의 왕국 중 하나인 노섬브리아의 해안에 좌초했다. 여기서 라그나르는 노섬브리아의 왕인 앨라 2세(Ælla II)와 생애 마지막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에서 라그나르는 생애 처음으로 패배하면서 결국 붙잡혔다.

당시 엘라 2세는 라그나르를 죽이면 그의 아들들이 복수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라그나르를 구금할 생각이었으나 잡은 포로가 라그나르인지 모르고 있있기에 생포당한 라그나르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라는 물음에 답하지 않았고, 이에 앨라 2세는 심문을 위해 그를 뱀굴에 쳐넣었다.

이에 라그나르는 유언으로 "새끼 멧돼지들이 늙은 아비의 죽음을 안다면 어떻게 꿀꿀거릴까?"를 남기며 죽었고, 이사실이 스칸디나비아에 있던 그의 아들 뼈없는 이바르를 비롯한 그의 아들들이 엘라 2세가 파견한 사절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사가에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으로 앨라 2세의 전령들에게서 아버지의 죽음을 전해들은[72] 이들은 엘라 2세의 사절들이 돌아간 후 다른 바이킹들에게 라그나르의 복수를 하자고 선동하면서 시작했다. 다만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사가에서 이바르는 아버지에게 과실이 있다고, 사절들에게 말하고는 해당 이유만으로 전쟁에서 빠졌다고 한다. 후술하지만 이것은 이바르의 기만술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스칸디나비아의 척박한 땅에서 하는 농사와 무역으로 급속하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에 벅찼기에 차선책인 약탈 또한 약빨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아예 그동안 약탈하던 지역들을 점령하기로 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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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 대군세 당시 바이킹의 진격로

바이킹 군세는 865년 후반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 해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타넛 섬에 주둔했고, 켄트 주민들이 그들에게 공물을 받쳐가며 평화를 맺으려고 했지만 바이킹들은 켄트 지방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무차별적인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고, 이내 동앵글리아의 국경까지 도달했다. 이들의 갑작스러운 출현에 놀란 것은 동앵글리아의 왕인 애드문드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바이킹들이 약탈과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조건으로 겨울을 날 수 있는 장소와 식량 및 말들을 제공하기로 협의했다.

이후 바이킹들은 1년 동안 동앵글리아에 머물다가 866년이 끝나갈 즈음에 라그나르의 아들들은 아버지를 죽인 앨라 2세의 노섬브리아로 진군했다. 노섬브리아 군대는 연전연패했고 이에 앨라 2세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수도 요크에서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항전에도 불구하고 867년 노섬브리아의 수도는 함락되었고 앨라 2세는 산 채로 붙잡혀 라그나르의 아들들에 의해 복수의 피의 독수리형으로 참혹하게 처형되었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사가에서는 결말은 똑같이 되지만 이와 다른 서술이 있다.

이바르가 빠진 상태에서 바이킹들은 켄트 지방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브리튼 섬을 침략해 이후 노섬브리아를 향해 북진했지만 그로 인해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바이킹 군대는 앨라 2세에게 패배하고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노섬브리아 군대가 후퇴하는 동생들을 추격하는 동안, 이바르는 앨라 2세를 찾아가서 자신은 아버지 라그나르의 죽음에 대한 배상만 받으면 충분하다고 왕을 설득했다. 이에 무엇을 원하냐는 앨라 2세의 말에 황소 한 마리의 가죽으로 덮을 수 있는 면적의 땅만 주면 앞으로도 그를 거스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비록 승리하긴 했어도 바이킹들을 상대하는게 힘들었던 앨라 2세가 이를 수락하자, 이바르는 자신이 구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황소 가죽을 부드럽게 두드려서 세 번을 잡아 늘린 뒤, 최대한 얇고 세심하게 가공하여 아주 길고 가느다란 가죽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줄로 한 바퀴 휘감을 수 있을 만큼의 큰 영토를 가져갔다고 한다.[73] 그렇게 잉글랜드 땅에 정착한 이바르는 매우 관대하고 지혜로운 영주로서 주변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심지어 그 앨라 2세와도 친분을 다지며 신하로서 이로운 조언을 해주는 위치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훼이크에 불과했다. 자신이 충분히 신뢰를 얻은 것을 깨달은 이바르는 동생들과 몰래 접촉함과 동시에, 재산을 털어 앨라 2세가 부리던 노섬브리아 군인들을 자기 밑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노섬브리아 왕국의 군사력을 약화시킨 이바르는 동생들에게 스칸디나비아 전역에서 전사들을 집결시켜 전쟁 준비를 하라는 전갈을 보냈고, 앨라 2세에겐 동생들이 다시 침략해오면 자신이 맏이로서 잘 타일러서 돌려보내겠다며 안심시키는 등 그동안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수작을 부렸다.[74]

그렇게 몇 년 간 공들여온 뒤통수를 친 이바르는 포로로 잡은 앨라 2세를 피의 독수리형으로 참혹하게 죽인 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스칸디나비아의 영토는 동생들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잉글랜드에 남아서 죽을 때까지 자기 영지를 다스리며 살았다고 한다.

어째든 바이킹들은 노섬브리아 북부에 더럼을 수도로 에크베르흐트 1세를 괴뢰왕으로 세운 뒤 자신들이 점령한 지방에서는 그의 이름으로 '대리 통치'를 하는 형식을 빌려 통치했으며, 노섬브리아는 해마다 데인겔드를 지불해야 했다.

노섬브리아 정복이 끝나자 바이킹 침략군은 방향을 남쪽으로 돌려 전성기가 끝나고, 계속되는 내전으로 약화된 머시아를 급습했다. 국경을 넘어 남하하여 손쉽게 머시아군의 저항을 격퇴하고, 머시아의 수도 노팅엄을 점령했고, 가까스로 탈출한 머시아의 왕 부그레드는 웨식스의 왕인 애설레드 1세와 동맹을 맺고 바이킹들을 몰아내려 했다. 웨식스-머시아 연합군은 머시아의 수도를 탈환하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실패했다. 결국 수도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머시아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했는데, 바이킹은 이를 받아들여 노팅엄을 돌려주고 노섬브리아로 철수했다.

또한 바이킹 대군은 당시 머시아의 군주였던 부그레드를 정치적으로 압박함과 동시에 머시아 국토를 유린했고, 왕의 무능함에 분노한 이들을 지원하면서 그의 퇴위를 종용했다. 그러면서 바이킹들은 머시아의 왕위를 원하는 세력을 지원했고, 압박을 받게 만들었다. 어째든 머시아에서 성공적으로 약탈을 마무리한 바이킹들은 노섬브리아로 철수했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리고 괴뢰국 노섬브리아에 일부 정착민들을 남겨 놓은 채 870년 동앵글리아로 돌아가 그해 겨울을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동앵글리아의 왕 에드문드는 바이킹들이 겨울을 보내는 동안 이들과 체결한 평화협정을 깨고, 이들을 기습했다. 하지만 바이킹에게 역습당해 동앵글리아 군대는 전열이 무너진 채 전멸했고, 심지어 왕이 전사하는 대패를 당했으며, 심지어 이때 동앵글리아의 앵글족 귀족들까지 몰살 당했는지 바이킹들은 오스왈드라는 자를 자신들의 괴뢰로 세웠다.

오즈월드의 존재는 그의 주화 때문에 알려졌다. 그가 발행한 주화들과 은괴는 이스트앵글리아내 바이킹들의 공격 시기 내내 사용되었고 바이킹들은 비록 비율을 낮추기는 했지만 은으로 된 페니를 생산하는 앵글로색슨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8개의 주화들이 애설레드와 오즈월드의 집권기의 것으로 알려졌고, 반면에 200개가 넘는 주화들이 오즈월드의 전임자인 에드먼드의, 화폐 주조자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듬해 871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일명 여름의 대군세라 불리는 지원군이 야를 바그세크[75]와 구트룸[76]의 지휘하에 잉글랜드에 상륙했다. 이들은 동앵글리아 지역을 거쳐서 이번에는 곧장 웨식스 왕국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당시 웨식스는 머시아나 노섬브리아와 달리 강력한 기반을 다져 둔 상태였으며 애설레드 1세가 동생인 알프레드와 함께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같은 해 1월 8일 애쉬다운 평원에서 결전을 벌여 여름의 대군세를 격파하고, 군세를 이끌던 얼 바그세크를 죽이는 대승을 거두었다.

여름의 대군세는 얼 바그세크의 전사와 함께 애쉬다운 평원에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분열되어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그들을 격퇴한 웨식스군도 상당히 많은 사상자를 냈기에 피로스의 승리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킹 지원군이 전멸하자 각지에 정착한 바이킹들과 앵글로색슨족 사이엔 당분간 불편한 평화가 이어졌다.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 그리고 동부 머시아 일대에 바이킹들이 정착했는데 이들은 데인(Dane)인, 즉 '덴마크 사람'이라 불렸다. 애쉬다운 전후 3개월 후 웨식스의 왕이었던 애설레드 1세가 승하했다. 애설레드 1세에게 두 아들로 장남인 에설헬름과 차남인 애셀왈드가 있었지만 둘 다 미성년자였기에 같이 전쟁에 종군한 그의 동생인 앨프레드 대왕이 즉위하면서 이교도 대군세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는데, 앨프레드는 시간을 벌기 위한 요량으로 애쉬다운 평원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바이킹들에게 데인겔드를 지불했다.

애쉬다운 평원 전투에서 살아남은 일부 바이킹들은 871년872년 동안 런데위치(현 런던)를 점거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이들은 식량이 떨어졌고, 무엇보다도 노섬브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바이킹의 꼭두각시인 에즈베르흐트 왕과 대주교 울프헤레를 내쫒는 일이 발생하자 바이킹 군대는 머시아군과 웨식스군의 포위망을 뚫고 노섬브리아로 철군, 873년 봄에 반란군을 격파하고 에즈베르흐트와 울프헤레를 복귀시켰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에즈베르흐트가 사망하자 릭시게(Ricsige)를 왕으로 즉위시켰다.

이후 원래 주둔지인 렙톤으로 돌아온 바이킹들은 머시아의 왕 부르그레드를 정치적으로 압박함과 동시에 머시아 국토를 유린했고, 왕의 무능함에 분노한 이들을 지원하면서 부르그레드의 퇴위를 종용했다. 결국 부르그레드가 퇴위해 로마로 떠나고, 머시아 왕위 주장자 중 한명인 체올울프가 머시아 왕이 되었다.

874년, 머시아 렙톤에 주둔하던 데인족 군대는 2개로 나뉘어져 할프단이 이끄는 군대는 북상해 노섬브리아의 색슨족 거주지와 교회 등을 공격해 초토화시킨 후 요크를 중심으로 남쪽 데이라 지방을 점거하고 자신을 '요르비크의 왕'으로 칭했다. 이 일의 여파로 노섬브리아 왕 릭시게가 충격을 받고 급사했고, 새로 노섬브리아 왕으로 즉위한 에즈베르흐트 2세는 아예 공식적으로 틴 강 북쪽의 밤버러 지방에서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처치가 되었다. 이후 할프단은 더 북상하여 헤브리디스 제도의 바이킹 군세와 합류, 북쪽의 픽트족스코틀랜드, 그리고 지금의 컴브리아 지방에 세워진 브리튼인 왕국인 스트라스클라이드 왕국(Kingdom of strathclyde)를 공격해 초토화했다.[77] 875년 동앵글리아의 괴뢰왕인 오스왈드가 죽었는지 바이킹들의 야를들은 에델레드 2세를 새로운 괴뢰왕으로 세웠다.

한편 구트룸과 오스켈트, 그리고 언웬드가 이끄는 두 번째 부대는 남하해 웨식스로 향했다. 이들은 캠브리지에 기지를 건설해 그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인 876년 월햄을 점령하여 무차별적인 약탈을 저질렀다. 앨프레드는 이들과 협상하여 웨식스를 떠나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불안한 평화가 지속되는 와중에 데인족들은 877년 약화된 머시아를 급습해 스스로의 세력을 다시 한 번 과시했다. 그들은 머시아의 마지막 왕 체올울프 2세를 퇴위시키고, 머시아의 동부를 완전히 자신들의 세력권 안으로 병합했다.

또한 기세를 몰아 878년 1월 데인족 군대가 웨식스 북부에 위치한 치픈헴을 기습공격했다. 이곳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기기 위해 877년 12월 앨프레드가 방문한 이래 아직 머물던 참이었는데, 데인족들은 이 지역을 파괴하고 거주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했다. 하지만 다행히 앨프레드는 그 난리통에서 간신히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구트룸이 국경을 이렇게 쉽게 돌파한 이유는 과거 머시아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머시아의 버그레드 왕이 데인족들과 손을 잡은 정적들의 정치적 압박에 못이겨 퇴위한 사례가 있듯이 데인족들의 강력한 군사적 원조는 왕위요구자들에게 달콤한 유혹이었다. 결국 일부 웨식스의 지방장관들이 권력을 얻고자 묵인 및 협조한 탓에 구트룸은 국경지대로부터 관문들을 재빠르고 손쉽게 돌파했고, 순식간에 앨프레드를 기습할 수 있었다.

구트룸은 자신이 지원한 인물들을 웨식스의 주요 인사에 배치시키면서 사실상 웨식스를 괴뢰국으로 삼으려고 했다. 하지만 구트룸이 간과한 사실이 있었는데, 웨식스 왕국의 대다수 지역은 데인족과의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고, 분노한 지역 주민들은 데인족의 지원으로 권력을 장악한 꼭두각시 정부에 충성하기를 거부했다.

한편 앨프레드는 치픈헴의 참사에서 간신히 탈출한 뒤 오지를 전전하며 데인족들에게 반격할 준비를 했다. 주변의 지지자들을 소집하고, 구트룸과 적대하는 파벌을 불러들이며 새로이 군대를 꾸렸다. 인근 지역의 수비군들과 지역 주민들이 협조했고, 소수 정예로 구성된 부대가 데인족들과 반란군들을 무자비하게 섬멸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들어와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은 바이킹들이 무엇보다 애용하는 방식이었고,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반란 세력들은 수도 인근 지역을 제외하곤 통제력을 회복하지 못했다. 앨프레드 대왕은 지방도시들과 마을을 다시 휘하에 복속시킴과 동시에 왕위를 재탈환할 군대를 지방에서 끌어모았다. 그는 바이킹과 꼭두각시 왕, 그리고 반역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진격했고, 에딩턴 평원에서 구트룸의 데인족 군대와 마주쳤다.

에딩턴 전투라고 불리는 이 격렬한 전투에서 앨프레드의 웨식스군은 바이킹의 방패벽을 격파하면서 대군세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어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아들 우바 라그나르손의 군대가 사이누프 전투에서 무너짐으로써 이교도 대군세는 완전히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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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 대군세 종료 시점인 878년 잉글랜드의 형세
노란색 노섬브리아는 바이킹의 괴뢰 정권이다

878년 구트룸과 우바가 패배함으로써 바이킹이 감행한 대대적인 웨식스 침공은 막을 내렸다. 사로잡힌 구드룸은 항복 조건하에 따라, 구스룸은 세례를 받고 군대를 웨식스에서 철수해야만 했다. 구스룸이 항복함에 따라 세례를 받고 웨식스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한 것에 동의한 합의는 웨드모어 조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조약 이후에 앨프레드와 구스룸의 영토 간에 경계와 더불어 평화 무역 협약, 사람들의 몸값인 워길드를 정한 또다른 조약이 채결됐으며, 이 조약은 앨프레드와 구스룸의 협약이라고 알려졌다. 그 밖에도 노섬브리아 남부 정복당했고, 머시아는 동부가 강제로 인정해야 했다. 878년 이후의 시대를 후대 사람들은 바이킹의 잉글랜드 지배, 즉 데인로(Danelaw)라고 부르게 되었다.

웨식스는 약화된 머시아를 완전히 산하의 종속국으로 두어 대외적으로 머시아-웨식스 vs 바이킹(데인족)의 구도가 본격적으로 잡혔으며, 분열된 데인족의 세력들과 하나로 뭉친 웨식스 왕국 사이의 대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웨식스의 우세로 이어졌다. 일례로 892년에 스칸디나비아로부터 또다시 대규모 군세가 켄트에 상륙해 웨식스 본토를 직공했으나, 이번에는 이전과 달리 별탈없이 방어에 성공, 바이킹 군대는 결국 얼마 가지 않아 해산되었고, 앨프레드는 데인족들을 브리튼에서 몰아낼 기회로 잡게 되었다.
2.1.3.1. 데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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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인로의 시작 시점인 878년 잉글랜드의 지도. 노란색 노섬브리아는 바이킹이 세운 괴뢰 정권이며, The Danelow라고 써져 있는 붉은색 영역이 데인족들의 영토를 합친 지역이다.

데인로로 불리는 지역들은 전부 동앵글리아와 머시아의 북동부, 노섬브리아의 남부의 지역들을 데인족 바이킹들이 점령해 지배하는 지역들을 일컫는 말이나 내부적으로 여러개의 크고 작은 왕국이나 지역들로 나눠져 있었다. 왕을 자처한 것은 노섬브리아 남부를 차지해 요크를 중심으로 삼은 요르비크 왕국을 세운 할프단과 동앵글리아의 왕을 자처한 구트룸뿐이었으며, 나머지는 현재의 더비와 레스터, 링컨, 노팅엄과 스탬퍼드를 기반한 자치구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요르비크 왕국에 복속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노샘프턴, 베드포드, 헌팅던, 캐임브리지와 같인 요새화대 큰 마을들도 대규모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며, 동앵글리아에 복속되어 있었다.
구스룸은 동앵글리아로 돌아왔고, 그동안 괴뢰왕으로 내세웠던 애델레드 2세를 퇴위시켰는지 본인이 동앵글리아의 왕이 되었다. 880년대에 바이킹 침략 무리에 대한 기록들이 있었지만 구스룸은 위협이 되는 걸 멈추고 기독교 왕으로서 10년 이상 군림했다. 그는 세례명 애설스탠이 새겨진 주화들을 주조했고, 890년에 사망하였고, 외흐리크가 뒤를 이었다.

외흐리크 통치기의 동앵글리아 왕국에 대해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는 동앵글리아의 군대가 머시아와 웨식스를 습격했고, 서색슨 군대가 보복으로 동앵글리아를 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899년 앨프레드 대왕의 사망 후 웨식스의 왕위를 두고 애설레드 1세의 아들인 애설월드와 앨프레드 대왕의 아들인 대 에드워드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고, 이에 애설월드는 요르비크 왕국으로 망명한 후 바이킹들의 힘을 빌어 웨식스의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고, 이때 요르비크의 왕이 되었다. 애설월드는 동앵글리아의 바이킹들에게도 자신과 함께 동참해달라고 요청했고, 외흐리크를 비롯한 동앵글리아의 바이킹들이 요청을 수락해 공격한 것이었다. 이때 애설월드가 동애글리아의 왕으로 칭해졌는데, 이는 애설월드가 웨식스의 왕위를 빼앗은 후 상당한 잇권을 외흐리크에게 주는 조건이 붙으면서 이에 대한 보답인지 동앵글리아의 공동왕이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에설월드와 외흐리크는 베오르트시게, 베오르노스 이소파, 오시텔 등 반란에 동참한 자들과 함께 군을 이끌고 자신들과 싸우려는 웨식스의 군대와 싸웠으나 패배했고, 웨식스의 군대는 북쪽은 데빌스 다이크와 위시 강까지 황폐시켰지만 에드워드가 철수를 명령하자 켄트-서식스의 사람들은 명령에 따르지 않고 동앵글리아의 바이킹들은 추격해 902년 12월 13일 캠브리지셔의 마을인 홀름에서 도망쳤던 바이킹 군대를 따라잡았고, 이에 홀름에서 재정비한 바이킹들은 홀름 전투에서 켄트-서식스의 군대와 싸워. 바이킹군은 승리했지만 난전이었던 것인지 외흐리크 비롯해 에설월드와 베오르트시게, 베오르노스 이소파, 오시텔는 전사했다.

동앵글리아의 왕위가 비자 구스룸 2세를 새로운 동앵글리아의 왕으로 세웠다. 다른 데인족 세력들과 함께 웨식스의 대 에드워드 왕을 상대로 공방전을 주고 받았지만 전쟁의 결과로 인해 데인족 세력의 전체적인 약화를 불러왔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구스룸 2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동앵글리아가 906년에 에드워드와 평화를 맺었고, 애드워드는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 받아 점령지마다 요새화된 마을인 버(burgh)를 세워 바이킹들의 반격을 대비했다. 실제로 바이킹 세력이 자리잡고 있던 캐임브리지 인근 허트퍼를 버를 세웠다.

913년에 노샘프턴의 바이킹들이 동맹 세력과 함께 새롭게 할양된 머시아의 영토를 침략해 약탈을 한 후 귀환하는 당시 루턴 근교에서 머시아 군대에 패하여 많은 말과 무기를 잃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웨식스의 군대가 베드포드를 위협했고, 11월 베드포드는 웨식스군에 의해 포위되었고, 지배자인 야를 투르케텔는 종자 전원과 함께 항복했고, 12월, 노샘프턴에 거주하던 데인족 바이킹들은 베드퍼드에서 에드워드에 복종했기 때문에 그 세력은 더욱 약해졌습니다. 에드워드는 915년 11월에 덴마크군이 지배하는 요새로 돌아왔고, 이번에는 직접 지배권을 잡고 우즈강의 남쪽 해안에 두 번째 성채를 건설했다. 그 후, 투르케텔은 에드워드의 봉신이 되었지만 916년 여름에 에드워드 허락 하에 프랑스로 이주했다. 917년이 될때까지 잉글랜드 전역의 데인족 세력은 웨식스와 계속적인 전투를 치르며 많은 영토를 잃고, 무너지기 시작했고, 동앵글리아 또한 후반에 에드워드에 복종한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월마 안가 917년 7월, 데인족 동앵글리아는 헌팅엄에서 요새를 구축 중이었던 현재 바이킹 세력과 동맹을 맺고, 템스퍼드로 진격하여 베드포드를 탈환하기 위한 공격을 시작했지만 바이킹 군대는 패배했고, 그들의 통치자 야를 서퍼스와 노샘프턴과 케임브리지의 사람들은 917년에 서색슨족에게 항복했고, 서퍼스는 종속 통치자로 남았고, 918년 웨식스와의 전투에서 구스룸 2세는 자신을 따르는 데인족계 바이킹들과 함께 전사하면서 동앵글리아는 웨식스에 합병되었다.
이교도 대군세 일단락되었지만 머시아의 북동부는 데인족 바이킹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들 지역은 현재의 더비와 레스터, 링컨, 노팅엄과 스탬퍼드로 해당 요새화된 마을(burgh)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들을 데인족들의 야를들이 자치적으로 통치했다. 이들은 요르비크의 왕들에게 충성한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립적으로, 때로는 이웃의 통치자들과 동맹을 맺어 군대를 운영했다.

더비
이 지역은 877년부터 덴마크인이 정착하고 있었지만, 913년에 마시아의 여군주인 애설플래드가 데인족의 영역 깊숙히까지 진군해, 근처의 탐워스에 성채를 건설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위협에 노출되는 것은 아니었다. 917년에 애셀플레드는 최초의 공격을 개시해, 더비의 요새를 목표로 선택했다. 당시 현지 통치자는 아마 노샘프턴과 레스터의 군대와 합류하여 마시아를 공격하기 위해 여러 번 습격했다. 애셀플레드는 약화된 성채를 이용하여 917년 7월에 마을을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이 지역 전체가 영국령 마시아에 병합되었다.

덴마크인은 한때 로마의 요새였던 델벤티오에 자신들의 요새를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6 에이커 (24,000 m2)의 직사각형 요새는 성채에 약 500 하이드 상당의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바이킹은 874년에 근처의 레프턴에 진출했지만, 역병이 창궐하면서 1년 후에 거기를 포기했다.

레스터
레스터는 덴마크의 요새 중에서도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곳 중 하나였다. 현지 통치자는 노샘프턴의 바이킹 군대와 연합하여 913년에 웨식스의 영토인 베드포드셔와 옥스포드셔를 습격하고, 에드워드 대왕을 거꾸로 서서 색슨인의 요새인 하트퍼드를 포위했다. 이것이 계기로 애셀플레드는 914년 레스터 주변의 덴마크 점령지 끝까지 군을 이동시켜 월릭에 성채를 건설했다. 917년 7월, 삼방면으로부터의 공격의 일환으로, 레스터와 노잠프턴, 그리고 아마 더비의 연합군이, 토우 세스터의 머시아의 요새를 포위했다. 그 해 후반에 더비와 노잠프턴을 잃어버린 것으로 고립되었지만, 마시아 군대는 918년 초에 현지를 거칠게 되돌아가고, 그 결과 요새는 애셀플레드 군대에게 평화적으로 항복했다.

941년 요르비크의 올라브 왕에 의해 지배받았지만 잉글랜드 왕 에드먼드 1세는 같은 해 레스터에서 바이킹군을 포위했다. 올라프와 그의 고문인 요크 대주교 울프스탄 1세는 모두 도망쳤고, 평화 협상에서 다섯 개의 자치구가 요크 왕국에서 잉글랜드로 양도된 후 포위는 해제되었다. 이후 레스터는 야를 올름이 930년부터 958년 사이 지배했다는 것이 칙허장을 인증되었다. 이후 올름은 딸을 울라프 왕과 결혼시켜, 동맹을 굳혔다. 이 성벽은 로마 시대의 레스터 성벽(Ratae Corieltauvorum)을 이용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성벽은 약 7,800 피트 (2,400 미터) (약 1,900 하이드)이었다.

링컨
링컨의 성벽은 웨섹스와 요크 사이의 루트를 지키고 고립 된 장소에 있기 때문에 영국과 데인족의 전투의 대부분으로부터 보호되었다. 링컨의 데인족은 한때 앵글로 색슨의 린지 왕국이 있었던 지역에 정착했다. 바이킹은 873년에서 874년에 걸쳐 린지 근처의 토크시 요새에서 월동했다. 링컨은 918년에 마시아와 웨섹스의 경계에 있는 덴마크 영토의 모든 항복 후 항복했다고 생각된다. 한때 로마 군단의 주둔지이었던이 성벽은 아마 41 에이커 (약 1,300 하이드)의 오래된 요새 위에 쌓여 있었다고 추정된다.

노팅엄
868년, 무골 이바르와 하프단 라그날슨이 이끄는 바이킹군이 노팅엄을 처음으로 점령하고, 그 후 월동을 위한 야영지를 지었다. 부그레드와 그의 웨식스의 동맹군은 포위했지만 869년 거의 전투를 하지 않고 평화를 맺고 바이킹 철수를 허용했다. 데인족의 재점령과 정착은 877년에 시작되어 918년 여름 웨식스 왕 에드워드의 공격까지 이어졌다. 에드워드는 920년 토렌트 강 반대편에 두 번째 요새를 건설했고, 이 지역을 데인족의 공격으로부터 더욱 보호를 굳혔다. 색슨적의 노팅엄은 약 39에이커의 넓이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요새의 넓이는 약 1300 하이드였을 가능성이 있다.

스탠포드
894년 여름 웨식스의 엘더만 아에테르노스가 스탠포드 주변 지역을 침략했지만 마을은 포위되지 않았고 데인족의 지배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918년 5월 후반에 에드워드 왕이 스탠포드를 공격했고, 요새는 곧 웨섹스 군대의 손에 빠져 종말을 맞이했다. 그 해 후반, 에드워드는 웰랜드 강 남쪽에 두 번째 요새를 건설했다. 로프에서 보면, 북쪽의 요새의 성벽은 약 3,100 피트(약 750 하이드), 에드워드 통치기의 요새는 약 2,700 피트(약 650 하이드)였다고 추정된다.
876년 현재의 요크를 뻬앗은 후 요르비크 왕국을 세우기 전 더블린의 왕위까지 갖고 있었다. 할프단의 더블린 통치는 안정되지 못했고, 그가 요크에 가 있는 동안에 왕위에서 내쫓겼다.[3] 그는 877년에 더블린을 탈환하러 아일랜드로 돌아왔으나, "금발의 이교도" (할프단이 속해있던, 새롭게 도착한 바이킹들인 "흑발의 이교도"와 반대되는, 아일랜드에 장기간 있었던 바이킹들을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여겨지는 논란의 용어) 군대와 마주치게 된다. 양 측의 병력들은 스트랭퍼드호 전투에서 충돌하였고, 이 전투에서 할프단은 전사하고 만다.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할프단 병력들은 스코틀랜드를 거쳐 노섬브리아로 돌아왔고, 이 과정에서 픽트족의 왕 컨스턴타인 1세가 살해당한 전투를 벌였다. 노섬브리아의 바이킹들은 구드뢰드가 왕위에 오른 883년까지 왕이 없이 지냈다.

구드뢰드는 요크 최초의 기독교 바이킹 왕이었다. 그의 즉위에 대해 더럼의 시메온이 쓴 '왕들의 역사'에서는 단순히 "노예에서 태어난 구스레드가 왕이 되었다"고 언급하지만, 그의 '더럼 교회 역사'에서는 더 긴 설명을 합니다. 여기서 그는 할프단이 쫓겨난 후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이킹 군대와 살아남은 주민들은 왕이 없어서 불안했다. 그러자 축복받은 커스버트가 칼라일 수도원장인 에드레드의 환상 속에 나타나서 다음과 같은 말로 그에게 말했다:—"데인족 군대로 가라." 그가 말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신이 내 사자로 왔다고 알려라. 그리고 당신이 하르다크누트의 아들인 구드뢰드라는 소년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물어봐라. 그들은 그를 과부에게 팔았다. 그를 찾아서 과부에게 그의 자유의 값을 지불한 후에, 그를 앞서 말한 군대 전체 앞에 데려오고, 그리고 내 뜻과 기쁨은 그가 오스위스둔(즉, 오스윈의 언덕)에서 왕으로 선출되고 임명되고 팔찌가 그의 오른팔에 끼우기를 바란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구드뢰드의 선출은 린디스판 출신의 울프헬레 대주교가 관여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북부 브리튼의 교회와 종교의 중심지는 바이킹의 도래 이후 조직적으로 부를 빼앗겨 왔지만, 가난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요크에서 발굴된 7세기부터 11세기의 다양한 시기 교회의 유물의 양은 대성당이 종교의 중심지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스뢰드는 895년에 죽었고 요크 대성당에 매장되었습니다.

노샘브리아의 시그프뢰드가 구드뢰드를 대신해 요르비크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통치기에 발행된 화폐를 통해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9세기에 리브르 계곡에서 발견된 현재 쿠아데일 보물로 알려진 대량의 유물에는 약 8,000장의 앵글로- 스칸디나비아 동전, 대륙 동전, 쿠피체 동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발견된 동전 중에는 시그프뢰드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그가 통치하고 있던 시기를 알 수 있었다. 동전의 증거로부터, 시그프뢰드는 구스뢰드의 뒤를 이어 895년부터 900년경까지 통치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세 연령 작가 에젤 웨어드의 지적에 따라, 일부 역사가들은 시그프뢰드가 이전에 웨섹스 해안을 습격했던 시그펠트와 같은 인물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해적 시그펠트가 대함대를 이끌고 노섬브리아인의 땅에서 와서 두 번 약탈되어 그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 에젤웨어드 1962년, p. 50 A. 895

역사가 알프레드 P. 스미스가 제창한 또 다른 가설은 시그프뢰드가 같은 해에 더블린 왕국을 주장한 야를 시그펠트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이다.

큐어데일 보물에는 크누트 또는 쿠누토르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도 포함되어 있으며 동전의 증거에서 그가 900년에서 905년 사이에 통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요크의 통치자로 기재되어 있지만, 동시대의 문헌에 크누트가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역사가에게는 난문이 되고 있다. 역사가들은 몇 가지 가설을 세웠다. 그 중에는 "구드뢰드의 통치 중에 동전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것일 수 있습니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동전 중에는 시그프뢰드와 크누트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던 것도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동일 인물일까」라고 하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그가 "노르웨이 문헌에 기록 된 덴마크의 귀족으로 매우 짧은 통치 후 902년에 암살되었다. 통치 기간이 짧기 때문에 대량의 화폐를 제조 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899년 앨프레드 대왕이 죽고 아들인 대 에드워드가 왕위를 승계했는데, 이때 앨프레드의 형인 애설레드 1세의 아들인 애월드는 자신이 정당한 왕위 계승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로 인해 숙부에게 왕위를 양보해야 했던 것도 모자라 이제는 사촌에게까지 빼앗기 상태가 되자 자신이 웨식스의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 주장하며 내전을 일으켰지만 에드워드에 의해 웨식스 내에서의 반란을 진압되었고, 애설월드는 데인족들이 지배하고 있는 요르비크로 망명했고, 이때 어떠한 잇권에 대한 보장이 오갔는지 모르지만 그곳의 데인족에 의해 요르비크의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하는데,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 그는 한밤중에 몰래 도망쳐 노섬브리아의 데인족들에게로 갔다. 그들은 그를 왕으로 맞이하고 그에게 복종했다.

프랑스어 위키피디아 백과에선 크누트가 이때까지 살아 있었고, 에설월드에 의해 추방되었다고 한다.[78] 에설월드는 요크에 오래 머물지 않았고 903년에 웨식스의 왕위를 되찾기 위한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에설월드가 함대를 편성하고 우선 에식스에 상륙하고, 그 후 동앵글리아로 향해, 거기서 외흐리크 왕에게 원정에 대한 협력을 설득한 것이 기록되어 있고, 이에 외흐리크 또한 웨식스를 정복한 후의 잇권에 대한 보상인지 애설월드를 자신과 함께 동앵글리아의 공동왕임을 선포한 후 연합군을 형성했다. 연합군은 머시아를 습격하고, 웨식스의 크리클레이드 지역을 습격했다. 그 후 그는 템스 강을 건너 웨섹스에 들어가 블레이던을 습격했다. 에드워드는 보복으로 덴마크령 동앵글리아를 공격었지만 에설월드와 싸우지 않고 철수했다.

하지만 켄트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그의 명령을 듣지 않고, 동앵글리아 깊숙히 진군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켄트인 부대를 다시 불려들이기 위해 7명의 사자를 보냈다. 그러나 데인족들은 켄트의 사람들을 따라잡고 홀름에서 싸웠다. 그 장소는 불분명하지만, 케임브리지셔의 홀름일 가능성이 있다. 데인은 승리했지만 큰 손실을 입었다. 에설월드는 동앵그리아의 바이킹 왕 외흐리크, 두명의 데인족 귀족인 이소파와 오스케텔, 그리고 아마도 머시아의 전왕 부그레드의 친족이었던 베오르노스의 아들인 베오르지게와 함께 전사했다. 켄트 측의 손실에는 두 명의 엘더만인 시게울프와 시게헬름, 수도원장인 켄울프가 포함되었다.

애설월드가 죽자 요르비크 왕국의 바이킹들은 새로운 왕으로 하르다크누트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이후 902/903년에 에오월스와 할프단 2세, 그리고 에설월드의 연대기 한정으로 잉웨가 요르비크의 공동왕으로 즉위했다. 데인족 통치자들은 요르비크를 8년 동안 통치했다. 요크에서 바이킹들이 증가했는데, 이는 902년 에린의 게일인들에 의해 바이킹 노르드인들이 더블린에서 추방되면서 난민들이 인근에 위치한 같은 데인족 왕국으로 그보다 더 큰 요르비크로 이주한 까닭이었다. 이들 난민 중 훗날 요르비크의 왕이 될 라그날 1세와 그의 친족인 시그트뤼그도 있었다. 906년의 협상과 조약에도 불구하고 바이킹은 더블린 해안에서 괴롭힘과 습격을 벌이는 원정을 시작했다.

909년 에드워드 왕은 노섬브리아를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고, 이듬해 노섬브리아의 바이킹들은 에오월스와 할프단 2세의 지휘하에 웨식스와 머시아를 가로질러 약탈했다. 그러나 약탈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군대는 테텐홀 근처에서 웨식스와 머시아 군대에게 가로막혀 큰 패배를 당했는데, 이때 앵글로 섹슨 연대기에 따르면 에오월스와 할프단 2세 그리고 애설월드의 증언에 따르면 잉웨 또한 같이 전사했다.

이후 요르비크의 왕위는 8년간 공석이었다. 그러다가 918년 요르비크의 다음 통치자는 라그날 1세이며, 이마르의 손자이자 902년에 더블린에서 추방된 바이킹 중 한 명이었다. 라그날은 918년 코르브리지 전투에서 알바 왕인 카우산틴 2세와 싸웠다. 북부 영국의 역사 소책자 '성 쿠베르트의 역사'(11세기에 완성되었지만 아마도 이전의 자료도 참고로 했다)에 따르면, 카우산틴은 노섬브리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배하고 있던 에드울프의 아들 엘드레드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연대기부터 실제로 싸움을 이긴 것은 누군가는 분명하지 않지만,이 싸움의 결과로, 라그날은 요크에서 왕으로서의 지위를 확립 할 수있었다. 그러나 요르비크 사람들이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이 것과 별개로 그의 종교는 노르만 이교였기에 요르비크인들은 라그날에 불만스러웠던 것 같았고, 918년 초에 머시아인의 여군주인 에셀프레드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해 6월에 그녀가 사망했기 때문에 협상은 무산되었다.

라그날은 요크를 통치하고 있는 동안에 3회로 나누어 화폐를 발행하고 있어, 노섬브리아의 정부 기구가 계속 작동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조폐국의 일상 업무와 세금의 징수는 라그날이 주도한 것이 아인 요크 대주교인 흐로테와르트였을 가능성이 있다. 라그날은 통치 후반인 920년에 에드워드에 복종했지만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920년 후반 또는 921년 초에 사망했다.

다음 통치자는 라그날의 친족으로, 902년에 더블린 왕국에서 추방된 또 다른 바이킹의 지도자인 시그트뤼그였다. 그러나 시그트뤼그는 더블린을 탈환하여 왕이 되기 위해 아일랜드로 돌아갔다. 그 후, 920년에 요크로 여행하고 라그날에 합류했고, 921년에 라그날이 죽고, 시그트뤼그를 왕이 되었다.

시그트뤼그는 라그널과 에드워드 사이에서 합의된 제출 조건을 위반하여 체셔와 대번포트를 습격했다. 에드워드는 924년에 사망했습니다. 시그트뤼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왕국을 확대한 것으로 이를 뒷받침하는 발굴된 그의 통치기의 화폐가 증거가 되었으며, 이 시대의 동전이 머시아 왕국의 링컨에서 요르비크의 양식으로 주조되고 있었다.

어째든 에드워드의 사망 후 그의 아들인 애설스탠이 뒤를 이었고, 연대기에는 시그트뤼그가 에드워드에 복종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기록되었지만, 926년 1월 탐워스에서 애설스탠에게 복종했다. 합의로 시그트뤼그는 애설스탠의 여동생 에드기스와 결혼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포함했다.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시그트뤼그는 세례를 받았지만 곧 다시 이교 신앙으로 회귀하고 에드기스와의 결혼도 거부했고, 얼마 안가 죽었다.

시그트뤼그가 죽자 더블린의 왕이었던 그의 친족인 구드뢰드는 요르비크로 가서 왕이 되었고 더블린은 아들들에게 나누어 맡겼다. 그러자 시그트뤼그의 아들들이 화가 났고, 그들은 "헬기의 아들들(아마 리머릭의 토리르 헬가손을 가리키는 듯)"과 연합하여 더블린을 공격했다. 이때를 시작으로 더블린과 리머릭의 바이킹들의 분쟁은 937년까지 10년간 지속되었다.

934년 올라프 구드뢰다르손이 아버지 구드뢰드의 뒤를 이어 더블린의 노르드 왕이 되었다. 노르드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은 올라프가 카우산틴의 딸과 결혼하면서 굳건해졌다. 937년 8월까지 올라프는 아일랜드의 바이킹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물리쳤고, 그는 즉시 이전 노르드 왕국인 요크를 차지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올라프와 카우산틴은 개별적으로는 애설스탠에 대항하기에는 너무 약했지만, 함께라면 웨식스의 지배에 도전할 수 있었고, 둘 다 공통점으로 애설스탠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것들이 한 몫했다. 가을에 그들은 오웨인이 이끄는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오웨인과 연합하여 잉글랜드을 침략했다. 중세의 원정은 보통 여름에 진행되었고, 애설스탠은 그렇게 늦은 해에 그렇게 대규모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반응이 느렸던 듯하며, 맬즈버리의 윌리엄이 보존한 오래된 라틴어 시는 그가 "느긋한 여가에 시달렸다"고 비난했다. 동맹군은 애설스탠이 웨식스와 머시아 군대를 모으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잉글랜드 북서쪽을 털어먹었다. 그러나 마이클 우드는 1066년의 하랄드와 달리 그는 성급한 행동을 자제해 패배할 수 있을 위험성을 피했다 주장하며 그의 신중함을 칭찬했다. 그가 북쪽으로 진군했을 때 웨일즈인들은 그에게 합류하지 않았고 어느 쪽에서도 싸우지 않았다.

937년 두 군대는 잉글랜드 북부로 추정되는 브루난버에서 대치했고, 에델스탠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의 젊은 이복동생이자 미래의 에드먼드 왕의 지원을 받았다. 올라프는 군대의 잔당과 함께 더블린으로 도망쳤고, 카우산틴은 아들을 잃었다. 잉글랜드군도 큰 손실을 입었는데, 그 중에는 에드워드의 남동생인 에설웨어드의 아들이자 에델스탠의 사촌 두 명이 포함되었다.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은 얼스터 연대기 에 다음과 같이 보고되어 있다 .
색슨족과 노르스인 사이에서 잔혹하게 벌어진 크고 비참하고 끔찍한 전투가 있었는데, 셀 수 없이 많은 노르스인들이 쓰러졌지만 그들의 왕 올라프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했다. 반대편에서는 많은 색슨족이 쓰러졌지만 색슨족의 왕 애설스탠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애설스탠 또한 자신의 두 사촌들이 전사하는 등 큰 피해를 봤고, 구드뢰드의 요르비크 지배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6개월만에 앵글로색슨인 군주 애설스탠에게 축출당했다.

이후 애설스탠은 노섬브리아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모든 앵글로 색슨 왕국을 하나의 통일 잉글랜드에 통합하여 바이킹과 그 동맹국으로부터의 위협를 억제했지만, 939년에 그가 죽자 바이킹의 리더로 애설스탠에게 축출되었던 구드뢰드의 아들인 울라프 구드뢰다르손이 더블린에서 도착했으며 최소한의 저항으로 노섬브리아를 점령했다. 그의 통치 중에 요크에서 주조된 화폐는 라틴어나 앵글로색슨어가 아닌 노르드어가 명각되어 있다. 새 문양은 아마 오딘과 관계된 새 큰까마귀를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940년, 그의 사촌인 올라프 쿠알란이 요크에서 그에 합류했다. 941년 올라프 구드뢰다르손은 머시아와 동앵글리아를 침략했다. 요크와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중재했고, 애설스탠의 후계자인 에드먼드 1세는 남동 미드랜드와 링컨셔의 대부분을 내줘야 했다.

올라프 구드뢰다르손은 942년에 사망했고, 올라프 쿠알란이 후임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943년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울라프 쿠알란이 에드먼드의 후견인으로 세례를 받았고, 같은 해 노섬브리아의 또 다른 왕이 라그날 가스 프리슨이라고 명명되었고, 에드먼드의 후견인으로서 확신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다. 울라프와 라그날은 둘 다 왕이라고 불리지만, 그들이 공동 통치자였는지 아니면 적대적인 왕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그들을 친족으로 보고 있다.

울라프와 라그날은 944년까지 요크를 통치했다. 애설스탠의 죽음부터 울라프와 라그날의 추방까지의 기간 사건의 연대는 앵글로 색슨 연대기의 다양한 버전이 모순되어 있기 때문에 불분명하다. 애설스탠이 죽은 후, 에드먼드는 노섬브리아의 지배권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머시아 데인로의 5개 도시도 울라프에게 충성을 맹세한 것 같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울라프가 탐워스를 습격했다.

여기서 올라프는 탐워스를 함락시켜 쌍방에 대학살이 일어나 데인족이 승리해 많은 전리품을 꺼냈다. 이 습격으로 울프란은 잡혔다. 여기서 에드먼드 왕은 레스터에 있는 올라프 왕과 울프스탄 대주교를 포위했지만 그들이 한밤중에 요새에서 도망쳤다.

이러한 사건이 940년부터 943년 사이에 언제 일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고, 그 결과 역사가들은 울라프 맥 고프리스에 관한 것인지 울라프 쿠알란의 것인지에 의견이 나뉘어지고 있다.

에드먼드는 942년에 다섯 마을을 재정복했고, 이 사건은 앵글로 색슨 연대기로 시에 시전되고 있다. 연대기는 울라프의 세례와 에드먼드 왕이 그의 대부가 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이것은 울라프가 이미 기독교인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할 필요는 없고, 그러한 세례는 종종 정치적 행위였기 때문에 그가 영원히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았다. 예를 들어, 앨프레드 대왕은 웨일즈 기독교인 왕 아나라우드 압 로드리의 견신례를 후원했다. 울라프는 944년에 요크의 왕위에서 추방되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는 "에드먼드 왕은 노섬브리아 전역을 정복하고 두 명의 왕 (또는 "왕족 태생의 남성"), 올라프와 라그날을 놓쳤다"고 적혀있다. 울라프와 라그날에게 갈등이 있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그들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에설월드의 역사서에는 울라프가 요크 대주교 울프스탄과 무명의 머시아인 엘더만이 이끄는 공격을 받고 폐위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째든 노섬브리아는 다시 잉글랜드에 속하게 되었다. 945년에 에드먼드는 캄브리아에 침공하여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 돔날 맥에오게인의 아들 2명을 맹인으로 만들었다. 그 후,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동맹과 교환하여 어스트라드클리드의 모든 것을 스코틀랜드 왕 말 콜룸 1세에게 "주었다"고 한다.
그해 에드먼드 왕은 컴벌랜드 전역을 파괴하고 이 땅을 스코틀랜드의 왕인 말 콜룸에게 주었다. 단, 그 조건은 그가 육지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왕과 동역자가 된다는 것이었다.
— 자일즈 1914, A. 945

946년, 에드먼드는 팩클처치에서 암살되었다. 에드먼드의 뒤를 이은 것은 이드리드로 그의 즉위 당시 노섬브리아 내에서 잉글랜드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낮아진 상태였고, 이드리드는 곧 노섬브리아에 내의 충성심이 떨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거기서 그는 "노섬브리아 전역을 지배하에 놓고", 스코틀랜드인으로부터 복종의 맹세를 얻었다.

947년에 이드리드는 앵글로 스칸디나비아의 마을 탄셰르프에 가서 울판 대주교와 노섬브리아의 위탄이 그에게 복종했다. 하지만 복종의 맹세는 오래 가지 않았다. 연대기에는 947년에 노섬브리아 인들이 곧 서약과 맹세를 깨뜨렸다고 밝혔고, 이윽고 노르웨이 왕위에서 폐위되어 추방된 에릭 블러드액스를 왕으로 모셨다다”고 하고 있다. 그 해에 이드리드 왕은 북부의 이반자를 엄격히 처벌하기 위해 노섬브리아에 파괴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 습격에는 성 윌프리드에 의해 설립된 리폰의 대성당의 불타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드리드의 군대는 남쪽으로 돌아가는 도중 Tanshelf 근처의 캐슬 포드 (Ceaster forda)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이에 이드리드는 노섬브리아인들에게 에릭를 폐위시켜 추방시키지 않는다면 노섬브리아와 잉글랜드 사이에 평화가 없을 것이라는 협박을 했고, 노섬브리아인들은 이드리드의 협박에 따라 948년 에릭를 폐위와 함께 추방시키고, 배상금을 지불했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그 직후인 948년 또는 949년에 카우산틴 1세의 선동으로 스코틀랜드와 캄브리아의 말 콜룸1세기 노섬브리아를 남쪽의 티스 강까지 습격하고 많은 가축과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인해 요르비크는 혼란에 빠졌다.

949년 울라프가 더블린을 통치했을 때, 노섬브리아인들은 요크를 통치하도록 울라프를 초대했다. 울라프가 잉글랜드로 돌아온 것은 아마 이드리드의 동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해 알바 왕의 말 콜룸 1세가 남쪽의 티즈강까지 노샘브리아를 습격하여 많은 노예와 많은 약탈품을 빼앗았다. 이 침략이 울라프를 향한 것이었는지, 혹은 울라프가 지배하지 않았던 노섬브리아 북부만을 약탈해 울라프를 지원할 의도였는지는 불분명하다. 952년에 북쪽에서 두번째 침공이 있었지만, 이때는 말 콜룸의 스코틀랜드인, 브리튼인, 색슨인을 포함한 동맹군이 패했다. 이후 952년 울라프는 에릭에 의해 폐위되어 더블린으로 추방되었다.

다시 요르비크의 왕위를 차지한 에릭은 954년, 다시 노섬브리아인들에 의해 추방되어 아마 더블린이나 아일즈로 향하는 도중, 스테인모어로 살해되었다.

영국의 자료에 따르면, 에릭은 올라브의 아들 맥커스 백작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이것은 올라프 시트릭슨 일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맥커스는 바이킹의 지도자들 사이를 갈등시키는 정평있는 전술을 사용했을지도 모른 이드리드를 위해 부분적으로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웬도버의 로저는 에릭이 밤버러의 오스울프 1세에게 배신당한 후 살해되었다고 썼다. 스칸디나비아의 자료에 따르면, 에릭은 적에 대해 수로 열세의 군대를 이끌고 사망했지만, 5명의 헤브리디스 제도[79]의 왕과 2명의 오크니 백작이 동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째든 그의 죽음을 끝으로 요르비크 왕국으로 불린 노섬브리아 남부는 물론이고, 노섬브리아 북부인 밤버러 일대가 이드리드에게 복속하면서 이드리는 앵글로 섹슨 왕국들을 완전히 통합하는데 성공하였고, 일단은 데인로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후 이드리드는 오스울프에게 그의 통치 영역인 밤버러 일대는 물론이고, 남노섬브리아 전역의 통치권을 넘겨주었고, 963년 동안 엘더만으로서 구 노섬브리아를 통치하다가 죽었다. 그의 사후 티스 강을 기점으로 다시 남북으로 분할되어 북쪽은 이드울프 2세, 남쪽은 오슬릭이 엘더만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오슬릭은 에드거 1세의 궁정에 어느 정도 체류하면서 신뢰받는 지위를 누렸다. 12세기에 작성된 연대기인 색슨족의 초심(De primo Saxonum adventu)에는 오슬릭이 밤버러의 이드울프 2세와 더럼 주교[80]인 Ælfsige와 함께 스코틀랜드 왕 키나드 2세를 웨식스에 있는 에드거에게로 인도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엘더만 오슬릭과 이드울프가 성 커스버트의 주교였던 Ælfsige는 키나드를 에드거 왕에게 인도했다. 그리고 키나드가 에드거에게 경의를 표했을 때, 에드거 왕은 그에게 Lothian을 주었고, 큰 명예를 안고 그를 자신의 땅으로 돌려보냈다.

이 일은 968년과 975년 사이, 즉 Ælfsige가 주교가 되고 에드거가 죽는 사이에 일어났을 것입니다. Richard Fletcher는 이를 97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975년, 에드가 왕이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슬릭은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그의 추방 기록에는 그 이유가 나와 있지 않는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다른 사본에는 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용감한 오슬라크는 흔들리는 파도, 바다제비의 목욕, 물의 격동, 고래의 고향을 넘어 나라에서 쫓겨났다. 그는 지혜롭고 말이 잘 통하는 백발의 남자였지만 자신의 땅을 잃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에드거 1세가 사망하고 뒤이어 즉위한 순교왕 에드워드의 즉위에 대해 오슬릭이 반대를 했기에 추장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요크의 새로운 엘더만으로 토레드가 임명되었다. 토레드는 잉글랜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애설레드 2세의 아내가 그의 딸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992/4년 토레드는 햄프셔의 엘더만 엘프릭, 런던 또는 로체스터의 주교인 에펠스탄, 그리고 도체스터 주교인 에펠스윅과 함께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과 싸우다가 전사했고, 후임 엘더만으로 머시아의 출신의 엘프헬름이 선임되었다.
2.1.3.2. 웨식스를 제외한 머시아, 노섬브리아(밤버러 일대)(데인로 이후) 일대
878년 에딩턴 전투에서 웨식스 왕국이 이기면서 이교도 대군세앵글로색슨데인족 바이킹들 간의 화약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머시아의 영토는 그대로 반토박이 나 북동부의 영토는 데인족의 차지가 되었다. 이에 체올울프는 잃어버린 국력을 회복하기 위해 웨일스로 눈을 돌려 귀네드 왕국과 전쟁을 했으나 로드리 마우르 압 메르번에게 패해 죽었다. 그의 죽음 이후 머시아에서 주조된 화폐들은 모두 머시아 왕의 이름이 아닌 웨식스의 앨프레드의 이름으로 주조되기 시작했다.

이후 비어버린 왕위를 두고 내전이 발생했다. 내전은 2년간 이어지다가 애설레드가 승자가 되었지만 불행히도 애설레드는 머시아의 왕을 자처하지 못했다. 이교도 대군세 이전부터 웨식스의 국력이 머시아를 압도한지 오래였고, 그나마 영토마저 반토막이 난 상태에서 더 이상 웨식스를 상대로 동등한 위치에 있을 수 없었기에 애설레드는 머시아가 더 이상 독립 왕국이 아니라 웨식스의 종속국으로 전락한 것을 인정해야 했는 그 계기는 귀네드 왕국과의 콘위 전투였다.

즉위 직후 애설레드가 한 일은 웨일스 북부의 귀네드 왕국을 다시 침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콘위 강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머시아는 또다시 패배했다. 이론 인해 머시아는 북부 웨일스의 지배권의 주장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에설레드는 웨일스 남동부의 글러위싱 왕국과 그웬트 왕국에 대한 권력 행사를 계속 시도했다. 앨프레드 대왕의 전기 작가이자 측근인 어서에 따르면, 이들 왕국은 "에설레드 왕과 머시아인의 군사력과 압정에 시달리고 있다."고 고한 후 앨프레드 대왕에게 지배권을 인정할테니 애설레드 압력을 막아줄 것을 요구했다. 결국 에설레드도 웨식스의 지배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앨프레드 대왕의 딸인 애설플래드와 혼인하게 되었다.

에설레드가 883년에 버클리 수도원에 땅을 주었을 때, 그는 앨프레드 대왕의 승인을 얻어 그것을 하고 앨프레드의 영주권을 인정했다. 그 후 그는 보통 앨프레드의 허가를 받아 행동했지만, 884년에 버킹엄셔의 리즈버러에서 열린 회의처럼 앨프레드를 언급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칙허장을 발행한 적도 있고, 잉글랜드의 머시아가 런던을 향해 남동쪽으로 꽤 멀리 뻗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878년 에딩턴 전투 이후, 앨프레드는 웨식스에 버(burgh)라고 불리는 요새화된 정착지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바이킹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백성과 영토를 보호했고, 에설레드가 앨프레드의 영주권을 수락했을 때 버는 머시아까지 확장되었다. 버흐 중 하나가 우스터였는데 , 에설레드는 그곳에서 주교와 협력하여 아직까지 잔존한 로마 성벽을 도시의 방벽으로 사용했다. 그 후 두 세대에 걸쳐 우스터는 교회 정착지에서 다양한 장인 인구가 있는 도시로 변모했다.

런던은 바이킹의 공격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여러 차례 바이킹 군대에 점령당했습니다.886년에 앨프레드는 런던을 점령했고, 아서에 따르면 그는 도시를 "복원"하고 "다시 사람이 살 수 있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그는 에셀레드에게 통치권을 넘겼습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상황에 대해 의견이 다릅니다. 프랭크 스텐튼 에 따르면, 앨프레드는 바이킹에게서 무력으로 런던을 탈환하여 에셀레드에게 넘겼습니다. 그 이유는 런던이 이전에 머시아의 도시였고 다른 왕국의 전통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오스 코스탐베이스도 비슷한 견해를 취하며, 앨프레드의 결정은 아마도 바이킹 영토 밖에 있는 영국인들 사이의 단결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알프레드 스미스는 연대기의 설명이 앨프레드에게 유리한 편향을 반영하고 있으며,에설레드가 웨식스 연대기 작가가 인정하고자 했던 것보다 런던의 회복에 더 큰 역할을 했기 때문에 책임을 맡았다고 제안하고 있다. 연대기의 일부 버전에서는 앨프레드가 883년에 런던을 포위했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시몬 캐인스는 앨프레드가 아마도 그 당시 런던을 점령했고 886년의 "점령"은 885년에 도시 근처에서 바이킹이 공격한 후 런던의 방어가 회복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랜덴윅이라고 불리는 앵글로 색슨의 런던은 로마의 런디늄 서쪽 1마일에 위치했지만, 랜덴윅은 방어되지 않았으며 회복은 고대 로마 도시의 성벽 내부, 특히 현재는 퀸하이즈 라고 불리는 템즈강에 가까운 지역에서 행해졌지만, 당시는 머시아의 지배자를 따서 에설레드 하이즈라고 불렸다. 에설레드는 곧 이 지역의 부흥에 착수해, 889년에 앨프레드와 함께 우스터 주교에게 그 땅을 양도하고, 899년에는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다른 토지를 양도했다. 두 주교는 에설레드와 마찬가지로 머시아인이었고, 강둑 시장에서 모든 통행료를 받을 권리를 가진 앨프레드 왕의 강력한 동맹자였다.

런던이 복구된 후, 앨프레드는 "데인족에게 복종하지 않은 모든 잉글랜드인"의 항복을 받았고 웨식스와 머시아의 동맹은 앨프레드의 가장 나이 많은 딸인 에설프레드와 에설레드의 결혼으로 공고해졌다. 그녀는 887년 헌장에서 처음으로 에셀레드의 아내로 기록되었지만, 결혼은 아마도 880년대 초반에서 중반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에셀레드는 아마도 그의 아내보다 훨씬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들에게는 앨프윈이라는 딸이 있었고, 12세기 연대기 작가인 맬즈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그녀는 에설레드 부부의 유일한 자식이었다. 880년대에 작성된 앨프레드 왕의 유언장에서 에셀레드는 100개의 맨커스 가치가 있는 검을 물려받았다.

892년에 두 개의 바이킹 군대가 영국 동부를 공격했고, 에설레드는 방어에 참여했다. 바이킹 지도자 중 한 명인 하슈타인이 패배한 후, 앨프레드는 하슈타인의 두 아들 중 한 명의 대부가 되었고 에설레드는 다른 아들의 대부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군은 하슈타인의 아내와 아이들을 사로잡았지만, 아들들이 영국 지도자들의 대자였기 때문에 그에게 돌려보냈다. 893년에 에설레드는 런던에서 군대를 데려와 앨프레드의 아들 에드워드와 함께 버킹엄셔의 손니에서 바이킹 군대에 맞서 싸웠지만, 바이킹들은 직접 공격하기에는 너무 강했기 때문에 영국 영토를 떠나도록 허락했다. 그해 말에 더 큰 바이킹 군대가 에식스에서 머시아를 거쳐 웨일스 국경까지 진군했고, 에설레드는 머시아인과 서색슨인의 합동 군대와 함께 뒤따랐다. 웨일즈 왕들은 버팅턴 전투에서 바이킹을 만나기 위해 에설레드와 합류했습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이 침략자들은... 전쟁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투에서 완전히 패배했습니다."하지만 마리오스 코스탐베이스는 바이킹들이 결국 길을 뚫고 에식스로 후퇴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바이킹 군대는 마침내 896년에 분산되었다. 대부분의 시간동안 앨프레드는 데번셔를 방어하며 서부 지방에 있었고 리처드 에이블스는 "앨프레드 왕은 893~896년에 영국이 누린 대승과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와 그의 영지장, 특히 그의 사위 에델레드가 영광을 차지했다."라고 말을 남겼다.

9세기 말, 에설레드 왕의 통치하의 머시아는 세 명의 엘더만이 각각 나눠서 통치했다. 에설프레드의 외삼촌인 에설울프는 머시아 서부와 중앙부를 지배했고, 남부와 동부는 동앵글리아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엘더만이 되는 에설스탄의 아버지인 에설프리드가 통치했다. 알헬름은 북쪽 데인로에 접하는 토지의 책임자였다. 에설울프와 알헬름은 9세기 이후에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에설레드 왕의 건강이 나빠진 후 곧 에설프리드는 에설레드 왕의 수석 부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에설프리드는 웨식스 출신으로 앨프레드 왕에 의해 머시아 남동부의 권익을 관리하도록 임명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칙허장에서 에설레드와 에설프레드가 종교 공동체를 지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883년, 에설레드는 버클리 수도원을 왕의 헌물 지급(feorm)의 의무로부터 해방하고, 887년에는 토지의 소유를 확인하고(에설레드도 증명했다), 옥스포드셔의 피어턴 대성당으로 인력을 이전시켰다. 901년, 그들은 공동으로 매치웬록 수도원에 땅을 주었고, 전 수도원장의 성 밀드버러에 경의를 표하며, 만카스 30개분의 금 성배를 기증했다. 903년, 그들은 우스터 주교들이 840년대부터 되찾으려고 했던 전 수도원의 땅을 둘러싼 화해 협상을 했고, 워퍼스 주교는 “에설레드가 머시아의 영주가 될 때까지 우리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했다”라고 적었다.

역사가 중에는 899년부터 909년까지의 10년간의 언제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에설레드의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에설프레드가 머시아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시릴 하트와 매기 베일리는 애설레드가 병석에 눕게 된 일이 902년 부터라고 생각한다. 베일리는 902년 '머시아의 기록'의 설명을 인용해 에설레드가 단독으로 혹은 에드워드와 협력하여 군사 행동을 취한 것을 나타내고 있다. 아일랜드의 연대기 '3개의 단편'도 에설레드가 903년에 에드워드왕, 에설레드, 엘프윈과의 회합에 참석한 것은 인정하고 있지만, 902년경부터 에설레드는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고 제안하고 있다. 1998년, 케인즈는 에설레드가 만년에 병으로 무력해졌을 가능성을 시사했지만, 2014년에 에설레드와 에설프레드는 에드워드 왕과 협력하여 바이킹과의 싸움에 임했다고 말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마틴 라이언도 에설레드의 건강 상태의 악화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에설레드는 에드워드 왕과 함께 바이킹 영토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고 언급했다.

말메스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에드워드 왕의 장남으로 나중에 에설스탠 왕은 에드워드가 900년경에 재혼한 후 에설레드와 에설프레드의 궁정에서 자랐다. 이것은 1개의 독립적인 기록에 의해 역행된다. 요크 공문서관의 1304년 ​​사본에 따르면, 925년에 애설스탠은 "이전 머시아의 영주 에설레드와 맺은 부권의 계약에 따라"글로스터의 세인트 오스왈드 수도원에 특권을 주었다. 에드워드 왕이 924년에 사망했을 때, 에설스탠은 원래 웨식스의 궁정에서 반대에 직면했지만, 머시아의 왕으로 받아들여졌다.

911년에 에설레드가 사망한 후, 에설프레드는 '머시아인의 귀부인'으로 통치했지만, 남자 령제인 에드워드가 가져간 런던과 옥스퍼드의 머시아 영토는 상속되지 않았다. 그녀가 머시아의 여군주로 통치한 당시 머시아는 더이상 왕국이 아닐 뿐더러 더욱이 앵글로 색슨 역사상 그녀가 여자로서 첸왈흐의 왕비였던 색스부르흐와 함께 여성 군주의 두번째 사례였다.

에설레드가 죽었을 때 에드워드는 알프레드가 머시아의 지배 하에 둔 머시아의 도시인 런던과 옥스퍼드와 그 내륙 지역을 장악했다. 어떤 역사학자는 에설프렐드가 남자 형제인 에드워드가 머시아에서의 그녀의 위치를 ​​인정하는 대가로 해당 영토들을 가져갔다고 제안했다. 알프레드는 웨식스에 요새화된 마을인 버(burh)의 연결망를 구축했고 그의 자식들은 에드워드와 에설플레드 이제 방어를 강화하고 바이킹에 대한 공격 기지를 제공하기 위해 이를 확장하는 계획에 착수했다. 프랭크 스탠에 따르면 에설플레드는 그녀가 계획한 원정에 머시아의 군대를 지휘했다.그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그녀의 형제가 머시아의 보호에 의존했기 때문에 남부 데인족에 대한 전진을 시작할 수 있었으며 이는 그의 통치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에설플레드는 910년에 블렘스버라는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이미 요새화했고 , 912년에는 서번 강의 교차로를 막기 위해 브리지노스에 방어 시설을 구축했다 .913년에는 레스터의 데인족을 막기 위해 탬워스에 요새를 , 트렌트 벨리에서의 접근을 막기 위해 스태퍼드에 요새를 구축했다 .914년에는 글로스터와 헤리퍼드에서 모집한 머시아의 군대가 브리타니에서 온 바이킹의 침략을 격퇴했고, 철기 시대의 에디버리 언덕 요새는 노섬브리아나 Cheshire의 침략을 막기 위해 수리되었고, 워릭은 레스터의 데인족에 대한 추가 보호로 요새화되었다. 915년에는 치버리가 머지 강의 웨일스와 런콘 에서 오는 길을 지키기 위해 요새화되었다. 914년 이전에는 헤리퍼드에 방어 시설이 건설되었고, 아마도 슈루즈베리와 Scergeat , Weardbyrig에 있는 두 개의 다른 요새에도 방어 시설이 건설되었지만 , 그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917년 3개의 바이킹 군대의 침략이 실패했는데, 에설플레드가 군대를 보내 더비와 그 주변 지역을 점령했기 때문이다. 이 마을은 레스터, 링컨 노팅엄, 스탬퍼드와 함께 데인로의 5대 자치구 중 하나였다. 더비는 영국군에게 가장 먼저 함락되었다. 그녀는 전투에서 "그녀에게 소중한 4명의 종사(thegn)"를 잃었다. 에설플레드를 "유능한 전쟁 지휘관으로 유명하다"고 묘사한 팀 클락슨은 더비에서의 승리를 "그녀의 가장 큰 승리"로 여긴다. 그해 말에 동앵글리아의 데인족은 에드워드에게 항복했다. 918년 초, 에설플레드는 저항없이 레스터를 점령했고 대부분의 지역 데인족 군대가 그녀에게 항복했다. 몇 달 후, 데인족가 통치하는 노섬브리아 남부의 요르비크의 지도자들은 에설플레드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다고 제안했는데, 아마도 아일랜드의 노르드 침략에 대한 그녀의 지원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제안을 활용하기 전에 918년 6월 12일에 죽었다. 에드워드에게는 비슷한 제안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 Three Fragments에 따르면 918년 에설플레드는 노섬브리아의 코브리지 전투에서 노르드 바이킹 지도자 라그날이 이끄는 군대에 맞서 스코틀랜드와 노섬브리아 잉글랜드군을 이끌었다. 역사가들은 이것이 가능성이 낮다고 생각하지만, 그녀는 전투에 파견대를 보냈을 수도 있다.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라그날은 자신을 노섬브리아의 통치자로 자리 매김했다. Three Fragments에서 에설플레드는 또한 스코틀랜드와 어스트라드클리드 브리튼인들과 방어 동맹을 형성했다.

에설플레드와 웨일스인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유일하게 기록된 사건은 916년에 그녀가 머시아 수도원장과 그의 동료들의 살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원정대를 보냈을 때였다. 그녀의 부하들은 Llangorse 호수에 있는 브러헤이니옥 왕실의 크래노그를 파괴하고 여왕과 그녀의 동료 33명을 사로잡았다. 대 에드워드에게 강하게 호의적인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한 버전에 따르면, 에설플레드의 죽음 이후 "웨일스인의 왕들, 허우엘, 클리독, 이두왈, 그리고 모든 웨일스 사람들이 에드워드를 그들의 상위군주로 삼고자 했다." 허우엘 다 압 카델는 웨일스 남서쪽 데헤이바르스의 왕으로 , 클리독 압 카델은 아마도 북동쪽 포위스의 왕이었고, 이두알 포엘 압 아나라우드는 북서쪽 귀네드의 왕이었다. 남동부 웨일즈의 웬트는 이미 웨식스 영주령에 있었지만 찰스-에드워드의 관점에서 이 구절은 에드워드 머시아에 대한 직접적인 권력을 잡을 때까지 다른 웨일즈 왕국은 머시아의 지배권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에설플레드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은 발행되지 않았지만 1990 년대에는 Mercian 서부 마을에는 특이한 장식 디자인이 있었는데, 이는 그녀의 통제하에 발행될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그녀가 죽은 후, 서부 머시아 동전 뒷면은 다시 웨식스에서 생산된 동전의 뒷면과 동일해졌다. 910년과 924년 그의 죽음 사이의 기간에 대한 에드워드의 헌장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반면 에설플레드의 단독 이름으로 작성된 헌장은 S 224(아마도 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감)와 S 225(915년 9월 9일로 날짜가 지정됨)는 두 개가 남아 있으며, 그녀가 신원 불명의 장소에 지은 버흐 중 하나인 Weardbyrig 에서 발행되었다.

에설플레드는 918년 6월 12일에 탬워스에서 사망하였고, 그녀의 시신은 75마일(121km) 떨어진 글로스터로 옮겨졌고, 그녀는 남편과 함께 세운 성 오스왈드 수도원에 묻혔다. 에설플레드가 죽자 앨프윈이 머시아의 두번째 여군주로 즉위했다. 그러나 어머니와는 달리 앨프윈은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결국 즉위한 지 6개월 만에 외삼촌인 웨식스의 왕인 에드워드가 개입해 그녀를 웨식스로 데려가면서 머시아를 직접 통치했는데, 이에 대한 반발이 없는 것을 볼 때 이때를 기점으로 머시아의 정통 왕가가 완전히 단절된 상태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머시아는 웨식스의 영향력 하에 완전히 들어가게 되며, 이후 924년 에드워드의 아들인 애설스탠이 924년 머시아의 통치자가 되어 아버지인 에드워드가 죽기 전까지 3년간 통치했고, 에드거는 957년부터 머시아의 통치자가 되어 2년간 통치했고, 이후 울프헤어가 머시아의 최초의 엘더만으로 임명되어 983년까지 통치하다가 죽었고, 이후 처남인 앨프릭 실드가 후임자가 되어 2년간 통치하지만 985년 초, 시렌세스터에서 열린 왕실 회의에서 반역죄로 인해 해임과 함께 추방되고, 다음 후임으로 .울프릭 스팟이 임명된다.
876년 할프단이 노섬브리아 대부분 지역을 차지해 요르비크의 왕을 자처할 당시 에크베르크 2세는 밤버러 일대인 노섬브리아 북부, 타인 강 너머의 현재의 잉글랜드 북부와 스코틀랜드 남부만을 통치했다. 에크버흐트의 통치권의 북쪽 국경은 불확실하다. 리치지의 죽음과 에크베르트의 집권은 더럼의 시몬에 의해 기록되어 있으며, 그는 876년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이교도 왕인 할프딘은 자신과 그의 추종자들을 위해 노섬브리아의 땅을 나눴다. 노섬브리아의 왕인 리치지가 죽고 에크베르트 2세가 타인 강 너머의 노섬브리아를 통치했다.

883년, 시메온은 지도자 할프단 라그나르손(Halfdan Ragnarsson)이 죽자 요크와 노섬브리아 남부에서 바이킹 왕이 선출된 사실을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자 성 커스버트는 수도원장 에드레드(루엘에 살았기 때문에 성이 룰리스크였다)에게 주교와 앵글족과 데인족 전체가 몸값을 지불하면 하르딕넛의 아들 구스레드를 왕으로 추대하라고 말하도록 했다. 구스레드는 데인족이 휘팅엄의 어떤 과부에게 노예로 팔았던 자였다. 그는 요크를 다스렸고 에크베르트는 노섬브리아를 다스렸다.

그러나 다른 출처에서는 에크버르트가 2년 동안 통치했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그가 노섬브리아 전체에 대한 주장을 언급하는 것인지 불명이다. 사망년의 불명으로 성 쿠스버트의 역사에서 요르비크의 왕인 구스레드가 895년부터 2년간 통치했다고 하며, 12세기 연대기인 노섬브리아 연대기에선 오스베르트라는 인물이 901년 왕위에서 추방되었다고 적혀 있으며, 동일한 연대기에서 899년에서 924년 에드워드 통치기간 중 이드울프라는 인물이 통치자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어째든 그의 뒤를 이어 밤버러의 통치자가 된 이는 엘라 2세의 외손자인 이드울프 1세로 별다른 치적에 대해서 언급은 없으며, 12세기의 연대기에 의존해야 했기에 통치 영역에 대해서도 많은 논란이 있지만 남 노섬브리아가 바이킹들의 요르비크 왕국이였던 만큼 그의 통치 영역으로 전임자 시기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확실한 것은 이드울프가 자신의 자식들의 대부를 앨프레드 대왕으로 지정할 정도로 그의 동맹자였다는 점과 913년에 사망하고 장남인 엘드레드가 다음 통치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성 커스버트의 역사에 따르면 910년경에 엘드레드는 요르비크의 왕인 라그날의 공격을 받고 영토를 상실했다고 한다.

이후 엘드레드는 알바 왕 카우산틴 막 아에다에게 피난했고, 두 사람은 콜브리지 전투에서 라그날과 싸웠다. 이 전투는 얼스터 연대기와 알바왕 연대기에 따르면 918년으로 되어 있다. 이 싸움은 결착이 없는 것 같고, 라그날은 남 노섬브리아, 구 데이라의 지배자인 채 남았고, 엘드레드는 자신의 영토를 되찾는데는 성공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 사본 A에 따르면 920년 베이크웰에서 열린 회의에서 엘드레드를 포함한 북부 지배자들은 대에드워드에게 복종했지만, 이 해석은 마이클 데이비슨을 포함한 역사가에 의해 이의가 주장되고 있으며, 그들은 이것을 대등한 사람끼리의 회의로 간주하고 있다. 927년 7월 12일, 엘드레드는 이몬트 다리에서 에드워드의 아들 에설스탠에게 복종한 북부 통치자 중 한 명이었다. 엘드레드의 복종은 노섬브리아가 에설스탠의 왕국에 합류하여 일반적으로 잉글랜드의 통합으로 간주되고 있다. 다만 다른 연대기 기록에선 엘드울프라는 인물이 밤버러 일대를 지배하다가 추방되었다고 한다.

어째 엘드레드는 931년 또는 932년에 잉글랜드 남부에서 발행된 엘설스탠의 칙허장의 몇 건의 증인이었다. 벤자민 허드슨은 그는 그 이후 기록되지 않았고 아마 933년에 사망했다고 말했지만, 크론막 노이즈 연대기에는 934년에 "북 색슨인의 왕 아돌프 메틀프가 사망했다"고 기록했고, 알렉스 울프는 이것이 엘드레드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기록일 수 있다고 제안하고 있지만 어쩌면 형제지간일수도 있다.

어째든 934년 새로운 통치자로 형제로 추측되는 오스울프가 즉위했다. 954년까지 수년간 북부에서는 이드울프와 이알드레드가 통치하고 있었지만, 남노섬브리아는 스칸디나비아인에 의해 지배되어 940년대 초부터는 더블린의 올라프 시그트뤼그손과 한때 노르웨이의 왕이었던 에릭 사이에서 권력이 교체하고 있었다. 웬도버의 로저의 '플로레스의 역사'(13세기 초)에 따르면 오즈울프는 맥커스라는 인물과 공모하고 에릭을 '스테인모어라는 외진 장소에서' 유인한 후, 살해했다.

12세기까지는 잉글랜드 국왕인 이드리드 왕의 지배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스울프가 노섬브리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전승이 있다. 『플로레스의 역사』의 이 부분은 수세기 후에 편찬된 것으로, 분명한 시대착오가 포함되어 있지만, 저자는 현존하지 않는 특정의 이전의 자료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기술은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는 에릭의 사후 노섬브리아의 새로운 통치자로 이드리드 왕의 이름을 꼽았다.
노섬브리아의 왕, 에릭 사후, 그해 노섬브리아인들이 이드리드 왕을 노섬브리아의 새로운 통치자로 세웠다.

리처드 플레처는 오스울프가 이드리드 왕의 부추김으로 움직이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이에 대한 노고를 치하하고자 오스울프를 노섬브리아의 전체의 통치자로 승격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다. 12세기의 다른 자료인 데 프리모 색슨 어드벤투는 오스울프의 지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노섬브리아인의 마지막 왕인 에릭(Erik) 다음으로 엘더만 중 첫 번째인 오스울프는 에드레드(Eadred) 왕 밑에서 노섬브리아인의 모든 지방을 통치했다.

비슷한 감정이 관련 '왕들의 역사'에서 표현되고 있다. “여기서 노섬브리아인의 왕은 끝을 맞았고, 그 이후 영토는 백작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드리드의 정복과 오스울프의 통치는 이렇게 서서 색슨인에 의한 북부의 영구적인 지배의 시작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오스울프의 통치 기간에 대해서는 그 밖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알바왕 연대기에는 일둘브 막 카우산틴 시대에 스코틀랜드인들이 에든버러를 포기했다고 하지만, 노섬브리아인이나 오스울프의 관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지지 않았다.

오스울프의 죽음의 날짜는 알 수 없다. 오슬락이 요크의 영주로 처음 등장하는 963년은 오스울프가 죽기 전의 해였다고 생각된다. 오슬락이 오스울프와 혈연 관계에 있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색슨족의 초림(De primo Saxonum adventu)에 따르면 노샘브리아는 오스울프 사후 두 지역으로 나뉘어졌으며, 일부는 오슬락의 통치하기로 되었고, 다른 하나는 이드울프가 통치했다. 에드거 왕은 요크 회의 도중 노섬브리아를 분할을 하고 그 지역 전체가 엘더만의 상속재산이 되는 것을 막았다. 식전에서, 이드울프는 새로운 백작위의 「검을 띠었다」하지만, 대관은 되지 않았다.

다른 전승에서는 에드거 왕이 로지안을 이드울프의 영토에서 분리하고 스코틀랜드 왕 키나드 2세에게 양도했다는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이드울프, 오슬락, 엘프시게 주교는 키나드를 체스터에 있는 에드거 왕의 궁정으로 호위했다고 한다. 키나드가 경의를 표했다고 전해진 후, 에드거는 키나드에게 보상하기 위해 로지안을 주었다.

10세기 알바왕 연대기에는 키나드 2세의 통치 중에 '색슨왕의 아들'이 스코틀랜드의 습격으로 잡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웨식스의 잉글랜드 왕이 아니라 밤버러의 통치자의 아들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되며, 아마 이드울프 혹은 그의 후임인 월세오프의 아들일 것이다. 잡힌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옛 자료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지만, 이드울프는 무사히 귀환하는 대신 트위드 강 이북의 영토를 양도한 것이 아닐까 추측되고 있다.

이드울프의 후계자 월세오프는 994년 남부 칙허장을 증명했으며, 이를 통해 이드울프는 그 해까지 사망 또는 퇴위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드울프는 에드거 왕의 사후 왕위 계승 위기 때 975년 영국을 덮친 정치적 혼란을 극복할 수 없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이드울프와 오슬락의 양자가 에드거 왕의 후계자로 성공한 순교왕 에드워드가 아니라 실패한 에셀레드 2세를 지지했기 때문에 지위를 잃었다고 한다. 또한 이드울프는 유력한 노섬브리아 귀족에 의해 퇴위되었거나 암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되어 있다.

11세기의 다른 기록에서는 이드울프와 월세오프 사이에 엘드레드라는 인물이 밤버러의 통치자라고 기록되었는데, 린디스판의 주교인 엘드레드와 동일시되고 있다.
2.1.3.3. 웨식스→잉글랜드 왕국
웨식스는 약화된 머시아를 완전히 산하의 종속국으로 두어 대외적으로 머시아-웨식스 vs 바이킹(데인족)의 구도가 본격적으로 잡혔다. 하지만 분열된 데인족의 세력들과 달리 하나로 뭉친 웨식스 왕국 간의 대결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웨식스의 우세로 이어졌다. 동앵글리아의 군주로 구트룸을 삼으며 법과 규율로 그를 통제하는데 성공한 앨프레드 대왕은 약화된 데인족들을 하나둘 씩 몰아냈기 시작했다.

그시작은 앨프레드가 구스럼과 맺은 조약 이후로 878-879년 겨울 동안 펄햄에 머물렀던 바이킹 무리가 헨트로 항해하여 879년부터 892년까지 대륙에서 활동했다. 880년대 내내 웨식스 해안에서 지역적인 습격이 있었습니다. 882년에 앨프레드는 4척의 덴마크 함선과 작은 해전을 벌였습니다. 함선 중 2척은 파괴되었고 나머지는 항복했습니다. 이것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된 4건의 해전 중 하나였으며 그 중 3건은 앨프레드가 관여했다. 또한 882년 앨프레드는 머시아의 애설레드가 자신의 영향권에 벗어나기 위해 벌인 웨일스 정복을 무산시키기 위해 애설레드의 압력을 버티지 못한 웨일스 남동부의 글러위싱 왕국과 그웬트 왕국의 지배권을 받아들였고, 애설레드를 달래기 위해 자신의 딸인 애설플래드와 혼인시켰다. 또한 고립된 북노섬브리아의 이드울프와도 교류하며 그의 자식들의 대부를 자처하면서 밤버러 일대까지 영향권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한편 이시기 앨프레드는 웨식스의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 5세기와 6세기에 브리튼 섬을 침략한 후 정착한 앵글로 색슨족은 부족 징집병 또는 퓌르드(fyrd)로 불리는 경보병에 의존했으며, 초기 앵글로색슨 브리튼의 여러 왕국의 군사력은 이 시스템에 의존했다. 퓌르는 모든 자유민이 복무해야 하는 앵글로색슨 지방의 지역 민병대였다. 군 복무를 거부하는 사람은 벌금을 물거나 땅을 잃을 수 있었다.  694 년경 에 발표된 웨식스의 이네 왕의 법전에 따르면
토지를 소유한 귀족이 군 복무를 게을리하면 120실링을 내고 토지를 몰수한다.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귀족은 60실링을 내고 평민은 군 복무를 게을리한 것에 대해 30실링의 벌금을 내야 한다.

878년 앨프레드의 성공에 앞서 웨식스가 겪은 실패의 역사는 그가 물려받은 전통적인 전투 시스템이 데인족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앵글로색슨족과 데인족이 약탈을 위해 정착지를 공격하는 동안, 그들은 다른 전술을 사용했다. 앵글로색슨족은 전통적으로 습격에서 방패벽에 군대를 집결시켜 목표물을 향해 진군하고 방어를 위해 배치된 다가오는 벽을 극복하는 정면 공격을 선호했다. 데인족은 쉬운 목표물을 선택하고, 더 많은 것을 위한 고위험 공격으로 약탈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해 신중한 습격을 지도에 표시하는 것을 선호했다. 앨프레드는 그들의 전술이 약탈자들이 강력한 저항에 부딪힐 경우 후퇴할 수 있는 안전한 요새에서 소규모 공격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새는 사전에 준비되었으며, 종종 영지를 점령하고 도랑, 성벽, 울타리로 방어를 강화했다. 요새 안으로 들어가자 앨프레드는 데인족과 유리한 입장에 있었고, 포위군의 식량과 체력이 약해졌기 때문에 적보다 오래 버티거나 반격으로 적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앵글로색슨족이 약탈자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집결시킨 수단 역시 바이킹들에게 취약한 면이 있었다. 지역적 습격을 처리하는 것은 샤이어 페어드의 책임이었다. 왕은 왕국을 방어하기 위해 징집군을 소집할 수 있었지만 바이킹 습격의 경우 통신과 물자 조달 문제로 인해 징집군을 충분히 빨리 소집할 수 없었다. 습격이 시작된 후에야 지주들에게 전투를 위해 병력을 모으라는 요청이 전달되었다. 페어드가 집결하여 도착하기 전에 넓은 지역이 황폐화될 수 있었다. 지주들은 왕이 부를 때 이 병력을 공급할 의무가 있었지만, 878년의 공격 동안 그들 중 많은 수가 왕을 버리고 구트룸과 협력했다.

이러한 교훈을 염두에 두고 앨프레드는 에딩턴에서 승리한 후 비교적 평화로운 몇 년을 색슨 방어를 야심차게 재편하는 데 활용했다. 로마 여행에서 앨프레드는 서프랑크의 왕인 대머리 샤를 2세와 함께 머물렀으며, 카롤링거 왕들이 바이킹 약탈자들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연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의 경험에서 배운 그는 웨식스를 위한 세금 및 방어 시스템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의 군제 개편의 골자는 5하이드(hide) 이상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자유민과 자력으로 3회 이상 항해를 한 항구의 상인들에게 테인(귀족 아래의 중간계급)의 지위를 부여하고 증원군에 합류시켰다.

또한 농부들을 중심으로 국가 위기 시에 적에 대항할 수 있는 조직적인 민병대를 창설했는데, 이러한 조직은 앵글로색슨 왕국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민병대 구성원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반은 집에서 봉사하고, 반은 데인군에 맞서 싸우도록 구성되었다. 아울러 복무 기간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병력을 교대로 소집할 수 있는 순환 근무제를 도입하였다.

또한 성채마을인 버(burgh)가 잉글랜드에 대규모로 세워진 때도 앨프레드의 통치기로 앨프레드의 새로운 군사 방어 시스템의 기초는 왕국 전역의 전술 지점에 분산된 버의 연결망이였다. 약 30킬로미터(19마일) 떨어진 33개의 버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군대는 하루 안에 왕국 내 어디에서든 공격에 대처할 수 있었다.

앨프레드의 버흐(22개가 자치구 로 발전)는 윈체스터와 같이 돌담을 수리하고 해자를 추가한 옛 로마 도시에서부터 웨식스의 버펌과 같이 나무로 된 보루와 울타리로 보강된 넓은 해자로 둘러싸인 거대한 흙담까지 다양했다. 윈체스터의 경우 성벽 안쪽의 로마시대 도로를 무시하고 새롭게 격자로 구획된 도로를 닦았다. 당시 도로 건설에서 측량을 위해 66피트 길이의 자를 이용했는데, 이는 웨식스의 표준 도량형이 되었다. 다만 그외의 버들은 로마가 남긴 성채를 재건하기도 하였다. 버흐의 크기는 데번의 필튼과 같은 작은 전초 기지에서 윈체스터에 있는 가장 큰 기존 도시의 대규모 요새까지 다양했다.

현재 Burghal Hidage로 알려진 문서는 이 시스템이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고 있다. 여기에는 문서에 포함된 각 요새 도시에 속한 호수 단위인 hide의 복수형인 hidage가 기록되어 있다. 월링포드에는 2,400개의 hidage가 있었는데, 이는 그곳의 토지 소유자가 2,400명의 병력을 공급하고 먹일 책임이 있었고, 이는 9,900피트(1.88마일, 3.0킬로미터)의 성벽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숫자였다. 총 27,071명의 군인이 필요했는데, 이는 웨식스의 모든 자유인의 약 4분의 1에 해당한다. 많은 버는 강을 가로지르는 쌍둥이 도시였으며, ​​한 세대 전 대머리 샤를이 서프랑스 북부에 지은 것과 같은 요새화된 다리로 연결되었다. 이중 버는 강의 통로를 막아 바이킹 선박이 돌, 창 또는 화살로 무장한 사람들이 줄지어 선 수비대가 있는 다리 아래로 항해하도록 강요했다. 다른 버는 요새화된 왕궁 근처에 위치하여 왕이 자신의 거점을 더 잘 통제할 수 있도록 했다.

버는 군대 사용을 위해 유지된 도로 체계(헤레패스 라고 함)로 연결되었다. 도로 덕분에 여러 버에서 군대를 신속히 집결시켜 바이킹 침략자에 맞설 수 있었다. 도로망은 특히 전리품을 실은 바이킹 침략자에게 상당한 장애물이 되었다. 이 체계는 바이킹의 경로와 통신을 위협하여 훨씬 더 위험해졌다. 바이킹은 버에 대한 포위 공격을 위한 장비와 발달된 포위 기술 교리가 부족하여 신속한 공격과 잘 방어된 요새로의 방해받지 않는 후퇴에 전투 방식을 맞추었다.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수단은 버를 굶겨서 복종시키는 것이었지만, 이를 통해 왕은 인근 버에서 야전군이나 수비대를 군 도로를 따라 보낼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러한 경우 바이킹은 왕의 합동 군대의 추격에 극도로 취약했다. 앨프레드의 버 시스템은 바이킹의 공격에 엄청난 도전이 되었기 때문에 892년 바이킹이 돌아와 켄트의 림프 강 어귀에 있는 반쯤 지어진, 수비대가 제대로 배치되지 않은 요새를 공격했을 때 앵글로색슨족의 외곽 영역을 웨식스와 머시아의 외곽 국경으로 제한할 수 있었다. 앨프레드의 버 시스템은 전략적 개념에서 혁신적이었고 실행에 있어서는 엄청난 비용이 들었다. 그의 동시대 전기 작가인 어서는 많은 귀족들이 "왕국의 공통된 필요"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들에게 부과된 요구에 반발했다고 썼다.

이때문인지 앨프레드는 조세 제도 또한 개편해야 했다. 전통적으로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소작인들은 토지 소유에 따라 세 가지 의무를 지녔다. 군 복무, 요새 작업, 다리 수리라는 소위 "공통 부담"이었다. 이 세 가지 의무는 전통적으로 trinoda necessitas 또는 trimoda necessitas 라고 불렸다. 군 복무를 소홀히 한 것에 대한 벌금에 대한 고대 영어 이름은 fierdwite 였다. 버를를 유지 하고 농민 징집병을 상비군으로 재편하기 위해 앨프레드는 소작인의 토지 소유 생산성에 따라 세금 및 징집 제도를 확대했다. hide는 소작인의 공적 의무가 평가되는 시스템의 기본 단위였다. hide는 한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토지의 양을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hide는 토지의 가치와 자원에 따라 크기가 달랐고 토지 소유자는 자신이 소유한 hides의 수에 따라 왕에게 의무를 제공해야 했다.

그 밖에도 지방 행정 또한 바이킹과 휴전한 후에 손을 봤는데, 자신의 지배 영역을 10개 정도의 주로 나누고, 각 주에는 각각 세속 권력인 장관과 종교 권력인 주교를 파견하였다. 통상적인 봉건주의 국가에서는 각 지역을 토착 세력에게 맡겨 두고, 국왕은 이들로부터 형식적인 충성맹세만 받았는데, 앨프레드는 중앙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고, 세금을 걷으며 징병을 실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심지어 정치권력 뿐만 아니라 성직자의 임명권과 파견권까지 국왕이 장악하여 종교 권력도 국왕의 손에 넣었다.

다만 그의 치세에 봉건제가 점진적으로 도입되었는지 데인족들이 지배하는 데인랜드로 불린 동부 머시아와 동앵글리아는 자영농들이 대세였으나 웨식스에서는 영주를 비롯한 유력자들이 큰 농장(장원)을 소유하고, 농민들에게 소작을 시키는 장원제도가 대세가 되어 가고 있었다.

행정 뿐만 아니라 법마저 개편하기 시작했다. 880년대 후반이나 890년대 초반에 앨프레드는 자신의 법률로 구성된 긴 돔복 또는 법전을 발행했는데, 법전의 기초는 7세기 후반 웨식스의 전임 왕인 이네가 법전을 참고했다. 이 법률들은 모두 120개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앨프레드는 서문에서 자신이 많은 " 종교 회의록" 에서 찾은 법률을 모아 "우리 조상들이 지켰던 법률 중 나를 기쁘게 한 법률을 많이 기록하도록 명령했고, 나를 기쁘게 하지 못한 법률 중 많은 것을 내 신하들의 조언으로 거부하고 다른 방식으로 지키도록 명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앨프리드는 특히 "내 친척인 이네, 또는 머시아의 왕 오파, 또는 브리튼 섬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켄트의 왕인 에설베르흐트 시절에 발견한 법률을 골라냈다. 그는 이네의 법률을 통합하기보다는 자신의 법전에 추가했고, 에델버트가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신체 부위의 부상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 규모를 포함했지만, 두 부상 관세는 일치하지 않는다. 오파가 법전을 발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아 역사가 패트릭 워멀드는 앨프리드가 교황 특사 오스티아의 조지가 오파에게 제시한 786년의 교황 특사령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법전의 약 5분의 1이 앨프레드의 서문에 의해 차지되는데, 여기에는 십계명의 영어 번역, 출애굽기 의 몇 장, 사도행전의 15:23-29절이 포함되었다. 서문은 기독교 법의 의미에 대한 앨프레드의 묵상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 앨프레드 자신이 웨식스에 율법을 내린 것 사이의 연속성이 있다는 전통성을 만들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은 거룩한 과거를 역사적인 현재와 연결하고 앨프레드의 율법 제정을 일종의 신성한 입법으로 나타냈다.

마찬가지로 앨프레드는 그의 법전을 120장으로 나누었는데, 120은 모세가 죽은 나이였고, 초기 중세 성서 주석가들의 숫자 상징주의에서 120은 법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모세의 법전과 알프레드의 법전 사이의 연결 고리는 사도 서한으로, 그리스도께서 "계명을 깨뜨리거나 폐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계명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으며, 자비와 온유함을 가르치셨습니다"(서론, 49.1)라고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모세의 법에 주입하신 자비는 기독교 공회의가 "그리스도가 가르친 그 자비를 통해 거의 모든 악행에 대해 첫 번째 범죄에서 세속 군주가 허락을 받으면 죄 없이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이래로 야만인들의 법전에서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해 관세의 기초가 되었다.

돈을 지불하여 보상받을 수 없는 유일한 범죄는 영주에 대한 배신이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멸시하는 자를 위해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죽음에 팔아넘긴 자를 위해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셨으며, 모든 사람에게 자기 주인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앨프레드가 그리스도의 계명을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마태복음 22:39-40)에서 세속의 영주를 주 그리스도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하라는 것으로 바꾼 것은 앨프레드가 영주권을 인간을 통치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신성한 유대로 이해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돔보크의 소개에서 법률 자체로 넘어가면 어떤 논리적인 배열을 발견하기 어렵다. 잡다한 법률이 뒤섞인 듯한 인상이다. 보존된 법률 조례는 소송에서 사용하기에 특히 적합하지 않다. 사실, 앨프레드의 법률 중 몇몇은 조례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하는 이네의 법률과 모순된다. 패트릭 워멀드의 설명에 따르면 알프레드의 법률 조례는 법률 매뉴얼이 아니라 "실질적 방향보다는 상징적 영향을 위해 고안된" 왕권에 대한 이념적 선언문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실제적인 측면에서 조례에서 가장 중요한 법률은 첫 번째 법률일 수 있다. "가장 필요한 것은 각자가 자신의 선서와 서약을 주의 깊게 지키도록 명령한다"는 것은 앵글로색슨 법의 근본적 교리를 표현하고 있다.

앨프레드는 사법 문제에 상당한 주의와 생각을 바쳤다. 어서는 사법적 공정성에 대한 그의 관심을 강조한다. 어서의 언급에 따르면 앨프레드는 그의 영주와 관료가 내린 다툼이 있는 판결을 검토하는 것을 고집했으며 "자신이 없는 동안 왕국의 어느 곳에서든지 발표된 거의 모든 판결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공정한지 부당한지 확인했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의 통치 시절의 헌장에는 앨프레드가 손을 씻는 동안 자신의 방에서 그러한 항소 중 하나를 듣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어서는 앨프레드를 솔로몬의 판사로 묘사하며, 자신의 사법 조사에 꼼꼼하고 부당하거나 지혜롭지 못한 판결을 내린 왕실 관리들을 비판했다. 어서는 앨프레드의 법전을 언급하지 않지만 앨프레드는 판사들이 "지혜를 추구하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문맹이 되지 않도록 주장했으며, 왕의 명령을 따르지 못하면 직위 상실로 처벌을 받았다.

앨프레드 시대에 작성된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아마도 잉글랜드의 통일을 촉진하기 위해 쓰여졌을 것이고, 반면에 에서의 앨프레드 왕의 생애는 앨프레드의 업적과 개인적 자질에 대해 정당성을 위해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앨프레드가 그 나라의 지배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웨일즈에 배포될 수 있도록 이런 방식으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개혁의 성과 덕인지 892년 바이킹 약탈이 재개되었을 때 앨프레드는 상비하고 기동성 있는 야전군, 수비대 네트워크, 강과 하구를 항해하는 소규모 함대로 바이킹 약탈에 맞서 싸울 준비가 더 잘 되어 있었다. 그 밖에도 브리튼 섬의 앵글로색슨족들로만으로 바이킹의 침략을 막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기독교 세계 각지의 지도자들과 교류를 했다. 후술한 로마에 구호품을 자주 보냈을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총대주고 엘리아스 3세와도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데인족을 비롯한 스칸디나비안들의 동향을 주시했는데, 890년경, 유틀란드 반도 헤데비의 무역상 울프스탄이 발트해를 따라 프로이센의 무역 도시인 트루소까지 여행을 떠났는데, 앨프레드는 어떠한 방법으로 이 여행의 세부 사항을 직접 수집하는데 성공했다.

그외에도 앨프레드는 이교도 대군세로 인해 쇠퇴한 앵글로색슨 내의 종교와 교육, 문화 등을 부흥시키려고 했다. 880년대에, 그가 귀족들에게 성벽을 짓고 관리하라고 "권유하고 위협"하던 당시, 앨프레드는 거의 1세기 전 카롤루스 대제의 사례에서 영감을 받아 학문을 되살리기 위한 동등하게 야심찬 노력을 기울였다. 이 기간 동안 바이킹의 약탈은 종종 신의 형벌로 여겨졌고, 앨프레드는 신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종교적 경외심을 되살리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 부흥은 궁정과 주교들 사이의 분위기를 강화하기 위해 머시아, 웨일즈 및 해외에서 성직자 학자들을 모집하는 것을 수반했다. 자신의 자녀, 귀족의 아들, 낮은 출신이지만 지적으로 유망한 소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궁정 학교를 설립했다. 권위있는 직책을 맡은 사람들에게 문해력을 요구하려는 시도였다. 왕이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라틴어 작품을 모국어로 번역하는 일련의 작업이었다.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계도를 포함하여 앨프레드의 왕국과 가문의 부상을 자세히 설명하는 연대기를 편집하여 웨식스 왕들에게 성경적 조상을 제공했다.

앨프레드 치하의 교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데인족의 공격은 수도원에 특히 큰 피해를 입혔다. 앨프레드가 애설니와 샤프츠베리에 수도원을 세웠지만, 이것들은 8세기 초 이후로 웨식스에서 처음으로 지어진 새로운 수도원이었다. 어서에 따르면, 앨프레드는 애설니에 있는 자신의 수도원을 위해 외국의 수도사들을 잉글랜드로 초빙했는데, 그 이유는 지역 주민들이 수도원 생활을 시작하려는 관심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앨프레드는 웨식스의 교회 기관이나 종교적 관행을 체계적으로 개혁하지 않았다. 그에게 왕국의 영적 부흥의 열쇠는 경건하고 학식이 풍부하며 신뢰할 수 있는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는 것이었다. 왕으로서 그는 자신이 신민의 현세적, 영적 복지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세속적 권위와 영적 권위는 앨프레드에게 별개의 범주가 아니었다.

그는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목회에 대한 번역본을 주교들에게 배포하여 사제들을 더 잘 훈련하고 감독할 수 있도록 하고, 같은 주교들을 왕의 관리와 판사로 사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편안히 여겼다. 그의 경건함은 그가 전략적으로 위치한 교회 토지, 특히 데인로와의 경계를 따라 있는 영지를 수용하여 바이킹의 공격으로부터 더 잘 방어할 수 있는 왕의 테인과 관리들에게 이전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상술한 대로 데인족의 습격은 잉글랜드의 학문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앨프레드는 그레고리오의 목회적 보살핌을 번역한 서문에서 '잉글랜드의 학문이 철저히 쇠퇴하여 험버 강 이쪽에는 영어로 신성한 예배를 이해하거나 라틴어에서 영어로 단 한 글자라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험버 강 너머에도 많은 사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앨프레드는 극적으로 효과를 내기 위해 젊은 시절 잉글랜드의 학문의 심오한 상태를 과장했을 것이다. 라틴어 학문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플레그문트, 웨퍼스, 울프시게와 같은 학식 있는 머시아와 웨식스 성직자들이 그의 궁정에 있었다는 사실에서 입증되었다.

잉글랜드의 사본 제작은 바이킹의 침략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860년대 무렵에 급격히 감소했으며, 세기말까지 부활하지 못했다. 수많은 앵글로색슨 사본이 보관되어 있던 교회와 함께 불타버렸다. 873 년으로 날짜가 매겨진 캔터베리의 크리스트처치에서 발행한 엄숙한 증서는 너무나 형편없이 작성되어 있어서 역사가 니콜라스 브룩스는 눈이 멀어서 자신이 쓴 것을 읽을 수 없거나 라틴어를 거의 또는 전혀 모르는 서기관이 있었다고 가정했다. 브룩스는 "캔터베리의 대도시 교회는 성경이나 기독교 예배에 대한 효과적인 훈련을 전혀 제공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었다.

상술한대로 앨프레드는 자신의 자녀, 귀족 자녀, 그리고 "많은 하위계층"의 교육을 위해 궁정 학교를 세웠다. 그들은 그곳에서 영어와 라틴어로 된 책을 공부했고 "글쓰기에 전념했다. 그 정도로 그들은 자유 학예에 헌신적이고 지적인 학생으로 여겨졌다." 그는 웨식스에서 기독교 학문을 부흥시키고 왕에게 개인적인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대륙과 브리튼 섬에서 학자들을 모집했다. 그림발드와 색슨인 존은 프랑크에서 왔다. 플레그문트(앨프레드가 890년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 워체스터의 워퍼스 주교, 애설스탄, 왕실 사제 워울프는 머시아에서 왔고, 애서는 웨일즈 남서부의 성 데이비드에서 왔다.

앨프레드의 교육적 야망은 궁정 학교를 설립하는 것 이상으로 확장된 듯하다. 기독교적 지혜가 없다면 전쟁에서 번영도 성공도 있을 수 없다고 믿었던 앨프레드는 "다른 직업에 유용하지 않은 한, 지금 브리튼 섬에서 공부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진 모든 자유민 청년을 학습에 참여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자신의 왕국에서 라틴어 문해력이 쇠퇴하고 있음을 깨달은 앨프레드는 초등 교육을 영어로 가르치고, 성직자로 승진하고자 하는 사람은 라틴어 공부를 계속하도록 제안했다.

영어로 쓰인 "지혜의 책"은 거의 없었다. 앨프레드는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필요한" 책을 영어로 번역하는 야심 찬 궁정 중심의 계획램을 통해 이를 해결하려고 했다. 앨프레드가 이 계획을 시작한 시점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웨식스가 바이킹의 대대적 공격으로부터 벗어난 후인 880년대였을 수 있다. 앨프레드는 최근까지 많은 번역물의 저자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경우에 의심스러운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잉글랜드의 학자들은 번역물을 "앨프레드식"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더 많으며, 아마도 그의 후원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의 작품일 가능성은 낮다고 보는 편이다.

잃어버린 Handboc 또는 Encheiridio를 제외하고, 왕이 보관했던 비망록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가장 이른 번역물은 중세에 큰 인기를 끌었던 책인 대교황 그레고리오의 목회였다. 번역은 우스터 주교인 Wærferth가 앨프레드의 명령에 따라 착수했으며, 왕은 단지 서문만 제공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앨프레드가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궁정 학자들의 조언과 도움을 받아 네 권의 작품을 직접 번역했다는 것이다. 그레고리오의 Pastoral Care, 보에티우스의 Consolation of Philosophy ,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Soliloquies, 그리고 시편의 처음 50편이다.

이 목록에 앨프레드 법전에서 발췌한 불가타 출애굽기의 번역을 추가할 수 있다. 오로시우스 의 이교도에 대한 역사와 베다의 브리튼인의 교회사의 고대 영어 버전은 어휘 및 문체적 차이로 인해 학자들에게 더 이상 앨프레드 자신의 번역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앨프레드의 번역 계획의 일부였다는 데에는 여전히 의견의 일치가 있다. 사이먼 케인스와 마이클 라피지는 볼드의 리치북과 익명의 고대 영어 순교록에 대해서도 이를 제안했다.

앨프레드가 대교황 그레고리의 목회에 대한 번역을 위한 서문에서 그가 이러한 작품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자신의 방법을 "때로는 단어 그대로, 때로는 의미 그대로" 번역하는 것으로 설명했지만, 번역은 원문에 매우 가깝게 유지되었지만 언어 선택을 통해 영적 권위와 세속적 권위의 구분이 모호해졌다. 앨프레드는 번역본을 사용하기를 원했고 모든 주교들에게 배포했다. 앨프레드의 목회에 대한 번역에 대한 관심은 너무 오래 지속되어 11세기에도 여전히 사본이 만들어졌다.

보에티우스의 철학 위안은 중세 시대에 가장 인기가 있었던 철학 핸드북이었다. 목회적 보살핌의 번역과는 달리 앨프레도의 문서는 원본을 매우 자유롭게 다루었지만 여전히 번역에만 특유한 부분이 많고 앨프레드의 주변에서 왕권에 대한 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보에티우스에서 자주 인용되는 문장이 나온다. "간단히 말해서, 나는 살아있는 동안 합당하게 살고 싶었고, 내 인생이 끝나면 선행으로 내 기억을 후세에 남기고 싶었다." 이 책은 두 개의 사본으로만 현대에 전해졌다. 이 중 하나에서는 산문으로 쓰여 있고 다른 하나에서는 산문과 두문자 운문이 결합되어 있다. 후자의 사본은 18세기와 19세기에 심하게 손상되었다.

앨프레드의 마지막 작품은 Blostman ("Blooms") 또는 Anthology라는 이름을 딴 작품이다. 전반부는 주로 히포의 성 오거스틴 의 Soliloquies 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나머지는 다양한 출처에서 발췌했다. 마지막 단어는 인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고귀한 잉글랜드 왕에게 어울리는 비명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있는 동안 이해력을 키우지 않고 모든 것이 명확해질 끝없는 삶에 도달하기를 항상 바라며 갈망하는 매우 어리석고 진정으로 비참한 사람으로 보인다."

1693년 서머싯에서 발견된 앨프레드 보석은 고대 영어로 "앨프레드가 나를 만들라고 명령했다"는 비문이 새겨져 있어 오랫동안 앨프레드 왕과 연관되어 왔다. 이 보석은 길이가 약 2.5인치(6.4센티미터)이고, 금으로 만든 섬세한 조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그 아래에는 꽃 모양의 홀을 든 남자의 에나멜 이미지가 있는 클루아조네 에나멜 플라크에 고정되어 있는데, 아마도 시력이나 신의 지혜를 의인화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것은 한때 바닥에 있는 움푹 들어간 소켓을 기반으로 한 얇은 막대나 막대기에 부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보석은 확실히 앨프레드의 통치 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기능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보석은 앨프레드가 목회 관리에 대한 그의 번역본 사본과 함께 모든 주교구에 보내도록 명령한 독서 지침서인 애스텔 중 하나였을 것이라는 의견이 종종 제시되었다. 각 애스텔은 50개의 맨커스라는 왕자의 가치가 있었는데, 이는 앨프레드 보석의 양질의 제작 기술과 값비싼 재료와 잘 맞는다.

어서와 연대기 작가가 바이킹에 대한 웨식스의 저항을 기독교 성전으로 묘사한 것은 단순한 수사학이나 선전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신이 왕이 복종해야 할 주인이며 왕이 추종자들에 대한 권위를 얻는 계층적 기독교 세계 질서에 대한 비전에 뿌리를 둔 신성한 보상과 처벌에 대한 교리에 대한 앨프레드 본인의 믿음을 반영했다. 귀족들이 '공동선'을 위해 일하도록 설득해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앨프레드와 그의 궁정 학자들은 오파를 포함한 이전 왕, 베데를 포함한 성직자 작가, 알퀸 및 카롤링거 르네상스의 다양한 참여자를 포함한 이전 왕의 유산을 바탕으로 자신이 물려받은 기독교 왕권에 대한 개념을 강화하고 심화시켰다. 이것은 그의 신하들을 복종시키기 위해 종교를 냉소적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앨프레드의 세계관에 내재된 요소였습니다. 그는 9세기 영국과 프랑크의 다른 왕들처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영적 복지와 신체적 복지를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믿었다. 그의 왕국에서 기독교 신앙이 파괴되고, 성직자들이 그들의 사무실과 전례에서 망가뜨린 라틴어 단어를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하고, 고대 수도원과 대학 교회가 무관심으로 인해 버려졌다면, 그는 요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했다. 앨프레드의 궁극적인 책임은 그의 백성을 사목적으로 보살피는 것이었다.

883년, 교황 마리노 1세는 로마의 색슨족 거주 지역에 세금을 면제해 주었는데, 아마도 앨프레드가 매년 로마에 구호품을 보내겠다고 약속한 대가였을 것이다. 이것이 중세 세금인 베드로의 성금의 유래일 수 있다. 교황은 앨프레드에게 선물을 보냈는데, 그 중에는 참십자가의 일부로 알려진 것도 있었다. 구트룸과 조약을 맺은 후, 앨프레드는 얼마 동안 대규모 갈등을 면했습니다. 비교적 평화로웠지만, 앨프레드는 여러 차례 덴마크의 습격과 침입을 막아야 했다. 그 중 하나가 885년에 영국 남동부에 있는 동맹 왕국인 켄트에서 있었던 습격으로, 아마도 구트룸과의 전투 이후 가장 큰 습격이었을 것이다. 어서의 습격에 대한 설명에 따르면, 바이킹 습격대는 색슨족의 도시인 로체스터 에 있었고, 그곳에서 도시를 포위하기 위해 임시 요새를 지었다. 이 침입에 대응하여 앨프레드는 앵글로색슨족 군대를 이끌고 덴마크군에 맞섰고, 덴마크군은 웨식스군과 교전하는 대신 좌초된 배로 도망쳐 잉글랜드의 다른 지역으로 항해했다. 후퇴하는 덴마크군은 다음 여름에 잉글랜드를 떠났다.

켄트에서 덴마크의 습격이 실패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앨프레드는 함대를 동앵글리아로 파견했다. 이 원정의 목적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어서는 약탈을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함대는 스토어 강을 거슬러 올라간 후 13척 또는 16척(출처에 따라 숫자가 다름)의 데인족 함선과 마주쳤고 전투가 벌어졌다. 앵글로색슨 함대는 승리했고 헌팅던의 헨리가 기록한 대로 "전리품을 싣고" 있었다. 승리한 함대는 스토어 강을 떠나려고 하다가 기습 공격을 받았고 강 어귀에서 데인족의 공격을 받았다. 데인족 함대는 이전 교전에서 약화되었을 수 있는 앨프레드의 함대를 격파했다.

886년에 앨프레드는 런던을 탈환하고 다시 거주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앨프레드는 그 도시를 그의 사위이자 머시아의 통치자인 애설레드에게 맡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앨프레드는 자신의 칭호를 "앵글로색슨족의 왕"으로 개칭했는데, 이는 브레트왈다의 개칭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는 그의 손자인 애설스탠까지 이어졌다. 런던의 복원은 880년대 후반에 진행되었으며 새로운 거리 계획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졌다. 기존 로마 성벽에 요새를 추가했고, 일부는 템스 강 남쪽 기슭에 일치하는 요새를 건설했다고 믿어지고 있다.

이것은 또한 거의 모든 연대기 작가들이 통일 이전의 영국의 색슨족이 앨프레드에게 복종했다는 데 동의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888년 캔터베리 대주교인 에셀레드도 죽었습니다.1년 후, 앨프레드의 적이자 동앵글리아의 왕인 구스럼, 또는 그의 세례명으로 애설스탄이 죽고 서퍽의 해들리에 묻혔다. 구스럼의 죽음은 앨프레드의 정치적 지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로 인한 권력 공백은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자리를 차지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다른 권력에 목마른 바이킹 군벌들을 자극했다.

892년 또는 893년 가을이 지난 후, 데인족들은 다시 공격했다. 유럽 본토에서의 자신들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2개 부대로 나눠 330척의 배를 타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들은 방어진을 구축했는데, 규모가 큰 부대는 켄트의 애플도어에 있었고 , 규모가 작은 부대는 하슈타인이 지휘하여 역시 켄트의 밀튼에 있었습니다. 침략자들은 자신들의 처자식들을 데리고 왔고, 이는 정복과 식민지화를 위한 의미 있는 시도였음을 보여줬다. 893년 또는 894년에 앨프레드는 두 군대를 모두 관찰할 수 있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가 하슈타인과 회담을 하는 동안 애플도어에 있는 데인족이 폭발하여 북서쪽으로 공격했다. 그들은 앨프레드의 장남 에드워드에게 따라잡혀 서리의 파넘 전투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들은 버킹엄셔와 미들섹스 사이의 콜른 강에 있는 쏜니에 있는 섬으로 피난을 갔지만 그곳에서 봉쇄당하고 인질을 내주고 웨식스를 떠나겠다고 약속해야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에식스로 가서 벤플릿에서 또 다른 패배를 겪은 후 슈베리에서 하슈타인의 군대와 합류했다.

앨프레드는 쏜니에서 아들을 구제하기 위해 가던 중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의 데인족들이 엑스터와 노스데번 해안의 이름 없는 거점을 포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앨프레드는 즉시 서쪽으로 서둘러 엑스터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다른 곳의 운명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슈타인이 이끄는 군대는 아마도 서쪽에 있는 친구들을 도울 생각으로 템스 계곡을 따라 진군을 시작했다. 그들은 머시아, 윌트셔, 서머싯의 세 엘더만[81]들이 이끄는 대규모 군대와 마주쳤고 북서쪽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버팅턴에서 따라잡히면서 포위당했다. 잉글랜드 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도망친 사람들은 슈베리로 후퇴했다. 지원군을 모은 후, 그들은 영국을 가로질러 돌진하여 파괴된 체스터의 로마 성벽을 점령했다. 잉글랜드군은 겨울 봉쇄를 시도하지 않고 그 지역의 모든 보급품을 파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894년 또는 895년 초에 식량 부족으로 인해 데인족들은 다시 한번 에식스로 후퇴해야 했다. 연말에 데인족들은 배를 템스 강과 리 강으로 끌어올려 런던에서 북쪽으로 20마일(32km) 떨어진 곳에 요새를 구축했다. 데인족의 방어선에 대한 정면 공격은 실패했지만 그해 말에 앨프레드는 데인족 함선의 탈출을 막기 위해 강을 가로막는 수단을 발견했다. 데인족들은 자신들이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북서쪽으로 공격을 받아 브리지노스 근처의 콰트브리지에서 겨울을 났다. 그 다음 해인 896년(또는 897년)에 그들은 싸움을 포기했다. 일부는 노섬브리아로 , 일부는 동앵글리아로 후퇴했다. 잉글랜드에 인맥이 없는 데인족들은 대륙으로 돌아갔다.

이후 앨프레드는 해군까지 개편했다. 896년에 그는 60개의 노를 가진 12척 정도의 롱쉽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함대를 건조하라고 명령했는데, 이는 바이킹 전함의 두 배 크기였다. 이것은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주장했듯이 영국 해군의 탄생이 아니었다. 웨식스는 이전에도 왕실 함대를 소유했다.앨프레드의 형인 켄트의 부왕 애설스탄과 엘도르만 엘헤어는 851년에 바이킹 함대를 격파하고 9척의 배를 나포했고 앨프레드는 882년에 해군 작전을 수행했다. 897년은 웨식스의 해군력에 있어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저자는 앨프레드의 배가 덴마크나 프리지아의 배보다 크고, 빠르고, 안정적이며 물 위에서 더 높이 올라갔다고 말했다. 앨프레드는 어서의 고전적인 지도를 받으며 항해보다는 전투에 적합하도록 높은 측면을 갖춘 그리스 및 로마 전함의 디자인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앨프레드는 해상 전력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가 상륙하기 전에 약탈 함대를 요격할 수 있다면, 그는 그의 왕국이 약탈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앨프레드의 배는 개념적으로는 더 뛰어났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해전을 벌일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인 강어귀와 강의 가까운 물에서 잘 조종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당시의 전함은 함선 파괴자가 아니라 병력 수송선으로 설계되었다. 바이킹 시대 후반 스칸디나비아의 해전처럼, 이러한 전투는 한 척의 배가 적함 옆에 와서 두 척의 배를 함께 묶은 다음 배에 탑승하는 것을 수반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 결과, 묶인 두 척의 배 위에서 백병전을 포함한 육상 전투가 벌어졌다.

896년에 기록된 한 번의 해전에서 앨프레드의 새로운 9척 함대는 잉글랜드 남부의 알려지지 않은 강 어귀에서 바이킹 함선 6척을 요격했다. 데인족은 배의 절반을 좌초시키고 내륙으로 들어갔다. 앨프레드의 함선은 즉시 이동하여 탈출을 막았다. 떠 있던 3척의 바이킹 함선은 잉글랜드의 방어선을 돌파하려고 시도했다. 한 척만 성공했고 앨프레드의 함선이 다른 두 척을 요격했다. 바이킹 함선을 자기 함선에 묶은 잉글랜드 선원들은 탑승하여 바이킹들을 죽였다. 한 척의 함선은 조수가 빠지면서 앨프레드의 무거운 함선이 좌초되어 탈출했다. 선원들 사이에서 육전이 벌어졌다. 데인족은 수적으로 매우 열세였지만 조수가 오르자 그들은 흘수가 얕은 배로 돌아갔고 먼저 풀려났다. 잉글랜드군은 바이킹들이 자신들을 지나 노를 저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지만 너무 많은 사상자(프리지아인과 영국인 62명에 비해 120명 사망)를 냈기 때문에 바다로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모두 서식스 주변으로 노를 저어 갈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었고 두 척은 서식스 해안(아마도 셀시 빌)으로 밀려났다. 난파된 선원들은 윈체스터의 앨프레드 앞으로 끌려와 교수형에 처해졌다.

앨프레드는 899년 10월 26일에 50세 또는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평생 고통스럽고 불쾌한 질병으로 고생했다.그의 전기 작가 어서는 앨프레드의 증상을 자세히 설명했고 이를 통해 현대 의사들이 가능한 진단을 내릴 수 있었는데, 알프레드는 크론병이나 치질을 앓았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그의 손자 이드리드 왕도 비슷한 질병을 앓았던 것으로 보인다. 890년 스칸디나비아와 데인로의 바이킹 세력들과 전쟁을 벌인 와중에 형인 애설레드 1세의 장남인 애설헬름이 사망하고 차남인 애셀왈드만이 남았지만 앨프레드는 은근히 원래 왕위에 즉위해야 할 조카를 후계로 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직계로 잇길 원했고, 결국 앨프레드의 의지대로 그의 아들인 대 에드워드가 즉위하였지만 애설월드가 반발했고, 왕위를 뺏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A' 버전에 따르면 , 애설월드는 에드워드 왕의 허락 없이, 그리고 주교의 명령을 무시하고 수녀원에서 수녀를 납치했다. 그녀의 신원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납치는 애설월드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고, 애설월드는 추종자들과 함께 도셋의 윔본을 점령했는데, 윔본에는 그의 아버지인 애설레드 1세의 시신이 안치된 마을이었고, 애설월드는 납치한 수녀를 왕비로 삼으면서 자신을 웨식스의 왕이라 자처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 앨프레드와 함께 데인로의 바이킹들과 싸웠던 대 에드워드는 당연히 군대를 이끌고 애설월드를 정벌하려 나섰다. 그가 윔본 근처인 윔본에서 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철기 시대의 언덕 요새인 배드버리 링스에 주둔했을 때, 애델월드는 전투에서 그들을 맞이할 충분한 지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애드워드가 공격을 준비하자, 애설월드는 한밤중에 윔본을 탈출하여 노섬브리아로 갔다. 그는 그곳의 데인족에 합류했고 요르비크의 왕으로 추대되었고, 애설월드의 반란을 제압한 대 에드워드는 900년 6월 8일 대관식을 올려 웨식스의 왕위에 올랐다.

901년, 도망갔던 사촌 애설월드가 함대를 이끌고 에식스로 돌아와 동앵글리아의 데인족들에게 봉기하라고 꼬드겼고, 그결과 그들의 왕인 에오흐릭과 함께 동앵글리아의 공동왕이 되었다. 이듬해(902)에는 애설월드는 규함한 데인족들과 함께 직접 머시아와 북부 웨식스를 침략해 국경에 있는 크리클레이드의 요새화된 버까지 도달했다. 그런 다음 그는 탬즈 강을 건너 웨식스로 들어가 브레이든을 습격했다. 애드워드는 데인족의 동앵글리아를 약탈하여 보복했지만 애설월드와 전투를 벌이지 않고 철수했다. 그 직후, 대 에드워드의 철수 명령을 시게울프, 시게헬름, 켄울프, 시게버스,이드월드들이 지휘하는 켄트인들로 구성된 부대가 항명한 후 거부하고, 후퇴 중이었던 데인족 군대를 추격했다. 데인족들은 현재의 헌팅던셔 홀름에서 재정비한 후 한판 붙었다. 데인족이 이 싸움에서 이기면서 지휘관들을 포함한 겐트 부대 전원이 궤멸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고, 그 와중에 반역자인 애설월드와 동앵글리아 왕 에오흐릭, 그리고 그밖에 데인로 바이킹들의 지도자들인 베오르트시게,베오르노스, 이소파, 오시텔도 죽으면서 애드워드의 왕좌에 대한 위협은 끝났다.

886년 런던에서 앨프레드는 "데인족에 복종하지 않은 모든 영국인"의 공식 복종을 받았고, 그 후 그는 앵글로색슨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채택했으며, 이는 그의 후기 헌장과 에드워드의 두 가지를 제외한 모든 헌장에서 사용되었다. 케인즈는 이를 "웨식스와 머시아를 모두 포괄하는 완전히 새롭고 독특한 정치 체제의 발명"으로 보았으며, 이는 에드워드가 웨식스 궁정의 머시아의 지원을 받아 물려받았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사람은 캔터베리 대주교 플레그문트였다. 903년 에드워드는 머시아의 토지에 대한 여러 헌장을 발행했다. 그 중 세 개는 머시아 지도자들과 그들의 딸 앨프윈이 증언했으며, 모두 애설레드와 애설플래드가 "앞서 말한 왕 아래에서 머시아에 대한 통치권과 권력을 가졌다"는 진술을 포함하고 있다. 에드워드의 권위에 대한 어떠한 인정도 포함하지 않은 다른 헌장들은 머시아 지도자들에 의해 발행되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주화를 발행하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지위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마틴 라이언(Martin Ryan)에 의해 받아들여지며, 그는 에설레드(Æthelred)와 에설플래드(Æthelflæd)가 영국 머시아에서 "상당하지만 궁극적으로 종속적인 왕의 권위의 몫"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다른 역사가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폴린 스태퍼드는 애설플래드를 "마지막 머시아 여왕"으로 묘사하고 있다. 반면 찰스 인슬리의 관점에서 머시아는 애설플레드가 918년에 죽을 때까지 독립을 유지했다고 보고있다. 마이클 데이비슨은 903개의 헌장을 머시아 통치자들이 "신의 은총으로 머시아 군주제를 유지하고, 통치하고, 방어했다"는 901개의 헌장과 대조했다. 데이비슨은 "머시아의 종속에 대한 증거는 확실히 엇갈렸다. 궁극적으로 '앵글로색슨 왕국'의 이념은 머시아의 흡수를 달성하는 데 덜 성공적이었을 수 있으며, 모호한 정치적 쿠데타로 봤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890년대부터 웨식스 궁정에서 편찬되었고, 역사가들은 9세기 후반과 10세기 초반의 항목이 웨식스 관점을 반영한다고 보고 있다.

9세기 후반과 10세기 초반에 웨식스 왕가와의 혼인은 대륙 통치자들에게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890년대 중반에 앨프레드는 자신의 딸 앨프스리트를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2세와 결혼시켰고, 919년에 에드워드는 자신의 딸 이드기푸를 서프랑크의 왕인 단순왕 샤를 3세와 결혼시켰다.925년에 에드워드가 죽은 후, 또 다른 딸인 이드기스가 미래의 독일 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는 오토 1세와 결혼했다 .

홀름 전투 이후 몇 년 동안 앵글로색슨족과 덴마크 바이킹 사이에 전투가 기록되지 않았지만 , 906년에 에드워드는 동앵글리아와 노섬브리아의 데인족과 평화를 맺었고, 이는 갈등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한 버전에 따르면 그는 "필요에 따라" 평화를 맺었는데, 이는 그가 그들을 매수해야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잉글랜드인들이 덴마크 영토에서 땅을 매수하도록 격려했고, 베드퍼드셔와 더비셔의 영지와 관련된 두 개의 헌장이 남아 있다. 909년에 에드워드는 웨식스와 머시아의 연합 군대를 보내 노섬브리아의 데인족을 유린했고, 링컨셔의 바드니 수도원에서 노섬브리아의 왕이자 성인인 오스월드의 뼈를 탈취했다. 오스월드는 에설레드와 에설플래드가 글로스터에 세운 새로운 머시아 대성당으로 옮겨졌고, 데인족은 에드워드의 조건에 따라 평화를 받아들여야 했다. 이듬해 노섬브리아의 데인족은 머시아를 습격하여 보복했지만, 귀환하는 길에 테텐홀 전투에서 머시아와 웨식스 연합군을 만나 바이킹족은 비참한 패배를 겪었다. 그 후, 노섬브리아의 데인족은 에드워드의 통치 기간 동안 험버 강 남쪽으로 원정을 떠나지 않았고, 그와 그의 머시아 동맹군은 동앵글리아의 남부 데인로와 바이킹족의 동머시아 5개 자치구 인 더비 , 레스터, 링컨, 노팅엄, 스탬포드를 정복 하는 데 집중할 수 있었다.

911년에 머시아의 군주인 애설레드가 죽고 에드워드는 런던과 옥스퍼드 주변의 머시아 영토를 장악했다. 애설레드의 뒤를 이어 그의 미망인이자 애드워드의 누이인 애설플래드가 머시아의 여군주로서 통치자가 되었고, 애설레드는 생애 후반에 어떠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와병 상태인 것으로 보이며, 애설플래드가 수년간 통치자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에드워드와 애설플래드는 바이킹의 공격을 막고 바이킹으로부터 점령한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요새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911년 11월, 그는 하트퍼드의 리 강 북쪽 기슭에 요새를 건설하여 베드퍼드와 케임브리지의 데인족의 공격을 막았다. 912년, 그는 군대와 함께 에식스의 말든으로 진군하여 위덤 에 요새를, 하트퍼드에 두 번째 요새를 건설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런던을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에식스에서 데인족의 지배를 받는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그에게 복종하도록 독려했다. 913년, 그의 활동은 잠시 중단되었지만 애설플래드는 머시아에서 요새 건설을 계속했다. 914년, 바이킹 군대가 브르타뉴에서 출항하여 세번 강 어귀를 약탈했다. 그런 다음 웨일즈 남동부의 에르깅(현재 헤리퍼드셔의 아첸필드)을 공격하고 에르깅의 주교인 사이 필리오그를 포로로 잡았다. 에드워드는 은 40파운드라는 거금을 받고 그를 몸값으로 받아냈다. 바이킹들은 헤레퍼드와 글로스터 군대에 패배했고, 인질을 주고 평화를 유지하겠다고 맹세했다. 에드워드는 바이킹들이 약속을 어길 경우를 대비해 강어귀 남쪽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두 번이나 공격을 물리쳐야 했다. 가을에 바이킹들은 아일랜드로 이동했다. 이 사건은 남동부 웨일즈가 북쪽의 브리체이노그와 달리 웨식스의 세력권에 속했음을 시사한다. 머시아가 지배적이었다. 914년 후반에 에드워드는 버킹엄에 두 개의 요새를 건설했고 , 베드포드에 있는 덴마크 군대의 지휘관인 야를 서케틸이 그에게 복종했다. 그 다음해에 에드워드는 베드포드를 점령하고 북쪽 강둑에 있는 바이킹 요새에 대항해 그레이트우즈 강 남쪽 강둑에 또 다른 요새를 건설했다. 916년에 그는 애식스로 돌아와 말든에 요새를 건설해 위덤의 방어를 강화했다. 그는 또한 서케틸이 그의 추종자들이 영국을 떠나도록 도왔고, 이로써 미들랜드의 바이킹 군대의 수가 줄어들었다.

전쟁에서 결정적인 해는 917년이었다. 4월에 에드워드는 노샘프턴셔의 타우체스터에 요새를 건설하여 노샘프턴의 데인족을 방어했고, 위깅가메어라는 알려지지 않은 장소에 또 다른 요새를 건설했다. 데인족은 타우체스터, 베드포드, 위깅가메어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에셀플래드는 더비를 점령하여 영국의 방어 조치의 가치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바이킹 군대의 분열과 재정 부족으로 인해 도움이 되었다. 데인족은 베드포드셔의 템스퍼드에 자체 요새를 건설했지만, 여름이 끝나갈 무렵 영국군이 요새를 습격하여 동앵글리아의 마지막 데인 왕인 구스룸 2세를 죽였다. 그런 다음 잉글랜드군은 콜체스터를 점령했지만, 지키려고 시도하지는 않았다. 데인족은 대규모 군대를 보내 말든을 포위 공격하여 보복했지만, 수비대는 구원을 받을 때까지 버텼고 후퇴하는 군대는 크게 패배했다. 에드워드는 타우세스터로 돌아와 요새를 석벽으로 보강했고, 근처 노샘프턴의 덴마크인들은 그에게 항복했다. 케임브리지와 동앵글리아의 군대도 항복했고, 그해 말까지 버티고 있던 유일한 덴마크 군대는 5개 자치구 중 4개 자치구인 레스터, 스탬포드, 노팅엄, 링컨의 군대뿐이었다.

918년 초, 애설플래드는 싸움 없이 레체스터의 복종을 확보했고, 요르비크의 데인족들은 그녀에게 충성을 제안했는데, 아마도 아일랜드에서 남노섬브리아를 침략한 노르웨이계 바이킹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6월 12일에 죽었다. 애드워드에게는 같은 제안이 있었는지 알려지지 않았고, 노르웨이계 바이킹은 919년에 요크를 점령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웨식스 버전에 따르면, 애설플래드가 죽은 후 머시아인들은 애드워드에게 복종했지만 머시아 버전은 918년 12월에 그녀의 딸 앨프윈이 "머시아에서 모든 권한을 박탈당하고 웨식스로 끌려갔다"고 증언했다. 머시아는 애드워드에 의해 억압된 지속적인 준독립을 시도했을 수 있으며, 그 후 그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게 되었다. 스탬퍼드는 애설플래드가 죽기 전에 에드워드에게 복종했고, 노팅엄도 그 직후에 항복했다. 918년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데인족과 잉글랜드을 포함하여 머시아에 정착한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복종했다." 이것은 그가 험버 강 남쪽의 모든 영국을 통치했음을 의미하지만, 920년대 초 바이킹 요크의 동전이 링컨에서 주조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링컨이 예외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는다. 일부 데인족 야를들은 영지를 유지하는 것이 허용되었지만, 에드워드는 아마도 지지자들에게 땅을 보상했고, 일부는 자신의 손에 두었다. 화폐 증거는 그의 권위가 동부 앵글리아보다 동부 미들랜드에서 더 강했음을 시사했다. 이전에 애설플래드의 지배를 받았던 세 명의 웨일스 왕, 하이웰 다 클리독, 이드왈 포엘이 이제 에드워드에게 충성을 바쳤다.

후기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주요 통화는 은 페니였고, 일부 동전에는 왕의 양식화된 초상화가 새겨져 있었다. 에드워드의 동전에는 앞면에 "EADVVEARD REX"가 있고 뒷면에는 주조인의 이름이 있었다. 발행 장소는 그의 통치 기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그의 아들 애설스탠의 통치 기간에는 표시되어 에드워드 통치 기간의 많은 주조 장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바스, 캔터베리, 체스터, 치체스터, 더비, 엑서터, 헤리퍼드, 런던, 옥스퍼드, 샤프츠베리, 슈루즈베리, 사우샘프턴, 스태퍼드, 월링포드, 웨어햄, 윈체스터 및 아마도 다른 마을에 조폐소가 있었다. 애설레드 또는 애설플래드의 이름으로 동전을 주조한 적은 없지만, 약 910년경부터 머시아에 있는 조폐소에서 뒷면에 특이한 장식 디자인이 있는 동전을 생산했다. 이것은 920년 이전에 중단되었고, 아마도 애설플래드가 애드워드의 주화와 자신의 주화를 구별하는 방식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캔터베리 대주교 플레그문트의 이름으로 된 개인적 동전의 발행도 있었다. 에드워드의 통치 기간 동안 주화 제작소의 수가 극적으로 증가하여 처음 10년 동안 남부에서 25개소 미만이 마지막 10년 동안 67개소로 늘어났고, 영국의 머시아에서는 약 5개소에서 23개소로 늘어났으며 정복한 데인로 지역에서는 27개소가 더 있었다.

데인로 지역에 정복전 당시인 908년에 플레그문트는 웨식스의 국왕과 백성들의 구호품을 교황에게 전달했는데, 이는 거의 1세기 만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로마를 방문한 첫 사례였으며, 이 여행은 웨식스 교구의 제안된 재편에 대한 교황의 승인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었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을 때 웨식스에는 데뉴울프가 소유한 윈체스터와 애서가 소유한 셔본이라는 두 개의 교구가 있었다. 908년에 데뉴울프가 사망하고 이듬해 프리테스탄이 대신하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윈체스터는 두 개의 교구로 나뉘었고, 윌트셔와 버크셔를 관할 하는 램즈베리 교구가 만들어 졌고, 윈체스터에는 햄프셔와 서리가 남았다. 위조된 헌장에는 이 분할이 909년으로 나와 있지만 이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서는 같은 해에 사망했고 909년과 918년 사이 어느 시점에 셔본은 데번과 콘월을 관할하는 크레디톤과 서머셋을 관할하는 웰스의 세 개의 교구로 나뉘었고 셔본은 도셋과 함께 남았다. 이러한 변화의 효과는 윈체스터와 셔본에 비해 캔터베리의 지위를 강화하는 것이었지만 이러한 분열은 웨식스 주교의 세속적 기능의 변화와 관련이 있었을 수 있다. 즉, 지방이 아닌 지방에서 왕의 정부의 대리인이 되어 방위를 지원하고 지방 법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통치 초기에 그의 어머니 얼스위드는 윈체스터에 너나민스터(Nunnaminster)로 알려진 수녀들을 위한 성 메리 수도원을 세웠다. 에드워드의 딸 애드버스는 그곳에서 수녀가 되었고, 그녀는 성인으로 숭배되었으며 12세기에 클레어의 오스베르트에 의해 성인 전기의 주제가 되었다. 901년에 에드워드는 아마도 그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남성들을 위한 주요 종교 공동체를 짓기 시작했다. 수도원은 윈체스터 대성당 옆에 있었는데, 이곳은 옛 민스터(Old Minster)로 알려졌고 에드워드의 기초는 신 민스터(New Minster)라고 불렸다. 그것은 옛 민스터보다 훨씬 컸고 아마도 왕실 영묘로 의도되었을 것이다. 901년 폰티외에서 잉글랜드로 도착한 것으로 추정되는 브르타뉴의 성 유독의 유물과 같은 해에 사망하여 곧 성인으로 숭배받게 된 앨프레드의 가장 가까운 고문 중 한 명인 그림발드의 유해를 획득했다. 에드워드의 어머니는 902년에 사망했고 그는 그녀와 앨프레드를 그곳에 묻고 아버지의 유해를 옛 민스터에서 옮겼다. 920년대 초에 매장된 사람에는 에드워드 자신, 그의 동생 애설웨어드, 그의 아들 앨프웨어드가 포함되었다. 반면에 애설스탠이 924년에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아버지의 설립에 아무런 호의도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에드워드가 죽은 후 왕위에 대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윈체스터가 그에게 반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뉴 미니스터에 묻힌 다른 유일한 왕은 959년의 애드위그었다.

에드워드가 옛 민스터를 확장하지 않고 훨씬 더 큰 건물로 덮어버리기로 한 결정은 데뉴울프 주교에 대한 적대감을 시사하며, 이는 옜 민스터가 새로운 부지를 위한 땅과 베딩턴에 있는 70개의 하이드 부지를 양도하여 신 민스터에 수입을 제공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에드워드는 신 민스터에서 후원자로 기억되었지만 옛 민스터에서는 렉스 아비두스(탐욕스러운 왕)로 기억되었다. 그는 옛 민스터가 앵글로색슨 왕들의 왕릉이 될 만큼 웅장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로운 교회를 지었을 수 있다. 그들의 전임자들처럼 웨식스의 왕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앨런 택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에드워드가 신 민스터에 기부한 방법은 일반적으로 그의 교회 정책과 일맥상통했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교회에 거의 기부하지 않았다. 그의 통치 기간 대부분에 걸쳐 헌장이 부족했던 것을 볼 때 그는 전혀 기부하지 않은 것 같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에드워드의 왕권은 웨식스의 새로운 강경한 군주제를 상징하는 듯하며, 평신도와 교회를 포함한 모든 자원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착취하기로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애드워드는 아버지의 문화 정책에 대해서 그대로 이어갔다. 앵글로색슨 학문의 수준은 9세기에 특히 웨식스에서 심각하게 떨어졌고, 플레그문트와 같은 머시아 학자들은 앨프레드가 시작한 학문의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머시아인들은 앨프레드와 에드워드의 궁정에서 두드러졌고, 머시아 방언과 학문은 웨식스인들에게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앨프레드의 계획이 그의 아들의 통치 기간 동안 얼마나 계속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앨프레드의 통치 기간 동안 라틴어로 된 작품의 영어 번역은 계속 복사되었지만, 알려진 원본 작품은 거의 없다. 앵글로색슨 사각 소문자로 알려진 문자는 930년대에 성숙했고, 가장 초기 단계는 에드워드의 통치로 거슬러 올라갔다. 주요 학술 및 문서 중심지는 캔터베리, 윈체스터, 우스터의 대성당 중심지였다. 수도원은 에설스탠의 통치 때까지 큰 기여를 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통치 기간 동안 제작된 원문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앵글로색슨 영국에서 확실히 만들어진 유일하게 살아남은 대규모 자수품은 에드워드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것들은 19세기에 더럼 대성당의 성 커스버트 관에서 제거된 스톨, 마니플 및 아마도 거들일 수 있다. 그것들은 934년에 애설스탠이 수도원에 기증했지만 자수품에 새겨진 비문은 에드워드의 두 번째 아내인 앨프래드가 윈체스터 주교인 프리테스탠에게 선물로 의뢰한 것임을 보여준다. 아마도 애설스텐이 윈체스터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한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901년 사우스햄튼에서 열린 회의에는 에드워드의 형제와 아들, 그의 집안의 테인, 거의 모든 주교가 참석했지만, 알더만은 참석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왕은 윈체스터 주교로부터 윈체스터의 새로운 성당을 건립하기 위한 토지를 얻었다. 910년부터 924년 왕이 죽을 때까지의 기간에 대한 헌장은 남아 있지 않았다. 헌장은 보통 왕이 토지를 하사할 때 발행되었고, 에드워드는 바이킹에 대한 전쟁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손에 들어온 재산을 유지하는 정책을 따랐을 가능성이 있다. 헌장은 교회에 넘어간 재산과 관련이 없고, 교회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지 않는 한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또 다른 가능성은 에드워드가 왕가의 남성 구성원에게 반환되는 조건으로만 재산을 하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헌장은 교회 기록 보관소에서 찾을 수 없다.

에드워드 1세가 반포한 법전의 3조는 위증 혐의를 확신할 만한 사람은 선서로 자신을 무죄를 입증하지 않고 재판을 통해서만 무죄를 입증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잉글랜에서 재판에 의한 재판의 지속적인 기록의 시작이다. 아마도 688~726년의 이네 왕의 법률에 언급되어 있지만 , 앨프레드의 법률과 같은 후기 법전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 보인다. 에드워드 통치 시대의 행정 및 법률 시스템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서면 기록에 크게 의존했을 수 있다. 에드워드는 도서지에 대한 법률을 발표한 소수의 앵글로색슨 왕 중 한 명이었다. 그 시대에 실제로 도서지가 무엇인지에 대한 혼란이 점점 더 커졌다. 에드워드는 도서지와 민속지 분쟁에 대한 신속한 해결을 촉구했고, 그의 법률은 관할권이 왕과 그의 관리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확립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에 따르면 920년에 영국의 통치자들은 에드워드에게 전반적으로 복종했다.
그런 다음 에드워드는 피크 디스트릭트의 베이크웰에 가서 인근에 자치구를 건설하여 주민을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왕과 모든 스코틀랜드의 사람들,레이날드와 이드울프의 아들들과 노섬브리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 영국인과 덴마크인, 노르드인과 그 외 사람들, 그리고 어스트라드클리드왕 웨일즈의 왕과 모든 어스트라드클리드 웨일즈 사람들이 그를 아버지와 군주로 인정했다.

이 구절은 20세기 후반까지 대부분의 역사가들에게 직접적인 보고로 여겨졌으며 프랭크 스텐튼은 "이 목록에 이름이 나온 각 통치자들은 에드워드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확실히 얻을 것이 있었다"고 관찰했다. 1980년대 이후 이 제출은 점점 더 회의적인 시각을 받고 있는데, 특히 연대기의 구절이 927년에 에셀스탄에게 제출한 것과 같은 다른 제출과 달리 이에 대한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출은 문헌적 출처와 동전에서 독립적인 지원을 받았다. 앨프리드 스미스는 에드워드가 정복한 바이킹에게 부과할 수 있었던 것과 동일한 조건을 스코틀랜드인과 노섬브리아인에게 부과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연대기가 왕들 간의 조약을 웨식스에 대한 복종으로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스태포드는 통치자들이 머시아와 노섬브리아 사이의 국경에 있는 베이크웰에서 만났으며 국경에서의 만남은 일반적으로 어느 쪽의 복종에 대한 암시를 피하기 위해 이루어졌다고 관찰했다. 데이비슨은 "아버지와 군주로 선택됨"이라는 문구가 정복당한 군대 집단과 버에 적용되었으며 다른 왕과의 관계에는 적용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회의가 "복종"을 나타낸다는 생각은 가능성이 있어야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연대기 작가의 구절의 문서적 맥락은 회의에 대한 그의 해석을 의심스럽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의 다른 왕들의 종속을 강요하거나 조건을 지시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919년에 북서쪽 델웰과 맨체스터에 버를 건설하고 921년에는 북웨일즈의 클루이드 강 어귀에 클레데마타(루들란)를 건설하는 애설플래드의 정책을 계속했다.

919년부터 체스터에서 머시아와 웨일스의 반란을 진압한 그의 생애 마지막 해까지 머시아와 그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머시아와 동부 데인로는 10세기에 알려지지 않은 날짜에 전통적인 경계를 무시하고 주(shire)로 조직되었으며, 숀 밀러와 데이비드 그리피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가 919년부터 직접 통제권을 행사한 것이 머시아의 감성을 무시한 변화의 맥락일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변화에 대한 분노, 먼 웨식스의 통치 부과, 에드워드의 재무관들의 재정적 요구가 체스터에서 반란을 촉발했을 수 있다. 그는 반란을 진압한 직후인 924년 7월 17일 체스터에서 남쪽으로 12마일 떨어진 파른던의 왕실 영지에서 사망했으며 머시아와 웨식스는 저마다 애드워드의 아들들인 앨프워드애설스탠을 왕으로 세워 대립했지만 불과 16일만인 924년 8월 2일 옥스퍼드에서 죽으면서 동생인 애설스탠이 즉위했다.

애설스탠의 대관식은 925년 9월 4일 템스 강 상류의 킹스턴에서 거행되었는데, 아마도 웨식스와 머시아의 국경에 있는 상징적인 위치 때문일 것이다.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인 아셀름에 의해 대관되었는데, 이는 이전의 웨식스의 역대왕들의 대관식과 달랐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전까지 웨식스를 비롯한 앵글로색슨의 왕들은 투구를 쓴 채로 대관식을 했는데, 아셀름의 대관식은 처음으로 왕관을 쓴 새로운 예식 형태로 서프랑크 전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관식 이후에도 반대는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맬즈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앨프레드라는 알려지지 않은 귀족이 애설스탠의 추정된 사생아라는 이유로 그를 속이려고 음모를 꾸몄지만, 그가 스스로를 왕으로 만들려고 했는지 아니면 에설위드의 남동생인 에드윈을 대신해서 행동했는지는 알 수 없다. 속이려고 하는 것은 에설스탠이 반대 세력에 대한 숙청을 벌이지 않는 한 왕위에 오를 수 없게 만드는 데 충분한 장애가 되었을 것이다. 에설스탠과 윈체스터 사이의 긴장은 몇 년 동안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윈체스터 주교인 프리테스탄은 928년까지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에설스탠의 알려진 헌장도 목격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931년 사임할 때까지 꽤 정기적으로 목격했지만, 그의 선임자로서 자격이 있는 것보다 낮은 지위에 있었다.

에드워드는 에셀플래드와 그녀의 남편 에셀레드의 도움으로 머시아 동부와 앵글리아 동부의 데인족 영토를 정복했지만 에드워드가 죽었을 때 브리튼 섬에 남아 있던 바이킹 왕 시그트뤼그가 여전히 ​​요크 바이킹 왕국(이전에는 노섬브리아 남부 왕국인 데이라)을 통치하고 있었다. 926년 1월, 에셀스탠은 유일한 친누이가 시그트뤼그와 결혼하도록 했으며, 동시에 그가 기독교로 개종해야 한다고 조건을 걸었다. 두 왕은 서로의 영토를 침략하지 않고 서로의 적을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시그트뤼그는 애설스탠의 누이를 누이를 돌려보냈고, 기독교에서 다시 노르만 이교 신앙으로 회귀했지만 다음 해에 죽었고, 에셀스탄은 침략의 기회를 잡았다.

시그트뤼그의 사촌인 구드뢰드는 더블린에서 함대를 이끌고 왕위를 차지하려고 했지만, 에셀스탠은 쉽게 승리했다. 그는 요크를 점령한 후 데인족들의 복종을 받았다. 남부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그는 "노섬브리아 왕국을 계승"했으며, 그가 구드뢰드와 싸워야 했는지는 불확실하게 묘사했다. 남부 왕들은 북부를 통치한 적이 없었고, 그의 찬탈은 항상 남부의 지배에 저항해 온 노섬브리아인들의 분노에 부딪혔다. 그러나 927년 7월 12일, 페인리스 근처의 이몬트에서 알바의 왕인 카우산틴 2세, 데헤우바르스의 하이웰 다 국왕, 범버러의 엘드레드,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인 오웨인(또는 웬트의 모건 압 오웨인)이 애설스탠의 지배권을 받아들였다. 그의 개선으로 북부는 7년간 평화를 누렸다.
애설스탠은 북부 브리튼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한 최초의 잉글랜드의 왕이었지만, 그는 웨일스 왕에 대한 권한을 아버지와 고모로부터 물려받았다. 910년대에 웬트는 웨식스의 지배권을 인정했고 데헤우바르스와 귀네드는 애설플래드의 지배권을 받아들였다. 애드워드가 머시아를 점령한 후, 그들은 그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맬즈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이몬트에서 회의가 있은 후 애설스탠은 웨일스 왕들을 헤리퍼드로 불러들여 매년 막대한 조공을 부과하고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경계를 와이 강의 헤리퍼드 지역에 정했다. 웨일스의 주요 인물은 데헤우바르스의 하이웰였으며, 초기 중세 웨일스 역사가 토마스 찰스-에드워즈는 그를 "당시의 모든 왕들 중에서 '브리튼인의 왕'의 가장 확고한 동맹자"라고 묘사했다. 웨일즈 왕들은 928년에서 935년 사이에 애설스탠의 궁정에 참석했고 평신도 명단의 맨 위에 헌장이 있는 것을 목격했다(스코틀랜드와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을 제외하고). 이는 그들의 지위가 다른 위대한 인물들의 지위보다 우월하다고 여겨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동맹은 웨일즈와 잉글랜드 사이에, 그리고 웨일즈 내부에서 평화를 가져왔고, 이는 애설스탠의 통치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하지만 일부 웨일즈인들은 통치자들의 하위 왕으로서의 지위와 그들에게 부과된 높은 수준의 공물에 반감을 품었다.

맬즈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헤리퍼드 회의 이후 애설스탠은 엑서터에서 콘월인을 굴복시고, 성벽을 보강하고, 타마르 강에 콘월 경계를 정했다. 그러나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회의적으로 여기고 있다. 콘월은 9세기 중반부터 웨식스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토마스 찰스-에드워즈는 이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묘사하는 반면, 역사가 존 루벤 데이비스는 잉글랜드의 반란을 진압하고 콘월인을 타마르 강 너머로 고립시킨 것으로 보고 있다. 애설스탠은 새로운 콘월 교구를 설립하고 첫 번째 주교를 임명함으로써 자신의 통제력을 강조했지만 , 콘월은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유지했다.

애설스탠은 모든 앵글로색슨족의 첫 번째 왕이 되었고, 사실상 잉글랜드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성공은 존 매디콧이 영국 의회의 기원에 대한 역사에서 영국 왕권의 제국적 단계라고 부르는, 약 925년에서 975년 사이의 시작을 알렸다. 그때 웨일즈와 스코틀랜드의 통치자들이 잉글랜 왕들의 회의에 참석하여 그들의 헌장을 증인이 되었다. 애설스탠은 그의 새로운 영토인 노섬브리아의 귀족들을 그의 통치에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기독교를 강조하면서 베벌리, 체스터-르-스트리트 및 요크의 대성당에 선물을 아낌없이 주었다. 그는 또한 랭커셔의 광대한 영토인 Amounderness를 매입하여 그 지역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부관인 요크 대주교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원망받는 외부인으로 남았고 북부 잉글랜드 왕국들은 더블린의 이교도 노르드인과 동맹을 맺는 것을 선호했다. 남부 영국에 대한 그의 강력한 통제와 대조적으로 북부에서의 그의 입장은 훨씬 더 불안정했다.

933년 에드윈은 북해에서 난파선으로 익사했다. 그의 사촌인 불로뉴 백작 아델로프는 그의 시신을 생토메르의 생 베르탱 수도원으로 옮겨 매장했다. 수도원의 연대기 편찬자에 따르면, 에드윈이 왕이었다고 잘못 믿었던 폴퀸은 그가 "왕국의 어떤 혼란에 휩싸여" 영국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폴퀸은 에설스탠이 죽은 동생을 위해 수도원에 구호품을 보냈고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이 영국으로 왔을 때 호의적으로 맞이했다고 진술했지만, 폴퀸은 에설스탠이 수도사들이 944년 여행을 떠나기 전에 죽었다는 것을 몰랐다. 12세기 연대기 작가 더럼의 시메온은 에설스탠이 에드윈을 익사시키라고 명령했다고 말했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드윈은 형의 통치에 대한 반란이 실패한 후 영국에서 도망쳤을 수도 있고 그의 죽음으로 윈체스터의 반대가 끝났을 수도 있다.

934년에 애설스탠은 스코틀랜드를 침략했다. 그의 이유는 불분명하며 역사가들은 다른 설명을 내놓습니다. 933년에 그의 이복형제 에드윈이 죽자 웨식스에서 그의 통치에 반대하던 세력이 마침내 제거되었을 수도 있다. 노섬브리아를 잠시 통치했던 더블린의 노르드 왕 구드뢰드는 934년에 죽었다. 그로 인한 데인족들 사이의 불안정은 애설스탠에게 북부에 자신의 권위를 각인할 기회를 주었을 것이다. 934년에 밤버러의 엘드래드일 가능성이 있는 통치자가 죽었다는 것을 기록한 클론맥노이즈 연대기의 항목은 밤버러의 지배권을 놓고 애설스탠과 카우산틴 사이에 있었던 분쟁이라는 또 다른 가능한 설명을 시사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설명 없이 원정을 간략하게 기록했지만, 12세기 연대기 작가 우스터의 존은 카우산틴이 애설스탠과의 조약을 어겼다고 증언했다.

애설스탠은 934년 5월에 네 명의 웨일스 왕, 즉 데헤우바르스의 하이웰, 귀네드의 이드왈, 웬트의 모르간, 브리치니오그의 테우드르 압 그리프리와 함께 원정을 떠났다. 그의 수행원에는 18명의 주교와 13명의 엘더만도 포함되었는데, 그중 6명은 영국 동부에서 온 데인족이었다. 6월 말이나 7월 초에 그는 체스터에 도착하여 성 커스커버의 무덤에 후한 선물을 줬는데, 여기에는 원래 계모 엘프레드가 윈체스터의 프리테스탄 주교에게 선물로 주문한 스톨과 마니플(성당 의복)이 포함되었다. 침략은 육로와 해상을 통해 시작되었다. 더럼의 시메온에 따르면 그의 육군은 685년 에크프리드가 재앙적인 침략을 한 이후 잉글랜드군이 도달한 가장 북쪽 지역인 스코틀랜드 북동쪽의 던노타까지 약탈했고 함대는 당시 아마도 오크니의 노르드 왕국의 일부였을 케이스네스를 약탈했다.

원정 기간 동안에는 전투가 기록되지 않았고 연대기에는 그 결과가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9월에는 그는 버킹엄에 있는 영국 남부로 돌아갔고, 카우산틴은 그곳에서 하위 통치자로서 헌장을 목격하여 에셀스탠의 영주권을 인정했다. 935년에 카우산틴,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오웨인, 하이웰 다, 이드왈 포엘, 모건 압 오웨인이 헌장을 증명했습니다.같은 해 크리스마스에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오웨인은 웨일스 왕들과 함께 다시 에셀스탄의 궁정에 있었지만 카우산틴은 그렇지 않았다.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가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는 상황이 매우 달라졌다.

934년 올라프 구드뢰다르손이 아버지 구드뢰드의 뒤를 이어 더블린의 노르드 왕이 되었다. 노르드와 스코틀랜드의 동맹은 올라프가 카우산틴의 딸과 결혼하면서 굳건해졌다. 937년 8월까지 올라프는 아일랜드의 바이킹 지역을 지배하기 위해 경쟁자들을 물리쳤고, 그는 즉시 이전 노르드 왕국인 요크를 차지하기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올라프와 카우산틴은 개별적으로는 애설스탠에 대항하기에는 너무 약했지만, 함께라면 웨식스의 지배에 도전할 수 있었고, 둘 다 공통점으로 애설스탠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것들이 한 몫했다. 가을에 그들은 오웨인이 이끄는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오웨인과 연합하여 잉글랜드을 침략했다. 중세의 원정은 보통 여름에 진행되었고, 애설스탠은 그렇게 늦은 해에 그렇게 대규모의 침략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반응이 느렸던 듯하며, 맬즈버리의 윌리엄이 보존한 오래된 라틴어 시는 그가 "느긋한 여가에 시달렸다"고 비난했다. 동맹군은 애설스탠이 웨식스와 머시아 군대를 모으는 데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잉글랜드 북서쪽을 털어먹었다. 그러나 마이클 우드는 1066년의 하랄드와 달리 그는 성급한 행동을 자제해 패배할 수 있을 위험성을 피했다 주장하며 그의 신중함을 칭찬했다. 그가 북쪽으로 진군했을 때 웨일즈인들은 그에게 합류하지 않았고 어느 쪽에서도 싸우지 않았다.

937년 두 군대는 잉글랜드 북부로 추정되는 브루난버에서 대치했고, 에델스탠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그의 젊은 이복동생이자 미래의 에드먼드 왕의 지원을 받았다. 올라프는 군대의 잔당과 함께 더블린으로 도망쳤고, 카우산틴은 아들을 잃었다. 잉글랜드군도 큰 손실을 입었는데, 그 중에는 에드워드의 남동생인 에설웨어드의 아들이자 에델스탠의 사촌 두 명이 포함되었다.

이 전투에 대한 기록은 얼스터 연대기 에 다음과 같이 보고되어 있다.
색슨족과 노르스인 사이에서 잔혹하게 벌어진 크고 비참하고 끔찍한 전투가 있었는데, 셀 수 없이 많은 노르스인들이 쓰러졌지만 그들의 왕 올라프는 소수의 추종자들과 함께 탈출했다. 반대편에서는 많은 색슨족이 쓰러졌지만 색슨족의 왕 애설스탠은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한 세대 후에 연대기 작가 애설웨어드는 이 전투가 대중적으로 "대전"으로 기억되었으며, 애설스탠의 사후 명예는 "신의 승리"로 굳건해졌다고 보고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평소의 간결한 스타일을 버리고 위대한 승리를 자랑하는 영웅시를 썼으며, 잉글랜드의 언어를 사용하여 애설스탠을 잉글랜드 전체의 통치자로 묘사했다.

역사가들은 이 전투의 중요성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상술한 잉글래든군의 피해로 인해 알렉스 울프는 이를 에셀스탠의 " 피로스의 승리 "로 묘사햇다. 이 원정은 교착 상태로 끝난 듯하고, 그의 권력은 쇠퇴한 듯하며, 그가 죽은 후 올라프는 저항 없이 요르비크 왕국을 회복했다. 앨프리드 스미스는 이를 "앵글로색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투"로 묘사하지만, 그는 또한 에셀스탠의 통치 이후의 결과가 과장되었다고 보고 있다. 반면 사라 풋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전투의 중요성을 과장하기는 어렵다고 보고 있다. 앵글로색슨족이 패배했다면, 영국 본토 전체에 대한 그들의 패권은 붕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애셀스탠은 내치에도 주력했는데, 그는 할아버지 앨프레드 대왕과 아버지 에드워드의 정책을 고스란히 승계했다. 앵글로색슨 왕들은 왕 밑에서 가장 높은 평신도 지위를 가진 영주를 통해 통치했다 .9세기 웨식스에서 그들은 각자 하나의 샤이어를 통치했지만 10세기 중반에는 훨씬 더 넓은 지역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는데, 아마도 에셀스탠이 자신의 확장된 영토를 통치하는 문제를 다루기 위해 도입한 변화였을 것이다. 에셀스탠이라고도 불리는 영주 중 한 명은 영국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지방인 동앵글리아의 동부 데인로 영토를 통치했다. 그는 너무 강력해져서 나중에 에셀스탠 반왕으로 알려졌다. 헌장을 목격한 영주 중 몇몇은 스칸디나비아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온 지역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거의 확실히 에드워드 시대에 데인족 군대를 이끈 야를의 후계자였으며, 에셀스탠이 지방 정부에서 자신의 대표로 유지했다.

엘더만 아래에는 리브(고귀한 지역 토지 소유자였던 왕립 관리)가 마을이나 왕립 영지를 관리했다. 초기 중세 사회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권위가 분리되지 않았으며 평신도 관리들은 교구 주교와 지역 수도원장과 긴밀히 협력했으며, 이들은 또한 왕의 왕실 회의에 참석했다.

모든 앵글로색슨족의 첫 번째 왕으로서, 애설스탠은 자신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할 효과적인 수단이 필요했다. 그는 전임자들의 토대를 바탕으로 영국이 지금까지 본 가장 중앙 집권적인 정부를 만들었다. 이전에는 일부 헌장이 왕실 사제에 의해 작성되었고 다른 헌장은 종교 단체 회원에 의해 작성되었지만, 928년에서 935년 사이에는 역사가들에게 " 애설스탠 A "로 알려진 서기관에 의해 독점적으로 작성되어 중요한 활동에 대한 전례 없는 수준의 왕의 통제를 보여줬다. 이전 및 이후 헌장과 달리 "애설스탠 A"는 채택 날짜와 장소에 대한 모든 세부 정보와 비정상적으로 긴 증인 목록을 제공하여 역사가들에게 중요한 정보를 제공했다. "애설스탠 A"가 은퇴하거나 사망한 후 헌장은 더 단순한 형태로 되돌아갔으며, 공식적인 문서 작성 사무소의 발전이 아니라 개인의 작품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정부의 핵심 메커니즘은 왕의 의회(고대 영어로는 위탄)였다. 앵글로색슨 왕들은 고정된 수도가 없었다. 그들의 궁정은 순회적이었고, 그들의 의회는 왕국 주변의 다양한 장소에서 열렸다. 그러나 애설스탠은 주로 웨식스에 머물렀고, 그의 의회에 주요 인물들을 소집하여 외곽 지역을 통제했다.에드워드 1세 치세에 왕국이 확장될 때까지 충분했던 소규모의 친밀한 회의는 주교, 영주, 테인, 먼 지역의 거물, 그의 권위에 복종한 독립 통치자들이 참석한 대규모 회의로 자리를 옮겨졌다. 프랭크 스텐튼은 애설스탠의 의회를 "국민 의회"로 보고, 이는 영국의 통일에 대한 장벽이었던 지방주의를 무너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봤다. 존 매디콧은 더 나아가 이를 영국 정부에서 정의된 역할을 가진 중앙 집회의 시작으로 보고 애설스탠을 "영국 의회의 진정한 창시자에 가까운 왕으로 봤다.

앵글로색슨족은 북유럽계 게르만족 집단에서 최초로 행정 문서를 모국어로 작성한 사람들이었고, 고대 영어 법전은 7세기 초 켄트의 에델버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9세기 말의 앨프레드 대왕의 법전도 모국어로 작성되었으며, 그는 자신의 영주들이 그것을 배우기를 기대했다. 그의 법전은 반역, 평화 유지, 백부장 조직 및 사법 재판 과 같은 분야에서 프랑크 제국의 카롤루스 대제로 거슬러 올라가는 카롤링거 왕조의 법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것은 10세기 내내 유효했고, 애설스탠의 법전은 이 기초 위에 세워졌다. 법전은 왕의 승인이 필요했지만, 그것은 고정된 규정의 정전이라기보다는 지역 수준에서 조정하고 추가할 수 있는 지침으로 취급되었고, 관습 구전법도 앵글로색슨 시대에 중요했다.

애설스탠의 통치 기간 동안 다른 10세기 영국 왕보다 많은 법률 문서가 남아 있다. 가장 이른 시기의 문서는 십일조 칙령과 "자선 단체에 대한 조례"로 보인다. 930년대 초에 햄프셔의 그라들리 , 켄트의 엑스터, 페이버샴, 서리의 썬더필드에서 열린 왕립 협의회에서 4개의 법률 코드가 채택되었다. 런던과 켄트의 지역 법률 문서가 남아 있으며, 웨일즈 국경의 '던세테' 에 관한 문서도 아마도 애설스탠의 통치 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영국 법 역사가 패트릭 워멀드(Patrick Wormald )의 견해에 따르면, 이 법률은 926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애셀름(Athelm)의 뒤를 이어 울프헬름(Wulfhelm )에 의해 작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른 역사가들은 울프헬름의 역할을 덜 중요하게 여기며 주된 공로를 에셀스탄(Æthelstan) 자신에게 돌리지만, 이 시련이 교회 의식으로서 갖는 중요성은 교회의 영향력이 커졌음을 보여준다. 니콜라스 브룩스(Nicholas Brooks)는 주교들의 역할을 교회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데 점점 더 관여하는 중요한 단계로 보고 있다.

두 개의 가장 초기의 법전은 성직자 문제와 관련이 있었고, 애설스탠은 울프헬름과 그의 주교들의 조언에 따라 행동했다고 언급했다. 첫 번째 법전은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두 번째 법전은 애설스탠의 관리들에게 자선 의무를 강요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금액을 명시하고 관리들에게 매년 죄수 노예 한 명을 해방하도록 요구했다. 그의 종교적 관점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법을 더 광범위하게 신성시하는 데 나타냈다.

후기 법전은 그가 사회 질서, 특히 강도에 대한 위협에 대한 우려를 보여주는데, 그는 강도를 사회 붕괴의 가장 중요한 징후로 여겼다. 그라들리에서 발행된 후기 법전 중 첫 번째 법전은 12세 이상의 사람이 8펜스 이상의 물건을 훔치는 행위로 적발되면 사형을 선고하는 등 가혹한 처벌을 규정했다. 애설스탠이 엑스터 법전에서 인정했듯이, 이는 별 효과가 없었던 듯하다. "애설스탠 국왕이여, 공공의 평화가 제 바람이나 그라들리에서 정한 조항에 따라 유지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제 의원들은 제가 너무 오랫동안 이런 고통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의회는 다른 전략을 시도하여, 도둑이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면 사면을 제공했다. 강력한 가족이 범죄 친척을 보호하는 문제는 그들을 왕국의 다른 지역으로 추방함으로써 해결되었다. 이 전략은 오래가지 못했고, 썬더필드에서 에셀스탠은 강경 노선으로 돌아섰고, 사형의 최소 연령을 15세로 올려 완화했다. "그는 모든 곳에서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죽이는 것이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했고, 사소한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평화 유지에 공동 책임을 지는 10명 이상의 남자로 구성된 맹세 집단인 십일조 제도가 처음 도입되었습니다 (나중에 frankpledge 로 알려짐 ). 사라 풋은 절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일조와 맹세를 하는 것이 프랭키아에서 유래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절도를 에셀스탠에 대한 불충실과 동일시하는 것은 그에게는 특이한 듯합니다. 절도에 대한 그의 집착은 절도에 강하고, 절도의 원인에 강하며, 다른 왕의 법전에서는 직접적으로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역사가들은 애설스탠의 입법에 대해 크게 의견이 엇갈린다. 패트릭 워멀드같은 역사가들은 판결은 가혹했다고 말했다. "애설스탠의 입법의 특징은 그의 숭고한 열망과 그의 경련성 영향력을 나누는 심연이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애설스탠의 통치의 입법 활동은 '열광적'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결과는 솔직히 엉망진창이다. 그러나 사이먼 케인스의 견해에 따르면, "의심할 여지 없이 애설스탠 왕의 정부에서 가장 인상적인 측면은 그의 입법의 활력이다"는 것이다. 이는 그가 관리들에게 의무를 다하도록 이끌고 법을 존중하도록 주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또한 성가신 사람들을 통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음을 보여준다. 케인스는 그레들리 규정을 사회 질서를 유지하려는 왕의 결의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입법"으로 봤다.

970년대에 애설스탠의 조카인 에드거 왕은 앵글로색슨 영국에 유럽에서 가장 진보된 통화를 제공하기 위해 통화 시스템을 개혁했으며, 균일하고 풍부한 양질의 은화를 사용했다. 그러나 애설스탠의 시대에는 훨씬 덜 발달했고, 애설스탠이 국가를 통일한 후에도 오랫동안 지역별로 주화가 주조되었다.그레들리 법전에는 왕의 영토 전체에서 주화가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아버지의 법전에서 복사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으며, 주화 제조소가 있는 도시 목록은 런던과 켄트를 포함한 남쪽으로 제한되어 있지만 웨식스 북부나 다른 지역은 그렇지 않았다.애설스탠의 통치 초기에는 각 지역에서 다양한 스타일의 주화가 발행되었지만, 요크를 정복하고 다른 영국 왕들의 복종을 받은 후 그는 "국경 십자가" 유형으로 알려진 새로운 주화를 발행했다. 이것은 "Rex Totius Britanniae"라는 비문으로 그의 새롭게 높아진 지위를 알렸다. 웨식스, 요크, 그리고 잉글랜드의 머시아(머시아에서는 "Rex Saxorum"이라는 칭호를 달고)에서 예시가 주조되었지만 동앵글리아나 데인로에서는 주조되지 않았다.

930년대 초에 새로운 주화가 발행되었는데, "왕관을 쓴 흉상" 유형으로, 왕이 처음으로 세 개의 줄기가 있는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었다. 이것은 결국 통치자 초상화가 없는 주화를 발행한 머시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발행되었는데, 이는 사라 풋의 견해에 따르면, 머시아인들이 그들 사이에서 자란 웨식스 왕에 대한 충성이 빠르게 내려갔음을 시사하고 있다고 봤다.

앵글로색슨 시대에 교회와 국가는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성직자들은 왕의 연회와 왕립 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에설스탠의 통치 기간 동안 이러한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특히 캔터베리 대주교구가 에드워드가 머시아를 합병한 이후 웨식스의 관할권에 속하게 되었고, 에설스탠의 정복으로 북부 교회가 처음으로 남부 왕의 지배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애설스탠은 아마도 윈체스터 주교인 프리테스탠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자신의 측근들을 웨식스의 주교구에 임명했다. 왕의 미사 사제(왕의 집에서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고용된 사제)중 한 명인 앨페게가 웰스 주교가 되었고, 또 다른 사제인 베온스탠이 프리테스탠의 뒤를 이어 윈체스터 주교가 되었다. 베온스탠의 뒤를 이어 왕가의 또 다른 구성원인 앨프헤아가 되었다. 에드거의 통치 기간인 10세기 후반 베네딕토회 수도원 개혁의 주요 인물 두 명인 던스탠과 애설월드는 어린 시절 애설스탠의 궁정에서 봉사했으며 왕의 요청에 따라 윈체스터의 앨프헤아에 의해 사제로 성임되었다. 애설월드의 전기 작가 울프스탠에 따르면 "애설월드는 왕궁에서 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동행을 하며 오랜 시간을 보냈고 왕의 현인들로부터 그에게 유용하고 유익한 많은 것을 배웠다." 미래의 캔터베리 대주교인 오다도 애설스탠과 가까웠으며, 그는 그를 램즈버리 주교로 임명했다. 오다는 브루난버 전투에 참전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애설스탠은 유명한 유물 수집가였으며, 당시에는 이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지만, 그는 수집품의 규모와 그 내용의 정제로 유명했다. 둘의 성 삼손 수도원장은 그에게 선물로 몇 개를 보냈고, 그는 서한에서 "당신이 지상의 보물보다 유물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애설스탠은 또한 교회와 수도원에 사본과 유물을 관대하게 기부했다. 그의 명성이 너무 커서 나중에 일부 수도원 서기관은 그들의 기관이 그의 관대한 기부의 수혜자가 되었다고 거짓 주장했다. 그는 특히 체스터의 성 커스버트 숭배에 헌신했으며, 그곳 지역 사회에 대한 그의 선물에는 베데의 '커스버트의 삶'이 포함되었다. 그는 특별히 체스터에 선물하기 위해 그것을 위임했고, 그가 종교 재단에 준 모든 사본 중에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에서 전적으로 쓰여진 유일한 사본이다. 여기에는 애설스탠이 커스버트에게 책을 선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영국 왕의 가장 오래된 사본 초상화이다.

애설스탠은 교회를 세운 것으로 유명했지만, 이것이 얼마나 정당한지는 불분명하다. 후기의 모호한 출처에 따르면, 이 교회에는 도셋의 밀턴 수도원장과 서머셋의 무첼니에 있는 목사가 포함되었다 . 역사가 존 블레어의 견해에 따르면, 이 명성은 아마도 타당할 것이지만, "이러한 물은 애설스탠이 설립자로서 거의 민속적인 명성을 얻었기 때문에 흐려져, 그를 후대의 기원 신화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수도원에 관대한 기부자였지만, 새로운 수도원을 위해 땅을 주지 않았고 바이킹의 공격으로 파괴된 북부와 동부의 수도원을 되살리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대륙 교회와의 유대 관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했다. 첸발트는 우스터 주교로 임명되기 전에 왕실 사제였으며 , 929년에 그는 에셀스탄의 이복 자매 두 명과 함께 작센의 궁정으로 가서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가 그들 중 한 명을 아내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첸발트는 독일 수도원을 순회하며 에셀스탄을 대신하여 호화로운 선물을 주었고, 그 대가로 수도사들이 왕과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영원히 기도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결혼 동맹 이후 영국과 작센은 더욱 가까워졌고, 독일 이름이 영국 문서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첸발트는 이후 서신을 통해 연락을 유지하여 대륙의 개혁 수도원주의 사상을 영국으로 전파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애설스탠은 9세기 후반에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 교회 학문을 되살리려는 할아버지의 교육 정책을 고스란히 계승했다. 존 블레어는 애설스탠의 학문적 업적을 "특히 책의 유통과 제작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산산이 조각난 교회 문화의 확고한 재건"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에 경건함과 신성한 학습의 진흥으로 유명했다. 교육에 대한 그의 관심과 책과 유물 수집가로서의 명성은 특히 브르타뉴인과 아일랜드인을 비롯한 세계적인 교회 학자 그룹을 그의 궁정으로 끌어들였다. 애설스탠은 919년 바이킹이 브르타뉴를 정복한 후 브르타뉴에서 도망친 브르타뉴 성직자들에게 광범위한 지원을 제공했다. 그는 당시 중부 프랑스에서 망명 중이었던 브르타뉴의 돌 대성당 성직자들과 우애 협정을 맺었고, 그들은 그에게 브르타뉴 성인들의 유물을 보냈는데, 그의 후원을 바랐던 것 보인다. 이러한 접촉으로 영국에서 브르타뉴 성인을 기념하려는 관심이 급증했다. 애설스탠의 궁정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 중 한 명은 문법가 이스라엘도 있었는데, 그는 브르타뉴 사람이었을 수 있다. 이스라엘과 "어떤 프랑크인"는 아일랜드 주교인 더브인스를 위해 " 복음 주사위 "라는 보드 게임을 뽑았고, 그는 그것을 뱅거로 가져갔다. 애설스탠의 궁정은 잉글랜드 수도원 개혁 운동의 기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애설스탠의 통치 기간 동안 살아남은 산문 서사 자료는 거의 없지만, 그 기간 동안 풍부한 시가 탄생했으며, 그 중 많은 부분이 브루난버 시와 같이 웅장한 용어로 왕을 찬양하는 노르드어의 영향을 받았다. 사라 풋은 베오울프가 애설스탠의 서클에서 지어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애설스탠의 궁정은 웨식스 학자 알드헬름(  639 년경 ~709년)과 10세기 초 프랑스 수도원주의의 영향을 받아 후기 라틴 작가들의 정교한 해석적 스타일이 부활하는 중심지였다. 문법가 이스라엘과 같은 애설스탠의 궁정에 있는 외국 학자들은 실천자였다. 해당 양식은 길고 복잡한 문장과 희귀한 단어와 신조어에 대한 선호도가 특징이었다. "애설스탠 A" 헌장은 해석적 라틴어로 작성되었다.사이먼 케인스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들이 왕이 처음으로 영국을 그의 통치 하에 통일한 직후에 처음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며, 그것은 높은 수준의 지적 성취와 성공에 의해 활력을 얻고 새로운 정치 질서의 속성을 채택한 군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이 스타일은 애설스탠의 궁정에서 교육받은 애설월드와 던스탠과 같은 10세기 후반 수도원 개혁가들의 건축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이 운동의 특징이 되었다. "애설스탠 A" 이후 헌장은 더 단순해졌지만 해석적 스타일은 에드위그와 에드거의 헌장에서 다시 나타났다.

역사가 WH 스티븐슨은 1898년에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이 헌장 편찬자들의 목적은 가능한 한 많은 단어를 사용하고 찾을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럽고 과장된 단어를 선택하여 그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모든 문장은 불필요한 단어가 너무 많이 쌓여서 의미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화려하고 부분적으로 두음을 이루는 단어로 시작하는 첨부 절이 있는 호출은 작은 글씨로 된 20줄에 걸쳐 언어적 불꽃놀이가 타오르는 가운데 진행될 것이고, 불꽃놀이는 헌장 전체에 걸쳐 똑같이 화려하게 유지될 것이며, 독자는 유약에 눈이 멀고 연기에 눈이 멀어서 이러한 자주 번역할 수 없고 보통 끝이 없는 문장의 의미에 대해 불확실한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마이클 라피지는 해석적 양식이 현대인의 취향에 아무리 불쾌해 보여도 그것은 후기 앵글로색슨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현대 역사가들이 받은 것보다 더 많은 동정적인 관심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역사가 데이비드 우드먼의 관점에서 "애설스탠 A"는 "적지 않은 천재성을 지닌 개인 저자로 인정받아야 하며, 학위증의 법적 형식을 개편했을 뿐만 아니라 복잡하면서도 지속적으로 매혹적인 라틴어를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여러 면에서 "애설스탠 A"의 학위증은 앵글로색슨 외교 전통의 문체적 정점을 나타내며, 애설스탠 자신의 중대한 정치적 업적과 영국의 형성에 적합한 보완물이었다."

애설스탠은 유럽 본토의 왕실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웨식스 궁정은 카롤링거 왕조와 관련이 있었는데 , 이는 애설스탠의 증조부 애설울프와 서프랑크 왕 샤를 2세의 딸 유디트의 결혼, 그리고 앨프레드 대왕의 딸 앨프기스와 유디트가 재혼한 남편인 보두앵 사이에서 태어난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 2세의 결혼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애설스탠의 이복 자매 중 한 명인 애드기푸는 910년대 후반에 서프랑크 왕인 단순왕 샤를 3세와 결혼했다. 그는 922년에 폐위되었고, 애드기푸는 아들 루이를 잉글랜드의 안전한 곳으로 보냈다. 애설스탠의 시대에는 이러한 관계가 확고히 확립되었고, 그의 대관식은 카롤링거 왕조의 기름 부음 의식으로 거행되었는데, 아마도 그의 통치와 카롤링거 전통 사이에 의도적인 유사점을 찾기 위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933-938년의 그의 "왕관을 쓴 흉상" 주화는 카롤링거 왕조의 도상학에 따라 왕관을 쓴 왕을 표현한 최초의 앵글로색슨 주화였다.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에셀스탄은 자신의 여성 친척을 자신의 신하와 결혼시키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자매들은 수녀원에 들어가거나 외국인 남편과 결혼했다. 이것이 그가 유럽 궁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 한 가지 이유였고 그는 자신의 이복 자매 여러 명을 유럽 귀족과 결혼시켰다. 역사가 셰일라 샤프는 이것을 "빅토리아 시대까지 다시는 없었던 왕조의 결혼 활동의 폭발"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이유는 해협 양쪽이 바이킹의 위협에 저항하는 데 공통된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웨식스 왕가의 권력과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영국 공주와의 결혼이 유럽 통치자들에게 더 명예로운 것으로 여겨졌다. 926년 프랑크 공작 위그는 에셀스탄의 사촌인 불로뉴 백작 아델로프를 사자로 보내 에셀스탄의 자매 중 한 명과의 결혼을 요청했다. 말메스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아델울프가 가져온 선물에는 향신료, 보석, 많은 빠른 말, 순금 왕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검, 카롤루스의 창, 가시관 조각이 포함되었고, 애설스탠은 그의 이복 자매 애드힐드를 위그의 아내로 보냈다.

애설스탠의 가장 중요한 유럽 동맹은 동프랑크의 새로운 류돌핑거 왕조와 맺어졌다. 동프랑크의 카롤링거 왕조는 10세기 초에 멸망했고, 새로운 류돌핑거 왕인 하인리히 1세는 많은 사람들에게 왕에 적합한 자로 여겨졌다. 그는 아들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 왕실 결혼이 필요했지만 적합한 카롤링거 왕가의 공주가 없었다. 결국 카롤링거 왕가와 통혼했던 웨식스의 왕실이란 대안으로 봤는데, 특히 그들은 (잘못되게) 독일에서 숭배받던 7세기의 왕이자 성인인 오스왈드의 후손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929년 또는 930년에 하인리히는 애설스탠의 궁정에 사절을 보내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아들 오토의 아내를 구했다. 애설스탠은 이복 자매 두 명을 보냈고 오토는 이드기스를 선택했다. 50년 후, 앨프레드 대왕의 형의 후손인 에셀웨어드는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라틴어 버전을 에센의 수녀원장인 마틸데에게 보냈다. 마틸데는 에드기스의 손녀였으며 분명히 그것을 요청한 사람이었다. 이름이 불확실한 다른 자매는 알프스 근처의 군주와 결혼했지만 군주의 신원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초기 중세 유럽에서는 왕이 다른 왕의 아들을 위해 양아버지 역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애설스탠은 몰락한 젊은 왕족에게 지원을 제공한 것으로 유명했다. 936년에 그는 잉글랜드 함대를 보내어 바이킹에게 정복당한 그의 조상의 땅을 되찾기 위해 그의 양자인 브르타뉴 공작 알렌 2세를 도왔다. 같은 해에 그는 이복 누이 애드기푸의 아들인 루이가 서프랑크의 왕위를 차지하도록 도왔고, 939년에는 반항적인 귀족들과의 싸움에서 루이를 도우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한 또 다른 함대를 보냈다. 후대의 스칸디나비아 자료에 따르면 그는 노르웨이의 왕인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막내 아들인 호콘 1세에이리크 1세 블로됙스로 부터 그의 왕위를 되찾도록 도왔고 그는 노르웨이인들 사이에서 "Æthelstan the Good"로 알려졌다.

애설스탠의 궁정은 아마도 앵글로색슨 시대의 가장 국제적이었을 것이다. 잉글랜드와 유럽 궁정 사이의 긴밀한 접촉은 그의 죽음 직후에 끝났지만 잉글랜드 왕실에서의 계승은 오랫동안 대륙의 통치 가문에게 명예의 원천으로 남았다. 프랭크 스탠턴이 그의 저서 앵글로색슨 영국 시대에 대한 역사에서 "오파와 크누트 사이에 유럽의 일반 문제에 그토록 두드러지게 활약하거나 그토록 지속적인 역할을 한 영국 왕은 없었다."라고 밝혔다.

외국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찬양하는 용어로 묘사했다. 프랑스 연대기 작가 플로도아르는 그를 "해외에서 온 왕"이라고 묘사했고, 얼스터 연대기는 "서구 세계의 존엄성의 기둥"이라고 묘사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비슷한 견해를 취했다. 마이클 우드는 "에셀스탄 왕의 제국의 형성: 영국의 카롤루스?"라는 에세이의 제목을 붙였고, 그를 "로마인 이후로 영국이 본 가장 강력한 통치자"라고 묘사했다. 베로니카 오르텐버그의 관점에서 그는 바이킹을 거듭해서 격파한 군대를 가진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다. 대륙의 통치자들은 그를 카롤링거 황제로 보았고, 그는 "분명히 새로운 카롤루스로 대우받았다"고 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웨식스 왕들은 권력과 성공의 아우라를 지녔고, 그로 인해 920년대에 점점 더 강력해졌지만, 대부분의 대륙 가문은 군사적 문제에 시달리고 내전에 휘말렸다. 내전과 대륙에 대한 바이킹의 공격으로 카롤링거 제국의 통일이 종식되었고, 이미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지만, 군사적 성공으로 애설스탠은 국내에서 승리하고 전사 왕들의 위대한 영웅 왕조라는 명성을 넘어서 카롤링거 왕조의 이념을 발전시키려고 시도할 수 있었다.

939년 10월 27일 글로스터에서 애설스탠은 마지막 브래트왈다로 죽었다. 애설스탠는 혼인도 하지 않았기에 후사가 없었고, 결국 이복 동생인인 에드먼드 1세가 왕위에 오른다.애설스탄의 죽음을 알게 된 요크 바이킹들은 브루난버 전투에서 패배한 바이킹 군대를 이끈 더블린의 바이킹 왕인 올라프 구드뢰다르손을 불려들여 왕위를 올렸다. 울라프는 939년 말까지 요크에 있었고 이듬해 그는 에드워드와 애설플래드가 정복한 요크 왕국의 남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북동쪽 머시아를 침공했다. 그는 노샘프턴으로 진군했지만 격퇴당했고, 그다음에는 옛 머시아 왕조의 중심지인 탬워스를 습격하여 양측 모두 상당한 인명 피해를 입혔다. 북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는 에드먼드가 이끄는 군대에게 레스터에서 붙잡혔지만, 바이킹을 대신하여 요크의 대주교 울프스탄과 아마도 잉글랜드를 대신하여 행동한 캔터베리 대주교의 중재로 전투는 중지되었다. 그들은 레스터에서 링컨, 레스터, 노팅엄, 스탬포드, 더비의 5개의 데인로 자치구를 울라프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조약을 채결했다 .이것은 에드워드가 10세기 초에 바이킹 정복을 시작한 이후 잉글랜드가 맞이한 첫 번째 심각한 위기었고, 역사가 프랭크 스텐튼 은 이를 "불명예로운 항복"이라고 묘사했다. 울라프는 잉글랜드 기준보다 낮은 바이킹들의 도량형으로 요크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그러나 울라프는 941년에 사망하여 애드먼드는 손실을 반전할 수 있게 되었다. 942년에 그는 F다섯 자치구를 회복했다. 그의 승리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겨져서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다음과 같은 시로 기념되었다.
여기, 친애하는 잉글랜드의 수호자이자, 사랑받는 행위의 선동자인 에드먼드 왕은 도레 휘트웰 갭 과 험버 강으로 둘러싸인 넓은 바다의 흐름인 머시아를 정복했다. 레스터와 링컨, 노팅엄, 스탬포드, 더비의 다섯 자치구도 있었다. 이전에 데인족들은 노르만족의 지배를 받았고, 이교도의 포로 족쇄에 강제로 복종당했으며, 에드워드의 아들, 전사들의 수호자인 에드먼드 왕의 명예 아래 다시 몸값을 치르기 전까지 오랜 시간 동안 복종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다른 10세기 시와 마찬가지로 이 시는 영국 민족주의와 웨식스 왕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며, 이 경우 기독교 잉글랜드인과 덴마크인이 에드먼드 휘하에서 연합하여 노르드(노르웨이) 이교도에 대한 승리의 저항을 보여주고 있다. 스텐턴은 이 시가 15년간의 애설스탠의 통치 이후 동부 머시아의 덴마크인이 자신들을 영국 왕의 합법적인 신민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고 언급했다. 무엇보다도 현대 작가들은 종종 무시하지만 이 기간 동안 영국의 전체 역사의 기초가 되는 덴마크인과 노르드인 간의 적대감을 강조하고 있다. 영어로 쓰인 최초의 정치시이며, 작가는 정치적 현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윌리엄스는 회의적이며, 이 시는 동시대의 작품이 아니며, 동시대 사람들이 그들의 상황을 그런 관점에서 보았는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고 있다. 같은 해에 에드먼드는 북부 머시아에 있는 대규모 영지를 유력한 귀족인 울프시게 더 블랙에게 부여하여, 데인로에 있는 땅을 지지자들에게 부여하여 바이킹에 저항할 수 있는 관심을 갖게 하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속했다.

울라프의 뒤를 이어 요크의 왕이 된 사람은 그의 사촌인 올라프 쿠알란으로, 그는 943년에 애드먼드를 대부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는 그가 웨식스의 지배권을 받아들였음을 시사했다.쿠알란은 자신의 주화를 발행했지만, 요크에서 다른 두 이름으로도 주화가 발행되었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라이벌이 있었다. 울라프 구드뢰다르손의 형제인 라그날은 애드먼드의 후원으로 세례를 받았고, 다른 이름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Sihtric이었습니다.세 사람의 주화는 모두 같은 디자인으로 발행되었는데, 이는 공동 권한을 시사하고 있다. 944년에 애드먼드는 요크의 바이킹 통치자들을 몰아내고 이전에 바이킹을 지원했던 대주교 울프스탠과 940년에 애드먼드가 임명한 머시아의 엘더만, 아마도 애설먼드의 도움으로 도시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에드먼드가 죽었을 때, 그의 후계자인 이드리드는 노섬브리아에서 더 많은 반란에 직면했고, 이는 954년까지 최종적으로 진압되지 않았다. 밀러의 견해에 따르면, 에드먼드의 통치는 "에설스탠이 노섬브리아를 정복했지만 여전히 통일된 잉글랜드의 일부가 아니었고, 이드리드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는 그렇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노섬브리아인의 거듭된 반란은 그들이 분리주의적 야망을 유지했음을 보여주며, 이는 연이은 남부 왕들의 압력에 의해서만 포기되었다. 에설스탠과 달리 에드먼드와 이드리드는 영국 전체에 대한 관할권을 거의 주장하지 않았지만, 각자는 때때로 노섬브리아를 통제하지 못할 때에도 자신을 '앙글랜드의 왕'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에드먼드는 헌장에서 940년과 942년에 때때로 자신을 "앵글로색슨족의 왕"이라는 더 낮은 칭호로 부르기도 했으며 945년에 노섬브리아를 완전히 장악한 후에야 자신이 전체 브리튼의 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주화에서 자신을 Rex Totius Britanniae 라고 설명한 적이 없었다.

에드먼드는 에설스탄으로부터 웨일즈 왕들에 대한 영유권을 물려받았지만, 웨일즈 북부의 귀네드의 왕인 이드월 포엘은 에드먼드의 초기 약점을 이용하여 충성을 거부했고, 캄브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942년에 잉글랜드에 의해 살해된 울라프를 지원했을 수도 있다. 942년에서 950년 사이에 그의 왕국은 웨일즈 남부 의 데헤이바쓰의 왕인 하이웰 다 에게 정복당했는데, 웨일즈 역사가 토마스 찰스-에드워즈는 그를 "당시의 모든 왕들 중에서 잉글랜드의 '황제'들의 가장 든든한 동맹자"라고 묘사했습니다.웨일즈 왕들이 잉글랜드의 헌장에 대한 증언을 하는 것은 에설스탄의 통치 때보다 드물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역사가 데이비드 덤빌의 견해로는 에드먼드가 웨일즈 왕들에 대한 영유권을 유지했다는 데 의심할 이유가 없다. 데번의 토지를 처분한 944년 헌장에서 에드먼드는 "잉글랜드의 왕이자 이 영국 지방의 통치자"로 칭해졌으며 이는 이전의 영국 왕국인 덤노니아가 여전히 영국에 완전히 통합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 사이먼 케인즈는 에드먼드의 직함 문구에 "어떤 '지역적' 간섭"이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다.

945년까지 스코틀랜드와 어스트라드클리드는 모두 브루넌버 이후 왕위에 오른 왕들이 있었고 스코틀랜드가 영국과 동맹을 맺은 반면 어스트라드클리드는 바이킹과의 동맹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 해에 에드먼드는 어스트라드클리드를 정복했습니다. 13세기 연대기 작가 웬도버의 로저에 따르면, 이 침략은 하이웰 다의 지원을 받았고 에드먼드는 어스트라드클리드 왕의 두 아들을 눈멀게 했는데, 아마도 아버지에게서 왕위에 합당한 상속인을 빼앗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이고 있다. 그런 다음 에드먼드는 육지와 바다에서 왕국을 방어하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스코틀랜드의 말 콜룸 1세에게 왕국을 주었는데, 이 결정은 역사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Dumville과 Charles-Edwards는 이를 애드먼드의 영유권 인정을 조건으로 어스트라드클리드를 스코틀랜드 왕에게 양도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반면 윌리엄스는 이것이 그가 더블린의 바이킹에 대한 동맹을 조건으로 말 콜룸이 해당 지역의 영유권을 갖는 데 동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스탠턴과 밀러는 이를 애드먼드가 노섬브리아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북쪽 한계임을 인정한 것으로 보고 있다.

카트로라는 아일랜드 수도사의 성인 전기에 따르면, 그는 스코틀랜드에서 대륙으로 여행하는 동안 잉글랜드를 여행했다. 에드먼드는 그를 궁정으로 불렀고 캔터베리 대주교 오다는 그를 림프네에 있는 그의 배에 태웠다. 여행하는 성직자들은 이 기간 동안 사본과 사상의 유통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카트로가 에드먼드의 궁정에 있던 유일한 켈트 성직자였을 가능성은 낮다.

에드먼드는 애설스탠의 세계적인 궁정에서 강력한 대륙과의 접촉을 물려받았으며, 이는 누이들이 외국의 왕과 왕자와 결혼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에드먼드는 형의 대륙 정책을 계승하여 동맹을 유지했는데, 특히 서프랑크의 루이 4세와 동 프랑크의 왕이자 미래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오토 1세와의 동맹을 유지했다. 루이는 오토의 조카이자 처남이었고, 오토와 에드먼드는 처남이었다. 에드먼드와 대륙의 통치자 사이에 기록되지 않은 광범위한 외교적 접촉이 있었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지만, 오토가 에드먼드의 궁정에 사절을 보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940년대 초, 일부 노르망디의 영주들은 루이에 대항하여 덴마크 군주 하랄드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945년 하랄드는 루이를 붙잡아 프랑크 공작 위그 대공에게 넘겼고, 위그 대공은 루이를 포로로 잡았다. 에드먼드와 오토는 이에 대해 항의하며 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지만, 이는 라온 시를 위그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이루어졌다.

에드먼드의 이름은 스위스 의 Pfäfers 수도원의 형제회 책에 있는데, 아마도 대주교 오다가 로마로 갔거나 로마에서 팔리움을 받기 위해 그곳에 머물 때 요청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외교 사절단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아마도 애설스탠의 통치 때부터 계속된 잉글랜드와 대륙 성직자 간의 광범위한 접촉에 대한 희귀하게 남은 증거를 나타냈다.

에드먼드는 동앵글리아의 영지 관리인(ealdorman)인 에설스탠 반왕, 윈체스터 주교인 에프히, 램즈베리 주교인 오다와 같은 형의 권위과 주요 고문을 물려받았는데, 오다는 에드먼드에 의해 941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에설스탠은 932년 영지 관리인으로서 처음으로 헌장을 목격했고, 에드먼드가 즉위한 지 3년 이내에 그의 형제 두 명이 영지 관리인으로 합류했다. 그들의 영토는 잉글랜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그의 아내는 미래의 에드거 왕을 양육했다. 역사가 시릴 하트는 에드먼드 통치 기간 동안 형제들의 권력을 1세기 후의 고드윈 가문의 권력과 비교했다. 의붓아들의 통치 기간 동안 일식을 겪었던 에드먼드의 어머니 에드기푸도 매우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940년 상반기에는 애설스탠의 통치가 끝난 때와 비교했을 때 엘더만의 증명서에 변화가 없었지만, 그해 후반에는 엘더만의 수가 4명에서 8명으로 두 배로 늘어났으며, 새로운 엘더만 중 3명이 머시아 지역을 담당했다. 942년 보조금으로 인해 애설스탠 반왕의 가족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이러한 임명은 울라프의 침략을 다루기 위한 애드먼드의 조치의 일부였을 수 있다.

에드기푸와 이드리드는 애드먼드의 많은 헌장을 증명하여 높은 수준의 가족 협력을 보여줬다. 처음에는 에드기푸가 먼저 증명했지만 943년 후반이나 944년 초반부터 이드리드가 우선권을 차지했는데, 아마도 그의 권위가 커졌음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에드기푸는 항상 regis mater (왕의 어머니)로서 종교 기관과 개인에게 부여된 모든 보조금을 포함하여 약 3분의 1을 증명했다. 이드리드는 형의 헌장의 절반 이상을 증명했다. 헌장 증명에서 에드기푸와 이드리디의 두드러진 위치는 다른 웨식스 왕의 어머니와 남성 친척과는 비교할 수 없다.

925년에서 975년경은 앵글로색슨 왕실 헌장의 황금기였으며, 당시 헌장은 왕정의 도구로서 절정에 달했고, 에드먼드의 헌장 대부분을 작성한 서기관들은 그가 동생에게서 물려받은 왕실 비서실을 구성했다. 928년에서 935년 사이에는 학자들이 애설스탠 A 라고 부르는 매우 학식이 풍부한 서기관이 매우 정교한 스타일로 헌장을 작성했다. 케인즈는 이렇게 논평합니다. "애설스탠 A가 초안하고 쓴 증서의 영광과 복잡성에 대해 숙고해야만 그 뒤에 나온 증서의 우아한 단순함을 감상할 수 있다." 에드먼드 C로 알려진 서기관은 애설스탠의 통치 기간 동안 복음서( BL Cotton Tiberius A. ii folio 15v)에 비문을 썼고, 944년에서 949년 사이에 에드먼드와 이드리드를 위해 헌장을 썼다.

에드먼드의 헌장 대부분은 에드먼드 C의 헌장을 포함하여 외교 "주류"에 속하지만, 4개는 주로 이드리드의 통치로 거슬러 올라가는 '두문자어 헌장'이라는 그룹의 일부입니다. 이 헌장은 매우 학식이 풍부한 학자, 거의 확실히 우스터 주교 센월드의 서클에 있는 누군가, 또는 아마도 주교 자신이 초안했다. 이 헌장은 같은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의 비율이 높고 특이한 단어가 사용된다는 특징이 있다. 벤 스눅은 이 헌장을 "인상적인 문학 작품"이라고 묘사하며, 그 시대의 많은 글과 마찬가지로 그 스타일은 주요 학자이자 8세기 초 셔본 주교였던 알드헬름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 .

10세기에 일반적으로 사용된 유일한 동전은 페니였습니다 . 에드먼드의 통치 기간 동안 주요 동전 디자인은 H(수평) 유형이었으며, 앞면에 십자가나 기타 장식이 있고, 그 주변에 왕의 이름과 주화 제작자 의 이름이 수평으로 적힌 원형 비문이 있다. 동앵글리아와 덴마크 샤이어에는 BC(Bust Crowned) 유형도 상당수 있었다. 이것들은 앞면에 종종 조잡하게 그려진 왕의 초상화가 있었다. 에셀스탠 통치 기간 중 한 기간 동안 많은 동전에 조폐국이 그려졌지만, 에드먼드가 즉위할 무렵에는 BC 유형의 주화가 940년대에도 계속되었던 노리치를 제외하고는 드물어졌다.

에드워드 1세의 통치 이후 에설스탠 통치 하에서 주화의 무게가 약간 감소했으며, 이러한 악화는 940년경 이후로 심해져서 973년경 에드거가 주화를 개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매우 작은 표본을 기준으로 볼 때 에드먼드 통치 하에서 은 함량이 감소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주화의 지역적 다양성이 증가했으며, 이는 에드거 통치 초기에 디자인이 비교적 통일될 때까지 20년 동안 지속되었다.

그 밖에도 애드먼드는 이북 형인 애설스탠의 법 개혁 전통을 이어갔다. 그가 개혁한 법률들은 I Edmund, II Edmund 및 III Edmund라고 분류되어 있다. 반포된 순서는 명확하지만 반포 날짜는 명확하지 않는다. I Edmund는 교회 문제를 다루는 반면 다른 법전은 공공 질서를 다루고 있다.

에드먼드 1세는 에드먼드가 소집하고 대주교 오다와 울프스탠이 참석한 런던 공의회에서 공포되었다. 이 법전은 오도가 이전에 공포한 "헌법"과 매우 유사하다. 독신이 아닌 성직자는 재산을 잃고 봉헌된 땅에 매장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교회 회비와 교회 재산 의 회복에 관한 조항도 있었다. 살인자가 자신의 범죄에 대한 속죄를 하지 않는 한 왕의 근처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은 왕권의 신성함에 대한 강조가 증가하고 있음을 반영했다. 에드먼드는 마법과 우상 숭배와 관련된 법률을 공포한 몇 안 되는 앵글로색슨 왕 중 한 명이었으며, 이 법전은 위증과 마법 약물의 사용을 비난했다. 위증과 마법에서 약물을 사용하는 것 사이의 연관성은 전통적이었는데, 아마도 둘 다 종교적 맹세를 어기는 것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II Edmund에서 왕과 그의 고문들은 "우리 가운데 있는 수많은 불법적인 폭력 행위에 대해 크게 괴로워하고" 있으며 "평화와 화합"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언급되어 있다. 주된 초점은 혈전을 규제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당국(witan)은 살인에 따른 복수를 중단해야 한다. 대신 살인자는 피해자의 친척에게 wergeld (보상금)를 ​​지불해야 한다. wergeld가 지불되지 않으면 살인자는 불화를 겪어야 하지만 교회와 왕궁에서 그를 공격하는 것은 금지된다. 살인자의 친족이 그를 버리고 wergeld에 기여하고 그를 보호하기를 거부하면 왕은 그들이 불화에서 면제되기를 원한다. 피해자의 친족 중 누구든지 그들에게 복수하면 왕과 그의 신하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모든 소유물을 잃게 될 것이다. 역사가 도로시 화이트록의 관점에서, 불화를 통제하기 위한 법률의 필요성은 부분적으로 보상을 받아 분쟁을 해결하는 것보다 복수를 추구하는 것이 더 남성적이라고 믿는 데인족 정착민의 유입 때문이었다. 여러 스칸디나비아 차용어가 이 코드에 처음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농장을 공격하는 범죄인 hamsocn의 경우, 처벌은 가해자의 모든 재산을 잃는 것이고, 왕은 그가 목숨을 잃을지 여부를 결정한다. 스칸디나비아 차용어는 에드먼드의 다른 코드에서는 발견되지 않으며, 이 규범은 특히 그의 덴마크 신민을 겨냥했을 수 있다. 에드먼드가 폭력 수준에 대한 우려와 대조적으로, 그는 도난을 방지하는 데 성공한 그의 백성들의 환호를 받았다. 이 규범은 법을 지지하는 데 있어 더 큰 지역적 주도권을 장려하는 동시에 에드먼드의 왕의 위엄과 권위를 강조했다.

앵글로색슨 왕과 그들의 지도자들 사이의 관계는 개인적이었다. 왕은 충성과 복종의 서약에 대한 대가로 군주이자 보호자였으며, 이는 데번의 콜리튼에서 발행된 III 에드먼드에서 처음으로 카롤링거 왕조의 법률 에 근거한 용어로 설명되었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거룩한 것이 거룩한 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에드먼드 왕에게 충실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 마치 사람이 군주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처럼, 공개적으로든 비밀스럽게든 어떠한 분쟁이나 불화 없이, 그가 선호하는 것을 선호하고 그가 무시하는 것을 무시해야 한다." 신의 보복에 대한 위협은 법을 어기고 불충실한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강제력이 제한되어 있던 사회에서 중요했다. 군사 역사가 리차드 아벨스는 "모든 사람"(omnes)이 맹세해야 한다는 것이 문자 그대로 모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 법원에서 왕의 대신이 집행하는 선서를 할 자격이 있는 사람들, 즉 중간 및 대지주를 의미해야 하며, 에드먼드의 선서는 모든 사람을 그에게 개인적으로 묶어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다고 주장했다. 지배권에 대한 강조는 군주가 추종자들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들을 위해 보증을 서야 하는 의무를 명시한 조항에서도 더욱 잘 드러났다.

III 에드먼드는 또한 도난, 특히 가축 도둑질을 방지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지역 사회는 산 도둑이나 죽은 도둑을 잡는 데 협조해야 하며 도난당한 가축을 추적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하며 거래는 고위 관리, 사제, 재무관 또는 항구 관리자가 입회해야 했다. 법률 역사가 패트릭 워멀드가 끔찍하다고 묘사한 조항에 따르면 "우리는 노예에 관해, 만약 그들 중 다수가 도난을 저지르면 그들의 지도자를 잡아서 죽이거나 교수형에 처하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 세 번 채찍질을 당하고 두피를 제거하고 새끼손가락을 절단하여 죄의 표시로 삼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 법전은 지방 정부의 행정 단위로서 헌드레드(hundrad)에 대한 첫 번째 언급을 담고 있는데, 도둑을 잡는 데 도움을 거부하는 사람은 왕에게 120실링, 헌드레드에게는 30실링을 내야 한다고 요구하는 조항이다.

윌리엄스는 "두 번째 법전과 콜리톤 입법에서 중세 사회의 네 기둥인 왕권, 영주권, 가족, 이웃의 기능이 분명히 드러난다"고 언급했다. 워멀드는 이 법전을 "다양한 앵글로색슨 법률 문서에서의 교훈"이라고 설명하지만, 그는 이 법전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특히 살인을 왕족에 대한 모욕으로 다루는 것으로 확장되는 고조된 수사적 톤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역사가 알라릭 트라우스데일은 "지방 행정 기관에 대한 명시적 자금 지원과 법 적용에 있어 지방 공무원의 더 큰 권한 부여"를 에드먼드 입법의 원래 기여로 보고 있다. 에드먼드는 그의 손자 에셀레드 2세의 법률에서 과거의 현명한 입법자 중 한 명으로 나열되어 있다 .

10세기의 주요 종교 운동인 영국 베네딕토회 개혁은 에드거 시대에 절정에 달했지만 에드먼드의 통치는 오다와 앨피에가 이끈 초기 단계에 중요했는데, 둘 다 수도사였다. 오다는 플뢰리 수도원을 비롯한 대륙의 개혁 중심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그는 앨피에의 주요 고문이었고 936년에 루이가 프랑크 왕으로 프랑스로 복귀하도록 협상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던스턴은 개혁의 핵심 인물이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고 그의 첫 번째 전기 작가에 따르면 그는 에드먼드의 궁정에서 주요 인물이었지만 그의 적들이 에드먼드에게 그를 추방하도록 설득했지만 왕은 간신히 죽음을 모면한 후 마음을 바꾸어 글라스턴베리에 수도원을 포함한 왕실 영지를 주었다. 윌리엄스는 그가 이 기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부정한다. 그의 형은 헌장을 증명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에드먼드는 궁정에서 너무 큰 파괴적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를 멀리하기 위해 던스턴에게 수도원을 주었을 수 있다. 그는 미래의 또 다른 개혁 지도자인 에설월드와 합류했고 그들은 다음 10년의 대부분을 글라스톤베리에서 베네딕토회 문헌을 연구하는 데 보냈는데, 이곳은 수도원 개혁을 전파하는 최초의 중심지가 되었다.

에드먼드는 아마도 945년 스코틀랜드로 가는 길에 체스터-르-스트리트 교회에 있는 성 커스버트 성지를 방문했다. 그는 성지에서 기도하고 자신과 군대를 성자에게 맡겼다. 그의 부하들은 성지에 60파운드를 바쳤고, 에드먼드는 성자의 몸에 금 팔찌 두 개를 씌우고 값비싼 팔리아 그라에카 (그리스 천) 두 개를 몸에 감았다. 팔리아 그라에카 중 하나는 아마도 커스버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자연의 여신 실크"로 알려진 훌륭한 비잔틴 실크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는 또한 "성 커스버트의 전 영토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나은 평화와 법을 부여했다." 에드먼드가 성지에 대한 존경과 지원을 보여준 것은 북부의 성 커스버트 공동체의 정치적 권력과 남부의 그에 대한 경의를 모두 반영했다. 맬즈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에드먼드는 에이단(Aidan)과 같은 노섬브리아의 중요한 성인들의 유물을 남쪽의 글라스턴베리 수도원(Glastonbury Abbey)으로 가져왔다.

종교 부흥의 또 다른 신호는 수도 생활을 채택한 귀족 여성의 수였다. 윌튼 수도원의 후원자였던 앨프기드라는 수녀와 에드먼드의 첫 번째 아내의 어머니인 윈프래드를 포함하여 여러 여성이 에드먼드로부터 보조금을 받았다. 애설스탠은 수녀원장에게 두 개의 영지를 부여했고, 에드먼드는 일곱 번, 이드리드는 네 번 부여했다. 그 후 한 번의 추가 기부를 제외하고는 그 관행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기부의 의미는 불확실하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설명은 10세기 중반에 일부 수도 귀족 여성에게 영지가 부여되어 수녀원을 설립하거나 자신의 집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소명을 추구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에드먼드의 아들 에드거의 통치 기간 동안 애설월드와 그의 동료들은 베네딕토회 수도원주의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종교 생활의 형태라고 주장했지만, 이는 에드먼드와 같은 이전 왕들의 견해가 아니었다. 그는 종교를 지원하는 데 관심이 있었지만 종교 발전에 대한 특정 이념에는 헌신하지 않았다. 그는 보조금에서 애설스탄의 정책을 이어갔다. 제라르 드 브로뉴가 944년 베네딕토회 규칙을 부과하여 생베르탱 수도원을 개혁했을 때 , 변화를 거부한 수도사들은 영국으로 도망쳤고 에드먼드는 그들에게 바스에 있는 왕실 소유의 교회를 주었다. 그는 수도사들이 933년 바다에서 익사한 그의 이복형제 에드윈에게 장례를 치러 주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동기가 있었을 수 있지만, 이 사건은 에드먼드가 단 하나의 수도원 규칙만 유효하다고 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는 개혁되지 않은 Bury St Edmunds Abbey에 특권을 부여했을 수도 있지만 헌장의 진위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영어&라틴어 학습은 대륙 모델과 7세기의 주요 학자이자 셔본 주교인 알드헬름의 해석적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에델스탄의 통치 기간에 부활했다. 부흥은 에드먼드의 통치 기간에도 계속되었고 웨일즈 서적 제작은 점점 더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웨일즈 사본은 연구되고 복사되었으며, 대륙의 출처도 중요하지만 영국에서 카롤링거 소문자 문자를 일찍 사용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에드먼드의 통치 기간에는 또한 토착 사각 소문자 문자의 새로운 스타일이 개발되어 19세기 중반의 왕실 학위에 사용되었다. 캔터베리에 있는 오다의 학교는 정복 이후의 연대기 작가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는데, 특히 뛰어난 대륙 학자이자 10세기 중반 영국에서 가장 뛰어난 시인이었던 프리테고드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인의 역사(Historia Brittonum)의 "바티칸" 개정판은 에드먼드 통치 기간인 944년에 영국에서 제작되었다.

946년 5월 26일 사우스 글로스터셔에 위치한 퍼클처치에서는 성 어거스틴 축일 미사가 있었다. 이 자리에는 그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레오파라는 추방당한 범죄자가 있었다. 귀족들과 연회를 즐기던 에드먼드는 레오파를 목격하였고, 그를 내쫓는 과정에서 에드먼드는 레오파에게 살해되었다. 일각에서는 에드먼드가 레오파로부터 그의 하인을 지키다가 죽임을 당했다고도 한다. 이로써 일국의 왕은 한낱 범죄자에 의해 허무한 죽음을 맞았다. 당시 에드먼드의 나이는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사망한 에드먼드의 유해는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에드먼드의 두 아들 에드위그와 에드거는 왕관을 쓰기엔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의 동생 이드리드가 왕위를 계승했다. 에드먼드와 마찬가지로 이드리드는 영국 왕국 전체를 물려받았지만 곧 노섬브리아를 잃었고 그것을 되찾기 위해 싸워야 했다.노섬브리아에는 여러 라이벌 세력이 있어 상황이 복잡했다. 바이킹인 올라프 쿠알란은 여러 시기에 더블린과 남부 노섬브리아 왕국인 요크를 통치했다. 940년대 초 요크의 왕이었을 때 그는 에드먼드를 대부로 삼아 세례를 받아 그의 통치에 복종함을 나타냈고 그의 동전은 영국의 디자인을 따랐지만 에드먼드는 944년에 그를 추방했다.울라프와 노르웨이의 왕인 에릭 블러드액스는 이드레리드의 통치 기간 동안 요크를 통치했다.에릭은 바이킹 검 디자인이 있는 동전을 발행했고 울라프보다 웨식스의 권력에 더 심각한 위협을 나타냈다. 요크의 거물들은 주요 인물들이었으며, 요크 대주교인 울프스탄이 이끌었다. 울프스탠은 주기적으로 바이킹 왕들을 받아들여 독립을 시도했지만 다른 때에는 남부의 지배에 복종했다. 역사가 마리오스 코스탐베이스의 견해에 따르면, 울프스탠의 노섬브리아에서의 영향력은 에릭보다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앵글로색슨족의 북부 노섬브리아 영토인 밤버러의 통치자 오설프는 자신에게 이익이 될 때는 이드리드를 지지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여러 사본이 서로 모순되고, 유일한 동시대 출처인 헌장의 증거와도 충돌하기 때문에 사건의 순서는 매우 불분명하다. 946, 949-50, 955년의 헌장은 이드리드를 노섬브리아의 통치자로 부르고 있으며, 이는 요크가 남부의 지배에 복종했던 시기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에드먼드가 죽은 후, 헌장 S 521은 "그의 자궁 형제인 이드리드가 귀족들에 의해 대신 선택되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즉시 "자신의 통치 하에 있는 모든 노섬브리아를 분할"하고 스코틀랜드로부터 복종 약속을 받았다. 그는 스코틀랜드가 지원한 반란에 대응하여 노섬브리아를 침략했을 수 있었다. 그는 946년 8월 16일 템스 강 상류의 킹스턴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오다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으며, 웨일즈 남부의 데헤이바쓰의 왕인 하이웰 다, 울프스탠, 오설프가 참석했다. 그 다음해 노섬브리아와 머시아 국경 근처의 탠셸프에서 울프스탠과 다른 요크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요크의 거물들은 곧 충성 맹세을 어기고 에릭을 왕으로 받아들였다. 이드리드는 리폰으로 군대를 이끌고 가서 미니스터를 불태웠는데, 이는 울프스탠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었다. 울프스탠은 그곳이 그의 가장 부유한 영지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노섬브리아인들은 복수를 노렸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D 버전에 따르면, "왕이 귀국하던 중, 요크에 있던 군대가 캐슬포드에서 왕의 군대를 따라잡고 그곳에서 대대적인 학살을 저질렀다. 그러자 왕은 너무 화가 나서 땅으로 돌아가 완전히 파괴하고 싶어했다. 노섬브리아의 귀족들이 이를 알게 되자, 그들은 에릭을 버리고 이드리드 왕에게 그들의 행동에 대한 보상을 지불했다." 1~2년 안에 그들은 다시 편을 바꾸어 울라프 쿠알란을 왕으로 추대했다. 952년에 이드리드는 울프스탠을 체포했고 같은 해에 에릭은 울라프를 몰아냈지만 954년에 요크 귀족들은 다시 에릭을 몰아내고 잉글랜드의 지배권으로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침략 때문이 아니라 북부인들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고 이 변화는 영구적임이 증명되었다.

에릭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오술프의 모략으로 암살당했고, 역사가 프랭크 스텐튼은 개인 모험가가 영국에서 왕조를 세울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고 언급했다. 울프스탠은 나중에 아마도 955년 초에 풀려났지만, 그는 대주교직을 복직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대신 템스 강 도체스터의 주교직을 받았다. 그런 다음 이드리드는 오술프를 노섬브리아 전체의 첫 번째 영지 관리자로 임명했다. 오술프의 지위는 아마도 왕이 그를 임명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력했을 것이고, 남부의 왕들이 밤버러에서 직접 엘더만을 선택할 수 있게 된 것은 다음 세기가 되어서였다. 이드리드는 유언장에서 1600파운드를 기근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거나 이교도 군대로부터 평화를 사는 데 사용하도록 남겨두었는데, 이는 그가 잉글랜드가 공격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고 여겼음을 시사한다.

930년대와 940년대에 발행된 헌장은 왕정의 연속성과 애설스탠, 애드문드, 이드리드의 통치 사이의 원활한 전환을 시사했다. 이드리드의 주요 고문은 주로 그가 형 애드문드로부터 물려받은 사람들이었고, 몇몇 경우에는 그의 이복형제 애설스탠에게 돌아갔다. 캔터베리 대주교인 오다와 동앵글리아의 엘도르만 애설스탠은 에드먼드 치세까지 권세를 잡았던 애설스탠의 고문이었다. 애드문드와 이드리드 치세에 엘더만 애설스탠의 권력은 너무 커서 그는 애설스탠 반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아내 앨프윈이 어머니의 조기 사망 후 애드문드의 어린 아들 애드거의 양모가 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애설스탠 반왕의 동생 이드릭(Eadric)은 웨식스 중부의 영지 관리인(ealdorman)이었고 이드리드는 그에게 서식스의 땅을 주었고 이드릭은 그것을 애빙던 수도원에 주었다. 글래스톤베리의 수도원장이자 미래의 캔터베리 대주교인 던스탠은 이드리드의 가장 신뢰하는 친구이자 고문중 한 명이었으며 그는 이드리드의 많은 헌장을 증명했다. 이드기푸는 의붓아들 애설스탠의 통치 하에서 밀려났지만 그녀는 자신의 아들 애드문드와 이드리의 통치 하에서 강력해졌다. 애드문드의 두 번째 아내 애설플래드의 아버지인 앨프가는 946년부터 951년까지 에식스의 영지 관리인이었다. 애드문드는 앨프가에게 칼자루는 금으로, 칼집은 은으로 장식된 칼을 선물했고 앨프가는 나중에 그것을 이드리드에게 주었다. 앨프가는 일관되게 엘더만들 사이에서 마지막을 증명했으며, 이는 앨프가가 애설스탠 반왕에게 종속되었을 수 있었다. 울프릭 커핑과 던스탠의 형제인 또 다른 울프릭이라는 두 명의 테인은 애드문드와 이드리드로부터 막대한 토지 보조금을 받았으며, 이는 왕실의 후원이 지방의 사소한 인물을 위대한 귀족으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드리드는 백칙령을 발표했을 수는 있지만 법전이 남아 있지 않은 몇 안 되는 후기 앵글로색슨 왕 중 한 명이다. 엘더만은 지역 차원에서 왕을 대신하여 법적 판결을 내렸다.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중 한 가지 사례는 아마도 노예였을 여성을 훔친 사건과 관련이 있다. 선베리의 에셀스탠이라는 남자가 나중에 그녀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합법적으로 그녀를 취득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다. 그는 소유물을 포기하고 소유자에게 보상금을 지불했지만 엘더만 버흐트퍼스는 그에게 왕에게 자신의 wer(생명의 가치)를 지불하라고 명령했고, 에셀스탠이 지불할 수 없자 버흐트퍼스는 그에게 선베리 영지를 몰수하라고 요구했다. 952년 이드리드는 캔터베리의 세인트 오거스틴 출신인 수도원장 에설름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로 테트포드 사람들을 "대량 학살"하라고 명령했다. 이것은 지역 사회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일반적인 처벌이었다. 역사가 시릴 하트는 애설름이 지역 주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곳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우려고 했을 것이라고 봤다. 힘은 웨식스 왕들이 잉글랜드를 지배하는 데 기본이었으며, 역사가 조지 몰리노는 테트포드 학살을 "간헐적으로 풀려난 무자비하지만 무서운 강압적 힘의 과시"의 한 예로 봤다.

앵글로색슨 궁정은 전국을 평생을 순행했기에 고정된 수도는 없었다. 다른 후대 앵글로색슨 왕들과 마찬가지로 이드리드의 왕실 영지는 주로 웨식스에 있었고 그와 그의 궁정은 그 사이를 여행했다. 이드리드의 여정에서 알려진 모든 장소는 탄셸프를 제외하고 웨식스에 있었다. 중앙 금고도 없었지만 이드레드는 그의 성유물을 가지고 여행했는데, 그것들은 그의 대규모 사제들의 보호하에 있었다. 던스턴의 첫 번째 전기 작가에 따르면, 이드레드는 "던스턴에게 그의 가장 귀중한 소유물, 즉 많은 토지 헌장, 이전 왕들의 오래된 보물, 그리고 그가 직접 획득한 다양한 부를 넘겼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의 수도원 벽 뒤에 충실하게 보호되어야 했다." 그러나 던스턴은 이드레드의 보물을 맡은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울프헬름, 웰스의 주교와 같은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이드리드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는 그것을 분배할 수 있도록 재산을 요청했지만 던스탠이 자신의 몫을 가지고 도착하기 전에 죽었다. 의례는 중요했다. 949년 부활절에 발행된 헌장은 이드리드를 "왕관으로 높임을 받았다"고 묘사하여 왕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예외적이고 카리스마가 있는 인물로 묘사했다.

925년에서 975년 사이의 기간은 앵글로색슨 왕실 학위서의 황금기였으며, 왕정의 도구로서 절정에 달했고, 왕들은 이를 사용하여 왕권의 이미지를 투사하고 궁정과 국가 간의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했다. 애설스탠의 통치 후반에서 이드리드 통치 중반 사이의 대부분의 헌장은 "외교적 주류"라는 스타일로 왕의 서기실에서 작성되었는데, 이러한 헌장을 작성한 서기관은 "Edmund C"로. 그는 애드문드 통치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헌장 두 개와 이드리드 통치 때로 거슬러 올라가는 헌장 세 개를 작성했다. 이 문서 양식은 950년경에서 이드리드의 통치 말기 사이에 거의 사라졌다. 살아남은 헌장의 수는 감소하고 있으며 952년과 95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헌장은 없다. 이 기간의 헌장은 다른 두 전통에 속하고 있다. 950년경에 극적으로 변화한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드리드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건강이 악화되자 왕실 문서 제작에 대한 책임을 왕실 문서 사무실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일 수 있다.

한 가지 대안적 전통은 940년에서 956년 사이에 작성된 "두문자어 헌장"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7세기 셔본의 주교인 알드헬름의 영향을 받은 스타일로 두문자어 반복과 특이한 어휘를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매우 학식이 많은 서기관의 작품으로, 거의 확실히 우스터의 주교인 센월드의 서클에 속한 사람이거나 주교 본인일 것이다. 이는 머시아의 선례를 가지고 있으며 대부분은 템즈 강 북쪽의 영지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유형의 헌장 7개가 949년에서 951년까지 살아남았으며, 그 해의 전체의 절반이고, 다른 두 개는 955년으로 날짜가 매겨져 있다. 역사가 사이먼 케인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두운음" 헌장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고 학습과 문학 작품으로서 그 자체로 깊은 흥미를 끄는 놀라운 자료 덩어리를 나타냅니다. 졸업장으로 판단하면, 창의적이고, 활기차고, 즐겁게 혼란스럽다. 외교적 주류와는 거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립 의회에서 진행되는 이전 의식의 핵심에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다른 대안적 전통은 "던스턴 B" 헌장에서 발견되는데, 이는 " 두문자어 " 헌장과는 매우 다르며, 평범하고 소박하며, 일반적인 초기 호소와 서문을 생략한 스타일이다. 이들은 던스턴과 글라스톤베리 수도원과 관련이 있으며,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에 발행된 모든 헌장은 남부와 서부의 영지를 위한 것이다. 이들은 951년과 986년 사이에 제작되었지만, 던스탠이 "자신의 손가락으로" 썼다고 주장하는 캔터베리의 크라이스트 처치에 레컬버 성당과 그 땅을 부여한 949년 헌장에 의해 예고된 것으로 보인다. 이 문서는 원본이 아니며 10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시대착오가 없고 "던스턴 B" 헌장의 많은 문체적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아마도 원래 헌장의 "개선된" 버전일 것이다. 던스탠을 헌장과 연관시키는 추가 증거는 던스탠의 명령에 따라 작성된 아를의 카이사르우스(Caesarius of Arles)의 묵시록의 박람회(Expositio in Apocalypsin)의 사본에 대한 해설에서 제공되며, 이 사본은 원본 사본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던스탠 B" 헌장의 필체와 매우 유사하여 두 문서 모두 글래스턴배레의 필사자가 썼을 가능성이 높다. 케인스는 이 헌장을 "규율이 잘 잡혀 있고 철저히 전문적"이라고 설명했다. 953년과 9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든 유형의 헌장 8개가 남아 있으며, 그 중 6개는 이 전통에 속하고 2개는 "두문자어"이다. 6개의 "던스탠 B" 헌장은 왕의 증인이 아니며, 던스탠은 의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플 때 왕의 이름으로 헌장을 작성할 권한을 받았을 것이다.

940년대에 "주류" 헌장의 초안 작성자들은 "잉글랜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950년대 초에 "던스턴 B" 헌장은 이드리드를 "알비온의 왕"으로 묘사한 반면, "두운 반복" 헌장은 이드리드의 칭호에 복잡한 정치적 분석을 도입했고, 요크를 최종적으로 정복한 후에야 그를 "영국 전체의 왕"으로 묘사했다. 이드리드의 대관식 때 발행된 것을 포함한 여러 "두운 반복" 헌장은 "앵글로색슨족과 노섬브리아족, 이교도와 브리튼족의 왕국의 통치"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물론 그런 증거를 너무 과장하는 것은 위험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한 명의 관찰자의 눈에는 전체가 구성 요소의 합보다 크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그 밖에도 이드리드의 유언장은 살아남은 앵글로색슨 왕의 유언장 두 개 중 하나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것은 이드히드 왕의 유언장이다.첫째, 그는 자신의 시신이 안치되기를 바라는 재단에 금 십자가 두 개와 금 자루가 달린 칼 두 개, 그리고 400파운드를 바친다.
항목, 그는 윈체스터의 올드 미니스터에 다운튼, 다머럼, 칼네의 세 영지를 준다.
항목, 그는 뉴 미니스터 에 웨어웰, 앤도버, 클레어의 세 영지를 주고, 넌나민스터, 샬본, 태첨, 브래드 포드에 준다.
항목, 그는 윈체스터의 넌나민스터에 30파운드를 주고, 윌튼에 30파운드, 샤프츠베리에 30파운드를 준다.
항목, 그는 자신의 영혼의 구원과 그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해 1600파운드를 주어, 그들이 필요하다면 궁핍과 이교도 군대로부터 스스로 구제를 살 수 있게 한다. 크라이스트처치의 대주교는 이 중에서 400파운드를 받아 켄트와 서리, 서식스, 버크셔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 그리고 주교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돈은 수도원에 남아 그 카운티에 있는 의회 의원들이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윈체스터 교구의 주교인 Ælfsige는 400파운드를 받아야 한다. 햄프셔를 위해 200파운드, 윌트셔와 도싯셔를 위해 각각 100파운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돈은 위에 언급한 비슷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 카운티에 있는 의회 의원들이 관리해야 한다.
항목, 던스턴 수도원장은 200파운드를 받아 서머싯과 데번 사람들을 위해 글래스턴베리에 보관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위와 비슷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항목, Ælfsige 주교는 남은 200파운드를 받고, 윈체스터의 주교좌에 돈을 보관하여, 어느 샤이어가 필요로 하든 그것을 위해 보관해야 한다.그리고 Oscetel 주교는 400파운드를 받고, 위에서 설명한 조치에 따라 머시아인을 위해 도체스터의 주교좌에 보관해야 한다. 지금 울프헤름 주교는 400파운드(?)의 금액을 가지고 있다.
항목, 2,000권의 금을 가지고 가서 주교구에서 주조해야 한다. 그리고 대주교는 한 몫을 받고, Ælfsige 주교는 두 번째를 받고, Oscetel 주교는 세 번째를 받고, 그들은 그것들을 신을 위하여 그리고 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주교구 전역에 분배해야 한다.
항목, 나는 어머니에게 에임즈베리와 완티지와 베이싱에 있는 영지와 서식스, 서리, 켄트에 있는 내 모든 서고와 이전에 그녀가 가졌던 모든 것을 준다.
항목 나는 대주교에게 금화 200장을 주는데, 백장은 120장으로 계산한다. 그리고 나의 주교들에게는 각각 금화 120장을 준다. 그리고 나의 엘더만들에게는 각각 금화 120장을 준다.그리고 적절하게 임명된 각 시종와 각 임명된 시종장과 집사에게는 금화 80장을 준다. 그리고 나의 유물을 맡긴 각 사제들에게는 금화 50장과 은화 5파운드를 준다. 그리고 다른 사제들에게는 각 5파운드를 준다. 그리고 정식으로 임명된 각 관리와 내가 왕위를 계승한 이후 임명된 모든 성직자(?)와 내 집안의 모든 구성원에게 금화 30개를 지급한다. 그들이 어떤 직책을 맡든, 다만 왕궁에 있는 사람은 예외이다.
항목, 나는 위에 언급된 각각의 영지에서 열두 명의 자선가를 선출하기를 원하며, 그들 중 누구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다른 사람을 그의 자리에 임명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지속되는 한,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유지되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를 수행하기를 거부하면 그의 영지는 내 몸이 쉬게 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스탠턴은 유언장을 "정복 이전 왕실의 최고 권위자"로 묘사했다. 그것은 discthegns(집사)가 그의 식탁에서 일했으며 다른 주요 관리들은 집사와 hræglthegns(옷장 관리자)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언장에 명시된 모든 영지는 웨식스에 있으며, 이는 왕의 재산이 그곳에 집중되어 있음을 반영하지만, 그는 위치를 지정하지 않고 남동쪽에 있는 서적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이드위그는 유언장에서 제외된 것을 기뻐했을 수 없으며, 그의 즉위 후에 유언장이 폐기된 것으로 보인다.

이드리드의 통치기를 포함해 후기 앵글로색슨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유일한 동전은 페니였다. 하프 페니는 매우 희귀했지만 이드리드 통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몇 개 발견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반으로 잘라서 파딩을 만들었다. 에드워드 1세 통치 시절 약 24 그레인이었던 페니의 평균 무게는 에드거의 개혁 이전 주화까지 점차 감소했고, 이드리드 시대에는 약 3그레인으로 감소했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이전 통치 시절의 85~90%에 달했던 높은 은 함량은 이드리드 치세에도 유지되었다.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중 일반적인 동전 유형 중 하나는 BC(상체 왕관)로 지정되었으며, 앞면에 왕의 머리가 있다. 많은 BC 동전은 애설스탠 통치의 원래 스타일을 기반으로 하지만 조잡하다. 일부는 이전 통치 기간에 일했던 주화 제작자가 생산했지만 BC 동전을 생산하는 30명 이상의 새로운 주화 제작자가 있었고, 그 중 약 20명이 단일 동전으로 표현되었으므로 아직 동전이 발견되지 않은 BC 동전을 생산하는 다른 주화 제작자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앞면에 왕의 흉상이 없고 뒷면에 ​​화폐 주조인의 이름이 수평으로 있는 H(수평) 유형은 더욱 일반적이었으며, 이드리드드의 통치 기간 동안 알려진 화폐 주조인이 80명 이상이었고 그 중 다수는 단일 표본에서만 발견되었다.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동안 지배적인 스타일은 남쪽과 동쪽의 HT1로 뒷면 상단과 하단에 삼엽초가 있었고, 북쪽 중부의 HR1로 삼엽초 대신 장미 장식이 있었으며 약 60명의 화폐 주조인이 생산했으며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동안 가장 풍부한 스타일이었다.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동안 노섬브리아와 북동부에는 대량의 산출량을 가진 몇몇 주화 제작자가 있었지만, 나머지 지역의 동전은 다양한 주화 제작자가 생산했다. 일부 BC 동전에는 조폐국이 표시되지만 H 유형 동전에는 거의 표시되지 않다. 몇몇 HR은 더비와 체스터를 표시하고, 하나의 HT1 동전은 옥스포드 비문과 캔터베리가 있는 것으로 남아 있다.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거의 내내 주요 요크 주화 제작자는 잉겔가였다. 그는 이드리드, 울라프, 에릭을 위해 고급 주화를 생산했으며 이드리드 통치의 마지막 몇 달 동안 일한 후 헤리거로 교체되었다. 또 다른 대규모 주화 제작자는 훈레드(Hunred)로, 요크가 바이킹의 손에 있었을 때 더비에서 활동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0세기의 주요 종교 운동인 영국 베네딕토회 개혁 은 에드거 시대에 절정에 달했지만, 에드레드는 초기 단계에 강력한 지지자였다. 또 다른 지지자는 플뢰리 수도원이라는 주요 대륙 중심지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수도사였던 오다 대주교였다. 에드레드가 왕위에 올랐을 때, 이 운동의 미래 지도자 두 명이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에 있었다. 던스탠은 에드먼드에 의해 수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그와 함께 윈체스터의 미래 주교인 윈체스터의 에델월드가 합류했다. 개혁자들은 또한 에설스탠 반왕과 에드기푸와 같은 평신도 지지자들을 두었는데, 그들은 던스탠과 특히 가까웠다. 역사가 니콜라스 브룩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증거는 간접적이고 불충분하지만 던스탠이 10세기 초 웨식스의 유력한 여성 연대와 특히 이드기푸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음을 시사할 수 있다." 던스탠의 첫 번째 전기 작가에 따르면 이드레드는 던스턴에게 공석인 크레디톤 교구를 수락하라고 촉구했고 그가 거부했을 때 이드레드는 이드기푸를 설득하기 위해 그녀의 "여성의 말의 선물"을 사용할 수 있는 식사에 던스턴을 초대했지만 그녀의 시도는 실패했다.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동안 에설월드는 성경과 수도사의 종교 생활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기 위해 해외로 갈 수 있는 허가를 요청했는데, 의심할 여지 없이 플뢰리와 같은 개혁 수도원에서였을 것이다. 그는 글래스턴베리의 규율이 너무 느슨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드리드는 그런 현명한 사람이 자신의 왕국을 떠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어머니의 조언을 거부하고 대신 그를 세속 사제들이 섬기고 에설월드가 주요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바꾼 애빙던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이드리드는 애빙던에 100 하이드의 왕실 영지를 부여하는 것을 포함하여 공동체를 지원했고 에설월드는 훨씬 더 관대한 기부자였다. 이드리드는 수도원을 계획하기 위해 애빙던으로 여행했고 벽을 세울 것을 제안한 기초를 직접 측정했다. 그러고 나서 에설월드는 그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고 그는 수락했다. 왕은 미드를 풍부하게 흐르게 하라고 명령했고, 아무도 왕의 만찬에서 나가는 것이 보이지 않도록 문을 잠갔다. 왕을 수행하던 노섬브리아의 테인(thegn)들 중 일부는 관습대로 취했고, 떠날 때 매우 즐거웠다. 그러나 이드리드는 공사가 진행되기 전에 죽었고, 에드거(Edgar)가 왕위에 오를 때까지 건물은 건설되지 않았다.

수도원 개혁의 지지자들은 성인과 그들의 유물 숭배에 헌신했다. 이드리드가 노섬브리아를 공격하는 동안 리폰 대성당을 불태웠을 때, 오다는 성 윌프리드의 유물과 에디우스(리폰의 스티븐)가 쓴 리폰의 Vita Sancti Wilfrithi 사본을 압수하여 캔터베리로 가져왔다. Vita는 오다 가문의 프랑크인 학자인 프리테고드가 쓴 윌프리드의 새로운 운율적 삶( Breuiloquium Vitae Wilfridi )의 기초를 제공했고, 오다의 이름으로 된 서문(비록 프리테고드가 초안했을 가능성이 높음)은 리폰이 윌프리드의 유물을 부당하게 소홀히 했다고 비난함으로써 도난을 정당화했다. 마이클 라피지는 대성당의 파괴가 "악명 높은 furtum sacrum "(신성한 도난)의 구실을 제공한다고 봤다. 윌프리드는 단호하게 독립적인 북부 주교였으며 역사가 데이비드 롤라슨의 견해에 따르면 도난은 유물이 웨식스 왕조에 대한 반대의 초점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왕들은 또한 유물을 열렬히 수집했으며, 이는 그들의 경건함을 보여주고 그들의 명성을 높였으며 이드리드는 자신의 유물을 돌보도록 임명한 사제들에게 유언장에 유산을 남겼다.

에드거 왕의 통치 하에서 에델월드와 그의 동료들은 베네딕토회 수도원주의가 유일하게 가치 있는 종교 생활 형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 되었지만, 이는 이드리드와 같은 초기 왕들의 견해가 아니었다. 951년에 그는 아들을 둔 기혼자인 에설시게를 윈체스터 주교로 임명했다. 에설시게는 개혁가가 아니었고 나중에 그 대의에 적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동안 헌장의 교회 수혜자에서 벗어나는 추세가 지속되었다. 에설스탠 통치 기간 동안 수혜자의 3분의 2 이상이 성직자였고 에드먼드의 통치 기간 동안 수혜자의 3분의 2가 평신도였다. 에드레드와 에드윅 왕의 통치 기간 동안 4분의 3이 평신도였다.

10세기 중반에 일부 종교 귀족 여성들은 수녀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면서도 토지를 하사받았다. 애설스탠은 두 개의 영지를 하사했고 애드먼는 일곱 개, 이드리드는 네 개였다. 그 후 한 번의 추가 기부를 제외하고는 이 관행이 갑자기 중단되었다. 기부의 의미는 불확실하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설명은 일부 귀족 여성들이 수녀원을 설립하거나 자신의 집에서 수도 생활을 하는 등 자신의 방식으로 종교적 소명을 추구할 수 있도록 영지를 하사받았다는 것으로 보인다. 953년에 이드리드는 서식스의 토지를 그의 어머니에게 하사했고, 그녀는 헌장에서 famula Dei 로 설명되어 있는데 , 이는 아마도 그녀가 자신의 영지를 유지하면서 수도 생활을 했고 수도원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드리드의 통치기 당시 글래스턴배레와 애빙던은 학습의 중심지였고 던스탠과 애설월드는 둘 다 뛰어난 라틴어 학자였지만 그들의 수도원에서의 연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오다는 또한 유능한 라틴어 학자였고 캔터베리에 있는 그의 가문은 10세기 중반에 또 다른 주요 학습 중심지였다. 거기서 가장 뛰어난 학자는 프리테고드였다. 그의 시 Breuiloquium Vitae Wilfridi는 중세 라틴 문학 전문가인 Lapidge에 의해 "아마도 10세기 앵글로-라틴 문학의 가장 주목할 만한 기념물"로 묘사된다. 그것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가장 뛰어나고 독창적이지만 엄청나게 어려운 라틴어 제품 중 하나"이며 "앵글로-라틴 해석적 스타일의 '걸작'으로 의심스럽게 묘사될 수 있다 ." 프리테고드는 오다의 조카 오스왈드의 가정교사였으며, 그는 미래의 요크 대주교이자 수도원 개혁 운동의 세 번째 지도자였다. 프리테고드는 그의 후원자 오다가 958년에 사망하자 서프랑크로 돌아갔다.

이드리드 왕은 말년에 소화기 계통 질환으로 고생하다가 사망했다. 갈수록 병세가 심각해진 그는 음식을 다 소화할 수 없어 즙만 섭취하고 나머지는 뱉어낼 정도였다고 한다. 955년 11월 23일에 그는 서른한 살 혹은 서른두 살 전후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평생을 배우자 없이 독신으로 지냈으므로 사망 당시 후사가 없었다. 따라서 귀족들은 위탄을 개최해 형 에드먼드 왕의 장남인 이드위그를 다음 왕으로 선출했다.

에드윅은 아마도 956년 1월 말, 킹스턴 어폰 템스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대관식이 끝난 후, 캔터베리 대주교 오다와 글라스톤베리 수도원장이자 미래의 캔터베리 대주교인 던스탠을 포함한 왕과 그의 주요 귀족들을 위한 잔치가 열렸다. 자신을 "B"라고만 밝힌 던스탠의 가장 초기 성인전기 작가 에 따르면, 이드위그와 그들 중 한 명과 결혼하기를 바랐던 한 명문가의 여성과 그녀의 딸이 "음란한 제안"으로 이드위그를 쫓았고, 그는 잔치를 떠나 "이 창녀들을 애무"함으로써 모인 귀족들을 화나게 했다. 오다는 그를 잔치에 다시 데려오라고 촉구했지만, 거의 모든 귀족들은 왕을 화나게 하는 것을 두려워했고, 던스탠과 그의 친척인 리치필드 주교 키네시게만이 그의 분노에 맞설 용기가 있었다. B는 다음과 같이 계속했습니다.
가장 초기의 형태에서도 그것은 더 나은 증거와 충돌하는 스캔들 같은 색깔을 이미 띠고 있었다. 예를 들어, 두 여인 중 어린 여인이 왕과 결혼했고 그녀는 영국 수도원 중 가장 위대한 곳 중 하나에서 영예를 얻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뉴 민스터의 Liber Vitae에서 이드위그 왕의 아내인 앨프기푸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 성지를 선택하고 자선을 통해 지역 사회의 기도에 자신을 맡긴 저명한 여성" 목록에 등장했다. 가장 큰 공로를 가진 성직자들은 두 여인이 있을 때 기꺼이 궁정에 나왔다. 이 이야기에서 안전하게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던스탠이 왕, 왕의 아내가 된 여자,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에게 모욕을 했기 때문에 추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 결혼은 이드위그가 왕으로서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정치적으로 중요했으며 에드가 주변의 세력은 이를 위협으로 여겼을 수도 있는데, 이는 그가 왕위를 계승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ASC D )의 버전 "D"에 따르면 958년에 "대주교 오다는 이드위그 왕과 앨프기푸를 갈라놓았는데, 둘은 너무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이드위그의 아내는 애설워드를 그녀의 형제로 지명한 유언장을 작성한 앨프기푸로 확인되었고, 그는 애설레드 1세의 후손인 연대기 작가 애설워드로 확인되었는데, 그렇다면 그녀는 이드위그의 사촌이 되었을 것이다.

사이먼 케인스는 또한 "B"의 대관식 잔치에 대한 설명에 의문을 제기하며, 오다가 교회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결혼에 반대했을 수 있고, "B"의 설명은 던스탠과 키네시게가 그를 결혼에서 설득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데 기초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마이클 윈터바텀과 마이클 라피지의 관점에서 "잔치에 대한 B의 설명은 오다가 교회법 절차를 시행한 것에 대한 음란한 조작이다." 반면, 숀 밀러는 결혼에 대한 반대가 종교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었다고 주장하고, 폴린 스태포드는 취소를 에드거의 성공적인 반란의 결과로 봤다. 에드거의 반란은 이드위그를 너무 약화시켜 그의 적들이 그를 상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봤다.

비르트퍼쓰는 그의 성인 전기인 성 오스왈드의 생애 에서 "사악한 삶을 살았던 - 절제되지 않은 청년이 하는 일처럼 - 이드위그가 다른 여자를 마치 자신의 아내인 것처럼 사랑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와 함께 도망쳤고, 오다는 말을 타고 그녀가 머물고 있는 집으로 가서 그녀를 붙잡아 왕국에서 데려갔다. 그러고 나서 그는 이드위그에게 그의 사악한 행실을 버리라고 촉구했고, 그 이후로 왕은 "통회의 표정으로 오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를 이드위그의 결혼 이야기의 한 버전으로 간주하지만, 케인즈는 이드위그와 그의 여성들에 대한 다른 이야기들이 뒤섞였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가들은 거의 모두 이드위그와 앨프기푸 사이의 결혼이 해소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지만 스탠턴은 예외였으며 11세기 후반이나 12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북부 문서인 ASC D가 취소에 대한 유일한 출처라고 지적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전설적인 추가 사항을 초래한 주제에 대한 권위를 갖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보고 있다."

이드위그의 전임자 이드리드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건강이 훨씬 악화되었으며 그는 어머니 이드기푸, 대주교 오다, 글래스턴베리의 수도원장 던스탠, 그가 윈체스터의 주교로 임명한 앨프시게, 그리고 너무 강력해서 반왕으로 알려졌던 동앵글리아의 엘더만 애설스탠을 포함한 주요 고문들에게 의지했다. 이드리드의 통치의 마지막 2년 동안 남아있는 대부분의 헌장은 글래스탠베리 수도원에서 작성되었으며 이 중 거의 대부분이 왕의 인증을 받지 못했다. 이는 던스탠이 이드리드가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플 때 그의 이름으로 헌장을 발행할 권한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드위그가 계승했을 때 궁정은 강력한 파벌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전 정권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여주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벤 스노크는 "이드위그는 그의 형제 에드거와 달리 분명히 주관이 뚜렸한 사람이었다. 그는 권력을 잡자마자 이 모든 것을 종식시키기 위해 행동했다." 그러나 케인스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드위그와 에드거가 자신의 행동 독립성을 주장할 수 있었는지, 아니면 궁정에서 확립된 이해 관계에 달려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이드리는 그의 유언장에 따르면 이곳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지만 윈체스터의 올드 미니스터에 묻혔다. 그는 아마도 글래스턴베리와 같은 개혁된 베네딕토회 수도원에 묻히기를 바랐을 것이지만 이드위그는 자신의 무덤이 던스탠과 같은 반대자들의 초점이 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드리드의 유언장에서 주요 수혜자는 그의 어머니 이지기푸였고 이드위그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녀는 나중에 이드위그가 왕위에 오르면서 "모든 재산을 빼앗겼다"고 불평했기 때문에 유산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그가 그녀의 권력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지기푸는 아들 에드먼와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동안 자주 헌장을 증명했지만 이드위그의 헌장 중 하나만 증명했고 에드거는 955년과 957년 사이에 동생의 궁정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그의 헌장 중 많은 부분을 증명했다. 애설스탠 반왕의 지위는 이드위그가 그를 제거할 수 없을 만큼 강력했지만 956년에 이드위그는 애설스탠의 관할 구역의 일부를 담당하는 여러 명의 새로운 영주를 임명했는데 여기에는 애설스탠의 장남 애설월드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아마도 재편을 예고한 것 같다.

역사가들은 종종 이드위그를 비판하며 그를 무책임하거나 무능하다고 묘사해 왔으며,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핵심 증거는 그가 956년에 발행한 예외적인 수의 헌장이다. 그해에 그가 기증한 60여 건의 토지는 모든 정통 앵글로색슨 헌장의 약 5%를 차지하며, 12세기 이전에 유럽의 다른 통치자는 그 연간 총액에 맞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주로 평신도에게 유리했으며 일부 교회 토지가 양도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종교적 소유였던 영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역사가들은 때때로 그가 지원을 사기 위해 왕의 재산을 양도했다고 가정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거의 없다. 그는 특권을 판매하여 토지 소유자가 이미 왕에게 식량, 임대료 및 서비스를 빚진 유전적 가족 재산으로 소유하고 있던 민속지를 대부분 의 의무에서 면제된 서지(bookland)로 전환 하여 수익을 창출했지만 장기적으로 왕의 수입을 줄였을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재산이 최근에 왕실 헌장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미 서지였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그가 재산을 압류하여 자신의 총애를 받는 사람들에게 판매하거나 주었을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앤 월리암스는 많은 수의 헌장이 이드위그가 지원을 했음을 나타낼 수 있지만 배경에 대해 알려진 바가 너무 적어 확신할 수 없다고 봤다. 왕의 부는 너무 커서 보조금이 자원을 크게 고갈시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드위그에 대한 적대감 중 일부는 아마도 던스탠과 같은 구시대의 산물을 희생시키고 특히 앨프에레와 같은 충신들을 승진시켰기 때문일 것이다. 앨프헤레와 그의 형제들은 여러 왕에게 친척으로 인정되었지만 관계의 본질은 알려지지 않았다.그들은 이드위그와 가까웠고 그는 가장 나이 많은 Ælfheah를 그의 집사로 삼았습니다.Ælfheah와 그의 아내 앨프위드는 이드위그가 친척으로 인정했으며 그의 관대함에서 이익을 얻었다. 983년 사망할 때까지 뛰어난 평신도 거물이 된 앨프헤레는 956년 머시아의 엘더만으로 임명되었다. 이드위그의 통치 첫 해에 임명된 다른 엘더만으로는 머시아의 애설스탠 로타와 동앵글리아의 애설스탠 반왕의 아들 애설월드가 있었고, 올던 전투의 미래 영웅인 비르트노쓰는 에식스의 엘더만이 되었다. 이들은 확립된 가문의 사람들을 임명 한 건전한 인사들이었고 에드거는 집권했을 때 이를 지켰지만 앨프헤레 가문과 애설스탠 반왕의 아들 애설윈 가문 간의 적대감은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에드거의 죽음 이후 공개적인 적대 행위로 이어졌다.

에드먼드와 이드리드 왕에게 헌장에서 주어진 칭호는 다양했으며, 가장 흔한 것은 "잉글랜드의 왕"이었다. 957년 왕국이 분열되기 전에 발행된 이드위그의 헌장에서 그는 "앵글로색슨", "잉글랜드", "알비온" 및 "브리튼 전체"의 왕으로 다양하게 불렸다. 에드먼드와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동안 오다의 증언은 왕의 증언보다 길고 자랑스러웠지만, 이것들은 에드윅의 시대에 줄어들었고, 더 이상 그가 왕의 주인을 가리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957년 여름, 왕국은 남쪽의 이드위크와 북쪽의 에드거로 나뉘었고, 경계는 템스 강이었다. "B"에 따르면, "이드위크 왕은 템스 강 북쪽 사람들에게 완전히 버림받았다. 그들은 그에게 맡겨진 권력을 무분별하게 사용한 그를 멸시했다. 그는 어리석은 증오심으로 현명하고 현명한 사람들을 파괴하고, 자신과 같은 무식한 사람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로 대체했다."

20세기 후반까지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분열의 원인을 이드위크의 무능한 통치 때문이라고 비난했다. 1889년에 출판된 원본 National Biography Dictionary에 있는 이드위그에 대한 항목에서 윌리엄 헌트는 이드위그가 어리석게 정부를 운영했으며 웨식스를 편애하여 머시안인과 노섬브리아인의 반란을 유발했다고 언급했다. 1922년에 J. 아미티지 로빈슨은 분열을 이드위그의 잘못된 통치에 대한 머시아인의 반란의 결과로 보았고, 1984년에 헨리 로인은 분열의 원인을 이드위그가 "책임 있는 교회의 의견을 소외시켰다"는 데 돌렸다. 스탠턴은 이드위그가 그의 왕국의 대부분을 잃은 것은 아마도 "단순한 무책임함" 때문일 것이며, 그의 위식스 출신들의 사회에서 그는 더 먼 지역의 귀족들과의 접촉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21세기에 크리스토퍼 루이스는 이러한 분열을 "위험할 정도로 불안정한 정부와 깊은 위기에 처한 법원"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고 있다. 반면 밀러와 네이스미스는 이를 구체제를 희생시키고 강력한 새로운 파벌을 육성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데 기인한다.

다른 역사가들은 분열이 이드위크의 실패로 인해 발생했다는 견해를 부정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네 가지 버전에서 왕국의 분열을 언급하고 있으며, 모두 그것을 마치 정상적이고 예상된 사건인 것처럼 에드가가 머시아 왕위에 "승계"된 것으로 묘사했다. ASC D와 ASC F는 분열을 955년으로 잡는 반면, ASC B와 ASC C는 올바르게 957년으로 잡았다. 바바라 요크의 견해에 따르면, 날짜의 차이는 에드가가 머시아를 부왕으로 통치하도록 항상 의도되었지만, 그는 957년에 열네 살이 되어 성인이 될 때까지 직접 행동할 수 없었기 때문일 수 있다. 956년의 우스터 헌장의 S 633은 에드가를 레굴루스 (부왕)로 묘사한다. 957년에서 959년의 헌장은 이 분할이 평화로운 정치적 합의였음을 시사한다. 템즈 강 남쪽의 관할권을 가진 영주와 주교는 이드위그에 남았고 북쪽 관할권을 가진 주교는 이드위그에 남았으며 여기에는 이드위그에 의해 승진한 사람들도 포함되었다. 분할 전에 그의 헌장을 증명한 거의 모든 테인들은 분할 후에도 그에게 충성했다. 분할까지 헌장의 증명자로서 에드거의 두각과 이드위그가 임명한 영주에 대한 머시아 왕으로 유지된 것은 연속성의 증거이며 왕국의 분할이 에드윅에 대한 쿠데타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케인즈는 왕국 분할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모두 타당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템즈 강 북쪽의 이드윅 통치에 대한 불만의 결과였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기에 정치적 통일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고 추정되는 것은 없었을 것이며 이드위크가 그의 형제와 왕위를 공유하도록 항상 의도되었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드위그는 어느 정도 상위 서열을 유지한 듯하다. 그는 헌장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묘사되는데, 에드거는 이 직함을 가끔만 사용했다. 에드거는 대부분 "머시아의 왕"이었고, 노섬브리아와 브리튼의 왕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머시아에서 발행된 동전을 포함한 모든 동전은 이드위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이름으로 발행되었으며, 역사가 프레드릭 빅스는 에드거가 머시아를 장악했다면 이드위그가 그 지역의 주화를 계속 통제하도록 허용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말한다. 빅스는 이 분열을 초기 앵글로색슨의 공동 왕권 전통의 잔재로 본다. 에설월드와 같은 베네딕토회 개혁자들은 서로 다른 왕들이 서로 다른 관행을 지지한다면 위태로울 획일적인 수도원 의식을 원했기 때문에 분열에 반대했다. 에설월드는 이드위그가 왕국을 분할했다고 비판했고, 에드거가 왕국을 "하나로 되돌렸다"고 칭찬했다.

형제들 사이에 경쟁심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의견 불일치는 있었다. 머시아의 왕이 된 직후 에드거는 던스탠을 망명에서 불러들였고, 959년에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면서 할머니의 재산을 돌려주어 이드위크가 할머니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불만을 나타냈다. 에설스탠 반왕은 분열 당시에 은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에드거의 대부였고, 자신의 책임을 넘길 적절한 때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에델스는 머시아의 엘더만이였기 때문에 에드거가 왕국을 분열했을 때 엘더만로서 일했지만 에드거의 수석 엘더만이 되었다.

왕국이 분열된 후 이드위크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앨프릭이라는 사람이 957년에 남동부에서 엘더만이 되었지만 그는 아마도 958년에 사망했다. 아마도 서부 샤이어의 엘더만이었던 에드먼드는 분열 전에는 보통 앨프스탠에 이어 평신도 귀족들 사이에서 2위로 증언했고, 분열 후에는 앨프헤레의 형제인 앨프헤아가 이드위그가 죽기 직전에 집사(seneschal)에서 센트럴 웨섹스의 엘더만으로 승진할 때까지 이드위그의 헌장에서 1위로 올라갔고 즉시 평신도 증언자의 수장이 되었다.

한편 이드위그의 통치기인 10세기 중반의 대부분 헌장은 "외교적 주류"로 알려진 스타일로 작성되었지만 던스탠과 관련된 던스탠 B 헌장과 우스터 주교인 센발트와 관련된 두 가지 다른 전통도 있었다. 이드위크 통치기의 거의 모든 헌장은 주류이다. 이드리드와 에드거의 통치로 거슬러 올라가는 던스탠 B 헌장이 있지만 이드위그의 헌장은 없으며 이드위크의 두음 헌장(S 633)은 우스터 대성당에 대한 보조금인 하나만 알려져 있다. 그의 헌장은 아마도 930년대부터 존재했던 왕실의 중앙 기록 사무소에서 작성되었을 것이다. 약 90개의 헌장이 남아 있는데 이는 매우 많은 수이지만 7개만 원본 문서이고 나머지는 후대의 사본이기 때문에 분석이 제한적이다. 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60개 지폐는 주로 1월 말 그의 대관식, 2월 13일경, 날짜를 알 수 없는 세 번째 행사, 그리고 11월 29일경 등 4차례에 걸쳐 발행된 것으로 보인다.

후기 앵글로색슨 영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 유일한 동전은 은 페니였다. 이드위그의 통치 기간 동안의 수평 동전 디자인(뒤쪽에 주화 제작자 이름이 수평으로 표시됨)은 이드리드, HT1, HR1 및 HR2의 세 가지 기본 수평 유형을 따랐다. 추가 수평 유형도 있었다. 많은 HT1 동전은 약 35명의 주화 제작자가 미들랜드와 남부에서 생산했으며, 그 중 17개는 조폐국을 보여줬다. 이드위그의 통치 기간이 짧았음을 고려할 때 요크 주화 제작자 2명과 영국 북동부의 나머지 주화 제작자 13명에게서 예상치 못하게 많은 수의 HT1 동전이 생산되었다.

이드위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유형학적 발전이 있었다. 특히 런던에서 흉상 왕관이 있는 주화의 부활로, 앞면에 왕의 초상화가 있고, 남서쪽에서는 동전 양쪽에 십자가가 있고 가장자리 주위에 비문이 있는 Circumscription Cross가 있다.이 두 주화는 모두 매우 제한된 수량으로 생산되었지만 에드거의 통치에서 더 광범위하게 사용될 것을 예고했다. 동앵글리아 주화 제작자는 일반적으로 애설스탠의 통치 이후로 흉상 왕관 디자인을 사용했지만 이드위그의 치세에 일시적으로 수평 유형으로 전환했을 수 있다. 주화의 무게는 에드워드의 치세 이후로 점차 감소했다. 이 기간 동안 85-95%에 달했던 높은 은 함량은 일반적으로 유지되었지만 이드리드듸 치세 때처럼 덜 정교한 주화가 생산되었다.

이드위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에드거의 이름으로 동전이 주조되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머시아와 노섬브리아에서 이드위그의 동전은 957-959년에 에드거의 이름으로 일부가 주조되었다면 예상보다 훨씬 더 흔했다. 이는 모든 동전이 이드위그의 통치 기간 내내 그의 이름으로 주조되었음을 나타냈다.

에드거의 통치 기간 동안 수도원이 독신 생활의 엄격한 규칙과 개인 소유 금지를 따르는 베네딕토회 개혁 운동이 종교와 정치에서 지배적이 되었다. 에드거 이전의 왕들은 그 이상에 동조했지만, 그들은 애설월드 주교와 그의 동료들이 그것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종교 생활이며 재산을 소유하고 많은 사람이 결혼한 세속 성직자(서기)가 타락하고 부도덕하다고 보는 견해를 취하지 않았다. 에드먼드와 이드리드처럼 이드위그는 베네딕토회 수도사와 세속 성직자 공동체에 모두 기부했지만 나중에 그는 수도원을 약탈하고 세속 성직자를 편애한 적이라고 묘사되었다. 12세기에 베네딕토회 연대기 작가 맬즈버리의 윌리엄이 쓴 글에 따르면,
곧, 그의 불쌍한 아첨꾼들의 지원을 받아 이드위그는 영국 전역의 모든 수도원 사람들을 부당한 재난에 빠뜨렸고, 먼저 그들의 수입 지원을 박탈한 다음 추방했다. 모든 수도사의 수장인 던스탠 자신은 플랑드르로 짐을 싸서 보내졌다. 그 당시 모든 수도원은 깔끔하지 못하고 불쌍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수도사들이 270년 이상 살았던 맬즈버리 수도원조차도 그는 서기들을 위한 음탕한 집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오 주 예수님, 우리의 창조자이자 재창조자이신 당신은 우리의 기형을 잘 고칠 수 있는 숙련된 장인이시여, 이 어수룩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수년 동안 숨겨져 있던 당신의 보물을 빛과 대중에게 알리셨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그들이 직접 땅에서 일으켜 신사에 세운 성 알드헬름의 시신입니다. 그 서기관들의 위신은 왕의 관대함으로 더욱 높아졌는데, 그 관대함은 성인에게 크기와 편리한 위치 모두에 있어서 감탄할 만한 영지를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리에서도 왕이 다른 수도원들에 얼마나 잔인하게 대했는지 기억하는 것은 무섭습니다. 왕 자신도 젊고 어리석었고, 그의 유치한 마음을 끊임없이 공격하던 여주인의 조언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드위그는 많은 헌장에서 애설월드의 애빙던의 땅을 주었고, 그로 인해 나중에 그곳의 수도사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왕실 후원자 중 한 명으로 여겼다. 그는 또한 993년 헌장에서 애빙던의 후원자로 지명되었다. 새로운 교회 건설은 이드리드가 시작하여 에드거의 통치 하에 완료되었지만 애빙던에게 교회 건설을 위한 목재를 부여한 이드위그의 헌장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공사가 계속되었음을 시사했다. 애설월드는 오다와 던스탠에 대한 그의 결혼에 대해 이드위그의 편을 들었고 이드위그는 아마도 에드거에게 애설월드를 가정교사로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종교 개혁은 958년 에드거와 그의 고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는 체스터의 세인트 워버그 대성당에서 세속 서기들의 개혁되지 않은 가문에 영지를 하사했다. 하지만 970년대에 베네딕토회 개혁자들은 950년대의 역사를 다시 쓰고 에드거의 즉위를 이드위그의 부적격한 통치에 대한 운동의 승리로 제시했다. 애설월드는 이드위그가 "어린 시절의 무지로 [...] 성지의 땅을 탐욕스러운 낯선 사람들에게 분배했다"고 썼다. 이드위그가 수도원에 준 선물은 그가 수도원에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만큼 많았고, 반대자로서의 그의 평판은 그가 던스탠을 개인적인 적대자로 여겼다는 사실 때문인 듯하다. 던스탠의 전기 작가 B와 비르트퍼쓰와 같은 일부 초기 출처는 이드위그를 비판했지만 그의 범죄 중에 교회를 약탈한 것을 나열하지 않았으며 그는 일부 수도원 위조자들에 의해 그들의 시설에 재산을 양도하는 사람으로 선택되었는데 이는 그가 그럴듯한 후원자로 여겨졌음을 보여줬다.

맬즈베리와 애빙던 외에도 이드위그는 우스터 미니스터와 뱀튼 미니스터에 토지를 주었다 . 그가 버리 세인트 에드먼즈에 준 베클스와 엘름스웰의 부지는 둠즈데이 북이 쓰여질 당시에도 여전히 수도원의 손에 있었다. 그는 또한 런던 주교와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토지를 주었다. 사우스웰 미니스터는 이드위그가 956년 도체스터 주교인 오시텔에게 준 대규모 부지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드위그의 가까운 동맹에는 951년 이드리드에 의해 윈체스터 주교로 임명된 앨프시게가 포함되었다. 앨프시게는 아들을 둔 부유한 기혼자로, 서색슨 귀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앨프헤레의 형제인 앨프헤아를 "내 사랑하는 친구"라고 묘사하고 그를 아들의 보호자로 임명했다. 앨프시게는 또한 이드위그의 또 다른 지지자인 울프릭과 가까웠으며 유언장에 그에게 재산을 남겼다. 앨프시게의 생활 방식은 그를 개혁자들에게 혐오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오다의 적이었고 비르트퍼쓰는 그가 오다의 죽음을 기뻐하고 지팡이로 그의 무덤을 쳤다고 비난했다. 958년 오다가 죽자 이드위그는 앨프시게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지만 그는 팔리움을 받기 위해 로마로 가던 중 알프스에서 동사했다. 그 후 이드위그는은 웰스의 비르헬름 주교를 캔터베리로 옮겼지만 에드거가 뒤를 이어 비르헬름을 던스탠으로 대체하는 식으로 해임했다.

에드위그 왕은 959년 열여덟 살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사료에 기록된 바가 없으며, 왕위는 머시아와 노섬브리아를 통하고 있던 동생 에드거 1세가 이었다. 에드거의 전 교사였던 애설월드는 궁정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아마도 960년부터 963년까지 에드거의 개인 고문으로 일했고, 그때 왕은 그를 윈체스터 주교로 임명했다. 에드거의 통치 초기에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던스탠은 궁정에 참석하는 데 부지런했으며, 역사가 앨런 태커의 견해에 따르면 "애설월드의 특징적인 맥락이 그의 수도원 제국인 반면, 던스탠의 특징적인 맥락은 왕실 궁정이었다." 970년대 초에 주요 세속적 거물은 동앵글리아의 엘더만(애설월드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애설와인, 머시아의 앨프헤어, 요크의 오슬락 , 에식스의 비르트노쓰였다.

960년대와 970년대 초의 헌장은 유사하며 그 기간 동안의 정치적 변화를 시사하지 않지만 960년대 후반부터 북부 귀족들이 더 규칙적으로 대표되었다. 954년에 이드리드는 요크의 바이킹 왕인 에릭 블러드액스가 제거된 후, 북노섬브리아 영토인 밤버러의 통치자 오설프를 노섬브리아 전체의 엘더만으로 임명했다 .오설프는 남부 영국의 지원에 힘입어 권력을 얻은 것이 아니었고, 960년대에 그가 죽었을 때 에드거는 다시 노섬브리아를 분할하고 오슬락을 요크(남부 노섬브리아)의 엘더만으로 임명하여 그 지역에 대한 자신의 통제력을 강화했지만, 그는 밤버러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을 선택할 수 없었다.

엘더만은 왕이 젊은 나이에 죽는 시기에 안정을 제공하는 데 중요했지만, 동앵글리아의 애설윈과 머시아의 앨프헤레의 가족은 공격할 수 없는 지위를 얻었고 그들의 경쟁은 왕국의 안정에 위협이 되었다. 에드거는 그들을 통제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긴장은 그의 죽음 이후 공개적인 적대 행위로 붕괴되었다. 템즈 강 남쪽 지역의 엘더만은 970년 이후에는 증명되지 않으며, 이는 에드거가 더 낮은 지위의 왕실 관리를 통해 이 지역을 통치하기로 선택했기 때문일 수 있다. 샤이어리브들이 엘더만의 수행했던 임무를 위임받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의 통치는 덜 균일해졌고 다른 지역에서 다른 통치 방법이 생겼다. 그의 죽음 이후 세 명의 새로운 남부의 엘더만에 임명되어 그 격차가 메워졌다.

왕권은 순회적이었다. 고정된 수도는 없었고, 법정은 일년에 4~5회 한 왕궁에서 다른 왕궁으로 옮겨갔다. 우스터의 존에 따르면, 에드거는 매년 겨울과 봄에 왕국을 돌며 자신이 공포한 법령이 준수되고 있는지, 가난한 사람들이 강자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물었다. 역사가 리처드 허스크로프트는 이 이야기를 "아마도 약간 장밋빛"이라고 묘사한다. 해리잉은 지역 사회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표준적인 처벌이었고, 974년 에드거는 타넷 사람들에게 재산을 박탈하고 그들 중 일부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는데, 그들이 요크에서 지나가는 상인들을 강탈했기 때문이다.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한 토지 몰수는 왕에게 후원을 받거나 처벌 면제에 대한 지불을 받을 기회를 제공했다. 한 사례에서 에드거는 100 개의 금화에 대한 몰수를 철회했고, 다른 사례에서는 120개의 금화에 대해 몰수된 여러 재산을 증식했다.

930년대 이래로 헌장은 왕실 비서실에서 작성되었지만, 이것은 아마도 957년에서 959년으로 나뉘어진 후에도 변함없는 형태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에드거가 959년에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이드위그로부터 물려받은 비서실을 사용하기보다는 머시아의 왕으로서 고용했던 비서실을 유지하는 것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드거의 헌장은 훨씬 이전 헌장의 산문을 바탕으로 유능하지만 공식적이고 파생적인 라틴어로 작성되었다. 그들은 이전 왕들의 헌장보다 스타일이 더 다양하며, 스눅은 이것이 중앙 통제의 쇠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앵글로색슨 관료주의의 점점 더 정교해지는 것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헌장의 서론(서문)과 헌장 조항을 어기는 사람에 대한 제재에는 큰 다양성이 있지만 정치적, 법적 프로토콜은 안정적인 전통을 따르고 있다.

헌장은 여러 그룹으로 나뉜다.대부분은 "외교 주류"에 속하며 여기에는 에드가 A.로 알려진 서기관이 작성한 것도 포함된다. 학자들은 그의 위치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1930년대의 리처드 드뢰게라이트 와 1960년대의 피에르 샤플레는 이 서기관을 애설월드의 애빙던과 연결했으며 아마도 애설월드 자신과 연결했을 것이다. 케인스는 1980년에 그가 아마도 왕실 서기실의 사제였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수산 케일리는 2000년에 이전의 견해를 옹호했다. 에드가 A는 에드가가 머시아의 왕이었을 때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고 960년대 초 헌장의 상당 부분이 그에 의해 작성되다. 그는 963년에 일을 그만두었지만 통치 후반에 그의 스타일을 채택한 서기관이 일부 헌장을 작성했다. 또 다른 그룹은 던스탠과 관련되어 있으며 던스탠 B 헌장이라고 한다. 이들은 이드위그의 통치 기간 중 중단된 기간을 포함하여 951년에서 975년 사이에 제작되다. 에드가가 머시아의 유일한 왕이었던 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들은 그가 직접 증명하지 못했다. 또한 중부 및 서부 지방 기관에서 제작된 헌장도 있었고 어떤 경우에는 수혜자가 초안 작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헌장은 많은 위조품과 진짜 헌장을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출처이다. 에드가의 약 160개의 헌장이 남아 있으며, 그 중 10개는 그가 머시아의 왕이었던 957~95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머시아의 헌장 대부분과 그가 영국의 왕으로서 발행한 헌장 약 100개는 실질적으로 진짜이며, 가장 많은 수는 961~963년과 968년에 발행되었다. 이러한 헌장은 주로 종교 단체나 개인에게 토지를 부여하는 표준적인 허가서이며, 윈체스터의 뉴 미니스터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과 같이 몇 가지 더 복잡한 허가서도 있다. 대부분의 헌장은 이후 사본에서만 알려져 있지만, 16개는 원본이거나 원본일 수 있는 단일 시트로 남아 있다. 일부에서는 에드가의 통치 연도를 제시하고, 그들이 근거로 삼은 시작 날짜는 다양했는데, 일부는 959년, 960년, 973년을 제시했지만 대부분은 957년을 제시했다. 에설스탠처럼 에드가는 어떤 헌장에서는 영국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다른 헌장에서는 영국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며, 케인즈는 "에드거의 통치에서 일관된 관례가 사용된 것은 에설스탠이 930년대에 만든 정치 체제를 단호하게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고 언급했다.

에드가가 법전을 네 개나 썼다고 하지만 정확한 수는 두 개다. 백조령은 역사가들에 의해 예전에 에드가 1조로 불렸지만 누가 발행했는지는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이전 왕에게 발행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에드가 2조와 3조는 앤도버 법전으로 알려진 한 세트의 조항의 종교 및 세속 조항이다. 따라서 에드가 4조는 두 번째 법전이다. 에드가는 법의 내용보다 법의 행정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기존 법률이 적절하게 시행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법전은 일방적인 왕의 선언이 아니라 왕의 고문의 조언을 받아 발행되었다.

법률 역사가 패트릭 워멀드는 앤도버 법전을 인상적이고 합리적이라고 묘사했다. 에드가 2조는 교회 문제, 특히 교회 회비를 다루고 있다. 처음으로 십일조를 내지 않을 경우 구체적인 처벌이 규정되었고, 교황에게 내야 할 페니인 로마스콧을 내지 않은 사람은 그것을 로마로 가져가야 했다.이것은 실제적인 처벌이 아니라 이론적인 처벌이었다. 에드가 3조는 정의를 접근 가능하게 하고, 부당한 판결을 방지하고, 도량형을 표준화하고, "왕의 영토 전체에서 하나의 주화를 사용해야 한다"는 데 중점을 두고있다. 원고는 왕에게 구제를 요청하기 전에 다른 방법을 모두 고갈시켜야 했고, 판결은 공정해야 했으며 처벌은 적절해야 했다. 법원은 정기적으로 열어야 했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법적 의무를 지킬 보증인을 스스로 찾아야 했다. 질서 유지에는 세속 및 종교 당국의 협력이 필요했지만, 법률 사건의 판결에서 영장 관리자와 주교가 함께 일해야 했던 것은 에드가 3조 때까지는 아니었다.

에드가 4조는 앤도버 법전보다 더 장황하고 이전의 어떤 법전보다 더 수사적이다. 이 법은 역사가들의 가장 큰 관심을 끌었는데, 이는 "그들이 가장 잘 결정하는 좋은 법률"을 가져야 했던 이전의 바이킹 왕국 요크의 별도의 관습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족에게 헌드레드로 알려진 행정 구역의 북부 데인로에서 이름인 와펜타크가 이 법전에서 처음 언급되었다. 데인로가 자체 관습을 가져야 한다는 양보에 대한 한 가지 예외는 훔친 물건의 판매를 더 어렵게 만드는 조항이었다. 각각의 버, 헌드레드, 와펜타크에는 최소 12명의 선서한 증인이 임명되어야 했고, 모든 거래는 이 증인 중 두세 명이 증인으로 서야 했다. 샤이어, 헌드레드, 와펜타크는 이 무렵 왕이 인구를 통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에드가 6조는 "내 영토의 모든 주에 있는 영국인, 덴마크인 또는 영국인이든 모든 국민"을 언급하면서 에드가의 신민이 세 개의 서로 다른 정치적 공동체로 구성되어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법전 사본을 여러 부로 나눠 엘더만 울프헤레와 에드윈에게 보내어 널리 배포하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알리도록 명령했다.

10세기 후반의 성인전기 작가 윈체스터의 랜트프레드는 에드가가 죽을 무렵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영광스러운 에드가 왕의 명령에 따라 모든 종류의 범죄를 억제하기 위한 법률이 영국 전역에 공포되었다. 즉, 어떤 도둑이나 강도가 왕의 영토 어디에서든 발견되면 눈을 뽑고 손을 자르고 귀를 뜯고 콧구멍을 파내고 발을 제거하는 등 긴 고문을 가하고 마지막으로 머리의 피부와 머리카락을 깎은 후 사지를 거의 다 죽인 채 벌판에 버려 야수와 새, 밤의 사냥개에게 잡아먹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에드가의 알려진 법률은 절단을 명시하지 않지만 에드가 6조는 남아 있지 않은 처벌 목록을 언급했다. 크누트의 법전은 유사한 처벌을 명시하고 있으며, 그 저자인 요크의 대주교 울프스탠은 크누트의 법률이 에드가의 법률에 근거했다고 말했다. 워멀드는 그 처벌을 "끔찍하다"고 묘사하고, 케인즈는 에드가가 "모든 왕 중 가장 강한 왕"으로 칭송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그가 가져온 평화를 존경한다면 그가 그것을 집행하기 위해 취한 조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크누트은 에드가의 법률을 따라야 할 선례로 내세웠고, 1020년 선언문에서 모든 사람이 "에드가의 법을 확고히 준수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ASC D는 1018년에 덴마크인과 영국인이 "에드가의 법에 따라" 합의에 도달했다고 명시했다. 1019/20년에 Cnut이 그의 신하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옥스퍼드에서 합의된 법전을 언급했는데, 이를 에드가의 법이라고 묘사하고 사람들에게 이를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워멀드의 견해에 따르면 크누트는 그의 정권이 에드가의 법을 준수하기로 한 옥스퍼드 합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법전은 에드가의 법률과 거의 유사하지 않으며, 그에 대한 언급은 실용적인 출처라기보다는 존경받는 입법자로서의 상징이었을 것이다. 노르만 정복 이후에도 에드가의 법률은 계속해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12세기 역사가 에드머는 그가 법전을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지만 "가장 영광스러운 에드가 왕"의 "성스러운 법률"을 언급했다.

에드가 통치기의 잉글랜드는 여전히 은 페니가 일반적인 화폐였다. 그러나 몇 개의 반 페니도 생산되었으며 에드가의 경우 9개가 알려져 있다. 에드가의 주화는 그의 직접적인 전임자들의 다양한 주화 디자인을 광범위하게 이어받은 개혁 이전과 그의 통치 말기에 이루어진 주요 개혁의 두 단계로 나눠졌다.

에드먼드와 이드리드의 통치 기간 동안 주화의 지역적 차이가 증가했는데, 특히 영국과 바이킹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바꾸었던 노섬브리아에서 그랬고, 954년 이후 북부에 대한 지배가 영구적으로 회복되면서 에델스탠의 주화가 점차 더 큰 통일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에드가의 개혁 이전 주화 디자인에는 에드윅의 통치 때부터 계속된 수평 유형이 포함되었다. 외접 십자가 유형은 에설스탠 때 도입되었고 에드가 때 일반적이 되기 전까지 20년 동안은 드물었다. 흉상 왕관 유형도 에드가의 통치 기간에 훨씬 더 일반화되었다. 네이스미스는 에드가의 초기 주화를 개혁된 주화의 "근본적인 변화를 향한 중요한 단계"로 설명했다. 애설스탠의 통치와 에드가의 개혁 이전 주화는 주조소가 일반적으로 표시된 유일한 개혁 이전 시기였으며, 이 시기에도 많은 동전에 정보가 표시되지 않았다. 에드가의 개혁 이전 주화에는 30개의 주조소가 명시되어 있으며, 나머지 6개는 도시를 표시하지 않는 동전에 대해 화폐 수집가가 추론한 것이다. 앨프레드와 애드워드의 통치에서 에드가의 개혁까지 주화 표준은 점차 떨어졌다. 10세기 전반의 대부분 동안 주화의 순도는 90%가 넘는 은으로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950년대에는 순도가 낮은 동전이 몇 개 생산되었고, 에드가의 개혁 이전 주화에서는 그 수가 크게 증가했다. 에드워드의 통치 이후 동전의 평균 무게는 점차 감소했으며, 이는 에드가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에드거의 개혁된 주화는 전국에 표준화된 디자인을 가져왔다. 그것은 애설스탠의 주화를 모델로 했으며 이전 15년 동안 부분적으로 예고되었다. 그것은 약 96%의 은으로 이전 기간과 대부분의 다른 동시대 유럽 주화와 비교했을 때 높고 균일한 순도(은의 비율)였다. 무게는 증가했지만 여전히 지역적 차이가 있었다. 모든 조폐국은 동일한 디자인을 사용했으며, 앞면에는 왕의 흉상이 왼쪽을 향하고 안쪽 원 안에 그의 이름이 바깥쪽에 +EADGAR REX ANGLOR으로 표시되었다. 뒷면에는 중앙에 작은 십자가가 있었고, 그 주변에는 주화 제작자의 이름과 조폐국 위치가 있었다. 이 디자인은 독창적이지 않았다. 애섨탠의 흉상 왕관 주화와 매우 유사했지만, 왕국 전체에 걸쳐 균일성을 유지한 것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주화 개혁은 13세기에 웬도버의 로저가 유일하게 언급한 연대기 작가가 될 때까지 문서 자료에 기록되지 않았다. 이 개혁이 정확히 언제 도입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통치 말기였다. 그의 죽음 이후 주화의 순도는 지역별로 더욱 불균형해졌다.

에드가의 주화 표준화는 획일성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하며 변화를 강요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그의 통제력의 힘을 보여줬다. 그것은 그의 통치 말기에 그의 왕국의 세속적, 영적 응집력을 증가시키려는 그의 단호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처음으로, 약 40개의 조폐국 모두가 균일한 디자인의 주화를 생산했다. 역사가 레비 로치는 에드거의 주화 개혁을 "후기 앵글로색슨 왕조의 가장 뛰어난 업적 중 하나"라고 묘사했다. 그것은 150년 이상 지속되었다.

958년 머시아의 왕으로서 에드가는 체스터의 세인트 워버그 성당에 땅을 하사했다. 이곳은 개혁되지 않은 공동체였고 세속 성직자의 집이었으며 에드가의 통치 후반에 왕의 후원을 받을 가능성이 희박했다. 베네딕토회 개혁자들은 나중에 그의 즉위를 그들의 대의에 대한 승리로 제시했지만, 이 기부는 수도원 지위가 그와 그의 고문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전 왕들은 개혁을 지지했지만 에드거가 왕위에 올랐을 때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두 개뿐이었고 그의 지지는 이 운동의 광범위한 성공에 핵심적이었다. 스텐턴의 견해에 따르면, 그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면서 세속 인사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지만 교회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기의 주요 업적인 잉글랜드의 수도원주의를 재건하는 데 있어서 에드가 왕의 열정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이 운동의 세 주요 인물인 던스탠, 오스월드, 애설월드를 모두 지지했다. 오다는 958년에 사망했고, 캔터베리 대주교의 후계자로 이드위가 선택한 앨프시게는 교황에게서 팔리움을 받으러 가는 길에 알프스에서 동사했다. 웰스의 주교인 비스헬름은 이드위그가 두 번째로 임명했지만 에드가가 왕이 되었을때 그는 비스헬름이 규율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온화하다는 이유로 그를 해임하고 던스탠을 임명했다. 오스왈드는 962년에 우스터의 주교가 되었고 971년에는 우스터의 주교직을 유지한 채로 요크의 대주교가 되었다.

에드가의 통치 초기에 세 번째 수도원 지도자인 애설월드는 헌장을 증명한 유일한 수도원장으로서, 그의 특별한 지위를 보여줬다. 그는 수도사와 달리 결혼할 수 있었던 세속 성직자(때로는 캐논이라고 함)를 강력히 비판했다. 963년 윈체스터 주교로 임명된 후, 애설월드는 도시의 새로운 성당을 오로지 수도사만을 위한 기관으로 전환했다. 에드가는 세속 성직자들을 강제로 추방하기 위한 교황의 권한을 성공적으로 구했고 왕의 관리가 지휘하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수행하도록 도왔다. 966년 그는 웅장한 헌장에서 새로운 공동체에 특권을 부여했는데, 여기에는 세속 성직자들을 몰아냄으로써 교회를 정화하는 것에 대해 언급되어 있고, 에드가가 그리스도에게 새로운 성당을 부여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vicarius christi(그리스도의 대리인)로 묘사된다. 왕의 개입을 정당화하는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성직자들의 죄악스러운 본성 때문에 왕을 위한 그들의 기도가 무가치하다는 것이었다.

에드가와 앨프스리스는 에셀월드에게 서드번의 영지를 하사했는데, 그 조건은 그가 성 베네딕토의 규칙을 라틴어에서 영어로 번역하여 평신도의 종교 교육을 돕는 것이었고, 그 번역은 영국 수도원의 규칙을 정해졌고 현재까지 남아 있다. 그것은 에드가가 윈체스터의 공회의에 모든 영국을 위한 단일 수도원 규칙을 작성하라는 지시를 보낸 결과로 작성되었으며, 그것은 통일과 획일성에 대한 그의 열망을 보여준다. 그는 그의 주교, 수도원장, 수녀원장들에게 "수도원 관습에 관해 한마음이 되라... 한 규칙과 한 나라의 관습을 지키는 다른 방식으로 인해 그들의 신성한 대화가 불명예를 당하지 않도록" 촉구했다. Regularis Concordia는 모든 수도원에서 왕과 여왕을 위해 하루에 여러 번 시편을 외워야 한다고 지시했으며, 수도원장 선출을 위해서는 왕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규정했습니다. 이 문서는 973년경, 아마도 5월 11일 에드가가 바스에서 대관식을 치른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대륙 개혁가들은 세속 성직자가 교회에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던스탠과 오스월드도 동의했다. 그들은 성당 공동체에서 세속 성직자을 추방하지 않았다. 에셀월드는 더 극단적이었으며, "에드가 왕의 수도원 설립"이라는 문서에서 그는 에드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웨식스 왕국뿐만 아니라 머시아 땅에서도 모든 사람의 더러움으로부터 성지를 정화했다. 그는 앞서 말한 죄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성직자들을 확실히 몰아냈고, 구세주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봉사를 위해 그의 영토의 가장 중요한 곳에 수도사들을 세웠습니다. 그는 또한 어떤 곳에서는 수녀들을 세워 그의 배우자 앨프스리스에게 맡겨 그녀가 모든 필요에 도움을 주도록 했다.

개혁자들은 개인적인 금욕을 실천했지만, 그들의 미사, 전례, 기도는 대륙적인 방식으로 점점 더 사치스러워졌고, 그들은 건물과 필요한 물건들을 지불하기 위해 수도원의 땅과 부를 늘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개혁자들은 에드기와 그의 관리들로부터 물질적, 재정적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평신도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게다가, 이 운동의 지도자들은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자신의 자원을 사용한 부유한 귀족들이었다. 애설월드는 에드가에게 에드워드 1세가 부여한 윈체스터 구 성당의 특권을 갱신하기 위해 금으로 된 200개의 멘커스 와 5파운드 상당의 은잔을 지불했고, 이는 타운턴의 대규모 영지와 관련이 있었다. 또한 애설월드는 앨프스리스에게 "자신의 정의로운 사명을 돕는 대가로" 50개의 멘커스를 지불했다. 애설월드는 그의 교구에 있는 수도원을 대신하여 법원을 통해 끈기 있게 토지 청구를 추진했고, 에드가는 자주 개입하여 그를 지원했다. 그의 죽음 이후 토지 소유자들은 수도원의 공격적이고 모호한 청구로 인해 잃어버린 재산을 회복하기 위해 법적 조치를 취했고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가장 위대한 거물들조차도 개혁가들의 요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애설윈은 앳필드에 있는 40개의 하이드에 달하는 재산을 회복하기 위한 성공적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에드가가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그것을 애설월드에게 넘기도록 강요했다고 불평했다. 에드가의 죽음 이후 반수도원적 반응은 개혁가들이 왕의 지원에 얼마나 의존했는지 보여줬다. 하지만 개혁가들의 반대자들이 에드가를 어떻게 보았는지 보여주는 글은 남아 있지 않았다.

에드가는 개혁자들을 지지했기 때문에 비르트퍼쓰와 울프스탠과 같은 베네딕토회 작가들의 작품에서 극찬을 받았는데, 이 두 작가는 모두 990년대 후반에 글을 썼다. 개혁자들은 에드가에게 거의 신권적인 지위를 부여했고, 그는 Regularis Concordia에서 선한 목자 에 비교되었다. 동시대 신학자 Ælfric of Eynsham도 에드거를 칭찬했습니다.그는 군주제를 신이 제정한 것으로 여기며 복종할 것을 촉구했다. 역사가 캐서린 카르코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통치 초기부터 에드기는 유능하고 강력한 바실레우스로 묘사되었으며, 그의 왕권은 신으로부터 직접 나왔다." 이 개혁은 유럽 운동의 영국 지부였으며, 카롤링거 왕조 이후 유럽의 수도원은 모두 Regula S. Benedicti를 따랐지만 워멀드는 "수도원의 획일성이 정치 원칙의 문제였던 카롤링거 왕조 이후 유럽의 유일한 장소는 영국이었다"고 언급했다.

다른 왕들처럼 에드가는 교회에 기부하는 데 관대했다. 970년에 에설월드는 에드가의 관대한 지원으로 엘리 수도원에 세속 사제 공동체를 재건하여 수도사들의 집으로 삼았다. 에드가의 선물에는 금과 은으로 도금한 십자가, 금으로 된 이미지와 보석, 금으로 장식된 망토, 보석과 에나멜로 도금한 복음서가 포함되었다. 그는 967년에 설립되거나 재건된 베네딕토회 수녀원인 롬지 수도원의 주요 후원자였고 그의 아들 에드먼드는 그곳에 묻혔다. 에드가는 또한 성 스위툰의 시신이 있는 윈체스터의 올드 미니스터를 지원 했다. 971년에 성자의 시신은 에드가의 명령과 에설월드의 지원으로 부지에 있는 무덤에서 미니스터 내부의 무덤으로 옮겨졌다. 이것은 새로운 성인 숭배의 시작이었다. 두 번째 번역은 974년경에 수행되었다. 스위툰의 유물은 에드가가 만들도록 명령한 금, 은, 루비로 된 웅장한 새로운 유물함에 넣기 전에 맨발로 3마일을 행렬하여 운반되었다. 그는 또한 애설월드의 애빙던 수도원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개혁된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주로 웨식스와 머시아의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고, 많은 세속 성직자들보다 훨씬 적었지만 개혁된 수도원은 훨씬 더 부유했다. 개혁가들은 에드거의 통치를 영국 교회를 근본적으로 바꾼 황금기로 묘사했지만, 역사가 존 블레어는 회의적이다. "논란은 에드가의 통치에 종교 문화가 있었음을 드러낼 수 있는데, 우리가 표면 아래를 파헤쳐 보면 그 문화는 덜 배타적이고 에설스탠과 에드먼드의 문화와 더 비슷해 보이기 시작했다."

앨프레드가 871년에 왕위에 올랐을 때 학문은 낮은 수준으로 쇠퇴했고 라틴어에 대한 지식은 매우 부족했다. 그는 학문의 부흥을 시작했고 에드거에 의해 정점에 도달했다. 라피지는 그의 통치가 "잉글랜드 문학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나타낸다"고 언급했다. 오스월드의 라틴어 작품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설월드와 던스탠은 뛰어난 학자였다. ​에설월드의 Regula S. Benedicti의 번역은 최고 수준이며 그의 뉴 미니스터 헌장은 베네딕토회 운동의 눈부신 학식을 보여주고 에드거 왕과 개혁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정교한 해석적 라틴어 로 작성되었다. 애설월드가 제작한 고대 영어 작품 중 일부는 너무나 호사스럽고 값비싼 제작비가 들었기 때문에 젊은 오블라티스트들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아마도 귀족과 왕족을 대상으로 했을 것이다. 에드거의 통치 기간 동안 라틴 문학이 크게 증가했는데, 이는 모두 애설월드의 윈체스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문학의 대부분은 종종 많은 그리스어를 포함하는 시로 구성되었다. 세 명의 주요 개혁가는 대륙 학문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플뢰리 수도원의 란트프레드와 같은 학식 있는 외국 성직자들을 집으로 맞이했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윌슨은 에드거의 통치 기간 동안 "영국에서 본 적이 없는 최고의 회화 및 조각 업적이 탄생했다"고 말했다. 성 애설월드의 축복의 말씀(Benedictional)은 잉글랜드 미술의 가장 위대한 사례 중 하나다. 에드거의 아버지의 이복 자매 몇 명은 대륙의 왕족과 결혼했으며, 이러한 인맥은 에드거가 라드보드와 같은 외국 학자들과 베나와 같은 화가와 금세공인들을 데려오는 데 도움이 되었는데, 이들은 왕을 위해 금속 가공품을 만들고 윌튼 교회의 천장을 장식했다.

피터 렉스는 에드거의 전기에서 그의 통치가 그의 왕국 안팎에서 그의 통치에 대한 반대가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관찰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공격한 기록은 없지만, 엘더만과 이웃 왕들 사이에 여러 차례 전투가 있었다. 966년, 군나르의 아들 토레드가 웨스트모어랜드를 황폐화시켰는데, 아마도 어스트라드클리드의 남쪽 확장에 대한 영국의 저항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키나드 왕은 970년대 초에 노섬브리아를 습격했다. 960년대 후반에 북 웨일스 왕국인 귀네드의 군주들 사이에 불화가 있었고 , 967년에 앨프헤레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그곳을 황폐화시켰다. 970년대 초에 앵글시는 바이킹에게 두 번이나 공격을 받았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에드거의 해군의 힘을 자랑했다. ASC D와 E는 많은 왕들이 에드거를 존경했다고 선언한 후에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고귀한 왕이 왕좌를 차지하는 한, 영국에서 먹이를 얻을 만큼 자랑스러운 함대도 없었고 군대도 강하지 않았다." 후대의 연대기 작가들은 우스터의 존과 같이 과장된 주장을 했다. 그는 에드거가 3,600척의 배를 가지고 있었고 매년 여름 영국 섬을 일주했다고 썼지만, 그의 아들 에설레드의 통치 기간에 해군 조직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으며, 에드거는 아마도 그 기반을 마련한 상당한 함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북부 버전 ASC D 및 E에 있는 시는 문체상 울프스탠이 쓴 것으로 생각되는데, 에드거를 칭찬하지만 계속해서 "그는 한 가지 악행을 너무 크게 저질렀다. 그는 사악한 외국 관습을 사랑했고 이 땅에 이교적 관습을 너무 확고하게 가져왔으며, 외국인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이고 해로운 사람들을 이 나라로 유혹했다." 이것은 아마도 에드거가 바이킹 용병과 그들의 배를 고용한 것을 언급하는 것인데, 이 방편은 앨프레드와 아마도 에드거 이전에 애설스탠이 사용했고, 에드거 이후에는 애설레드가 사용했다.

972/973년에 에드거는 독일 황제 오토 대제에게 사절을 보냈다. 비스프레쓰에 따르면
에드거는 그의 테인인 아스크비히 대수도원장과 울프메르를 통해 황제에게 놀라운 선물을 보냈고, 그들은 황제에게 더욱 놀라운 선물을 가져왔으며, 그 선물들은 확고한 평화 조약을 수립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왕은 왕에게 걸맞게 관대함이 넘쳤다. 그의 풍부한 관대함의 결과로 다른 민족의 왕들은 그를 극도로 칭찬했고, 그가 적에게 사나운 사자의 분노를 보였기 때문에 이웃의 왕과 왕자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네이스미스는 973년을 잉글랜드 왕국의 기적으로 기념하는 해로 묘사했다. 에드거와 애프리스는 973년 5월 11일 성령 강림절 일요일에 바스에서 왕과 여왕으로 봉헌되었다 .왕은 일반적으로 지도자들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출된 다음 즉위 직후에 대관되었지만 에드거가 통치 초기에 대관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그것이 첫 번째 대관식이었음을 암시했다. ASC A , ASC B 및 ASC C는 "전투에서 대담했던 에드먼드의 아들은 이 일이 일어났을 때 세상에서 29년을 보냈고, 30번째에 왕으로 봉헌되었다."라고 말했다. ASC D 및 ASC E는 그를 "애설링 에드거"라고 묘사했다.역사가들은 그것이 두 번째 대관식이었는지, 그렇지 않다면 지연된 이유에 대해 논쟁했다. 한 가지 이론은 그가 사제로서 성직을 서임할 수 있는 최소 연령이 30세였기 때문에 30세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29세라는 나이에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우스터의 12세기 수도원장인 니콜라스에 따르면 에드거는 젊은 시절의 열정을 극복할 때까지 성직을 연기했으며 스텐턴은 그가 "정신과 행동이 완전히 성숙해졌다고 느낄 때까지" 기다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재닛 넬슨과 같은 다른 역사가들은 그가 통치 초기에 대관식을 치렀을 가능성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에드거가 왕으로서의 정통성이 훼손되었을 것이므로 통치 초기에 대관식을 치렀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973년의 봉헌식은 잉글랜드의 영주라는 그의 제국적 지위에 대한 주장을 축하하고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 ( ASC A 및 B )의 초기 버전에서 이것이 운문으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연대기에서 대관식을 언급한 경우가 드물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이 대관식에 특별한 무언가가 있었음을 시사했다. 독일 궁정은 정교한 의식과 과시를 주도했으며 오토 1세에게 파견된 에드거의 대사관에서 알게 된 정보가 바스에서의 대관식을 계획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수 있다.

11세기 후반 또는 12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대기의 북부 버전인 ASC D에 따르면 에드거는 해군과 함께 체스터로 항해했고, 그곳에서 여섯 명의 왕이 육지와 바다에서 그의 동맹이 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25년도 지나지 않아 같은 사건에 대해 글을 쓴 아인샴의 앨프릭은 "이 섬에 있던 모든 왕, 캄브리아인과 스코틀랜드인이 에드거에게 왔고, 어느 날 여덟 명의 왕이 에드거의 지시에 복종했다."라고 말했다. 12세기에 우스터의 존과 맬즈버리의 윌리엄은 체스터 회의에 대한 설명을 남겼다. 그들은 왕들이 복종의 상징으로 디 강에서 에드거를 노를 저어 보냈다고 말했다. 이전 출처와 달리 그들은 왕들의 이름을 밝혔고 웨일즈 역사가 토마스 찰스-에드워즈는 그들의 가능한 신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스코틀랜드의 키나드, 어스트라드클리드의 더프널과 그의 아들 말쿨룸, 섬의 왕 맥커스, 귀네드의 이아콥과 그의 조카 하이웰 , 그리고 바이킹이었을 가능성이 있는 시퍼스와 아마도 고대 웨일즈 이름인 이우하일 의 변형인 이우칠 등 두 사람은 알려지지 않았다. 우스터의 존은 자신이 하위왕이라고 부르는 왕들에 대해 가장 자세한 설명을 제공했다.

그는 명령한 대로 그를 만나러 갔고, 그들이 육지와 바다에서 그에게 충성하고 협력할 것이라고 맹세했다. 어느 날, 그는 그들과 함께 작은 배를 탔다. 그들을 노에 앉히고 직접 조타를 잡은 그는 디 강의 흐름을 따라 능숙하게 조종했고, 많은 귀족과 영주들이 비슷한 배를 타고 따라와 궁전에서 세례자 요한 수도원으로 항해했다. 그곳에서 기도를 한 후, 그는 같은 화려함으로 궁전으로 돌아왔다. 궁전에 들어가면서 그는 귀족들에게 그의 후계자들 각자가 자신이 잉글랜드의 왕이라고 자랑할 수 있을 것이며, 그의 지휘를 받는 많은 왕들과 함께 그러한 영예의 화려함을 즐길 것이라고 길게 선언했다고 한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회의를 동등한 사람들 간의 협상으로 본다. 체스터 회의는 웨일즈에 대한 영국의 공격과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공격 이후 왕들의 회의였을 수 있다. 로디언은 아마도 950년대부터 스코틀랜드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고, 이 무렵 에드거는 공식적으로 스코틀랜드에게 양도했다. 키나드는 이 양보를 확보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을 수 있으며, 윌리엄스의 견해로는 그가 자신을 에드거의 부하로 여겼을 가능성은 낮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체스터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12세기 역사가들의 미화로 인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가려졌다."

다른 역사가들은 영국의 우월성에 대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 더 적극적이다. 레비 로치와 리처드 허스크로프트는 체스터에서 일어난 사건을 에드거의 패권 행사의 과시로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몰리노는 이에 동의하며, 잉글랜드 왕이 훨씬 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통치자들을 위협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에드거의 이웃들이 그들의 땅이 황폐해지는 것을 피하고 싶었다면, 체스터로의 초대는 그들이 거절할 수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에드거는 헌장에서 자신을 " 브리타니아 "와 " 알비온 " 의 통치자로 묘사함으로써 영국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 수도원 개혁자들의 글에서도 발견되는 그러한 주장은 다른 10세기 왕들의 칭호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에드거의 통치 기간 동안 정점에 도달했지만, 실제로 영국의 다른 국가들에 대한 권력은 그 세기 초반보다 낮았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 왕들은 때때로 애설스탠의 헌장을 증명했지만 에드거의 헌장은 결코 증명하지 않았다. 바스에서 열린 그의 대관식에는 영국의 거물들만 참석했지만, 946년 이드리드의 대관식에는 적어도 두 명의 웨일즈 왕이 참석했다. 그의 통치 이후, 영국의 다른 지역에 대한 남부 왕들의 패권은 더욱 약화되었고, 스코틀랜드, 웨일즈 또는 캄브리아 왕들이 1031년까지 영국의 지배권을 인정했다는 증거는 없다.

975년 7월 8일, 에드거 1세가 글로스톤버리에서 죽었다. 후계로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전부 나이가 어렸고, 이중 장남인 에드워드는 나이가 12세인데다가 무엇보다 공인하기는 했으나 사생아였다. 에드워드는 966년 윈체스터 신성 성당 헌장 의 증인으로 처음 기록되었다. 앨프리스는 왕의 "적법한 아내"로, 애드먼드는 왕의 "적법한 아들"로 증언한 반면 애드워드는 "같은 왕에게서 태어났다"고 설명되었다. 이것이 왕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는 불확실하며, 이는 그가 애드워드를 왕위 계승에서 제외하기를 원했음을 시사했다. 또는 앨프리스의 친구이자 동맹이었던 애설월드 주교의 명령이었을 것이다. 역사가 바바라 요크는 애설월드가 애드워드의 적법성을 부인한 것을 "기회주의적 특별 변론"으로 봤다. 969년경 던스탠의 글래스턴베리 수도원에서 작성된 계보는 애드원드를 에드먼드와 애설레드보다 우선시했다. 에드거가 975년 7월 8일에 죽었을 때 왕위 계승을 놓고 논쟁이 있었지만 에드워드의 나이가 열세 살이었고 애델레드의 나이는 여섯 살에서 아홉 살이었기 때문에 역사가 숀 밀러는 "그들은 활동적인 참여자라기보다는 확실히 명목상의 지도자였다"고 지적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에드워드의 지지자들을 수도원 개혁의 수호자로, 에설레드의 지지자들을 반대자로 보았지만, 양측 모두 지지자들이 있었고, 이 견해는 현재 일반적으로 거부되고 있다. 그들 사이에서 선택하게 된 진짜 이유는 아마도 가족간 동맹 때문일 것이다. 에설월드 주교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아들 에설레드의 주장을 내세운 친구 에서스리스를 지지했고, 던스탠 대주교는 에드워드의 주요 지지자였다. 우스터의 존에 따르면, 오스월드 대주교도 에드워드를 지지했다. 오스월드는 에설레드를 지지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엘더만 에설헤어와 불화가 있었고,그의 처남 에설프릭 실드와 함께 에설헤어의 적 에설와인(에델스탄 반왕의 아들)은 아마도 에드워드를 지지했을 것이다.

비스프레쓰의 오스월드의 삶은 에드워드를 불안정하고 폭력적인 젊은이로 묘사했다.
"이제 이 왕국의 어떤 귀족들은 에드거 왕의 장남인 에드워드를 왕으로 선출하기를 원했다. 일부 영지 관리들은 막내아들을 원했다. 왜냐하면 그는 말과 행동에서 모든 사람에게 더 온화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남은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뿐만 아니라 공포를 심어주었다. 그는 혀를 때리는 것뿐만 아니라 잔인하게 때리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집안 사람들을 괴롭혔다."

역사가 프랭크 스텐턴은 그의 "권위 있고 대규모로 권위 있는" 앵글로색슨 영국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에드워드가 성인으로서 존경을 받은 지 오랜 후에도 그의 분노 폭발은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많은 귀족들이 동생인 애델레드를 선출하도록 결의한 것도 부분적으로 이러한 이유 때문일 수 있다."

캔터베리의 베네딕토회 수도사 이드머는 던스턴의 성인 전기 에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
이 에드워드가 왕으로 봉헌되어야 할 때, 그 땅의 많은 왕자들은 한편으로는 그가 왕이 되는 것에 반대하려고 했다. 그들은 그가 관습적으로 자기 부하들의 지나친 행동을 맹렬히 비판했던 그의 성격이 너무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어머니가 합법적으로 결혼했지만 그를 낳을 때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왕국에 봉헌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가 앤 윌리엄스는 마지막 요점에 대해 회의적이며, 출산 전에 왕의 아내를 봉헌하는 것이 10세기에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에드머는 헨리 1 세의 형에 반대하는 주장을 제기한 12세기 초에 글을 썼으며, 이것이 그의 해석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언급했다. 게다가 에드머는 에드거가 죽기 2년 전에 대관식을 치렀다고 말했기 때문에 같은 주장이 에설레드에게도 적용되었다.

분쟁은 곧 해결되었습니다. 10세기 후반 또는 11세기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원고의 달력 항목은 에드워드가 왕으로 선출된 날짜를 에드거가 죽은 지 2주도 채 안 된 7월 19일로 알려줬다. 아마도 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헌장은 에드워드가 두 계급의 지도자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왕으로 선출되었다고 명시했다. 에설레드는 왕의 아들들이 전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땅을 받았는데, 그 중에는 에드거가 애빙던 수도원에 부여한 땅도 있었고, 지금은 모든 주요 귀족들의 계급에 의해 강제로 회수되었다. 에설레드는 헌장에서 "그들이 이 일을 정당하게 했는지 부당하게 했는지는 그들 스스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했고, 보상으로 애빙던에 다른 땅을 부여했다. 이 헌장은 아마도 에설레드의 지지자들이 땅 부여에 대한 대가로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에 동의한 합의를 반영한 ​​것일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마도 그가 선출된 날과 같은 날 킹스턴 어폰 템스에서 던스탠 대주교에 의해 대관되었다.

정복 이후의 파시오는 던스턴이 에드워드의 왕으로의 대관식을 강행했다고 주장하며 다른 설명을 내놨다. "하지만 에드워드의 봉헌 당시, 국가의 지도자들 중 일부가 이에 반대하기를 원했을 때, 던스턴은 자신의 선출을 일심으로 고수했고, 관례적으로 그가 앞서 들고 다니던 성십자가 깃발을 잡고 중앙에 수직으로 세웠으며, 남은 독실한 주교들과 함께 그를 왕으로 봉헌했다."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 이후 역사가들은 때때로 "반수도원적 반응"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뒤따랐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ASC D가 "신의 적"이라고 묘사한 앨프헤레와 다른 많은 귀족들이 수도원에 공격을 가했다. 그의 라이벌인 애설윈은 신의 친구(amicus Dei)라고 불렸고, 비스프레쓰가 에드워드의 통치 기간에 다음과 같이 쓴 것처럼 수도사들의 수호신으로 묘사되었다.
왕국의 모든 봉토가 흔들렸다. 주교들은 당황했고, 장로들은 분노했고, 수도사들은 두려움에 휩싸였고, 사람들은 공포에 질렸고, 세속 성직자들은 행복해졌다. 그들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수도원장은 이제 수도사들과 함께 추방당했고, 성직자들은 아내들과 함께 끌려왔다. 그리고 '마지막 오류는 처음 오류보다 더 심했다'...이전에 장식된 말에 앉아 동료들과 함께 다윗 왕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던 수도사들은, 이집트로 마차를 탄 고대 총대주교처럼 짐을 지고 다니거나, '지갑도 없고, 신발도 없이' 동료와 친구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고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갈등이 수도원주의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며, 이러한 혼란을 귀족들의 개인적 경쟁과 에드거가 수도원에 양보하도록 강요한 토지에 대한 보상을 회복하거나 획득하려는 그들의 결의에 기인했다. 애설윈은 비스프레쓰의 램지 수도원을 설립했지만, 그는 그들의 영지 몇 개를 훔친 혐의로 앨리 수도원에서 구금되었다. 앨프헤레는 애설월드가 설립한 수도원을 해산했지만, 애설월드의 엘리를 애설윈으로부터 보호했으며 던스탠의 글로스터베리와 애설월드의 애빙던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윌리엄스는 "수도원 토지를 압수한 데에는 반수도원주의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많은 경우, 아마도 대부분의 경우 개혁된 수도원을 위해 토지를 취득하는 데 관련된 부정한 관행이 문제가 되었는데, 판매자(아마도 상당한 압력을 받았을 것임)나 그들의 상속인들이 실제 시장 가치에 가까운 가격을 얻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 매우 제한적인 정보만을 가지고 에드워드 통치 기간 동안 무질서의 정도를 판단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느 시점에서 앨프헤레와 애설윈은 전면전에 가까워진 것으로 보이지만 전투는 없었다. 레오시케라는 테인은 피터버러, 아운들, 케터링 의 영지를 빼앗아 무질서가 심어져 2년 동안 작물이 심어지지 않았다. 레오시게는 애설윈의 동생인 앨프월드게 살해당했고, 그는 그 후 애설월드 주교에게 사면을 받았다. 역사가 조지 몰리노는 싸움의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에드워드의 통치를 만연한 갈등의 시대로 묘사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에드워드 통치기 당시 왕의 회의는 아마도 에드워드의 대관식 때인 템스 강 상류의 킹스턴에서,977년 부활절 이후 옥스퍼드셔의 커틀링턴에서, 그리고 같은 해 윌트셔의 칼른에서 열렸다. 칼른에서의 회의는 무너진 윗층에서 열렸고, 많은 주요 의원들이 부상을 입었고 일부는 사망했지만 던스탠은 들보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무사했다. 앨프헤레는 엘더만 중에서 1위를 차지했고 애설윈은 에드워드의 모든 헌장에서 2위를 차지하여 이전 통치 시절의 주요 평신도 귀족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음을 나타냈다. 에드워드의 첫 번째 헌장은 거의 모든 주요 귀족이 증명했으며, 그의 통치가 일반적으로 수용되었음을 보여줬다. 이것은 연대기 작가 애설워들를 엘더만으로 나열한 최초의 헌장이며 그는 아마도 에드워드에 의해 임명되었을 것이다. 970년대 초반에는 잉글랜드 남부를 관할하는 영지 관리인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에드거의 권한이 너무 커서 그가 직접 그 지역을 관할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에드거가 왕위에 오른 후, 세 명의 영지 관리인이 그 지역을 관할하도록 임명되었는데, 웨식스의 에셀웨어드, 햄프셔의 에셀머, 서식스와 켄트의 에드와인 이었다. 안정이 에드거의 개인적 권한에 달려 있었다면, 그의 죽음 이후 당국이 질서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에드거의 통치 기간 동안 요크의 영지 관리인 오슬락이 추방된 것을 비난하며 기록하고 있지만, 그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기록된 다른 사건은 거의 없다. 976년에 심각한 기근이 있었고, 977년에 사이드먼 주교가 사망했으며, 978년에 던스탠이 에드워드로부터 미들섹스의 헨던 근처 땅을 매입했다 .

역사가 사이먼 케인즈는 에드거 통치 후반의 헌장에서 에델레드 통치 초반까지 이어지는 외교적 전통을 보았지만, 에드워드의 "약간 변칙적인" 헌장은 제외했다. 에드워드 통치 3년 9개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추정되는 5개의 헌장이 남아 있는데, 그 기간의 평균이 1년에 4~5개였던 것을 감안하면 적은 숫자이다. 헌장 S 828과 S 829의 진위성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케인즈는 그것들이 사기라고 말하지만, 아마도 진짜 문서를 기반으로 한 증인 목록이 있다고 말했다. 이 헌장의 편집자 수잔 켈리는 그것들을 "매우 어려운 문서"라고 설명하고 진짜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두 헌장 모두 에드워드 통치 기간 중 또는 그 근처에 같은 부주의한 초안 작성자가 동시에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S 828은 에드워드 왕이 버크셔 의 킹스턴 바그퓨즈에 있는 13개의 하이드의 땅을 램즈버리의 주교인 앨프스탠에게 부여한 것이다. S 829는 같은 마을에 있는 7개의 하이드를 애빙던 수도원에 부여한 것이다. 경계 조항은 두 헌장에서 모두 동일한데, 아마도 주교와 수도원이 영지 내에 다른 분산된 단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윈체스터의 올드 미니스터의 헌장 S 831은 아마도 진짜일 것이고 941 중 하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에드워드가 그의 궁정사제인 앨프릭에게 윌트셔의 와일리에 있는 땅을 부여한 것이다. 헌장 S 832는 에드워드가 앨더만 애설월드에게 콘월에 있는 많은 땅을 부여한 것이다. 이것은 에드워드가 그의 "충실한 가신"(fideli vasallo) 앨프시게에게 데번주 체리톤 비숍의 토지를 부여한 헌장 S 830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두 헌장 모두 엑서터 기록 보관소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마도 크레딧온에서 작성되었을 것이고 하트는 그것들이 현재 형태로 진짜인지 의심하고 있다.

애드워드 통치기의 사용된 유일한 화폐 또한 페니였다. 에드거의 통치 후반까지 여러 마을의 조폐국에서 생산한 페니는 디자인, 무게, 순도 (은 함량)가 다양했다. 970년대 초에 그는 단일 디자인과 훨씬 더 균일한 무게와 순도를 갖춘 개혁 주화를 도입했다. 소형 십자가형이라고 불리는 디자인의 동전은 앞면에 국왕의 왼쪽을 향한 흉상이 있고, 가장자리 주위에 국왕의 이름(+EADGAR REX ANGLOR)이 있는 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뒤면에는 중앙에 작은 십자가가 있고, 가장자리 주위에 주화 제작자의 이름과 조폐소가 있다. 에드거의 개혁 디자인은 에드워드 통치 기간 동안 생산된 유일한 동전 유형이었고, 이드리드 통치 초기에 교체되었다.

에드워드의 동전은 평균적으로 에드거의 동전보다 약간 가볍고 후대의 에설레드의 동전보다 무거웠다. 에드거의 개혁 이후 96%의 세밀도가 높고 균일했으며, 링컨과 요크에서 생산된 약간 덜 세밀한 동전 몇 개를 제외하고는 에드워드 시대에도 유지되었다. 에드워드가 죽은 후 세밀도는 더 다양해졌다. 에드거의 통치 기간 동안 동전용 다이는 거의 모두 한 센터(아마도 윈체스터)에서 만들어진 후 왕국 전역의 다른 조폐국으로 배포되었다. 에드워드 시대에 센터는 훨씬 적은 수의 조폐국에 공급했고 지역 다이 커팅 센터가 이를 보완했다.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어려운 정치적 상황 때문일 수 있다.

에드워드는 978년 3월 18일 저녁 도싯 주 퍼벡 힐의 코프 갭에 있는 계모 엘프스리스의 영지에서 살해당했다. 에드원드의 암살에 대해 비스프레쓰는는 자세한 정황을 남겼다.
어느 날 저녁 무렵, 주목할 만하고 선출된 왕은 형제애의 위로를 구하며, 우리가 말했듯이 사랑하는 동생이 태후와 함께 살고 있는 집에 도착했다. 귀족들과 지도자들은 그를 맞으러 갔는데, 이는 마땅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태후, 즉 그의 어머니와 함께 안에 머물렀다. 그 귀족들은 서로 사악한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너무나 저주받은 의도와 너무나 모호하고 사악한 눈멀음에 사로잡혀 있어서, 하느님의 기름부음받은 자에게 손을 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장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를 포위했다. 그들과 함께 왕실 집사가 서서 겸손하게 봉사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존경할 만한 왕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주님과 그분의 권능의 위력"을 신뢰했기 때문에 군인을 거의 동반하지 않았다. 그는 사이드만 주교의 지도 아래 성경을 배웠다. 그는 몸이 강하고 튼튼했다. 공모자들이 그를 에워쌌을 때 - 유대인들이 우리 주님을 에워싼 것과 똑같았다 - 그는 두려움 없이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단 하나의 광기, 똑같은 광기에 사로잡혔다... 군인들이 그를 붙잡았다. 한 군인이 그의 오른쪽에 서서 마치 키스를 하려는 듯이 그를 끌어당겼고, 다른 군인이 그의 왼쪽을 단단히 잡고 치명타를 가했다. 그리고 왕은 최선을 다해 소리쳤다. "무슨 짓이야, 내 오른손을 부러뜨리려고?" 갑자기 그는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순교자는 그의 종사에 의해 들어올려져 어떤 촌뜨기의 집으로 옮겨졌는데, 그곳에서는 그레고리오 성가도 장례식의 애도도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이 나라 전체의 고귀한 왕은 싸구려 담요로만 덮여서 햇빛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암살은 에델레드를 왕으로 옹립하기 위해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 앨프스리스 왕비가 의붓아들의 살해를 모의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이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분명한 증거는 없다. 다만 이후 상황이 방증이라 할 만하다. 어느 누구도 이 살인으로 처벌을 받지 않았고, 에드워드 왕의 죽음 한 달 후 에설레드가 애설레드 2세로 즉위한다.

한 연대기 작가에 따르면, 에설레드의 대관식은 영국 국민의 고문들의 큰 기쁨 속에 거행되었다. 사이먼 케인스는 " 램지의 비르트퍼쓰는 에설레드가 대주교 던스탠과 대주교 오스왈드에 의해 왕으로 봉헌되었을 때 "그의 봉헌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하며, 이와 관련하여 왕을 "나이 면에서 젊은이였고, 매너가 우아했으며, 얼굴도 매력적이고 외모도 잘생긴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애설레드는 왕이 되었을 때 나이가 9~12세였고, 처음에는 윈체스터 주교 애설월드, 어머니인 앨프스리스, 캔터베리 대주교 던스탠과 같은 주요 의원들이 국정을 관리했다. 애설레드가 왕위에 오를 당시 잉글랜드의 정세는 10세기 중반에 에설레드의 아버지인 에드거 왕 이 데인로를 재정복한 이후 평화의 시기를 경험했다. 그러나 에설레드가 14세가 넘지 않았을 때인 980년부터 소규모의 바이킹 부대가 영국을 상대로 일련의 해안 습격을 감행했다. 햄프셔, 타넷, 체셔는 980년에, 데번과 콘월은 981년에, 도싯은 982년에 공격을 받았다. 그 후 6년이 지난 988년에 남서쪽에서 또 다른 해안 공격이 있었다고 기록되었지만, 여기서 침략자와 데번의 테인 사이에서 유명한 전투가 벌어졌다 . 스텐튼은 이 일련의 고립된 습격이 영국 자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지만 "그것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중요성은 영국이 처음으로 노르망디 와 외교적 접촉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었다.

한편 섭정으로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애설월드가 984년 8월 1일에 죽었다. 이때 애설레드는 성년이 된 만큼 친정을 시작했는데, 애설레드는 초기 의원들을 버리고 나중에 후회하게 될 교회 특권을 침해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이는 후술할 덴마크 바이킹 집단들의 공격이 지속되는 동안에도 993년 헌장에서 그는 애설레드의 죽음으로 인해 "나의 이익뿐만 아니라 나라의 모든 주민의 이익에도 기여하는 근면함과 목회적 보살핌을 베푸는" 사람이 나라에서 사라졌다고 명시했다.한편 애설레드의 어머니인 앨프스리스는 990년대에 그녀가 그의 상속자들을 키우고 그녀의 형제 오돌프가 애설레드의 주요 고문 중 한 명이 되었을 때 새로운 지위를 누렸다.

덴마크의 공격은 990년대 초에 더욱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애설레드는 덴마크에 대한 데인겔드라는 세금을 다시 거둬들여 조공으로 지불을 했지만 덴마크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완화하지 못했다. 애설레드의 군대는 주로 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상당수의 외국 용병이 있었지만 상당수의 훈련된 기병대를 보유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노르만족은 영국을 습격하고 돌아온 덴마크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이로 인해 영국과 노르만족의 궁정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그들의 적대감에 대한 소식이 결국 교황 요한 15세에게 전해 졌습니다.교황은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해소하고자 했고, 영국과 노르망디 사이에 평화를 이루기 위한 조치를 취했으며, 이는 991년 루앙에서 비준되었다.

991년 8월, 규모가 큰 덴마크 함대가 영국 남동부에서 지속적인 원정을 시작했다. 켄트의 포크스톤 에 도착하여 남동쪽 해안을 따라 블랙워터 강을 거슬러 올라가 결국 강어귀에 도착하여 노시 섬을 점령했다. 노시에서 서쪽으로 약 2km(1마일) 떨어진 곳에 해안 도시인 말든이 있는데, 애식스의 엘더만인 비르트노쓰가 테인으로 구성된 부대와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잉글랜드인과 덴마크인 사이에서 이어진 전투는 이후 말든 전투로 불리며, 고대 영어로 작성된 시를 통해 말든 전투는 불후의 명성을 얻었는데, 이 시는 비르트노쓰가 압도적인 적수에 맞서 애식스 해안을 방어하려는 운명적이지만 영웅적인 시도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잉글랜드 느낀 일련의 참패 중 첫 번째였으며, 처음에는 덴마크 침략군에게, 나중에는 조직적인 덴마크 군대에게 패배했다. 스텐튼은 이 시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본토로의 접근을 위해 그들은(데인족) 만조 때 침수되는 보도에 의존했는데, 이 보도는 노시에서 강어귀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있는 평지로 이어졌다. 그들이(데인족) 섬에 있는 진영을 떠나기 전에 비르트노쓰는 그의 종사들과 지역 민병대를 거느리고 보도의 육지 쪽 끝을 점령했다. 조공 요구를 거부하고, 만조 때 물 건너로 소리쳤고, 비르트노쓰는 강둑을 따라 그의 부하들을 끌어모았고, 썰물을 기다렸다. 물이 빠지자 약탈자들이 보도를 따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비르트노쓰의 종사 3명이 그들을 반대했고, 마침내 그들은 방해받지 않고 건너가 본토에서 동등한 조건으로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를 가장 존경하는 사람들조차도 '과도한 용기'라고 부르는 것으로 비르트노쓰는 이에 동의했다. 해적들은 썰물을 헤치고 달려들었고,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 문제는 비르트노쓰의 몰락으로 결정되다. 그의 부하들 중 많은 수가 즉시 도망쳤고 영국군의 대열은 무너졌다. 이 전투에 지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비르트노쓰의 테인 무리가 전투에서 졌다는 것을 알고도 고의로 죽음을 택해 군주의 복수를 했다는 뛰어난 용기였다."

말던 전투의 여파로 영국은 덴마크인에게 그들이 원하는 조공을 바치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평화를 위해 10,000파운드의 가폴이 그들에게 지불되었다. 그러나 아마도 991년에서 993년까지 잉글랜드 해안을 계속 파괴한 것은 말던에서 비르트노쓰를 격파한 덴마크 함대였다. 991년 이후로 대열이 불어난 덴마크 함대는 994년에 템즈 강 어귀를 향해 방향을 바꾸고 런던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결정적이지 않았다.

이 무렵 애설레드는 덴마크 함대의 지휘관들을 만나 불안한 협정을 맺었다. 당시 정착해 있던 덴마크 와 잉글래드 사이에 정착 분쟁과 무역 규제와 같은 겉보기에 문명화된 협정을 규정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이 조약은 또한 전년의 약탈과 학살을 잊을 것을 규정했고, 평화의 대가로 약탈자들에게 22,000파운드의 금과 은을 지불했다고 말하면서 갑자기 끝났다. 994년 노르웨이 군주이자 이미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인 올라프 트리그바손이 앤도버에서 열린 의식에서 기독교인으로 확인되었다. 애설레드 왕이 그의 후원자로 섰다. 선물을 받은 후 올라프는 "적대감을 품고 영국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올라프는 이후 영국을 떠나 노르웨이로 가서 결코 돌아오지 않았지만 "바이킹 군대의 다른 무리는 영국에 머물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조약을 통해 일부가 와이트 섬을 기반으로 용병으로 애설레드 왕의 서비스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이다."

997년에 덴마크의 약탈이 다시 시작되었다. 케인즈에 따르면, "이것이 새로운 함대나 군대였다는 암시는 없으며, 아마도 991년 약탈군의 잔여 병력으로 994년에 창설된 용병 부대가 보호를 위해 고용된 사람들을 공격했을 것이다." 997년에는 콘월, 데번, 서부 서머싯, 남부 웨일즈를 공격했고, 998년에는 도싯, 햄프셔, 서식스를 공격했다. 999년에는 켄트를 공격했고, 1000년에는 영국을 떠나 노르망디로 향했다. 아마도 잉글랜드가 덴마크의 가폴(gafol) 또는 공물 요구에 굴복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일 것이다. 공격으로부터의 갑작스러운 해방을 애설레드는 자신의 수중에서 동원할만한 모든 자원, 군대를 모으는 데 시작했다. 1000년 함대가 떠난 후 애설레드는 어스트라드클리드를 공격했는데, 공격의 이유에 대해서는 불명이며 또한 그의 어머니인 앨프스리스가 이시기(1000~1002년)에 사망했다.
2.1.3.4. 잉글랜드에 남은 로만 브리튼계 국가들
이교도 대군세 당시 잉글랜드에 잔존한 로만 브리튼계 국가들은 콘월과 어스트라드클리드 밖에 없었는데, 콘우너은 이미 웨식스에 의해 먹혀져 가고 있었고, 어스트라드클리드 역시 바이킹의 공격을 받은 이후 북쪽의 알바 왕국, 남쪽으로 잉글랜드의 압박을 받게 된다.
다시 콘월을 통치한 왕은 도냐스로 그는 웨식스에 복속된 하위왕으로서 콘월을 통치했다. 그러나 웨일즈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875년에 익사했다. 그의 죽음은 사고였을 수도 있지만, 878년 신윗 전투에서 데번의 엘더만 오다가 승리한 후 앨프레드 대왕에게 쫓겨나기 전에 웨식스를 괴롭히고 있던 바이킹과 협력한 것에 대한 처벌이라고 아일랜드에서 기록했으며, 그가 마지막 콘월의 왕이라고 기록되었다. 이후 바글란의 책에 880년경 엘루이드 압 퍼페르딘, 890년경에 알라노루스 압 엘루이드가 콘웰의 군주라고 이름만 기록되었을 뿐 계속 왕을 칭했는지 치적에 대한 기록도 없다.

이후 콘웰은 엘더만들에 의해 통치되었는데, 웨식스의 왕실은 현지 분위기를 가만해 앵글로색슨 귀족들을 임명한 것이 아닌 로만브리튼인들을 임명했다. 최초로 기록으로 등장한 엘더만은 코난으로 926년에서 937년까지 통치했는데, 12세기 연대기 작가인 멜즈베리의 윌리엄의 기록에 927년경에 잉글랜드의 애설스탠이 엑서터에서 콘월인을 몰아내고 콘월의 동쪽 경계를 타마르 강으로 정했다고 하는데, 후대의 역사가인 칼 에드워즈는 당시 콘월이 잉글랜드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윌리엄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 일축했지만 다른 역사가인 존 루벤 데이비스는 이 원정을 영국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그 후 콘월인을 타마르 강 너머로 고립시키고 콘월에 별도의 주교구를 만드는 것으로 봤다. 이후 940년경에 롤로페 압 알라노루스였는데, 944년 애설스탠의 아들인인 에드먼드 1세는 자신을 '영국의 왕이자 브리튼인의 이 속주의 통치자'라고 칭했다. 이후인960년경에 보르테긴 헬린 압 롤로페, 980년경에 베파인 압 보르테긴, 1000년경에 알루레드 압 베파인이 통치했다. 그동안 잉글랜드의 왕들은 9세기에 동부 지역의 땅을 하사했지만, 서부 지역에서는 10세기 중반까지 아무런 하사 기록이 없다.

골동품 수집가 윌리엄 캠던은 1607년 그의 책 브리타니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콘월 사람들은 그들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온 힘을 다했지만 곧 색슨족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 색슨족은 수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들의 조국은 그들을 방어할 만큼 자연적으로 충분히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콘월은 이제 헌드레드 체계와 같은 앵글로색슨 행정적 특징이 도입되었지만, 데번과 달리 콘월의 문화는 영어화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주민들은 여전히 ​​콘월어를 사용했고 지명은 여전히 ​​주로 브리튼어였다.

콘월의 교회 세력 역시 일단은 여전히 그 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콘월이 웨식스에 굴복하기 이전 콘월의 교회는 정치에도 개입할 정도로 영향력이 강했으면 웨일즈의 영향까지 받았기에 콘월이 웨식스에 복속된 이후 켄스텍 (833년-870년)은 캔터베리 대주교에게 복종하겠다고 공언한 최초의 콘월 주교가 되었고, 같은 기간에 셔본 주교는 "콘월 교회의 오류를 근절하기 위해" 매년 콘월을 방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880년대에는 콘월의 교회에 더 많은 색슨족 사제들이 임명되었고, 그들은 폴툰, 케엘윅, 란드위탄(세인트 브록의 폴튼또는 동부 콘월의 필라톤)과 같은 일부 교회 부지를 통제했다. 아마도 셀리위그(에글로샤일의 켈리윅 또는 아마도 콜리턴(공식적으로 켈리윅))과 로히턴이었을 것이다. 결국 해당 지역들을 웨식스 왕들에게 넘어갓다. 그러나 앨프레드 대왕의 유언에 따르면 그가 콘월에서 소유한 땅의 양은 매우 적었다. 타마르 강 서쪽에서 앨프레드 대왕은 스트래튼 지역에서 작은 지역과 타마르 강 동쪽의 콘월 땅에 있는 리프튼 주변의 몇 개의 다른 작은 부지만 소유했다. 이것들은 캔터베리에서 임명된 사제직이 점점 더 영국에 의해 지배되고 있던 교회를 통해 그에게 제공되었다.

콘월 교회의 초기 조직과 소속은 불분명하지만, 9세기 중반에 디누린에 있는 그의 교구와 함께 컨스텍 주교가 이끌었는데, 이 위치는 때때로 보드민으로, 때로는 게란스로 확인되었다 .컨스텍은 셀노쓰의 권위를 인정하여 콘월을 캔터베리 대주교의 관할권으로 두었다 .920년대 또는 930년대에 애설스탠 왕은 콘월 전체를 관할하는 성 게란스에 주교구를 설립했는데, 이는 처음에는 셔번 교구에 종속된 것으로 보이지만 10세기 말에 자체적으로 완전한 주교구로 부상했다. 여기의 처음 몇 명의 주교는 콘월 원주민이었지만 963년 이후에 임명된 주교는 모두 잉글랜드인이었다.[82]
바이킹들에 의한 이교도 대군세가 진행되는 870년, 15~16세기의 얼스터 연대기와 11세기의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는 맨섬의 바이킹 왕들인 울라프와 이마르가 아스칼이 통치하던 알트 클루드의 수도를 포위 공격하고 4개월간의 봉쇄 끝에 요새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알트 클루트의 파괴는 11~13세기의 캄브리아 연대기와 13~14세기의 문서인 브레히네드 이 세손과 브루트 이 군주들의 연대기와 같은 웨일스 출처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먼 곳의 출처에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바이킹들이 브리튼 전역에서 거둔 성공에 대한 경각심을 보여주는 예일 수 있다.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에 따르면, 알트 클루트은 우물이 말라버린 후에야 공격을 받았다. 한 가지 가능성은 바이킹들이 던바턴 바위을 둘러싼 우물을 성공적으로 장악하여 브리튼인들이 식수를 마실 수 없게 했다는 것이다.

다음 해인 12세기 스코틀랜드 연대기, 얼스터 연대기, 그리고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는 울라프과 이바르가 200척의 함대와 브리튼인, 잉글랜드인, 픽트인으로 확인된 많은 포로를 데리고 아일랜드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보여줫다. 이 사람들이 아일랜드로 이주한 것은 9세기 독일 자료인 크산텐스 연대기에서도 증명된다. 포로들은 몸값을 받기 위해 잡혔을 수도 있고. 더블린 노예 시장으로 팔려갔을 수도 있다. 어쩌면 아스날과 그의 가족이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스날에 대한 기록이 2년뒤의 기록에도 나온 것을 볼 때 탈출한 것으로 보인다.

공격의 이유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알트 클루트가 풍부한 표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표적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반면에 포위 공격의 놀라운 기간은 울라프과 이바르가 단순히 아스날의 영역을 약탈한 것이 아니라 수도를 특별히 노리고 점령에 성공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울라프과 이바르가 알트 클루트의 왕들을 해상 이익에 대한 적극적인 위협으로 여겼을 수 있고, 알트 클루트의 요새 수도가 바이킹이 아일랜드에서 롱푸르트를 해군 기지로 활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브리튼인에게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 성채가 파괴되면서 바이킹은 스코틀랜드 중부로 무제한으로 접근할 수 있었을 수 있다. 한편, 바이킹 포로의 기록된 민족은 알트 클루트의 브리튼인들이 많은 잉글랜드과 픽트족 노예나 신민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줄 수 있다. 다른 한편, 기록된 민족은 알트 클루트의 함락이 그 지역에서 동시대의 일련의 바이킹 원정에서 기록된 유일한 사건이었다는 증거일 수 있으며, 울라프 이바르가 알트 클루트의 브리튼인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했을 뿐만 아니라 로디안의 브리튼인과 픽트족 영역 전체에 대한 권력을 주장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더블린 과 요크 사이에 연결 경로를 찾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클라이드만과 포스만을 연결하는 수로나 적합한 운반로가 없다는 사실이 이에 반대하는 증거일 수 있다. 아일랜드 단편 연대기에서 울라프가 약 872년에 즉시 브리튼으로 돌아왔다는 사실 이 알트 클루트에 대한 공격이 단순히 이동 가능한 부의 획득이 아닌 영토 정복/통제의 맥락에서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아스날은 872년에 사망했다. 얼스터 연대기와 스코틀랜드 연대기는 그가 픽트족의 왕인 카우산틴 맥 시나에다의 명령에 따라 살해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스날의 유일하게 알려진 아들인 룬은 아스날과 관련된 하레이안 혈통에 나열된 마지막 왕이다.

만약 룬이이 아스날의 뒤를 이었다면(가능성이 높다면) 그가 아스날보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불확실하다. 카우산틴이 아스날의 몰락에 일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룬은 어느 시점에 카우산틴의 누이와 결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스날의 암살을 둘러싼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카우산틴과 룬의 가족 관계는 아스날의 몰락이 룬이 왕위를 차지하도록 조종되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한 가지 가능성은 룬이 아버지의 왕국에서 추방되어 울라프과 이바르가 원정을 시작했을 때 픽트 왕실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카우산틴이 브리튼의 왕권과 관련하여 룬의 라이벌을 상쇄하기 위해 행동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반대로, 룬과 아스날 사이에 갈등이 없었다면, 후자에 대한 카우산틴의 행동은 침입적이고 공격적인 이웃의 맥락에서 수행되었을 수 있다.

아스날의 제거는 카우산틴이 바이킹의 맹공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을 이용하려는 시도의 맥락에서 수행되었을 수 있다. 알트 클루트의 파괴는 13세기까지 요새가 기록에 나타난 마지막 시간이다. 이 유적지는 영국이 패배한 후 바이킹의 군사 기지로 사용되었을 수 있지만 후대까지 군주의 통치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다. 아마도 이 유적지는 신뢰를 잃었고 그 후 통치 왕조의 중심지로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게 되었을 것이다. 확실히 브리튼인의 수도는 클라이드 강을 따라 고반과 파트윅 근처로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클라이드 강 북쪽 기슭에 있는 전자의 장소는 8세기 아스날의 선대인들에 의해 이용된 것으로 보이는 반면, 남쪽 기슭에 있는 후자의 장소는 적어도 1세기 전에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수도의 이전은 살아남은 문서 자료에 의해 입증되는 듯하다. 예를 들어, 알트 클루트가 함락되기 전까지 이 왕국의 통치자들은 요새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유적지를 잃은 후, 알트 클루트 왕국은 클라이드 강 계곡인 Ystrat Clut(Strathclyde)쪽으로 방향을 바꾼 결과 어스트라드클리드 왕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아스날 자신은 872년 사망 후 어스트라드클리드 브리튼인의 왕으로 칭했다. 이는 아일랜드 자료에서 이 용어를 처음 사용한 것이다. 아스날이 바이킹 포로의 손에 아일랜드에서 최후를 맞았을 가능성은 있지만, 사망 시 그에게 부여된 칭호는 그가 새로운 어스트라드클리드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다는 증거일 수 있다. 사실, 그 또는 룬이 이 영역을 통치한 최초의 군주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스날의 죽음이 픽트족과의 갈등 속에서 일어났을 것이라는 의심도 있다. 예를 들어, 12세기의 베르찬의 예언은 카우산틴에게 4번의 승리를 돌렸고, 그 중 네 번째는 캐스 루어스로 묘사되어 있다.캐스 루어스는 아마도 글래스고와 같은 장소였으며, 그는 그곳에서 "녹색 망토의 브리튼족의 왕"을 이겼다.이 출처와 아스날의 부고를 합치면 카우산틴이 전투에서 아스날을 물리친 후 아스날을 처형하거나 암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사건은 아스날의 몰락에서 카우산틴의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설명할 수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알트 클루트 정복 후 아스날이 울라프과 이바르 아래에서 꼭두각시 왕 으로 통치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바이킹들은 정복당한 노섬브리아와 동앵글리아의 잉글랜드 왕국에서 꼭두각시 왕을 내세웠다. 아스날과 바이킹의 권력 사이의 유사한 관계는 아스날의 몰락에서 카우산틴이 한 역할을 설명할 수 있으며, 룬이 어떻게 왕위를 계승했는지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룬이 권력을 장악한 결과로 카우산틴이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 어떤 경우든 카우산틴의 선동으로 아스날이 명백히 제거된 것은 픽트족에게서 이웃의 적을 제거한 것으로 보이며, 카우산틴의 권위와 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룬의 통치는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872년에 시작되었을 것이다. 알바 왕 연대기는 룬을 rex Britannorum ("브리튼인의 왕") 으로 기록했다. 룬과 그의 처남 사이의 적대감은 베르찬의 예언에서 입증될 수 있다. 이 출처에 따르면 카우산틴은 그의 적에게 4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처음 세 번의 승리는 바이킹에 대한 승리로 기술되는 반면, 네 번째 승리는 캐스 루어스의 승리로 설명된다. 이곳은 아마도 글래스고와 동일할 수 있으며, 그는 그곳에서 "녹색 망토의 브리튼인의 왕"을 물리쳤다. 문제의 이름이 없는 왕이 아스날이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또 다른 가능성은 예언이 룬 자신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만약 룬이 실제로 예언의 망토를 두른 군주라면 카우산틴과의 갈등은 그의 아버지가 죽은 후에 일어났을 수 있으며, 그의 왕국이 픽트족의 지배로부터 독립되도록 하기 위한 시도에서 이루어졌을 수 있다.

알바 왕 연대기에 보존된 왜곡된 구절을 믿는다면, 울라프는 872/874/875년에 픽트족에게서 조공을 받던 중 카우산틴에게 살해당했다. 873년 이바르가 죽자 얼스터 연대기는 그를 "아일랜드와 브리튼 전체의 북방인의 왕"으로 칭했다. 이 칭호는 픽트족, 어스트라드클리드, 브리튼족, 웨일스족이 거주하는 지역에 대한 바이킹의 지배력을 부분적으로 예시하는 것일 수 있다. 룬의 통치 기간인 것으로 보이는 875년에 알바 왕 연대기는 픽트 족이 달러에서 섬나라 스칸디나비아인들에게 파괴적인 손실을 입었고 그 후 침략자들이 1년 동안 그 주변을 점령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 바이킹 정복은 얼스터 연대기에서 입증된 것처럼 보이며, 9세기에서 12세기 사이의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기록된 대로 875/876년에 픽트족과 어스트라드클리드, 브리튼족에 대한 할프단 의 원정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할프단의 이 북부 원정은 섬나라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울라프의 죽음을 복수하고 이 지역에서 이바르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맥락에서 수행되었을 수 있다. 어쨌든 브리튼족과의 이러한 충돌은 어스트라드클리드 왕국이 영구적으로 복종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룬의 통치와 삶이 언제 끝났는지는 불확실하다. 한 가지 가능성은 룬이 876년에 사망했을 때, 카우산틴이 바이킹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카우산틴의 죽음은 얼스터 연대기에 의해 876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알바왕 연대기는 그의 몰락을 아툴에서 찾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여러 왕 목록에서는 그의 몰락을 인베르두팟이라고 다양하게 불리는 곳에서 찾는다. 이 불확실한 위치는 파이프의 인베르두팟을 가리킬 수 있다. 카우산틴이 이 날짜에 실제로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지배권을 누렸다면, 룬은 그와 함께 지원 가신으로서 몰락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위를 누가 계승했는지도 알 수 없다. 만약 룬과 카우산틴이 둘 다 876년에 죽었다면 에오하이드는 그들의 부재 중에 영국의 왕권을 물려받았을 것이다. 확실히 카우산틴의 형제인 아에드 막 키네다가 픽트족의 왕위를 계승했고 2년 후 그가 죽은 후에도 왕으로 통치했다. 그 후 픽트족의 왕권이 지릭 이라는 인물에 의해 계승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에오하이드가 왕위를 계승했을 것으로 보인다.

알바왕 연대기에 따르면, 에오하이드는 아에드를 계승하여 11년 동안 왕위를 지켰습니다.연대기에는 또한 지릭 에오하이드와 같은 집안 사람(" 양부 " 혹은 "후견인")이자 조정자였기 때문에 이 기간 동안 통치했다고 더 언급되어 있다고 덧붙여져 있다. 그들의 통치 기간 동안 일식도 기록되었는데, 이 사건은 성 키리시우스의 축제로 거슬러 올라가며, 두 사람은 왕국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연대기는 아에드 핀들리아스 막 닐이 에오하이드 통치 2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아에드가 실제로 879년에 사망했으므로 연대기의 연대기는 에오하이드가 통치를 시작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정확했다. 일식에 관해서는 연대기가 에오하이드의 왕권의 마지막 해의 맥락에 그것을 두는 것으로 보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식은 885년 6월 16일에 일어난 일식과 동일하다는 것이 분명하다. 6월 16일은 적어도 한 명의 키리시우스라는 이름의 성인의 축제일이기 때문이다. 연대기와 얼스터 연대기에서 제공한 날짜 는 이전 통치와 다음 통치 사이에 11년의 간격이 있음을 보여주므로 일식이 실제로 에오하이드의 통치 중에 일어났다는 것이 분명하다. 일식과 관련된 연대기의 불일치는 에오하이드의 추방과 주목할 만한 천문 현상을 연관시켜 정권 교체의 극적인 효과를 높이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연대기 외에 에오하이드와 지릭을 왕으로 연관시키는 유일한 출처는 12세기의 베르첸의 예언 때문이다. 후자에 따르면 에오하이드는 추방되고 지릭( "행운의 아들"로 묘사됨)이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13년 동안 왕으로 통치했다. 두 출처 간의 불일치는 부분적으로 민족적 편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확실히 베르첸의 예언은 에오하이드의 브리튼의 유산을 비판하는 반면 지릭은 스코틀랜드 인으로 칭송받았다.

한편 어스트라드클리드 왕국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나온 것은 10세기가 되어서였다. 알 클루드를 잃은 후 어느 시점에서 어스트라드클리드 왕국은 영토 확장을 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927년까지는 남부 국경이 페인리스 근처의 이몬트 강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남부 확장의 촉매는 스칸디나비아 정복자들의 손에 노섬브리아 왕국이 극적으로 쇠퇴한 것이었을 수 있으며 이러한 확장은 9세기 후반과 10세기 초반에 컴브리아인과 섬나라 스칸디나비아인이 협력하여 이루어졌을 수 있다. 이 세력들 간의 우호적인 관계는 고반에 있는 현대 스칸디나비아 영향을 받은 조각품의 놀라운 컬렉션에서 입증될 수 있다. 어스트라드클리드 왕국의 확장 동안 에오하이드가 통치했을 것으로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 픽트와 브리튼 왕국이 에오하이드의 통치를 받는 동안 바이킹의 공격을 받았다는 기록은 확실히 없다. 더욱이 픽트와 브리튼 왕국의 연합은 그가 영국의 권위를 남쪽으로 확장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에오하이드의 추방 이후 더프날 6세가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위를 차지한다. 그의 동치 기록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으나 러시아어 위키백과 기준으로 그웬티안 연대기(Gwentian Chronicle)에서는 890년에 색슨족과 동맹을 맺지 않은 어스트라드클리드 사람들은 조국을 떠나 아나 라우드가 통치 하던 귀네드로 망명했다고 한다. 이는 데프날왈이 색슨족 세력과 동맹을 맺고 이에 불만을 품은 어스트라드클리드의 브리튼인들이 귀네드로 망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만 927년까지 어스트라드클리드의 남부 국경이 페인리스 근처의 이몬트 강에 도달한 것으로 볼 때 더픈날 또한 확장 정책을 시도한 것으로 본다.

945년 웨일즈 연대기의 기록에 따르면 앵글인의 왕 에드먼드 1세가 어스트라드클리드를 침공해왔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와 잉글랜드의 연대기에서는 에드먼드 1세는 스코트인들에게 컴브리아인들을 지배할 권한을 인정하는 한편, 브리튼인 왕실의 씨를 끊기 위해 더픈날의 아들들의 눈을 뽑았고, 유일하게 말 콜룸과 오와인만이 실명되지 않았다.

더픈날의 사망 시기는 알수 없으나 알바왕 연대기에 카우산틴 2세의 통치기간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왕위는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말 콜룸, 오와인 압 더픈날이 계승했다지만 멜로즈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쓴 것으로 보이는 멜로즈 연대기와 스코틀랜드 연대기에서 리데르크라는 인물이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971년 알바왕 연대기와 얼스터 연대기에서 알바의 왕인 킬렉 막 일둘브가 셋째동생 오하드와 함께 브리튼인들에게 살해되었되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같은 시기의 사건을 기록한 멜로즈 연대기에서는 킬렌이 자신의 형제와 함께 리데르크의 딸을 유괴하여 강간했고 리데르크가 그 보복으로 킬렌을 죽였다고 하는데, 이때 기록에서 리데하크가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으로서 기록되어 있다. 베르찬의 예언에서는 킬렌이 "외국을 찾던 중"에 죽었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어스트라드클리드인에게서 세금을 걷어들이려 했다는 것을 시사할 수 있다.

다만 리데르크가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인지는 제대로 증명할 수 없지만 킬렌이 자신의 딸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의 전쟁 무리가 킬렌의 군대를 이길 만큼 분명 강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리데르크는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저명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말 콜룸의 즉위 시기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이름이 웨일스어가 아닌 게일어임은 그가 브리튼인 출신 왕실과 주변의 스코트인 귀족들의 관계가 양호했을 때 태어났음을 시사한다.

973년에 에드거와 체스터에서 회담했다고 하는 모인 왕들 중에 말 콜룸과 그 아버지가 모두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앵글로 색슨 연대기의 'D', 'E', 'F' 버전에 따르면, 그 해에 왕에게 서임 된 후, 영국의 군주는 대규모 해군을 모으고 체스터에서 6명의 왕과 회담했다. 10세기까지 그와 회담한 왕의 수는 8명이 되었다고 하며, 10세기의 성 스위잔의 생애가 그 증거가 되고 있다. 12세기까지 8명의 왕의 이름을 들기 시작했고, 에드거를 디 강으로 쏟아냈다고 여겼다. 이것은 12세기의 문서 ' Chronicon ex Chronicis', '잉글랜드 왕들의 행적', '색슨족의 초임', 13세기 'Chronica majora', 웬도버 버전과 파리 버전 '플로레스 히스토리아람' 등의 자료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참고로 말 콜룸과 더픈날이 같이 기록된 것을 볼 때 이는 더픈날이 회담전까지는 생존해 어스트라드클리드의 왕위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에드가를 강으로 노를 저어 내려가는 사람들의 상징적인 이야기는 역사적이지 못한 미화일지 모르지만, 여덟 왕에게 부여된 이름 대부분은 동시대의 통치자들과 연관될 수 있으며, 이는 이들 중 일부가 그와 화해에 참여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후자의 기록은 왕들이 에드가에게 복종했다고 주장하지만,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그들이 그와 협력하기로 합의했고, 따라서 그의 efen-wyrhtan ("동료", "심지어 일하는 사람", "동료 일꾼")이 되었다고만 언급하고 있다. 한 가지 가능성은 이 집회가 어떻게든 에드먼드가 945년에 어스트라드클리드가 자리하고 있던 캄브리아를 침입한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같은 출처에 따르면 에드먼드가 캄브리아를 말 콜룸 막 돔넬에게 맡겼을 때 그는 후자가 자신의 mid-wyrhta("동료", "짝수 일꾼", "동료 일꾼", "함께 일하는 사람")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 그렇게 했다. 색슨족의 초임, 웬도버와 Flores historiarum의 파리 버전, Chronica majora와 같은 덜 신뢰할 수 있는 비현대적 출처는 에드거가 975 년에 로시앤을 키나드에게 부여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가정된 부여가 체스터에서의 에피소드의 일부를 형성한다면 945년의 협정과 함께 975년의 집회가 그 자체로 복종이 아니라 영국 국경을 따라 상호 협력에 관한 회의였음을 나타낼 수 있다. 캄브리아 확장의 정확한 연대기는 불확실하지만 927년까지 어스트라드클리드 왕국의 남쪽 국경은 페인리스 근처의 에아몬트 강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973년 집회의 체스터 위치는 모든 당사자에게 논리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다른 명명된 왕 중 한 명은 키나드였다. 앵글로-색슨 연대기가 왕의 수를 여섯 명으로 계산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키나드가 실제로 참석했다면 그의 라이벌이자 킬렌의 형제인 아믈리브 맥 일룰브도 참석했을 가능성은 낮다. 키나드와 아믈리브의 통치에 관한 연대기는 불확실하지만 아물리브는 아마도 971/976~977년에 통치했을 것이다. 그리고 키나드는 971/977~995년에 통치했을 것아다. 알바 왕이 회의에서 수행한 역할은 그의 왕국의 국경과 관련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른 명명된 왕 중 한 명은 마쿠스 막 아라일트 인 것으로 보이며 다른 한 명은 이 사람의 형제인 고프래이드 일 수 있다. 이 두 사람은 스코틀랜드인과 컴브리아인들에게 위협으로 여겨졌을 수 있다. 마쿠스와 고프래이드는 10년 초에 앵글시를 황폐화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에드거의 집회가 이 활기찬 고립된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초래한 위협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이루어졌음을 시사할 수 있다. 사실, 체스터에서의 집회의 결과로 형제들이 영국 본토에서 서쪽으로 아일랜드로 관심을 돌렸을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

집회의 또 다른 측면은 아일랜드에서 더블린의 왕인 울라프 쿠알란의 놀라운 부상과 관련이 있었을 수 있다. 에드거는 마쿠스와 고프래드와 같은 사람들을 억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스코틀랜드인과 캄브리아인이 울라프와 연합하여 아일랜드해 지역에서 후자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을 막고 싶었을 수 있다. 에드거와 그의 스코틀랜드인 및 캄브리아인 대응자에 대한 또 다른 요소는 북부 잉글랜드 국경의 안정성이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토레드 거너슨이라는 사람은 966년에 웨스트모어랜드를 황폐화시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잉글랜드가 캄브리아의 남쪽 확장에 대한 대응의 맥락에서 취했을 수 있는 조치로 보인다. 키나드의 취임 이후 풀려난 캄브리아와 브리튼인의 영토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침략은 캄브리아의 반대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지만 또 다른 가능성은 이 캠페인이 토레드의 캄브리아 영토 점령에 대항하는 방법으로 실행되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더픈날의 사망시기는 상술한 대로 미정이나 에드거와 비슷한 시기인 975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다양한 아일랜드 연대기에 따르면 더픈날은 순례를 떠나는 동안 타지에서 죽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출처는 975년 더픈날의 사망 기사와 997년 말 콜룸의 사망 기사 사이에 캄브리아 왕국이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못했다. 더픈날이 언제 순례를 떠났는지 확실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리데르크가 971년에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라고 의심할 만한 이유가 있다. 반면에 더픈날이 973년에도 여전히 통치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이것은 그가 말 콜룸에게 권력을 넘긴 시점일 수 있다. 아마도 2년 전에 리데르크가 킬렌을 암살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또는 더프날은 순례를 떠날 때까지 왕의 통제권을 유지했을 수 있다. 맞다면 에드거의 죽음이 이 마지막 여정을 재촉했고 캄브리아의 왕권이 말 콜룸에게 넘어갔을 수 있다.

말 쿨룸이 회의에 참여한 것은 부분적으로 그의 아버지의 임박한 순례와 관련이 있었을 수 있으며, 그는 에드거의 영역을 더픈날이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보증을 구했을 수 있다. 말 콜룸이 회의에 모인 왕 중 한 명으로 확인되었다는 사실은 더픈날이 의회 이전 어느 시점에 그에게 통제권을 양도했음을 나타낼 수 있다. 반대로 말 콜룸의 직함은 그가 단지 그의 나이 많은 아버지를 대신하고 섭정으로 행동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말 콜룸이 회의 이전에 실제로 왕위를 맡았다는 증거는 970년 울머에서 잉글랜드 왕실 헌장을 목격한 특정 Malcolm dux의 기록에 존재할 수 있다. 이 문서의 진위성은 의심스럽지만, 증명된 Malcolm은 말 콜룸 자신과 동일할 수 있다. 만약 말 콜룸이 실제로 973년에 왕이었다면 더픈날의 회의에서의 역할은 일종의 ' 원로 정치가 '였을 수 있다. 특히 그가 국제 문제에 대해 수십 년 동안 경험을 쌓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문이나 멘토 역할을 했을 수 있다.

말 콜룸이 더픈날을 계승했다면 리데하크가 죽었거나 왕으로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945년에 잉글랜에 의해 실명된 형제들들이 970년대에도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들이 겪은 끔찍한 부상은 그들이 통치할 자격이 없다고 여겨졌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의 즉위를 둘러싼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말 콜룸의 통치는 분명히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확실히 어떤 출처도 말 콜룸의 통치가 시작될 무렵 스코틀랜드-캄브리아의 정치적 관계를 기록하지 않았지만 더픈날이 로마로 떠났다는 사실은 후자가 자신의 부재 중에 왕국이나 왕조가 위협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말 콜룸은 동시대의 아일랜드, 잉글랜드, 프랑크 왕들과 함께 10세기의 Saltair na Ran 이 보존한 여러 줄의 찬사 시로 기념되었다. 그는 997년에 사망했는데, 이는 그의 북부 대응자인 알바의 왕 카우산틴 맥 퀴레인과 같은 해였다. 말 콜룸의 죽음은 클론맥노이즈 연대기, 얼스터 연대기,Chronicon Scotorum, 그리고 티거나흐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다. 후자는 그를 "북부 브리튼인의 왕"이라고 칭했다. 말 콜룸의 왕위는 형제인 오와인에게 계승된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오웨인 포엘에 의해 계승된 것으로 보이며 그는 말 콜룸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오와인의 명백한 통치 기간에 대해서는 거의 확실하지 않는다. 새 천년 이 바뀌면서 오와인은 50대나 60대였을 수 있으며 영국의 영토 침략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9세기에서 12세기 사이의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영국의 왕인 애설레드 2세가 1000년에 어스트라드클리드 왕국에 파괴적인 전쟁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잉글랜드군이 거의 전국을 황폐화시켰다고 하지만 체스터에 주둔한 잉글랜드 해군은 악천후로 인해 육군과 합류하지 못했기에 대신 맨 섬을 공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맨 섬 공격은 영국 함대가 원래 솔웨이 퍼스에서 공격을 즉흥적으로 실행하기 전에 클라이드 퍼스 지역을 관통할 의도였음을 시사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잉글랜드는 원래 캄프리아의 브리튼인과 아일랜드인을 모두 공격할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애설레드가 캄브리아인을 공격한 구체적인 이유는 불확실하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권위의 힘을 보여주는 그의 북부의 군주들과 동맹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였을 것이다. 한 가지 가능성은 애설레드의 침략이 그 지역의 스칸디나비아 약탈 세력에 대한 캄브리아의 지원과 관련이 있었고, 작전은 아일랜드해 지역의 스칸디나비아 전초 기지를 목표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 언급한 연대기 항목에는 그 해에 "적 함대"가 노르망디로 출발했다는 사실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 이동에 대한 맥락은 제공되지 않았다. 12세기 연대기인 Chronicon ex chronicis에 따르면 함대는 애설레드의 파업 이전에 북부를 비웠으며, 이는 후자가 해외 원정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를 잘 설명할 수 있다. 사실 잉글랜드인들이 브리튼에 주둔하고 있던 스칸디나비아 군대와 거래를 맺고 그 후 이 군대의 일부를 캄브리아인과 싸우도록, 또 다른 일부를 노르만족과 공격하도록 지시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있다.

2.2. 웨일스

중세 웨일스 전역도와 소왕국들의 영역들
앵글로·색슨의 침공때 유일하게 침공을 면한 웨일스 지방은 로마 제국이 잉글랜드 일대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을 때인 400년대를 기점으로 귀네드, 구엔트, 포위스 등의 잘잘한 소국들이 건국된 상태였다. 이후 로마 군대가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이후 십여개 이상의 소국으로 존재했으며, 이후 중세 중기가 되기까지 귀네드, 룽 구이 아 하브렌, 포위스, 구엔트, 데허이바쓰의 다섯 국가로 통합되지만 남은 소왕국의 왕들 간 서로가 브리튼인의 왕을 자칭해 대립하면서 끝내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지진부진해졌다. 또헌 웨일스 사와 관련된 문헌이 많은 나라 중 고작해바야 귀네드, 포위스, 구엔트, 데허이바쓰 네 곳 밖에 없다.
2.2.1. 포위스
포위스는 400년대에 구르세른에 의해 건국되었는데, 전승에 따르면 구르세른은 5세기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이름을 날린 보티건의 웨일스식 이름이다. 구르세른은 픽트족과 스코트족에게 쫓겨 웨일스 북부로 도피했고 그 곳에서 포위스를 건국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아들인 카티건을 거쳐 케델 디르넬루그, 동생인 리드페드 프라이치에게로 이어졌고, 이후 리드페드의 아들인 킨겐 글로드리드, 파스겐 압 킨겐, 모르간 압 파스겐, 모르간의 동생인 브로셔 이스기트록으로 이어졌다.

포위스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왕국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포위스는 여러 지역들이 느슨히 결합된 형태의 왕국이었고 완전한 왕국의 외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로 통치 행적이 제대로 기록된 왕은 브로셔였다.

포위스는 종종 "브로크웰의 땅"이라고 불렸지만, 이 군주의 통치 기간 동안의 사건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일부 세부 사항은 고대 웨일스 시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이는 해석하기 어려웠고, 이 기간에 대한 현존하는 시 중 어느 것도 9세기 이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일부는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브로셔은 전사 영웅이자 넓은 땅의 통치자로 묘사된다. 이러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사냥을 매우 좋아했으며, 그의 주요 휴양지 중 하나는 "May-Abode" 또는 여름 거주지로 만든 메이포드 계곡이었다. 여름에 마스라팔을 방문할 때 그는 종종 성 그위드파치의 수도원을 방문했다. 그는 그의 성스러운 아들 성 티실리오에게 왕국의 그 지역의 주교구를 수여했다. 티실리오와 브로셔는 메이포드에 있는 교회의 기초와 관련이 있지만, 현재 성 메리 교회의 돌은 이 시기의 것이 아니다.

나중에 문장원(College of Arms)에서 브로셔에게 할당한 문장은 그의 남성 상속인이 사용할 수 있는데, 'Sable, three nags' heads, erased argent'로, 세 마리의 참수된 색슨 백마를 나타낼 수 있다. 이 지역의 많은 후대 부족과 가문은 브로셔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그의 문장을 그들의 문장에 포함시켰다. 이 가문의 대부분 계보는 16세기에 전령에 의해 처음 기록되었는데, 브로셔에 대한 견해는 다음 인용문에서 설명할 수 있다.
체스터의 영사인 브로셔 이스기트록은 당시 펭그워네 포위스라고 불리던 마을에 거주했으며, 현재는 슈루즈베리(살로피아)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주거지는 지금 세인트 채드 대학이 있는 곳과 똑같은 곳에 있었다.
—  파웰 박사, 캄브리아의 역사 (1584년판)

베다(2권, 2장)에 따르면 613년경 체스터 전투에서 뱅거 온 디의 수도사들이 노섬브리아의 에젤프리드에게 살해되었을 때 방위군 중에도 '브로크메일'이 있었다고 했다. 웨일즈 연대기 전투의 설명은 베다의 설명과 일치하지만, 이 설명은 베다의 저작 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아마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인물은 분명히 브로셔가 아니다. 당시 포위스의 왕이었던 손자인 셀리프 압 시난이 전투로 사망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인물을 '브로크펠'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베다가 언급한 인물과 잘못 동일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통치기인 549년, 흑사병의 일종인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브리튼 섬에 상륙했고, 웨일스 지역 사회는 황폐해졌으며 마을과 시골 모두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브리튼은 이 역병의 영향을 덜 받았는데, 당시 대륙과의 무역 접촉이 훨씬 적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력이 감소하고 앵글리아의 침략이 늘어나자, 브로셔는 카에르 구리콘에서 펭그웨른으로 궁정을 옮겼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펭그웨른과 전통적으로 연관되는 상술한 슈루즈베리 였거나, 더 방어하기 쉬운 딘 그위곤, 레킨에 있는 언덕 요새 였을 가능성이 있다.

560년경, 브로셔가 죽고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시난이 포위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키난은 6세기 중반 성직자 길다스가 자신의 저서 '브리튼의 멸망과 정복에 대하여'에서 맹렬히 비판한 웨일스의 폭군 중 한 명인 아우렐리우스 카니누스와 같은 사람일 수 있지만, 후자가 키난의 친척인 시닌 압 밀로를 가리킬 가능성도 있다 .

시난은 14세기의 탈리에신의 책에서 처음 증명되었지만 실제로는 6세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웨일즈 전역에서 많은 성공적인 원정을 이끈 군벌로 소개된다. 와이 강에서, 웬트의 사람들을 상대로, 앵글시에서 , 그리고 디페드에서 브리체이니오그와 콘월에서 그의 아들과 달리 그는 전투에서 앵글로 색슨족과 맞선 적이 없다고 설명된다.

성인들의 삶은 키난의 통치에서 더 평화로운 면을 강조하지만, 이러한 작품들은 후기이고 성인들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졌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거의 신빙성이 없다. 란카르판의 수도원장인 리프리스의 세인트 카라도크의 삶(1100 년경 에 쓰여짐 )에서, 시난은 글래모건에 대한 습격을 감행하려고 했다. 그곳의 왕은 너무 두려워서 성직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중재해 달라고 부탁했다.성직자들은 키난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들이 니스 강에서 멈췄을 때, 그들 중 한 명이 나무 위로 올라가 높은 곳에서 왕에게 다가갔다. 나무는 강 반대편 둑으로 가는 다리를 형성하는 방식으로 구부러지고 성인의 기적적인 힘을 목격한 키난은 폭력적인 계획을 포기하고 온 땅에 평화를 선포했다. 시칸은 여기서 라인윅의 왕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디페드의 라인 압 카두간의 이름을 딴 지리적 영토일 수 있으며, 브리치니오그 근처 또는 현대 헤리퍼드셔와 브렉녹셔의 경계에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이전 두 곳 중 하나 또는 둘 다일 것이다. 웨일즈의 성 부노의 삶에서 시난은 성인에게 그위델워른(에데이르니온)의 땅을 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셀리프 사르프가다우 외의 다른 아들로는 때때로 셀리프로 오해받는 에일루드가 있으며 신뢰할 수 없는 출처에서는 마레두드와 디노가드를 목록에 추가하고 있다. 일부 가계도에는 그가 '스코틀랜드의' 그웬윈윈과 결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때때로 그가 613년경 체스터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죽었다고 주장되기도 하지만, 정확한 설명은 이용 가능한 증거보다는 왕조의 건국 신화나 포위스의 영광에 대한 전설을 만들고자 하는 욕구에 더 근거할 것이다. 키난은 600년경에 사망하였고, 아들인 셀리브가 포위스의 왕이 되었고, 셀리브는 시기 미상이나 얼스터 연대기에서 브리튼인의 왕의 칭호를 얻게 된다.

포위스 관련 초기 기록은 대부분 잉글랜드, 즉 머시아와의 충돌에 관한 것이다. 포위스는 웨일스의 동부로 머시아와 국경을 맞댄 탓에 머시아와 노섬브리아와 잦은 충돌을 겪었다. 셀리브가 즉위한 이후 머시아와는 전쟁을 하지 않았지만 616년 무렵 포위스의 왕 셀리브는 웨일스 북부인들과 함께 머시아와 동맹을 체스터 전투에서 노섬브리아 왕국의 애델프리드와 격돌하는데 이전투에서 셀리브가 전사하면서 패배하고 만다.

셀리브의 뒤를 이은 것은 그의 아들인 맨우간으로 일설에 따르면, 613년에 망간 업 세라이프가 왕위에 붙었을 때, 그는 아직 소년이었기 때문에, 한때 도그필링 왕이었던 엘아드 압 그래스트(일명 에일드 포위스)가 포위스에 침공했다고 한다. 이 강탈자는 아마 642년의 머시아의 펜다와 동맹을 맺고 메이저필드 전투에서 노섬브리아인과 싸워 전사할 때까지 아마 30년 이상 왕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도그필링 왕조는 궁극적으로 656년경에 색슨인에 의해 붕고되었고, 맨우간은 포위스의 왕위를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에일드는 엘아드 압 그라스트와 같은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옥스포드 대학 지저스 컬리지 사본에는 에일루드가 맨우간의 형제로 셀리브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대영도서관의 Harley MS 3859에서는 그는 맨우간의 삼촌이자 셀리브의 형제로 보고 있다. 이는 성인이 된 후계자가 없을 경우 형제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리데베드 브리치의 사례)나, 장자가 계승에서 제외되는 경우(그리피드 압 류엘린 파우르와 다피드 압 류엘린 사례)를 들 수 있기 때문이다. 12세기 포위스 궁정의 시인인 퀸델르 브리디드 마우르는 이 왕조가 몰락한 후 귀네드에서 일하다가 포위스 웬윈윈으로 가게 되었으며, 그는 셀리프의 후손들을 ‘전쟁의 뱀’이라고 묘사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에일루드는 642년경에 마에스 코그위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맨우간의 아들인 벨리가 포위스의 왕으로 즉위한다. 맨우간의 아들이라고 하나 족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셀리프의 아들이거나 형제였던 에일루드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 중에서도 특히 시인 퀸델르가 마트라팔 왕조를 셀리프의 후손으로 묘사한 기록이 남아 있어, 그가 셀리프의 후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에일루드 포이스가 엘판 포이스와 킨둘란과 함께 마에스 코그위 전투에서 싸웠다고 가정한다면, 벨리는 헬레드가 보호를 요청하기 위해 달려간 왕이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벨리는 695년경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인 귀로그가 뒤를 이었는데, 귀로그의 행적은 그의 모친이 카누 헬레드의 화자인 킨드륀의 딸 헬레드였을 가능성과 725년 사망했다는 것 외에 알려진 것이 없으며, 귀로그가 죽자 아들인 엘리세드가 왕위를 이었다.

엘리세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으나, 그는 잉글랜드인들에게 점령된 포이스의 영토를 되찾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8세기 중·후반에는 잉글랜드 왕국 중 하나인 머시아와 갈등을 빚는다. 이때 엘리세드가 머시아에 이해 점령된 브리튼인의 일부 영토를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증손자인 킨겐 압 카델이 엘리세드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가 현재 발레 크루시스 수도원 근처에 위치해 있으며, 엘리세그의 기둥으로 알려져 있다. 기둥에 새겨진 이름 엘리세그는 비문을 새긴 장인이 잘못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의 라틴어 비문은 현재 거의 읽기 어려우나, 에드워드 루이드가 이를 필사한 시기에는 더 명확했다고 합니다. 엘리세드와 관련된 비문 부분의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카텔의 아들 킨겐, 카텔의 아들 브로크메일, 브로크메일의 아들 엘리세그, 엘리세그의 아들 귀라우크."
"킨겐은 그의 증조부 엘리세그를 위해 이 돌을 세웠다."
"바로 그 엘리세그가 앵글인의 힘으로부터 포이스의 유산을 검과 불로 되찾았다."
"이 글을 읽는 자마다 엘리세그의 영혼에 축복을 내리기를."

몇몇 오래된 시에서는 엘리세드가 "특별한 왕관, 꼬인 금 사슬로 된 목걸이, 금으로 만든 팔찌와 발찌를 가졌으며 이는 포이스의 주권을 상징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유물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으나, 1400년 오와인 글린두르의 대관식 때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이외에도 엘리세드는 수도를 펭그웨른에서 마트라팔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엘리세드는 755년 사망하고 아들인 브로크메일 압 엘리세드에 의해 계승되었다.

758년 즉위해 잉글랜드를 호령한 머시아의 왕 오파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국경에 ‘오파의 방벽’을 건설하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또한 오파는 포위스에 몇 차례 공격도 가했는데, 760년 헤리퍼드에서 포위스를 공격했고, 이와중에서 773년 브로크메일이 죽었고, 그의 아들인 카델이 왕위를 계승했다. 이언 가운데 오파는 778년, 784년, 796년에 다시 포위스를 공격했으며, 796년 오파가 죽은 후에도 머시아는 포위스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808년 카델이 죽고, 그의 아들인 킨겐 압 카델이 왕위를 이었지만 822년 포위스는 잠시 머시아인에게 장악되다가 머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앵글로색슨족와의 지속적인 충돌로 생긴 국력 소모는 포위스가 이웃 왕국인 귀네드와의 경쟁에서 열세에 놓이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는데, 결국 854년에 킨켄은 로마로 순례를 떠났는데, 이는 부활절 날짜를 둘러싼 웨일스 켈트 교회와 로마 사이의 갈등이 해소된 후 로마를 방문한 최초의 웨일스 통치자였다.

하지만 킨겐은 로마로 여행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객사했고, 이 소식은 포위스에 전해졌다. 킨겐에게 왕위를 이을 아들로 엘리세드, 이에우아프, 에이단, 그루피드가 있었기에 후계 문제는 별 탈이 없었으나 킨겐도 생각치도 못한 문제가 발생했다. 9세기 초·중반 귀네드는 메르빈 브리흐의 즉위를 기점으로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진다. 메르빈은 포위스의 공주로 킨겐의 누이인 네스타를 아내로 맞는데 이것을 이용해 포위스를 거의 장악하기에 이른다. 포위스와 귀네드의 예속 관계는 로드리 마우르의 즉위와 함께 더욱 심화된다. 메르빈과 네스타의 아들 로드리는 모계 혈통을 통해 포위스의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마침내 정당성이 있던 외사촌들을 제치고 855년 무렵 귀네드의 왕관을 쓴 채 포위스의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고, 로드리 마우르의 공식 즉위 이후, 포위스의 왕위는 당연히 귀네드의 왕이 차지하는 처지로 전락했다.878년 로드리 마우르가 죽자 그의 아들들이 웨일스를 다시 분할했고, 이때 아들들 중 한 명인 메르빈 압 로드리가 포위스의 왕위를 가진다. 그러나 900년경 그의 형인 세레디기온의 왕 카델에게 영토를 잃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메르핀의 사망은 10세기 첫 10년 동안 바이킹 잉기문드르의 앵글시 침입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어째든 메르빈의 아들인 리웰린이 삼촌으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되찾는데, 성공했지만 942년까지 통치한 것 외엔 왕으로서의 치적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결국 사촌인 하이웰 다로 알려진 하이웰 압 케델이 포위스를 공격해 리웰린을 왕위에서 몰아내 차지했고, 리웰린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혼인시킨 후 8년 동안 포위스를 지배하다가 950년 사망했고, 데헤이바쓰의 왕위를 상속받은 오와인과 로드리 애드윈이 공동으로 포위스까지 통치했다가 954년 에드윈이 964년 로드리가 각자 사망하면서 오와인이 데헤이바쓰의 왕위와 포위스의 왕위를 단독으로 차지한다. 오와인이 포위스를 지배하는 동안 메르핀의 아들인 하에란두르(또는 하아르두르)의 익사 사건은 왕들의 연대기와 웨일스 연대기 모두에 보고되었다. 첫 번째 기록에서는 953년에 이 사건이 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필리모어의 복원에 따르면 후자의 날짜는 956년으로 정해졌다. 987년 오와인이 죽자 아들인 마레두르가 데헤이바쓰와 포위스의 왕위를 계승했고, 999년 죽은 후 포위스의 왕위는 리웰린 압 세이실이 차지했다. 포위스는 중세 중기인 1063년까지 귀네드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다.
2.2.2. 궨트
궨트는 로마인이 사라진 5세기 무렵에 건국되었다. 410년 무렵 로마인들은 브리튼 섬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5세기 무렵 웨일스 남동쪽 끝에 에위아스(Ewias 또는 Ewyas)라는 왕국이 생겼다. 그러나 곧 에위아스와 에위아스 동쪽 땅을 모두 포함한 궨트 왕국이 새로 탄생했다. 궨트는 이스크와 와이에 흐르는 강 사이의 지역이 영토였다.

다만 이는 일부 역사 학자들의 의견일 뿐 영국 주류 사학계는 에위아스의 존재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제프리 몬머스는 그의 유명한 유사 역사서 브리튼 왕의 역사(Historia Regum Britanniae)에서 옥타비우스(웨일스어: 에우다프)를 "에위아스와 에르긴의 백작"으로 묘사하며, 그가 로마에 맞서 전투를 벌인 실루레스의 지도자였던 카라타쿠스의 후손이라는 전설을 기록했다. 제프리에 따르면, 그는 3세기 말이나 4세기 초 트라헨(Trahern)을 물리치고 코엘 고데보그(Coel Godhebog) 왕의 형제인 트라헨을 물리친 후 "브리튼의 왕(British High Kingship)"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역사적 증거는 없으며, 코엘의 통치는 일반적으로 5세기 옛 북부(Hen Ogledd) 지역에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브리튼 왕의 역사의 웨일스어 버전에서는 옥타비우스를 에우다프(Eudaf)라고 부르며, 이 인물은 브라우드위드 막센 울레딕(Breuddwyd Macsen Wledig)에서 막센 울레딕(Macsen Wledig)의 아내 엘렌의 아버지로 등장하며 북웨일스의 세곤티움 근처에 살았다고 묘사된다. 8세기 클로독 교회와 관련된 헌장에는 에위아스의 왕이었던 클리다우그(Clydawg)가 사냥 중 살해되었으며,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예배당이 세워졌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궨트라는 이름은 실루리아의 수도였고 ‘실루리아의 시장’이라는 뜻을 가진 벤타 실루럼에서 온 것이다. 궨트라는 이름은 벤타에서 궨타로 다시 궨트로 변하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벤타 실루럼은 ‘벤타 요새’라는 뜻의 카루엔트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카루엔트는 이름이 바뀐 후에도 500년 무렵까지 궨트 왕국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다.

궨트의 건국자는 카라도그이다. 카라도그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궨트를 건국했는지 존재하는 기록은 없다. 카라도그에 대한 기록은 대체로 윤색된 중세 로맨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는 아서 왕 전설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으로 유명하다. 전설에 따르면, 카라도그는 아서 왕의 아버지 우서 펜드라곤 시대에 원탁의 기사로 활약한 전설적인 영웅이다. 로마 군대에 맞서 싸운 용맹한 선조들의 땅에 카라도그라는 전설적 인물이 세운 왕국이 바로 궨트이다.

왕국의 초기 중심지는 로마의 행정 중심지였던 카르웬트(Caerwent) 또는 로마의 주요 군사 기지였던 카르레온(Caerleon)일 가능성이 있다. 두브리시우스(Dubricius), 타테우스(Tatheus), 카독(Cadoc)과 같은 웨일스 성인들이 5세기부터 이 지역에 기독교를 전파했다. 전통에 따르면, 6세기경 카라독은 궁정을 카르웬트에서 포츠큐엣(Portskewett)으로 옮겼으며, 이는 아마도 인근의 서드브룩(Sudbrook)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설로는 카라독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는 6세기 중반의 통치자로 기록된 에르브(Erb)가 이 왕국을 세웠으며, 그가 블랙 마운틴(Black Mountains) 동쪽의 에르긴(Ergyng) 지배자로서 남쪽의 더 넓은 지역을 장악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에르브의 사망 후, 그의 왕국은 어린 아들들 사이에 나뉘었다. 닌니오(Nynnio)는 궨트(Gwent)와 글위싱(Glywysing)의 왕이 되었고, 페이비오(Peibio)는 에르깅(Ergyng)의 통치자가 되었다.

닌니오가 죽고 그의 아들인 테이스팔트가 480년경에, 연대상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는 케레디기온 왕국의 시조인 쿠네다의 아들 케레디그의 딸인 코룬과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의 손자인 테우드릭(테오도릭)이 그의 후계자로, 익명의 딸과 콘월의 부딕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 시기 궨트의 일부는 또 다른 통치자 인니르(Ynyr)의 통치 아래 있었는데, 이는 라틴어 ‘Honorius’를 켈트어화한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510년경 테이스팔트가 죽고 다이페드(Dyfed) 왕위의 간접적인 후계자였던 인니르가 지역 전통을 이어가며 유리한 동맹을 맺고자 노력하기 위해 보르티머(Vortimer)의 딸인 먼 사촌 성녀 마테리아나(Materiana)와 결혼하여, 이 결혼을 통해 웬트(Gwent)의 왕이 되었다.

웨일스 전설 이야기 게레인트와 에니드 (Gereint ac Enid)에서 그는 종종 카이어 팀(Caer-Theim, 카디프(Cardiff))의 인윌(Ynwyl)과 동일 인물로 식별된다. 성 밀리아우(Saint Miliaw)에 얽힌 전설에 따르면, 그의 여동생 데르웰라(Derwela)가 인니르(Ynir)의 두 번째 아내가 되었으며, 이때 인니르는 그녀보다 거의 40살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기독교 개종은 성 베우노(Saint Beuno)에 의해 매우 늦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또 다른 반전설적 인물과의 혼동일 수도 있다. 그가 5세기 말에 사망한 후, 아들 이돈 압 인니르(Iddon ap Ynir)가 왕위를 계승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돈의 통치 시기를 정확히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580년대 또는 590년대까지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색슨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의 승리는 케아울린을 상대로 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세르딕이나 킨릭과의 소규모 전투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는 죽기 전에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잘못된 행위"를 바로잡기 위해 교회에 기부를 했다고 전해진다.

이후의 왕 중 한 명은 기독교 신자였던 글라위싱의 통치자였던 테우드리그(Tewdrig) 왕으로, 란다프 교회의 후원자였으며, 색슨족의 침입을 격퇴한 이력이 있었다. 그는 통치의 어느 시점에서 왕위를 아들인 뮤릭에게 물려주고 와이 강 건너편의 여울 근처의 바위투성이 지역인 틴턴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다가 이교도 색슨족의 침입을 받았다. 왕국이 색슨족의 침입을 받자 아들을 돕기 위해 세속에 나와 색슨족과 싸우다가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생전에 자신이 정해둔 매장지인 이니즈 에크니[83] 가까이에서 죽기 원했기에 그곳으로 옮겨가던 도중 세번 강 어귀의 만에 있는 매서른 보다 더 멀리 가지 못했고, 그곳에서 잠시 쇠약해지다가 죽었다. 뮤릭 왕은 그 자리에 교회를 짓고 아버지의 시신을 그곳에 묻었고, 주변 땅을 란다프 주교들에게 주었다. 6세기부터 여러 왕들이 글위이싱(Glywysing) 왕국과 그 왕국을 통합하기 시작했고, 뮤릭은 결혼을 통해 이 통합을 이루었고, 620년으로 추정되는 시기에 죽었고, 그의 아들인 아트루이스(Athrwys)가 왕이 된다. 그는 655년까지 통치했는데, 많은 역사가들은 아트루이스가 아서왕(King Arthur)의 원형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를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있다.

이후 아트루이스의 아들인 모르간이 궨트와 글위이싱의 왕으로 즉위해 730년까지 통치했다. 모르간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는 12세기에 랜다프 대성당에서 편찬된 문서 모음집인 랜다프 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모르간이 웨일스 남동부 전역에서 행한 기부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여러 왕과 소왕들이 나누어 다스렸던 지역에서 그의 권력 범위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존 에드워드 로이드는 모르간이 궨트와 글러워싱의 왕위를 모두 가지면서 글러워싱의 다른 이름인 "모르가눅"의 어원이 되었다는 설을 제기했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모르간 무인바우르의 후손인 모르간 헨의 이름이 붙은 것일 가능성도 있다. 조모 온브라우스 페르흐 구르간트 마우르(Onbraus ferch Gwrgant Mawr)를 통하여 에르겅의 왕위계승권 역시 가졌을 수도 있다.

『란드라브의 서』(12세기)에는 모르간이 란드라브 주교 오우도케우스와 베르스구인(Berthguin)에게 내렸다는 칙령들이 여러 개 남아 있다. 이 책의 또 다른 칙령에는 모르간이 삼촌 브리옥(Ffriog)을 죽여서 오우도케이우스가 모르간에 대한 교회절차를 밟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란드라브의 서』는 12세기에 쓰여졌기 때문에, 사료로서의 가치가 의심되기도 하지만 현재로서는 모르간 무인바우르라는 인물을 알기 위해 가장 중요한 사료다.

그는 터위강과 구이강 사이의 땅 대부분, 즉 구어르와 모르가눅, 궨트에 주권을 행사한 것으로 보이며, 그 중 후자 둘은 후손들에 이르기까지 지배가 유지되었다. 이 땅은 모르간의 아들 이드왈이 계승했고, 이드왈은 715년부터 745년까지 궨트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색슨족의 압박이 궨트의 국경에 상당한 파괴를 초래했으나, 통합된 왕국은 이에 맞서 싸우는 데 성공했다. 이타엘은 카디프 서쪽 세인트 파간스 근처에 성 니콜라스에게 헌정된 교회를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죽은 후, 궨트의 통치권은 강력한 군주에 의해 관리되던 이전과 달리 그의 여섯 아들 사이에 분할되어 권력이 약화되었다. 그중 페른파엘 압 이타엘이 궨트를, 그의 형제 리스 압 이타엘이 글리위싱의 왕이 되었습니다. 페른파엘의 치세 동안 앵그로색슨족들에 의한 웨일스 국경의 지속적인 적대 행위는 멈춘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머시아 왕국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웨식스 왕국과의 증가하는 경쟁에 직면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캄브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페른파엘은 775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아트루이스가 뒤를 이었다.

아트루이스는 머시아 왕국의 왕 오파가 오파 방벽을 건설할 당시의 웨일스의 통치자들 중 한명이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방벽은 그의 왕국과 포위스의 브로크파엘 압 엘리세드의 왕국 경계를 표시했으며, 이는 상호 이익을 위한 목적으로 머시아 왕 오파의 행정관들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트루이스의 후계자는 그의 아들 이드왈이 830년대에 등장하게 된다. 이드왈은《왕자 연대기》(Chronicle of the Princes)에서 그웬트와 모르가누그(즉, 글리위싱)의 왕으로 불렸다.

이드왈은 그의 형제 뮤릭과 함께 귀네드의 왕 로드리 대왕을 도와 머시아 엘더만인 베오르울프와 그의 형제 애설울프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웨일스 연대기》에 따르면, 이텔은 그의 형제보다 먼저 사망했으며, 《왕자 연대기》에서는 뮤릭보다 나중에 죽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두 자료 모두 이드왈의 죽음이 브리케이니오그 사람들의 배신에 의해 발생했다고 동의하고 있다. 이 사건은 매우 악명이 높아 중세 웨일스에서 브리케이니오그 사람들의 배신이 속담처럼 전해졌다.

《왕자 연대기》는 이드왈의 죽음을 서기 843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필리모어의 《웨일스 연대기》 A본 재구성에서는 이를 848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웨일스 연대기 기준으로 이드왈의 뒤를 이어 뮤릭이 왕위를 계승했는데, 7세기에는 궨트가 남동부 웨일스를 아우르는 단일 왕국이었으나, 9세기에는 글리위싱(현재의 글래모건)과 더 작은 궨트(현재의 몬머스셔)로 나뉘었다. 역사학자들은 뮤릭이 글리위싱의 왕으로서 남동부 웨일스를 지배했는지, 아니면 단지 궨트의 왕에 불과했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있다. 그의 아들인 브로흐파엘과 펄르파엘은 궨트의 왕이었으며, 그들은 글리위싱의 왕인 사촌 하웰 압 리스에게 종속되었다.

뮤릭에 대한 주요 자료는 12세기 《란다프의 책》에 기록된 헌장들이다. 이 책의 대부분은 위조된 것이며, 20세기 후반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가치가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1970년대 데이비스의 헌장 연구 이후로, 이들은 재평가되었고, 일부는 위조로 판단되지만 다른 일부는 전체 또는 부분적으로 진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헌장은 날짜가 기재되어 있지 않으며, 여러 뮤릭이 언급되므로 어느 뮤릭을 가리키는지 항상 명확하지 않는다. 뮤릭 압 아르드파엘과 그의 아들인 브로흐파엘과 펄르파엘이 9세기에 통치했다는 확인은 두 개의 독립적인 출처에서 제공된다. 893년 앨프레드 대왕의 전기에서 어서가 "브로흐파엘과 펄르파엘(뮤릭의 아들들, 궨트의 왕)"이라고 언급하였고, 헌장 199bii는 뮤릭 왕이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증인으로 하여 기부한 내용이다.

데이비스는 뮤릭의 통치 기간을 약 848년부터 약 874년까지로 설정합니다. 그의 통치 이전에 남동부 웨일스의 왕들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그의 통치 기간은 란다프 헌장에서 약 50년의 공백을 두고 있습니다. 그의 왕으로서의 전임자는 아마도 이드왈 압 아트루이스로, 그는 848년에 전투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가문의 마지막 왕으로 보인다. 한 하렐리안 계보(하렐리안 도서관에 보존된 고대 웨일스 계보)에 따르면, 뮤릭은 리스의 아들 아르드파엘의 아들이었다.

데이비스는 뮤릭의 기부가 글리위싱과 그웬트 전역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보고하며, 그녀와 찰스-에드워즈는 그가 글리위싱의 왕으로서 두 지역을 통치했다고 주장했다. 찰스-에드워즈는 뮤릭과 그의 형 이드왈이 아마도 글리위싱을 차례로 통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했다. 심스-윌리엄스는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뮤릭을 글리위싱에 두는 유일한 헌장은 그의 이름이 나중에 삽입된 것이라 주장하며, 그가 궨트를 넘어서는 권한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드왈의 아들인 하웰 압 리스는 글리위싱의 왕이었고, 뮤릭의 아들들은 궨트의 왕으로서 하위 왕으로 존재했습니다.

850년경, 헌장 169b와 170은 뮤릭이 모든 교회가 세속적인 의무에서 해방될 것을 명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데이비스는 랜다프 헌장이 "법의 무법 상태와 권력을 가진 이들의 자의적인 권력 남용의 인상을 주고 있다"고 언급한다.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뮤릭은 몇 안 되는 예외 중 하나로, 모든 교회 재산을 세속적인 통제에서 해방하려고 시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전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으며, 왕들은 10세기와 11세기에도 계속해서 교회의 소유권을 이전하는 기부를 했다.

중세 웨일즈의 왕들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뮤릭이 랜다프 서적의 헌장에 기록된 주교에게 한 기부에는 868년에 세렌니르 주교에게 트릴렉(Tryleg) 교회를 양도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뮤릭이 승인한 여러 차터는 세속인으로부터 성직자에게 기부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850년경으로 날짜가 매겨진 두 차터는 뮤릭의 보증으로 그레시엘리스 주교에게 기부된 내용을 담고 있다. 헌장 169b에서는 파우(Fauu)가 킬펙(Kilpeck) 교회와 그 땅을 기부했으며, 헌장 170에서는 쿠인콤(Cuinncum)이 컴 모우리크(Cum Mouric, 아마도 리틀 듀처치) 교회를 주교에게 돌려주었다. 헌장 74는 약 860년경에 날짜가 매겨져 있으며, 뮤릭은 브리트콘(Britcon)과 일리우그(Iliwg)가 디프리그(Dyfrig) 대주교의 교회에 라안 모카(Lann Mocha, 세인트 마우간스)를 기부하는 것에 동의했지만, 헌장의 다른 버전(171b)에서는 뮤릭이 그레시엘리스 주교에게 라안 보차(Lann Bocha)를 기부하는 것을 보장하고 있어, 어느 버전이 진짜인지 명확하지 않다.

캄브리아 연대기(Annales Cambriae)에는 뮤릭라는 이름의 왕들의 사망이 849년과 874년에 기록되어 있으며, 웨일즈의 역사학자들은 어느 쪽이 뮤릭 압 아르트파엘인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찰스-에드워즈는 그가 849년에 사망한 뮤릭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트럼(Bartrum)은 그의 사망이 874년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데이비스는 "증인 서열의 상대 연대 주장이 뮤릭 압 아르트파엘, 즉 헌장 169b-171b, 199bii(214?), 216b, 225의 뮤릭이 849년이 아니라 874년에 사망했음을 시사한다"고 주장한다. 심스-윌리엄스는 두 날짜를 대안으로 언급했다.

한편 뮤릭의 치세 말기에 바이킹들에 의한 이교도 대군세로 인해 앵글로색슨족들이 큰 타격을 입었고, 웨식스만이 간신히 감당했으며, 직접적인 위협인 머시아는 영토의 절반이 잃게 되었다. 뮤릭이 죽고 브로크파엘이 궨트의 왕위에 오른다.

브로크파엘이 왕위에 오른 이후 881년 귀네드와의 콘위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머시아의 군주인 애설레드는 북부와 서부 웨일즈에 대한 머시아의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지만, 그는 남동부에서 자신의 통치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폭력적인 시도를 이어갔다. 웨식스의 왕이었던 앨프레드 대왕은 남동 웨일즈 왕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머시아와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고, 애설레드의 억압으로 인해 남동부 웨일즈 왕들은 자발적으로 알프레드에게 복종하고 그의 보호를 구하게 되었다. 결국 애설레드 자신도 독립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웨식스 왕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앨프레드 왕의 전기를 쓴 어서(Asser)는 브로크파엘(Brochfael)을 앨프레드 왕에게 복종한 웨일즈 왕들 중 하나로 언급했다.
880년대 후반, 그리고 그 이전 상당한 기간 동안, 웨일즈의 남쪽 지역 전체는 앨프레드 왕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현재도 그렇다. 즉, 디펫(Dyfed) 왕국의 모든 주민들과 함께 하이페이드(Hyfaidd)는 로드리 마우르(Rhodri Mawr)의 여섯 아들의 힘에 밀려 앨프레드 왕의 왕권에 복종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글리위싱(Glywysing)의 왕 하이웰 압 리스(Hywel ap Rhys)와, 뮤릭(Meurig)의 아들들이자 궨트(Gwent) 왕들인 브로크파엘(Brochfael)과 페른파엘(Ffernfael) 역시, 앨더먼 애설레드와 머시아인들의 압박과 폭정에 의해 앨프레드 왕에게 자발적으로 복종을 요청하여 적들로부터 보호와 지배를 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브로크파엘의 통치 기간의 헌장에 대해서는《란다프 서》의 기부증서에 따르면, 브로크파엘은 젊은 시절 아버지 뮤릭의 기부에 증인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왕으로서 직접 기부를 시작했다. 약 868년경, 뮤릭 왕은 트릴렉(Tryleg)의 교회를 포기하고 이를 주교 케렌니르(Cerennyr)에게 반환했으며, 이 과정에는 브로크파엘과 페른파엘이 함께 있었다. 브로크파엘은 다른 웨일즈 왕들처럼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는 세번 강 하구 연안에서 어업권과 토지를 케이페일리오그 주교(Bishop Cyfeilliog)에게 여러 차례 기부했다. 890년대에서 920년대 사이 케이페일리오그에게 제공된 기부는 모두 궨트에 위치한 토지였으며, 브로크파엘이 주요 기부자였다.

기부증서는 브로흐파엘과 케이페일리오그 사이의 갈등도 기록하고 있다. 한 갈등은 브로크파엘이 "성스러운 동정녀"로 묘사된 딸의 종교 생활을 지원하기 위해 3 모디아이(약 120에이커 또는 50헥타르)의 토지를 교회에 기부했을 때 발생했다. 그의 딸이 약 910년경에 사망하자, 브로크파엘은 이 기부를 되찾으려 했으나, 케이페일리오그는 해당 재산을 주장했고 결국 판결은 그의 손을 들어 주었으며, 브로흐파엘도 이를 인정했다. 역사가 레스터 리틀은 이 사건에서 브로흐파엘이 "상대적으로 유순한 태도"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이전에는 약 905년경, 브로흐파엘의 가문(familia)과 케이페일리오그의 가문 간에 다툼이 있었다. 브로크파엘은 케이페일리오그를 모욕했고, 이에 케이페일리오그는 그와 그의 가족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브로크파엘은 다시 사과하고 물러섰으며, 케이페일리오그는 자신의 얼굴 크기를 기준으로 한 "모욕 보상금"을 순금으로 지급받았다. 브로크파엘은 금으로 지불할 수 없었기에 대신 약 6모디아이(약 240에이커 또는 100헥타르)의 란피한겔(Llanfihangel) 토지로 보상했다.

브로크파엘은 10세기 초 사망했으나 정확한 사망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가 데이비스(Davies)는 그의 통치가 약 910년경에 끝났다고 보고 있으며, 찰스 에드워즈(Charles-Edwards)는 918년경에 글리위싱과 궨트가 하이웰(Hywel)의 아들 오와인 압 하이웰(Owain ap Hywel)에 의해 아마도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D 사본에는, 105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부분에서, 927년에 궨트 왕 오와인이 영국의 왕인 애설스탠에게 복종한 여러 브리튼 통치자 중 하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데이비스는 뮤릭(Meurig)의 후손으로 이어진 왕가가 브로크파엘와 그의 형제이자 공동왕인 페른파엘의 죽음으로 끝났다고 설명하였고, 상술한대로 오와인이 궨트의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데 그는 자신의 형제인 아트파엘에게 궨트의 왕위를 넘겨주는데, 아트파엘은 896년과 915년에 일어난 데인족의 약탈 원정 때 궨트를 이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공격들로 인해 웨일스의 군주들은 공통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웨식스 왕국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아트파엘의 사후 그의 아들인 카델이 궨트의 왕이 되었다.

궨트의 왕위에 오른 카델은 942년까지 통치했다. 그의 통치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약 940~942년경 랜다프 주교 울프리스의 기부 행사에서 증인으로 두 번 언급된 것이 전부다. 카델은 942년에 독살되어 사망했으며, 후손을 남기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카델의 뒤를 이은 것은 글리위싱의 캐드간 압 오와인의 손자인 노위 압 그위리드가 통치하였는데, 실제로는 무력으로 영토를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948년경 알코에드 압 디세이스라는 인물을 살해했고, 955년에는 자신의 친족 중 한 명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교회를 모독하고 집사를 살해했다. 허나 그의 통치는 시릴적 통치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며, 궨트 왕국은 카델의 사촌인 글리위싱의 왕인 모르간 압 오와인의 이름으로 통치된 것으로 보이며, 궨트는 모르가누그 왕국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모르간 헨이 궨트와 글러위신그를 통일한 것은 그가 유일한 왕이 된 이후가 아니다. 모르간 헨이 궨트와 글러위신그를 통틀어 자신의 이름을 따 ‘모르간의 영토’라는 뜻의 모르가누그 또는 글라모르간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042년의 일이다. 카두간이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모르간 헨이 두 왕국을 공식적으로 통일했다는 사실은 모르간 헨의 권력이 카두간의 힘을 훨씬 능가했음을 시사한다.

모르간 헨은 장수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모르간 헨의 본명은 모르간 아브 오와인인데, 후대 사람들이 그를 노왕(老王) 모르간이란 뜻을 지닌 ‘모르간 헨’이라 부르는 이유도 그가 이례적으로 여든 살에 가까울 만큼 장수했기 때문이다. 마흔이 넘는 나이에 통일된 모르가누그 왕국을 건설한 모르간 헨은 이후로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홀로 모르가누그를 통치하였다.

모르간 헨이 태어난 이듬해인 899년에는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으로 추앙받는 앨프레드 대왕이 사망을 했다. 알프레드 대왕은 웨일스 국가와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가 잉글랜드의 통일을 이룩한 이후 많은 웨일스 왕국들은 그와의 군신관계를 자처하며 잉글랜드로부터 보호와 원조를 구하곤 했다. 이러한 기조는 알프레드 대왕의 후계자인 대 애드워드에설스탠의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에설스탠은 웨일스와 가까운 동맹 관계를 유지한 왕이다. 에설스탠은 웨일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평가받는 데헤이바쓰의 허웰 다와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모르간 헨의 아버지 오와인 또한 에설스탠과 긴밀한 공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다. 에설스탠은 왕위에 오른 3년째가 되던 927년, 앨프레드나 애드워드와 같은 선왕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허웰을 비롯한 웨일스 왕들과의 군신관계를 확실히 하고자 했다.

12세기 역사가인 맘즈버리의 윌리엄에 따르면, 펜리스 근교의 이몬트 다리에서 에설스탠은 오와인과 허웰 다를 비롯한 웨일스 군주들과 회동을 갖고 평화적인 협력을 대가로 조공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다른 기록에서는 웨일스가 조공을 바쳤다는 언급이 없어 윌리엄의 역사 기술을 그대로 신뢰하긴 어렵지만, 오와인을 비롯한 웨일스 군주들보다 에설스탠이 우위에 있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930년 오와인 사후, 아들 모르간 헨은 잉글랜드에 대한 아버지의 외교 방침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모르간 헨은 허웰 다와 함께 잉글랜드 궁정에 자주 드나들며 에델스탄과의 친교를 유지하고자 노력하였다.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통해 평화를 도모한 모르간 헨의 태도는 에설스탠이 사망한 이후나 허웰 다가 사망한 950년 이후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었다. 모르간 헨은 에델스탄의 뒤를 잇는 에드먼드 왕과 에드레드 왕의 궁정에도 자주 방문해 예의를 표하며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고자 했다.

모르간 헨과 잉글랜드의 관계에 균열이 일어난 것은 에드거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면서부터이다. 에드거 왕은 자신을 잉글랜드의 최고 통치자로 보았고, 따라서 웨일스 왕들을 자신의 신하처럼 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역대로 잉글랜드 왕들이 웨일스의 왕들을 한 국가의 왕으로서 존중해 준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973년 에드거는 체스터에서 웨일스와 스코틀랜드의 군주들과 회동을 가졌으나 모르간 헨은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 모르간 헨이 여든 살에 가까운 고령이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에드거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탓이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모르간 헨은 아버지의 외교 방침을 계승하여 앨프레드 대왕 이후 날로 세력을 더한 잉글랜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록 잉글랜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략이나 약탈로 인한 피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다.

모르간 헨은 웨일스 풍습에 따라 통일된 모르가누그를 장남 오와인에게 고스란히 계승하는 대신 여러 아들들에게 나누어 물려주었다. 따라서 모르간 헨의 사망과 함께 통일된 모르가누그는 다시 조각조각 분리되었다. 장남 오와인 압 모르간은 글리위싱을 통치하였고, 카델, 컨빈, 이드와슬론은 다른 모르가누그의 나머지 영토를 함께 다스렸으며, 궨트는 노위의 아들인 아르스파엘이 통치하게 되었다. 이로써 모르가누그는 모르간 헨이 사망한 후 모르간 헨의 아들들과 조카아들에게 고루 돌아갔다. 왕국과 왕권을 한 명에게 집중시키지 않고, 여러 왕족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풍습은 모르가누그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큰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노위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아르스바일은 궨트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노위의 사망 시기와 아르스바일의 즉위 시기는 960~970년대로 추정된다. 궨트와 글러위신그를 통합한 모르간 헨이 974년 사망하면서 970년대는 웨일스 남동부의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있었다. 모르간 헨의 사망과 동시에 모르가누그란 이름 하에 잠시 봉합되었던 궨트와 글러위신그는 분열되었고, 글러위신그를 비롯한 모르가누그의 주요 지역은 모르간 헨의 아들 오와인 압 모르간의 손에, 궨트의 주요 지역은 아르스바일의 손에 들어갔다.

절대적인 힘을 자랑했던 군주가 사라진 만큼 궨트에는 혼란이 찾아왔다. 이 시기에 아르스바일은 자신의 형제 엘리세드 압 노위를 살해하였다. 아버지 노위의 친족 살해에 이어 또 한 번의 친족 내 살인이 일어난 것이다. 아르스바일의 엘리세드 살해 요인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왕권을 사이에 둔 권력 다툼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욱이 웨일스는 전통적으로 장자에게 왕국과 권력을 독점적으로 승계하지 않는다. 따라서 선왕의 사후 형제들 간의 갈등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엘리세드를 제거한 아르스바일은 궨트의 유일한 군주로서 지위를 누렸으나 이후에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아르스바일은 약 10여 년간 궨트를 통치하였는데, 주된 통치 기간은 970년대로 알려져 있다. 아르스바일은 그가 살해한 엘리세드의 두 아들 로드리와 그리피드가 아버지의 복수를 하면서 약 983년에 생을 마감한다. 아르스바일의 왕좌를 차지한 엘리세드의 두 아들은 서로를 죽여 왕권을 독점하는 대신 함께 궨트를 통치하였다. 이로써 두 세대에 걸쳐 벌어진 피의 복수극은 아르스바일의 사망과 함께 막을 내리게 되었다.
2.2.3. 귀네드
귀네드는 웨일스의 브리튼인 국가 중 가장 강성한 편에 속했으며, 종종 귀네드 왕이 브리튼인들의 왕을 자처하기도 했다. 귀네드는 브리튼인의 국가이나 왕가의 시조는 웨일스 토착 브리튼인이 아닌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의 옛 북부(Yr Hen Ogledd)에 속한 고도딘 왕국 출신의 쿠네다 압 에데른이다.

쿠네다는 460년까지 귀네드를 통치하다가 죽었고, 아들인 에이니온이 왕위를 잇는다. 전승에 따르면, 에이니온에게는 일곱 명의 형제가 있었으며, 형제 중 하나인 케레딕은 케레디기온의 이름을 남겼고, 그의 조카 메이리온은 형제 티비온의 아들로 메이리오니드의 이름을 남겼다.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전승이 지명을 설명하려는 시도라고 보고 있다.) 다른 형제로는 르후폰(르후포니오그의 창시자), 두노드(두노딩), 아플로그(린의 아플로기온), 독마엘(독페일링), 에데른(에데이르니온)이 있었다.

에이니온은 포이스의 카에레이니온 지역을 세웠으며, 이 지역의 주요 종교 중심지는 란페어 카에레이니온이었다. 인근에는 에이니온 이어스와 관련된 전승이 내려오는 고대 요새 카에레이니온이 있다.

에이니온은 귀네드의 왕 카드왈론 라위르의 아버지이며, (어쩌면) 그의 손자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이교도" 군주라고 질다스가 언급한 왕인 퀸라스가 있다. 전통적인 족보에 따르면, 영웅 구곤 글레디브루드가 그의 아들이라고 하나,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에이니온은 500년경에 죽었으며, 귀네드의 왕위는 카드왈론이 잇는다. 전통에 따르면, 카드왈론은 아서 왕이 색슨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바돈 산 전투 이후(이 전투는 490년에서 510년 사이로 추정됨) 귀네드를 통치하였다.

그의 통치 중 주요 업적은 앵글시 섬(Ynys Môn)에 정착해 있던 아일랜드계 이주민들을 정복한 것이다. 이후 앵글시 섬은 그윈에드 왕국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카드왈론은 '라위르'(Lawhir)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유난히 긴 팔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전승에 따르면, 시인 이올로 고흐는 카드왈론이 등을 굽히지 않고도 팔이 땅에 닿을 만큼 길어서, 까마귀를 죽이기 위해 땅에서 돌을 들 수 있었다고 전한다.

그는 아들 마엘군 귀네드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역사가 질다스가 마엘군을 그의 삼촌을 죽이고 왕국을 차지했다고 비난하는 기록은, 이 삼촌이 카드왈론과 마엘군 사이에 잠시 왕위를 차지했음을 암시하지만, 그 인물이 누구였는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질다스는 자신의 저서인 De Excidio Britanniae에서 그를 "마글로쿠누스"라 부르며 그와 다른 왕들의 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질다스는 마엘군을 “섬의 용”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앵글시 섬(Ynys Môn)을 가리킨 것으로 보인다. 질다스에 따르면 마엘군은 당시 웨일스의 다섯 왕 중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 마지막으로 너를 이야기하지만, 너는 사악함에서 첫 번째이고 최고이다; 많은 이들보다 더 강력하며, 동시에 악의가 넘치며, 베푸는 데 매우 너그럽지만, 죄에서도 더 헤프게 쓰는 자이니; 전쟁에서는 강하지만, 네 영혼을 파괴하는 데는 더 강하다..."

질다스는 마엘군이 젊은 시절 삼촌을 왕국에서 쫓아내고, 그 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수도사가 되기로 맹세했으나 이를 지키지 않고 다시 죄악의 길로 돌아섰다고 비판한다. 또한, 마엘군은 자신의 아내와 조카를 살해하고 조카의 과부와 결혼한 죄를 지었다고 한다.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엘군의 무자비한 성격은 도덕적으로 많은 지탄을 받았으나 이 성격은 군사적 능력과 결합해 왕권 강화와 왕국 성장에는 큰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왕권을 차지한 후, 마엘군은 웨일스 주변국들에게 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었고 그들을 제압한 후에는 귀네드 왕국의 패권을 과시했다. 이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마엘군은 주변국의 왕들에게 자신이 더 높은 왕임을 각인시키기 위해 독특한 시합을 제안했다고 한다.

마엘군은 다른 왕들을 트라에스 말구인이라는 해변에 집합시킨 후, 밀물 때 물가에 놓인 의자에 가장 오래 앉아 버티는 사람이 ‘브리튼인의 왕’ 지위를 차지할 것을 제안했다. 이 이상한 시합의 승자는 당연히 마엘군이었다. 의자가 물에 뜨도록 미리 수를 썼기 때문이다. 이 일화는 다른 행적들과 더불어 마엘군의 야심이 크고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 결과, 마엘군은 ‘브리튼인의 왕’ 지위에 올라 귀네드 왕국을 주변국보다 더 강한 국가로 만들었고, 귀네드 왕국은 왕국으로 불릴 만큼 크게 발전해 수많은 왕국들 중 웨일스를 대표하는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마엘군은 웨일스에 가톨릭을 전파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가톨릭에 한없이 너그러운 말군의 태도는 그가 매사에 무자비하고 냉혹했던 것만은 아님을 보여준다. 로마 군대는 410년을 기점으로 영국 땅에서 완전히 사라졌으나 로마 군대가 떠난 후 2세기 동안, 로마의 유산인 가톨릭은 웨일스 내에 급속히 퍼져나갔다. 열정적인 전도사들에 의해 보급되던 가톨릭은 말군이라는 강력한 통치자의 후원 아래 웨일스 최초의 종교로 발돋움했다. 마엘군은 그의 영토인 귀네드 왕국의 국경을 넘어 웨일스 전역에 가톨릭이 보급되고 교회가 설립되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실은 그의 영향력이 귀네드 왕국의 물리적 크기보다 더 거대했음을 말해준다.

가톨릭과 관련된 말군의 몇 가지 일화도 있다.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숙부까지 축출한 망군은 돌연 왕관을 내려놓고 평생 속세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수도승이 되겠다며 수도원에 들어간 적이 있다. 숙부를 축출한 죄책감에 속죄를 위해 수도원에 들어갔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이유는 밝혀진 바 없다. 하지만 세속적 야망이 컸던 말군에게 수도원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금세 자신의 다짐을 철회하고 왕좌를 재탈환했고, 주변국들을 하나씩 정복하기 시작했다.

마엘군의 주요 궁정은 데간위와 란로스 사이의 카에르 데간위였으며, 궁정에서는 그를 찬양하는 시인들이 모였다고 전해진다. 질다스는 그가 신을 찬양하기보다 자신에 대한 찬양을 듣기를 더 좋아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통치 말기에 마엘군은 웨일스에서 가장 강력한 왕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의 왕국은 아들인 룬이 물려받았다. 캠브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마엘군은 547년에 "노란 역병"으로 불리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설화로 역병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마엘군은 자신을 로스의 교회에 가두고 아무도 출입하지 못하도록 출입문에 경비병을 세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마엘군은 얼마 후 교회 안에서 그가 그토록 피하려고 했던 역병에 걸려 사망한 채 경비병들에게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만 질다스의 비난과는 별개로 6세기경 마엘군 이전까지 귀네드는 부족 사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엘군 즉위 이후 귀네드는 부족국가의 모습을 재빨리 벗고 국가의 틀을 갖춘 덕분에 일찍이 강대국으로 발돋움했다. 귀네드는 6세기 초 이미 왕국으로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엘군 귀네드는 용맹하고 냉혹한 성격으로 주변 왕국들을 굴복시켜 웨일스의 패권을 움켜쥐었다. 귀네드는 해외 교류도 활발했다.

마엘군의 사망후 그의 아들인 룬이 왕위를 이었다. 이오르베르트 압 마도그가 13세기 초에 편찬한 웨일스 법전인 베네도트 법전에는 아르폰 남성의 특권 목록이 포함되어 있다. 특권 중 하나는 귀네드 군대의 선두에서 싸울 권리로, 이는 그들이 론 귀네드와 북부 웨일스 남성(고도딘 또는 마나우 고도딘)과의 전쟁에서 용맹을 발휘한 결과라고 적었다. 탈리에신의 론의 만가 또한 이 전쟁과 론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탈리에신의 작품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에서 존 모리스-존스는 이 만가가 6세기 작품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하며, 이에 대해 토마스 스티븐스 등도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다.

베네도트 법전에 따르면, 북부 왕자인 엘리디르 문파우르 압 고르스트 프리오다우르가 아르폰의 아베르 메위두스(현재 카드난트 또는 "전투의 시내")에서 살해되었고, 그에게 연관된 북부 친족이 보복으로 귀네드를 침공하여 아르폰을 불태웠습니다. 북부 군대를 이끈 인물로는 클리드노 아이딘, 후한 너드 압 세닐트, 관대한 모르다프 압 세르판, 그리고 튜드왈 튜델리드의 아들 리더더흐 헤일 등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베네도트의 왕가 계보 및 고도딘의 왕가에도 언급되는 인물들로, 엘리디르 문파우르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삼종마에 관한 전설 중 하나에 따르면, 엘리디르는 른의 여동생 에우르가인과 결혼한 상태였다고 한다.

후에 론은 군대를 모아 북부 고리드 강(포스 강 또는 포스만 강) 근처까지 진군했고, 베네도트 법전에는 이 전쟁의 최종 결과가 기록되지 않았지만, 론과 그의 군대가 북부에 상당 기간 머물렀다고 나와 있다. 탈리에신의 만가에 따르면 이 전쟁에서 론이 전사했다고 한다. 이후 른의 아들 벨리 압 른이 귀네드의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엘리디르가 귀네드에 있던 이유와 그의 죽음에 대한 상황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북부 친족들은 그의 죽음의 책임을 귀네드로 돌렸습니다. 나중의 이야기들에서는 엘리디르가 마엘군 귀네드의 왕위 계승을 두고 론과 경쟁하고 있었다는 등의 추측을 덧붙이기도 하나, 이는 단순한 추정에 불과하다.

한편 론과 관련된 카이르훈은 "른의 요새"라는 뜻으로, 로마 시대 2세기에 건설된 소규모 요새인 카노비움을 가리키고 있다. 이곳은 로마의 주요 요새인 데바(현대의 체스터)와 세곤티움(현대의 카나번) 사이의 로마 도로를 따라 위치해 있다. 이는 론의 근거지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있으며, 고고학 연구와 카이르훈이라는 이름의 고유성을 통해 이 추측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있다.

론의 뒤를 이어 귀네드의 왕이 된 벨리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의 이름은 웨일스 계보 기록에서만 확인된다. 벨리는 최소 두 아들을 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버지 론 압 마엘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599년 사망하고, 그의 아들 이아고가 그를 계승했다. 벨리는 성 에데이른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로 추정되고 있다.

할레인 왕가 계보, 예수대학 원고 20, 그리고 헨그워트 원고 202 등의 왕실 계보에 따르면, 그는 왕들의 조상이자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어, 그 역시 왕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성인의 후손 (Bonedd y Saint)에는 벨리가 성 에데이른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벨리의 아들이 누드 혹은 룻드라고 나와 있다. 헨그워트 원고 202는 에데이른을 벨리의 아들로 명시하고 있다.

중세 웨일스 3부작 중 하나에서는 벨리의 또 다른 아들로 보이는 "른 압 벨리"라는 인물을 언급하며, 그가 군사적 업적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이 이름은 중세 시인 하웰 포엘(1240년경 – 1300년경)의 오드에서도 반복된다. 그는 오와인 압 그루푸드의 포로 생활을 애도하며, 오와인을 "자유로웠다면, 벨리의 아들 른처럼 그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라고 비교했다. 하지만 이런 인물에 대한 확인된 증거는 없고, 왕실 계보와도 상충된다. 토머스 스티븐스 같은 학자들은 이를 오류로 결론짓고, 실제 대상은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벨리의 사망후 귀네드의 왕이된 이아고는 통치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이아고와 그의 왕국에 대한 정보는 소수의 일화적 언급에 한정되며, 대개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에 기록만이 남아 있다. 그의 사망은 616년 체스터 전투(Gwaith Caer Lleon)와 같은 해에 일어났으나, 이아고의 죽음과 전투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또한 귀네드가 전투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이아고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카드판 압 이아고가 왕위에 올랐다.

1766년에 출판된 헨리 롤랜즈의 모나 안티쿠아 레스타우라타에는 방고르 대성당의 기록 보관소가 이아고를 방고르의 학장을 세운 인물로 언급했다. 그러나 이 기록의 정확성은 해든과 윌리엄 스텁스의 저서 영국 및 아일랜드에 관한 교회회의 및 교회 문서에서 의문을 제기하며, 방고르에서 학장이 존재했던 가장 초기의 증거는 1162년에 나온다고 언급했다.

중세 웨일스 3부작에 따르면, 이아고 압 벨리 왕은 자신의 부하인 카다바일 윌트(Cadafael Wyllt, "야생의 카다바일")의 도끼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리스의 존이 쓴 켈틱 브리튼에서는 타이게르나흐 연대기에서 이아고의 죽음을 "잠들다"라는 의미의 dormitato라는 표현으로 기록하여, 폭력적인 죽음과 모순된다. 일반적으로 dormitato는 성직자를 지칭할 때 사용되므로, 이아고가 왕위에서 물러난 후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았을 가능성도 있다.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브리튼 열왕사에서는 이아고의 아들 카드판과 당시 인물들을 등장시켜, 유년기에 유배당한 에드윈이 이아고의 손자이자 미래의 왕인 카드월론과 함께 귀네드에서 자랐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제프리의 소설적인 요소로 널리 인정된다. 이후 "전통적인" 이야기로 발전된 이 내용은, 미래의 노섬브리아 왕 에드윈이 카드월론과 평화롭게 자랐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내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 기록에 따르면, 588년에 데이라의 왕 엘라가 죽자 버니시아의 애설프리드는 이 틈을 타 데이라를 정복하며 엘라의 세 살짜리 아들 에드윈을 유배시켰다. 에드윈은 후에 이스트앵글리아의 레드왈드와 동맹을 맺고 616년에 애설프리드를 죽여 노섬브리아의 성공적인 왕이 되었다. 에드윈의 유배 생활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그가 귀네드에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

귀네드의 다음 왕이 된 카드판 또한 귀네드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어, 카드판과 그의 치세에 대한 정보도 매우 제한적이다. 카드판에 대한 기록은 왕가의 계보, 클린녹 파우르 수도원을 위한 성 베우노에게 부여한 기부, 그리고 랑카드왈라드르의 성 카드왈라드르 교회에 있는 그의 비문이 새겨진 묘비를 통해 알려져 있다.

카드판은 이전 왕이자 그의 아버지였던 이아고 압 벨리의 아들이며, 할레인 왕가 계보와 예수대학 원고 20에 그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는 616년경 체스터 전투(Gwaith Caerlleon) 즈음에 왕위에 올랐다. 이 전투에서는 버니시아의 애설프리드가 이끄는 노섬브리아 군이 웨일스의 이웃 왕국인 포위스를 크게 격파하고 방고르 이스 코에드의 수도사들을 학살했다. 하지만 귀네드가 이 전투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없으므로, 카드판의 즉위와 전투 사이에는 단순한 시간적 우연으로 보인다.

그의 외치는 묘비에 새겨진 글자를 확인할 수 있는데,그의 통치 동안 귀네드가 프랑크 왕국과 지중해 연안 국가들의 영향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묘비는 카드반을 가장 현명하고 명성 있는 왕으로 묘사하는데, 이것은 당시 귀네드의 높은 위상을 보여준다. 말군의 거점이던 데가누이의 항구에서는 아테네, 보르도, 흑해 지역에서 수입한 유리 세공품과 도자기가 발견되었다. 활발한 대외 교역도 귀네드의 빠른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625년 카드판이 죽고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카드월론 압 카드판이 왕위에 올랐다.

카드왈론의 삶과 통치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에 대한 주된 정보는 앵글로색슨 작가 베다의 저서 영국 교회사에 있으며, 베다는 카드월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카드판 압 이아고의 아들로 기록되며, 마일군 그윈에드와 쿠네다의 후손으로 여겨지지만, 역사학자 알렉스 울프는 베다가 언급한 카드월론이 그윈에드의 왕과 다를 수 있으며, 그가 옛 북부의 왕가 계통을 따라 카트과일라운 리우의 후손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카드월론의 생애는 노섬브리아의 에드윈 왕의 야망에 큰 영향을 받았다. 베다의 기록에 따르면 에드윈은 서부 요크셔의 브리튼 왕국 엘멧을 정복하고 그 왕 케르딕을 추방하면서 아일랜드해로 영향력을 넓혔고, 앵글시까지 그의 통치가 확장되었다. 캄브리아 연대기는 카드월론이 629년경 앵글시 근처 글란나우크(퍼핀 섬)에서 포위당했다고 기록했다. 웨일스 시와 웨일스 삼부는 카드월론을 에드윈에 대항한 영웅으로 묘사하며, 그가 아일랜드에서 힘을 기른 후 에드윈을 패배시켰음을 언급했다.

전설적인 역사서인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브리튼 왕의 역사는 카드월론이 아일랜드와 건지 섬으로 떠난 후, 둠노니아에서 머시아의 펜다와 동맹을 맺었다고 전하고 있다. 제프리는 카드월론이 펜다의 이복 여동생과 결혼했다고도 서술했다. 이후 카드월론과 펜다는 연합하여 노섬브리아와 전쟁을 벌였으며, 633년 10월 12일 헤트필드 전투에서 에드윈과 그의 아들 오스프리스를 패배시키고 죽였다. 이 승리 후 노섬브리아는 데이라와 버니시아로 나뉘어 혼란에 빠졌다.

베다는 카드월론을 "기독교를 자처했지만 잔혹하고 야만적인 폭군"으로 묘사하며, 그가 여성과 어린이마저 잔인하게 죽였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동맹자 펜다가 앵글로색슨인인 점과 이후 웨식스케드왈라 왕이 그의 이름을 따왔다는 사실은, 베다의 부정적 묘사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카드월론은 노섬브리아의 새로운 왕 오스왈드와 맞서다가 634년경 헤븐필드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사했다. 그의 뒤를 이어 카다파엘이 귀네드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다.

카다파엘은 펜다와 다른 웨일스 왕들과의 동맹을 갱신하고, 노섬브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은 북부와 잉글랜드 중부에서 계속되었다. 635년에서 641년 사이 어느 시점에 펜다는 동앵글리아 왕국을 패배시키고 왕 에그릭을 죽였다. 이후 그는 654년에 에그릭의 후계자인 안나를 죽여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자가 되었다. 가장 중요한 전투는 642/644년에 오스웨스트리 근처로 추정되는 마서필드 전투(웨일스어로 마에스 코그위)에서 일어났으며, 펜다와 그의 웨일스 동맹군이 오스왈드를 패배시키고 죽였다.

북쪽에서는 전쟁이 그리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노섬브리아는 638년 또는 그 직후에 로디언(즉, 고도딘)의 동부 해안 지역 전체를 확보했고, 640년대에는 알트클루드(어스트라드클리드의 전신) 사람들과의 전투가 있었다. 이 전투의 결과는 역사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현재의 남부 스코틀랜드 대부분이 노섬브리아의 통제하에 들어간 것으로 보아 노섬브리아의 성공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펜다와 그의 동맹은 여전히 주요 위협으로 남아 있었고, 650년 또는 651년에 오스왈드의 버니시아 후계자인 오스위그를 그의 요새 밤버러에서 포위했으나 그를 패배시키지는 못했다.

결정적 순간은 655년에 찾아왔다. 이때 펜다는 버니시아를 상대로 머시아인, 웨일스인, 데이라인, 동앵글리아인 연합군을 다시 이끌고, 북쪽의 어떤 요새에서 오스위우를 포위하며 평화를 강요했다. 큰 대가를 치른 전쟁에서 승리한 후, 동맹군은 남쪽으로 돌아갔고, 특히 웨일스는 고도딘이나 마나우 고도딘에서 노섬브리아인에게 빼앗긴 품위의 상징(일명 “유데우의 회복”)을 되찾은 것에 만족했다.

그러나 오스위그는 패배했을지언정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동맹군의 지도자들 중 다수가 전투에서 죽은 상황에서 오스위그는 윈와드 전투(웨일스어로 마에스 가이, 위치는 불확실함)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이 전투에서 펜다가 사망하며 동맹이 붕괴되고 버니시아의 우위가 확립되었다.

오스위그는 펜다를 무찌른 직후 머시아를 점령하고 펭웬의 리스(왕실)로 기습을 감행하여 킹들란 왕을 죽이고 왕가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후 펭웬은 역사 기록에서 사라지게 되었으며, 일부 생존자들은 서쪽 마스라팔로 이동했고 남아 있는 사람들은 머시아의 종속 왕국 일부로 흡수되었다. 카드파엘의 경우 어떻게 죽었는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반적으로 펜다가 패배한 직후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 사건에 대한 동시대 기록은 없으나 약 180년 후에 기록한 넨니우스는 카다파엘이 전투 전날 밤에 집으로 돌아갔다고 언급하며, 그의 동맹이 가장 절실히 필요할 때 의도적으로 전장을 떠났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하지만 그가 이런 성격이었다면 왕으로 선출되거나 오래 통치했을 가능성이 낮고, 펜다 또한 그와 20년간 동맹 관계를 유지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 웨일스 삼종 설화에서 벨리의 아들인 이아고 왕의 죽음은 그의 부하 중 한 명인 카다파엘 윌트(영어: "카다파엘 야생인")의 도끼에 의해 발생했다고 묘사된다. 그러나 학자 존 리스는 《켈트 브리튼》에서 티게르나흐 연대기에는 이아고의 죽음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dormitat (또는 dormitato,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잠들다"라는 뜻의 단어)이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폭력적인 죽음과는 상반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헤르게스트의 붉은 서에 있는 《머딘과 그의 자매 그웬디드의 대화》(웨일스어: Cyfoesi Myrddin a Gwenddydd ei Chwaer)에서 미래의 왕들이 예언으로 나열되는데, 이 명단은 카드왈론 압 카드판까지 정확히 기록되었으나, 이후 카다파엘이 빠져 있고 카드왈론의 아들 카드왈라드르 압 카드왈론이 다음 왕위 계승자로 나와 있다.

카다파엘에 대한 비판과 그의 이름에 대한 반감이 실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874년 한 미국인이 웨일스 이름에 대한 논문에서 “카다파엘은 여전히 경멸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라고 언급하며, 그 이유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카다파엘이 655년에 죽고 카드왈라드르가 귀네드의 다음 왕이 되었다. 예수 칼리지 필사본 20에서 “카드왈라드르 벤디게이트”(“축복받은 카드왈라드르”)로 나타지만 제대로 된 기록이 전무하며 대개 웨일스 내의 전설과 몬머스의 제프리가 쓴 브리튼 왕의 역사에서만 다뤄지고 있지만 대개 검증되는 내용이기에 많은 역사가들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카드왈라드르는 658년에 엑서터 근처 핀호에서 웨식에게 큰 군사적 패배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평화롭고 경건한" 성격을 가졌다고 전해지며, 많은 교회를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앵글시의 랑카드왈라드르에 있는 세인트 카드왈라드르 교회는 그를 창립자로 간주하고 있다.

카드왈라드르의 사망 날짜는 확실하지 않으나, 664년이나 682년으로 추정된다. 그의 이름은 《브리튼 역사서》(Historia Brittonum)의 한 부분에 “카트왈라트”로 언급되며, 왕으로 있을 때 끔찍한 역병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664년의 대역병은 캄브리아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베다의 기록에 따르면 이 역병은 브리튼과 아일랜드에 큰 영향을 미쳤고, 아일랜드 연대기에서도 발생이 언급된다. 682년의 역병은 베다가 기록하지 않았으나, 캄브리아 연대기에 브리튼에서 발생했으며 카드왈라드르가 그 피해자 중 하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캄브리아 연대기와 아일랜드 연대기 모두 683년에 아일랜드에서 역병의 영향을 언급하며, 다른 기록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카드왈라드르의 뒤를 이어 이드왈 이르크가 귀네드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이 시기의 기록이 부족하여 이드왈의 이름은 후대 왕들의 족보와 14세기 웨일스어 필사본에 나오는 예언 속에서만 등장한다. 이드왈 이르크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예수 대학 사본 20호와 하를리안 족보 등 일부 족보에서만 발견되며, 여기서는 "로드리 몰위노그, 이드왈 이르크의 아들, 카드왈라드르 벤디게이드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다. 존 데이비스의 《웨일스의 역사》에서는 이드왈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존 에드워드 로이드의 《웨일스 역사》에서도 그를 로드리 몰위노그의 아버지로만 간략히 다룬다. 이드왈이 살았던 시기의 귀네드의 왕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왕의 아들이자 왕의 아버지였기 때문에 왕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이를 확증할 만한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

이드왈의 이름은 《멀딘과 그의 누이 그웬디스의 대화》(웨일스어: Cyfoesi Myrddin a Gwenddydd ei Chwaer)라는 중세 웨일스 예언시에도 등장합니다. 이 시는 두 개의 중세 웨일스 필사본, 페니아르트 3(1300년경)과 헤르게스트의 붉은 책(1380~1410년경)에 보존되어 있다. 이 시는 질문과 응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래의" 왕들의 계보가 예언되는데, 그 중 이드왈도 포함되어 있다. 이 계보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역사적 족보와 일치하지만, 실제 왕위 계승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이드왈이 왕이라고 가정하에 720년에 사망하고, 로드리가 귀네드의 새로운 왕으로 즉위한다. 그의 별명인 "대머리와 회색"은 아마도 그의 외모를 묘사한 것일 수 있다. 귀네드 왕국의 역사에서 이 시기는 기록이 부족하고 불확실한 부분이 많아, 많은 중요한 중세 웨일스 역사서들, 예를 들어 존 데이비스의 《웨일스 역사》에서는 로드리를 언급하지 않으며, 다른 역사서들에서는 그의 이름을 간략히 언급하기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일스 연대기》에서 그는 "브리튼의 왕"으로 기록된 바 있다.

로드리의 재위 기간 동안 귀네드 왕국의 상황에 대한 신뢰할 만한 정보는 부족하지만, 그의 이름은 여러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 대학 사본 20호에는 로드리가 "이드왈 이르크의 아들, 카드왈라드르 벤디게이드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하를리안 족보에는 그가 "투트구알의 아들, 카드왈라드르의 손자"로 나온다. 이 족보들이 귀네드 왕국의 왕들의 계보를 기록하는 데 사용된 방식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불확실하다.

로드리 몰위노그의 사망은 754년으로 추정되며, 《웨일스 연대기》와 함께 이를 기록한 자료들은 그가 왕위를 어떻게 물려받았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왕이 된 시기와 그의 이전 왕에 대한 정보는 명확하지 않으며, 그가 왕위에 오른 경위도 불분명하다.

722년경에는 코넬 왕국에서 전쟁이 있었으나, 관련된 인물의 이름은 명시되지 않았다. 《브루트 y 사에손 연대기》는 721년에 로드리 몰위노그와 색슨인들 사이에 "광범위한 전쟁"이 있었다고 기록하지만, 이 사건의 세부사항은 확실치 않는다. 또한 《브루트 아버퍼그움》에 기록된 내용은, 이후 이올로 모르간윅의 위조로 밝혀졌다.

754년 로드리 몰위노그는 그의 후계자 카라독 압 메이리온(Caradog ap Meirion)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며, 이는 귀네드 왕국의 계승에 중요한 전환점을 나타냈다. 이 시대의 귀네드 왕국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기록되지 않아, 카라독에 대한 정보는 매우 제한적입니다. 예를 들어, 존 데이비스의 《웨일스 역사》와 같은 신뢰할 수 있는 역사서에서는 카라독 언급하지 않거나, 존 에드워드 로이드의 역사서에서는 그의 이름을 주석에서만 간략히 다루고 있다.

카라독은 로드리 몰위노그가 사망한 후 왕위에 오른 것으로 추정되며, 《웨일스 연대기》에서 그의 사망이 798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왕위 계승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는 부족하며, 기록이 드문 이 시기에는 다른 왕들이 존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카라독의 이름은 예수 대학 사본 20호와 같은 족보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웨일스 연대기》에는 그의 사망이 언급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카라독은 앵글로색슨인들(아마도 머시안 왕국의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목이 베어졌다"는 표현으로 그의 죽음을 묘사하고 있다.

카라독의 재위 기간 동안, 768년에 엘포드 주교의 주도 아래 웨일스 교회는 부활절 계산법을 로마식(가톨릭식)으로 변경하였고, 이는 오랫동안 이어져 온 교회 내 논쟁을 해결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또한, 796년에 루드란 습지에서 전투가 있었으나, 전투의 참가자와 결과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다. 《브루트 아버퍼그움》에 의하면, 카라독은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고도 하지만, 이 기록은 후에 이올로 모르간윅의 위조로 밝혀졌다.

예수 대학 사본 20호의 족보에 따르면, 카라독의 아들인 후대의 왕 하웰(816년–825년)은 그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존 에드워드 로이드와 같은 일부 역사적 작업에서는 하웰이 카라독의 전임 왕의 아들이며, 카라독의 후계자인 커난의 형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주장에 대한 근거는 명확하지 않는다.

카라도그의 뒤를 이어 귀네드의 왕위에 오른 커난은 별명이 "딘다에스위의 커난"으로 단다에스위는 로시르의 칸트레프에 속한 딘다에스위 지역을 가르키고 있다. 후에 귀네드의 왕들이 주로 앵글시의 서부에 위치한 아버프라우에서 거주한 것과 달리, 커난은 란마이스(Llanfaes)라는 앵글시 동남부 해안의 궁정을 유지했다.

커난의 통치 기간은 하웰 압 카라독의 치열한 왕위 계승 투쟁으로 특징지어 있다. 하웰은 보통 커난의 형제로 여겨진다. 예수 대학 사본 20호의 족보에서는 그가 카라독 압 메이리온의 아들로 등장하며, 이 경우 "압 카라독"이라고 불린다.

커난이 왕위에 오른 후, 그에 대한 기록은 813년까지 나타나지 않아, 그의 족보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와 카라독 사촌 관계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또 다른 가능성은 상술한 대로 그의 별명이 메나이 다리를 근처에 위치한 것으로 여겨지는 카스텔 딘다에스위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그가 앵글시의 동남부 출신임을 확인시켜주는 단서일 수 있다.

상술한 대로 커난의 초기 통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없지만, 그의 재위 말년은 자연 재해와 군사적 실패로 얼룩졌다. 810년에는 웨일스를 휩쓴 소의 전염병으로 많은 소들이 죽었고, 그 이듬해인 811년에는 마엘군 귀네드의 고대 목조 궁정인 데간위가 번개에 맞아 파괴되었다.

812년에서 816년까지, 커난과 하웰 사이에 앵글시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고, 결국 커난은 패배하고 추방되었습니다. 상술한 대로 커난과 하웰은 역사서에서 형제로 언급되기도 했지만, 그 근거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웨일스 연대기》에서는 이 두 사람을 이름만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그들의 관계나 가계는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대학 사본 20호의 족보에서는 커난과 하웰이 형제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하웰은 카라도그 압 메이리온의 아들이자 시난의 먼 사촌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렐리안 족보도 이를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다.

커난을 몰아내고 귀네드의 왕이 된 하웰은 하웰이 왕위에 오른 후, 817년에 머시아의 왕 코엔울프(Coenwulf)는 귀네드의 약점을 이용하여 루포니오그(Rhufoniog) 지역을 점령하고, 귀네드의 방어 요새인 에리리(Eryri, 스노우도니아)를 황폐화시켰다. 818년에는 앵글시 섬의 란마이스에서 중요한 전투가 일어났으나, 그 전투의 참가자들은 기록에 나타나지 않았다. 란마이스는 커난 왕의 고향이었던 궁정이 있는 곳이었다.

821년에도 머시아는 디 강(Dee Estuary) 근처의 웨일스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었으며, 코엔울프는 그 해 평화롭게 사망했다. 823년, 머시아는 포위스 왕국을 황폐화시키고, 다시 귀네드로 돌아와 데간위(현대의 데간위)까지 불태웠다.

825년 하웰은 마엘군 귀네드(Maelgwn Gwynedd) 왕가의 남성 혈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왕으로서 후계자 없이 사망하였고, 귀네드의 새로운 왕가를 연 이는 하웰의 정적이었던 커난의 외손자인 메르번 압 구리아드였다.

825년 귀네드의 왕으로 등극한 메르번 브리흐는 귀네드 왕들 중 최초로 건국자 키네다의 남자 후손이 아니었다. 메르번의 아버지는 귀네드 왕국과 상관없는 구리아드로, 그가 귀네드의 공주인 에실트를 아내로 맞으면서 그들의 아들 메르번은 귀네드 왕좌에 대한 권리가 생겼다. 메르번의 즉위는 귀네드 왕국에 새로운 왕가의 시작을 알렸다.

메르번의 치세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는다. 손턴(Thornton)은 830년에 웨섹스 왕 에그버트(Ecgberht)에게 패배한 웨일스 왕들 중 하나가 메르번일 가능성을 제시했으나, 이 패배가 그의 통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다만, 일종의 역성혁명으로 왕위에 올라 왕권의 정당성이 부족한 메르번이 아들인 로드리 마우르에게 귀네드 왕국을 온전히 물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드리 마우르가 웨일스의 왕들 중 최초로 웨일스 영토의 절반 이상을 다스릴 수 있도록 기반을 닦아주었다는 사실은 메르번의 국가 장악력과 통치력이 대단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메르번이 왕권을 잡기까지 귀네드 왕국을 포함한 웨일스가 크고 작은 전쟁과 재난을 겪으며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는 점에서 메르번의 통치력은 더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 내부적으로 귀네드 왕국의 왕권을 놓고 키난과 허웰 두 형제가 812년부터 816년까지 약 4년 동안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뒤이어 허웰이 죽은 825년에도 공석이 된 귀네드의 왕위를 두고 격렬한 세력 다툼이 있었고 바로 메르번이 이 혈투의 최종 승자가 되었다. 즉, 메르번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귀네드는 잦은 내전으로 피폐한 상황이었고 이런 귀네드에 안정을 가져다준 것이 바로 메르번의 통치였다.

외부적으로도 웨일스는 북쪽 스칸디나비아 부족과 동쪽 머시아의 위협을 끊임없이 받았다. 스칸디나비아 부족들의 첫 번째 서유럽 침략은 78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스칸디나비아 부족들의 세력 확장은 급속히 진행되어 800년 무렵에는 스코틀랜드에 상당수의 부족 사회가 건설되었으며, 830년 무렵에는 더블린을 중심으로 아일랜드에도 그들의 영향력이 뻗치기 시작했다. 메르번의 통치기인 830년경 아일랜드에 거점을 마련한 바이킹은 눈을 돌려 아일랜드 동부인 웨일스를 공격했으나 메르번 통치 아래의 귀네드는 훌륭히 방어해냈다. 하지만 바이킹의 침략은 계속되었고, 메르번의 아들인 로드리 마우르는 바이킹을 대파하고 국경을 철통같이 수호한 공로로 전 유럽에 이름을 떨쳤다.

한편 오늘날의 잉글랜드인 웨일스의 동쪽에는 당시 머시아의 침입이 계속되었다. 머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인 오파는 잉글랜드와 웨일스 사이에 제방을 쌓아 두 지역 사이의 국경을 확고히 했지만 오파의 뒤를 이은 머시아의 왕들은 끊임없이 웨일스의 국경을 침입하고 위협했다. 그리하여 822년 머시아는 귀네드 왕국의 이웃인 포위스 왕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스의 패배는 메르번에게는 전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메르번이 포위스의 공주 네스타와 결혼함으로써 포위스와 긴밀한 동맹 관계를 체결했기 때문이다.

이후 머시아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포위스 왕국은 머시아의 손아귀에서 자연스레 벗어났다. 머시아의 오파에 이어 잉글랜드의 주도권을 잡은 인물은 바로 웨섹스의 왕 에그버트이다. 잉글랜드에서 세력을 공고히 다진 에그버트는 830년 웨일스 원정을 주도했고 그동안 바이킹과 앵글로색슨의 침략을 잘 방어한 메르빈은 이 전쟁에서 에그버트에게 패하고 만다. 하지만 이 패배는 귀네드의 존립이나 메르번의 통치권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 패배 이후로도 귀네드는 웨일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으로 존재했고 메르번도 귀네드의 왕으로 권세를 누렸다. 다만 상술한 대로 이는 기록이 없어 증명하지 못한 주장이다.

머르번은 브리튼인의 왕으로 언급되며, 이는 《브리튼인의 역사》(Historia Brittonum)의 필경사의 추가 기록과 밤베르크 암호(Bamberg Cryptogram)에 나타냈다. 하지만 두 출처 모두 머르번의 치세 동안 그의 궁정에서 일한 인물들의 기록으로 추정되므로, 그의 후원자를 존중하는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는 않는다.

문학 자료에서도 머르번의 이름이 나타난다. 그의 이름은 13세기 중반 필사본인 《헤르게스트의 붉은 서(Book of Hergest)》에 포함된 **〈머르딘과 그의 여동생 그웬디드 사이의 대화(Cyfoesi Myrddin a Gwenddydd ei Chwaer)〉**라는 예언서에서 등장한다. 이 대화는 미래의 왕들에 대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 중 “tir manaw의 Merfyn Frych” (한국어로 “마나우 땅의 머르핀 브리흐”)라는 구절에서 머르핀이 언급된다.

844년 메르번은 케틸에서 벌어진 앵글로색슨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10세기 중반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웨일스 연대기(Annales Cambriae)』는 844년 메르번이 전사한 사실을 기록했지만 메르빈이 사망한 이 전투가 왜 발발했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메르번의 왕권은 그의 아들인 로드리 압 메르번에게 승계되었다.

아버지 메르빈의 뒤를 이어 로드리가 귀네드 왕국의 왕에 등극한 해는 불과 20대 중반인 844년으로 추정된다. 로드리가 즉위한 시기는 그가 왕국을 확장하거나 빼앗길 수도 있는 불안정한 시기로, 위기와 기회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던 때라고 할 수 있다. 9세기 초부터 머시아를 비롯해 잉글랜드의 여러 왕국은 웨일스를 정복할 목적으로 침략을 자주 일삼았다. 실제로 822년 귀네드의 이웃 국가인 포위스가 일시적으로 머시아의 통치 아래에 놓였고, 830년 웨섹스의 에그버트 왕이 웨일스를 침략해 더베드와 귀네드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830년대를 기점으로 잉글랜드 남부에서 바이킹의 침략 활동이 증가 추세를 보이며 적극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850년대부터는 잉글랜드에서 약탈하고 도망치는 ‘치고 빠지기’ 전략을 구사하던 바이킹들이 잉글랜드 땅에 정착하기 시작했고, 870년대에는 웨섹스를 제외한 잉글랜드의 모든 왕국이 바이킹에 의해 점령당했다.

머시아나 웨섹스와 같은 잉글랜드 왕국들의 침입과 바이킹의 침략은 웨일스의 여러 왕국들에게 분명히 큰 위협이었지만, 이런 불안정한 정국이 세력 확장의 야망과 그를 위한 군사적, 정치적 역량을 갖추고 있던 로드리에게는 기회로 작용했다. 실제로 바이킹의 급속한 세력 확장은 잉글랜드 왕국들에게 영토 방어 외의 모든 여력을 빼앗았기 때문에, 잉글랜드 왕국들의 웨일스 침략은 자연히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바이킹과 잉글랜드의 충돌은 로드리에게 귀네드 왕국의 내부를 정비하고 웨일스 내에서 세력을 확장할 시간을 제공했다. 9세기 웨일스 왕국들에게 가장 큰 위협은 머시아나 웨섹스, 바이킹이 아닌 로드리의 귀네드 왕국이라는 사실은 로드리가 어떤 세력보다 적극적으로 웨일스 내부 왕국들을 그의 세력권으로 병합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기록이 없어 로드리가 웨일스 왕국들을 어떻게 하나둘 통치 아래에 두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물리적 충돌이나 전쟁보다 혈연이나 결혼을 통해 해당 왕국 왕권의 정당성을 확보해 왕권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844년 귀네드 왕국의 왕이 된 후로 로드리는 855년 어머니의 나라인 포위스의 통치자가 되었고, 871년 아내의 나라인 세이시슬르그의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이 과정에서 큰 물리적 충돌이 없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것은 첫째, 로드리가 포위스와 세이시슬르그의 수장 자리에 오른 855년과 871년이 각각 전임 통치자(포위스-킨겐 아프 카델, 세이시슬르그-구곤 아프 메이리그)가 사망한 해이고 둘째, 로드리가 어머니와 아내를 통해 포위스와 세이시슬르그의 왕권을 주장할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드리는 전임자의 사망에 따라 포위스와 세이시슬르그의 왕을 겸직했던 것이다.

그의 할아버지인 구리아드가 귀네드의 공주 에실트와 결혼해 아들에게 귀네드 왕국의 왕좌를 물려주고, 그의 아버지인 메르빈이 포위스의 공주 네스타와 결혼해 아들에게 포위스 왕국의 왕좌를 물려준 것처럼, 로드리는 주변국인 세이시슬르그의 공주인 앙하라드 베르흐 메이리그와 결혼해 세이시슬르그의 왕권에 전략적으로 접근했다. 다만, 그의 선조와 다른 점이 있다면 로드리는 생전에 세이시슬르그의 왕권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로드리가 기존 귀네드 왕국에 포위스와 세이시슬르그를 포함해 오늘날의 웨일스의 절반이 넘는 거대 세력을 형성한 배경에 단순히 3대에 걸친 결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로드리는 856년 앵글시 섬을 침입한 바이킹을 크게 무찔렀을 만큼, 그의 군사적 능력은 웨일스 내에서 견줄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또한 그가 이미 귀네드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통치자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포위스와 세이시슬르그의 왕좌를 큰 잡음 없이 차지한 것으로 미루어 그의 세력이 이미 주변국에서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대했다는 것과, 그의 정치적 수완도 탁월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정치적 수완을 통해 로드리는 큰 물리적 충돌이나 병력 손실 없이 웨일스의 절반이 넘는 영토를 차지할 수 있었고 이렇게 비축한 병력을 바이킹과 같은 외세로부터 왕국을 방어하는 데 오롯이 사용할 수 있었다.

로드리는 뛰어난 정치적 수완으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수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전사의 면모에서 비롯되었다. 포위스와 세이시슬르그를 통치하면서 영토를 점점 넓혀가던 로드리는 넓어진 영토만큼 늘어난 국토방위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로드리는 동쪽으로 잉글랜드 왕국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동시에 해안가를 수시로 급습하는 바이킹족의 공격을 막아야 했다. 로드리가 외세 침입 대비에 유난히 신경 쓴 것은 재건축을 거쳐 오늘날까지도 웨일스 동남부 카마던셔의 디네후르 성을 최초로 축조했다는 사실이 말해준다.

822년에는 머시아, 830년에는 웨섹스가 웨일스를 침공해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잉글랜드 왕국들 간의 격렬한 세력 다툼은 점차 웨일스에 대한 야욕을 일시적으로 거두도록 만들었다. 머시아의 경우, 829년 훗날 잉글랜드 전역을 통일하는 웨섹스 왕국의 지배 아래에 놓이며, 웨일스에게 더 이상 위협을 주지 못했다.

반면, 웨일스를 비롯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 영국 땅 전역으로 바이킹의 침략은 나날이 확대되었다. 날렵한 함선의 기동력을 바탕으로 바이킹은 해안가 마을을 습격했는데, 특히 돈 많고 방어에 취약한 수도원을 주로 공격했다. 바이킹의 첫 서유럽 침공은 789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800년 무렵까지 스코틀랜드를 침략해 상당수 마을을 형성했고, 830년 무렵에는 아일랜드에도 식민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8세기 후반 서유럽을 처음 침공하기 시작한 바이킹이 불과 2세기도 안 된 10세기 초 프랑스 북부의 많은 지역과 잉글랜드의 많은 왕국을 손에 넣은 것은 바이킹의 가공할 전투력을 입증한다.

850년대 들어 바이킹은 웨일스를 여러 차례 공격했다. 853년 바이킹이 귀네드 왕국을 습격한 기록이 있고, 854년 데인인(the Danish)이 앵글시 섬을 초토화했다는 기록도 있다. 앵글시 섬은 땅이 비옥하고 배를 통한 접근이 쉬워 귀네드 왕가의 본거지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침략을 겪었던 곳이다. 앵글시 섬이 공격받은 지 2년째인 대망의 856년 로드리는 바로 그 앵글시 섬에서 바이킹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웨일스에서 바이킹족을 이끄는 수장까지 죽이는 쾌거를 거두었다. 이 승전 소식은 영국을 넘어 곧 서프랑크의 왕 샤를 2세의 귀에도 들어올 정도로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로드리는 국제적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로드리 대왕이 바이킹에게 거둔 승리가 바이킹 세력을 웨일스 땅에서 영원히 축출한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잉글랜드 땅을 차지하겠다는 바이킹의 야욕은 860년대를 기점으로 강해졌고 이와 맞물려 바이킹은 871년부터 웨일스에도 대대적인 공세를 퍼부었다. 실제로 여러 기록은 856년의 대승 이후에도 로드리가 바이킹의 침략을 계속 막아왔음을 말해준다. 예를 들어, 귀네드나 포위스와 같은 웨일스 왕국의 왕들에 대한 역사서인 『왕들의 연대기(Brut y Tywysogion)』는 로드리가 872년에 거둔 두 차례의 승리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승리는 방골라우, 두 번째는 마네기드에서 거둔 것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로드리가 바이킹을 격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승리의 여신이 항상 로드리 대왕의 손을 들어준 것은 아니다. 877년의 바이킹 침공은 성공적이어서 로드리는 자신의 왕국으로부터 추방되어 아일랜드로 건너가게 되었다. 같은 해 바이킹은 웨섹스를 제외한 잉글랜드의 다른 왕국들을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점령해 영국 땅에 그들의 세력을 공고히 했다. 이듬해인 878년 로드리는 귀네드 왕국으로 돌아와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그의 재집권은 백일천하로 끝났다. 왕좌를 탈환한 지 얼마 안 되어 로드리가 앵글로색슨과의 전투에서 아들 구리아드와 함께 전사했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이 웨일스 국경을 침범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강성해지는 바이킹의 세력을 피해 도망가다가 침범했거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바이킹의 명령을 받고 영토 확장을 위해 침공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터에서 자신의 이름을 전 유럽에 드높인 로드리는 아일랜드로 추방당하는 불운한 말년을 보내다 결국 전쟁터에서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지만 북쪽으로 앵글시 섬, 남쪽으로 고웨르에 이르는 역대 웨일스 왕들 중 아무도 이루지 못한 넓은 영토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로드리는 실로 ‘웨일스의 왕’이라고 할 만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이 업적으로 로드리는 후손들로부터 ‘대왕’ 칭호를 받게 되는데 로드리처럼 9세기를 살아간 많은 왕들 중, ‘대왕’ 칭호를 받은 인물은 로드리를 포함해 서유럽을 정복한 프랑크 왕국의 샤를 대제, 잉글랜드 통일을 이룬 알프레드 대왕까지 단 3명뿐이다. 후손들은 자신의 국가를 강대국으로 만들어준 그들을 대왕으로 부르며 존경심을 표해 왔다. 유럽의 변방인 웨일스의 왕에게 대왕 칭호가 붙었다는 것은 로드리의 영향력과 명성이 웨일스라는 작은 땅보다 훨씬 더 거대했음을 시사한다.

로드리의 뒤를 이은 이는 장남 아나라우드로 그는 아버지의 영토를 다른 형제들과 함께 분할해 자신은 귀네드를 통치했다. 고중세의 여느 웨일스 왕들의 연대기처럼 아나라우드의 유년시절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나라우드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시기는 881년으로 그해 20대 중반의 아나라우드는 콘위 전투에서 앵글로색슨 군대를 격파하고 아버지 로드리 대왕의 복수에 성공했다.

잉글랜드 왕국들 중 머시아는 웨일스와 가장 인접한 왕국으로 끊임없이 웨일스로의 영토 확장을 꾀했다. 로드리 대왕이 사망한 구체적 맥락에 대한 자료는 없으나 그가 앵글로색슨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것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와 전투를 벌인 앵글로색슨은 머시아의 군대로 추정된다. 머시아는 9세기 들어 경쟁국인 웨섹스의 급성장과 바이킹의 강력한 공격으로 급격한 쇠퇴를 경험했다. 하지만 머시아는 마지막까지 웨일스 정복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머시아의 군주인 에설레드는 결국 881년 귀네드 왕국으로 침공을 감행했다.

아나라우드는 그의 형제들과 웨일스 북부 콘위 강에서 머시아 군대를 맞았다. 양측 군대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고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으며 어떻게 승부가 났는지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아나라우드가 이끄는 귀네드 군대가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은 기록에 확실히 남아 있다. 한 웨일스의 역사 기록은 이 승리를 “신이 내린 로드리의 복수”라고 서술했다.

아나라우드가 콘위 전투에서 거둔 승리는 그 개인에게 여러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 그는 이 승리로 용맹한 전사였던 로드리의 피가 그의 몸에도 흐르고 있음을 만천하에 알리며 웨일스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또한 이 패배를 계기로 머시아는 북부 웨일스, 즉 귀네드 왕국에 대한 야심을 접고 글리위싱고 구엔트와 같은 남부 웨일스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따라서 아나라우드는 머시아의 침략에 대한 우려 없이 왕국의 내부 강화를 꾀하고 남부 웨일스로 왕국의 세력을 확장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브리튼의 왕으로서 아나라우드의 명성과 초강대국 웨일스를 향한 귀네드 왕국의 발전은 모두 콘위 전투의 승리에서 시작되었다.

아나라우드가 웨일스에서 귀네드 왕국의 안정과 강화를 도모할 무렵, 웨식스의 왕인 앨프레드 대왕은 잉글랜드 전역을 장악한 바이킹(데인인)을 무찌르고 바이킹의 침입과 지배로 쇠약해진 잉글랜드 왕국의 대부분을 자신의 치하에 두기 시작했다. 다수의 잉글랜드 왕국들은 바이킹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앨프레드 대왕에게 웨식스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보호를 요청했다.

웨일스 남부 왕국들도 콘위 전투에서 패한 후 남부 웨일스로 시선을 돌린 머시아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너도나도 앨프레드 대왕의 웨섹스 왕국과의 동맹을 도모했다. 웨일스 동남부의 글리위싱의 왕 히웰 압 리스를 비롯해 그와 인접한 구엔트 등의 왕국들이 앨프레드 대왕과의 동맹을 통해 머시아를 비롯해 남부 웨일스로 세력 확장을 꾀하던 귀네드와 같은 적군의 침입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다.

반면, 아나라우드와 카델 등 로드리의 후손들은 처음에는 앨프레드 대왕과의 동맹을 꺼린 듯하다. 앨프레드 대왕과의 동맹은 웨섹스 왕국의 아래로 들어감을 의미하고, 그것은 안전을 위해 그들의 왕국을 강성하게 만드는 것을 스스로 포기함을 뜻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아나라우드는 알앨프레드 대왕의 최대 경쟁국이자 바이킹이 이끄는 ‘요크의 스칸디나비아 왕국’과의 동맹을 통해 브리튼 섬 전체에 힘의 균형과 긴장을 유지하려고 했다.

당시 요크의 스칸디나비아 왕국은 잉글랜드 북동쪽의 요크를 거점으로 세력을 아일랜드의 해안가와 더블린까지 확장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요크 왕국과의 연합으로 서쪽 해안가 침략에서 자유로워진 귀네드 왕국은 병력을 동쪽에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다. 즉, 아나라우드는 웨일스 남동부로 세력을 확장함과 동시에 동쪽으로부터 잉글랜드의 침략에도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요크의 스칸디나비아 왕국과 아나라우드의 귀네드 왕국의 연합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래서 아나라우드는 요크 왕국과의 동맹으로 웨섹스 왕국의 확장을 견제하겠다는 기존 방침에서 앨프레드 대왕과의 연합으로 노선을 선회했다. 아나라우드가 앨프레드 대왕과 만나 힘을 합치기로 합의한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893년 이전으로 알려져 있다.

앨프레드 대왕의 전기인 『앨프레드의 삶(Life of Alfred)』를 집필한 어서(Asser)에 따르면, 아나라우드는 웨섹스 왕국과의 동맹을 위해 앨프레드 대왕을 직접 찾아갔고 그로부터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또한 아나라우드와 앨프레드 대왕의 동맹은 동등한 위치가 아니라 아나라우드가 앨프레드 대왕보다 낮은 왕의 위치에서 후원을 요청하는 형식이었다고 한다.

앨프레드 대왕과 손잡은 후인 894년 스칸디나비아 군대가 웨일스를 공격했다. 귀네드 왕국이 있는 웨일스 북부를 먼저 공격한 그들은 아나라우드 군대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혀 진로를 남쪽으로 선회했으나, 그곳에는 앵글로색슨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앨프레드 대왕의 지원을 등에 업고 바이킹의 공격을 막는 데 성공한 아나라우드는 동맹을 그대로 유지한 채 그의 형제들과 웨일스 내부에서 영토 확장에 총력을 기울였다.

상술한 대로 형제들과 함께 성장한 아나라우드는 로드리가 죽은 후, 형제들과 각각 로드리의 왕국을 나눠 물려받았다. 이후에 아나라우드는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을 소진하는 대신, 그들과의 협력과 연합을 통해 ‘로드리의 아들들’의 위력을 온 웨일스에 떨쳤다. 또한 요크의 스칸디나비아 왕국이나 앨프레드 대왕의 웨섹스 왕국과의 협력을 통해 자신의 왕국을 지키는 한편, 왕국의 영토를 남부 웨일스까지 확장하는 것을 도모했다. 즉, 국왕으로서 아나라우드의 성공은 다른 왕국과의 적절한 동맹과 연합에서 비롯한 것이다.

스칸디나비아 군대를 무찌른 이듬해인 895년 아나라우드는 웨일스 남부로의 영토 확장을 본격화했다. 아나라우드는 앵글로색슨 군대의 지원 아래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를 침공했다.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는 모두 앨프레드 대왕의 동맹군이 아니었기 때문에 앵글로색슨 군대는 큰 어려움 없이 아나라우드의 공격을 도울 수 있었다.

한편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는 귀네드 왕국과 더베드 왕국이 아래 위에서 호시탐탐 노리던 영토로, 더베드도 앨프레드 대왕의 웨섹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다. 이로 인해 아나라우드는 남부 영토 확장을 위해 앨프레드 대왕의 지원을 받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더베드의 왕이던 더베드의 허피아드가 893년 사망하자 다페드와 웨섹스 왕국의 동맹은 지속되지 못했다. 아나라우드의 귀네드 군대가 케레디기온과 어스트라드 투이를 침공한 895년 웨섹스와 다페드는 더 이상 동맹 관계가 아니었고, 웨섹스 군대는 걸림돌 없이 귀네드 군대를 도울 수 있게 되었다.

앨프레드 대왕이 아나라우드를 지원한 배경에는 앨프레드 대왕 본인의 정치적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웨일스 최고의 세력은 누가 뭐래도 귀네드와 포위스, 세이시슬르그를 위시한 로드리의 아들들이 이끄는 왕국들이었고, 아나라우드는 이중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앨프레드 대왕에게 웨일스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과 손잡는 것은 어떤 동맹보다 유용하게 느껴졌을 것이고, 그가 기꺼이 아나라우드의 웨일스 남부 침공에 힘을 보탰을 것으로 여겨진다.

웨일스 내에서 가장 강력한 병력을 형성하고 있던 귀네드 군대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앨프레드 대왕의 원조를 받아 마치 달리는 말에 날개를 단 듯 거침없이 웨일스 남부를 침공했고, 얼마 안 되어 케레디기온은 아나라우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다페드 또한 왕인 하이페드(Hyfaidd) 압 블레드리(Bleddri)가 사망하자 아나라우드는 망설임 없이 이 기회를 포착해 894년에 케레디지온(Ceredigion)과 타이위 계곡(Tywi Valley)을 가차 없이 침략했으며, 그 노력을 강화하기 위해 머시아(Mercia) 군대의 도움을 받았다. 하이페드의 아들 리와르크(Llywarch) 압 하이페드가 다페드의 지배자로 아버지의 뒤를 이었으나,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아나로드의 지도하에 있는 귀네드(Gwynedd)로부터 점점 더 많은 압박을 받았습니다. 리와르크가 903년에 사망한 경위는 분명하지 않는다.

리와르크가 사망한 후, 그의 형제 로드리(Rhodri) 압 하이페드가 다페드 왕의 자리를 이어받았으나, 그의 치세는 단 한 해에 그쳤다. 그는 아르위스틀리(Arwystli)에서 메르피니온(Merfynion)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참수되었다. 이 사건은 아나라우드의 다페드 왕국 정복의 절정을 이루었다. 다패드는 아나라우드의 형제 카델(Cadell) 압 로드리(Rhodri)의 통치하에 귀네드와는 독립적인 왕국으로 통치된 것으로 보인다. 카델이 다페드 왕국을 획득하게 된 정확한 사정과 사건들은 여전히 불분명하다. 아나라우드의 학장 정책에 대해 아써에 의하면, 이후에도 아나라우드는 영토 확장 욕심을 숨기지 않고 케레디기온보다 더 남동쪽인 브러하이니오그까지 손을 뻗은 것으로 보인다.

아나라우드가 사망한 916년경 귀네드 왕국은 이미 웨일스 내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로드리와 아나라우드의 후손들은 이후 북쪽으로는 귀네드 왕국, 남쪽으로는 데헤이바쓰 왕국을 중심으로 전 웨일스를 장악했다. 아나라우드의 아들인 이드왈 보엘은 귀네드 왕국을 물려받아 웨일스 북부에서 입지를 더 공고히 다졌고, 아나라우드의 조카이자 카델의 아들인 허웰 다는 웨일스 남부에 데헤이바쓰 왕국을 세워 귀네드 왕국의 입지를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메르번 브리흐에서 시작된 귀네드 왕국의 두 번째 왕조는 로드리 대왕을 거쳐 크게 성장했고, 아나라우드를 거쳐 안정세에 접어들며 꾸준히 그 세력을 팽창했다. 때에 따라 현명한 협력이나 강력한 힘을 통해 귀네드 왕국의 안정과 성장을 꾀한 아나라우드는 후대에 ‘브리튼의 왕’으로 불리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많은 존경을 받고 있다.

916년 아나라우드가 사망한 후 귀네드 왕국은 이미 웨일스 내에서 적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성장했다. 로드리와 아나라우드의 후손들은 이후 북쪽으로는 귀네드 왕국, 남쪽으로는 데헤이바쓰 왕국을 중심으로 전 웨일스를 장악했다. 아나라우드의 아들인 이드왈 보엘은 귀네드 왕국을 물려받아 웨일스 북부에서 입지를 더 공고히 다졌으나 아나라우드의 조카이자 카델의 아들인 허웰 다는 웨일스 남부에 데헤이바쓰 왕국을 세워 귀네드 왕국의 입지를 위협할 만큼 성장했다.

하지만 916년에는 머시아의 여왕 에설플레드가 브러하이니오그를 공격하여 위협하였고, 917년경에는 바이킹에게 서쪽 해안가를 공격당하며 수세에 몰렸다. 결국 921년 웨일스의 가장 강력한 두 왕, 이드왈과 허웰은 모두 대 에드워드에게 신종하였다.

921년의 항복 이후 이드왈은 웨일스 최강자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동시에 그는 기존의 항복을 철회하고 점점 잉글랜드에 저항하는 노선을 취하기 시작했다. 반면, 허웰은 에드워드를 믿을 만한 동맹으로 인식하고 협력관계를 점차 강화했다.924년 대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이드왈은 혼란한 상황을 틈타 체스터 지역을 공격하였다. 잉글랜드와의 관계가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늘 편치 않았던 이드왈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에서 겪은 굴욕을 되돌려주고자 했다.

잉글랜드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에드워드의 아들 애설스탠은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웨일스 왕들과의 군신관계를 다시 확인받고자 했다. 927년 애설스탠은 허웰을 비롯한 웨일스의 왕들과 회동하여 항복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드왈은 허웰과 함께 927년, 928년, 937년 총 세 번에 걸쳐 애설스탠의 궁정에 방문하였다. 당시 방문자를 기록한 명부에 의하면 허웰의 이름은 웨일스 군주들 가운데 언제나 맨 처음에 등장하였고 이드왈의 이름은 허웰의 이름 다음에 등장하였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가 이드왈보다 허웰에 호의적이었음을 증명하는데 이는 이드왈이 여전히 잉글랜드와 애설스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927년의 항복은 이드왈에게 에델스탄에 대한 표면상의 충성 이외에 다른 선택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표면상의 충성은 이드왈을 실질적 행동으로 이끌었는데, 이드왈은 허웰과 함께 애설스탠을 도와 브리튼 섬 북부에 위치한 스트라스클라이드 원정길에 참가한 바 있다.

939년 애설스탠의 사망과 함께 잉글랜드에 대한 이드왈의 태도도 바뀌었다. 이드왈은 잉글랜드의 궁정에 출입하는 대신 잉글랜드에 대항할 힘을 키웠다. 결국 942년 이드왈은 동생 엘리세드와 힘을 합쳐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전쟁은 결국 이드왈은 패사했다. 그의 슬하에 다섯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드왈의 후계자로 점쳐지던 아들은 이아고 아프 이드왈과 이아이아프 아프 이드왈이었다. 하지만 귀네드의 왕위를 차지한 자는 다름 아닌 사촌인 허웰이었다. 하웰은 순식간에 귀네드를 침공하여 이드왈의 아들들을 추방하고 귀네드의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웨일스 최강국으로 군림해오던 귀네드는 신생국 데헤이바쓰에게 정복되는 굴욕을 맛보게 되었다.

949년 하웰이 사망하자 이드왈의 아들들은 귀네드를 되찾는다. 이드왈의 아들들은 데헤이바쓰와 949년, 952년 두 차례 격돌하여 승리하였고, 그 결과 왕국을 완전히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 이드왈의 다섯 아들 중 이아고와 이아이아프가 이드왈의 뒤를 이어 귀네드의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전투에서 승리한 후, 형제들은 서로 다투기 시작했습니다. 이아고는 969년에 이에우아프를 포로로 잡고 10년간 통치했지만 내전, 외적의 침략, 혹은 왕권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이유인 974년 잠시 했다가 978년 하웰 압 이아고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클리노그 파우르 수도원을 습격했다. 이 습격에서 하웰은 아마도 머시아의 앨프헤어 백작이 제공한 잉글랜드 군대의 지원을 받았다. 하웰은 979년 전투에서 이아고를 물리쳤고, 같은 해 이아고는 바이킹 군에 의해 포로가 되어 실종되었다. 하웰은 귀네드의 유일한 지배자로 남게 되었지만, 아버지 이에우아프는 풀어주지 않았다. 존 에드워드 로이드에 따르면, 이에우아프는 988년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980년, 하웰은 이아고의 아들 쿠스텐닌 아브 이아고의 도전과 마주했다. 쿠스텐닌은 맨 섬의 바이킹 지도자 고프라이드 맥 아랄트와 동맹을 맺고 앵글시를 공격했지만, 하웰은 전투에서 이들을 물리쳤고, 쿠스텐닌을 처형하고 고프라이드와 그의 군은 도망쳤다. 이제 귀네드 왕국을 안정적으로 차지한 하웰은 왕국을 남쪽으로 확장하려 했다. 그는 다시 앨프헤어와 동맹을 맺고 브리체이니오그와 모르간누그를 공격했으나, 이들 왕국을 합병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985년, 그의 잉글랜드 동맹은 그에게 등을 돌렸고, 그의 증가하는 힘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그를 죽였다. 하웰은 그의 형제인 카드웰론 아브 이에우아프에 의해 후계자로 대체되었고, 카드웰론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년뒤인 986년 귀네드는 데헤우바르스의 마레두드 아브 오웨인에게 합병되었다. 그는 모르간누그와 구엔트(Gwent)를 제외한 웨일스 전역을 지배했을 것이다.

마레두드는 레드너와의 국경에 위치한 머시아 정착지를 습격한 기록이 있으며, 데인족들의 습격으로 포로가 된 일부 백성을 구하기 위해 은화로 몸값을 지불한 기록도 있다. 바이킹의 습격은 마레두드의 통치 기간 동안 계속해서 큰 문제였다. 987년, 고드프리 할러드슨이 앵글시를 습격하여 1,000명을 죽이고 2,000명을 포로로 잡았다고 전해지며, 마레두드는 이 포로들을 풀어주기 위해 큰 몸값을 지불했다.

마레두드가 999년경 사망한 후, 귀네드 왕국의 왕위는 이드왈 포엘 왕가에 속한 커난 압 하웰에 의해 회수되었다.
2.2.4. 데헤이바쓰
데헤이바쓰 왕국은 웨일스 중남부에 걸쳐 있다. 대부분의 웨일스 왕국들이 로마인이 브리튼 섬에서 철수한 5세기에 건국된 반면, 데헤이바쓰는 10세기 초에 세워진 비교적 신생 왕국이다. 데헤이바쓰의 건국자는 하웰 다이다. 하웰 다는 귀네드의 위대한 왕 로드리 마우르의 손자로 귀네드의 왕족 출신이다.

로드리 마우르는 귀네드 왕국을 웨일스 중남부의 세이시슬르그까지 확장한 후 장남 아나라우드에게는 귀네드, 차남 카델에게는 세이시슬르그를 물려주었다. 하웰 다는 카델의 아들로 동생 클러도그와 함께 세이시슬르그를 물려받았다. 이후 하웰 다는 다페드의 공주 엘렌과 결혼해 더베드로 세력 확장을 도모하고, 904년 다페드의 왕 흘러와르흐가 사망하자 왕의 사위라는 지위에 자신의 정치력과 힘을 보태 다페드의 왕좌를 차지했다.

920년 클러도그의 사망과 함께 하웰 다는 세이시슬르그를 독점하면서 웨일스 중부에서 남부로 이어지는 거대한 영토를 독식했다. 웨일스 중남부를 손에 넣은 허웰은 자신의 영토에 ‘남부’를 뜻하는 데헤이바쓰라는 이름을 붙였다. 데헤이바쓰라는 새 왕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데헤이바쓰의 수도는 웨일스 중서부의 디네후르로 정해졌다. 이 지역의 이름을 따 데헤이바쓰의 통치 왕가는 ‘디네후르 왕가’로 불렸고, 디네후르 성은 대대로 데헤이바쓰 왕의 주요 근거지가 되었다. 디네후르 성은 허웰 다의 할아버지 로드리 마우르가 지은 것이다.

그동안 귀네드의 독무대와 같았던 웨일스의 세력 분포는 데헤이바쓰의 등장으로 북부의 귀네드, 남부의 데헤이바쓰 양강 체제로 재편되었다. 또한 소부족 집단들이 주축이 된 군소 왕국들의 모임과 같던 웨일스는 데헤이바쓰라는 초강대국의 등장과 함께 통일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더베드와 세이시슬르그를 장악한 허웰의 상승세는 멈출 줄 모르고 930년 마침내 세이시슬르그 동쪽의 브러하이니오그까지 차지했다. 브러하이니오그를 손에 넣음으로써 허웰은 웨일스 통일을 위해 웨일스 남동부의 두 왕국 글러위신그와 구엔트 그리고 북부의 강자 귀네드만 남겨놓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드왈이 942년 머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전사하면서 웨일스의 판도를 뒤집어 놓았다. 허웰이 이드왈의 사망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귀네드 왕국을 침공해 이드왈의 아들인 이아고 압 이드왈과 이아이아프 압 이드왈, 그리고 하웰 압 이아이아프의 왕위 분쟁을 틈타 948년 최후의 승자인 하웰 압 이아이아프를 축출하고 귀네드의 왕관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당시 귀네드 동쪽의 포위스는 귀네드의 통치 아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허웰은 귀네드의 왕좌를 차지하면서 자동적으로 포위스까지 지배하게 되면서 거의 웨일스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잉글랜드와의 외교 관계에서 하웰 다 또한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중시했는데, 이미 로만켈트족들을 서쪽 웨일스와 북쪽 스코틀랜드 지역으로 몰아내 그나마 브리튼 섬의 옥토라 부르만한 지역들을 차지한 앵글로-색슨족들을 칠왕국과 바이킹들에 의한 이교도 대공세 시기를 해쳐나가면서 앨프레드 대왕 시기와 대 에드워드 시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브리튼 섬에서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한 상태였기에 그 역시 다른 웨일스의 소왕으로 있던 시기 다른 소왕들과 마찬가지로 웨식스에 신종했고, 이후 대 에드워드가 죽고 애설스탠이 웨식스의 왕이자 통일 잉글랜드의 왕이 되고, 본인이 브리든인의 왕을 칭한 후에도 저자세로 있었다.

허웰은 애셀스탠의 궁정에 자주 드나든 것으로 유명하다. 애셀스탠은 자신의 통치구역 밖에 있는 군주들을 주기적으로 자신의 궁정으로 불렀고 특히 허웰은 이 모임에 자주 갔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허웰이 애셀스탠과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친교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모임 참가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자료를 보면 웨일스 왕들의 이름은 애셀스탠과 대주교의 이름보다 뒤에, 주교와 귀족의 이름보다 앞에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웨일스의 왕은 굉장히 높은 지위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웨일스 왕들 중 항상 첫 번째로 기록된 이름이 바로 허웰이라는 점은 그가 웨일스 왕들 중 가장 높은 위치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와 허웰의 동맹이 그만큼 공고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동맹은 감정적이고 개인적이라기보다 철저히 실리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애셀스탠은 937년 브루난버 전투에서 바이킹과 스코틀랜드인 연합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 승리 이후, 애셀스탠은 웨일스에 대한 통제를 느슨히 풀었다. 그리고 애셀스탠의 후계자인 에드먼드 1세는 세력이 더 약했기 때문에 웨일스의 군주들을 강하게 압박하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애설스탠이 웨일스의 왕들을 덜 압박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허웰은 더 이상 모임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것은 허웰의 모임 참가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강력한 군주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의무적으로 행한 것임을 드러낸다.

그 밖에도 내치에 있어서 중요한 업적을 세웠는데 웨일스 역사상 최초로 성문법으로 만들었다. 웨일스 법은 940년 무렵부터 945년 사이에 허웰의 근거지인 카마던셔 근교의 ‘터 그윈 아르 다프’에 각 지역대표들이 참가해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허웰의 웨일스 법 편찬은 단순히 한 국가의 법을 제정한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허웰 이전까지 웨일스에는 성문화된 법이 없었다. 성문법이 없다는 것이 웨일스에 법 자체가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허웰이 수행한 과업은 법을 완전히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웨일스의 여러 지역에 퍼져 있는 법의 역할을 하는 ‘관습’이나 ‘풍습’을 성문법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허웰이 제정한 ‘웨일스 법’은 중앙집권적 성격을 띤 국가법이라기보다 여러 지역의 실상과 삶의 지혜가 묻어난 국민법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웨일스 법은 처벌을 통해 사회질서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친족 집단 간의 문제를 중재하고 탈 없이 화해할 수 있도록 권유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데, 처벌보다 관용과 자비를 권하고 민중의 눈높이와 상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여타 법령에서는 최근까지도 결여되어 있던 여성과 아이들을 존중하는 면이 두드러져 있으며, 이런 특성은 허웰의 법이 왕과 귀족들의 의사만 반영해 제정된 것이 아니라, 이미 백성들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시행되던 관습적인 법령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했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허웰의 법이 시대를 앞서간 성격을 갖는 또 다른 이유는 허웰 자신이 시대에 앞선 교육을 받았고, 뿐만 아니라 잦은 영국 궁정 출입과 심지어 웨일스 왕으로는 최초로 경험한 로마 순례는 그를 ‘우물 안 개구리’에 머물지 않고, 식견과 시야를 넓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특히 허웰의 시대는 유럽과 이슬람의 많은 국가들이 법 자체와 그것의 성문화에 큰 관심을 갖던 시기로 로마를 방문해 당시 유럽 전반의 사회적, 문화적 분위기를 직접 체감한 허웰은 웨일스 법을 제정함으로써 선진문물을 적극 도입했다.

허웰의 법이 탄생한 또 다른 배경에는 웨일스 내 여러 왕국이 그의 통치 아래에 놓였기 때문이다. 허웰은 당시 각기 다른 왕국으로 오래 지내온 세이시슬르그, 더베드, 귀네드와 같은 다수의 영토를 동시에 통치하였기 때문에 행정 조치를 통해 이질적인 국가들에게 통일성과 일체감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 공식적인 법 제정은 이 역할을 수행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수단이었다. ‘웨일스 법’이라는 공식적인 법의 등장은 지역에 따라 다른 삶의 방식을 고수하던 백성들에게 동일한 가치관, 행동규범, 생활방식 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허웰은 웨일스 역사상 가장 많은 왕국과 넓은 영토를 통치했음에도, 그의 집권기의 웨일스는 큰 불화나 충돌 없이 비교적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했다. 허웰의 통치기 동안 외세의 침입은 물론 내부 분열도 기록에서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것은 허웰의 법에 웨일스의 여러 왕국 간의 분열과 갈등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음을 의미한다. 더욱이 허웰의 법은 모든 법전이 왕과 그의 관리들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할 만큼, 왕권 강화와 신성화라는 목적으로도 만들어져 이런 법의 배포를 통해 어떤 세력도 감히 허웰에게 도전할 수 없도록 만들어 왕국의 안정과 평화에 기여했다.

선진적이고 자비롭기로 유명한 허웰의 법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신분에 대한 엄격한 구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을 구분하는 가장 기초적 기준은 자유민과 비자유민의 경계이다. 왕이나 귀족은 당연히 자유민으로 구분되는 반면, 농민이나 노예는 비자유민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웨일스의 법이 선진적인 것은 다수가 비자유민의 신분에 묶여 있던 유럽 전반의 풍토와 비교해 웨일스에서는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자유민의 권리를 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웨일스 법은 여성의 권익보호에서도 비교적 적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물론 웨일스 법에도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은 뚜렷하다.

허웰의 법은 오늘날까지 총 42부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중 36부는 웨일스어, 나머지 6부는 라틴어로 되어 있는데 웨일스 법은 처음에 웨일스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라틴어판은 원전의 번역본이다. 웨일스 법이 처음에 웨일스어로 기록된 것은 그것만이 웨일스 백성의 삶을 구체적이고 세부적으로 반영하고, 내용을 온전히 기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950년 허웰이 죽은 후 그의 자리를 아들인 오와인 압 허웰이 계승했고, 다른 아들들에게도 각각 왕국을 분할했다. 그리고 953년 무렵, 귀네드 왕국은 이드왈 보엘의 아들들인 이아고와 이아이아프가 왕좌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오와인은 귀네드를 무력으로 수복하려 했으나 수복하기는커녕 오히려 952년 이아고에게 데헤이바쓰 침공을 허용했다. 954년 귀네드와 데헤이바쓰의 운명을 가르는 최후의 일전이 귀네드의 흘란루스트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의 자세한 정황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승리의 여신은 또 한 번 오와인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결국 오와인은 허웰 다가 사망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귀네드 왕국과 귀네드에 복속되어 있던 포위스를 잃고 허웰 다가 이룬 거대한 데헤이바쓰 제국은 조각나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오와인은 남웨일스에서 데헤이바쓰의 패권을 공고히 하는 데 주력했고, 이를 통해 데헤이바쓰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다만 오와인은 귀네드의 왕좌를 여전히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고 있었고, 훗날 웨일스 연대기』에 이드왈, 아이고, 아아이아프에 대한 기록을 완전히 배제하는 등 귀네드 왕위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지 않았다. 상술한대로 오와인은 다른 두 형제와 함께 950년 데헤이바쓰를 분할해 물려받았으나 다른 두 형제인 로드리와 에드윈이 각각 952년, 954년에 사망하자 오와인은 왕이 된 지 4년 만에 데헤이바쓰의 유일한 통치자로 등극했다. 귀네드의 패권을 완전히 빼앗긴 오와인에게 오랜 통치 기간은 여러 과제를 남겼다. 왕국 확장의 한계에 직면한 상황에서 오와인은 허웰 다가 시도하지 않았던 웨일스 남동부로의 세력 팽창에 힘을 쏟는 한편, 대내적으로 비교적 신생국인 데헤이바쓰 왕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통치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런 노력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웨일스 연대기』이다.영토 확장과 왕국 강화 측면에서 큰 업적을 남기지 못한 오와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 『연대기』의 집필과 편찬으로 신생국인 데헤이바쓰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상술한대로 선친의 유산인 귀네드 왕국을 빼앗아간 이아고와 이아이아프,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인 이드왈에 대한 언급은 철저히 피하하면서 메르빈의 진정한 혈통이자 데헤이바쓰와 귀네드를 포함한 웨일스 전체의 지도자로서 입지를 세우고 싶었던 오와인의 강한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

상술한대로 954년 흘란루스트에서 있었던 귀네드와 데헤이바쓰의 전투에서 귀네드가 승리를 거둠으로써 귀네드는 웨일스 북부에서 데헤이바쓰의 영향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데헤이바쓰를 세운 허웰 다가 귀네드의 통치권을 빼앗은 것이 942년이므로 12년 만에 귀네드는 자신의 통치권을 되찾은 것이다. 귀네드에게 당한 패배로 오와인은 북웨일스로 영토 확장을 도모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와인과 데헤이바쓰의 왕국 팽창 야욕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았으며 북웨일스의 패권을 장악하는 데는 실패했으나 남웨일스에서 데헤이바쓰의 영향력은 여전히 공고했다.

북웨일스 경로가 차단된 오와인은 남웨일스의 왕국들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웨일스 남동부의 글러위신그와 구엔트는 웨일스의 변방으로 전략적 요충지와는 거리가 멀어 그동안 많은 왕들에게 침략할 필요가 없는 땅으로 외면받아왔다. 오와인은 북웨일스 진출 경로가 완전히 막혀 다른 왕들과 달리 글러위신그와 구엔트 침략에 관심을 가졌다. 960년 오와인은 글러위신그 옆의 작은 왕국인 고웨르를 공격했다. 당시 고웨르를 비롯한 웨일스 남부의 소왕국들은 강력한 왕이 없는 대신 여러 가문 출신의 귀족들이 왕위를 번갈아 차지했기 때문에 이 국가들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불안정했다. 오와인은 이 국가들의 취약점을 간파하고 남부를 목표로 왕국 확장을 도모했다.

960년 오와인의 고웨르 공격은 데헤이바쓰가 웨일스 남동부로 진출해 남부의 패권자로 올라서는 시발점이 되었다. 970년대부터는 오와인의 아들 이니온 압 오와인이 데헤이바쓰 군의 수장이 되어 고웨르를 비롯한 웨일스 남동부에 공격을 이어갔다. 이니온은 아버지 오와인보다 탁월한 전사였으며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겠다는 욕심도 더 큰 인물이었다. 이니온은 970년과 977년 두 차례 고웨르를 침공했고 계속되는 공격에 조금씩 데헤이바쓰의 손아귀로 들어오던 고웨르는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이니온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980년대 들어 고웨르 동쪽의 브러하이니오그와 구엔트로 세력을 넓혀갔다. 오와인이 처음 확립한 웨일스 남동부로의 영토 확장 기조가 불과 20~30년 만에 큰 성과를 낳은 것이다. 탁월한 전사이자 야심가인 이니온의 통솔 아래 데헤이바쓰는 점점 더 빠르고 무자비하게 영토 확장을 진행했다. 하지만 데헤이바쓰의 세력 확장은 다른 소왕국들에게는 그들의 세력 약화를 뜻했고, 데헤이바쓰가 침략을 통한 전리품으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동안, 피해국들의 생활은 피폐해져갔다. 결국 984년 이니온은 그가 침략한 구엔트 왕국의 귀족들에게 살해당함으로써 끝을 모르던 침략 야욕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니온의 사망은 오와인에게 왕위계승이라는 큰 과제를 안겨주었다. 오와인은 970년대부터 점차 왕국 통치의 일선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960년대 오와인이 시작한 웨일스 남동부로의 왕국 팽창을 970년대에 이니온이 계승하게 된 것도 오와인이 전면에서 물러나 자식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면서 일어난 당연한 수순이었다.

데헤이바쓰의 군 통수권자이자 실질적 통치자인 이니온의 죽음은 자칫 데헤이바쓰 왕권의 공백을 초래할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왕권의 공백은 왕국의 세력 약화로 직결될 수 있었다. 오와인이 귀네드 지배력을 완전히 상실한 954년, 흘란루스트 패배 이후 30년 가까이 소강상태이던 귀네드와 데헤이바쓰 간의 충돌은 이니온의 빠르고 무자비한 왕국 팽창에 귀네드가 위기를 느끼면서 불씨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니온이 살해되기 불과 1년 전인 983년 이니온이 이끄는 데헤이바쓰 군대는 귀네드 군대와 한 차례 맞붙었다. 이때 이니온은 귀네드에게 승리를 거두었지만 당시 귀네드는 앵글로색슨과의 동맹으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 탓에 승리의 출혈이 상당했다. 결국 이 전투로 촉발된 군사력 약화가 화근이 되어 데헤이바쓰는 구엔트의 침공을 허용했고 이니온까지 살해되었다. 귀네드가 호시탐탐 웨일스 남부로의 왕국 확장을 꾀하던 상황에서 오와인이 왕위계승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지 않는다면 데헤이바쓰의 존속 자체가 위험한 상황이었다.

오와인은 이니온의 빈자리를 마레두드 압 오와인이라는 아들로 대신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마레두드는 형 이니온 이상으로 훌륭한 전사이자 포부가 큰 야심가로 이니온이 사망한 984년부터 데헤이바쓰의 실질적 통치자 자리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이니온의 사망과 마레두드의 왕위 등극은 데헤이바쓰의 영토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 986년 마레두드는 데헤이바쓰의 왕들 중 허웰 다 이후 처음으로 귀네드를 침공했고, 이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당시 귀네드의 왕이던 카드왈론 압 이아이아프를 죽이고 귀네드를 장악하였다

987년 오와인이 죽고 마레두드가 데헤이바쓰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즉위 직후 바이킹들의 끝없는 침략을 대처해야 했다.즉위 이후 바이킹의 수장 고드프리가 귀네드의 거점이자 웨일스 북쪽 섬인 앵글시를 공격해 수많은 사람을 포로로 잡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포로로 잡힌 사람 수가 무려 2천 명에 달했으며 이듬해인 988년 바이킹의 칼끝은 앵글시 남쪽 레디기온의 슬란바다른과 모르가누그의 슬란카르반으로 향해 해안가에 위치해 접근성이 높고 방어가 취약한 교회와 수도원 등을 약탈했다.

바이킹의 쉴 새 없는 전방위 공세에 견디다 못한 마레두드는 군사력으로는 그들을 완전히 격퇴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고 그들에게 돈이나 재물을 주는 대신, 웨일스 땅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으려고 했다. 바이킹에게 웨일스를 침략하지 않는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989년 마레두드는 인두세를 인상했고, 해당 인두세 수입으로 2년 전 붙잡혀간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해 자국민들을 돌려받는다.

마레두드의 협상으로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던 바이킹의 웨일스 침략은 잠시 소강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번에 왕국 내부의 반란이 문제가 되었다. 992년, 마레두드의 요절한 형 이니온의 아들인 에두인 아브 이니온이 잉글랜드 군대와 손잡고 마레두드의 영토를 공격했다. 이니온이 살아 있었다면 자신이 가장 유력한 차기 왕 후보였기 때문에 에두인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삼촌 마레두드에게 도전한 것이다. 에두인은 마레두드의 영토인 더베드, 고웨르, 케레디기온을 공격했지만 아직 젊고 경험이 일천한 탓에 귀네드를 정복하고 바이킹의 공격을 막으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마레두드의 상대가 되지 못하고 패했다. 오히려 이듬해인 993년 마레두드는 왕권에 대항하는 세력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바이킹과 연합해 에두인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정복지인 귀네드에서도 마레두드에 대항해 왕권을 되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움직임을 주도한 인물은 메이리그 아브 이드왈의 아들들이었다. 결국 994년 마레두드는 귀네드의 반란군과 대면한 전투에서 패해 자신의 거점인 웨일스 남부로 패주하였다. 이 패배로 마레두드는 귀네드를 포함한 웨일스 북부 상당 부분의 영향력을 잃었다.

999년 마레두드가 사망했는데 후계자인 아들 카드왈론은 이미 그보다 7년 일찍 죽었는데, 문제는 데헤이바쓰의 왕위는 레인이라는 인물에게 넘어갔고, 그는 마레두드의 아들로 받아들여졌으나, 왕국이 리웨린 압 세이실에 의해 정복된 후, 대부분의 웨일스 역사에서는 그를 아일랜드 출신의 위조자이자 왕위 찬탈자로 기록하였다. 이후 왕국은 마레두드의 가족에게 복원되었으며, 이는 마레두드의 형제 아이니온의 손자인 하웰 압 에드윈을 통해 이루어졌다.
2.2.5. 롱 구이 아 하브렌
롱 구이 아 하브렌(Rhwng Gwy a Hafren)은 중세 웨일스의 지역으로, 포위스(Powys)와 브리체니오그(Brycheiniog) 왕국 사이, 웨일스 마르크스(Welsh Marches) 지역에 위치했다. 이 지역은 Gwy (웨일스어로 Wye 강)와 Hafren (웨일스어로 Severn 강) 사이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포위스 카운티의 일부인 랻너셔(Radnorshire)와 거의 동일한 영토를 차지했다. 이 지역은 9세기나 10세기경에 처음으로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던 지도자들에 의해 지배되기 시작했다. 노르만 침략 이후, 이 지역은 웨일스 변경의 중앙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웨일스와 노르만 세력 간의 빈번한 충돌이 일어난 장소였다.

이 소왕국들의 왕들의 치적은 커녕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고 있다. 철기 시대와 로마 시대에 롱 구이 아 하브렌은 오르도비시(Olovices)족의 영토 일부였다. 중세 초기에는 이 지역이 분명히 포위스 왕국과 관련이 있었으나, 이후 몇 세기 동안 포위스의 군주들은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9세기 또는 10세기 이후, 이 지역은 이오르웨르스 히르플라우드(Iorwerth Hirflawdd)와 그의 후손인 엘리스탄 글로드리드(Elystan Glodrydd)라는 인물들의 후손들이 지배했다. 비록 이들 가문이 포위스 왕국과 혈연적인 연관이 있었지만, 포위스 왕조와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9세기 초, 또 다른 왕조가 등장하여 부엘트(Buellt)와 그웨르트리니온(Gwerthrynion)을 독립적인 소왕국으로 형성했다. 이 왕국의 지배자들은 포위스 왕가의 혈통을 따르지 않았고, 대신 초기 왕인 보티건의 아들로 전해지는 파센트(Pascent) 또는 파스겐(Pasgen)에서 기원하고 있다고 믿었다.
2.2.6. 기타 소왕국들
웨일스 내에서 귀네드와 궨트, 포위스, 데헤이바쓰, 롱 구이 아 하브렌 외에도 다른 소왕국들도 존재했는데, 해당 소왕국들은 다섯 소왕국에 의해 예속되었고, 이후 웨일스의 지뱅 행정 단위인 칸트레브의 기초가 된다.
중세 웨일스 전통에 따르면, 글리위싱, 혹은 글루이싱(Glywysing)은 이 지역의 초기 왕인 글루이스(Glywys)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이름은 현재 글로스터(Gloucester)로 알려진 로마 시대의 라틴어 Glevenses("글레붐의 사람들") 또는 Glevensis("글레붐 출신의 사람")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이름은 글레붐에서 온 침입자들, 이주자들, 또는 특정 통치자에게서 유래했음을 시사한다.

글리위싱은 타우(Tawe) 강과 어스크(Usk) 강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한 족보에서는 글루이스를 솔로르(Solor)의 장남이자, 모르(Mor)의 손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케레디지온(Ceredigion)의 케레딕(Ceredig)의 딸인 그왈(Gwawl)과 결혼했다고 전해지며, 전설에 따르면 둘 사이에는 22명의 자녀가 있었으며, 대부분이 남자였고, 교회 인사인 페드로그(Pedrog)와 에델릭(Edelig)도 포함되었다.

12세기 자료에 따르면, 480년 글루이스는 죽기 전 은둔자의 삶을 살기 위해 왕국을 그의 아들들의 이름을 딴 세 개의 칸트레브(cantref)로 나뉘었습니다, 각각 파울(Pawl)은 페니첸(Penychen), 그윈리우(Gwynllyw)는 그윈루그(Gwynllwg), 그리고 머치윈(Merchwyn)은 고르퓌니드(Gorfynydd)를 통치하게끔 했으며, 이중 그윈리우가 글리위싱의 왕위를 계승했다. 이들 지역들은 일반적으로 가문의 수장에 의해 함께 통치되었고, 때로는 소왕국의 봉토처럼 취급되기도 했다.

성 카독(1100년경)의 전기 작가 리프리스(Lifris)와 성 그윈리우(1120년경)의 전기에서 그윈리우에 대한 전설적인 세부 정보가 전해지지만, 세부 사항은 종종 다르다. 그는 웨일스의 왕 목록에서도 언급되며, 그의 업적이 웨일스 시인들에 의해 기려진 점을 보면 널리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인의 전기는 종종 과장되지만, 그윈리우라는 이름의 군주가 실제로 존재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 이야기의 핵심 요소에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부분이 일부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그윈리우가 통치할 당시 글리위싱의 북서쪽 경계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부분의 역사적 기록과 학자들은 타르가스(Talgarth) 근처의 블랙마운틴에서 시작해 로거 강(Loughor River)을 따라가는 경계, 즉 현재 카마던셔와 스완지의 경계를 지목하고 있다. 그윈리우는 몇몇 기록에 따르면 막센 웨딜릭(Macsen Wledig)의 후손이며, 어머니 그왈(Guaul) 역시 저명한 인물로 쿠네다(Cunedda)의 손녀였다.

그윈리우에 대한 이야기는 그를 적극적이고 냉혹한 전사로 묘사하며, 주변 왕국을 자주 공격하고 약탈했다고 전해진다. 성 카독의 전기에는 그윈리우를 "도둑을 좋아하고, 그들을 자주 부추겨 약탈하게 했다"고 묘사하지만, 성 그윈리우의 전기에서는 그가 공정하고 정의로운 통치자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공격 대상에는 북쪽 이웃 왕국 브리케니오그(Brycheiniog)도 포함되어 있다.

그윈리우는 같은 웨일스의 소왕국 중 하나인 이웃 왕국 브리케니오그의 공주 그왈라디스(Gwladys)와 혼인하고자 했으나, 그녀의 아버지 브라이칸(Brychan) 왕은 청혼 사절단을 거절했다. 깊이 사랑에 빠진 그윈리우와 그왈라디스는 브라이칸의 궁정에서 도망쳐 산을 넘어 탈출했으며, 그 과정에서 그윈룩의 300명의 추종자 중 200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장남인 카독은 497년 몬머스셔(Monmouthshire)에서 태어났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천사는 그의 출생을 알리고 은둔자 메우디(Meuthi)를 불러와 세례와 교육을 맡겼다. 그의 세례를 위해 성스러운 우물이 솟아났고, 이후 이 우물은 포도주와 우유가 흐르고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카독는 세례명으로 캐스메일(Cathmail, 카드파일)이라는 이름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들이 태어난 후 그윈리우는 새로 결성된 용감한 전사들과 함께 야생의 축하 약탈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아일랜드 수도사 타티우(Tathyw)의 소를 포함한 여러 가축을 훔쳤다. 타티우는 그윈리우를 두려워하지 않고 직접 찾아와 소를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그윈리우는 갑자기 영감을 받거나 신의 뜻에 따라 카독를 타티우에게 보내 그의 수도원에서 교육받도록 결정했다. 이곳에서 카독은 라틴어의 기본 지식을 습득하고 성직자의 삶을 배우게 되었다.

한 번은 글래모건의 카디프 지역에서 카독이 적대 부족의 무장한 돼지치기에게 쫓기던 중, 나이 든 하얀 멧돼지를 만나게 되었다. 멧돼지는 카독에게 격렬하게 달려들었으나 기적적으로 사라졌고, 카독은 이를 신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이 땅은 그의 삼촌 페니첸(Penychen) 소유의 목초지였고, 페니체은 그 땅을 조카에게 선물했다. 이곳은 이후 란카반의 대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지는 자리가 되었다.

카독의 여동생 마체스(Maches)는 전통에 따르면 도둑들이 그녀의 양을 훔치다 살해했다고 전해지며, 타티우는 이곳에 교회를 세웠다. 성인이 된 카독은 아버지의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는 것을 선호"했고, 이후 카독은 성직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윈리우가 임종을 맞이했을 때, 그의 아들 카독과 성 다브리그(Dyfrig)가 그의 곁을 지켰으며, 다브리그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집전했습니다. 그의 전통적인 사망일은 3월 29일로, 이 날이 그에게 헌정되었다. 그의 사망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며, 500년 또는 523년으로 추정이 되며, 카독이 왕위를 이었다.

얼마 후 카독은 고인의 유언에 따라 숙부인 파울의 땅을 상속받고, 글리위싱의 대부분을 자신의 손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왕으로서의 의무는 카독이 어린 시절 선택한 종교적인 길을 포기하게 하지는 않았다. 사제왕인 카독은 다시 웨일스 북부로 가서 그곳에서 기독교를 전파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란카르반에 길다스를 남기고, 돌아와서 친구의 부탁으로 그의 아버지 그윈리우의 무덤에 수도원을 세웠다.

웨일스에서 전염병이 돌자 카독은 브르타뉴로 떠났다. 그가 떠난 동안, 그는 웨일스 대주교로 다비드가 선출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카독과 다비드는 좋지 않은 관계였으며, 카독은 웨일스로 돌아가는 대신 로마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다.

고향으로 돌아온 카독은 귀네드 왕 마엘군과 충돌하게 되었고, 마엘군은 글리위싱을 세금으로 압박하려 했다. 전쟁이 일어날 뻔했지만 카독은 마엘군에게 공물을 바치면서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그리위싱을 침공한 카독의 삼촌 붉은 얼굴의 라인은 패배했지만, 카독과의 혈연 관계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564년, 카독은 마지막 삼촌 페트로크의 영지를 합병했고, 그 해 다시 아일랜드와 란카르반을 방문하여 수도원 권한을 제자 엔리에게 넘겼다. 그 후 그는 동쪽으로 떠나 칼흐윈에 있는 수도원의 수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열정 덕분에 수도사들은 도시 베네벤툼을 재건했으며, 카독은 그 보답으로 그 도시의 첫 번째 주교로 선출되었다.

580년 1월 24일, 베네벤툼에서 사크스가 공격을 감행해 카독은 교회에서 창에 찔려 죽었고, 그의 이모부인 뮤릭이 글리위싱의 왕이 되었다.그는 궨트와 글리위싱 왕국을 결혼을 통해 통합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뮤릭은 615년까지 통치하다가 사망하고, 아스뤼스가 궨트의 왕으로 즉위했는데, 글리위싱은 에르빅 압 뮤릭-에이니안이 통치했다. 이후 750년경 궨트의 왕인 이델이 사망하고, 아들들이 궨트를 분할해 통치했는데, 이중 뮤릭과 로드리, 리스가 공동으로 글리위싱을 통치했다. 《캄브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약 760년경 헤리퍼드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노우이가 포이스의 통치자인 엘리세드 아프 길로그와 동맹을 맺어 머시아 군대에 패배를 안겼다고 전해진다. 궨트나 글리위싱의 통치자가 이 머시아군의 격퇴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주교 티르찬 시대에는 코르스 아프 가브란, 에르빅 아프 엘핀, 브로흐바일, 그왈로니르, 블레이디드와 함께 뮤릭과 로드리, 의 이름이 언급했다. 765년에 웨일스인들은 머시아를 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으며, 769년에는 머시아인들이 웨일스를 공격했다. 778년에는 오파가 이끄는 머시아 군대가 남부 브리튼인의 땅을 황폐화시켰다. 784년 여름에도 침공을 반복했습니다. 이 침공은 치명적이었으며, 오파는 그의 방벽을 더 가까운 쪽으로 재건하여 와이강과 세번강 사이의 지역을 남겨두었고, 이곳은 엘리스탄 글로드리트 부족이 거주하며 웨일스의 다섯 왕족 부족 중 하나가 되었다.

뮤릭과 로드릭이 얼마나 오래 살고 통치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주교 터르찬 시기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존 로이드는 이 시기의 글리위싱이 "완전히 불명확한 상태에 싸여 있다"고 언급했다. 다만 리스의 경우 775년 혹은 780년까지는 살았다고 한다. 뮤릭에게는 테우두르라는 아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리스에게는 브로흐바일와 뮤릭이 있었다.

브로흐바일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은 《란다프 서》에 실린 헌장에서 주교 티르찬이 의장을 맡았을 때 언급되었다. 같은 이름의 브로흐바일이 주교 티르찬과 왕 뮤릭, 리스(이텔의 아들)와 함께 증인으로 등장하나, 왕으로서가 아닌 단순한 증인으로 언급되었다. 웬디 데이비스는 이 헌장을 748년경으로 추정했으나, 이는 잘못된 추정일 가능성이 있다.

다른 견해에 따르면 리스의 형제 뮤릭과 로드리, 그리고 그의 아들 브로흐바일이 차례로 영토를 상속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주교 티르찬의 마지막 재임 기간 동안, 브로흐바일은 《란다프 서》에 부계가 언급되지 않은 채 왕의 칭호로 헌장에서 증인 데우이, 트라하이른, 콘푸르와 함께 등장했다.

제수스 칼리지의 계보에 따르면 그는 글리위싱의 통치자이자 구리아드의 아버지로 언급된다. 브로흐바일과 구리아드의 이름은 계보에 잘못 포함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 설에 따르면 이 구리아드의 아들이 대 아르트바일였다고도 전해진다.

뮤릭의 경우 그의 시대에는 머시아와의 전쟁이 벌어졌다. 778년, 머시아군은 오파의 지휘 아래 남부 브리튼 땅을 황폐화시켰고, 784년 여름에는 다시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이 시기에 오파의 성벽 건설이 시작되기도 했다.

그는 메이겐 킬 킨코이드라는 곳에 성을 세웠고, 엘러흐 강 또는 롬니 강 근처에 있는 카를리온 성을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그는 매우 잔혹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그는 한 귀족의 딸에게 접근했다는 이유로 귀족들에 의해 높은 절벽에서 밀쳐져 죽임을 당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후 그의 후계자는 아르트바일로, 아르트바일은 아마도 그의 형제였을 가능성이 있다.

아르트바일의 통치하는 동안, 글리위싱 왕국은 여러 명의 가문 구성원들에 의해 나뉘어졌고, 각 구성원들은 왕국의 작은 부분을 지배하는 사실상의 군주들이었다. 아르트바일은 글리위싱에서 인정받은 우두머리였으나, 다른 가족 구성원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795년, 덴마크에서 온 바이킹 이교도들이 처음으로 브리튼에 침입하여 대규모 파괴를 일으켰고, 후에 그들은 글라모르간을 침략하며 많은 이들을 죽였다. 하지만 결국 브리튼 군은 이들을 격퇴하고 바다로 몰아냈다.

아르트바일은 815년에서 825년 사이에, 현대 카디프 근처 로아트 교회에서 앵글로색슨들과의 전투 중 사망했으며, 그의 군대는 결국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는 그 교회에 묻혔습니다. 이후 그의 아들 리스가 뒤를 이었다. 831년에 머시아군이 센게니드 수도원을 불태운 후 트레오다 성을 공격했으며, 이후 세번을 넘어가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 후 글렌모건과 멀팅 왕국 사이에서 평화가 이루어졌다.

848년에 리스의 친척인 이텔이 브리헤이니오크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고, 이는 리스의 아들 히웰에 의해 브리헤이니오크와 적대 관계를 일으켰다. 그 이듬해 리스의 아들이나 형제가 애설레드가 이끄는 머시아군에 의해 살해되었고, 글리위싱과 궨트에서 두 형제가 통치하게 되었다.

리스는 856년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하웰이 글리위싱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가 왕위에 오른 당시 애설레드의 지휘 하에 머시아군은 웨일스 남부를 압박하고 있었고, 하웰은 사촌인 페른바일과 브로흐바일과 함께 웨식스 왕국의 앨프레드 대왕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캄브리아 연대기"에 따르면, 848년에 이텔 아르투이르가 브리헤이니오크와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이는 히웰과 브리헤이니오크 사이의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850년대 동안, 하웰은 에리사드 이우 지역(현재의 포위사 지역)과 에비아스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엘리세드와 충돌했다. 이 지역들은 원래 글리비스잉의 정당한 영토로 주장되었으나, 브리헤이니오크와 캘델 왕이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있어, 하웰은 결국 자신의 왕국의 경계를 에리사드 이우로 설정하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하웰의 지시로 세운 세리그 하웰 성이 존재했습니다.

860년에 발생한 위텐 전투에서는 많은 웨일스인과 색스인이 사망했으며, 이후 몇 년 동안 블랙 헤이드(바이킹)들이 고웨어 반도에 침략했으나 결국 바다로 퇴각했다. 864년에는 누군가가 글리위싱을 약탈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웰은 성 이일티다 교회에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성령의 이름으로, 하웰이 그의 아버지 리스의 영혼을 위해 이 십자가를 세웠다'는 문구와 함께 십자가를 세웠다. 그의 후계자는 아들 오와인이었다. 그의 사망에 대한 기록은 다소 차이가 있다. "그웬티안 연대기"에 따르면 하웰은 894년에 나이로 로마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캄브리아 연대기"는 그가 885년에 사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웰의 아들 아르트파엘과 오와인은 글라모르간의 영토 재분배를 맡았다.

모르간 왕 덕분에 알려진 그리스핑과 궨트 왕국의 통합은 아마도 오와인의 통치 시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찰스-에드워드스는 그가 통치한 시기에 두 왕국이 합쳐졌다고 주장합니다. 오와인의 통치 기간 동안, 바이킹들이 브리지노르트 근처의 콰트포드에서 겨울을 지냈고, 896년 봄에는 브리헤니오그, 궨트, 그리고 그리스핑의 윈룩 왕국을 약탈했다.

오와인 또는 그의 형제 아르트와일은 궨트 왕국을 선조들의 후계자로서, 혹은 정복을 통해 차지했을 것으로 보이며, 아르트와일이 916년에 사망하면서 두 왕국은 통합되었을 것입니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아르트와일은 927년에 사망했다고도 합니다.

오와인과 그의 아버지 히웰은 또한 웨식스 왕국의 왕 에설스탠과 연관이 있다. 927년경, 애설스탠이 노섬브리아를 정복한 후, 오와인과 하웰은 애설스탠과 만나 에몬트 브리지(현재의 펜리트)에서 평화를 맺었다. 이 평화는 약속과 맹세로 보장되었으며, 이후 이 평화 유지의 대가로 금전적인 세금과 다른 형태의 의무가 부과되었고, 이는 후에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다. 930년 오와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과 조카는 다시 글리위싱 왕국을 나누어 가졌다.

카두간과 모르간은 글리위싱을 다스리게 되었고, 그리피드가 궨트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하우어 반도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 지역은 글리위싱의 가장 서쪽 끝으로, 데헤이바쓰와 접경을 이루고 있었다.

935년, 그리피드가 케레디기온 사람들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영토는 그의 형인 카두간이 그리피드의 영토까지 통치하지만 951년 캄브리아 연대기에서 색슨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하며, 이후 모르간이 죽은 형제들의 영토를 완전히 장악한다. 955년, 모르간의 삼촌인 노위 압 구리아드는 모르간에게서 궨트를 되찾았고, 970년에는 아르트바일 압 노위가 궨트의 왕이 되었습니다.

모르간의 통치 시기 동안, 오와인, 데헤이바쓰의 왕은 세 차례 (960년, 970년, 977년) 모르간누그를 침략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967년, 에이니온, 오웨인 데헤이바쓰의 아들은 모르간의 영토인 하우어 반도를 침략했으며, 이를 계기로 모르간의 아들 오와인과, 잉글랜드 왕 에드거가 이에 대응하여 에이니온의 아버지 오웨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모르간은 974년에 사망했고, 그의 장남 이드왈론이 글리위싱을 계승했다. 다만, 다른 기록에 따르면, 장남은 오웨인으로 되어 있다. "그웬티안 연대기"에 의하면, 모르간은 1001년에 사망했고, 고령과 노쇠로 인해 많은 세월 전 이미 왕권을 아들들과 손자들에게 넘겼으며, 그는 "랜드웨의 테일로 제단 아래"에 묻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오와인, 이드왈론을 비롯한 그의 형제들의 통치 기간 동안, 그들은 인근의 데헤이바쓰와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977년, 데헤이바르트 군의 또 다른 침공이 있었지만, 이 역시 이전의 두 번(960년대와 970년대)의 침공처럼 실패로 끝났다. 985년, 하웰 왕은 엘프헤르 머시의 지원을 받아 모르군누그와 브리헤이니오그를 침략했으나, 그들의 연합군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웨인이 983년에 사망했는지, 아니면 1001년까지 살아남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984년 또는 982년에 펜코드 콜린 전투에서 에이니온이 다시 침입하다가, 그 지역의 글리비스인과 궨트의 군사들에게 저지되었다. 이드왈론 또한 990년에 사망했는지, 아니면 아버지처럼 1005년에 왕위를 포기하고 사망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는다.

오와인과 이드왈론의 사후, 그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중 한 명이 이텔 블랙이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텔은 오웨인의 조카이자 이드왈론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이텔은 용맹한 군주였으며, 이스트라드와인에 궁전을 두고, 여름 별장인 '톤 이텔 블랙'도 소유했다. 그의 별명은 머리카락과 수염의 색깔에서 유래했다.
중세 초기(450년경-1045년) 오늘날의 웨일스 남부에 위치했던 소왕국으로 동쪽의 잉글랜드와 서쪽의 데헤이바쓰의 완충국으로 기능했고, 남쪽으로는 모르가누그과 국경을 접했다. 초기엔 가르스마드룬(Garthmadrun)으로 불렸으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될 당시 테이트팔트 압 테이트린이 통치한 것으로 보이며, 5세기 중반에는 브리튼에 대한 주요 위협이 아일랜드인과 픽트족의 침입에서 섬에 용병으로 정착한 색슨족의 반란으로 바뀌었다. 테이트팔트의 나이가 들면서 그의 아들 테우드리가 색슨족에 맞서 기병대를 이끌고 용의 머리가 그려진 깃발을 휘둘렀다고 전해진다. 그는 아마도 페이비오 압 에르바의 딸과 결혼하여 테우드리그의 아버지가 된 인물로 보인다. 에르바에게는 왕위를 계승한 첫째 아들 닌니오가 있었으며, 이 닌니오에게는 아버지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535년경 후손 없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 리바르흐라는 아들이 있었다. 에르바는 막시무스 막시무스의 아들인 쿠스테닌으로 여겨지는 콘스탄틴의 딸과 결혼했다.

이후 브러헤이니옥의 통치자는 궨트의 왕인 테우드리그(Tewdrig)였고, 이후 테우드리그가 아들인 뮤릭에게 왕위를 양위했을 때 브러헤이니옥의 통치자는 마르헬 압 투드릭이 이었다. 이후 브레녹의 브리한이 뒤를 이었다. 족보서들에 따르면 브러한은 아일랜드섬에서 코로낙의 아들 안라크와 그 아내 마르헬(Marchel)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르헬은 가르스마드룬(Garthmadrun)의 후계자였고 이들 부부가 브러헤이니옥 왕위를 계승했다. 부왕이 죽자 브러한은 가르스마드룬으로 돌아가 왕위에 오르고 나라 이름을 브러헤이니옥으로 바꾸었다. 브러한이라는 이름은 아일랜드어 이름 브로칸(Broccán)의 웨일스어형 같으며, 조부라는 코로낙 역시 아일랜드어 이름 코르막(Cormac)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1100년경에 쓰여진 카도쿠스 성인전에서는 브러한의 딸 굴라더스 왕녀가 구인룩 왕 구인러우에게 납치당해서 버르한이 아르수르, 카이, 베두이르와 싸웠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에 따르면 굴라더스가 구인러우와의 사이에서 카도쿠스를 낳았으니 브러한은 카도쿠스의 외조부가 된다. 브러한이 사망하면서 브러헤이니옥 또한 다른 웨일스의 소국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분할 상속으로 나눠졌다. 붉은 머리 라인이 상위왕이 되었다.

기록에서는 그를 브리한의 아들로, 아버지 사후 왕위를 이어받은 인물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 칼리지 도서관에 보관된 족보집에서는 그를 브리한의 아들이자 리게네우의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의 존재를 마나우에서 언급한 것은 브리한의 아들 커난과 관련된 이야기를 잘못 해석한 결과로 보인다. "성 카독의 생애"에 따르면, 라인은 카독이 현자가 지배하던 시기에 글리위싱을 침공했지만 그 지역 사람들이 그를 물리쳐 포로로 잡았다. 하지만 라인은 카독의 외숙부였기 때문에 라인을 죽이지는 않았다. 카독은 와서 라인을 풀어주었고, 그와의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그 증인은 "생애"의 70절에 나와 있다. 루이스 압 에드워드는 브리한의 아들 라인에게 속한 7개의 칸트레브를 언급했는데, 여기에는 브레콘의 3개 칸트레브와 와이 강과 세번 강 사이에 있는 3개 칸트레브, 비엘트의 1개 칸트레브가 포함된다.

라인은 530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면 그의 아들인 리게뉴는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브리케이니옥의 왕이 되었다. 리게뉴의 통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540년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리바르크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560년경 이드왈론이 브러헤이니옥의 왕이 된다. 이드왈론의 통치 기간 동안 브리케이니옥은 포이스의 커난의 침략을 받았다. 적군은 브리케이니옥을 침범하여 네드 강에 주둔하였고, 그곳에서 글리위싱을 위협하였다. 랑카반의 수도사들이 개입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적군이 물러간 후, 이드왈론은 왕국에 대한 권력을 되찾았다.

이드왈론은 620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리발론이 뒤를 이었다. 리발론에게는 아들이 없었으며, 그의 딸 케인드리치는 이스트라드 티비의 통치자 엘리세드 압 이스고르드와 결혼하였다. 엘리세드는 장인의 사후 브리케이니옥의 왕위를 계승하였지만 그역시 얼마 안가 죽었고, 이후 케이드리치가 브러헤이니옥을 통치하다가 남편의 5촌인 디페드의 왕인 골리디엔과 재혼해 골리디엔은 디페드, 이스트라드 티비, 브리케이니옥의 왕이 되었다. 670년, 굴리디엔이 사망하였고 그의 아들 카텐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몇몇 디페드 왕가의 계보에서는 카두간에게 '트리델릭' 또는 '트레델릭'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이는 그가 '땅을 테이로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는 카두간 트레데실과 동일인물임을 시사한다. 이는 아마도 테이로 교회를 뜻할 가능성이 크다. 마찬가지로 성인 에우도구이의 전기에서는 카두간이라는 왕이 티비의 서쪽 지역을 다스리며 이 지역의 에우도구이 수도원들, 특히 페날룬, 란데이로 파브르, 란디브루이르를 침략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중 페날룬은 디페드에 위치하고 있으며, 다른 두 곳은 이스트라드 티비에 있다. 710년 카두간이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라인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720년, 케레디기온의 통치자 세이실 압 클리독이 라이네로부터 이스트라드 티비를 점령하고 세이실리그 왕국을 세웠다. 이로 인해 디벳과 브리케이니옥이 서로 단절되었다. 같은 해, 라이네는 자신의 동생 아우스타를 브리케이니옥의 통치자로 파견했고, 730년 라인이 사망하고, 디페드는 라인의 아들인 테우도스가 계승했다. 다른 아들(혹은 동일인일 수도 있는) 테우도르는 브리케이니옥에서 공동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란다브의 책》에서 엘기스틸(엘위슬)의 아버지로 언급되며, 또한 브리케이니옥의 왕으로 두 아들, 엘비드와 리발론과 함께 등장했다. 이들은 두 개의 문서에서 아우스트가 라나고르스트와 라누르웨트에 있는 재산을 교회에 전달하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증인으로는 에우도구이 주교 등이 있다. 웬디 데이비스는 이 사건을 685년으로 추정하며, 아우스트가 동일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 에우도구이는 약 615년에 사망했다. 피터 바트럼은 아우스트가 엘위슬의 아버지와 엘비드, 리발론의 아버지가 다른 인물이라고 봤다. 휴 토마스는 첫 번째 아우스트가 카두간의 아들일 것으로 추정하며, 두 번째는 라이네 드렘리드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736년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는 아들 엘위슬이 되었다.

2.3. 스코틀랜드

스코틀랜드에서도 각각 부족 국가가 세워졌고, 이중 스코트랜드 지역에서 9세기 중엽까지 고산지역을 픽트족들이 차지하고 있으며, 남부의 평지는 노섬브리아 왕국이 차지 하고 있었다. 서부에는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게일인 이주자들의 연맹 왕국 달 리아타(Dal riata)가 존재했는데, 스코틀랜드를 건국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왕 코이나흐 언 퍼르버서흐 막 알핀(키나드 1세)이 이곳의 왕이었다. 과거에는 픽트인들이 키나드 1세의 아버지 알핀 2세를 죽였고 키나드는 이에 대한 복수로 픽트랜드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정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키나드가 달 리아타와 픽트랜드 두 곳의 왕위를 얻은 것은 단순히 부모에 의한 상속일 뿐이었을 거라고 여겨진다.[84] 달 리아타는 키나드의 치세 이후로 픽트랜드에 흡수되었고, 이후의 군주들은 한동안 모두 픽트인의 왕을 칭했다. 현재는 게일인의 달 리아타와 픽트인의 픽틀랜드가 게일인 위주로 점차 통합되었다고 보며, 키나드가 달 리아타와 픽틀랜드 두 곳의 왕이 된 것이 그 시작으로 여겨진다.

키나드 1세의 치세는 중세 초의 여러 왕들과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얼룩지었다. 삭소니아에 6번 침공했다고 하는데, 이 삭소니아가 독일 북부의 작센 지방을 일컫는지 잉글랜드의 색슨족을 일컫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현재 스코틀랜드 최남단에 있는 멜로스를 침공하고 던바를 불태웠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때 잉글랜드 북부까지 침공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반면 바이킹들의 공세에 시달렸고, 심지어 내륙까지 바이킹이 진출했다는 기록이 있는 등 이당시 스코틀랜드 또한 바이킹의 약탈에 시달렸다.

858년 키나드 1세가 죽고 동생인 돔날 1세가 즉위했다. 돔날 1세는 스콘-퍼스의 근교에 있는 포테비엇에서 게일인들이 처음으로 법을 제정했다고 한다. 이 법의 이름은 '아드 파인드의 법'으로, 돔날 1세의 증조부 아드 막 오하드의 이름을 땄다. 아드 파인드는 아드 막 오하드의 별명으로, 게일어로 하얀 아드라는 뜻이다. 이 법은 현재 실전됐지만, 기리크나 카우산틴 2세 치세의 법률을 참고해 주로 교회의 특권에 관한 법으로 추정하고 있다.

862년 돔날 1세가 죽자 키나드 1세의 아들인 카우산틴 2세가 왕으로 즉위했다.불행히도 그의 치세는 즉위 3년에 바이킹들에 의한 이교도 대군세에 휘말려야 했다. 866년, 고드프레드의 아들 아믈리브와 외슬이 하이랜드 포트리우에 상륙해 많은 조공과 포로를 획득하고 돌아갔다. 하지만 카우산틴에겐 천만다행히도, 이듬해에 악재가 터져 아믈리브는 아일랜드로 물러갔다. 우선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이자 키나드 1세의 사위이기도 한 아드 핀들리어흐가 군사를 내어 바이킹 점령지를 습격해 여러 마을과 항구를 파괴하는 등 처남을 도왔는데, 이는 외슬이 자신의 아내를 탐했던 이유도 있었다.덕분에 아믈리브는 870년까지 브리튼으로 넘어오지 못하고 아일랜드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870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아일랜드를 진정시킨 아믈리브는 다시 바다를 건너 이번엔 브리튼인들의 국가인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을 공격해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군사 요충지 덤바튼을 4개월 동안 포위한 끝에 점령했다. 여기서 카우산틴은 어부지리를 시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기록에 의하면 이 패배로 권위를 상실한 어스트라드클라이드 국왕 아르트갈은 키나드의 아들 카우산틴의 사주로 살해당했다. 아르트갈에 사후에 왕위에 오른 이는 카우산틴의 매부 룬이었다. 이를 통해 픽트 왕국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까지 영향권에 넣는데 성공한다.

이후 871년 혹은 872년에 아믈리브가 다시 한 번 픽트 왕국을 침공하자 카우산틴은 맞서싸워 874년에 아믈리브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거기다 아믈리브의 원정을 돕곤 하던 아믈리브의 형제 이마르도 873년에 죽으면서 일단 대규모의 바이킹 침공은 진정되는 듯 했다.

하지만 875년 노섬브리아동앵글리아, 머시아의 동부를 점거하던 바이킹들이 군대는 2개로 나눴는데 이중 할프단이 이끄는 군대는 북상해 북쪽의 픽트족과 스코틀랜드를 공격해 왔다. 할프단의 군대의 진격로에 픽트 왕국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이는 카우산틴 치세 최대의 위기였는데, 수도 스콘 근교의 달러에서 픽트 왕국군은 할프단의 군대에게 거대한 학살로 기록될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당하기까지 한다. 이는 픽트 왕국을 흔들리게 만들었고, 결국 877년 카우산틴 1세는 이 군대와 맞서 싸우던 중 잡혀 처형당했다.

이후 왕위는 동생인 아드 막 키나다가 이었으나 돔날 1세의 아들을 자칭한 기리크 막 둥갈이 일으킨 반란에 1년만에 내전에서 패해 죽었다.기리크 막 둥날에 대해 쇼러스 보허넌과 같은 역사가들은 그를 대왕이라고 부르며 그가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절반을 정복했다고 기록했는데, 신빙성은 떨어진다. 이유는 기리크에 대한 기록이 잉글랜드 쪽에는 남아있지 않으며, 그의 치세기가 동시대 잉글랜드에선 이교도 대군세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잉글랜드의 절반 이상을 정복한 것은 스코트인이 아니라 데인족 바이킹이었다.

기리크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의 국왕인 오하드 막 룬과 공동으로 통치했는데, 현대 역사가들은 둘의 관계를 친족 관계가 아닌가 의심하고 있다. 885년 성 키리쿠스의 축일에 개기일식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식을 불길하게 여기던 관습 상 왕권의 약화에 일조했으리라 추측되며 889년 카우산틴 1세의 아들인 돔날 2세에게 왕위를 빼았긴다.

돔날 2세의 치세는 그의 아버지 카우산틴 1세처럼 바이킹들과의 전쟁으로 점철되는데, 이는 유명한 하랄 1세 하르파그리, 즉 노르웨이의 왕 미발왕 하랄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하랄 1세가 노르웨이를 정복한 직후 그의 과세 정책 등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대규모로 노르웨이를 탈출해 아이슬란드, 페로 제도, 오크니 제도, 옛 달 리아타 땅 등으로 넘어와 정착했다. 이에 하랄 1세는 이들을 잡아족치기 위해 이 지역들로 원정을 나간다. 즉, 픽트 왕국은 가뜩이나 기존에 넘어와있던 이교도 대군세의 후예인 데인인들도 버거운데 아닌 밤중에 홍두깨나 다름없는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픽트 왕국은 서쪽으로는 아일랜드의 더블린 왕국, 남쪽은 잉글랜드의 데인로 왕국, 북쪽으로는 반하랄 노르웨이인, 동쪽으로는 하랄 1세에게 시달리는 상황에 처해 버렸다. 픽트 왕국은 약탈당했으나, 돔날 2세는 분투해 이니시브솔리안에서 바이킹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900년에 살해당하는데, 이에 대해선 여러 기록이 엇갈린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그가 900년에 오피둠 포더, 현대의 둠노타르 성에서 데인인들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버찬의 예언'은 그가 게일인[85]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은 자는 아드 막 키나다의 아들인 카우산틴 2세였다. 그의 치세에 최초로 나타나는 기록은 904년 픽트 왕국군이 아일랜드 더블린 왕국에서 출병한 더블린 국왕 이마르와 그가 이끄는 데인인 군대를 스트래턴에서 맞닥뜨려 크게 이기고 국왕 이마르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906년엔, 수도 스콘에 있는 '믿음의 언덕'이라는 곳에서 주교 첼라흐와 만나 신앙, 법, 규율, 그리고 라틴어로 pariter cum Scottis라고 하는 것 네 가지를 수호할 것을 결의했다. 이 partier cum Scottis가 무엇인지는 여러 추측이 있으나 공통적으로 게일인의 법 또는 게일인의 관습을 의미하며 스코틀랜드의 기독교화와 게일화를 위해 왕과 교회가 손잡은 것이다.

이 만남의 또 다른 의미는 시기상 첼라흐 주교 및 대다수의 스코틀랜드 성직자는 기리크의 치세 당시에 임명되었거나 당시 정권과 관련이 있는 이들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과 카우산틴 2세 간의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카우산틴 2세는 동시기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왕국의 종교 집단과 긴밀한 관계를 가져 내정에 도움을 받게 됐다.

그는 바이킹들과도 전쟁을 치렀는데 그가 즉위한 시기인 10세기 초반은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는 옛 바이킹들의 후예 데인인들이 마지막 전성기를 불태우고 쇠락기로 접어들 때였다.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와 그 뒤를 이은 시트릭 케흐[86]는 노섬브리아와 맨 섬, 아일랜드의 바이킹들을 다시 통합해 주변의 기독교 국가들을 위협했는데,911년 즈음에 머시아 영주 애설플래드가 노섬브리아 지역의 데인인들을 몰아내기 위한 북벌을 감행할 때 아일랜드인들과 북쪽 군주들과 동맹을 맺었다고 하는데, 데인인이나 아일랜드인이 아닌 북쪽 군주가 카우산틴 2세 밖에 없으므로 동맹에 가담해 바이킹에 대항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918년, 노섬브리아의 잉글랜드인 왕 엘드레드 1세가 왕국 남쪽의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가 이끄는 군대에게 쫒겨 스코틀랜드로 도망쳐오자 카우산틴 2세는 그를 도와 남하해 현대의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국경지대 동쪽인 코브릿지에서 라그나르와 크게 싸웠다.

이전투에서 라그나르는 군대를 네 부대로 분산해 배치했는데, 스코틀랜드군은 세 부대를 격파했으나 라그나르가 친히 이끄는 네 번째 부대에게 매복당해 승리를 놓쳤다고 한다. 왕이나 모마어[87]들의 피해는 전혀 없었다. 전투의 흐름은 완전히 스코틀랜드가 다 이긴 전투로 카우산틴 2세의 근소한 승리로 기록하나, 결국 엘드레드의 복위를 이루지 못한 카우산틴 2세가 패배한 전투라 볼 수 있고 실제로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는 이 전투를 통해 노섬브리아 지역의 데인인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918년에 반 데인인 동맹을 주창한 머시아의 영주 애설플래드가 죽고 그녀의 남동생 웨식스 왕 대 에드워드가 조카딸로 부터 머시아를 빼앗았는데, 그는 918-919년 즈음에 누나가 진행하던 데인인의 주요 다섯 도시, 더비, 레스터, 링컨, 노팅엄, 스탬포드의 정복을 위한 작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920년에 라그나르 및 주변 국가들의 국왕들을 만나 조약을 맺고 이 왕들에게 명목상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노섬브리아-더블린의 왕 라그나르 우어 이마르,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국왕 오웨인 압 디프날,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카우산틴 2세가 이 조약에 참여했다.

이후 카우산틴은 대 에드워드의 아들인 애셀스탠과는 불편한 관계가 되었는데, 이 둘의 관계로 인해 근세까지 악연으로 점철되었다.

대 에드워드의 사후 웨식스-머시아의 왕위를 물려받은 애설스탠은 더 큰 야망을 품는데, 그는 시트릭 케흐와 그의 누이를 혼인시켜 노섬브리아의 데인인들과 기독교화를 조건으로 동맹을 맺어주는 척 했다가, 시트릭 케흐가 죽자마자 927년에 대대적으로 노섬브리아를 공격해 노섬브리아에서 데인인들을 모두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모든 브리타니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데, 이때 카우산틴 2세는 망명 온 시트릭 케흐의 아들 올라프를 받아들이고, 잉글랜드에 대항해 반 잉글랜드 동맹을 체결해 군사적 대항에 나섰고 어스트라드클라이드 왕국과 웨일스의 소 왕국들이 가담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패배였다.

927년 7월 12일 애설스탠은 주변 국가 국왕들을 컴브리아의 에몬트 다리로 소집하여 조약을 맺는데, 조약의 내용은 '우상숭배를 절대 금함'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우상숭배란, 북유럽 신화를 따르는 데인인들과의 동맹을 의미한다. 여기 참여한 왕들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국왕 오웨인 압 디프날, 웨일스 데허이바르스의 국왕 하이웰 닷, 그리고 카우산틴 2세였다. 또한 이때 애설스탠이 카우산틴 2세의 아들 일둘브의 대부를 서주었다고 한다.

웨일스의 하이웰 닷 등이 아예 애설스탠의 궁정에 입조해 있는데 비해 카우산틴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명목상의 지배권은 인정만 하는 스텐스를 취했고, 결국 934년, 애설스탠은 다시 스코틀랜드 정벌에 나서게 된다. 웨일스의 네 개 소 왕국들의 왕을 모조리 대동했으며, 934년 5월 28일에 윈체스터로 군을 집결시켜 6월 7일에 북진을 시작했고, 잉글랜드의 육군은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오웨인이 이끄는 군대를 제압한 후 하이랜드까지 북진해 포트리우까지 다다랐고, 해군은 브리튼 섬 최북단의 케이트니스까지 공략하면서 카우산틴 2세는 또 패배해 조약을 채결했는데 조약은 스코틀랜드에게 불리하게 체결되었고, 카우산틴 2세는 그의 아들을 애설스탠에게 인질로 보내고 잉글랜드 궁정에 입조하고 애설스탠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조약들에 참가해야 했다.

935년부터 다시 잉글랜드 궁정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므로, 934년 한 해 동안 잉글랜드에 머무른 뒤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번번히 무릎을 꿇었지만 카우산틴 2세는 포기하지 않고 와신상담을 꿈꿨다. 당시 아일랜드의 더블린 왕국은 노섬브리아의 데인인 왕이었던 시트릭 케흐가 노섬브리아로 갈 때 왕위를 넘겨줬던 그의 동생 고드프레드의 아들로 시트릭 케흐의 아들 올라프와는 사촌지간인 올라프 구드프리트손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카우산틴 2세는 올라프와 동맹을 맺었다.

어스트리드클라이드 역시 이 동맹에 다시 가담했고, 이 새로운 반 잉글랜드 동맹은 937년, 잉글랜드에 대대적 공격을 가했다. 아예 각을 잡은건지, 주로 여름에 전쟁을 진행하던 관습까지 깨고 가을에 잉글랜드를 기습한 것이다. 허를 찔린 애설스탠은 빠른 초기대응에 실패했고, 스코틀랜드-더블린 연합군은 신나게 잉글랜드 북서부를 털었다. 애설스탠은 군대 소집에 한 달 가량을 소모한 뒤 10월 경에 브루난버에서 대전투를 벌였다.

전투의 결과는 잉글랜드의 피로스의 승리로, 이 전투에서 카우산틴 2세는 아들 첼라흐를 잃었고, 애설스탠은 두 조카와 사촌들을 잃었다. 양군 모두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그나마 잉글랜드도 워낙 큰 피해를 입어 또 애설스탠에게 가서 조아리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평생 동안 카우산틴 2세의 이를 바득바득 갈리게 한 애설스탠은 결국 939년, 세상을 떠난다.

이후 943년 내정, 종교 양쪽의 개혁으로 강한 권위를 얻었지만 패배가 반복되고 본인도 늙으면서, 카우산틴 2세는 더 이상 예전같은 권위를 누리기 힘들다고 판단해 퇴위하기로 했다. 그의 아들인 일둘브가 아직 어렸기에 조카 말 콜룸에게 양위하고 파이프에 있는 성 앤드류 컬디 수도원에 들어갔다. 하지만 아래 후술한 대로 죽기 전까지 조카인 말 콜룸 1세의 정책에 대해 간섭하는 등 권력을 내려 놓지 않았다.

말 콜룸의 통치는 스코틀랜드 남쪽에 있는 포스 강까지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말 콜룸 1세의 포스 강 지배는 945년에 945년에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먼드 1세는 노섬브리아 정벌에 나섰는데 애셀스탠 사후 노섬브리아가 다시 독립했기 때문으로 943년에 올라프 구드프리트손이 죽은 후 스코틀랜드로 망명했었던 그의 사촌 올라프 시그트리드손이 노섬브리아를 물려받은 상태였다. 이 945년의 정벌에서 올라프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의 디프날 압 오웨인과 동맹을 맺고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고, 에드먼드 1세는 북진해서 어스트라드클라이드까지 털어버리고 디프날의 두 아들을 잡아다 눈을 뽑았다. 그러면서 잉글랜드 왕 에드먼드 1세는 어스트라드클라이드에 대한 스코틀랜드 왕국의 통치권을 인정하고 잉글랜드는 컴브리아까지만 점령하며, 서로 간의 군사 지원을 약속하는 조약을 통해 확정되었다.

948년에 노르웨이에서 에릭 블러드엑스가 노섬브리아를 침략해 데인로를 재건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노려 말 콜룸 1세는 950년에 카우산틴 2세의 주장에 동의해 노섬브리아로 출병해 알비도소룸의 약탈, 또는 나인디쉬의 약탈로 불리는 대규모 약탈을 벌여 많은 사람과 소를 노획했다. 이후 시기 미상이지만 하이랜드의 중심지인 모레이의 모마어 첼라흐를 공격해서 잡아 죽였다. 말 콜룸은 954년 전쟁터에서 죽었고, 그 뒤를 일돌브가 계승했다.

일둘브의 치세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으며 연대기마다 제각기 다르다. '알바 왕들의 연대기'는 일둘브가 대규모 남정을 통해 현재의 에든버러를 확보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역사가들은 이 정벌은 일둘브 대에만 있었던 대규모 원정이 아닌 이전 왕들이 꾸준히 전개했던 남진 정책 중 일부로 보고 있으며, 에든버러 역시 이르면 카우산틴 2세 치세, 늦으면 일둘브의 치세에 이미 확보한 것으로 보고 있다.

962년에 일둘브가 사망했는데 역시 연대기마다 차이가 있어 '버찬의 예언'은 962년에 아버지가 퇴위한 뒤 들어갔던 성 앤드류 컬디 수도원에서 평온하게 죽었다고 기록한 반면 '알바 왕들의 연대기'에선 지도자가 알려지지 않은 바이킹 약탈대와 하이랜드의 모레이 근교 컬렌에서 맞붙은바우드 전투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나오며 실재로 그의 사후 말 콜룸 1세의 아들인 두브 막 밀 콜룸과 일둘브의 아들인 킬렌 막 일둘브 간의 왕위를 두고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른 자는 두브였으나 그의 치세는 일둘브의 아들인 킬렌의 반란과 싸우며 장작 5년 동안을 왕위를 지키는데 허비해야 했다. 결국 967년 폐위당해 하이랜드의 중심지 중 한 곳이었던 포레스에서 살해되었다. 킬렌의 치세는 두브의 치세 또한 짧았으며 그 끝 또한 연대기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971년 그가 살해된 것에 대해 고통점을 갖고 있다.

그 뒤를 이은 자는 말 콜룸 1세의 아들이자 두브의 동생인 키나드 2세로 그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해주며 충성심을 견고하게 했으며, 이를 위해서 잉글랜드를 지속적 침략하기까지 했다. 또한 스트래스클라이드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잉글랜드를 침입할 교두보를 마련했다. 케네스 2세의 야망은 컸다.

973년 체스터에서 열린 영국 왕들의 정상회의에서 그는 당시 잉글랜드의 왕인 에드거를 상대로 외교력을 발휘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의 영토 경계선에 대한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 대신,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컴벌랜드까지 스코틀랜드 영향력 아래 놓이게 한 것이다. 키나드 2세의 성공적인 대외 업적은 그의 권위와 함께 왕권 안정화를 가져왔다.

키나드 2세는 자신의 왕권을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잠재적인 정적들을 제거해 나갔다. 특히 친형 두브의 아들인 시내드 막 두프의 왕위 계승권을 없애고자 지속적으로 노력했지만, 이는 도리어 시내드를 지지하는 세력의 결속을 가져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시네드의 세력들은 키나드 2세에 의해 희생되었지만, 이 둘은 지속적으로 왕권을 놓고 경쟁을 하였다.

키나드 2세는 자신의 아들인 말 콜룸에게 에게 왕권을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 왕권 승계에 관한 법을 개정하고자 했다. 법 개정 내용은 죽은 왕의 가장 가까운 혈족이 왕위를 계승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자신의 왕권을 노리고 있는 시네드와 카우산틴의 왕권 승계를 배제하기 위한 시도였다. 하지만 이 법을 마련하기 전에 키나드 2세는 995년 이둘의 음모에 살해된다.

키나드 2세를 암살한 후 카우산틴이 카우산틴 3세로 즉위했지만 시내드와 말 콜룸은 여전히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결국 997년 스코틀랜드 동해안 쪽 아몬드 강 인근 성곽에서 시네드에 의해 살해되었고, 시네드는 키나드 3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아직 컴브리아 주에 말 콜룸이 남아 있는 등 여전히 불안정한 정세를 유지하게 되었다.

3. 아일랜드

아일랜드의 경우 스코틀랜의 북부와 함께 로마 제국에 점령되지 않은 곳인데다가 이미 고대로부터 여러 군소 왕국들이 세워진 상태였다.이들 왕국은 5~9개 정도로 대에 따라 멸망하기도 하고, 분열되기도 했는데 이 왕국들을 쿠어거(Cuaighe)라고 한다. 아일랜드의 다섯 지방으로 알려진 울라(얼스터), 무운(먼스터), 라긴(렌스터), 코나흐타(코노트), 미데(미스)들이 이런 쿠어거들이었다. 아일랜드 신화에 따르면 대다수의 쿠어거들은 기원서 4~5세기 경에 건국되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로마 제국이 현재의 잉글랜드 지역을 정복할 당시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각 쿠어거들은 투어허(Tuatha)[88]라는 수많은 소왕국들로 나뉘었다.

쿠어거의 왕을 리(Rí)라고 했다. 또한 아일랜드 섬 전체에 대한 군주로서 쿠어거의 '리'들 위에 아르드리(Ard Rí, High king)가 있었다. 아일랜드 신화에서는 아르드리가 기원전 19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말이 안 되고 적게 잡으면 846년, 최대한 높여도 459년에야 아르드리가 출현했다.

아르드리의 왕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각 쿠어거의 '리'들 중 힘센 자가 아르드리를 겸했다. 그래서 쿠어거들은 국력이 좀 강해졌다 싶으면 군사를 일으켜 아르드리에게 도전했다. 아르드리의 권한은 강하지 않았고, 지극히 형식적인 왕위였다. 미데의 플란 너 시나너, 무운의 브리안 보루마 등의 아르드리가 통일을 시도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아일랜드는 중세 내내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서로마 제국 붕괴 당시의 아일랜드의 쿠어거들의 행보는 다음과 같다. 북쪽의 올라는 5세기 당시 일부 부족민들이 현재의 스코틀랜드 서부로 이주해 달 리아타를 건국했고, 이후 6세기 중반부터 픽트족으로 부터 달 리아타를 위협받게 되었다. 이후 7세기경인 626년에 달 나라이디의 소왕인 콩갈 카에흐가 올라의 리를 자처했고, 628년에 쿠어거로 독립하여 아르드리를 자처하고 있던 이 넬의 수이브네 멘을 죽이고 아르드리 자리를 찬탈했다. 하지만 637년 북 이 넬의 돔날 막 아에도에게 패배하고 죽게 된다. 이후 8세기 동안 북 이넬에게 밀려 영토가 동쪽으로 축소되었고, 732년 또는 735년에 북 이 넬에게 패하면서 종속되었다.

북 이 넬의 경우 상술한대로 본래 올라에 속한 투어허였다가 425년에 올라 북서부를 공격하면서 별도의 쿠어거로 독립한다. 이후 대체로 강력한 쿠어거들의 눈치를 보며 세력을 확장해 6세기 초 미데를 공격해 킬데어를 빼았으며, 이 넬의 왕들 중 상당수가 아르드리를 자처할 정도로 성장했다. 비록 상술한대로 628년 올라의 리인 콩갈 카에르의 공격으로 당시 아르드리였던 수이브네 멘이 죽었지만 637년 둠날 막 아에도가 복수를 함과 동시에 아르드리 자리를 탈환했고, 이후 8세기까지 올라의 서쪽 영토들을 잠식했다.

미데의 경우 4~5세기경, 코나흐타와 라긴으로 부터 상당한 영토를 빼앗으나 6세기 초 이 넬의 공격을 받고 킬데어의 근거지를 상실, 위클로우 산맥까지 밀려나서 오늘날의 아클로 지역을 새 도읍으로 삼았다.이때 이 넬의 왕가 일부가 킬데어에서 따로 투어허를 성립해 남 이 넬로 분가하게 된다. 참고로 성 패트릭 이전 421년 로마 총대주교가 파견한 팔라디우스라는 인물이 미데와 라긴을 중점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이후 8세기 중엽인 743년부터 왕들의 계보가 기록되었는데, 이때 이 넬 왕가 출신으로 촐마인 씨족의 돔날 미디 막 무르차도가 미데의 왕이 되어 그의 씨족이 12세기 중엽까지 미데를 통치했다.

라긴은 4세경 말인 383년 로마 황제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명령으로 브리튼 섬에서 로마 군단이 철수하자 바다 건너 웨일스에 식민지를 건설하지만 이후 이 넬의 공격받고 일부 영토를 상실하고 이넬과 오랫 동안 적대적 관계가 된다. 상술한대로 성 패트릭 이전인 421년 로마 총대주교가 파견한팔라디우스라는 인물의 선교지 지역 중 하나였다.. 8세기 무렵에는 라긴 왕가가 북쪽을 근거지로 하는 이 둔라이(Uí Dúnlainge)와 남쪽을 근거지로 하는 이 켄슬라로 분화된다.

코나흐타는 아일랜드의 쿠어거들 중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곳으로 438년 사망한 두아흐는 칸노트 최초의 기독교인 왕이다. 8세기경 북이넬과의 접경지역이였던 브레프네가 쿠어거로 독립하였거 브레프네를 다시 병합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전쟁을 했다. 칸노트의 통치 왕가는 973년 사망한 왕 콘코바르의 이름을 따 오 브리언에서 오 콘코바르로 이름을 바꾸었다.

무운은 쿠어거들 중 2개의 강력한 투어허들의 연합체와 같은 곳으로 오가나흐타와 달 가쉬가 자신들보다 더 작은 투어허들을 통제했다. 오가나흐타는 5세기 경에 건국되었으며, 투어허 중 431년 성 패트릭에 의해 개종되었다. 무운의 패권을 장악하는 6세기부터 10세기 후반인 977년까지 아르드리를 배출하지는 못했으나 비교적 오래 안정적으로 무운을 지배했다.

아일랜드 전역을 통틀어 기독교를 독실하게 신봉했던 왕국이며 몇몇 왕들은 실제로 성직자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820년 왕위에 올라 847년까지 먼스터 지역을 통치했던 펠리미 막 크림산은 성직자로서도 큰 명성과 권위를 떨쳤으며 사람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아일랜드인’으로 칭했다.

5백 년 이상 먼스터 지역의 주도권을 가졌던 어거나흐타 왕국의 통치 방식은 다른 아일랜드 왕국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들은 무력에 기반을 둔 군사적 정복이 아니라 평화적이고 정치적인 방식에 주로 의존했던 것이다. 어거나흐타의 왕들은 대체로 전쟁보다 평화를 선호했으며 그들이 정복한 다른 왕국의 왕족이나 백성들을 매우 공평하게 대우해 주었다.

브레프네의 경우 상술한대로 700년대 코나흐타에서 독립한 쿠어거로 다시 투어허로 복속시키려는 코나흐타와 지속적으로 전쟁을 해야 했고, 영토와 인구수 등에 밀린 브레프네가 패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8세기경 중앙 권력에서 밀려난 오로크 일족이 브레프니의 왕권을 장악하고 있던 오렐리 일족에게 반기를 들고 권력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은 양측의 힘이 팽팽히 맞서 장기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오스라거는 1세기에 옹구스 오스리허가 건국했으며 라긴의 투어허었다. 5세기 무운의 코르쿠 리그더가 달 비른 왕조를 폐하고 오스라거를 합병했다. 7세기에 달 비른 왕조가 다시 힘을 되찾았지만 859년까지 명목상 무운의 일부였다가 커르발 막 둔렁거 왕 때 독립을 되찾았다. 이후 오스라거 왕들은 향후 3세기 동안 아일랜드 섬의 정치사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지만 섬 전체를 다스리는 아르드리를 배출하지는 못했다

아르길라의 경우 331년 경에 건국된 것으로 추정되며 본래 올라에 속한 투어허였으나 카르브러 리페하르의 손자들인 콜라 3형제가 울라 왕국으로부터 오늘날의 얼스터 중부를 빼앗아 건국했다고 한다.원래 동쪽의 이웃나라 울라의 영향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6세기부터 북쪽의 북 이 넬 왕조와 남쪽의 남 이 넬 왕조에게 동시에 영토를 잠식당하면서 쪼그라들었다. 735년 아르길라는 북 이 넬 왕조의 케넬 노간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827년 북 이 넬 왕조의 제후로 신종했다.

바이킹들에게 묻히긴 했어도 이기간의 아일랜드 또한 해적질을 했었다. 주된 활동지는 브리튼 섬의 서쪽 해안으로 위의 상술한 웨이스와 스코틀랜드의 개척된 정착지 또한 이러한 해적질로 인해 만들어진 전진 기지에서 기원한 것으로 보이며 그 밖에도 살리아 북부 해안 등도 아일랜드 해적들의 활동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인해 라진 남부의 아타코티 족들의 경우 로마 제국의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선교 활동을 하게된 계기가 바로 이들 아일랜드 해적들에게 붙잡혀 오랫 동안 노예 생활을 한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8세기 후 아일랜드 또한 바이킹의 침략을 피할 수 없었다.795년 아일랜드에 최초로 바이킹이 이오나 섬, 라흘란 섬, 미라가크 섬에 도래했고, 대략 200년에 걸친 기간 동안 그들의 침공을 받았는데 당시 아일랜드 섬에 있던 여러 왕국들은 바이킹에 맞서 싸우기엔 역부족이었고, 이후 여러 지역에 걸쳐서 그들이 점령한 거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852년 현대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도 그들이 이 땅의 원주민인 켈트족들을 쫓아내고 건설한 거점으로 이바르와 울라프 형제가 요새를 축조한 데에서 시작되었다.

그나마 각각의 군소 왕국들이 힘을 합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모든 역량을 동원하면서 잉글랜드처럼 바이킹들에게 짖밣히는 꼴은 면했다. 이후 902년 브레가의 말 피니아 막 폴라나카인과 라긴의 체르발 막 무이레카인이 연합해 더블린을 공격했고, 980년 더블린의 왕을 자처하던 바이킹 군벌인 올라프 시그트뤼그손이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였던 말 세크날 막 돔날에게 패배해 시키는 등 선전했고, 이후 2세기 넘게 노르만 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정착지에서 살면서 점차 원주민들인 아일랜드계 켈트족들과 섞이게 되었고, 점차 아일랜드화되어 갔다.

이들 바이킹들이 세운 아일랜드의 정착지들은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노예 거래 등이 행해졌으며 최초로 화폐를 주조해 은본위제를 도입시켰다. 다만 아일랜드의 정착지를 기반으로 한 아일랜드의 바이킹들이 잉글랜드에 정착지를 둔 바이킹들과 협공을 해 당시 알바 왕국으로 불린 스코틀랜드와 웨식스를 공격하기까지 하는 등 아직 그 기세가 꺾이지는 않았다.


[1] 고대 영어로 Æthelberht. 애설버트. 재위 589년~616년[2] 아마 간질 발작[3] 이후 캐드왈라는 서식스를 공격해 두 공동왕을 죽이고 서식스를 정복한다.[4] 후의 웨식스/잉글랜드 왕 애설스탠은 애설울프의 증손자로, 이 애설스탠과 다른 사람이다.[5] 고대 로마 제국의 요새 안데리툼(Anderitum)으로 추정되는 장소[6] 반면 2004년 미국 영화 킹 아더에서는 바돈 산 전투에서 아서와 싸워 죽는 왕이 웨식스 왕국의 시조 체르디치, 킨리치 부자로 나온다.[7] 정확히는 옥스퍼드셔-글로스터셔까지[8] 이후 캐드왈라는 자신의 동생 물(Mul)을 대신 앉혔다.[9] 그러나 자국은 계속 통치하고 있었다.[10] 혹은 『브리튼인의 역사』에 의하면 받고 분배되었다.[11] 이때 노섬브리아 왕국의 병력수는 3000명이었던 반면 머시아, 귀네드, 엘메트의 연합군 병력수는 1800명이었다.[12] 다만 성 베다는 페이다의 개종이 매부인 데이라의 왕 알프리스의 권유였다고 기술하고 있다.[13] 다만 성 베다는 자신의 연대기인 앵글인의 교회사에서 그의 왕비인 알프리스가 남편을 살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14] 이때를 기점 머시아 왕가는 웨식스 왕가의 시조가 자신들의 선조인 이켈의 숙부라는 말도 안되는 프로파간다를 내세워 웨식스를 길들이려고 했다.[15] 마지막 인물은 아마도 헤리퍼드의 전 주교[16] 다만 전승에 따라 오파의 제방이라 부를 뿐 실제로 로마시대의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다.관련 링크[17] 만커스는 당시 프랭크에서 유통하고 있던 아바스 왕조의 금화에서 파생된 화폐로 당시 은화 30개에 해당되었다.[18] 오파의 동명의 딸과 같은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19] 후의 글로스터 대성당[런던] 근교로 추측된다.[21] 현재 윌트셔 주 스윈던 근처의 로턴[22] 고대 영어 발음은 각각 '베오르니체'(Beornice)와 '데레'(Dere).[23] 망명중 픽트족의 공주와 결혼해 탈로르칸이란 이름의 아들 한 명을 둔 상태였다.[24] 베다와 앵글로 색슨 연대기는 모두 오수왈데의 통치는 실제로 9년간으로 간주되고, 9년째는 “에아드위네와 오수왈데 사이의 1년을 통치한 사람들이 가고 있던 이교 때문에 “오수왈데의 통치 이전 해를 오수왈데에게 덧붙였다고 말한다.” 오수왈데는 브리튼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9세기 앵글로 색슨 연대기에서 그는 브레트왈다라고 불린다. 아드무난은 오수왈데를 “하나님에 의해 모든 브리튼의 황제로 임명되었다”고 말했다.[25] 다만 학자마다 전투 장소가 다르다고 보고 있다.[26] 공교롭게도 애안프리드 또한 망명 당시 켈트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버니시아로 돌아온 후 다시 이교로 개종했기에 1년도 되지 않은 통치 기간이었기에 다른 연대기에서 기록말살 되었다.[27] 거기 알려진 수녀원장은 데이라 왕족의 일원인 경향이 있었다[28] 다른 사료에서는 임명은 734년으로 되어 있다.[29] 후대의 왕 에델바르트이 몰과 동일한 인물로 추정된다.[30] 에델레드 왕의 아버지는 에델발트 몰이다.[31] 전체적인 흐름이 《에다》나 《볼숭 사가》에서 아틀리가 군나르를 심문하다가 뱀굴에 빠트려 죽이는 스토리와 매우 흡사하다. 이 전승이 《라그나르의 사가》에 영향을 줬을 수도 있고, 그 반대일 가능성도 있다.[32] 라그나르가 죽으면 그의 아들들이 복수하러 올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다.[33] 포로 신세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해서 발할라에 가길 원했던 것 같다. 애초에 잉글랜드에 온 이유도 아들들이 범접하지 못할 명예를 얻는 것이 목표이기도 했다.[34] 사진이나 통신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절이라 앨라 2세가 라그나르를 못 알아본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아무리 신원 파악을 못했어도 거대한 창과 마법의 옷이라는 비범한 무구들을 가지고 있었고, 마지막까지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 강인한 전사였는데, 만일을 위해 평범한 감옥에 가두거나 다른 용도로 써먹는 등의 선택지를 고려하지 않고 고문을 강행하다 죽여버린건 명백한 실수다. 앨라 2세가 라그나르의 아들들의 복수를 예상하지 못했다면 모를까, 이미 그 점을 고려하고 있는 상황이었다.[35] 이후 그가 죽을 때까지 누구와 싸웠다라는 식의 기록이 계속된다.[36] 영어로 "king of the West-Saxons"로, "서쪽 색슨 사람들의 "이라는 말인데, 정확히는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의 지도자"라는 것이다. 이 시대에 다른 앵글로색슨족 왕국들 또한 다 이런 식으로, 중국식의 칭왕 • 칭제 같은 것이 아니라 그 동네 사람들에게나 지도자로 받들여지는 두목이라는 의미였다.[37] ealdormann. 영주라는 뜻이다.[38] 원래 '워덴의 무덤', 즉 '오딘의 무덤'이라는 뜻이나 지금은 Adam's grave로 불린다.[39] 베다의 저서, 《색슨 연대기》, 전설들에 따르면 웨식스 왕가를 비롯해 잉글랜드로 넘어온 앵글로색슨 지도자들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공통적으로 오딘이 나온다. 그러니 오딘의 무덤에서 오딘의 후손이 패배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40] 체울린의 기록과 주로 연관되어 있는 지역이 템스강 상류 유역의 웨식스 북부이다. 그래서 현대 사학자들은 체울린계의 정치적 근거지가 그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측하며, 만약 쿠다도 왕이었다면 그는 윈체스터로 대표되는 왕국 남부를 통치했을 것이다.[41] 퀴네길스 왕의 개종 한 번에 바로 그리스도교 국가가 된 건 아니었다. 첸왈흐나 캐드왈라 같은 몇몇 후대 왕들은 가톨릭을 처음부터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을 정도로, 웨식스에 기독교가 정착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42] 체르디치의 진짜 후손인지 확실하지는 않다.[43] 섹슨어로는 윈탄체스터라고 불렸다[44] 그 후, 주트족은 와이트 섬에 갇혀 있었다[45] 첸왈흐와의 공통 조상이 6대조 체르디치5대조 킨리치 정도뿐이다.[46] 추측[47] 이로써 캐드왈라는 웨식스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잉글랜드 남부의 패권을 장악한다.[48] 아마 혼인 관계로 인한 사돈지간으로 보인다.[49] 섹슨인 자유민의 당시의 명칭[50] 49 헥타르[51] 다만 그의 망명을 받아준 카롤루스는 개인적으로 오파와도 많이 교류한 유럽 본토의 왕이기도 했다.[52] 베오르흐트리치의 죽음에 대해 후대의 엘프레드 대왕의 궁정학자였던 어서는 베오르흐트리치가 왕비인 이드바에 의해 실수로 독살되어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기록했다. 그녀는 프랑크 왕국의 수도원으로 도망쳤지만 나중에 남자와 함께 있는 곳을 발견하고 쫓겨났다고 기술했지만 이 이야기의 출처는 의심스럽다.[53] 오늘날의 로튼[54] 보티건이란 말은 고유이름이기 보다는 보통명사로 족장이나 참주를 뜻하는 말이었다.[55] 우서 왕의 할아버지가 브르타뉴(Brittany)의 왕 코나누스(Conanus)이다.[56] 아서 가의 상징이자 웨일스의 상징이다. 웨일스 국기에도 그려져있다.[57] '펜드래곤'이란 어느 특정 가문의 성씨가 아니라 켈트족 브리튼인의 지도자에게 바치는 전통적인 경칭이라고 한다.[58] 이때 판본에 따라 공작부인 이그레인에게 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59] 판본에 따라 어떻게 결혼했는지 내용이 다르다. 전쟁이 끝나고 결혼 후 아서 왕을 얻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전쟁중 동침 후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60] 엑터 경은 친 자식처럼 아서를 키웠으며 아서의 신분이 밝혀지자 친아들 케이와 함께 충성을 맹세했다.[61] 2 세기 전에 프톨레마이오스가 언급한 현재 스코틀랜드 부족[62] 혹은 캄브리아 연대기[63] 현재의 영국의 헬레포드셔[64] 귀네드의 카도반 압 이아고[65] 아마도 다페드의 말레이디드 압 레인으로 추정.[66] 데본의 악스머스 근처의 비안둔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이전인 577년 데오럼 전투에서의 승리의 장소를 생각하면 서머셋일 가능성이 높다.[67] 현재 잉글랜드 북부 노스 요크셔의 캐터릭으로 불리고 있다.[68] 웨스트 몰랜드의 리웨넷 계곡[69] 현재의 리즈[70] 아일랜드의 다르리아타 왕국은 북서쪽에 있었다.[71] 베리의 아들 이웨인으로 추정됨.[72] 이때 분노한 휫세르크는 전령들부터 죽여버리려고 했으나, 이바르는 동생을 저지하고 그들을 무사히 잉글랜드로 돌려보냈다. 이바르의 침착한 성격을 강조하는 부분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후술할 계획을 위해 잉글랜드 측에 자신이 외교적이고 침착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줄 목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문서 상단의 그림이 이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73] 이 영토가 런던 혹은 요크라고 한다.[74] 당연하지만 이바르는 바이킹들을 돌려보낼 생각 따윈 없었고 그저 "애들이 너무 흥분해서 제 말은 안들어요ㅠㅠ" 라는 변명으로 무마했다.[75] 전승에 따르면 당시 덴마크 윌란 반도의 통일 군주였다고 한다.[76] 전승에 따르면 바그세크의 전임자인 호뢰크 2세의 조카라고 한다[77] 이때 헤브리디스 제도 바이킹의 지도자인 이마르의 형제 올라프 코눙(백색인 올라프와 동일인물)과 그 아들이 동반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78] 그의 행방에 대해서 그가 더블린의 왕이 되려고 맨몸으로 수영해 해협을 거너려고 하다가 익사했다고 한다.[79] 스코틀랜드 서쪽에 위치한 500여개의 작은 군도[80] 당시 명칭은 성 커스버트였다.[81] 지방장관으로 번역된다. 보통의 봉건 영주와 비슷한 직위지만, 가문에 상속되는 타국의 봉건제와 달리 샤이어무트에서 선거제로 선출 후 왕에 의해 형식적인 승인을 받거나(머시아의 경우) 왕에 의해 테인들 중에 임명되는(웨섹스의 경우) 직위라는 차이점이 있다.[82] 중세 중기 초인 1027년경부터 성 게란스 교구는 크레디턴 교구와 공동으로 운영되었고, 1050년에 합병되어 엑스터 교구가 되었다.[83] 현재의 플랫 홀름.[84] 달 리어타는 부계로, 픽트랜드는 모계로.[85] 알핀 가문은 게일계고 돔날 2세도 아일랜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추측이 있는 만큼 왕가 사람 혹은 최측근 귀족 세력으로 추측할 수 있다.[86] 데인인 또는 데인-게일 혼혈인 왕들로 아일랜드 식으로 이름이 기록되었다.[87] 스코틀랜드 고유의 귀족 작위로 보통 백작위로 번역되나 아일랜드의 소 왕과 같은 급이라 볼 수 있다. 중앙 집권이 약했던 스코틀랜드 왕국에서 모마어들은 넓은 자치권을 누렸다. 참고로 모마어라는 귀족 작위는 바로 이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한다.[88] 원래 민족, 족속이라는 뜻이었다가 이 시기에 소왕국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오늘날에는 시골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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