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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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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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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큐 5년 5월
엔큐 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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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8년 7월
1168년 7월
규안 2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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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호 8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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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에이 6년 9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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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일본의 방송국 닛폰 테레비가 일본인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일본인' 명단이다.
<rowcolor=#ffffff> 1위 2위 3위 4위 5위
오다 노부나가 사카모토 료마 도요토미 히데요시 마쓰시타 고노스케 도쿠가와 이에야스
<rowcolor=#fff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노구치 히데요 히지카타 토시조 사이고 다카모리 미소라 히바리 후쿠자와 유키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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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국 관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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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1]
파일:Toyotomi_hideyoshi.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출생 1537년 3월 17일[2]
오와리국 아이치군 나카무라
(현 아이치현 나고야시 나카무라구)
사망 1598년 9월 18일 (향년 61세)[3]
야마시로국 기이군 후시미 후시미성
(현 교토부 교토시 후시미구)
재임기간 초대 하시바 당주
1573년 7월 20일 ~ 1598년 9월 18일
관백
1585년 8월 6일 ~ 1592년 2월 10일
태정대신
1586년 2월 2일 ~ 1598년 9월 18일
초대 도요토미 당주
1586년 9월 9일 ~ 1598년 9월 18일
태합
1592년 2월 11일 ~ 1598년 9월 18일
서명
파일:도요토미 히데요시 서명.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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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본명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
후지와라노 히데요시(藤原秀吉)[우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우지]
신호 풍국대명신(豊国大明神)
봉호 일본국왕(日本国王)
종교 신토
부모 친부 기노시타 야에몬(木下弥右衛門, ? ~ 1543)
친모 오만도코로
계부 지쿠아미(竹阿弥)
양부 고노에 사키히사(近衛前久, 1536 ~ 1612)[6]
배우자 정실 코다이인
측실 요도도노 외 12명
}}}}}}}}}
1. 개요2. 가문과 역사3. 호칭과 별명4. 생애5. 가족 관계6. 평가7. 여담8. 기타 창작물

[clearfix]

1. 개요

일본 전국 시대 최후의 최고 권력자.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오다 노부나가에게 중용되어 그의 사후 전국 시대의 일본을 통일하고 관백천하인의 지위에 올랐다. 전국시대를 평정한 그는 말년에 조선을 침공해 임진왜란을 일으켰으나 전쟁의 끝을 보기 전에 세상을 떠버린 탓에 일본군의 철군으로 임진왜란은 막을 내리고, 정권의 지지 기반을 다지는 것도 실패해 자신의 사후에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단초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7][8]

2. 가문과 역사

파일:고시치노키리.svg 파일:고시치노기리몬.svg
도요토미 가문과 하시바 가문의
고시치노키리(五七の桐) 문장
[9]
<colbgcolor=white> 파일:다이코키리(검은 배경).svg 파일:다이코키리.svg
다이코키리(太閤桐)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몬(豊臣秀吉定紋)
파일:기노시타 오모다카.svg
기노시타 가문 시절의 문장
오모다카(沢瀉)

전국 시대가장 출세한 인물로 유명하다. 미천한 출신으로 태어나 일본 조정 최고의 자리인 관백[10]까지 오른 인물이다. 일본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표현할 때 빠지지 않는 어구가 바로 戦国一の出世頭(= 전국 최고의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일 정도로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입신출세의 아이콘과도 같은 인물이다. 때문에 그가 칭한 태합(太閤, 타이코) 또한 최하층에서 시작하여 크게 출세한 인물의 대명사 중 하나가 되어 이토 히로부미, 다나카 가쿠에이 등을 금태합(今太閤, 이마타이코)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조선 전역을 불바다로 만든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으로 악명 높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당연히 부정적 평가를 받는다. 최근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히데요시에 대해 평가가 점차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으며, 당장 NHK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에서 처음으로 임진왜란을 대충으로나마 다루기 시작한 이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해 일부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역으로 한국인들 중에서도 일본사를 접하게 되면서, 임진왜란 전의 히데요시의 입지전적인 인생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게 되는 등, 그의 대한 역사적 평가는 한일 양측에서 조금씩 입체적으로 변하는 중이다.[11]

3. 호칭과 별명

이름을 자주 바꿨다. 다른 이름으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기노시타 히데요시'(木下秀吉),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별명은 '대머리 '(禿げ鼠),[12] 원숭이.[13] 한국에서는 이토 히로부미를 이등박문으로도 부르는 것처럼 조선 시대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한자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풍신수길로도 불린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풍신수길 외에도 "平秀吉"(= 타이라노 히데요시), 즉 "평수길"이라고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자칭한 씨(氏)인 平, 즉 타이라(헤이지)를 성씨로 사용한 것으로 오해하고 오기했다는 설이 있으나, 이는 부정확하며 겐지를 정통, 겐페이 합전 이후에 권력을 상실한 헤이지를 찬탈자의 가문으로 인식한 조선 왕조가 히데요시에게 타이라의 성씨를 붙여 주었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나, 의문을 완전히 해소하기에는 약간의 부족함이 있다.

만년에 관백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퇴임한 섭정이나 관백을 이르는 호칭인 태합(太閤)으로도 많이 불린다. 사실 태합이라는 호칭은 히데요시만의 전용 호칭은 아니지만, 이 호칭으로 불린 사람들 중 제일 인지도가 높아서 일본인들이 그냥 '태합'이라고만 지칭하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4] 그래서 나온 말이 금태합(今太閤 = 오늘날의 태합)인데, 히데요시처럼 밑바닥 출신에서 입신출세한 인물들의 별명으로 쓰이는 단어다. 정치계의 이토 히로부미다나카 가쿠에이가 이 별명으로 불린 것으로 알려져 있고, 그 외 마쓰시타 고노스케 파나소닉 창업주 겸 초대 회장도 이 별명으로도 불렸다고 하며, 일본의 연예 기획사 요시모토 흥업의 창업자인 요시모토 세이(吉本せい)는 여금태합(女今太閤)이라고 불렸다.

4. 생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생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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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가족 관계

부모 이름 생년 몰년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
(木下弥右衛門)
미상 1543년
어머니 오만도코로
(大政所)
1516년 1592년 8월 29일
향년 76세
계부 지쿠아미
(竹阿弥)
불명 불명
양부 코노에 사키히사
(近衛前久)
1536년[15] 1612년 6월 7일
향년 76세
형제자매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친부 기타 가족사항
친누나 닛슈니 1534년 1625년 5월 30일
향년 91세
기노시타 야에몬 미요시 요시후사(1534 ~ 1612)와 결혼
장남 도요토미 히데츠구(1568 ~ 1595)
차남 히데카츠(1569 ~ 1592)
삼남 히데야스(1575 ~ 1592)
이부남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 1540년 4월 8일 1591년 2월 15일
향년 50세
지쿠아미 아내 치운인(? ~ 1622)
1남 2녀(어려서 요절)
이부여동생 아사히히메 1543년 1590년 2월 18일
향년 47세
지쿠아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계실
자녀 없이 사망
공식적인 형제자매 말고도 루이스 프로이스의《일본사》에서는 히데요시의 또 다른 형제자매가 등장한다. 1587년 이세국에서 히데요시의 이부형제를 자처한 '세이키치'라는 사람이 친인척 20여 명과 함께 오사카에 나타났다. 히데요시는 이 사실을 오만도코로에게 물었고, 오만도코로가 모른다고 말하자 세이키치와 그의 친인척 20여 명을 참수한다. 또한 같은 해 오와리에 사는 이부자매 두 사람을 찾아내어, 감언이설오사카로 오게 만든 후 도착 즉시 참수했다.
부인 이름 생년 몰년 자녀 기타 가족사항
정실
키타노만도코로(北政所)[16]
네네(寧々)
코다이인(高台院)
[17]
불명 1624년 10월 17일
향년 77, 78세, 82세(추정)
없음 아버지 스기하라 사다토시
어머니 아사히도노
측실 미나미도노
(南殿)
불명 1634년 하시바 히데카즈
그외 1녀(요절)
측실 엔유인
(円融院)
1549년 불명 없음 우키타 나오이에의 과부
우키타 히데이에의 친모
측실 요도도노(淀殿)
차차(茶々)/키쿠코(菊子)
1569년 1615년 6월 4일
향년 46세
도요토미 츠루마츠
도요토미 히데요리
측실 히메지도노
(姫路殿)
불명 1641년 6월 16일 없음 오다 노부나가의 조카딸
측실 산노마루도노
(三の丸殿)
불명 1603년 3월 17일 없음 오다 노부나가의 딸
니죠 아키자네의 계실
이 외에도 수많은 들이 있다. 주요 인물만 기재함.
자녀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친모
장남 하시바 히데카츠
(羽柴秀勝)
아명은 이시마쓰마루(石松丸).
1570 ~ 1574년 추정 1576년 11월 4일
향년 2 ~ 6세
미나미도노
장녀 이름불명
불명 불명 미나미도노
차남 도요토미 츠루마츠
(豊臣鶴松)
1589년 7월 9일 1591년 9월 22일
향년 2세
요도도노
삼남 도요토미 히데요리
(豊臣秀頼)
1593년 8월 29일 1615년 6월 4일
향년 21세
요도도노

수많은 처첩들을 두었음에도 후술할 불임 논란 때문인지 자녀가 4명밖에 없다. 불임은 아니더라도 난임은 확실했던 듯. 이중 장남 하시바 히데카즈는 도요토미 히데카츠와는 다른 인물로, 히데요시가 나가하마 성의 성주였던 시절에 생긴 아들이다. 생년은 1570년, 1573년, 1574년 등 이설이 많지만, 1576년에 요절했다.[18]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가족 관계
하시바 히데카츠
(羽柴秀勝)
1568년 1586년 1월 29일
향년 18세
본명 오다 히데카츠(織田秀勝), 오다 노부나가의 4남
도요토미 히데츠구
(豊臣秀次)
1568년 1595년 8월 20일
향년 27세
친누나 닛슈니의 장남
도요토미 히데카츠
(豊臣秀勝)
1569년 1592년 10월 14일
향년 23세
친누나 닛슈니의 차남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小早川秀詮)
1582년 1602년 12월 1일
향년 21세
정처 네네의 오빠 키노시타 이에사다의 다섯째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
(宇喜多秀家)
1572년 1655년 12월 17일
향년 83세
우키타 나오이에의 장남
유키 히데야스
(結城秀康)
1574년 3월 1일 1607년 6월 2일
향년 33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히데요시는 생전에 양자를 많이 둔 편이었다. 오죽하면 히데카츠와 츠루마츠가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 히데요리는 히데요시가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늦둥이로 태어나기 전이라 조카인 히데츠구양자로 받아들여 후계자로 임명했다.[19]

6. 평가

6.1.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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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이 비천하고, 교육 수준이 낮아 상당 기간 동안 문맹이었다. 게다가 키도 작아 당대 일본인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인 155cm에 한참 못 미치는 140cm에 불과했다. 전국 시대 3영걸로 히데요시의 맞수로 자주 거론되는 인물들인 오다 노부나가의 키가 170cm,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159cm였다.[20]

히데요시는 유년기에 마츠시타 유키츠나의 휘하에서 군략과 무예에 대해 배웠으나, 그 기간이 짧아 다른 경쟁자들이나 무사들에 비해 교양과 학식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처세술임기응변은 대단히 뛰어났으며 경험과 학습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개선해 나갔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근면성실함과 능력을 보여줘 노부나가의 눈에 띄여 중용받았으며, 천하인이 되기 전까지는 노부나가의 행보를 따르면서 실력 위주로 인물을 쓰는 면모를 보였다. [21]

실제로 모략과 전쟁이 난무하는 전란의 시대에서 히데요시의 임기응변과 기지는 놀라운 수준이었고, 이는 특히나 공성전에 있어서 빛을 발했다.[22] 안 그래도 당대 유력 세력들을 근방에 두고 한 수, 한 수에 목숨을 걸어야 했던 노부나가 입장에선 근면성실하며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데다가 뛰어난 기책으로 상황을 타파하는 히데요시를 중용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았음에도 주고쿠 방면 공략 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된것만 봐도 히데요시의 전술적 역량 자체를 저평가하기는 힘들다.

또한 오다 노부나가가 실수로 황금 술잔을 우물에 떨어뜨렸을 때 히데요시에게 술잔을 꺼내보라고 명했다는 일화에서, 히데요시는 하인들을 시켜 물을 최대한 많이 박박 긁어 모아온 뒤 그 많은 물을 한꺼번에 때려 부어 그 충격으로 술잔이 떠오르게 해 오다 노부나가에게 바쳤다. 이러한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히데요시의 기지가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민 출신인 그는 서민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었고, 이는 서민들의 심리를 파악해 그들을 매수해 공작을 벌이거나,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식량을 긁어모아 적의 군량을 줄이는 책략을 쓰는 등 여러 방면에서 빛을 볼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상황에 따라선 다른 사람의 방침을 적극적으로 따를 줄 아는 인물이었다. 일본의 상업을 크게 발전시켰다는 것도 생전 노부나가가 시행하던, 또는 하려던 정책들을 본받아 한 것이며, 단지 전략이나 정치만이 아니라 사치같은 사적인 것에 대해서도 노부나가에 대한 동경심을 자주 드러냈다.[23] 또한 일본의 정치사적으로 보자면 다 지은 밥을 뺏긴 격이긴 하나 에도 시대 체제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히데요시가 천하인이던 시절에 진행한 토지 조사(태합검지)와 가타나가리(칼 사냥), 상업 통제, 사농공상 신분제 등은 에도 막부도 이를 굳이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어나가며 수백 년 동안 이어지는 에도 시대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인신매매를 싫어했다고 한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일본인들로 인신매매를 하자 전부 구출하게 했으며, 타국에 팔려간 일본인들을 데려오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인에 대한 인신매매도 마찬가지로 금지했으며, 정만록에 의하면 히데요시가 엄히 금지시켜 잡혀간 여자들을 조선으로 돌려 보냈다고 한다.

다만 히데요시 또한 초인이 아닌 만큼 단점이 많은 인물이기도 했다.

우선 낮은 신분이 발목을 잡았다. 말단 아시가루 출신[24]이었기에 가문의 지원이나 후다이[25]같은 게 아예 없었고, 이 때문에 히데요시는 히데나가 같은 가족과 기요마사를 비롯한 인척들, 오다가의 가신들, 미츠나리를 비롯한 오미 출신 가신들과 여러 세력에서 능력 있는 이들을 받아들여 기반을 쌓았다. 본인도 이렇게 형성된 지지 기반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코바야카와 타카카게의 양자로 보내거나 우키타 나오이에의 아들 우키타 히데이에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중용하는 등 어떻게든 정권의 기반을 만들어 보려고 했다.[26]

위와 관련된 설화로 가마쿠라의 쓰루가오카 하치만구에서는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세이와 겐지의 직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정이대장군의 목상을 보고 "당신은 천황의 후손에[27]4대 본성(= 겐페이토키츠)으로 불린다. 이 중 후지와라를 제외한 셋은 전부 황실의 분가이다. (참고로 타치바나는 유일하게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성씨이다.) 종법상 천황과 촌수가 멀어지면 신하의 신분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동아시아에선 일반적이었다. 조선에서도 전주 이씨의 왕자군파에서 갈라져나간 자들이 과거를 통해 관직 생활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컨대 조선 중기의 정승 이원익을 들 수 있다.) 이는 현대 일본의 황실전범에도 적용되는데 증손자까지 황족이고 고손자부터는 평민이 된다. 하지만 현대에는 세습친왕가화족들의 몰락과 여자들만 태어나면서 다들 해당 경우가 적용되기도 전에 평민이 되었다.] 명문 가문의 출신이므로 유배지에서 거병했을 때에도 사람들이 따랐지만, 나는 천한 신분으로 일어나 내 능력만으로 천하를 잡았으니 당신보다 내가 낫다."라고 말했다는 설화가 있을 정도.

또한 본격적으로 권력을 잡은 후 자신의 주군이었던 노부나가에 대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가진듯한 면모도 크게 부각되었다. 대외적인 관직이 어떻든 천하인에 오른 시점에서 사실상 최고 통수권자나 다름없음에도 황실로부터 태정대신과 관백직을 제수받으려 했던 것이 본디 그 관직들이 노부나가에게 주어질뻔 했던 것이어서[28] 본인도 그를 노렸다는 이야기도 있고, 요도도노 즉 차차히메를 으로 들인 뒤 과할 정도로 총애한 것 또한 본래 그녀의 어머니이자 노부나가의 여동생인 오이치 부인을 노렸으나 그녀가 시바타와 함께 자살하자 차선책으로 노부나가의 조카인 차차히메에게 집착한게 아닌가하는 보상심리겸 자신을 오다 가로 들이거나 오다 가와 동격인 존재로 여기고자 벌인 일이 아닌가하는 추측이 대세다.[29]

그리고 급박한 상황에서의 임기응변은 뛰어났으나 전반적인 부분에서 대국적인 안목은 매우 부족했다. 사실 신분이나 노부나가에 대한 자격지심 정도야 이후 하기에 따라 어찌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겠으나, 천하인이 된 후 터져나오기 시작한 자만심과 함께 사실상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을 야기한 결정적인 이유가 이런 큰 그림을 그리는 능력의 부재였을 정도.

우선 천하인에 오른 뒤 과대망상적인 언행과 행동이 잦았다. 후시미 성 건축중 후시미 전역에 대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재해로 죽거나 다치고 후시미 성 내에서 조영하고 있던 대불도 무너지자 "나라와 백성들을 보호하라고 만들어 놨는데 네 몸 하나 못 지키냐!"라고 화를 내며 직접 쓰러진 대불에다 활을 쏘았다는 일화도 있으며, 조선에 보내는 국서, 즉 정식으로 보이는 외교 사절에 어머니가 태양 꿈을 꾸고 자신을 낳았으니 자신은 태양(일륜)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거나[30], 조선과 명 더 나아가 인도까지 평정한 대제국을 만들어 억만년을 다스리겠다는등 자만이나 오만을 넘어선 광오한 말도 아무렇지 않게 주장했으며, 심지어 이를 임진왜란으로 직접 실천하려 했다. 당연하게도 저런 광오한 발언 외에도 조선에서 사신이 왔는데 조선 사신과의 회견에 0살짜리 아들도요토미 츠루마츠를 데려와서 츠루마츠가 소변을 지려 조선 사신들을 벙찌게 하는 등 기본적인 서식이나 예절도 지켜지지 않는등 그의 부족한 지식이 부각되기도 했다. 오죽하면 히데요시의 이런 행동거지에 대해서 단순히 대국적인 안목이 부족한 수준이 아니라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즉 치매와 같은 질환에 걸려서 그런 거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 임진왜란 직전 조선이 전쟁 가능성을 오판한 이유도 이 부분이 작용했다는 해석이 있다. 히데요시의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행동과 배경 탓에 오히려 '히데요시 이 작자 과연 제정신인가? 이런식으로 전면 침공을 하겠다고 주장하는게 대체 말이 되는가? 이전과 유사한 왜구들의 대규모 노략질 수준이겠지.'라는 '상식적인' 결론을 내리고 준비했다가 임진왜란을 맞닥뜨리게 되었다는 것.

물론 임진왜란은 단지 광오함에 빠져 저지른 짓만은 아니었고 측근인 칠본창의 입지를 키우는 한편 평화가 도래하기 시작한 일본 내의 군사력을 외부에서 소모해 분쟁의 여지를 최대한 억제함으로써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안정적으로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는 나름의 판단은 있었으나, 측근은 물론이요 어머니인 오만도코로마저 꺼리거나 반대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만만하게 강행했을 정도로 그 행동이 이해하기 힘든 면이 있었다. 사실 정말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자기 자리를 물려주고 싶었으면 조선을 침공하는 게 아니라 다이묘들을 숙청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히데요시의 상황 상 그게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조선 침공을 하게 된 것도 있다. 사실 히데요시는 결국 이에야스와 싸워서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야스가 자신에게 만나러 오라고 보채거나(이에야스도 결국에는 가긴 하지만 꽤 오랫동안 가지 않고 버텼다.) 심지어 인질을 보내기까지 하는 등의 짓을 할 수밖에 없었던 불안정한 정권이었다.

또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지는 뛰어났지만 생각이 짧았으며 장기적인 안목의 일은 하지 못했다. 일례로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경우, 죽일 거면 죄를 뒤집어 씌워서 할복시키는 멍청한 방법으로 죽일 게 아니라 때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순신과 맞붙여 버리는 게 훨씬 좋은 방법이었다. 이순신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당시 일본군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넘지 못할 어마무지하게 높은 산맥과도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수군으로 만들어서 이순신을 공격하게 하면 간단히 제거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죽였으면 사람들은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적과 싸우다 전사한 것이라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도 세력이 분열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31]

반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자신을 몰아내겠다는 인간이 아예 자신의 정적들을 숙청하라고 판까지 깔아주고 이를 최대한 이용해서 거의 대다수의 다이묘들을 숙청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에도 막부를 안정시켰다. 실제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숙청한 다이묘들은 전부 서군 다이묘였으며, 서군 측 다이묘 중 숙청을 피한 유일한 인물은 조선과의 관계 개선에 반드시 필요했던 쓰시마 당주 소 요시토시였다.

후계자 선정에 있어서도 문제가 많았는데, 많은 처첩을 두고 이들과 관계도 부족하지 않게 맺었음에도[32] 정작 아이는 잘 잉태시키지 못해 불임 또는 난임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당시부터 많았으며, 심지어 기껏 가진 친자식 두 명 모두 어릴 적에 요절하는 바람에 결국 정치적 이유로 여럿 받아들인 양자중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지은 상태였다.[33] 사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던 게, 히데츠구 본인은 윗선인 덴노와 타 다이묘들, 심지어 백성들에게까지 고루 평판이 좋았으며 임진왜란 등 외정에 집중하던 히데요시를 대신해 내정을 솔선수범해서 돌보고 프로이스 등 선교사들마저 히데츠구를 우호적으로 보는 등 당대 일본 전역에서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없다시피 할 정도로 이상적인 후계자였다. 요약하자면 인망, 능력, 윗선의 지지 등 모든 면에서 후계자로서의 덕목을 고루 갖췄다 볼 수 있던 것이다.

문제는 히데요시 말년[34]도요토미 히데요리가 태어나자[35] 부성애라도 느꼈는지, 아니면 노망이라도 났는지 이미 유력 후계자로 추대되던 히데츠구를 두고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세우려 한 것.[36]

불길함을 느낀 히데츠구도 히데요리가 너무 어린 점을 들어 자신의 딸과 결혼시킨 뒤 자신의 후계자로 내세우면 안되냐고 주장한다든가, 아예 히데츠구 본인이 후계자 지위를 포기하고 출가하면서까지 히데요시의 적대감을 줄이고자 별 짓을 다했으나, 히데요시는 끝끝내 이런 히데츠구의 간절한 행위를 짓밟고 그의 일족을 뿌리째 뽑아버렸다. 혹시 모를 여지도 남기지 않는단 이유로 아직 나이가 어려 히데츠구와 관계를 가지지도 못했던 코마히메나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히데츠구의 친자식 츠치마루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딸인 코마히메라도 살려달라며 필사적으로 사정한 모가미 요시아키를 필두로 다테 마사무네,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등 유력 다이묘들이나 가신들에게도 일방적으로 징계를 내렸고[37] 결국 이 일은 히데요시 평생의 제일 치명적인 정치적 실책이 되어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사후 반 도요토미 파벌을 흡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 천하인이 되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이 사태가 얼마나 파장이 컸는지 히데요시 사후 수십 년이 지난 뒤 오사카 전투가 종전되고 히데요리의 어린 아들이 처형될 때도 "이게 다 히데츠구를 죽인 것에 대한 천벌을 받는 거다."라며 동정한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결론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일본 전국을 통일난세의 영웅이며, 일본 역사상 최초로 중국인도를 무력으로 지배할 계획을 실행에 옮긴 정복 군주이다. 그러나 이러한 야망이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꺾이며 2대를 넘기지 못하고 정권의 몰락을 자초한다. 자신의 적이었던 선조와는 반대로 난세 + 휘하 장수일 때는 명장이었으나 치세에는 암군이었던 셈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장수로서는 쓸만했지만 정치가로서는 불안정했다는 말이 어울렸던 인물.

6.2. 일본

일본에서는 밑바닥의 병사부터 시작해서 관백이라는 무신정권의 최고 위치까지 오른 그의 입지전적인 출세 경력[38]과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 국내에서의 업적, 평소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던 성격[39]에도 꽤나 주목한다. 일본인들이 자주 쓰는 히데요시의 호칭 중 하나는 생전에 그의 경칭으로 쓰인 '태합(太閤)'이다.

에도 막부 시절에는 에도 막부가 도쿠가와 가문인 만큼 철저하게 악담과 승자의 역사로 인해 저평가되었지만,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에도 막부를 격하시키면서 히데요시를 자연스럽게 칭송하더니 그가 쇼군을 자처하지 않고 명분상 천황을 중시하여 관백 직위를 받은 점이 높게 평가되었다. 이상적인 공무합체(公武合體)[40] 사례로 여겨져 히데요시를 신으로 모신 신사를 재건하는 등 이후 일본 제국 시절에는 상당히 고평가되었다.[41] 대외 침략에 매진했던 그들에게는 히데요시가 선구자였던 점도 주효하였다.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경술국치 당시 "코바야카와, 가토, 고니시가 이 날을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시를 지을 만큼 그들에게는 임진왜란이 대륙 침공의 모범적 사례, 히데요시는 그 나름의 국위선양을 이룬 인물로 인식된 모양이다.[42]

특히 오사카를 거점으로 삼아 도시의 상징인 오사카 성을 쌓고 일대를 크게 발전[43]시켰던 인물이라 오사카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오늘날에도 오사카 사람들은 히데요시를 타이코한(太閤はん)[44]이라는 친숙한 애칭으로 부른다고 한다.[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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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성 앞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 그리고 그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제신(祭神)으로 기리는 호코쿠(도요쿠니) 신사(豊國神社)가 있다. 일본의 107대 천황인 고요제이 덴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호코쿠다이묘진(豊國大明神)이라는 신호(神呼)를 내려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으로 모셔지게 됐고, 신호에 따라 호코쿠 신사라고 불리게 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출세의 운을 받아보고자 지금도 많은 일본인이 이곳에 와서 참배한다고 한다.

다만 일본의 패전 이후 이에야스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하소설 버프를 받아 재평가를 받게 되었지만 히데요시의 경우, 제국 시절 당시의 히데요시를 크게 호평하던 집권 세력들이 조금씩 물러나면서 객관적인 평가를 다시 받게 되었고 결과적으론 임진왜란 전의 업적만 인정하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다. 일본에서도 임진왜란을 비판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는데, 권위 있는 통사를 내기로 명성이 높은 야마카와 출판사의 <일본사>는 임진왜란을 명확히 "침략"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237 페이지의 소제목은 <도요토미 정권의 변질과 제1차 조선침략>이다. 인터넷과 정보의 발달로 인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평가는 일본 내부에서도 점점 떨어져가고 있는 현실에 놓였다.

이렇듯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까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대한 일본의 국가적인 고평가는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세운 에도 막부신분제를 무너뜨리고 정계 진출에 대한 공평한 기회를 창출했다는 일본 신정부의 공로를 선전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프로파간다였을 수 있다. 현대의 일본인들이야 히데요시를 특별히 미워하거나 원한을 품을 구실은 없을 것이므로, 히데요시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과거보다 현재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일본 제국에 의해 필요 이상으로 높이 평가된 것은 사실이므로, 조선 세조의 경우처럼 후대의 특정 정권에 의해 정치적 목적으로 높이 평가된 측면도 있는 셈이다.

재한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이토 히로부미와 더불어 사실상의 금지어 취급을 받고 있다. 아무리 일본 본토에서 출세의 대명사라 해도 최소한 한국에서는 극악무도한 침략자인 만큼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재한일본인 자신들에게는 자멸행위나 다름없기 때문이다.[46]

6.3. 한국

한국사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친 임진왜란의 주동자이기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는 먼 훗날의 이토 히로부미,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과 더불어서 평판이 엄청나게 나쁜 대표적인 일본인 중 1명이다.

<징비록>, <조선왕조실록>이나 임진왜란 직전 조선 통신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그에 관한 서술이 남아 있는데, 대체로 "생김새는 원숭이 같고, 왜소한 체격을 숨기기 위해 낙낙한 옷을 입었다. 볼품없는 풍채이나, 눈빛만은 광채가 형형해 주위의 대신들을 압도했다"는 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또한 일본인들의 기록에는 없지만 강항 선생의 <간양록>이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 등 외국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오른쪽 손가락이 6개였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컴플렉스가 있어서 잘라버렸다고도 한다. 다만, 전근대시대 인물에게 손가락이 6개였다느니하는 기록은 좀 걸러서 해석해야한다. 당대 유럽기독교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런 기형은 마녀나 악마 숭배자의 상징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고의로 특정인을 까내리려고 이런 식으로 묘사하는 일은 흔했다.[47]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보다도 먼저 가톨릭 탄압을 시작한 인물인 만큼, 그 가톨릭의 선교사인 루이스 프로이스가 그를 좋게 표현했을 리도 만무하다. 일단, 그가 다지증이라는 풍문은 만화 센고쿠 덕분에 한국에도 알려졌다.
이 외에도 조선에서는 한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군을 시역했다'는 식의 풍문이 널리 퍼진 바 있다. 이러한 풍문은 <징비록>과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시역했다는 사실은 조선 조정이 일본과의 수교를 꺼린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훗날 강항 등이 도착해서 '찬탈, 즉 반역을 한 것은 맞으나 시역은 아니다'라고 했다.

히데요시가 반역자인지 어떤지에 대해 여기서도 평가가 갈렸다. 통상 반역을 '주인에게 가야 할 권리를 부하가 빼앗는 행위'로 해석한다면, 히데요시는 오다 히데노부에게 가야 할 주군으로서의 권리를 결과적으로 볼 때 빼앗은 셈이므로 히데요시도 반역자이다. 그러나 전국시대는 혼란스러운 시대였으니 당시 일본에서 특이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오다 가문은 히데요시와 서열이 뒤바뀌어 있기는 하나 요도도노 등의 사례를 통해 볼 수 있듯이 히데요시의 배려로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았고 훗날 가문이 이어져서 메이지 시대 당시 자작급은 될 정도로 그 세력을 유지했다. 중국식으로 보면 이왕삼각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할 수 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명히 오다 가문이 일궈낸 자리를 찬탈한 반역자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찬탈당한 오다 가문에게도 일본 전역을 통치할 정통성이 있다고 보기는 또 어렵다는 것이다. 히데요시가 워낙에 천한 신분이었기에 잘 부각되지 않는 것이지 오다 가문도 기존에 일본을 통치하던 명문가들과는 인연도 없었고[48], 노부나가가 크게 일으키기 전까지는 오와리국도 제대로 통일하지 못한 상태로 전국 다이묘들 중에 3~40위 수준의 작은 영지밖에 없었다. 심지어 원래 오와리 슈고 다이묘였던 시바 가문을 하극상한 야마토노카미 오다 가문을 또 하극상해서 노부나가의 아버지대에야 겨우 독립 다이묘가 된 가문이었다. 즉, 평화로운 시대의 정통성 논리로 보면 오다 가문은 일본 전역은커녕 오와리국을 통치할 정통성조차 없었다. 실력으로 찬탈하고 차지한 다음에 시간이 조금 지나면 정통성을 대충 인정받는 풍조였었던 전국시대였기에 용납된 것 뿐. 히데요시가 실력으로 노부나가의 가문의 지배권을 찬탈한 것도 오다 가문의 그것과 별 다를게 없다는 것이다.

고전소설 <임진록>에서도 일부 이본에서는 평수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병권을 장악한 뒤 왜왕을 폐위하고 스스로 관백이라 칭했다는 설정이 나온다.(경판본) 근데 좀 뜬금없게도 사쓰마 출신이고, 어머니는 납치당한 중국인. 단 완전 뜬구름 소리는 아닌 게, 징비록에도 틀리기는 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출신이라는 서술이 있다. 아마도 당시 조선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출신이 아닌 중국 출신으로 보았고 때문에 임진록에서도 이런 설정을 넣었을지도 모른다.

조일관계가 정상화된 이후에 일본의 사정을 살피는 한편 다시 시작된 우호관계를 유지, 강화시키라는 임무를 띠고 파견되었던 조선통신사들도 일본에 대해 사뭇 객관적이고 심지어는 긍정적으로 보는 와중에도[49] 히데요시에 관한 문제만큼은 늘 민감했고, 임진왜란 전에 대한 평가는 조금씩 바뀌어도 적어도 왜란 이후의 히데요시에 대해서는 '용서 못할 국적이자 침략자, 천하만민의 원수'라는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그래도 예외가 있기는 있었으니, 1624년 당시 부사로 파견되었던 강홍중과 1763년에 서기로 파견된 원중거가 이들이다. 먼저 강홍중은 <동사록>이라는 일기 형태의 사행록을 남겼는데, 여기에서 도요토미가 일본 전국을 통일하고 안정시킨 것에 대해 짧게 소개하면서 "이러므로 수길이 우리나라와는 비록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이지만, 또한 공적이 있다 하겠다." 라고 평가했다. 또한 원중거는 사행 후 일종의 일본 백과사전인 <화국지(和國志)>를 쓰는데, 여기에서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도요토미를 까면서도 '중국으로 치면 진시황 같은 사람'이라는 평을 내렸다. 이것은 시황제가 한창 전국통일 이룰 때까지 영민하고 노련한 통치자의 수완을 발휘했으나, 말년에 이르러 교만과 독선에 허황된 망상에 빠져 나라를 떠받들 중요한 후계자를 내치고, 충신을 죽이고, 백성들을 시달리게 하여 패업을 제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과 같게 본 것이다. 반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나 지금이나 한국에선 ‘그래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단 낫다’는 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숙종 때는 히데요시를 모신 사찰에서 조선통신사들의 연회가 열렸는데 히데요시와 히데츠구가 증축한 덕에 도요토미 가문을 모신 절이라는 걸 알게 된 통신사 일행이 항의하는 바람에 다툼이 벌어진 적이 있다. 일본 측은 외교 문제로 비화할까봐 가짜 사료를 들고 와서 '이 절은 다른 사람이 세운 것이며 히데요시와는 관계가 없다.'고 거짓으로 해명했는데[50] 이렇게까지 성의를 보이자 통신사도 넘어가기로 했는지 연회가 재개됐다고 한다.

자국 일본에서도 히데요시의 평판이 나날이 부정적으로 흘러가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의 우리나라도 히데요시에 대한 평가는 딱히 변하지 않은 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임진왜란 이전의 능력 및 성과에 대해선 나름대로 고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임진왜란 발발 이후의 모습에 대해선 긍정적 평가는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7. 여담

8. 기타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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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とよとみ ひでよし, 천황에게서 받은 성이라고 해서 뒤에 の를 붙여 읽기도 한다. 구자체는 豐臣 秀吉[2] 1536년 2월 2일이라는 설도 있다.[3] 1536년 2월 2일 설이 맞을 경우 향년 62세[우지] 묘지는 하시바를 그대로 썼다. 자세한 사항은 우지(성씨) 문서 참고.[우지] [6] 양부라지만 겨우 1살 많을 뿐이다.[7] 한마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통일이라는 밥을 만들었는데, 그의 사후 히데요시 밑에서 조용히 야망을 키워가던 3대 천하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전부 꿀꺽해 에도 막부를 열어 버렸다. 그래서 일본사, 특히 전국시대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오다가 떡방아를 찧고 '하시바'가 만든 떡을 도쿠가와가 먹었다."는 구절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 전투 문서로.[8] 하지만 애당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통일도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센고쿠 시대 말기 최대 군벌이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무력으로 누르지 못했던 것이 컸는데 이로 인해 히데요시는 이에야스를 제거하지 못했고 결국 관동으로의 전봉(= 제후의 영지를 딴 곳으로 옮김.)이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그러나 이것조차도 이에야스가 관동 경영에 성공하면서 무위로 돌아갔고 오히려 히데요시 사후 이에야스가 관동은 물론이고 본인의 옛 영지의 영향력마저 되찾으며 거대한 세력을 갖추게 되는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어쨌든 형식상으로는 이에야스가 히데요시의 신하가 된 상황이었으니 일단은 그가 일본을 통일한 군주라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9] 고시치노키리 문장은 오동나무를 상징하며, 본래 일본 황실의 문장 중 하나였고 오늘날에도 일본 정부의 상징이다. 그러나 아시카가 다카우지고다이고 천황에게 하사받은 이래 재상이나 조정의 고관에게 하사되었고 오다 노부나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이 문장을 하사받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잡은 초기에만 이 문장을 사용했고 이후 본래 자기 가문의 문장인 접시꽃 문장을 쇼군 가문의 문장으로 사용했다. 오다 노부나가 문서에 있는 초상화에도 노부나가의 옷에 이 문장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고시치노키리는 주로 조정이나 중앙 정계의 정치적 유력자에게 수여되는 문장이고, 이외에도 각 가지의 잎 수가 2개씩 적은 고산노키리(五三桐)를 비롯해 다른 기리몬(오동나무 문장)들은 평민과 무가를 불문하고 폭넓게 쓰인다.[10] 역직은 군정직이고, 관백은 조정직, 그리고 관백은 품계 없는 관위로 품계가 가장 높은 관위는 태정대신. 다만 품계가 없다는 의미와 히데요시의 권력을 감안하면 최고의 자리라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무가 출신으로 관백이 된 이는 자기가 물려준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외에는 유일하다. 정1위는 죽어서나 되었고 생전에는 종일위였으니(살아서 정일위가 된 인물은 일본 역사를 통틀어도 고작 6명 뿐이다.) 위계 기준으로는 사실상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라갔다.[11] 일본 영상물에서는 젊은 시절부터 최고권력자에 오르기까지는 호방하고 대범하며 미천한 출신답게 재치있는 인물로 묘사하다가 말년에 타락, 노망드는 식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한국 매체에서는 당연하게도 히데요시가 침략자였던 만큼 악인으로 묘사된다.[12] 오다 노부나가가 히데요시의 정실부인인 코다이인에게 보낸 편지가 유래. 노부나가만 쥐처럼 생겼다고 생각한게 아닌지 김성일도 쥐처럼 생겼다고 평했다.[13] 대중에게 주로 알려진 별명으로 히데요시를 원숭이로 묘사한 그림이 많다.[14] 한국에서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을 가리키는 것과 마찬가지다.[15] 양부라지만 겨우 1살 많을 뿐이다. 히데요시가 천민이었던 반면 코노에 사키히사는 공가 귀족들 중 황족을 제외하면 가장 권위가 높은 후지와라 가문의 으뜸인 고노에 가문 사람인데다 아버지 대부터 본인까지 관백 겸 태정대신을 지낸 서열 끝판왕이었다. 천한 신분이었던 히데요시는 자신의 신분을 높이고자 양자로 들어가는 꼼수를 쓴 것이다.[16] 관백의 부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백-태합으로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 사람을 부르는 대명사가 되었다.[17] 출가한 이후의 법명.[18]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판.[19] 그런데 히데요리가 태어나면서 히데요시는 히데츠구를 숙청하고,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세웠다.[20] 세 사람의 키를 현대 일본인으로 비유하자면 오다 노부나가 187~8cm, 도쿠가와 이에야스 174~176cm임에 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4~5cm 정도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21] 현대에 유행하는 역사물 소설이나 게임을 통해 전국시대공명이라고까지 불리는 타케나카 시게하루나 그에 비견된다던 구로다 간베에가 초반부터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 그를 보좌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좀 더 정확히는 이들은 본디 오다 노부나가 직속 가신이었으며, 요리키(일종의 파견 근무직)으로서 히데요시의 보좌로 보내진 것이다. 즉 직위는 히데요시가 위라고 하더라도 이들의 상사는 사실상 히데요시가 아닌 노부나가였기에 히데요시도 이들에게 함부로 대하긴 힘들었다.[22] 공성전 당시 수공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거나 스노마타 일야성 전승, 주고쿠 대회전 등에서 부각된다.[23] 이에 관련된 일화로 당시 다도와 이에 관련해 고급 찻잔을 모으던 문화는 상류층들의 전유물이었는데, "평소 노부나가의 행실을 존경하던 히데요시가 큰 돈을 털어 모은 자신의 찻잔 수집품들을 노부나가에게 자랑했으나 노부나가가 "너 따위가 나랑 맞먹으려 한 것이냐!"며 드물게 그에게 격노했다."는 일화가 있다. 진위 여부는 불명이나 저게 사실이라고 전제하고 본다면 능력을 인정함과는 별개로 신분이 낮은 것도 사실인 히데요시가 귀족만의 문화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것은, 심지어 그게 자신의 흉내였다는 사실은 보기에 따라선 너를 흡수하고 지금보다 더 위대한 자리에 앉겠다.라는 야욕을 드러냈다고 볼 수도 있으니 노부나가의 격노가 이상한 것도 아니다.[24] 실제론 히데요시보다는 혈통이 좋았던 다른 전국 다이묘들도 대부분 자기 조상의 혈통을 부풀릴 수 있는만큼 최대한 부풀리는 풍조였단걸 감안하면 히데요시의 아버지는 아시가루조차 아니었을거라는 추측도 많다.[25] 누대에 걸쳐 섬기는 가신단.[26]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은 당대에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개념이며 애초에 7명도 아니고 9명이었다. 시즈가타케의 칠본창이란 말이 보급된 것은 에도 시대 이후에 생긴 창작이다.[27] 미나모토/겐지(源氏), 타이라/헤이케(平氏), 타치바나(橘氏), 후지와라(藤原氏)는 천황에게 사성받음으로서 쓸 수 있는 본성 중에서도 특히나 격이 높아 일명[28] 생전 노부나가는 일본 황실과 조정으로부터 종2위 우대신과 우근위대장직을 제수받았다가 천하인으로서 입지를 굳히며 조정으로부터 태정대신, 관백, 정이대장군 중 하나 이상을 제수받으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전 혼노지의 변으로 사망했고 사후 수백년이 지나서야 정1위로 사후 추서되었다. 즉 히데요시가 노부나가를 모든 면에서 따라잡거나 넘어서기 위해서는 저 세 관직 중 적어도 한개는 차지해야했던 것이었다.[29] 히데요시의 친구 토시이에의 기록에 따르면 노부나가에 대한 공포심과 죄책감도 가지고 있었던듯 하다. 말년에 병으로 죽어가는 와중에 노부나가가 나타나 히데요시를 저승으로 데려가려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히데요시는 "내가 원수 아케치를 죽이고 오다 가문을 보전하지 않았냐"고 항변했지만, 노부나가는 "그러기에는 내 아들을 비롯한 오다 일족들을 죽이고 핍박했기에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며 일갈했고 멱살을 잡고 끌고 갔다고 한다. 깨어난 히데요시가 주위를 살펴보니 진짜로 끌려간 듯 이부자리에서 한참 떨어진 자리에 누워있었고, 이 꿈을 계기로 히데요시는 건강이 더 악화돼 곧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30] 사실 중화질서는 둘째치고, 명목상이나마 천황의 아랫사람으로서 할 소리는 아니다.[31] 실제로도 다윗밧세바를 손에 넣기 위해서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가 전사할 때까지 계속 싸웠다. 당시 다윗의 백성들은 우리아가 전사한 줄로만 알았지 다윗에 의해 숙청당한 줄을 몰랐을 정도였다.[32] 히데요시는 당대 귀족들 풍조와 달리 미소년 남색도 아예 안하고 여자만 탐했는데도 임신을 잘 못 시켜서 더욱 부각됐다.[33] 이는 히데츠구의 친모가 히데요시 본인의 친누나라 히데츠구는 본인의 입장에선 조카이기 때문에 양자 중 제일 가까운 혈족이란 점이 컸다.[34] 히데요시가 56세일 때, 아내인 요도도노가 30세일 때 본 아들이다. 10대 후반~20대 초반 즈음엔 아이를 보는 게 기본인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요도도노 입장에서 보더라도 노산에 가까웠다.[35] 사실 히데요리 이전에 츠루마츠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병으로 어려서 죽었다. 그래서 더 히데요리를 싸고 돌았다고도 할 수 있다.[36] 히데츠구도 불길한 느낌을 받았는지 히데요리가 태어난 뒤 축하연의 초대장을 받고도 천식을 이유로 불참했다고 한다.[37] 그나마 모가미 요시아키와 다테 마사무네는 이에야스의 탄원서로 몇 달간 근신만 받았을 뿐 징계 자체는 받지 않았다.[38] 세계사 전체를 둘러봐도 히데요시와 동급이거나 그이상의 자수성가로 평가받는이가 중국의 주원장나폴레옹밖엔 없으며 이때문에 많은 역사학자들이 히데요시의 비교대상으로 항상 주원장나폴레옹을 언급하며 이둘과 비교분석하거나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에 일본의 중국사 전공자들은 주원장을 히데요시의 상위호환이라 평하거나 일본의 유럽사 전공자들은 히데요시와 나폴레옹을 서로 비교하며 둘이 왜 잘나가다 망했는지를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39] 그러나 이것도 정확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본인이 천하인이 되고 후계자 아들인 도요토미 츠루마츠를 잃기 직전, 흑화하기 전의 성격이다. 츠루마츠를 잃고 임진왜란을 일으킨 걸로 모자라 조카이자 양자인 도요토미 히데츠구를 숙청하기까지 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코 다정다감하고 허물없는 성격이 아니었다. 성격이 괴팍해지고 본인이 짜놓은 큰 계획들이 뜻대로 잘 안풀리면서 초조와 불안 상태에 더 많이 머물게 되었다.[40] 공가(= 조정)와 무가(= 실권을 쥔 무사 가문)가 조화를 이룸.[41] 어차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본인이 미천한 출신이었다가 크게 성공한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을뿐더러 본인의 직위였던 관백이 쇼군보다 오르기 어려운 직위였기에 굳이 천황가의 후손을 사칭하면서까지 쇼군이 될 필요를 못 느꼈을 것이다.[42] 반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음침한 계략꾼으로 상당히 저평가되었다. 이유는 물론 메이지 유신을 이끈 유신지사들 입장에서는 타도해야할 타락한 구체제가 에도 막부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나 그 시조인 이에야스를 깎아내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이에야스는 일본 황실을 푸대접했다고 여겼고, 이러한 격하에는 괘씸죄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야스 외에도 일본 역사상 천황을 갈아치웠던 무로마치 막부의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요시미츠는 그 목상(木像)이 대역죄로 효수를 당했다. 사실 임진왜란은 객관적으로 봐도 그리 성공적인 침략이라고 보기 어렵다. 첫 해는 조선의 국방 상태가 안 좋은 점이 유리하게 작용해서 평안도와 함경도까지 진격하긴 했으나 결국은 공세종말점에 다다르자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이듬해부터는 후퇴를 거듭하여 조선 내 거점이 부산을 포함한 경상도 일대로 축소되었다. 이후로는 시간만 끌었을 뿐 딱히 이렇다 할 성과도 없이 행패만 부리다 히데요시가 죽고 나서야 자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적어도 도요토미 정권이 일본을 통치하는 동안은 일본이 임진왜란으로 손해만 봤다고 봐도 무방하다.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이 도자기 제작 기술과 유학이 발달하는 등의 이익을 보긴 했지만 이것도 도요토미 정권이 멸망한 후의 일이었다.[43] 사실 오사카는 혼간지 겐뇨가 거점을 차리고 오다를 고생시킬 정도로 노른자위 땅이었다. 히데요시가 영지로 삼은 이후에는 사카이를 교역거점도 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크게 발전했다.[44] 'はん'은 "~씨"를 뜻하는 'さん(~상)'의 간사이 방언이다. 한국식으로 번역하자면 방언이니까 '태합 아재', '태합 씨' 정도.[45] 사실 유능한 센고쿠 다이묘들은 오늘날 현지에서 스타 취급받는다. 다케다 신겐도 야마나시현에서 지역 대표 위인 대접를 받는다. 정작 관백을 그만두고 태합으로 물러난 말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시대를 끝낸 그 영웅이 맞나 싶을 정도로 타락한 뒤였다. 굳이 임진왜란이 아니어도 도요토미 히데츠구 및 그 일가를 잔혹하게 숙청하여 도저히 좋게 평가하기 힘든 상황이었다.[46] 비슷한 이유로 숭덕제 또한 재한 만주족 사이에서 사실상의 금지어 취급을 받고 있다.[47]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보다도 앞선 시대의 인물인 앤 불린도 정적들에 의해 다지증이라는 가짜 뉴스가 퍼지는 굴욕을 당한 일화가 있다.[48] 본인들은 타이라, 후지와라의 먼 방계 가문이라 주장했지만 신빙성은 낮다.[49] 무작정 까내리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살펴보고 나서 깔 것은 까고 괜찮다 싶은 것은 볼 만 하다고 인정하는 태도는 1607년, 전쟁이 끝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파견되었던 통신사들의 사행록에서도 엿보인다.[50] 가짜 문서를 가져와 보여준 인물이 쓰시마의 입장을 대변하는 위치였던 아메노모리 호슈였는데 신유한의 사행 기록인 <해유록>에는 아메노모리가 통신사들이 끝내 접대를 거절하자 분해하면서 칼까지 빼려고 하는가 하면, 통신사들에게 가짜 기록을 보여주고 난 다음 날에도 실무를 맡은 일본 관리들에게 일본말과 조선말을 섞어가며 갈구고, 통신사들에게도 "저희가 아니라고 문서까지 가져와 보여드렸는데 안 믿어주시니 섭섭합니다"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되어 있다.[51] 네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남편의 바람기를 가지고 하소연하자 이에 상관인 오다 노부나가는 "일전에 보았을 때 그대는 더 아름다워지셨소. 토키치로(히데요시) 녀석이 그대에 대한 불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이는 언어도단. 저 대머리 쥐새끼 녀석이 그대만큼 훌륭한 여성을 또 얻을 리는 없을 테니 그대도 부인답게 당당하게 행동하고 질투는 하지 않도록 하시오. 그리고 이 편지는 토키치로에게도 보여주도록 하시게."라는 서신을 보내 네네 편을 들어줬다.[52] 노부나가의 딸, 노부나가의 여동생 오이치노카타의 딸 요도도노, 노부나가 남동생의 딸 등. 특히 요도도노는 전국시대 최고 미녀였던 이치히메(오이치)를 닮아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최고 미녀로 명성이 자자했던지라 가장 총애했다.[53] 사실 오다 가문은 미남미녀가 많기로 유명한 가문이었고 오다 노부나가 역시 대중매체에서 당당한 미장부로 그려지는 일이 많다.[54] 에도 시대 조선 통신사에서 조선 측 서장관인 신유한이 유학자인 아메노모리 호슈에게 "남자가 여자와 서로 어울리지 않고 같은 남자와 어울린다니 괴이하다"라는 반응을 보이자 아메노모리는 "학사님이 그게 얼마나 좋은 건지 모르시나 봐요"라고 대답하니, 이를 들은 신유한이 "성리학자인 아메노모리도 저런데 보통 일본인들은 오죽하겠나."라는 식으로 평한 기록이 있다. 다만 이런 남색 문화는 상류층이나 즐기는 것이었고 일반 백성이 즐기는 문화는 아니었다.[55] 도요토미나 도쿠가와나 천하인이라는 입지와 힘을 이용해서 각각 후지와라씨의 양자가 되어 관백이 되고, 겐지를 칭해 정이 대장군이 되었다. 그럴 힘이 없었다면 후지와라나 겐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해봤자, 아무도 들은 척도 해주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56] 사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동맹 관계였으니(물론 실질적으로는 오다 > 도쿠가와였지만 명목상으로는 동격이다. 실제로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가 포함되어 정치적인 중요성이 높은 서쪽 땅은 자기가 가지려 했지만 그래도 동쪽은 이에야스에게 주려고 했을 정도.) 원래라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동맹의 부하 1에 불과한 입장이었다. 그런데 오다 가를 차지하고 자신에게 인사하러 오라고 을러댔으니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고까웠을 듯. 말할 것도 없이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천하를 차지하려는데 있어서 제일가는 장애물이었다.[57] 사실 이보다는 이에야스가 에도 경영을 이유로 내세웠던 것이 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해 고쿠다카는 더 크지만 실제로는 구 호조 영지라서 다스리기 매우 어려운 에도를 영지로 주었던 것.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대실패로 이에야스는 결국 이 땅을 휘어잡는데 성공했고 거기다 이전의 자신의 영지였던 미카와와 도토미에 대한 영향력도 잃지 않았다.[58] 정사에서는 오사카 성 전투에서 전사했다.[59] 이렇게 큰 땅덩이를 계승자가 아닌 아들에게 떼어주는게 불합리하다고 여긴 가로가 저지했기 때문에 타테이시 번은 결국 절반 크기인 5천 석밖에 받지 못했는데 키노시타 가의 전승에 의하면 나중에서야 노부요시의 정체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아들 쿠니마츠이고 선대 영주 노부토시가 그를 모시기 위해 1만 석을 주려고 했음을 알게 된 가로는 자신이 주군의 깊은 뜻이 담긴 유명을 어겼다는데 죄책감을 느껴 할복했다고 한다.[60] 키노시타 무네토시 씨는 아직도 현지에서 지역 유지의 대접을 받으며 사람들에게 "영주님"으로 불린다고 하며 도요토미의 성씨가 적힌 인장을 대대로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