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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d164a><colcolor=#ffc224> 본명 |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 James Earl Carter Jr. | ||
출생 | 1924년 10월 1일 ([age(1924-10-01)]세)[1] | ||
조지아 주 플레인스 와이즈 요양원 (現 조지아 주 플레인스 릴리안 G. 카터 간호 센터) | |||
사저 | 조지아 주 플레인스 우드랜드 드라이브 29 | ||
재임기간 | 제39대 대통령 | ||
1977년 1월 20일 ~ 1981년 1월 20일 | |||
서명 | |||
링크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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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여동생 글로리아 카터[2], 루스 카터[3] 남동생 빌리 카터[4] | ||
배우자 | 로잘린 카터 (1946년 결혼 ~ 2023년 사별) | ||
자녀 | 장남 잭 카터 (1947년생) 차남 칩 카터 (1950년생) 삼남 도넬 카터 (1952년생) 장녀 에이미 카터 (1967년생) | ||
학력 | 플레인스 고등학교 (졸업) 조지아 사우스웨스턴 주립대학교 (공학 / 편입) 조지아 공과대학교 (편입) 미국해군사관학교 (B.S.) 유니언 칼리지 (비학위과정) 호서대학교 (명예박사) | ||
종교 | 개신교 (침례회)[5] | ||
신체 | 키 177cm[6] / 체중 70kg / A형[7] | ||
소속 정당 | |||
군사 경력 | |||
임관 | 미국해군사관학교[8] (1946년 임관) | ||
복무 | 미합중국 해군 | ||
1946년 ~ 1953년 | |||
최종 계급 | 대위 (미합중국 해군) | }}}}}}}}} |
백악관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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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9대 미국 대통령 취임 선서[9] |
본래 "제임스 얼 카터 주니어(James Earl Carter Jr.)"라는 풀네임을 가지고 있으나, 일반 대중들을 대상으로는 애칭인 지미(Jimmy)를 써서 통칭 "지미 카터"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서명을 하거나 선서를 할 때도 이 이름을 사용했다.[11] 덕분에 다른 제임스라는 이름을 가진 대통령과는 확실히 구분되기도 한다.
역대 민주당 소속 대통령 중 유이하게 재선에 도전했음에도 단임으로 그친 대통령 가운데 한 명이다.[12] 1976년 대통령 선거에서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수렁에 빠진 공화당을 꺾고 8년 만에 민주당 정권 재창출을 이루었고, 재임 중 도덕주의 외교, 볼커 쿠데타라 불리는 연준의 초고금리 정책, 가정폭력청 및 연방 교육부 신설, 캠프 데이비드 협정 등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재임 기간 내내 경제 지표가 안좋았고 주 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에서의 미흡한 대응으로 지지율이 하락해 로널드 레이건에게 4년만에 정권을 넘겨줬다.[13]
퇴임 이후에는 "사랑의 집짓기" 등 여러 자선활동에 참여하고 비공식적인 외교 활동으로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등의 행보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에 대한 공로로 2002년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는 처음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14] 이를 두고 지미 카터를 "최고의 전직 대통령"이라고 농담삼아 부르기도 한다.
현대 대통령 중 재임 기간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했고, 심지어 재선 출마를 위한 당내 경선에서도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거센 도전을 받았다.
퇴임 후 대통령으로서의 평가도 좋지 못한 편이다. 부족한 정치 경험으로 재임 기간 내내 민주당이 통제하는 의회와 갈등을 빚었고, 미숙한 인사 처리로 인하여 백악관 내에서도 권한 분쟁이 잇따랐다.[15] 여러모로 1970년대 후반의 혼란스러운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처리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다만 최근에는 폴 볼커 연준의장의 정책이나 친환경 에너지 지원 정책, 여성인권 신장, 평등권(ERA) 입법 등에서 제한적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며 평가가 올라가는 추세이다. 한편으로는 카터 본인의 부족한 정치 경험으로 인해 러닝메이트였던 월터 먼데일 부통령에게 여러모로 컨설팅도 받고 많은 권한을 위임했는데, 이것이 현대 미국 부통령의 권한과 역할의 시초가 되는 매우 큰 정치사적 영향을 남겼다.
2. 약력
- 1963년. 조지아 주 의회 상원의원
- 1971년 1일. 제76대 조지아 주지사 (1971.1.12.~1975.1.14.)
- 1977년 1일. 제39대 미국 대통령 (1977.1.20.~1981.1.20.)
- 1999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훈
- 2002년. 노벨 평화상 수상
- 2007년. 제49회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낭독 앨범상 수상
- 2016년. 제58회 그래미 어워드 최고의 낭독 앨범상 수상
3. 생애
자세한 내용은 지미 카터/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1. 최장수 전직 대통령
2023년, 부인 로잘린 카터의 장례식에 참석한 지미 카터 (당시 99세) |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하고 있는 대통령이기도 하다. 단순 최장수를 넘어서 역대 최장수 대통령 기록을 경신했던 이전 대통령들의 수명(90~94세)보다도 5살 이상 압도적으로 길다. 2018년 1월 29일에 로널드 레이건(93년 120일)의 기록을 넘어섰고, 같은 3월 6일에 제럴드 포드의 기록(93년 165일)을 넘었다. 조지 H. W. 부시(94년 171일)가 11월 30일 사망한 뒤인 2019년 3월 22일 이후로 아버지 부시의 기록도 넘었으며, 2019년 10월 1일 생일을 보내 95세를 넘었고, 이후로도 장수하여 2024년 10월 기준 100세가 되었다. 2022년에 사망한 유명 장수인들과 비교하자면, 영국 최장수 여왕인 엘리자베스 2세(1926년생)나 대한민국의 최고령 MC이자 전국노래자랑 최장수 진행자였던 송해(1927년생), 중국 최장수 주석이였던 장쩌민(1926년생), 바티칸 최장수 교황 베네딕토 16세(1927년생)보다 2~3년 일찍 태어나 이들이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현재도 계속 생존 중이다.
상술했지만 카터가 차기 대선 시즌까지 생존함으로서 미국 대통령들 중 최초로 100세를 기록하는 대통령이 되었다. 마침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한달 전이 카터의 100번째 생일이기도 하니 확실하다. 그리고 퇴임 후 지내는 시간이 가장 긴(20[age(2000-01-01)]년 기준 [age(1981-01-20)]년) 전직 대통령이기도 하다.[16]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현재 생존하고 있는 전직 미국 대통령 5명 중 한 명으로 당연히 이들 중 나이가 가장 많다. 카터 전 대통령은 1924년생인데 클린턴 전 대통령과 부시 전 대통령 그리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1946년생[17], 오바마 전 대통령은 1961년생이다.[18]
카터 대통령과 시대를 공유한 대한민국의 20세기 대통령[19]들은 2021년 11월 23일을 끝으로 모두 사망했으며[20], 장수로 유명한 영국의 군주 엘리자베스 2세[21]보다도 2살이나 많다. 할리우드 배우들로 보자면 1950~60년대 황금기를 맞은 세대들[22]과 나이가 비슷하다.
또한 대통령에 취임할 당시(1977년)부터 따지면 박정희부터 윤석열까지 무려 11명의 대한민국 대통령을 보았다.
단, 퇴임 후 가장 많은 후임 대통령을 본 대통령은 아닌데, 8대 마틴 밴 뷰런이 16대 에이브러햄 링컨까지 무려 8명이 새로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나서 링컨 취임으로부터 1년 5개월이 조금 못 되어 사망했다.[23]
사실 카터는 암 중에도 최악의 암이라는 췌장암으로 많은 가족을 잃었다. 아버지와 형제자매를 모두 췌장암으로 잃었고 어머니는 췌장암은 아니지만, 유방암이 췌장에까지 전이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런 췌장암 가족력 때문에 카터가 이렇게 장수한 것은 인간 승리라고 할 수 있다.[24]
2019년 10월에는 낙상으로 눈이 심하게 멍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집짓기 행사를 참여하는 등 괜찮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22년 10월 1일 98세 생일을 맞았다. 이로서 카터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독보적으로 장수하는 중이다. 부인 로잘린 카터 여사는 2025년 4월 23일까지 생존한다면 앞선 베스 트루먼[25]의 기록을 깨고 최장수 1위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었으나, 2023년 11월 19일 사망하면서 그러지는 못하게 되었다. 다만 전 세계를 통틀어서 현재 생존중인 전직 국가원수, 정부수반 최장수는 100세를 넘은 에콰도르 전 대통령 권한대행인 기예르모 로드리게스이며, 동갑내기이지만 생일이 더 빠른 라오스 전 국가주석인 캄타이 시판돈(ຄຳໄຕ ສີພັນດອນ)과 일본 전 총리인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생존 중이기 때문에 4위이다.[26]
카터도 사망하게 되면 미국의 생존해있는 전현직 대통령[27]들은 사망한 대통령들의 후임뿐만이 되는 셈이다.[28] 참고로 지미 카터(1924년 10월)의 후임인 로널드 레이건(1911년)과 전임인 제럴드 포드(1913년)는 카터보다 나이가 많은 탓에 90세 이상 장수했지만 카터보다 일찍 사망했으며(조지 H. W. 부시는 4개월 일찍 태어났을 뿐 카터와 같은 1924년 생이다), 오바마의 후임인 트럼프와 바이든 모두 오바마보다 나이가 많다. 한국의 경우 둘 다 2021년에 생을 마감한 전두환(1931년)과 노태우(1932년)의 후임들은 자살한 노무현(1946년)을 빼면 자신들보다 나이가 많은 김영삼(1929년)과 김대중(1924년)이고, 이 때문인지 김대중부터 전두환까지 역순으로 자연사했다.
카터만큼 장수한 것으로 알려진 정치인이 따로 있다면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헨리 키신저. 키신저는 카터보다 1살 더 나이가 많은 1923년 생이며, 2023년 5월 27일에 100세를 달성하고 같은 해 11월 29일 사망했다.
미국 외의 국가로 범위를 넓히면 상술한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일본 총리가 있다. 무라야마는 카터와 같은 1924년생이나 생일이 약 7개월 빠르다.
2023년 2월, 이전에 걸렸던 흑색종이 재발하여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치료를 시작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삶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당시 100세를 바라보는 초고령이었기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다른 호스피스 환자들과 비교하면 치료 시작 이후로도 매우 오래 생존해 있다.[29] 그런데 카터는 호스피스 치료로부터 1년 반이 넘은 2024년 12월 기준으로도 살아 있다.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에서 카멀라 해리스를 찍을 수 있을때까지 살아있는 것이 목표라고 아들에게 전했다 한다.# 경합주인 카터의 거주지 조지아주서 사전투표는 10월 15일에 시작하므로, 100세가 되어서 표를 던지게 될 것이다.
2024년 10월 1일 100세 생일을 맞이했다. 언론사에서 여러 기사를 냈고 조 바이든 대통령은 2일 전에 축하 메세지를 보냈다.#
현지시각 10월 16일, 사전투표로 카멀라 해리스에게 투표하면서 소원을 성취했다. 현지시각 11월 5일, 대선 본투표 당일을 맞이하면서 선거 결과까지 확인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해리스는 트럼프에게 참패하게 된다.
4. 평가
자세한 내용은 지미 카터/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카터 내각의 용인과 인물들
5.1. 경제 - 폴 볼커 연준의장
"민간 기업들이 고금리정책의 여파로 파산하고 근로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플레이션은 이제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고 있습니다."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볼커는 인플레이션의 숨통을 끊었지만 카터 정권의 숨통도 함께 끊었다." (어느 민주당 인사)
카터의 경제 인사는 임기 말에 윌리엄 밀러 연준 의장의 오락가락 정책이 실패로 끝난 뒤 취임한 폴 볼커 연준 의장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독일계 미국인으로, 통화주의자로서 케인스주의와 대립한 밀턴 프리드먼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래서 그의 정책을 요약하면 닥치고 고금리. 연 13%에 달하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해 엄청난 고금리 정책으로 버블을 깨버리는데 성공했다. 어느정도였냐면, 1979년에 1차로 14%로 올리고 1981년엔 21%나 되었다. 정말 2020년대 같은 저성장 시대에는 상상도 못할 금리다. 실업자가 넘쳐나고 경기가 침체되는 등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펴기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버렸다.물론 폴 볼커가 일반적 의미의 신자유주의자는 결코 아니었다. 볼커는 악명을 감수한 깨끗한 원칙주의자라는 게 정평. 그러나 그의 정책 덕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경기가 침체되었으며, 일본 경제에 따라 잡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은 부정할 수 없다.[30] 이 때문에 볼커는 '대공황과 버블 위험을 넘긴 카터 최고의 인사 정책' 이란 칭찬과 '카터 재선 실패의 원흉' 혹은 '정리해고로 점철된 신자유주의의 대문을 연 인물' 이란 비판을 함께 받는다. 즉, 그의 통화주의가 이른바 케인즈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렸다는 사실엔 모두가 동의한다.[31]
카터의 재선 실패에는 이란 대사관 사건 못지 않게 경제 악화도 있다. 간신히 정권을 잡은 민주당 입장에선 경제정책을 전문가에게 위임함으로서 "경제에 무능한 대통령"이란 이미지로 끌려내려갔다는 푸념이 나올 수 밖에. 그래서 '외치보다 내치엔 더 실패했다' 는 평가를 받는다. # 빌 클린턴이 바깥에서 여기저기 물리고 다녔지만 아주 좋은 이미지를 남긴 것도 경제면에서 미국을 번성시켰기 때문인데, 카터는 이에 실패했다.
폴 볼커의 정책은 비록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지만, 레이건 대통령은 커다란 반발과 농민들의 파업 속에서도 그를 계속 중임시켰는데, 1983년에야 인플레이션이 잡히면서 미국 경제의 내실은 안정되었다. 그는 1987년까지 FRB 의장으로 재직한 뒤, 1927년생으로 82세의 노령에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경제회복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재직했다.
볼커는 신자유주의의 대문은 열었다지만 월가의 유대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며 '투자와 상업, 회계와 컨설팅은 나눠야 한다' 라고 외친 인물이기도 했다. 볼커가 있었다면, 비록 출혈은 있었어도 대침체같은 일은 없었을 것이란 이야기. 볼커는 한발 더 나아가 "은행권에서 혁신이라고 하는 것 중 쓸 만한 건 현금 자동 입출금기 하나뿐" 이라면서 글래스-스티걸법 금융규제법 폐지를 끝까지 반대한 이유로 사임했고 지금 시점에선 그가 옳았다. 볼커 식으로 말하면 간신히 욕 먹어가면서 버블 꺼뜨려놨더니 후임자인 앨런 그린스펀이 기어이 다 버블 올려서 칭찬만 먹다가 이 사단을 냈다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볼커는 그런 점에선 감세정책으로 고성장 저물가를 기록하면서 임기중엔 칭찬 일색이었으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 욕을 먹는 그린스펀과 대비된다.# 민주당에 호의적이었던 볼커는 반통화정책을 폈는데도 공화당 레이건 정부에서 중용했고, 공화당에 호의적이었던 그린스펀은 통화정책을 폈는데도 민주당 빌 클린턴 정부에서 중용한 것이 놀랍고도 재미있다. 원래 미국은 상대 당파 성향의 인물을 비교적 인정하는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2022년 연준 의장으로서 폭발적인 금리인상 기조를 고수하고 조 바이든 행정부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는 제롬 파월의 고금리 기조를 분석하면서도 볼커가 자주 소환된다. 파월 스스로도 볼커를 본받겠다는듯 의회 출석이나 연설에 나설 때 볼커의 자서전 제목인 Keeping At It이라는 표현을 써먹으며 투자가들이 공포에 떨기도 한다. (예시) 당연히(?) 이런 파월의 고금리 정책으로 인해 바이든은 카터 시즌 2라는 암울한 전망을 받고 있다. 바이든이 카터보다 더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볼커는 카터 시절 임기를 시작했지만 파월은 트럼프 시절 처음 부임하여 완화정책을 펴다가 바이든 임기에 유임이 되자마자 태세 전환으로 고금리 정책을 펴며 바이든 행정부의 숨통을 죄고 있다는 점.
5.2. 외교 -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 국가안보보좌관
사실 내치는 잘하고 외교문제에 난관이었음은 린든 B. 존슨 이후 민주당 대통령의 공통적 현상이기도 하지만(클린턴을 빼면[32]) 그 역시 인재복은 있었다. 공화당에 헨리 키신저가 있다면 카터에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인 젊은 인재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33]가 있었던 것.이른바 '카터의 제갈공명'이었던 브레진스키는 평화적 수단을 통해 미국의 패권을 유지/강화하는 정책, 즉 온건해보이지만 현실주의적인 전략가로 유명한데 이렇듯 카터 정부를 단순히 지미 카터라는 개인의 성격으로만 해석하려면 상당한 무리임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카터 정부의 이미지는 온건해보이지만, 임기 말에 터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반대해 오사마 빈 라덴 등의 반소 게릴라를 지원한 것도 브레진스키의 조언에 따른[34] 카터의 정책이었다. 1980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한 것도 그때다.
다만 반론도 있다. 브레진스키는 미·중 국교에 집착하고, 밴스 국무장관을 무시하고 외교라인을 장악했다가 기어이는 밴스는 사임하고 무장 헬기를 이란 대사관에 들였다가 패망했다는 해석이다. 물론 뒤에 보듯 브레진스키 선에서 수습하긴 했지만 국민들이 그걸 아나. # 사실 진보 측에서는 카터가 애초에 지론인 "인권외교" 에서 벗어나 친팔라비 행보를 보인 것이 대선의 향방을 바꾼 외교적 실수라는 평도 있으며, 브레진스키를 "냉전 진영주의자" 라고 보기도 한다. 아프간 전쟁에 따른 소련의 몰락도 끝내 공화당 시대에나 드러나니... 아프간 개전시에 그렇게 될 거라고 내다본 사람은 없었으니 공적을 돌릴 순 없다.
여하간 카터의 임기는 이 볼커, 브레진스키라는 두 관료가 주도했고 성과도 있었지만 거꾸로 카터의 인기가 급전직하, 재선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밖에 F-20 항목에 보다시피 한국이 F-20을 도입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결국 도입은 취소했지만. 또한 이때 박정희 정권의 인권탄압을 비판하여 한국 정부와 크게 갈등하였고 나중에는 카터 정부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까지 거론하자 박정희의 핵개발을 자극한 것도 덤. 한편 카터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서울을 방문했다가 박정희와 자주국방, 인권유린 등을 놓고 논쟁했던 일화도 저술했는데, 당시 박정희와의 회담에서 그동안 동맹국 지도자들과 가진 토론 가운데 아마도 가장 불쾌한 토론이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냉랭한 분위기는 박정희의 젊은 딸이자 북한 암살범[35]에게 살해된 어머니를 대신해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고 있던 박근혜 덕에 어느 정도 누그러지긴 했다고 한다.#
참고로 지미 카터가 대통령 퇴임 직후 내놓은 회고록에는 박정희 관련 내용이 하나도 들어가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 일각에선 카터가 사실 한국엔 눈곱만큼도 관심 없는데 그저 인권 이미지 때문에 쑈한 것을 순진한 박정희가 낚여서 괜히 고생했다는 식의 해석도 있었는데 구순 회고록에서는 박정희 내용이 꽤 많이 할당된 것을 봐선 억측에 불과했다.
6. 종교적 성향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다.[36][37] 미국 역사상 가장 신앙심이 깊은 대통령 중 한명으로 꼭 언급된다. 주일예배를 빠짐없이 참석하고 주일학교 교사로도 봉사했다. 평생 140명을 전도했으며 그의 이상론적 도덕주의 외교에도 신앙이 큰 영향을 미쳤다.또한 카터의 개신교 신앙은 보통 미국 남부의 독실한 침례회 개신교도라고 하면 떠올릴 법한 근본주의적 태도와는 다른 융통성이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상기했듯이 "여성을 목사로 임명하는 걸 반대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거나 "동성결혼은 반대하지만,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존재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38]
게다가 미국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팔레스타인 인권 탄압에 문제제기를 했는데, 미국 민주당을 지배하는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항의하여 주장을 철회했다. 미국에서 이스라엘을 비판하면 현직 정치인이나 전직 대통령에게조차 위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1979년 방한 때 마찰을 빚고 있던 박정희를 개신교 신자로 전도하려 한 일은 유명하다. 구순회고록에 이때의 일이 자세하게 적혀 있는데, 먼저 운을 뗀 것은 박정희로, 자신의 아내와 일부 자녀들이 기독교도인데, 그들이 나중에 카터와 만나면 꼭 기독교 얘기를 해보라고 강권했다면서 사적인 만남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카터가 간단히 기독교에 대해서 설명을 해주고 박정희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었는데, 이를 들은 박정희는 카터의 침례교도 친구 한명을 청와대에 보내서 추가적인 대화를 하게 해달라고 했고 카터가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성사되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당시 공산주의 국가이던 폴란드의 기에레크 서기장에게도 전도를 시도했으며, 1979년 1월, 덩샤오핑의 방미 당시에 덩샤오핑이 "카터 대통령님, 대통령께서는 지금까지 중국 인민들에게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대통령님께 우리로부터 뭔가 부탁이 있으시다면 들어드리고 싶습니다."라고 하자 카터는 자신의 유년시절 가장 큰 영웅들은 중국에서 활동하는 침례교 전도사들이었으며 따라서 중국에 선교사 활동, 성경, 종교활동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덩샤오핑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역시 구순회고록에 적혀 있다. 다음날 덩샤오핑은 선교사들은 중국의 전통문화을 업수이 여기면서 특권계층처럼 살았기 때문에 절대로 허용할 수 없으나 성경과 신앙활동은 용인하겠다고 대답했다. 6개월 후 카터 부부는 중국을 방문하여 상하이의 교회에서 예배를 올리기도 했다.
2013년 타임지 인터뷰에서 가톨릭과 이슬람교의 행태와 교리를 비판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가톨릭과 이슬람에 남아 있는 성차별적 요소를 비판한 것이다. 가톨릭에서 여성 사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이슬람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 다니던 교단에서 여자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여 여자 목사를 인정하는 교단으로 옮긴 인물이니, 충분히 납득이 가는 발언이다.
카터가 자신의 신앙에 대해 말하는 영상들. 예수의 산상수훈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은총은 비신자들에게도 열려 있으며, 무신론자도 좋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7. 등장 매체
남북 전쟁을 모티브로 한 대체역사소설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젊은 나이에 남부연합(본작에선 남부연합이 1944년까지 존속한다.) 해군육전대로 휴가중 집을 지키다가 흑인 게릴라 부대의 총격으로 1942년에 사망한다.워게임: 유러피안 에스컬레이션의 DLC 캠페인 "중대한 오류(Fatal error)"[39] 에서는 자던 와중에 페탈 에러 사건이 벌어졌고 졸지에 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가 모든 전쟁 권한을 떠안아 보복 핵공격과 전면전을 지시한다.[40] 이후 소련의 핵공격이 없었음을 알자 발사한 핵미사일을 다 자폭시켰지만 NATO군은 매우 뜬금없이 바르샤바 조약군을 패퇴시켜 동서독을 무력통일하였고 이는 구소련 영향권의 몰락을 불러와 졸지에 "번개와 같은 신속한 행동으로 소련을 무릎 꿇린" 위대한 군사지도자에 올랐다.
심슨 가족에서는 항상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초라한 전 대통령으로 나온다. 스프링필드에 카터의 동상을 세웠는데[41] 그걸 공개하자마자 시민들이 나쁜 놈이라면서 폭동을 일으키고 동상을 끌어내리며 길바닥에서 끌고 다녔고(나중에 마지가 풀려나고 이 동상은 카터의 얼굴에 마지의 머리를 한(...) 동상으로 마개조된다.), 번즈의 생일 행사에 전직 대통령들이 입장하는데 재선 못한 사람은 안 받아준다며 입장 거부당하고[42] 뒤이어 입장 거부당한 조지 H. W. 부시한테도 무시당한다. 주택 건설 봉사를 할 때는 조지 H. W. 부시를 모르고 건설 자재로 때렸다가 두들겨 맞기도 했다. 또 다른 에피소드에서는 우연히 장갑으로 남부 사람의 뺨을 때리면서 결투신청을 한 호머가 집을 버리고 도망치다 주택 건설 봉사를 하는 지미 카터와 만났는데, 여기서 호머가 지미 카터를 욕하자[43] 분노해 호머에게 결투신청을 하려 하기도 했다. 위에서 나왔듯 지미 카터 역시 남부인 조지아 주 출신이다.
레이첼 맥아담스, 해리슨 포드 주연의 '굿모닝 에브리원(Morning Glory)'에서는 성범죄 용의자(Sexual offender)라고 나오는 굴욕을 당했다. 사실 극중에서도 카터가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게 아니라, 뉴스 중에 도주중인 성폭행 용의자 소식을 전한 후 화면이 지미 카터 근황 소식으로 넘어갔는데 자막이 계속 'sexual offender'라고 떠 있었던, 즉 방송사고 장면.
상기한 예시들처럼 뭔가 거물 정치인 중 만만한 사례로 미국 대중매체에서 자주 인용된다. 코난 오브라이언이 스티븐 연과 함께 찍은 디지털쇼트 찜질방 편에서도 코난이 농담의 소재로 언급한다. "이봐, 그 땟국물들은 지미 카터가 대통령이던 시절부터 내 몸에 붙어있었다고!" 아무래도 카터의 이미지가 개신교 평화주의자라서 그런지 소송드립에서 좀 자유로울 것이라는 미국사회의 편견 같은 게 있을지도?[44][45]
덩샤오핑의 일대기를 다룬 2014년작 중국드라마 '등소평'(历史转折中的邓小平)에 등장한다. 1970년대말 배경때 등장한다.
울펜슈타인 2: 더 뉴 콜로서스에서는 해당 세계관의 자니 카슨이라고 할 수 있는, TV 토크쇼 진행자로 '지미 카버'가 등장하는데, 이름이나 생김새나 영락 없는 지미 카터를 모델로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대한민국 정치비사 1회에 등장한다. 배경이 박정희가 핵개발을 시도하던 시기여서 그런지 회담 내내 불편한 표정을 짓는다.
8.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선거인단 수) | 당선 여부 | 비고 |
1970 | 미국 주지사 선거 | 조지아 | | 620,419 (59.28%) | 당선 (1위) | 초선 |
1976 | 미국 대통령 선거 | 미합중국 | 40,831,881 (50.08%, 297명) | |||
1980 | 미국 대통령 선거 | 35,480,115 (41.02%, 49명) | 낙선 (2위) |
9. 여담
* 백악관 지붕 위의 태양광 발전소는 지미 카터 행정부를 상징하는 요소이다. 지미 카터는 환경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깨끗한 미래 에너지인 태양광 발전에 많은 투자를 약속했고 자신도 태양광 전자판을 백악관 웨스트윙 지붕 위에 설치했다. 오일쇼크로 전기 값이 확 오른 것 때문에 어느정도 현실적인 선택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오일쇼크가 안정되고 기름값이 내려가자 로널드 레이건은 태양광 발전소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는지 철거해버렸다. 이 일화는 영화 바이스에서 지미 카터 행정부의 흥망성쇠를 묘사할때 그대로 사용된다.
- 저술활동을 상당히 즐겨, 20권이 넘는 책을 집필했다. 한국에도 몇 권의 도서가 번역되어 출간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카터의 자서전이 2018년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카터는 집필한 책 가운데, 두 권을 통해 그래미상도 두 차례 수상했다. 2016년 그래미상 수상 도서가 바로 카터의 자서전이다.
- 한국어 위키백과의 첫 번째로 작성된 문서의 표제어이기도 하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2002년 10월에 서비스를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 지미 카터가 노벨평화상 수상자라서 먼저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관련 링크).
- 정식 퍼스트네임 본명 대신 애칭을 본명처럼 사용한 최초이자 셋뿐인 대통령이다. 제임스(James)라는 본명이 올드하게 생각했는지 대신 지미라는 애칭을 성과 합하여 '지미 카터'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다.[46] 선거 포스터나 언론 기사 등 대외적으로 언제나 '지미 카터'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했고, 미국인들조차도 위키피디아를 찾아보지 않는다면 그의 본명이 제임스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다.[47] 지미 카터 이외에는 빌 클린턴이 윌리엄이라는 퍼스트 네임 대신 빌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빌 클린턴'이라는 이름을 대외적으로 사용했고, 조 바이든 현 대통령도 조지프 대신 조라는 애칭을 주로 사용한다.[48] 아이젠하워의 경우 아이크라는 애칭으로 불리었지만 본인이 사용한 것이라기 보다 언론이 긴 독일어식 성 대신 붙여진 애칭이라 할 수 있으며, 이와 별도로 그가 언론이나 선거에서 대외적으로 사용한 이름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라는 본명이었다.
- 존 F. 케네디 이후로 계속 이어지던 해군 출신 대통령의 기록을 그가 마감했다. 이후, 후임 로널드 레이건을 건너 뛰어 조지 H. W. 부시가 현재로서는 마지막 해군 출신 대통령이 되었다.
- 자식을 유일하게 워싱턴 D.C.의 공립학교에 보낸 대통령이다. 이렇게 보면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사실 자녀를 보낸 공립학교가 있던 지역이 흑인 밀집지역인데다[50] 교육 수준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거의 빈민가였다.[51] 공화당계는 물론 민주당계 대통령들도 자기 자식들을 값비싼 사립학교에 보냈다. 버락 오바마도 두 딸을 연 3만불 가까이 수업료를 받는 사립학교에 보냈을 정도인데, 카터는 유일하게 공립학교에 보냈다.
- 4년 임기를 채운 대통령 중 연방 대법관을 지명할 기회를 가지지 못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카터 이후 4년 단임으로 퇴임한 아버지 부시도 2명[52], 도널드 트럼프는 3명[53]씩이나 지명한데다, 4년을 채 못 채우고 백악관을 떠난 카터의 전임자 제럴드 포드조차도 연방 대법관을 지명할 기회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아쉽다.[54]
- 애틀란타를 가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Jimmy Carter Street가 있다. 그의 조지아 주지사 경력이 큰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 카터 이후 당선된 대통령들은 모두 키가 180cm를 넘는다. 당장에 20세기에 집권한 대통령들 중 180cm를 넘지 않는 사람은 카터(178cm) 포함 5명뿐이다.[56]
- 클린턴 부부와 악연이 있는 듯 하다. 처음에는 카터도 빌을 칭찬하였으나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빌이 카터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는데, 그래도 1994년까지만 해도 클린턴 행정부의 대표로 아이티나 북한에 가는 등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1998년에는 빌이 이라크 폭격을 거론하면서 "카터는 맨날 나를 비판하기만 한다"며 불평하였다.#[58] 한편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경선 당시 버락 오바마를 지지하였고, 그가 경선에서 이기자 클린턴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하지 말라고 조언하였다.# 2016년 미국 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는 버니 샌더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그를 찍었다고 밝혔다.# 물론 클린턴이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어 도널드 트럼프와 맞서게 되자 그녀를 지지하였다.
- 조 바이든이 재선을 포기하기 전까지 2024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역대급 비호감 선거로 치러졌다보니 이 사람을 출마시키라는 농담이 돌았다. # 물론 한 세기를 산 노인이다 보니 현실성은 없지만, 카터는 생존 중인 전직 대통령 중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트럼프를 제외하면 유일하게 재선에 실패하여 법적으로 출마가 가능한 인물이다.
9.1. 독재자 킬러 밈
에펨코리아 버전 (번외)
한국에서는 독재자 킬러라는 농담이 있는데, 카터가 만난 독재자들은 거의 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는 2010년대 초반 한 이글루스 유저의 연재 글에서 유래한 밈이다. 연재 글 아카이브가 정리된 네이버 블로그 링크[59]
- 1977년 파나마의 독재자 오마르 토리호스를 만났는데, 1981년 비행기 추락사로 4년 만에 사망했다.
- 1978년 이집트-이스라엘 간 캠프 데이비드 협정 때 미국을 방문해 카터를 만났던 이집트 대통령 안와르 사다트는 이 일로 노벨평화상은 수상했지만, 3년 후 1981년에 과격파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 같은 해 만난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이란 국왕도 다음해인 1979년 이란 혁명에 당해 쫓겨나 외국을 떠돌다 망명지 이집트에서 만난 지 2년 후인 1980년 사망.
- 1978년 만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12년 후 1989년 동유럽 혁명 와중에 다른 동유럽 공산권 지도자들처럼 퇴진을 거부하다 유혈혁명으로 총살.
- 1979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II)을 맺기 위해 만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은 3년 후인 1982년 사망.
- 5.16 군사정변 이후 16년[60] 동안이나 대통령으로 집권했던 박정희는 1979년 카터와 한미정상회담을 한 이후 4개월 만인 그 해 10월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했다.
- 1994년 6월, 카터가 미국 특사 자격(이 시점에선 전직 대통령)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을 만났지만 그는 14일 만에 죽었다. 카터에게 당한 역대 최단기록 사망자. 그런데 김일성의 경우엔 정말로 카터 때문에 죽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 카터가 주선한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느라 김일성의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는 의견이 나와서다.
- 2010년 8월 25일 북한을 또 다시 방문했으나, 이 때 김정일은 김정은을 데리고 중국을 방문했다. 다음 해인 2011년 4월 28일에도 북한을 방문했으나 역시 김정일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했다. 당시 북한은 외국인들의 조문을 안 받겠다고 발표했다. 기사. 기사
- 2004년 8월 베네수엘라의 대통령 재신임 투표 개표상황을 감시하고자 14개국 참관인 수백명과 함께 방문하여 우고 차베스 대통령을 만났다. 차베스는 그 선거에서 58%의 득표율[61]로 재신임에 성공했지만, 이후 갑자기 암에 걸려 오랜 기간 투병 생활을 한다. 또한 카터가 2009년에 한 번 더 방문했는데, 그 이후 차베스는 최후의 발악으로 2012년 대선에서 자기가 직접 출마하기도 했으나 2013년 3월에 사망했다. 처음 카터와 만난 지 9년 뒤의 일이다.
- 그를 만나지 않은 무아마르 알 카다피는 그래도 40년을 잘 살았지만, 그 대가(?)로 2011 리비아 민주화 운동과 1차 리비아 내전 이후 끔찍하게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게다가 오디세이 새벽 작전을 이끈 당시 미군 아프리카사령부(AFRICOM) 사령관의 이름이 하필이면 카터 F. 햄 대장이었다.
- 2013년 5월 초 한국계 미국인 케네스 배 씨[62]의 석방을 위해 방북신청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기사 카터 측에서는 대변인을 거쳐서 초청을 못 받아 방북 계획을 안 세웠으나 방북 의사는 확고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리고 2014년 9월 김정은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는 보도가 나왔다. 북한에서도 공식적으로 인정한 상태. #
- 2008년에는 카이로에서 이집트의 독재자인 호스니 무바라크가 회담을 가졌는데, 2012년 6월 무바라크가 혼수상태에 빠졌고 사실상 사망 취급받았다. 무바라크는 나중에 운이 좋게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였으나 그것도 잠시, 8년 후인 2020년 2월 25일 노환으로 사망했다.
- 피델 카스트로는 카터의 2002년 방문 후에도 14년 동안이나 장수했다.[63] 또 2010년 카터가 방문할 즈음 이미 카스트로는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권좌를 물려주는 작업을 하며 자신의 독재를 스스로 그만둬서 카터의 저주를 피해버린 셈이 되었다(참고로 이 매치는 김정일 원격 방문보다 한 달이나 먼저 있었다). 하지만 불사신 카스트로는 사신 카터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이후 2011년 3월에 벌어진 리턴 매치에서도 카스트로는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연인이 대신 죽었다. 모두 카터가 방문한 이후 4년만에 벌어졌다. 그뒤 갑자기 카터가 뇌암에 걸렸다. 이로서 둘의 대결은 카스트로의 역전승으로 끝나나 했더니 그 후 2016년 11월 25일에 피델 카스트로가 사망했다. 다만 다른 독재자들처럼 임기 중 병사나 사고사한 게 아니라 그가 90살 먹은 고령이라서 자연사이고 이미 2008년에 정권을 물려준 상태라서 애매하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독재자들에 비해서는 꽤 오래 버텼다. 카터가 2002년에 만난 이래 14년. 2011년 재회담을 포함하면 5년이다.[64] 한편 카터는 완치되면서 고령 통치자의 단두대 매치에서 탈출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카터가 정말로 독재자를 제거하려는 의도가 있었을 리는 만무하다. 우선 카터는 미국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매우 높은 지위에 있던 인물이며, 유화노선인 민주당 정권의 대통령이었고, 해외 봉사에 적극적인 등 도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즉 미국에서 적성국과 외교 관계를 맺을 때 적대적 이미지를 주지 않으면서 비공식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고, 방문을 거절하기도 힘들 만한 '급'이 되는 몇 안 되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94년 북핵 문제 때는 거의 전쟁 직전[65]의 상황이었으나 김영삼의 강경노선을 원치 않았던 빌 클린턴 대통령이 카터를 파견했고, 카터의 방북 이후 북한의 본심을 어느 정도 파악한 뒤 유화책을 쓰면서 전쟁 위기를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이 때 카터를 파견할 것을 제의한 인물은 당시 해외 거주 중이던 김대중.#
또한 카터가 만나려 하는 독재자들은 애초에 주위의 어그로를 지나치게 끌거나 독재가 장기화되어 문제를 노출한 독재자이거나 딱 봐도 늙어서 오늘 내일하는 독재자이다(대표적으로 북한의 독재자들). 이런 사람들의 명줄이 길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카터가 이런 독재자들과 굳이 만나는 것도 이로 인해 갈등이 터지거나, 터지기 직전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한국 인터넷에서 공감을 산 가장 큰 이유는 한반도의 박정희와 김일성이 미국과 좋지 않은 관계 속에서 급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박정희는 끼워맞추기식 대입으로 볼 여지가 있으나, 김일성은 문자 그대로 카터를 만난지 며칠 만에 죽은 것이었으므로 워낙 극적이었던지라 이게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진 것이다. 위 명단을 봐도 다른 독재자들은 카터를 만난지 최소 몇 년 뒤에 사망했기 때문에 개연성이 전무하다시피 하나[66] 박정희와 김일성은 카터를 만난 지 몇 개월 내지 몇 주만에 사망했으며, 심지어 둘 다 죽음의 원인에 카터가 약간이나마 연관[67]이 있다는 진지한 분석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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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대 최장수 미국 대통령이다. 그리고 미국 대통령 최초로 100세를 돌파했다.[2] 본명은 글로리아 카터 스팬으로 1926년에 출생하여 1990년에 여동생 루스 카터, 남동생 빌리 카터와 마찬가지로 췌장암으로 사망.위키피디아[3] 본명은 루스 카터 스태플턴으로 1929년에 출생하여 개신교 전도 활동을 하며 일생을 보냈으며, 1983년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위키피디아[4] 본명은 윌리엄 알톤 카터로 1937년 출생하여 1988년에 작은 누나인 루스 카터와 마찬가지로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위키피디아[5] 남침례회 소속이였으나 2000년 남침례회 측이 더이상 여성 목사 안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 아내 로잘린과 함께 협동침례교친교(Cooperative Baptist Fellowship, 위키피디아(영어))라는 교단으로 옮겼다. 협동침례교친교 교단은 여성 목사 안수 금지를 반대하던 남침례회 온건파가 1991년 설립하였고 2002년 공식적으로 남침례회 교단을 탈퇴하여 세운 교단으로 여성 목사를 허용하는 온건주의 침례교단이다.[6] 젊을때는 177cm였으나 고령으로 인해 170대 초반 정도로 줄어 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 링크[8] 조지아 공대를 자퇴 후 다시 해사 신입생으로 입학했으며 학위는 B.S.(이학사).[9] 왼쪽편에 전임 대통령인 제럴드 포드가 보인다. 여담으로 미국 의사당 동쪽편에서 개최된 마지막 취임식이다. 후임자 로널드 레이건부터는 서쪽편에서 개최된다.[10] 지미 카터 평생의 좌우명이라고 한다. 동명의 자서전도 있다. 대선 슬로건으로서의 의미는 "최고를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라는 중의적인 뜻도 된다.[11] 비슷한 예로 후에 빌 클린턴이 있다. 이쪽은 풀네임이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이며, 본래는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였다. 빌 클린턴의 경우 '빌 클린턴'으로 법안에 서명하는 경우도 잦았지만 취임 선서를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이라고 했기에 사면장 등에는 '윌리엄 J. 클린턴'이라고 서명했다. 조 바이든 역시 본명은 조지프 로비넷(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주니어지만 애칭인 조를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조 바이든 역시 취임 선서에서는 본명을 사용했고, 법안이나 국정문서에 서명할 때에는 '조셉 R. 바이든 Jr.' 또는 'J. R. 바이든 Jr.'라는 법적인 본명을 사용한다.[12] 다른 한 명은 마틴 밴 뷰런으로, 나머지 민주당 소속 대통령은 재선에 도전하지 않거나 모두 재선에 성공했다.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현직으로 출마했을 때는 낙선했으나 4년 후 다시 재도전하여 재선되었다.[13] 다만 통념과 달리 1980년 대선에서 압도적으로 레이건에게 밀린 것은 아니다. 중도 성향 무소속 후보인 존 B. 앤더슨이 카터의 지지층을 흡수했기 때문에 접전 지역에서 모두 카터가 패배해 선거인단에서 큰 차이가 났지만, 존 B. 앤더슨의 표가 카터로 옮겨갔다면 결과는 상당히 접전이었을 것이다. 마냥 카터의 인기가 나빴던건 아니라는 얘기.[14] 지미 카터는 노벨 평화상을 수여받는 4명의 대통령(시어도어 루스벨트, 우드로 윌슨, 지미 카터, 버락 오바마) 중 한명인데, 나머지 세명은 모두 재직 도중 수여받았다.[15] 독수리 발톱 작전도 따지고 보면 대이란 강경론을 편 즈비그니에프 브레진스키의 국가안보보좌관실과 온건론을 고수한 사이러스 밴스의 국무부가 갈등해 일이 커진 것이라는 분석이 있을 정도이다.[16] 그 이전엔 허버트 후버가 가장 길었다.[17] 가장 최근에 대통령을 지냈으며 2024년 대통령 선거의 당선자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 3명중 생일이 가장 빠르며 카터와는 22세 차이이다. 하지만 현 대통령보다는 4살 어리다.[18] 현직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1942년생으로 카터와는 18세 차이.[19]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으로, 불과 카터 재임기 4년 동안 우리나라 지도자가 2번 바뀌었다. 박정희가 1979년 암살 당하고 그 자리에 최규하가 올랐는데, 취임 8개월만인 1980년 8월 신군부의 5.17 내란으로 사임하고 나서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으로 올랐기 때문이다.[20] 미국 대통령들 중 빌 클린턴과 임기가 겹치는 대한민국 대통령들(양김-김영삼과 김대중)까지 모두 사망하였고, 조지 W. 부시와 임기가 5년 모두 겹쳤던 노무현도 이른 죽음을 맞았다. (부시의 재임기는 마지막 해인 2008년을 제외하면 김대중- 노무현 정부였다.) 결국 버락 오바마와 임기가 겹치는 대통령(이명박, 박근혜) 부터가 생존 중이다.[21] 2022년 9월 8일 향년 9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2] 말론 브란도와 동갑이고 오드리 헵번, 마릴린 먼로보다 먼저 태어났다. <대부>에서 비토 콜레오네(말론 브란도)의 아들인 마이클 콜레오네 역으로 출연했던 알 파치노가 2024년 현재 [age(1940-04-25)]세이다.[23] 만약 카멀라 해리스가 당선된 후 카터가 2025년 1월 20일까지 생존하여 47대 대통령도 본다면 밴뷰런과 같이 이 타이틀을 기록하게 되었으나,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이 기록을 이루려면 104세 때인 2029년 1월 20일까지는 생존해야 한다. 덤으로 밴뷰런은 퇴임 후 21년을 생존했으며, 밴뷰런이 후임 대통령을 많이 보게 된 건 그의 퇴임 이후에 어느 누구도 재선에 성공하지 못했고(다만 11대 제임스 K. 포크와 15대 제임스 뷰캐넌은 재선에 불출마했기 때문에 예외.), 9대 윌리엄 해리슨과 12대 재커리 테일러가 임기 중에 사망했기 때문이다.[24] 카터의 경우 뇌암에 걸렸지만 완치했다.[25] 해리 S. 트루먼의 영부인. 향년 97세.[26] 원래는 크로아티아 전 총리 요시프 마놀리치가 가장 장수한 국가원수였지만 2024년 4월 15일 향년 10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27] 클린턴, 부시,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28] 다만 카터가 사망하기 전에 나머지 5명(클린턴, 아들 부시, 오바마, 트럼프, 바이든)중 한 명이라도 사망한다면 사망한 대통령들의 전직 대통령들까지 모두 사망해야 그렇게 되는 것이다. 물론 클린턴은 이 5명중 제일 먼저 해서 예외일 수도 있지만(현재 76세) 이후의 4명 중에서 아들 부시와 트럼프도 클린턴과 동갑인데다가 생일이 더 빠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 알 듯하다.[29] 9월 16일을 넘겨 대통령은 아니지만 미국 최장수 부통령인 존 낸스 가너의 기록을 경신하였다.[30] 인플레를 잡으면 실업이 증가한다는 것은 '필립스 곡선'으로 유명한 이야기다. #[31] 아예 케인스 경제학보다도 좌파적인 해석에선 포드주의 이래 뉴딜 호황으로 잠시 화해를 맞았던 노동자와 자본가의 관계가 필연적인 인플레로 파국을 맞았으며 결국 자본가와 통화의 승리로 끝났다고도 해석한다.[32] 그러나 그 클린턴도 비슷한 면이 있다. 소말리아 문제, 북핵 문제 등. 걸프전의 뒷처리를 해야 하는 대통령이라 축소기에 있기는 했지만, 클린턴도 임기말에는 유고 내전 등 큼직큼직한 군사행동을 결정해야 했다.[33] 1928년생으로 당시 겨우 만 48세에 발탁되었다. 폴란드계로, 망명한 외교관의 아들이었기에 더 반공적이고 소련에 원한이 있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유발시켜 소련 붕괴에 일조한 것도 이 사람. 2017년 5월 26일 타계. 여담으로 민주당 후배 대통령 조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인 제이크 설리번은 이보다 더 젊은 나이인 만 44세에 임명되었다.[34] 브레진스키는 그때 "이제 소련은 놈들의 베트남 전쟁을 겪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그건 사실이었다. 특히 베트남 전쟁에서 실패한 미국이 불황을 겪어도 나중엔 회복한것과 달리 소련은 아프간 전쟁에서 실패한 후 경제에 회복할수 없는 큰 타격을 입었고 이는 소련이 망하는 중요한 원인으로 적용된다. 그리고 미군은 아프간에 다시 들어가게 되고...[35] 문세광은 엄밀히 말해서 조총련이지만 카터의 책에선 그냥 북한 암살범이라고 적혀 있다.[36] 미국 개신교 최대교단 중 하나인 남침례회였으나, 여성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에 반발하여 다른 침례교 교단으로 갔다. 빌 클린턴 역시 카터를 따라 2008년 새로운 침례교 교단으로 옮겼다.[37] 단, 한국의 대표적인 진보 성향의 개신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 계열의 목회자나 개교회 중에서도 예배 인도자의 성향에 따라 오히려 보수 성향을 띄는 경우도 많으니 교단의 성향이랑 교단에 소속된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 개개인의 성향이 꼭 일치하지도 않는다.[38] 이건 사실 개념적인 크리스천으로선 평범할 정도의 상식이다. 다만, 카터가 속한 미국의 침례회는 미국의 대표적인 보수 교단이라서, 교단 차원에서 동성결혼을 반대하며 더불어 장로회나 감리회 등에서 허용하고 있는 여성 목사 임직을 허용하지 않는 교단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그 중에서도 최대 교파이자 가장 근본주의에 가까운 분파라 할 수 있는 남침례회 출신이므로 카터가 엄청 특이한 경우. 단, 정치적 보수와 신앙적 보수가 항상 일치하는 건 아니라(대체로 일치하는 편이긴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의외로 있다) 그리 이상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39] NORAD에서 근무하는 엔지니어가 새 미사일 요격체계 연습 전, 시스템을 훈련 모드로 돌려야 되는걸 잊고 소련이 일제히 전면 핵공격을 한다는 시나리오 디스크를 삽입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수천개의 핵미사일이 미국을 향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는 경보가 발령되었다.[40] 실제 역사에서는 NORAD에서 2200여개의 핵미사일이 발사되었단 경보가 울렸지만 다른 기관에서 이런 경보가 없어서 허위경보임을 안다.[41] 원래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동상을 세우려 했고, 자금을 모으기 위해 바자회를 열었는데 마지가 감옥에 가는 바람에 마지만 만들 수 있는 인기 메뉴를 내놓을 수가 없게 되었고 때문에 매상이 부족해져서 땜빵으로 만든 동상이다.[42] 근데 쫓겨난 닉슨은 잘만 입장한다. 쫓겨나든 말든 재선만 하면 상관없는듯.[43] 리사가 집을 버리고 도망나온 자신들에게 집을 지어줄 수 있는지 물었는데, 이미 집이 필요한 다른 사람들이 있어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호머가 여기서 게으른 놈이라고 욕을 했다.[44] 다만 코난의 경우 '카터 시절'을 그냥 '수십년 전'에 은유한 것에 가깝고, 본인이 63년생이기 때문에 제대로 기억하는 첫 대통령이 카터였을 가능성이 다분하다.[45] 역으로 말하자면 위 문단의 '굿모닝 에브리원'에서 해리슨 포드가 "이제 카터에게 소송당할 준비나 하라고, 뭐 성범죄 용의자?"라고 비꼬는 건 그만큼 큰 방송사고를 쳤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46] 심지어는 본인의 대통령 취임선서도 지미 카터라는 이름으로 했다. 당시 워런 버거 대법원장이 ‘나, 제임스 얼 카터는…’이라고 선서문을 선창하자 카터가 ‘나, 지미 카터는…’이라고 정정해 주었다.[47] 물론 미국인이라면 지미가 애칭이고 제임스 정도가 본명일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추측할 수 있지만, 이를 확실하게 확인해 보고자 할 때, 제임스라는 본명이 공식적으로 사용된 경우가 거의 없으므로 위키피디아를 찾아서 확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48] 다만 클린턴과 바이든은 취임선서에서 윌리엄 제퍼슨 클린턴 및 조셉 로비네트 바이든 Jr. 라는 법적 본명으로 했으며, 각료 임명장이나 사면장 등 중요 공식문서에도 각각 윌리엄 J. 클린턴 및 조셉 R. 바이든 Jr. 이라고 서명했기에 취임 선서와 서명에서도 애칭인 지미를 사용한 카터와 차이점이 있다.[49] 지미(지 어미) 카터(cutter). 지 어머니를 베는 놈이라고 얘기했다.[50] 워싱턴DC는 예나 지금이나 흑인이 과반이다.[51] 사실 미국의 대다수 공립학교(특히 중/고등학교)들은 사립학교에 비해 경쟁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지는 편이다. 단 대학 교육은 예외로 메이저급 주립대학들은 아이비 리그로 대표되는 세계구급 사립대학들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아웃풋을 자랑한다.[52] 버락 오바마 시절 은퇴한 데이비드 수터, 및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클래런스 토머스를 지명하였다.[53]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54] 2010년 6월에 은퇴한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을 지명하였다.[55] 베리 골디의 할아버지 베리 골디 1세와 지미 카터의 외할아버지가 이복형제이다. 정확히는 증조할아버지가 소유 흑인 노예랑 낳은 자식이 베리 골디 1세, 본 부인과 낳은 자식이 지미 카터 외할아버지. 때문인지 몰라도 베리 골디도 상당히 장수하고 있는 편이다.[56] 다른 4명은 시어도어 루스벨트(178cm),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179cm), 해리 S. 트루먼(172cm), 캘빈 쿨리지(178cm). 이중 트루먼이 유독 작은 편이다. 다만 트루먼도 당시 미국인 전체 평균에 비해서는 많이 작지 않은 쪽이다. 다른 대통령들이 매우 큰 키였던 것. 큰 키가 정치 활동에 유리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57] 케네디는 1차 세계대전 도중인 1917년에 태어났으며 존슨, 닉슨, 포드는 1차 세계대전 이전에 태어났다.[58] 북한의 경우 클린턴이 폭격을 고려하긴 했으나 곧 마음을 바꾸고 카터를 보냈지만, 그보다 몇달 전이었던 아이티의 경우 클린턴이 정말로 침공을 준비하자 카터가 협상 시도를 자원하였다.[59] 원 글의 작성자가 언급한 대상은 오마르 토리호스,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안와르 사다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박정희, 김일성, 우고 차베스, 피델 카스트로이다. 그 밖에 무아마르 카다피에 관련된 내용도 원 글 작성자의 드립이다.[60] 사실 대통령 공식 취임은 1963년부터이지만 취임 2년 전부터 5.16 군사정변을 일으키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직에 앉았기에 실질적 권력은 18년 동안 잡은 셈이다.[61] 원채 2002년 하반기부터 2003년 상반기까지의 석유파업과 자본파업으로 석유공사 노조와 주요 기업들이 파업하면서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8~-9%대의 성장률을 찍으며 국가파탄까지 갈 수 있을 지경까지 다다랐기에 차베스가 위기에 몰린 상황이었지만 베네수엘라의 석유 생산이 정상화되고 이라크전의 여파로 유가도 급등하면서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던 참이었다.[62] 케네스 배의 아버지는 과거 빙그레 이글스-MBC 청룡의 감독을 역임한 배성서 씨다.[63] 카터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2002년은 그가 피델 카스트로를 만난 해였기 때문이라는 농담도 있다.[64] 카터가 암에 완치된 지 1년도 안 되어서 피델이 사망했다.[65] 국방부가 북한에게 카운트다운을 하고, 미군의 주력 폭격기를 평택에 집결 및 토마호크, 벙커 버스터 등의 미사일 주파수도 전부 맞추었다고 한다. 이때 미국 고위장성들은 우와! 이제 친다!며 축배를 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66] 그나마 시기상으로는 우고 차베스 정도가 카터와 연관성이 있어 보이지만, 이조차 단순 우연에 불과하다.[67] 박정희는 유신 정권 말기 카터 정권과 상당한 갈등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10.26 사건에 미국이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추측이 있다. 김일성은 본문에 언급했듯이 카터가 중재한 남북정상회담 준비로 인해 무리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해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