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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17:20

장엄(삼국지)

張儼
(?~266)

1. 개요2. 생애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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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중국 삼국시대 손오의 문관이며 자는 자절(子節)로 양주 오군 사람. 장한, 장발의 아버지.

2. 생애

젊어서 이름이 알려져 현위를 지냈고 아는 것이 많아 대홍려에 임명되었으며, 265년에 사마소가 사망하자 266년 1월에 장엄은 오관중랑장 정충과 함께 조의를 표하러 갔다. 그 곳에서 가충, 배수와의 문답을 거절하고 양호, 하정 등과 우의를 쌓지만 장엄은 돌아오는 길에 병사한다.

이 사람이 지은 책 중에 묵기(黙記)라는 것이 있는데, 제갈각의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는 제갈량의 후출사표도 여기에서 나왔다. 후출사표의 제갈각 위작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장엄이 제갈각과 가까운 사이라 후출사표를 실었다고 주장하지만 정작 정사 삼국지 내에 제갈각과 장엄이 서로 관계가 있었다는 내용은 전혀 없어서 오히려 위작론의 근거가 없어지는 감도 있다. 어쨌거나 습착치가 한진춘추에 인용한 묵기의 후출사표 말고도 배송지가 묵기의 내용 중에 일부를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에 인용했다. 그 내용인 즉슨 묵기의 술좌편이라는 부분에서 제갈량에 대해 평가한 내용으로 오나라 사람의 관점에서 쓰여졌기에 편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이 위나라 인구의 1/9밖에 안되는 인구로도 대항했고 농업, 군사, 형법 등을 잘 정비해서 기산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고 했으며, 또한 사마의가 10배나 되는 땅과 군사를 보유했지만 제갈량이 이를 발랐다는 것으로 군사적 능력에 높은 평가를 주면서 제갈량이 단순한 문관이 아니라는 반론을 펼칠 때 많이 인용된다.

아래는 배송지가 묵기에서 인용한 전문.
한조가 기울고 천하가 붕괴되자 호걸들이 다투어 신기(神器)를 탐내었다. 위씨는 중토를 차지하고 유씨는 익주를 점거하니 아울러 해내에서 거병하며 당대의 패주가 되었다. 제갈량, 사마의 두 재상은 이때에 이르러 명주에게 몸을 맡겨 혹 촉한에서 공을 세우고 혹 이수, 낙수에서 책명(冊名, 사책)에 이름을 남김. 공을 세움)하고, 조비유비가 죽고 난 뒤 후사가 대를 잇자 각각 보아(保阿, 보육, 보필)의 임무를 받아 어린 주인을 보필하며 승낙한 성심을 저버리지 않고 또한 일국의 종신으로 패왕을 어질게 보좌했다. 전대를 살펴 근래의 일을 보면 두 재상의 우열은 가히 상세히 알 수 있다.

공명(제갈량)은 파, 촉 땅에서 일어나 1주(州)의 토지에 의지하니 대국에 비하면 그 전사, 인민이 9분의 1 정도에 불과했으나, 대오에 예물을 바치면서도[1] 북적(北敵)[2]과 맞서, 농업에 힘쓰고 전쟁하는(耕戰) 대오를 갖추도록 하게 이르렀고, 형법을 정돈(整頓)하여 가지런히 하며,[3] 보졸 수만을 거느리고 기산으로 장구(長驅, 멀리 달려감)하니, 개연히 황하와 낙수의 물로 말의 목을 축일 뜻을 품을 수 있었다. 중달(사마의)은 천하에 열 배의 땅에 의거하여 거기 있는 수많은 군졸을 거느리고도, 견고한 성을 점거하고 정예를 끼고는 적을 사로잡을 뜻이 없고 스스로 보전하는데 힘쓸 뿐 공명이 스스로 오고 가게 만들었다.

만약 이 사람(제갈량)이 죽지 않았다면 끝내 그 뜻을 펼치며, 해를 이어 궁리하고 바삐 다그치며 모략을 일으켰을 것이니 즉 옹주, 양주는 갑옷을 벗지 못하고 중국은 안장을 풀 수 없어 승부의 형세는 또한 이미 결정되었다 할 것이다. 지난날 자산[4]이 정나라를 다스릴 때 제후들이 감히 군사를 내지 못했고 촉상이 이에 가깝다 할 수 있으니, 사마의에 비하면 또한 뛰어나지 않은가!

어떤 이가 말했다,

"병(兵)은 흉기이고 전(戰)은 위사(危事, 위태로운 일)인데, 경내를 지키며 백성들을 편안케 하는데 힘쓰지 않으면서, 토지를 넓히고 천하를 정벌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제갈승상이 실로 광좌지재이나 외롭고 끊어진 땅에 거처해 전사는 5만을 채우지 못하니, 스스로 관문을 닫고 험지를 지키면 군신이 무사했을 것입니다. 헛되이 군사를 이끌고 매년 정벌하지 않는 해가 없었으나 지척의 땅으로도 진격하지 못하고 제왕의 기업도 넓히지 못했으면서, 국내를 황잔(荒殘)하게 만들고 서토는 그 역조(役調, 부역과 조세)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위나라 사마의의 용병하는 재주는 쉬이 가볍게 볼 수 없고, 적을 헤아려 진격하는 것은 병가에서 신중히 살피는 바입니다. 만약 승상이 이를 미리 헤아렸다면 탄연히 공훈을 세웠다 할 수 없고, 만약 이를 헤아리지 않고 결정했다면 명철이라 일컬을 수 없습니다. 해내(천하)가 그(제갈량)에게 돌아가도록 향하는 뜻에 관해,[5] 저는 의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그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듣기로 탕왕은 70리, 문왕(주문왕)은 백리 땅으로 천하를 차지했으니 모두 정벌하여 천하를 평정한 것이고, 읍양(揖讓, 예의로 사양함)하여 왕위에 오른 자는 오직 , 가 있을 뿐이오.

이제 촉, 위가 적이 되어 싸우는 나라로 사세상 함께 왕이 될 수 없고 조조, 유비 이래로 강약이 현격하게 달랐으나 유비는 오히려 양평으로 출병하여 하후연을 붙잡고 관우는 양양을 포위하여 장차 조인을 항복시키려 하고 우금을 사로잡았소. 당시 북변에 크고 작은 근심거리가 있었으나 맹덕이 몸소 남양으로 출병하고 악진, 서황 등이 구원했으나 포위는 즉시 풀리지 않았소. 이 때문에 장자통(蔣子通: 장제)이 그때 허도를 옮겨 황하를 건너려는 계책에 관해 말한 것이고, 때마침 국가(國家, 즉 오나라)가 남군을 습격해 취하자 관우가 철병했소.

현덕과 조조는 지력, 사중에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고 용병 행군의 도도 같다 할 수 없는데, 오히려 현덕이 잠시 승리를 취했으며 또한 이때에는 대오(오나라)가 기각(掎角, 양쪽에서 협공함)[6]한 형세도 아니었소.

이제 중달의 재주는 공명보다 못하며 당시의 세력은 지난날과 다르니, 현덕이 적과 맞섰는데 (그의 신하인) 공명이 어찌 출군하여 적을 도모하지 않을 수 있겠소? 옛날 악의는 약소한 연나라 군사로 다섯 나라의 군사를 겸하여 강국인 제나라로 장구해 70여 성을 떨어뜨렸소. 지금 촉한의 병졸은 연나라 군보다 적지 않고, 군신간의 결속은 악의 때보다 더 신의가 있소. 게다가 우리 국가와 순치의 도움이 되어 동서로 상응하고 뱀처럼 머리와 꼬리가 되면 형세가 중대해져 다섯 나라의 군사에 비할 바가 아니니, 어찌 저들을 꺼리어 불가하단 것이오?

무릇 병은 기(奇)로써 승리하고 지(智)로써 적을 제압하는 것이니, 토지의 넓고 좁음이나 인마의 많고 적음에만 편벽하게 의지해서는 안 되오. 내가 그(제갈량)의 치국한 형체를 보면 당시에 이미 차림새가 가지런히 바르며 엄숙(嚴肅)했고[7] 그 가르침이 뒤에도 남았으며, 그 말에 이르러 간절하고 진취의 뜻을 진술하여 충모(忠謀, 충성스러운 계책)가 건건(謇謇, 충직)하여 주인에 대한 의(義)가 드러나니 비록 옛날 관중, 안영이라 해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소?

3. 미디어 믹스

파일:external/kongming.net/zhangyan2.jpg
삼국지 9 일러스트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9에서만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 38, 무력 27, 지력 79, 정치 86로 매우 좋다. 제갈량을 좋게 평가해줬기에 코에이가 인심 좀 쓴 듯하다. 가진 병법도 누선, 혼란, 배반으로 괜찮은 편.


[1] 이게 그 오나라 입장에서 쓰여졌다는 것을 입증하는 글이다.[2] 북쪽의 적이란 뜻으로, 보통은 이민족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조위를 뜻한다.[3] 여기서 '농업에 힘쓰고 전쟁하는'의 한자 단어가 '경전(耕戰)'인데 이는 법가의 서적인 상군서(商君書)의 경전편에서 단어를 따온 것이다. 상군서의 저자 상앙은 백성들에게 농사를 권장해 경제력을 키워 부국을 이루고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강병을 이루는 부국강병 정책으로서 이른바 '경전론'을 제시했는데 장엄이 제갈량의 정책을 평가하며 '경전(耕戰)의 대오를 갖추게 했다'이라고 씀은 곧 그가 파악하기론 제갈량이 법가적 입장에서 부국강병을 이루었다고 봤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단어 바로 다음에 제갈량이 '형법을 정제(整齊)했다'는 말을 덧붙인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장엄은 법가적 정책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법으로서 질서를 안정케 한 인물로 제갈량을 파악했음을 알 수 있는데, 정작 제갈량 본인은 상앙은 덕으로 교화함이 부족했다고 비판하긴 했다.[4] 춘추시대 정나라의 재상 공손교(公孫僑)의 다.[5] 즉 삼국이 아직 정립된 상황에서도 제갈량은 천하의 큰 인물로 인정받았다는 이야기이다. 묵기의 이 편의 내용으로 보아 아직 촉한이 강건하게 버티고 있던 시절에 묵기가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미 삼국시대 당시에도 제갈량은 시대의 거물로서 존경받고 있었던 것이다.[6] 여포가 포위당했을 때 진궁이 말한 그 기각이다.[7] 원문 단어는 '숙정(肅整)'으로 행동이 단정하다는 뜻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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