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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니코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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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122대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
Ἀνδρόνικος Β
파일:Andronikos_II_Palaiologos2.jp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
Ἀνδρόνικος Δούκας Ἄγγελος Κομνηνὸς Παλαιολόγος
출생 1259년 3월 25일
니케아 제국 니케아
사망 1332년 2월 13일 (향년 72세)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재위 기간 로마 황제
1282년 12월 11일 ~ 1328년 5월 24일 (45년)
전임자 미하일 8세
후임자 안드로니코스 3세
부모 아버지 : 미하일 8세
어머니 :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배우자 헝가리의 언너, 몬페라토의 이리니
자녀 미하일 9세, 안드로니코스 3세
종교 그리스도교(정교회)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재정 위기와 베네치아 문제2.3. 아나톨리아 전선
2.3.1. 오스만 베이국의 발흥2.3.2. 크레타 침공2.3.3. 바페오스 전투2.3.4. 카탈루냐 용병2.3.5. 방어선의 붕괴
2.4. 불가리아와 전쟁2.5. 팔레올로고스 내전 (1321~1328)
3. 가족관계4.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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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122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제2대 황제.

1261년 부친 미하일 8세에 의해 복원된 로마 제국의 제122대 황제이자,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제2대 황제. 부친이 1282년 사망하면서 5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옥좌에 앉아있었다. 그가 황제에 오를 당시, 제국은 유럽과 아나톨리아 양면에서 수많은 적들의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이는 일부분 그의 부친의 책임이 있어 개고생을 했다.[1] 특히 개판난 경제는 그를 괴롭혔고 결국 재정난 해결을 위해 상비군을 대폭으로 감축하고 해군을 해체했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제국에 이 되고 만다.[2] 말년에는 손자와의 내전을 벌였고 결국 패배하여 수도원에서 죽었다. 한마디로 안 좋은 상황 속에서 나름 노력은 했지만 그 과정이 좋지만은 않아 이란 욕은 다 들어먹게 된 황제.[3]

2. 생애

2.1. 초기 생애

풀네임은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콤니노스 팔레올로고스. 그는 미하일 8세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의 아이들중 가장 오래 살았다. 또한 그는 요안니스 3세 와도 혈연관계가 있다. 그는 1261년, 아버지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직후 공동황제로 임명되었다. 1282년 미하일 8세가 죽자 단독황제로 즉위하였다.

2.2. 재정 위기와 베네치아 문제

1285년, 그는 재정 위기와 화폐 가치 하락을 해결하기 위해 증세와 함대 축소를 결의하였다. 그의 치세동안 히페르피론의 가치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는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세금을 올리고 면세자들의 수를 줄이며 약 80척을 보유하던 해군을 해체한다. 따라서 이후 동로마 제국은 제노바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 해군에 의존하게 되었다.

1296년에 제노바인들이 황제의 묵인 하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갈라타 지구의 베네치아 상인들을 학살하자, 1296 ~ 1302년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동로마 - 제노바 측이 패하여 산토리니 섬 등이 베네치아 령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뒤늦게 재정 안정화를 이유로 해군을 해체한 것이 멍청한 짓이었음을 깨닫게 된 안드로니코스 2세는 1320년대부터 해군력 재건을 목표로 드로몬 20척을 건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2.3. 아나톨리아 전선

2.3.1. 오스만 베이국의 발흥

1281년, 에르투으룰 사후 부족을 이어받은 오스만 1세1289년에 에스키셰히르를 함락, 제국 측에 충격을 주었고, 1299년에는 베이 칭호를 쓰며 쇠위트를 수도로 정한 후에 오스만 제국이 될 국가를 세웠다.

2.3.2. 크레타 침공

안드로니코스 2세는 1277년 베네치아인들과의 조약으로 제국으로 송환된 호르타치스(Hortatzis)에게 크레타공격을 명령했다. 크레타를 완전 정복하는데는 실패했지만 여기서 납치한 크레타인들을 메난드로스 강가에 이주시켰다.

2.3.3. 바페오스 전투

오스만 1세1282년 부족장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리고 약 20년 동안 동로마령 비티니아에 여러번 침입하여 제국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팔레올로고스 시대의 벨리사리우스"로 일컬어지는 알렉시오스 필란트로피노스오스만군을 상대로 선전했으나, 그가 모종의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명형에 처해진 뒤에는 속절없이 밀렸다.

1301년 오스만 베이국니케아 제국의 수도였던 니케아포위했고, 여러차례 프루사를 공격했다. 또한 근처 농지를 황폐화하고 니코메디아를 굶기겠다고 협박을 했다.

1302년 봄, 공동황제였던 미하일 9세는 마그네시아 방면 원정을 계획했다. 튀르크인들은 동로마군의 수에 압도당하며 전투를 피해다녔다. 그 과정에서 동로마군은 너무나 깊숙히 진격해 버렸고 결국 그들은 마그네시아에서 고립되게 된다.

결국 징집병들은 그들의 가족과 집들을 지키기 위해서, 알란족트라키아 일대의 그들의 가족들을 지키기위하여 떠나면서 동로마군은 전투없이 와해되고 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미하일도 막대한 난민들과 함께 해상으로 철수했다.

이후 니코메디아를 구원하기위해 안드로니코스는 메가스 헤타리아 요르요스 무잘론[4]에게 2천의 군사를 주어 보냈고 1302년 6월 27일 바페오스 평원에서 (아마도 니코메디아 인근) 오스만 1세가 이끄는 5천의 튀르크군 경기병대와 조우했다. 5천의 오스만군은 오스만 1세의 군대 뿐만이 아니라 그의 동맹인 파플라고니아와 메난드로스 강 인근 튀르크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튀르크의 돌격이 시작되자 전투에 관심없었던 알란족들이 철수 하기 시작했고, 동로마군의 전열은 붕괴되었다. 요르요스 무잘론은 남아있는 군사를 이끌고 니코메디아로 후퇴했다.

2.3.4. 카탈루냐 용병

미하일 9세의 실패와 바페오스 전투 전투의 패배 이후 안드로니코스는 지중해에서 끗발좀 날리던 루지에로 데 플로르가 이끄는 알모가바르 병종의 카탈루냐 용병들을 고용했다.

카탈루냐 용병대는 명성대로 여러번 튀르크인들에게 승리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정복지를 제대로 관리하기는 커녕 튀르크인들보다도 더 잔인하고 야만적인 통치를 벌였고, 약탈까지 저지르며 미하일 9세와 여러번 충돌했다.

1305년 이러한 횡포를 도무지 견디지 못한 동로마는 루지에로 데 플로르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이에 카탈루냐 전우회는 대장을 죽인 동로마에게 크게 분노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적이었던 튀르크인들과 함께(...)[5]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테살리아를 약탈하고 황폐화했다. 거기에 아테네 공국테베를 정복하여 아예 거기에 눌러 앉아 1390년대에 피렌체에 조져지기 전까지 아테네 공국을 통치했다.

2.3.5. 방어선의 붕괴

튀르크인들은 계속하여 동로마 제국령 아나톨리아를 공격했고 대부분의 비티니아 일대는 오스만 1세오르한의 공격으로 상실되며 안드로니코스 2세의 치세 말기에는 프루사까지 잃는다.

오스만 베이국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카라시 왕조는 1296년 이후 팔로카스트론(Paleokastron)을 포함한 미시아 강가 일대를 정복한 것을 시작으로 1310년에 아이딘이 스미르나를, 사루한은 1313년 마그네시아를 정복했으며 게르미얀(Germiyan)은 1328년 시마브(Simav)를 점령하는 등 아나톨리아 서부 대부분이 튀르크인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2.4. 불가리아와 전쟁

토도르 스베토슬라프제2차 불가리아 제국 역시 큰 문제로 다가왔다. 그는 1305~1307년간 미하일 9세를 박살내고 북부 트라키아 일대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 전쟁은 미하일 9세의 딸을 불가리아 차르와 혼인시키며 종결되었으며 이후 그의 장손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와 동맹을 맺고 안드로니코스 2세와 내전을 치른다.

2.5. 팔레올로고스 내전 (1321~1328)

1320년 장손 안드로니코스 3세는 자신의 아내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의 형제이자 안드로니코스 2세의 둘째 손자인 마누일을 죽였고 이에 충격을 받은 이들의 아버지 미하일 9세가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살인과 방탕하고 불성실한 행동으로 할아버지 안드로니코스 2세의 분노를 산 안드로니코스 3세는 후계자 자격을 박탈 당하고 만다. 계승권을 잃게 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1321년 부활절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탈출해 아드리아노플로 가서 지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 결과 이후 요안니스 6세가 되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시르얀니스 팔레올로고스 등의 지지자들을 모으는데 성공했다.

시르얀니스는 노황제와의 협상을 위해 대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고 1321년 6월 6일 양측은 평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안드로니코스 2세와 공동황제에 오르며 트라키아, 마케도니아를 다스리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함한 나머지 영지들은 안드로니코스 2세가 다스리게 되었다. 그러나 두 안드로니코스들은 말이 공동황제였지만 사실상 별개의 국가였으며 두 세력 모두 자유롭게 외국과 조약을 맺었다.

1321년의 평화는 그리 오래 유지되지 못했는데 안드로니코스 3세 진영에서 권력다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시르얀니스는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와 안드로니코스 3세의 관계를 질투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얻은 보상이 너무 적다고 생각해 안드로니코스 3세에게 역심을 품고 있었다.[6] 결국 시르얀니스는 1321년 12월 안드로니코스 2세 쪽으로 진영을 갈아탄다.

시르얀니스는 진영을 갈아탄 대가로 안드로니코스 2세로부터 메가스 둑스라는 작위를 받았으며 노황제에게 내전을 재개하라고 부추겼다. 허나 콘스탄티노플 인근 도시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안드로니코스 2세는 평화를 원했고 손자와 할아버지는 1322년 6월 영토를 2차 내전 이후로 원상복귀하는 것으로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시르얀니스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어 버렸고 그는 분노하여 안드로니코스 2세를 죽이고 자신이 황제가 되려는 쿠데타 계획까지 세웠으나 이 시도는 실패했고 시르얀니스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다. 하지만 농노들의 지속적인 반란이 문제가 되어 1327년 2월 두 안드로니코스 사이에 새로운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번 내전에는 다른 발칸반도의 국가들 역시 참여했으며 안드로니코스 2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와, 안드로니코스 3세는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와 동맹을 맺고 내전을 치른다.

마지막 내전의 무대는 마케도니아였다. 여러 전투 이후 테살로니카를 포함한 마케도니아의 도시들이 안드로니코스 3세의 손아귀에 들어오자 이런 승리로 고취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콘스탄티노플 공격을 계획했고 1328년 5월 드디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입성 이후 그는 안드로니코스 2세를 자진 퇴위하게 압박했고 안드로니코스 2세는 자진 퇴위하고 2년 후에 수도원에서 사망한다.

3. 가족관계


현재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 카를 폰 합스부르크의 800년 전 조상 중 한 명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본가는 후계 없이 단절되었지만, 이탈리아몬페라토 변경백국을 지배하고 있던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분가의 조상이 안드로니코스 2세였고, 이 분가는 남계는 끊겼으나 여계 쪽으로 자손을 남기는데 성공하여 그 후손이 합스부르크의 개조가 되었다.

4. 참고 자료


[1] 서방의 가톨릭 세력과 동방의 튀르크계 적들은 동로마 제국을 항상 위협하던 양면의 적들 그 자체이지 미하일 8세든 누구든 특정한 황제의 책임이라 하기 어려운 문제이지만 미하일 8세의 경우 찬탈로 인해 부족한 정통성과 이를 만회하기 위해 감행한 무리한 원정 및 인기영합적 정책,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심각한 재정의 소모 및 국력의 피폐화와 민심의 이반, 여론의 분열등이 심각한 문제였다.[2] 황제 본인도 당장 경제가 안좋아서 어쩔 수 없었지만 이것이 멍청한 짓임은 알고 있어서 경제 사정이 어느 정도 나아지자 뒤늦게나마 군사력 복구에 힘썼고 그 결과 육군은 그의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 때에 미하일 8세 수준은 아니더라도 다시 적극적인 군사원정이 가능할 정도로는 회복되지만 해군은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도 회복되지 못했다.[3] 특히 해군 해체 건은 오늘날에 봐도 쉴드가 불가능하다. 이때 해체된 해군 전력이 나중에 오스만 해군으로 편입되거나 해적이 되어 제국에게 향한 칼날이 되었기 때문이다.[4] 미하일 8세의 소산드라 쿠데타 당시 살해당한 섭정 요르요스 무잘론과는 동명이인이다.[5] 물론 적대했던 튀르크인이 아닌 동로마 내에 있던 튀르크인 용병들을 설득한 것으로 추정된다.[6] 거기에 확실친 않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가 그의 부인을 탐하기까지 해 완전히 마음이 떠났다는 설도 있다.[7] 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이슈트반 5세와 쿠만의 에르제베트의 딸.[8] 모레아의 데스포티스 디미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와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