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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0:04:47

중세/과학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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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민간 기술
2.1. 농업2.2. 건축 및 토목2.3. 예술2.4. 시계2.5. 기계 공학2.6. 제철2.7. 수차2.8. 항해2.9. 인쇄·용지 및 문서2.10. 과학 및 학술 지식2.11. 의복2.12. 기타
3. 군사 기술
3.1. 갑옷3.2. 방패3.3. 냉병기
3.3.1. 도검류3.3.2. 폴암3.3.3. 타격무기3.3.4. 기병3.3.5. 투석기3.3.6. 투사 무기
3.4. 화약 무기3.5. 방어 시설3.6. 군사 제도

1. 개요

중세에 들어서면서 유럽은 다른 문명권보다 빠르게 각종 기술들을 재발견하거나 발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세 유럽의 기술 발전은 대개 6세기를 기준으로 향상되기 시작했으며, 동시에 기계론적 세계관의 맹아가 싹틀기 시작했다.# 기술은 보통 민간 기술과 군사 기술로 나눠져 발전했다.

아래의 내용의 상당 부분은 영문 위키피디아의 《medieval technology》에서 기반한다.

중세 과학 기술에 대한 내용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도와 같은 무형의 것도 다루고 있다.

2. 민간 기술

2.1. 농업

2.2. 건축 및 토목

2.3. 예술

2.4. 시계

2.5. 기계 공학

2.6. 제철

중세 유럽의 제철 기술은 시대별로 초기와 중기,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줄로 풀무를 이용한 화로에서 철을 생산했으나 생산량은 1~15kg 밖에 생산되지 못했으며 탄소 함유량도 낮은 연철로 나왔기에 따로 목탄불에 달구면서 표면침탄시키고 따로 가열해야 했으며, 주로 접쇠법의 일종인 패턴웰딩 방식으로 강철 제품을 생산해야 했다.

중기에 들어서 수차와 연결된 풀무로 통해 공기를 불어 넣는 강제과급하는 방식과 최대 300kg급까지 키운 발전된 괴철로로 연철을 샌산하여 패턴웰딩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수차와 연결된 대형 망치로 두들겨 강철화 시켰고, 이때의 철 생산량은 전기에 비해 수백kg이나 증가하게 되었다.

중세 후기인 1350년대로 들어서자 용광로와 함께 철을 용해시키는 제강법이 등장하면서 강철의 생산이 증가하게 되었고, 15세기에 총생산량이 6만톤을 넘게 되었고, 이 때를 기점으로 물레방아에 연결된 풀무와 페턴 웨딩이 사라진다. 다만 자력으로 초강법을 얻는 것은 실패해 18세기 영국이 식민통치를 하던 인도에서 초강법을 획득한 후 유럽 전역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2.7. 수차

수차는 상기한 대로 고대부터 만들어졌다. 하지만 중세 시대로 들어서면서 일반에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교 전파와 장원제와 봉건제의 등장으로 인해 노예의 비율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유럽인들은 기존의 노동력을 기계로 대체하려고 하기 시작했다.[1] 이에 대한 대안이 바로 수차와 풍차였다.

수차와 풍차는 6세기경 아일랜드에서 위에서 물을 붓는 방식으로 가동되는 상괘식이 등장한 것 외엔 초기에 단순히 곡식의 도성과 물을 빼내거나 붓는 용도로만 사용되었으나 9세기부터 프랑스에서 축용을 위한 용도의 수차가 개발됨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하 수차들은 곡식을 도정하기 위한 수차들이었으나 정작 농민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는 당시 영주들이 물레방아의 경영자들과 계약을 맺으면서 이들을 세리로 삼아 사실상 장원 내의 농노들에게 강제적으로 물레방아를 이용하게 만들어 도정한 곡식의 일정부분을 물레방아 업자에게 주게끔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농노들도 물레방아를 이용하는 것보다는 몰래 맷돌을 사용해 곡식을 도정했고, 영주는 영주들 대로 맷돌을 압수하려고 했다.

이밖에도 수차는 다리를 세울 때도 사용되었다. 교각을 착공하기 전 우선적으로 교각의 틀을 만들기 위해 하천의 높이 보다 더 긴 여러 개의 나무 말뚝을 교각의 형태에 맞게 박은 다음 그 옆으로 수차를 가설해 틀 안에 고여있던 물을 빼는 역할을 했다.

2.8. 항해

2.9. 인쇄·용지 및 문서

2.10. 과학 및 학술 지식

2.11. 의복

2.12. 기타

3. 군사 기술

중세 유럽의 군사 기술은 동시기에 평화기가 상대적으로 많았던 동양과 달리 군사 기술이 평이하게 달랐다. 우선 로마제국의 쇠퇴기와 서로마 제국의 붕괴기를 거치면서 퇴보하였고, 동양과 비교하면 군사 편제서부터 봉건제 등으로 인해 동원력이 약해지면서 단순한 편제를 하고 있었고, 군사학적으로도 무경칠서가 존재하던 동양과 달리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기 전 서로마 제국의 귀족이었던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가 저술한 군사학 논고 하나 외에 없었다.

하지만 중세 중기를 거치면서 이슬람과과 교류 및 지역별로 독자적으로 군사 기술을 발달해가기 시작했고, 이러한 군사 기술의 발전은 후일 16세기를 기점으로 군사 기술이 동양을 초월하게되는 양분이 된다.

3.1. 갑옷

중세 유럽의 갑옷은 대체로 신분과 재력별로 구분된다. 동서 막론하고 병장기 중 갑옷 만큼은 대체로 가성비 싼 것을 제외하면 자비로 구입하는 것이 현실로 대다수 병졸의 경우 철갑으로 무장하지 못한 것이 허다했다. 그래서 병졸들의 갑옷은 갑옷은 대체로 지급품인데다가 금속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 보편적이었다.

반면 금속제 갑옷은 시대별로 세가지로 나눠진다. 중세 초기만하더라도 대체로 반팔 티셔츠 형태로 쇠사슬로 만들어지거나 가죽끈으로 엮은 여러개의 철편으로 만들어진 갑옷이 주류였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가 되면서 후자가 점차 도태되기 시작하고 전자가 주류가 되면서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후 13세기부터 중세 후기인 14세기부터 15세기 초반꺼지 제철 기술의 발달과 함께 점차 판금으로 갑옷을 만드는 이행기(Trasition Period)에 진입하면서 몸통을 제외한 전체 부위가 판금화를 거치게 된다. 다만 몸통에 입는 흉갑의 경우 판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동양의 두정갑 동일한 구조의 갑옷들이 1410년 판금갑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신하게 되었다.

1420년대가 되면서 판금 갑옷의 초기형의 등장하게 되며 이 때를 기준으로 점차 판금갑이 대세가 되기 시작되었고, 이후 이탈리아의 밀라노와 남부 독일에서 각각 밀라노 양식, 고딕 양식 등이 등장하게 되며, 또한 철의 대량 생산으로 인해 일반 병졸들도 돈만 넉넉하게 있다면 판금으로 만들어진 투구와 흉갑 정도는 마련할 수 있게 된다. 자세한 발전사는 서양 갑옷을 참고할 것.

사족이지만 판타지 등의 매체의 영향으로 일반 병졸들도 가죽 갑옷을 입고 다녔다는 통념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통념과 달리 상당히 왜곡된 부분들이 많다.

3.2. 방패

로마 제국 후기에 들어서면서 게르만족들이 군대의 중추를 이루게 되면서 로마군의 방패는 직사각형의 방패인 스쿠툼에서 이민족들의 원형 내지는 타원형의 방패로 전환되었고, 이는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에도 유지가 되었다. 그러다가 갑옷의 발달과 함께 카이트 실드와 히터 실드 등의 다양한 방패가 나오기 시작하나 14세기 말 화약의 전래와 함께 갑옷 또한 극단적으로 방호력이 상승하게 되면서 방패의 입지가 줄어들어 소형화가 진행되어 이후 총기를 비롯한 화약무기가 완전히 보편화된 18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전장에서 퇴출된다.

3.3. 냉병기

중세 시기는 유럽의 냉병기가 갑옷의 발전과 함께 발전해가던 시기였다. 투사 무기를 제외한 냉병기들은 고대부터 도검류와 창류, 둔기류 등으로 세분화되었으며,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이후 로마식 무기와 북쪽의 게르만/노르만족 양식의 무기들로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중세 중기로 접어들면서 갑옷의 발달 등으로 인한 여러 요인들로 인해 점차 중세 고유의 양식들이 등장, 고대의 냉병기들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3.3.1. 도검류

도검류는 양손검한손검, 단검으로 분류된다. 전근대까지 동서 막론하고 검은 검병을 제외한 모든 병과에 거쳐 부무장의 위치에 있었다. 일단 중세 중기까지는 양손검은 동로마군이 쓰던 팔크스를 빼면 전무하다시피했다. 이는 이당시 검술의 전술 자체가 검과 방패를 드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4세기 트랜지셔녈 아머의 유행과 함께 방패를 사용하는 것이 점차 사라지게 되면서 양손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 양손검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단검의 경우 주로 한손검 다음으로 중세시기 유럽 각지의 군대에서 부무장으로 애용한 무기로 기사라도 한손검 외에도 별도로 차고 다녔다. 단검의 용도는 주로 근접전 와중에 한손검을 분실할 시에 그 대용품으로 사용되어 갑옷으로 보호하기 힘든 부위의 급소를 노리는데 사용되거나 전투 후 살 가망이 없는 자들의 목숨을 끊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부무장으로 한손검을 마련하기 힘든 가난한 병사들이 둔기류 다음으로 차고 다닌 무기이기도 했다.

이밖에도 스페인과 아일랜드, 덴마크 등에서도 제각기 양손검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이중 덴마크의 양손검은 크로스 가드의 길이가 짧은 것이 특징이었다.관련 링크

3.3.2. 폴암

중세 유럽의 보병들은 대체로 궁병을 제외하면 주무장이 창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창이란 무기 자체가 다른 무기에 비해 가성비가 저렴한 양산형 무기인데다가 근접 병기 중 공격범위가 넓었고, 상대적으로 배우기가 쉬웠다. 중세 중기까지는 방패와 함께 1.8미터 정도의 단창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중심이었으나 중세 후기가 됨에 따라 방어구가 점차 발달하면서 기존의 창으로 트랜지셔널 아머나 플레이트 아머를 제압하는데 불리하자 그 대안으로 폴암류가 대안으로 떠오르게 된다.

폴암은 대개 농기구 내지는 공구에서 기원하는 장병기들을 통칭하며, 익숙한 농기구 및 공구에서 기원한 장병기들이 많기 때문에 농민이나 시민 출신의 병사들이 손십게 익힐 수 있던 무기였다. 하지만 폴암은 창에 비해 무겁다보니 점차 보병들 사이에서 방패를 버리는 병사들이 보변화되기 시작하나 폴암만으로 플레이트 아머를 상대하는데 역부족이었다.

3.3.3. 타격무기

타격무기는 둔기도끼로 나눠진다. 도끼의 경우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무기로 야만족의 무기라는 인식도 있지만 둔기와 함께 플레이트 아머와 같은 갑옷으로 무장한 상대와 상대하는데 효과적인 무기로 창과 폴암에 등재된 데인 액스와 폴 액스 또한 원칙적으로 도끼에 속한 무기이기도 하다.

둔기의 경우 마찬가지로 선사시대부터 사용된 무기로 중세 중기로 들어서면서 갑옷이 중무장화됨에 따라 점차 도끼와 함께 갑옷에 효과적인 무기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특히 중세 후기에 발생한 농민반란에서 농민병들들이 기사들을 상대할 때 도끼와 함께 둔기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과 중장병들에게 대항했으며, 형태에 따라 여러 분류로 나눠졌다.

3.3.4. 기병

3.3.5. 투석기

투석기는 화약이 보편활될 때까지 사용한 공성무기로서 유럽에서도 고대서부터 사용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붕고된 이후 목책으로 지어진 성채가 보편적이었기에 강력한 투석기가 불필요했으나 이후 바이킹과 마자르 족 등의 약탈 등으로 인해 석축으로 된 성채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아울러 11세기 중반에 십자군 전쟁으로 중동의 건축 공법이 유럽에 소개되면서 석재 성이 보편화되면서 점차 강한 투석기가 필요해지게 되었다.

3.3.6. 투사 무기

3.4. 화약 무기

영문 위키피디아의 화약 무기의 연대표

3.5. 방어 시설

3.6. 군사 제도

중세는 고대과 근·현대 사이의 과도기적 시기로 군사 제도 또한 과도기적 제도로 운영되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동로마가 통치하던 지역들을 제외한 구 서로마령에서는 제국이 해체되면서 레기온 체계 또한 완전히 붕괴되면서 그 서로마령에 각자도생식으로 세워진 게르만족 왕국에 이어져 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욱이 사회 구조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봉건제와 함께 기사들 위주인 기병대가 위주였고, 전시에 자신의 장원에서 징발한 징집병들을 이끌고 전장에 합류했다. 또한 상술한 병기들조차 고대에는 거의 없던 것들이었으며, 이에 따라 전술과 병종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 다만 노예제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19세기 들어서이며 대항해시대 이전부터 중세 유럽에선 여전히 노예제가 잔존했는데, 주로 겔리선의 노잡이들이 노예들로 구성되었으며, 속설과 달리 같은 종파의 그리스도인이라도 노예로 삼은 기록이 남아 있다. 자세한 것은 노예제 문서를 참고.[2] 비누 용액과 알칼리 용액을 섞은 것에 서로 겹쳐진 양모를 적셔 압력을 가하는 작업. 양모는 섬유의 수축이 심하기 때문에 축융 작업으로 미리 최대한 수축시켜놓아서 섬유를 치밀하고 단단하게 만들어놓아야한다.[3] 물론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다. 산업혁명을 통한 대량 생산 이전까지 종이는 여전히 비싼 편이었다.[4] #관련 링크[5] 참고로 동시기 동북아에서 최고로 치던 서역산 말 다음으로 치던 몽골 초원의 말들은 어께 높이가 120cm 내외였고, 한반도산 말의 경우 제일 커봤자 이보더 더 작은 117cm 정도이며, 가장 작은 크기가 9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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