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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4:14:51

슈룹/시대착오적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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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
2.1. 정치 관련
2.1.1. 역병 구제에 반대하는 관료들2.1.2. 전염병 처리 문제2.1.3. 성남대군의 교태전 및 의금부 침입2.1.4. 대신들의 폐세자 시도2.1.5. 대비에게 육조의 임명권을 약속하는 음모2.1.6. 폐세자빈을 주청하는 대비2.1.7. 태인세자의 독살의 진실을 밝히는 이호
2.2. 종친 관련
2.2.1. 교육 기관2.2.2. 대군들의 교육 방기
2.3. 어휘 관련
2.3.1. 물귀원주2.3.2. 한어2.3.3. 거벽2.3.4. 본궁 호칭2.3.5. 왕자와 후궁에 대한 마마 호칭 사용2.3.6. 민휘빈
2.3.6.1. 해소
2.3.7. 책봉례를 치르지 않은 왕세자빈에 대한 빈궁 호칭
2.4. 예법 관련
2.4.1. 왕위 승계를 고려하지 않은 설정2.4.2. 매우 좁은 중전의 입지2.4.3. 자식에게 반말을 내뱉는 후궁2.4.4. 윤 왕후는 어째서 윤 왕후로 불리는가(★)
2.4.4.1. 개연성2.4.4.2. 해소
2.4.5. 선대왕의 후궁이었던 조 귀인이 어떻게 현 대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가
2.4.5.1. 의문이 남는 해소
2.4.6. 성남대군에게 반말하고 무례하게 구는 의성군2.4.7. 승정원에 직접 찾아간 중전2.4.8. 연필을 쥔 중전2.4.9. 곡좌를 무시하는 자리배치 방식2.4.10. 세자의 시호 관련
2.5. 건물 관련
2.5.1. 태화전2.5.2. 포스터의 고려 궁궐2.5.3. 건물 위치
2.6. 소품 관련
2.6.1. 도자기2.6.2. 청화백자 붓2.6.3. 왕세자빈 적의2.6.4. 왕세자의 방심곡령 착용


1. 개요

드라마 슈룹시대착오적(anachronistic)[1] 묘사를 지적한 문서.

먼저 이 드라마가 실존 모티프가 아닌 가상 인물, 가상 설정이 더해진 가상의 역사극이므로 역사적 개연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서 지나친 잣대를 들이대기는 좀처럼 어려운 편이라는 의견이 있으나, 가상 인물이나 가상 설정이라 하더라도 시대 배경을 엄연히 현존했던 조선이라는 나라로 설정하였으므로 관련된 논란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가상의 나라 이름을 설정했다면 논란이 적었을 것이다.[2] 극의 기본적인 모티프 자체가 '현대의 극성 학부모들을 조선의 왕궁으로 옮겨본다면?'에 가깝다.

다만, 해당 문서에서는 조선왕조를 모두 통틀어 그 당시에 나올 수 없는 예법이나 소품 등이 개연적인지 따져 볼 수는 있다. 즉 역사 사실을 토대로 '개연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특히 중국풍과 관련된 논란은 가상역사물, 퓨전 사극의 전형적인 딜레마를 보여준다. 가상역사물의 특성상 어느정도 고증에 어긋나는 현대 사회 반영이나 창작 요소는 당연하지만, 의도적으로 고증을 뒤틀어 시대상에 맞춘 적절한 재해석이나 현대적인 창작이라고 생각했던 요소가 오히려 다른 역사의 고증에 부합하는 상황이 발생해 버리는 것. 퓨전 사극은 창작이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역사의 비주얼을 차용하는 만큼 창작과 변형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으며, 그러다보니 나름 변형시켰다는 게 한국사의 다른 시대나, 문화권을 어느정도 공유하는 중국사, 일본사의 요소와 충돌하는 일이 잦다. 얼핏 보면 문화권 특성으로 뭉뚱그릴 수 있어 보여도 실제로는 아주 사소한 단어 하나, 글자 하나 차이만으로도 한국사와 중국사, 일본사의 개념이나 용어가 구분되는 경우는 흔하다.

문제는 중국, 일본과의 역사 갈등 문제 때문에 역사 및 역사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간접적인 경쟁관계가 되면서 이것이 매우 민감한 문제가 되었다는 것. 결국 창작 요소 하나하나마다 외국 고증과 충돌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파악하고 그럼에도 부득이 집어넣게 되면 그에 대한 해명이나 반박 장치를 마련해야하기 때문에 정통 또는 팩션 사극 고증 재현 이상으로 수고로움이 더해진다는 소리이다. 그야말로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상황으로, 그렇다고 나름 노련한 국내 드라마 제작진들조차 한국사 고증을 재현하는 것만도 어려워하는 마당에 외국의 역사 고증이나 콘텐츠를 섭렵하는 데도 한계가 있으니 결국 이는 역사 자체보다 극의 전개와 미술적 요소를 위해 역사에 대해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비주얼을 차용하는 것을 우선하는 가상역사물의 공통적이고도 고질적인 딜레마라고 할 수 있다. 정통 사극 제작이 위축되고 퓨전 사극 제작이 늘어난 이유 중의 하나가 고증 재현 문제에 대한 반발로부터 자유로운 극의 전개와 연출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아이러니한 상황.

2. 목록

추후 극중 전개를 지켜 볼 필요가 있는 쟁점에 대해서는 ★로 표시한다.

2.1. 정치 관련

2.1.1. 역병 구제에 반대하는 관료들

1화에서 영의정을 위시한 관료들이 전염병 확산 문제를 이유로 전염병이 번진 해당 마을을 통제하고, 그 주민들이 굶어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국왕의 구휼 집행을 반대한다. 이것이 실제 조선 왕조의 대책과는 달라서 비판점이 되었다.

실제로 현대 정부가 그러는 것처럼 조선에서도 역병 발생 지역의 인구 이동 통제를 실시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대신 주민들에게 의료진, 의약품, 생필품, 식량 등을 제공하는 구휼 정책 또한 같이 시행하였다. 이것은 사상적 이유와 현실적 이유가 있다.

사상적 이유로, 조선 왕조는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을 국시로 하여 세워진 왕조이다. 그 유교에서 중시하는 것이 바로 백성이다. '백성은 임금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임금은 그러한 백성을 자식과도 같이 돌보아야 한다(군사부일체).'라는 유교식 충효사상과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라는 민본주의가 대표적이다. 당장 조선 세종부터가 '民惟邦本, 食爲民天'[3]이라고 못을 박아버렸다.[4] 저 '民惟邦本'이라는 말부터가 사서삼경에 나오는 중요한 문구여서[5] 당시 과거 시험을 준비하던 선비들이 달달 외워야 하는 문구이기도 했다. 살려볼 수 있는 백성을 죽도록 방치하는 것 자체가 조선의 건국 이념상 말도 안 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현실적 이유로는 더 간단한데, 역병으로 고통받는 상황에서 생필품과 식량까지 통제된 상태라면 백성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온전히 아사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개 유민이 되어 떠돌게 된다. 그러면 전염병이 더욱 확산되는 결과가 초래된다. 정말 심할 경우 전염병에 죽나, 굶어 죽나 어차피 매한가지니 한 번 찔러라도 보자며 아예 민란이나 반역이 일어날 수도 있다. 유민이 대량으로 발생하든 민란이 일어나든 전염병은 확산되어 인구는 감소한다. 이것은 국력의 약화를 의미한다.

이런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조선 왕조는 기근이나 역병 대처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이와 관련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된 조선 세종의 '民惟邦本, 食爲民天' 발언도 세종이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을 구휼할 것을 명령할 때 덧붙인 것이다.

아무래도 국왕의 애민 정신이나 정치 활동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 삽입한 장면으로 보이는데, 한국 사극의 병폐인 "악한 양반 - 선한 국왕" 구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구중 궁궐 안에 갇혀 민중들이 어찌 사는지도 모르는 국왕이 민중들의 삶에 관심이 많고 온정적인 반면, 국왕에 비해 민중들에게 훨씬 더 가깝고, 그들의 삶을 더 잘 관찰하는 데다가 잘못이나 부정, 학정을 저지르면 삼사나 반대파로부터 탄핵 당할 수도 있는 양반들은 마을 봉쇄 및 구제 포기가 가져올 후폭풍을 생각하지도 않고 덮어놓고 구휼을 반대하는 무능하고 악한 모습을 보였다.
경신대기근 당시 조정과 양반들의 상황을 보면 양반들은 먹고 살만하니 그랬다는 식의 "악한 양반 - 선왕 국왕''이라는 구도가 어째서 실제와는 다른, 뻔한 스테레오 식 구도인지 알 수 있다.

2.1.2. 전염병 처리 문제

4화에서 보검군이 의료진과 환자 같은 밀접 접촉이 불가피하여 구휼은 허용하되, 의료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위 문단에 상술했듯이 조선 왕조는 전염병이 발생하면, 구휼은 물론 의약품을 지원하고 의원을 파견했다. 만약, 이렇게 되면 군 병력이 격리 지역 통제 및 생필품 지급만 담당하고 격리 지역을 방치한다는 것이 된다.

흑사병처럼 그 당시 기준으로는 도저히 치료가 불가능한 질병으로 묘사되지도 않는데, 생필품만 제공하고 의료를 포기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만약 도성 내부나 인근 지역에서 환자가 발생한다면, 격리 지역의 상황을 인지하고 있기에 필사적으로 감염 사실을 숨기거나 도주할 것이다. 누가 치료조차 안 해주는 생지옥에 끌려가 죽음을 기다리려 할까?

게다가 도성 내부 주민들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격리 지역으로 걸어 가서 방화까지 하고, 약재상들도 쉽게 경비를 뚫고 약재를 공급했다. 이는 격리 지역 내부의 주민들도 언제든 빠져 나갈 수 있다는 게 된다. 이렇게 되면, 조정과 임금은 그저 격리 지역 주민의 양심만 믿고 그들에게 가만히 갇혀 죽을 것을 종용한 셈이다.

의성군은 한술 더 떠서 격리 지역 그 자체를 주민들과 함께 소각할 것을 주장했다. 민본주의와 인의, 덕치를 근본으로 삼는 유교가 국시인 조선 왕조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말이며, 노약자와 아동들까지 있는 곳에 전염병이 돈다는 이유로 불을 지르는 것은 유자(儒者)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어도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밀접 접촉이나 격리 해제, 역학 조사 등을 운운하는 것으로 보아, COVID - 19와 관련 지은 것으로 같지만, 지나치게 그것에 집중하여 현실성, 재현성을 잃어버렸다. 작가진은 악역과 주인공 간의 차이를 강조하고,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악역들을 주인공 보다 훨씬 더 멍청하게 만드는 쉬운 방법을 썼다. 그 결과, 의성군의 지능은 심각하게 감퇴되었고 캐릭터성도 망가져 버렸다.

이렇게 되면, 의성군은 대군들을 위협하는 강력한 악역이 아니라 평소에 공부도 안 한 성남대군의 발끝도 못 따라잡는 멍청이가 되어 버린다. 대비와 영상과 같은 강력한 우군을 배경으로 하고, 종학에서 좋은 자리에 앉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관의 쪼인트를 깔 정도로 학업에 열중하는 의성군의 모든 것이 평소에 아무 것도 하지 않다가 잠시 계기를 만나 각성한 성남대군의 재능에 그 의미를 완전히 부정당한 것이다. 의성군이 보위 운운한 것은 이제부터 무능력자의 망상에 지나지 않는 게 되고, 의성군의 머리에 익선관을 씌워 주려는 모든 시도는 애초부터 억지였지만, 설득력을 더 잃게 되었다.

2.1.3. 성남대군의 교태전 및 의금부 침입

5화에서 성남대군이 교태전에 잠입하면서 불화살 2발을 쏘아 금군들의 주의를 돌리는데, 실제로 이랬다간 역도의 무리가 침입한 것으로 간주되어 교태전을 폐쇄하던 병력은 즉각 주라를 불어 비상을 알리고 금군 전체가 전각들을 샅샅이 뒤졌을 것이다. 의금부 역시 가장 엄중하게 지키는 곳인데, 너무 쉽게 뚫려 버렸다. 물론, 극의 빠른 진행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약간은 방법을 달리하는 게 더 좋았을지도.

2.1.4. 대신들의 폐세자 시도

5화에서 병판과 이판이 세자가 고작 며칠 쓰러졌다고 폐세자 운운했다. 상소를 올린 자는 구족을 멸하고, 오랜 법식 운운한 이판과 인정전 앞에 엎드려 폐세자를 청한 우의정과 병판, 그외 대신들은 오랜 법식에 따라 능지처사당했을 것이다.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무력한 세자였던 경종도 이 정도로 능멸을 당하지는 않았다. 영조의 눈밖에 난 사도세자도 대신들이 두려워하여 비행을 쉬쉬해 늦게 영조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미래 권력인 세자는 신하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대신들이 폐세자를 주장하는 건 왕이 세자를 바꾸기로 결심한 게 확실해야 가능했다.[6] 더군다나 작중 세자가 세손을 낳은데다 중전 소생의 왕자가 다섯이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당장 세자를 폐해봤자 멀지않은 미래에 대비가 된 중전과 왕이 된 세손이나 대군에 의해 가문이 제대로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정상이었다면, 세자의 환후를 돌보기 위해 명의를 찾거나, 명산대천에 기도를 올리는 게 맞을 것이다. 대신들의 망동은 극중의 긴장감과 대립 구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의도로 선보인 듯 하다.

2.1.5. 대비에게 육조의 임명권을 약속하는 음모

11화에서 위기에 몰린 황숙원[7]과 황숙원의 아버지인 황원형이 대비를 찾아와 무려 조선의 행정기관인 육조와 내명부의 인사권을 양도하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의성군을 밀어달라는 청탁을 넣었고 대비가 그에 응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내명부의 인사권이야 원래는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이 가지고 있는 것이고 왕실의 웃어른이자 중전의 시어머니가 되는 대비가 인사권에 첨언하거나 간섭하는 건 별로 이상할 게 없는 부분이나 육조에 대한 인사권은 이야기가 다르다. 한 예로 고려 시기의 천추태후나 조선 시기의 문정왕후 역시 왕의 모후이자 왕실 최고어른이라는 점을 내세우며 자기 측근의 세를 키워 정권을 좌지우지 하는 방식을 사용했지 직접적인 인사권을 가지진 않았다.[8]

즉, 극 중에서 대비가 의성군을 밀어주는 조건으로 육조의 인사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다른 것도 아닌 '왕의 권력' 중 일부를 대비가 직접 쥐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유학을 숭상하는 조선에서는 '대역무도'에 해당될 수 있는 부분이며[9] 아무리 영의정 가문과 결탁했다 해도 다른 종친들과 대신들, 그리고 유생들이 가만 두고 볼 리가 없다.[10][11]

이러한 점은 이 드라마가 비록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는 하지만 시대 배경이 조선이라는 점을 망각하고 얼마나 사실성이 떨어지게 묘사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게 중국이라면 매우 자연스러운 설정이다. 중국에선 실제로 측천무후자기 아들인 황제를 끌어내리고 본인이 스스로 황제에 오르면서 3성 6부의 권한을 통째로 가진 사례가 있다.[12] 이 드라마에 중국 냄새가 나는 것이 한둘이 아니라 문화공정이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상황이고, 대비가 육조의 권한을 가지려는 것도 이 논란과 일맥상통하다.

2.1.6. 폐세자빈을 주청하는 대비

간택할 때에 지병이 있는지를 확인했고, 문제 삼지도 않았는데, 대비는 세자빈으로 간택된 뒤에 대비 자신의 정치적 필요 때문에 갑작스럽게 폐세자빈을 운운했다.[13]

실제로 병으로 인해 세자빈 간택이 취소되고 후궁인 양제로 강등된 경우가 있긴 하다. 순회세자의 후궁 양제 황씨로, 간택 당시 지병이 있음을 숨기고 간택에 참여하고 이후 복통을 호소하며 1년씩이나 가례를 미뤄 보다못한 왕실측에서 강등시킨 것. 물론 이 경우는 간택 당시 지병을 숨긴 것인 데다가 이 경우에조차 병 때문에 폐빈을 시키긴 뭐한지라 강등만 시켰다.[14] 게다가 황씨를 양제로 강등할 당시 강등에 반대하는 목소리까지 있었다[15].

물론 유전병이라면 문제가 되는 것이 맞으나 이는 유전과 관계 없는 병인데다 상술했듯 간택 과정에서 병이 있음을 확인했음에도 폐빈 운운하는 것은 동궁만이 아닌 왕실 전반이 흔들릴 수 있는 행위일 뿐더러 군권을 틀어쥐고 있는 병판을 건드려 괜한 화를 자초하는 일이기에 거의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심지어 21세기인 현대 사회에서도 이혼은 이래저래 얽힌 복잡한 문제때문에 여러모로 내리기 쉽지 않은 결정인데, 이 시대에는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그렇기때문에 보통 칠거지악이 폐비 사유라고 해도 인현왕후를 제외하고 실제 조선시대에서는 후사를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폐위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16] 만약 극 중 윤청하처럼 후사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문제가 된다면 세자의 후궁을 새로 들이면 될 일이다. 그렇지만, 이 드라마의 대비는 종묘 사직과 왕실을 위태롭게 하는 짓만 골라서 하는 광인으로 설정된 인물이고 존재 자체가 역사적 오류이기에[17] 문제 삼을 일은 아니다.

2.1.7. 태인세자의 독살의 진실을 밝히는 이호

다른 오류들은 모조리 애교로 보일 정도로, 본작에서 가장 말이 안되는 오류.

물론 태인세자를 독살한 어머니의 악행을 드러내는 것은 당연히 옳은 일이다.[18] 문제는 이호가 이라는 점. 이 추악한 진실을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호가 직접 밝힌다는 것은 핵폭탄을 터트리는 것과 같다. 부정한 방법으로 아들을 왕위에 올린 대비와 당사자인 이호는 물론이고 중전인 임화령, 이호의 자식들의 정통성은 큰 타격을 입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가루가 된다.[19]

2.2. 종친 관련

2.2.1. 교육 기관

종학은 계속 개편과 쇠퇴를 반복한 기관으로 영조조에 폐지되었다. 종학청 건물은 임란 중에 불에 타서 선조가 유영경 등과 함께 재건을 논의한 바 있다. 이후, 왕손의 교육은 종실과 관련한 업무를 맡아 보는 종부시에서 전담했다. 또한 종부시는 2화에서 언급된대로 왕손들의 성적과 품행도 평가했다.

현재 종학청이나 종부시 모두 없어졌기에 작품 내에서의 종학은 전주향교에서 촬영되었다. 대비가 숙종조에 세운 보양청을 언급한 것이나 가체를 하지 않은 것, 이황이 집필한 주자서절요가 존재하는 것을 보면, 조선 후기의 상황을 일부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2.2.2. 대군들의 교육 방기

윤 왕후가 대군들이 왕세자를 위협할 수 있기에 자신이 낳은 4명의 대군들에게 기본적인 교육 외에 따로 제왕 교육을 시킨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왕세자라는 지위는 그렇게 쉽게 흔들릴 정도로 만만한 지위가 아니다. 세자의 형제가 세자를 위협하려면 경원대군이나 영창대군, 연잉군처럼 아예 세자가 왕후에게 견제를 당하고 있어서 그 견제패로서 지원을 받는 정치적으로 특수한 상황이어야 했다.[20]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조차도 형님이 세자일 때부터 숨을 거둘 때까지는 철저히 얌전한 저자세로 굴었고, 본인의 야심이 아니라 신하들에게 추대되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이복형의 왕좌를 빼앗은 셈이 된 진성대군중종반정 전까지는 뭘 했는지 기록도 없을 정도로 조용히 지냈다. 세자-왕이 되지 못한 왕자들은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나 성종의 형 월산대군처럼 쓸데없이 야심 보이지 말고 유유자적 사는 것이 미덕이었다는 것.
물론 그 중에서도 이레귤러급 망나니는 있었다지만 양녕대군도 어쨌든 세자의 권위를 위협하지는 않았다.[21] 사실 이건 최근 국내 작가들 사이에서 전반적으로 지나치게 형제간 궁중 암투를 부각시키는 경향이 생긴 면으로 인해 일어난 것이긴 하다.
그러나 제왕학을 따로 교육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지, 아예 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곤란했다. 원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나라이든간에 그 나라의 최상류층에 속해있는 귀족이나 왕족들은 그에 걸맞은 교양을 갖추기 위해 최고의 교육을 받는 것이 의무시되었다. 브리저튼같은 드라마에서 자주 묘사되는 것처럼, 유럽 귀족들이 최고급 교육을 받으면서 우아한 기품을 갖추는 것은 조선의 왕자들에게도 해당이 되었으며 조선에 큰 영향을 미친 중국 왕조들은 제왕 문학관을 설립해 종친들을 교육했다.
게다가 조선은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아 학문 수양을 아주 중시했고, 그런 나라의 왕족이 기초적인 학문도 부족하면 왕실의 체면이 깎일 수 있었다. 따라서 왕손들도 국가에서 정한 교육 과정을 반드시 이수해야 했다. 그리고 아무리 세자의 권위가 확고하다지만 수명도 확고할 수는 없었고, 세자가 자식도 없이 요절하면 동생 대군이 대신 왕위를 이어야 하니, 당장은 제왕학을 가르치지 않아도, 만약을 대비해 유사시 교육 받을 수 있는 기본 소양은 갖추어야 했다. 바보 행세를 한 건지 정말 지적장애가 있었는지 그 실상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긴 하지만 어쨌든 좀 모자랐다고 알려진 제안대군도 '예법을 지키는 데는 흠이 없었다'고 기록된 만큼 적어도 예법 정도는 배웠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대군들이 세자의 지위를 위협할 수 있으니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는 말은 비유하자면 수능을 준비하는 평범한 고3 학생이 '내가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면 서울대 수석 합격생의 자리를 빼앗을 수 있으니 공부를 안 하겠다' 정도에 가까운 말이라는 것이다.

2.3. 어휘 관련

2.3.1. 물귀원주

2화에서 '물귀원주(物歸原主)'의 자막 표출을 한국식 정자체 (돌아올 귀)가 아닌 중국식 간체자 로 표기하였다는 것이 중국식 색채라는 의견이 있다. 간체자는 19세기 말에 비로소 대두됐고[22] '물귀원주'가 최초로 쓰였다는 1627년 명나라 소설 《初刻拍案惊奇》[23]에서조차 归가 아닌 歸로 표기되어 있다. 21세기 현재 정자를 쓰는 대만, 홍콩, 한국을 제외하면 중국만 归로 표기한다.

간체 표기 이외에도, 단어 자체가 국내에서 쓰인 용례가 없는 그냥 중국어라는 점이 비판을 받았다. 어떤 한자성어가 중국 본토에서 유래됐더라도, 한국에 정착한 뒤 역사를 거치며 관용어로서 잘 쓰이면 사자성어, 고사성어 등에 포함되어 국어사전에, 혹은 넓게 잡아 한자사전에라도 등재되는 것이 수순이다. 그러나 '물귀원주'는 네이버 사전 기준으로 중국어 사전에만 나온다. 즉, 중국에서 수입한 고사성어기는커녕 조선에서 쓰인 적이 없는 중국에서나 쓰이는 중국 한자성어라는 것이다. 이는 구글링으로도 알 수 있는데, 대부분 중국어 관련이거나 해당 드라마로 인해 최초로 언급된 기사들만 나온다.

중국 웹 백과사전 바이두 백과와 바이두 한어사전[24]에서 "물귀원주"의 의미와 출전 등을 확인할 수 있다. 物归原主(成语) - 百度百科 物归原主 - 百度汉语

이 탓에 검수하는 사람이 중국인이냐는 등 전반적인 검토에 대한 아쉬운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철인왕후 제작사라는 트위터 발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지만, 슈룹의 제작사 스튜디오 드래곤 홈페이지의 작품 목록에는 버젓이 철인왕후가 있다. 결국 재방송 및 다시보기 방영분에서 간체자는 정체자로 수정됐다. 슈룹, '물귀원주' 자막 논란에 재빨리 수정(기사)

2.3.2. 한어

2화에서 계성대군이 중국어를 한어(漢語)[25]로 칭했다. 실록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에는 한어와 중국어란 표현을 혼용했다. 사실 오류는 아니지만, 시청자나 배우들에게나 중국어란 단어가 익숙하고, 극중 대사가 모두 현대어를 혼용하는 상황인데 굳이 한어라고 대본을 작성한 것은 조금 불필요했다.

2.3.3. 거벽

2화에서 중전이 거벽을 언급하는데, 자막으로 거벽을 현대의 코디네이터로 비유했다. 그러나 실제 거벽은 답안지를 대신 작성해주는 대리시험에 가깝다. 다만, 2화의 거벽들은 현대의 쪽집게 강사처럼 묘사되기에 극적 각색이라고 하면 넘어갈 수는 있다. '실제 역사의 거벽은 이러했지만 본작에서는 이렇게 각색했다'는 식으로 설명이 좀 더 되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2.3.4. 본궁 호칭

5화 말미에서 중전이 '본궁(本宮)'이라는 자칭을 사용하였다. 이 본궁이라는 호칭은 청나라 사극에서 '한 궁의 주인'인 황후, 황태자비, 공주, 빈 이상의 비빈[26]들이 사용한 것으로써, 조선을 포함한 한국사에 포함되는 나라들에서는 사용례가 없고 국어사전에서도 호칭으로는 등재된 적이 없는 단어이다.[27] 당연한 것이 조선왕조에서는 궁중 여인이 내명부의 주인일지언정 황제국처럼 궁을 당연히 따로 가지는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중전의 '전'은 궁이 아니라 궁 내의 '전각'(교태전)을 일컫는다. 즉 내명부의 안주인이 궁궐 중심의 전각에 있어서 중전이라 부르는 것이다. 다만 남성의 경우는 세자를 '동궁'이라 부르는 경우는 있었다. 이 또한 궁궐 동쪽에 법제상으로 세자가 쓰는 별궁을 궁궐 동쪽에 두기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조선왕조 시대 궁중 여인이 자신을 이를 때 이르는 말로는 아랫사람에게는 나, 윗사람에게는 첩, 소첩 따위의 용례를 사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그간 제작되어 온 조선시대 사극에서도 앞에 열거한 자칭을 사용하였다. 일각시청자 전체에서 불거지고 있는, 이 시대극이 중국풍이라는 평가는 이런 사실에 기반한다. 중국 시대극에서는 궁궐의 여인이 '본궁'이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장면이 매우 빈번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현대에 들어서는 황실이 폐지된 중국에서는 더 이상 쓸 일이 없는데, 스스로 칭제하고 있는 일본에서 황실 가족(친왕)들에게 "ㅇㅇ宮"이란 '궁호'를 내려준다. 그리고 중국에서 한국 사극을 수입해가면 제후의 격식에 맞는 조선왕조의 칭호(과인, 세자, 중전 등)를 죄다 황제국의 격식(짐, 태자, 황후 등)으로 번역해버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논란이 거세지자 종영 이후 박바라 작가는 인터뷰에서 본궁이라는 호칭은 '본인이 중궁'이라는 말의 약자로 쓰인 것이라고 해명을 했다.# 당연히 말이안되는 해명이다.

2.3.5. 왕자와 후궁에 대한 마마 호칭 사용

본작에서는 후궁인 귀인과 왕자인 대군과 군에게 마마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다. 마마 호칭은 조선 궁중 예법상 대비와 왕, 왕비, 왕세자, 왕세자빈, 세손, 세손빈에게만 사용할 수 있는 최고존칭으로, 후궁과 왕자에게는 사용할 수 없었다. 대군과 군에게는 자가, 후궁에게는 마마님[28]의 호칭을 사용해야 함이 옳았다.[29]

또한 대군의 자식은 아버지를 말그대로 '아버지'라고 부름이 옳다. 왕과 세자의 자식만이 부를 수 있는 아바마마 호칭을 사용한 것도 고증 오류. 물론 이정도는 거의 대부분의 사극에서 지켜지지 않는 고증 오류 중 하나인지라 참작의 여지는 있다.

2.3.6. 민휘빈

극 중 세자빈 더러 민휘빈이라 지칭하는데, 조선 극초기라면 모를까 세종 재위 중후반부터는 남편인 세자가 버젓이 살아있는 세자빈에게 봉호를 붙이지 않았다.[30]

다만 세자가 먼저 사망하고 세자빈이 생존해 있는 경우에 빈호(嬪號)를 수여하여 책봉하기는 했었다. 의경세자빈이었던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세자빈호는 정빈이었다가 수빈으로 고쳤고, 사도세자빈 홍씨는 혜빈이었으며, 효장세자빈이었던 효순왕후는 현빈으로 책봉되었었다.
2.3.6.1. 해소
7회 중반부에서 세자빈을 폐서인하는 과정에서 이호가 '휘빈 민씨'라고 표현하였다. 즉 '민휘빈'은 시호가 아닌 것이다. 이를 보아서는 세자 사후 빈호로 지칭된 소혜왕후[31], 공회빈 윤씨[32], 효순왕후[33], 혜경궁 홍씨[34]처럼 세자 사후 휘빈의 봉호를 부여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맞다.[35]

더 나아가서 생각하면 작가가 후궁들을 직위+성씨 구조(예로 귀인 황씨)로 인물 표기한 것이 아니라 성직위(황귀인, 고귀인, 태소용 등)으로 나타낸 것으로 볼 때 민휘빈 역시 성+직위 형태로 하였다가 섣부른 오해를 야기한 것일 수도 있다.

2.3.7. 책봉례를 치르지 않은 왕세자빈에 대한 빈궁 호칭

12화에서 삼간택에서 낙점된 윤청하에게 빈궁이라고 호칭하였다. 빈궁이라는 호칭은 정식으로 왕세자빈 책봉 교지를 받은 이에게 사용할 수 있는 호칭이다. 간택된 왕세자빈에게는 빈씨(嬪氏)라고 호칭함이 옳다. 더 나아가서 설명하면, 간택된 왕비는 책봉 전까지 비씨(妃氏)로 호칭하였다.

2.4. 예법 관련

엄밀하게 말하면 1화에서 쟁점이 된 궁중 예법은 조선보다 청나라에 더 가깝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조선 시대극이라기엔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전개가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실제 궁중예법을 어길 거면 철인왕후와 같이[36] 100% 무근본 컨셉으로 코믹하게만 갔어야 태클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무근본 코믹 컨셉으로 가더라도 시대배경 상 지켜야 할 개연성은 지켜줘야 납득이 가능한 것이다. 슈룹쪽은 정통 사극을 표방하고 있기에 더욱 문제가 된다.

2.4.1. 왕위 승계를 고려하지 않은 설정

선대왕 시절, 외척을 물리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세자는 물론 왕비와 나머지 대군들까지 죽거나 쫓겨났고 그 덕에 '이호(최원영扮)'가 세자가 되어 왕으로 등극했으며 그 와중에 '대비(김해숙扮)'은 후궁 시절 엄청난 기여를 한 것으로 설정됐다. 이런 전례가 있다 보니 현 시점에서 세자의 위치에 문제가 생기자 '현 중전(김혜수扮)'과 중전의 나머지 대군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대비는 예전처럼 세자는 물론, 중전의 자리까지 다시 갈아 치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현실의 역사였다면 설령 세자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고 해도 왕이 젊으니 원손이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정석이며, 국왕의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닌데다가 설령 일찍 훙서한다고 치더라도 대왕대비나 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 그만이다. 그게 아니라도 다른 대군이 세자 자리에 오르는 것이 절대불변의 철칙이다.[37][38]

사례들을 살펴보자면, 먼저 원손이 아버지인 세자 사후 세손으로 왕위에 오른 가장 유명한 사례로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있다. 또 세자가 공석이 된 후 동생인 다른 대군이 왕위에 오른 사례라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조선사 최고의 성군 세종이 있으며, 의경세자 사후 왕위에 오른 예종이나 소현세자 사후 왕위에 오른 효종도 있다.

대군이 없는 상황에서도 동생이 형을 제치고 세자가 된 경우가 있긴 한데, 바로 광해군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친형 임해군이 왕으로서의 자질을 논하기는커녕 개인적인 인성조차 모두가 진저리칠 정도였다는 점도 있었고, 부왕 선조가 정비 소생 대군을 한 20년 정도만 빨리 얻었어도[39] 후계 구도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조선사에서 적장자가 무사히 세자를 거쳐 왕위에 오른 사례가 의외로 그렇게 많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조선은 종법과 절차에 의거해서 세자를 선정하고 세자가 임금과 상국 양측 모두의 인가(책봉)을 받게 하여 그 권위를 높였다. 즉 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왕비 소생의 대군들과 후궁 소생의 여러 군(君)들이 비어버린 세자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는 건 실제 역사에선 존재할 수가 없는 일이다.[40]

일개 군 따위가 원손과 네 명의 대군들이 있는 상황에서 후계를 노렸다는 이유로 사사당해도 할 말 없고, 대군과 원손이 있는데도 후계에서 그들을 배제하려 하는 대비는 중전과 조정 전체의 역공을 받아 무력화되는 게 현실일 것이다. 또한, 윤 왕후가 택현 운운한 것도 실제 현실에서 시도되었다면[41][42], 대비는 아들을 용상에 앉히기도 전에 하찮은 후궁 따위가 국본을 정하는 데 개입했다는 이유로 아들과 같이 사사당하고[43], 영상은 능지처사 당했을 것이다. 만약 대군들을 배제하더라도, 명조나 청조 같은 상국에서 왜 대군들을 세자로 정하지 않았냐고 물으면 임해군에게 연기를 시킨 것처럼 4명 모두에게 바보 연기나 병자 연기를 시켜야 했을 것이다. 이 또한 조선 입장에서는 부담이 된다.

극중에서 윤왕후의 대군들이 재능과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일개 후궁이 낳은 서자 따위와 국모의 자손인 대군은 넘을 수 없는 차이가 있다. 그들 모두가 금치산자가 아니고서야 이호가 국본이 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극의 기본 구조를 생각하면 모두 포기해야 하는 재현성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변론은 애초에 극의 기획 자체가 무리했다는 결론만 남는다. 차라리 정종(조선)[44]이나 선조가 그랬듯 적통 왕비에게 적자가 없고 서자들끼리 세자 경쟁을 벌이는 구도였다면 좀 나았을 것이다.[45] 임성한 드라마처럼 극 중 대군들이 한날 한시에 벼락맞고 죽어버린 바람에 남은 왕손이 이호가 유일했다면 가능하나

애초에 군으로 왕을 세웠다 해도 한번 더 저러려고 하는 대비야말로 시대착오적 묘사이다. 대군에 원손까지 제쳐두고 또다시 서자를 세자로 세우려고 한다면, 택현이고 뭐고 서자의 서자가 왕이 되는 것이니 만약 본인이 세운 서자가 왕이 되어 대왕대비가 된다면 편하게 살진 못할 것이다. 비슷한 사례로 장렬왕후가 있다. 소현세자 사후 원손을 제치고 둘째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우는 남편의 잘못된 선택 때문에 그 봉림대군이 죽고 대왕대비가 되었을 때 예법 때문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예송논쟁의 중심에 휘말려 꽤나 골아픈 세월을 보냈고, 이 논쟁이 끝을 맺고 환국정치가 시작되어 당파투쟁이 더욱 심각해진 탓에 본인이 힘을 쓰고 나서야 친척을 우의정으로 만들 수 있게 변해버린 정치 지형을 다 보고 죽은 지 1년도 안 돼서 증손자며느리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이 모든 것이 정통성을 시비하며 생긴 예송논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사례를 보면 대비는 택현을 또 한번 관철시켰다가 정통성으로 나중에 피보지 말고 세자의 쾌유를 기원하고, 그게 안되면 원손이 후계를 잇게 하는 게 자신의 훗날과 아들의 사후평가를 위해서라도 훨씬 나을 것이다.

극의 전개를 위해 실제 역사와 비교하자면 상당히 무리한 사건을 배경 설정으로 깔아둔 것은 맞으나, 시놉시스에서 설명했듯이 이 드라마는 극성 학부모들 간의 대립을 궁중 암투로 풀어내기 위해 설정한 배경이므로, 이런 설정이 없다면 극의 진행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만든 것이라고 옹호자들은 주장한다.

하지만 차라리 배경을 조선 중후기만큼 성리학적 종법이 빡빡하지 않았던 삼국시대 이전[46]으로 하거나 그냥 '이 세계관은 그런 설정이다'라고 해 버리면 그만일 아예 가상의 국가[47]로 설정해 비판받을 여지를 줄인다든지, 세자는 원손 없이 밀려나고 중전은 더 이상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후궁인 주인공이 다른 후궁들과 암투를 벌인다는 식으로 핵심 설정을 유지하면서도 실제 역사적 개연성에 어긋나지 않게 하는 방법이 많다. 하다 못해 조선이더라도 차라리 명종(조선)대의 야사를 차용해, 왕이 적자든 서자든 아들이 단 한 명도 없어, 마음에 드는 유능한 방계 왕족을 후계자로 책봉하려는 모습을 보이자 방계 왕족들과 그들의 어머니들이 암투를 벌이는 내용을 그렸으면 실제 역사에도 있었던 일이라고 합리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배경설정을 살짝 바꾸는 것만으로도 오류를 피할 수 있었기에 슈룹의 제작진이 "시청자들은 가상 설정이라면 조선 예법과 맞지 않더라도 모두 납득해줄 것"이라는 안일한 발상으로 극을 만들었다는 비판은 피할 수가 없다.

게다가 청나라의 설정으로 바꿔도 부자연스러운 건 계속 있다.

청나라에서 후궁이 태후가 되고, 서자가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건, 가경제와 도광제의 경우를 제외하면 애초에 황후 소생의 적출 아들이 없거나, 요절했거나, 혹은 심각 막장 적자 한 명만 있었던 경우가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2대 숭덕제: 첫 번째와 두 번째 아내가 미움을 사 폐출당했다. 이후 정실부인이 된 효단문황후도 딸만 셋 두었다.
3대 순치제: 두 황후와 사이가 좋지 못했고, 두 황후 모두 자식을 두지 못했다.
4대 강희제: 가장 유명한 청나라의 후계싸움. 하지만 이게 어느 정도 성립될 수 있었던 건, 황후 세 명 소생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 황태자 윤잉 하나 뿐이었고, 그 황태자 윤잉이 엄청난 망나니였기 때문이었다. 그마저도 강희제는 황태자 폐위를 주저했다. 최종적으로 황위를 계승한 옹정제도 황자 시절에는 철저히 황태자를 옹호하며 야심을 결코 드러나지 않았고, 그 덕에 강희제의 큰 신임을 얻고 황제가 될 수 있었다.
5대 옹정제: 정실부인 효경헌황후에게서 아들이 있었지만,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 이미 사망했다.
6대 건륭제: 조강지처 효현순황후계후 호이파나라씨 소생의 아들들이 모두 요절했다.
9대 함풍제: 아내 효정현황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다.

즉, 적출 아들이 없었기에 서자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거지, 적출 아들들이 있었음에도 택현 운운하며 서자를 세웠던 것이 아니다. 즉, 이 드라마의 시스템은 실제 조선도, 청나라도 닮지 않았다든 것이다.

2.4.2. 매우 좁은 중전의 입지

본 드라마에서 중전은 대비와 영의정, 간택 후궁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권위 없는 중전으로 묘사되고 있다. 하계인 후궁들에게도 깍듯하게 존대를 하는데다, 중전의 지시로 차린 밥상을 엎어버리는 등 후궁들이 중전을 대놓고 무시하는 장면까지 있다. 하지만 실제 조선에서 감히 후궁 따위가 중전 앞에서 중전이 가져온 밥상을 엎어버리거나, 중전에게 자기 자식이니 상관 말라고 소리를 지른다면 웃전을 모욕했다는 이유로 큰 벌을 받았을 것이다.[48]

작중 중전은 왕손을 무려 다섯, 그것도 왕세자를 포함하여 모두 아들을 낳은데다 손주로 세손까지 본 정실 왕비이다.[49] 따라서 출신 가문[50]이 어디든 간에 후궁들[51]과 세도가는 물론이고,[52] 왕과 대비[53]도 함부로 대할 수 없다.[54], 조선시대 왕비의 위치는 단순히 임금의 정실이 아닌, 내명부를 다스리는 주인으로 내명부의 일에 관해서는 임금도 함부로 관여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자식이 없는 왕비라 하더라도 감히 후궁들이 개겼다가는 바로 개박살이 났다. 따라서 드라마처럼 후궁 소생 왕자(!)가 감히 왕비의 험담(!!)을 대군(!!!)에게 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관념상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짜로 그랬다면 조선에서 가장 중히 여긴 효와 충을 동시에 어겼다 하여 대역죄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왕이었던 연산군이 당시 양어머니이자 대비였던 정현왕후에게 패악을 부렸다 하여 두고두고 비판받고 결국 폐위당하는데, 후궁 소생 왕자가 자신의 법적 어머니인 정궁에게 욕을 하거나 정궁 소생의 왕자에게 위협을 가하는 드라마의 모습은 그야말로 조선이라는 시대 배경을 완전히 무시한 판타지 세계관이라고 보면 된다. 특히 조선에서 후궁소생의 자식들은 공식적으로 전부 중전의 자식이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끈 광해군조차도 정궁인 인목왕후(소성대비)를 가두었다는 이유로 반정의 명분이 되어 폐위당하게 될 정도로 왕비의 위치는 단순한 국왕의 배우자가 아니었다.

특히 아들까지 있었다면 그 권위는 엄청났는데, 한미한 집안의 출신이었던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그 예이다. 폐비 윤씨는 성종에게 상당한 패악질을 부렸음에도 아들을 둔 중전이라는 이유로 성종이 적극적으로 폐위의사를 밝힘에도 불구하고 신하들이 모두 폐위에 반대하다 성종이 강력하게 의사를 드러내자 비로소 가능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하나도 아니고 무려 다섯이나 되었다면 더 이상 논의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슈룹은 인열왕후를 모티브로 한 주인공의 드라마라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 역사에서 소현세자가 죽었음에도 차기 왕위 계승자로 논의되던 것은 당연히 대군, 특히 차남이었던 봉림대군뿐이었고 계승논란도 차남인 봉림대군이 아닌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으로 범위가 한정되었다. 즉 후궁출신의 왕자들은 당연히 후계자 논쟁에 오르지 못했으며, 인열왕후 소생의 3남이자 적자였던 인평대군마저도 후계자로 언급된 적이 없었기에, 그러한 주장은 역사에 무지한 주장으로 볼 수 있다. 드라마 내용처럼 정궁의 자식들이 있음에도 후궁의 자식들을 가지고 후계자를 논한 사례는 조선시대에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실제로 인조 사후 효종, 현종까지 정궁인 인열왕후의 아들임에도 차남이라는 이유로 정통성 논란에 엄청나게 시달렸던 예송논쟁을 생각하면 인열왕후가 모티브라는 것은 역사에 대해 무지한 사람들의 주장에 불과하다. 더욱이 이 드라마가 인조시대 인열왕후를 모티브로 했다기엔 인조는 후궁 소생 왕자가 2명이고 인열왕후와의 관계에서 장성한 정궁 소생 왕자가 3명이라 드라마상 설정처럼 후궁들에게 많은 아들을 둔 왕도 아니었다. 설정상 조선이라는 시대에 전혀 걸맞지 않는 판타지 수준의 고증을 가진 사극을 가지고 실제 인물에 대입하려는 시도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궁 소생의 왕자가 생존하는데도 후궁 소생의 왕자가 왕이 된 경우는 광해군뿐이었고, 그 외에는 반역을 통한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았다.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도 세자 책봉 당시에는 영창대군이 아직 태어나지 않아 후궁의 왕자들끼리 경합했던데다가 선조가 승하할때 영창대군의 나이가 너무 어려서였다. 진작부터 선조에게 정궁의 왕자가 있었다면 광해군과 같이 후궁 소생의 왕자가 후계자로 언급되는 것 자체가 반역으로 사사되었을 감일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실제로 영창대군의 존재만으로 광해군의 세자 입지는 꽤 위험해졌는데 이는 영창대군이 선조와 인목왕후의 적장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해군이 선왕의 중전과 정궁 소생 왕자가 거슬린다고 죽이고 내쫒고 패악질 한 결과가 왕좌에서 쫒겨나는 대의명분이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조선의 중전과 정궁 소생 왕자가 얼마나 힘이 강했는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이런 특수한 사례를 제하고 이 드라마와 같이 정궁소생의 왕자가 살아있는데 후궁 소생 왕자가 후계로 언급되는 것은 조선시대 실제 역사에서는 사례가 전무했으며 명청시대에나 가능한 계승방식을 조선에 무리하게 대입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장남이 왕위를 계승한 사례가 적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경우에도 적자인 차남이나 3남, 혹은 적자인 왕자들의 자손이 있는데 후궁 소생 왕자나 그 자손이 왕위에 오른 사례는 반정을 일으켜 왕위에 오르는 경우 외에는 없었다.

2.4.3. 자식에게 반말을 내뱉는 후궁

현실 역사에서 왕의 자식들은 모친의 신분과 상관없이 왕의 자식으로써, 원칙적으로는 모두가 중전의 자식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왕의 자식들은 품계상 후궁들보다 높기 때문에(무품으로 주인의 입장) 후궁들(정1품~정5품으로 신하의 입장)은 아무리 자기 자식이라고 해도 함부로 반말을 하거나 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가 딸 숙녕 옹주에게 무심코 '너'라고 했다가 효종이 격분한 것을 중전인 인선왕후가 중재해서 무마한 일이 있었다. 심지어 황귀인은 의성군에게 회초리를 들기까지 한다.

근데 이부분은 슈룹만의 문제는 아니다. 동이이산을 보면 후궁인 숙빈 최씨나 의빈 성씨가 연잉군, 원자에게 하대를 한다.

2.4.4. 윤 왕후는 어째서 윤 왕후로 불리는가(★)

선대왕 시기에 폐비된 중전이었던 작중 윤 왕후(서이숙扮)는 이미 폐서인 당한 폐비임에도 불구하고 윤 왕후로 불리고 있다.
2.4.4.1. 개연성
애초에 왕후의 칭호 자체가 조선에선 왕비가 사망한 후에 올리는 시호에만 쓰이는 데다가, 이미 폐비당한 윤씨를 왕후나 왕비로 부르는 건 자칫하면 선왕이 내린 폐위 교지를 거부하는 역모로 해석될 수도 있다. 즉 이 경우는 변론의 여지가 없는 창작물의 반영 오류의 사례다.
2.4.4.2. 해소
(1화 기준) '윤 왕후'라고 언급하는 대사는 아직 중전과 그의 지밀상궁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상태이다. 그외의 외부인에게 '윤 왕후'라고 언급하는 건 등장한 적이 없다.

마지막화에서 폐비 윤씨라고 정확하게 나왔음으로 그저 사적인 곳에서 잠깐 쓰인 거지 공적으로 쓰이진 않는 설정으로 밝혀졌다. 또한 조선시대에 사적인 곳에서까지 폐비 ㅇ씨로 불렀는지 ㅇ 왕후로 불렀는지는 알길이 없으니 큰 설정오류라고 볼 순 없다.

2.4.5. 선대왕의 후궁이었던 조 귀인이 어떻게 현 대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가

드라마 1화를 보면 대비는 중전의 자리를 거치지 않고 대비의 자리에 올랐다고 해석될 만한 대사가 언급됐다. 하지만 2화에서는 후궁에서 중전을 거쳐 대비 자리에 오른 점도 어느 정도 시사됐다.

조선의 법도상 대비는 왕의 법적인 어머니이자 선왕의 중전만이 오를 수 있었던 자리로, 살아생전 아들 순조가 왕위에 오르는 걸 직접 지켜본 수빈 박씨도 간택후궁에 무품 빈이었고, 아들의 즉위 후에는 궁호와 저하 칭호까지 쓸 순 있었지만 끝내 대비가 되진 못하였다. 이러면 경우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조 귀인의 아들 이호가 왕위에 오른 후 어머니를 왕비로 추숭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본 드라마에서 나오는 왕실이 중국 등의 법도를 따라서 조 귀인이 대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허나 첫 번째의 경우가 성립하려면 윤 왕후(서이숙扮)가 폐비된 후 선왕이 승하하고 현왕이 즉위할 때까지 곤위가 비어있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55] 그러나, 이것 또한 말이 안되는 게 내 · 외명부를 총괄하고 왕실 내부의 일을 담당하는 중전의 자리는 이후 한시도 비워둘 수 없기 때문이다.[56]

다만, 광해군이 생모였던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를 추존한 예에서 보듯이, 예법이라는 것이 반드시 절대적이고 교조적인 원리가 아니며, 정치적 상황에 따라 변화될 수 있는 논리였다는 것이다. 후궁 출신 대비가 없는 것은, 숙종이 법으로 후궁 출신 왕비를 금지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는 후궁 출신 대비가 나올 수 없었던 것이고, 숙종 이전에는 왕들이 적자 출신이거나 방계 출신이어서그와 같은 상황이 발생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즉, 숙종 이전의 광해군의 공성왕후 추존에서 볼 수 있듯이 숙종 이전에 이런 일이 생겼으면 중국의 예와 고려의 예를 들어서, 얼마든지 생모를 대비로 추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조선은 후궁 출신 대비가 없었다는 결과론적인 얘기를 가지고 평가하기에 실제 역사적 개연성에 당착됐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지만,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개연성이 아주 없는 허무맹랑한 얘기도 아니었다는 것이다.[57][58]

이에 비해, 청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서태후의 예[59]에서 알수 있듯이, 청나라에서는 후궁이더라도 자식이 황위에 오르면, 황후와 함께 그 살아있는 생모도 태후가 된 예가 존재한다. 세자자리를 놓고 적자와 서자 구분없이 경쟁하는 왕자들, 본궁이라 본인을 지칭하는 중전, 후궁에서 중전이 되지 않고 바로 대비가 된 듯한 대비 등의 설정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중국 청나라 시대 사극의 설정을 대충 차용해서 무리하게 조선시대에 대입한 듯한 심증을 버리기 어렵다.

본 드라마에 나오는 왕실에서 청의 제도를 따라 청나라에서 황제의 어머니를 성모황태후에 봉한 것처럼 조 귀인을 성모왕대비[60]에 봉하였다는 것인데, 왕의 생모인 성모왕대비가 존재한다면 법적 모친인 모후왕대비도 존재해야 마땅한데 모후왕대비가 없다는것은 결국 첫 번째 경우와 같이 윤 왕후가 폐비된 후 곤위가 비어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완전히 창작물의 반영 오류의 사례로 볼 수밖에 없다. 결국 중국의 그것을 많이 참조한 티가 나나, 더 정확히 말하면 중국 청나라의 내명부 제도보다는 드라마 후궁견환전견환오라나랍 의수의 관계를 더 참조한 걸로 추정된다. 극 중 옹정제 사후 오라나랍 의수는 초반에 모후황태후가 되는 걸 기대했으나 견환의 계략때문에 결국 모후황태후가 되지도 못하고 사후 언니인 순원황후와 똑같은 사람으로 둔갑이 되어 역사에 황후로 기록되지도 못한걸로 그러졌는데 슈룹의 윤왕후와 조대비의 관계도 이와 많이 유사하다. 결국 제작진이 한중록이라던지 경국대전, 승정원일기같은 아주 좋은 교보재가 있는데 읽을 생각도 안했다는 얘기다. 더 멀리 갈것도 없이, 국역화가 완료된 조선왕조실록도 있는데 말이다.

만약, 작가가 조금 더 조선시대에 실제 사례에 맞는 설정을 고민했더라면, 아들을 본인 손에 피를 묻혀가며 왕을 만들었지만, 본인이 중전이 되지 못해 **궁으로 불리며, 본인의 며느리가 대비가 될시 본인이 서열에서 뒤로 밀리는 불완전한 지위[61]에 열등감을 가지며, 본인이 후계를 정해 이를 만회하려는 설정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좀 더 개연성을 가질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11회에서 황숙원이 내명부의 모든 권한을 다 줄테니 의성군을 밀어달라며 협상하는 장면에서 "대비는 중전의 권한(내명부 통솔권)을 한번도 가져보지 못했다"고 언급한다. 이는 '중전으로 정식 임명 및 승인은 됐지만 의식을 치르지 못해 기다리는 상태였을 수 있다'는 반론으로 변명할 수 없는 오류이다. 대비 조씨가 선왕시절에도 내명부 통솔권을 가지지 못했다면 이는 중전으로 임명받지도 못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조씨가 중전으로 임명되어 책봉 의식만 남겨놓은 상태였다면 내명부 통솔권도 가졌을 것이다.[62][63]
2.4.5.1. 의문이 남는 해소
마지막화인 16화에서 책봉 의례만 남겨둔 채 왕이 승하하여 단 하루만에 왕비 자리에서 내려왔다는 점이 시사되며 의문점이 해소되었다. 사실 해소라고 하기엔 뭐한 게, 다른 나라와 전쟁 중이라던가 나라의 상태가 예식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게 아닌 이상 저렇게 얼렁뚱땅 일을 처리할 경우 '정식적으로 책례(冊禮)를 치르지 못한 후궁 출신의 중전이 대비가 되는 게 합당한가?' 와 '국왕이 훙서했는데 책례를 치르지 못한 중전을 대비로 올리는 건 예법에 맞는가?' 등의 또 다른 쟁점이 생긴다.

왕비에 대한 책례는 죽은 선왕의 신주가 사당에 모셔지는 부묘례(祔廟禮)[64] 이후에 진행되었고 왕이 문무백관을 모은 채로 왕비가 될 인물에게 교명과 옥책, 옥보를 내리는, 왕실의 정통성을 널리 알리기 위한 중요한 행사였다. 때문에 제대로 된 책례를 치르지 못한, 그것도 후궁 출신의 중전은 아무래도 입지 면에서 상당히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있다.[65] 또한 정조 시기에 책례 이후 신하들이 축하인사를 건네고 이 사실을 방문으로 붙이는 전례를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시적으로 금한 적은 있으나# 책례 자체는 금한 적이 없고 이 책례 문화는 대한제국 멸망 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만약 드라마의 전개처럼 남편이 될 왕이 하루 전에 훙서했다면 마땅히 상례 이후로 책례를 미루고 중궁전에 대해 대신들이 논의해 처결하는 게 맞는거지, 왕비 책례도 치르지 못한 후궁이 곧바로 대비로 올라가는 것은 당시 조선의 예법으로도 논란이 많았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대부들의 극심한 반대를 받았을 수도 있다.

왕이 죽었으니 왕실 어른이 없는 비상사태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왕이 부재중일 때 대신할 수 있는 게 바로 국본(國本)인 세자이며 의정부삼사는 그냥 폼으로 있는 조직이 아니다. 물론 계유정난이라는 특이한 사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 극중에서 현 대비의 아들로 나오는 이호는 즉위할 당시 아주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즉 수양대군처럼 야심찬 종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국본으로서의 입지가 단단했던 탓에 굳이 대비의 수렴청정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런 식의 묘사는 오히려 극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아마도 수렴청정으로 유명한 문정왕후신정왕후 조씨를 모티브로 한 것 같은데 둘 다 왕이 12살 어린 나이였었고 문정왕후는 명종이 20살이 될 때, 신정왕후는 고종이 15살 될 때 공식적으로 수렴청정을 거뒀다.

2.4.6. 성남대군에게 반말하고 무례하게 구는 의성군

군주의 서장자라지만, 엄연히 후궁 소생의 서출인 의성군이 중전 소생의 적자 성남대군에게 반말을 하며, 심지어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내가 왕이 되면 너 같은 놈은 죽여버리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조선에서는 적통과 서출 간의 신분 격차가 있었고 그만큼 서출이 받는 차별도 심했다. 똑같은 왕의 소생이고 자신이 나이가 더 많으며 외척의 권세가 대단하다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품하계인 군 본인보다 신분이 높은 무품상계 대군에게 반말을 하고 협박까지 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칼을 들고선 성남대군에게 천한 자식 운운하며 협박하거나 닥치라는 욕을 하고, 대군을 죽이려 들었다.

게다가 세자와 원손이 멀쩡히 살아 있는 상황에서 일개 군 따위가 "내가 왕이 되면"이라는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참수당해도 할 말이 없으며 운이 좋아야 사사일 것이다. 그리고 2화에서 의성군은 중전에게 불경한 언사를 지껄이고 중전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등, 계속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방적으로 계속 대군에게 시비를 걸고 심지어 대군을 죽이려 들었는데, 이 역시 쉽게 넘어가지 못할 중대한 범죄행위다.

실제로 세자가 되어 왕위에 오른 서얼출신의 왕자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당시 본인이 세자가 될 때까지 왕위에 오를 만한 적통이 없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광해군이 31살이 될때까지 선조에게선 중전소생의 왕자가 태어나지 않았고, 숙종은 적통 왕자가 없었고 경종은 자식이 아예 없었기에 영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며, 순조 역시 정조에게 적통 왕자가 없었기에 왕위에 오른 것이다. 또한 왕자가 아닌 종친이었던 인조, 철종, 고종 역시 당시 왕에게 아들이 없었기에 왕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심한 인성적 결함 문제를 가진 왕의 적통 왕자는 왕위 후계권을 박탈당할 수도 있다지만, 슈룹의 대군들은 대군과도 같은 품위가 없는 말썽꾸러기로 소문났고 놀길 좋아한다는 설정이 있긴 하지만 인성적으로나 지능적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다. 화령의 아들들은 놀기 좋아하고 장난치길 좋아하는 평범한 10대초반 ~ 20대 초반의 남자에 불과하다.

다만, 이는 극중에서 의성군과 대군들 간의 갈등 구조를 연출하기 위해 실제 역사와 맞지 않는 상황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66][67]

2.4.7. 승정원에 직접 찾아간 중전

영화 광해에서도 나오지만, 임금이 신하를 찾아가는 일은 없다. 2화에서 중전이 도승지를 찾아가는데, 원래 예법을 따지면 도승지가 명을 받고 교태전을 방문하는 게 맞을 것이다. 대비를 경계했다 해도 중전이 승정원을 가는 것 자체가 훨씬 더 이상하다. 그러나, 중전의 지나친 '거조'와 급한 성정이 자주 묘사된 만큼, 중전의 캐릭터성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봐도 무방하다.

2.4.8. 연필을 쥔 중전

5화에서 중전이 붓을 연필 쥐듯이 잡고 글을 쓴다. 다수의 사극에서 배우들에게 붓 쥐는 법을 시연하게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래도 배우가 직접 글을 쓰는 장면인데, 붓 쥐고 글 쓰는 법을 익히게 하기에는 시간적 문제가 있었던 것 같고 미장센을 위해 재현을 포기한 듯 하다.

이와는 별개로, 정말 도덕경을 구해와서 중전이 도덕경 마지막 81장의 끝 구절인 위이부쟁(爲而不爭)을 쓰는 것으로 끝 맺는 것은 제작진이 신경 쓴 부분이다. 또한 5화에서 중전측 인사들이 주고 받은 밀서들, 금상이 손에 든 소는 대충 아무 뜻도 없이 휘갈긴 글들이 아니라, 극중의 상황에 맞는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 겨우 1초나 나오는 글들이지만, 이것도 신경 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4.9. 곡좌를 무시하는 자리배치 방식

조선 왕실의 예법에 있어서 곡좌(曲座)를 전혀 보여주지 않고 모두 대좌로만 보여주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여태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사극에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비일비재하게 나타났던 문제이고 촬영장 내 공간이 협소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참작의 여지는 있는 부분이다.[68]

왕이 북쪽에 앉아 남면하고 있으면, 신하는 자신이 속한 문반과 무반의 지정 방향에 따라 서서 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자리를 잡아야 하나 그러지 아니하고 대좌로만 하고 있다.대비와 중전, 대비와 왕, 왕비와 세자, 대비와 세자빈 정도만이 서로 대좌를 할 수 있을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곡좌를 하되 아무리 왕자끼리라도 서로 같은 품계가 아닌데 어깨를 나란히 하여 앉을 수가 없고, 이는 후궁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14화에서 세자빈과 세자의 동생들인 대군이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장면이 나오는 데, 세자빈은 다음 지존인 세자의 빈(賓)으로서 같은 무품상계인 대군보다 서열이 앞선다. 따라서 무안대군의 처소에 빈궁이 찾아갔더라도 빈궁이 상석인 북쪽에서 남면하고 앉고 대군들은 곡좌를 하고 앉아야 올바른 궁중예법이다.

실제로 조선 영조 때에 영조의 서자녀인 화유옹주가 세자빈인 혜빈(혜경궁) 홍씨와 방이 좁아서 곡좌를 하긴 했는데 혜빈 홍씨와 어깨선을 나란히 하여 앉았다고 인원왕후에게 혼났다는 한중록의 기록이 있다. 왕비와 신하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앉아서는 안되며, 중전과 후궁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서도 안되고, 대비와 후궁이 얼굴을 맞대고 앉아서도 안되고, 편전에서 임금과 신하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서 정사를 논하는 것은 예법과 국법을 어기는 행위이다.

2.4.10. 세자의 시호 관련

작중 장남인 세자가 사망한 지 꽤 지난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시호 없이, 그냥 세자라고 불린다. 조선의 경우 폐세자를 제외하고, 보위에 오르지 못한 체 사망한 세자에게는 순회세자, 효장세자, 사도세자, 문효세자와 같이 정식으로 시호를 받는다. 본 작품에서도 이호의 이복 형인 태인세자 역시 "태인"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따라서, 죽은 세자 역시 00세자라는 시호를 받아야 마땅하다.

2.5. 건물 관련

2.5.1. 태화전

임금의 침전을 찾는 장면에서 '태화전'이라는 편액이 임금의 침전에 걸린 것이 발견되었다. 태화전은 당나라 장안 대명궁의 침전, 청나라자금성의 정전(正殿)에서 쓰인 전각 이름으로[69], 자금성에서도 이전에는 봉천전(奉天殿), 황극전(太和殿), 금란전 등의 이름으로 쓰이다가 1645년(순치 2년)에 태화전이란 이름이 붙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단 한 차례도 태화전이란 이름이 쓰인 적이 없다.[70] 경복궁의 침전은 강녕전, 창덕궁의 경우엔 대조전, 창경궁은 수령전, 덕수궁함녕전, 경희궁은 융복전으로, 아무리 가상역사라지만 조선 배경에서 쓰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이름이다.

슈룹 제작진들에 따르면 태화전의 태화는 신라시대의 연호 고려시대의 학당등 유교문화권에서 좋은 의미로 널리 사용 되었다고 표명했다. 그러니 당나라, 청나라 등의 전각에서 따온 이름이라기 보단 정통사극과 결래를 달리하기 위해 사극에서 잘 쓰이지 않는 단어를 썼다고도 주장하는 것이다. #

사실 이것도 말이 안되는게 태화를 연호로 쓴 신라시대의 왕은 진덕여왕이다. 신라 마지막 성골 출신으로 전대 선덕여왕의 유지에 따라서 즉위했을 뿐 제위 기간 중 모든 업적은 김춘추에 의해서 진행된 허수아비였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게다가 고려시대 학당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하는데 대(大)를 대 혹은 태라고 읽을 수는 있으나 한자를 태(太)로 쓰지는 않았다. 다시 최충의 학당 중의 하나인 대화재 혹은 태화재라고 읽을 수는 있어도 한자는 대화재(大和齋)라고 썼기 때문에 제작진의 변명은 틀렸다고 볼 수 있다.

2.5.2. 포스터의 고려 궁궐

파일:슈룹 티저 포스터.jpg
회경전이 인정전(仁政殿)으로 등장한다.

이 포스터는 MBC 용인 대장금파크에서 촬영되었다. 고려 만월대 회경전이 조선 창덕궁 인정전으로 현판만 바꿔달고 등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장금파크는 고려시대가 배경인 신돈 촬영용으로 지어졌지만 여러 사극에서 조선 궁궐로 둔갑하는 시대착오적 묘사가 많았는데, 이 드라마 또한 그 전통(?)을 이었다.

2.5.3. 건물 위치

궁전에 있어야 할 중전과 상궁, 계성대군이 남원 광한루에 순행을 나왔다가 1분도 안 되어서 창덕궁에 있는 희우정으로 차원 이동한다. 그리고 희우정 옆에는 창경궁 경춘전의 현판이 걸려 있으며 두 건물 모두 현판만 희우정과 경춘전일 뿐, 실제 건물의 모습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제작진이 극의 미장센을 위해 다양한 장소에서 촬영을 한 후 이어붙이는 경우는 역사극이 아닌 장르나 외국 작품에서도 흔한 일이라 이건 심각한 문제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고 옥에 티 정도다.

또한 고궁에서 드라마 촬영이 어렵게 된 00년대 중반 이후로 우리나라엔 조선의 궁궐을 완벽하게 구현해 놓은 세트장이 없어 현판과 전각의 모습이 따로 노는 실태는 이전부터 비일비재 했다.

2.6. 소품 관련

2.6.1. 도자기

조선 전기와 후기의 환경을 모두 재현하고 있기 때문인지 청자와 청화 백자, 청색 자기를 혼용하고 있다. 아쉽지만, 분청사기를 수준 낮게 보거나 민간용 자기로 생각하는 대중들의 인식을 우려해서인지 왕실에서 분청사기를 쓰는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2.6.2. 청화백자 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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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화령의 처소를 자세히 보면 한국풍보다는 다소 중국풍에 가까운 청화백자로 만들어진 붓과 붓걸이가 놓여져있는 걸 볼 수 있다. 실제로 중국 타오바오나 대만인터넷쇼핑몰 사이트에서 종종 팔리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비록 한국풍이 아닌 중국풍 붓이라 할지라도 조선 왕실 내부에 존재하는거면 의외로 핍진성에는 크게 어긋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로부터 한반도 왕조는 중국 왕조에 조공을 대주는 대가로 중국 왕조 쪽에서 본국에서 생산된 사치품들을 선물로 보내주는 사례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이다.[71] 극 중 화령의 처소에 놓여 있는 중국풍 청화백자 붓도 만약 중국 사신이 가져다줬다거나 중국에 갔다온 조선 사신이 받아온 선물이라면 존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게다가 17~18세기쯤부터는 중국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일 거 같은 유럽에서도 중국의 청화 백자가 인기가 많아져 수입이 많이 되기도 했다. 저 멀리 유럽까지 수출이 된 마당에 바로 코앞인 조선에 수출이 못 될 이유는 더더욱 없다. 결과적으로 봤을 때 기존 사극에서는 간과된 의외로 실제 역사적 개연성이 반영된 셈. 이뿐만 아니라 옛날 , 시대의 문화재 중에는 청화 백자로 만들어진 붓 손잡이들이 많은 편이었고, 이중 몇 개는 현존하여 박물관에 소장되어있기도 하다.[72]

그러나 실제로 조선에서는 성종 시기에 만들어진 법전 경국대전에 대소원인(大小員人, 모든 벼슬아치)은 술을 마실 때 쓰는 그릇(酒器)를 제외하고는 금이나 은, 청화백자 소재의 그릇을 사용하지 못하게 규정했다. 그럼에도 일부 대신들과 종친들이 알음알음 다른 용도로 청화백자를 사용하는 바람에 사헌부에서 하소연하기도 했고# 연산군 시절에도 예조에서 사치에 대한 금지 항목 등을 올렸는데 그 중 16번째가 유밀과와 금과 은으로 만든 접시, 행과반(과일용 접시), 그리고 바로 위에 언급된 청화백자로 만든 그릇이었다.# 즉 유교적인 토대의 도덕관념이 지배하고 있던 조선에서 군자로서의 길을 추구해야 하는 왕과 왕실이 사치하는 것은 비판 받을 수 있는 요소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청화백자는 '왕이 내리는 하사품 중 하나'였다. 일례로 세종성균관에 청화백자 재질의 큰 술잔을 2개 하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는 태종이 자신이 처음 벼슬을 받은 곳이라고 성균관에 청화백자로 된 큰 술잔을 하사했었는데 성균관에서 임금의 하사품인 그 잔을 아끼고 보물처럼 보관하다가 세월이 많이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깨졌고 황망해하자 정인지가 주청을 올려 다시 내린 것이다.#[73]

또한 기록 덕후인 조선답게 명나라에서 온 사신이 왕실에 바친 물품에 대해서도 기록이 되어 있는데 청화백자는 주로 중국에서 조선의 왕에게 술잔()의 형태로 하사되었고 중궁전에 하사된 건 주로 대삼(大衫), 칠적관[74], 비단, 방모[75] 같은 옷감들이나 솜 재질의 연지, 말채나무 가루, 바늘 등 미용 및 가사에 관련된 것, 그리고 드물게 상아로 된 칼집을 가진 날이 3개 달린 장도 등이었다. 따라서 청화백자는 조공 관계에 따라 당시 상국이었던 명나라에서 조선의 왕, 혹은 경우에 따라서는 국본인 왕세자에게만 하사하던 품목이었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임금이 하사하던 하사품이기 때문에 그 귀한 것을 (별다른 적공이 없는) 중전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좀 무리한 설정이라 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조선의 왕이 받은 청화백자는 위에서도 언급되어 있지만 술잔이었지 절대로 이 아니었다.

청화백자가 청나라 시기에도 많이 만들어졌으니 청나라에서 하사하지 않았겠느냐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병자호란으로 조선을 장악한 청나라는 조선에게서 뜯어가면 뜯어갔지 뭔가를 내렸다는 기사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청나라 역사서인 청사고에는 건륭제가 조선국왕 이산이 학문과 시를 좋아한다고 하자 오경 필사본과 필묵을 내린 적은 있는데 청화백자로 만들어졌는지는 확인이 불가하다.[76] 청나라가 조선의 왕에게 하사했다는 물품을 보면 대체로 칙서를 내려서 임명해주는 것과 감사의 말이 대부분이고, 물질적인 것이라고 해봐야 은전과 말 몇필(인조), 오경과 자신이 지은 시, 지필묵(정조), 고급비단 4필, 유리그릇 4점, 옻칠기 4점, 찻잎 4병(순조), 여의주, 비단, 자기, 칠기(철종), 비단(고종)[77] 정도로 특출나게 귀한 것은 없었다.

정리하자면 슈룹에 등장한 청화백자 재질의 붓은 뭔가 화려하고 독특한 인테리어 소재이긴 하지만 시대적 정황으로 봤을 때, 등장하기엔 부적절한 물건이며 설령 상국으로부터 하사받은 것이라 해도 왕의 침전이나 편전이 아닌 중궁전에 비치된 게 대단히 잘못된 묘사라고 볼 수 있다.

2.6.3. 왕세자빈 적의

다른 부분과 달리 이 부분은 실제 역사를 극화(劇化)한 사극에서도 잘 다루지 않은 부분이라[78] 다룬다.

12회 후반부와 성남대군과 윤청하의 혼인 당시, 윤청하의 예복으로 아청색 적의가 나왔다. 그간 사극에서는 대비, 왕비, 세자빈을 막론하고 모두 왕비의 붉은색 적의를 보여준 것에 반해 슈룹은 조선 전통 예법에 맞게 아청색 적의를 연출하였다. 다만 아쉬운 부분은 대수에 끈이 달려 있다는 점일 테다. 대수는 일반적인 가체와 마찬가지로 머리에 얹는 것이지 쓰는 것이 아니기에 끈이 달려있으면 안 된다. 하지만 다른 사극들도 범하는 오류지만 본작에서는 대수에 끈을 달아놓았다.[79] 아무래도 무게 중심을 잡고 안정적으로 얹기 위함으로 추정한다.

2.6.4. 왕세자의 방심곡령 착용

어느정도 고증이 반영된 세자빈의 아청색 적의와 달리, 극 중 세자가 된 성남대군의 경우 반대로 가례를 치를 때 목에 둥그런 방심곡령(方心曲領)을 착용하고 나오는 오류를 범했다. 방심곡령 착용이 고증 오류인 이유는 이 방심곡령은 가례가 아닌 주로 제사를 지낼 때 목에 착용하는 제복(祭服)용 소품이기 때문. 주로 종묘에서 제례를 지낼 때 많이 착용한 소품인데, 이는 결혼식날 제삿날 복장으로 결혼을 치른 것이나 다름이 없는 셈. 누가 보면 영혼결혼식일 줄 본래 국왕과 세자의 경우 가례를 치를 때도, 제사를 지낼 때도 똑같이 면복을 착용하지만 대신에 방심곡령의 유무로 이 둘을 구별을 짓는다. 하지만 본래 복식사 자료에도 국왕의 면복과 면류관을 재현해낼 때 종종 방심곡령까지 포함해서 재현하는 경우가 많았기때문에 제작진들이 방심곡령을 제사용 소품인 줄 인지하지 못하고 단순히 면복에 같이 포함된 소품인 줄 알고 등장시키는 오류를 저지른 것으로 추정된다.


[1] 당시 시대 상황과 맞지 않음을 뜻한다. 간혹 사회부조리를 지적할 때마다 '시대착오적'이라고 말하곤 하나 오히려 그쪽이 파생적 쓰임이다.[2] 조선구마사 논란 이후 보이는 퓨전 사극 또는 가상역사극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한데, 자유로운 창작을 추구함과 동시에 재현성 및 역사 왜곡 논란을 미연에 방지함에 있어 효율적이다.[3] 민유방본, 식위민천. 백성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요,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과 같이 우러러보는 것이다.[4] 세종실록 3권, 세종 1년 2월 12일 정해 4번째기사(1419년 명 영락(永樂) 17년) '연이은 흉년을 걱정하며 굶어죽는 백성이 없도록 잘 살피라는 왕지를 내리다' 출처.[5] 상서, 하서(夏書), 오자지가(五子之歌) 출전.[6] 심지어 바로 이런 경우였던 양녕대군이 폐세자될 때도 황희처럼 반대하다 귀양간 사람도 있다. 또 설사 폐세자 된다 하더라도 엄연히 왕위계승권을 가졌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권력을 잡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스치는 바람에도 목이 날아갈 수 있는 중신들은 누가 세자가 되든 조심해야 마땅하다.[7] 원래는 귀인이었으나 계성대군의 비밀을 폭로하는 계략이 실패하면서 강등되었다.[8] 애초에 수렴청정이라는 것이 나이가 어린 왕이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고 있는 상태에서 왕실의 웃어른인 왕대비가 그런 왕을 도와 보조를 하는 것에 가깝지, 왕대비 본인이 그 권한을 전부 직접 가진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9] 물론 효(孝)의 영역에서 보면 그럴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다른 것도 아닌 군주의 권한에 대한 부분이다. 양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알려진 인종도 어머니에게 자기 권한의 일부를 떼주진 않았다.[10] 야사를 통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고 알려진 문정왕후도 자신의 동생인 윤원형에 대한 탄핵 건에 대해서만 막아줬을 뿐이었고 아들이 성인이 되자 수렴청정을 거뒀으며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중전의 외삼촌인 이량을 중용했을 때도 별다른 반대를 내지 않았다. 더불어 명종이 친정을 하면서 낸 국가 정책에 대해서도 간섭을 하지 않았다.[11] 조선은 군주제 국가이긴 하지만 왕의 독주를 견제하는 삼사가 존재했고, 군주가 크게 실책을 저지르거나 독주를 보이려는 기색이 보이면 즉각 삼사에서 상소를 올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유생들이 만인소를 제출하며 대신들이 사직 상소를 내는 등 적극적인 견제가 들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조선은 이전 왕조를 무너뜨리고 성립되었으며 반정으로 왕을 2번이나 갈아치운 국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왕실의 웃어른이라고는 해도 대비가 육조의 인사권을 쥐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12] 물론 측천무후는 고종 집권 후반기에 천후(天后)라고 불리며 일반적인 황후 이상의 권력을 가진 상태에서 지병에 시달린 고종을 대신해 7년 간 수렴청정 식의 정무를 본 경험이 있었고 본인이 낳은 아들들이 죄다 무능했기 때문에 이들을 내쫓는 와중에도 나라를 유지하면서 도합 대리 통치기간만 18년에 가깝다. 때문에 고작 내명부 암투에서 승리해 아들을 왕위에만 올렸을 뿐이지 정치 경력이라곤 전무한 대비에게 육조의 권한이 주어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13] 심지어 대비 본인이 직접 천거한 세자빈이다![14] 여담으로 양제 황씨는 강등된 후 1년도 안돼 병으로 사망했다.[15] 명종실록 16년 5월 28일 정해 1번째 기사, 홍문경 부제학 이중경 등 "양제 황씨(黃氏)는 빈(嬪)에서 강호(降號)된 것인데 아직 빈도 간택하지 않고 먼저 양제를 정하는 것은 선후의 순서에 매우 어긋나는 것이요 정시(正始)의 도리에도 맞지 않는 것이니, 양제로 정한다는 명을 거두소서."[16] 게다가 그런 인현왕후의 폐위조차도 남인들까지 반대할정도로 매우 거센 저항에 부딪혀서 숙종은 그냥 국왕의 권위로 찍어눌렀으며, 후에 인현왕후를 복위시킬때도 본인이 인현왕후에게 참고 기어야했다.[17] 심지어 몇몇 행위는 오히려 본인의 권력 유지마저 더 위태롭게 만드는 자해 행위에 가까울 정도[18] 나라의 국본인 세자를 시해한 대역죄이기에 강상죄에도 안 걸린다.[19] 영조는 생모의 출신이 한미했었도 삼종(효종-현종-숙종)의 혈맥을 이어받았다는 논리로 겨우 즉위했지만, 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으로 즉위기간 내내 정통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으며, 효종도 형 소헌세자와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지만 정통성 때문에 강빈과 조카들에게 잔인할 정도로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대비가 세자를 독살하여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었는데, 그 내막을 왕이 직접 밝힌다? 이는 다 같이 죽자는 말이다. 곳곳에 반란이 터지는 것은 기본이고 왕조 교체까지 일어날 수 있다. 절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가 없다.[20] 참고로 영창대군은 세자인 형이 후궁 소생, 자신은 정비 소생이었으나 오직 그 이유만으로 이복형 광해군을 위협한 것은 아니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나기도 전에 임진왜란 당시 분조를 이끌면서 리더십을 증명했던 광해군은 모든 신하들에게 차기 국왕감으로 여겨졌고 결국 아버지 선조의 견제를 무릅쓰고 세자 책봉을 받았으며, 영창대군이 태어난 것은 그 후였다. 만약 영창대군이 태어났을 때 광해군이 세자가 아니었다면 '그래도 정통성이...'라는 식의 공격이 들어올 수도 있었겠지만, 이미 세자 책봉을 받은 이상 원칙적으로 정통성마저도 광해군이 벌써 가져간 상태였다. 그러나 광해군을 견제하려던 선조와 거기에 부화뇌동한 유영경이 영창대군의 존재를 이용해 들쑤시는 바람에 광해군 vs 영창대군의 구도가 되어버린 것. 사실 영창대군은 광해군 즉위 후 그의 개입 혹은 방조로 추정되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을 때조차 열 살이 채 안 되었을 만큼 어렸기에 본인이 무슨 야심이 있을 리 없었고, 선조도 진심으로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으려 했다기보다는 단지 광해군을 견제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리라는 추측이 많다.[21] 그리고 이쪽은 형제지간의 위치에서 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망나니짓을 할수록 '형이란 놈이 저러니까 폐세자됐지'라는 인식이 생겨 세종의 입지가 강해질 수 있었다.[22] 중국공산당이 표준화한 간체자를 표준 문자 표기로 채택한 시기는 통념과 달리 비교적 최근이다. 공산당은 국민의 문해력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이른바 '교육 개혁'의 일환으로 1956년에 첫 번째 한자 간체화를 도입했다. 1960년대에는 대부분의 문서에서 간체자를 사용하도록 했으며 이 시기 이후 중국 대륙에서는 간화자의 사용이 보편화된다. 현재 한국처럼 정자를 쓰는 대만도 사실 과거 중국 본토를 실효 지배하고 있었을 때, 간체자를 쓰려고 했었다. 이 간체자는 예로부터 민간에서만 쓰던 초서를 간략화하고 획수를 줄여 근현대에 비로소 중국 인민의 정식 문자로 전환된 것이다. 한글로 비유하자면 ㄹ을 z나 乙처럼 쓰면서 훗날 정식 표기가 뒤바뀌는 미래를 예측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한글도 훈민정음의 원형을 살리고자 ㅊ, ㅎ의 윗부분을 ㅗ처럼 출력되는 폰트(꼭지히읗, 꼭지치읓)로 디자인한다. 그래선지 二처럼 출력되는 폰트를 많은 공공기관에서 지양하는 편이다. 또 ㅅ, ㅈ, ㅊ를 좌우대칭으로 출력되는 폰트(갈래지읒, 갈래시옷, 갈래치읓)를 선호하는 편. (자세한 건 훈민정음체, 프리텐다드, 본고딕, 맑음고딕 등으로 참고해볼 것)[23] "초각박안경기"[24] 중국의 국어사전.[25] 현대 중국에서 표준 만다린어를 이 단어로 지칭하기도 한다.[26] 황귀비(皇貴妃), 귀비(貴妃), 비(妃), 빈(嬪). 실제 역사에서 본궁이란 호칭은 사용된 적이 없고, 모두 평범하게 '나'라고 자칭했다.[27] 호칭이 아닌 다른 뜻의 동음이의어 단어는 있다. 예컨대 태조 이성계의 오대조를 모신 사당.[28] 정1품, 무품 후궁 빈의 경우엔 자가[29] 왕자를 대감이라 불렀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는 60년대 연구의 오류에서 비롯된 인터넷에 퍼진 대표적 오정보로, 왕자의 존칭은 '자가'였다. 무품인 왕자를 정2품까지 불리는 대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신분을 낮춰부르는 불경한 행위이니 절대 대감이라고 부르면 안된다. 자세한 사항은 자가항목 참고.[30] 한국사의 후궁 제도 참고. 참고로 마지막으로 부군이 살아있으면서 적통계열의 비빈으로 봉호를 받은 여인은 소헌왕후로 공비라고 불렸는데, 봉호제가 개편되면서 봉호가 삭제되었다.[31] 의경세자 사후 수빈[32] 순회세자 사후 덕빈[33] 효장세자 사후 현빈[34] 사도세자 사후 혜빈[35] 남편이 죽은 왕세자빈이 ○빈으로 책봉되었다고 해도 법적으로 왕세자빈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단순 예로, 영조 연간 사도세자 사후 혜빈으로 새롭게 책봉된 혜경궁 홍씨는 왕세자빈 신분으로, 왕세손 이산왕세손빈 김씨보다 서열이 앞섰다. 그러나 정조 즉위 후에는 품계상 세자빈보다 왕비가 낮을 수가 없기에 대비>중전>혜빈>수빈 박씨의 순으로 내명부 서열이 정리되고 문안순서도 그리 시행하였지만, 혜빈 홍씨에게 대비를 이르는 호칭인 자전(慈殿)을 차용하여 자전보다 1계급 낮은 자궁(慈宮)을 사용토록하여 왕의 친어머니로서의 대우를 하였다.[36] 오히려 철인왕후 쪽이 호칭 면에서는 슈룹보다 고증이 잘 지켜졌다. 이 작품도 논란이 있긴 했으나 이는 고증 관련 논란은 아니었다.[37] 다만, 종법에서는 원손이 대군에 앞선다. 대군이 원손 대신에 물려받은 사례로 효종이 있는데, 그 효종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경안군 이회는 죽기 전까지 정계에서 폭탄과 같은 존재였다. 또한, 사대부들도 소현세자와 민회빈 사건에 대해 의문이 많아서 김홍욱과 같은 강골한은 대놓고 민회빈 사건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가 장살당했다.[38] 반대로 조선 초기 세조 재위 시절에는 본래 장자였던 의경세자가 요절하고 나서 원손인 월산대군이 아닌 둘째 왕자였던 해양대군이 차기 세자가 되어 왕위를 물려받았는데 이 때는 인조 재위시절과는 다르게 종법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던 조선 초기였던 데다가, 세조의 왕권이 꽤 강했기 때문에 딱히 잡음이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말만 숙부와 조카였지, 해양대군은 세조의 늦둥이 아들이었기 때문에 본인의 조카 월산대군보다 고작 4살 더 많았고, 세자로 책봉되었을 때가 고작 8살이었다.(그리고 세조가 즉위하게 된 계기 자체가 나이어린 국왕의 친위세력을 숙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몰아낸 것이기 때문에 세조와 공신들 입장에서는 또다시 나이어린 후계자를 세우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낀 것도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효종예종의 사례 둘 다 종법을 어겼다고는 볼 수 있으나 어찌되었거나 왕비 소생의 대군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드라마에서처럼 서자 군이 대군을 제치고 왕위를 가지려고 시도했던 적은 조선 역사에서는 한 차례도 없었다. 다만 대군의 존재에도 서자 신분으로 임금에 오른 광해군이 있는데, 그의 경우 선조가 유일하게 중전으로부터 얻은 아들이자 적장자영창대군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세자 신분이었다. 게다가 광해군의 경우도 원래는 선조가 오랫동안 정비였던 의인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생기지 않자 그냥 적자를 보기 힘들거라고 체념을 하고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한 것이었고, 영창대군의 탄생 자체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돌발변수에 더 가까웠다. 이 당시 선조는 나이를 먹을대로 먹은 할아버지였던터라, 아무도 손녀뻘인데다가 그냥 빈 곤위자리를 뗌빵하는 목적을 위해 뽑혔던 계비와의 사이에서 뒤늦게 대군이 태어날거라고는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39] 선조의 유일한 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났을 때 광해군은 이미 나이 서른이 넘어 정치적으로 입지가 탄탄한데다 세자 책봉까지 받은 뒤였다. 심지어 즉위한 후에도 영창대군에게 정통성이 있다며 옹립하려는 세력이 있었던 탓에 광해군은 결국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결정(사사하라는 명을 직접 내린 것은 아니나 죽음의 정황상 광해군의 개입 혹은 묵인이 없었을 가능성은 적다)을 내린다. 이것이 후일 반정으로 폐위되는 빌미 중 하나가 되기도 하지만.[40] 조선에게 있어 종법은 단순히 집안 상속의 원리로 그치는 게 아니라 성리학 정치이론의 근간 그 자체였다. 이를 통해 단순히 가문 내에서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서 '대종'(大宗)인 왕실과 '소종'(小宗)인 사대부의 질서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칭하는 단어에 괜히 '집 家'자가 들어가 있는 게 아니다. 이런 이론적 장치가 없으면 당장 로판에서 보는 것처럼 왕손들끼리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벌이면서 오스만 제국처럼 주기적인 내전으로 국력을 갉아먹게 되며, 나아가서는 지배층 내에서 왕위를 둔 무한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41] 그나마 세종이 형 효령대군을 제치고 세자 자리를 차지한 게 택현의 사례라고 볼 수는 있겠으나, 충녕대군 또한 엄연히 왕비 소생의 적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지, 만약 후궁 소생의 왕자였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태종도 서자들이 수두룩하게 많았지만 양녕대군이 폐세자된 후 그 많던 왕자군 중 그 누구도 세자 후보로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장성한 대군들이 존재하는 한, 일개 서자 왕자군 따위는 택현의 대상에서 아예 논외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이때는 태종의 뜻이 이미 효령이 아니라 충녕에게 있는 것이 너무 명백했기 때문에 신하들도 "전하 그러시면 안됩니다 택현해야 합니다"가 아니라 "전하 말씀이 맞습니다 택현해야죠"라면서 왕의 뜻에 맞춰주기 위한 명분으로 택현을 들고 나왔다는 점이다.[42] 또한 윤 왕후가 폐비된다고 소생들이 전부 폐위되진 않는다. 아버지에 의해 폐위된 대군은 역사상 없고 연산군도 모후가 폐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멀쩡히 세자-국왕이 되었다.[43] 실제로 영조의 후궁중 한 명이었던 숙의 문씨가 훗날 영조 사후 손자였던 정조에 의해 사도세자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이유로 사사시켜버린다.[44] 다만 정종은 즉위 2년만에 야심 큰 동생에게 일찌감치 세자 자리를 주어 서왕자들의 경쟁은 없었다.[45] 물론 이렇게 해도 서왕자들은 법적으로 모두 중전의 양자로 취급되므로 나이에 따라 서열이 정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으나, 적서 간의 경쟁이 아닌 서자들끼리의 경쟁이 되면 적어도 광해군처럼 나이 서열을 극복하고 세자가 된 사례가 없지는 않으므로 어떻게 욱여넣을 수는 있다.[46]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가 원작 보보경심청나라와 시대가 겹치는 조선 후기를 놔두고 굳이 고려 초기를 배경으로 한 것도 본 문단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고려 초기에는 적서차별이 완전히 자리잡기 전이었고 형제상속도 빈번했기 때문에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 보보경심의 배경인 청나라와 비슷한 상속권 분쟁을 다루는 게 매우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그러나 고려로 설정하더라도 고려는 초기에는 왕족끼리 근친혼을 했고, 조선과 달리 아예 왕비가 1명이 아닌 여러 명이거나 후기 같은 경우 몽골 출신 인물들이 왕비 자리에 앉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도 이 드라마와 같은 설정으로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은 무척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고려, 조선이 아닌 삼국시대 정도까지는 거슬러 올라가야 자연스럽게 녹아들만한 설정인 것이다. 물론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의 경우는 고려 왕족끼리의 근친혼이 본격화되기 전(태조 때부터 광종 때까지)이 시대적 배경이었다는 걸 감안해야겠지만 말이다. 아니면 차라리 청나라 같은 외국국가로 제작을 했다면 오히려 고증이 자연스러워질 정도로 청나라 시대와는 부합하는 부분이 많다.[47] 궁중암투물은 아니긴 하지만, 가령 환혼 같은 경우는 아무튼 역사 재현성 문제로는 무슨 소리를 들은 일이 거의 없다. 아스달 연대기 수준으로 뒤죽박죽이면 그건 좀 문제지만.[48] 21세기에도 윗사람에게 이런 짓거리를 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폭행죄로 법적 처벌까지 갈 수 있는데, 진짜 조선 시대였으면 폐위는 기본이고 사약까지 받을 수 있는 수준이다. 실제로 효종의 후궁인 안빈 이씨가 딸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지칭한 일을 두고 효종이 노발대발하며 안빈 이씨에게 큰 벌을 내리려 하자, 인선왕후가 한사코 말려서 겨우 넘어간 일이 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로 나온 말에 그 난리가 난 것을 보면 밥상 엎는 것까지 갈 필요도 없이 ‘내 자식이니 중전은 빠져라’ 라는 말로도 충분히 목이 날아갈 수 있다.[49] 조선시대로 말하자면 이른바 삼종의 혈맥(왕-세자-세손)을 이은 것으로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정통성 끝판왕이다.[50] 구르미 흐린 달빛의 홍라온처럼 역적의 딸이라면 모를까… 사실 세손까지 손주로 본 시점이면 그냥 넘어갔을 가능성이 높다.[51] 과장 안하고 중전이 헛기침만 해도 납작 엎드려야 할 처지로 감히 왕세자(+중궁)의 자리를 두고 중전과 경합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52] 작중 영의정처럼 중전을 적대하기는커녕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기 위해 자신들의 딸을 들이미는게 정상이다. 만약 영의정이 그랬던것처럼 왕실의 적통인 세자빈과 세손, 그리고 대군들을 죽이려 했다면 거열형으로 온 몸이 찢겨서 죽고 삼족이 멸해 가문이 멸문당했을 것이다.[53]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정통성을 가져다 주었으니 대형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폐위는커녕 후궁을 들이는 일에도 눈치봐야 한다. 중전을 건드리면 자신은 물론이고 세손의 정통성까지 흠집이 가기 때문. 이는 대비 역시 마찬가지로 무조건 중전 편을 들지 절대 드라마처럼 행동하지 않는다.[54] 작중에서 대왕대비나 태상왕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들조차 함부로 못 대한다. 실례로 명성왕후효종의 적장손을 낳았다. 물론 명성왕후의 처가의 힘도 한 몫을 하긴 했지만 당시 시할머니시어머니는 현종이 후궁 못들이게 질투하고 압박하는 행동을 한 명성왕후를 시집살이시키지 않았다.[55] 선왕의 왕비가 멀쩡히 살아있는데도 자신의 친어머니를 왕비로 추숭하여 선왕의 왕비를 밀쳐내고 대비의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적서와 정궁과 후궁의 구별이 엄연하고 일부일처제를 엄격하게 따르는 조선에서 말이 안되는 행동이다. 사실 이와 유사한 사례가 딱 하나 있었는데,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한 것. 하지만 광해군인조반정때문에 폐위되면서 공성왕후의 위패 또한 종묘에서 치워지게 된다. 즉, 있었지만 없던 일이 되어버린 것. 게다가 이마저도 드라마와 달리 공빈 김씨 사후에 왕후로만 추숭되었기 때문에 살아생전 대비가 된 것이 아니었다.[56] 실제로 비워져 있었던 이유로 엄청난 피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은 그만큼 역대 왕조 사이에서도 중전 자리를 가장 중요시 여겼던 왕조이다.[57]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광해군의 생모가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고 왕후로 추존된 거지 대비가 된 것은 아니다. 만약 서자 출신 왕이 살아있는 후궁 출신 생모를 대비로 만들려 했다가는 신하들과 유생들이 상소를 올리러 총출동했을 것이다. 당장 후술할 수빈도 대비가 못 되고 예우만 좀 받은 정도다.[58] 조선 왕조에서 똑같은 일은 당연히 아니지만 비슷한 일이 간접적으로 일어날뻔한적은 있다. 바로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안순왕후는 세자의 후궁에서 세자빈을 거치지 않고 바로 왕비가 되었다. 여기서 만약 예종이 오래 살았더라면 안순왕후가 후궁 시절에 낳은 제안대군이 왕위를 계승했을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왕비 자리를 거치고 말고가 얼마나 중요한것인가를 보여준다. 안순왕후가 왕비로 승격했기 때문에 그 시각 이후로 제안대군은 서자가 아닌 적자다. 왕의 후궁에서 대비가 되는것과 세자의 후궁에서 왕비가 되는건 왕비 자리를 거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이가 크다는것.[59] 남편 생전엔 후궁이었으나, 자식이 즉위한 후 황후와 함께 태후가 됨.[60] 이는 청나라에만 존재했던 것으로, 명나라 등 타 중국 왕조에도 있었을 지언정 조선의 역사 속에서나 이런 지위는 없다.[61] 실제 혜경궁은 후궁이 아닌 정실이었으나, 남편인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지 못해, 사사롭게는 왕의 사친이었으나, 공식적으로는 평생동안 중전이 아닌 세자빈의 신분이었다. 이로인해, 정조 즉위 후에는 왕의 사친으로서 혜경궁의 궁호와 왕대비(정순왕후 김씨)-왕비(효의왕후 김씨)- 혜경궁으로 서열이 확립되면서 서열이 밀리게 되었다. 아무리 왕의 생모여도 혜경궁은 왕세자빈이므로 왕비보다 서열이 우선할 수는 없기 때문.[62] 결국 마지막회에서 대비의 죽음과 함께 짧은 나레이션이 나오는데 앞의 내용처럼 중전으로 임명은 됐는데 책봉 의식만 남겨둔채 선왕이 승하하여 그대로 대비가 되었다고 한다. 이의 경우 실제 역사의 사례중에서는 문종의 왕후 현덕왕후 권씨와 가장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현덕왕후의 경우 극 중 대비와는 정반대로 본인이 단종을 낳자마자 급사해버려서 책봉 의식을 못한 것이었다.[63] 아다리가 완전히 맞지는 않지만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와도 살짝 비슷한 측면도 있다. 안순왕후의 경우 본래 세자시절의 예종의 후궁으로 입궁했고, 이 당시 세자빈이었던 장순왕후도 생존해있을 때였다. 그리고 장순왕후 요절 이후 세자빈 자리는 오랫동안 공석이었으며, 당시 품계가 소훈이었던 안순왕후는 곧바로 새로운 세자빈으로 승격이 못되고 계속 세자의 후궁자리에만 머물러있었다. 그러다가 시아버지 세조가 예종에게 양위를 하면서 지아비가 국왕이 되고나서야 비로소 왕비로 승격이 되었다. 그나마 극중 대비와 비슷한 사례라고 볼 수 있으나… 그래도 안순왕후의 경우 왕비 노릇을 잠깐이라도 하긴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와 형님인 정희왕후인수대비에 밀려 적자 아들인 제안대군이 왕위를 포기까지 해야했고 여러모로 발언권이 많이 없었다.[64] 보통 선왕 승하 이후 그 다음 후대왕이 즉위한 지 약 3년정도 지난 시점에서 행해지며 부묘례가 끝나면 흔히 '탈상'한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슈룹의 대비의 경우 후궁 시절일 때부터 이미 한참 나이를 먹은 장년이었고, 이는 이호의 아버지인 선대왕또한 마찬가지였기때문에 이미 부묘례가 행해진지 몇십년이 지났을 확률이 높다. 즉, 극 중 대비가 중전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이유가 부묘례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는 것.[65] 애초에 부군이 없는 상태에서 중전이 되면 입장이 애매해질 것이다.[66] 의성군이 대비를 뒤에서 욕하던걸 대군들이 알고있기 때문에 대군들이 이것을 이용하면 의성군 세력들은 역모죄에 강상죄를 적용받아 죄다 숙청당하는게 조선의 법도이다.[67] 실제 조선왕조에서 중종의 서장자였던 복성군작서의 변에 휘말리면서 세자 자리를 탐낸다는 누명을 쓰고 사사까지 되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도 이렇게 가차없이 제거되는데, 하물며 극 중 서자 왕자들처럼 행동했다가는 사사로 끝나지도 않을듯.[68] 애초에 호칭조차도 중전이나 대비나 후궁이나 전부 마마로 통일된 상태의 가상역사극이다. 이런 사극에서 좌석의 배치까지 신경 썼을리는 만무하다.[69] 통일제국 외의 중국 국가 중에서는 오호십육국 시대의 북위가 태화전이란 명칭을 쓰긴 했다. 그 외는 베트남 후에왕궁의 대전 이름이 태화궁인 정도. 이것도 후에왕궁의 모티브가 자금성이기 때문이다.[70] 태화궁이라고 하여 별궁 이름으로 '태화'라는 명칭이 사용된 적은 있음.[71] 심지어 명나라의 입김이 강하던 조선 전기 때는 아예 관복이나 예복도 하사해준 적이 많았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곤룡포나 면복도 원래는 명나라로부터 받은 하사품이었다.[72] 파일:british museum brush.jpg
현재 영국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명나라 만력제 시기에 제작된 청화 백자 붓이다.
[73] 이외에도 대신인 이사철이 병석에서 일어나자 세조가 청화백자 술잔을 내린 일도 있었다.[74]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많이 보는 대수머리와 적의 형태의 예복은 명나라가 멸망하고나서부터 입기 시작한 왕비 예복이고, 그 전까지는 명나라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대삼과 칠적관을 예복으로 활용하였다.[75] 두터운 재질의 방직물.[76] 보통 상국에서 온 공물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던 조선에서 별도로 기록하지 않은 걸 보면 특별한 소재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청나라의 하례품을 좋아하지 않아 기록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필묵(筆墨)이라는 말은 글을 쓰는데 필요한 도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글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일 경우에는 문예창작 덕후였던 건륭제가 또 자뻑으로 조선에 자신이 지은 시 등을 선물했을 가능성도 있다.[77] 조선이 양이선을 강화도에서 쫓아냈다고 하자 내린 하사품이다.[78] 영화 사도에서의 사도세자혜경궁 홍씨의 국혼 장면 등 간혹 가다가 사극에서 이 아청색 적의가 등장하기는 한다.[79] JTBC에서 제작한 사극이자 막장 요소 및 역사왜곡으로 논란이 있었던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에서는 의외로 대수에 끈을 달지 않은 적절한 고증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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