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밥 딜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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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F. 토마스 하버드 대학교 문학 교수가 말하는 “왜 밥 딜런이 중요한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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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밥 딜런에 대한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평가
에스콰이어 1965년 9월호 표지[1] |
롤링 스톤은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아티스트 2위에 꼽았고 2015년에는 롤링 스톤 선정 100대 송라이터 위대한 송라이터 1위로 꼽기도 했다. 음악 통계 사이트인 어클레임드 뮤직에서는 비틀즈에 이어 역대 아티스트 랭킹 2위, 2006년 미국 음악 잡지 페이스트 선정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 100인 중 1위, 2014년 LA위클리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송라이터 20인중 1위, VH1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5위를 기록, 2007년 Q 매거진 편집자 선정 '음악사를 바꾼 21인'에, 1999년 타임지에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말론 브란도,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비틀즈 등과 함께 선정되었고, 스미스소니언 잡지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100명의 미국인들 중 밥 딜런을 포함시켰다. 음악가 중에선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롤링 스톤스, 데이비드 보위, 마이클 잭슨 등과 함께 대중음악사 최정상에 위치하며 대중음악의 가사를 문학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포크를 현대 예술로 탈바꿈시킨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밥 딜런은 1962년 데뷔 이후 모든 년대에 지속적으로 명반을 만들어냈고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많은 생산력과 창작력 그리고 발전을 보여주면서 영향력과 인기를 유지했다.[2]
이 정도로 긴 시간동안 꾸준하게 쉬지 않고 다작을 하면서 명반을 만들어낸 아티스트는 대중음악계에서 거의 없다.[3] 왜냐하면 모든 레전드급 대중음악 아티스트들은 음악적으로 전성기가 지나고 침체기가 오는데 이를 극복하고 다시 음악성이 부활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레전드급 대중음악 아티스트들은 갑작스레 요절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욱 그런 것도 있다.[4]
밥 딜런도 예외없이 80년대 중반의 침체기에 들어섰지만 80년대 후반의 ‘Oh Mercy’라는 명반을 내며 재기를 시도했고 90년대 후반의 ‘Time Out of Mind’로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고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까지 수상하며 다시 커리어가 부활했다. 이때부터 낸 앨범들은 크리스마스 앨범을 제외하면 모두 수작 내지 명반이라는 평을 듣는다.
무려 60년에 가까운 본인의 어마어마하게 긴 커리어 동안 최고의 음악성을 보여주고 있고 본인의 침체기를 극복하고 고령임에도 연달아 명반들을 쏟아내며 최고의 아티스트의 지위를 유지했다는 것만으로도 밥 딜런의 독보적인 위대함과 경이로운 창작성을 보여 준다.
딜런의 앨범들은 수많은 매체에서 명반으로 등재되어 있다. 롤링 스톤이 선정한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에는 그의 앨범이 10장이나 등재됐고 어클레임드 뮤직이 산정한 3,000위내 가장 많은 명반을 보유한 아티스트 중 하나이며 또 이들의 통계에 의하면 밥 딜런은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훌륭한 앨범을 내놓은 아티스트다.
음악 참고서인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에서는 7개가 등재, NME 선정 500대 명반에는 7개가 등재, 피치포크가 선정한 연대별 최고의 음반 리스트에는 60년대 4개[5], 70년대 1개[6], 90년대 1개[7] 총 6장의 앨범이 명반으로 등재되어 있다. 음악 리뷰 사이트 Rate Your Music의 1위부터 1000위까지의 모든 앨범 중 6개가 밥 딜런의 앨범이다.
딜런은 많은 음악 장르의 정수로 여겨진다. USA 투데이 저널리스트 에드나 건더슨은 "딜런의 음악적 DNA는 1962년부터 거의 모든 대중 음악의 변화를 알려왔다."라고 말했다. 펑크 음악가인 더 클래시의 조 스트러머는 딜런이 "서정, 멜로디, 진지함, 영적, 록 음악의 깊이를 위한 견본을 내려놓았다"고 말했다. 호주의 비평가 잭 막스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은 딜런이 믹 재거부터 에미넴까지 모든 사람들이 딜런 핸드북으로 교육을 받으면서 그 이후로 록에서 지배적인 스타일이었던 오만한 스타일을 발명했다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딜런이 록 스타의 성격을 바꾼 것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록 뿐만 아니라 힙합에도 영향을 줬는데 많은 사람들은 딜런의 음악, 특히 딜런이 작곡한 "Subterranean Homesick Blues"을 랩의 초기 연결고리로 본다.[8]
대중 음악사 최정상의 아티스트답게 그에게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매우 많다. 2017년 음악 최대 데이터베이스 사이트 올뮤직의 카탈로그를 연구한 결과, 밥 딜런은 데이터베이스에서 솔로 뮤지션으로서 가장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났다.[9]
그에게 영향을 받은 굵직한 아티스트만 말하자면 비틀즈 존 레논은 “밥 딜런이 비틀즈의 음악을 통째로 변화시켰다”고 고백한 바 있고 지미 헨드릭스, 롤링 스톤스, 조니 캐쉬, 더 클래시, 그레이트풀 데드의 제리 가르시아[10], 더 후의 피트 타운젠드[11], 닐 영[12], 루 리드, 브루스 스프링스틴, 데이빗 보위, 사이먼 앤 가펑클, 레너드 코헨, 록시 뮤직의 브라이언 페리, 패티 스미스, 닉 케이브, 핑크 플로이드의 시드 바렛, 톰 웨이츠, 조니 미첼, 톰 페티, 더 밴드, 버즈, U2 등이 밥 딜런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의 음악적 영향력을 <뉴스위크>는 70년대의 가수들 이를테면 폴 사이먼, 브루스 스프링스틴, 이글스, 닐 영, 도노반, 돈 매클레인[13], 조니 미첼[14] 등을 팝 역사는 다른 말도 아닌 '딜런의 자식들'로 분류했다. R.E.M., 벡에서부터 징징거리는 기타 소리의 헤비 메탈 밴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뮤지션들을 '딜런의 후예'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밥 딜런이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노랫말 때문이다. 그는 낱말 하나 하나에 의미를 부여했고 자유롭게 써내려가면서도 깊이 있는 메시지를 쾌척했다. 대중 가요에 부재했던 철학이 있었고 그런 만큼 난해하기도 했다.
그의 가사에 담긴 정확한 의중을 어떻게 알아내느냐에 대한 어려움은 더욱 그를 전설로 만들었다. 대중 음악가들은 밥 딜런의 경이로운 언어 세계를 접하면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것 못지 않게 가사가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깨달았다.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는 밥 딜런에 대한 가사를 감상하고 분석하는 강좌들이 개설되어 있다. 특정 대중음악인이 대학의 커리큘럼으로 등장한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그로 인해 대중 음악의 가사는 롤링 스톤 평론가의 말대로 '하루살이에서 성경으로' 그 수준이 도약했다. 그것은 팝과 록이 전에 없던 '품위와 격조'를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지미 카터 대통령과 체코의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영문학계에서는 그의 노랫말을 텍스트로 하는 학위 논문이 제출되기 시작했고, 강의가 개설됐다. 예를 들어, 다트머스 대학교의 루 렌자 영어학 교수는 1970년대 중반부터 딜런에 관한 수업을 가르치며 그의 음악을 시로 인정하며 분석하고 있었고 또 문학계 일부에서도 시로 인정하는 움직임이 일었다.
현재는 대학 강의에서 밥 딜런의 노랫말이 문학 텍스트로 활용됨은 물론, 다른 문학가들과 동등하게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며 털사 대학교에서는 그의 인생, 음악, 영향력을 연구하기 위한 연구소까지 나왔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가 밥 딜런을 수상자로 결정한 이유 역시 “미국 음악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로, 그들도 시인으로서 밥 딜런의 공로를 인정했다.
또한 영문학 분야 가장 권위 있는 문학 선집으로 알려진 『노튼 앤솔러지』에도 딜런의 가사가 실려 있다. 〈스페인산 가죽 부츠(Boots of Spanish Leather)〉가 『노튼 시선집(The Norton Anthology of Poetry)』(2005)에,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이 『노튼 문학 입문집(Norton Introduction to Literature)』(2010)에 수록됐다.
1998년에 밥 딜런의 가사는 스탠퍼드 대학교가 후원하고 개최한 '밥 딜런에 관한 최초의 국제 학술회의'에서 학계와 시인들에게 상세히 연구되기 시작했다. 2004년 하버드 대학교의 고전 문학 교수 리처드 토마스는 "딜런"이라는 제목의 1년생 세미나를 만들어 개설한 강의는 딜런의 예술세계를 탐구하면서 고대문학을 함께 다뤘다.
그가 딜런의 음악에서 고전 시 코드를 읽어낸 건 2001년부터다. 당시 딜런이 발표한 신곡 ‘론섬 데이 블루스’를 들으며 고대 로마시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대서사시 ‘아이네이스’를 떠올린 것이다. 2006년에 나온 앨범 ‘모던 타임스’에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시 구절이 18구절이나 인용돼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토머스 교수는 뉴욕타임즈 인터뷰에서 “딜런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라틴어를 배웠다. 가사를 보면 라틴어 문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2004년 토머스 교수가 딜런의 영상과 노래를 교재로 고전 시를 가르친다고 했을 때 동료 교수들은 “가수 딜런 노래로 고전문학을 가르친다고?”라며 비웃었다. 심지어 학교위원회는 강좌 개설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그는 “딜런은 단순한 가수가 아니다. 그는 문학과 음악이라는 이질적인 영역을 통섭한 문화 현상 그 자체”라며 교수들을 설득했고 결국 세미나가 만들어젔다.
토머스 교수의 수업은 한 학기 동안 딜런의 생애를 따라가는 여정이다. 교재는 딜런의 앨범과 영상이다. 강의계획안에는 “그의 가사를 통해 생명력이 긴 문학과 음악 문화를 배우며 베르길리우스와 호메로스 등 고대 작가의 작품을 다룬다”고 안내돼 있다. 학생들은 발표와 함께 토론에 적극 참여해야 하고 학기 말에는 2,500단어 분량의 리포트를 내야 한다.
2007년 영국의 계관시인[15] 앤드류 모션은 그의 가사가 학교에서 공부되어야 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2009년 캘리포니아 대학교/샌디에이고 캠퍼스의 문학 학자이자 독일 비교 문학 교수인 윌리엄 아칸더 오브라이언은 '딜런'이라는 이름으로 학문적 강의를 개설하고 세계 문학에 기여한 딜런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미적, 문화적 중요성"을 기념했다.
제레미 유드킨 보스턴 대학교 음악학 교수와 케빈 베렌츠 문학 교수는 보스턴 대학교에서 "밥 딜런: 음악과 단어"라는 새로운 강의를 만들어 가르친다. 문학 평론계 최고의 평론가 중 한 명으로 간주되는 크리스토퍼 릭스는 밥 딜런의 작품을 분석하고 500페이지 분량의 책 'Dylan's Visions of Sin'를 공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딜런을 언어적으로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나는 딜런에 관한 책을 존 밀턴, 존 키츠, 알프레드 테니슨, 토마스 스턴스 엘리엇에 관한 서적과 함께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학자들까지 그의 가사를 논문에 인용을 많이 해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16][17]
그는 어렸을 때 시인 랭보를 좋아했고 지금의 이름도 영국 시인인 딜런 토머스에게서 따올 정도로 시와 가까이 있었다. 때로는 가사가 비유와 상징을 사용해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경우도 있지만 저항정신을 담으면서도 사회와 인간, 인생을 바라보는 따뜻함을 잊지 않았다.
시대와 주류에 맞서는 저항성에 예술성이 더해지면서 그의 노래의 진정성은 진가를 발휘했다. 창법도 때로는 음정과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읊조리듯 불러 아티스트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존 레논 역시 소년과 소녀의 사랑 얘기밖에 몰랐는데 그의 음악을 듣고 나서 인생, 사회, 종교에 대한 노랫말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1960년 보헤미안들의 성지였던 그리니치 빌리지에 정착한 그는 우디 거스리와 그곳에 거주하고 있는 포크 커뮤니티의 정치적 성향에 자극받아 저항적, 사회 비판적 성격을 띤 포크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본인은 그리니치 빌리지에 안 갔더라면 이런 노래들을 결코 부르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한 바 있다)
1962년 밥 딜런은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존 해먼드에 의해 컬럼비아 레코드에서 데뷔 앨범을 낸 후, 1963년 《프리휠링 밥 딜런The Freewheelin’ Bob Dylan》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다. 이 앨범에는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비롯한 〈전쟁의 지배자들(Masters of War)〉[18] , 〈궂은 비가[19] 쏟아지네(A Hard Rain’s A―Gonna Fall)〉 등 지금까지 불리는 수많은 곡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앨범으로 밥 딜런은 저항의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된다.
1960년대는 세계사적 전환기였다. 선발 제국주의 국가와 후발 제국주의 국가가 맞붙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세계는 동서로 분할되고, 냉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이념의 각축장이 된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거대한 두 개의 제국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두 개의 제국 어디에도 진정한 자유와 평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저항이 196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이 시기 미국의 현실을 가장 정확하게 노래한 사람이 바로 밥 딜런이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에도 영향을 준 ‘Blowin‘ in the Wind’(바람만이 아는 대답)과 ‘The Times They Are a-Changin’과 같은 노래들은 사회상을 잘 보여주는 저항적 노랫말로 시민권을 대표하는 곡이 되었다. 이러한 가사들로 한국에선 밥 딜런은 저항의 아이콘, 반전가수로 인식되었다.
또 딜런은 장르적으로 포크, 록, 컨트리, 블루스에 걸쳐 있으며, 포크록을 창시해 1960년대 청춘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포크록의 전형을 보여준 ‘Highway 61 Revisited’와 ‘Blonde On Blonde’ 앨범은 포크의 저항성과 록의 마이너(하위문화)를 결합한 것이다.
노랫말과 록 사운드를 공유한 포크 록은 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젊은이들의 주요 음악 문법으로 일세를 풍미했다. 포크 페스티벌에서 밥 딜런이 일레트릭 기타를 연주한 사건이 1999년 <뉴스위크>에 의해 '금세기의 사건'으로 꼽힌 것도 이 때문이다. 음악적으로 그는 비단 포크록을 퍼뜨린 것뿐 아니라 록과 컨트리 음악을 융합한 '컨트리 록'을 시도해 후배들이 뒤따르게 했다. 이 부문의 뮤지션들, 이를테면 이글스, 잭슨 브라운, 린다 론스태드, 포코 등도 엄밀히 따지면 딜런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3. 관련 어록
"밥 딜런이 대중 음악에 끼친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작곡가로서, 그는 대중 음악 작곡의 여러 다른 학파들을 개척했다. 보컬리스트로서, 그는 가수가 공연을 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좋은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무너뜨렸고, 대중 음악에서 보컬리스트의 역할을 재정의했다.
음악가로서, 그는 일렉트릭 포크 록과 컨트리 록을 포함한 여러 가지 대중 음악의 장르들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성취의 일부분이다. 딜런의 힘은 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동안 분명했다.
60년대 중반 비틀즈의 자기성찰적인 작곡으로의 전환은 그가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며, 또 그의 영향력은 그의 많은 노래들은 대중적인 음악의 최고의 기준이 되었고 그의 최고의 앨범들은 의심할 여지 없는 록앤롤 경전의 고전이 되면서 몇 세대에 걸쳐 반향을 일으킨다.
포크 전반에 걸친 딜런의 영향력은 똑같이 강력했으며, 20세기 진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또 포크라는 장르가 전통적인 노래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작곡으로 옮겨갔을 때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했다. 또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판매량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딜런의 존재감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90년대 후반, 2000년대에는 상업적 그리고 음악적으로 다시 부활하며 그의 저력이 증명됐다."
― 올뮤직
음악가로서, 그는 일렉트릭 포크 록과 컨트리 록을 포함한 여러 가지 대중 음악의 장르들을 촉발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성취의 일부분이다. 딜런의 힘은 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동안 분명했다.
60년대 중반 비틀즈의 자기성찰적인 작곡으로의 전환은 그가 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것이며, 또 그의 영향력은 그의 많은 노래들은 대중적인 음악의 최고의 기준이 되었고 그의 최고의 앨범들은 의심할 여지 없는 록앤롤 경전의 고전이 되면서 몇 세대에 걸쳐 반향을 일으킨다.
포크 전반에 걸친 딜런의 영향력은 똑같이 강력했으며, 20세기 진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또 포크라는 장르가 전통적인 노래에서 벗어나 개인적인 작곡으로 옮겨갔을 때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했다. 또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판매량이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딜런의 존재감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90년대 후반, 2000년대에는 상업적 그리고 음악적으로 다시 부활하며 그의 저력이 증명됐다."
― 올뮤직
"20세기 대중음악의 발전에 대한 가수 겸 작곡가로서의 밥 딜런의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그의 업적은 50년 넘게 끊임없이 변화하는 창의력을 포함하고 있으며 지속적인 혁신을 보이는 동시에 미국의 음악 전통에 확고히 뿌리를 두고 있다."
― 폴라음악상[20]
― 폴라음악상[20]
"And now Dylan has entered that pantheon, shoving against the boundaries of the definition of ‘literature’ just as he pushed past so many borders in music."
"밥 딜런은 이제 만신전에 올랐다. 음악에서 수많은 경계를 밀어냈듯이 '문학'의 정의라는 경계를 힘차게 밀어내면서."
― LA 타임스, 2016년
"밥 딜런은 이제 만신전에 올랐다. 음악에서 수많은 경계를 밀어냈듯이 '문학'의 정의라는 경계를 힘차게 밀어내면서."
― LA 타임스, 2016년
"20세기 말 가장 위대한 시인."
― 앨런 긴즈버그, 시인[23]
― 앨런 긴즈버그, 시인[23]
"아마도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시인일 것이다."
― 펫 와스트버그, 작가 /스웨덴 한림원 회원[25]
― 펫 와스트버그, 작가 /스웨덴 한림원 회원[25]
"밥 딜런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학 예술가이다. 그의 언어 사용은 특별하고, 그는 다른 어떤 것과 달리 상당한 시적 작품을 창조했다. 비록 그의 주된 매체는 음악과 공연이지만, 그의 필사된 작품은 정교한 시적 감수성과 기술을 보여준다. 그의 시는 주로 말의 상호작용에 관한 것이다: 말, 운, 어법, 그리고 언어의 인식 그 자체로 표현과 사물의 형태로써의 언어 그 자체이다."
(중략)
"밥 딜런의 작품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20대에 썼던 곡들 중 몇 곡만이 아니라 그의 반복적인 주제와 스타일들을 따라 그의 작품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의 2012년 앨범 'Tempest'는 1963년의 'The Freewheelin' Bob Dylan'과 현저하게 다른데, 이 앨범에는 여전히 초기 앨범의 메아리가 담겨 있다. 밥 딜런은 1960년대에 여러 개의 영향력 있는 노래를 작곡한 '시대의 목소리'라기 보다는 영문학의 주요 작가이다. 딜런은 이 시기의 노래들로 항상 기억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노래들은 미국 역사에서 매우 강력하고 중요한 시기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혁명적인 행동은 시를 재창조하고 그것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50년이 넘는 그의 글쓰기 경력 동안, 우리는 1960년대의 멋진 노래들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또한 1997년부터 현재까지 그의 가장 최근의 작품들은 거의 틀림없는 가장 강력한 작품들로 고려해야 한다. 이 후기 작품들은 시인의 눈과 기술을 가진 뛰어난 장인의 작품들이다. (중략) 밥 딜런은 시대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는 1960년대 초의 스타로서의 지위를 넘어서, 일렉트릭과 어쿠스틱 모두를 아우르는 작업을 한 오늘날까지 그의 작품이 울려 퍼진 시인이다."
― 글로브 앤 메일[26]
(중략)
"밥 딜런의 작품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가 20대에 썼던 곡들 중 몇 곡만이 아니라 그의 반복적인 주제와 스타일들을 따라 그의 작품 전체를 고려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의 2012년 앨범 'Tempest'는 1963년의 'The Freewheelin' Bob Dylan'과 현저하게 다른데, 이 앨범에는 여전히 초기 앨범의 메아리가 담겨 있다. 밥 딜런은 1960년대에 여러 개의 영향력 있는 노래를 작곡한 '시대의 목소리'라기 보다는 영문학의 주요 작가이다. 딜런은 이 시기의 노래들로 항상 기억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노래들은 미국 역사에서 매우 강력하고 중요한 시기에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가장 혁명적인 행동은 시를 재창조하고 그것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50년이 넘는 그의 글쓰기 경력 동안, 우리는 1960년대의 멋진 노래들의 중요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또한 1997년부터 현재까지 그의 가장 최근의 작품들은 거의 틀림없는 가장 강력한 작품들로 고려해야 한다. 이 후기 작품들은 시인의 눈과 기술을 가진 뛰어난 장인의 작품들이다. (중략) 밥 딜런은 시대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는 1960년대 초의 스타로서의 지위를 넘어서, 일렉트릭과 어쿠스틱 모두를 아우르는 작업을 한 오늘날까지 그의 작품이 울려 퍼진 시인이다."
― 글로브 앤 메일[26]
"문학과 대중음악의 개척자인 그는 유럽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리듬을 처음으로 융합시켰고, 이후 세대의 음악가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혁명을 일으켰다."
― 아스투리아스 공상[27]
― 아스투리아스 공상[27]
"밥 딜런의 절충적이고 다차원적인 작곡은 미국 대중음악의 모든 장르에서 널리 찬양되고 존경 받아왔다. 그의 가사와 음악은 포크, 컨트리, 블루스, R&B, 스탠다드 팝 및 재즈 등 모든 장르의 영향을 줬다. (중략) 미국 음악의 가장 위대한 아이콘 중 하나인 밥 딜런은 진정한 시인이자 작곡가이다."
―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29]
― 송라이터 명예의 전당[29]
"딜런의 음악에 대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는 라디오의 녹음된 시간은 3분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뒤집었습니다.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곡들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습니다. 수십 년 전에 녹음했을 때만큼 오늘날에도 그의 음악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공정하게 말하면, 여전히 현 시대의 관련있는 몇몇 송라이터가 있지만, 여기 오직 하나만이 있습니다. - 딜런 - 그의 시는 때때로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았습니다."
― CNN[30]
― CNN[30]
"그의 음악은 음악으로만 보면 안 된다. 그것은 대중음악의 정신혁명과 관계한다. 그의 음악은 20세기 모더니즘의 가장 강렬한 분출이다. 이 점을 빼놓고는 왜 그의 음악과 앨범이 명작인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그레일 마커스 (평론가), <보이지 않는 공화국> 中
그레일 마커스 (평론가), <보이지 않는 공화국> 中
밥 딜런의 발자취는 거대하다. 그 이름은 마치 선대의 성인(聖人)처럼 하나의 위엄으로 우리를 억누른다. 딜런과 그의 음악을 피해 가는 것은 ‘록 역사에 대한 접근’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중략)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임진모, 1999년[31]
(중략)
전설로 숭앙하는 것은 그가 대중 음악계에서는 보기 드문 ‘음악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음악인의 최고 영예인 ‘아티스트’란 소리를 들어 마땅했다.
그는 록에 언어를 불어넣었다. 포크와 컨트리를 록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시대와 맞서기도 했고 자신의 예술성에 천착하기도 했다. 그러한 업적과 성과의 편린들이 모여 그의 ‘광활한 아티스트의 세계를 축조하고 있다.
밥 딜런은 역사의 수혜와 위협 속에서 ‘인간’을 살려냈다. 음악인으로서 인간의 몸체는 다름 아닌 자유일 것이다.
밥 딜런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 임진모, 1999년[31]
"밥 딜런의 상호 문맥에서, 그는 베르길리우스나 오비디우스와 같습니다: 전통에서 충분히 늦게 왔고 그 뒤에 충분한 전통을 가진 사람. 그것을 통제할 수 있고, 그 일부가 될 수 있고, 그것을 다시 만들고,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카툴루스[33]나 베르길리우스같은 시인과 밥 딜런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다고 봅니다. 나는 그들이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언어의 통제, 가사와 멜로디를 연결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을 초월한 것입니다."
― 리처드 F. 토마스, 하버드 대학교 고전 문학 교수[34]
― 리처드 F. 토마스, 하버드 대학교 고전 문학 교수[34]
"그는 작곡가가 항상 중요한 힘의 문화인 지난 50년 동안 가장 중요한 작곡가입니다. (중략) 60년대는 내 나이에 사람들에게 모든 문화에 부담이나 무게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더 큰 무언가로 변형되었습니다. 그것은 혁명으로 생각되었습니다. 많은 중요한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1960년대 후반, 온갖 종류의 일이 전 세계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딜런은 그 부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그 중 일부 였습니다. 표현하고자하는 것을 표현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느끼고있는 것, 생각하고있는 것의 표현으로 그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중략) 그는 1960년대 훨씬 이전에 일어난 일들에 의해 음악, 시, 글쓰기에 의해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흐름에서 완전히 쫓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일하고, 쓰고, 반성하고, 위대한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 1969년 이후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일해 왔습니다. 그래서 딜런의 작품을 더 긴 안목으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 숀 윌렌츠, 프린스턴 대학교 역사학 교수[35]
― 숀 윌렌츠, 프린스턴 대학교 역사학 교수[35]
"그의 캐논에 있는 모든 작품들이 서정적인 걸작인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전체 작품에서의 세부사항과 넓은 주제와 감정의 추가는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의 작품만큼 충격적이다. 그가 동시에 훌륭한 음악가라는 사실은 우리 시대의 가장 광범위하고 결과적인 예술가 중 한 명이라는 것이 되는것을 가능하게 했다."
― 제레미 유드킨, 보스턴 대학교 음악학 교수 & 케빈 베렌츠 보스턴 대학교 문학 교수[36]
― 제레미 유드킨, 보스턴 대학교 음악학 교수 & 케빈 베렌츠 보스턴 대학교 문학 교수[36]
"자신의 영웅성을 한사코 부인하는 대중적 영웅, 자신의 문화에 너무나 웅변적으로 도전해서 결국 반문화의 토대를 놓았으면서도 나중에는 자신이 낳은 것의 과도함에 등을 돌린 한 반항아."
― 로버트 셸턴, 뉴욕 타임즈 전속 작가
― 로버트 셸턴, 뉴욕 타임즈 전속 작가
"그의 세대의 다른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의 창조력에 가까워 지려고 애 쓰고 있었지만, 5,60대의 딜런은 새로운 힘과 영감을 얻었다: ‘Time Out Of Mind’(1997), ‘Love and Theft’(2001), ‘Modern Times’(2006) 트릴로지는 그의 20대 시절 1960년대 일렉트릭 트릴로지 이후 가장 지속적인 예술적 재능을 발한 시기다."
― 인디펜던트[39]
― 인디펜던트[39]
"밥 딜런은 귀를 위한 시를 쓴다. 그는 존 밀턴과 윌리엄 블레이크에서 이어지는 영어권 전통 속에서 위대한 시인이며, 항상 자신을 쇄신하고 새로운 신원을 창조하고 있다."
― 사라 다니우스, 현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42]
― 사라 다니우스, 현 스웨덴 한림원 사무총장[42]
"언제나 그는 제 영웅입니다. 그를 흠모하는 마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젔어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모르겠습니다."[43]
"내 롤 모델 중 하나는 밥 딜런이다. 난 그의 가사를 통해 인생을 배웠으며, 그가 늘 안주하지 않는 걸 지켜봤다. 예술가들이 정말로 뛰어나다면, 남은 생애 동안 그 재능으로 잘 살 수 있고,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선 성공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순간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실패의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들은 진정한 아티스트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늘 실패의 위험을 안고 살았다. 애플이 나에게 그런 대상이었다. 난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실패할 때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못 했다. 픽사와 내 가족, 명성을 위해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이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고도 실패한다면, 어쨌거나 최선을 다한 것이다."[44]
"나의 롤 모델은 밥 딜런 입니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죠. 누군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그는 여전히 예술가입니다. 저 역시 실패 할까봐 혹은 실패했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춘 적은 없습니다."[45]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입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합니다."[46]
"그의 방 바깥의 테라스에 함께 앉아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는 제 영웅이에요. 그래서 굉장히 긴장했지요. 한편으로는 그가 명석함을 잃지는 않았을지,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 나이가 들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기쁘게도 그는 여전히 송곳처럼 날카로웠어요. 정말 개방적이고 솔직했지요."
― 스티브 잡스
"내 롤 모델 중 하나는 밥 딜런이다. 난 그의 가사를 통해 인생을 배웠으며, 그가 늘 안주하지 않는 걸 지켜봤다. 예술가들이 정말로 뛰어나다면, 남은 생애 동안 그 재능으로 잘 살 수 있고,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선 성공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순간이 예술가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실패의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들은 진정한 아티스트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늘 실패의 위험을 안고 살았다. 애플이 나에게 그런 대상이었다. 난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실패할 때 얼마나 힘들지 상상도 못 했다. 픽사와 내 가족, 명성을 위해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왜냐면 이것이 내가 정말 원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하고도 실패한다면, 어쨌거나 최선을 다한 것이다."[44]
"나의 롤 모델은 밥 딜런 입니다. 밥 딜런과 피카소는 언제나 실패를 두려워한 적이 없었죠. 누군가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계속한다면 그는 여전히 예술가입니다. 저 역시 실패 할까봐 혹은 실패했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일을 멈춘 적은 없습니다."[45]
"밥 딜런은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시인이자 뮤지션입니다. 또한 그는 개인적으로 제 영웅이기도 합니다."[46]
"그의 방 바깥의 테라스에 함께 앉아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눴지요. 그는 제 영웅이에요. 그래서 굉장히 긴장했지요. 한편으로는 그가 명석함을 잃지는 않았을지, 많은 사람들이 그러듯 나이가 들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하지만 기쁘게도 그는 여전히 송곳처럼 날카로웠어요. 정말 개방적이고 솔직했지요."
― 스티브 잡스
"이게 바로 내가 딜런을 좋아하는 이유에요. 그는 정확히 내가 예상한 대로였어요. 그는 리허설에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나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모든 재능 있는 사람들은 공연 전에 나와 미셸과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 안달입니다. 그는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을 연주했습니다. 아름다운 연주였죠. 그는 이 일에 너무 몰두해서 새로운 편곡을 세웠고 노래는 완전히 다르게 들렸죠. 노래를 끝내고, 무대를 내려온 그는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고 흔들더니 머리를 갸웃하고, 그저 가볍게 씨익 웃어 보인 후 떠났습니다. 그게 다였습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밥 딜런에게 원하는 모습이 아닌가? 그가 싱글싱글 웃으며 비위를 맞추는 건 바라지 않잖아. 이런 행사들에 관해 좀 회의적이었으면 하지. 그러니 우리가 원하는대로 해준 거야."[47]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으로부터 U2까지 모든 가수가 밥 딜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음악사에서 밥 딜런 만큼 거대한 거인은 없다."[48]
― 버락 오바마
"그는 음악을 통해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으로부터 U2까지 모든 가수가 밥 딜런에게 빚을 지고 있다. 미국 음악사에서 밥 딜런 만큼 거대한 거인은 없다."[48]
― 버락 오바마
"그는 아마 다른 어떤 창조적인 아티스트들보다 내 세대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와 가사가 항상 귀에 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경력 동안 밥 딜런은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평화를 어지럽힌 권력자들을 불편하게 했다."
― 빌 클린턴, 1997년 백악관에서[50]
― 빌 클린턴, 1997년 백악관에서[50]
"그는 연주자로서, 작가로서, 작사가로서 미국의 우상이다... 그는 영원히 로큰롤을 바꿨다. 그는 팝송이 Like a Rolling Stone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확장시켰다."
― 프랭크 시나트라[51]
― 프랭크 시나트라[51]
"밥 딜런만큼 노벨 문학상을 받을 만한 사람은 없다. 그는 우리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시적 목소리, 시대의 음유시인, 우리의 락앤롤 셰익스피어이다. 인기 있는 작곡가가 문학의 고상한 영역과 동일하다는 개념에 비웃을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 시대의 서정적인 언어에 밥 딜런만큼 더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중략) 그는 현재 75세이며 여전히 팬들을 황홀경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비평가들과 그의 동료들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중략) 딜런의 작품의 전부는 대중가요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다른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작가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는 밥 딜런을 듣고 영원히 그들을 변화시켰다. 언제나 훌륭한 싱어송라이터 레너드 코헨, 닐 영, 그리고 폴 사이먼은 모두 그를 존경했다. 마커스 멈퍼드, 에드 시런, 테일러 스위프트, 아델 같은 차세대 스타들도 그렇다. 당신은 심지어 힙합에서 그의 생도들을 들을 수 있다. 그는 JAY-Z부터 켄드릭 라마까지 모든 사람들에 의해 이름이 확인되는 가장 존경받는 백인 작곡가이다. 소설가, 시인 및 영화 제작자는 정기적으로 그를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은 전 세계를 만져 버렸고 그런 숨 막히게 피할 수 없는 형태로 엄청난 도달 거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를 감동시켰다."
― 닐 맥코믹 텔레그래프 수석 음악평론가[52]
― 닐 맥코믹 텔레그래프 수석 음악평론가[52]
"60년 이상 비극, 배신, 죽음, 삶의 가장 큰 비극에 아름다움을 가져다주는 노래의 도덕적 인 신실함 등을 엿볼 수있는 시적인 가사로 그는 음악에 신화적인 힘을 유지해왔다."
― 더 가디언[53]
― 더 가디언[53]
"딜런은 우리 시대의 가장 순수하고 가장 지적인 목소리이다... 아무도 그처럼 명확하고 지적인 작품들을 20년이상 만들어내지 못했다."
― 헌터 S. 톰슨 (저널리스트, 곤조 저널리즘 창시자)[54]
― 헌터 S. 톰슨 (저널리스트, 곤조 저널리즘 창시자)[54]
"노래의 피카소"[57]
"그는 아마도 우리가 한 세대 동안 가졌던 가수 중 가장 세련된 가수일 것이다. 어떠한 유명 가수도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와 같은 독자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딜런은 피카소다. 그 풍부함, 범위, 그리고 모든 음악 역사의 동화다."[58]
― 레너드 코헨
"그는 아마도 우리가 한 세대 동안 가졌던 가수 중 가장 세련된 가수일 것이다. 어떠한 유명 가수도 피카소와 앙리 마티스와 같은 독자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딜런은 피카소다. 그 풍부함, 범위, 그리고 모든 음악 역사의 동화다."[58]
― 레너드 코헨
"그는 금세기 최고의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는 매우 높은 수준에서 음악신에 나타났고, 그리고 나서 (여기에 약간의 결함이 있는) 자신을 꾸준히 확장시킨다. 그는 보통 청중들 앞에서 한 발짝 더 서 있다. 그의 가사의 집중과 놀라움, 그의 멜로디의 아름다움, 말과 음악의 극적인 공감, 그의 욕망의 범위, 그의 신앙의 범위, 자기 갱생의 힘, 그의 재치, 그의 초현실주의, 경험의 진실..."
― 앤드류 모션 경 (영국의 계관시인)[59]
― 앤드류 모션 경 (영국의 계관시인)[59]
"그는 아마도 록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될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 자신의 노래를 쓰고, 음악적 상상력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고, 비틀즈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존 레논에 대한 그의 지배력 때문이다; 그의 가사와 그의 우울함. 또 그는 롤링스톤스보다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음, 그는 롤링 스톤즈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 존 퀴난 (문화 비평가, 저널리스트)[60]
― 존 퀴난 (문화 비평가, 저널리스트)[60]
"밥의 노래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밥의 가사를 읽어봐야 한다. 그것들은 삶의 기쁨과 슬픔으로 채워져 있다. 밥이 되어 노래를 하면 어느 누구도 평범하게 노래할 수 없다. 가끔 난 내가 곡을 만든 것처럼, 나인 것처럼 그의 곡을 노래한다. 난 밥과 같이 가사를 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날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 지미 헨드릭스[61]
― 지미 헨드릭스[61]
"오늘, 저는 이번 발표를 시작하기에 앞서 시인이자 가수인 딜런, 밥 딜런의 가사를 인용하고자 합니다."
― 스티브 잡스, 오늘날의 컴퓨터의 토대가 된 1984년작 Macintosh 128K의 발표장에서
― 스티브 잡스, 오늘날의 컴퓨터의 토대가 된 1984년작 Macintosh 128K의 발표장에서
"노벨 문학상은 밥 딜런의 불멸을 향한 또 다른 발걸음이다. 반항적이고 은둔적이며 예측할 수 없는 예술가/작곡가는 정확히 노벨 문학상이 있어야 할 곳이다. 그의 말재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60년 동안 나의 레퍼토리 중 밥의 곡보다 더 감동적이고 깊이, 어둠, 분노, 미스터리, 아름다움, 유머가 더 가치 있는 곡은 없었다."
― 조안 바에즈, 2016년[64]
― 조안 바에즈, 2016년[64]
"밥 딜런을 정확하고 적절하게 칭찬할 방법은 없다. 그는 우리 시대의 호메로스다. 제 2의 밥 딜런은 앞으로 몇 천년 동안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이로 인해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
― T 본 버넷 (프로듀서, 2001년/2008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 수상)[65]
― T 본 버넷 (프로듀서, 2001년/2008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상 수상)[65]
"밥은 엘비스가 여러분의 몸을 해방시킨 것처럼 여러분의 마음을 자유롭게 해주었습니다 – 그는 음악이 선천적으로 육체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지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위대한 록 음악이 만들어지는 곳이라면, 밥 딜런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밥 딜런은 나의 조국의 아버지다."[67]
― 브루스 스프링스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밥 딜런은 나의 조국의 아버지다."[67]
― 브루스 스프링스틴,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서
"이것은 1953년 윈스턴 처칠에게 수여된 이후 가장 특이한 노벨문학상이다. 아니면 가장 대담한 상이겠다. 나는 밥 딜런을 못 마땅해 하지는 않는다. 그 남자는 천재야."
― 블레이크 모리슨, 작가[70]
― 블레이크 모리슨, 작가[70]
"작가로서 나는 어떤 작가를 존경하고 영감을 주는지 정기적으로 질문을 받는다. 나는 항상 밥 딜런이라고 말한다. 그는 나에게 먼저 펜을 종이에 쓰라고 자극한 사람이었다. 시와 노래는 딜런의 모든 작품에서 교환이 가능하며 그리고 스웨덴 한림원이 그의 진정한 천재성과 문학 세계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했을 때 그것은 거의 감정적으로 나에게 매우 큰 기쁨을 줬다. (중략) 밥 딜런은 진정한 창조적인 카멜레온이자 문화적 아이콘이다. 그의 노래는 사회 논평 발라드와 살아있는 신문 문서에서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랑 노래와 네 마디의 컨트리 노래까지 다양한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그 노래가 오늘날 서정시의 조각이라고 증언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압축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문학의 특성을 확대한다."
― 브라이언 코나한, 작가[71]
― 브라이언 코나한, 작가[71]
"밥 딜런은 셰익스피어처럼,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어디에 살든, 그리고 여러분이 그것을 알고 있든 간에, 지금 우리의 뼈 속에 있습니다."
― 빌리 로체, 극작가[72]
― 빌리 로체, 극작가[72]
"나는 그가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싱어송라이터
―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싱어송라이터
"그가 시인일까요? 혹은 송라이터일까요? 같은 대답이 적용됩니다: 그는 밥 딜런입니다."
― 프랜신 프로스, 소설가[73]
― 프랜신 프로스, 소설가[73]
"지난 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문화적 변동을 구현한 음유시인인 딜런을 학계가 인정하지 않으면 그것은 팝시인을 기릴 최고의 기회를 낭비할 것이다."
― 빌 와이먼, NPR 전 예술 편집자[74]
― 빌 와이먼, NPR 전 예술 편집자[74]
"그는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가졌지만, 또한 위대한 시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의 배경음악이었다. 알다시피, 나는 세대간 사고방식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세대간의 연대가 존재하는 가장 낮은 형태의 연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0년마다, 모든 세대에는 특별한 목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확실히 내 운명에 있어서, 그것은 그였다."
― 크리스토퍼 히친스[75]
― 크리스토퍼 히친스[75]
"그는 물론 내 송라이팅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물론 그는 모든 사람의 송라이팅에 영향을 주었죠. 아무도 사랑 노래의 가사를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가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갑자기 가사에 다른 것에 대해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요."
― 톰 페티 (싱어송라이터,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76]
― 톰 페티 (싱어송라이터,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76]
"밥이 우리 일을 발명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구별하기 위해 힘든 싸움을 했다."
― 스티브 얼 (싱어송라이터)[81]
― 스티브 얼 (싱어송라이터)[81]
"당신이 딜런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지 않아. 그는 불꽃과도 같다. 그를 손에 쥐려고 하면 화상을 입을 것이다. 딜런의 변화와 끊임없는 실종과 끊임없는 변혁은 그를 붙잡고 그를 꼼짝 못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의 팬 층은 너무 집착하고, 그래서 그에게 진실과 완벽함, 그리고 답을 찾는 것을 열망한다. 딜런은 절대로 제공하지 않을 것이고, 좌절만 할 뿐이다. … 딜런은 까다롭고 신비롭고 회피적이며 좌절감을 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정체성에 대해 잘 알 수 있을 뿐이다."
― 토드 헤인즈[82]
― 토드 헤인즈[82]
"밥 딜런은 락앤롤의 찰리 채플린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 다 관객 모두에게 천재로 여겨진다. 둘 다 초기 작품으로 혁명가로 선언되었고 이후 작품들이 열등하다고 여겨졌을 때 동료들에게 철저한 공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모두 동료들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들의 예술을 발전시켰다."
"밥 딜런은 60년대 대중음악의 예측불가능성의 원천이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음반 판매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그의 중요성은 미학과 사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향력이었다."
― 존 랜도, 프로듀서[83]
"밥 딜런은 60년대 대중음악의 예측불가능성의 원천이었다. 그는 어마어마한 음반 판매자는 결코 아니었지만, 그의 중요성은 미학과 사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영향력이었다."
― 존 랜도, 프로듀서[83]
"아마도 밥 딜런은 시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는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명이다."
― 그레일 마커스, 문화 비평가[84]
― 그레일 마커스, 문화 비평가[84]
"딜런은 탐험 할 수있는 행성이라고 할 수 있다. 작곡가의 경우, 딜런은 목수에게 망치와 못과 톱이 필수적인 것 만큼 중요하다. 작곡가로써의 그의 여정은 신화의 소재이다. 왜냐하면 그는 노래의 다른 부분 안에 살기 때문이다."
― 톰 웨이츠[86]
― 톰 웨이츠[86]
"밥 딜런은 파동이다. 그는 내가 태어난 해부터 세계를 휩쓸고 있는 멜로디, 단어, 리듬, 아이디어, 태도의 움직이는 힘이다."
― 앤서니 키디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리드보컬[87]
― 앤서니 키디스, 레드 핫 칠리 페퍼스 리드보컬[87]
"우리들의 셰익스피어는 땡땡이 무늬 셔츠를 입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뒤에 있는 모든 작곡가들은 그의 짐을 운반하고, 이 초라한 아일랜드식 음유시인이 자랑스럽게 그의 짐을 나르는 것이다. 아무 때나."
― 보노, 밥 딜런을 세익스피어로 비유하며 한 말[88]
― 보노, 밥 딜런을 세익스피어로 비유하며 한 말[88]
"밥 딜런과 같은 커리어를 가진 아티스트는 없다. 그것은 50년 이상 지속되며 다른 아티스트들보다 더 많은 걸작 앨범을 포함하고 있다."
― Ultimate Classic Rock[89]
― Ultimate Classic Rock[89]
"사실 밥딜런에게 노벨상은 부수적인 타이틀인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대중음악과 문학의 경계를 허문,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의 반열에 올라 있기 때문이다." (2016년)
"딜런의 미국 대중 음악에 대한 비전은 변혁적이었다. 그 누구도 밥 딜런만큼 더 높고 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015년)
― 롤링 스톤
"딜런의 미국 대중 음악에 대한 비전은 변혁적이었다. 그 누구도 밥 딜런만큼 더 높고 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015년)
― 롤링 스톤
"무심한 천재, 눈을 가늘게 뜨고 경멸하는 눈초리, 건조한, 직설적인 유머. 점점 커지는 슈퍼히어로 지위의 완전한 무관심. 그는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소년이다. 그러나 모두가 갈망하는 그 소년이다. 성배. 마지막 미국의 영웅이다."
― 피치포크, 2006년
― 피치포크, 2006년
"밥 딜런처럼 그들 시대의 음악과 문화에 영향을 동시에 준 음악가는 거의 없다. 딜런은 자기 세대에게 최소한 두 가지 존재였다. 자유분방한 포크 가수가 "Master of war"를 비난하며 대중을 이끈 가수와 포크를 바로크 예술로 만든 음악가였다. 하지만 딜런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딜런은 신화이다. 아마도 유일한 진정한 락의 역사일 것이다. 그의 음악은 전설적이다. (중략) 딜런은 이례적으로 세련된 가사를 썼다. 그는 포크 가수라기 보다는 초현실적인 시인이었다; 그의 가사는 그의 세대의 갈망과 괴로움을 표현하기 위해 형이상학과 잔인한 사회정치적 현실 사이에 문학적 다리를 건설했다. 새로운 웅변 형식을 유행시키기 위해 딜런은 두 개의 오래된 역사적 모델인 월트 휘트먼과 성경에서 영감을 받아 그것들을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정교한 국어로 만들었다."
― 피에로 스카루피 (이탈리아 비평가)
― 피에로 스카루피 (이탈리아 비평가)
"나는 밥 딜런에게 경외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지금은 그를 좋아하지 않아요' 말하면 그리고 나는 '아니, 밥 딜런이야'이라고 말했다. 나에게 그것은 피카소와 같다. 나에게 있어, 그것은 피카소처럼, 피카소의 다양한 시기에 대해 사람들이 토론하는것처럼, '이것이 이것보다 더 나았고, 이것보다 더 나았습니다.' 하지만 난 말한다. '아니. 피카소야. 다 괜찮아."
― 폴 매카트니, 2007년
― 폴 매카트니, 2007년
"난 밥 딜런을 정말 좋아한다. 그의 초기 작품도 좋아하고, 일렉트릭 기타를 쓴 작품도 좋아하고, 기독교 앨범도 좋고, 그가 낸 다른 앨범도 좋아한다."
― 조니 캐쉬
― 조니 캐쉬
"그들은 밥 딜런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물어봤어요. 그건 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물어보는 것과 같죠."
― 피트 타운젠드, Flanagan, (1990), Written In My Soul, p. 88.
― 피트 타운젠드, Flanagan, (1990), Written In My Soul, p. 88.
"밥 딜런은 가장 위대한 싱어송라이터 중의 한 명이다. (중략) 음악가로서 그는 비틀즈에 영감을 불어 넣었고 또 포크 락을 주류로 끌어 들여 일렉트릭 기타가 음향적인 것 만큼 혁명적 일 수 있음을 증명하는 등 무수한 방법으로 대중 음악을 형성했다."
― 로큰롤 명예의 전당
― 로큰롤 명예의 전당
"대중음악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작사가인 딜런은 진정한 위대한 존재다. 그의 목소리는 그의 노래에 성격과 의미를 부여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그가 실험해 본 다양한 장르와 그의 작품에서 절충적인 성격은 놀랍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지속적으로 존경 받을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것은 대단한 위업이지만, 그가 그의 경력 45년 동안 여전히 그렇게 높은 품질의 음악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딜런을 재능있고 특별하게 만들 뿐 아니라 비틀즈와 함께 대중음악의 정점으로 만든다."
― Rate Your Music[90]
― Rate Your Music[90]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의견이 분분했다. 그러나 그 모든 논쟁을 비웃듯 미국에서의 밥 딜런 연구는 이제 하나의 학문, “딜런학(Dylanology)”이 되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수많은 딜런 연구서들과 논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깨알 같은 글씨의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밥 딜런 백과사전』까지 나와 있다. 딜런은 대중문화를 자본과 지배이데올로기의 ‘시녀’라는 오명으로부터 구해냈고, 대중문화에 숭고성(崇高性)을 부여한 예외적 예술가이다. 딜런 덕분에 대중은 엄숙주의에서 해방되어 흥얼거리고 건들거리면서도 얼마든지 인생의 의미와 전쟁의 광기와 신의 존재에 대해 묵상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밥 딜런의 음악을 처음 듣고 깊이 매혹당했던 이유는, 잘 들리지 않던 가사 때문도, 멜로디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어떤 ‘자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그것은 규범을 넘어서는 힘이었으며, 통념을 조롱하는 해방의 팡파르였다. 그의 목소리는 가짜 권위, 위선과 거짓을 단번에 교란시키면서 모두가 꿈꾸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을 호출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가 불러내는 ‘저 너머’의 세계는,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유토피아 욕망을 자극한다. 그에게 있어서 노래는 “개인교사였고, 현실에 대한 변화된 의식으로 인도하는 가이드였으며, 어떤 다른 공화국, 즉 해방된 공화국이었다.”(밥 딜런)
60년대에 (포크음악을 통해) 저항의 아이콘으로 추앙을 받던 그가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을 집어 들었을 때 수많은 포크 애호가들이 그의 ‘배신’에 분노했다. 그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가스펠 음악을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예수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이제 70후반이 된 그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길거리의 평론가’였고, 예수쟁이라 비판을 받기 훨씬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단 한 번도 신에 대한 사유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는 ‘거리의 이데올로기’를 포크라는 단일한 형식에 가두기를 원치 않았을 뿐이며, 모든 사유의 끝장은 결국 신에 대한 사유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61년부터 2012년까지 발표된 그의 노래 가사를 모은 『밥 딜런 가사집』은 거의 700페이지에 이른다. 그는 이 모든 노래의 가사를 썼을 뿐만 아니라 곡을 붙였고 음반으로 제작했으며, 최근까지 연평균 100회에 이르는 월드 투어 콘서트에서 그것들을 불러왔다. 양적 성취만으로도 그의 생산력은 어마어마하다. 그의 음악 창고는 성경을 위시하여 니콜라이 고골, 오노레 드 발자크, 기 드 모파상, 빅토르 위고, 찰스 디킨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단테, 장 자크 루소, 오비디우스, 조지 고든 바이런, 퍼시 비시 셸리, 윌리엄 블레이크,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에드거 앨런 포, 지그문트 프로이트, 존 밀턴, 알렉산드르 푸시킨,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크 쇼트, 쥘 베른, 허버트 조지 웰즈, 로버트 그레이브스, 알렌 긴즈버그, 잭 케루악, 잭 런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사상과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 무수한 사상과 언어의 창고에서 자신의 철학과 노래와 가사들을 끌어올린다. 그는 이 모든 과거의 언어들을 다시 뜨개질했으며, 그것들을 자기 시대, 자신의 언어로 변형시켰다.
내가 밥 딜런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사회 비판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자성(自省)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밖을 향한 그의 예리한 칼날은 항상 같은 강도로 그의 내면을 향해 있다. ‘나는 꿈속에서 성 오거스틴을 보았네’라는 노래에서 그는 “그 잘난 세상의 왕과 여왕들에게” “슬픈 불평”을 날리지만, 동시에 자신을 “성 오거스틴을 죽인 자들 중의 한 명”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에게 분노하여 잠에서 깨어나며 “외로이 고개를 숙이고 운다.” 비판은 아픈 자성을 동반할 때 진정성을 얻는다.
― 오민석 단국대학교 영문학 교수 / 문학평론가, 내가 밥 딜런을 좋아하는 이유
내가 밥 딜런의 음악을 처음 듣고 깊이 매혹당했던 이유는, 잘 들리지 않던 가사 때문도, 멜로디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어떤 ‘자유’의 냄새 때문이었다. 그것은 규범을 넘어서는 힘이었으며, 통념을 조롱하는 해방의 팡파르였다. 그의 목소리는 가짜 권위, 위선과 거짓을 단번에 교란시키면서 모두가 꿈꾸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을 호출하고 있었다. 그의 노래가 불러내는 ‘저 너머’의 세계는, 우리 모두에게 잠재되어 있는 유토피아 욕망을 자극한다. 그에게 있어서 노래는 “개인교사였고, 현실에 대한 변화된 의식으로 인도하는 가이드였으며, 어떤 다른 공화국, 즉 해방된 공화국이었다.”(밥 딜런)
60년대에 (포크음악을 통해) 저항의 아이콘으로 추앙을 받던 그가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을 집어 들었을 때 수많은 포크 애호가들이 그의 ‘배신’에 분노했다. 그가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가스펠 음악을 들고 나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예수쟁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 이제 70후반이 된 그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는 그 이후에도 여전히 ‘길거리의 평론가’였고, 예수쟁이라 비판을 받기 훨씬 이전부터 그 이후까지 단 한 번도 신에 대한 사유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그는 ‘거리의 이데올로기’를 포크라는 단일한 형식에 가두기를 원치 않았을 뿐이며, 모든 사유의 끝장은 결국 신에 대한 사유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61년부터 2012년까지 발표된 그의 노래 가사를 모은 『밥 딜런 가사집』은 거의 700페이지에 이른다. 그는 이 모든 노래의 가사를 썼을 뿐만 아니라 곡을 붙였고 음반으로 제작했으며, 최근까지 연평균 100회에 이르는 월드 투어 콘서트에서 그것들을 불러왔다. 양적 성취만으로도 그의 생산력은 어마어마하다. 그의 음악 창고는 성경을 위시하여 니콜라이 고골, 오노레 드 발자크, 기 드 모파상, 빅토르 위고, 찰스 디킨스, 니콜로 마키아벨리, 단테, 장 자크 루소, 오비디우스, 조지 고든 바이런, 퍼시 비시 셸리, 윌리엄 블레이크,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에드거 앨런 포, 지그문트 프로이트, 존 밀턴, 알렉산드르 푸시킨,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에드거 라이스 버로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크 쇼트, 쥘 베른, 허버트 조지 웰즈, 로버트 그레이브스, 알렌 긴즈버그, 잭 케루악, 잭 런던,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스콧 피츠제럴드 등의 사상과 철학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 무수한 사상과 언어의 창고에서 자신의 철학과 노래와 가사들을 끌어올린다. 그는 이 모든 과거의 언어들을 다시 뜨개질했으며, 그것들을 자기 시대, 자신의 언어로 변형시켰다.
내가 밥 딜런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가 사회 비판뿐만 아니라 뿌리 깊은 자성(自省)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밖을 향한 그의 예리한 칼날은 항상 같은 강도로 그의 내면을 향해 있다. ‘나는 꿈속에서 성 오거스틴을 보았네’라는 노래에서 그는 “그 잘난 세상의 왕과 여왕들에게” “슬픈 불평”을 날리지만, 동시에 자신을 “성 오거스틴을 죽인 자들 중의 한 명”이라고 고백한다. 그는 자신에게 분노하여 잠에서 깨어나며 “외로이 고개를 숙이고 운다.” 비판은 아픈 자성을 동반할 때 진정성을 얻는다.
― 오민석 단국대학교 영문학 교수 / 문학평론가, 내가 밥 딜런을 좋아하는 이유
"그의 음악은 하나의 현대사상 저서나 같다. 마이클 잭슨이 음악을 영상처럼 보게 했다면, 밥 딜런은 음악을 책처럼 읽게 했다고 할까. 어쩌면 1960년대 이후 서구 대중음악은 밥 딜런에 대한 경배를 통해 힘과 품격을 늘렸는지도 모른다."
― 임진모
― 임진모
"밥 딜런의 음악이 미국, 나아가서 세계 대중음악사에 끼친 결정적인 공로는, 대중음악이 문학적 예술로 승화될 수 있다는 걸 처음으로 보여줬다는 것이다. 통속적이고 동어반복적인 사랑 타령에서 벗어나서 대중음악이 인간인식의 내면, 나아가 사회와 역사에 대한 통찰을 담을 수 있었다."
―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 강헌 (대중음악 평론가)
[1] 밥 딜런과 말콤 X, 피델 카스트로, 존 F. 케네디의 얼굴을 1/4씩 배치했다. 이 커버가 나올 당시 딜런은 Like a Rolling Stone으로 최전성기를 맞았다. 60년대 초중반 딜런의 가사가 얼마나 크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했는지를 알 수 있는 표지. 하지만 밥 딜런 본인은 이걸 보고 굉장히 불쾌해 했다.[2] 64살에 발매한 32번째 정규 앨범 ‘Modern Times’가 빌보드 200 1위를 차지했고, 67살에 발매한 33집 ‘Together Through Life’는 빌보드 앨범 차트,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달성했다. 또 74살에 발매한 ‘Shadows in the Night’는 영국 앨범 차트 최고령 1위를 기록했다.[3] 사실상 밥 딜런보다 오랫동안 활동한 대중가수는 1957년부터 활동해온 디온(가수) 정도다. 디온은 나이도 밥 딜런보다 2살 위인데다, 데뷔는 4년 먼저 앞섰으며, 밥 딜런이 데뷔했을때 이미 미국을 대표하는 대중가수로 자리 잡았다. 이후 브리티시 인베이전으로 침체기를 겪으며, 종교 음악을 만들다가 80년대부터 다시 대중가요로 복귀하여 2023년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4] 예를 들면 엘비스 프레슬리는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요절하였고, 존 레논은 마크 채프먼에 의해 암살로 요절하였으며, 마이클 잭슨은 아동 성추행 누명을 벗은 후 다시 일어서려던 찰나에 급성 프로포폴과 벤조디아 제핀 중독으로 요절하였다.[5] 6위 Blonde on Blonde, 14위 Highway 61 Revisited, 38위 Bringing It All Back Home, 55위 The Freewheelin' Bob Dylan.[6] 5위 Blood on the Tracks.[7] 93위 Time Out of Mind.[8] #[9] 전체 2위.[10] Dylan's influence on Garcia and Hunter was a given; both admired his songwriting and thought he gave rock music a modicum of respectability and authority. "He took ‘rock music’ out of the realm of ignorant guys banging away on electrical instruments and put it somewhere else altogether," Garcia said later. Richardson, P. (2015). No Simple Highway. St. Martin's Press. p. 150.[11] "They asked me what effect Bob Dylan had on me," Townshend said. "That's like asking how I was influenced by being born." Flanagan, (1990), Written In My Soul, p. 88.[12] "Bob Dylan, I'll never be Bob Dylan. He's the master. If I'd like to be anyone, it's him. And he's a great writer, true to his music and done what he feels is the right thing to do for years and years and years. He's great. He's the one I look to." Time interview with Neil Young, September 28, 2005.[13] 많은 사람들이 돈 맥린, 돈 매클린으로 알고 있는 가수다.[14] 돈 매클레인과 조니 미첼은 시기와 전달 매체는 다르지만 밥 딜런에 대해서 부정적인 언급을 한 바 있다.[15] 계관시인이란 영국 왕실이 가장 명예로운 시인에게 내리는 칭호로 지금은 총리의 추천으로 임명된다.[16]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대 연구진은 1970년부터 2015년까지 쓰인 생물 의학 논문 중 밥 딜런의 노래가 인용된 논문을 정량적으로 분석해 지난해 영국의학저널(BMJ) 크리스마스 특별호에 발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밥 딜런 노래 가사의 일부가 인용된 문헌은 727편에 달했고, 이 중 213편은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보고서를 만든 존 린드버그 박사와 에디 바이츠버그 박사에 따르면 밥 딜런 노래 가사 인용 경쟁은 1997년 두 사람이 공동으로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 메디신'에 발표한 'NO(Nitric Oxide)와 염증: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논문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들은 1963년 피터, 폴 앤 메리가 대히트시킨 "두 번 생각하지 말아요. 모두 잘 될 거예요(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를 인용하면서 "우리는 딜런의 노래를 인용하기로 결심한 후 두 번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이언스에 따르면 두 사람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이라는 제목은 네이처 메디신에 발표한 논문 내용과 완벽히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바이츠버그는 사이언스와의 인터뷰에서 "딜런의 작품은 너무 멋져서 노벨문학상을 받고도 남는다"며 "오늘 바람 대신 노벨상이 그에게 대답했다"고 덧붙였다.[17] '바람'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것은 딜런의 대표 곡인 '블로잉 인더 윈드(Blowin' in the wind)'를 떠올리게 했다. 미국 국립의학도서관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인 '메들라인' 검색 결과 가장 먼저 딜런의 가사를 인용했다고 인정되는 논문은 1970년 '저널 오브 프랙티컬 너싱'에 실린 '그들이 시대를 바꾼다'라는 제목의 연구 성과다. 이 가사는(The Times They Are a-Changin) 이후 무려 135편의 논문에 그대로 쓰였으며 '블로잉 인더 윈드'는 36개 논문에 사용됐다. 주로 미국 과학자들이 논문에 딜런의 가사를 많이 이용했으며 스웨덴 과학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18] 영국 중세 민요인 Nottamun Town의 멜로디에 딜런이 쓴 전쟁의 부조리함을 꼬집는 새 가사를 입힌 곡이다. 다만 딜런이 부른 곡조는 영국 출신의 미국 여성 포크 가수 겸 애팔래치안 덜시머 연주자인 진 리치(Jean Ritchie)의 편곡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리치 측과 합의 하에 3,000달러를 물어야 했다.[19] 많은 사람들이 방사능 낙진(쿠바 미사일 위기 참조)을 묘사한 것이라고 해석했는 데, 본인은 부정했다.[20] 출처[21] 출처[22] 출처[23] 출처[24] 출처[25] 출처[26] 캐나다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신문 중 하나.출처[27] 출처[28] 출처[29] 출처[30] 출처[31] #[32] 출처[33] 로마의 서정 시인.[34] 출처[35] 출처[36] 출처[37] 출처[38] 출처[39] 밥 딜런이 팝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인 70가지 이유 중[40] 출처[41] 출처[42] 출처[43] 밥 딜런이 '가장 좋아하는 곡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원 투 매니 모닝스(One Too Many Mornings)」라고 답했다. 그날 밤 스티브를 초대한 공연에서 그 노래를 불러주렀다. 공연히 끝난 후, 딜런이 스티브에게 "그래, 내가 불러 준 노래는 잘 들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언제나 처럼 스티브는 딜런을 이렇게 회상했다.. "언제나 그는 제 영웅입니다. 그를 흠모하는 마음은 세월이 흐르면서 더욱 깊어졌어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어떻게 그런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모르겠습니다."[44] 1998년 포춘과의 인터뷰에서[45] 스티브 잡스 이야기 p232-p237[46] 2006년 8월, 발표회에서[47] 2010년 딜런이 백악관에서 공연했을때 오바마가 인터뷰에서 한 말[48] 2012년 미국 민간인 최고 훈장인 자유의 훈장 수훈식에서[49] 출처[50] 출처[51] 출처[52] 출처[53] 출처[54] 출처[55] 출처[56] 출처[57] 출처[58] 출처[59] 출처[60] 출처[61] 출처[62] 출처[63] 출처[64] 출처[65] 출처[66] 출처[67] 출처[68] 출처[69] 출처[70] 출처[71] 출처[72] 출처[73] 출처[74] 출처[75] 출처[76] 출처[77] 출처[78] 출처[79] 출처[80] 출처[81] 출처[82] 출처[83] 출처[84] 출처[85] 출처[86] 출처[87] 출처[88] 출처[89] 출처[90]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