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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교 문화권 국가의 강간약지 정책
진나라가 군현제를 실시한 이래로 중국에서 유교 문화와 행정체제를 수입한 한반도 국가들은 수도권에 힘을 집중시켜 중앙집권을 이루는 강간약지 정책을 추구해왔다.정작 중국은 전근대 행정의 한계에 비해 지나치게 넓은 국토로 인해 이를 실현하는데 어려움이 컸고 일본은 헤이안 시대 이후 막부 정권을 거치면서 지방권력이 강한 봉건제가 자리 잡았지만 조선은 좁은 국토의 이점을 살려 높은 수준의 중앙집권을 이뤘고 이는 밑의 항목의 결과로 이어진다.
2. 수도 근방을 중심으로 삼아온 역사
2.1. 전근대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는 지배층인 수도 귀족들이 강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예맥과 삼한의 소국들은 삼국 및 가야를 제외하고는 군장국가 단계에서 영토국가로 발전하는 데 실패했고 이로 인해 원래 각 소국들에는 강한 지방색이 존재했었으나, 삼국이 이들을 흡수하게 되면서 이들은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목지국이나 건마국 등의 유적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소국들에서 유래한 전통 공동체는 삼국의 형성에도 쉽사리 해체되진 않았고[1] 후의 조선시대처럼 중앙집권이 강한 시대는 아니었다.고구려, 백제, 발해가 수도를 옮겼기에 중앙의 발달이 억제되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당연히 오히려 중앙의 세력을 키우거나 최소한 유지하기 위한 이동이었다. 고구려의 경우 애초에 방어에는 유리하나 몹시 추운 산골짜기인 졸본성이 스타트 지점이었기에 영토가 넓어짐에 따라 더 나은 입지로의 이동은 필연이었고 일단 국내성으로 이동하긴 했으나 여기도 그나마 압록강 유역이라 졸본성보다는 낫다 뿐이었지 산골짜기이긴 마찬가지였기에 입지가 워낙 안 좋았다.[2]
그래서 고조선과 낙랑군 때부터 고도로 발달했던 평양성을 진작에 개발하면서 눈여겨 보긴 했으나 고국원왕이 평양성을 공격한 백제군에게 전사하기도 하는 등 전성기를 누리던 백제의 위협 때문에 쉽게 수도를 옮기진 못했고 장수왕 대에 마침내 백제를 초토화시키는 데 성공해 국방문제가 해결되자 즉각 실행에 옮기게 된다. 당연히 이후로는 천도의 필요성이 없었기에 하지 않는다. 백제의 경우 애초에 한성이라는 훌륭한 입지에서 시작했던 만큼 수도를 옮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개로왕 대에 장수왕에게 수도를 완전히 함락당하면서 강제로 천도당하게 된 거였고 웅진성은 이때의 국난에 대비하기 위한 임시 수도였기에 군사적 요충지로서는 몰라도 입지가 워낙 안 좋아서[3] 사비성으로 천도하게 된다.
당연히 이후로는 천도의 필요성이 없었기에 사비성 또한 평양성과 마찬가지로 백제 멸망 때까지 쭉 수도로서 있게 된다. 무왕 대에 금마저를 집중적으로 육성하기도 했으나 어차피 사비성과 가까운 배후지였기에 부수도로 기능하는데 그친다. 신라의 경우 수도 금성(현 경상북도 경주시)이 소백산맥이라는 방어막을 끼고 있어서 위협이 덜했던 데다 애초에 금성에서 더 후퇴할 만한 곳도 없었기에 자연히 삼국시대 내내 천도의 필요성이 없었다. 만약 진한이나 가야 소국 등 가까운 나라들의 위협이 거셌다면 신라의 경우에도 천도를 고려했겠지만 그런 경우는 발생하지 않았으며 초창기 백제의 사주를 받은 왜국의 침략으로 함락되었던 적은 있지만 이것도 광개토대왕의 빠른 지원으로 곧바로 회복했다.
삼국통일 후에도 천도를 하진 않았지만 5소경이라는 부수도를 만들어 수도의 치우침을 보완하였다. 발해의 경우 당나라의 기미주에서 탈주한 유민들의 이동으로 시작했던 만큼 초창기부터 기반이 부실해서 현지 말갈족들을 복속시키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그에 따라 처음에는 부수도를 만들고 이동하면서 체제를 정비하였다. 하지만 결국 여타 한민족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주문명을 형성하는데 성공하자 농사에 유리했던 상경용천부에 정착하게 된다.
즉 정리해보면 애초에 시작한 입지가 워낙 구려서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벽지이거나 영토의 확장에 따른 교통과 통신의 필요성이 생기거나 심각한 국방 문제가 발생하는 등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게 아닌 이상 삼국은 물론이고 역사적으로 볼 때 어느 나라도 아무 이유 없이 굳이 천도를 감행하진 않았다.[4]
잦은 천도를 유목민족의 특성에 비유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이들이 애초에 스텝지대에 국가를 형성했기에 목초지가 소모되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동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 이들도 일단 정복 전쟁에 성공하면 정복한 나라의 중심지에 알박기를 하고 굳이 천도를 하진 않았다. 가장 유명한 유목민족인 몽골족과 튀르크족이 건국한 원나라와 오스만 제국의 경우를 봐도 원나라는 대도에 정착한 뒤에는 상도를 여름 수도로 삼고 별장으로 사용한 것 외에는 이동한 적이 없고 오스만 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 수도로 삼은 뒤에는 이동한 적이 없다. 원나라가 대도에서 천도하게 된 건 명나라에게 달달 털리면서 북원으로 전락해 어쩔 수 없이 초원으로 밀려나게 됐을 때였다. 한민족 또한 전통복식인 한복에서 바지가 발달한 등 유목생활을 영유하다 정주하게 된 흔적이 보이는데 당연히 옛 흔적일 뿐이지 일단 정주문명을 건설한 뒤에는 정주민으로서의 문화를 발달시켰다.
그러다 후삼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지방 각지에서 호족들이 거병하면서 신라는 무너졌고 금성 또한 중심지로서의 입지를 잃어버리게 된다.[5]
고려 시대에는 개경(현 북한 개성시)이 중심이 되면서 한반도 중부지방에 수도가 위치하게 되어 현 수도권 과밀화 현상의 단초가 마련된다. 한반도 중부지방은 당대 최고의 교통이었던 수운의 중심지였기에 당연히 천도의 필요성 또한 떨어졌고 이후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한반도 중부지방은 수도권으로 자리잡게 된다.[6]
일단 호족들의 중앙 진출과 과거제를 통한 신진 인사 등용으로 고려시대에는 지배층의 폭이 넓어졌고, 아직 지방에 남아있던 호족들의 전통 공동체도 유지되었기에 향리층의 지위가 낮지도 않았다. 이후 여몽전쟁과 홍건적 및 왜구의 침입 등으로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전통 공동체가 박살나는 등 여러 혼란이 있긴 했지만 이 혼란 당시 몽골과 홍건적의 피해를 직격으로 맞고 일부는 아예 한민족의 영토로 편입되지 못한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를 제외하면 대체로 조선 중기까지 이런 균형이 유지된다. 하지만 고려 성종의 과거제 도입을 시작으로 향교가 수도에서 출세하는 인식을 심어주고, 이에 서서히 지방의 권력이 약해지며 권정평의 묘지명에서는 안동 출신이 향리가 되는 것을 꺼려, 20세가 되기도 전에 개경에 상경하여 향시에 응시하는 사례까지 언급되었다. 중앙의 관료사회에서 인정받아야지만 진정으로 출세할 수 있다는 인식이 이때부터 심어지게 되었다.
마침내 현 서울특별시의 전신인 한성부를 수도로 삼은 조선시대에는 중앙정부가 전국적인 군현 장악력을 획득하게 되는 한편으로 지방에서는 재지사족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 향회 및 향약이 발달하게 된다. 이는 고려 후기 때 본격화된 지방의 성장과도 맞물린 것이었다.[7]
이들은 중앙에서 임명한 수령을 견제하는 한편 지방의 각종 정책에 개입하는 등 큰 명예와 권위를 누리게 된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유향소를 감독하는 기관인 경재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한편 이때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향리층이 있긴 했으나 이미 여러 번의 전쟁으로 박살나기도 했고 재지사족에게 밀려서 신분이 아예 중인으로 고정되는 등 위상이 떨어진다.
중종 대에는 각종 사화 등의 정치 혼란으로 인해 관리들이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거나 지방에서 중앙진출을 위해 과거 공부를 하던 재지사족들이 과거 공부를 접고 유학자로서 정착해 지방에서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졌다. 이때 성장한 대표적인 세력이 이황을 위시한 영남 사족 세력이었다. 영남 사족 세력은 명종 대에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해서 선조와 광해군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으나,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몰락해서 정치적 위상이 별 볼일 없는 수준으로 전락한다.
이후 인조와 숙종 대에 권력을 장악한 인사들은 남인이고 서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경기에서 넓게는 충청도까지를 근거지로 삼은 기호 사족 세력이었다.[8]
이때 인사 임용의 폭이 경기도와 충청도에 집중되는 등 편중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수도권 세력이라 할 수 있는 기호 사족 세력에게 우위가 주어질 수밖에 없었다. 재지사족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 또한 이름이 향청으로 바뀌면서 수령의 보좌기구로 전락하게 된다.[9]
숙종대의 환국과 경종대의 신임옥사를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심화되었고,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영조대의 이인좌의 난과 탕평책이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영남 사족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이 외에도 지역별로는 연대순으로 세조(조선)대의 이시애의 난으로 함경도가, 선조(조선)대의 정여립의 난으로 전라도가, 평안도 같은 곳은 반역향 문서에서 보다시피 효종 대의 영변부의 살인 사건이 중요한 정치적 탄압의 계기가 되었고 후대의 홍경래의 난은 차라리 약간 유화적인 정책을 이끈 계기가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탕평책의 취지는 당파에 상관없이 고루 등용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온건파만 중용되었고 강경파는 배제되었다. 특히 재지사족들 중에는 강경파가 많았기 때문에 등용문이 막혀버리게 되면서 한성 사족 세력이 득세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는 경향분기(수도와 지방의 풍조가 나뉨) 현상이 나타나 경화세족이라는 한성 사족 세력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그 신 안동 김씨의 장동 김문(물론 이 때는 '좀 더 이름 있다' 수준에 불과했지만)이었고, 반대로 재지사족 세력은 그나마 이름 있다던 영남 사족 세력도(대표적으로 이현일 등이 있다) 은근한 무시를 당해야 했다. 게다가 경신대기근이라는 어마어마한 자연재해까지 겹치는 바람에 한성부 외곽인 성저십리 지역에 지방출신 이주민들이 급증하는 등 인구의 서울 집중의 단초가 되었다. 조선은 당대의 유럽, 일본에 비해 거주이전의 자유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유연했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인한 경향분기 세태는 18세기와 19세기 내내 이어졌고, 여기에 세도정치가 들어서면서 이 문제는 완전히 고착되어 조선 멸망 때까지 쭉 해결되지 못했다. 그래서 경향 분기 현상이 이어지는 가운데서도 지방에서는 향촌 조직이 재정비되고 양반호가 보편화되며 노비호가 해체되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나며 나름의 성장이 계속되고 있긴 했지만, 흔히 자본주의 맹아론에서 제시하는 '양반의 인식 변화'는 대체로 한성의 경화세족들만 누리게 되었다. 개성이나 평양과 같이 여몽전쟁, 홍건적의 침략으로 인한 수난으로 양반 자체가 없다시피하여 중앙의 무시[10]가 심했던 평안도의 대도시들은 아예 성리학 중심의 중앙 문화에서 이탈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11]
2.2. 근현대
그러던 것이 일제강점기를 통하면서 조금은 바뀌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도 지방에 쌀 이출 등 교역을 위하는 항구가 구축되면서, 그리고 종반에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 지역에 병참기지화 정책이 진행되면서 변화가 생겼다.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공업이 발달하게 된 한반도 북부 지방으로의 인구 이동이 활발해지기도 했다.일제강점기에도 이미 의료 인프라, 교육 시설 등은 경기도에 가장 많았다. 외국과 근접해 개화가 지리적으로 빨랐던 제2의 도시 평양이 있던 평안남도 같은 곳이 경기권보다 우수한 1인당 의료인 수를 기록하기도 했으나 1940년대가 되자 역전당한다. # 의생은 지방에 많아도 의사는 경기권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격차는 권역별로 비교할 때 현재도 유지되고 있다. #
그리고 광복이 되고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월남민이 폭증했고, 대개 삶의 기반이 미약했던 이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일거리가 있는 도시 지역으로 몰렸다. 한편, 북한 정권조차 서울에 집착하며 헌법에 서울이 수도라는 조항을 무려 1972년까지 넣고 있었다.
한편으로 임시 수도[12]였으며 최대 무역항을 보유한 부산의 인구가 폭증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는 빠른 경제 발전을 위해 성장 거점 우선 발전에 중점을 둔 경제 개발 방식을 택하였다. 이는 규모의 경제와 유관한 방식이다. 우리나라는 수출 중심의 경제 성장 모델을 세웠기 때문에 자연히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교통망의 개발에 관심을 두었고, 따라서 주로 경부선과 경부고속도로 연선 지역과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한민국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체제경쟁 속에서, 북한에 뒤지지 않는 경제성장과 생존을 목표로 밀리면 다 죽는다라는 의지로 군사적 안정과 경제개발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전 국민이 총력전형태로 나섰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한반도의 지금까지 역사와 다른 공업 중심의 경제구조를 만들면서 이 구조에서 경제성장의 동력이 될 엔진과 지휘부가 될 지점은 결국 한반도에서 가장 부가 넘쳤던 서울과 한강 일대였다. 이때부터는 마치 MMORPG의 저렙지역과 고렙지역이 갈라지듯 지방에서 능력있는 인재는 전부 서울에 몰빵하고 지방의 생산에 부가가치를 더하는 일은 서울에 모두 몰아주는 식으로 서울을 대한민국 국력의 최전선에 놓고 발전 전략을 짠 것이다. 그렇기에 국민들은 어느순간부터 (서울에서) 밀리면 다 죽는다라는 의식이 머리에 박히게 되었다. 마치 MMORPG 게이머들처럼, 저렙때부터 빠르게 성장공식을 타면서 사냥터를 갈아치운뒤 마지막 고렙지역에서 계속 렙업을 못할거면 생존이 안되니 게임을 접던가 자기 모든 것을 다 밀어넣어서라도 서울에서 버티면서 돈을 벌고 살아남아 자기가 경쟁력있는 사람이란걸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자기 아파트값에 경제논리가 아닌 힘의 논리, 생존의 논리에 더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밀리면 도태되고 도태되면 죽으니까라는 공포에 지배당한 것이다.
그래서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이런 방식으로 경제 개발을 빠르게 진행되면서, 경부선과 경인선 지역을 중심으로 경제 개발에 혜택을 받은 지역들은 인구가 증가하게 되었지만, 반면에 이 두 지역에 해당되지 않았던 전라도같은 대부분 지역들은 일자리가 없거나 교통이 불편한 이유로 심각한 인구 유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난 지방민들[13]은 상대적으로 일자리가 많은 수도권으로 몰려들었고, 그 결과 대규모로 수도권으로의 인구 이동이 이루어지게 되어 수도권 집중 현상이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이로 인해 빈부격차는 가속화되었다.
한편 1970년대까지 경제 발전에서 남동임해공업지역의 지분이 강했던 경상도는 경공업과 중화학공업으로 발전했는데, 성장 속도가 같은 경부선 라인인 서울을 제외한 수도권, 충청도를 뛰어넘게 되자 전두환 정권부터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1980년대부터 경상도는 성장 억제 관리에 들어갔으며[14], 그 대신 경상도에 비해 경제력이 밀렸던 수도권(서울 제외), 충청도 위주로 균형을 맞추려고 했다.
1980년대부터 경상도가 성장 억제 관리에 들어가면서 남동임해공업지역은 포항, 광양에 제철소를 두고, 울산, 여수에 석유화학단지를 두며, 거제와 울산에 조선소를 세우는 것에 머무른 것과 달리 수도권은 계속해서 경제 개발과 도시 개발이 이루어졌고, 여기에 1기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수도권은 여러 측면에서 경상도를 급격하게 추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2000년대에 수도권은 타 지역들에 대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게 되었고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가 급격하게 벌어지자 각종 문제가 가시화되며 '서울 공화국' 비판 현상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은 현대에 들어서 서울이 주도권을 놓쳤던 때가 없다. 즉, 수도권 과밀화 경향은 항상 잠재되어 있었다. 1987년에 민주화 이후 지방자치와 지방분권, 지방균형발전 등에 대한 관심이 활성화되었으나 수도권 과밀화에 대한 본격적 문제 의식이 제기된 것은 수도권의 절대 우위가 완성된 2000년대였다.
지역내 GDP를 기준으로 보면 서울이 22%, 경기가 24.5%, 인천이 4.8%로 수도권의 GRDP가 51.3%로 GDP의 50% 이상이다. 서울만 놓고 봐도 1/5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3. 반복되는 수도권 중심 경제 정책
대한민국 정부의 경제 정책이 서울 중심으로 집행되었기에 수도권 과밀화 현상이 발생했다. 일각에선 박정희 정부부터 시작된 중상주의적, 간섭주의적 정책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알려져 왔다. 근현대사를 공부했다면 다 알겠지만, 초창기 박정희 정부는 효율적인 도시화를 위해 서울을 포함한 대도시 중심의 경제 정책을 펼쳤다.이 정책 자체는 상술했듯이 효율적으로 도시화를 달성할 수는 있다. 왜냐면 박정희 정부부터 대도시 중심의 거점개발 경제 발전을 추구했고, 이는 대한민국의 성공적인 공업화로 이어진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때부터 남동임해공업지대로 대표되는 경상도의 과도한 지역성장을 억누르기 위해 국제그룹 해체 사건으로 대표되는 성장억제정책을 시행했고, 민주화 이후 다른 정부들도 마찬가지로 서울 집중 정책기조를 계속 따라갔으며,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서울의 발전 속도와 지방 발전 속도의 균형점을 잡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더구나 부동산 경제가 성장하면서 정부의 정책 집행력을 넘어서버렸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는 서울의 지나친 과성장+갈수록 악화되는 안보상황을 우려해 각 지역 거점별로 종합적인 도시개발계획[15]을 세웠고 최종적으로는 1980년 이후에는 공주·연기(현 세종) 일대에 행정수도를 옮기려는 단계까지 온 상태였지만 박정희 본인이 암살당하면서 모든 개발 정책이 중단되었고,[16] 훗날 노무현 정부가 다시 세종시로 천도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 또한 헌법재판소와 서울/경기도민의 반대여론 속에 행정복합도시 하나를 건설하는 것에 그쳤다. 결론적으로 역대 대한민국 정부 혹은 대통령 중에 서울 중심의 정책을 벗어난 인물은 전두환 이래로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의 제어 실패는 서울과 외국 도시들을 비교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인구 8200만인 독일에서 최대 도시이자 수도인 베를린의 인구가 370만/도시권은 454만에 최대 광역권인 라인-루르 지방은 1100만명인데 비해, 인구 5100만인 대한민국에서 서울은 인구가 950만/광역권은 2600만이 된다.
특히 도시로의 인구 집중은 도시화율로 드러나는데, 도시화율 자체는 독일과 대한민국에 큰 차이가 없다. 도시권 인구로 봐도 마찬가지인 게, 인구 100만인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은 도시권 인구가 약 500만인데 비해, 서울은 시내 인구 자체가 950만이고, 실질적으로 도시권인 인천광역시와 경기도를 합치면 2600만이 넘는다.[17]
여기에 정부에서 세금을 징수하거나 강제력을 동원하여 서울시와 인접한 경기도에 인프라를 증설, 인구가 몰리도록 하니 일자리, 도시구조가 수요로부터 체계적으로 유리되었다. 이에 따라 서울은 압도적인 인프라를 등에 업고 인접도시까지 흡수해 연담화가 되었으나, 서울을 제외한 다른 지방의 중소도시들과 시골들은 인접 광역시와 연담화되지 못한채 기형적으로 개발이 지체되거나 수행되지 않았다. 수도권에 집중한 신도시 계획이 대표적인 예시다.
자본의 축적은 노동의 한계생산성을 증대시키므로 필연적으로 임금이 인상되도록 추동하며, 인상된 임금에 따라 기업이 지방으로 진출하는 유인을 제공한다. 정상적인 경제체제라면 지방도 수도권을 조금씩 따라잡아야 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반복되는 서울 중심의 정책으로 인해 기업이나 투자자들이 지방에 투자할 유인이 소멸해버렸다. 한마디로 정책부터가 잘못되었던 것.
거기다 대한민국은 국민을 대도시로 끌어모아 일시켜 생산을 끌어올리는 전략을 취하는 과정에서 주거문제를 해결하는데 국가의 돈을 쓰는 것이 부담된다는 이유로 부동산 버블을 만들고, 전세 제도라는 일종의 半사금융의 형태로 국민의 주거권을 건설시장에 떠넘기면서 정부는 돈을 들이지 않는 대신 고금리로 시중에서 빨아들이는 자금을 전부 아파트 한채에 때려박게 만드는 현재 대한민국의 지나친 고비용 주거문제를 고착화시켰다. 문제는 이런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선 국민의 안정적인 장기 고용과 국민의 수익이 저축으로 돌아오는 순환구조가 안정되어야 했는데 IMF 금융 위기로 장기 고용이 무너지고, 지속적인 생산을 통해 소득이 저축으로 돌아오는 구조까지 같이 깨지면서 지금의 전세제도는 실수요자가 아닌 투자목적의 가수요만 왕창 생겨나고 공급은 소수의 투기세력과 건설사들이 일방적으로 조이면서 가계와 정부에 계속 고비용 압박을 전가하는 식의 주택시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4. 서울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교통 지리
한반도의 지형도를 놓고 살펴보자. 산지가 70%를 차지하는 한반도 지형의 특성상 그나마 인구가 몰리는 지역은 약간이나마 남아있는 평지밖에 없는데, 그게 상당수가 해안가, 특히 서해, 동해안쪽에 몰려있다. 그런데 그 인구 집중지들 간에 이동하긴 위해서 반드시 통해야 하는 장소가 바로 서울 일대다.남부 일대에서 북부로 가려고 해도 서울을 통할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북부에서 남부로 가려 해도 서울을 통해 가야 했다. 이것 때문에 서울은 꼭 수도가 아니었던 시절에도 언제나 최중요 도시로 손꼽혀왔고,[18] 정치적 안배를 위해 부각한 도시들[19]과 다르게 순수히 실리적 이유만으로 수도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도시였다. 즉, 가만히 놔둬도 한반도 지형상 발전할 수밖에 없는 도시인데 여기에 정치적 의미까지 더해져 서울로의 밀집은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분단 이후 서울은 교통지리 상의 강점을 잃어버렸다.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서울의 위치는 국토 끄트머리이며 외국과도 연결되지 않는 막다른 길이다. 휴전선 전방으로부터는 50km도 채 안 되는 지역이니 남북한 극한 대치상황이라면 인구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는 증가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분단된 대한민국에서 정치적 특혜를 받지 않았다면 교통지리 상의 유리한 입지가 사라지고[20] 최전방으로 바뀐 서울은 쇠퇴가 극심했을 것이다.
단, 분단 후에는 잃어버렸지만 분단 이전의 오백년에 이르는 통일왕조 시절 동안 최고의 교통요지로 기능하며 쌓아온 상징성과 인프라는 어디 가는게 아니므로 쌓아놓은 막대한 자산이 분단 후의 약점을 극복하는데 크게 작용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서울 외 다른 지역은 분단 전이나 후나 우선 기존의 모든 자산이 쌓여있는 서울과 연결되는 것을 1순위로 두었고, 서울보다 가까운 곳, 서울보다 북한으로부터 덜 안전한 곳으로 연결되는 것은 후순위였다.
또한 외국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서술인데, 육로가 막힌 것은 삼면이 바다요 남은 길은 적국인 대한민국 현실상 서울이 아닌 어디든 마찬가지이고, 조선시대부터 서울과 떼어놓기 힘든 짝꿍이며 대한민국 2위 항구와 1위 공항을 보유한 인천을 통해서 얼마든지 수출입이든 문화교류든 잘만 해왔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냉전이 끝난 뒤에는 중국과의 교류에서는 다른 지역보다 유리한 면도 있다. 육로가 연결된 통일 이후에도 중국 경제의 핵심인 동남연안지역과의 교류는 육로보다는 바닷길이 유리할 것이다.
5. 대도시 중심, 규모 중시 가치관
대한민국은 예로부터 말은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속담이 있다. 문자 그대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의미인데[21] 이 인식이 현대에도 크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이 태동할 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출세를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깔려 있었고 지금은 다소 나아졌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워렌 버핏처럼 투자에서 분위기에 휩쓸리는 그릇된 판단을 막기 위해 월 스트리트가 아니라 오마하[22]라는 전주[23]보다 좀 작은 도시에서 사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그조차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여기도 우편이 오고 정기간행물들도 배달이 됩니다.'#라고 할 정도의 양적 인프라가 부족한 곳에 살며 개인주의적인 사고로 무작정 대도시로 가지는 않는 경우도 있고, 투자은행 등이 세제 혜택과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 확산으로 월 스트리트를 떠나 아예 금융 중심지로서의 역사가 없던 플로리다로 가는 현상도 있을 정도지만 # 한국은 이런 개인주의적인 판단이 어렵기에 서울에서 벗어나는 것은 틀린 것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 특유의 물질주의 문화, 다른 취향을 이상하게 보는 오지랖 문화로 인해 어떤 문화 생활, 인프라가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은 확고한데 그 기준이 서울이라는 것이다.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은 토박이보다는 외지인의 비율이 훨씬 더 높다.# 그럼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 때문에 수도권에서 내려가려고 하지 않는 반면,[24] 지방 사람들은 오직 수도권에 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근거지를 떠나기도 한다. 대학, 직장 문제로 대학 등 교육 문제도 그렇고, 취미생활, 그리고 교통수준, 심지어 기초적인 의식주 생활과 의료환경까지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격차가 다소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수상이나 산지, 하늘에서 이뤄지는 요트, 스키, 경비행기 등 서울에서 자체 해결이 안 되는 취미활동조차도 서울과 교통수단으로 연결이 안 된 지역은 거의 없기 때문에[25] 접근성 측면에서 서울 사람이 취미를 즐길 수 있는 난도는 웬만한 지역보다도 낮은 편이다.
물론 수도권 로망은 미국이나 독일, 호주 등을 제외한 불문이긴 하지만 이는 비약적으로 상경하는 사람들 중 지방에 일자리가 없어서 상경한 이들이 대다수이다. 서양 기준으로 보면 특히 자기 고장에 대한 애착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 경제적으로 쇠락한 지역 출신이라도 나름의 자부심을 표출하는 것[26]이 이상하지 않다. 특히 일부 서양 국가는 수도와 경제 중심지 내지 정치 중심지가 다르다. 서양 문화권은 전체적으로 동양 문화권보다 지방 분권 의식이 잘 갖춰져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서구 기준으로는 교외나 근교 거주가 한국과 달리 오히려 성공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27]가 흔하며, 낮은 건물 밀도, 한두 개의 필수 상점[28]이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좋게 받아들여지거나, 큰 도시의 떠들썩한 여가 못지 않게 개인적/가족 중심 여가가 중시되는 경우가 많다. 대중교통의 경우에도 버스/전철이 15-30분 간격으로 운행해도 수용하고, 마지막 차량 시간이 저녁 11시 정도여도 감수하며, 주말/공휴일 감축 운행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강하다. 기다림 자체를 아예 생활의 일부로 수용해버린 것이다. 일본도 '적정 규모'의 도시를 한국보다 좋게 평가하고, 저층 주거지, 골목길 문화[29]도 좋게 평가하는 편이다.
서양에서는 도시 규모 < 도시 기능, 적정 규모 = 삶의 질, 중규모 = 관리 효율성 같은 가치관이 자리잡아 부산이 인구가 6천 7~8백만(영국/프랑스)에서 8천5백만(독일)인 서구 국가 제2위 인구 수준의 버밍엄이나 맨체스터, 마르세유, 함부르크보다 인구가 최소 백만명 이상 많다. 심지어 프랑스 마르세유는 한국 광역시보다도 인구가 적다. 하지만 정치적이거나 문화적인 만족감에 있어서는 이런 서구 지방 출신이 한국 지방 출신보다 높은 편이다.
극히 일부, 그것도 인터넷 여론이지만, 서울에서만 즐길 수 있는 취미를 즐겨야 출세로 여기는 부류마저 존재한다. 흔히 인프라보다는 지방 일자리를 중시하는 부류의 일반인은 PC방 같은 곳을 가거나 넷플릭스 등을 즐겨 지방에서도 살 수 있어, 서울에서 즐기기 쉬운 클래식 같은 것을 얼마나 즐기겠냐는 말도 있는 것이 이런 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지방에는 중공업을 유치한 도시가 많은데, 저런 업종은 '남성 중심적'으로 여겨지다보니 여성이 만족하는 이야기를 가진 인프라가 부족해져 20대 성비가 여성이 많은 지자체가 서울밖에 없다. 미국의 사례를 비교하자면, 서쪽이 남성이 많고 동쪽이 여성이 많은데 미국인들은 여성이 더 고향에 머무르려고 하지 않겠느냐며 한국인과 인식이 정반대다. # 한국의 전통에서는 돈을 벌어오라는 교육이 여성에게는 약해 소비가 중시되고, 가능한한 많은 물질적 자원을 들여 어머니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많은 인프라가 중요했던 반면, 미국의 전통은 어디에서든 건강한 돌봄이 중시되는 모양인지 고향에 있어도 괜찮다는 인식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의 실제 우수도 여부와는 관계없이 단지 소재 지역만으로 인식이 달라지기까지 한다. 인서울 대학교, 인수도권 대학교란 용어의 등장처럼 단지 수도권에 소재하는 것만으로도 입결이 상승하는 데 반해, 자타공인 한국 최고의 공과대학인 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대조차 지방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당하는 경우가 있고#1#2, 두 대학의 선호도 역시 지방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전에 비해서 낮아지는 경우가 있으며# 한때 서울 소재 대학에도 뒤지지 않던 위상을 자랑하던 최상위 거점국립대학교도 입결이 하락하였다. 이렇다보니 논산 이전을 결사반대하는 육군사관학교의 사례#처럼 수도권 소재 대학은 지방으로의 이전을 거부하며 교명에 '목포'라는 지역명을 빼려고 하는 목포해양대학교#처럼 지방대들이 지역색을 없애고자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유일하게 지방으로 사람들이 이사가려는 현상이 2020년대에 나타난 것은 지방 의대 정원을 확대하며 지역인재 전형을 노리는 집안이 늘어난 경향밖에 없다. # 그나마도 의사가 되고 나면 수도권으로 가려는 경향이 꽤 심하다. 고정된 기준으로 서열화된 한국 사회 속에서 물질이나 학력과 같은 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서열'을 얻을 수 있다면 사람들은 어디든 가려고 하겠지만, 다른 도시는 그저 '다른 것'이라는 인식이 부족하고, 서울이 서열의 정점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이런 현상은 지속된다는 것이다.
광역시는 아직까지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정치권, 기업, 정부가 수도권 중심 투자를 지속하면서 광역시의 국립거점대를 비롯한 지방대들이 자생력을 잃어버리면서 도시의 기반 수준이 엄청나게 벌어져 직장과 학업은 물론, 한국인이 원하는 의료나 문화생활 같은 것들조차 지방이 서울의 수준을 따라올 수가 없게 되었다. 게다가 인서울 대학교의 인식과 지방대의 인식, 인서울 대학교 주변은 대학로 및 각종 인프라로 넘쳐나는 반면, 지방대는 주변이 논밭이나 산으로 둘러싸인 경우가 많아 지방대를 기피하게 되어 자퇴하거나 편입하기도 한다. 사실 지방대조차 국립대나 비교적 유명한 사립대는 시내에 위치한 곳이 많아 일부 광역시 중에서는 대표 상권이 그런 대학 주변인 경우도 있고, 서울의 대학 또한 많은 곳이 산에 둘러싸인 형국이지만 그래도 서울의 대학의 네임밸류가 높아지다보니 근처의 인프라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지방 출신의 학생이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다 보면 그 인프라를 누리게 되기에 졸업 후 다시는 그 인프라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슬픔에 고향으로 돌아가기 싫어하기도 한다.[30]
더 나아가 서울의 유명 대학에 부속된 대학병원마저 서울에 위치하다 보니 고급 의료 서비스 또한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대학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을 포함한 대학병원들이 열 개나 있으며, 거기다 국내 최대 규모의 일반 종합병원인 현대 계열 서울아산병원이 있고 삼성 계열 삼성서울병원 등도 있다.
조금 희귀한 병에 걸리면 서울 아닌 곳에서는 치료를 할 수 있는 의사가 아예 없는 경우도 흔하다. 물론 어떤 병의 경우는 서울 내에서도 해결책이 매우 제한적이거나 국내에 치료 가능한 의사가 없으며, 간혹 대기 오염이나 삶의 여유 같은 사항을 들며 건강에 지방이 유리한 면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존재한다. 지역별 의료분쟁 건수를 보면 단순히 인구 비례에 따라 의료분쟁 건수가 달라지기에 의사의 실력이 일반적인 질병에 한정해서는 대단한 차이가 없다. # 의료의 질 같은 주관적 인식에서도 지방에서의 의료사고가 나오면 서울의 평범한 곳이 아닌 서울의 특별한 병원을 사람들이 비교한다.
공연을 보려고 해도 서울과 서울 외 지역의 행사 수가 엄청나게 차이나고, 이중 연극은 2018년 기준 서울 시민조차 서울 시민 중 대중적인 아동/가족 연극까지 모두 합쳐도 20.9% 정도 되는 사람이 지난 1년 동안 한 번이라도 봤다고 할 정도로 서울에서만 볼 수 있는 연극은 대중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취미고, 서울 시민 중 대중 공연조차 9.4% 가량만 즐긴다.#[31] 그렇지만 어쨌든 이런 것은 고급 문화로 인식되고는 했으니 수직적이면서 집단주의적인 잔재가 남은 한국 사회에서는 인터넷에서 자기 지역의 체면과 결부되는 풍조로까지 이어질 정도다. 서울 부심 문서에서도 보다시피 인터넷에서 도시의 규모, 부를 근거로 하여 급을 나누는 사람들이 오프라인 여론의 비판을 받을 정도인데, 지방마저 다른 지역을 이길 수 있는 기준이 크고 시설이 많은가이고 이런 기준에서는 서울을 이길 수 있는 곳은 한국에서는 어디에도 없다. 전 세계를 따져봐도 경제대국의 광역권 중에서 서울보다 규모가 큰 곳은 인구 규모로 따지면 도쿄밖에 없다.
교통 발달로 인해 수도권 내 접근성이 크게 향상되어 인천 및 경기도 지역에 거주해도 서울을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기 때문에 수도권 집중도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위와 같은 인식 때문에 접근성은 지방과 수도권이 모두 개선이 되었으되 '수도권 사람도 지방에서 근무를 하고 여행하기 좋다'라는 점보다는 '지방 사람도 서울에서 더 경제활동을 해야 한다, 약간 먼 곳이라도 서울의 네임밸류를 좇을 수 있다'라는 생각이 커지고 있다. 독일 같이 심지어 구 동독 지역 도시며 사업장만 있지 유명 기업 본사가 없는 라이프치히라도 젊은 사람이 취향에 따라 이주하는 경우나, 영국의 에든버러 같이 전체 인구 순위는 영국 내 7위 광역권 인구가 80만에 불과해도 역사적으로까지 엘리트 중심의 문화를 지녔다고 평가받는 지역이 한국에는 없었다. 에든버러에는 영국 5대 은행에 속하는 로열 뱅크 오브 스코틀랜드(RBS) 그룹의 본사가 있는데 이걸 한국에 대입하면 전주나 경주 같은 인구는 그저 그렇지만 역사적인 도시에 저런 은행의 본사가 있는 것이다. 일론 머스크 마냥 캘리포니아가 싫으면 실리콘 밸리도 없는 텍사스에다 공장 만들고 자기 마을을 건설하겠다는 식의 주장도 한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아예 서울과 붙어 있는 광명, 과천, 하남 등은 서울에 인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개발수요를 일으켜 서울 문화권에 흡수되는 일이 계속되고 있으며 법적으로 수도권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수도권과 인접하고 서울과 광역철도가 연결되어 접근성이 좋은 충청남도 천안시·아산시도 대기업 투자나 인구 증가의 혜택을 어느 정도 누리고 있으며 경부선과 호남선 고속도로와 열차, 경강선 열차와 영동고속도로의 실질적인 종착지[32]인 부산광역시와 광주광역시, 원주시 역시 영남, 호남, 강원도에서 서울과 오가기 위한 관문 취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천안시·아산시라도 어디까지나 지방 기준에서나 수도권에 가까운 곳이지 서울까지 전철로 자주 왕래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아니므로 일반열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편이고,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 역시 수도권으로의 이사나 왕래가 잦을 정도이다.
법적인 의미에서 수도권은 경기도 전체를 포함하지만 실질적으로 수도권으로 인정받는 서울 인접 지역은 아무리 넉넉히 쳐줘도 남쪽으로는 오산시, 북쪽으로는 동두천시[33]까지이며 평택시[34], 안성시, 이천시, 여주시, 양평군, 가평군, 포천시[35], 연천군, 파주시[36]는 수도권으로 취급 안 해주는 경우도 존재하니, 평택보다도 더 남쪽인데다 경기도도 아닌 천안·아산은 그래봤자 결국은 수도권과는 거리가 있는 곳으로 간주하는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만 온라인에서의 인식과는 별개로 이 지역들도 수도권의 영향에 속한 지역임은 분명하므로 각종 개발 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어 인구증가세는 높은 수치를 보인다.[37] 현재 수도권은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위성도시, 베드타운의 역할을 하는 것을 넘어 수도권 자체가 도시권으로 성장하고 있다. 수도권과 가장 가까운 대도시권인 대전권도 국가가 정책적으로 막대한 지원을 퍼부은 세종이 인구 증가를 견인하고 있고, 청주가 조금씩 증가 추세를 보일 뿐, 바로 서쪽인 공주시 같은 경우 상황이 안 좋으며, 천안-세종-청주-대전 라인 이외의 도시들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심지어 2023년 들어서는 세종시조차 인구 순유출을 기록하는 사태가 있었고, 대전에서는 인구가 7명 증가했다고 환호하는 일이 있었을 정도로 2기 신도시 등의 물량공세가 집중된 수도권에 비하면 인구 증가가 둔화되거나 감소마저 우려되는 일이 있기도 하다. 조금 더 수도권에 가까운 청주시가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과거 1960년대에도 윤치영 서울시장이 이미 서울 과밀화를 우려하고 도시개발을 방치한 전력이 있다. 정부에서도 50년도 넘게[38] 이 문제를 인식하고 서울을 위시한 수도권 집중 현상을 해소하고자, 1982년의 수도권정비계획법 등으로 대표되는 수도권 규제 도입하고 1998년에는 정부 외청을 대전에 이전한 정부대전청사 건립했으며, 2000년대 이후에는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을 비롯한 공공기관의 비수도권 이전 등의 분산 정책을 시행하여 점진적인 개선을 도모하고 있다. 행정중심복합도시도 사업은 다르지만 가장 큰 목적은 비수도권의 발전 도모에 있다. 하지만 수백년간 형성된 한국인들의 욕구가 다 비슷해진 여건 속에서 당연히 사람들의 욕구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수도권에서 충족되기 쉽다. 이에 따라서 전국의 도시 자체가 굉장히 획일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한국인의 가치관은 양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데 이를 충족시킬 만한 곳은 서울밖에 없게 된다. # 그나마 2000년대 이후로 출세에 대한 한국인의 정체성, 마인드셋 전반이 바뀌고 있는 추세지만.
혁신도시 정책으로 서울 소재 공기업들이 대대적으로 지방으로 이전하게 되었으나, 근무자들이 지방에 가는 것을 기피하여 사표를 던지거나 명예퇴직을 예정보다 일찍 신청하는 일이 많았고 설령 사직은 안 한다고 해도 본인만 지방에 내려가 있고 자식은 서울·경기에서 교육을 받게 하는 주말부부 가장들이 많다.혁신도시 이전 기관 직원 40%가 가족을 홀로 놔두고 혼자 이주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밤이면 유령도시 되는 충북혁신도시, 주말이면 텅 비는 김천혁신도시 등 일과가 끝나면 곧바로 서울로 훌쩍 떠나는 경우가 많다. 안정성과 복지가 상위권에 있는 공기업조차 이럴 정도지만,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대한상공회의소의 '지방근무 인식조사'에 따르면 네 명 중 세 명 꼴로 지방 근무를 기피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언론이 이런 쪽으로만 관심을 가지다 보니, 막상 지방에서도, 특히 광역시 중심으로 그 지방에 근무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줄을 모른다. 심지어 수도권 거주자조차 기꺼이 근무지를 수도권 밖으로 옮길 수 있다는 여론이 56% 정도 된다. # 그래서 광역시만 해도 지역별 선발을 하는 코레일의 경우 지방의 커트라인이 서울의 커트라인을 뛰어넘는 경우가 있고, 서울의 인프라를 선호하는 여성이 많은 서울 초등임용에서도 경기·인천보다 다른 광역시의 커트라인이 높은 경우도 있다. # 금융공기업의 경우에도 집이 지방인데 이쪽에서 일할 수 없겠느냐는 사람들이 있다. 야놀자의 경우 재택근무 철회 방침에 지방에서 재택근무를 하려는 직원들의 반발이 있었을 정도다. 결국 생각보다 많은 실제 수요에 비해서도 지방에 일자리가 부족해지는 악순환을 낳아 다시 서울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결과가 나타난다. 고령화 등의 수치도 막연히 서울을 동경하는 사람의 생각과 달리 서울에도 번화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지역이 있고 가족을 이룬 중년층들이 모인 지역도 있지만 고령화가 심한 지역[39]도 있는데, 지방은 고령화가 심한 지역만 보면서 서울은 가장 젊은 지역만 보는 경우도 있다. 서울보다는 광주, 세종, 대전, 울산이 젊고 심지어 고령화에 대한 우려가 높은 부산마저도 평균적으로 서울보다 젊은 자치구도 있다. #
이러한 인식을 더 부추기는 것은 전 국민이 서울 중심의 미디어를 소비하는 것이 한 몫한다. 한국 내 드라마와 영화의 배경 99%가 서울이기 때문에 서울에서 나고 자라든 수도권을 비롯한 여러 지방에서 나고 자라든 똑같이 서울 문화를 소비한다. 미디어의 서울 집중화 현상이 무의식적으로 서울이 아니면 안된다라는 생각을 주입시키기 때문이다.[40] 전 국민이 서울의 지역구는 알지만 제 2의 수도 부산광역시만 하더라도 해운대구를 빼고는 모르는 사람이 상당 수이며 서울이외에는 관심조차 없기 때문이다.
서울의 상징성 자체가 워낙에 넘사벽이라, 1990년대에도 분당신도시의 지역번호를 02로 해달라는 민원이 거셌고, 서울 전화번호 자체가 하나의 특혜로 인식되던 시절도 있었다. 당연히 분당의 서울편입론도 강했다. 물론 정부는 이를 거절했다.[41]
혹자는 수도권 과밀화 문제의 최선의 대책은 집적불이익[42]이 두드러져 제 발로 지방으로 나갈 때까지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또다른 계급화를 낳아 실제로 몇몇 인터넷 유저들 사이에는 서울에서 인근 신도시(평촌, 분당, 일산 등)로 이주하는 사람들을 두고 서울에 있을 능력이 안 되어 밀려난 사람들이라 비하하는 경우를 가끔씩 볼 수 있다. 신도시들이 조성되기 전에도 안양, 과천, 부천, 광명 등을 촌동네라 하는 사람들이 꽤 있긴 했다.[43] 그러나 사회에서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측면에서 수도권 집중을 일부러 방기하는 것은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할 뿐더러, 형평성을 지향하는 행정 이념과도 맞지 않고, 크게 보면 사실상 국토의 균형 발전을 명문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헌법 120조 또는 122조와 123조를 국가가 위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44][45]
6. 세계 도시 중 서울의 위상
서울은 단순히 대한민국의 수도나 최대 도시를 넘어 이미 세계적인 도시 중 하나이다. 해외 유수의 잡지나 일간지에서 세계 상위 도시의 순위를 매길 때 서울은 반드시 포함이 된다고 봐도 무방하며 조사 기관에 따라 세계 10~20대 도시에 포함되기도 한다.이렇게 국력을 갖춘 대한민국의 수도 및 최대 도시라는 점에서 서울 역시 세계적으로 그 위상이 과거에 비해 크게 높아졌지만, 부산이나 대구, 대전, 광주 같은 다른 지방 거점 대도시들은 세계 도시로서의 위상이 낮다. 부산의 경우 아시아만으로 한정하면 그나마 서울에 필적[46][47]할 만한 경쟁력이 나오지만, 대구, 대전, 광주는 이마저도 없다시피 하다.
사정이 이러니 세계적인 안목을 갖추기 위해 상경한다고 해도 아주 생뚱맞은 소리는 아니게 되었으며, 수도권에서는 다양한 외국의 문화를 접하고 수용할 수 있다. 외국인들도 대한민국의 문화를 접하려고 대한민국으로 유학이나 여행을 올 때 절대다수가 서울을 목적지로 삼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규모가 크다고 반드시 인지도가 높은 건 아니다. 유럽에서 관광지로서 인지도가 높거다 다른 이유로 세계적 위상이 높은 도시들 중에서는 인구비율로만 따지면 그다지 크지는 않은 대도시이거나 소도시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도시들이 관광지, 혹은 다른 산업 위주 도시로 인지도가 높다는 것은 그만큼 브랜딩이 잘 되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국은 비교적 최근에 급성장한 국가이고 문화유산이 압도적으로 잘 보존되어있는 나라라고 보긴 어렵기 때문에 지방 도시의 브랜딩에 상대적으로 불이익이 있고, 이것이 낮은 인지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7. 방언 사용으로 인한 지방 기피 현상
사투리 때문에 지방에서 살기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녀를 가질 예정이거나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부들의 지방 기피 경향이 매우 강한데, 그 이유는 말을 배우는 시기의 자녀가 사투리에 많이 노출되어 사투리 억양이 입에 붙어 버리면 고치기가 굉장히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시대가 흐를수록 사투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촌스럽다', '듣기 싫다', '나이 들어 보인다' 등)이 강해지고 있어서 사투리가 입에 붙으면 심한 놀림을 받거나 취업에 걸림돌이 되는 등 불이익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다.물론 최근 젊은 층은 사투리 사용량이 급감하긴 했지만 억양의 높낮이가 심한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젊은 사람들도 억양이 어느 정도 티가 나는 편이다 보니 자녀 교육에 상당한 악영향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 지역들이 특정 정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성향도 있기 때문에, 이로 인한 갈등과 대립, 충돌 등도 있을 수 있는 상황이다.
[1] 당연히 삼국 입장에서도 강압적으로 굴어 이들의 반발을 사기보단 일단은 인구로서 흡수하고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편이 좋았다.[2] 국내성을 함락시켰던 조위의 관구검이 '도대체 이런 곳에 어떻게 수도가 들어설 수 있었지? 믿을 수가 없다'라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이곳의 겨울 평균 기온은 -11℃. 쉽게 말하자면 철원보다 겨울에 6도 정도 낮은데, '냉대동계건조기후(Dw) + (한반도보다) 내륙 지방 + (평양성보다) 고위도'라는 악조건 덕분에 여름엔 철원보다 더운 데다 춘천 평야의 반에 불과한 좁은 평야 외에는 모두 산이다.[3] 현 충청남도 공주시의 공산성이 옛 웅진성을 바탕으로 구축되었는데 산성이 험난해서 방어에 유리하고 금강을 끼고 있어서 유사시 도망치기 좋다는 점을 빼고는 수도로서는 입지가 아주 좁고 참담하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사비성 침공이라는 국난을 맞자 다시 웅진성으로 피난했고 거기서 북방령 겸 웅진성주 예식진의 배신으로 잡혔다. 조선 시대에도 인조가 이괄의 난 때 공산성으로 피신했던 적이 있다.[4] 비슷한 사례로 6.25 전쟁 때 남한이 공산군을 피해 천도를 몇 번이나 감행할 수밖에 없었는지 비교해 보자. (서울 → 대전 → 대구 → 부산 → 서울 → 부산 → 서울)[5] 그래도 조선시대까지 대도시로서는 유지된다.[6] 사실 개경도 수운은 좋으나 입지가 좁아서 서경(평양)으로의 천도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었으나, 결국 왕조 멸망 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던 게 고려 내내 요동 정복에 실패해 전진방어선을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서경은 5도 양계 기준 북계에 속한 전방의 도시로 계속 남았다. 그로 인해 항시 대륙세력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고 여몽전쟁 땐 동녕총관부라는 이름으로 아예 뜯기기까지 한 적이 있다.[7] 향, 부곡, 소는 반란 및 전공을 통해 계속 군현으로 격상되어 왔다.[8] 편의상 이들을 기호학파로 싸잡아 분류하기도 하지만 학파의 경우 이들 내부에서도 차이는 있었다. 여기서 '기'는 경기도를 가리키고 '호'는 충청도를 의미한다.[9] 유향소가 급격하게 세력을 잃게 되는 건 임진왜란 및 병자호란으로 인한 타격의 여파일 수도 있다.[10] '상놈'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한 것이므로 신분이 낮은 사람끼리는 무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평안도 지역의 민란에 남부 지방 등 다른 지역에서 호응하거나, 그 반대 사례도 있었다.[11] 개성과 평양은 조선 유수의 대도시였음에도 조선시대 내내 계속되었던 서북민 차별 때문에 정치적 권리는 그다지 얻지 못했으며, 뒤늦게 발전한 경제력에 비해 정치적으로 밀리는 불만이 누적되어 홍경래의 난 같은 반란까지 터졌다. 평안도 지역에 대한 차별은 구한말 이후로 평안도에서 개신교가 번성하게 된 배경이 되기도 했다. 특히 개성은 한성과 가까운 도시이자 전 수도였는데도 양반층이 성장하지 못한 게 의아할 수도 있는데, 지리적으로 수도 한성과 가까웠기 때문에 인재가 가까운 한성으로 툭하면 빠져나간 데다 임진왜란 때 인프라가 박살나며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 성계육 항목으로.[12] 대전과 대구가 먼저 임시 수도로 지정되었다가 계속 밀리면서 부산까지 임시 수도가 오게 되었다.[13] 특히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이 현상이 유독 심했으며, 실제로 수도권 인구 통계를 내보면 절반이상이 전라-강원 상경민 출신인것으로 나온다.[14] 대표적으로 신발 등으로 유명한 부산의 경우는 1980년대에 국제그룹, 동명그룹 등이 기업 해체를 당했고, 여기에 영남권이 성장 억제에 들어가면서 이후에 성장 억제 도시로 지정되었다.[15] 백지계획, 가로림만 임해공업도시, 창원시 국가산업공단 등이 있다. 이중 창원시의 경우에는 특히 대한민국의 핵개발 계획과 연계하여 세워질 도시였기 때문에 가장 먼저 정부의 이목이 집중되었고, 실제로 착공하여 완성된 사례로는 창원시가 유일하다.[16] 실제로 박정희가 암살 직전 방문한 마지막 공식 행사인 삽교천방조제준공 행사도 이런 계획의 일환이였다.[17] 참고로 광역경제권으로는 수도권이 일본 수도권, 뉴욕, 로스앤젤레스, 런던, 파리에 이은 세계 6위의 경제권 지역이다. 전부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일본 등 경제 대국의 핵심 도시 지역에 인구 천만을 넘는 대광역권이다.[18] 당장 삼국시대 때 서울쪽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던 걸 떠올려보자. 전성기여서 서울을 차지했는지, 서울을 차지해서 전성기가 되었는지 앞뒤는 다를 수 있어도 어쨌든 삼국 각 국의 전성기=서울 확보 시기 공식은 확실하다[19] 고구려의 국내성(중국 지안시), 백제의 금마저(익산), 신라의 달구벌(대구) 및 발해의 5경제와 고려의 3경제.[20] 분단 이후 이런 입지상의 수혜를 누린 지역이 바로 대전이다.[21]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던 조선의 특성을 간과할 수 없다.[22] 이 도시가 속한 네브래스카 주는 인구가 190만명 가량으로 전라남도보다 좀 많은 수준이다. 그런데 네브레스카의 면적은 남한의 두 배 가량이니 도시를 벗어나면 옥수수 벌판이 펼쳐지며 한국의 어느 군보다도 주 전체의 인구밀도가 낮다.[23] 이곳에 있는 전북혁신도시는 서울보다 인프라는 최신식이다. 그런데 이곳으로 간 국민연금기금운용본부는 기금운용 인력을 구하는데 엄청난 인력난을 겪는다. 여의도의 분위기를 공단의 인력은 선호하는 편이었다.[24] 그 다산 정약용도 아들들에게 "결코 사는 곳을 서울 성저십리에서 벗어나지 말라"라고 했으니...[25] 참고로 미국의 경우 젊은 세대가 이런 취미를 즐기기 위해 덴버, 포틀랜드 같은 한국 광역시 수준 인구 규모의 도시로 이주한다. 특정한 기준의 성공을 위한 경쟁과 남들보다 많이 버는 경제적 안정이 미국인의 최우선 가치가 아니고,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삶의 질과 라이프스타일이 그들이 원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수백km는 더 가야 한국 광역시에 비견되는 규모의 다른 도시를 찾을 수 있을만큼 대도시치고 외딴 곳이다. 미국인들은 실리콘 밸리(레드우드 국립공원, 산타크루즈 해변 등), 뉴욕 근처(허드슨 강, 롱아일랜드 해변 등)에서 좀 벗어나도 그런 취미를 즐길 수는 있지만 다른 가치를 가진 도시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그런 최대 대도시에서 이주하는 경우도 정말 존재한다. #[26] 미국에서는 시골에 대해서도 애정을 드러내는 컨트리 음악이 존재한다. 그 외 분야에서도 자기 지역을 힘든 곳으로 묘사해도 완전히 배척할 무언가로 여기는 게 아닌 경우도 있다.[27] 미국 실리콘밸리 근처 팔로알토나 쿠퍼티노, 런던 교외의 서리나 버킹엄셔, 파리 쪽의 뇌이쉬르센이나 베르사유 같은 지역이 있다. 아예 도심과 유사한 선호도를 지닐 수 있는 곳이다.[28] 거대한 상점에 비해 불필요한 소비 유혹 감소, 거주지의 평온함 유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29] 예를 들면 교토의 산넨자카나 니넨자카, 구로카와 온천 마을의 골목길이 긍정적 이미지를 갖는다.[30] 정확히 얘기 하면, (비수도권 소재의)고향으로 돌아가봐야 서울에서 대학생활 하면서 쌓은 전공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직장이 수도권에 비해서 훨씬 적은 편이고, 삶의 질에 있어서 비수도권 보다는 수도권이 우위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주로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직장을 구하고,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자리잡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이들도 고향으로 오고 싶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서울에 준(準)하는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는 전제하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고향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오겠다는 의미는 아니다.[31] 그나마 연극·뮤지컬·클래식보다 접근성이 월등히 양호한 문화생활인 영화는 광역시 레벨쯤 되면 문제 없이 즐길 수 있고, 중소 도시에서도 어느 정도 향유할 수 있다. 연·뮤·클은 서울 쏠림 현상이 정말 극심하다.[32] 명목상 호남선 도로와 철도의 진짜 종착지는 목포이다.[33] 사실 이마저도 경기북부는 경기남부에 비해 인프라가 그리 많지 않아 동두천 이내 서울 이북도 고양시, 파주시(운정신도시 포함 남부 한정), 구리시, 남양주시, 의정부시, 양주시 정도를 제외하면 실질적인 수도권 취급을 못 받는다.[34] 그나마 평택은 경부선 전철의 영향, 잇따른 광역버스 노선 개통, 고덕신도시 개발로 차츰 수도권으로 인정받는 분위기다. 물론 평택 서부 안중출장소 권역은 예외로 친다.[35] 이쪽의 경우 구 영평 지역을 제외한 남부 지역은 수도권으로 인정받고 있다.[36] 이전 각주에서 서술했듯 남부 동 지역은 제외.[37] 단, 철원은 접경지역 특성상 인구도 적고, 개발도 느리다.[38] 1970년부터 대놓고 수도권을 겨냥한 '수도권 인구의 과밀집중 억제에 관한 기본지침'이 건설부에서 만들어졌다. #[39] 어느 정도 사정을 아는 사람은 탑골공원 같은 말에 노인이 많이 모이는 곳을 떠올리기도 한다. 단독·다세대 주택이 많은 지역이 서울에 있는데 이런 곳에 고령층이 몰려 있다.[40] 소프트 파워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 미국에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도 2000년대 초까지 미디어에 자주 등장하는 보스턴에 있는 하버드 대학교를 스탠퍼드 대학교, 예일 대학교, 프린스턴 대학교보다 더 가고 싶어하고, 뉴욕 맨해튼에 거주하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만드는게 미디어가 주는 소프트파워의 힘이다. 예시로 든 하버드 대학교와 맨해튼은 서울과 부산만큼의 거리 차이가 난다.[41] 사실 1기 신도시 계획 초창기에는 분당, 일산의 서울전화 편입이 살짝 검토되기는 했지만, 경기도 곳곳(서울 편입 예정지 시절에 이미 서울전화로 묻지마 편입한 광명, 서하남, 고양 신도지구와 정부청사 버프로 1985년에 서울전화 편입의 막차를 탄 과천 제외)에서 서울전화 편입 요구가 워낙 심했고 성남전화, 고양전화를 서울전화로 돌리는 기술적 비용과 구성남 및 원당읍내 주민과의 형평성 문제 등으로 정부는 서울통화권(02 사용지역) 추가 확장 절대 불가방침으로 선회하고 해당 계획을 전면 폐기했다. 다만 1993년에 인접 통화권 시외요금을 시내요금 수준으로 책정하는 것으로 대신했다.[42] IC의 한자어인 집적(集積) 회로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43] 이를 극단으로 잘 표현한 말이 바로 그 유명한 '이부망천'. 서울과 바로 붙어있는 지역의 인식조차 이럴 정도면, 아예 서울과 동떨어진 지역은 인외마경 취급할 가능성이 크다.[44] 그래서 상당수 수도권 정치인들은 지역균형발전은 헌법으로 규정할 사항이 아니라면서 개헌 때 그 조항을 아예 삭제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45] '공포 마케팅' 문서의 '자본주의와의 연관성' 문단에도 관련 내용이 있다. 관련 글: [생생경제] 우리의 불행은 야수자본주의 때문[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저자 김누리[46] 맞먹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서울에 대항할 만 한 도시라는 것.[47] 이것도 매우 넓게 봐야 턱걸이로 언급될만한 수준으로, 자타공인 아시아의 간판급 도시인 서울과는 위상 차이가 어마어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