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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 ||
<colbgcolor=#e3ba62> 덕수궁 준명당 德壽宮 浚眀堂 | ||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 |
건축시기 | 1904년 (창건) |
<colbgcolor=#e3ba62> 준명당[1] |
[clearfix]
1. 개요
덕수궁의 건물이다. 석조전의 동쪽, 중화전의 서북쪽에 있으며 즉조당과는 복도로 이어져있다.현판 글씨는 의정부찬정 박제순이 썼다.#[2]
2. 이름
'준명(浚眀)' 뜻은 '다스려 밝힌다', 또는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이다. 《서경(書經) - 고요모(皐陶謨)》 편에 나온 구절인 “날마다 세 가지 덕을 밝혀, 밤낮으로 소유한 집을 다스려(浚) 밝힌다(眀)."에서 따왔다.#특이하게 '명'자를 흔히 '밝을 명'자로 쓰는 '明'이 아닌 '眀'자로 썼다. 얼핏 보면 잘 구분이 안가지만 '明'에서 '해 일(日)' 이 아닌 '눈 목(目)'이 들어가있다. '明'과 모양만 다른 같은 글자이며, '밝게 볼 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일제가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을 대신썼다는 주장과, 반대로 일본(日本)을 싫어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日'이 들어간 '明'대신 '眀'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을 말하면 둘 다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대한제국 이전부터 쓰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당장 고종의 침전 정문인 광명문 현판에도 버젓이 '日'이 들어간 '明'이 적혀있다. 저런 거짓 정보에 속지 말자.
3. 역사
<colbgcolor=#e3ba62> 경운당[3] |
준명당과 즉조당이 붙어있는 지금과 달리, 경운당이 있던 시절에는 경운당과 즉조당[A] 사이에 행각을 두어 영역을 구분했다. 고종은 경운당에서 주로 전배하거나# 진찬을 열었다.# 이후 같은 해 7월#에서 12월 사이에 이름을 덕경당으로 바꾸었으며# 1902년(광무 6년) 10월에는 관명전으로 개칭했다.#
<colbgcolor=#e3ba62> 관명전을 그린 그림. 왼쪽이 관명전, 오른쪽이 즉조당, 동남쪽 하단이 석어당이다.[5] |
<colbgcolor=#e3ba62> 《경운궁중건도감의궤》의 준명당 모습[7] |
<colbgcolor=#e3ba62> 준명당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덕혜옹주(주황색 원 안) |
4. 구조
- 장대석을 3벌대로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기단의 상부는 전돌로 마감했으며, 정면에 4벌짜리 계단 하나를 길게 두었다. 기단의 동쪽 측면은 기단 자체를 계단식으로 쌓았으나 서쪽 측면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위에 네모난 주춧돌과 기둥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했으며 용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colbgcolor=#e3ba62> 대청[A] |
<colbgcolor=#e3ba62> 위 좌측 부터 서온돌, 동온돌(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라 본 방향).[A] 맨 아래는 동북온돌(북쪽에서 남쪽으로 바라 본 방향).[A] |
- 바깥 창호의 경우, 대청 툇간(退間)에는 띠살 창호를 달고 위쪽에 빗살로 된 교창(交窓)을 달았으나 정면의 온돌방 바깥 칸과 뒷면의 가퇴 부분은 정(井)자 살이다. 실내 창호의 경우 대청에서 뒤로 나가는 문짝은 화려한 아(亞)자 살이고, 온돌방의 창호는 전부 용(用)자 살이다. 다만, 동, 서 양 온돌방에서 뒷면의 툇간으로 나가는 문은, 가운데는 정(井)자 살로, 위와 아래는 용(用)자 살로 서로 다르다.
<colbgcolor=#e3ba62> 준명당 난간의 구멍[11] |
5. 여담
- 1912년 7월 23일 자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그달 18일 오후 1시에 준명당 후원의 느티나무가 쓰러졌다. 이 사고로 준명당 뒤편에 자리하던 영국총영사관이 피해를 입었고, 근처의 공중 전화선 및 덕수궁 전용 전화선이 일시적으로 끊어졌다.
- 2015년 5월 문화재청과 한한국문화재재단에서는 궁중문화축전 기간 동안 〈궁궐愛서, 소중한 하루를 선물하세요〉라는 행사를 진행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대상으로 '효(孝, 효행)', '우(友, 우정)', '애(愛, 사랑)'를 주제로 한 사연을 공모했으며, 이 중 '우(友)' 사연을 채택받은 사람에게 준명당을 대여해주었다.#[13]
- 문화재청에서 2016년 이후 3월 말 ~ 4월 초 봄의 1주일 가량을 준명당과 즉조당, 석어당, 중화전, 함녕전 등 덕수궁의 주요 전각 내부를 개방했다.# 해설자의 인솔 하에 단체관람을 했으며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하고 가야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 19 사태로 진행하지 않았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2] 을사오적의 그 박제순 맞다.[3] 사진 출처.[A] 당시엔 중화전이었다. 1902년 새 중화전 건립 후 즉조당으로 환원.[5] 사진 출처.[A] 당시엔 중화전이었다. 1902년(광무 6년)에 새 중화전 건립 후 즉조당으로 환원.[7] 사진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A]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A] [A] [11] 사진 출처 - 서울 스토리.[12] 덕수궁 유치원에 덕혜옹주만 다닌 것은 아니었고, 신하들의 자녀들도 같이 다니게 했다. 양반가의 딸들 중 덕혜옹주 또래의 아이들을 원생으로 모집했다.[13] '효'는 창덕궁 가정당, '애'는 창경궁 대온실 앞 정원을 대여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