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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현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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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현대가 기업 회장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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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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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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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영
(1958~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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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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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066b5b879b5819d93fbddda06b77cff.jpg 파일:00731017_0001.jpg
1953년 부산, 6.25 전쟁 피난 중.
왼쪽부터 정세영, 정인영, 정상영, 정주영, 정희영, 정순영, 정신영.
1982년 6월 7일 재계원로 간담회에 참석하는 김용완, 이병철, 정주영.
파일:image-1-5.png 파일:1460335461038.jpg
2000년 5월 31일 삼부자 동반 퇴진 발표 날의 정주영, 정몽구, 정몽헌
정주영 최후의 결단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룹은 자연 해체되기 시작한다.
2001년 3월 23일 정주영 빈소.
왼쪽부터 정몽구, 정몽근, 정몽헌, 정몽준, 정몽일.
1. 개요2. 특징
2.1. 병역2.2. 스포츠2.3. 따로 또 같이2.4. 현대가와 정치2.5. 3, 4세의 연이은 사회적 물의2.6. 여담
3. 가계도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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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14bab9c6fe5fc1f4500f3c3aa22f330.jpg


현대그룹 창립자 정주영의 가족 관계. 언론 등지에서 범현대家, 현대 일가 등으로 불리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정주영 직계가 현대자동차그룹, 현대백화점그룹, 선진종합, 현대비앤지스틸, 현대그룹, HD현대, 현대해상, 현대엠파트너스를 경영하고 있고 정주영 형제 직계 즉 정주영의 방계는 HL그룹, 현대성우그룹, 현대종합금속, 서한그룹, 후성그룹, HDC, 현대코퍼레이션, KCC를 경영하고 있다.

정주영 가문은 하동 정씨 지예부사공파로 범현대가만의 돌림자가 따로 있다. 창업주 정주영 아래로 2세대는 '몽(夢)○', 3세대는 아들은 '○선(宣)', 딸은 '○이(伊)', 4세대는 아들은 '창○', 딸은 '진○'을 돌림자로 사용한다.[1] 해당 돌림자는 하동 정씨 지예부사공파 문중에서 정한 항렬자는 아니다. 대부분 재벌이 자신들의 문중에서 정한 항렬자를 쓰는 것과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범삼성가경주 이씨, 범SK가수성 최씨, 범LG가능성 구씨, 범롯데가영산 신씨, 범한화가순천 김씨, 범GS가김해 허씨, 범한진가양주 조씨, 범두산가밀양 박씨 양산군파, 범DL가전주 이씨 인성군파, 범금호가밀양 박씨, 범효성가함안 조씨, 범DB가강릉 김씨, 범코오롱가여주 이씨, 범대우가광산 김씨[2] 문중의 항렬자를 사용한다. 단순히 정주영계의 범현대가에서만 쓰는 돌림자로 보면 된다.[3]

2. 특징

파일:PYH2016111112260001300_P4.jpg
2016년 11월 11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정몽구의 외손녀이자 정성이의 장녀인 선아영의 결혼식.
가장 최근에 범현대가 식구 대부분이 모인 현장이다.[4]

2.1. 병역

범현대가는 범LG가와 더불어 병역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편이다. 정몽구는 육군 병장 만기제대했고 정몽준, 정기선ROTC 장교 출신이다. 다만, 정몽근정의선담낭 절제술을 받은 이력으로 인해 병역이 면제되었다.[5] 직계 3세대 11명 중 정의선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병역을 정상적으로 마쳤다.

2.2. 스포츠

가문 전체가 스포츠와 매우 깊은 인연을 자랑한다. 창업주 정주영은 1980년대 초 대한체육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1988 서울 올림픽 유치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할 때도 전두환 정부현대그룹에게 인천·경기·강원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을 권유했지만 당시 대한체육회 회장을 맡았던 정주영이 직접 "서울 올림픽 개최 준비에 올인해야 한다"는 이유를 들면서 야구단 창단을 고사했다.

그러나 프로야구가 첫 해부터 흥행 대박을 터뜨리자 야구단 창단에 나서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됐고 결국 1983년 말 프로축구단 현대 호랑이를 창단했다. 그리고 난 뒤에도 실업야구단 현대 피닉스를 창단하면서 계속 프로야구 진입을 시도하다가 1995년 말 인천·경기·강원 연고팀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해 현대 유니콘스를 창단하며 프로야구 입성에 성공하며 과거의 아쉬움을 털게 된다.[6]

1990년대 이후에 프로화가 이뤄진 농구와 배구에도 실업 시절부터 신경을 많이 썼다. 1970년대에는 남자 농구단과 여자 배구단을 각각 만들었는데 1977년 현대건설 여자배구단을 창단하고 1978년 현대전자 농구단을 창단했다. 이어 1980년대에는 1983년 현대자동차써비스 배구단을 창단했고 1986년 현대중공업 여자농구단을 창단했다. 특히 한국 남녀 농구의 레전드 스타인 이충희전주원을 영입하기 위해 정주영 회장이 스카우트를 직접 지시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인생 말년에는 현대 남녀 농구단을 이끌고 평양에 가서 남북 통일 농구대회를 연 적도 있다.

현대그룹이 계열 분리를 하기 전에는 삼성과 더불어 굉장히 많은 스포츠단을 운영했고 당시 운영하던 곳도 대부분 현재 이어져오고 있어 대한민국 스포츠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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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운영 스포츠단에 대한 내용은 현대그룹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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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야구단 현대 유니콘스
실업 야구단 현대전자 야구단
프로 농구단 청주 현대 하이페리온
아이스하키단 현대정유 오일뱅커스
레이싱단 오일뱅크 카레이싱팀
사이클단 현대엘리베이터 여자 사이클팀
프로 축구단 전북 현대 모터스
프로 축구단 인천 현대제철 레드엔젤스
프로 야구단 KIA 타이거즈
프로 농구단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프로 배구단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프로 배구단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양궁단 현대제철 남자 양궁단
양궁단 현대모비스 여자 양궁단
럭비단 현대글로비스 럭비단
양궁단 현대백화점 여자 양궁단
탁구단 현대백화점 여자 탁구단
프로 축구단 울산 HD FC
실업 축구단 울산 현대미포조선 돌고래
프로 씨름단 현대 코끼리 씨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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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 야구단 현대해상화재보험 야구단
테니스단 현대해상 남자 테니스단
아이스하키단 HL 안양 프로 축구단 부산 아이파크 프로 농구단 부산 KCC 이지스
핸드볼단 금강고려화학 여자 핸드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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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K리그, 한국프로농구, V-리그 등 국내 주요 프로 스포츠 리그에는 KIA 타이거즈, 전북 현대 모터스, 울산 HD FC, 부산 아이파크,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부산 KCC 이지스,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수원 현대건설 힐스테이트 등 범현대가의 구단이 즐비하다. 이 중 HD현대 소유의 울산 HD, HDC그룹 소유의 부산 아이파크, KCC그룹 소유의 부산 KCC 이지스를 빼면 모두 현대자동차그룹 산하 구단이다. 각 그룹 차원에서 적극적인 투자를 해온 덕분에 구단들의 성적 또한 중상위권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범현대가의 지원이 끊어지면서 해체된 구단도 있다. 대표적으로 2003년 이후 구단 운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2007년 시즌 후 해체한 현대 유니콘스가 있다.

특히 현대가는 유독 축구에 대한 인연이 남다르다. 젊은 시절부터 축구를 즐겨했던[7] 창업주 정주영은 후술하게 될 현대중공업 부서별 축구대회 제1회 대회에 직접 선수로 등록해서 경기를 뛴 뒤 선수들과 막걸리를 나눠마셨다는 일화가 유명하며[8] 그의 아들 정몽준은 1993년부터 2009년까지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냈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는 FIFA 부회장을 지냈다. 특히 라이벌 일본보다 유치 경쟁을 훨씬 늦게 시작했음에도 2002 월드컵을 공동 유치하는 등의 공로를 인정받아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 올랐으며 2002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덕분에 단숨에 차기 대권주자 반열에 올라 정치적 입지를 다지기도 했다.

현재 정의선전북 현대 모터스 구단주, 정몽준이 울산 HD FC 대주주[9], 대한축구협회장인 정몽규부산 아이파크 구단주다. 다만 정몽준이 축구계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축구계를 장악한 정몽규에 대해서는 비판 여론이 거세다.

아울러 범현대가 계열 주요 그룹 중 하나인 현대중공업에는 현대스리가라고 불리던 부서별 축구대회가 오랫동안 진행됐는데 현대스리가 문서에도 나와있듯이 그냥 평범한 동네 축구나 사내 축구대회 수준이 아니다.

축구 외에 다른 종목도 남다른 애착을 보이고 있는데 다른 기업들은 인기 하락으로 슬슬 발을 빼던 민속 종목 씨름에도 현대중공업과 현대삼호중공업 등을 통해 상당히 오랜 기간 후원을 했다. 이는 생전에 엄청난 씨름 팬이었던 정주영의 영향이 크다. 현대그룹 신입사원 연수 때마다 빠지지 않던 체육활동 중 하나가 씨름이었고 정주영 본인이 샅바를 직접 매고 경기에 나설 정도로 씨름 광팬이었다. 특히 1983년에 열린 제1회 천하장사 씨름대회를 처음부터 끝까지 VIP석에서 다 본 인물 중 한 명이다.

양궁이 대한민국 올림픽의 전통적 효자 종목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현대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대그룹 계열분리전부터 대한양궁협회장을 맡았으며 정몽준에 이어 정몽구가 이어받으면서 계열분리 이후 현대자동차그룹에서 전담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현대제철(남자)과 현대모비스(여자)를 통해 실업 양궁단을 운영하고 있다. 현대백화점그룹 또한 현대백화점 양궁단을 운영한다.

2.3. 따로 또 같이

왕자의 난으로 유명한 현대가이고, 이로 인해 현재 현대그룹은 여러 기업들로 분할되었지만, 그럼에도 현대가는 서로간의 유대감이 깊은 편이다. 이는 가족 간, 특히 형제 간의 유대관계를 유난히 강조했던 정주영의 평소 행보가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주영은 사업적 측면에서는 동생도 봐주지 않던 냉철한 사업가였지만 사업 이외의 측면에서는 동생들을 끔찍이 아끼며 뒷바라지한 큰형님이었다고 한다. 특히 정주영의 명령에 의해 평생의 대업으로 생각했던 현대자동차를 별안간에 정몽구에게 뺏겼던 정세영도 정주영을 "일생을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큰형님"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다.

정몽구 역시 왕자의 난으로 동생 정몽헌과 갈등을 빚긴 했지만 사석에서는 정몽헌을 "우리 막내"라고 칭했다고 하며,[10] 왕자의 난 이후에도 종종 서로의 집을 찾아가 교류를 가졌다고 한다. 정몽헌이 대북송금 문제로 조사를 받을때 검찰에 최대한 선처를 호소하고 다녔으며 결국 이 일로 정몽헌이 자살했을 때 형제들 중 가장 먼저 계동 사옥에 도착해서 사태를 파악했고 동생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자 그 자리에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고 한다. 또한 아직 나이가 어린 조카인 정몽헌의 아들 정영선을 대신해서 사실상 상주 역할까지 도맡았다.

정주영과 변중석 여사의 기일 제사에는 정주영의 직계 자손뿐 아니라 정주영의 동생들과[11] 조카들도 참석한다. 또한 어느 한 기업이 위기가 왔을때는 범현대가 기업들이 의기투합해 서로 도움을 주고 받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한라그룹이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때, 범현대가 기업들이 도와줘서 한라그룹을 재건할수 있었다.[12]

하지만 예외도 있는데 바로 피가 안 섞인 현정은이 경영하는 현대그룹. 여기는 다른 범현대가 기업들과 전부 사이가 좋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정몽헌의 사망 이후 현대가 형제 기업들이 지원을 끊어버린 현대 유니콘스.[13] 그리고 정몽헌 사후 현정은이 현대그룹 회장직에 올랐을 때도 정주영의 막내동생이자 현정은의 시숙부인 정상영 KCC그룹 명예회장이 "정 씨가 일으킨 현대그룹이 현 씨에게 넘어가는 걸 볼 수 없다" 며 현대엘리베이터 주식을 대거 매입하며 사실상 현대그룹을 섭정하겠다고 하는 등 경영권을 두고 분쟁을 벌였고,[14] 정몽준현대중공업 측과도 경영권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2011년 현대건설 인수 과정에서도 정몽구현대자동차그룹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도 현정은 측이 정몽구와 현대차그룹을 대놓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결과는 정몽구가 인수전에서 승리하며[15] 사실상 범현대가의 적통을 이어받았다는 평가가 대다수다. 사실 지금 아예 계열분리되어 남남인 범현대가 기업들이 그래도 서로 도울 일이 있을때는 적극적으로 나서지만 현정은의 현대그룹 측만 따로 노는 걸 보면 답이 나온다.[16] 다만 여기도 같은 현대라고 힐스테이트나 아이파크 아파트의 엘리베이터 시공은 현대그룹 계열의 현대엘리베이터가 맡으며 과거 현대상선이 현대그룹 계열사였던 시절에는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와의 거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17]

범현대그룹은 서로간의 거래가 많다. 물론 계열 분리는 되었으므로 내부거래는 아니나, 일부에서는 내부거래에 준한 것으로 본다. 범현대그룹 계열사에 입사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현대와 함께 한다는 농담이 나올 정도다.[18]

아침에 출근할 때 모는 자가용은 범현대가 특별 할인을 해주는 현대자동차기아, 제네시스에서 만든 차량일 것이고, 이 때 순정 내비게이션이나 '맵피' 라는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이용한다면 이것들은 현대오토에버[19] 에서 만든 것이다. 만약 서울 내 통근버스를 탄다면 현대엔지니어링에서 운영하는 차량을 탈 것이고, 전철을 이용할 경우에는 현대로템에서 만든 전동차를 탈 것이다. 추가로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사의 경우 본사 사옥이나 제조공장의 자산포괄위탁(경비, 영선 등 각종 자산 관련 제반 관리)을 현대엔지니어링이 관리하고 있으며, 출입게이트를 통과하려면 현대카드에서 만들어 준 M, M2 사원증을 찍고 들어가야 한다. 출입게이트를 통과해서 사무실로 이동하기 위해 엘리베이터에 탑승한다면 이는 현대엘리베이터에서 설치한 엘리베이터일 것이고 근무하는 책상이나 기타 사무실 가구는 현대리바트[20]에서 제조한 것이고 각종 선물 역시 이 회사에서 발송한 물품이 온다. 구내식당은 현대그린푸드에서 운영하며, 제조공장이나 건설현장에서 근무한다면 마찬가지로 현대리바트가 납품한 근무복과 안전화를 착용할 것이다.[21] 출장을 갈 때 타는 업무용 차량은 현대캐피탈에서 렌트한 현대자동차나 기아의 차량일 것이고, 보험 또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현대해상으로 가입되어 있다. 종합건강검진은 서울아산병원아산의료원에서 많이 한다. 만약 HDC그룹이 아시아나항공 인수에 성공했으면 해외 출장도 현대와 함께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2.4. 현대가와 정치

여타 재벌이 그렇듯 범현대가 역시 정치권과 연관이 매우 깊었지만, 라이벌인 삼성과 달리 이 쪽은 직접 정치에 뛰어들어 활동했던 인물들이 존재한다. 현대건설의 리즈 시절이었던 1960년대~1980년대에는 박정희 정부, 전두환 정부와 연줄이 깊었고[22], 본격적으로 현대아산을 세우고 대북 사업에 뛰어들었던 1990년대 후반 이후에는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와 사업적 관계를 형성했다.

범현대가 중 처음으로 정치에 직접 뛰어든 인물은 현대그룹의 창업주인 정주영이다. 1987년, 명예회장으로 은퇴한 뒤 돌연 정치에 관심이 생기자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제14대 대통령 선거 출마선언을 했다. 앞서 열린 제14대 총선에서 지역구 24명, 전국구 7명 등 총 31명의 당선자를 내며 원내 제3당이 되었고, 현대그룹의 막강한 자금력으로 여러 인사들을 영입하고 당원만 1000만명 가까이 모집하기도 했다.[23] 제3지대 역할을 공고히 하며 양김을 상대로 팽팽한 선거전을 펼쳤지만, 초원복국 사건 등 여러 악재가 겹쳐 결국 본선에서 3위로 낙선하고 만다. 대선패배 후 정주영은 "당원이 1,200만명인데 득표수가 438만표이라니... 당원들은 어디에다 투표한 것인가" 라며 한탄했다는 일화가 있다. 정주영은 대선 낙선 뒤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통일국민당에서 손을 뗐으며, 통일국민당은 표류하다가 자민련에 합쳐지면서 해산되었다.[24]

두 번째로 대권에 도전한 인물은 바로 정몽준이었다. 1988년 울산 동구 을에서 무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민주자유당통일국민당을 거쳐 무소속으로 의정활동을 해왔다.[25] 울산에서 현대그룹의 입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에 동구에서만 5선을 했으며, 정몽준이 한나라당에 입당한 18대와 19대 총선에서는 서울 동작 을로 지역구를 옮겨 또 2선 국회의원을 했다. 무난하게 의정활동을 해오던 2002년, 그에게 천운이 다가온다. 2002 FIFA 월드컵을 개최하는데 그가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대회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4강이라는 희대의 성적을 내자, 이와 더불어 정몽준의 지지율 또한 올라가게 된다. 정몽준은 국민통합21을 창당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순식간에 대선판의 캐스팅보트로 부상하는데,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던 노무현과 단일화를 하였으나 대선 투표 전날 지지를 철회하는 희대의 실수를 저지르며 결국 기회를 살리지 못하게 된다. 만약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 등 요직을 하며 대권주자로서 체급을 키웠다면, 다음 대선에서 충분히 승부를 걸어볼만 했다. 정몽준 입장에서는 최악의 수를 두었던 셈.

여담으로 현대그룹의 자본력으로 선거를 총지휘했던 1992년과 달리, 2002년의 현대그룹은 이미 왕자의 난 이후 계열분리가 된 상태였고, 현대그룹의 수장이었던 정몽헌 역시 대북송금 사건으로 수사망에 오르는 등 그룹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룹 차원에서의 지원은 없었다. 정몽준은 이후 무소속, 1인 정당 소속으로 울산 동구에서 4~5선을, 2007년 17대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 지지를 선언하면서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한나라당 입당 후 지역구를 서울 동작구 을로 옮긴 뒤 6선, 7선에 성공했고 당 대표까지 지내며 정치활동을 이어가다가,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의원직을 사퇴한 뒤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박원순에게 밀려 대패한 뒤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결론적으로 현대그룹에서 직접 정치에 도전한 정주영-정몽준 부자 모두 국회의원과 총재(당 대표)를 지내는 등 요직을 두루 맡았지만, 끝내 대통령에는 당선되지 못하고 정치활동을 접었다. 정몽준이 정계를 은퇴한 뒤에는 아직 범현대가에서 정계로 진출한 사람은 없다.[26]

2.5. 3, 4세의 연이은 사회적 물의

창업주나 그의 동생들 그리고 범현대가 2세들이 사회적 물의를 안 일으켰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3, 4세들의 물의를 나열한다. 음주운전에 마약하고 갑질해도···현대家의 '유전무죄' 신기루

정주영의 6남 정몽준의 차남 정예선SNS 상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발언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긴 했지만 적어도 범죄는 아니었으며, 말한 사람이 재벌 3세만 아니었으면 이슈가 되지도 않았을 일이였다. 차라리 정예선 정도면 질풍노도 20살의 치기로 보일 정도로 3, 4세들의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다.

정주영의 8남 정몽일의 장남 정현선은 2018년 2월부터 2019년 1월까지 액상 대마(마리화나) 카트리지를 26차례 흡입한 혐의가 적발돼 구속 기소됐다. 하지만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정현선의 여동생 정문이는 2012년 8월 서울 성북동 주택가 골목길에 세워둔 차 안에서 한 남성으로부터 대마초를 전해 받고 함께 피운 혐의가 적발돼 불구속 기소됐다. 이듬해인 2013년 4월 마약류관리법 위반 혐의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정주영의 둘째 동생 정순영의 3남 정몽훈의 장남 정광선은 2013년 대마초를 피운 혐의로 구속됐다. 경기도 오산에서 주한미군 전용 군사우편을 통해 국내로 밀반입된 대마초를 구입해 흡연했다.
정순영의 4남 정몽용의 장남 정인선은 2009년 대마초 흡연 혐의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정주영의 4남 정몽우의 장남 정일선은 수행기사를 상대로 갑질을 시전했는데 3년 간 수행기사 61명을 주 56시간 이상 일하게 하고, 이 가운데 1명을 폭행한 혐의로 약식기소돼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수행기사 매뉴얼에는 모닝콜과 초인종 누르는 시기와 방법, 신문 두는 위치, 차량 안 물품 구비부터 운동복 애벌 빨래법 등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 할 일들이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 수행기사들은 매뉴얼을 지키지 못할 경우 경위서를 쓰고 벌점을 받아 감봉 조치를 당했다.

정주영의 차남 정몽구의 장남 정의선의 장남 정창철은 2021년 7월 24일 오전 4시 45분경 만취 상태로 아버지 정의선의 명의로 등록된 제네시스 GV80 차량을 운전하다 서울 광진구 강변북로 영동대교 램프에서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64%로 면허취소 수준인 0.08%를 넘어선 것으로 밝혀졌다. 서울동부지검은 정창철을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로 벌금 900만원에 약식 기소했다. 거기에 정창철은 당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아파트에서 지인과 술을 마시다 운전대를 잡은 것으로 알려져 검찰이 코로나 19에 따른 사회적 거리두기 방역 수칙 위반에 대해서 수사할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특히 정창철의 경우 범현대가 4세의 첫 물의인데다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나쁜 음주운전으로 언론을 타면서 좋지 않은 방향으로 주목을 받고 말았다. 무엇보다 정창철은 정주영의 장증손[27]으로, 범현대가 일원 중에서도 말 그대로 직계 중의 직계이자 적통 그 자체이며 정의선의 외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현대자동차그룹을 이끌 후계자가 될 것이 유력한 인물이 다른 것도 아니고 자동차와 관련된 음주운전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 더군다나 아버지 정의선은 재벌 3세 중 가장 탁월한 경영 능력을 실적으로 입증하고 있고, 구광모와 더불어 4대 그룹 총수 중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연루된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며, 병역 역시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사유로 면제를 받았고[28] 평소 성품 역시 겸손하고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대외적인 이미지가 상당히 좋은 편인데, 이런 아버지의 이미지에 제대로 먹칠을 한 셈이다.

2세로 올라가면 음주운전으로 정인영의 장남 정몽원정순영의 장남 정몽선이 있으며, 대한축구협회 문제 관련과 광주 화정 아이파크 붕괴 사고 등 여러 논란들의 중심에 정세영의 장남 정몽규가 있다.

2.6. 여담

여담으로 정주영이 이병철보다 훨씬 노조에 부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노조 하면 범현대가의 노조들이 손꼽히는 것도 삼성과 현대의 재미있는 대비가 된다. 원래 범현대에 소속된 노조들은 물론이고 1999년 인수한 기아에는 1960년 창립 때부터 강성으로 유명한 금속노련 내에서도 일세를 풍미한 기아자동차 노조가 있었다.

3.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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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업 이전에 태어난 정주영 세대는 문중에서 정한 항렬자를 쓴다.[2] 일가 모두 3대 아래의 항렬을 쓴다. 일례로 김우중은 36세손이지만 39세 항렬을 썼다.[3] 정확히는 정주영의 아버지 정봉식 가계의 항렬자라고 할 수 있다. 정주영을 필두로 한 1세대까지는 문중에서 정한 항렬자이고 그 이후 세대는 모두 현대가 안에서만 쓰는 항렬자를 쓴다.[4] 범현대가 식구 대부분이 참석하는 정례적 가족 행사로 정주영 명예회장과 변중석 여사의 기일 제사가 있으나 한두명이 빠지곤 한다. 대표적으로 고령으로 거동이 다소 불편해져서 대외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정몽구 회장이 꼽힌다.[5] 정의선의 어머니인 이정화가 2009년 담낭암을 앓다 별세한 바 있다.[6] 이 당시 돌던 루머 중 하나가 "현대 유니콘스 창단 이후 1군 선수들 운동장비가 어마어마했는데, 글러브는 페라가모, 양말은 피에르가르뎅, 신발은 구찌더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구찌에서 운동화가 나올 리 없겠지만 그만큼 개인 장구류까지 최고급으로 지원해줬다는 것이 와전된 것.[7]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던 성격 덕분에 여러 스포츠 종목을 섭렵하고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무려 등번호 1번(!)을 달고 뛰어다녔다고 한다. 축구가 끝나면 직원들을 남녀 할것없이 죄다 모아서 막걸리를 줄창 먹었다고(...)[9] 울산 현대의 구단주는 권오갑이지만 실권은 정몽준에게 있으며 권오갑은 그의 오른팔, 대리인에 가깝다. 대표적으로 홍명보와 같은 아시아 축구계 거물급 인사가 중국·일본·중동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울산에 부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한축구협회장 및 FIFA 부회장을 지낸 정몽준의 영향력·인맥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임을 위해 직접 홍명보와 미팅을 가졌다고 한다.[10] 정몽헌보다 뒤에 태어난 동생들(정몽준, 정몽윤, 정몽일, 정정인, 정정임)은 변중석 여사 소생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1] 다만 정주영의 동생들은 2021년 막내 정상영이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모두 별세했다.[12] 정몽준 계열의 현대중공업이 부실 투성이였던 한라중공업을 인수해서 정상화했으먀 이후에도 현대자동차의 도움으로 그룹의 핵심인 HL만도를 되찾아와 대기업 명단에 들어오는데 성공했다.[13] 다만 범현대가에서 정몽헌 회장 사망 후 현대 유니콘스에 대한 지원을 매정하게 바로 끊어버린 것은 아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이미 KIA 타이거즈를 인수해 운영하고 있던 상황에서도 현대 유니콘스의 운영비 절반 수준인 80억원을 지원하는 등 사실상 2개 구단을 운영하다시피 했다. 사실 정몽구 회장은 2001년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려고 시도했지만 당시 구단 대주주였던 하이닉스반도체가 인수대금 900억을 부르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됐고, 대신 싸게 매물로 나온 해태 타이거즈기아자동차 명의로 인수해 프로야구에 진입했다. 이마저도 현대차그룹은 환율 하락으로 인한 자동차 수출시장 악재, 노조 파업, KIA 타이거즈 운영비 등의 이유로 지원을 중단한 것이다. 범현대가 중에서 특이하게 야구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40억원의 운영비를 지원해주고 해체 직전까지 유니폼, 헬멧, 경기장 펜스 등에 현대해상 광고를 붙이는 방법으로 자금을 지원해줬던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은 유니콘스 해체 이후 재창단 된 히어로즈와도 몇년간 광고 스폰서쉽을 유지하는 등 여러모로 노력하였으나 한계가 있었다. 반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다른 범현대가 형제들이 유니콘스 구단에 어떻게든 지원해주려고 노력하는 와중에도 정몽헌 사후 유니콘스 구단에 대한 지원을 모두 끊고 관심조차 가지지 않았으며, 구단 대주주였던 현대전자하이닉스반도체로 재출범한 뒤로 구단에 단 한 푼도 지원을 해주지 않고 사실상 나몰라라 하는 식으로 해체될 때까지 방치하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현대 해체 후 재창단된 히어로즈를 응원하는 올드 팬들 사이에서는 현정은 회장, 그리고 하이닉스에 대한 인식이 현재까지도 나쁜 편이다.[14] 이 때의 앙금인지 2021년 정상영 명예회장이 작고했을 때도 현정은 회장과 현대그룹 측에서는 조문을 전혀 오지 않았다.[15] 당시 범현대가 계열 기업들은 현대건설 인수 과정에서 암암리에 정몽구 측을 지지했다는 후문이다.[16] 대표적으로 2014년 해운업 위기 당시에 한진그룹조양호한진해운을 살리기 위해 사재까지 털어가며 적극적으로 대응한 것과 달리 현대상선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라는 VIP나 다름없는 거래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 기업으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지 못했다.[17] 물론 현대상선이 당시에도 국내 2위의 국적선사였기 때문에 수많은 물동량을 감당하려면 현대상선과의 거래는 필수였다.[18] 사실 형제간에, 친척간에 사이가 안좋은 일부 케이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재벌들은 웬만해서는 서로 같은 형제기업이나 친척기업끼리 밀어주고 당겨주면서 공생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례이다.[19] 구 현대엠엔소프트[20] 2017년 12월 현대H&S를 인수, 법인 사업 및 유니폼 사업에도 진출함.[21] 여기가 아니라면 마찬가지로 현대백화점그룹 계열인 한섬에서 유니폼을 제작 또는 구매해서 납품해주기도 한다.[22] 다만 정주영 명예회장은 전두환을 좋게 보지 않았다. 일해재단을 비롯해서 정치자금을 상당히 많이 강요 받았기 때문. 이는 노태우도 동일했으며 결국 직접 정치까지 하는 원인이 되었다.[23] 최불암, 강부자 등 연예계 인사들 역시 정주영에게 공천되어 당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다.[24] 14대 대선에서 낙선한 정주영은 동생인 정세영 현대그룹 회장을 대신 보내 사과했지만 김영삼은 취임 이후 대출 규제 등 현대그룹 측에 각종 정치보복을 단행한다. 이는 현대그룹이 훗날 김대중 및 민주당계 정당과 한동안 행보를 같이 하는 원인이 된다.[25] 다만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초기에는 김대중 대통령 및 여당 새정치국민회의와 사실상 행보를 같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문민정부 시절 현대그룹이 당한 온갖 정치보복,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 등으로 현대그룹이 추진하던 대북사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중론.[26] 범현대가에 속하지는 않지만 현대건설 사장이었던 이명박은 대통령 당선에 성공했다.[27] 정주영의 장남 정몽필 슬하엔 딸 2명만 있고 아들이 없었으며, 정몽필이 교통사고로 요절하자, 사실상 차남이었던 정몽구가 장남 취급을 받았다. 이 때문에 정주영은 정몽필 생전에는 정주영-정몽필-(정몽구를 건너뛰고)-정의선으로 회장직을 승계하는 것을 염두에 두기도 했다. 따라서 만약 정몽필이 죽지 않았다면 큰아버지인 구본무의 양자로 입적해 회장직을 물려받은 LG가의 구광모처럼 정의선 역시 큰아버지 정몽필의 양자로 입적했을 가능성도 있다.[28] 담낭 절제술로 인한 병역 면제. 담낭염을 앓던 모친의 유전적 영향으로 보인다.[29] 평범한 농사꾼이었으며 정주영의 할아버지는 서당 훈장이었다.[30] 장남 정몽필의 생모. 정주영이 변중석과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여자다.[31] 정주영의 배우자로, 차남 정몽구, 3남 정몽근, 장녀 정경희, 4남 정몽우, 5남 정몽헌만 낳았다. 장남 정몽필은 변중석이 시집 오기 전에 먼저 태어나 있었다.[32] 1978년 정몽준의 생모라고 주장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사망했을 시 1978년 이후 사망이다.[33] 6남 정몽준의 생모.[A] 아들들의 생모가 모두 다른 인물이라는 얘기가 유력하다. 정체에 대해선 아직도 다양한 설이 많으며, 여러 예술인들이나 일반인들의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35] 7남 정몽윤의 생모.[A] 아들들의 생모가 모두 다른 인물이라는 얘기가 유력하다. 정체에 대해선 아직도 다양한 설이 많으며, 여러 예술인들이나 일반인들의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37] 8남 정몽일의 생모.[A] 아들들의 생모가 모두 다른 인물이라는 얘기가 유력하다. 정체에 대해선 아직도 다양한 설이 많으며, 여러 예술인들이나 일반인들의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39] 차녀인 정정인과 3녀인 정정임의 생모. 딸의 미국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생계가 힘들다고 한다.[40] 1982년 4월 29일, 경북 김천시 아포읍 근처를 지나던 중 경부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향년 48세.[41] 전 아나운서, 유방암으로 1990년 9월 25일 사망. 향년 47세.[42] 사내 결혼이었다고 전해진다.[43] 대일외고, 이화여대 수석입학.[44] 초등학교 동창으로 김석원쌍용그룹 회장 장남. 과거 방송인 김성경과의 열애설 보도로 보아 이혼 또는 별거로 추정된다. 자세한 내용은 범쌍용가 참고.[45] 2009년 10월 5일 미국에서 담낭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70세.[46] 선호영(선병원 설립자)의 아들, 부자가 모두 정형외과 의사다.[47] 배우 길용우의 아들.[48] 채몽인 애경그룹 창업주와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의 손녀이자 채몽인과 장영신의 장남인 애경그룹 총괄부회장 채형석의 차녀.[49] 종로학원 설립자 정경진의 장남.[50] 평사원 출신으로 신데렐라라고 불렸다. 현대하이스코 사장까지 초고속 승진을 하고, 실적도 좋아서 현대하이스코를 물려주기로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이혼하게 되면서 백지화 되었다. 하이스코 역시 현대제철에 합병되었다. 현재는 부친이 차린 1차 협력사 삼우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51] 포뮬러 3 드라이버로 활동 중[52] 정도원 삼표그룹 회장의 장녀. 정의선 부회장의 처제 정지윤은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장남 박성빈과 결혼했다.[53] 정의선의 사촌동생인 현대백화점 정지선과는 동명이인이고, 성별도 다르다. 같은 정씨인데다 이름까지 현대백화점 정지선과 같아서 처음에는 집안 어른들이 반대했지만 집안 최고어른이자 할아버지인 정주영 회장이 본이 다르기 때문에(이쪽은 김포 정씨이다.) 괜찮다고 허락했다고 한다.[54] 김덕중 전 교육부장관의 손자. 자세한 내용은 범대우가 참고.[55] 여담으로 드라마 영웅시대에 유일하게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다.[56] 30대 그룹 총수중 최연소였으나 1978년생인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취임으로 밀려났다.[57] 법무부장관 황산덕의 손녀.[58] 현대차에 스프링을 개발·공급하는 자동차 부품 전문 기업인 대원강업 허재철 회장의 장녀.[59] 입사동기가 무려 전직 대통령이다.[60] 주 분야는 수상 운송업이며,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스키장 스타힐리조트를 운영하고 있다.[61] 학생 때 스키 선수를 한 적이 있다.[62] 스타힐리조트 정면 슬로프 중앙에 비비안 광고 간판이 십수년째 서 있다.[63] 1990년 4월 24일 음독 자살하였다.[64] 숙명여자대학교 메이퀸 출신.[65] 2016년 기사 갑질 논란…정일선 사장, 수행기사 3년간 12명 교체 참고.[66] 구자엽의 딸이자 구태회의 손녀이다. 자세한 내용은 범LG가 참조.[67] 김영무 김앤장 대표의 장녀. 시어머니 이행자는 설립자겸 고문.[68] 구 현대BS&C.[69] 8월 4일 투신자살, 향년 54세. 사후에는 아내가 회장이 되었다.[70] 현대상선 대표 현영원와 용문학원 이사장 김문희 부부의 차녀. 김문희가 김무성의 이복누나이니 김무성의 외조카가 되는 셈이다.[71] 신현우 전 국제종합기계 대표이사와 신혜경 서강대 일본학과 명예교수의 차남. #[72] 김인 새마을금고중앙회장의 차남. #[73] 김동조 前 외무부장관 막내딸.[74] 철강업체 유봉 대표이사. 그의 누나(서지원, 1969)는 현 두산그룹 부회장 박지원의 아내이다.[75] 정몽주니어로 유명한 사람이다.[76] 부국물산 회장 김진형의 장녀.[77] 김인규KBS 사장, 前 경기대 총장의 아들.[78] 현대파이낸스 회장 권영찬의 딸.[79] 2019년 기사 '변종마약 투약' 현대가 3세 체포.."조사받으려고 귀국" 참고.[80] 2012년 기사 대마초 피운 현대가 3세는 정몽일 현대기업금융 회장 딸? 참고.[81] 할리우드에서 그레이스 정이라는 이름으로 단역 배우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82] 당시 정주영의 나이 65세였다. 엘리자베스 정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에 살며 토요타 미국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하고 있다고 한다.#[83] 이재성 현대중공업 사장의 아들.[84] 백지연 아나운서의 아들.[85] 1990년 9월 30일 경기도 광주시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향년 54세.[86] 1993년 10월 9일 태릉 아이스링크 선수 대기실에서 일어난 불의의 화재 사고로 딸과 함께 중화상을 입고 투병하다가 사망. 사고 당시 김씨는 불과 37세, 정지은은 11살 어린 나이에 불과해 더욱 안타까움을 남긴다.[87] 화재사고로 죽은 딸. 일본으로 건너가 치료를 받다가 1993년 11월 8일 사망했다.[88] 진영심 소생.[89] 조동길의 아들이자 이인희의 손자이다. 자세한 내용은 범삼성가 참조.[90] 2013년 기사 현대家 또 대마초, 마약 천국?… 현대 성우효광그룹 장남 구속 참고.[91] 김성수의 막내 아들인 김상겸 고려대 명예교수의 딸. 김상겸 교수는 고려대 체육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98년 나가노동계올림픽 한국선수단장을 맡았다. 자세한 내용은 동아일보/오너 일가 참고.[92] 2009년 기사 천방지축 재벌 3세 ‘現代 이미지’ 먹칠...대마초흡입 혐의로 집행유예 선고 참고.[93] 한일시멘트에게 인수된 이후 현대시멘트에서 한일현대시멘트로 사명변경 https://www.mk.co.kr/news/business/view/2018/07/452929/ 참고.[94] 노신영 前 국무총리의 아들.[95] 김성두 전 대한화재보험 사장의 딸. 미국 국적자로 한국명은 김나영.[96] 치과의사로 알려졌다. #[97] 섬유생산업체 전남방직 회장이던 김석성의 아들. 김석성은 김무성의 사촌형으로,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의 외당숙이며,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에게 있어 김종엽은 육촌동생이다.[98]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독일 함부르크 대학교로 유학을 갔고 거기서 교통사고로 인해 발생한 장폐색증으로 1962년 4월 14일 사망.[99] 독립운동가 집안 출신이다.[100]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의 외조카로, 2022년 9월 7일 서울가정법원에서 실시한 정몽익 측과 최은정 측의 이혼사건의 조정 성립으로 재판상 이혼에 준하여 조정성립일을 기해 이혼처리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이혼소송 과정에서 정몽익 측이 2012년 경 이후 가출하여 내연녀(현 배우자)와의 사실혼관계를 통한 혼외아들 2명 출산 사실 등이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범롯데가 참고.[101] 이하 현 배우자 곽지은 소생. #[102] 가족 관계 출처.[103] 사망했다면 1935 이후.[104] 장녀로 추정된다.[105] 가족 관계 출처.[106] 변중석 여사를 정주영에게 소개시켜 준 숙부가 바로 이 숙부다.[107] 가족 관계 출처.[108] 장남 또는 차남으로 추정된다.[B] 여섯째 숙부의 자녀가 아닐 수도 있다.[B] [B]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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