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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41:42

휴경

파일:중세시대의 영지 경작.png
중세 유럽의 휴경
1. 개요2. 효과
2.1. 영양 성분의 보충2.2. 식물성 타감 작용에 의한 토양 독성의 희석2.3. 토양 염화의 희석2.4. 병충해의 억제
3. 역사
3.1. 서유럽
4. 휴경이 필요 없었던 지역5.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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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휴경(休耕, fallow)은 농사를 지을 때 지력을 유지하기 위해 한 해 농사를 쉬는 것을 말한다. 휴경 중인 농지를 휴경지(休耕地, fallow land) 혹은 휴한지(休閑地)라고 한다.

휴경은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토양 독성이 빠지고 비옥도가 회복되는 동안 지력 소모가 덜한 류의 작물을 소량 재배하며[1] 소소한 농사를 지으며 버티는 것인데, 간작(間作, intercropping) 이라고도 한다.

나머지 하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재배하지 않고 방치해놓는 것인데, 병충해 감소의 효과도 있다.

휴경을 하면서 아예 농사를 쉬는 일은 드물고 대개는 땅을 나눠서 돌아가면서 농사를 짓는데 이를 윤작(輪作, 돌려짓기, crop rotation)이라고 한다. 윤작 가운데 제일 유명한 것이 아래 4윤작법이고, '윤작'의 뜻풀이가 '돌려짓기'이다 보니 '윤작'이면 무조건 휴경지 없이 돌아가면서 경작을 하는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는데, 그렇지는 않고 이포제, 삼포제 등을 모두 포함하는 말이다.# 농사와 농사를 번갈아 바꾸면서 하는 답전윤환(畓田輪換)도 있다.

영어 'fallow'는 'follow'(따라가다)와 철자가 비슷한 데다가 미국식 발음도 [ˈfɑːloʊ]라서 오타를 내는 경우가 많다. 영어 학습 때 'fallow' 같은 단어는 어지간해서 쓸 일이 없으니 네이버 검색에서 나오는 'fallow'는 대부분 'follow'의 오타이다.

2. 효과

농업 기술이 부족하던 전근대에 휴경은 여러가지 효과를 가졌다.

2.1. 영양 성분의 보충

주된 식량 작물인 곡물들은 대부분 질소 화합물을 많이 소모하기 때문에 경작하면 토지의 질소질이 사라지며, 질소질을 잃은 토지에서는 다시 경작을 해도 작물이 거의 성장하지도 않고 열매를 맺지도 못한다. 이것을 보충하는 방법을 몰랐던 시대에는 그냥 땅을 내버려두면 땅의 질이 좋아지는구나 하는 경험적 지식을 제일 먼저 습득했다. 때문에 휴경은 지력의 감퇴를 막기 위해 고대부터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용되어온 농법이다.

밀 농사를 주로 짓는 서안 해양성 기후지중해성 기후대는 온도가 높은 여름에 건기가 되는 특성상 땅이 빨리 메마르고 동시에 염류나 독성이 쌓이기 매우 쉬웠다. 게다가 밀 자체가 지력을 엄청나게 소모했기 때문에 땅을 놀리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문제를 극복하고자 휴경 대신 순무토끼풀로 지력 고갈을 해결하는 노포크(Norfolk)식 4윤작법이 개발되기도 했으나 여전히 지력 고갈을 막는데는 역부족이었다. 서양에서 지력 고갈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프리츠 하버 덕이라 봐도 무방하다.

반대로 물을 대는 무은 휴경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벼라는 작물이 호수저수지에서 퍼온 물에 녹아있는 영양 성분을 정말 잘 뽑아 쓰기 때문이다. 덕분에, 인공 질소 고정 화학 비료까지 있는 현대 벼 농사에서 지력 부족으로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시피하며, 따라서 벼 농사는 비옥도와 상관없이 토양이 물을 잘 가두면서, 한국의 장마철 처럼 주기적으로 독성이 제거되기만 한다면 휴경이 아예 필요하지 않다.[2] 이 때문에 고려인들이 똥땅의 대표격인 스텝 지역에서 벼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물도 지력도 쭙쭙 빨아먹는 토란의 위엄과 비교된다 과거 논에 윤작으로 콩이나 자운영을 심곤 했으나, 이것은 놀리는 땅 없이 땅을 고루고루 사용하기 위함이었으며, 콩은 조금이라도 수익을 더 뽑기 위해, 자운영의 경우 주요 밀원 식물이기에 양봉을 위해 같이 심었던 것으로, 요즘은 논두렁에 심심해서 콩 조금 심는게 전부다.

영양을 소모하는 작물 중 대표적인 것은 옥수수가 있다. 이것은 옥수수가 C4 식물이기 때문에 생존력이 좋고 면적 대비 열량도 많이 뽑아주는 대신, 광합성 효율이 안 좋은 만큼 토양의 각종 영양물질도 있는대로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땅콩의 경우에는 뿌리 혹 박테리아가 있는 콩과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질소를 있는대로 쭙쭙 빨아먹어서 토양 황폐화에 큰 기여를 하며, 물만 잘 묶는 토양이면 잘 자라는 벼와 달리, 물도 양분도 있는대로 퍼먹는 토란도 지력 퍼먹는 괴물이다.

댐 건축의 남발과, 단순히 홍수 억제에만 집중한 강변 정비로 인해 범람을 통한 영양물질 공급이 줄어들어 토양이 황폐화되기 시작한 나일강 주변 농업지대가 대표적인 영양 부족으로 인한 지력 감소의 예시. 하구쪽은 염해까지 발생하고 있다.[3]

2.2. 식물성 타감 작용에 의한 토양 독성의 희석

또 전근대인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연속적으로 경작을 하면 토양 독성 증가 현상이 일어난다. 많은 식물이 알칼로이드 계 독성 물질등 각종 물질을 뿜어내는데, 이게 쌓이면 심은 작물이 자기 독성을 못 이겨서 죽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것은 신생대에 접어들면서 식물의 주류를 이루는 속씨 식물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심지어 이중 질소 자체가 필요없는 작물인 감자 같은 것도 토양 독성화는 답이 없기 때문에[4], 간작 보다는 농사 자체를 폐하여 땅 자체를 일정기간 푹 쉬게 해주는 휴경의 효과가 더 좋다. 어쨌든 간에 증가한 토양 독성은 강우 등으로 토양의 각종 물질들이 정리되어야 해결되기 때문이다.

작물을 포함하여, 식물 중에는 타감작용[5]을 하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작물 중에 인삼담배는 지력 파괴자로 악명 높으며, 오죽하면 한번 인삼을 심은 땅은 다시는 인삼을 못 심는다거나, 휴경 기간이 3년을 넘어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6], 실제로 9년삼 인삼 한번 재배하면 다음 20년간은 그 땅에서 재배한 인삼의 품질을 보장하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산양삼은 애초에 지력 끝판왕인 부엽토에서 재배하는 것이고.

담배 역시 지력을 많이 소비하기로 유명하다. 미국 초창기 이주인들이 점점 원주민들의 영역을 침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지속된 담배 농사로 인해 토양이 황폐화되었기 때문이었다.[7] 그래서 인삼은 오늘날에도 흙갈이도 해가면서 삼포제로 지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인삼과 담배는 질소를 쭙쭙 빨아먹는 형태의 지력 파괴 작물이 아니라, 타감 작용으로 독성 물질[8]을 내놓아서 토양 독성을 엄청나게 증가시키는 독성작물(!)이기 때문에 지력소모가 심한 것으로, 엄밀히는 지력 자체가 빨려나가는게 아니라 지력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놓는 류의 작물이다. 인삼 자체가 약용 식물이라는 점을 역으로 돌려보면 독성식물(?)이니 인삼을 4년만 키워도 그 땅은 초토화가 되어버리고, 6년을 넘기려 하면 인삼이 독성을 못 견디고 썩어버리는 것이다. 하물며 9년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다. 한편, 담배는 아예 대놓고 맹독초(!) 이기 때문에 한국/일본처럼 장마철에 폭우로 독성물질이 쓸려 내려가도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토양 독성의 또 다른 예시로 커피가 있다. 커피나무의 낙엽에서 카페인이 용출되어 카페인 독성으로 토양이 오염되어 커피 나무가 사실상 자살하는 셈이 된다. 좀더 친숙한 예시로는 고추냉이 (진짜 와사비와 와사비가 아닌 고추냉이 모두)가 있다. 고추냉이가 너무 크게 자라면 다닥다닥 붙어있는 커다란 고추냉이들이 뿜어내는 독성을 자기가 못 견디고 죽어버린다.

이런 토양 독성 문제는 토질보다도 중요한 문제거리이다. 과거 비옥한 초승달로 유명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이 토양 독성 증가와 염해를 견디지 못하고 초토화되었다.[9], 북아프리카는 고대 로마 시절에는 숲까지 있던 지역이었으나, 지속적인 관개수로에 의존한 농업으로 인해 토양 독성이 증가하고 염해가 발생하여 사막이 되어버렸다.[10]

CAM 식물은 워낙 황폐한 환경에 적응하였기에, 비옥한 토양이 CAM 식물에겐 되려 독성 토양이 되어버리기도 한다.[11]

2.3. 토양 염화의 희석

강우량이 부족하여 관개 수로(특히 지하수)를 이용하는 경우, 물은 증발하고 물에 녹아있던 염류가 누적되며, 나중에는 아예 나트륨이 가득한 소금 밭이 되어버리기 십상이다.

이렇게 된 대표적인 예가 바로 메소포타미아다. 현재 이라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는 원래 비옥한 초승달이라고 불릴 만큼 농사가 잘 되는 비옥한 땅이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토지에 염분이 많이 쌓여 기원전 1700년 무렵에는 하얀 소금 성분들이 땅 표면에 그대로 드러나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늘어났다. 결국 이런 토양의 염화 현상으로 인해 인류 최초의 문명인 수메르는 식량 부족 사태에 시달리며 쇠퇴하고 말았다.[12]

2.4. 병충해의 억제

농약이 없던 과거에는 이것은 매우 중요하였고 현대에도 봄에 논두렁을 태우거나 하는 것은 이런 월동하는 병원체나 해충의 구제목적이 있다. 지금도 소규모 텃밭이라도 비료와 농약을 쓰지않고 농업을 해보면 생산량을 좌우하는 건 비료가 아니라 병충해 방제이다.

같은 토지에 매년 같은 작물을 연속 재배하면 그 작물에 병을 일으키는 병원체나 해충 등이 그 토지에 계속 월동을 해서 다음 해 농사에 큰 피해를 미치는데 휴경을 하거나 다른 종류의 작물을 심는 윤작을 하면 이런 농 병충해 피해를 감소시킬 수 있다.

어떤 작물은 일반적으로는 형성되지 않는 특정 병충해에 취약한 특수한 환경을 유발하면서[13] 동시에 특정 병충해에 취약해 연작이 불가능함은 물론, 토양을 황폐화 시키기도 한다. 모든 작물이 연작시 매우 당연하게 해당 작물을 대상으로 하는 병충해에 취약해지지만, 유난히 이런 문제가 심한 작물들이 종종 있다.

특정 작물 농사에 의한 병충해 중에서 특히 유명한 것이 뿌리썩음병. 뿌리가 썩는 부류의 작물 병해는 대부분 진균 때문에 발생한다. 진균 특성상 일단 발생하면 그 토양에서 죽치고 앉아서 계속 재발하기 때문에 작물의 병해 중에서도 제일 악명이 높다.

인삼은 고유의 뿌리썩음병 유발 진균이 꼬이는 문제가 있다. 6년 이상 인삼을 묵혀 키우기가 극도로 어려운 중요한 이유이자 윤작이 불가능한 이유이다. 상술했듯 인삼은 토양 입장에선 독성작물이라 장기간 키우면 토양 독성을 마구잡이로 증가시키는 문제가 있는 골치 아픈 작물이다. 심지어 인삼을 공격하는 뿌리썩음병 진균까지 따로 있기 때문에 인삼이 몇 년 자라다보면 진균에 감염되어 인삼이 죄다 썩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 일쑤이다. 더구나 이후 인삼을 다시 심더라도 이미 땅에 자리 잡은 진균이 새로 심은 인삼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인삼 외의 작물을 심어도 뿌리썩음병 진균이 적응 가능한 작물이라면 얄짤 없이 썩어버리기까지 한다.

이러한 토양의 병균, 해충 오염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토양을 통째로 오토클레이브 해버리는 것이다. 제 아무리 극성맞은 진균도 오토클레이브 해버리면 사멸할 수 밖에 없다. 현대에 들어서는 인삼을 재배하며 흙을 다 퍼내서 새 흙으로 교체하고, 기존의 흙은 오토클레이브해서 재활용하는 방식이 도입되어 인삼 농사의 산출량을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

하지만 흙을 다 갈아 엎는 과격한 방식은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인삼같이 무진장 비싼 고부가가치 작물이 아니고서야 시도할 이유가 없다. 바나나같이 플렌테이션 방식으로 대충 그냥 많이 심어서 많이 수확해 많이 팔아서 퉁치는 작물들은 병충해의 고착화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하물며 그나마 고부가가치 작물이라 할 법한 포도도 뿌리 썩음병으로 골치를 썩히고 있다.

3. 역사

퇴비나 화학비료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휴경은 농사에 있어서 필수였다.

휴경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대에 농업이 처음 시작된 이래, 농부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경험적으로 한 땅에 계속해서 농사를 지으면 지력이 쇠하여 작물이 점점 잘 자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이를 막기 위해 여러가지로 노력한 결과 땅을 쉬게 하거나(휴경), 아니면 다른 작물을 키워 지력을 복구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휴경은 땅 자체를 말 그대로 놀리는 것이기에 쉬는 동안에는 아예 작물수확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렇게 휴경지가 필요한 농사법은 장원제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때문에 역사적으로 휴경지를 줄이려는 노력이 지속되어왔다.

오늘날에도 비료만으로는 회복할 수 없는 지력도 있다거나, 땅이 거칠어진다거나 하여 휴경의 필요성이 언급되기도 한다. 보통 이럴 땐 땅을 갈아엎어 그 위에 다른 흙을 깐다. 인삼은 오늘날에도 휴경이 필요한 작물 중 하나이다. [14]

3.1. 서유럽

중세시대 초기까지 유럽에서는 농지 전부에 쟁이질을 한 뒤 그 중 1/2에만 농사를 짓고 나머지 땅에는 휴경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는 또 농지 전부를 갈아엎은 뒤 전해에 휴경하였던 1/2의 땅에 농사를 지었다. 휴경지가 절반이나 되었지만, 어차피 중세 초기만 해도 유럽에서는 땅의 면적에 비해 농사지을 인구가 부족하고 농지가 남아돌았기 때문에 상당히 쓸 만한 방식이었다.[15]

그러다가 샤를마뉴 시대인 8세기 후반에 농지를 1/3씩으로 나눠서 한쪽에는 봄에 농사를 짓고(춘경지) 한쪽에는 가을에 농사를 지어서(추경지), 휴경지는 남은 1/3로 줄이는 방식이 개발되었는데, 이를 삼포제(三圃制, three-field system) 혹은 삼포식 농업이라고 한다. 하나의 1/3 경지만 본다면, 봄 농사(귀리), 가을 농사(밀, 호밀), 여름 농사(콩), 휴경, 그리고 세 번째 해에는 다시 윤작의 싸이클이 도는 방식이다[16]. 삼포제에서 봄농사 때는 귀리, 보리를 심어 가을에 수확하고, 가을 농사 때는 이나 호밀을 심어 다음 해 여름에 수확하였다.

삼포제는 외세의 침략이 없고 치안이 안정되어 인구가 꾸준히 증가하던 지역 중심으로 수 세기에 걸쳐 천천히 도입되었는데,[17] 같은 면적의 땅에서 산출이 기존보다 50%가량 증가했다고 한다.[18] 또한 삼포제는 봄과 가을로 농사 시기가 나누어졌기 때문에 한정된 노동력을 1년 내내 효과적으로 분배하여 사용할 수 있었고, 어쩌다가 한 계절의 농사가 잘 안되어도 다음 수확까지 1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반년만 기다리면 되어서 기근에 대한 해결책이 되기도 하였다.

귀리 같은 곡물을 재배하는 환경에서는 밭 가는 데 있어서 말이 소보다 더 효율적이다. 면적의 똑같은 밭을 갈 때 필요한 에너지 양은 말이 소보다 압도적으로 효율적이지만, 풀 먹어도 되는 소와는 달리 말에게는 곡물도 일정량 먹여야 한다.[19] 그런데 봄농사에서 재배하는 귀리는 현재도 말의 주요 사료로 쓰일 정도로 말에게 적합한 곡물이어서 말을 키우기가 좋았다. 또한 삼포제는 이미 황무지 개간을 활발하게 한 뒤에 농지의 산출량을 더 증가시키려는 의도로 도입되었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는 오히려 소에게 줄 막대한 풀을 구할 수 있는 개활지가 부족하였다. 그래서 삼포제를 할 경우에는 소보다는 말을 키움이 더 경제적이었다. 그래서 삼포제가 도입되고 봄농사에서 귀리를 재배하게 되자, 유럽에서 땅을 갈기 위해 키우는 가축이 에서 로 차츰 변하였다.

이후 16세기에 초에 플랑드르 지방에서 개발된 4윤작법(four-field crop rotation)은 4년을 주기로 보리, 클로버와 호밀풀,[20] 밀, 순무를 순서대로 돌려지어 휴경지를 없애는 데 성공하였다.# 4윤작법에서 재배하는 작물 중에서 클로버, 호밀풀과 순무는 양이나 소의 먹이로 사용했다. 비록 4윤작법을 처음 개발한 곳이 현재 벨기에 지역이기는 하지만, 이를 체계화시키고 유럽 전체로 전파한 주체는 18세기 영국이었다.[21] 4윤작법 덕분에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는데, 콩과 식물이라서 지력을 회복시켜주는 클로버를 재배했을 뿐만 아니라, 방목된 가축이 풀을 뜯어먹고 남긴 배설물 또한 지력을 크게 회복시겼기 때문이다.

농업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늘어나자 인구 또한 많아졌다. 영국에서 1750년에 550만 명이었던 인구가 1800년에 900만, 1850년에는 1600만 명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또한 4년 주기에서 절반인 2년 동안 가축의 먹이를 재배했기에 가축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고, 덕분에 유럽의 식탁에서 육류의 비율이 크게 개선되었다. 특히 순무를 저장하였다가 겨울 동안 가축의 사료로 사용하였기에, 예전처럼 가축 먹이를 구할 수 없는 겨울이 오면 대부분의 가축을 도축하던 관습에서 벗어나 일년 내내 가축을 사육하고 고기를 공급할 수 있었다. 한편 더 이상 가축을 방목할 공유지가 필요 없어지고 키우는 양의 수가 증가하자 인클로저 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결국 4윤작법은 18세기 영국의 산업 혁명을 이끈 한 가지 동력이 되었다.

이후 썩은 식물이나 발효된 배설물로 만든 거름과 녹색식물의 잎과 줄기를 그대로 땅에 묻는 녹비가 등장하였고, 산업혁명 시대에 화학 기술이 발달하면서부터는 아예 땅에 이로운 성분을 모아 만든 화학비료를 땅에 주는 방식이 대중화되어 근현대에 들면서 식량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4. 휴경이 필요 없었던 지역

고대 이집트나일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여 경작지의 토양독소를 씻어주는 동시에 소모된 유기질을 보충하여 주었으므로 휴경없는 밀농사가 가능했다. 다만 이집트도 나일강의 수위가 크게 범람할 정도로 오르지 않으면 흉년을 피할 수 없었는데, 로마인들이 이집트를 정복한 후 자기들의 토목기술을 써서 수도/관개시설을 여러 곳에 지으면서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도 물을 퍼내어서 지력을 보충할 수 있게 되어 고대 지중해 세계 전체의 곡물 수요를 충당하는 세계구급 곡창지대로 거듭나게 된다. 허나 아스완 댐, 정확히는 2번째 댐이 생긴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이젠 모기를 비롯한 해충들도 번성하면서 효율이 크게 떨어졌고, 현대 이집트는 1980년대 이래로 곡물을 외국에서 수입하는 나라가 되었다. 물론 이는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곡물 수요가 생산량을 초과해서 발생한(맬서스 트랩)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등 몬순 지대에도 휴경이 별 필요 없다. 기온이 높고 연간 강우량이 많기 때문에 토양독소가 쌓일 틈이 없어서 이기작조차도 가능하기 때문. 다만 밭농사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되고, 비 때문에 토양 내 영양소도 많이 씻겨 내려가기 때문에 논농사의 효율도 썩 좋은 편은 아니다. 애초에 이기작을 하는 이유 자체가 1사이클 당 생산성이 낮아서 그렇다. 대신 는 지력 소모가 적은 편이다.

한국의 경우 시비법이 발전함에 따라 휴경지가 거의 없어졌다. 지금은 농사 이외의 목적이 없는 이상 휴경지인 경우는 거의 없다. 땅 투기 목적임에도 농사 지으려 한다며 세금을 회피하려는 자들이 있어서 부동산 관련 법에 종종 언급된다.

페르시아 만의 비옥한 초승달 지대도 장기간에 걸쳐 퇴적된 흙의 영양소 덕분에 휴경 없이도 풍족한 농사가 가능했지만 사람들이 계속 농사를 지으면서 결국 지력이 쇠해버렸다. 특히 유프라테스 강에 포함된 소금기가 세월이 흐를수록 계속 주변 토지에 쌓여서 파르티아 왕조 시절이 되면 하얀 소금기가 강 주변을 잔뜩 매운 장면이 사람들의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소금기가 쌓인 땅이니 결국 농사 짓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되어 황폐해지고 말았다.

5. 매체에서

늑대와 향신료에서도 이와 비슷한게 언급된다. 현랑 호로는 지력의 유지를 위해 흉년을 들게 할 필요가 있었는데도 마을 사람들이 호로 탓만 했고, 농업 기술이 발달하면서 자신이 필요 없어졌다 생각해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그 농법은 가끔씩 대기근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늑대와 향신료/고증 항목 참조.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22]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는 농경 관련 건물에서 '윤작' 연구를 하면 식량 생산력이 늘어난다. 게임 시스템상으로 휴경을 표현하는 건 아니고 연구 이름으로 역사를 표현한 사례. 게임상 업그레이드라서 역사와는 달리 어업 생산량이 늘어나기도 한다. 참고로 동남아 문명[23]은 모두 윤작 연구가 지원되고 반대로 동아시아 문명[24]은 모두 윤작 연구를 할 수 없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수확하고서 빈 땅이 되는데 그 상태로 휴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오래 휴경하면 농장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수확한 농장에 바로 씨를 뿌려 다시 농장을 만들든, 휴경이 너무 오래되어 사라진 농장 터에 농장을 다시 건설하든 버튼 한 번 더 누르느냐 마느냐의 차이일 뿐 자원 소모는 동일하므로 오래 놀린다고 보는 득실은 없다.

배틀렐름에서는 벼를 한참 채취하면 벼가 고갈돼서 다 자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물을 부으면 더 빨리 자라는 식인데, 물을 부으면 되는 거라서 휴경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아무튼 어느 정도 쉬어줘야 한다는 점이 비슷하다.



[1] 콩류에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있어 땅에 질소를 고정시킬 수 있다.[2] 여름에 폭우가 내리면서 토양의 염류라는 염류는 싸그리 씻겨 내려가기 때문에 토양이 매우 산성임과 함께 황폐하나, 대신 모조리 싹 씻겨 내려가다보니 토양 독성도 안 쌓인다. 예외는 바닷물 역류로 염해가 생기는 바다와 인접한 강 하구쪽 지역 정도?[3] 그래도 워낙 비옥했던 땅이어서인지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농사가 잘 되긴 한다. 강가라서 역류로 인한 염해만 아니면 염분 정리도 그나마 잘 되는 편이다.[4] 감자의 솔라닌도 알칼로이드 물질이다.[5] 他感作用. 다른 생물에 영향을 끼치는 작용 현상을 말한다.[6] 실제로는 10년 이상 휴경하기도 한다.[7] 한편으로는 그래서인지 타탕카 이요탕카는 "얼굴 흰 사람들은 땅이 힘을 잃었는데도 계속해서 약을 뿌리며 생산을 강요한다. 이 얼마나 벌 받아 마땅한 행위인가" 라고 비판했다.[8] 주로 다른 식물의 발아와 성장을 억제하기 위한 독성이다. 그 외에도 해충의 생리작용을 교란하거나 해충이 기피하게 만드는 물질들을 분비한다. 식물 자신은 이러한 독성에 어느정도 내성을 갖추고 있으나 타감 물질의 농도가 높으면 이 물질을 분비하는 식물 자신도 해를 입는다.[9] 이 때문에 현대에 비가 많이 내리면서 토양 독성이 완화된 이라크는 갑자기 사막이었던 땅에서 잡초가 무성하게 번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10] 로마 붕괴 이후 토지 관리 기술이 저하된 것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11] 그래서 선인장은 비료를 찔끔 주고 물도 선인장이 말랑말랑할때 왕창 줬다가 잊어버리는 식으로 키워야 한다.[12]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4~25쪽[13]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특정 병충해 유발 생물(균류, 해충 등)이, 그 작물이 자라면서 토양에 형성되는 특수한 환경에 잘 적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4] 지력 때문이 아니라 인삼을 심고나면 인삼뿌리썩음병의 원인균이 번식하기 때문이다. 인삼 자체는 양분을 특출나게 빨아먹는 편은 아니다.[15] 땅에 비해 인구가 부족했던 중세 초기까지만 해도 한 귀족의 영지와 다른 귀족의 영지 사이에 숲이나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가 제법 넓게 펼쳐져 있고 각 영지는 고립되어 자급자족을 하며 살았다.[16] 귀리는 파종기가 봄인데 수확기가 늦여름이다. 밀과 호밀은 파종기가 늦여름이나 초가을인데 추수기가 초여름이다. 귀리를 추수하고 밀과 호밀을 심어 수확하면 이듬해에는 귀리의 파종기를 놓친다. 그래서 밀 다음에는 비교적 파종이 늦은 콩을 심으면, 이번엔 콩의 가을 수확기에 맞물려서 밀을 못 심는다. 자연스레 반년쯤 휴경하고 이듬해 봄에 귀리를 심는다.[17] 1200년 전후가 되어서야 삼포제가 유럽의 대세 농법이 되었다.[18] 1년에 휴경을 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 땅이 1/2에서 2/3이 되면 실제 경지 면적은 33%가 증가하는 것이지만, 봄농사에서 콩과 같이 지력 회복에 도움이 되는 작물을 재배했고, 한 작물만 보면 휴경을 2년 한 것과 같기에 총 산출량은 더 많이 증가했다.[19] 양질의 건초가 있는 환경이라면 말도 건초만 먹고 힘든 일을 할 수 있기는 하다.[20] 한국의 교과서에서는 클로버만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지만, 호밀풀(English ryegrass)을 클로버와 섞어서 씨를 뿌려 함께 재배하는 경우가 많았다. 호밀풀은 키가 90cm까지 자랄 수 있는 잔디 계열 풀로, 가축의 먹이로 쓰기에 탁월하다.[21] 영국 노퍽(Norfolk) 지방의 영주였던 찰스 타운센드(Charles Townshend) 경이 처음 영국에 들여와 개량하였기에, 4윤작법을 노퍽 농법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타운센드 경은 영국에서 처음으로 순무를 체계적으로 재배하였기에, '순무 경'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22] 말 목장비 > 큰 쟁기 > 윤작 순.[23] 버마, 크메르, 베트남, 말레이[24] 한국, 몽골, 중국,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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