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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물 제820호 | |
덕수궁 함녕전 德壽宮 咸寧殿 | |
소재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수량 | 1동 |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제작시기 | 대한제국, 1897년 창건, 1906년 중건 |
<colbgcolor=#e3ba62> 함녕전[1] |
[clearfix]
1. 개요
德壽宮 咸寧殿덕수궁의 황제 침전이다. 황제도 사람이니만큼 자신만의 생활공간이 당연히 필요한데 함녕전이 바로 그런 곳이다. 쉽게 말해 황제의 집.
정문인 대한문과 정전인 중화전 사이에 있다. 덕홍전과는 한 영역이다.[2]
2. 이름
‘함녕(咸寧)’ 뜻은 ‘모두(咸)가 평안하다(寧)’이다. 《주역(周易) - '건(乾)' 괘 단사(彖辭)》에 나오는 “만물에서 으뜸으로 나오니, 만국이 모두 평안하다”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열강이 각축하던 시절에 국가 간에 평화롭길 바라는 마음을 담은 듯 하다.‘함령전’으로도 아는 사람들이 많다. ‘寧’을 '령'으로 읽고 쓰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 듯 하다.[3] 그러나 그것은 활음조 현상 때문이다. '寧'의 앞 글자에 받침이 없는 경우 '녕'으로 발음하기 힘들어 편의상 그렇게 부르고 쓰는 것일 뿐이다. 함녕전의 경우, '녕' 앞의 글자 '함'에 받침이 있기 때문에 원래대로 함녕전으로 읽는 것이 맞다.
3. 역사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본래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었다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잠시 머물던 행궁이었다. 그나마도 인조 이후엔 즉조당과 부속 건물 몇 채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전부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면서 약 270년 간 비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원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던 고종이 환궁할 곳으로 경운궁을 택하여, 경운궁을 제대로 된 궁궐로 만드는 공사를 시행했다. 이 때 임금의 정식 침전으로 지은 것이 함녕전이다.<colbgcolor=#e3ba62> 1897년 완공 직후의 함녕전 | <colbgcolor=#e3ba62> 《임인진연의궤》[4]에서 나타나는 1902년 경의 함녕전 그림 |
<colbgcolor=#e3ba62>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함녕전 모습[7] |
함녕전이 소실된 이후 고종은 중명전을 집무실 겸 침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1906년(광무 10년)에 다시 지었어도 그 무렵 있었던 여러 역사적 격변때문에 함녕전으로 돌아갈 시기를 놓치고[8] 계속 중명전에서 거주했다. 1907년(융희 원년)에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함녕전에 잠시 머물긴 했지만, 얼마 안있어 창덕궁으로 이어했다.[9] 결국 고종이 공식적으로 아주 돌아온 것은 이미 국권을 뺏긴 후인 1912년 10월이었다.
이후 이왕직[10]에서 고종의 편의를 봐준답시고 행각들에다 대기실, 사무실을 설치하는 등 주변 모습을 많이 바꾸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후 함녕전을 빈전과 혼전[11][12]으로 사용했고 이후 전호(殿號)를 효덕(孝德)으로 정하여 약 1년 간 함녕전을 '효덕전(孝德殿)'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후 주인없이 건물은 비었고, 1938년 일제의 덕수궁 공원화 계획으로 관광지로 변했다.
2009년 문화재청에서 일제가 변형한 행각을 복원했고 2019년에는 정문 광명문을 원 위치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1층[13]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지붕의 각 마루는 양성을 하고 취두, 용두, 잡상으로 장식했다. 잡상의 수는 7개이다. 평면은 ‘ㄴ’자 형태이다. 또한 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각기둥을 세운 뒤, 쇠서[14] 1개만 둔 몰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다. 강녕전과는 달리 중앙에 월대 없이 5단 짜리 계단만 3개를 설치했으며 뒷면에는 대청과 통하는 쪽은 계단 1개를, 북쪽으로 돌출된 부분엔 동쪽과 북쪽에 각각 1개 씩의 계단을 두었다.
- 정면 9칸, 측면 4칸에 북쪽에 온돌방 4개를 덧붙여 총 40칸 규모이다. 내부는, 가운데 정면 3칸, 측면 2칸을 대청으로 놓고 칸을 나누지 않고 한 공간으로 뚫어 넓게 했으며 천장은 우물 반자[15]로 막고 단청을 아름답게 칠하여 화려함을 부각했다. 대청을 중심으로 동, 서 양 옆의 정면 2칸, 측면 2칸을 온돌방을 두었으며 앞면의 협칸과 측면의 칸들을 마루로, 뒷면의 협칸은 쪽방으로 구성했으며 온돌방도 대청과 마찬가지로 벽체를 치지 않고 전부 한 칸으로 통하여 공간을 넓게 했다. 대청과 온돌방을 연결하는 문은 중앙에만 창호를 두고 그 위 아래로 종이를 바른 불발기[16] 양식으로 설치했다.
- 다른 궁궐들의 메인 침전은 일반적으로 다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건물인데 반해,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고, 대부분 쇠서가 2개인 이익공 공포인데 반해 함녕전은 쇠서 1개를 둔 몰익공 공포이다. 사실 앞서 말했듯 경복궁의 대비전 중 하나인 만화당을 옮겨다 지은 것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처음부터 정식 침전으로 지은 강녕전, 대조전 등과 비교해 구조의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옮길 때 용마루를 빼도 되지 않냐고 반문할 수 있는데, 그대로 놔둔데엔 두 가지 이유로 추측할 수 있다. 하나는 무량각 건물이 굉장히 고난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건물이라 함부로 뺐다간 공사가 더욱 힘들어졌을 것이고[17], 또 하나는 이게 중국 양식이라 그런 선진 기술을 귀하신 왕과 왕비의 침전에만 적용한 것인데, 이미 여러 서양 문물을 접하고 자주 독립국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이 굳이 중국풍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이다.
- 근대 시기에 지어서 그런지 서구적인 요소가 더럿 보인다. 대청 천장엔 샹들리에가 2개나 걸려있고, 대청 문틀[18]마다 커튼 박스를 달았으며 지금은 치웠지만 대청과 툇간 바닥에 카펫도 깔았었다.자세한 내부 모습을 보고 싶으면 여기로.
5. 여담
- 1899년(광무 3년)에 황의수란 사람이 덕수궁 서문 포덕문을 통해 궁 안으로 들어와 함녕전까지 가서 “나는 서교를 널리 선전해 천자가 될 것이다.”란 말을 해서 체포되었고, 교수형을 당했다. 사실 천주교, 개신교의 포교가 허용받은 지 한참 지난 시기라 그 죄목으로 처형당한 건 아니었다. 궁에 무단 침입해 황제의 침전에서 자신이 천자가 되겠다고 한 게 문제.#
빼박 역적 인증
<colbgcolor=#e3ba62> 함녕전 내부 개방 소식을 다룬 〈SBS 8 뉴스〉 영상 |
- 비영리 문화단체 '아름지기재단'에서 문화재청, 덕수궁 관리소, 에르메스 코리아, 문화유산국민신탁 등과 협조하여 '궁궐 전각 내부 집기 재현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함녕전을 대상으로 하여 2016년에는 외주렴을, 2017년에는 용교의, 오봉병, 용문석을 재현했다. #
6. 영상 매체에서의 활용
대한제국 시기를 다룬 영상물이 드물어 함녕전이 등장한 적은 별로 없으며 하다못해 야외 세트장에서 재현한 것으로도 나온 적이 거의 없다.<colbgcolor=#e3ba62> 《덕혜 - 마지막 왕녀》에 등장한 함녕전 |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덕홍전이 서쪽에, 함녕전이 동쪽에 있다.[3] 대표적인 예로, 인명으로는 무령왕(武寧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어령(李御寧) 등을, 이외에는 보령군(保寧郡), 고령가야(古寧伽倻), 태령전(泰寧殿)을 들 수 있다. 자세한 것은 '寧' 문서 참조.[4] '임인진연'은 '임인년(1902년)의 궁중 잔치'란 뜻이다. 이 연회는 고종이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열렸다.[5] 경복궁 북동쪽의 대비인 철인왕후나 순화궁 경빈 김씨가 거주하던 건물로 추정된다.[6] 즉조당에서 머물렀단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사실 환궁 전 신하들이 권유하긴 했으나, 즉조당은 거처로 삼기엔 너무 좁았으며 무엇보다 경복궁 선원전에서 옮겨온 어진들을 임시로 모셨기 때문에 고종이 거절했다.#[7]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8] 그 유명한 을사조약이 바로 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9] 移御. 임금이 이사가다.[10] 李王職.[11] 혼전(魂殿): 임금과 왕비 신위를 임시로 봉안하던 곳. 빈전(殯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12] 원래는 빈전인 흥덕전과 혼전인 흥복전을 사용해야하나 일제가 덕수궁 선원전 일대를 헐어 매각해서 함녕전을 사용했다.[13]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14] 소 혀 모양의 부재.[15]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16] 종이를 두껍게 바른 장지문의 한가운데에 교살이나 완자 살을 짜 대고 창호지를 바른 문.[17]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18] 방으로 들어가는 문 제외.[19]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은 이정윤이, 소녀 시절은 김민정이, 그리고 성인은 이혜숙이 맡았다.[20] 이 때 상궁들이 "마마도 돈을 내고 들어가셔야 하옵니다." 라고 하고, 덕수궁 즉조당을 구경하는 덕혜옹주 일행 뒤로 관람 온 일본인 관광객 일행에게 가이드가 어린 시절 덕혜옹주가 다녔던 유치원 자리라며 그의 어린 시절을 설명한다. 왕녀가 돈 내고 궁에 들어가며 덕혜 자신이 살았던 모습이 역사적 일화로 언급 될 만큼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장치이다. 마치 영화 《마지막 황제》를 생각나게 한다.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덕홍전이 서쪽에, 함녕전이 동쪽에 있다.[3] 대표적인 예로, 인명으로는 무령왕(武寧王), 효령대군(孝寧大君), 이어령(李御寧) 등을, 이외에는 보령군(保寧郡), 고령가야(古寧伽倻), 태령전(泰寧殿)을 들 수 있다. 자세한 것은 '寧' 문서 참조.[4] '임인진연'은 '임인년(1902년)의 궁중 잔치'란 뜻이다. 이 연회는 고종이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간 것을 기념하여 열렸다.[5] 경복궁 북동쪽의 대비인 철인왕후나 순화궁 경빈 김씨가 거주하던 건물로 추정된다.[6] 즉조당에서 머물렀단 이야기도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사실 환궁 전 신하들이 권유하긴 했으나, 즉조당은 거처로 삼기엔 너무 좁았으며 무엇보다 경복궁 선원전에서 옮겨온 어진들을 임시로 모셨기 때문에 고종이 거절했다.#[7]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8] 그 유명한 을사조약이 바로 중명전에서 체결되었다.[9] 移御. 임금이 이사가다.[10] 李王職.[11] 혼전(魂殿): 임금과 왕비 신위를 임시로 봉안하던 곳. 빈전(殯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12] 원래는 빈전인 흥덕전과 혼전인 흥복전을 사용해야하나 일제가 덕수궁 선원전 일대를 헐어 매각해서 함녕전을 사용했다.[13]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14] 소 혀 모양의 부재.[15] 서까래가 안보이게 천장을 가리고 평평하게 만드는 구조물.[16] 종이를 두껍게 바른 장지문의 한가운데에 교살이나 완자 살을 짜 대고 창호지를 바른 문.[17]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18] 방으로 들어가는 문 제외.[19]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은 이정윤이, 소녀 시절은 김민정이, 그리고 성인은 이혜숙이 맡았다.[20] 이 때 상궁들이 "마마도 돈을 내고 들어가셔야 하옵니다." 라고 하고, 덕수궁 즉조당을 구경하는 덕혜옹주 일행 뒤로 관람 온 일본인 관광객 일행에게 가이드가 어린 시절 덕혜옹주가 다녔던 유치원 자리라며 그의 어린 시절을 설명한다. 왕녀가 돈 내고 궁에 들어가며 덕혜 자신이 살았던 모습이 역사적 일화로 언급 될 만큼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장치이다. 마치 영화 《마지막 황제》를 생각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