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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도 일본어(半島日本語; Peninsular Japonic)설이란, 과거에 한반도에서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즉 한반도에서 사용되던 언어가 현재 일본어가 되었다는 학설을 의미한다. 일본어족은 현대 일본어 및 방언과 고일본어는 물론 류큐어 까지 포괄하는 어족으로, 반도 일본어설을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는 알렉산더 보빈이 있다. 그는 대표 논문 「고구려에서 탐라까지(From Koguryŏ to T’amna)」에서 반도 일본어설을 제시했다. 번역본 가설은 탄탄한 근거와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기에 국내외 많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지만, 간접적인 근거를 이용한 추측과 재구 외에는 직접적인 물증, 즉 1차 사료가 없기에 아직 가설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0년경부터 한국 인터넷 커뮤니티에 널리 퍼져서 마치 정설인 것처럼 알려지기도 했지만, 상술했다시피 아직 가설 단계이다.
2. 구성
"반도 일본어설"이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 | 마르티너 로비츠가 내놓은 대안 가설.[1][2] |
반도 일본어설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고대 한반도 중남부에는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들 중 일부가 일본 열도로 이주한 집단이 야요이인이고, 이들이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 문명을 시작하고 일본 열도에 고일본어(Old Japanese)를 퍼뜨렸다. 한편 일본 열도로 이주하지 않고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본어족 집단은 만주에서 남하한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에 밀려, 결국 한반도에서 사용되는 언어가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로 동화·대체되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연구한 알렉산더 보빈은 고조선에서 한국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고, 한반도 남부의 진국에서는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추정했다. 이후 고조선의 준왕 집단이 진국의 영역으로 남하하여 건마국을 세워 마한 지역의 초대 맹주가 되고, 마찬가지로 고조선계가 세운 목지국이 건마국 다음 마한의 맹주가 되면서 마한 지역은 한반도 남부에서 가장 먼저 한화(韓化)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마한의 한화는 마찬가지로 한국어족을 사용한 고구려계 유이민이 세운 백제에서 지속되었다는 주장이다. 보빈은 물론 백제에서도 일본어와 연관이 있는 어휘가 일부 발견되었으나, 초기 진한보다는 훨씬 적음을 확인했으며, 이는 마한 지역이 훨씬 먼저 한화되었다는 증거로 해석했다.
반면 마한과 언어 및 풍습이 달랐다는 변한/가야와 진한의 토착 언어는 일본어족 계통이었으나[3], 변한과 진한의 소국 중에서도 고조선계 유이민들이 세운 구야국과 사로국의 언어는 한국어족으로 보았다. 이러한 구야국과 사로국이 각각 변한과 진한의 맹주가 되면서 이 두 지역도 차츰 한화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변한/가야의 소국들이 멸망하고 사로국이 신라가 되어 진한 및 변한 지역을 장악하면서 한반도에서 일본어족은 7세기 이후에 사멸되어 기층 언어로만 남았다는 주장이다. 또한 당시 제주도 지역에 있던 국가인 주호국/탐라국에서 사용되었던 탐라어를 일본어족이라고 추측했다.
이 가설은 한국 신화인 단군 신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있고, 언어학적으로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유사한 언어(고대 한국어)를 사용했다는 기록에 대해 '삼국사기' 권34, 권37이나 '양서 백제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반도 중남부의 지명 등 고유명사가 한국어보다는 고대 일본어와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을 주된 근거로 든다.
만약 해당 가설이 사실이라면, 당시 한반도에서 쓰였던 반도 일본어는 상대 일본어와 매우 유사할 것으로 추측된다.[4]
2.1. 지명사의 유사성
반도 일본어설의 근거로 거론되는 것은 대부분 일반 명사나 수사, 지명이나 인명 등의 고유명사이다. 특히 역사학자 및 언어학자들은 경덕왕의 한화 정책 이전에 사용되었던 한반도 남부의 옛 지명들이 한국어보다는 일본어와 유사하다는 것을 강력한 근거로 들고 있다. 실제로 지명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5], 찬성론자들은 한화 정책 이전의 본래 지명은 반도 일본어를 사용하는 원주민들이 지은 것이기에 일본어와 유사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化昌縣本知乃彌知縣景徳王改名
화창현은 본래 지내미지(tinəmiti)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西畿停本豆良彌知停景徳王改名
서기정은 본래 두량미지(turamiti)정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單密縣本武冬彌知一云曷冬彌知景徳王改名
단밀현은 본래 무동미지(mutamiti) 혹은 갈동미지(katamiti)였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道安縣本刀良縣景徳王改名
도안현은 본래 도량(tora)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화창현은 본래 지내미지(tinəmiti)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西畿停本豆良彌知停景徳王改名
서기정은 본래 두량미지(turamiti)정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單密縣本武冬彌知一云曷冬彌知景徳王改名
단밀현은 본래 무동미지(mutamiti) 혹은 갈동미지(katamiti)였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道安縣本刀良縣景徳王改名
도안현은 본래 도량(tora)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다.
위 기록들은 전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신라의 옛 지명들 중 일부이다. 경덕왕의 한화 정책 이전 본래 지명인 tinəmiti, turamiti, mutuŋ miti/katuŋ miti, tora는 한국어 지명이라고는 보기에는 어색하지만, 알렉산더 보빈은 이 지명들을 일본어로 쉽게 분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먼저 tinəmiti의 경우, 고대 일본어 속격 조사 -nö [nə],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길’이라는 뜻의 mîti로부터 ti-nö mîti를 얻을 수 있다. 고대 서부 일본어 ti는 '피, 우유, 아버지, 힘'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며, 보빈은 tinəmiti의 의미는 고대 일본어로 '강한/견고한 길'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A]
- turamiti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에서 tura는 ‘앞, 얼굴‘이라는 의미이며, mîti는 상술했듯이 ‘길'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turamiti의 의미는 고대 일본어로 ‘앞길에 있는 정’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추측했다.[A]
- mutuŋ miti의 경우, 상술했듯이 miti는 고대 서부 일본어로 ’길‘이라는 뜻이다. 또한 고대 서부 일본어는 음절말 자음이 없었음을 염두에 두면, mutuŋ은 고대 서부 일본어 mutu '친밀한, 가까운'과 비교해볼 수 있다. 따라서 mutuŋ miti는 ‘은밀한 길’이라고 해석할 수 있으며, 경덕왕이 지은 ’단밀(단지 은밀함)‘에도 일부 보존되어 있다고 추측했다. mutuŋ miti의 또다른 이름인 katuŋ miti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로 ’합치다‘라는 뜻의 ‘kate-’와[8] ’길‘을 의미하는 mîti로 번역할 수 있으며, ‘합쳐지는 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A]
- tora의 경우, 고대 서부 일본어로 ‘호랑이’라는 뜻의 tôra로 쉽게 번역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A]
알렉산더 보빈은 진한과 신라 외에도 변한 및 가야계의 몇몇 소국들의 이름을 예시로 들었다. 이를테면 변한 및 가야의 소국 중에서는 미오야마(彌烏邪馬)와 사이기(斯二岐)라는 국가가 있다. 이 두 국가들의 국명은 한국어로 보기에는 상당히 낯설지만 일본어와는 괴리감이 없다는 점에서 근거로 쓰이고 있다. 특히 ’미오야마‘에서 일본어로 산을 뜻하는 ‘야마(やま, 山)’를 추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오야마(미오산)’라는 명칭을 일본 신화에 나오는 나라현에 위치한 ‘미와야마(미와산)’와 관련짓는 주장도 있다.[11]
다만 미오야마 국명 반도 일본어설에 대해서는 비판도 있다. 말 마(馬) 자는 주조마국처럼 다른 나라 이름에서도 이름 뒤에 붙는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일종의 접미사로 보는 주장이다.[12] 미오야마국에서 마 자를 접미사로 보고 제외하면 ‘미오야국’이 되는데, 구야국이나 안야국에서 볼 수 있듯 삼국지 동이전에서 야(邪) 자로 끝나는 나라 이름은 여럿 존재한다. 그리고 만약 말 마 자가 접미사라면, '야마'를 세트로 묶어서 추정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부정된다. 또한 ‘미오야마’라는 말에서 가야의 또 다른 명칭인 ‘임나(미마나)’가 유래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서 더 나아가 일각에서는 ‘임나’의 음운에 중점을 두어 ‘미오야마’라는 명칭은 ‘미마야오(彌馬邪烏)’나 ‘미오마야(彌烏馬邪)’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알렉산더 보빈은 탐라의 이름 역시 고대 일본어로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탐라‘가 '타미(民 - 백성)'+'무라(村 - 마을)', 혹은 '타(田 - 밭)'+'무라(村 - 마을)'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즉 제주어가 탐라에 건너가기 전 제주도의 토착 국가로 추정되는 주호국의 토착어인 탐라어가 일본어족이었다는 주장이다.[13] 그러나 ‘탐라’에서 ‘타’가 ‘타(田)’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탐(耽)의 당시 한자음이 /*tom/이었음을 간과한 것으로서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고대 일본에서는 '토라(度羅, トラ)'라는 명칭으로도 불려졌다는 상반되는 증거도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 음악 가가쿠(아악)의 탐라 음악도 이를 따라 '토라가쿠(度羅楽)'이다.
그러나 적어도 탐라의 뒷부분만큼은 보빈의 가설대로 반도 일본어족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서》에서는 탐라를 탐모라(耽牟羅)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 모라(牟羅)라는 지명 요소는 《일본서기》[14], 《양서》[15], 〈울진 봉평리 신라비〉[16] 등 삼국시대의 각종 문헌에서 문증되며 《삼국지》[17], 〈광개토대왕릉비〉[18], 《삼국사기》[19]에도 비슷한 단어가 등장한다. 몇몇 학자들은 이 단어를 일본어의 무라(むら)와 연관지어 마을이라고 해석한다. 다만 이 어휘가 차용된 방향성은 알 수 없다. 반도 일본어파의 잔재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고대 한국어 어휘가 일본조어로 넘어갔다가 되려 한국어족에서는 사라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 그리고 위키낱말사전에 따르면 한국어 '무리(중세 한국어: 물)'과 관련짓는 견해도 있다.# 참고로 중세 한국어에서 'ᄆᆞᅀᆞᆶ(/*mʌzʌlh/)'이었던 현대 한국어의 '마을'과는 별개의 어원을 가진다.
그러나 ‘모라(牟羅)/모로(牟盧)’는 ‘산(山)’을 의미하는 순우리말 ‘메’의 고어형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용비어천가》에 ‘메’의 고어형으로 ‘모레’가 제시되어 있는데, 당시 음가를 고려해보면 ‘모라‘나 ’모로‘는 ’모레‘의 이표기가 된다.
- 당시 사서인 《일본서기》에서는 모라/모로를 산으로 해석했다. 첫 번째로 사례로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을 구례산(久禮山)이라고 해석하였다. 두 번째로는 백제의 대산성(帶山城)을 '시토로모로노사시'라고 읽었는데, 여기서 '시토로'는 띠를 뜻하는 중세 한국어 'ᄯᅴ', '사시'는 성을 뜻하는 중세 한국어 '잣'과 일치한다. 따라서 대산성의 산에 해당하는 부분은 '모로'가 된다.
고구려 지명 중 고구려어로 산을 뜻했던 달(達)이 들어간 경우가 많았듯이[21], 산악지대가 많은 한반도 특성상 현대 대한민국이나 북한의 지명에도 山자가 들어간 곳은 매우 많다. 탐라가 위치했던 제주도야 한라산이라는 대표적인 산이 있다.
여기서 또 새로운 가설이 있는데, ‘산’을 의미하는 ‘모라’라는 순우리말을 고일본어로 ‘숲’을 뜻하는 ‘모리’에서 차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상술한 ‘모라 = 무라’ 가설과 같이 차용한 게 맞더라도 차용된 방향성을 알 수 없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2. 고언어와의 비교 연구
알렉산더 보빈은 상술했듯이 진한과 변한/가야에서 쓰이던 언어를 일본어족으로 보았다. 현재 남아 있는 변한어 사료는 존재하지 않지만,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 양서 등의 사서에는 진한어 자료가 일부 남아있다. 기록에 의하면 진한과 변한은 언어가 같다고 했으므로, 진한어가 일본어족임이 입증되면 자연스럽게 변한어 또한 일본어족이 된다.2.2.1. 진한어
알렉산더 보빈은 초기 진한에서 쓰였던 언어를 일본어족에 속한 언어로 보았고, 북쪽에서 내려온 한국어족 계통의 집단이 사로국을 건국함에 따라 진한 지역이 한화(韓化)되었다고 주장했다. 즉 이 설에 따르면 초기 진한어는 일본어족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국어족인 신라어로 언어가 대체되었다는 것이다.[22] 이에 대한 근거로 보빈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 후한서, 양서에 제시되어 있는 진한의 언어를 들었는데, 그는 남아 있는 진한어 텍스트가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되어 있다면서, 이는 본래 일본어족 언어를 쓰던 진한 지역이 한화되는 과정, 즉 과도기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이러한 중국 사서들에는 신라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진한은 중국 방면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고 하고, 언어 관련해서도 중국과의 언어적 관련성을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주로 설명하지, 일본어 계통과 관련 있다고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보빈도 이에 대해 중국 사서에 적힌 진한어들은 중국어처럼 보인다고 인정하면서도, 이러한 '중국어처럼 보이는' 진한어들을 제대로 재구하고 어원을 밝혀내면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된 결과가 나온다고 주장한다. 다음은 실제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나온 진한어의 예시와 보빈의 분석이다.
東方人名我爲阿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아(阿, *ʔa)라 한다.
名國爲邦
나라를 방(邦, *pæwŋ)이라 한다.
賊爲寇
도적을 구(寇, *kus)라 한다.
相呼爲徒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 *da)라 한다.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아(阿, *ʔa)라 한다.
名國爲邦
나라를 방(邦, *pæwŋ)이라 한다.
賊爲寇
도적을 구(寇, *kus)라 한다.
相呼爲徒
서로 부르는 것을 도(徒, *da)라 한다.
- 진한어로 ‘나’를 ‘아(ʔa)’라고 한다는 점에서, 1인칭 단수 대명사 *a(阿, 상고 한어 및 전기 중고 한어 *ʔa)를 얻을 수 있다. 보빈은 이를 중세 한국어에서의 1인칭 단수 대명사인 na와는 양립할 수 없다고 보아, 진한어의 1인칭 단수 대명사 ‘아’의 어원을 일본어족에서 찾았다. 일본조어에서 ‘나’를 의미하는 *a, 고대 서부 일본어의 a, 고대 동부 일본어의 a, 고대 류큐어의 a, 세소코어의 'a, 요나구니어의 'anu에서 볼 수 있듯 고대 일본어족에서 1인칭 단수 대명사는 '아'였다. 이로써 보빈은 진한 일본어 *a '나'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나라를 방(*pæwŋ)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언어학자인 고노 로쿠로는 한고조 유방을 피휘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그러나 보빈은 고노의 주장이 틀렸다고 주장하고 邦(*pæwŋ)이라는 글자를 열도 일본어에서 기대되는 마지막 자음 탈락이 나타난 형태인 ‘근처, 장소’라는 뜻의 고대 서부 일본어 pê, '-의 쪽'이라는 뜻인 고대 동부 일본어 ‘-N-pï’와 비슷한 일본어 낱말을 적은 것으로 추측했다. 이와 동계어로는 '하늘 꼭대기(구름-쪽-꼭대기)'라는 뜻인 kumo-fe-tithe에서 나타나는 ’쪽‘이라는 뜻의 고대 류큐어 ‘-fe’가 있다고 보았다. 이 낱말이 때때로 류큐조어 *e를 보존하고 있는 고대 류큐어에서 문증되므로 확실히 동계어로 보았으나, 다른 류큐 방언에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본 본토로부터 차용된 말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로써 보빈은 진한 일본어 *pe(ŋ) '나라'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도적을 구(寇, *kus)라고 한다는 점에서, 보빈은 賊과 寇의 대립에는 어떠한 개별 방언적·지리적 특성도 없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보빈은 *kus라는 진한어 낱말을 중국 사서에서 한자로 준훈차한 것으로 보았으며, 이에 대한 어원으로 중세 일본어로 ‘무례한 부류, 범죄, 사기꾼, 불의’를 의미하는 kuse에서 찾았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kus '도적'을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 진한어로 서로를 '도(徒, *da)'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진한인들이 제자백가 사상에 심취해서 서로를 '제자님(徒)'이라고 불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이는 2인칭 단수 대명사인 '너'를 음차한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중세 한국어 ne와는 전혀 맞지 않기에, 보빈은 '*da'의 어원을 일본어족에서 찾았다. 일본어족의 류큐어 분지에서 2인칭 단수 대명사 '너'는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로, 진한어에서의 2인칭 단수 대명사 *da와 매우 유사하다. 이 낱말은 류큐어에서도 널리 퍼지지 못했지만, 남류큐어와 북류큐어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사실에서 보빈은 류큐조어에 이 날말이 존재했을 것이라 추측했다.[26] 하테루마어 daa, 요나구니어 Ndaa, 시토이어 daa에서 류큐조어의 2인칭 단수 대명사인 *Ndaa를 재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보빈은 선(先)비음화된 *Nd-를 한자로 적을 때 *d-로 전사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3세기 중국어에는 선비음화 파열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보빈은 진한 일본어 *da '너'를 재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B]
상기된 예시 외에도 보빈이 같은 방식으로 진한어를 재구한 결과, 진한어 낱말에는 일본어와 한국어가 섞였다고 주장했다. 재구한 결과에 따르면 진한어에서 나타나는 일본어계 낱말은 인칭 대명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 문화어휘이고, 한국어계 낱말은 형태론적 표지 하나를 포함하여 중요하지 않은 기초어휘와 문화어휘이다.
어족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인 인칭대명사가 일본어족 계통으로 나타났다는 점을 들어, 보빈은 원래 진한 지역의 토착 언어는 일본어족이었으나, 한국어족이 침입해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이 혼재되어 쓰이던 시기의 언어가 바로 진한어이고, 이후 진한 지역을 완전히 정복한 신라에 의해 완벽하게 한화되었다고 주장했다.[B] 또한 마한의 왕이 진한까지 전부 지배하였다는 기록도 있기에, 보빈은 한국어족 사용자인 마한 지배자들이 진한 지역의 일본어족 사용자들을 동화시켜 한국어족의 영역으로 만들었다고 여겼다.
반면 보빈은 양서에 제시된 7세기 신라어 낱말을 분석해도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혼재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결과가 나오게 된 가능성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신라가 7세기까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것과, 두 번째는 일본어족이 기층 언어가 되어 한국어족에 남았다는 것이다.
첫 번째 가능성과 관련하여 신라어를 반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주장도 간혹 나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도자 칭호들이 반도 일본어족의 흔적이 있다고 보는 경우가 있다. 거서간, 이사금, 매금 같은 칭호조차도 일본어와 연관짓는 가설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신라인 혹은 백제인과 왜인이 말이 통하지 않는다거나 통역관[29]이 필요하다는 문헌 근거가 굉장히 많이 남아있다.
현재 해석할 수 있는 신라어 텍스트로 향가가 전하는데, 향가를 해석한 결과 향가의 언어는 일본어족이 아닌 한국어족에 속했다. 신라가 양층 언어 국가였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최소한 신라의 주류 언어는 고대 한국어 계통일 가능성이 높고, 반도 일본어와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일본서기1>, <일본서기2>,[30] <일본후기>, <입당구법순례행기1>, <입당구법순례행기2> 그렇기에 보빈은 두 번째 가능성에 더 주목하였다.[B]
다만 알렉산더 보빈은 적어도 7세기까지는 일본어족 계통 언어가 한반도 남부에서 쓰이고 있었다고 추측했는데, 경주지역은 이미 기원전 1세기 이후로는 재래의 검단리 문화가 소멸하고 와질토기 문화권으로 통합되었다는 사실[32]과는 배치된다. 이후 성립된 사로국은 후대의 통일 신라까지 별다른 단절이나 변혁 없이 6부라는 지배층이 쭉 이어진 정치체임이 고고학적으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기에 신라가 시대별로 언어가 어족 단위로 달라졌으리라 상정하기 어렵다. 또 마찬가지로 기원전 시기 경주 지역의 주민 계통이 비교적 중층적이라는 사실은 인정받지만, 기원후에 사로국-신라 사회는 와질토기 문화권으로 동질적인 물질문화를 이루고 양층언어 사회로 볼 만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33]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가능성은 총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권역을 제외한 나머지 진한의 지역에서는 여전히 반도 일본어가 쓰였지만, 사로국이 권역을 넓혀가면서 한국어족을 진한 지역에 보다 빨리 확산시켰다는 것이다. 즉 7세기 무렵부터 반도 일본어는 일부 시골의 장노년 계층에서만 간혹 쓰이는 언어로 전락했다는 가능성이다.[34] 두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사로국 건국 시기쯤, 즉 보빈의 추측보다 훨씬 더 빨리 한반도 전역이 한국어족 사용 지역으로 모조리 동화되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가정 하에, 한반도에서 일본어족 계열의 언어는 쓰였던 적은 없으며, 한반도 전역이 원래부터 한국어족의 권역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위 세 가지는 전부 심증에 기반한 추측일 뿐이고, 자료가 부족하여 결정적인 물증은 존재하지 않는다.
2.2.2. 가야어(변한어)
기록에 따르면 진한과 변한은 언어, 의식주, 법속이 전부 같다고 한다. 만약 위의 초기 진한어가 일본어족 계열이라는 것이 확실시 된다면, 진한과 언어가 같다는 변한도 자연스럽게 일본어족이 된다.[35] 이에 따라 변한의 후신인 가야의 언어에도 자연스럽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대체로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변한 대까지는 일본어족이 사용되었고, 이는 초기 가야 시절까지 이어지다가 중후기로 들어가면서 한화되었다고 본다. 진한어의 텍스트가 꽤 있는 것과는 달리, 이를 검증하기 위한 가야어 자료는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다음이 전부이다.加羅語謂門為梁云
가야어에서는 '문(門)'을 '양(梁)'이라 이른다.
가야어에서는 '문(門)'을 '양(梁)'이라 이른다.
량>양은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고 실제 梁이 표기하는 발음은 '돌(twol)'인데 고일본어에서 문을 의미하는 '토(と; 戶)'와는 음운이 굉장히 유사하다. 이는 가야어-일본어 간의 관계를 추측하는 하나의 지표로서 여겨졌다. 하지만 ‘울돌목’, ‘돌쩌귀’[36] 등 순우리말에 문을 돌로 지칭하는 표현이 남아있는 것을 볼 때, 고한국어에서도 원래 돌이나 그 비슷한 발음으로 발음했으나 한자어 ‘문’으로 대체되었으며, 가야어가 한국어족 언어들 중에서 예외적으로 대체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늦게 대체되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즉, ‘문’을 의미하는 ‘돌/토’는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공유했던 어휘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석봉천자문에는 문의 순우리말을 '오래'라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 ‘울돌목’이나 ‘돌쩌귀’에서 ‘문’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돌’은 단순히 가야어의 잔재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기록을 보면 고대 일본어를 가야에서 사용된 고대한어(韓語)와 구분짓고, 가야어를 한어(韓語)라고 기록하는 등의 에피소드를 보면 당대에도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한 듯하다. 예를 들면 가야를 능욕하기 위해 작성된 기사로 보이는 가야의 지배층의 아녀자들이 임나일본부의 왜국측 인사들을 성적으로 유혹하기 위해 ‘너의 뿌리를 나의 뿌리에 넣어라’라고 발언한 기사가 있는데 거기서 임나일본부측 왜국 인사는 아녀자들이 하는 고대 가야어를 알아듣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반도일본어설은 엄격한 사료검증을 요한다. 예시
2.3. 수사의 유사성
보다 이전에는 규슈대학 무라야마 시치로(村山七郎) 등이 수사의 유사성을 제기한 바 있다. 수사의 유사성은 동계어의 중요한 증거로서, 상당히 일찍 갈라진 인도유럽어에도 1, 2, 3과 같은 기본 수사는 상당히 비슷하다. 예를 들어 3을 가리키는 수사는 영어 Three, 프랑스어 Trois, 스페인어 Tres, 러시아어의 Три(Tri), 그리스어 τρία(Tria), 산스크리트어 Tri.가 있는 등. 고구려와 일본어의 수사가 유사하다는 주장은 국내에서도 《고종석의 문장》등 여러 언어, 문장학 교양서에서 인용되었다. 이후 크리스토퍼 벡위드 등이 주장한 부여어족 가설도 이러한 어휘 비교를 근거로 했었다.수사 | 고구려어 | 한국 한자음 | 구결 | 고대 일본어 | 현대 일본어 |
3 | 密 | 밀 | my | 미 | 밋츠[みっつ] |
5 | 于次 | 우차 | u-ts | 이투 | 이츠츠[いつつ] |
7 | 難隱 | 난은 | na-n | 나나 | 나나츠[ななつ] |
10 | 德 | 덕 | ty | 토워 | 토ー[とお] |
위의 수사 비교는 모두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지명 이력을 근거로 했다. 《삼국사기》의 지명은 대개 한문을 훈과 음 양 쪽으로 읽던 시기의 것을 밝히고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명의 고유명사에서 실질 형태소를 분리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계통 연구에서 상당히 신뢰성 있는 것으로 꼽히며 실제 '물(勿)'이 '수(水)'와 통한다는 것[37]이나 '달(達)'이 '산(山)'과 통한다는 것은 거의 자명한 사실이다. #
문제는 이를 근거로 분리된 수사 표본에 대한 신뢰성이다. 상기한 '물'과 '달' 같은 후보는 수많은 지명에서 사용되어 표본 신뢰성이 확실한 편이나, 재구된 수사의 경우 그 증거가 되는 표본이 굉장히 적다. 이 설을 지지하는 학자들은 숫자 '10'이 '덕'인 이유를 두고 삼국사기 지명 '십곡현(十谷縣)'을 다른 말로는 '덕돈홀(德頓忽)'로 불렀는데, '골 곡(谷)'자가 '조아릴 돈(頓)'과 통하므로 '열 십(十)'이 '큰 덕(德)'이라고 비정했다. 7의 '난은' 역시 '칠중현(七重縣)'을 '난은별(難隱別)'이라고도 불렀으므로 '일곱 칠(七)'이 '난은'이라는 주장이며, '오곡군(五谷郡)'은 '우차탄홀(于次呑忽)', '삼현현(三峴縣)'은 '밀파혜(密波兮)'라는 기록에서 각각 5, 3이 이츠츠(いつつ)와 밋츠(みっつ)와 관련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수사 3이라면 한반도 동남부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밀=推=密=三이라는 상관관계를 도출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 지리지를 분석하면 '현풍(玄風)'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일대의 옛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나 신라 때에는 '추량화현(推良火縣)' 또는 '삼량화현(三良火縣)'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 '현효현(玄驍縣)'으로 고쳐서 화왕군(火旺郡: 창녕)에 속하게 하였다. 즉, 위의 표본대로 수사를 수집한다면, 벡위드나 이기문 등이 고구려-백제 계통에서 분리하는 신라어에서도 고구려어와 유사한 경향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다만, 초기 신라어가 일본어와 매우 가깝다고 추정한 보빈의 경우에는 이 지적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수사 '3'은 현재 '密 발음설'과 '悉(siet)/史(s^ïei) 발음설'로 나누어져 있어 지명만으로는 정확히 비정하기 어렵다. 후자는 다른 지명 기록에서 '실직군(悉直郡)', '사직(史直)'이 곧 '삼척군(三陟郡)'이 되었다는 것을 그 근거로 한다.
'5'의 경우에도 이를 '우차'로 인정하더라도 고일본어 '이투'와의 대응이 문제이다. 이를 현대음으로 생각하면 비슷하게 여겨질 지 모르나 고대음가로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하기 어렵다. 次의 성모는 清母[tsʰ]인데 이를 기준으로 할 경우 于次의 상고음은 [ɣiotsʰi]에 해당한다. 그러나 상대 일본어의 ツ는 당대에 [tu]로 발음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치경 파찰음은 대부분 サ행으로 옮겨졌다.[38] 때문에 정말로 于次와 연관을 가졌다면 ギュウシ~ウシ로 음사되었어야 합당하다. 즉, 현대음을 기준으로 하면 비슷할지 모르나 당대 음가를 생각하면 이 둘이 비슷하다는 것은 문제가 많다.
2017년에는 서울대 이승재 교수가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백제어 목간[39]에서 수사를 분리하여 #, 숫자 '2'를 '의털읍(矣毛邑)', 숫자 '3'을 '새태읍(新台邑)', '5'를 '도스읍(刀士邑)', 7을 '일고읍(日古邑)', 8을 '옅털읍(今毛邑)'이라 재구하였는데, 여기서 재구된 음은 상술한 것과는 전혀 다르고 현대 한국어와 매우 비슷하다. 사실상 백제어는 한국어족에 속한다고 보고있다.
하지만 수사의 유사성 가지고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 삼국시대인 고구려, 백제, 신라는 서로 말이 통했으나[40], 일본서기에 따르면 5~6세기 백제와 고대 일본어는 말이 안통했고, 6~7세기 신라어도 고대 일본어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지리가 가까우면 타국의 외래어가 들어오는 것은 항상 있던 일이 었다. 지금도 친구라는 말이 대마도에서 사용되고 있다. 오히려 고구려의 어휘(고대 한국어) 일부가 일본에 들어와 굳었다고 볼 여지도 있다. 고구려 왕족이 일본 유민으로 간 고마씨도 존재 한다. 과거 기록만 봐도 말이 안통했다는 것은 어휘가 대부분 달랐다고 봐야한다. 가뜩이나 섬나라라서 폐쇄적이라 독자적인 가능성이 높고, 어순만 같지 어휘는 다른 알타이어족 국가는 정말 많다. 독자적으로 언어가 발달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2.4. 고고학 등 학제적 연구 및 고찰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는 언어학 연구자들은 이를 방증하는 여러가지 고고학적 증거들을 제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고고학계의 해석은 다른 경우가 많고, 때로는 근래의 고고학계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낡은 학설에 근거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41] 그러므로 언어학 연구자들이 제시한 고고학적인 근거만을 가지고 반도 일본어설이 입증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다.물론 고고학적인 물질자료만을 토대로 언어, 어족과 같은 관념 문화의 변화양상을 온전히 복원할 수는 없다. 이러한 물질문화의 변화는 때로는 우리의 관념과 함께 변화하지만, 또 때로는 서로 독립적으로 변화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학적 추론을 무시한 채 오로지 고고학적인 관점으로 해석한 내용을 토대로 반도 일본어 가설을 완전히 틀린 것으로 배척하기도 어렵다는 것은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고고학적 관점 및 분석을 무시한 채 언어학적 추론만을 가지고 어족과 인간집단의 이동이라고 하는 거대한 역사적인 사건을 재구성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42] 이에는 고고학 뿐 아니라 유전학, 문헌기록과 같은 다양한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는 반도 일본어설을 입증 및 반론하기 위해서는 고고학과 언어학, 그리고 유전학과 같은 여러 관련 학제 간의 상호보완 연구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2.4.1. 존 휘트먼(John Whitman)의 고고학적 연구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한반도의 청동기 시대 집단들이 반도 일본어를 사용한 집단이라고 본다. 이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알렉산더 보빈과 존 휘트먼(John Whitman)이 있다. 휘트먼은 기원전 1,500년경, 요동반도에서 한반도로 논농사가 도입되면서 일본어족이 들어왔다고 본다. 이후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입하면서 수많은 유이민들이 발생하였고, 이들이 한반도로 이주하면서 한국어족이 들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일본어족의 경우 논농사를 기반으로 해서 한반도 남부지방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기원전 300년경 이들 집단이 일본 규슈 지방으로 이주하면서 일본 열도로 일본어족이 확산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반도 일본어의 경우 기원전 300년경에 유입된 한국어족으로 인해 점점 소멸되어갔다고 주장했다.휘트먼은 이러한 원시 일본어족 문화의 지표 유물을 민무늬 토기로 보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간 야요이인들의 문화는 대체로 송국리식 토기의 유적 문화와 일치하는데, 송국리식 토기는 이 민무늬 토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어족의 문화는 십이대영자 문화로 대표되는 이중구연토기, 점토대토기가 지배적으로, 민무늬 토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된다.
실제로 송국리 문화를 영유하던 집단은 일부가 일본열도로 직접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당시 한반도에 살던 주민이 일본 열도로 이주했다는 사실 자체는 유전학적으로도 증명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Cis-AB형의 존재가 있는데, 이 혈액형은 침미다례의 지역이었던 전라남도의 남쪽과 일부 변한 지역, 그리고 일본 규슈에서만 발견되는 희귀 혈액형이다. 침미다례의 고고학적 계통은 서해안 토돈분구묘 + 위만조선계의 예맥 + 송국리 문화 유형인 계열 세력의 융합인데, 이를 근거로 송국리 문화 유형인들의 Cis-AB형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라고 주장한다.
알렉산더 보빈은 상술했듯이 마한이 진한과 변한보다 일찍 한화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 또한 고고학적 증거가 존재한다. 보빈은 한국어족 집단들은 비파형 동검과 세형 동검으로 대표되는 북방 세력이라고 보았는데, 진국 지역 일대에서 세형 동검이 가장 먼저 등장한 지역은 준왕이 세운 것으로 추정되는 마한 건마국 부근, 즉 금강 유역이었다.# 즉 이는 준왕의 마한 정복 전승과도 통하지만 실제로 이는 서기전 300년경의 일로, 위만의 쿠데타보다 100년 정도 앞선다. 다만 기원전 300년은 상술했듯 고조선이 연나라에게 패하여 중심지가 심양에서 평양으로 이동한 시기와 일치하는데, 즉 기존 준왕의 전승보다 더 빨리 한국어족이 한반도에 유입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다.
상기한 논의를 종합하여, 반도 일본어설 측에서 제시하는 여러 고고학 및 관련한 학제적 증거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점토대토기-세형동검의 유입으로 한반도 중남부가 사회문화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었으며 이는 한반도가 일본어족에서 한국어족으로 대체되는 계기로 지목할 수 있다. 둘째, 민무늬토기문화는 일본어족의 문화로, 점토대토기는 한국어족의 문화로 뚜렷이 구별할 수 있으며, 한반도의 민무늬토기가 전파되어 형성된 야요이문화를 바로 일본열도에 일본어족이 확산된 계기로 지목할 수 있다. 셋째, 앞선 논의는 진개의 동정이나 준왕의 남래와 같은 문헌 근거와도 호환된다. 넷째, 실제로 유전학적으로도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으로의 직접적인 이주를 뒷받침할 수 있다.
2.4.2. 남한지역 점토대토기-세형동검 유입에 대한 고고학계의 연구동향
앞선 단락에서 언급했듯 휘트먼의 가설에서는 점토대토기 내지 세형동검을 한국어족의 지표로 보고, 이 문화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남한지역의 일본어족 집단(청동기시대 토착민)이 한국어족 집단으로 대체되었다고 보고 있다.하지만 현재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앞서 제시된 휘트먼의 가설과는 달리, 기원전 5-4세기 이후 점토대토기문화 및 세형동검의 확산을 단순한 이주나 주민교체설, 이로인한 문화적 단절의 견지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고고학계는 이를 비교적 소규모의 이주민과 토착민 간의 활발한 교류 및 융화의 관점에서 설명하거나, 전기 청동기시대부터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온 요동지역 청동기 문화 네트워크 사이의 교류의 결과로 해석하고 있다.[43] 특히 알렉산더 보빈이 제시하는 '무기와 전술이 우월한 북방의 기마민족 내지 수렵민이 남방의 농경민족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식의 자극적인 주장[44]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상호 간의 호혜적인 교류 속에 점진적으로 통합되어갔음을 시사하고 있다.[45] 한편 강원 지역에서는 점토대토기 문화가 기원전 4세기부터 나타나기는 하지만, 이는 종래의 민무늬 토기와 병존하다가 새로운 철기문화로 모두 흡수되기 때문에 딱히 점토대토기 문화가 지배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46] 이 지역에서 한국어족이 정착한 과정은 단순히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의 이주 이외의 다른 부가적인 요인을 통해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휘트먼 등은 점토대토기-세형동검의 유입을 대규모 인구집단의 이동 및 언어교체의 계기로 지목할만큼 이 당시 문화변화가 격절적이라고 보는 데에 반해,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이를 그러한 단절적인 변화로 이해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현재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대규모 이주민 집단이 내려와 재래 토착 청동기시대 주민들을 대체했다'고 해석하지 않는다.
인도 유럽어족의 기원에 있어서의 농경-언어확산가설[47]이나 스텝 기원가설[48]과 같이, 주로 언어교체는 급격한 인구집단의 전면적인 교체 혹은 적어도 인구통계학적인 변화를 야기할만큼의 대규모 이주민의 유입으로 인해 일어난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49] 하지만 이 당시 점토대토기-세형동검의 확산 이후 형성된 새로운 '세형동검문화' '점토대토기문화'는 주로 이전 문화와의 연속적인 측면이나 계승적인 측면이 많기 때문에 토착민들이 일방적으로 대체되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설령 이주가 있었더라도 언어교체의 계기로 지목할만큼의 대규모 이주민이 있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물론 물질 문화의 변화 양상을 통해 해석된 상기의 논의들이 관념 문화의 변화까지 온전히 포괄하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이 반도 일본어설이 거짓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극단적인 수준의 대규모 주민 교체는 없었을지언정 비교적 소규모 수준의 고조선 계통 주민들의 집단적 이주는 어느정도 존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또 이들이 지역적인 교역망을 주도함에 따라 이들의 언어인 한국어족이 점차 지배적인 언어로 부상했을 가능성까지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반도 중남부에서 청동기 시대 말기에서 원삼국시대 사이에 어떤 집단이 대규모로 이동했다고 상정할 수 있을 만큼의 극적인 변화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이 무렵의 고고학 자료들을, 외래인의 대규모 이주로 말미암아 어족이 비교적 단시간에 극적으로 변했다는 반도 일본어 가설을 결정적으로 확증할만한 근거로 사용하기는 어려워보인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 당시 상황에 대한 고고학계의 주류 의견은, 반도 일본어설의 찬성론자들이 이 무렵의 일본어족 집단으로 가정하는 한반도 중남부 토착민들은 단순히 이러한 외래 문화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거나 이들에 흡수되는 입장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적극적으로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다른 집단과 교섭하면서 토착문화와 외래문화가 융합된 새로운 문화를 창출시킨 주역 중 하나였다는 것이다.[50] 즉 일본어족 토착민이 일부 기층 어휘만을 남기고 외래의 한국어족 집단에 일방적으로 흡수 및 소멸한 것으로 가정하는 반도 일본어설의 주장과는 다소 배치된다.[51][52][53]
이와 같은 고고자료의 양상은, 외래 한국어족에 의한 토착 일본어족 집단의 대체라고 하는 반도 일본어 가설에 부분적으로 개연성을 제공할 여지는 있으나, 이러한 자료를 반대되는 가설[54]을 배척하는 논리로 이용하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55] 또한 고고자료 상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을 한국어족으로, 토착민을 일본어족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고고학적 해석을 통해서는 도출하기 어려운 많은 비약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한편,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이들 중 일부는 '송국리문화가 한국어족 도래 이전에 이미 기후문제로 쇠락해 있었으며, 따라서 한국어족 계통 이주민들이 자연스럽게 토착 송국리문화를 대체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물론 고고학계에서도 기원전 7-6세기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 송국리문화가 기원전 6-5세기에 걸쳐 불상의 이유로 크게 쇠락했다는 사실 자체는 인정한다. 하지만 이는 송국리유적, 관창리유적, 진주 대평리 유적과 같은 그 당시 송국리 사회에서 각 지역별 최상위 취락의 역할을 담당했던 대형취락이 해체되거나 축소된 사실에 대한 담론일 뿐이다. 실상은 세형 동검계통 이주민들이 당시 사회를 주도했다고 보는 조진선조차도 변, 진한사회의 기층에 송국리문화와 검단리문화가 자리잡고 있음을 인정하며, 세형동검문화 계통의 취락은 극소수였으며, 이에 반해 다수의 송국리형-검단리유형 취락들이 기층에서 잔존해 있었다고 보고 이들의 흔적은 기원전 1세기 와질토기문화가 성립할 무렵까지 지속되었다고 본다.[56] 뿐만 아니라 2010년대 이후 대다수의 고고학자들 모두 점토대토기문화가 유입된 이후에도 송국리계통 취락이 잔존하고 있었다고 보며, 이미 앞서 언급했듯 순수한 점토대토기 취락은 거의 없고, 대신 소수의 점토대토기 계통 이주민과 다수의 송국리문화계통 주민들이 결합하여 양자의 문화가 혼합된 다수의 복합취락을 형성했다고 보고 있다.
다시말해 송국리문화는 기원전 6-5세기에 걸쳐 기후변화 및 점증하는 사회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상당부분 정치적 혼란을 겪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갑작스레 해당 문화를 영위하던 주민들이 증발하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며 그들의 인적, 문화적 요소는 후대 문화에도 지속적으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57]
물론 2000년대 이전의 고고학계에서는 연나라 진개의 동정이나 준왕의 남정과 같은 문헌기록을 고고자료와 연결시키는 데에 과도하게 집착했던 나머지, 마치 송국리문화 자체가 기원전 대략 기원전 4세기 무렵의 거점취락의 해체와 동시에 사라지고, 세형동검을 공반한 점토대토기문화가 이를 대체했다는 단절론적 입장이 우세했던 적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점토대토기단계 단절론/주민교체론'에 가까운 견해라 할 수 있으며, 세형 동검의 전래를 언어교체의 계기로 보는 휘트먼의 가설 역시 대체로 이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이청규가 세형 동검과 점토대토기의 출현 연대를 서로 상이하게 보는 것을 시작으로[58] 이러한 단절론의 근거가 되는 문헌중심적 편년연대론이 공격받기 시작했으며, 2010년대 이후 이창희 등에 의해 문헌기록과 무관한 유물의 자체적인 새로운 편년안이 정립되면서[59] 고고학계에서는 '송국리문화가 이미 기원전 4세기 이전에도 점토대토기를 수용하고 있었으며, 한반도 중남부에서의 세형 동검의 유입은 점토대토기문화의 출현보다 늦다'는 입장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이미 송국리 사회는 점토대토기문화의 최초 출현시점부터 적극적으로 이러한 외래 문화를 수용하고 이주민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매우 점진적으로 점토대토기와 세형동검과 같은 초기철기문화의 문화요소들이 성립하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며, 주민교체론과 같은 극단적인 단절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또 앞서 언급했듯, 애당초 이러한 점토대토기문화 계통 이주민들의 취락이 소수인데다가 소규모라는 점도 이러한 단절론을 배격하는 한 가지 근거가 되었다. 애당초 이들 이주민들의 취락은 매우 열세하여 입지상 충분한 가경지(可耕地)조차도 확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는 상황에서[60] 도대체 무슨 수로 이들 소수의 이주민들이 다수의 토착민들을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단 말인가?[61]
뿐만 아니라 세형 동검과 점토대토기문화가 이주민에 의해 동시에 확산되었다고 보는 문헌중심적 연대관에는 또 하나의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에 근거해서는 세형 동검이 부장된 분묘가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호서 및 호남서부지역에는 이 분묘들과 공반하는 생활유적 자체가 거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연대관에 근거하면 당시 세형동검집단을 점토대토기집단으로 보아야 하는데 정작 이 무렵 해당지역에서 순수한 점토대토기문화의 단일취락은 거의 없고, 그나마 송국리문화와 점토대토기가 모두 공반된 취락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동시기에 원형점토대토기문화의 단일 마을유적이 나타나는 곳은 송국리문화가 확산되지 않았거나, 중심지에서 크게 떨어져 있어서 송국리문화가 크게 우세하지 않은 지역들이 대부분인데, 오히려 해당 지역에서는 세형동검이 거의 출토되지 않는다. 결국 이에 따르면 송국리문화를 대체하고 들어섰다는 점토대토기문화 계통 이주민들은 호서 및 호남서부 지역에 다수의 분묘만 조영한 뒤 생활유적을 건설하지 않았으며, 정작 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지역에서는 세형동검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기이하고 모순된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반면에 해당 연대관에서 이전 시기에 이미 종말한 것으로 가정하는 송국리유형 취락들이 이 무렵까지 잔존하고 있다고 가정하면, 해당 분묘들이 자연스럽게 송국리유형 취락과 관계된 것으로 해명된다.
이는 구(舊)연대관에서 송국리문화가 점토대토기-세형동검 문화에 의해 일괄 대체되는 것으로 가정하여, 점토대토기가 공반되지 않는 순수한 송국리형 취락을 일괄적으로 기원전 4세기 이전으로 편년한 데에서 기인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김장석은 이러한 편년관에 반대하여, 적어도 호서지역 및 호남서부 일대에 한해서라도 송국리문화 종말기의 연대를 기원전 2세기 중후엽까지 내려 볼 것을 제안한다. 이에 따르면 송국리형 취락들은 호서 및 호남서부 지역에서 세형동검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기원전 4-3세기 무렵에 존속하고 있었으며, 해당 지역에서 분묘에 세형동검을 부장하던 영위하던 권력자들은 주로 송국리문화 계통의 취락들을 기층으로 거느리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김장석은 피난민에 불과한 점토대토기문화 계통의 유이민들이[62] 토착 송국리사회를 압도하고 재지 문화의 변화를 이끌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고있는데, 이들이 부분적으로 재지 송국리문화사회의 지배층에 편입되었을 수는 있을지라도, 세형동검을 수용한 것은 어디까지나 재지계통 지배층의 선택의 결과로 해석한다. 다시말해 세형동검의 유입은 어디까지나 재지 송국리문화 계통 주민들의 선택의 결과에 가까우며, 세형 동검의 유입으로 송국리문화가 종말한다는 것은 편년 오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63][64] 그렇다면 세형동검을 점토대토기문화와 결부시키고, 이를 외래의 한국어족의 유입 및 토착언어 대체의 근거로 보았던 휘트먼의 가설은 그 기초부터 무너지게 된다. 왜냐하면 상기 논의에 따르면 이러한 세형동검은 종래의 재지송국리문화집단과 훨씬 더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65][66]
비슷한 맥락에서 천선행 역시 원삼국시대 한(韓) 문화를 세형동검 및 점토대토기와 같은 외래계 문화로 정의하는 통설에 반대한다. 특히 근래에 들어 송국리문화 및 점토대토기문화의 접변 사례에 대한 보고가 늘어나고 있어 분구묘와 같이 과거에 송국리문화와 초기철기문화 간 단절이라고 생각했던 요소들이 실은 상당부분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의 결과로 드러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 문화를 재지 토착민과 단절된 문화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즉, 재지 문화는 상당부분 토착 묘제를 존속시키고 있는데다가, 새로운 문화요소에서조차도 토기 제작기법 등 재래의 기술이 계승되는 측면이 강했기 때문에 토착민의 문화가 외래문화와 공존, 화합하면서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형동검의 확산 이후에도 송국리문화, 점토대토기문화는 기원후 2세기까지 잔존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천선행의 경우에는 문헌기록 상 준왕의 남래 자체는 사실로 인정하지만, 이를 문화적인 단절의 계기로 보지는 않는다. 문헌기록에 따르면 마치 준왕을 중심으로 한 단일 집단이 도래, 확산하여 한(韓) 사회를 건설한 것처럼 묘사하나, 실제의 당시의 각 지역별 고고자료는 지역별로 상당히 이질적인 측면이 강하므로 문헌기록과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고 한다. 요컨대, 삼한사회나 진(辰)이라 범칭되는 집단은 실상 선주문화 및 외래문화의 수용양상 등의 측면에서 상당히 지역성이 강했고, 따라서 물질문화도 상당히 이질적이므로 마치 어떤 단일집단이 확산한 결과로서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문헌기록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삼한 문화의 한 구성요소에 불과한 '세형동검'을 마치 단일한 집단의 표지유물처럼 활용한 기존 학계의 관행은 잘못되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그러므로 세형동검과 같은 외래 문화요소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토착문화가 이러한 외래문화를 수용하여 생겨난 중층적 구조로서 삼한사회를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67][68][69]
결국 이러한 근래의 고고학계의 논의들을 살펴보면, 송국리문화는 최상위취락의 해체 및 와해 현상으로 쇠락을 겪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상당수 송국리유형 취락들은 길게는 기원전 1세기까지 혹은 그 이후까지 별다른 외부문화의 유입없이 존속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일부 지배계층의 취락들의 경우 순차적으로 점토대토기나 세형 동검을 수용한다던가, 새로운 묘제양식을 받아들인다던가 하는 식으로 문화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지배층의 경관적, 위세품적 요소를 제외하면 정작 주거나 실용기, 생활패턴과 같이 실생활에 보다 더 밀접한 요소들은 재지의 양식이 그대로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70][71]
이처럼 청동기 시대에서 초기 철기 시대, 그리고 원삼국시대로 물질문화가 변화하는 과정은 다양한 계통의 외래문화의 지속적인 유입으로 말미암아 점진적으로 변화한 것이지 특정한 주민집단의 대규모 이주로 말미암은 단절론적 획기에 의해 변화한 것이 아님이 고고자료가 축적될수록 보다 더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근래에 들어서는 그러한 변화 과정의 연속적인 측면 역시 보다 더 세밀하게 재구성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문화 접변이 무력 정복을 통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볼만한 근거도 그다지 찾기 어렵고, 오히려 토착사회가 적극적으로 외래 물질문화를 수용하는 양상으로 볼 때 그럴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 오히려 일부의 새로운 묘제형식이 추가된다던가, 세형 동검이나 일부 토기제작양식이 외부에서 유입된 데에 반해, 생계경제 양상이나 수단, 생활주거 양식 등은 거의 변하지 않고 재래의 요소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과연 세형동검이나 점토대토기와 같은 새로운 문화요소를 주민교체나 언어 교체의 계기로 지목해야만 하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지에 대해 반문해볼 수밖에 없다. 청동기시대-삼한시대의 물질문화변화 양상은 한 때 학계에서 특정한 문헌기록에 과도하게 주목하여 단절론적 견해가 유행했었다는 것 이외에는 별달리 특별할 것이 없다.[72] 외래에서의 새로운 문화요소의 유입이나 소규모 이주민이 있었을 가능성 자체를 특별히 전면적인 언어교체의 계기로 볼 근거는 없기 때문에, 앞선 단락에서 언급된 휘트먼의 가설은 고고학적으로는 전혀 증명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2.4.3. 고대 한국어족 집단과 일본어족 집단의 구획 및 지표의 타당성 검토
또 한편, 반도 일본어족 가설의 주장대로라면, 청동기 시대-원삼국시대 사이에 중국 동북지역 및 한반도 중, 북부에 있던 수렵민 성향이 강한 '한국어족' 계통의 주민집단과, 한반도 중남부 농경민들을 중심으로 한 '일본어족' 계통의 주민집단이 적어도 특정 시점에는 서로 어족 수준의 언어의 차이가 분명히 나타날만큼 이질적인 집단으로서 병존해야만 한다.[73] 물론 물질 문화의 양상이 언어, 어족과 같은 관념문화를 온전히 반영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고고학적 사료를 통해서는 물질 문화 집단을 확연하게 두 개의 이질적인 집단으로 구별할 만한 실마리는 그다지 나타나 있지 않다.예를 들면 기원전후부터 다양한 문화권이 병존하는 요서-요동-서북한-압록강-두만강 유역의 광대한 영역의 문화집단들은 이들을 단일한 '북방세력' 내지 '북방문화'로 단순화할 수 있을만큼 동질적이지도 않았다. 예컨대 부여계 문화를 대표하는 서단산문화나 고구려의 선행문화인 공귀리형 토기 문화도 유사한 점이 있으면서도 묘제나 여타 문화요소가 분명히 차이가 나며, 이들은 다시 원삼국시대 이후 강원지역의 예계 문화권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와도 상당한 차이점을 보인다. 흔히 후대의 문헌기록을 과도하게 소급 적용하여 이들을 '예맥계 종족'이라고 단순화하는 경향도 분명히 학계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실상 이들은 삼국시대 이전에 어떤 통일된 종족집단이나 물질문화를 이루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74]
또한 북방 문화는 반대로 한반도 중남부의 청동기 문화 집단과 아주 격절적으로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이들은 같은 요령식 비파형 동검 문화권에 속해 오히려 긴밀히 교류하는 관계였다는 점도 분명히 주지해야 한다. 오히려 송국리 문화가 확산된 한반도 중서부 일대는 해로를 통해 서북한 및 요동집단과 밀접하게 교류했던 경향 역시 존재한다.[75][76]
청동기 시대 조기부터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중남부는 이미 이러한 다양한 계통의 북방 문화의 영향을 받고 수용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이러한 영향으로 청동기 시대 조기-전기부터 다양한 문화 조합상이 한반도 중남부에 나타났다.[77] 특히 요동과 압록강 유역에서는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더라도, 대체로는 비교적 재지 신석기문화의 기초 위에 무문토기문화가 혼합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향이 많았다. 반면에 한반도 중남부에서는 비교적 급격하게 즐문토기문화가 소멸하고, 이것이 요동-압록강 권역에서 발원한 다양한 계통의 무문토기문화로 대체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78] 청동기시대 전기동안 한반도에서는 도작을 위시한 정주농경 생활양식이 급격히 확산되는 것으로 보이며, 이전 신석기시대에 비해 주거지 등 생활유적이 짧은 시간 안에 폭증하는 것으로 나타나 이 시기에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79] 이는 이미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한반도 중남부가 요동-압록강 유역으로부터 사회, 경제 및 문화를 막론하고 전방위적 영향을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청동기 시대 중기 혹은 후기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문화권이 생업양상별로 구획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대략 울산-경기 중부를 가르는 축선으로 송국리 문화권과 비송국리 문화권이 구별된다. 대체로 송국리문화권은 도작 및 여타 잡곡농경을 위시한 정주농경문화가 자리잡은 지역으로, 비송국리문화권은 비교적 수렵채집 및 어로의 생계양식이 상당부분 잔존하고 있었던 지역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 중남부에서도 비교적 문화권의 구별이 있어 완전히 동질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므로[80] 반도 일본어설 등의 주장처럼 청동기시대 한반도 및 중국 동북지역을 '북방계 문화'와 '남방계 문화' 내지 한국어족 집단이나 일본어족 집단으로 단순화하여 구별할만한 단서는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들 역시 서로 간의 무조건적인 긴장관계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경주, 부산 등 동남부 일대에는 이들 사이의 병존지대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특히 야요이 문화의 초기 기원 중 하나로 지목되는 곳이 이 양 문화의 병존지대로, 청동기 시대 중-후기의 송국리 문화를 일부 수용했으나 청동기 시대 전기 이래의 잔존 요소가 상당히 강하게 남아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초기 야요이 유적에서도 마찬가지로 송국리 문화에서는 이미 소멸된 각목돌대문토기나 공렬문토기 등이 나타나고 있어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의 양상과는 다소 차이를 보인다.[81] 사실 송국리 문화는 야요이 문화와 상당한 접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 양자를 완전히 동일시하기는 어렵고 기존에 존재하던 송국리 문화와 조몬 문화가 상당한 변형 및 융합을 거쳐[82] 형성된 제 3의 문화로서 야요이문화가 탄생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83][84][85] 혈연적 공통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문화요소의 공통점만을 가지고 송국리 문화로서 한반도 중남부 제집단이 범칭되고 있기는 하나[86] 단순히 이에 근거하여 한반도 중서부의 전형적인 송국리 문화 집단과, 상당히 많은 문화적 변형을 거쳐 형성된 일본 규슈의 야요이 문화 집단을 혈연적으로 동일한 계통의 집단으로만 해석할 수 있을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일 수 있다.[87]
대개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는 반도 일본어족을 주로 농경민인 송국리 문화와 동일시하고, 이들 문화가 태백산맥을 경계로 비교적 수렵채집의 생계양식이 여전히 강하게 잔존하던 한반도 중동부, 중북부 일대로 전파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근거로 반도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이 서로 명확히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당 지역의 고고학적 양상들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한 것으로, 강원 지역 및 울산 지역에서는 오히려 오랫동안 점토대토기보다는 민무늬토기가 우세한 반면에, 한반도 중서부 일대에 먼저 점토대토기와 세형 동검이 출현하며, 이들은 또한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한국어족의 기원지로 지목하는 요동지역과 긴밀한 교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각 어족에 대한 지표들로 제시하는 민무늬 토기, 세형 동검, 농경 내지 수렵 채집이라는 생계경제 양상 등은 어떤 측면에서건 고고학적으로 서로 다른 두 집단으로 명확히 분리해서 해석할 수 있을만큼 일관적인 양상으로 확인되지는 않는다.[88][89]
위와 같은 기원전 시기 동북아시아 지역 문화유형의 복잡한 양상을 검토해보면 단순히 이 광범위한 지역에 거주하던 여러 제종족들을 거대한 두 개의 집단, 즉 한국어족 집단과 일본어족 집단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지에 많은 의문부호가 달린다. 오히려 물질문화의 양상으로만 보자면 한국어족-일본어족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별법보다 훨씬 더 다양한 스펙트럼의 문화 양상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서로 외떨어져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또 긴밀한 교류의 관계 속에 존재했다. 그렇다면 반도 일본어 가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렇듯 다양한 범주의 문화권을 어디에서부터 한국어족으로, 또 어디에서부터 일본어족으로 구획해야하는지, 또 그러한 구획에 어떤 정당한 근거가 있는지를 먼저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90][91]
사실 반도 일본어설에서 일본어족의 지표로 제시하고 있는 '무문토기문화'는 산동 용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던 요동지역 남단의 초기 청동기문화가 지속적으로 주변 지역으로 파급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한반도 중남부에 전파된 청동기시대 조기의 돌대문토기문화 및 전기의 가락동 유형 문화는 이러한 문화적 영향에 놓여 있던 요동지역 및 압록강-청천강 유역의 주민들이 직접적으로 이주하여 형성되었다.[92][93]
이처럼 청동기시대 중국 동북지역 및 한반도의 물질문화는 대체로 동질적인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역사언어학에서 청동기시대 한반도 일본어족 집단의 존재를 설정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른다. 그래서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 측과 반도 일본어설 측 모두 도작문화라고 하는 비교적 특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송국리문화에 주목한다. 야요이문화는 송국리문화 요소의 많은 영향을 받았을지언정, 송국리문화의 직접적인 연장으로만 이해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은데도, 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야요이=송국리문화=일본어족이라는 도식을 세운 뒤에 도작문화의 이주를 토대로 일본어족의 이동 과정에 대해 해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때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에서는 한반도에 조와 기장과 같은 잡곡농경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이미 한국어족이 널리 확산되어 있었는데, 그 이후 일본어족 집단이 도작과 함께 산동반도 내지 요동반도의 한국어-일본조어에서 분화하여 한반도에 들어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주한 것이라고 보았다.[94] 또한 반도 일본어설에서는 송국리문화와 같은 한반도 중남부의 도작문화를 일본어족 집단으로 가정하여 마찬가지로 이들이 도작과 함께 일본열도로 이주함으로써 일본어를 일본열도에 전파하였으며, 이후 이들과 전혀 상관없는(?) 고조선계통의 점토대토기문화가 한반도에 유입됨으로써 한반도에서 기존의 일본어족 언어가 한국어족 언어로 대체되는 것으로 보았다.[95][96] 어느 쪽이건 두 가설 모두 송국리문화라고 하는 도작문화 자체를 일본어족과 관계시키고 일본 열도에서의 도작의 확산을 일본어의 확산과 연관시키고 있다는 큰 맥락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송국리문화의 기원 내지 기층이라 할 수 있는 가락동 유형 문화가 요동지역-청천강유역 무문토기문화에서 기원한 데다가 송국리문화 내지 도작의 전파 역시 산동반도 및 요동반도 남단을 거쳐 한반도로 전래된 것이 유력하므로, 고조선계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동반도 지역의 문화와 송국리문화를 서로 이질적인 계통으로 보는 것은 어색하다. 설령 송국리문화의 수리도작이라는 생업기술 자체는 한반도 무문토기 확산과 별개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더라도, 이에 바탕을 둔 여러 주거문화 및 생활유물을 위시한 한반도 및 중국 동북지역의 무문토기문화는 서로 비교적 유사한 계통에 속해 그 연관성이 뚜렷하기 때문이다.[97]
이홍종에 따르면 야요이문화의 기원이 된 집단은 충청지역의 송국리문화 집단이 직접적으로 이주해온 것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지역의 재지의 전기 청동기문화집단(미사리계, 역삼동계)이 송국리문화를 인지하거나 채용함으로써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98] 이에 따르면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과 반도 일본어설에서 모두 가정하는 '송국리문화 도작민들의 산동반도 - 한반도 중서부 - 일본열도로의 직접적인 이주'가 성립한다고 보기 어렵다. 요컨대, 최소한 도작민의 이동을 토대로 일본어의 확산을 설명하고자 하는 역사언어학계의 시도는 고고학적 자료에 그다지 잘 들어맞지 않는 것이다.
다만, 일부 고고학 연구자들은 이홍종과는 다른 관점을 견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안재호 등은 송국리문화가 청동기시대 전기 무문토기문화와는 다소 이질적인 중국계 이주민의 유입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99] 송국리문화의 형성 시기와 야요이문화의 개막 사이의 시기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점에 착안하며 이들 중국계 이주민들이 수도작에 유리한 지역을 찾아 일본 열도에까지 직접적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았다. 해상 교통로를 통해 한반도 중서부지역의 송국리문화가 1차로 경남해안에 전파된 뒤, 이것이 다시 일본 규슈지역까지 전파됨으로써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문화가 개막한 것으로 보았는데, 이러한 해상교류는 토착 무문토기인들보다는 주로 해상생활에 익숙한 중국계 이주민이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100] 하지만 앞서 보았듯 야요이 조기문화는 청동기시대 전기 무문토기문화를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는데다가, 조기 야요이문화와 경남해안 송국리문화권에는 딱히 송국리형 묘제가 나타나지 않는 등 송국리문화의 원향인 중서부지역의 문화요소와는 차이가 많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였는지, 해당 연구에서도 중국계 이주민들이 영남지역의 토착집단과 동행하여 일본 규슈지역으로 이동한 것이라는 단서를 붙여두고 있다.[101]
그나마 송국리문화 외래기원설에 근거한 이러한 주장은 수전농경문화를 한반도에 전파한 이주민이 일본어족 집단의 기원이라고 보는 역사언어학계의 주장과 어느정도 호환될 여지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대로라도 역사언어학 연구에서의 고고학적 모순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안재호 등은 송국리문화의 형성에 관여한 중국계 이주민을 한반도 무문토기문화집단과 서로 별개의 집단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102] 만약 이러한 논의에 근거하여 송국리문화 형성에 기여한 중국계 이주민을 일본어족 화자 집단으로 가정하게 된다면, 이들 중국계 이주민의 도래 이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던 토착 무문토기문화집단은 일본어족과는 다소 구별된 언어 화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이 경우, 알렉산더 보빈은 어떻게 송국리문화가 확산된 적조차 없었던 경주지역의 언어에서 일본어족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송국리문화 외래기원설에 근거하자면 보빈의 이러한 언어학적 발견이 잘못되었거나, 혹은 반대로 역사언어학에서 도작문화-송국리문화를 일본어족 집단의 기원으로 간주하는 휘트먼 등의 견해가 잘못되었거나 최소한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103]
또 안재호 등도 송국리문화는 토착문화와 상당부분 융합, 혼합했을을 부인하지 않으며, 중서부지역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토착민과 토착문화의 비중이 훨씬 더 높다고 보고 있다. 설령 송국리문화 외래기원설에서 상정하는 중국계 이주민이 일본어족 집단의 기원일지라도, 이들은 상당수 토착 무문토기문화 집단에 동화, 융화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시대 이후 주류 한국어족과는 이질적인 언어를 가진 일본어족 집단이 상당부분 잔존하고 있었다고 보는 반도 일본어설의 입장과는 다소 맞지 않게 된다.
정리하자면, 기존 고고학계의 통설에서는 주로 일본열도 야요이 조기문화 개막에 기여한 한반도 수전농경민이 직접적으로 중국대륙에서 한반도에까지 수리도작문화를 가지고 이주한 집단이 아니었다고 보고 있으므로 수도작의 이동경로를 통해 일본어족의 확산, 분화 과정을 설명하려는 역사언어학계의 주류가설과 어긋난다. 반대로 안재호 등의 송국리문화 외래기원설에 근거하여 송국리문화 형성에 기여한 중국계 이주민을 일본어족 화자로 가정하고자 한다면, 이들 송국리문화가 전파된 적도 없었던 경주 지역의 고대 언어에 일본어족의 흔적이 검출된다고 보는 보빈의 발견과 크게 모순된다. 문제는 이러한 보빈의 '진한어 일본어족설'이 반도 일본어설 및 한반도 중남부에 일본어족 집단이 존재했다는 역사언어학계의 주장의 핵심적인 논거였다는 점이다.
끝으로 송국리문화 외래기원설의 입장에서 이들 무문토기문화 집단과 송국리문화 형성에 기여한 중국계 이주민을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으로 본다고 한다면 애당초 이 논의는 어떻게 한반도와 일본열도가 한국어와 일본어 사용자 집단으로 분화했는지를 전혀 해명해주지 못하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맥락의 논의가 부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도작민의 이동과 확산을 토대로 일본어족의 확산을 해명하고자 하는 역사언어학계의 주류 견해는 고고학적으로 성립하기 어렵고 역사언어학계의 통설과 배치되는 측면이 존재한다.
만약 도작 내지 도작문화의 확산에 따라 일본어족이 확산되었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경주지역 검단리문화를 위시한 무문토기문화 자체를 일본어족 집단으로 가정한다고 하면 어느정도 고고학적 물질자료와 역사언어학적 발견과의 모순은 피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고조선 등과 연결되는 요동지역 문화의 언어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요동지역 역시 한반도와 무문토기문화라는 물질문화를 공유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요동과 한반도에 이르는 이러한 물질문화를 어떻게 한국어족과 일본어족 집단으로 구획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남게 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의 확산 과정에 있어 농경민의 인적 확산에 의해 언어가 확산된 것이라는 농경-언어확산 가설을 이 당시 한반도 상황에 적용하기 어렵다면, 일본어족-한국어족 간의 언어확산-교체 과정을 어떻게 해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도 남게 된다는 것이다. 트랜스유라시아어 가설이건, 보빈-휘트먼류의 반도 일본어설이건 단순히 특정 시기에 특정 물질문화나 농작물이 전파되었던 것을 언어교체의 계기로 지목하는 것 이외에는 이러한 언어교체의 계기를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104]
결국, 어느 쪽이건 한반도 청동기시대와 관련한 역사언어학계의 논의를 고고학적 논의와 호환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또한 송국리문화는 장강유역과 산동반도의 도작문화와 연관이 깊기 때문에, 이들 문화를 처음 전파하거나 조영한 주체는 유전적으로 동아시아 계통의 집단이거나, 최소한 그 영향을 받았을 개연성이 높다. 로비츠의 논문에서는 신석기시대 한반도 주민들에게는 조몬인의 형질이 나타나지만, 현대 한국인에게서는 조몬인 형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하여 신석기시대 이후 어느 시기에 조몬계통 신석기시대 주민들이, 조몬인 조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이질적인 이주민 그룹에 의해 대체된 것으로 가정하였고 이들이 한반도에 도작을 가져온 집단인 것으로 추정하였다.[105] 그런데 해당 논문에서는 이 집단을 북아시아 계통의 형질의 비중이 높은 하가점 상층문화 집단과 연결시키고, 이들이 한반도, 나아가 일본열도에 도작을 전파한 주체로 이해하고 있다.[106] 이는 장강유역-산동반도를 한반도 도작문화의 기원지로 보는 전통적인 식물고고학적 입장에 어긋날 뿐 아니라[107] 기후상 도작이 어려운 요서지역을 도작 전래 루트로 보는 경우가 없다는 점에서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108]
또한 로비츠의 논문에서는 이미 신석기시대 한반도인들을 하가점 상층문화인과 거의 유사한 형질구성을 나타내는 홍산문화 계통의 형질로 이해하고 있는데, 비교적 다소 비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조몬계 + 북아시아계 + 동아시아계의 혼합으로 설명되는 것은 한반도 신석기인이나 일본 열도 야요이인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안도 패총 신석기시대 전기 인골에서는 아예 조몬계 성분이 검출되지 않으므로, 일부 야요이 인골에서 나타나는 매우 낮은 조몬인 형질 구성 역시 한반도 신석기인 집단의 이주를 통해 충분히 해명할 수도 있다.[109] 그렇다면 로비츠의 논문에서 보여주는 하가점 상층문화인과 한반도 신석기인-일본 열도 야요이인 사이의 광범위한 유연관계는 홍산문화 시기로부터의 이들 지역 간의 유전적 연관관계를 보여줄 뿐,[110] '청동기시대 이후 요서지역 주민들이 도작을 가지고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 열도로 이주하였다'라는 일본어족 집단의 확산에 대한 그들의 가정을 입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111][112]
결국, 이에 따르면 역사 언어학자들이 내세우는 한국어 및 일본어의 확산 및 이와 관련한 인류집단의 이동에 대한 가설은 고고학적 증거들에 다소 부합하지 않고, 유전학적으로도 엄밀히 입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 청동기 시대 도작문화와 무문토기문화 자체를 일본어 확산의 지표로 보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과 반도 일본어설 모두 상당한 문제가 있고, 설령 이들의 주장대로 한때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일부 한반도에 있었더라도, 한반도 도작사회가 전부 일본어족 언어 사용자 집단이었을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진다. 청동기시대의 개막 이후로 한반도 및 요동지역 사회가 급격한 인적단절과 문화적인 교체를 겪었다고 볼만한 고고학적 근거는 없으므로, 비록 일부 신석기시대 생계양식을 보존한 잔존집단이 오랫동안 남아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하진 못하더라도, 대체로 청동기시대에 조성된 언어 환경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이어진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나마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에서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동계어에 속한다고 보므로, 원래는 동질적이었던 무문토기문화가 특정시기에 각각 한국어족과 일본어족 사용자 집단으로 분화했다는 논리를 펼 수라도 있다.[113][114] 하지만 한국어와 일본어가 계통상 전혀 상관없는 고립어 내지 단독 어족이라고 가정하는 반도 일본어설에서는 이러한 논리가 통용되기는 어렵다. 즉, 반도 일본어설의 입장에서는 고고학적으로 상당히 동질적이었던 요동과 한반도의 청동기-농경민 집단이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서로 계통상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다소 이상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115]
물론 이에 대해서는 알렉산더 보빈과 같이 역사언어 변화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언어학적 증거만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다소 극단적인 입장을 가진 언어학 연구자들도 일부 존재한다. 이들은 고고자료가 언어학적 변화를 잘 반영하지 않을 수 있다고 믿고, 따라서 일부 고고자료의 양상이 그들의 언어학적 추론에 완전히 부합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그들의 가설을 기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반도 일본어설 측, 특히 휘트먼이 제시하는 고고학적 지표들의 정당성을 변론하는 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첫째로는 이들이 민무늬 토기나 점토대토기 및 세형 동검을 각각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의 지표로서 선정하고 대별한 것은 이들 언어학 연구자들의 임의의 선택의 결과일 뿐, 결코 비판의 여지나 반증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며, 충분히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입론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로는 설령 이들의 언어학적 추론을 인정하여 한때 한반도 남부에 일본어족 언어 사용자가 거주했다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이와 관련한 고고자료 지표의 선정이 달라진다면 고대 반도 일본어족 집단의 정체나 거주양상, 그리고 한반도에서 이들이 사라진 경위 등에 대한 해석 역시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보빈의 언어학적 추론만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단순히 고대 한반도의 언어에 일본어의 영향이 검출된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하지만 반도 일본어설이 다루는 주제는 이보다는 훨씬 광범위하며, 특히 한반도 남부의 주민대체설이라던가, 송국리문화 등 한반도 청동기 시대 주민들이 일본어족 집단이라는 것 등 쟁점이 되는 많은 주제는 언어학적 추론을 통해 내려진 결론이라 하기 어렵다. 이는 민무늬 토기와 세형 동검을 각각 일본어족과 한국어족의 지표로서 임의로 선정한 뒤, 해당 물질자료를 영위한 집단들의 인적교체를 그들의 언어학적 입장에 짜맞추어 가설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학자들이 특정한 물질문화요소를 언어확산의 지표로서 충분한 근거없이 선정하고 나서, 나중에와서 이에 근거한 그들의 상상과 실제 물질문화 양상이 서로 부정합한 것이 드러나자 '고고자료는 언어양상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한다'라고 변명하는 것은 언어도단에 가깝다. 애당초 해당 지표를 언어 확산의 지표로 삼아야만 하는 충분하고 합리적인 근거가 없었던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기원전후 한반도에 단조철기 등의 본격적인 철제기술이 유입되자 실생활 관련 유물과 생계양식까지 완전히 변화했음을 감안하면 차라리 철기가 세형 동검보다 한반도 남부 사회에 훨씬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도 있다. 또 세형 동검이 야요이시대 일본열도에 확산되어 중대한 사회변화의 획기로 작용한 데에 비해, 철제기술은 기원전후한 시기에는 그 분포 범위가 일본에까지 전면적으로 확산되지는 않았으므로 철기는 차라리 휘트먼이 제시하는 세형 동검보다 오히려 훨씬 한국어족의 확산 범위를 추정하는 데에 훨씬 적합할 수도 있다. 만약 휘트먼이 세형 동검 대신 이러한 철제기술에 대해 보다 더 주목하고 가설을 세웠다면 한국어족 집단의 확산을 마치 위만이나 낙랑군과 같은 중국계 유이민의 확산과 연루지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이 당시 한반도 철제기술은 대체로 중국 전국시대의 철제기술에 그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116] 반면 세형 동검은 전국시대 중국보다는 당시에는 중원권역이 아니었던 청동기시대 중국 동북지역에 기원을 두고 있으므로 이 경우 반도 일본어설에서의 인구집단 이동에 대한 가설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117]
문제는 적어도 휘트먼의 논의 속에서는 그가 구태여 철기를 제치고 세형동검을 한국어족의 지표로서 선정해야만 했던 어떤 특별한 이유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118] 휘트먼 등이 어족에 대한 고고자료를 선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가설을 세우는 과정은 이처럼 매우 부실한 증거와 논의에 토대해 있으며, 그의 해석이 다른 경쟁 가설과 비교할 때 가장 개연적이라고 볼만한 근거도 없다.
그렇다고 그의 가설이 딱히 고고학적, 유전학적인 변화양상을 온전히 다루는 것조차도 아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 사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인구유입은 역시 야요이시대 초창기에만 단발적으로 이루어져 일방적으로 재지 토착 조몬문화를 대체한 것이 아니며,[119] 최근 일부 유전학 연구에서는 오히려 야요이시대에까지는 조몬계와 외래계 혈통이 비등하다가 기원후 3-5세기 이후 고훈 시대가 개막한 이후에야 외래계 혈통의 유전적 영향이 토착 조몬계의 그것을 압도하게 된다고 보기도 한다.[120] 이는 야요이문화 성립 과정에서 조몬계 토착민의 영향이 적지 않아서 반도 일본어설이 상정하는대로 '일방적으로 대륙계 언어가 전래되어 토착 조몬계 언어를 대체했다'는 것이 그 어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 유일한 가설이 아님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일본 고훈시대-한국 삼국시대에는 고고학적 증거들과 문헌기록 속에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대규모 이주를 시사하는 내용은 수두룩하게 나오지만,[121][122] 딱히 비슷한 시기 한반도가 소위 '기마민족'의 도래를 통해 전면적인 주민교체가 나타났다고 볼만한 증거는 없다.[123] 이후에도 한반도 남부인들은 별다른 주민교체 없이 통일신라(발해)-고려-조선을 거쳐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졌고 언어도 연속적인 계승관계에 있다.[124] 즉, 고훈시대-삼국시대에 일본으로 건너간 도래인들이 한국어족 언어 구사자가 아닐 가능성은 비교적 낮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25] 그렇다면 왜 일본어는 이 시기 도래계 주민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한국어와 큰 차이가 있을까? 적어도 이주민에 의해 일방적으로 기층 언어가 대체되는 측면에 과도하게 주목하는 반도 일본어설은 이러한 미스터리에 대한 충분한 해답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126]
앞서 제시한 분자인류학계 일각의 '일본인 삼중기원설'은 차치하고서라도, 고고학적 흔적만 두고 보았을 때도 야요이문화의 성립과 발전에는 다양한 계통의 한반도 집단이 기여하였다. 일본 열도는 야요이시대 조기나 그 직전 단계에는 특히 미사리-역삼동 계통의 한반도 조-전기 청동기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으며, 이와 병행하는 조기-전기에는 송국리문화의 직접적인 영향 역시 받았다. 전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점토대토기-세형동검문화가 다시 또 대규모로 이주하여 일본 열도에서 본격적으로 청동기문화가 시작되고 여러 사회복합도의 진전이 나타났다. 휘트먼 등은 세형동검집단을 한국어족 집단으로 보고 있으므로, 그 논리에 의거하자면 최소한 야요이시대 전기 후반부터 고훈시대 전후에 이르기까지는 한국어족 집단에 의한 대규모 도래인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던 것이 명백하다. 즉, 휘트먼의 논리에 따르더라도 야요이인과 야요이문화는 초기부터 한국어족과 전혀 다른 일본어족에 의한 영향만을 받아 한반도와 독자적인 언어집단을 수립한 것이 아니라, 한국어족 집단의 직접적인 영향 역시 상당부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열도에서의 야요이문화의 성립과 한반도에서의 점토대토기문화의 확산과정만 가지고서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 사이의 언어적 차이를 충분히 해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야요이문화와 '야요이인 집단'의 기원 자체가 단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127]
이는 '한반도 청동기시대 주민집단들이 토착 조몬인들을 대체하여 야요이 문화를 성립시켰고, 이 과정에서 일본 열도에 일본어족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으며, 한국어는 청동기시대 이후의 한반도 이주민에 의해 확산되었다'라고 하는 휘트먼의 가설이, 어떤 측면에서건 이 시기의 한일 간의 언어, 인적집단의 이주-확산 관계를 설명하는 유일한 해석도 아니고, 이 과정의 전모를 해명하는 가설인 것도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최근의 고고자료 및 유전학적 자료를 검토하면 훨씬 더 다양한 가설이 존재할 수 있고,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을 구획하는 고고자료 지표들도 비단 세형동검이나 점토대토기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다양한 자료들을 그 후보로서 검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요컨대, 반도 일본어설 측은 세형 동검을 한국어족의 지표로서, 민무늬 토기를 일본어족의 지표로서 부여하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물질문화 및 유전학적 연구결과를 토대로 한국어 및 일본어 확산 및 이와 관련한 인구집단 이동에 대한 가설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만약 반도 일본어설에서 이러한 고고학 및 유전학적 증거들을 엄밀하게 다루지 않은 채로 인구 집단의 이동 과정에 대한 비약적인 가설을 세우고자 한다면 이는 언어학의 범위를 넘어선 학제적인 측면에서는 그다지 높은 설득력을 가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2.4.4. 탐라어의 계통 문제에 대한 고고학적 검토
알렉산더 보빈은 중세 이전 제주도의 토착언어인 탐라어가 일본어족과 연결될 가능성에 대해서 검토한 바 있었다. 하지만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이 주장에도 역시 모순이 있다. 왜냐하면 오히려 제주일대의 무문토기문화 계통 송국리문화의 이주는 소규모에 불과했고, 탐라 정치체의 형성과 함께 제주도에서 원형주거지가 대규모로 확산되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자료들은 주로 기원전 4-2세기 경 원형점토대토기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128][129] 앞서 살펴본 휘트먼의 가설에 따르면 세형동검 및 점토대토기를 한국어족의 표지유물로 간주했으므로, 이에 따르면 탐라어는 당연히 한국어족이어야 할 것이다.한편 제주도가 송국리 및 점토대토기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일지라도, 제주도의 송국리문화가 기층문화라거나 점토대토기문화가 지배층이라는 시각은 물질자료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해석에 불과하며, 송국리문화 유입 이전 재지민의 잔존문화의 양상이 오히려 더 강하게 나타난다는 입장도 존재한다.[130] 이에 따르면 송국리문화 유입 초창기, 비교적 소규모로 형성된 원형주거지 내에서는 외래의 송국리토기보다는 재지계의 심발형토기가 훨씬 우세하다가 이후에 점진적으로 삼양동식 토기로 대체된다고 한다. 또 점토대토기문화의 유입으로 원형주거지가 비교적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을 때에도, 각 주거지 내에서 오히려 종래의 재지계 토기(심발형 토기 및 삼양동 토기)의 비중이 점토대토기의 비중보다도 훨씬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이는 송국리문화 유입 이전 재지민들이 송국리 및 점토대토기문화라는 외래문화를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료들이다. 이에 따르면 제주도의 토착 언어를 토대로 한반도 주류 언어가 어떤 언어인지를 추측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일 수 있다.[131] 요컨대, 탐라어는 송국리문화 유입 이전 신석기시대 혹은 전기 청동기시대 주민들, 그리고 점토대토기계통 주민들의 언어를 반영할 수는 있지만, 주로 반도 일본어설에서 일본어족으로 지목하는 청동기시대 중기 내지 후기 육지의 송국리문화 주민의 언어와 직접적으로 연루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매우 빈약한 편이다.
만약 반도 일본어설 측에서 제주도 점토대토기문화는 송국리문화와 접변한 뒤 유입된 것이니 한국어족이 아니라는 논지로 이를 재반론하고자 한다면, 점토대토기의 확산을 토대로 한국어족의 확산에 대한 가설을 펴는 이들의 기본적인 대전제 자체가 성립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확산된 점토대토기 문화가 다 이런 식으로 접변화한 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반도에는 순수한 '점토대토기 이주민'으로 볼 수 있을만한 취락이나 흔적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132] 제주도가 유독 문화적 보수성이 강해 일본어족이 많이 남았다는 논리로 땜빵을 하기에는 애당초 앞서 보았듯 제주도는 점토대토기 도래 이전에는 송국리문화 자체가 그다지 유행한 적조차도 없다.[133] 그렇다면 보빈이 지적한 제주도의 일본어족의 흔적은 도대체 무엇일까? 만약 정말로 보빈의 주장대로 그것이 일본어족의 흔적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는 송국리문화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만 보더라도 송국리문화를 일본어족으로 가정하는 보빈과 휘트먼의 반도 일본어설의 추론은 고고자료의 측면에서 볼 때 정합성이 완전히 결여돼 있다.
2.4.5.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의 왜계 묘제가 반도 일본어족 집단의 증거?
한편, 언어학 유튜버인 향문천은 그의 저서에서 삼국시대 마한[134]과 가야[135]의 지배층이 일본-류큐어족 화자 집단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왜계 양식인 전방후원분이 전남과 경남 지역에서 발견되는 것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136]하지만 이는 고고학적으로 전혀 성립할 수 없는 주장이며,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전방후원분을 근거로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하지 않았다. 이러한 왜계 고분은 주로 기원후 5-6세기에 갑작스럽게 등장했다가 사라질 뿐, 현지의 토착묘제와 명확히 계통적으로 차이가 나는 외래계 문화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연히 허무맹랑한 이야기이지만, 오히려 이러한 한국의 전방후원분은 반도 일본어설보다는 일본 극우들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교묘하게 왜곡하여 사용하기도 한다.[137]
예컨대 왜계 석실을 연구한 김준식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전방후원분을 포함하여 한반도 남부지역에 분포하는 왜계석실의 출현배경과 피장자 출신에 관해서는 아직도 연구자마다 견해 차이가 뚜렷하다. 그러나 왜계석실의 구조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와 가야 횡혈식석실과는 확실히 다르고, 일본 규슈지역 횡혈식석실의 요소가 반영된 것에 대해서는 큰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왜계석실의 계보는 용례의 차이는 있으나 크게 일본 규슈지역에서 직접 계보를 구할 수 있는 규슈계(또는 이식형), 재지 묘제와 왜계요소가 혼합된 창출계(또는 복합형)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규슈계 왜계석실의 경우 구체적으로 규슈 북부지역(福岡縣) 계통인지 아니면 중서부지역(有明海 沿岸-熊本縣, 佐賀縣, 長崎縣) 계통인지의 구분과 함께 각 계통에 따른 한반도 남부지역 내 분포현황 및 피장자의 활동방식의 차이점까지 주목한 사례도 있다.
- 김준식, 장고봉유형 사례로 본 창출계 왜계석실 유형설정의 재검토, 2021.
- 김준식, 장고봉유형 사례로 본 창출계 왜계석실 유형설정의 재검토, 2021.
마찬가지로 최영주 역시 한반도 남부의 왜계 석실이 규슈에서 성립되어 한반도로 전파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한반도 남서부지역 횡혈식석실은 왜계로 크게 북부큐슈형과 히고형으로 분류된다. 각 형식의 석실들은 구조의 세부적인 차이를 보이는데 이는 큐슈계 석실이 일본열도와 한반도 서남해안 연안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현상으로 전파의 계기와 방법, 전파한 곳과 받아들인 집단의 정치·사회적 관계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지역별로 아주 다양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석실 구조의 차이는 재지의 공인들에 의해 석실들이 축조되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 최영주, 韓半島南西部地域倭系 橫穴式石室의 特徵과 出現背景, 2010.
- 최영주, 韓半島南西部地域倭系 橫穴式石室의 特徵과 出現背景, 2010.
한편, 허진아-송원근은, 이 무렵 영산강 유역에는 토착 옹관고분을 위시한 다양한 계통의 묘제가 공존하고 있었던 사실을 지적한다.
당시 마한사회의 내부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기록이 전무하다보니 연구자들은 정치적 사건 위주의 단편적 기록에 의존하여 백제의 입장에서 마한의 소멸을 설명해 올 수밖에 없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고고 자료의 활용에서도 녹록지 않은 상황에 직면해 있는데, 5-6세기 영산강 고분문화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하다는 것이다. 분구·전용옹관·다장 등 지역전통을 비롯해 백제·가야·일본 등 당대 주변지역의 고분문화가 모두 확인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연구자가 어떠한 요소에 더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상반되는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 허진아-송원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5-6세기 영산강 고분사회의 구슬 교역·유통·소비, 2022.
- 허진아-송원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5-6세기 영산강 고분사회의 구슬 교역·유통·소비, 2022.
이들은 또, 이러한 다양한 묘제가 백제와 재지세력을 둘러싼 다양한 역학관계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때, 동시에 옹관고분이 해당 지역에서 재지세력의 전통문화임을 명시하고 있다.
백제 중앙은 영산강유역에 대해 국내 및 주변 정세에 따라 시기별(한성기-웅진기-사비기)로 다른 지배전략을 취하였다. 나주 오량동 토기요지에서 확인되는 풍납토성 출토 돌대완(뚝배기형 토기)이나 영암 옥야리 방대형 고분의 직구호 및 소호류 등 한성백제 기종은 백제 중앙이 한성기 후반부터 영산강 중핵지역과 교섭을 시도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정촌 1호 석실에서 알 수 있듯이, 웅진기 초중반(5세기말-6세기초) 백제는 영산강 상류권에 가까운 복암리 세력과 그 관계를 확대, 강화해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동시에, 나주 반남면 일대에서는 U자형 옹관을 매장시설로 사용하는 고분 축조집단이 강력한 지역정치체로 성장한다. 백제는 이들과 금동신발·금동관 등 사여품을 매개로 정치적 관계를 맺어 재지세력 간 견제를 도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영암 태간리·광주 월계동·함평 신덕 등 외래 계통의 전방후원형(장고형) 고분이 이러한 중핵지역 공동체를 에워싸듯이 분포하고 있어, 옹관묘 전통의 재지세력이 영산강유역 전체를 정치적 영향력 아래 두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 허진아-송원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5-6세기 영산강 고분사회의 구슬 교역·유통·소비, 2022.
- 허진아-송원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본 5-6세기 영산강 고분사회의 구슬 교역·유통·소비, 2022.
마찬가지로 김낙중은 옹관고분이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표지적 고고자료라고 주장하면서, 대략 기원후 3세기 후반부터 이것이 해당지역의 중심적인 묘제로서 등장한다고 본다.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표지적 고고학 자료는 대형옹관을 매장주체로 한 고분이다. 영산강유역이 4세기 중엽 이후 백제에 복속되었을 것이라는 역사학계의 大勢論을 再檢討하도록 한 이 지역의 독특한 묘제이다 옹관고분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옹관 자체의 형태적 연구뿐만 아니라 분구 부장유물을 종합적으로 다루어 많은 진전을 보았다. (중략)
2세기 후반 이후 凡馬韓的으로 사용되던 대형 옹형토기는 백제가 우월적 정치체로서 성장에 따라 점차적으로 범위를 좁혀가며 용도가 바뀌는데 3세기 후반 이후 영산강유역에서 저분구묘의 중심 매장시설로 기능을 전용하면서 옹관고분이 등장하게 된다.
- 김낙중, 榮山江流域 甕棺古墳 發生 背景, 2004.
2세기 후반 이후 凡馬韓的으로 사용되던 대형 옹형토기는 백제가 우월적 정치체로서 성장에 따라 점차적으로 범위를 좁혀가며 용도가 바뀌는데 3세기 후반 이후 영산강유역에서 저분구묘의 중심 매장시설로 기능을 전용하면서 옹관고분이 등장하게 된다.
- 김낙중, 榮山江流域 甕棺古墳 發生 背景, 2004.
즉, 상기의 인용문을 종합하자면 전방후원형 고분(장고분)을 위시한 왜계 묘제는 결코 영산강 유역의 중심 묘제가 아니다. 오히려 3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옹관고분이 전통양식으로서 해당 지역의 중심묘제라고 할 수 있다. 이후 5-6세기 경에 들어서야 규슈일대에서 유래한 왜계 묘제의 양식들이 영산강유역권에서 외래 묘제로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며, 해당 묘제는 이전의 토착묘제와 계승 관계없이 이미 규슈지역에서 성립된 양식이 수입되어 일부 지역적 변형을 거쳐 나타난 것이다.
그러다 나중에 영산강 유역권에 백제의 영역지배가 관철되면서 해당 지역에서 공존하던 토착 옹관고분과 왜계고분과 같은 다양한 묘제가 백제식 묘제로 통일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계의 견해들은 5-6세기 왜계 묘제의 등장의 이유를 같은 시기에 있었던 영산강 유역과 규슈지역 간의 교류, 이주 내지 전파에서 찾는 것이 개연적이지, 결코 이것이 해당 지역에 기원전시기부터 잔존하던 '반도 일본어족 집단' 내지 '토착 왜 집단'의 존재를 암시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한반도 남부의 왜계 묘제가 명확히 외래계 문화라는 것이 임나일본부설을 방증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성백제식 횡혈식 석실 양식이 규슈와 기나이 일대에서 유행했다고 해서 규슈와 기나이 일대의 왜가 백제에 복속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138] 마찬가지로 이렇듯 한성기 백제와 왜와의 밀접한 교류관계를 백제-왜 동계설을 입증할 증거로 쓰기도 어려운데, 한성백제의 중심지인 서울-경기일대와 일본 열도는 그 이전까지 어떤 물질문화상 동질성도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확히 똑같은 맥락으로 5-6세기에 이르러 영산강 유역의 고분축조 집단이 왜계 묘제를 수용하거나 일부 왜계 집단이 이주했다고 해서 이러한 교류관계를 근거로 원래 해당 지역이 친연성이 강했다거나, 서로 유사한 계통의 종족이어서 교류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폭론 역시 아무 근거가 없다. 이들 지역의 토착문화가 일본 열도의 문화와 계통상 뚜렷한 연관이 있다는 증거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土田 純子는 4세기 후엽 이전 호남지역에 왜계 자료 자체가 상당히 빈약하다고 지적하고 있다.(湖南地域의 倭系資料와 前方後圓形古墳, 2018)
흔히 영산강 유역에 전방후원형 고분과 같은 왜계 묘제가 유행하기는 하지만, 해당 지역에서 중심 고분은 어디까지나 초기철기시대에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는 대형옹관고분[139]이었고, 이 묘제는 6세기까지 연속하다가 백제의 직접통제 하에 들어섬에 따라 백제식 횡혈식 석실분으로 대체된다. 즉, 강력한 수장층 중 하나가 왜계 고분문화를 영위했던 것은 맞지만 이는 병존하던 여러 수장층 중 하나일 뿐, 이들 중 가장 강력한 고분문화는 대형 옹관고분이라는 토착 묘제였다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경남지역에 나타나는 왜계 고분은 그 흔적이 훨씬 더 희미하고 당연히 해당 지역에 기원전 시기부터 연속되는 토착 묘제는 각 지역마다 다 따로 있다.
또 5-6세기 영산강 유역의 왜계 묘제라 할지라도 대체로 왜계 양식 속에 토착 양식이 섞여 있거나 변형되기가 일쑤여서, 이들 왜계 고분은 일부는 실제로 왜인이 직접 이주한 결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토착민이 규슈일대의 왜계 묘제의 양식을 일부 수용함으로써 조영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140] 이 시기 영산강 세력과 규슈 왜 집단 사이의 긴밀한 교류 관계는 많은 연구자들이 한성백제의 멸망과 기나이 왜왕권의 쇠퇴 속에서 영산강 세력과 규슈 왜 집단이 비교적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던 상황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141] 이 과정에서 규슈일대의 왜계 고분이 한반도로 수입되는가 하면, 한반도에서 새롭게 변형된 양식의 '창출형 왜계 고분'이 역으로 다시 규슈 일대에 나타나는 등 양자 상호 간 긴밀한 교류 관계에 있었던 것이다.[142]
그러나 6세기 전엽에 이르러 영산강 세력은 백제의 확고한 지배영역으로 편입되고, 규슈 왜 역시 이와이의 난을 거쳐 독자성을 상실하면서 양자 사이의 긴밀한 교류관계는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143]
물론 한반도 왜계 묘제의 모든 것이 이러한 교류관계를 통해 나타난 것은 아니고, 그 이외에도 백제계 왜인관료 혹은 백제가 왜에 요청한 왕실 호위집단처럼 다양한 경로로 말미암아 이러한 왜계 고분이 조영되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 왜계 고분은 단발적이고 소규모로 나타나는 것이 너무나 명확해서, 마치 왜가 해당 지역을 확고하게 영역지배를 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나 혹은 해당 지역에 토착 왜 집단이 기원전시기부터 기원후시기까지 지속적으로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반도일본어족 한반도 잔존설'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144]
야요이문화가 시작되는 기원전 8-7세기 경부터 삼국이 통일되는 기원후 676년에 이르기까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반도와 왜 열도는 긴밀한 교류관계에 있었으며, 한반도의 묘제와 문물이 일본으로 건너가기도 하고, 혹은 반대로 일본의 묘제와 문물이 한반도로 유입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문화 양상이 서로 동질적이거나 동일한 변화양상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렇게 서로 교류한 문물은 각지에서 토착화되고 변용되어 그 지역만의 특색을 강하게 띠었다. 그리고 각지에서 토착화한 문물이 다른 지역으로 다시 전파될 때, 그 문화의 계통, 기원을 추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며, 역사시대 한반도에 나타나는 왜계자료도 대체로 기원지와 전파시기가 뚜렷이 규명돼 있다. 그러므로 한반도에 해당지역의 재지문화와 이질적인 왜계 문물이 갑자기 나타났을 때는 이것이 상기한 전파와 교류의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해당 지역에 '토착 왜 집단'이 이전부터 연속해서 잔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상당히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한반도에 나타나는 왜계 자료는 대체로 역사시대 이후 그 기원과 전파시기를 명확히 추적할 수 있는 교류의 산물일 뿐, 결코 '토착 왜 집단'인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역사시대 한반도 남부에 잔존하고 있었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기원후 한반도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왜계자료들을 일본 열도와 한반도 사이의 교류 관계 이외에,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계속해서 잔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서 해석할만한 근거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앞서의 논의는 한반도에 토착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존재했다는 가설을 완전히 반증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각에서 한반도에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존재했음을 입증하기 위해 5-6세기 왜계묘제나 왜계 자료들을 근거로서 제시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점은 위의 논의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2.4.6. 종합적인 검토
앞서의 논의를 종합하면, 청동기 시대부터 요동 지역과 한반도 중서부 일대가 교류망을 이루고 이주민이 일부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 야요이 문화가 부분적으로 한반도 이주민의 기여에 의해 성립되었다는 사실과 같은 몇 가지의 고고학적 증거만을 가지고서는 보빈류의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대로 반도 일본어족이 한국어족과 뚜렷이 구별되는 상태로 오랫동안 존재해왔고, 이들이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지배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극단적인 가설을 증명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일본 야요이 문화의 기원이 한반도 주민의 이주로 인해 시작되었으며, 또 그들 이주민이 원래 한반도에서 사용하던 언어가 일본어족의 원류가 되는 언어였다고 할지라도, 그 언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지는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논증되기는 어렵다.결론적으로, 청동기 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의 고고학적 양상은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일부 부합하는 측면도 있으나[145] 차이점도 적지 않으며,[146] 따라서 고고학적 근거를 토대로 반도 일본어 가설을 논증하고자 할 때는 매우 조심스럽고 엄밀하게 고고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한국 고고학 연구자 중 정규 논문을 통해 반도 일본어 가설에 대해 평가한 연구자는 김장석과 박진호가 거의 유일하다. 그들은 반도 일본어 가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달리 청동기 시대 전기 당시의 한반도의 물질 문화 양상은 비교적 동질적라고 보아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청동기 시대 전기 이전에 이미 분지되어 한반도 북부 및 중남부 일대에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이 서로 병존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며[147][148] 또 한국어족이 세형 동검과 함께 확산되었다는 휘트먼의 주장에 대해서는 세형 동검 계통 이주민은 비교적 소수였을 것으로 보이므로 근거가 부족하다고 본다.[149][150] 김장석, 박진호는 이에 따라 벼농사 등 생계경제 수단의 확산과 함께 한국어족이나 일본어족이 한반도나 일본열도에서 제각기 확산되었다고 보는 농경-언어 확산 가설 이외에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한국어와 일본어의 기원 및 분화에 대해 추측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151]
한편, 이러한 김장석의 주장 역시 어느정도 유전학적 연구결과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어보인다.
UNIST 생명공학과 박종화 교수팀에 의해 진행된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게놈분석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의 게놈은 8천년 전(기원전 6000년 경) 악마문 동굴에서 나타나는 북아시아 신석기인(선남방계)과 3500년 전(기원전 1500년 경) 동남아 철기시대 밧콤노우 고대인(후남방계)의 게놈을 융합한 결과로 잘 설명된다고 한다.[152] 이 때 악마문동굴의 북아시아 신석기인 역시 동남아에서 기원하여 이미 오래 전에 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확산된 '선남방계'이며, 아직 이들에게는 남중국계통의 청동기-신석기인들인 '후남방계' 혈통의 영향이 나타나지 않으므로 이 당시에는 후남방계 집단이 아직 한반도에 도래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153] 그러다가 대략 5-4000년 전(기원전 3~2000년 경) 무렵, 중국 남부에서 유래한 '후남방계'가 한반도, 북중국, 동남아 등 다양한 방향으로 확산되었고 그 중 한반도 방면으로 확산된 집단이 선남방계와 결합하여 현재의 한국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 남중국에서 벼농사가 시작되었음을 고려하면,[154] 이들 후남방계의 확산은 일반적으로 도작농경의 확산과 거의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이는데,[155] 이는 한반도에 도작농경이 유입된 청동기 시대 전기에 전면적인 고고자료의 변화가 나타난다고 주장한 김장석의 입장과 일치한다.[156] 그리고 후남방계의 도래 이후로는 별다른 대규모 유전적 변화는 검출되지 않으므로, 설령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더라도 또다른 이질적인 인류집단의 유입을 상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휘트먼의 '세형동검-언어 확산설'은 도작농경의 전래 이후에도 이들 도작농경민과 어족 수준에서 다른 언어를 사용할만큼 이질적인 집단이 유입되었다고 보는데, 이러한 '세형동검-언어 확산설'에 비판적인 김장석의 견해는 상기한 유전학적 연구결과와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157][158][159]
다만 UNIST 연구진이 신석기 시대 선주민을 북아시아계로, 청동기시대 새롭게 유입된 이주민을 동아시아계로 비교적 단순화하여 이해하는 것과는 달리, 로비츠의 2021년 네이처지 논문에서는 이미 한반도 신석기시대 전기 인골들이 jalainur인과 동아시아 계통인 양소문화인의 조합으로 표현되는 홍산문화인을 통해 그 유전 구성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이미 최소한 신석기 시대 전기부터는 한반도에 어느정도 동아시아계통 집단의 이입이 있었던 것으로 볼 여지도 있다.[160] 하지만 로비츠는 같은 논문에서 한반도 신석기인에게서는 대체로 조몬계 형질이 다소나마 나타나고 있으나, 현대 한국인에게서는 사라졌음을 근거로 하여, 청동기시대 이후에 한반도로의 또다른 대규모 주민집단의 이주가 존재하였음을 가정하였다. 그렇다면 앞서 UNIST 연구진이 기원전 3-2000년대 이후 동아시아계통 집단의 대규모 한반도 이주로 지목한 사건은 신석기 시대 전기 이후에 한 차례 더 존재했던 동아시아계 집단의 2차적인 이주였던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고고학적으로는 한반도 중남부에서 신석기 시대에는 농경의 흔적이 매우 제한적이고 국소적으로 나타나는 데에 반해,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3세기 무렵 이후 본격적으로 정착농경이 시작되면서 이전에 비해 인구가 유례없이 폭증하는 양상이 나타나므로 이러한 도작 및 정주농경 문화를 가지고 유입된 인구집단에 의해 조몬계 형질을 상당수 잔존하고 있던 신석기인들의 유전형질이 상당수 희석된 것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고고학이 다루는 영역은 물질문화 및 이와 관련해서 제한적으로 추론되는 관념상이기 때문에 온전한 관념의 영역인 언어의 교체의 문제에 대해서 명확한 해답을 내려주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고고학자들은 이러한 언어 교체의 문제에 대해 매우 조심스러운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반면에 언어학계에서는 특정한 유물을 함부로 이주민 확산의 표지로 선정하는 식으로 고고학적 연구를 오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반도 일본어설 측이나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 측 모두 이들이 상당부분 잘못된 맥락에서 인용된 고고학적 증거들을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는 대전제로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161][162][163] 비록 언어학자는 아니지만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을 지지하는 일본 고고학자인 K MIyamoto가, 김장석이 '세형동검-언어 확산설'을 반대하자 세형동검이 아닌 '원형점토대토기'를 이를 대신하는 이주민 확산의 표지유물로 삼는 것이 이러한 한 예다.[164][165]
그러나 김장석은 원형점토대토기집단이든 세형동검집단이든 이들이 재래 사회를 해체하고 이를 대체했다고 보지 않는다.[166] 그는 재지 송국리계통의 수장층이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을 차례로 수용하여, 대민지배를 위한 이념조작에 이를 사용하다가, 철기가 도입된 이후 이념조작 대신 무력을 통한 직접적인 대민지배전략으로 선회함에 따라 기층 취락을 스스로 재편한 것으로 보았다.[167] 이는 원래 무문토기를 사용하던 재지수장층이 정치적 필요에 따라 비파형동검, 세형동검 그리고 철기를 순차적으로 수용한 것이라는 논리이며, 원형점토대토기 집단의 이주가 기존 사회를 와해시키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최소한 김장석의 논의를 바탕으로 점토대토기 이주설-언어교체설을 입론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반도 일본어설이 엄밀히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이를 통해 고고자료를 일관되고 정합적인 방법으로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 반도 일본어설 측에서 제시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은 단편적인 지역 간 문화적 교류의 흔적들을 가지고 '이것이 바로 새로운 언어가 유입/교체된 증거이다'라면서 내세우는 수준에 불과하다. 현재 고고학에서는 단순히 문화의 전파, 파급, 수용을 특정 인류집단의 이동과 동일시해서 해석하지도 않고, 그러한 문화 전파는 많은 경우, 오히려 전면적인 주민교체를 통해 일어나지 않고 대부분 토착민이 스스로 외부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확인되기도 한다.[168] 만약 이주민에 의한 재지집단에 대한 정복과 지배가 확인되려면 역시 이와 관련한 고고자료가 검출되어야 하며, 이러한 문화 담당 주체가 바뀌었다고 할 때에도 이에 상응하는 전면적인 문화적인 단절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반도 초기철기시대는 세형동검이나 점토대토기와 같은 이질적인 외래 문화요소가 전면적으로 확산되는 시기이기는 했으나, 그 이외의 많은 문화요소들이 연속적, 계승적 측면에 있으며, 외래문화요소조차도 상당부분 토착화, 접변화한 뒤에 확산되었다. 이는 설령 이주민이 소규모로 존재하였어도, 해당 문화를 영위한 주체는 결국 토착민이었을 개연성을 높게 보여주는 증거의 일례다.
하나의 물질문화가 전파되고 수용되는 양상에 대해서도 고고학계에서는 이처럼 매우 복잡하고 심도깊은 논의를 진행한다. 물질문화는 한두 가지 요소만으로 그 본질이 온전히 해명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여러가지 속성들과, 다른 물질문화 사이의 상관관계 등이 모두 정합적으로 들어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외래 물질문화 요소가 한반도에 나타났다는 사실만을 들어서 주민교체나 대규모 이주민의 존재를 섣불리 상정하고, 이를 통해 반도 일본어설과 같은 언어학적 가설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된 것으로 보는 이들이 있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들 언어학 가설들이 이렇듯 오용된 고고학적 증거들을 자신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한 주요한 근거로 삼고 있는 이상, 고고학이 제시하는 이 당시 물질자료에 대한 자체적인 해석안들은 상기한 언어학적 가설을 검증하는 데에 중요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169]
3. 고구려어(부여어족)와의 근연관계 논쟁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行不張拱, 拜不申足則異
백제의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전(百濟傳)
백제의 지금의 언어와 복장은 대략 고구려와 같은데, 다닐 때 두 손을 맞잡지 않고 절할 때 다리를 펴지 않는 점이 다르다.
- 『양서(梁書)』 동이열전(東夷列傳) 백제전(百濟傳)
其拜及行與高驪相類. 無文字, 刻木爲信語言待百濟而後通焉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중국과 신라가)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
-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
'그들은 절하고 다니는 걸음걸이가 고려(고구려)와 비슷하다. 문자가 없어서 나무에다가 새겨서 이것을 가지고 남과의 약속을 했다. (중국과 신라가) 말을 하는 데는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
- 『양서(梁書)』 신라전(新羅傳)
우선 고구려어와 백제어, 신라어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는 근거는 없다. 양서(梁書)에 '백제는 고구려와 언어가 같다(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고 서술되어 있고 '신라는 중국인과 말을 할 때 백제 사람을 중간에 놓아야만 했다(言語待百濟而後通焉)'고 되어 있어 삼국의 언어가 서로 유사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신라인은 백제인, 고구려인과 말이 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신라-백제-고구려 삼국이 방언연속체로써 존재했다는 걸 보여주는 기록이다. 백제의 경우 토착 세력인 피지배층과 고구려 유민 계통의 지배층이 서로 다른 언어를 썼다는 이중언어설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이 가설을 입증할 근거는 부족하다. 오늘날 들어서는 고구려의 변체한문(變體漢文) 문법 구조가 한국어의 문법적 요소와 비슷하다는 점이나 백제 목간에서 현대 한국어와 비슷한 형태의 수사가 확인됨으로써, 이들이 한국어족이었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등장하는 한반도 중남부의 옛 고구려 지명은 반드시 고구려어로 표기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기존 마한 토착 세력들이나 황해도~경기도 북부의 예맥족이 쓰던 지명을 그대로 답습했을 가능성이 높다. 후자라면 옛 고구려어는 일본어와 큰 관련이 없으나, 이 경우 고구려계 지배 세력이 도달하기 이전의 한반도 중남부에서 일본어와 비슷한 언어가 쓰이고 있었다는 학설과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청동기시대 송국리문화는 경기남부 이남에만 그 분포가 한정돼 있고, 그나마 경기남부에서도 송국리문화가 비교적 미약하다. 한강 본류를 위시한 경기북부 지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중-후기에도 역삼동 유형과 같은 재지 청동기문화가 지속되는 가운데에 점토대토기문화가 국소적으로 유입되었다가 원삼국시대 이후로는 영서지역을 중심으로하는 중도유형권으로 통일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면 황해도-경기북부에 일본어계 지명이 있었고, 이것이 해당지역의 토착 집단과 관계된 것이라는 입장은, 송국리문화와 같은 청동기시대 도작문화를 일본어족 집단으로 가정하는 주류 반도 일본어설의 견해와 크게 배치된다.
한편, 고구려어와 일본어 사이의 관계를 비교언어학적 관점에서 분석하기에도 사료가 매우 부족하며,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한들 이게 실제로 동계어라서 유사성을 가지는 건지, 단순히 차용한 건지 판단하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문제이다. 오늘날 이에 대한 재구는 모두 삼국사기 지리지나 일본서기, 삼국지 등 중국 일부 사서에 등장하는 고유명사를 비교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있다.
일본서기 비다쓰 덴노조의 기록을 참고하면, 고대 야마토 왕권은 백제와 언어가 통하지 않아 역관을 따로 두었고 백제의 언어를 '한(韓)어'라고 구분하여 자국의 언어와는 별개의 언어로 따로 구분했다. 고구려-백제어와 한어를 별개로 보는 이중언어설을 제외하면 이 기록은 일본어와 고대 한국어가 다른 계통이라는 근거가 된다. 반대로 고대 일본어는 고구려-백제어, 즉 '부여계 어족'과 완전히 다른 언어 계통이었지만 부여계 어족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부여계 어족에 속하는 고구려어, 백제어와 서로 비슷해졌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을 언어동조대라고 한다.[170] 이에 대해서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설은 없다.
고구려와 왜(倭) 사이에 서로 동류의식을 보인 적이 없다는 점이 확실하나 동류의식 자체는 언어계통의 논박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예로, 인도유럽어족은 까마득한 고대 시절부터 수많은 민족들이 썼지만 이들은 서로를 결코 동류로 여긴 적이 없었다.[171] 동류의식을 근거로 언어 간의 친연관계를 논한다면 오히려 이는 역설적으로 해당 언어의 화자인 문화 그룹이 충분히 분리되지 않아, 그 언어들이 속한 어족의 역사가 인도유럽어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짧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고구려와 왜 사이에 동류의식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을 이 둘의 언어가 같은 어족이 아니었다는 근거로 제시할 수는 없다.
한편 고구려어를 일본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와는 별개로,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다른 세력으로는 중국 정부에 대한 충성도가 매우 높은 만주족 연구자들[172]이 있으며 이들이 고구려어를 퉁구스어족으로 묶으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퉁구스 계통의 언어와 고구려어가 다르다는 중국의 기록[173], 고구려어와 연관된 백제어를 삼한어 계통으로 묶는 일본 기록마저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기본적인 증거조차 무시하고 그저 만선사관 혹은 동북공정을 통해 한국을 만주 세력(고구려)에 종속된 국가로 폄하하거나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4. 오해
임나일본부설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 해당 학설이 한일 양국 고대사와 연관될 여지가 있어 일부에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고대에 일본어 화자들이 한국어 화자에 밀려났다', '일본어가 한반도에서 유래되었다'는 내용만 따와 곡해하기도 한다.오히려 임나일본부설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학설로도 볼 수 있는데, 한반도에 거주하던 원시 일본어를 사용하던 주민이 일본 열도로 이주하여 야요이문화를 이룩했고[174] 이들의 후예가 오늘날 현대 일본인이라는 주장을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175][176] 다시 말해서, 임나일본부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를 침공, 지배한 것이 아니라 원래 한반도에 있었다가 일본 열도로 전해진 언어가 현대 일본어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 본 학설의 올바른 해석이다.
한반도 중남부와 일본 열도에 동일한 어족이 존재하였다는 학설은 임나일본부설을 연상시킬 수 있으나, 해당 학설의 대표자인 알렉산더 보빈은 임나일본부설에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논문을 읽어보면 오히려 임나일본부설과 배치되는 주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임나일본부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학설이다. 기본적으로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학설들의 중론이 지적하는 한국어족 남하 시점은 한반도 국가 쪽이든 일본 열도 국가 쪽이든 부(府)니 뭐니 하는 그런 지배 기구를 논할 시기보다 한참 이전이다. 게다가 보빈은 일본의 역대 천황들 중 몇몇은 고대 한국어를 쓰던 한국계라는 주장도 한 적 있는 사람이다. 심지어 일본 극우 세력의 역사왜곡 단골 주제인 진구황후의 정체도 고대 일본을 다스리던 한국인 여왕이라고 하는 사람이니, 일본의 극우들이 보빈의 논문을 제대로 읽어봤다면 뒷목 잡고 쓰러져도 이상할 게 없다.
다만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 남하설' 역시 근본적으로는 한반도에 있던 기마민족이 일본 열도로 이동하여 토착민을 정복했다는 주장이지만, 한편으로 이 역시 소위 일본계 기마민족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변형된 형태의 남선경영론과 임나일본부설을 옹호하는 맥락으로 악용되었던 사례가 있다.[177] 그러므로 이와 유사한 맥락의 주장을 내세우는 반도 일본어설 역시 임나일본부설와 연결될 위험이 있다는 점은 충분히 경계할 필요는 있다. 특히 보빈이 한국어족 집단을 기마민족으로 설정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에가미 나미오의 기마민족 남하설은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178][179]
특히 고고학적으로 논의되는 야요이문화 한반도기원설과 반도 일본어설의 초점은 다소 다르다. 고고학적인 야요이문화 한반도기원론은 주로 일본 토착 조몬문화의 기층 위에 역삼동문화, 미사리문화, 송국리문화, 점토대토기문화 등 댜양한 계통의 한반도문화가 일본 열도에 이주, 전파되거나 영향을 끼친 뒤, 이들 다양한 문화가 종합되어 일본 열도의 독자적 문화로서의 야요이문화가 탄생한 부분에 대해 방점을 찍고 논의되지만, 이에 반해 반도 일본어설은 언어적 측면에서 일본어족 집단이 한국어족 집단과 구별되어 있었다는 점에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보빈이나 휘트먼 등이 직접적으로 임나일본부설을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반도 일본어설을 받아들이는 대중들은 이를 근거로 마치 '일본인의 정체성과 문화적 독자성이 이미 한반도에서 형성되었으며, 한국인들은 그 이후에야 들어온 외래계 주민이자 침략자이다'라는 식으로 인식할 위험이 있다. 물론 단순히 원시 일본어가 한반도에서 한때 사용되었다는 것만으로 일본인의 기원과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한반도에서 수립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자체는 반도 일본어설의 자체적인 논리에서도 함의하고 있지 않는 폭론에 가깝지만, 반도 일본어설이 변형된 형태의 임나일본부설의 일종인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과 연결될 위험이 상당부분 존재하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180]
하지만 반도 일본어설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야요이문화는 일본 열도에서 여러 계통의 한반도 문화들을 흡수하고, 나아가 토착 조몬인과 결합한 뒤 나름대로의 재지적 변형을 거쳐서 형성된 문화이다. 그러므로 야요이문화가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음을 근거로 마치 소위 일본계 종족으로서 야요이인 집단이 이미 한반도에서 형성되어 있었고, 이들이 그대로 일본 열도로 이주하였다고 가정하는 것은 애당초 고고학적 논리 자체에서부터 성립할 수 없는 궤변이다. 설령 반도 일본어설의 주장대로 한반도에서 원시적인 일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존재하였다고 할지라도, 이들은 일본 열도의 야요이문화와는 상당부분 다른 문화적 특질들을 보이고 있었을 것이며, 어떤 한반도계 집단이 일본 열도의 특정 집단과 문화적 교류관계를 넘어선 종족적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 이처럼 반도 일본어설은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의 형성 및 분화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없는 논의임을 충분히 유의해야 하며 해당 논의 속 한반도 내의 '원시 일본어족 화자집단'을 '일본계 집단'으로 치환하는 데에는 상당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고대 일본 문명'자체는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시대 중기 이후에나 발생한 것으로서, 한반도에서 일본 고대 문명이 발흥한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알렉산더 보빈은 한국어와 일본어 연구에서 가장 큰 난점으로 꼽은 부분으로 고대 언어에 관한 논의 속에 민족주의적 요소를 집어넣으려는 것을 지목했다. 한반도 남부가 고 일본어권이라는 주장을 일본의 극우들이나 한국의 일뽕들이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우기거나, 반대로 한국의 극좌들이나 반일주의자들이 친일주의자의 날조라고 치부하는 것을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마찬가지로 일본사의 초반부에 한국계 군주들이 통치한 시기가 있었다는 주장에 대해 한일 양국이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도 맹렬한 비판을 가하였다. 즉, 그에 따르면 한일 양국 모두 민족주의가 강한 탓에 자신들이 유리한 방향에서만 반도 일본어설을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보빈의 가설이 설명하고 있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언어 교체 과정은 세계사적 관점으로는 비교적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켈트어군도 유럽 대륙에서 발생하고 브리튼제도를 걸쳐 아일랜드로 넘어가서 한동안 주류 어군으로 자리잡았지만 정작 대륙에서 켈트어군은 일찍이 소멸되었고, 도서지역 켈트어군(Insular Celtic)만 살아남아 그 명맥을 이어갔다. 자세한 건 켈트어파 참조. 쉽게 말하자면 일본어족도 켈트어파랑 비슷한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181] 프랑스도 옛날에 대륙 켈트어파에 속한 갈리아어를 썼었고 이제는 흡수소멸된 언어의 흔적이, 아직까지 규명된 바로는 반도 일본어족의 그 고대어가 현대 한국어에 미친 영향보다도 현대 프랑스어에 더 짙게 남아 있는데[182] 이것을 가지고 아일랜드가 프랑스를 정복했다거나 프랑스가 아일랜드에 우월하다거나 하는 주장을 펼치지 않는 것을 떠올려보자.[183][184]
비교언어학이란, 여러 사료들을 바탕으로 언어의 역사와 진화 과정을 밝혀내는 과학의 한 분야인 만큼, 그 이론 자체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옛날에 자기네 언어의 조상 언어를 구사하던 사람들이 살던 땅이라는 사실이 그 후손으로 하여금 다시 그 땅을 회복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으며, 오히려 이는 자연주의의 오류에 해당한다.
학설을 불쾌하게 여기는 부분은 일본 우익들에게서도 관찰되는데, 반도 일본어설을 두고 자신들의 조상들이 '남진하는 한국인의 직계 조상들에게 축출당해 일본으로 밀려났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며 유쾌하지 못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반도 일본어설 관련 언어학 유튜브 채널들을 보면, 하플로그룹까지 운운하며 한반도와 엮지 말라고 비분강개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반면에 해당 내용에서 한국어에 반도 일본어의 잔재만을 강조하여 한국어의 기원에 일본어가 개입했다는 식으로 짜깁기를 하기도 한다.
다만 한일 학계에서 반도 일본어설이 폭넓게 수용되지 못하는 것이, 기성 학계가 이를 정치적인 문제로 불쾌하게 여기거나 민감하게 여겨서는 전혀 아니다. 애당초 일본 고고학계에서는 최소 전후무렵부터, 한국에서도 비슷한 시기부터 이미 오랫동안 고고유물을 통한 주민교체설이 폭넓게 논의되었으며[185] 일본의 주민들이 한반도에서 나왔다는 야요이문화 한반도 기원론도 이미 오래전부터 널리 논의되고 퍼져 있던 이야기지 전혀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새로울 것 없는 주민교체론, 이주설에 대해서 한일학계가 정치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보빈의 주장은 상당부분 설득력이 떨어진다.[186][187]
반도 일본어설과는 달리, 한반도의 송국리문화가 일본 야요이문화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자체는, 한일학계를 통틀어 최소한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압도적인 주류 정설이며, 이 과정에서 한일 학계 어디에서도 이에 대한 강렬한 저항이 있었던 적은 없다. 다시 말해 단순히 한반도 주민들이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사실이나, 일본인의 형성에 고대 한반도인이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어떤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것이 아니다. 야요이문화에 대한 송국리문화 기원설과 달리 반도 일본어설이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것은, 애당초 그러한 이주 이후에 또 한 차례 더 한반도 주민들이 전면적으로 대체되었다고 볼만한 학술적인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본래 일본으로의 대륙계 고고자료의 전파 과정에서 한반도는 당연하게 기장 중요한 유입 경로로서 전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반도로부터의 대규모 주민집단의 이주는 일본 고고학계에서 문화기원을 설명하는 전형적인 이해의 틀이었다. 이 때 이러한 유물상의 교체를 전면적인 주민교체와 연결짓는 시각은 '과정고고학'이 널리 수용된 이후의 비교적 근래의 고고학이 아니라, 그 이전의 고전적인 고고학 담론에서 오히려 활발히 유행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해석에 근거해서는 고고자료에 나타나는 재지문화의 계승성과 연속성을 충분히 반영하지도 못하는 데다가, 이러한 해석이 여타의 고고자료 및 형질인류학, 분자인류학과 같은 다른 종류의 자료와도 그다지 부합하지 않는 측면이 많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전면적인 주민교체설은 상당부분 해체되거나 축소, 후퇴되는 측면이 강한 것이다.[188]
그러므로 만약 알렉산더 보빈과 반도 일본어설 측이 한일학계에서 자신의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한다고 느꼈다면, 이는 한일 고고학계에서 딱히 새로울 게 없는 '이주론' '주민교체론'에 대한 정치적인 반감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미 한일 고고학계와 인류학계에서는 너무 진부해서 수없이 비판받아 현재는 잘 언급되지도 않는 고전적인 이론의 재탕에 가깝다고 여겼기 때문에 외면받는다고 하는 것이 좀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실제로 알렉산더 보빈은 주로 '기마민족 남하설/기마민족 정복왕조설'과 같은, 전후 일본에서 에가미 나미오 등이 제시한 낡은 이론에 근거하여 처음 반도 일본어설을 정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학설은 한국 학계에서는 제대로 통용된 적도 없는 데다가, 근래에 들어서는 일본 학계에서도 딱히 널리 받아들여지는 학설이 아니다. 이처럼 기원후에야 기마민족이 남하하면서 한국어족이 한반도에 전래된 것이라는 가설이 비판 받자, 휘트먼이 이를 땜빵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기원전시기 세형동검집단 남하론, 이것이 다시 비판받자 또 새롭게 나온 것이 점토대토기집단 남하론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이론들은 애당초 한국 고고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수반되지 않은 단편적인 접근에 불과하기 때문에 한국학계에서는 딱히 반향을 일으킬 여지가 없었다. 즉, 애당초 보빈이나 휘트먼 등이 제시한 논거가 고고학적으로는 대개 새로울 것이 없는 논거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이에 대한 반도 일본어설 측의 해석은 이미 수많은 토의와 논박을 거쳐서 현재 한일 주류학계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낡은 해석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구태여 관심을 가질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보빈과 휘트먼 등이 제시하는 언어학적 추론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이론이 저항을 받는 데에는 민족주의적 감정보다는 이러한 학제간 연구주제에 대해 관련 학계 사이의 충분한 합의나 소통이 부족한 데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므로, 이 점이 훨씬 선행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로 보인다.
5. 유사 및 반대 가설
반도 일본어설과 유사한 학설 또는 연관성은 있으나 주장하는 바가 다른 학설에는 다음과 같은 가설들이 있다.5.1. 일본어족 기원 가설
상술한 알렉산더 보빈이 추가적으로 추측한 바에 따르면 일본어족의 조어는 한반도에 넘어온 것보다도 이전에는 근본적으로 중국 대륙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이 있다.#[189] 사실 소위 '남방언어'들과 일본어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는 지적은 옛날부터 있어서, 크라다이어족은 물론이고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오스트로아시아어족 등등까지 묶은 남방어족(Austric languages)이라는 대어족 가설을 세우는 소수 학자들이 있었다. 다만 보빈은 이걸 부정하면서도 크라다이어족과 일본어족은 서로 별개의 어족이기는 하나 고대에 가까운 지역에서 사용되었기에 접촉에 의해 어휘나 문법요소가 가까워졌을 수 있다며 중국티베트어족의 확장 이전 선사시대 중국 동~남부쯤에서 일본어족의 조어가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정했다. 다만 본인도 확신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단순 가설임에 주의.일본어족의 기원이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가 아닌가 하는 추정도 있다. 오나라가 멸망하고 그 유민들의 일부가 배를 타고 한반도 중남부로 건너와 터전을 잡았다가 다시 북쪽에서 내려온 한국어족 집단에 밀려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요이 시대를 열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吳'의 상고한어 발음이 일본어 1인칭의 어근과 유사하다. 일본 왜의 어원이 1인칭 대명사임을 생각하면 오나라의 국명도 같을 수 있다고 보는 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에 한때 오나라의 공용어로 'proto-Japonic(원시 일본어)'이라고 적혀 있던 적이 한때 있었다. 일본어족의 기원을 논하는 한 논문에서도 종종 오나라와의 관계, 특히 오태백과의 관계를 다룬 사서의 내용을 다룰 뿐 아니라 양쯔강 하류에서 시작된 벼농사의 전파를 같이 고려해 일본어족의 원향(urheimat)을 중국 남동부로 보는 때가 많기 때문에 비록 춘추시대 오나라의 언어가 전적으로 고대 일본어는 아니었을지언정 각 지역의 언어 중 하나가 일본어족이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자세히 파고들면 오나라 일본어족설에서 해명해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단 역사에서 오나라 유민들이 한반도 남부로 왔음을 입증할 자료가 전혀 없다. 적어도 구전을 기록한 것으로라도, 한반도 남부에 자신들이 오나라 출신임을 밝히는 게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것이 없다. 거기에 오나라가 당대로서는 첨단 문물이었던 철기로 유명했다면 한반도 남부의 반도 일본어 사용자들이 청동기 및 철기를 쓰던 북방의 한국어족에 밀려났다는 것에 의구심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뿐 아니라 오나라 유민들이 정말 한반도 중남부의 반도 일본어를 사용했다면, 이들이 오나라의 계승 의식으로 유의미한 정치 집단을 이뤄야 했을 텐데 그런 것조차 없다. 굳이 이 난점들을 뚫고 오나라와 반도 일본어설을 엮자면, 원시 일본어족이 오나라뿐 아니라 한반도 중남부에 동시대에 같이 살았고, 그래서 둘 사이에 이렇다 할 유사성이나 접점이 없었다고 보는 것 말고는 없는데, 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아직까지 없다.
5.2. 고구려어-일본어 동계설
일본어족 계통의 언어가 한반도에서 사용된 적이 있다는 학설을 주장하는 다른 학자로는 미국의 언어학자인 크리스토퍼 벡위드(Christopher I. Beckwith)가 있는데, 이쪽은 가설의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벡위드는 일본어와 고구려어를 '부여어족'으로 묶고[190] 오늘날의 한국어는 이 계통에서 철저히 떼어놓았다. 즉 현대 한국어와 고구려어 사이에는 어휘 차용 이외에는 친족성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는 고구려어와 한국어 간의 유사성, 한국어와 일본어 간의 유사성은 단순한 어휘 차용으로 보고 기존 학설을 비판했다.그러나 알렉산더 보빈이 지적하듯이 그의 분석에는 결함이 많아서, 명백한 기초어휘까지 자의적으로 차용이라 주장하는가 하면, 한국어의 기본적인 한자음 재구에도 문제가 있었다. 대표적으로 국명 '신라(新羅)'가 'Silla'라고 발음되는 것을 한국어의 틀이 아닌 중국어의 틀에서 해석하려 하여, '新(신)'의 한자음이 고대에 'Sir'로 발음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신라를 표기할 때 斯羅(사라), 斯盧(사로), 尸羅(시라)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으며, 한자어가 아니라 본래 우리말을 한자를 빌려 적었을 뿐인 것을 몰랐다. 또 한국어 특유의 'n+r→ll'의 자음동화 현상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이외에도 무턱대고 단어의 어원을 한자어 기원으로 몰아가려는 경향도 보였으며, 일본어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간의 영향마저도 무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대한민국의 언어학자인 정광 선생에 의해 크리스토퍼 벡위드의 논문이 번역되어 출간된 뒤에 그의 주장은 굉장히 많은 비판을 받았다. 한편 이 가설은 일본어와 알타이 제어간 연관성을 찾는 일본의 알타이어족 가설 지지자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5.3. 원시 한반도어설
한편 한국 학자 중에서 이와 유사한 개념을 제창한 학자로는 서울대학교의 김방한 명예교수가 있다. 김방한 교수는, 한반도에 퉁구스(알타이)적 영향을 받은 북방계 어족이 존재하는 것과 별도로, 이들과 이질적인 언어인 '원시 한반도어'를 사용하는 기층적 집단이 따로 있어서 서로 공존하였으나 이들 원시한반도어를 쓰는 어족은 북방계 어족에게 흡수되거나 북방계 어족을 흡수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한국어가 형성되었다는 주장을 한 바 있다.예를 들어 일본어와 유사하다고 평가받는 삼국사기의 수사자료(3, 5, 7, 10)는 부여계 어족인 고구려어가 아니라 원시 한반도어라는 것이다. 관련 주장은 알렉산더 보빈의 반도 일본어설과 세부적인 면에서 그 주장을 달리하지만 한반도 내에 이질적인 2개의 언어 집단이 공존했다는 입장에서는 보빈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다만 김방한 교수는 그 기층언어를 니브흐어 등으로 추측했으나, 한국에는 니브흐어 부문을 연구하는 학자가 거의 없으므로 이 설은 검증이 어렵다.
5.4. 일본어족 조몬어 기원설
또 다른 가설로 일본어족의 기원이 한반도 기원의 야요이인의 언어가 아니라 조몬어, 즉 원주민들의 언어였다는 가설이 있다. 극히 최근 들어 제기된 새로운 가설로, 2017년 무렵 일본의 언어학자 이가라시 요스케가 주장한 이후, 2020년에 인도의 인류학자인 갸네시와르 차우베이와 네덜란드의 언어학자인 조르주 반 드리엄에 의해 다시금 제기된 주장이다. 이들의 가설에 따르면 일본어족은 본래 혼슈 서부의 조몬어에서 기원했으며, 이후 한반도를 통해 건너온 야요이인들과 융합하여 일본 전역으로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이 가설에서는 알렉산더 보빈의 가설과 달리 야요이인의 언어가 일본어족이 아니었고 오히려 조몬인의 언어였다고 보는 것이다. 보빈의 학설과 비교하면 보빈은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일본어족이 건너가 조몬어를 밀어냈지만, 이 가설에서는 이주 자체는 같으나 언어의 교체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언어적으로는 야요이인이 조몬인(일본어족)에게 동화되었다고 본다.5.5. 일본어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설
일각에서는 일본어의 기원을 중국 남부 혹은 대만섬으로 보기도 했으며 폴리네시아어, 마인어 같은 언어들과 동계 언어로 간주하고 진지하게 연구된 적도 있다.6. 기타
-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토끼를 의미하는 '오사함'이 일본어 '우사기'의 유래라고 주장하나[191],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며 오히려 한자의 고대어 음가를 생각하면 고구려 독음과 고일본어 독음은 상당한 차이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 탐라어에 대한 가설 또한 존재한다. 신당서, 일본서기 등 문헌에는 7세기의 탐라국 인명으로 유리도라(儒李都羅), 아파기(阿波伎), 고여(姑如), 구마기(久麻伎), 도라(都羅), 우마(宇麻), 가라(加羅) 등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구마기, 도라, 우마 3명은 각각 일본어로 곰을 뜻하는 쿠마(くま), 호랑이를 뜻하는 토라(とら), 말을 뜻하는 우마(うま)와 발음이 비슷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 외에도 탐라국의 세 형제 중 막내가 수여받았다는 관직인 ‘도내(都內)’가 일본어의 ‘토노(との)’와 동원어라는 의견도 있다.[192]
- 여담으로 한반도에서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했던 집단의 언어가 일본어족인지 한국어족인지는 미스터리인데, 알렉산더 보빈과 존 휘트먼은 이 집단의 언어를 일본어족과 한국어족 둘 다 아닌 미지의 언어로 추측했다. 이 미지의 집단으로 일본 열도의 선주민으로 추측되는 조몬인/아이누로 추측하였다.[193]
- 알렉산더 보빈은 1994년, 1995년, 1997년, 1999년, 2000년, 2001년에 여러 연구 결과물을 내며 알타이어족 학설의 지지자였지만, 2001년 교토의 국제일본학센터에서 교환 교수로 재직(2001-2002년, 2008년)한 시기부터 알타이어족 학설의 비판자로 전향하고, 한반도 중남부가 고일본어권(Old Japanese)'이라는 반도 일본어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2001년에도 Japanese, Korean and Tungusic. Evidence for genetic relationship from verbal morphology라는 저작물을 내놓으며 한국어, 일본어가 퉁구스어족과 언어형태적으로 유사하다는 저작물을 내놓았다. 하지만 교토의 국제일본학센터에 재직할 때는 반도 일본어설을 들고 나왔다.
- 다만 그가 반도 일본어설을 들고 나온 시기는 알타이어족 가설 자체가 보빈뿐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공격받던 시기이므로, 꼭 좋지 않게 생각할 이유는 없다. 애초에 반도 일본어설의 화살표 방향은 반도→일본이라 일본 우익들도 불쾌해하며, 이 학자가 가설로 내놓은 전파과정 및 소멸과정 자체도 다른 어파의 역사에서 일어난 일과 유사하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곳이 아니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즉 특이하지 않은 현상이라는 것을 주의하자.[194][195]
7. 링크
[1] 보다시피 보빈의 주장과 정반대이다. 그러나 로비츠의 논문은 보빈의 것처럼 기록에 남은 어휘를 연구하지 않고 고고학에만 의존했다는 한계가 있으며, 제주어가 중세 한국어가 아닌 고대 한국어에서 갈라져나왔다는 등 매우 비주류적인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로비츠는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을 동계어로 보며, 홍산 문화에 해당하는 요서 지역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한다. 서기전 3500년경 조를 기르는 이들이 남한 및 연해주로 이주하여 각각 한민족, 퉁구스인이 되었다고 하며, 서기전 1500년경 남은 일본어족 벼 농부들이 일부 남하했는데, 이 중 계속 남하하면서 일본으로 넘어간 이들이 있었고, 만주에 남은 이들은 부여계 민족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고조선을 포함한 한국사의 모든 북방계 나라는 일본어족 화자가 세운 것이다.[2] 참고로 그의 주장은 알타이어족 가설의 수정판인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의 일환이다. 주류 언어학계에서는 더 이상 알타이어족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 만큼, 로비츠의 주장 또한 널리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굳이 2020년, 2021년 학설까지 가지 않아도 일찍이 보빈은 로비츠 등의 알타이어족 가설을 줄기차게 간접적으로 저격해 왔다. 로비츠의 주장은 말하자면 알타이어족 가설 지지자들의 최후의 발악으로 취급받는 셈이다.[3] 변한과 진한은 언어와 풍습이 같다고 한다.[4] 물론 알렉산더 보빈의 재구가 참이라는 가정 하에, 동사 활용 한정형이 상대 일본어와 차이가 있는 탓에 방언 수준의 차이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 예를 들어 삿포로시나 오타루시 등 홋카이도에 존재하는 대다수의 지명들은야마토 민족이 홋카이도를 점령하기 전 아이누들이 지은 아이누어 지명을 음차만 해서 사용하고 있다. 유럽의 여러 강들의 이름도 선사 시대부터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여 이를 이용해서 고유럽 제어를 재구하는 데에 사용되고 있다.[A] Alexander Vovin(2013) - From Koguryǒ to T’amna[A] [8] 고대 서부 일본어 kate- ‘합치다’는 모음 동사로, 한정형은 kat-uru이다. 반도 일본어 katuŋ은 후행 비음 앞에서의 kat-uru > kat-uŋ의 변화가 일어났거나, 혹은 더 현실적으로 앞의 mut-uŋ의 사례에서 보듯 반도 일본어에서 동사 활용의 한정형은 고대 서부 일본어와 다른 형태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A] [A] [11] 미와야마에 있는 오미와 신사는 현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로,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신사에서 모시는 신은 뱀신으로, 신화에 의하면 이 신은 신라계 도래신이라고 한다. 미와야마는 오미와 신사가 지어지기 훨씬 전부터 신이 사는 산으로 숭배되었다고 한다.[12] 물론 기록상 말 마 자가 이름 뒤에 붙는 경우는 미오야마국과 주조마국이 전부이다. 이와 관련이 있는지 확실치 않지만 마한에서의 ‘마’도 말 마 자를 사용한다.[13] 기록에 의하면 주호국의 언어는 한과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삼한 지역이 반도 일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면, 주호국의 언어는 일본어족이 아니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러한 경우 기록에 남아 있는 주호국 사람들의 복식이 전형적인 남방계 복식이라는 것에 근거하여, 주호국의 토착 언어를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나 몽몐어족 등의 남방계 언어로 추정하는 학자들도 존재한다.[14] 529년 3월 신라가 공략한 성들 중 하나인 포나모라(布那牟羅), 동년 4월 왜국의 오우미노케나가 머무른 가야의 구사모라(久斯牟羅), 530년 9월 기사에서 등장하는 이사지모라성(伊斯枳牟羅城),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그리고 554년 12월 백제의 부여창이 요새를 쌓았다는 구타모라(久陀牟羅)가 기록되어 있다.[15] 6세기 신라인들은 왕성을 건모라(健牟羅)라는 명칭으로 부른다고 기록했다. 이는 《남사》에도 실린 내용이다. 健(건)은 '큰'의 음차로 '건길지' 할 때의 백제어 鞬(건)과 같으며, '牟羅'가 '마을'이라면 '健牟羅'는 '큰마을'이라는 뜻일 것.[16] 524년 1월 15일의 기록으로, 울진 지역에 거벌모라(居伐牟羅)라는 지명이 있었다고 한다.[17]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마한의 54개국 중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과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이 있다.[18]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옛 백제의 성들 중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모로성(牟盧城), 모루성(牟婁城), 고모루성(古牟婁城)이 있다고 기록했다.[19] 전라북도 고창군의 백제 시절 지명으로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 등장한다.[20] 신라는 한화정책을 실시할 시 '산'에 대응하는 어휘를 山 말고도 高로 번역하기도 했다. 또 다른 예는 본래 고구려의 달홀(達忽), 즉 '산성'이었던 고성군.[21] 오사함달, 공목달, 달홀 등.[22] 향가 등 현재 남은 신라어 텍스트는 전부 한국어족이다.[B] Alexander Vovin(2007) - Cin-Han and Silla Words in Chinese Transcription[B] [B] [26] 이는 언어학자 Thorpe가 재구한, 류큐어에서 더 널리 퍼진 2인칭 단수 대명사 *Ura(Thorpe 1983, 352)와는 분명히 다른 형태의 2인칭 단수 대명사이다. 즉 류큐조어에서는 2인칭 단수 대명사가 두 개 있었다는 의미이다.[B] [B] [29] 특히 백제에서 딸려보낸 일본어 통역관은 '오사(wosa)'라는 이름으로 불렸다.[30] 신라가 일본에 인질을 보냈다는 구절은 일본서기가 원래 신라든 백제든 간에 외국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면 인질을 보냈다고 일관되이 서술하므로 그러려니 하자. 사신이 일본에 갔음은 일본서기 기록대로 사실이지만 그 사신이 인질은 아니었음은 한국, 중국 사료와 교차검증으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인질이라는 단어가 한국과 일본의 용법이 달라, 일본에서는 단순히 정부측이 사람을 보냈다는 의미로 통한다. 이에 대해선 일본서기 항목 참조.[B] [32] 조진선, 진·변한의 형성과 분립 과정, 2023./ 이 때 조진선은 당시 경주지역에서는 검단리 문화 계통 주민들이 사회 기층을 이루고, 한반도 중서부 일대로부터 이주해 온 세형 동검 문화 집단이 상층을 이루고 있었다고 본다. / 이후에는 낙랑군 설치 이후 위만조선 계통의 이주민이 또 한차례 발생하였으리라 보인다.(최병현, 원삼국시기 경주지역의 목관묘·목곽묘 전개와 사로국, 2018)[33] 물론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정착한 선주민 계통의 묘제와 위만조선 계통의 묘제가 병존하는 양상은 있으나, 이들은 모두 반도 일본어설에서 한국어족으로 간주하는 세형 동검 문화의 도래 이후의 일이다.[34] 현재의 제주어를 생각하면 된다. 제주어는 지속적인 표준 한국어의 유입으로 인해 사멸 위기 단계에 있으며, 젊은 계층에서 이러한 토종 제주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조차 사라지고 있다.[35] 반면 마한은 진한과 언어가 다르다고 하는데, ‘다르다’의 범주를 가지고 단순히 방언으로서 다르다는 의견과 언어 자체가 다르다는 의견이 있다. 반도 일본어설을 따른다면 한화가 된 마한은 일본어족을 사용하는 진한과 언어가 다를 것이다.[36] 현재의 경첩. 철제 경첩의 경우, 쇠돌쩌귀라고 한다.[37] 오늘날에도 '물'이라는 고유어가 수(水)를 가리키는 것은 동일하므로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은 북방 퉁구스어 계통에서도 '물(勿)', '말(末)' 등의 어휘가 곧 '강' 등으로 풀이되는 것이 비슷하며, 하술할 수사 문제와는 별개로 일본어로 물을 가리키는 '미즈(みず)'의 고형 '밑', '미투'의 어원이라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38] 이에 대해서는 상대 특수 가나 표기법 항목의 サ행 파찰음설 참조. 대표적으로 千이 せん으로 옮겨진 것을 생각하면 된다.[39] 백제 멸망 이후 만들어졌으나 점령자인 신라의 문법과는 구별된다는 점에서 백제어의 흔적이라 추정했다.[40] 기록상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고, 고조선도 이후 유민들이 남하해 마한, 진한에 소국을 세우기 까지 한다.[41] 점토대토기단계의 주민교체론, 4세기 무렵 한반도 남부 기마민족 남하설 등[42] 반도 일본어설은 주로 고대 진한어와 일본어 사이의 공통어휘가 관찰된다는 점과, 고대 한국의 지명들이 일본어족과 흡사하다는 것에 근거한다. 보빈은 언어학계에서 마치 통설처럼 받아들여지던 기마민족 남하설을 참고하여 이를 한반도에 거주하던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존재했다가 기마민족인 한국어족 집단에 의해 대체된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고대 한일 간 공통어휘를 반드시 이러한 극단적인 가설을 통해 해명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물론 본 가설처럼 어족이 교체될 정도의 대규모 이동일수도 있지만, 기원전 시기부터 존재한 것으로 보이는 한반도 내 일본계 이주민의 흔적일수도 있고, 혹은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매우 협소한 영역에서만 존재한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언어 교류 및 전파 과정은 고고자료의 맥락과 동떨어질 수 없고, 물질문화의 변화양상에 대한 적절한 해석 없이 언어자료만을 가지고 결론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고고자료의 해석에 몰이해한 채로 언어의 전파 과정을 이해하다보면 지나친 비약과 단순화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된다. 특히 한국의 고언어자료는 지극히 국소적이고 제한적이므로 고고학적 맥락 없이는 특정 지역의 양상을 전국적인 것으로 과장할 위험도 존재한다.[43] 송만영, 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 / 김현식, 남한 청동기시대 원형점토대토기문화 출현의 정치·사회적 의미, 2023[44] 보빈은 기병을 가진 북방의 한국어족이 남방의 일본어족을 정복하고 예속시켰다고 추측하지만(From Koguryo to T'amna, 2013), 일반적으로 한반도에서 기마 내지 차마 문화와 연결지을 수 있는 흔적은 낙랑군 설치 이전 시점으로 소급되지는 않는다고 본다.(김두철, 한국 고대 마구의 연구, 2000 / 손로, 고대 동북아시아 차마구와 기마구의 변천, 2012) 마찬가지로 보빈이 한국어족의 남하 시점으로 처음 지목한 3-4세기 무렵 삼국시대 한반도 남부지역에 기마문화가 출현하는 현상 역시 고고학계에서는 기마민족의 남하와 같은 극적인 인구이동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토착민의 능동적인 대외교류의 결과로 해석되고 있다.(강봉원, 신라 적석목곽분 출현과 기마민족 이동의 상관관계에 대한 재검토, 2013)[45] (김승옥, 만경강 유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전개과정과 특징, 2016) 이 때 김승옥은 만경강유역에서는 점토대토기 문화 집단이 송국리 문화 집단에 비해 사회의 주도권을 가졌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호남 일부지역에는 점토대토기 문화의 최말기까지 송국리 문화가 잔존하여 이러한 방식의 통합이 모든 지역에서 일률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리라 보고 있다.[46] 이숙임, 강원지역의 점토대토기문화 고찰, 2007[47] 중동의 농경민이 유럽으로 북상하여 토착 수렵채집집단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인도 유럽어가 확산되었다는 가설[48] 흑해 일대 스텝초원의 유목민이 서진하여 유럽으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인도 유럽어가 확산되었다는 가설[49] 언어는 기본적으로 어떤 인구가 집단을 구성하고 서로를 구분하는 강력한 지표 중 하나이다. 대부분의 민족적 구분들이 언어적 구분과 상당수 일치하거나 유사한 것처럼.[50] 문안식, 요하 문명과 예맥, 2012[51] 다만 조진선, 주보돈 등 이 시기의 비교적 문헌기록을 신뢰하는 연구자들은 이 당시 진-변한 사회에서 유이민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 때문에 이들의 관점은 반도 일본어 가설과 어느정도 통할 여지는 있다.[52] 그런데 이러한 입장에서도 초기 점토대토기 계통의 이주민들이 최초 이주 단계에서 재지민과의 마찰을 피해 고지에 취락을 설치하고 그 유물의 수도 많지 않아 재지민에 비해 지극히 열세였던 상황(이형원, 청동기시대 갑천유역의 유적 분포양상과 그 의미, 2016)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 점토대토기 계통 이주민들은 재지민과의 활발한 교섭을 통해 서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는데, 이미 이들이 어느정도 자리잡은 단계에 이르면 순수하게 점토대토기문화로 이루어진 외래계 취락은 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고, 재지계 유물과 외래계 유물이 공반된 복합취락이 절대다수를 점하는 상황에서, 다소 점토대토기 문화가 각 취락에서 우세하게 나타나는 정도이다. 또한 취락의 규모 역시 외래계 취락이 재지계 취락보다 매우 소규모로 나타난다.(진영민, 중서부지방 점토대토기문화 취락의 변천과 성격, 2015) 이 시기에 유이민이 사회문화적 변화에 있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입장은 이른바 '재편론'이라 불리는데, 이러한 입장도 앞서의 이유로 이주민이 재지민을 일방적으로 흡수하거나 정복, 지배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단지 이주민들이 우월한 문화요소를 바탕으로 재지민과 교섭, 통합하여 새로운 복합취락을 구성하는 가운데에 좀 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는 의미이다. 설령 이들 이주민이 통합의 주도권을 행사하기는 하였을지라도, 이주민이 소수인데에 비해 점토대토기문화가 광범위하게 빠른 시간 안에 확산된 것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외래 문화수용이라고 하는 재지민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고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다. 한편 상기한 재편론과 대비하여 학계에서는 이 시기 이주민들이 재지사회에 흡수, 동화된 것으로 보는 입장도 있는데, 이를 흡수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이주민이 다소 간의 문화적 영향을 끼치긴 했어도 이러한 문화수용은 주로 재지수장층에 의해 자발적으로 진행되었다고 본다. 뒤에 나올 김장석 등이 이러한 흡수론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연구자로, 그는 재지민들과 통합 내지 재지민에 흡수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이주민들이 기존 재지민의 언어를 대체할 수 있었을지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53] 현재 고고학계에서 점토대토기 계통 이주민에 대한 전면적인 주민교체나 정복의 관점을 주장하는 연구자는 유병록이 거의 유일해 보인다.(영남지역 송국리문화 연구, 2019) 그는 특히 영남지역 일대에서 비교적 점토대토기문화와 송국리문화와의 공존 및 교섭양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을 근거로 이러한 문화교체 과정이 자연스럽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편론을 지지하는 조진선이나 준왕남래를 사실로 인정하는 천선행, 그리고 흡수론의 입장의 선두에 있는 김장석과 이형원, 이외에도 송만영, 김현식, 이후석(남한지역 세형동검문화의 형성 과정, 2023), 이동희(“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 에 대한 반론, 2010) 등 거의 대다수의 관련 연구자들이 대체로 '이주민은 소수였던데다가 점토대토기-세형동검 문화와 토착 송국리문화 간의 접변양상 및 공존이 양상이 확인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송국리유형 취락의 종말을 기원전 2-1세기에서 길게는 기원후 2세기까지 하한을 내려서 본다. 송국리문화에 대한 학설은 아니나, 이수홍은 울산-경주지역의 검단리문화권 무문토기인들 역시 와질토기 등장시점까지 원래 생활방식을 유지하면서 점토대토기문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했다고 본다.(울산지역 청동기시대 종말기의 지역상, 2018/ 경주 지역 지석묘 문화의 특징과 종말기의 양상, 2020) 요컨대, 현재 고고학계에서 청동기시대-원삼국시대 전환기에 이주민의 정복으로 인한 일방적인 문화교체를 주장하는 학설은 명백히 소수설이다. 그리고 유병록이 주장하는 이주정복설은 당시 위세품에 불과한 세형동검과 기원전 3-2세기 대의 소규모 주조철기가 과연 소수에 불과한 이주민들이 다수 토착민을 정복할 수 있을 수준의 무력을 제공하였을까하는 부분에서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54] 예컨대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한국어족이 한반도 중남부에 널리 자리잡았다는 입장[55] 예를 들면 반도 일본어설은 주로 진한어에 일본어족으로 볼 수 있는 어휘들이 존재한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진한일대, 특히 울산지역에는 검단리 문화가 소멸한 이후 일부 야요이계 토기가 부장되는 등 일본과 활발한 교류의 흔적이 존재하며(이수홍, 울산지역 청동기시대 종말기의 지역상, 2019 / 이러한 교역은 주로 철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도 사로국 초기 왜에서 왔다고 명시적으로 기록된 '호공'이라는 인물이 존재한다. 기원전후 무렵 문물교류 및 인적교류는 주로 한반도에서 일본열도 방향으로 향하기는 했으나, 일부 그 역방향도 존재했던 것이다. 이는 이미 야요이문화가 일본 열도에 성립한 이후, 일부 그 요소가 한반도로 들어온 흔적이다. 그렇다면 보빈의 가설 속, 진한 일대에 존재하는 일본어족의 흔적을 상기한 교류관계의 영향으로 해석해볼 여지도 있을 것이다. 단, 이 때 해당 지역은 이미 점토대토기-와질토기 문화권으로 상당부분 동질화된 가운데에서 일부 야요이토기가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설령 일본계 종족이 이 지역에 존재하였더라도 극소수의 이민자에 가까웠을 뿐,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최종적으로 진한어를 대체하게 된 신라어를 한국어족으로 평가하는 보빈의 가설과도 일치하는 지점이다.[56] 조진선, 진·변한의 형성과 분립 과정, 2023[57] 한편, 송만영은 이러한 송국리문화의 쇠퇴는 이주민의 유입과는 전혀 무관하고, 송국리문화 자체적인 사회변화에 기인한 것으로 본다. 오히려 점토대토기 및 세형동검의 유입과 관련한 사회 변화 자체가 송국리문화의 자체적인 문화 변용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58] 이청규, 요녕 본계현 상보촌 출토 동검과 토기에 대하여, 2000[59] 이창희, 점토대토기의 실연대-세형동검문화의 성립과 철기의 출현연대, 2010[60] 이형원, 송국리유형과 수석리유형의 공존양상, 2005[61] 생계수단으로서 농경은 대체로 수렵채집 및 어로활동보다 인구부양력이 크기 때문에 농경민 집단은 별다른 갈등이 없이도 몇 세대만 지나도 수렵채집민을 수적으로 압도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당시 한반도 청동기시대 주민들은 이미 본격적으로 도작농경을 하는 단계에 이르렀던 반면, 점토대토기 계통 이주민들은 마땅한 생계수단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62] 송만영의 경우,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분묘를 대상으로한 탄소연대의 확률밀도를 분석한 황재훈의 연구(분묘 자료를 통해 본 청동기시대 취락 경관의 구축, 2018)를 인용하여 이 무렵 어떤 계기로 유입되었건 간에 이주민들의 유입이 고고자료를 통해 검출될 수준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또 마찬가지 이유로 점토대토기문화 이래 외래 집단에 의해 토착민들이 기층민으로 재편되었다거나, 문화담당 주체가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는 아무 근거가 없다고 본다.(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63] 상기 두 문단 전체, 김장석,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에 대하여, 2009 / 보다 더 요약하면, 김장석은 "세형동검의 등장이 이 일대의 송국리유형의 모든 면을 대체하는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청동기와 권력집단의 묘제 및 관련유물의 변화만을 유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64] 이동희 역시 김장석의 논문을 비평하면서 송국리문화는 오히려 기원전 1세기까지 지속되었을 것이라며 송국리문화의 연대 하한을 낮추는 데에 동의한 바 있다. 다만 본 논문에서의 또다른 논점인 본래는 호서-호남지역의 원삼국시대의 토기로 알려진 타날문 토기의 연대 상한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했는데, 이동희는 이로 인해 남은 편년공백을 송국리문화의 연대 하한을 김장석의 주장보다도 더 낮춤으로서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 에 대한 반론, 2010)[65] 김장석은 그나마 분묘에서 세형동검이 원형점토대토기가 함께 출토된다는 점을 고려하여 원형점토대토기계통 이주민집단이 청동기제작의 제작기술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였으나, 이창희는 신연대관에서 원형점토대토기는 기원전 6세기, 세형동검은 기원전 5세기 후반, 삼각형점토대토기는 기원전 4세기부터 한반도 중남부에 출현하는 것으로 편년하여 원형점토대토기의 유입과 세형동검의 출현은 서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본다.(점토대토기의 실연대 -세형동검문화의 성립과 철기의 출현연대-, 2010)[66] 이후석(남한지역 세형동검문화의 형성 과정, 2023)도 마찬가지로 세형동검문화는 그 초기단계부터 토착화가 강하게 나타나며 이외에도 중원계통 문화요소 등 다양한 문화양상의 습합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 역시 세형동검문화의 형성은 이주민에 의한 토착민 축출 과정이라기보다는 양자 간의 상호 능동적인 통합의 견지로 이해한다.[67] 위 두 문단, 천선행, 만경강유역 한(韓) 문화의 실체와 전개, 2023[68] 천선행은 애당초 이러한 준왕집단 자체가 그다지 다수가 아니었으리라 보는 듯 한데, 준왕 도래 이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군집토광묘 역시 마찬가지로 해당 묘제 성립 이전 및 이후의 주거지의 수를 비교해보았을 때 이를 모두 이주민의 흔적으로 보기는 어렵고 상당부분 토착민들이 이러한 묘제를 수용하여 조성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역시 앞선 김장석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기존 연대관에서 준왕 남래 이전으로 편년되었던 송국리유형 취락들이 준왕 시기에도 그대로 병존했다는 입장인 것이다. 또 만경강 유역에서는 일부 외래요소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그 이외에는 재지 요소가 상당부분 연속적인 층위에 있을 뿐더러 준왕 일족의 절멸 기사와 부합하게 기원전 1세기 무렵에는 만경강 유역의 문화가 대체로 쇠퇴일로에 놓여 있었으므로 이들 집단이 한반도 중남부의 다른 지역까지 확산되어 토착민을 모두 정복했다고 보는 것에도 큰 무리가 따른다. 한편, 이후 만경강 사회는 외래문화를 수용한 토착민들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본다.[69] 한편, 이주민 집단이 우월한 문화로 재지사회를 재편했다고 하는 고고학계의 '재편론'이라고 해서 마치 준왕과 같은 이주민들이 강력한 고대국가를 건설하여 토착주민들을 강력하게 통제했다고 상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당시 이주민들이 재지사회를 재편했다는 것은 금관국에서 김수로집단이 구간사회를 통솔하는 것이나(조진선은 실제로 가야의 구간사회는 토착 지석묘사회가 형성한 것으로 본다.) 사로국에서 혁거세집단이 육촌사회를 규합하는 양상을 떠올리면 된다. 이들 집단은 기록 상으로 보아도 엄밀한 세속권력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종교적 권위를 내세워 공공의례를 주관하는 입장에 불과했으며, 여러 중대사는 여러 수장층 간의 긴밀한 협의 속에 결정되었다. 신라의 국가발전 과정이 이렇듯 병존하던 여러 수장층 중 하나인 김씨족단이 세습적 패권을 확보하고 이를 법제화하는 과정이었으나 이는 기원후 4~6세기 경의 마립간시대에서나 이루어진 일이다. 한편 준왕후손이 절멸했다는 기사라던가, 혁거세집단의 직접적인 후신인 박씨족단이 신라사회에서 패권을 상실하는 데에서도 보이듯 이들의 권위는 결코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조진선 역시 세형동검의 분포밀도로 보아 초기 진-변한 사회에 세형동검계통 이주민들은 결코 대규모로 유입된 것이 아니었다고 지적하는데, 그렇다면 설령 이들 이주민이 재지사회를 재편, 규합하는 역할을 수행했을지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기층민으로서 절대다수의 토착사회가 여전히 존속하는 가운데에, 재지 수장층과의 긴밀한 협조와 교섭, 그리고 상호 간의 융화의 과정을 통해 진행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일 수 있다.[70] 대체로 농공구는 청동기시대, 특히 송국리문화 시기에 그 세트가 갖추어져 있다가, 대체로 기원후 2세기에 이르러서야 철기의 전면적인 보급 및 확대의 결과로 철제농구로 대체된다. 철기는 점토대토기 도래보다 훨씬 이후인 기원전 3-2세기 경에서야 주조철기 등으로 파편적으로 나타났다가 대략 낙랑군 등 중국군현과의 교역관계가 활성화되는 기원전 1세기나 그 이후 시기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보급되고 확산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점토대토기 유입-확산기에 특유의 외래 농공구라고 할만한 요소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 듯 하다.(조현종, 한국 초기 도작문화 연구, 2008 / 김도현, 영남 지역의 원시-고대 농경 연구,2010 /이하나, 신라 철제농구의 변천과 확산, 2013 / 조한백, 영산강유역 철제 농구의 확산과 농업생산 - 4세기 전후의 변화상을 중심으로, 2023) 이런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실생활 측면에서 기층민들의 변화는 점토대토기도, 세형동검도 아닌 기원전후 철제기술의 본격적인 보급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차라리 낙랑군 설치 등과 관계된 것이지 점토대토기나 세형동검집단의 이주와는 그다지 상관없다.[71] 앞선 각주와 관련하여, 김장석은 철제기술의 도입 이후 수장층의 지배전략이 비파형동검-세형동검과 같은 위세품을 통한 이념조작에서 강력한 무력을 통한 직접대민지배전략으로 전환되었으며, 이에 따라 주민들의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 인구를 특정지점에 밀집시키는 전략을 시행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송국리 및 세형단검 단계에 건설된 취락들이 원삼국시대에 이르러 더 이상 점유되지 않고 폐기되는 일이 나타난다는 것이다.(김장석,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에 대하여, 2009) 그렇다면 이러한 송국리문화의 소멸은 점토대토기나 혹은 세형동검집단의 이주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철제기술이 도입됨으로써 수장층의 지배전략 및 일상의 생활패턴이 완전히 변화한 데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당연하게도 반도 일본어설에서 '한국어족'으로 가정하는 점토대토기나 세형동검은 철제기술과 함께 유입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기원전 3-2세기 대의 주조철기 유물이 파편적으로 한반도에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나 이는 대개 위세품적 성격이 강했으며 철기 기술이 전면적으로 보급, 확산된 것은 아니었다. 단조철기와 철제기술이 보급된 것은 주로 기원전후 시기, 더 길게는 기원후 2세기 이후의 일이다.[72] 유사한 사례로 불교문화의 유입과정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외국인 승려가 한반도로 직접 이주해오는 과정에서 불교문화가 출현하였고, 많은 물질문화의 변화를 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불교조각이 출현한다거나, 전통적인 종교건축 양식이 불교계 사원으로 대체되기도 했고, 장례의례 역시 부장품을 거의 갖추지 않는 박장풍습 및 2차장 내지 화장 풍습이 유입되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연맹왕국이나 국(國)단계 정치체들이 고대국가로 발전하거나 통합되는 등 한반도는 불교문화의 전래 이후 4세기-7세기에 걸쳐 급변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 과정에서 주민교체나 언어교체를 상정하지 않는다. 재래의 전통 취락과 재지문화가 그대로 잔존, 연속되는 가운데에 주로 이데올로기와 관계되는 지배계층의 위세품이나, 경관적 요소만 변화하는 양상은 앞서 말했듯 기원전 6-5세기 이후 한반도 중남부의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어 비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김장석은 송국리단계 및 후속 시기의 청동검을 당대 지배층의 이념조작의 수단으로서 주목한 바 있다.(송국리단계 저장시설의 사회경제적 의미, 2008 /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에 대하여, 2009)[73] 알렉산더 보빈은 한국어족을 기마술을 가진 정복자로, 일본어족을 보병 중심의 농경민족으로 대별하였다.(From Koguryo to T'amna, 2013), 앞선 단락에서 언급했듯이 일단 어느 시점에건 기마민족이 대대적으로 한반도로 남하했다는 가설은 고고학적으로는 아무 근거가 없다.[74] 오영찬, 예맥의 종족성과 물질문화, 2023[75] 강인욱, 초기 고조선 네트워크의 형성과 비파형동검문화, 2018/ 이후석, 요동지역 비파형동검문화의 체계와 사회, 2020[76] 반면 반도 일본어설에서 이 당시 민무늬 토기 집단과 같은 일본어족이라고 가정하는 야요이 문화권에서는 정작 비파형 동검이 나타나지 않으며, 점토대토기 문화가 한반도 중남부에 나타난 이후 한참이 지나서야 점토대토기 및 세형 동검이 규슈 지역으로 확산된다. 특히 최근에는 야요이 문화의 상한이 한반도 청동기시대 중-후기인 기원전 8-7세기까지로 상당 부분 올라갔는데도, 딱히 야요이 문화가 비파형 동검 문화권과 연루된 정황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청동기가 야요이시대 초반기에 아예 출토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전기 전반에 출토된 후쿠오카 이미카와 출토 동촉이 출토되는데 이는 비파형동검의 경부를 재가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지만 이 역시 지극히 제한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일본 열도에 청동기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것은 야요이시대 전기 후반에 한국의 점토대토기-세형동검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파된 시기부터이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이미 송국리 유적에서 청동기 거푸집이 발견되었으므로 이미 송국리문화 시기부터 제한적으로나마 청동기의 자체제작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되고 있다.[77] 천선행, 청동기시대 조기설정 재고, 2015 / 청동기시대 조기문화 성립과 지역 간 관계변화, 2019[78] 김장석, 남한지역 신석기-청동기시대 전환, 2002[79] 김장석, 한국 신석기-청동기시대 전환과 조기청동기시대에 대하여, 2017[80] 이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비송국리 문화권이라고 해서 점토대토기를 사용한 것은 아니고, 이들은 오히려 원삼국 시대 개막 직전까지 오랫동안 민무늬토기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오히려 점토대토기는 해로를 통해 송국리 문화의 중심지인 한반도 중서부일대에 처음 유입, 확산된 것으로 본다.(박순발, 요령 점토대토기문화의 한반도 정착 과정, 2004 / 송종열, 만경강유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정착 과정, 2015 등)[81] 이홍종, 송국리문화의 시공적 전개, 2003 / 이홍종은 이 때문에 이 당시 야요이 문화의 기원이 되는 세력은 한반도 내부의 열세 집단으로서, 여러 내외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 외래의 송국리 문화의 문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본다.[82] 재지적 특징이 강한 변형된 송국리 문화의 이주, 토착 조몬인들에 의한 선별적 문화수용 및 이들 양자의 결합 등[83] 이정은, 규슈지역 송국리문화의 확산과 문화변동, 2019 / 다만 비교적 규슈 지역에서는 송국리 유형 주거지로만 이루어진 취락이라던가, 송국리형 주거지가 기존 재지 주거지보다 우월한 입지를 확보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주는 결코 소규모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으며, 비교적 이주민이 재지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보는 입장이 일반적이다.(유병록, 일본 구주지방 송국리문화 연구, 2010 등)[84]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 현대 일본인 혈통 중 적게는 3%, 많게는 20% 정도만이 조몬계 혈통이며, 나머지는 한반도 계통의 혈통이 우세하다는 것이 통설이다. 다만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이민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는 사실 이러한 혈통적 우세는 어떤 언어가 우세한가의 문제와는 다소 무관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현대 미국에서 백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57.8% 밖에 안 되고 # 백인 중에서도 미국 전체 인구 중 대략 15% 정도를 차지하는 독일계 등 비영어권 국가들 출신들까지 모두 배제하면 순수하게 출신지의 언어가 영어인 인구는 과반이 훨씬 안 된다. 그럼에도 미국에서는 당연히 영어가 압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는 이미 미국이라는 사회가 초창기부터 영국계 주민들에 의해 세워져 영어가 처음부터 공용어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던 데다가 이후 비영어권 출신의 이민자가 들어와서 이들이 나중에는 영어권 출신들보다도 더 수가 많아졌을지라도, 그들이 이민할 당시에는 그들은 어디까지나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야요이 사회도 초창기에는 송국리문화 계통 이주민들이 토착 조몬사회와 활발히 교섭하고 융화되었다는 사실을 미루어보면, 지속적인 한반도계 주민들의 유입으로 결과적으로 이들이 혈통적으로는 다수가 되었을지라도, 그러한 이민은 오랫동안 점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각각의 이주 시점에서는 한반도계 언어를 사용하던 이들이 야요이 사회에서 항상 소수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라면 원래 한반도계 언어를 사용하던 이주민들은 이미 토착화한 야요이문화의 주류언어에 지속적으로 동화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야요이문화에서도 야요이시대 조기인 기원전 8-7세기 경부터 기원전후, 혹은 그 이후의 시점까지도 한반도로부터의 이주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85] 비교적 근래에 유전학계 일각에서 제기된 일본인 삼중기원설 연구에 따르면, 야요이시대 조몬계 혈통 비중이 60%로 나타나서, 야요이시대 이주민이 토착 조몬인을 대체하기보다는 동화, 습합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Niall P. Cooke 외, Ancient genomics reveals tripartite origins of Japanese populations, 2021) # 이에 따르면 유럽의 경우 농경민이 수렵민을 대체하는 형태로 확산되어 야요이시대 인구 확산 역시 그러리라는 추정이 있었으나, 해당 연구에서는 조몬인과 이주민이 동일한 비중으로 나타나 이주 농경민에 의한 일방적인 주민대체로 해석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만, 해당 연구 자체는 시모모토야마(Shimomotoyama) 유적에서 나온 후기 야요이 안골 2개체에서 추출할 유전자료만을 가지고 여러 비약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다소 비판의 여지가 있음은 고려해야 한다. 사실 해당 연구의 핵심 주장은 야요이시대 이주민은 북아시아계통, 고훈시대 이주민은 동아시아 계통으로 이들을 서로 다른 유전적 프로필을 가진 집단으로 가정하고, 고훈시대 이주민에 의해 현재 일본인의 유전 구성의 상당부분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다른 연구에서는 여러 야요이계 인골에서 이미 조몬계의 비중이 훨씬 낮게 나오기도 하고,# 현대 일본인과 유전구성비가 거의 동일하게 나오는 경우가 있었으며# 일본인 삼중기원설 연구에서도 고훈시대 인골의 기원을 재구성할 때 구태여 한국을 건너뛰고 현대 중국 한족만을 비교대상으로 삼는 방법론적인 비약도 있었다. 최근 도쿄대 연구팀이 시모모토야마(Shimomotoyama) 유적보다 좀 더 연대가 이른 도이가하마(Doigahama) 유적에서 출토된 또다른 야요이 인골에 대한 유전분석을 통해 상기한 삼중기원설을 재검증했는데, 도이가하마 유적 인골에서는 고훈시대 및 현대 야요이인, 그리고 한국인이 모두 유사한 유전구성비가 나타난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 연구에 따르자면 일단 야요이시대 이주민과 고훈시대 이주민이 전혀 다른 유전적 프로필을 가진 집단으로 이해하기는 어렵고, 이미 야요이시대부터 동아시아계 + 북아시아계 + 조몬계의 현대 일본인에게서 나타나는 유전구성비가 비교적 큰 변화없이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해당 연구도 시모모토야마 야요이 후기 인골에서 조몬계 형질의 비중이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였으므로# 야요이시대 전기부터 고훈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로부터의 여러차례의 이주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나, 한반도계 이주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야요이문화를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조몬계 비중이 높은 유전적 프로필을 가지고 있던 집단이 야요이시대 후기까지 잔존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로 보이기 때문이다.[86] 사실 송국리문화권에 속하는 진주대평리 유적만 하더라도 청동기시대 전기 이래의 재지의 물질문화 요소가 송국리문화와 융합하여 형성된 취락이며, 본래 송국리 문화는 직접적인 이주를 통해서만 확산된 문화가 아니다.(이종철, 송국리형 문화와 취락체제의 발전, 2015)[87] 묘제의 측면에서는 송국리문화의 원향인 금강하류역 일대의 전형적인 '송국리형 묘제'와 이러한 송국리문화가 전파된 지역의 여러 재지전통과 결합되어 쓰였던 광의의 '송국리문화의 묘제'는 명확히 구별된다.(이명훈, 송국리형 묘제의 검토, 2015) 이명훈에 따르면 송국리형 묘제는 금강하류역에서 전형적인 복합세트를 갖추고 있으나, 금강중류역에서만 해도 그 구성요소들이 상당부분 탈락돼 있고, 금강유역을 벗어난 경기남부, 전남 남해안, 영남지역 등지에서는 송국리형 주거지는 관찰되지만 송국리형 묘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영남지역은 서부지역에서 송국리형 묘제의 영향이 일부 관찰되기는 하나, 영남지역에서 빈출되는 석관묘는 송국리형 묘제의 그것과 형태와 전혀 달라 묘제에서 송국리문화의 영향은 그다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영남지역에서 확산된 송국리문화가 이주보다는 문물 교류 내지 재지 집단의 자발적 수용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근거 중 하나일 것이다.[88] 한편, 앞서 언급한 휘트먼은 어족을 구별하는 지표로서 민무늬 토기와 세형 동검만을 대별하고 있을 뿐인데, 이에 따르면 민무늬 토기문화권 중에서도 농경문화 전통이 비교적 약한 검단리 문화권, 천전리 유형권 등 강원지역 및 울산-경북 북부 일대 역시 일본어족이어야 할 것이다. 해당 지역에서는 송국리 문화권과는 달리 수전농경이 널리 퍼져 있지 못했는데, 그렇다면 수전농경을 일본어족의 특질로 부여하는 반도 일본어설은 이 부분에 대해 충분한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89] 다만, 해당 지역에서도 수전이 조성되면서 도작농경이 상당부분 발전했음이 확인되고 있으며(배진성, 검단리유형의 성립, 2005), 청동기시대 강원도 및 경상도의 작물조성을 살펴볼 때도 대체로 도작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정유진, 한반도 선·원사시대 도작의 변화 - 벼 식물유체의 발견비율과 탄화미 계측치의 검토, 2010) 그렇지만 해당 지역의 주거문화 등은 송국리문화에 비해 이동성이 강하고, 어로구 및 수렵구의 비중이 비교적 높으며, 입지 역시 산지와 바다에 접해 있어 애당초 농경보다는 수렵채집과 어로활동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안재호, 묘역식지석묘의 출현과 사회상, 2012 / 유병록, 영남지역 송국리문화 연구, 2019) 즉, 농작물 중에서는 비교적 도작의 비중이 높은 것은 확인되지만, 이러한 농경보다는 수렵채집 및 어로에 보다 더 치중했을 개연성이 높아보인다는 것이다.[90] 물론 본래 서로 이질적이었던 공귀리형문화, 서단산문화, 단결-크로우노프카 문화 그리고 송국리문화는 제각기 세형동검이 전파되면서 상층에 일부 유사한 물질문화를 공유하게 된다. 하지만 세형동검문화가 전파된 것은 일본 역시 마찬가지다. 기층의 다양한 토착문화가 새로운 외래문화를 수용함으로써 제각기 이질적인 문화와 정체성을 확립해나갔던 것이 이 당시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문화양상이었고, 일본 열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만약 휘트면의 주장대로 세형 동검의 전파가 곧 한국어족 확산의 지표라면, 일본 열도 서부지역도 이러한 교류망에 포함되어 세형 동검을 수용했으니 한국어족의 확신지로 분류해야 하지 않을까?[91] 반도 일본어설에서 한반도 중남부에 일본어족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비파형동검 단계에서는 한반도 중남부에 요동 및 서북한 지역과 동일하게 비파형동검이 나타나는 반면 일본 열도에서는 비파형동검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반도 일본어설에서 한반도 중남부가 한국어족으로 대체되었다고 주장하는 세형동검 단계에서는 정작 한국어족 확산의 지표인 세형동검이 일본 열도에까지 확산된다. 반도 일본어설 측은 특정한 물질문화자료를 가지고 한국어족에 의한 일본어족의 대체를 검증하거나 입론하고자 하지만, 이러한 가설은 이처럼 모순이 많고 정합적이지 않다. 요컨대, 청동기시대에는 한반도 중남부와 요동-서북한 지역 간의 문화적 연관관계가 반도 일본어설이 상정하는 것만큼 그다지 단절적이지 않았고, 초기철기시대(세형동검단계)에는 반도 일본어설에서'한국어족 문화'라고 상정하는 문화요소가 일본 열도에까지 전파되었을만큼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의 지표를 뚜렷이 구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앞서 천선행 등의 논의에서 나타나듯이, 토착문화의 바탕 위에 세형동검과 같은 외래문화 요소를 수용하여 재지화되는 것은 한반도 중남부에서 마찬가지여서 일본 열도의 세형동검문화 수용양상이 유독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다. 야요이문화에서도 세형동검의 유무는 야요이시대 전기와 중기를 구별하는 획기의 지표로서 사용될만큼(조진선, 전근대의 한일항로와 세형동검문화의 파급 경로, 2019) 야요이문화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형동검의 전파가 야요이시대 국(國)의 형성과 밀접한 영향이 있다는 점(조진선, 세형동검문화의 일본열도 파급, 2016)을 감안하면 일본 열도에서의 세형동검의 전파로 인한 사회적 영향의 크기가 한반도에서의 세형동검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여러 사회적 변화보다 결코 적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고고자료의 변화양상을 한반도에서는 일본어족에서 한국어족으로의 언어교체의 계기로 상정하지만 일본 열도에서는 언어 교체의 계기로 상정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도 일본어설에서 언어교체의 계기로 삼는 고고학적 지표를 일관되게 적용하자면 이미 일본 열도는 진즉에 한국어족으로 교체되었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92] 천선행은 이때 한반도 무문토기문화의 성립에 직접적으로 기여한 압록강중상류 및 청천강 유역권을 1차 무문토기문화권으로, 이에 직간접적인 파급을 야기하면서 무문토기문화에 영향을 끼쳤던 요동반도 남단에서 요동산지에 이르는 지역을 2차 무문토기문화권으로 가정한다.(한국 무문토기문화의 공간적 범위에 대하여, 2018) / 또한 천선행은 가락동 유형 이외에 역삼동 유형 및 흔암리 유형과 같은 청동기시대 전기의 문화는 직접적인 이주라기보다는 청동기시대 조기 돌대문토기문화 등의 재지주민이 교류를 통해 중국 동북지역의 문화요소를 수용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한반도 무문토기문화 형성기의 중국동북지역과의 관계, 2014)[93] 한편 송국리문화의 기원에 대해 고고학계에서는 전기 문화의 자체적인 발전의 결과라는 재래기원설과, 수리관개도작 체계 등이 전기 말에 외부로부터 유입되었다고 보는 외래기원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이 중 재래기원설 중에서는 송국리문화가 금강유역 가락동유형의 발전이라는 입장(송만영, 송국리유형 발생설의 학사적 검토, 2015)이 있으며, 여전히 외래기원설을 고수하는 측도 금강유역의 해당 재지 청동기문화와 송국리문화 사이에 상당한 접점이 있어 수리도작 이외의 많은 요소가 재래요소와 계승관계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송국리문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요동-압록강 유역권의 문화양상을 공유하고 있다.[94] Martine Robbeets 외, Triangulation supports agricultural spread of the Transeurasian languages, 2021[95] 점토대토기라는 개별 문화요소 자체는 요서 내몽고지역에서 기원하여 요서와 요동으로 각각 전파된 것으로 무문토기문화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 고조선 문화 자체를 무문토기문화와 완전히 무관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한반도 무문토기문화와 밀접하게 관련있는 쌍타자-마성자 문화 및 고대산 문화 자체가 고조선의 기층문화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비파형동검-다뉴세문경 교역 네트워크 속에서 송국리문화권과 요동지역 문화권은 서로 밀접하게 교류하였다.[96] 사실 무문토기문화의 확산 자체는 서속류나 도작과 같은 특정한 종류의 농경 확산과 직접적으로 연관을 짓기가 어렵기 때문에 휘트먼 등이 무문토기문화의 확산과 도작의 전파를 동일시한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비록 무문토기문화는 한반도 중남부에 있어서는 도작과 동시에 확산되는 경향은 있으나, 무문토기문화 자체는 도작과 무관한 지역에서도 널리 확산되고 영위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을 고고학적으로 입론하고자 했던 미야모토 카즈오도 이들 가설에서 상정하는, 무문토기문화와 관련한 proto-japonic의 한반도 확산을 벼농사의 전파와 직접적으로 관련짓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한편, 미야모토 카즈오는 농경언어확산 가설에 매몰된 이러한 역사언어학적 관점들을 비판하고 무문토기문화 자체를 일본어족으로, 점토대토기문화를 한국어족으로 설정했으나, 이 역시 이 단락에서 다루고 있는 야요이시대 언어교체론-야요이시대 일본어 기원론에 근거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점토대토기문화의 유입으로 한반도 문화가 단절적으로 변화했다고 하는, 현재는 한국 고고학계에서 폐기된 점토대토기단계 단절론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비판의 여지가 있다.[97] 사실 기원전 2000년대 전후 요서 및 중국 동북지역의 신석기시대 말기-청동기시대 전환기에는 중국 중원이나 산동 계통의 문화적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이것이 각지에서 재지적 변용을 거쳐서 한반도의 무문토기문화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유독 도작문화를 이러한 무문토기문화 등을 위시한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 청동기문화와 이질적인 배경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이유도 없다. 로비츠 등의 연구에서도 기원전 2000년대-15000년대 사이에 요서지역에서 영위된 초기 청동기문화인 하가점 하층문화 주민들이 중국 양소문화인들과 유전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지닌 것으로 나타나고# 한반도 청동기문화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요동지역의 여러 청동기문화 역시 하가점 하층문화 및 산동 용산문화에서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은 것은 분명하므로, 수리도작문화 역시 이러한 동북아시아 지역 청동기시대 성립기의 일반적인 교류망을 통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고 보는 것이 개연적일 것이다.[98] 이홍종, 무문토기와 야요이토기의 실연대, 2006 / 앞선 각주에서도 언급했듯, 금강유역권의 '송국리형 묘제'는 영남지역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99] 이를 송국리문화의 외래기원설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아직 학계에서 갑론을박이 치열하며, 송국리문화를 청동기시대 전기문화의 연장으로 보는 관점도 상당히 우세하다.[100] 안재호 외, 松菊里文化의 傳播와 聚落網, 2021[101] 안재호와 비슷하게 송국리문화 외래기원설을 지지하는 이종철은 영남지역의 청동기시대 조기-전기계통의 토착 각목돌대문토기-공열문토기 집단이 일본으로 선행적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이후 또다시 경남 남해안 일대의 송국리문화 집단이 일본 열도로 이주한 뒤 선행 이주민 집단과 결합함으로써 두 문화가 절충한 형태의 야요이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보았다.(송국리형문화의 취락체제와 발전, 2015) 어찌됐건 송국리문화와 별개의 영남지역 청동기시대 조-전기 문화요소를 가지고 있던 토착집단이 야요이문화의 형성에 기여했다는 인식은 이홍종, 이종철, 안재호 등이 모두 공유하고 있다.[102] 무문토기문화는 요동지역에서 토착 신석기문화 및 새롭게 유입된 산동반도의 신석기-청동기 문화 등 여러 문화 간의 상호 교류-융화의 결과로 탄생한 데에 반해, 주로 송국리문화 외래기원설에서는 장강유역-산동반도의 도작민들의 한반도로의 직접적인 이주를 상정하는 경향이 많다.[103] 물론 경주-울산지역에서 수리도작이 아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실 수리도작 기술 자체는 이미 청동기시대 전기에 한반도 중남부 전역에 확산된 것인데다가, 해당 지역의 물질문화는 송국리문화와 별다른 관련성이 없으며 야요이문화와도 직접적인 관련이 나타나지 않는다. 최소한 야요이문화와 관련이 있는 송국리문화 집단을 일본어족으로 가정하는 논리대로라면 애당초 송국리문화가 전파되지도 않았던 경주지역에서 가장 오랫동안 반도 일본어의 흔적이 잔존했다고 보는 알렉산더 보빈의 견해는 상당히 모순적이다.[104] 예를 들어 앞선 단락에서 보았듯 역사언어학계에서 한국어족 확산의 계기로 지목하는 점토대토기문화의 이주 등을 전면적인 주민교체로 보기 어렵다. 그나마 이들 점토대토기집단이 사회의 주도권을 차지했다고 보는 입장 역시 '재편론'이라는 애매한 명칭으로 지칭되는 것에서 드러나듯이, 점토대토기문화가 우세해진 계기는 '점토대토기문화집단'에 의한 일방적인 무력 정복의 과정으로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트랜스유라시아어 가설 측이나 휘트먼 등은 이러한 한국어족의 확산 내지 재확산 과정을 엄밀하게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105] Martine Robbeets 외, Triangulation supports agricultural spread of the Transeurasian languages, 2021[106] 이 논문에서는 도작확산을 통해 일본어족 확산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으므로 도작을 전파한 이들 요서농경민이 일본어족이라는 것이 해당 논문의 가정인 듯 하다.[107] 물론 이 점을 감안해서인지 로비츠의 논문에서도 산동반도와 요서를 이루는 광대한 지역을 도작재배권으로 분류하는 동시에, 반대로 산동반도 북부는 트랜스유라시아어가 사용되는 잡곡재배권과도 겹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정작 해당 논문의 유전학적 연구에서는 주로 요서지역 주민과 야요이 주민 사이의 연관관계를 입증하는 데에만 주력하기 때문에 이러한 분류는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108] 동아시아계 + 북아시아계의 혼합구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고대 황하유역이나 서요하유역 계통 주민, 그리고 나아가 현대 한국인, 일본인 등은 다소 간의 구성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동일한 클러스터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현대 한국인이나 청동기시대 한반도 주민들이 대체로 비슷한 시기 요서지역 계통 주민과 유전 구성이 비슷하다고 해서 청동기시대 이주민을 반드시 요서지역 청동기인의 이주로만 이해할 이유는 없다.[109] 실제로 도쿄대 연구팀이 진행한 도이가하마 유적의 야요이 인골에 대한 유전분석 연구#에서도 각 집단 사이의 친연관계 및 유전적 드리프트의 유사성을 분석하는 f3-statistics을 통해 해당 인골이 한반도 고인골 중에서는 안도 패총인골과 가장 친연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Among ancient Koreans, Korean_Ando exhibited the closest affinity with the Doigahama Yayoi individual, suggesting that immigrants to the Japanese Archipelago during the Yayoi period were derived from populations genetically closer to Korean_Ando than to ancient Koreans from Gunsan and Gimhae) 해당 연구에서 사용된 한반도 고인골인 군산, 김해 대성동, 김해 유하리 인골 등은 모두 초기철기시대-삼국시대의 인골이기 때문에 이는 어쩌면 야요이인골이 한반도 신석기시대 주민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해당 연구의 분석결과에서도 여러 야요이 인골들이 출토지에 따라 비교적 상이한 유전 구성비와 유전적 드리프트를 보이기도 하므로 안도 패총 인골 및 이와 연관된 신석기시대 한반도 주민이 야요이문화의 유일한 기원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110] 장우순-문치웅, 트랜스유라시아어의 요서 기원 가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2022[111] 로비츠 등은 청동기시대 일본어족 집단의 유입으로 토착 한국어족(?) 신석기인들이 대체된 뒤, 그 이후 또다시 한국어족 집단이 한반도 중남부에 재확산한 것으로 보는 매우 복잡한 인구이동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반도에서는 역사시대까지 조몬계 형질을 보유한 집단이 해안가나 도서지역을 중심으로 일부 잔존하고 있다는 관찰을 고려하면, 이 당시 한반도 인구집단의 주민교체가 그렇게 급격하게 이루어졌을지는 의문이다. 사실 청동기시대 전기 말까지만 해도 대체로 충청지역에서는 정주농경문화가 우세하여 주로 도작과 서속류 위주의 식단을 이룬 것과 대조적으로, 안면도 고남리 패총 유적에서는 어패류 위주의 식단조성을 이룬 것이 확인되는데, 이에 근거하여 농경민이 아직 정착하지 못한 해안 및 도서지역 등에서는 여전히 신석기시대의 생업 및 사회구조가 청동기시대 전기 내내 그대로 이어졌던 것으로 이해된다.(소상영, 한반도 중서부 지방 신석기 시대 생계·주거 체계 연구, 2013) 그리고 삼국시대 김해 대성동 인골에서도 여전히 조몬계 형질이 잔존하는 경우가 관찰되는 점을 고려해보면, 삼국시대에도 일부 지역에 한해서는 이들 신석기인의 형질이 잔존하고 있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에서 주민대체가 상정될 수 있을만한 급격하고 전면적인 문화적 단절이 나타나는 시기는 전통적인 수렵채집 위주의 사회구조가 전면적인 정착농경 사회로 급변하는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전환기가 거의 유일하므로 만약 로비츠 등의 가정대로 조몬계 형질을 가진 한반도 신석기인 집단과는 다소 이질적인 집단이 유입되었다면 이는 청동기시대가 가장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청동기시대 이주민이 토착 신석기인 집단을 대체하는 과정은, 어떤 폭력적인 절멸전쟁의 과정이라기보다는 내륙의 정착농경민이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는 반면, 신석기 수렵채집민을 해안가나 도서지역으로 몰아내는 방식을 통해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김해 대성동 인골처럼 역사시대까지 일부 잔존한 이들 그룹들도 이미 물질문화 상으로는 한반도 주류문화에 동화된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청동기시대 이후 인구-문화적 변화가 그다지 급격하고 단절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에 트랜스유라시아어 가설이나 반도 일본어설에서 제시하는 급격한 주민교체나 언어교체 가설은 이 당시 고고학적 변화상에 그다지 잘 들어맞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112] 한편, 일부 연구자는 벼라는 작물 자체는 이미 신석기시대에 한반도에 전래되었다고 보기도 하고, 또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사이의 한반도에 도작 및 도작문화를 가져온 새로운 인종집단의 유입이나 인적 교체를 부인하는 입장이 학계에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록 신석기시대에 농경이 제한적으로 행해졌을지라도 어디까지나 수렵채집사회의 생계양식이 존속하는 가운데에 농경은 보조적으로만 행해졌으며 본격적인 정주농경문화가 나타나지 않았음을 유의해야 한다. 실제로 오히려 이 당시에는 서속류 이외의 다른 작물의 재배는 설령 그 흔적이 있다고 해도 희미하며, 그나마 서속류 농경이 전파되고 여러 지역에서 서속류의 재배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 인구가 증가하거나 정주성이 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퇴화되는 경향마저 나타난다.(김민구, 작물유체로 본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사회, 2020) 이는 신석기인들이 작물 재배 기술 자체는 흡수했음에도 여전히 이동성이 강한 수렵채집사회의 원리에 따라 경제를 영위하였음을 의미할 것이다. 김장석은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전환기에 농경민이 한반도에 이주함으로써 배타적 토지점유가 확산되고, 이에 따라 토지이용 비용이 증가함에 따라 전통적인 수렵채집경제가 급격히 붕괴함으로써 급격한 문화적 단절이 이루어졌다고 보고 있다.(김장석, 한국 신석기-청동기시대 전환과 조기청동기시대에 대하여, 2017) 이들 농경민의 문화를 수렵채집민이 접촉을 통해 점진적으로 수용하는 양상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양자의 문화가 공반되는 경우도 거의 없거나 지극지 제한적이기 때문에 농경민의 급격한 확산으로 수렵채집민들의 사회가 붕괴되어 이들이 강제로 농경민 사회에 흡수되었다는 것 이외에는 이 현상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또 김장석은 이 당시 폭력적 충돌의 증거는 없으므로 전쟁과 학살에 의해 신석기인들이 대체되어 사라졌다고 보지도 않는다.) 나아가 탄소연대확률밀도분포 자료 상 청동기시대 이후 인구나 유적자료가 폭증하는 것은 사실로 확인되고 있어서, 청동기시대 이후 정주농경이 정착되었음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단순히 벼라는 작물 자체가 신석기시대 한반도에 도래하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지만, 청동기시대에 나타나는 수리도작을 중심으로한 본격적인 정주농경의 출현이 이전 시기와 급격한 단절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가 단절론적 획기라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이 과정에서도 청동기시대 전기 말까지 일부 해안가 및 도서지역에서는 오랫동안 신석기시대 생계양식이 잔존하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113] 실제로 앞선 각주에 언급된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 지지자인 미야모토 카즈오와 그가 인용한 마르틴 로비츠의 주장이 이런 맥락이다. 로비츠는 기장-조의 확산 등 농경언어확산에 비중을 두고, 미야모토는 농경-언어 확산에는 회의적인 대신 고고학적 문화와 언어 확산을 연관시키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대체로 산동반도-요서-요동-한반도 지역의 문화나 언어를 유사한 계통에 두고, 한국어족 집단과 일본어족 집단이 산동반도나 요서지역에서 제각기 시간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확산함으로써 두 언어가 분화했다는 입장을 공유한다.[114] 그러나 한국어-일본어 뿐 아니라 광범위한 유목민족의 언어까지 모두 동계어로 가정하는 로비츠와 미야모토의 입장은 유전학적으로 성립하기는 어렵다.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달리 요서(하가점 하층문화)나 현대 한국인은 오히려 유전적으로 북방 유목민족보다는 중국인 등 동아시아 계통과 좀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므로 ## 청동기시대에 산동-요서-요동-한반도 사이의 계통적 유사성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어도 이를 넘어서 트랜스유라시아어족에서 가정하는대로 신석기시대 이후로 일관되게 북방 유목민과 한반도-일본 열도 사이의 광범위한 계통적 유사성이 존재했다는 주장은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하가점 하층문화는 대략 기원전 15세기 무렵 기후변화로 인해 와해, 해체되었고, 그 이후 이들과 직접적인 혈연적 관계가 옅은 유목적 성향을 가진 집단이(로비츠의 논문에서는 이들이 주로 북아시아 계통의 유전형질을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정착하여 하가점 상층문화를 이룬 것이다. 고고학적으로도 이 하가점 상층문화를 고조선과 같은 한국계 청동기문화와 직접적으로 연결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115] 물론 고고학적으로 유사한 계통의 물질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들이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보아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이들 집단들이 어떤 분화과정을 거쳤는지, 아니면 본래 서로 이질적인 집단이 단순히 외래의 물질문화를 수용한 것에 불과한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차이를 구체적으로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지를 충분히 해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옳다. 예컨대 청동기시대에 경주 등 한반도 동남부 지역에서는 대체로 문화 전파 및 새로운 문화에 대한 수용이 느리고 보수성이 강하다. 생계양식의 측면에서도 수도작을 일정부분 수행하고 있으면서도, 수렵채집의 비중이 높고, 주거지의 이동성도 강한 편이다. 비록 해당 지역 역시 무문토기문화의 일종인 검단리문화를 영위했다 하더라도 이들은 정주농경문화 위주였던 다른 지역의 청동기문화에 비해서는 다소 이질성이 강한 집단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한반도 중서부지역은 한반도 중남부 전체에서 보았을 때에도 가장 요령지역과 문화적으로 가깝고 교류도 잦았으며, 무엇보다 요령지역에서 발원한 문화집단이 직접적으로 해당 지역에 이주함으로써 가락동유형 문화를 형성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어 시간이 흘러 이 지역의 가락동유형 등의 토착문화가 마찬가지로 요령이나 산동지역에서 발원했을 여러 새로운 외래계 문화요소와 결합함으로써 송국리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청동기시대 전기 이래의 수전농경이나 비파형동검 등은 휘트먼의 논의 속 한국어족 집단의 지표로 가정하는 세형동검과 거의 동일한 루트를 통해서 전래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도 상당부분 밀접한 관계망을 가지고 있었으리라 보이는데도, 반도 일본어설을 지지하는 휘트먼은 이들 한반도 중서부집단과 요령게통 집단을 전혀 다른 계통의 집단으로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어떤 경로로 서로 완전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인지, 혹은 한국어족은 언제 어떻게 한반도 중서부지역 주민의 언어들과 분화했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부족하다. 그리고 만약 알렉산더 보빈의 주장대로 한국어와 일본어가 완전히 다른 계통의 언어라면, 한국어와 일본어의 분화를 논의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같은 조어에서 분화된 언어는 같은 어족에 속해야 하기 때문이다.[116] 물론 실제로는 고고학적으로 한반도 철제기술의 유입이 특정 주민집단의 대규모 이동, 확산 및 전면적인 수준의 주민대체와 관련된 정황은 당연히 없다.[117] 하지만 세형동검도 마찬가지로 결국 그 문화의 기원은 연나라의 세력이 요서-요동으로 점진적으로 확장됨에 따라 중국 전국시대의 청동기-철기 문화가 십이대영자 문화권 및 그 이동 지역에 확산, 파급된 것에서 기인한다.(조진선, 금속유물로 본 한국 청동기, 2020) 그렇다면 만약 이들 세형동검집단의 팽창과 확산에 방점을 두고, 이러한 물질문화를 영위한 집단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고 토착민을 정복, 대체함으로써 어떤 언어세력이 확산되었다는 가설을 입론하고자 한다면, 해당 물질문화 파급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연나라 및 전국시대 중국인의 언어가 한반도로 확산되었다는 관점이 차라리 좀 더 타당할 것이다.(물론 앞서 말했듯 딱히 세형동검집단에 의한 토착민 정복-대체 가설은 그다지 한반도 남부의 고고자료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반도 일본어설이나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은 세형동검과 동반되는 한국어족의 기원을 제대로 지목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은연 중에 세형동검 집단이 마치 이동성이 강한 유목민적 성향이 있었다는 식으로, 이들이 요서 및 요북 일대의 북방 유목민족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과 같은 인상을 남기고자 할 뿐이다. 이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 측에서는 유목민 언어와 한국어-일본어를 동계어로 설정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고, 반도 일본어설 측에서는 알렉산더 보빈이 기마민족 남하설을 토대로 한국어족 집단에 의한 토착 일본어족 언어 대체에 대한 가설을 입론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 한반도의 고고자료에서는 유목민의 문화와 한반도를 연루시킬 증거는 거의 없는데, 요령권의 비파형동검-세형동검과 요동지역에서 확산된 무문토기문화는 모두 정주농경민과 관련된 문화이기 때문이다.[118] 이는 보빈 등이 '기마민족 남하설'이라는 언어학계의 통설에 근거하여 한국어족 집단을 중앙아시아 계통 유목민족과 밀접하게 연루된 집단으로 가정했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비파형동검의 기원에 대해서는 하가점 상층문화 기원론과 십이대영자 문화기원론이 대립하고 있기는 하나, 적어도 직접적으로 한반도와 관련된 요령계통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문화는 모두 유목민이 아닌 정주농경민에 의해 영위된 문화이다.[119] 천성행은 야요이 조기 재래계 문화가 우세하다는 점은 들어 이 시기 한반도계 이주민의 규모가 대규모가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여러차례 한반도에서의 이주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무문토기시대 한일간 지역관계변천, 2009)[120] Niall P. Cooke 외, Ancient genomics reveals tripartite origins of Japanese populations, 2021 / 다만 해당 연구는 로비츠 등의 네이처지 연구 결과와 상충하는 측면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Niall P. Cooke의 연구는 고훈시대 전후의 도래인들이 일본인들의 유전형질의 대다수를 차지했다고 보지만, 로비츠 등은 야요이인을 현대 일본인과 직접적으로 연관시키고 있다. / 2024년 도쿄대 연구팀이 진행한 야요이 인골에 대한 유전체 분석 연구#에서도 일부 야요이 인골에서 이미 현대 일본인과 비슷하게 한반도-동아시아계 유전구성이 다수로 나타난다는 통설을 재확인함으로써 Cooke 등이 제안한 고훈시대 이주민에 의한 일본 열도에서의 급격한 유전적 프로필의 변화는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다만 해당 연구에서도 시모모토야마 인골 등 북서 큐슈 일대의 일부 야요이 인골에서는 조몬계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난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하고 있으므로, 이에 근거하더라도 야요이문화를 한반도계 이주민의 전유물로만 간주하거나, 야요이시대에 토착 조몬계 주민들이 일방적으로 한반도계 이주민에 단시간에 즉각 대체, 습합되었다고 보는 관점은 잘못일 수 있을 것이다.[121] 일본서기 권 제10 응신천황조에 의하면 백제인 궁월군이 인부 120현을 이끌고 왜로 망명했다는 기사도 있고, 이외에도 백제인, 신라인, 고구려인, 가야인 등 한반도인이 특정 시점에 일본에 각각 이주하여 어떤 성씨의 시조가 되었다거나, 그들을 다른 지역으로 옮겼다는 등의 기록이 일본서기에 자주 나온다. 고고학적으로도 원래 조몬시대부터 야요이시대까지 일본 열도에서는 주로 모닥불의 형식으로 취사와 난방을 수행했었는데. 대략 3세기 후반부터 규슈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계 부뚜막-구들시설이 조금씩 나타나다가, 특히 5-6세기 경을 기점으로 백제계 난방-취사문화가 일본열도 전역으로 파급, 확산되는 양상이 관찰되며, 묘제에서도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이 5-6세기에 규슈와 기나이 지역을 중심으로 비교적 대규모로 조성되고, 대벽건물이라고 하는 새로운 건축 양식 역시 일본에 전방위적으로 나타난다.(우재병, 5~6세기 백제 주거ㆍ난방ㆍ묘제문화의 왜국 전파와 그 배경, 2006) 우재병은 이러한 문화 전파가 백제인의 직접적인 이주나 백제의 문화를 직접 경험한 왜인들의 기여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본다. 비단 백제계 뿐 아니라 세토내해 일대 등에서 5-6세기 한반도계 수혈식 석곽이나 특히 김해-부산 지역에 계보를 둔 목곽분 묘제가 여러 지역의 수장층의 묘제로 채택되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이 역시 한반도계 도래인 집단 및 이들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高田貫太, 日本列島 5, 6世紀 韓半島系 遺物로 본 韓日交涉, 2005) 이처럼 3세기 후반에서 6세기 사이에 일본 열도의 물질문화는 그 실생활의 영역에서 관념의례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한반도계 문화의 영향을 받아 급변하는 양상이 나타나므로, 일부 고유전학 연구에서 상정하는 고훈시대 한반도로부터의 대규모 인구집단의 이주의 가능성을 어느정도는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이에 대해 일본 학계에서는 고훈시대에는 재지계 토기나 유물의 수량이 더 많다는 이유로 이 시기의 주민대체 수준의 대규모 이주에는 회의적이다.[122] 다만 부뚜막-구들 시설 자체는 한반도 내에서도 자생한 문화가 아닌데, 오승환에 따르면 이러한 난방시설은 내몽고 지역에서 처음 발생하였다가 연나라시기 하북성 일대에서 정형화하고, 이후 연나라의 세력이 확대되며 전국계 철기문화 등이 공반된 채로 다른 지역으로까지 널리 확산된 것이다.(온돌 기원지 연구, 2021) 이러한 부뚜막 시설은 대체로 기원전 1세기 중반 한강유역에 와질토기 및 철기와 공반되는 형태로 처음 나타난 뒤 한반도 중남부 각지로 전파되는데,(이홍종, 부뚜막 시설의 등장과 지역상, 1993) 이때 이러한 취사-난방시설을 수용하는 양상 및 재지화 경향, 수용과 확산 정도는 지역별로 편차가 크며 지역별 변형도 많다. 예를 들면 재래 주거지 형태 속에서 이러한 부뚜막 시설 등이 나타나는 등 중부지역과 서남부지역에서는 재래민에 의한 주체적인 문화 수용 양상이 두드러진다.[123] 강봉원은 신라의 적석목곽묘와 그 부장품을 가지고 기마민족 남하설을 입론할 근거가 없다고 보고 있으며(신라 적석목곽분 출현과 기마민족 이동의 상관관계에 대한 재검토, 2013), 정호섭은 광개토왕-장수왕 시기 남진 과정에서조차도 고구려는 주로 점령한 지역에 간접지배-거점지배를 했을 뿐 고구려인의 한반도 남부로의 대규모 인구이동은 거의 없었거나 제한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남한지역 고구려 유적·유물의 현황과 과제, 2005)[124] 삼국시대 군산 옹관묘, 김해 대성동 고분이나 경산지역 임당-조영동 고분군 등에서 출토되는 기원후 4-6세기 인골 등은 대체로 현대 한국인과 유전적 구성이 거의 유사한 것으로 나타나 최소한 일본 고훈시대와 평행하는 한반도 삼국시대에 주민교체나 대규모 이주가 나타났다고 볼만한 증거는 없다.(#/ 정충원, 고인골의 총유전체 분석을 통한 한국인의 유전자 역사 연구, 2020/ 이돈녕, 삼국시대 한국인의 유전적 프로필과 혈연관계 분석, 2022)[125] 이때 Niall P. Cooke 등이 시도한 일본인의 삼중기원설 연구는 고훈시대 인구 이동이 한반도를 경유했음은 인정하지만 주로 이들을 중국 한족과 연관시키고 있다. 그러나 UNIST 연구진의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연구(Jungeun Kim 외, The Origin and Composition of Korean Ethnicity Analyzed by Ancient and Present-Day Genome Sequences. 2020)에서 중국인을 한국인, 일본인과 유사한 계통 그룹으로 묶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고대 한반도인의 영향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126] 다만 설령 Niall P. Cooke 등의 연구나 혹은 여타 유전학적 통설처럼 야요이나 고훈시대 전후 한반도를 통해 '동아시아 인종집단'이 일본 열도로 대규모로 이주했고 이것이 일본인 유전형질 형성에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라 할지라도, '일본사는 한국사의 연장'이라거나 '백제 등 한반도인의 식민지였다'와 같은 동북공정 식의 극단적인 주장은 전혀 성립할 여지가 없다. 조몬-야요이-고훈시대에 이르기까지 물질문화 및 생계구조에서 상당부분 연속성과 계승관계가 있다는 것이 일본 고고학계의 통설이라 적어도 최고 지배층에 한해서는 일본 열도 토착사회가 상당부분 연속성이 있다고 할 수 있고, 특히 이들 이주민들은 결국 한반도계 언어와는 상당부분 구별되는 고대 일본어를 받아들였다는 측면에서 일본 열도의 토착사회에 적극적으로 동화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당시 일본 열도의 고대국가는 한반도계 이주민의 많은 기여를 통해 형성되기는 했으나 이러한 토착문화 및 이주민 문화를 토대로 한반도 문화와 크게 구별되는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한 것이므로 이를 단순히 한반도 문화의 연장이나 변형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는 없다.[127] 물론 야요이문화에 기여한 여러 한반도 계통 이주민 집단 중 특정한 한 집단이 원시 한국어와는 이질적인 원시 일본어 사용자였고 이들이 일본 열도로 이주한 이후 한반도에서 소멸함으로써 한반도와 일본어의 언어환경이 분화하였을 가능성 자체는 여전히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128] 오원홍, 탐라 이전 송국리형 주거취락의 변화 양상 : 삼양동·용담동 일대 유적을 중심으로, 2018[129] 일반적으로 제주도의 '송국리형 주거지'라고 부르는 것은 주로 원형주거지라는 하나의 요소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박경민, 전통과 변화의 관점에서 본 제주도 원형 주거지, 2018) 어차피 점토대토기문화의 주거지 평면형태 자체가 원형이나 방형으로 일반화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으므로(구숙현, 원형점토대토기문화 취락의 특징과 의미 -중서부지역을 중심으로-, 2023) 결국 제주도는 점토대토기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130] 박경민, 전통과 변화의 관점에서 본 제주도 원형 주거지, 2018[131] 제주도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토기가 발견된 지역으로, 특히 한반도 신석기시대 초창기(B.C 10,000~6000)의 토기로는 제주도의 고산리식 토기가 유일하다. 그러나 기원전 6000년 경 신석기시대 조기가 개막된 이후에는 고산리식 토기는 계통적으로 단절되고, 한반도 남해안의 융기문토기문화로 대체된다. 이는 기본적으로 활동성이 강한 한반도 남해안 신석기시대 조기 주민들이 이주하거나 이들과 교류한 결과로 해석되며 이후부터는 남해안 토기문화권에 속하게 된다. 한편, 이 당시 한반도 신석기시대 조기의 융기문토기는 일본 조몬계 토기와는 기형, 문양의 시문기법, 형태가 완전히 다르다(강창화,제주 고산리 신석기문화 연구, 2007) 이후 제주도는 대체로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기문화와 궤를 같이 한다. 이 과정에서 육지에서의 이주 역시 상정되지만, 일정부분 재래 집단의 선택 역시도 제주 문화가 육지 문화와 차별화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동하였으리라 보인다.(박경민,제주 북서부 청동기시대 물질문화의 시간적 흐름과 성격, 2017) 예를 들면 제주도의 영선동식 토기는 육지에서 온 것이지만 제주도만의 특수성이 상당히 강하고(박근태, 제주도 영선동식토기 연구, 2011) 점토대토기와의 접변 이전의 송국리문화의 유행은 미진하다. 마찬가지로 제주도의 언어 역시 육지와의 지속적인 교류관계는 있었음에도 최소한 신석기시대 조기로부터의 보수성과 독자성이 상당부분 남아있었으리라 볼 여지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선 보빈의 논의 속 탐라어가 어느 시기의 유산인지를 고고학적 계통상으로 판가름하기는 대단히 어려워진다.[132] 송만영은 순수한 점토대토기집단의 취락으로 볼만한 흔적 자체가 거의 없는데다가, 원시타날문, 외반구연토기, 적색마연토기가 공반된 기원지의 유물복합체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133] 점토대토기 유입 이전 송국리문화의 이주는 소규모에 불과했거나 아니면 재지민이 송국리문화의 주거양식만을 수용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고, 그나마 이렇게 유입된 송국리식 주거문화는 이후 기원전 3세기에 들어서야 점토대토기와 함께 제주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김경주, 제주지역 점토대토기문화의 정착과 변천과정, 2018)[134] 보빈과 휘트먼의 가설에 근거하자면 건마국과 목지국은 일찌감치 한국어족으로 대체되었다고 보므로, 여기에서 향문천이 일본어족 집단으로 지목한 것은 침미다례에 한정된 이야기일 수 있다. 단, 백제-마한권역에서도 왜계묘제는 침미다례가 위치한 영산강 유역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공주-부여 일대에도 왜계 이주민들이 남긴 횡혈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김낙중, 백제(百濟) 횡혈묘(橫穴墓)의 특징과 의미에 대하여, 2019)[135] 보빈은 미오야마국을 위시하여 기원후 진-변한 일대에 오랫동안 반도 일본어족 집단이 잔존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진한어, 변한어는 모두 일본어족 계통의 선주민의 언어이고, 이후 3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점진적인 언어 교체를 통해 일본어족에서 한국어족으로 교체됐다는 것이다.(vovin, Cin-Han and Silla Words in Chinese Transcription, 2007) 가야지역의 왜계묘제는 창원, 고성군, 사천 등지에서 나타난다.[136] 향문천, 향문천의 한국어 비사, 2024, p.116.[137] 이러한 전방후원분의 피장자에 대한 가설은 왜인설과 재지수장설로 나뉘지만, 어느 쪽이든 백제 혹은 침미다례가 일본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증거로 사용될 뿐이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에는 너무나도 빈약하며 허점 또한 많다.[138] 김규운, 일본 기나이지역 초기 횡혈식석실의 출현과 도래인 문제, 2016 / 일본 九州地域 횡혈식석실의 도입 과정 검토, 2019[139] 김규정, 호남지역 청동기~초기철기시대 옹관묘 일고찰, 2022/ 김규정은 영산강 유역 옹관묘는 점토대토기의 유입 이후 자생적으로 나타나 영유아를 위한 이차장 묘제로 사용되다가 이후 성인 옹관이 만들어지며 해당 지역의 특징적인 옹관고분으로 발전했다고 본다.[140] 박영훈, 前方後圓形古墳에 對한 硏究, 2008 / 정기진, 전남 서부지역 전방후원형분 축조세력 검토, 2014 / 문안식, 백제 동성왕의 무진주 친정과 마한사회의 변화, 2017 / 김준식, 장고봉유형 사례로 본 창출계 왜계석실 유형설정의 재검토, 2021./ 특히 문안식은, 이 당시 왜계 묘제가 영산강 유역에 등장한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토착문화가 단절되고 왜계 문화 일색이 되었다거나, 왜인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명시하고 있다.[141] 박영훈, 前方後圓形古墳에 對한 硏究, 2008[142] 이 시기 북규슈 왜 집단은 영산강 유역 뿐 아니라 신라 및 가야제국과도 밀접한 교류관계를 가졌다. 물론 북규슈에 한정된 것으로 볼 수는 없고, 일본열도 전역에서 신라계, 가야계 문물교류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난다.(高田貫太, 日本列島 5, 6世紀 韓半島系 遺物로 본 韓日交涉, 2005)[143] 다만 이에 대해서는 영산강 유역과 북부 규슈 지역이 독자적으로 상호 교류한 것이 아니라, 각각 백제와 기나이 왜왕권과의 교역을 중계하는 교섭세력으로 기능하면서, 백제-왜왕권의 통제 하에 양자가 서로 밀접하게 교류한 결과로 성립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이 과정에서 상호간 인적 교류가 나타나면서 일본 열도에는 백제계 고분이, 영산강 유역에는 왜계 고분이 축조된다는 것이다.(김규운, 고분으로 본 6세기 전후 백제와 왜 관계, 2017)[144] 마찬가지로 삼국시대 한반도에 왜계 집단이 존재했음을 근거로 기원전 시기에 반도 일본어족이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논리 역시 성립할 수 없을 것이다. 상기 논의에서 보았듯, 삼국시대 왜계자료는 주로 역사시대 이후 여러 정치적 상황에 따른 한일 간 교류관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145] 예를 들면 청동기시대-초기철기시대 사이에 이주민들이 토착사회를 재편했다고 보는 조진선 등의 주장은 이 시기 한국어족에 의한 언어교체를 주장하는 반도 일본어설에 일정부분 개연성을 제공해준다.[146] 이는 초기철기시대 이주민의 규모가 그다지 대규모가 아니었을 개연성이 크고, 이러한 전환기적 양상이 과거에 생각했던 것보다는 그다지 극적이지 않으며 토착사회는 지속적이고 점진적으로 외래문화를 수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러하다. 조진선과 같은 재편론자들조차 송국리문화 단계 이래의 인구밀집지역에 역사시대 군현의 치소가 설치되며 계승되는 등(조진선-김수민, 고창-영광지역 마한 소국과 백제 군현, 2024) 토착사회가 초기철기시대에 이주민의 유입으로 대체, 소멸된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역사시대까지 계승, 지속된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이런 이유로 어떤 연구자는 이 시기 일부 이주민이 있었더라고 기존 사회를 해체할만큼 파급력이 크지 못했기 때문에, '삼한'이라는 정치체 자체가 송국리단계 토착사회가 외래문화를 수용하여 형성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전진국, 삼한의 실체와 인식에 대한 연구, 2017)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러 이주민의 유입으로 문화담당 주체가 교체되었다는 증거는 없다고 보아 이 시기 나타나는 여러가지 사회변화를 송국리사회 자체의 변동과정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송만영, 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 요컨대, 반도 일본어설에서 상정하는 바와 달리 이 시기의 고고학적 양상은 단순히 이주민의 유입으로 기존 사회가 해체되고 토착민들이 소멸, 정복되었다고 볼만한 근거가 없고, 나아가 이들 토착민이 소규모 이주민에 비해 열세의 입장에 있었는지, 아니면 이주민이 토착사회에 흡수되어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도 연구자에 따라 다양한 층위의 입장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 시기 언어교체가 나타났다고 볼만한 고고학적인 근거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147] 해당 주장은 한반도 중남부 일대에 분포권이 한정돼 있는 송국리문화를 일본어족의 기원으로 지목하는 반도 일본어설에 대한 반론에 가깝다. 송국리문화는 청동기시대 후기(혹은 중기)인 기원전 8-7세기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이후로는 한반도 중서부 일대가 검단리, 천전리 유형문화권과 생계경제 양상이나 물질문화가 뚜렷이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 이전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다른 지역과 물질문화상으로 그다지 뚜렷한 차이가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148] 한편, 청동기시대 전기 이후에 양자가 분리됐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한국어족과 일본어족의 차이를 감안할 때 언어학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이라고 지적한다.[149] Jangsuk Kim-Jinho Park, Millet vs rice: an evaluation of the farming/language dispersal hypothesis in the Korean context, 2020, 단, 이들의 연구는 반도 일본어설 자체를 전반적으로 다룬 것이라기보다는 반도 일본어설에서 가정하는 몇 가지 핵심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검토한 것에 가깝다.[150] 해당 논문에서 김장석 등은, 로비츠가 제시한 기장-조 언어 확산설 및 휘트먼이 제시한 세형동검 언어 확산설을 모두 기각하고 있으며, 이를 넘어 농경-언어 확산 가설 자체가 이 당시 한반도 상황에서는 잘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이를 적용할 때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 부연하자면 로비츠가 제시한 기원전 3500년 경의 기장과 조의 유입은 주로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계통의 토착주민들이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보이므로 언어확산의 계기로 보기가 어렵다고 본다. 한편으로 휘트먼이 한반도에서 첫번째 언어 확산의 계기로 제시한 기원전 1300년 경 벼농사의 유입에 대해서는 언어확산의 계기로 볼 수 있을만한 물질문화의 변화상이 분명히 나타난다고 본다.(이는 일본 열도의 야요이문화 형성기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이유는 이 당시 농경민들이 대규모로 이주한 뒤 자원을 배타적으로 점유함으로써 종래의 수렵채집계통의 빗살무늬토기 사회의 경제가 붕괴하고 벼농사 중심의 생계경제 양식으로 대체되었으며, 주거문화 및 물질문화 역시 전면적으로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휘트먼이 한반도에서의 언어확산의 두번째 계기로 제시한 세형동검의 유입 당시에는 그 이주 규모가 대규모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송국리문화는 인구가 밀집한 상태로 오랫동안 잔존하고 있어 이주민이 토착민을 압도했다 하기도 어렵다고 본다. 이 때 휘트먼은 벼농사와 함께 유입된 언어집단을 일본어족으로, 세형동검과 함께 유입된 언어집단을 한국어족으로 보았지만, 김장석 등이 고고자료를 검토한 결과로는 벼농사 유입을 계기로 언어확산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반대로 세형동검 유입을 계기로 언어확산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은 그다지 확실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151] 김장석은 해당 논문에서 한일 간 언어분화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따로 드러내지는 않는다. 다만 농경-언어확산 가설을 대신하여 빗살무늬토기집단과 조몬계 집단 간의 장기적인 교류관계나 기원전후 중국 군현을 매개로 한 한반도 철기교역 및 이에 근거한 정치체 간 네트워크의 재편과 같이 여러 다양한 사건들을 아울러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그가 도작농경민의 도래 이전의 신석기시대 한일 간의 교류관계를 거론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 그는 도작농경민이 각각 한반도와 일본에 이주했다고 해서 각 지역의 토착 언어가 이주민의 언어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어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 하다. 실제로 후술한 UNIST 박종화 교수는 동아시아의 유전적 변화는 유럽과 달리 단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며, 인종교체나 정복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보았는데,# 농경-언어 확산 가설은 반대로 주로 토착 수렵채집민이 절멸에 가깝게 사라진 유럽의 상황을 대상으로 한 이론이므로 이를 그대로 동아시아의 상황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김장석은 비록 도작농경의 유입 시기 일본이 마치 전면적인 언어교체를 상정할만큼 대규모 변화를 겪은 것은 분명히 고고학적으로 확인된다고 보지만, 이로인해 조몬계 언어가 완전히 대체되거나 사라졌다고 보는 농경-언어 확산 가설은 당시의 물질문화상과 모순되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언어 분화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152] #[153] #[154] Ahn S-M, Origin and Differentiation of Domesticated Rice in Asia, 1993 / 아시아 재배벼의 기원과 분화, 1999[155] 박종화 교수 역시 이들 후남방계는 정착농경을 했기 때문에 토착 선남방계(북방계) 수렵채집민보다 훨씬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156] 김장석은 이미 과거 연구(남한지역 신석기-청동기시대 전환, 2002)를 통해 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전환 과정이 마치 주민대체설을 상정할 수 있을만큼 단절적이고 극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청동기시대 전기에 이르러 도작농경이 급격히 유행하는 양상은 이전 신석기시대 주민들의 연속적인 적응의 결과로 해석하기 어렵고, 농경민 집단의 직접적인 이주로 인한 변화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그는 도작농경민들의 직접적인 이주 및 농경문화 확산으로 말미암아 토지에 대한 배타적 점유가 확산되자, 재래의 신석기시대 주민들은 자원집중처의 공유를 기반으로 하는 기존의 생계방식을 포기하고 이주민사회에 흡수된 것으로 본다.[157] 물론 한국인-일본인의 사례와 같이, 유전적인 거리가 언어적 거리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므로 박종화 교수팀의 연구가 휘트먼의 가설과 완전히 모순적인 결론을 냈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렇다면 반도 일본어설 측에서 도작농경민과 관련이 깊어 보이는 후남방계의 1차적 유입 이후에도 또다시 언어가 교체되었다고 보아야 하는 충분한 근거를 제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물론 K Miyamoto와 같이 동일 계통의 집단이 1000년의 차이를 두고 확산함에 따라 일본어-한국어가 분기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Kazuo Miyamoto, 2022) 이는 애당초 두 언어가 같은 어족에 속한다고 보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의 입장에서 입론된 것이다. 알렉산더 보빈과 반도 일본어설은 두 언어가 어족 수준의 차이가 있다고 보므로 이와 같은 설명은 반도 일본어설에서는 성립하기 어렵다.[158] 또한 보빈이나 휘트먼은 일관되게 일본어족을 농경민으로, 한국어족을 수렵채집 내지 유목집단으로 묘사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한국어족으로 간주하는 집단은 신석기시대 이래의 수렵채집집단을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그렇게 본다면 박종화 교수팀의 연구와도 크게 상충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작 한국 도작농경은 산동반도-요동-서북한을 거쳐 한반도 중서부지역으로 전파된 것이며(조현종, 한국 초기 도작문화 연구, 2008), 청동기시대 전기에 이르러 한반도 중남부는 나중에 고조선의 기층문화 중 하나로 여겨지는 쌍타자-마성자 문화의 직접적인 이주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천선행, 청동기시대 조기설정 재고, 2015) 그리고 이와 거의 동일한 교역망을 통해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이 차례로 한반도 중서부일대로 전파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도작, 비파형동검의 유입과 세형동검의 유입을 유독 다르게 보아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동일한 관계망을 통해 인적 집단의 이주와 문화 전파가 이루어졌는데, 그 중 특정 문화의 담당주체만을 이와 계승관계에 있는 그 이전의 문화 담당자와 유전적인 측면에서 전혀 이질적인 인류집단일 것으로 가정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도 일본어설은 이런 부분에 대한 해명 역시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어떻게 청동기시대 농경민의 유입 이후에도 본디 한반도와 그 인근에 거주하던 신석기시대 수렵채집민 집단이 여전히 이질적인 언어를 유지한 채 잔존하다가 갑작스럽게 세형동검문화를 구성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해명이 필요할 것이다.[159] 휘트먼의 논문에서는, 기원전 3세기 시점의 한반도 및 요령지역의 집약농경의 일시적 이완을, 두 지역에서 나타나는 세형동검과 연관시킴으로써 세형동검집단이 특히나 이질적이고 유목적 성향이 강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근래의 편년에서 한반도에 나타나는 세형동검의 연대를 기원전 5세기까지 올려보는 견해도 강한데다, 한반도 송국리문화의 쇠퇴는 이미 송국리 문화가 최전성기를 맞이한 기원전 7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송만영, 중부 지역 점토대토기 사회에 대한 다른 인식, 2019 ) 즉, 이러한 집약농경의 이완 기조는 기후변화나 혹은 사회적 갈등 및 긴장의 증가라고 하는 내적이고 연속적인 변화에 가까울 뿐 유목성향이 강한 이질적인 세형동검집단의 갑작스러운 등장에서 그 이유를 찾는 것은 어색하다. 송국리단계의 복합사회는 집약농경을 뒷받침하는 정치적 조직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에(Bumcheol Kim, Rice Agricultural Intensification and Sociopolitical Development in the Bronze Age, Central Western Korean Peninsula, 2005) 송국리사회의 이완, 쇠락화가 집약농경의 쇠퇴 및 혼합경제 양식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은 전혀 신기한 일이 아니며, 유독 유목성향이 강한 이질적인 종족이 유입된 결과로 볼 여지가 없다. 오히려 이러한 일시적 이완기를 제외하면 이 시기에서 삼한시대에 이르는 상황은 오히려 벼농사가 보다 더 집약화되는 시기로서 평가된다.(조현종, 한국 초기 도작문화 연구, 2008)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언급된 김장석, 천선행 등의 입장에 근거하자면, 이러한 송국리유형의 취락의 해체 자체가 편년오류에 근거한 착시효과일 수도 있다. 즉, 애초에 일부 대형취락의 해체 이외에 송국리 재래사회가 그다지 큰 충격을 받은 적조차도 없다는 것이다.[160] 해당 사실은 2024년 도쿄대 연구팀이 진행한 유전체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로 안도 패총 인골에서 상당한 수준의 동아시아계통의 형질이 나타나는 것으로도 재확인된다.# 신석기시대 전기를 전후한 무렵의 동아시아계통 주민들의 이입은 서속류 및 초기농경의 확산과 함께 이루어진 것일 수 있다.[161]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과 관련해서도 국내 연구자인 장우순과 문치웅이 이를 비판한 논문이 존재한다.(‘트랜스유라시아어의 요서 기원 가설’에 대한 비판적 검토, 2022) 이에 따르면 요서-한반도-일본 열도 사이에 유전적, 고고학적 연관관계가 존재한다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입증되지 않았음에도 트랜스유라시아어족은 지나친 비약을 통해 이들 광범위한 집단 사이의 언어적 연관관계를 무리하게 설정했으며, 때로는 여러가지 유전학, 고고학적 오류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로비츠의 논문(Triangulation supports agricultural spread of the Transeurasian languages, 2021)에서는 신석기시대 한반도 남부의 인종집단은 홍산문화와, 일본 야요이인은 하가점 상층문화와 유사한 계통으로 이해하여 마치 하가점 상층문화인들이 요서로부터 일본 열도로 이주함으로써 일본어가 퍼져나갔다는 논리(즉, 트랜스유라시아어의 원향인 요서에서 발원한 인구집단이 신석기시대 조-기장의 전파 이후 2차로 요동 등지에서 쌀을 가지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이주했다는 것)를 내세우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 홍산문화와 하가점 상층문화인들은 유전적으로 매우 유사한 형질에 속하기 때문에 이러한 구별 자체가 지극히 작위적이며, 이를 가지고 요서지역 인구집단이 도작을 가지고 일본열도로 이동했음을 입증할 수는 없다는 것이 장우순 등의 지적이다. 이때, 로비츠 등이 제시한 도표에서도 하가점 상층문화인들은 북아시아 계통인 악마문 동굴인의 형질이 강하게 나타나고, 해당 논문 안에서도 홍산문화와 하가점 하층문화 모두 황하유역 및 아무르유역 인종의 혼합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직접 언급하기도 한다. 또한 장우순 등은, 해당 논문의 고고학 측 연구진 중 하나인 리타오가 이전 연구에서는 오히려 서요하 분지와 요동 및 한반도와의 연결이 오히려 약한 편이라고 결론 내렸으나, 로비츠 등의 연구에서는 이를 정반대 관점으로 인용함으로써 사실상 이 연구는 고고학, 유전학, 언어학적 관점이 제각기 서로 다른 결론을 가리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기도 하다.[162] 사실 로비츠의 논문 속 유전분석자료에서 야요이-한반도 신석기인-홍산문화-악마문 동굴인이 유전적으로 상당히 유사하게 나타나는 것은 Niall P. Cooke 등의 일본인 삼중기원설 연구에서 야요이문화가 북아시아 계통에 가까운 집단의 이주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과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분석이지만 로비츠의 논문에서는 하가점 상층문화 계통 주민들이 요서에서 일본 열도로 직접 이주했음을 입증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유전체 분석결과를 오용하고 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만약 이미 신석기시대 한반도에도 하가점 상층문화인과 비슷한 유전적 조성을 가진 집단이 거주했다면, 도작의 전파나 야요이문화의 성립은 '요서계통 인구집단의 이주'가 아니라, 이미 이전부터 한반도에 거주하고 있던 북아시아 계통 신석기인들이 도작을 습득하여 일본 열도로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좀 더 자연스러운 해석일 수도 있는데, 로비츠 등의 연구는 요서-한반도-야요이 간의 이주 및 도작의 전파라고 하는 도그마에 사로잡혀 논리적 비약을 저지른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Niall P. Cooke 등의 연구 역시 고대 인류의 이동과 확산을 보여주는 qpAdm 분석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고대인류가 아닌 현대 중국인을 그 표지로 사용하는 등 방법론 측면에서 비판을 받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 역시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163] 한편, 장우순, 문치웅 해당 논문에서는 휘트먼의 주장 역시 무문토기-야요이문화를 각각 도작과 일본어 확산과 연루짓는다는 점에서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과 비슷한 부류의 선행논의로 언급되고 있고, 알렉산더 보빈의 경우에는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이 언어학적으로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주장하는 맥락에서 알타이어 어족 가설의 대표적인 반대자의 사례로서만 언급될 뿐이다.[164] Kazuo Miyamoto, The emergence of ‘Transeurasian’ language families in Northeast Asia as viewed from archaeological evidence, 2022 / 미야모토는 일본 내 농경 확산 과정에 대한 많은 연구를 제시하고 있는 학자로 연구 주제상 한국 고고학의 담론에도 어느정도 익숙하며, 점토대토기의 출현이 (소규모) 이주민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한국 고고학계에서도 다수설이기는 하다. 또한 K Miyamoto가 일본어족(청동기시대 주민집단)과 한국어족(점토대토기 집단)이 유사한 계통의 집단이라고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고고학계 역시 청동기시대 한반도 중남부의 주민집단의 문화와 초기철기시대 점토대토기-세형동검 계통의 문화가 상당히 유사한 계통에 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본문에서 보았듯이 근래에 들어서는 이러한 점토대토기-세형동검 문화집단의 이주와 초기철기시대 사회문화적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이며, 이 시기의 문화접변에 있어 토착민의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가 상당히 늘어났는데도 그의 연구에 이 점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부분은 다소 아쉽다고 할 수 있다.[165] 참고로 K Miyamoto와 반도 일본어설 모두 한반도 중남부에 한 때 일본어족이 살았다고 본다는 점에는 공통적이지만 그 맥락은 전혀 다르다. 미야모토가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의 지지자인데에 반해, 알렉산더 보빈은 알타이어족 가설 및 그 후신인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에 대한 대표적인 비판자이며, 반도 일본어설 역시 한국어와 일본어가 전혀 다른 기원에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다. 미야모토는 두 언어가 모두 요서 동편의 동일한 지역에서 기원하여, 약 천 년의 시차를 두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언어로 분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먼저 분기하여 확산된 집단이 일본어족이어서 한반도 남부를 지나 일본까지 확산되었고, 뒤이어 온 집단은 한국어족 화자여서 이들이 한반도 중남부의 언어를 대체했다는 입장이다. 그가 제시하는 한반도 중남부 언어 대체설, 주민교체설 그 자체가 한국의 고고자료 양상에 그다지 잘 부합하지 않기도 하지만 미야모토는 한국어와 일본어가 동일한 트랜스유라시아어족에 속해 있다는 가정 하에 이러한 논지를 편 것이므로 두 언어 간의 언어학적 거리에 대한 입장이 반도 일본어설의 가정과는 전혀 다르다. 트랜스유라시아어족 가설 역시 언어학적인 측면에서도 비판받는 부분이 많은만큼 K Miyamoto의 입장 역시 반도 일본어설과 마찬가지로 비판의 여지가 없는 확고한 정설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166] 애당초 과거 이 시기 단절론이 성행했던 이유 중 하나가 점토대토기와 세형동검을 하나의 유물세트로 본 것이었는데, 실제로 이들 문화가 한반도로 전래된 것은 상당한 시차가 있다는 점이 밝혀지자 이러한 이주에 의한 문화전파론이 상당부분 후퇴한 것이다.[167] 김장석, 호서와 서부호남지역 초기철기-원삼국시대 편년에 대하여, 2009[168] 근래의 유전학의 발전으로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국 신장지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2000년 경 무렵의 타림분지 집단에 대한 연구가 바로 그 예시이다. 본래 통설에서는 타림분지에서 발견된 미라의 외모가 서구적이라는 점, 목축과 관계된 문화요소가 발견되는 점을 근거로 유럽의 유목민이 이주하여 타림분지인들의 문화를 형성했다는 가설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타림분지 미라의 유전체를 분석한 결과, 이주민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오히려 플라이토세 말엽부터 계속해서 현지에서 거주해온 이들이 외래 문화를 수용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169] 이 문제는 한국 고고학계의 근래의 입장이 외국 언어학계에 충분히 전달되지 못한 데에서 따른 것으로 보인다. 휘트먼은 한국 신석기시대사 및 동아시아 농경 확산 연구에 있어 권위자인 안승모로부터 '고고학으로 본 한민족의 계통(2003)'을 추천받아 이러한 논의를 정립한 것으로 보이는데,# 해당 논문은 2003년에 발표되어 2000년대 중후엽부터 활발히 이루어진 점토대토기문화와 송국리문화의 공존, 접변 양상에 대한 학계의 풍부한 논의가 담기지 못했다. 안승모 역시 휘트먼의 논의가 지나치게 물질문화상을 단순화한 것으로 비판의 여지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덧붙여, 안승모의 해당 논문에서도 "고고학으로 볼 때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한반도로의 주민 이주는 같은 환발해권 내의 요령지역에서 이루어진 것일 뿐이다"라고 언급하여, 초기철기시대 한반도로의 인구집단의 이주가 있었더라도 이 시기의 이주민을 전혀 이질적인 계통의 집단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김장석의 비판논문 이후 언어학 문헌들에서는, 고고학자로서 김장석이 각각의 언어학적 가설에서 상정하는 고고자료의 변화를 검증한 것을 마치 김장석이 특정한 언어학 가설을 지지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도 많은 듯 하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그는 단지 여러 언어학 가설이 물질문화상과 모순되는 측면이 있다는 점만 지적할 뿐 구체적인 언어 확산모델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단지 귀류법에 가깝게 농경-언어 확산 가설 모형에 근거한 휘트먼과 로비츠의 논의를 고고학적으로 검토하고, 이것이 결국 모순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이러한 오해와 관련해 고고학계의 입장이 충분히 해명되면 언어학 및 고고학 간의 간극도 상당부분 해소되리라 보인다.[170] 인도 아대륙이나 발칸반도의 언어들, 현대 한국어와 현대 일본어, 그리스어와 튀르키예어, 스웨덴어와 핀란드어,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가 이런 사례이다.[171] 만약 고대 로마인들에게 변방의 야만족이었던 고트족이 로마인들과 동류라고 말한다면 로마인들 입장에서는 피꺼솟할 것이다. 애초에 고대 로마인도 이탈리아 반도 통일 이전에는 하나의 로마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시피 했다.[172] 이들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만주에 있었던 고대 국가들은 죄다 만주족(퉁구스계)의 역사이며, 중국사로 편입해야 함을 역설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사는 삼국시대 기준으로는 신라로 축소된다. 그런데 정작 이들의 조상인 청나라 지배층들은 만주원류고에서 신라만 자기들의 기원으로 끌어다 쓰려고 했다.다만 이들도 중화민족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데에는 부정적이다.[173] 매우 일관적으로 명백하게 퉁구스어족과는 다르다고 하는 데다 무엇보다도 풍부한 만주어 및 여진어 사료가 남아 있어서 간간히 남은 고구려어 단어들과의 차이점도 이미 상당히 드러나 있다.[174] 흔히 대중적으로는 야요이문화에 형성에 기여한 한반도계 이주민을 '한반도 야요이인'이라 부르는 등의 정체불명의 지칭이 유행하기도 하는데, 실상 야요이문화가 송국리문화나 점토대토기문화와 같은 한반도계 문화의 많은 영향을 받았을지언정 야요이문화 자체가 특정한 한반도계 문화 그 자체이거나 그 연장인 것은 아니다. 즉, 일본 열도에서 야요이문화가 형성되기 이전의 한반도에는 야요이인이 존재하지 않았다. 단적으로 야요이식 토기만 해도 한반도 무문토기와의 영향관계는 있을지언정 한반도 토착 토기의 기형과는 다른 점도 많으며, 특히 야요이 조기의 유우스식 토기는 흔히 야요이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진 송국리문화보다는 청동기시대 조기의 각목돌대문토기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등 다양한 계통의 한반도 토기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오히려 송국리식 토기는 재지계 토기와 공반되어 소량으로 출토될 뿐이다. 이처럼 고고학에서는 계통상 연관관계나 영향관계를 인정하더라도 단순히 이런 연관관계만을 가지고 거꾸로 기원지의 문화나 종족을 이주지의 그것과 동일한 계통으로 단순화하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느 문화요소의 기원을 다른 지역에서 찾을 수는 있어도, 이러한 문화가 확산된 지역의 문화는 토착민과 이주민의 교류, 토착민에 의한 선별적인 문화선택, 기후나 환경 조건에 따른 적응과 같은 다양한 요인에 의해 그 양상이 변화할 수 있다. 또 문화 전파가 직접적인 대규모 이동으로만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 역시 유의해야 한다. 송국리문화는 한반도 중남부 대부분의 지역에 확산되었으나 이 역시 초기 기원지인 금강하류역의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확산된 것만은 아니므로 송국리문화를 마치 어떤 동질적인 종족집단인 것처럼 간주하는 것도 명백한 오류이다. 요컨대, '야요이인'이나 '야요이문화'는 한반도 청동기시대 문화를 가지고 일본으로 이주한 집단이 일본 현지의 환경 상황과 토착민과의 교류 및 상호 결합을 통해 형성된 제 3의 새로운 종족이거나 문화이지 단순히 특정한 한반도계 문화의 연장이 아니며, 거꾸로 한반도에 야요이문화 및 야요이인이 거주했다는 서술 역시 명백한 오류이다. 端野晋平 등이 저술한 '수작농경 개시 전후 한일교류론의 諸문제 : 송국리문화와 야요이문화의 형성(2010)'에서도 중서부 일대에서 기원한 송국리문화가 한반도 내부에서 많은 재지적 변용을 겪은 뒤에 규슈지역으로 전파되었으며, 일본 열도에서는 이러한 여러 한반도계 문화요소를 흡수한 뒤 그 역시 나름의 재지적 변용을 통해 독자적인 새로운 문화로서의 야요이문화를 창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175] 다만 한반도가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으로 정립되고, 일본 열도가 야마토로 점차적으로 통일되기 이전까지는 한반도든 일본 열도든 간에 하나의 단일국가로 통합되지 않았다. 요동과 한반도에서 고조선과 부여처럼 종주권을 지닌 강한 나라가 있었기는 했으나, 중앙집권화 되기 이전의 연맹왕국 단계였기 때문에, 한 나라 안에서 여러 종족들이 공존하였다. 부여만 해도 읍루라는 문화와 언어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 존재했다. 따라서 설령 반도 일본어설이 사실이라면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밀려났다기보다는, 이합집산이 수백 년간 지속되면서 주도권을 잡은 한국계 종족들이 일본계 종족들을 점차 언어적으로 동화시켜 나간 과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같은 시대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조몬인, 한국계, 일본계, 중국계의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일본 열도의 언어가 점차 일본계 언어로 통일되는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과 일본인이 어족의 뿌리는 다름에도 유전적으로 매우 흡사한 건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176] 한편, 일본인의 문화적 기원 및 혈통적 기원이 한반도계 이주민이라는 것은 이미 고고학, 유전학적으로 명확히 검증된 사실이기 때문에 딱히 반도 일본어설이 이러한 주장을 더 강화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반대로 반도 일본어설이 기각되더라도 한반도계의 문화적, 혈통적 영향이 부정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치 반도 일본어설에 동조하지 않으면 이런 한반도 도래설을 부정하는 주장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177] 최성락, 전방후원형 고분의 성격에 대한 재고, 2004 / 고고학자 강인욱 역시 기마민족 남하설이 가야가 일본의 남선경영의 거점이었다는 주장의 연장선상에 있는 가설로서 변형된 임나일본부설의 일종임을 단편적으로 언급하고 있다.#[178] 물론 임나일본부설과의 연관성 여부를 떠나서 기마민족 남하설 자체는 고고학적 실증 근거가 전무하여 현재는 한일 학계에서 모두 사장된 학설이다.[179] 에가미 나미오의 가설에서는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열도로 이동한 것으로 보았던 반면, 보빈은 그 논의의 일부만 따와서 기마민족이 한반도에 남하했다는 주장에서 그쳤다는 점에서 양자의 차이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보빈 등이 아무런 고고학적 실증 근거도 없고, 한일 고고학계 어디에서도 진지하게 논의된 적도 없는 '기마민족의 한반도 남하'에 대한 논의를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차용했을지는 명약관화하다. 사실 언어학계에서는 오랫동안 이러한 기마민족 남하설에 근거하여 고대 한국어가 한어와 부여어(고구려어)의 이중 기원을 갖는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힘을 얻었으며, 고구려어-일본어 동계어설도 사실 이러한 기마민족 남하설의 논리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보빈은 이러한 언어학계의 통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나, 다만 방향만 바꾸어 고구려어와 일본어의 연관관계가 아니라 한반도 남부 언어와 일본어의 연관관계를 주장하는 쪽으로 논의를 편 것이 바로 반도 일본어설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반도 일본어설은 기마민족 남하설-고대 한국어 이중기원론에 근거하고 있는 전통적인 언어학적 패러다임을 상당부분 계승하고 있는 학설이라 할 수 있다.[180] 상기 단락에서 다룬 바 있듯, 언어학 유튜버 향문천은 본인의 저서에서 기원후 5-6세기에, 토착 묘제와의 어떤 계통적 연관성 없이 남해안 일대에서 돌연히 등장한 전방후원분을 이 당시 한반도 남부에 토착 일본어족 집단이 계속해서 거주했음을 보여주는 근거로 오용한 바 있는데, 이러한 주장 역시 반도 일본어설이 왜인 한반도 남부 지배설과 연결되는 전형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181] 켈트어군은 대륙에서 발생 후 영불 해협을 지나 브리튼 제도와 아일랜드로 전파되고 막상 대륙에서는 기층언어만 남기고 흡수소멸했다. 보빈의 주장에 따르면 고 일본어군은 대륙에서 발생 후 대한 해협을 지나 일본 열도로 전파되고 막상 대륙에서는 기층언어만 남기고 소멸했다.[182] 갈리아어 영향으로 숫자 세는 법이 굉장히 특이해졌다.[183]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이러한 언어 대체 현상이 모든 지역에서 일괄적으로 동일한 양상으로 일어난 것도 아니고, 주로 로마제국이라는 고도의 국가단계에서 나타난 현상을 국가가 형성되기 이전의 상황인 조몬-야요이 전환기나 한반도 청동기시대 말기의 상황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춤분한 검증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인간 집단의 이동과 언어 변화 양상은 마치 어떤 과학법칙처럼 한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 반드시 다른 지역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없다. 만약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상황에서 이러한 일방적인 언어 대체가 나타난다는 주장을 입증하고자 할 때에는 단순히 해당 지역으로 인구 이동의 가능성이나 외래 문화의 유입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나마 한반도 및 일본열도에서의 정주농경의 확산 과정에서는 각각 이전 시기와의 문화적인 단절이 나타나는 것은 확인되지만, 그 이외의 시기에는 비록 부분적인 외래계 문화요소의 전파는 있었을지언정 급격한 문화적 단절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184] 대중적으로는 마치 '한반도 야요이인이 토착 조몬인을 정복했다'는 식의 괴상한 명제를 주장하는 경우도 많이 보이는데, 앞선 각주에 언급했듯, 야요이문화가 한반도 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을지언정 '한반도 야요이인'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이들이 조몬인을 정복했다는 증거도 없으며, 오히려 야요이시대 극초기 상당한 시간동안은 오히려 전쟁의 흔적 자체를 찾아볼 수 없다. 대체로 대륙 켈트어가 로망스어로 대체된 것은 로마제국의 무력 정복과 확장의 결과이지만, 조몬시대-야요이시대의 전환이 그러한 복합사회 단계의 '전쟁'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는 근거는 딱히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조기 야요이문화부터 조몬문화의 강력한 영향만 확인되고 있을 뿐이다.[185] # #2 해당 링크는 국편위에서 발행한 '한국문화사'와 '신편한국사'의 본문이다. 여기에는 과거 논의된 신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주민교체설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이 나와 있다.[186] 물론 '전방후원분을 한국 학계가 은폐하려한다'는 식의 음모론이 한국 인터넷 상에 널리 퍼져 있는 것처럼, 비교적 대중들 사이에는 한일 간 인적 교류의 측면이 잘 알려져 있지 않거나 한쪽 일방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형식으로 왜곡된 채로 알려진 부분은 있다. 그러나 학계의 차원에서는 이미 한일 학계가 이러한 쟁점들을 충분히 공유하고 논의한 사안이지 딱히 감추려거나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잘만 논의되는 주제 중 하나다. 전방후원분만 해도 일본 고고학계, 사학계에서조차 이를 임나일본부설과 연결짓지 않는다. 즉, 고대 한일 인적 교류관계에 대한 대중적인 몰이해와는 별개로 한일 학계는 이런 많은 예민한 논점들을 충분히 공유하고 상당부분 이에 대한 합의안을 만들어왔다.[187] 한편,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도 한일학계 모두 야마토왕권의 남선경영설과 관련한 통치기구로 보는 입장은 존재하지 않고, 주로 안라회의나 사비회의와 관련한 외교사절로 보는 입장이 우세하다.(위가야, 540년대 ‘사비국제회의’와 한반도 남부 정세, 2020) 물론 양국 학계가 각자의 통설을 고집하거나 국가적 자존심 때문에 흔쾌히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이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대중들의 인식에 비해서는 양국 학계가 큰 틀에서 한일 관계사에 관해 유사한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188] 근래에는 전면적인 이주, 정복, 학살로 인해 선주민, 토착민이 현재의 일본인, 한국인과 아무 상관없다는 극단적인 관점은 그다지 통용되지 않고, 이주가 있었더라도 소규모로 이루어졌다던가, 상당부분 대규모 이주가 있었더라도 어느정도 토착민의 흔적이 상당부분 잔존하고 있다고 보는 측면이 강하다. 이는 단순히 양국의 정치적 감정이나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입론된 것이 아니라 충분한 고고학적, 인류학적 근거를 두고 입론된 학설들이다.[189] 물론 중국어와 연관이 있다는 소리는 아닌데, 중국어(파)는 선사시대에 그다지 넓지 않은 지역에서 쓰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본래 고대 중국 동남부에는 크라다이어족 등이 넓게 분포해있다가 중국어가 확장되면서 기층(substrate)언어로써 동화되어 사라졌다는 것이 정설이다.[190] 『고구려어 - 일본을 대륙과 연결시켜 주는 언어』 참조.[191] 계림유사에서는 도끼를 烏子蓋(오자개)라고 기록하였으나, 鳥(조)의 오자다. 이렇게 하면, 15세기 국어 '돗귀'와 鳥子蓋(teu t͡sɨ kɑi)의 발음이 비슷해진다. 이로 미루어 보아, 烏斯含(오사함)이 아닌, 鳥斯含(조사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중세 한국어 형태의 '톳기'와 한층 발음이 비슷하다. 뿐만 아니라 다름아닌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鳥를 烏로 잘못쓴 듯 보이는 사례들이 여럿 있다. 가령 현 이름들 중에 猪足(저족)은 烏斯迴(오사회), 猪䢘穴(저수혈)은 烏斯押(오사압)에 해당하는데, 여기에서 烏斯에 猪가 대응됨을 알 수 있다. 이 때 烏를 鳥의 오기로 보면 鳥斯(teu sie)가 되므로 돼지의 고어형 '돋', 방언형 '돗'과 비슷하고, 鳥斯含에서의 발음과 일치한다. 그러나 烏斯를 '우사기'에 착안해 '우사'로 읽는 경우 이렇게 일관된 설명이 어렵다. 상대 일본어로 猪에 해당하는 단어는 발음이 전혀 다른 '위(ゐ)'이기 때문이다.[192] 탐라어의 계통과 관련해서는 일본어족설 외에도 오스트로네시아족설, 몽몐어족설, 크라다이어족설, 조몬인 계통설, 니브흐어설 등이 존재한다.[193] 단, 이 역시도 아무런 고고학적인 근거는 없는 추측이다. 일본열도의 조몬계 토기와 한반도계 융기문토기, 빗살무늬토기 등은 이미 신석기시대 초엽부터 형태 상 명확한 차이가 나타난다. 기원전 6000~2000년 사이에 형성된 한반도 신석기시대 유적인 동삼동패총에서는 일부 조몬토기가 나타난다던가, 일본 규슈와 혼슈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나타난다던가 하는 식으로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에 교류관계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나, 양 지역의 토기 계통과 발달과정은 아주 명확하게 구별되므로 동일한 종족성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없다. 이 때,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문화권과 조몬문화권 간의 교류관계에 대해서는, 하인수(신석기시대 한일 문화교류와 흑요석, 2006)가 자세히 다룬 바 있는데, 해당 논문에서는 양 문화권의 활발한 상호관계에 대해 다루고 있으나, 동시에 한반도의 조몬계 토기와 일본 열도의 빗살무늬 토기가 각 지역에서 외래계 토기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194] 켈트어파가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과거 이베리아 반도와 갈리아는 켈트계 언어가 널리 쓰이는 지역이었으나 로마의 확장으로 인해 라틴어가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되었고 현대의 로망스어군으로 이어진다. 로마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브리튼섬과 아일랜드섬으로 켈트어 화자들은 이주했고 다시 대륙으로 건너간 브르타뉴어 화자를 제외하면 켈트어파는 유럽 대륙에서 쓰이는 것이 아니라 섬에서 쓰인다. 라틴어를 한국어, 켈트어를 일본어로 등치시키면 이해가 될 것이다.[195] 다만 한국인의 기원에 대한 게놈분석 연구를 진행한 UNIST 박종화 교수는 유럽의 인류집단의 이동은 주로 농경민들이 수렵채집집단을 정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현재는 고대 수렵채집민의 흔적을 거의 찾기 어려운 데에 반해, 동아시아 및 한반도에서는 농경 관련 인류집단(후남방계)이 신석기시대 인류집단(선남방계)보다 늦게 대규모로 유입된 것 자체는 사실이라 할지라도, 신석기시대 주민들의 유전적 영향 역시 뚜렷이 남아있어 정복과 인종교체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어렵다고 본다.# 물론 유럽이나 다른 지역의 상황을 참고하여 한반도 주민집단의 유전적, 언어적 특성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지역의 사례를 무비판적으로, 그리고 또 일괄적으로 적용하고자 하는 시도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구이동은 마치 어떤 자연적인 물리법칙처럼 언제, 어디에서나 동일하게 일어났다고 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