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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8:37:39

사마의/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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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출신3. 반동탁 연합군 당시 피난민 생활4. 성년이 되다5. 조조에게 출사하다6. 조조의 의심
6.1. 의심설이 나온 배경 -후원자들의 살해-
7. 조조 휘하8. 조비 휘하9. 조예 휘하10. 조방 휘하
10.1. 작피의 역10.2. 조방 휘하10.3. 2차 조중 정벌10.4. 고평릉 사변10.5. 왕릉의 난
11. 사후

1. 개요

사마의의 일생을 다루는 문서.

2. 출신

하내군 온현 효경리에서 아버지 사마방과 어머니 기정(奇庭)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漢)대 명문가들은 대개 낙양과 가까운 거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여남 원씨[1]나 홍농 양씨[2]에는 조금 밀리지만 당대에 이미 손 꼽히는 대호족 명문가였다.

할아버지 사마준은 학식이 넓고 고대의 유풍을 좋아했으며 신장이 8척 3촌[3]이나 되었고, 허리 둘레는 10위[4] 비만 이나 되었으며 풍격이 비범해 향리와 일족들이 그에게 의존하는 지역 호족의 리더 노릇을 했으며 영천태수를 지냈다.

아버지 사마방은 정직하고 공정한 관리로 정평이 났었는데 한서의 명신 열전을 그 자리에서 줄줄 암송했으며 본인 스스로와 자식들에게 매우 엄격했다고 한다. 얼마나 엄격했는지 아들들이 모두 나아가라는 명이 없으면 감히 나아가지 못했고, 앉으라는 명이 없으면 앉지 못했으며, 가리켜 질문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않았고, 부자 사이는 숙연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엄격함 덕분이었는지 아들 8명이 모두 기재였고[5], 그 가운데 사마의가 으뜸이었다. 사마방의 벼슬에서 알 수 있는 듯이 그는 문관(경조윤)과 무관(기도위)을 모두 거쳤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사마방의 다양한 경험은 자식들의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서 사마의의 특출났던 정치적, 군사적 재능은 우연히 얻어진 게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서로간의 문답을 통하여 깨우친 것으로 생각된다.

3. 반동탁 연합군 당시 피난민 생활

부사전에 따르면 어린 시절부터 호소와 친했는데[6] 주생에게 납치당했고 살해당할 뻔했다. 그러나 호소가 주생을 설득하여 살아날수 있었다고 한다.

본래 아버지를 따라 낙양에 있었으나 반동탁연합 결성 이후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할 때 아버지의 명으로 형 사마랑의 지도 아래 친족들과 함께 고향 하내군 온현으로 낙향했다. 그 후 하내군의 혼란을 예상한 사마랑과 함께 다시 여양으로 피난갔다고 한다.[7] 그 후 온현으로 돌아왔으며[8] 대기근으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말세에도 형과 함께 학업을 닦았다.(사마랑전)

반동탁 연합군 당시 하내 지역에서는 여러 열전에서 학살, 약탈이 묘사된다. 그런 혼란을 피해서 여러 호족들은 중원으로 도피한것 같다. 양준은 병란이 일어나자 하내군이 위험하다는걸 예상해 경현, 밀현으로 피난갔으며 그곳에서 사마랑, 사마지, 사마의를 만났음을 알 수 있다. 《위서》 <사마지전>에 따르면 사마랑과 사마의와 함께 행동하던 사마지는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형주까지 더 피난갔던 것으로 보인다.

4. 성년이 되다

사마의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절조를 갖추고 총명하며 많은 원대한 지략을 지녔고, 학문에 박학다식하고 유교를 가슴에 간직한 청년이 되었다. 한나라 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항상 개탄하여 천하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한다. 《세설신어》에 인용된 손성의 역사서 《진양추》에서는 "선왕(사마의)은 타고난 자태가 뛰어나고 고매했으며 영웅의 지략이 있었다"(宣王天姿傑邁,有英雄之略)라고 사마의를 당대의 준걸로서 묘사하고 있다.

같은 군(郡) 사람인 남양태수 양준이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했는데 16세, 17세의 사마의를 만나보고는 비상한 그릇이라 말했다.[9] 이때 최염은 친했던 사마랑에게 “그대의 동생은 총명하고 성실하며 강단이 있고 영특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 미치지 못하오.”라고 했다.

이후 201년, 23세가 되었을 때 군(郡)에서 상계연으로 천거했다. 당시 조조사공이었는데 그에 관해 듣고는 사마의를 벽소하려 했다. 사마의는 한나라의 명운이 바야흐로 쇠미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조씨에게 절의를 굽히지 않으려 하니 관절통 때문에 기거할 수 없다며 이를 사양했다. 조조는 사람을 시켜 밤중에 몰래 사마의를 엿보게 했는데 사마의는 꼿꼿이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이 부분에 대해 절의를 굽히지 않으려 했다는 대목을 보고 원소와의 대결을 앞둔 조조 세력에게 사마의가 청류파 가문으로서 탁류인 조조세력을 거절했다는 해석이 있는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사마의의 형인 사마랑이 조조군에 임관해 있었다. 만약 사마의가 조조군을 꺼렸다면 본인이 조조군에 임관함으로써 원소에게 사마씨가 조조 측으로 올인하는 것처럼 보일까 두려워하여서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래도 이때까지만 해도 조조보다는 원소의 세력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또, 위에서 언급했듯이 사마의의 고향인 하내군이 왕광원소가 주둔하면서 약탈을 자행해 하내군 백성의 절반이 죽고 사마씨들은 피난간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마음에 담아 두고 있었다면 사마의가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사마의의 행동은 일종의 간을 본 것에 더 가까울 것이다.

<선목장황후열전>에 따르면 사마의가 처음에 조조의 조명을 거절했을 때 중풍이 있다고 핑계 댔는데 일찍이 책을 말리다가 갑자기 비가 내려서 자기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손수 거둬들인 적이 있었다. 집안의 여종 한명이 이 광경을 목격했는데 아내(장춘화)는 이 일이 누설되어 화를 불러들일까봐 마침내 그 여종을 죽여서 입을 막은 다음 친히 집안일을 돌봤다. 사마의는 이로 인하여 아내를 무겁게 여겼다.[10]

하지만 사마의는 수십년 후 아내를 늙었다고 괄시했고 아내와 아들들까지 단식하자 그런 늙다리는 죽어도 상관없지만 내아들 때문에 내가 사과했다고 떠들었을 정도로 매우 가부장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아내를 죽인 조비 등과 비교하면 정신승리 정도로 보이기 때문인지, 사마의를 공처가로 표현하는 창작물들이 있다. 엄밀히 말해서 현대적 관점에서 사마의는 공처가라고 보긴 어렵다. 사마의의 발언을 보면 엄연한 정실부인에 대한 멸시와 자신의 뒤를 이를 아들들을 아내보다 더 중시하는 가부장의 면모가 명백히 나타난다. 이는 만약 장춘화 소생 중에서 가독을 계승할 맏아들을 비롯한 장성한 아들들이 없고 딸만 있었다면 장춘화가 단식하다 죽었어도 신경도 안썼을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렇지만 당대 기준으로는 장춘화가 여장부 기질이 있었고 아들들도 아버지 편을 들거나 어머니의 단식을 만류하기보다 동참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발언권이 일반적인 부인에 비해 높은 건 분명하다. 또 사마의가 정실부인인 장춘화를 늙어서 업신여겼다고 말하지만 첩들을 두고도 막내 아들인 사마간을 장춘화가 무려 43세에 낳았다는 걸 보면 서로 금슬도 좋았으므로, 사마의의 발언은 아내에게 진 걸 인정하기엔 체면상 그러니까 둘러댔다고 보는 관점이 틀린 것은 아니다.

5. 조조에게 출사하다

208년 6월, 조조승상이 되자 다시 벽소(辟召, 등용)해 문학연으로 삼고는 명을 받들어 떠나는 자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만약 다시 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린다면 곧바로 잡아 가둬라.

사마의가 두려워하며 그 직에 취임했다.

사마의가 조조에게 출사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일단 《순욱별전》에는 순욱이 사마의를 추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북당서초에 인용된 《위략》에 따르면 사마의는 학문을 좋아했는데 조홍에게 교제를 요구받자 굽히고자 찾아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이 있다고 지팡이를 잡았다. 한을 품은 조홍은 조조에게 말했다. 이에 조조가 사마의를 벽소했고 그러자 사마의가 바로 지팡이를 던지고 명을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11] 어감을 보자면 순욱이 조조에게 사마의를 추천한 후에 조홍의 일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순욱의 천거는 조조 진영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의 천거를 이유로 한 조조세력의 등용 시도가 사마의에게 거절당하고 나중에 조홍의 일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다. 혹은 반대로 조조는 순욱에게 특정 임무를 수행할 인재들을 추천받기도 하였고 그 대상은 이미 본인 세력에 속한 자들이기도 하였으므로[12], 사마의가 등용된 후에 순욱이 사마의의 재능에 대해 평하며 그가 맡을 만한 역할을 조조에게 추천하였던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정리하면 사마의는 몇 차례 공식적인 등용 제안을 거절하고, 나중에 조홍이 그에 대해 알게 되어 접근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마지막으로 조조가 강경하게 나오자 그제서야 관직에 임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의는 작게는 총명하고 사리에 통달했으며 크게는 큰 모략이 있었다. 위에서 최염이 사마랑에게 한 말을 조조가 듣고는 그를 벽소하고자 했는데 사마의는 풍비[13]가 있다고 핑계를 댔다. 조조는 노하여 (그를) 거두고자 하였고, 사마의는 두려워하다가 문학연 직책을 받아들였다고 나온다.[14]

6. 조조의 의심

사마의는 내심 꺼리는 바가 있어도 겉으로는 너그러웠고, 시기심이 있고 임기응변이 많았다. 조조는 사마의에게 웅대하고 호방한 뜻이 있음을 알아챘고, 그에게 낭고상(狼顧相)이 있음을 듣고는 이를 확인하고자 했다.[15] 이에 그를 불러 오게 하고는 고개를 돌려보게 하니 얼굴은 곧바로 뒤를 향하는데 몸은 움직임이 없었다.

또한 일찍이 세 마리 말이 한 구유에서 먹이를 먹는 꿈을 꾸고는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16] 그래서 태자 조비에게 말했다.
사마의는 신하가 될 사람이 아니니 필시 너희 집안일에 관여할 것이다.

사실 이 기록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가들은 회의적이다. 조비가 217년에 세자 책봉이 되었는데 사마의를 겨냥해 언급했다 보기 힘들다. 이는 후세에 세 마리의 말, 후일 조씨의 황위를 찬탈하는 세 명의 사마씨인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를 염두에 둔, 흥미성 과장이 많이 들어 간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설령 조조가 사마의를 경계해 이 말을 했다고 한들 당장 사마의 외에도 사마의의 친척인 사마지, 친형 사마랑, 동생 사마부가 모두 출사해 있었다.

정말로 조조가 사마씨를 경계했다면 208년생 사마사, 211년생 사마소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사마랑 3형제를 거론한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이때 쯤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도 원래 조식 휘하의 문학연이다가 조비가 세자가 되자 세자중서자로 자리로 옮기게 된다. 이렇게 조비 휘하에 사마씨들이 유력한 측근으로 자리 잡은 상황이었던 만큼 조조 입장에서 청류파 명문출신인 사마의와 그 형제들을 미래권력 조비에게 붙여줘도 될지 충성도 테스트를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세자가 평소 사마의와 친하여 늘 서로 비호했는데 이 일로 인해 총애를 잃게 되었다. 이에 사마의는 관리의 직무에 부지런히 힘써 밤에도 잠을 잊을 정도였고 가축을 기르는 일에까지 모두 직접 챙기니[17], 이로 말미암아 조조가 마침내 그에 관해 안심하게 되었다.

6.1. 의심설이 나온 배경 -후원자들의 살해-

만약 의심설이 사실이라면 이는 최염이 조조에게 살해당했던 시기가 가장 가능성 높다. 최염은 사마의를 여러 번 높게 평가했으며 당시 호족-천거제에서 이는 정치적 후원자 관계에 가깝다. 하지만 조조는 최염을 살해했다. 비슷하게 조비 역시 사마의에게 좋은 품평을 해준 양준을 살해했다. 이때 사마의는 양준을 살리고자 했으나 조비는 들어주지 않는다.

이렇게 사마의를 추천했던 두 인물들이 조조, 조비에게 시덥잖은 이유로 살해된 것은 사마의의 정치적 배경에 악영향을 끼쳤고 이것이 고대 역사서 특유의 예언론적인 면모가 가미되면서 조조가 의심했다고 기록된 것이다. 단 조조는 탁류 출신이었던 만큼 청류파 세력과는 언제나 묘한 긴장관계를 유지했는데 대표적인 청류파 인사인데다가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기용되는 과정에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모습을 보인 사마의에 대해 찝찝한 느낌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7. 조조 휘하

그리하여 사마의로 하여금 늘 세자(조비)와 함께 교제하게 하였고, 황문시랑으로 올렸다가 의랑, 승상 동조속으로 전임시키고 뒤이어 주부(主簿)로 전임시켰다. 이러한 그가 출사를 거부한 일화들은 까려면 얼마든지 위선자라고 깔수 있기에 청류파의 위선을 암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늦게서야 조정에 출사한 인물 치고는 황문시랑, 의랑, 승상 동조속, 주부 등 잘나가는 관직을 역임하며 꽤나 출세했다. 조조가 사마의를 꺼렸기 때문에 명문가 자제 신분에 가축 돌보는 일까지 해야했던 기록 자체는 《진서》 <선제기> 후반부에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마의의 관직 생활이 지장을 받았다고까지 보기는 어렵다. 진서 선제기의 해당 기록에도 스스로 가축을 돌보기까지 하는 사마의의 태도를 보고 조조가 의심을 풀었다고 적고 있고, 조비와 별 차이 안나는 사마의의 연령대와 늦은 출사시기를 고려하면 무난한 속도로 승진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조조가 한중장로를 굴복시켰을 때 사마의는 유엽과 함께 유비가 점령한 지 얼마 안 된 익주를 칠 것을 건의하였으나, 조조는 사람은 만족을 알아야 한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18]

이후 《진서》 <선제기>에는 유수구 전투 때의 일화가 나오는데 그 유명한 손권의 칭제 권유와 조조의 '이 아이(손권)가 나를 화롯불 위에 올리려 하는구나!' 드립이 나온다. 그런데 원래는 이 일화가 관우를 잡을 때(219년) 나오는 이야기인데 이걸 유수구 전투 때로 앞당겼을 뿐만 아니라 칭제를 조조에게 권하는 사람들도 진군, 환계, 하후돈 등이 아니라 사마의 혼자 한 걸로 나온다. 당연히 진서의 편집 오류로 《자치통감》에서는 사마의가 혼자 간언했다는 이 기록을 배제한다.

사마의는 조조에게 호수(胡脩)와 부방(傅方)은 성품이 좋지 않아 변경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했으나 조조가 듣지 않았다. 나중에 관우가 번성에서 승승장구하자 호수, 부방은 과연 관우에게 항복하니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졌다.

위국이 세워진 뒤 태자 중서자로 승진했다. 늘 중대한 모의에 참여하여 매번 기책을 내어놓아 세자(조비)에게 중한 신임을 얻으니, 진군, 오질, 주삭과 함께 4우라 불리었다. 승진하여 군사마가 되자 조조에게 말했다.
지금 천하에 농사짓지 않는 자가 대략 20만여 명에 이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방책이 아닙니다. 비록 전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지만 의당 스스로 농사지으며 둔수해야 합니다.

조조가 이를 받아들이니, 이로써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비축해 나라의 소용이 넉넉해졌다.[19]

형주에서 관우에게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지자 조조는 허도가 적과 가깝다 하여 하북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마의가 말하길[20] "천도한다면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니 인근의 백성들이 크게 불안해 할 겁니다. 손권과 유비는 겉으론 친밀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손권을 움직여 관우의 후방을 기습하면 번성의 포위는 자연히 풀릴 것입니다."라 건의했고 조조는 이를 따랐다.

조조는 형주의 남은 백성과 한천에서 둔전하던 자들이 남쪽 도적(오나라)에 매우 가까이 닥쳤다 하여 이들을 모두 옮기려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형초 사람들은 경박하여 동요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관우가 이제 막 격파되어 악행을 저지른 많은 이들은 몸을 숨기고 관망하고 있는데, 이제 착한 이들을 옮긴다면 그들의 뜻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차 떠난 자들이 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조조가 이를 따르니 그 후 도망한 자들이 모두 돌아와 생업에 종사했다.

8. 조비 휘하

조조가 낙양에서 죽자 조비가 놀라고 두려워했는데, 사마의가 장례 치르는 일을 다스리자 안팎이 숙연해졌다.[21] 그리하여 조조의 관을 받들고 으로 돌아왔다.

220년, 조비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위나라를 건국하여 황제로 즉위한 당시 조비의 측근인 사마의의 위상을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한나라의 자사와 태수는 상하관계가 명확치 않았다. 그 때문에 지방에서 대규모 반란이 발생해서 지방군만으로도 통제가 불가능할 때, 중앙정부에서 독군어사(督軍御史)[22]를 파견했다. 위나라에 들어서면 한나라 시절 장군직을 남발하지 않고 독군(督軍) 권한을 가진 중앙관료들로 위기상황을 극복하던 시절은 끝났고, 일반적으로 장군직을 가진 무관들이 행도독독군(行都督督軍)을 겸하는 기묘한 형태로 발전 혹은 변화하게 된다.

송서 백관지에 따르면 후한의 광무제가 독군제사(督軍諸使)라는 형태로 체제를 구축한 관직(독군어사/감군사자)를, 조조가 '황제가 임명한 제반 관리'라는 의미의 제사를 떼고, 임시로 군을 독(督)한다는 독군을 붙여 행도독독군으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물론 조조가 무언가를 새로 만든 건 딱히 아니다. 광무제를 비롯한 한나라 황제들과 관료들이 틀을 닦아놓은 관제를 자신의 입맛 혹은 필요에 따라 바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의 도독 제도와 조조가 기틀을 닦은 위나라 도독은 분명 다른 점이 존재한다.

조비황초 원년(220년) 사마의를 독군어사중승에 임명한다. 독군어사중승에서 독군의 성격은 독군어사에서 보이는 감찰의 기능과 더불어 임시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사중승은 홍이손의 삼국직관표에 따르면, 4품이지만 어사대의 우두머리이자 독좌(獨座)로서 황제 혹은 승상 직할이었다. 조조가 헌제 시절 승상에 취임해 어사대부(220년 사공으로 개칭)의 권한을 사실상 무력화시키면서, 위나라의 핵심 관직이 된 걸로 보인다.

사마의가 초대 어사중승은 아니지만 서선을 어사중승으로 임명 직후 바로 다른 관직으로 보냈기에 조비 시대에 제대로 감찰 임무를 한 건 사마의가 최초라고 봐야한다. 또한, 독군과 어사중승은 유사한 기능, 즉 감찰기능을 지닌 관직으로 이해되며, 독군의 경우 그 임시성을 고려해볼 때, 과거 비상설직이었다가 상설화된 장군과 같다고 보인다. 즉 사마의가 받은 독군어사중승은 과거 대사마대장군처럼 장군의 관이 더해진 형태로 이해할 수 있으며, 장군이 출정이 끝나면 파해졌듯이, 독군 역시 감찰이 끝나면 파해지는 형태로 보인다. 또한 독군어사중승, 독군량집법, 독군량어사, 위나라의 독군어사 등이 조비가 황제로 즉위하던 시기에 공통적으로 보인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이런 독군직이 붙은 관직들은 선양에 의한 즉위에 따른 혼란함을 감독하기 위해 기능한 관직들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일단 독군어사중승을 어사중승에서 독군의 관이 더해진 형태로 이해한다고 치더라도, 그 독군이 가질 수 있는 군령권 가능성 자체를 아예 부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 시기에는 지절을 지닌 도독들이 도독제군사, 도독중외 등으로 등장하던 시기였고, 도독이라는 형태로 이미 행도독독군 등이 거론되는 시기이므로 ‘독군’에서 보이는 감찰의 역할을 넘어선 군령의 권한이 온전히 있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여간 선양 이후 혼란한 체제에 맞추어 사마의가 임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만은 사실로 볼 수 있다.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로 즉위하자 하진정후에 봉해지고 승상 장사로 전임되었다. 221년, 조비는 독군을 파하고 시중 상서우복야(3품)로 사마의를 승진시킨다.

손권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번, 양양에는 곡식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당시 조인이 양양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조인을 불러 완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청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격파하여 지금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려 할 때이니 필시 감히 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이니 이곳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을 결국 따르지 않았다. 조인이 마침내 두 성(번, 양양)을 불태운 후 완으로 후퇴하는데 손권이 진소를 보내 양양을 점거해 버린다. 결국 조인이 서황과 함께 진소를 공파하고 한수 남쪽의 부화민을 북쪽으로 이주 시킨다.

당시 위나라의 양양-번성 라인에서 오나라로 귀순하는 백성들이 여럿 등장하면서 방어선이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조비는 후퇴론을 주장했고 사마의는 방어론을 주장했는데 결국 조인은 양양성을 불태우고 완성으로 후퇴한다. 그러나 손권은 주력군대를 보내지 않고 진소라고 하는 행적이 불분명한 장수를 보낸다. 결국 조인은 서황과 함께 양양을 다시 탈환한다. 이것이 과장되어 《진서》 <선제기>는 손권이 아예 양양을 쳐들어오지 않았다고 왜곡하여 서술하였다.

당초 촉장 맹달이 항복하자 위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매우 후대했었다. 사마의는 맹달의 언행이 간교하여 신임할 수 없다고 누차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맹달을 영(領) 신성태수로 삼고 후(侯)에 봉하고 가절(假節)했다.

222년, 조비가 남쪽으로 순행할 때 에 도착하기 전에 백관들에게 군현의 일을 간여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완의 현령이 잘못 이해해서 시장을 폐쇄하였고, 조비는 '내가 도둑놈이란 말인가?'라고 라며 양준을 투옥했다. 사마의와 왕상(王象), 순위(荀緯)가 양준을 구해주도록 청하며 머리를 조아리고 피를 흘렸으나 조비는 허락하지않았고, 양준은 결국 자살하였다고 한다.[23]

224년, 조비가 남쪽을 순행해 오와의 국경 지방에서 군대의 위세를 보였다. 사마의는 허창에 남아 진수했는데, 상향후로 고쳐 봉해지고 무군, 가절로 전임되어 5천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급사중, 녹상서사의 직이 더해졌다. 사마의가 굳게 사양하자 천자(조비)가 말했다.
내가 제반 정무를 보며 밤낮으로 이어 잠시라도 편히 쉴 틈이 없소. 이는 그대에게 영예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걱정거리를 나누려는 것일 뿐이오.

225년, 조비가 다시 수군을 크게 일으켜 오를 정벌했는데, 다시 사마의에게 명하길 머물며 지키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진무하고 밖으로는 군수 물자를 공급하도록 했다 조비의 신뢰는 매우 두터웠는데, 사마의에게 이르길, "짐이 동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서쪽을 맡고, 짐이 서쪽에 있을 때는 그대가 동쪽을 맡으시오"라고 했다. 조비가 죽을 때 사마의, 조진, 진군을 불렀고 황태자 조예에게 조서를 내려 말하길, "이 세 명의 신하와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9. 조예 휘하

조예가 즉위하자 무양후(舞陽侯)로 고쳐 봉해졌다.

손권이 강하를 포위하고 그의 장수인 제갈근, 장패(張覇)[24]를 보내 아울러 양양을 공격하자 사마의가 제군을 지휘해 손권을 쳐서 패주시켰다. 진격해 제갈근을 격파하고 장패를 참수하고 아울러 천여 급을 참수했다. 무군대장군에서 표기대장군으로 승진했다.

227년 6월, 천자가 조령을 내려 사마의를 에 주둔케 하고 독형예이주제군사의 직을 더했다.

그리하여 맹달은 오와 연결하고 촉과 관계를 공고히 해 은밀히 중국(위나라)을 도모하려 했다. 촉나라의 재상 제갈량은 그가 언행을 이리저리 고치는 것을 증오하고 또한 그가 화를 일으킬까 염려했다. 맹달은 위흥태수 신의(申儀)와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제갈량은 맹달의 거사를 재촉하고자 하여 곽모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니 신의를 방문하여 그 계획을 누설시켰다. 신의는 곧바로 맹달이 몰래 촉과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표로 올렸으나 황제 조예는 믿지 않았다.

《전략》에 따르면 227년, 제갈량성도로부터 한중에 도착하자 맹달이 또한 제갈량에 호응하고자 하여 제갈량에게 옥결(玉玦), 직성장즙(織成鄣汁), 소합향(蘇合香)을 선물로 보냈다. 제갈량은 곽모에게 거짓 항복하여 위나라로 가게 했다. 위흥 태수 신의는 맹달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곽모가 신의에게 말했다.
옥결은 모책이 이미 결정되었다는 말이고, 직성은 모책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말이고, 소합향은 일이 이미 합해졌다는 말입니다.

맹달은 그의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장차 거병하려 했다. 사마의는 맹달이 신속하게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서신을 보내 그를 회유했다. 이는 당시 사마의가 맹달이 신속히 거병하면 이를 막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뜻한다. 마침 조예는 맹달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믿지 않고 있었고 그래서 편지를 보내 그를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장군이 지난 날 유비를 버리고 국가에 몸을 의탁하자 국가에서는 장군에게 변경의 중임을 맡겨 촉을 도모하도록 했으니 촉인들은 장군을 이를 갈며 증오하지 않는 자가 없소. 제갈량은 우리를 서로 싸우게 하고 싶었으나 오직 방법이 없어 고심할 뿐이었소. 곽모가 한 말이 작은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경솔하게 누설되게 했겠소.
맹달은 서신을 받고 크게 기뻐하고, 거병을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했다. 이 사이에 사마의의 태도가 바뀐다. 사마의는 참군 양기(梁幾)를 파견해 실상을 조사하는 한편 맹달에게 입조를 권하였다. 사마의의 편지로 인해 거병을 망설이던 맹달은 놀라서 비로소 난을 일으켰다.

<명제기>에 보면 227년 12월, 마침내 조예는 표기장군 사마의에게 맹달의 난을 토벌하게 했다. 처음 신의가 표를 올렸을때는 맹달의 반란을 믿지 않던 조예가 이렇게 태도를 바꾼것은 그 사이 누군가가 조예의 판단 과정에 개입을 했다는 증거이고 이는 즉, 사마의가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맹달이 준비하지 못하게 함과 동시에 아군이 준비할 때까지 시간을 끄는 사이 군주 조예가 뜻이 바뀐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즉, 사마의는 우선 맹달에게 편지를 보내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안심시킨 후 낙양에 표를 보내 조예를 납득시켰을 가능성이 높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마의가 은밀히 군을 일으켜 공격했다. 제장들은 맹달이 두 적(촉한과 손오)과 결탁되어 있으므로 의당 관망한 뒤에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맹달은 믿음과 의리가 없고 지금은 그들이 서로 의심하는 때이니, 응당 결단하지 못하는 때를 틈타 속히 해결해야 하오.
그리고는 이틀 길을 하루에 걸어 8일 만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오와 촉이 각기 그들의 장수를 보내 서성 안교와 목란새로 향하게 하여 맹달을 구원하자 사마의는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이를 막았다.

당초 맹달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완은 낙양과 800리 떨어져 있고 내가 있는 곳과는 1,200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거사했다는 말을 들으면 응당 천자에게 표를 올리며 서로 왕복해야 하니 한 달은 걸릴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있는 곳은 깊고 험한 곳이라 사마의가 필시 직접 오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하자 맹달이 또 제갈량에게 고했다.
내가 거사한 지 8일 만에 군대가 성 아래에 도착하니 어찌 그토록 신속할 수 있습니까!
상용성의 3면은 물에 의지했는데 맹달은 성 바깥에 목책을 세워 스스로 굳게 방비했다.

사마의는 물을 건너 그 목책을 깨뜨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렀다. 여덟 갈래 길로 성을 공격하여 16일 만에 맹달의 생질인 등현과 장수 이보 등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맹달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수도로 보냈다.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군대를 거두어 개선하여 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불필요한 지출을 금하니 남쪽 사람들이 기뻐하며 귀부했다.

당초 신의는 오랫동안 위흥에 있으면서 변경 지역에서 전횡하며 번번이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하여 인장을 새겨 많이 황제 명의로써 대신해 수여하였었다. 맹달이 주살되자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 무렵 여러 군수들이 사마의가 새로 승리했다 하여 예물을 바치며 축하하자 이를 모두 받았다. 사마의는 사람을 시켜 신의에게 하례하러 직접 오도록 권유하고, 신의가 도착하자 황제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한 정황을 심문하고는 그를 체포해 수도로 송환했다. 또한 맹달의 남은 무리 7천여 가를 유주로 옮겼다.

여기서 <선제기>에는 촉장이라는 요정, 정타가 7천기를 데리고 항복했다는 기록이 더 있는데 타 기록에는 교차 검증되지 않는다. 만약 사실이라도 상용 근방에 웅거하던 반독립적 세력에 가까울 것이다.

9.1. 석정 전투

이 무렵 변군이 새로 귀부하여 호적에서 누락된 호구가 많으니 위 조정에서 실태 조사를 하려 했다. 사마의를 수도로 오도록 하여 천자가 이 일에 관해 사마의에게 자문을 구하자 사마의가 대답했다.
적이 엄격한 법률로 아랫 사람들을 속박하니 이 때문에 아랫 사람들이 그를 저버린 것입니다. 의당 너그러이 다스리면 자연히 안거하며 즐거이 생업에 종사할 것입니다.
또한 두 적을 의당 토벌해야 하는데 누구를 우선해야 하는지 물으니 사마의가 대답했다.
오는 중국(위나라)이 수전에 익숙지 못하다 여겨 감히 유수구 일대 관문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습니다. 하구, 동관이 바로 적의 심장과 목구멍입니다. 만약 육군을 환성으로 향하게 해 손권을 동쪽으로 유인한 뒤 수전군을 하구로 향하게 해 그들의 허점을 틈타 공격한다면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천자가 이를 모두 옳게 여겼고, 다시 사마의에게 명해 완에 머물도록 했다.

9.2. 제갈량의 3.5차 북벌

230년, 대장군으로 승진하고 대도독, 가황월이 더해지고 조진과 함께 을 정벌했다.[25] 사마의는 서성에서부터 산의 나무를 베어내 길을 열고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해 한수를 거슬러 올라갔다가 큰 비를 만나 회군했다.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가 '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朐䏰)에 도착하고 신풍현(新豐縣)을 함락했다. 군(軍)이 단구(丹口)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라고 쓰고 있는데 문제는 저 구인이라는 곳이 한중이 아니라 파동군 구인현이고 신풍현은 경조의 신풍현밖에 없다. 지명이 틀린게 커서 그냥 차라리 자치통감 말대로 서성에서 거슬러 올라갔다라고 쓴 거 만도 못하게 되었다.

보통 비가 내려 제대로 된 전투를 지속하지 못하고 위군이 후퇴한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전투가 있었던 모양으로 하후연전 하후패전에 따르면 (조진이 군사를 일으켜 자오도를 통해 촉을 침공했을 때다.) 하후패도 같이 참전했다. 선봉을 맡아 자오도를 통해 촉을 침공했던 하후패는 흥세를 포위하고 전곡에 진채를 내렸고 지원군이 올때까지 몸소 싸웠다고 한다.

또 <왕기전> 주석에서 왕기의 증언에 따르면 '이때 자오의 역에서, 병사가 수백 리를 행군하여 긴 비를 만나, 교각이 파괴되고, 뒤의 군량은 썩어, 전군이 핍절했다'고 하며 위나라가 본 손해로서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싸움으로 인해 식량이 고갈된 상황에서 싸움을 통한 위나라군의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후일 강유의 북벌에서 강유가 입은 피해와 제갈탄의 난에서 문흠당자가 죽은 것과 비슷한 사례로 언급하는 것을 보면 위군이 전투와 홍수로 인해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9.3. 제갈량의 4차 북벌

<제갈량전> 주석 《한진춘추》에 따르면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고 선비 가비능을 부르자, 가비능 등이 옛 북지 석성에 이르러 제갈량에 호응했다. 이때 위 대사마 조진이 병이 들어, 사마의가 형주에서 와서 입조했다. 조예가 말했다,
서방의 일이 중대하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 한 자가 없소.
이에 서쪽으로 장안에 주둔하게 하고 장합, 비요, 대릉, 곽회 등을 이끌게 했다.

사마의는 비요, 대릉에게 정병 4천을 남겨 천수군 상규현을 지키게 하고, 나머지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기산을 구원했다. [[장합]이 군사를 나눠 옹, 미에 주둔시키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전방의 군대가 홀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그러나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전군과 후군으로 나누는 것은, 바로 의 3군이 경포[26](영포)에게 사로잡힌 까닭이었소.
그리고는 진격했다. 제갈량은 군을 나눠 남겨두어 기산을 공격케 하고, 자신은 상규에서 사마의를 역격하려 했다. 곽회, 비요 등이 요격하자 제갈량이 이를 격파했다. 이에 그곳의 보리를 대거 수확하다 사마의와 상규 동쪽에서 조우했다. 군사를 단속해 험조한 곳에 의지하며 교전하지 않자 제갈량이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사마의가 제갈량을 뒤이어 노성에 도착했다. 장합이 말했다.
저들이 교전을 청하는데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니, 저들은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이 장기적인 계책으로 제압하려 한다고 여길 것입니다. 이곳에 머물러 주둔하되, 군을 나누어 기습군으로 삼아 그들의 배후로 출병할 것처럼 과시할 만합니다. 지금 제갈량은 외떨어진 군사로 군량이 적으니 또한 곧 달아날 것입니다.
사마의가 이에 따르지 않고 제갈량을 뒤쫓았다. 도착한 후 또 산에 올라 영채를 세우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가허, 위평이 여러 차례 청하며 말했다.
공께서 촉을 범처럼 두려워하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면 어찌하시렵니까?
사마의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제장들이 모두 싸울 것을 청하니, 이에 5월 신사일, 장합에 명해 남쪽을 포위한 무당감 하평(왕평)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도를 따라 제갈량에게로 향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제갈량은 위연, 고상, 오반을 보내 이를 막게 해 대파하고, 갑옷 입은 군사 3천 급을 얻었다고 했고 《정사 삼국지》에 주석으로 달린 《한진춘추》에서는 여기에 추가로 철갑옷 5천 벌, 각노 3,100 장을 노획했다고 한다. 사마의는 돌아가 영채를 지켰다.

<왕평전>에 따르면 231년, 제갈량은 기산을 포위하고 왕평은 따로 남쪽을 포위하고 지켰다.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의가 제갈량을 공격하고 장합은 왕평을 공격하였는데 왕평이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아니하니 장합은 이기지 못하였다.

진서》 <선제기>에 따르면 반대로 사마의가 포위를 무너뜨리니 제갈량은 밤을 틈타 달아났는데 뒤쫓아 이를 깨트리니 사로잡히거나 참수한 것이 만을 헤아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자치통감》은 《한진춘추》의 기록을 손들었으며 《삼국지집해》와 진서각주의 중국 학자들과 왕명성 역시 한진춘추의 기록을 신뢰했다.[27] 반대로 하버드 교수이며 자치통감을 영역한 아킬레우스 팡은 습착치를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한진춘추의 승전기록이 숫자 자체가 모순이며 전혀 믿을수 없다고 평가했다. 단, 아킬레우스 팡은 자치통감과 습착치의 기록을 비판하면서 왜 믿을 수 없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위략》에 따르면 제갈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가 장합에게 이를 추격토록 했다. 장합이 말했다.
병법에서 성을 포위할 때는 반드시 출로를 열어두고, 퇴각하는 군사는 쫓지 말라 했습니다.
사마의가 이를 들어주지 않아 장합은 부득이하게 진군했다. 촉군이 고지에 올라 숨어 엎드려 궁노를 난사하자 화살이 장합의 넓적다리에 적중했고 장합은 전사한다. 《한표전》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은 처음부터 사마의가 장합으로 하여금 추격하게 할 것을 알고 있었는지 목문도라는 곳의 나무에 장합은 오늘 여기서 죽는다라는 글을 새겼다고 한다.[28] <신비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이렇게 장합이 죽자 황제가 탄식하고 진군이 맞장구치는 등 위나라 조야가 한탄했다고 위서는 기록하고 있다. 어쨌거나 제갈량의 북벌을 막은것은 사실이었으므로 천자가 사자를 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조정에서는 전쟁에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위를 봉하고 관직을 더함에 각기 차등을 두었으며 사마의의 봉읍을 늘려 주었다.

<제갈량전> 주석으로 달린 사마진 시기 왕은이 지은 《촉기》에는 곽충 4사로 사마의가 장합과 함께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검각을 노렸으나 제갈량이 8만의 신의를 지켜 병사들의 교대 시간을 지켰고 이에 감격한 촉나라의 병사들이 일당십으로 싸워 장합을 죽이고 사마의를 격파했다고 나온다.

일각에서는 장합이 목문도에서 촉군을 추격하다 전사했다는 것은 사마의가 노성 전투에서 패하고 상규로 도망갔다는 증거로 본다. 목문도 위치는 노성의 북쪽이자 상규 남쪽인데 촉군이 목문도에서 퇴각했다는 이야기는 제갈량이 사마의를 상규까지 추격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합을 무리하게 추격시킨 이유도 하마터면 목에 칼이 들이밀어질 수도 있던 위기를 맞자 과잉대응을 한 개념이라는 주장도 덧붙여진다.

9.4. 관중 부흥

청룡 연간(233년 ~ 237년)이 되자 사마의는 장안에 주둔해 군영에 시장을 설치했는데[29], 부대의 관리나 병사들은 현민을 깔보며 약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비가 이 사실을 즉각 사마의에게 알리니 사마의는 이에 노해 군의 시후[30]를 불러들여 즉각 안비 앞에서 백대의 매질을 하고 그 자리에서 관리, 병사들에 대해서 엄숙함을 유지하도록 명한다. 그 이후로 군현과 군영이 맡은 바를 지키는 게 가능해졌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안비 참고.

이 무렵 군사 두습, 독군 설제가 모두 말하길, 내년(232년)에 보리가 익으면 제갈량이 필시 침범할 것인데 농우(농서)에 곡식이 없으니 의당 겨울 동안에 미리 옮겨놓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제갈량은 기산으로 두 번 출병하고 진창을 한 번 공격했다 꺾이고 돌아갔소. 설령 그가 뒤에 출병하더라도 다시 공성하지는 않고 응당 야전을 바랄 것이며, 필시 농동에서일 것이고 농서는 아닐 것이오.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내가 헤아려보건대 3년 안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이에 표를 올려 기주의 농부(農夫)를 옮겨 상규(上邽)를 경작하게 하고 경조(京兆), 천수(天水), 남안(南安)의 감야(監冶, 대장장이 감독)를 흥성하게 했다.

그런데 《진서》<식화지>에 따르면 사마의가 가평(嘉平) 4년(252년), 관중에 기근이 들자 사마의가 표를 올려 기주농민 5천명을 상규에 이주시켜 밭을 갈게 하고 경조, 천수, 남안의 염지(소금호수)를 흥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제는 가평 4년은 252년으로 이미 사마의가 죽은 다음 해라는 것이다. 게다가 상규로 기주의 농민을 이주시키는 계획은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에 따르면 사마의가 아니라 그의 동생 사마부의 계책이었다. 그리고 <선제기>는 사마의가 시킨게 감야(監冶)라고 나오는데 식화지는 염지(鹽池)를 흥하게 했다고 나온다. 일단 식화지는 사마의가 죽은 다음에 사마의가 표를 올렸다고 말이 안 되게 기록했으므로 이 부분은 <선제기>가 맞는듯 하다. 어쨌거나 <선제기>, <식화지>, <안평헌왕부열전>이 서로 충돌하는 기록이라 《진서》의 신뢰성을 더욱 의심하게 하는 기록으로 믿을 수가 없다.

또 <선제기>에서는 기주의 농부를 상규로 옮긴게 사마의로 나오고 <안평헌왕부열전>에서는 사마부로 나오는데 <선제기>는 사마의가 '제갈량은 농서로는 안 올 것'이라고 말해놓고 정작 농서인 상규에 농부들을 배치하고 대비케 하는 모순을 저질렀으니 사마부 열전 쪽이 더 맞는듯 하다. 상규의 농민 이주는 <안평헌왕부열전>에 따르면 매번 제갈량이 관중을 침입했는데 변방의 병력들은 제갈량을 능히 당해내지 못했고 관중에 적과 우연히 마주치자 곡식과 비단이 부족해서 제시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제갈량의 북벌을 막으려는 시도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233년, 성국거(成國渠)를 뚫고 임진피(臨晉陂)를 쌓아 수천 경의 농지에 물을 대니 나라가 충실해졌다. 《진서》 <식화지>에 따르면 임진피는 주변 황무지 3,000경의 물을 댈 수 있었다고 한다. 성국거는 《진서》 <지리지>에 따르면 오장원과 무공, 위수에 가까운 미현에 있었는데 진나라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관개수로였다. 이런 성국거를 진창에서 견수까지 확장시켰다는 기록이 《진서》에 있는데, 이것은 사마부가 제안한 관중 부흥책과 연계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로서 제갈량의 북벌에 대비하려 했던 것 같다.

이 모든 건 자치통감에는 없는 기록이지만 하여간 사마형제가 놀고 있지 않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또한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흉노 호박거자직이 반란을 일으키자 호준을 파견해 추격하고 격파해 항복시켰다. 다만 호준의 열전이 없어 상세한 활약은 알기 힘들다.

9.5. 제갈량의 5차 북벌

234년, 제갈량이 다시 군사 100,000명을 이끌고 야곡을 나와 미 땅의 위수 남쪽 평원에 영루를 세웠다. 천자가 이를 우려하여 정촉호군 진랑을 보내 보병과 기병 20,000명을 이끌고 가서 사마의의 지휘를 받게 했다.

《어림》에 따르면 제갈무후(제갈량)가 사마선왕(사마의)과 위수 가에서 장차 싸웠는데, 선왕은 융복(戎服)을 입고 일에 임하며, 사람을 보내 무후(제갈량)를 살피게 하였다. 과연 무후는 흰 수레를 타고, 갈건(葛巾)을 쓰며, 백우선(白羽扇)을 쥐고 삼군(三軍)을 지휘하니, 중군(眾軍)이 모두 그에 따라 나아가고 멈추고 하였다. 선왕(사마의)이 듣고 감탄하여 말했다.
가히 명사라 이를만 하도다!

제장들이 위수 북쪽에 주둔하며 적에 맞서려 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백성들이 모두 위수 남쪽에 모여 거주하니 이곳이 필히 다투어야 할 땅이오.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물을 뒤로 한 채 영루를 세웠다. 그리고는 제장들에게 말했다.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에 오른다면 제군이 무사할 것이오.

한편 제갈량은 호보감(虎步監) 맹염(孟琰)을 보내 무공수(武功水) 동쪽을 점거하게 했는데, 사마의가 위수(渭水)가 불어난 것을 틈타 20일에 (또는 20일만에?) 기병 1만을 출병하여 와서 맹염의 영을 공격했으나 제갈량이 죽교를 만들며 강 너머로 활을 쏘았고 다리가 완성되자 달려가 구원하고 사마의는 후퇴하였다.

이후 제갈량이 사곡에서 공격하여 나왔고, 아울러 난항(오장원)에서 둔전을 하였다. 당시 사마의는 위남에 주둔하고 있었다. 곽회는 제갈량이 반드시 북원을 다툴 것이므로 응당 먼저 그곳을 점거해야 된다고 계획했다. 논의하는 자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곽회가 말했다.
만일 제갈량이 위수를 넘어서 고원으로 올라와 병사들을 북산에 이어서 농으로 가는 길을 끊어버리고, 백성이나 오랑캐를 동요시킨다면, 이것은 국가에 이로울 것이 없습니다.
사마의는 그의 의견에 찬성하였다. 곽회는 곧 북원에 주둔했다. 참호와 보루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 촉나라 병사가 대대적으로 이르렀으므로, 곽회는 맞아서 그들을 공격했다.

며칠 후, 제갈량은 병력을 과시하면서 서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장수들은 모두 서위를 공격하려고 한다고 말했지만 오직, 곽회만은 제갈량이 서쪽에서 형체를 드러내는 것은 관병으로 하여금 중병을 서쪽에서 대응하게 하려는 것으로, 실제로는 틀림없이 양수를 공격할 것이라고 했다. 그날 밤, 과연 양수를 공격하였는데,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성을 공략할 수는 없었다.[31]

당시 조정에서는 제갈량이 군을 외지에 거주하게 하며 멀리 침범했으니 제갈량의 입장에선 급히 싸우는 것이 이롭다고 보아, 사마의에게 늘 명하길 몸가짐을 정중히 하며 그들의 변화를 살피라고 했다.

제갈량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사마의가 출전하지 않으니 제갈량은 사마의에게 부녀자들이 쓰던 두건과 머리 장식과 부인들이 쓰는 장신구를 보냈다. 사마의가 노하여 표를 올려 결전할 것을 청하자 천자가 불허하고는 강직한 신하 위위 신비(辛毗)를 보내 부절을 지니고 가서 군사가 되어 이를 제지하게 했다. 그 뒤 제갈량이 다시 와서 싸움을 걸자 사마의가 장차 출전하여 이에 응하려 했는데,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군문에 서서 막으니 사마의가 이에 그만두었다.

당초 촉장 강유는 신비가 왔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말했다.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당도했으니 적이 다시는 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제갈량이 말했다.
그는 본래 싸우려는 마음이 없는데 천자에게 결전을 굳게 청한 이유는 그의 군사들에게 무(武)를 과시하자는 것이오. 장수가 군중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만약 저들이 우리를 능히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리 길을 가서 굳이 결전을 청하겠소!
사마의의 동생 사마부가 서신을 보내 군사에 관해 물었다. 사마의가 답장을 보내 말했다.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통전》 150권에 따르면 사마의는 2,000여 명에게 영내 동남쪽 모퉁이에서 만세를 부르게 시켰다. 제갈량의 사자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사마의가 말하길 손오의 사자가 와서 항복을 청했다고 했다, 제갈량은 이를 알고 "손오가 항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마의는 곧 60세가 되는 영감인데, 구태여 이런 속임수를 쓸 필요가 있겠느냐."라고 했다.[32]

그 이전에 제갈량의 사자가 도착했을 때 사마의가 물었다.
제갈량의 일상 생활이 어떠하고 음식은 얼마나 드시오?
사자가 대답했다.
3~4 되를 드십니다.
이어 정사에 관해 물으니 대답했다.
스무 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직접 챙기십니다.
그 뒤 사마의가 다른 이에게 말했다.
제갈공명이 어찌 오래 가겠는가![33]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그와 더불어 대치한지 백여 일 만에 때마침 제갈량이 병으로 죽고 촉군이 퇴각하자 사마의가 그의 영루와 처소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奇才)로다!"

양의(楊儀) 등이 군을 정돈하고 출발하자 백성들이 선왕(宣王)에게 급히 고했고 사마의가 이를 추격했다. 강유가 양의에게 정기를 돌리고 북을 울리면서 마치 곧 사마의를 향해 나아갈 것처럼 하게 하니, 선왕은 이내 물러나 감히 핍박하지 못했다.[34]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야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發喪)했다. 사마의가 퇴각하니 백성들은 속어(諺)를 지어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 라고 했다. 어떤 이가 이를 사마의에게 고하자 사마의가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지만 죽은 자를 헤아려 대적할 수는 없다"

다음 날, 제갈량의 군영의 보루로 가서 그의 남은 흔적을 살펴보고 그의 도서와 양곡을 매우 많이 노획했다. 신비는 제갈량이 죽었는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사마의가 말했다.
군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군대의 문서, 비밀한 꾀, 병졸과 군마가 먹는 양곡인데, 이제 이들을 모두 내버렸으니 자신의 중요한 것을 내버린 자가 어찌 살아 있겠소? 의당 급히 추격해야 하오.
관중에 남가새가 많다는 말을 듣고 사마의는 군사 2천명에게 부드러운 목재로 된 바닥이 평평한 나무신을 신게 해 앞장서게 하고 질려가 모두 나무신에 박힌 뒤 기병과 보병이 함께 진격했다. 추격하여 적안에 도착했으나 더 이상 미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9.6. 북벌 직후

235년, 태위로 올리고 봉읍을 더욱 늘려주었다. 촉장 마대가 침범하니, 사마의가 장군 우금(牛金)을 보내 이를 공격해 패주시키고 천여 급을 참수했다. 《자치통감》에서는 《정사 삼국지》 <명제기>의 기록에 따라 태위로 올린 것만 기록했으며, 마대를 격파한 것을 제외했다. 아마도 정사 삼국지에 실리지 않았기 때문일듯 하다.

이때쯤이면 조진, 조휴 등 동료(경쟁자)들의 죽음 덕분에 사마의는 앉아서 위나라의 군권을 틀어 쥔 사나이가 되었다. 235년 정월의 태위직 제수는 이미 그가 쥔 권력과 권위를 생각하면 차라리 숙적 제갈량을 막아낸 것에 대한 기념선물에 가까웠을듯. 허나 중요한 것은 위나라 건국이래 진짜 군권은 조씨 인척들끼리 해먹는 대사마(조인조휴조진)로 분리되는 한편 나이든 문관들이 차례로 앉으며 사실상의 명예직이 되었던 태위 자리에, 실질적인 군권과 실력을 지닌 인물이 앉게 되었다는 것. 덕분에 조위의 역대 태위 중에서도 사마의는 전무후무한 존재감을 발휘하게 된다.

무도 저족의 왕 부쌍, 강단이 그들의 부속 6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정사 삼국지》 《촉서》 <장억전>에는 '236년 저족의 왕 부건의 동생은 정말 400여 호를 이끌고 위나라로 갔고 부건만이 투항하러 온다고 했다.' 라는 기록이 있고 이에 따라서 《자치통감》은 기록했다. 즉, 《진서》의 과장으로 부쌍은 왕도 아니었다.

관동에 기근(飢, '흉년'으로도 해석된다)이 들어 사마의는 장안의 곡식 5백만 곡을 수도로 보냈다.[35] 《위서》 <명제기>에 따르면 3월, 《자치통감》에 따르면 4월 조예는 이때 낙양궁을 크게 고치고, 소양전(昭陽殿)과 태극전(太極殿)을 만들었으며, 총장관(總章觀)을 지었다. 총장관은 높이가 10여장이나 되었는데 백성들은 농업과 잠업(누에치기)을 실업해 적기를 빼앗겼으며, 강직한 신하 양부(楊阜)와 고당륭(高堂隆) 등이 각각 여러 차례에 걸쳐 간절하게 진언했는데 조예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략에 따르면 조정에서 상소가 올라왔는데 그 중에는 '장병(將士)의 부모와 처자들의 굶주린 자를 후하게 하사하고, 백성의 병환을 물어서 그 악함을 없애고, 곳간을 채우고, 갑옷과 병기를 보수하고, 공경함으로서 천하에 임해주십시오'라는 말이 있어 곳간은 비고 장병의 부모, 처자들이 굶주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같은 해 7월에는 낙양의 숭양전이 불에 타 버렸는데 《자치통감》과 《위서》 <고당륭전>에 조예가 말하길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조예: (숭양전이 불탄) 이것은 어떤 허물이오? 예법에는 어찌 기도하여 재앙을 없애는 방법이 있소?
고당륭:《역전(易傳)》에서 말하기를, '위가 절검하지 않고 아래가 절검하지 않으면, 갑작스럽게 불이 나서 그들의 집을 태운다'고 했고, 또 '군왕이 누대를 높이면 하늘의 불이 재해를 만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임금이 힘써서 궁실을 장식하면서 백성들이 텅 비게되고 고갈되어 있는걸 알지 못한 것이니 하늘이 그것에 대응하여 가뭄(旱)를 주고, 우뚝 솟은 궁전에 화재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하늘이 감계를 내리는 것은 폐하를 꾸짖고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폐하께서는 응당 인도(人道)를 더하고 숭상하여 하늘의 뜻에 보답해야만 합니다.

즉, 3~4월에는 백성들은 부역에 동원되느라 농사시기를 놓쳤고 장병들의 처자들에게 줄 식량이 없었으며 7월에는 백성들이 텅 비고 고갈되어 있으며 결정적으로 하늘의 불이 재해를 만들어 가뭄이 들게했다는 것으로 당시 가뭄으로 인한 재해[36]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농사 시기를 놓친데다가 가뭄의 재앙까지 들었으니 기근이 들고 흉년이 되는건 당연지사, 따라서 사마의가 양곡 5백만 곡을 수도로 보낸건 235년 7월 후 흉년이 든 추수철에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236년, 흰 사슴을 잡아 헌상했다. 천자가 말했다.
옛날 주공단성왕를 보좌할 때 흰 꿩을 바친 일이 있다. 이제 그대가 섬서에서 대임을 맡아 흰 사슴을 헌상하니, 충성이 서로 부합하여 천년이 한 마음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것으로 어찌 길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9.7. 공손연의 난

당초 문의(공손연)는 숙부인 공손공의 지위를 빼앗고 그를 가두었고, 장차 모반하려 할 때 장군 윤직, 가범 등이 모반하지 말도록 간절히 간언하니 문의가 이들을 모두 죽였다.

요동태수 공손문의(공손연)[37]가 모반하자 사마의를 수도로 불렀다. 천자가 말했다.
이 일은 족히 그대를 수고시킬 일이 아니나 이 사안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하여 이 때문에 그대를 번거롭게 했소. 그대가 헤아리기에 그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요수에 의지해 대군에 맞서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계책입니다. 만약 앉아서 양평을 지키려 한다면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천자가 말했다.
그 계책 중에 장차 어떤 것을 쓸 것 같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현명한 자만이 미리 포기할 수 있으나 이는 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가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정벌하면 공손연은 우리가 장차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 필시 먼저 요수에서 맞서고 그 뒤 물러나 양평을 지킬 것이니, 이는 중책과 하책입니다.
천자가 말했다.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
사마의가 대답했다.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당시 궁실을 크게 수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전쟁이 더해지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피폐해졌다. 사마의는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이에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하수 이북으로 백성들이 곤궁하고 안팎으로 노역이 많아 사세상 이들을 함께 병행할 수는 없으니, 의당 안의 일은 잠시 그만두어 한 때의 위급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238년, 우금(牛金), 호준 등과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수도를 출발했다.[38] 임금의 수레가 이를 전송해 서명문을 나왔고, 동생 사마부, 아들 사마사에게 명해 전송하며 온현을 지나게 하고 곡식과 비단, 소와 술을 하사하고 군수, 전농 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방문하도록 명했다.[39]

고향인 온현에서 노인과 옛 친구들을 만나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사마의는 탄식하고 몹시 서운하고 섭섭해하다 감흥이 일자 노래를 읊었다.
천지가 개벽하여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구나.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다해 멀리 원정하노니.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 없애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만 리를 깨끗이 하고 온 세상을 통일하리니. 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한 뒤 관직을 사양하고 노인으로 여생을 보내 무양에서 죄인이 처벌을 기다리겠노라.[40]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을 지나고 갈석을 넘어 요수에 이르렀다.

당초 사마의가 양평에 이르렀을 때 꿈을 꾸었는데, 천자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워 말했다.
내 얼굴을 보시오.
고개를 숙여 보니 평소와 다른 점이 있어 내심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초 문의(공손연)는 위나라 군대가 출격한다는 말을 듣고 손권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권이 또한 멀리 출병하여 그를 위해 성원하고 문의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마의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 심히 동생(공손연)이 염려되오.

문의(공손연)는 비연(卑衍), 양조(楊祚)에게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보내 요수에 의지해 벽을 튼튼히 한 채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사마의에게 맞섰다. 정사삼국지 공손연전에 따르면 주위 20리 이상의 참호를 팠고 사마의군이 도착하자 비연이 응전하나 사마의가 호준을 보내 격파했다.

사마의가 대군을 결집해 많은 기치를 펼쳐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이 정예병을 다하여 이를 향해 나아왔다. 그러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하였고, 적의 둔영과 서로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 가에서 길게 포위하고는 적을 내버려두고 양평으로 향했다. 제장들이 말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하기만 하니 이는 군사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적이 둔영을 견고히 하고 보루를 높이는 것은 우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려는 것이오. 적의 대군이 이곳에 있으니 즉 그 소굴은 비어 있을 것이오. 우리가 곧바로 양평으로 향한다면 내심 두려움을 품을 것이고 두려움을 품으면 싸우러 나설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그리고는 진을 정돈하여 나아갔다. 적은 사마의의 군대가 그들의 배후로 출격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를 요격했다. 사마의가 제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둔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그리고는 군대를 풀어 역격하여 적을 대파하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적이 물러나 양평에 의지하니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정사 삼국지 공손연전에는 사마의가 동남으로 이동하는척 속이다 급하게 동북쪽으로 돌려 비연 등이 양평에 방비가 없는 것을 두려워해 밤 중에 달아났다. 다시 수산(首山)에서 공손연이 비연을 보내 죽음을 각오하게 싸우게 했는데 사마의가 대파하여 진군해 양평성 아래 성 주위에 참호를 팠다고 서술하였다.

때마침 큰 비가 연일 내려 홍수가 나[41] 물이 평지에서도 수 척에 이르자 전체의 군대가 두려워하며 둔영을 옮기고자 했다. 사마의가 군중에 영을 내려, 감히 둔영을 옮기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한다고 했다. 도독영사 장정(張靜)이 영을 범하자 그를 참수했고 이에 군중이 안정되었다.

적이 물을 믿고 태연히 나무를 하고 방목했다. 제장들이 이를 취하고자 했으나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사마 진규(陳珪)가 말했다.
예전 상용을 공격할 때는 8부로 아울러 나아가며 밤낮으로 쉬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능히 5~6일 만에[42] 견고한 성을 함락하고 맹달을 참수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와서 다시 편안하고 느슨하게 하니 저는 당혹스럽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맹달의 군사가 적어 그 식량이 1년을 지탱할 수 있었으나 우리의 장병들은 맹달의 군사보다 네 배에 달해 한 달을 버틸 수 없었소. 적이 그들의 군사 수 많음과 비오는 것을 믿고 굶주리고 곤궁해도 항복하려 하지 않으니, 우리는 응당 무능함을 보여 그들을 안심시켜야 하오.
조정에서 군대가 비를 만났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원정군을 소환하도록 청하니 조예가 반대했다
사마의는 위기에 처해 변화를 제외할 수 있으니, 오래지 않아 공손연을 붙잡아 올 것이오.
얼마 뒤 비가 그치자 마침내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땅굴을 파고 방패, 전차, 사다리, 충차를 쓰며 화살과 돌을 비 오듯 쏘아 부으며 밤낮으로 공격했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요수가 불어난 것을 이용하여 수송성을 요구(遼口)에서 성아래 까지 이르게 했다고 한다. 비가 그치자 토산을 쌓고 노(櫓, 망루)를 세우고 발석(發石, 투석기), 연노(連弩)를 만들어 성 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군급(窘急, 궁지에 몰려 매우 급박함)해졌고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장군 양조(楊祚) 등이 항복했다.라고 쓰고 있다.

처음엔 양평은 비어있다고 말하고, 공손연군이 양평에 방비가 없는 것을 두려워했다면서 갑자기 포위하고 나서는 양평에 군사가 많아 식량이 부족하다고 선제기, 정사 삼국지 공손연전 둘 다 증언하고 있는데 아마 공손연군은 요수에 방어라인을 쌓고 그곳에 물자를 모두 비축했다가 사마의의 우회기동에 곧바로 깨지고 양평으로 돌아온 공손연군과 양평에 살고 있던 일반 백성들 때문에 양평의 식량이 부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무렵 색이 희고 빛나는 갈기털이 있는 혜성이 있어 양평성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흘러 양수에 떨어지자 성 안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했다. 문의(공손연)가 크게 두려워하니 이에 자신이 임명한 상국 왕건(王建), 어사대부 유보(柳甫)를 보내 항복을 구하며 포위를 풀면 양손을 결박하고 얼굴을 들어 사람들에게 보일 것이라 청했다. 사마의는 이를 불허하고 왕건 등을 붙잡아 모두 참수했다.

격문을 보내 문의에게 고했다.
두 사람이 늙고 흐리멍텅하며 필시 말을 전하며 본뜻을 그르쳤을 터이므로 내가 이미 그대를 위해 모두 죽였노라. 만약 할 말이 더 남았다면 명료하게 판단할 수 있는 젊은이를 다시 보내도록 하라.
문의가 다시 시중 위연(衛演)을 보내 기일을 정해 볼모를 보낼 것을 청했다. 사마의가 위연에게 말했다.
군사의 대체의 요지에는 다섯 가지가 있으니, 싸울 수 있으면 싸우고, 싸울 수 없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달아나는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오직 항복하거나 죽는 것 뿐이다. 너희는 항복하지 않으려 하니 이는 죽음을 각오한 것일 터, 볼모를 보내 무얼 어찌하겠단 말인가?
"軍事大要有五,能戰當戰,不能戰當守,不能守當走,餘二事惟有降與死耳。汝不肯面縛,此為決就死也,不須送任。"
("전쟁에서 중요한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싸울 수 있을 때는 싸워야 하고, 싸울 수 없을 때는 지켜야 하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야 한다. 나머지 두 가지는 항복 아니면 죽음뿐이다. 너희들은 항복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죽기로 작정한 것일 터, 인질을 보낼 필요는 없다.")

문의가 남쪽 포위망을 공격해 갑자기 쑥 나오자 사마의가 군대를 풀어 이를 공격해 격파하고 양수 가의 장성이 떨어진 곳에서 문의를 참수했다. 성으로 들어간 뒤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새 것과 헌 것을 구별했다. 나이 15세 이상의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이고 인골을 쌓은 전승 기념비를 만들었다. 공손연이 임명한 공경 이하 가짜 관원들을 모두 처형하고 공손연의 장군 필성(畢盛) 등 2천여 명을 주륙했다. 4만 호, 30여 만 구를 거두었다.[43][44]

이에 사마의는 공손공을 석방하고 윤직(綸直) 등의 묘를 흙더미를 쌓아 북돋고 그들의 후손을 현창했다.[45] 영을 내려 말했다.
옛날 나라를 정벌할 때는 그 흉포한 악인를 주살할 뿐이었다. 문의에게 연루되어 그르쳐진 자들은 모두 그 죄를 용서한다. 중국인이 옛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면 원하는 대로 들어주도록 하라.

이 무렵 병사들 중에 추위에 떠는 자가 있어 저고리를 청했으나 사마의는 주지 않았다. 어떤 이가 말했다.
다행히 헌 저고리가 많이 있으니 줄 수 있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저고리는 관청의 소유인 물품이니 신하된 몸으로 사사로이 베풀 수 없다.

그리고는 상주하여 군인 중에 나이 60세 이상 천여 명의 군역을 파하여 되돌려 보내고, 군관 중 종군하다 사망한 자는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다. 천자는 사자를 보내 유주 광양군 계현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을 늘려 예주 영천군 곤양을 수여하니 예전과 합쳐 2개 현이 되었다.

여담으로 공손연의 난은 사마의가 고구려와 직접 대면한 사건이 되었다. 물론 이때는 관구검이 고구려로 쳐들어오기 전이라 우군으로서 만났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9.8. 공손연의 난 직후

사마의가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부역하는 자가 만여 명에 이르고 아름답게 꾸며 감상용으로 만든 물건이 천 개에 달했다.

이 때 조예가 사망하기 직전에 조우(曹宇), 하후헌(夏侯獻), 조조(曹肇)[46], 진랑 등이 손자(孫資), 유방(劉放) 때문에 위나라 궁궐에서는 여러 혼란이 있었는데, 처음엔 조우가 사마의를 관중으로 보내는 조서를 보낸다. 그러나 백옥에 이르렀을 때 사마의를 소환하는 조서가 내렸는데 사흘 동안에 조서가 다섯 번 도착했다. 임금이 손수 쓴 조서에서 말했다.
그간 두렵고 불안해하며 그대가 도착하길 기다리고 있으니, 도착하거든 곧바로 협문을 밀치고 들어와 나를 만나도록 하라.
장안으로 가라는 조서, 낙양으로 오라는 조서 두가지 다른 조서가 내려지니 사마의가 크게 두려워하고 낙양으로 출발한다. 이에 빠른 거마를 타고 밤낮으로 쉴 시간이나 쉬지 않을 시간이나 가리지 않고 계속 일하여 백옥에서부터 4백여 리 되는 길을 하룻밤을 묵은 뒤에 도착했다. 가복전 침실 안으로 인도되어 임금의 침상에 올랐다.

사마의가 눈물을 흘리며 천자의 병세에 관해 물으니 천자가 사마의의 손을 잡고 제왕(조방)을 눈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뒷일을 맡기오. 죽으려는 것을 겨우 견뎠으니 내가 차마 죽지 못한 것은 그대를 기다린 것인데 이제 서로 만났으니 아무 여한이 없소이다.
대장군 조상과 함께 임금의 유언을 받아 어린 주인을 보좌했다.

10. 조방 휘하

조방이 황제로 즉위하자 시중, 지절, 도독중외제군, 녹상서사로 올라 조상과 함께 각기 군사 3천 명을 통수하며 함께 조정을 관장하고 대궐 안에서 번갈아 숙직하고 수레를 탄 채 대궐로 들어올 수 있었다. 조상은 상서가 일을 아뢸 때 먼저 자신을 통하도록 하기 위해 천자에게 말해 사마의를 대사마로 전임하도록 했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그 앞뒤로 대사마가 누차 재위 중에 죽었다 하여 이에 사마의를 대사마로 임명하지 않고 태부로 삼았다.

《위서》 <조상전>에 따르면 정밀(丁謐)이 계책을 내어놓았는데, 조상으로 하여금 천자에 고해 사마의를 태부(太傅)로 임명하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겉으로는 명목상 사마의를 존중하는 것이나, 내심으로는 상서(尙書)의 주사(奏事, 국사의 결재를 주청하는 업무)가 먼저 자신을 거치도록 함으로써 그 일의 경중(輕重)을 제어하고자 함이었다. <조상전> 주석 《위서》에 따르면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 대사마로 삼아달라고 했는데 조방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짐이 생각건대 선제(先帝)께서는 본래 군자로서 낙천지명(樂天知命, 하늘의 뜻에 순응함)하셨으니 티끌만한 의심으로 꺼린 것은 아니나, 마땅히 백인(柏人)과 팽망(彭亡)의 일을 돌아보았기 때문에 저회(低徊, 생각에 잠겨 고심함)하셨으니 그 뜻이 있었도다! 이는 또한 선제(先帝)가 대신들을 경애하고 중히 여겨 은애(恩愛)로 지극히 후대한 것이다. 옛날 성왕(成王)이 보부(保傅, 태부, 태보)의 관직을 만들고 근래에 한(漢) 현종(顯宗, 후한 명제)이 등우(鄧禹)를 태부로 삼았으니 이는 모두 준걸들을 존숭한 때문이다. 이에 태위를 태부로 임명한다.”[47]

어쨌거나 이런 개드립 치고 넘어가긴 했지만 대사마는 누락되고 태부가 된 것. 누락된 이유는 이전 대사마들(조진/조휴)가 일찍들 죽어나가서 불길하다는 것을 들고 있는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름에 관한 금기가 많았던 고대 중국 사회에서 '대사마 사마의'는 웃기는 문제를 넘어서 당사자도 주변 사람들도 이건 좀 아니다라고 생각했을듯. 대사마는 생겼다가 없어졌다 태위로 이름이 변경됐다 태위와는 또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우여곡절이 많은 대사마 관직이지만,최소한 위나라에서는 이자리를 일종의 '대장군+@(명예)' 적인 무언가로 취급한 느낌이 있다.

위나라 초대 대사마는 조인인데, 하후돈/하후연은 먼저 죽었고 표기장군 조홍은 뭔가 올리기 애매하니 원톱 포지션이던 조인은 이미 대장군이었지만,그걸 대사마로 영전. 사실상 실권은 변화 없었겠다만 어쨌든 태생적으로 '대장군을 한 칸 더 올려준' 느낌으로 신설한 게 대사마였다는 것. 그 조인이 죽고난 후, 조비의 남은 제위기간 3년 동안은 어째서인가 대사마/대장군이 공석으로 남는다. (나중에 결국 이 자리를 차지할) 당시의 군부 톱 - 조휴와 조진은 이 시기 동안 중군대장군/정동대장군이라는 한급 아래의 자리에 머물렀다. 이는 무군대장군 사마의도 마찬가지.

어쩌면 친정을 중시하던 조비로서는 굳이 대장군(/대사마)라는 군부 1인자를 한 명 뽑아 세워두기 보다는 다들 그 아랫급에 동렬로 남겨두고 자기가 직접 컨트롤하는 게 낫다 생각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조비가 죽고난 후, 조예 대에 이르러 비로소 조휴가 대사마/조진이 대장군에 임명된다. 사실 이전에는 동렬이라해도 조진의 이름이 한 칸 앞에 실리는 입장이었지만, 여기서 역전된 셈. 그러나 어려서부터 함께 친하게 지내온 친척이자 동료인 두 사람이니만큼,이것을 공식적인 '서열변동'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을 듯하다. 조비가 좀 독특했던 거지 대장군 클래스에 올라야 하는 게 당연한 입장이었던 두 사람인지라...대장군을 둘로 분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형식상으로만 윗급인 대사마를 두었을 뿐, 실질적으로는 동렬로 각각 서쪽/동쪽을 관장하라는 게 자타 모두의 인식이었을 듯.

그렇다고는 해도 어쨌든 형식상으로는 대사마가 위인지라, 조휴의 사망 이후 대장군이었던 조진이 대사마로, 표기장군이었던 사마의가 대장군으로 한 칸씩 승진. 그리고 그 조진과 조예가 죽고난 후, 조방 체제가 시작되면서 정밀의 계책에 의해 문제의 '대사마 사마의'가 탄생할 뻔한 건데,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분명 정밀의 계책에 따르면 이 인사는 사마의를 툇방 늙은이로 몰아 넣는 의도를 띠고 있지만, 그런 목적이라면 태부는 몰라도 대사마 겸임은 그 목표에 어긋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다. 물론 어떤 의미로는 대사마/대장군 관계를 태부/태위(전자가 후자보다 명목상 더 높지만 명예직)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이미 종요를 통해 그런 '명예퇴직 용' 자리임이 확인된 태부와는 달리, 대사마는 지금까지 3대에 걸쳐 전성기의 원톱장군들이 앉아있던 자리였다.

더군다나 《진서》에 따르면 대장군인 조상이 사마의를 대사마로 올리려 한 것은 상서의 일이 자신을 거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한대 기준으로는 오히려 대사마의 역할이 바로 상서 통제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다.(위나라에서의 이 역할은 태위로 이어진다.) 혹시 조휴와 조진을 대사마/대장군으로 임명할 때 밸런스를 맞추는 의미에서(조비 시절 조진 쪽이 조금 앞서 있을 땐 조휴에게만 황월을 내렸듯) 대사마 쪽의 권한 일부를 축소하고, 그것이 악용될 소지를 남긴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정밀은 '이름 문제 때문에 대사마 자리는 무산 될 거라고 미리 내다보고', 태부 자리만 추천하면 너무 속보이는 짓이니 명예직인 태부+실권직인 대사마 자리를 추천하는 척 하면서 결과적으로 전자만 남고 후자는 증발해 버리는 시나리오를 쓴 것인지?

특히 본래 조씨 무장이 톱으로서 군권을 장악하는 위나라 통치 시스템 상징이었던 대사마가, 하필 후일 조씨 사직을 뒤엎을 사마의와 관련된 해프닝 때문에 증발해 버린 것은 뭔가 상징적인 느낌까지 들 정도이다.

어쨌거나 어전에 들어올 때 종종걸음하지 않고(입조불추), 임금을 알현할 때 호명하지 않고(알찬불명), 어전에 오를 때 칼을 차고 신발을 신도록 하니(검리상전) 한나라 때 소하의 전례와 같았다. 혼인과 장례 비용은 관에서 대어주었고, 아들 사마사를 산기상시로 삼고 자제(아들) 세 명을 열후로 삼고 네 명을 기도위로 삼았다. 사마의는 굳게 사양하며 자제의 관직은 받지 않았다.[48]
정시 원년(240년) 봄 정월, 동쪽의 왜국이 중역(重譯, 여러 나라 말을 거쳐 거듭 통역함)하며 공물을 바치고 언기(焉耆), 위수(危須)의 여러 나라들(언기, 위수는 서역방면의 나라)과 약수 이남의 선비 명왕(名王)이 모두 사자를 보내 공물을 바쳤다. 천자는 이를 재상의 공으로 돌려 다시 사마의의 봉읍을 늘려주었다.
당초 조예는 궁실 수축을 좋아하고 규격, 양식이 화려해 백성들의 고통이 컸다. 사마의가 요동(遼東)에서 돌아왔을 때 부역하는 자가 만여 명에 이르고 아름답게 꾸며 감상용으로 만든 물건이 천 개에 달했다. 이때에 이르러 이를 모두 파하도록 상주하고 비용을 절약하고 농사에 힘쓰도록 하니 천하가 기뻐하며 의지했다.

10.1. 작피의 역

<제왕기>에 따르면 241년 여름 5월, 의 장군 주연(朱然) 등이 양양군 번성현을 포위하자, 태부 사마의가 군사들을 인솔하여 이들에게 대항했다. <제왕기> 주석 《간보진기》에 따르면 오나라 장군 전종이 작피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의 50,000병력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을 침범했다. 전종이 이미 파주(破走)하고, 번성이 에워싸여 급박해졌다. 이에 사마의는 이렇게 청했다.
조중의 백성 10만이 강의 남쪽에 떨어져 갈팡질팡하여 갈 곳을 모르고 있으며 번성은 공격을 당하여 수개월 동안 포위가 풀리지 않으니 긴급한 일입니다. 청컨대 이를 토벌하고자 합니다.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적들은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는데 함락시키지 못하고 견고한 성의 아래에서 (기세가) 꺾였으니 스스로 파멸당할 형국에 있으므로 응당 좋은 계책으로 방어해야한다고 하였다. 사마의가 말하길
병법에 이르길 장군이 유능한데 수비하라고 하는 것은 군대를 속박하는 것이요 장군이 무능한데 맡기는 것은 군대를 복멸시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지금 국경이 소란스럽고 백성들의 마음에 의혹이 있는데 이는 바로 사직의 커다란 걱정입니다.

<선제기>에 따르면 241년 여름 5월, 오나라 장수 전종이 작피를 침범하고 주연, 손륜이 번성을 포위하고 제갈근, 보즐이 조중을 약탈하자 사마의가 몸소 이를 토벌할 것을 청했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르길, 적이 멀리 와서 번성을 포위했으니 창졸간에 함락시킬 수 없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꺾이어 스스로 무너지는 형세가 될 것이니 의당 장기적인 책략으로 이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사마의가 말했다.
변경 성이 적의 침범을 받았는데 묘당에 편안히 앉아 있구려. 변경이 시끄럽고 동요되면 민심이 혼란해질 것이니 이는 사직의 큰 근심거리요.

<장기전> 주석 《위략》에 따르면 241년, 오나라 장수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여, 성 안에서 지키고 있던 장수 을수 등을 구원하는 것이 매우 급박했다. 하후유는 진군하여 등새에 주둔하였는데, 병력이 적어 감히 나아갈 생각조차 못했지만, 태고가 피리를 불어 따르는 자들을 선도하여 주연으로부터 6~70리 떨어졌다가 돌아왔다. 을수 등으로 하여금 이것을 보게 하려고 몇 번이고 반복했다. 한 달여 만에 태부가 도착하여 함께 진군하자, 주연 등은 달아났다.

《간보진기》에 따르면 6월에 제군을 통솔하여 남정하였고 거가(車駕, 황제)가 진양성의 문밖까지 전송하였다. 사마의는 남방이 무덥고 습하므로 응당 시간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경기병을 시켜 도발하였으나 주연이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마침내 제군으로 하여금 휴식하고 목욕하도록 명령 내리고는 정예를 고르고 선봉에 설 병사들을 모아 호령을 펼치고는 반드시 공략할 기세를 보였다. 주연 등이 이를 듣고는 마침내 밤중에 도망갔다. 추격하여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러 크게 살육하고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선제기>에 따르면 6월, 그리하여 제군(諸軍)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津陽門)을 나와 전송했다. 사마의는 남쪽 지방이 덥고 습기가 많아 오래 끌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경기병으로 싸움을 걸었으나 주연은 감히 출동하지 못했다. 이에 군사들을 쉬게 하고는, 정예를 뽑고 선봉을 모집하며 호령을 분명히 해 반드시 공격하겠다는 태세를 보여주었다. 오군이 밤중에 달아나자 이를 추격해 삼주구(三州口)에 이르렀고 만여 명을 참획하고 선박, 군수물자를 거두고 돌아왔다.천자가 시중상시를 보내 완(宛)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라는데, 《간보진기》와 <선제기>를 빼고 정작 다른 사서들에선 그냥 주연이 한 달동안 포위하다가 사마의가 오자 퇴각, 혹은 달아났다고만 나오고 《자치통감》에서는 6월, 태부 사마의의 군대가 번성을 구하러 왔고 오나라 군대가 이를 듣고 밤중에 몰래 도주했는데 삼주구까지 추격해 많이 노획하고 돌아왔다(六月,太傅懿督諸軍救樊;吳軍聞之,夜遁。追至三州口,大獲而還)로 적었을 뿐이다. 자치통감에서 이렇게 적은 이유는 고증을 위해 참고로 한 여러 자료 들, 특히 정사 삼국지 본전에서 위나라와 오나라간의 특별한 혈전을 통한 대파, 참수 같은 기록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각각 여름 5월 오(吳)의 장군(將) 주연(朱然) 등이 양양군(襄陽) 번성현(樊城縣)을 포위하자, 태부(太傅) 사마선왕(司馬宣王)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이들에게 대항했다. 6월 29일 군사들을 퇴각시켰다. - 위서 삼소제기 제왕부분
거기장군 주연이 번성을 포위하고, 대장군 제갈근이 조중(柤中)을 취했다. 5월, 이 달, 위나라 태부 사마선왕이 번성을 구원했다. 6월, 군대가 돌아왔다. - 오서 오주전

어디에서도 《간보진기》, <선제기> 같은 수많은 살육, 만여급 참수 같은 여파에 대한 얘기는 없이 그냥 서로 군대를 물려서 돌아왔을뿐이다. 오나라 측은 피해 부분을 이미 <오주전> 본전에서 '중랑장 진황(秦晃) 등 10여 명이 전사했다.' 같이 기록했는데도 이 부분에서 인명이 상하는 대패를 당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위략》에서 《간보진기》, <선제기>에서 묘사한 바와 같이 주연이 밤중에 몰래 도주한 정황 자체는 있으므로 주연이 밤중에 몰래 도주했고 삼주구까지 추격해 오나라가 버린 많은 물자를 취했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

또 《간보진기》와 <선제기>는 양 기록을 볼 수 있듯이 사실상 내용이 같은 기록인데 <선제기>는 간보의 《진기》에서 그냥 '많이 죽이고 전리품을 획득했다'는 부분을 확정적으로 '만여 명을 참획하고 군수 물자에, 선박까지 획득했다'고 내용을 부풀렸다. 사실 본전을 살펴도 간보의 《진기》에서 많은 이들을 죽이고 전리품을 얻었다는 기록 자체가 의문스러운 기록인데, 한술 더 떠서 선제기처럼 주연의 군세가 5만인데 만여 급 참획에 선박, 군수물자까지 빼았겼다면 매우 엄청난 피해이다. 그러나 당연히 《삼국지》 《위서》, 《오서》엔 이런 기록이 없고 《위략》에서조차 주연이 도망갔으면 갔지 이런식으로 피해를 입었다고 쓰진 않았으며 자치통감도 만여급 참획은 빼버렸다. 이는 《진서》 <선제기>가 얼마나 기존 기록을 과장하고 왜곡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10.2. 조방 휘하

가을 7월, 봉읍을 늘려 언, 임영을 내리니 예전과 합쳐 모두 4개 현에 식읍이 1만 호가 되었고, 자제 11명을 모두 열후로 삼았다. 사마의의 훈덕이 날로 높아졌으나 더욱 겸손하고 공손하게 처신했다. 향읍의 덕망 있는 원로인 태상 상림(常林)은 그들이 매번 벼슬을 받는 것을 보고는, 늘 자제들을 타이르며 말했다.
가득 찬 것은 도가에서 꺼리는 바다. 사시가 변화하는 것을 내가 무슨 덕으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 겨우 화를 면할 수 있으리!

241년 이전, 조정에서는 당시 밭을 개간하고 곡식을 저장하고, 적국을 멸망시키려는 계책을 세우고 등애를 진과 항의 동쪽인 수춘 지역까지 파견하여 시찰한 후에 제하론을 내어 허창 부근에 있는 여러 논농사를 줄이고 하천을 모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면서 회하 북쪽에 사는 사람 2만 명과, 회화의 남쪽에 사는 사람 3만 명을 열에 둘씩 쉬게 하고, 늘 4만 명에게는 농사를 지으며 수비를 하게 하며[49] 더욱이 황하의 운하를 개척하며 관개를 늘리고 조운을 통하게 하자는 등애의 의견을 사마의는 훌륭하게 여겼다. 정시 2년(241년) 이 해에 비로소 조운할 운하를 넓게 팠는데 동남 지역에 사건이 있어서 크게 군사들을 일으키게 되면 배를 타고 내려가서 장강과 회하에 도달하게 되었고 물자와 먹을것에 여유가 생겼으며 수해를 입지도 않았다. 이것은 등애의 주장을 사마의가 받아들인 것으로 정사 삼국지에 등애의 주청-241년 운하 완공 기록이 있어 자치통감에서도 기록하였다. 참고로 진서 선제기에서는 등애가 주청했다는 이 기록을 빼버렸을 뿐더러 등애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242년 봄, 천자가 돌아간 아버지 경조윤(사마방)을 죽은 뒤에 봉해 무양성후의 시호를 내렸다.

3월, 주청하여 광조거(廣漕渠)를 뚫고 하수의 물을 끌어 변수(汴水, 황하의 지류)로 유입시키고 동남쪽 저수지들에 물을 대니 비로소 회수 이북에서 크게 농사지었다.

당초 오나라가 장수 제갈각을 보내 양주 여강군 환현에 주둔케 하여 변경 지역에 이에 괴로움을 받으니 사마의가 몸소 제갈각을 공격하고자 했다. 의논하는 자들 여럿이 말했다.
적이 견고한 성에 의거해 곡식을 쌓아놓고 위나라 군대를 유인하고자 하는 것이며 지금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공격해왔으니 그들의 구원군이 필시 당도할 것이라 진퇴가 쉽지 않고 유리한 점을 볼 수 없다.
사마의가 말했다.
적의 장점은 물에서 싸우는 것이니 그들의 성을 공격해야 하오. 만약 그들이 자신의 장점(수전)을 쓴다면 성을 버리고 달아날 것이니 승리하게 되는 것이오. 만약 성을 고수한다면 겨울이라 호수가 얕아 배가 다닐 수 없어 필시 물을 버리고 서로 구원할 것이니 이는 그들의 단점(육전)을 쓰는 것이 되어 또한 우리가 유리하오.

243년 가을 9월, 사마의가 제군을 이끌고 제갈각을 공격하니 황제의 수레가 진양문을 나와 전송했다. 12월, 군이 여강군 서현에 당도하자 제갈각은 비축해둔 군량을 불태우고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50] 지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진서』 「천문지」에 따르면 사마의가 대군을 보내 제갈각을 공격하자 그 성을 버리고 급히 달아났다고 하며, 이를 인용한 「개원점경」에 따르면 사마의가 제갈각이 주둔해 지키고 있어서 대군을 보내 토벌하자 그 성을 버리고 급히 달아났는데,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만여 명에 달했다고 표를 올렸다.

사마의는 적을 멸하는 요체는 군량을 비축하는 데 있다고 여기니 이에 군영을 지킴을 크게 일으키고 회양, 백척의 두 수로를 널리 열고 또한 영수의 남북에 있는 저수지들을 수리하여 밭에 물을 댐이 만 여 경에 이르렀다. 이 이후로 회북에 쌀 창고가 도처에 많게 되었고 수춘에서 수도에 이르기까지 농관, 둔전병이 서로 잇달았다.

그러나 《자치통감》에서는 《진서》 <선제기>에서 기록한 242년에 있었던 광조거 수로 개척과 243년에 있었던 회양거, 백척거 수로 개척을 언급하지 않는다. 자치통감은 황하에서 수춘까지 운하의 개척이 《정사 삼국지》<등애전>의 기록에 따라 241년에 있었다고 본 듯 하다. 사실 회양거, 백척거의 경우 사마의가 243년 12월에 서현에 도착했고 다음해 정월에 수도에 도착했으므로 선제기처럼 그 사이에 수로를 개척할 시간적 여유도 없다. 광조거도 사실 등애의 말대로 한다면 241년 운하가 완성되었을때 '하천의 물을 모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면서 회수 이북에서 수만명이 크게 농사짓고 있던 만큼' 광조거를 뚫었다고 '비로소'라는 표현을 쓸 필요가 없다.

진서》 <식화지>는 '정시 4년, 그러니까 243년에 사마의가 제갈각을 물리치고 등애를 수춘으로 파견했는데 등애가 땅은 좋은데 수원이 없는 것에 착안해 제하론을 짓자 듣고 좋다고 했고 회양, 백척의 수로를 열고(중략) 밭에 물 대고 크게 군사들을 일으키게 되면 배를 타고 내려가서 장강과 회하에 도달하게 되었고 물자와 먹을것에 여유가 생겼으며 수해를 입지도 않았다.'라고 회양, 백척거와 등애의 대운하 기록을 합쳤는데 회양, 백척거가 선제기에서는 1만경에 물을 댔다고 한데 비해 무려 2만경이나 물을 대었다고 뻥튀기 한데다가 회양, 백척거의 효용성에 대해 등애의 대운하 기록을 그대로 차용해왔다. 회양, 백척거가 실은 등애의 운하라는 걸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걸 수도 있겠고 등애의 공적을 빼앗아 사마의의 공적으로 넣으려는 시도일 수도 있겠다.

어쨌거나 식화지건 선제기건 간에 정사 삼국지 등애전에 수춘에 파견 나갔다가 돌아와 제하론을 등애가 제시한 시간대인 정시 2년(241년) 이전에도 안 맞고 자치통감도 운하에 대해선 등애전의 효용성에 대한 기록과 개통 시간대를 따른다. 따라서 광조, 회양, 백척 등의 수로는 241년에 대운하를 팠을 때 건설했거나 대운하의 일부였다 보는 게 타당하다. 이 세 수로를 팠을때 나타난 효과도 등애 대운하의 효과로 보면 되겠고. 어쨌거나 등애가 현장 간부라면 사마의는 이를 결제하는 높으신 분 포지션이라 사마의도 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244년 정월, 사마의가 회남으로부터 수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사자에게 절(節)을 들여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했다. 상서 등양, 이승 등은 조상이 공적과 명예를 세우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촉을 정벌하도록 권했다. 사마의가 이를 반대했으나 막을 수 없었는데 조상은 과연 공을 세우지 못하고 돌아왔다.

245년 가을 8월, 조상이 중루중견영을 없애고 그 군사들을 자신의 동생인 중령군 조희(曹羲)에게 속하게 했다. 사마의는 전대 황제 때부터의 오랜 제도라 하여 이를 제지했으나 막지 못했다.

겨울 12월, 천자가 사마의에게 조서를 내려 조회할 때 수레를 타고 어전에 오르도록 했다.

10.3. 2차 조중 정벌

246년 봄 정월, 오나라가 조중을 침범하자 이민족과 중국인 만여 가가 침범을 피해 북쪽으로 면수를 건넜다. 사마의는 면수 이남이 적과 가까우므로 만약 백성들을 되돌려 보낸다면 필시 침범받을 것이므로 의당 임시로 백성을 면수 이북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했다. 조상이 말했다.
지금 면수 이남을 잘 닦아 지키지 못하고 백성을 머물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
사마의가 말했다.
만약 적이 2만 군사로 면수를 끊고서 3만 군사로 면수 이남의 제군과 서로 대치한 채 1만 군사로 조중에서 마음대로 날뛴다면 장차 어찌 구할 수 있겠소?
조상이 이에 따르지 않고 끝내 남쪽으로 돌려보냈다. 과연 적이 조중을 습격해 격파하니 희생당한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이 해에 오나라 장수 주연이 조중에 들어와 수 천명을 참하고 노획하므로 조중의 백성과 관리들 만 여가가 면수를 건넜다. 사마선왕이 조상에게 말하길 "만약 곧바로 돌아오도록 한다면 반드시 다시 도적들을 불러올 것이니 응당 당분간 머무르도록 해야 하오."조상이 말하길 "지금 면수의 남쪽을 지키지 아니하고 백성들을 면수의 북쪽에 머물러두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오."선왕이 말하길 "그렇지 않소. 무릇 사물은 안전한 곳에 두면 안전한 것이고 위태로운 곳에 두면 위태로운 법이오. 그러므로 병서에서 이르길 '성패는 형(形)에 있고 안위는 세(勢)에 있으니 형세는 무리를 이끄는 요체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였소. 만약 적 2만명이 면수를 끊고 3만명이 면수 이남의 군대와 대치하며 만명이 육로로 조중을 습격한다면 그대께서는 장차 어찌 구하려고 하시오?"하였으나 조상은 듣지 않고 끝내 (면수 이북으로 간 백성들로 하여금)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주연이 이후에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한진춘추

《한진춘추》와 《진서》 <선제기>의 내용은 대화까지나 조상이 격파당했다는 내용까지는 대략 비슷하나[51], 여기서 또 조상이 보낸 백성들이 격파당해서 희생된 자가 만여명을 헤아렸다고 언급하는데 당연히 정사 삼국지와 그 주석인 한진춘추와는 전혀 검증이 안된다. <오주전>에서는 천여명을 참획했다고 나올 뿐이고 《한진춘추》에서도 단순히 격파했다고 보고 있다, 재차 습격했을 땐 주연이 직접 참획했다기보단 그냥 그곳에 있던 인구가 뿔뿔이 흩어져버리고 오나라엔 별로 획도 안 돼서 전공으로 쓰기가 모호했다거나 <선제기>가 조상을 깎아 내리기 위해 과장한 서술로 보인다.

10.4. 고평릉 사변

247년 4월, 부인 장씨(장춘화)가 죽었다.

조상이 하안, 등양, 정밀의 모책을 써서 태후(명원황후 곽씨)를 영녕궁으로 옮기고 조정을 전횡하니 형제가 함께 금병(친위군)을 관장하고 가까운 무리를 많이 심어놓고 제도를 여러 차례 고쳤다. 사마의가 이를 제지할 수 없었고 이에 조상과의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었다.

5월, 사마의는 병들었다 칭하고 정사에 관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이에 관해 노래했다.
하(하안), 등(등양), 정(정밀)이 도읍의 성을 어지럽히는구나.
248년 봄 3월, 황문 장당(張當)이 사사로이 비빈과 궁녀들의 거처의 재인(才人) 석영(石英) 등 11명을 뽑아 조상에게 바쳐 가녀로 삼게 했다. 조상과 하안은 사마의의 병이 위중하다 여겨 마침내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품으니 장당과 더불어 은밀히 공모해 사직에 해를 끼치려 도모하여 그 기일이 멀지 않았다. 사마의 또한 이를 은밀히 방비하니 조상의 무리들도 사마의를 자못 의심하게 되었다.

정시 9년(248년) 겨울, 이승이 서울을 떠나 형주자사로 부임하는 길에 사마의를 방문해 동태를 살폈다. 사마의가 병이 깊은 것처럼 속이니 2명의 계집종에게 시중들게 하고 옷을 잡고 있었으나 옷자락이 땅에 끌렸다. 입을 가리키며 목이 마르다고 하니 계집종이 죽을 올렸는데 사마의는 죽그릇을 잡지 못했고 죽이 모두 흘러 가슴자락을 적셨다.
이승은 이를 사실로 여기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지금 주상이 아직 어리셔서 천하가 명공을 믿고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명공의 옛 풍질(중풍)이 재발했다고 하더니 존체가 이 지경일줄 어찌 짐작했겠습니까!
사마의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말했다.
늙고 병들어 죽을 날이 코앞에 닥쳤소. 그대가 병주에 가게 되었구려. 병주는 흉노와 가까우니 잘 방비하도록 하시오. 그대를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으니 아들 사마사, 사마소 형제를 부탁하오.
이승이 말했다.
송구하게도 본주(형주)로 돌아가게 된 것이지 병주가 아닙니다.
그러자 사마의가 이를 혼동하며 말했다.
군이 병주에 도착하거든 노력해서 자신의 몸을 잘 지키시오.
이승이 다시 말했다.
송구하게도 형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사마의가 말했다.
이 사마의가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해 군의 말을 잘못 알아들었구려. 이제 본주 자사로 돌아가면 성덕장렬(盛德壯烈)히 공훈을 세우도록 하시오. 이제 군과 헤어지면 내 기력이 쇠해 뒤에 다시 만나기는 힘들 것이니, 내 힘으로는 주인의 예도 다하지 못하니 죽을 날이 가까웠구려. 사마사, 사마소 형제는 군과 우의로 맺어져 있으니 서로 저버리지 마시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구구한 바램이오.
이승 또한 크게 탄식하며 대답했다,
마땅히 가르침을 받들고, 황제의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이승이 작별인사하고 나와 조상과 만났다. 이승이 말했다.
태부의 말씀이 혼란스럽고 입으로는 그릇의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남쪽을 가리키면 북쪽을 보는 식입니다. 또 내가 병주로 간다고 말하기에 내가 형주로 가는 것이지 병주가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천천히 또박또박 말하니 그제야 제가 형주로 간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또한 주인의 예도 행하지 못해 전송할 때 방에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다시 조상등을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태부의 병환이 다시 회복되기 어려운 지경이니 애처로운 일입니다.
이 때문에 조상 등은 다시 사마의를 방비하지 않았다.

249년 봄 정월 6일, 천자가 고평릉을 참배하자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갔다. 당시 조상의 형제가 예전에 여러 차례 함께 성 밖을 나가자 환범이 말했다, "만기(萬機, 천하의 정치,정무)를 총괄하는 사람과 금병(禁兵)을 통솔하는 사람이 함께 나가서는 안됩니다. 만약 성문을 폐쇄해버리는 이가 있다면 어느 누가 다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겠습니까?" 조상이 말했다, "누가 감히 그럴 수 있겠는가!" 이로부터 다시는 함께 나가지 않았으나 이때에 이르러 모두 함께 성밖을 나갔다. 이날 금성이 달을 범했다. 사마의는 그동안 몰래 사마사가 기르고 있던 병마를 이끌고 먼저 무기고를 점거하고 도성을 나와 낙수(洛水) 부교(浮橋)에 주둔했다. 이에 사마의는 영녕궁의 태후(명원황후 곽씨)에게 상주해 조상 형제를 파면하도록 했다.
신이 예전에 요동에서 돌아왔을 때 선제(先帝, 위 명제 조예)께서 폐하와 진왕(秦王, 조순曹詢), 그리고 신을 어상(禦床)으로 오르게 해 제 팔을 잡고 말씀하시길 깊이 뒷일을 염려한다 하셨습니다. 이에 신은 '2조(조조와 조비)께서 또한 신에게 뒷일을 맡긴 것은 폐하께서도 보신 바이니 근심하실 일이 아닙니다. 만의 하나 뜻밖의 일이 생긴다면 신은 마땅히 죽음으로 명을 받들겠습니다.'[52]고 말씀드렸었고, 이는 황문령 동기(董箕) 등과 병을 간호하던 재인(才人)들도 모두 들어 알고 있는 일입니다.

지금 대장군 조상이 그 고명(顧命)을 저버리고 국법을 어지럽히니, 안으로는 참람되게도 군주의 의례를 모방하고 밖으로는 권력을 농단하고 있습니다. 여러 영(營)을 파괴하고 금병(禁兵, 친위병)들을 모두 장악하고, 백관의 요직에 모두 자기와 친한 자들만 앉혔습니다. 숙위하던 오래된 자들은 모두 쫓아내고 새로운 인물로 채워 사사로운 계책을 꾸미니, 그들 일당의 뿌리가 더욱 깊어져 그 방자함이 날로 더해갑니다. 또한 황문 장당(張當)을 도감(都監)으로 임명하여 서로 교류하며 지존(至尊)의 동태를 살피고 신기(神器, 정권, 제위)를 엿보며 2궁(황궁과 태후궁)을 이간시켜 골육의 정을 다치게 했습니다.

천하가 흉흉하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는데, 지금 폐하가 남에 기대어 보위에 앉아서 어찌 오래 안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선제께서 폐하와 신을 어상에 함께 오르도록 한 본의와 어긋나는 일입니다. 비록 신이 늙어서 쓸모없으나 어찌 감히 지난날의 맹세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옛날 조고(趙高)가 득세하자 이 때문에 진(秦)나라가 망했고 여씨와 곽씨(呂霍)를 일찍 처단했기에 한나라는 오래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는 폐하께서 본보기로 삼을 만한 일이니 지금이 (이전 맹세에 따라)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태위 장제, 상서령 사마부 등 신하들 모두, 조상이 무군지심(無君之心)을 품고 있어 그 형제들이 친위군을 지휘해 숙위(宿衛)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황태후께 상주했습니다. 이에 태후께서 명하시길 상주한대로 시행하라 하셨습니다. 이에 신이 담당관원과 황문령(黃門令)에 명하여 조상, 조희, 조훈의 관직과 병권을 파하고 각자 본래 관직인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가라 명하고, 만일 거가(車駕)를 억류하면 군법으로 처리하라 했습니다. 신이 병에 걸린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낙수 부교로 나아간 것은 비상사태를 살펴 대비코자 함입니다.

당시 사마사는 중호군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사마문에 주둔했다. 사마의는 궐 아래에서 포진하고 조상의 문을 지나려 했다. 조상의 장하독 엄세(嚴世)가 문루에 올라 노를 당겨 사마의를 쏘려 하니 손겸(孫謙)이 이를 제지하며 말했다.
사태가 어떠한지 아직 알 수 없소.
화살을 시위에 세 번 얹었으나 세 번을 말리며 매번 그의 팔꿈치를 당기니 발사하지 못했다.

대사농 환범이 성문을 나가 조상에게로 나아가자 사마의가 말했다.
꾀주머니가 갔구나!
장제가 말했다.
조상은 환범과 더불어 안으로 소원하고 지혜가 미치지 못하며 굼뜬 말은 작은 콩에 연연하는 법이니 필시 그를 제대로 쓰진 못할 것입니다.[53]
그리고는 사도 고유(高柔)에게 부절을 내려 대장군의 사무를 대행하여 조상의 진영을 거느리게 하며 말했다.
그대가 바로 주발이오.
태복 왕관에게 명해 중령군의 직을 대행하며 조희의 진영을 관장하도록 했다.

조상은 거가를 이수(伊水)의 남쪽에 머물게 했는데, 나무를 베어 녹각을 세우고 둔갑병(屯甲兵) 수 천명을 뽑아 호위하게 했다. 사마의가 동생인 사마부에게 말하길, 폐하가 밖에서 노숙할 수 없다며 장막과 태관(太官, 음식을 담당하는 관직), 식기를 재촉해 보내 행재소(行在所, 궁성밖에 임금이 임시는 머무는 곳)로 가게 했다.

환범이 조상을 설득하기를, 거가를 모시고 허창으로 가서 외병(外兵)을 부르자고 했다. 조상의 형제가 머뭇거리며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환범이 다시 조상의 동생인 조희에게 말했다,
지금에 이르러 경의 가문이 다시 빈천한 자로 돌아가려 한들 그럴 수 있겠소? 게다가 필부조차 인질 한 명을 잡아 살아나고자 하는 법인데, 지금 경은 천자를 끼고 있으니 천하에 영을 내리면 누가 감히 응하지 않겠소?
그러나 조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마의는 시중 허윤과 상서 진태를 보냈고 이들은 조상 스스로 한시바삐 돌아가 죄를 받으라고 설득했다.[54] 또한 조상이 신임하는 전중교위 윤대목을 보내 조상에게 말하길, 단지 관직에서 파면할 뿐이라 하고 이를 낙수(洛水)에 맹세했다. 조상이 이를 믿고 군사를 해산했다. 이에 조상은 허윤과 진태를 사마의에게 보내 돌아가 죄를 받고 죽음을 청하도록 하고 사마의의 상주문을 천자에게 알렸다.
군사를 해산하고 조상이 말했다.
나는 별로 잃는 거 없이 부가옹(富家翁, 돈 많은 늙은이)으로 살 수 있다.
환범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소리내어 울며 말했다.
조자단은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당신이 낳은 자식들은 개새끼나 송아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쩌다 오늘날 당신의 자식들에게 연좌되어 일족이 멸망하게 된 겁니까!
마침내 조상 형제는 파면당해 후(侯)로서 사저로 돌아갔다.

조상의 형제가 집으로 돌아가자, 낙양현에 조칙을 내려 백성 8백인을 뽑고 위부(尉部)에 명해 조상의 자택을 사방으로 포위했다. 각 모서리에는 높은 망루를 세우고 그 위에서 조상 형제의 거동을 감시했다. 조상이 궁지에 몰려 고민하다 활을 지니고 후원으로 가자, 망루 위의 사람이 '전 대장군이 동남쪽으로 간다!'고 소리쳤다. 조상이 청사로 돌아와 형제와 함께 의논했는데 사마의의 의중을 어떤지 알지 못하여 사마의에게 서신을 보냈다.
비천한 저 조상은 두렵고 두렵습니다. 무상히 화를 초래했으니 마땅히 죽어야 할 목숨입니다. 이전에 집안사람, 하인을 보내 양식을 가져오게 했으나 지금까지 도착하지 않아 여러 날을 굶어 마른 곡식으로 아침저녁 끼니를 잇고 있습니다.
사마의가 서신을 받아보고 크게 놀라며 즉시 답장을 보냈다.
양식이 부족하단 걸 미처 알지 못했소. 지금 쌀 1백 곡과 육포, 소금, 메주, 대두를 보내오.
그리고 이 물건들을 보냈다. 조상 형제는 즉시 기뻐하며 죽임을 당하지는 않으리라 여겼다.[55]
당초 황문 장당이 사사로이 재인(才人) 장(張)씨, 하(何)씨 등을 뽑아 조상에게 바쳤었는데 (조정에서는) 부정한 일이 있다 의심하여 장당을 구금하여 치죄했다. 장당이 진술하기를, 조상이 하안 등과 함께 은밀히 반역을 꾸며 이전에 훈련시켜 놓은 군사로 오는 3월 중에 거사할 것이라 했다. 이에 하안 등을 잡아들여 하옥했다. 그런데 위서 제왕기에는 1월 10일, 담당관리가 상주하여 황문(黃門)의 장당(張當)을 체포하여 정위에게 넘겨주고, 그의 진술에 따라 조사해 보니 조상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한 흔적이 없었다고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상 일파가 조상을 통해 음모했다고 한 것이다. 즉, 사마의는 애당초 이 반란을 기획하여 실행할 때부터 조상을 살려 둘 마음이 없었다. 불과 사나흘 전에 낙수에 걸고 파면으로만 그치겠다고 맹세한 것도 장제와 조상에게 한 거짓말이었다.
공경(公卿) 조신(朝臣)들이 의논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내렸다.
춘추의 뜻으로 볼 때, 임금의 친척은 장수가 되어선 안되고 장수가 되려고 하면 반드시 죽인다고 했다. 조상은 살붙이로서 대대로 특별한 총애를 입었고 선제(先帝)께서는 조상의 손의 잡고 유조를 남기며 천하의 일을 부탁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더러운 마음을 품어 고명을 저버리고 하안, 정밀, 장당 등과 함께 신기(神器)를 도모했도다. 환범의 일당도 같은 죄인으로 모두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자들이다.
이에 조상, 조희, 조훈, 하안, 등양, 정밀, 필궤, 이승, 환범, 장당 등을 잡아들여 모두 주살하고 3족을 멸했다.

장제가 말했다.
조상의 부친인 조진의 공훈을 볼 때 제사를 잇지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들어주지 않았다.

장제는 조진의 훈공으로 볼 때 그 제사가 끊어지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며 조진의 족손(族孫) 조희(曹熙)를 후사로 삼게 했다. 또한 장제는 자신의 말이 신의를 잃은 것을 스스로 질책하다 병이 들어 죽었다. 이는 조상에게 서신을 보내 파면하는데 그친다고 낙수에 맹세했으나(또는 사마의의 맹세를 전했으나) 이를 어긴 일을 가리킨다.

당초 조상의 사마 노지(魯芝), 주부 양종(楊綜)이 궐문의 군사를 베고 조상에게로 달아났었다. 조상이 장차 죄를 받으려 하자 노지, 양종이 울며 간언했다.
공이 대임을 맡아 천자를 끼고 천위에 의지하는데 누가 감히 복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를 버리고 처형장으로 나아가려 하시니 어찌 통곡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담당 관원이 주청하여 노지, 양종을 체포해 죄를 결정하라 하자 사마의가 이들을 용서하며 말했다.
이는 주인을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권하기 위함이오.
1월, 천자가 사마의를 승상으로 삼고 영천군의 번창, 언릉, 신급, 부성을 봉읍으로 더해 예전과 합쳐 모두 8개 현에 2만 호가 되었고, 상주할 때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게 했다. 승상 직은 굳게 사양했다. 또 구석의 예를 더하고 조회할 때 절하지 않게 했다. 구석 역시 굳게 사양했다.[56]

공연의 《한위춘추》에 따르면 조서를 내려 태상 왕숙(王肅)으로 하여금 사마의를 승상으로 책봉하게 하고 봉호를 1만호 늘리며 군신들이 주의를 올릴 때 이름을 쓰지 못하며 한나라 곽광의 고사대로 하도록 하였다. 사마의가 상서하여 사양하며 이르길
신이 친히 고명을 받으며 걱정이 깊고 책임이 막중하였으나 천위에 기대어 간사한 무리들을 없애고 속죄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으니 공로는 족히 논할 것이 못됩니다. 또한 3공의 관직은 성왕의 제도이며 전례에 적혀있는 것입니다. 승상에 이르러서는 진시황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한나라가 그대로 이어받아 바꾸지 않았습니다. 지금 3공의 관제가 모두 완비됐는데 이유 없이 다시금 총신으로 (승상을 삼는다면) 앞선 제도를 어긴 것이고 성명한 경전을 바꿔 진한의 길을 답습하는 것인데 비록 다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신이 응당 바로잡아야 하거늘 하물며 신 자신이 이에 당하여 굳게 다투지 않는다면 사방의 의논하는 자들이 장차 신을 무엇이라 하겠습니까!
상서하길 10여 번이 되자 조서를 내려 마침내 허락하고 다시 구석의 예를 가하였다. 사마의는 다시 말하길
태조께서 대공대덕이 있으시어 한씨가 높고 무겁게 여긴 연고로 구석을 내린 것입니다. 이는 곧 조대가 바뀔 때의 비정상적인 일이니 후대의 군신이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고는 또한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250년 봄 정월, 천자가 사마의에게 명해 낙양에 종묘를 세우도록 하고, 좌우 장사를 두고, 관속을 늘리고, 귀족의 측근이나 시종은 10명을 채우고, 매년 관청 등에서 업무를 돕는 하급 관리 중에서 천거해 어사, 수재 각기 1명씩을 임명하고, 관기 1백 명과 고취악대 14명을 늘리고, 사마의의 아들 사마융을 평락정후에, 사마륜을 안락정후에 봉했다.

사마의가 오랜 병으로 황제를 배알하지 못하자 매번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천자가 친히 사마의의 사저로 행차해 자문을 구했다.

위 내용을 정리하자면, 조상 일가의 경계를 파악하여 일부러 아픈 척을 해서 조상 일가를 방심하게 한 뒤 황제가 고평릉을 참배하러 가자 조상 형제가 모두 따라가버려 성이 비워진 사이 꾀병을 부려 그들을 속였던 사마의가 도성을 점거하여 명원황후를 압박해 조상 일가를 실각시킨다. 이때 조상에게 권력만 넘겨주면 신변을 보장해주겠다 속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상의 일가는 물론 측근들의 일가마저 모두 몰살시켜버리고,[57]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조상 일파는 사마의를 견제하면서 사마의의 아들들(이 중 사마사는 쿠데타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따라서 조상에게는 목숨을 걸고 정쟁을 벌인다는 인식이 부족했다.

사실 부족했다기보다 그런 생각 자체를 전혀 하지 않은 것 같다. 조상 일파는 사마의를 견제하기는 했지만 단순히 사마의 개인에게서 실권을 거두어가는 정도의 행동만을 했을 뿐, 형식상으로는 오히려 태부로 승진시키는 등 딱히 사마의를 핍박하거나 사마의 가족들을 정계에서 몰아내려는 식의 시도는 하지 않았다.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을 일으켰을 때도 조상이 순순히 권력을 넘긴 것은 사마의와 자신이 그렇게 대단한 대립 관계는 아니므로 사마의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핍박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10.5. 왕릉의 난

연주자사 영호우, 태위 왕릉이 사마의를 배반하고 초왕 조표를 옹립할 계책을 꾸몄다.
251년 4월, 오나라 병사들이 도수(涂水)를 막았다. 이 때문에 왕릉은 사건을 일으키려고 각 군대에게 비상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적군 토벌을 구하는 상주문을 올렸는데, 조서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답장이었다. 왕릉의 음모는 더욱 깊이 진행되었다. 그는 장군 양홍을 파견하여 폐립하는 일을 연주자사 황화에게 알리도록 했다. 황화와 장홍은 연명하여 일을 사마의에게 보고했다. 사마의는 중군을 이끌고 수로를 이용하여 왕릉을 토벌하면서, 우선 왕릉의 죄를 사면해준다는 명령을 내렸으며, 또 상서 왕광을 데리고 동쪽으로 가서 그로 하여금 편지를 써서 왕릉을 깨우치게 하였다.

사마의는 대군을 이끌고 몰래 백척(百尺)까지 나아가 왕릉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왕릉은 스스로 대세가 이미 끝났음을 알았으므로 배를 타고 혼자 나와서 사마선왕을 맞이하고, 하급관원 왕욱을 보내 사죄하고, 인수와 절월을 보냈다. 군대가 구두에 도착하자, 왕릉은 스스로를 결박하고 물가에서 죄값을 받으려고 기다렸다. 사마의는 조서를 받고 주부를 보내 결박을 풀어주었다, 왕릉은 이미 사면을 받았고, 더욱이 옛날에 잘 지냈던 것을 믿고 다시 의심을 품지 않고 작은 배를 타고 지름길로 사마의에게 가려고 하였다. 사마의는 사람들을 시켜서 이를 막고 배를 회하 가운데 머무르게 하였는데, 서로의 거리가 10여 장이었다. 왕릉은 자기를 바깥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이에 멀리있는 사마의에게 말하였다.
경이 곧바로 절간(折簡, 반쪽자리 죽간)을 가지고 나를 부른다고 하여도 내가 마땅히 감히 이르지 않겠는가? 군대까지 끌고 와야 했는가?"
사마의가 말하였다.
경은 편지를 보낸다고 올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오.
왕릉이 말하였다.
경은 나에게 빚을 진 것이오.
사마의는 말하였다.
나는 차라리 경에게 빚을 지지 국가에 빚을 지지는 않겠소.

마침내 사람을 시켜 그를 서쪽(낙양)으로 호송하게 했다. 왕릉은 스스로 중죄인임을 알았기 때문에 시험삼아 관에 박는 못을 요청함으로써 태부의 의중을 떠보았는데 태부가 못을 그에게 주었다. 왕릉은 예주 여남군 항현에 이르렀을 때 밤에 속관들을 불러 그들과 결별하면서
향년 80에 신명이 모두 스러지게 되었으니 천명인가 보다!

말하고는 마침내 짐독을 먹고 죽었다. 그의 남은 일당을 체포해 모두 삼족을 멸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사마의는 왕릉의 반란이 미수에 그치자 수춘에서 대량으로 사람을 죽였다. 6월, 아울러 조표를 죽였다. 위나라의 여러 왕공들을 모두 붙잡아 업에 두고는, 담당 관리에게 명해 이들을 감찰하여 서로 왕래하지 못하게 했다.

천자가 시중 위탄을 보내 부절을 지니고 오지에서 군의 노고를 위로하게 했다. 사마의가 감성으로부터 수도에 도착하자 천자가 또 겸대홍려, 태복 유의를 보내 절을 주면서, 사마의에게 책명을 내려 상국으로 임명하고 안평군공에 봉하고 사마의의 손자와 형의 아들 각기 1명을 열후로 삼았으며, 그 앞뒤로 식읍이 5만 호, 후로 봉해진 자가 19명에 달했다. 상국, 안평군공은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8월, 사마의가 병으로 앓아누워 가규[58], 왕릉에게 해를 입는 꿈을 꾸니 이를 매우 꺼림칙하게 여겼다.[59]

당초 미리 장례에 관한 유언을 지어 수양산에 흙을 파서 매장하고 분묘를 만들거나 나무를 심지 말라고 했다. 유언 3편을 지었는데, 평상복으로 염하고 부장품을 두지 말고 뒤에 죽는 자를 자신의 묘에 합장하지 말라고 했다.

가을 8월 5일, 수도에서 죽으니 이때 나이 73세였다.

11. 사후

천자가 소복을 입고 조문하고 장사 지내는 일의 예법은 한나라 곽광의 전례에 의거하고 상국, 군공을 추증했다. 동생인 사마부가 표를 올려 고인의 뜻을 진술하며 군공과 상여를 사양했다.

9월 17일, 하음에 매장하고 시호를 내려 무양문후(舞陽文侯)라 하고 다시 무양선문후(舞陽宣文侯)로 고쳤다.[60]

아들 사마소가 진왕에 오르고 나서 그는 아버지 사마의를 선왕(宣王)으로 추존하였다. 손자 사마염은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원제에게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서진을 건국한 후에 그는 묘호와 존호를 올려 할아버지 사마의를 고조 선황제로 추존하고 무덤을 고원이라 하였다.

훗날 동진명제왕도가 모시고 배석했다. 진 명제가 전대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연고를 묻자 왕도가 사마의가 창업을 시작한 일을 진술했다.진 명제가 얼굴을 평상에 묻으며 말했다,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동진)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겠는가!

진서》 선제기는 '그의 의심많고 잔인한 행적을 보면 대저 낭고(狼顧)라는 말에 부합되는 점이 있는 것 같다.'라고 평가 했다.

[1] 원소, 원술 이복형제가 잘 알려져 있다. 원술이 그렇게 기름진 수춘 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일대에 기반이 있던 명가 원씨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었다.[2] 양표, 양수 부자가 잘 알려져 있다.[3] 당시 척인 23.7cm로 계산하면 197cm가 나온다.[4] 현재 기준으로 계산하면 115cm 정도이다.[5] 다만 사마팔달 중 사마랑, 사마의, 사마부 세 명을 제외한 5명의 동생은 역사책에 족적을 남길 정도는 아니어서 역임한 벼슬만이 기록되어있다.[6] 친구라고 하기엔 사마의와 호소는 17살 차이가 난다. 사실상 사제 관계라고 봐야 한다.[7] 《위서》 <상림전>에 따르면 하내태수 왕광이 유생을 파견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감찰하게 하고 잘못이 밝혀지면 돈, 곡식으로 받았으며 조금이라도 늦으면 종족을 몰살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한 <사마랑전>에 의하면 반동탁 연합군으로 병력 수십만이 형양과 하내로 모여들어, 여러 장군들의 약탈로 남아있던 하내 백성중 절반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8] 여포와 조조가 복양으로 대치할 때라 하니 194~195년이고 사마의 만 15세~16세[9] 여포조조가 복양에서 대치할 때 온현으로 돌아갔다는 <사마랑전>에 따르면 거의 피난 시절 끝나기 직전에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양준은 밀현의 산간으로 피난갔으며(양준전), 사마의는 사마랑을 따라 여양현으로 피난갔다는 서술이 있다.(사마랑전) 현재의 쉰현. 중국 허난성 허비시와 싱양시 중국 허난성 정저우시이다. 약 162km 거리가 되는데 그때 쯤 사마의와 양준이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10] 당시 장춘화는 겨우 13세였다.[11] 사마씨 일족과 조홍의 악연은 다른 기록에도 있다. 사마의의 친척 형인 사마지 열전에 따르면 사마지가 조홍의 유모와 임분 공주를 옥에 가둔적이 있다.[12] 예를 들어 순욱을 대신하여 옆에서 신뢰할 인재를 추천받을 때 희지재 곽가 등이 순욱의 입을 통해 말이 나오는데 어감상 이미 등용된 상태다.[13] 찬바람이나 습기가 몸에 침투하여 생기는 병으로 통증이나 마비상태의 증상이 있다.[14] 이 '풍비' 핑계는 그의 말년에까지 잘 써먹는데 고평릉 사변 전 사마의가 이승을 칭병하여 속이자 이승이 '명공의 옛 질병이 재발하셨다니 참으로 이럴줄은 몰랐습니다.' 하는 부분이 나온다.[15] 이리가 고개를 돌린 모습으로 경계심이 큼을 비유하는 말.[16] 말 마(馬)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3부자로 해석되고 구유 조(槽)는 성씨 조(曹)를 의미한다.[17] 芻牧이란 부분인데 '가축을 돌보았다'는 말이 단순히 나라에서 쓰는 말 등을 '관리'했다는 얘기가 아니라 이 표현을 보면 일개 마부마냥 직접 꼴 베고 다닌 모양이다. 사마의의 출신과 직책,그리고 권력의 중추인 조씨와 그의 거리 등을 생각하면 확실히 파격적인 행동.[18] 광무제의 일화에 나온 득롱망촉의 일화다.[19] 정확히 어떤 사건을 말하는지는 알 수 없는데 그냥 사마의가 둔전 정책안을 낼 때에 열심히 참가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20]진서》<선제기>는 장제의 존재를 지우고 사마의 혼자 진언한것으로 나온다. 엄연히 진서보다 먼저 나온 《정사 삼국지》《위서》<장제전>에 따르면 조조에게 사마의와 같이 진언했다고 하기 때문에 이는 장제의 존재를 지우고 사마의의 공을 돋보이게 하려는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21] 조조가 으로 돌아오던 중에 죽는 바람에 당시 위나라에서는 혼란이 있었는데, 사마부, 진교, 가규 등의 활약으로 조비는 안전하게 승계를 완료한다. 특히 《진서》 <안평헌왕부열전>에서는 사마부와 화흠이 신하의 무리를 내쫓고 금위를 지켜 상사를 수습했다고 한다. 사마의는 아마 그 후에 장례를 치르는 일에 참가한 것 같다. 즉, 위나라 장수들과 같이 조조의 빈소에 상주로 있었다는 것이다.[22] 독군어사 역시 그 명칭을 살펴보면 '군(軍)을 감독하는 어사'로서 군사(軍事)에 대한 규찰과 감독을 행한다. 다만 군사를 통솔하는 권한을 줄 때는 절을 주는, 지절에서 나오는 것으로 확인된다.[23] 양준은 사마의를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고 평가했으며, 사마랑, 사마지랑도 평론할 만큼 사마씨와 친밀한 인물이었다.[24] 우리가 알고 있는 위나라 장수 장패(臧覇)가 아닌 오나라 장수로, 동명이인이다.[25] 제갈량의 3차 북벌 초기에는 대도독은 조진이 가져가고 본인은 부도독을 맡았었다. 대도독의 자리는 조진이 죽고 나서야 가져갔다.[26] 항우 휘하에서 활약하고 한나라 휘하에서도 활약한 영포의 별명[27] 자치통감의 저자는 잘 알려져 있지만 사마의의 아우인 사마부의 후손인 사마광이다. 그조차도 뻥이라고 했을 정도로 <선제기>의 기록은 사마씨에게 지나치게 유리하게 조작됐음을 알 수 있다.[28] 이 일화는 손빈의 일화와 같기 때문에 제갈량이 손빈을 흉내냈거나 한표전의 과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쨌거나 장합이 추격 도중 화살을 맞고 죽었다는건 다른 기록에도 있으므로 장합의 전사 자체의 신빙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9] 소제기 배송지주에 따르면 이때 석포를 만났다.[30] 시장의 감찰역[31] 4차 북벌 급은 아니나 5차 북벌도 《진서》 <선제기>는 사마의 띄워주기가 심한데 5차 북벌의 방비는 마치 사마의가 다한 것처럼 되었다. 촉군이 양수를 칠 거라는 예측을 곽회 혼자 한 게 아니라 사마의가 한 것처럼 왜곡했고 이 과정에서 촉군 진영에 나타난 혜성을 보고 패배의 징조라 공격해 총 2,000명 이상 피해가 났다고 썼다고 적었는데 이 당시 촉군 진영 방향에 나타난 혜성의 등장은 손성이 쓴 진나라의 역사를 다룬 사서 《진양추》에 따르면 갑자기 (8월에) 제갈량이 죽을 때의 일과 연관되지 제갈량의 패배와 연관된 일이 아니다. 장엄의 《묵기》 같은 기록에도 '사마의는 자기 자신의 보전에만 급급할 뿐 적을 깨뜨리지 못하였다'라고 썼으며 《자치통감》의 경우 <선제기>의 이런 기록을 아예 빼버리고 이 부분을 《정사 삼국지》 <곽회전>의 기록으로 따랐다.(아예 제갈량과 곽회가 북원에서 교전했다는 내용만 집어넣고 곽회가 제갈량의 후회기동을 홀로 눈치채고 양수에서 교전했다는 부분조차도 빼버렸다)[32]통전》 이 단락의 마지막에서 이르길 '공명이 오나라가 항복하지 않음을 헤아리는건 밝음이요, 사마의가 제갈량의 죽음을 헤아리지 못한건 어두운 것'이라 하였다.(孔明料吳不降,明矣。司馬不料亮死,暗矣)[33] 제갈량이 먹는 것은 부실하여 건강은 챙기지 않으면서 세세한 일까지 모두 챙기니 격무와 스트레스로 오래 못갈 것이라는 뜻이다. 바로 식소사번의 일화이다.[34] 호삼성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猶恐亮未死也'(오직 제갈량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두려워 한 것이다)'[35]자치통감》에선 기록이 짤렸다.[36]자치통감》의 현대 백화문 번역인 《자치통감전역(資治通鑑全譯)》에서는 대놓고 한재(旱災) 즉, 가뭄으로 인하여 생기는 재앙이라고 쓰고 있다.[37]진서》는 당나라 때 편찬되었으므로 당고조 이연의 휘를 피휘하여 그의 자인 문의로 기록하였다.[38]자치통감》은 우금과 호준의 참전을 기록하지 않았다.[39] 이때 위나라 조정은 병사 4만은 너무 많고 전쟁비용을 모두 주기 어렵다고 반대했으나 조예는 요동이 멀고 뛰어난 계책으로 승리할 수 있지만 군사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4만명을 그대로 줬다.[40] 이 노래를 부르고 실제로 요동에서 학살을 저지른다. 이미 강경 방책을 정해놨던 듯 하다.[41]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30여일.[42]정사 삼국지》와 《자치통감》, 《진서》 <선제기>의 앞선 부분에서는 상용을 함락시킨 시간이 보름이라고 명백히 써 있다. 따라서 진서의 오류일 수 있다. 혹은 진규가 사마의에게 아부를 하려고 일부러 함락 날짜를 줄여 말했을 수도 있다. 또는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우리와는 달리 정보 보관 장치가 부족해서 기억에 주로 의지하는 고대인이기 때문에 그냥 과장되게 기억하고 과장되게 말했을 수 있다.[43] 나중에 이 소식을 듣고 그의 자손이 세운 진나라가 오래 못가리라고 한탄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동진의 명제 사마소(서진문제로 추존된 사마소, 즉,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소와 동명이인이다.)는 승상 왕도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이런 짓을 했으니 진나라(서진)가 오래가지 못했고 지금 진나라(동진)도 곧 끝나리라며 한탄했다.[44] 8월 병인일(7일) 밤, 길이 수십 장에 이르는 큰 유성(流星)이 수산(首山) 동북쪽으로부터 양평성(襄平城)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일(23일), 공손연의 무리가 무너지니 아들인 공손수(公孫脩)와 함께 수백 기를 거느리고 포위를 돌파해 동남쪽으로 달아나자 대병(大兵)으로 급히 들이쳐 유성(流星)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를 베었다. 성을 함락하여 (공손연이 임명한) 상국(相國) 이하 수천 명의 수급을 베었고 공손연의 수급을 낙양(洛陽)으로 보냈고, 요동(遼東), 대방(帶方), 낙랑(樂浪), 현도(玄菟)가 모두 평정되었다.[45] 이들은 공손연의 봉기를 반란을 지지하지 않던 세력들인데 이들을 대우해 준 것은 1년 원정을 예측한 것과 함께 사마의가 요동지역에 대한 사전 정보를 준비했다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46] 조휴의 아들[47] 한고조 유방이 백인(柏人, 기주 조국(趙國) 백인현)에서 유숙하려다 지명이 (迫人, 핍박하다)과 유사하다 하여 이 곳을 피해 화를 면했고, 후한 광무제 휘하 장수로 촉의 공손술을 정벌하던 잠팽(岑彭)이 팽망(彭亡,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팽이 죽는다)이란 곳에서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이 있다. 이는 모두 이름글자와 관련된 금기사항을 얘기하는 건데, 사마의를 대사마로 임명하면 사마(司馬)라는 글자가 서로 겹치는 한편, 사마의의 성씨인 사마(司馬) 앞에 대(大)자를 붙이는 셈이라 적절치 않다는 뜻인 듯. 또 진서 선제기에 보면 그 당시 대사마들이 재직중에 누차 죽었다하여 태부로만 임명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상은 태부, 대사마로 천거했지만, 이런 불길함을 피하기 위해 대사마는 기각하고 태부로만 임명한다는 취지로 백인팽망(柏人彭亡)이 거론된 것.[48] 사마의가 이런 권리를 받았다는 기록은 오로지 진서에만 나오나 위서 조진자상전에도 조상이 조방이 즉위하자 이들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사마의도 동등한 탁고대신으로서 이것들을 받은 듯하다.[49] 이렇게 하면 1년에 500만석, 6~7년이면 3천만석이니 10만군사가 5년동안 먹을 양이라고 했다.[50] 「선제기」에서는 정확한 시점을 언급하지 않지만 「오주전」에서는 12월에 사마의가 서현에 당도했다고 서술하며 동일한 사건으로 보이므로 12월로 서술한다.[51] 여기까진 《진서》뿐만이 아니라 《한진춘추》와도 상호 검증이 된다. 《한진춘추》는 노성 전투에서 사마의의 패전을 말하는 중요한 사서이다.[52] 그런데 사마의는 조조에게 뒷일을 부탁받은 적이 없다.[53] 간보의 《진기》의 기록인데 《진서》는 어이없게도 사마의가 조상이 환범을 제대로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는 《자치통감》의 기록을 따른다.[54]진서》에서는 반대로 '밤중에 시중 허윤, 상서 진태를 사마의에게 보내 사마의의 의중을 살폈다. 사마의가 그의 과실를 하나하나 열거하며 그에 관한 처벌은 관리의 직책에서 면직시는데 그친다고 했다. 진태가 돌아와 조상에게 보고하고 상주문을 천자에게 올리도록 권했다.'라고 해서 조상이 진태와 허윤을 보낸것처럼 기술하여 마치 이들이 사마의의 명이 아니라 조상이 시켜서 한 것처럼 묘사했다. 생각해보면 진태와 허윤은 후일 사마씨에게 밉보여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이라 이렇게 조상과 엮은 게 아닌가 한다.[55] 이 기록은 《위서》 <조상전>의 주석 《위말전》의 기록인데 《자치통감》에서는 형제와 의논하여 사마의에서 음식을 청하고 사마의가 음식을 보내줬다는 일화를 빼버리고 오히려 '조상이 근심하고 괴로워 하며 계획을 알지 못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당시 상황에서 기인한듯한데 고평릉 사변은 6일에 벌어진 일이고 조상의 사형은 10일에 결정되었다. 중간에 사마의가 황제가 밖에서 노숙할수 없다며 물자를 보낸것으로 봐서 하루 정도 지난 후에 낙양으로 돌아 왔을 것이다. 즉, 이런 짧은 사나흘 정도의 시간대에 조상정도 되는 일국의 중신이 양식이 집안에 없어서 굶는 게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애당초 조상이 굶을 만큼 시간이 남아 있지도 않았던것.[56]진서》 <선제기>에는 2월에 승상과 각종 봉읍, 12월에 구석을 받았다고 나와있으나 《위서》 <제왕기>에는 1월 19일로 되어 있으며 《자치통감》도 같다. 여기선 자치통감을 따름.[57] 다만 이 때 조상 이외의 조조의 후손들은 숙청의 칼날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58] 가충이 가규의 아들, 가남풍이 손녀라는걸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부분. 왕릉은 사마랑, 가규와 절친한 사이였다. 자연히 사마랑의 동생인 사마의와도 오랜 교분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탓인지 왕릉의 일족을 멸한지 반년도 못가 세상을 떠났다.[59] 죽기 직전에 왕릉에게 "언운.. 그만 나를 놔주게..!" 라고 사정을 하지만 왕릉은 "무슨 소리야? 너도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까 같이 가자고" 라고 하며 그대로 사마의를 데리고 가버린다.[60]자치통감》에서는 그냥 무양선문후라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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