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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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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宇 | DAEW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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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다국적 기업)
창립일 1967년 3월 22일 ([age(1967-03-22)]주년)
해체일 1999년 11월 1일 (회장 및 사장단 퇴진)[1]
2001년 5월 23일 (상장폐지 및 법인 청산)
창업주 김우중
회장 김우중 (1967~1999)
장병주 (1999~2001, 회장 대행)
규모 대기업
유형 복합 기업, 기업 집단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5가 541[2]
(대우센터빌딩, 서울스퀘어)
사업 분야 전자, 건설, 자동차, 금융, 화학, 무역, 중공업, 조선업 등.
웹 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웹 아카이브)[3]
1. 개요2. CI3. 역사
3.1. 태동기3.2. 성장기3.3. 몰락기
4. 사옥5. 역대 임원6. 기업정신7. 탱크주의8. 현재9. 해체 이유
9.1. 정설 - 막대한 채무와 분식회계9.2. 해체 관련 음모론
9.2.1. 유대인 배후자본설9.2.2. 대북사업 비협조설9.2.3. 정부와의 악연설
10. 부채11. 부활 가능성? (무산)12. 계열사 목록
12.1. 전자·정보통신12.2. 건설12.3. 자동차·중공업12.4. 섬유·화학12.5. 무역·서비스12.6. 금융12.7. 공익사업
12.7.1. 스포츠단
12.8. 관계사12.9. 관련 단체
13. 여담14. 대중매체에서15. 참고 자료

[clearfix]

1. 개요



1967년부터 2000년까지 대한민국 경제계를 호령하던 4대 재벌[4] 중 하나였으며, 현재는 해체된 기업집단 중 하나며 창업주는 주산 김우중이다. 대도섬유의 대(大)김우중우(宇)를 따서 만들었다. 섬유, 무역, 건설, 조선, 중장비, 자동차, 전자, 통신, 관광, 금융 등 여러 사업부문을 두었으며, 1980년대에는 현대그룹에 이어 재계 2위에 올랐고 1993년 세계경영 전략 채택 이후 강력한 외형확장으로 사세를 넓혀갔으나, IMF 외환위기 이후 자체 구조조정 실패와 1999년 삼성과의 전자-자동차 빅딜 실패로 1999년 10월부터 워크 아웃(Work Out)에 들어갔고 그룹 해체를 맞았다.

창업 초기에는 흔하디 흔한 중소기업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지만, 연줄[5]과 김우중 자신의 경영 능력이 겹쳐 빠른 속도로 성장해나갔다. 특히 1970년대 중동 붐으로 엄청난 잭팟을 터트렸으며 197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오늘날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는 현대그룹, 삼성그룹, LG그룹[6]에 이은 4위 그룹으로 등극하며 한국을 호령하는 재벌 그룹 중 하나가 되었다. 1980년대 중동 붐이 끝난 뒤에도 5공 정권의 부실 기업 정리 정책의 수혜자로서 문어발식 경영 확장으로 세를 불려나갔으며 1990년대에 북방정책동유럽 혁명을 기회 삼아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을 꾀했다.

그렇게 1990년대 중반까지 기업 규모를 지속적으로 불려나가며 승승장구를 지속했고 1997년 외환 위기를 맞은 뒤로도 몸집 불리기 차원서 쌍용자동차를 인수했고[7] 그 결과 1999년에는 삼성을 제치고 재계 순위 2위를 차지하였다.[8] 김우중 입장에서는 오일쇼크 때 위기를 기회 삼아 몸집을 불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 작전을 구사한 것이겠지만 이러한 몸집 불리기는 당시 금융 환경이나 시대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너무도 무모한 작전이었고 결국 막대한 부채의 만기가 돌아오면서 자금난에 봉착하고, 엄청난 규모의 분식회계[9]가 드러나면서 김우중 회장은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되었으며, 2000년 주요 계열사가 모조리 워크아웃에 들어가 대우그룹은 공중분해됐다.

독단적이지만 우월한 경영으로 소문났었는데. 대기업에 입사를 하면 삼성은 책상 속에 연필까지 깎여 모든 게 준비돼 있고, 현대는 책상이라도 갖춰져 있고 대우는 책상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당시엔 철저한 관리가 모토인 삼성과 현장의 힘이 강한 현대, 자유로운 발상의 대우를 비유한 말이었지만, 현 시점의 세 그룹의 위상을 고려할 때에는 절묘하게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10]

2. CI

파일:대우그룹 초기 로고.jpg
창립 당시부터 1974년 중반까지 사용한 로고.[11]
파일:대우그룹 로고(1974-1977).jpg
1974년부터 1977년 말까지 사용한 로고. 오른쪽의 마지막 로고와 달리 6개의 줄로 구성되어 있다.
파일:대우 영문 로고_상하.svg
1978년부터 해체까지 사용한 로고.

그룹 로고의 상징에 대해 말하자면, 외곽을 타원으로 가장 넓고 큰 공간을 형성시켜 미래 지향적인 넓은 세계, 곧 5대양 6대주를 의미하며 전체가 하나의 세계를 이룬다. 일명 '오리발' 로고로 많이 불린다. 청색 부분은 창조와 도전, 흰색 바탕은 희생과 봉사를 상징한다.

3. 역사

3.1. 태동기

1967년 3월, 한성실업 출신 샐러리맨 김우중이 대도섬유 사장 도재환과의 5:5 공동출자로 서울 충무로에서 자본금 500만원,(2023년 시세로 약 2억대) 동남도서빌딩 3층에 무역업체 '대우실업'을 설립하고, 부산에 공장을 설치하여[12] 와이셔츠 등 공산품 수출을 시작했다. 대우라는 이름은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우중의 우(宇)에서 딴 것이다. 창업자는 김우중인데 회사 이름은 '우대'가 아니라 '대우'가 된 이유는 대도섬유의 도재환 사장이 자본금을 전액 출자해줬기 때문이라고 한다.[13]


1979년에 제작된 그룹 PR.

1970년대 경제성장 및 수출 호조에 따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힘입어 단기간에 국내 최대기업으로서 성장했다. 1973년 영진토건과 동양증권을 인수해 건설 및 금융업에 각각 손을 뻗었고, 1974년 동남전자를 인수하여 '대우전자'로 개편해 전자제품 수출업에도 손을 뻗었다. 1976년 부실기업 한국기계를 인수하고서 중공업 사업에 손을 뻗기 시작해 1978년 대한조선공사로부터 옥포조선소를 인수하여 '대우조선'을 세웠고, 1979년 새한자동차도 인수해 중공업 사업군을 형성했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부실 국영기업의 매각[14] 등 M&A를 많이 활용한 측면에선 이후의 STX웅진그룹[15] 등과도 비견된다. 1976년 기획조정실을 신설해 지주회사의 모양새를 갖췄다.

3.2. 성장기

1981년 대우개발이 대우실업을 합병해 '(주)대우'로 출범했고, 1983년 대한전선으로부터 가전사업부, 오리온전기, 대한통신공업, 광진전자공업 등을 인수해 전자/전기산업에도 손을 뻗었고, 1984년 부실 건설업체 경남기업도 인수했다. 다른 한편 그룹측은 해외 자원개발 참여, 해외 건설 및 조선 수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해외로 눈을 돌려 동유럽 및 신흥시장 개척을 추진해 왔으며 1993년 "세계경영"에 나서면서 중공업과 자동차, 특히 자동차 부문에서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1987년 경기도 용인군 백암면(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에 종합연수원을 세웠다.[16]

일세를 풍미하다 IMF로 공중분해된 대우그룹의 흥망성쇠와 함께 1980년대말 대우조선 사태를 포커스로 1989년 노동자 대투쟁이 전개되던 당시의 재벌기업-노동운동 간 충돌까지 포함한 사회상을 다루는 회차이다. 현재는 노동쟁의가 일상화된 풍경이지만 당시는 이런 논의가 제도권에서 다루어지는 것 자체가 사회적 쇼크였던 부분을 날 것 그대로 담고 있다. 모던코리아 2회


리즈 시절 막바지인 1996년에 제작된 그룹 PR. 아역 광고 모델은 장근석.


1999년 대우그룹의 마지막 광고. 위의 광고의 내용과 아래의 대사로 보아서는 완전한 해체는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고, 자동차관련 계열사만 남기는 구조개혁을 통해 자동차 전문 기업으로 변화하겠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하지만 이 때는 워크아웃을 결정한 상태라 이미 늦은 시기였다. 참고로 광고에 나오는 음악은 가을의 전설 OST에 수록된 제임스 호너의 'The Ludlows'이다.
(여 NA) : 1분을 하루처럼 썼습니다.
시간이 우리가 가진 유일한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1시간을 1년처럼 썼습니다.
시간이 유일한 재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피와 땀과 눈물의 시간이 이 땅의 시간을 세계의 시간에 맞추게 했습니다.
세계를 경영하게 했습니다.
세계가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새로운 천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우가 앞에 있습니다.

3.3. 몰락기

이 당시 김우중 회장은 그의 공격적인 경영 때문에 킴키즈 칸이란 별명이 붙었다. 공격적이고 팽창적인 진출과 경영 방식도 그렇지만, 중국-몽골-인도-우즈베키스탄-루마니아-폴란드로 이어진 자동차 공장 확장루트도 흡사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4년 뒤 몽골 제국처럼 사라졌다. 관련 기사

실제 당시 대우의 대외 확장 방식은 체제 전환기를 맞아 투자 유입을 갈망하던 구 공산권 국가의 다급함을 이용해 있는 대로 금융 지원을 받아낸 것으로, 당시에는 적은 투자로 큰 사업을 한다고 호언했으나 결국 도박에 불과했다. 이와 같이 극단적인 레버리징에 의한 과잉 투자의 몰락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도 맥락이 닿는다.

"만들어라, 그러면 팔릴 것이다"라는 야심만만한 발언은 정작 대우자동차가 주문물량을 소화하지도 못하면서 부채로 변했다. GM과 결별 이후 사들인 뮌헨 연구소, 영국의 워딩 연구소[17]와 폴란드의 FSO[18] 등도 모두 2000년 전에 모기업과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1992년까지 긴밀히 협력해온 제너럴 모터스폴란드에서 대우자동차가 정면충돌한 것도 이 시절인 1995년. 결국 M&A 다툼에선 승리했지만 이후 고부채로 포드에게도 버림받고 결국 GM에 팔린건 유명한 이야기다.

케이블 방송 초창기에는 DCN 같은 케이블 채널도 운영했으나, 1997년 외환 위기와 맞물려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경영여건을 극복하지 못하고[19] 2년 뒤인 1999년 동양그룹에 매각되었다. 이후 DCN은 채널명도 OCN으로 개명하고 2001년 오리온그룹 분가 때 합류했다가 2009년 CJ로 매각되어 2013년 12월, CJ ENM에 흡수 합병되었다.

1995년 우진필림으로부터 복합상영관 '씨네하우스'를 인수해 영화관 사업을 시작했고, '메가플렉스'란 이름으로 멀티플렉스 영화관 체인사업을 준비해 오다가 개장을 못 해보고, 결국 1999년에 (주)대우가 준비하던 영화관 사업은 동양그룹에 인수됐다. 그러다가 2001년에 동양제과 등과 함께 오리온그룹으로 분리됐다. 그러나 오리온그룹이 쇼박스를 제외한 미디어 계열사를 정리하면서 메가박스는 해외 자본에 매각되었다가 현재는 중앙그룹 계열에 인수됐다.

초기에 위태위태 할 때만 해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대마불사를 외쳤다. 의외로 IMF 직후 대우는 친정부 그룹의 선두에 있었다. 그래서 엄청난 위기 속에도 1998년부터 구조조정을 통해 계열사를 정리해 다운사이징을 했고, 1999년 7월에는 잠시 3조 원의 빚을 사재출연과 경영권 포기 등을 통해 위기를 잠시 넘기기도 했다. 하지만 대우자동차를 살리려고 마지막 순간에 삼성자동차를 받고 대우전자를 주는 빅딜을 하려고 한게 SM5 생산문제와 부산의 하청업체 문제 등으로 실패로 끝나면서[20] 엄청난 빚을 지게 되어 8월 워크아웃과 10월 김 회장의 중국 도피, 11월의 임원단 전원 사퇴로 몰락했다.

1997년 외환 위기가 아니었다면 인천광역시 연수구에 초고층 마천루를 지어 본사를 이전할 계획이었다. 대우그룹의 주요 계열사인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전자 등의 공장, 연구소들이 모두 인천에 위치해 있었고 대우그룹 인천 이전 계획과 연계한 것이 오늘날의 송도국제도시이고, 이곳에 건설할 예정인 151 인천타워가 이 마천루 계획의 후신격이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21]

참고로 그룹 존속 시절 대우증권과 오리온전기를 빼고 해체될 때까지 회사의 역사책인 사사(社史)를 단 한 번도 발간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87년과 1997년 두 차례 사사 발간 시도가 있었으나 노사분규와 IMF 사태로 각각 이루지 못했으며, 30년사 내용은 대우세계경영연구회 홈페이지에 있으나 회원만 공개중이다. 어느샌가 사사가 공개됐다.https://kimwoochoong.com/

대우그룹의 본산이던 (주)대우는 2000년 12월 상사부문을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인터내셔널)로, 건설부문을 대우건설로 분할시키고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 페이퍼컴퍼니로 남게 되었다. 2001년 5월 23일 대우중공업과 동시에 상장폐지[22] 이후, 2006년 3월 말 대우 계열 구조조정협약이 만료되고, 같은 해 5월 25일 법원에 파산신청을 내고 청산 절차에 들어갔다. ## 이로써 대우의 '세계경영' 신화는 역사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으며, 김우중 前 대우그룹 회장은 서울고법으로부터 징역 8년 6개월에 추징금 17조 원을 선고 받기에 이른다. #

4. 사옥

파일:대우센터빌딩.jpg
그룹의 상징인 대우센터빌딩(現 서울스퀘어)
서울역 앞에 대우센터빌딩을 직접지어 (주)대우의 본사 사옥으로 사용했었다. 그룹 해체 이후인 2006년 12월, 대우빌딩은 대우건설을 인수한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손에 넘어가서 30년동안 달고 있던 DAEWOO 로고를 떼고 금호아시아나 로고를 달았다. 매각과 동시에 건물 외벽의 대우건설 로고도 금호아시아나 CI로 교체되었다. # 그리고 4개월 후에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상황이 나빠져 모건 스탠리에 팔았다. 이후 리모델링을 하면서 건물 외관을 유리궁전으로 완전히 뜯어고치려 했으나, 대우빌딩이 용적률을 초월한 건물이라서 외관을 리모델링하면 모건 스탠리가 세금폭탄을 맞기 때문에 내부 수리와 외부 타일 교체만 하는 수준에서 그쳤다. 결국 모건 스탠리의 손에서 대우빌딩은 이름이 바뀌어 서울스퀘어가 됐다.

또한 그 거대한 모습으로 인해 서울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시골에서 상경하면서 서울역 도착해서 나오면 이 건물의 거대함에 감탄하고 '아! 여기는 서울이구나'를 알게 해주었다고 한다. 지금은 서울역 신역사가 약간 남쪽으로 내려와서, 대우빌딩을 약간 비껴서 보게 되기에 그 효과는 조금 줄어든 듯.

대우빌딩을 지을 당시 뒤에 있던 사창가와 빈민가 등을 서울역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시야에서 가리게 되었는데, 이로써 약자를 밀어내고 감추기 급급했던 서울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5. 역대 임원

6. 기업정신

창조, 도전, 희생
우리 대우가족은 창조, 도전, 희생의 대우정신을 지표삼아 기업활동의 모범을 보이고, 고객에게 봉사하며, 사회발전에 기여한다.

창조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지혜롭고 건설적인 사고다. 투철한 사명감과 성실한 마음으로 무장한 우리는 항상 자기개발에 힘쓰며, 강한 개선의 의지로 업무에 임한다.

도전은 기필코 자신의 목표를 성취해 내는 용감하고 개척적인 의지다. 진취적 기상과 불굴의 신념을 가진 우리는 어떠한 역경도 떨쳐내고 언제 어디서나 최선의 성과를 거둔다는 집념으로 반드시 주어진 책임을 완수한다.

희생은 대아와 대의를 위해 스스로 열성을 다하는 헌신적인 용기다. 확고한 주인정신과 소명의식에 불타는 우리는 근면과 절제를 자랑으로 여기며 솔선수범의 자세로 신뢰와 화목의 공동체를 만들어 보다 풍요로운 미래를 가꾸어 간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의 다짐이자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막중한 책임이다. 우리 대우가족은 이 엄숙한 소임을 깊이 자각하고 우리 사회와 후대를 위해 저마다 맡은 일에 열성을 다한다.
창조
1. 성실한 자세
대우가족은 적극적인 문제의식을 갖고 진지한 노력을 기울인다.
2. 개선의 자세
대우가족은 항상 탐구하는 자세로 담당한 업무를 발전시켜 나간다.
3. 자기개발의 자세
대우가족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되도록 부단히 실력을 연마한다.

도전
4. 진취적 자세
대우가족은 치밀한 사전 계획 아래 과감하게 업무를 추진해 나간다.
5. 개척의 자세
대우가족은 위험 속에서도 기회를 찾아내는 적극적 의지를 생활화 한다.
6. 집념의 자세
대우가족은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최상의 성과를 거두어낸다.

희생
7. 미래지향의 자세(사회에 대해)
대우가족은 내일의 더 큰 발전과 다음 세대를 위해 노력하고 봉사한다.
8. 솔선수범의 자세(조직에 대해)
대우가족은 항상 주인의식을 갖고 매사에 솔선수범한다.
9. 신뢰, 협동의 자세(동료에 대해)
대우가족은 확고한 동료의식으로 뭉쳐 언제나 최선의 협조를 제공한다.
10. 근면, 절제의 자세(자신에 대해)
대우가족은 개인이나 조직생활에 있어 근면과 절제를 적극 실천한다.
(1절)대우주 해와 달이 번갈아 뜨는 / 육대주 오대양은 우리들의 일터다
우리는 대우가족 한 집안 식구 / 온 누리 내 집삼아 세계로 뻗자

(2절)땀 흘려 공든 탑을 쌓아 올리는 / 굳은 뜻 곧은 마음 우리들의 방패다
우리는 대우가족 든든한 일꾼 / 뿌린 씨 열매 거둘 내일에 살자

7. 탱크주의


파일:대우전자 탱크주의 광고.jpg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관련 TV광고. 물건을 너무 튼튼하게 만든 "탱크주의" 때문에 신제품이 안 팔려서 망했다는 농담이 있고, 꽤 널리 퍼져 있다. 단 탱크주의는 어디까지나 대우전자의 슬로건으로, 타 계열사는 별 관계가 없다. 해당 광고 모델은 역사스페셜 진행자로 유명한 유인촌공룡선생에 출연했던 탤런트 조문정, 배순훈 당시 대우전자 사장이다.[24]

다만 여기에서 간과한 부분이 있는데, 필수기능과 튼튼한 제품으로 승부를 건 탱크주의 취지는 좋았지만, 당시 한국 전자제품은 전반적으로 품질이 매우 열악했다.[25]

사실 이 문제는 대우그룹 편입 이전 대한전선 가전부문 시절부터 유서가 깊었다. 이미 1978년 3월에 서울 서대문구 홍제 2동에서 TV 폭발로 어린이 2명이 화상을 입었고, 12월에는 경기도 인천시 남구 용현동에서 TV가 폭발해 일가족 5명이 사망하는 참사[26]가 있었는데, 둘 다 대한전선 제품이었다. (기사1 기사2) 이후 TV 부문은 절치 부심해 일본 SONY와의 기술협력으로 세계 최초로 고강성 CRT 모니터 개발을 하며 기술적으로 진보한 제품을 선보였고, 나름 고정 소비층도 탄탄했지만 신규 구매자층의 마음을 잡기에는 이미 한 발 늦었다. 결국 1983년에 대우그룹에 전자사업부를 매각했다.

사실 대우전자가 1990년대 초중반 이러한 캠페인을 만들어낸 것도, 위의 품질 문제와 연관된다. 비교적 구조가 간단한 제품은 고장도 잘 안나고 나더라도 고치기 쉽다. 그러나 쓸데없이 기능이 복잡한 제품들은 사소한 고장이 상대적으로 잘 날 수 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전자제품에 갖가지 기능들이 붙어 쓸데없이 복잡해지고[27] 경쟁사들은 이런 기능들을 '컴퓨터를 이용한 첨단 기능'으로 광고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러한 쓸데없고 복잡한 기능의 제품을 따라서 만들면 품질 문제가 걸릴 수 있으니 아예 기능을 줄여서 기본기만 갖춘 제품을 만들어 상대적인 품질 문제를 줄이고, 복잡한 기능에 피로감을 느끼는 계층을 타겟으로 탱크주의란 슬로건을 내건 것이다.[28]

그러다 보니 반대로 얼리어답터들에게는 탱크주의가 대우전자의 첨단 기술이 뒤떨어지는 것을 자뻑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첨단 기술의 상징이니 최첨단 기술의 상징이니 하는 용어로 싸우던 시절이기 때문. 하지만 지금과 달리 그 시절엔 얼리어답터들의 파급력이 별로 없어, 오히려 대우전자의 전략이 상당히 틈새시장을 잘 공략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해외시장에서도 이같은 일이 한번 벌어진 적이 있었는데, 대우전자의 탱크주의 슬로건을 장착한 전자레인지1997년 프랑스에서 우수한 평가를 얻으며 판매가 불티나게 팔리자, 오히려 자국산 전자 제품의 판매 부진을 우려한 강성 보수층에서 대우 불매운동을 벌여 인기와는 별개로 판매가 급감하기도 한 바 있었다.

7.1. 대우자동차

한편 자동차 부분에선, 특히 같은 시기 현대자동차에 비교해서 실제 1990년대 초반까지는 탱크라고 불러도 될 만큼 내구성 및 성능이 우수했기에 과소 평가된 경향이 크다. 게다가 언론의 영향으로 현대에 비해 대우는 뭔가 2인자의 이미지로 대중들에게 각인됐기에 당시 자동차 판매원들 사이에서 "대우자동차는 연비, 내구성, 디자인 모두 다른 회사보다 좋은데 대우 마크 때문에 팔리지 않는다." 란 말이 돌 정도였다. 특히 대우그룹이 해체되기 이전에 나온 대형 버스, 대형 트럭 같은 대형 상용차들의 내구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특히 잔고장이 적은 MAN[29]과의 기술 제휴를 통하여 개발한 엔진을 탑재해 1970년대 말 ~ 1980년대 운수산업 발전을 견인한 명품 BF101은 3만 대가 팔린 초 베스트셀러 차종이었다. 서울부터 소도시, 시골까지 BF101 시내버스가 없는 지역은 거의 없었으며, 운수회사들은 도로사정이 열악한 지역에도 과감히 뛰어들며 비로소 제 이익을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의 시내버스 구도를 보자면 현대자동차 버스부문 시내버스의 경우 잔 고장이 잦았고(특히 HD160 차종이 심했었다. 반대로 HD170은 BF101과 같은 D0846HM-V 엔진 장착), 동아자동차 HA20의 경우 출력은 좋았으나 연비가 나빴으며 아시아자동차 시내버스의 경우 한 대 당 가격이 비싼 걸로 유명했으며, 후에 현대가 1982년에 HD170의 후속모델 FB485를 출시하면서 편의성을 향상시켰으나 당시의 시내버스 업체들은 여전히 연비좋은 BF101을 선호했다.

또한 자동차 합리화 조치 이전의 경우에도 상용차 부문에서는 엘프대우 이스즈 대형트럭 모델들이 현대와 기아 등의 경쟁자들과 쟁쟁히 경쟁을 이어갔으며, 1980년대 후반에 조치 해제 이후에도 개쪽박찬 바네트엘프 2를 제외하면 1995년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한 트럭인 차세대 트럭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한 바 있었다.

그러나 승용차 부문에서는 라이벌인 현대나 기아가 선진국 시장의 경쟁 압력에 살아남기 위해 기술 자립도를 높이며 꾸준히 상품성을 끌어올린 반면, 대우는 GM과 본격적으로 충돌하기 전까지 GM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경쟁력을 잃었다. 단, 이 점이 기술 개발에 소홀히 한 대우자동차의 실책인지, 50%의 지분을 가지고 대우자동차를 단순 하청 공장 수준으로 두려는 GM의 의도 때문인진 알 수 없으나 1992년 대우그룹이 GM의 50% 지분을 사오면서 적극적인 신차 개발에 나섰다는 것을 보면 후자가 맞을 듯.[30] 단, 신차 개발을 시작해도 출시까진 4~5년의 시차가 있는데 출시된 시기가 하필이면 IMF였다.

더군다나 독일쪽 기술을 그대로 재현했다면 괜찮은데 그것도 아니고 조립 품질이 심하게 떨어졌다. 위에서 말한 버스와 달리 승용차는 대우 르망 문서에서 알 수 있듯 그야말로 엉망으로 나온 경우가 다반사.[31] 1997~1999년 라인 업을 갈아엎기 전의 모델이 씨에로는 오펠 카데트, 프린스와 브로엄은 오펠 레코드 및 제나토어로, 모두 1980년대가 가기 전에 단종 된 플랫폼을 20세기 끝날 때까지 사실상 페이스리프트 수준으로 버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나마 에스페로를 신호탄 삼아 1990년대 초반부터 시작한 고유모델 개발이 도산하기 직전에나마 시장에서 인정받은 것과, 국내 자동차 브랜드 중 채 10년이 되지 않은 단기간에 유럽시장 진출 성공[32]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고무적인 것으로 나름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8. 현재

비록 그룹은 해체됐지만 몇몇 계열사들은 대우의 이름을 달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제는 과거의 영광만을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신세이다. 이중 일부는 대우란 이름 자체도 사라지고 있는 혹은 사라진 상태. 다만 그룹이 망하기 전에 잘 나가던 계열사들은 아직도 해당 업계에서 순위권을 유지 중이다. 재계 순위 14위의 한화오션(구.대우조선해양), 재계 순위 24위의 대우건설, 업계에서 빅3에 속하는 미래에셋증권(구.대우증권), 3대 엔지니어링 회사인 포스코엔지니어링(구.대우엔지니어링), 사실상 지주 역할을 했던 포스코인터내셔널(구.(주)대우-무역부문) 등. 이 외에도 위니아전자(구.대우전자), 타타대우상용차, 자일대우(구.대우자동차 승용부문, 상용부문) 해상/해운업 대우로지스틱스, 학교법인 대우학원이 운영하는 아주대학교, 아주자동차대학교 등이 남아있다.

9. 해체 이유

9.1. 정설 - 막대한 채무와 분식회계

1999년 당시 대우는 약 86조원 가량의 대내외 을 가지고 있었다. 링크[33] 같은해 대한민국 국가예산이 84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부채 규모가 한 기업이나 심지어 국가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34] 1999년 해체당시에도 무조건적인 국내외 대출로 규모만 늘리던 성향이었다.

결국 해체이후 김우중 회장의 추징금이 괜히 17조 원[35]이나 되는 게 아니다. 저 어마어마한 금액을 가짜 장부 등으로 회계를 조작해서 은행을 속이고 빚을 얻어낸 돈이 저 만큼인 것이다. 이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며 미국에서는 분식회계를 저지른 기업주에게 징역 150년형을 때릴 만큼 엄청난 중죄이다. 남의 돈으로 사기쳐서 다 날려먹었으니 당연히 토해내야 되는데 그 돈이 엄청나다. 17조 원이면 2020년대 기준으로 약 14조 원인 이재용의 개인재산을 뛰어넘는 금액이다. 김우중 회장의 재산이 곧 대우그룹에서 나오며 이는 대우그룹이 정상적으로 유지되면서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다.

그리고 그 분식회계의 총합은 20조 원이 넘었으며[36] 그룹 부채의 총합은 추산하기로 최대 약 89조 원[37]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1999년의 정부 예산이 84조원으로 대우그룹의 부채는 이미 대한민국 1년 예산보다 커 정부에서조차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이미 나라의 국고가 거덜나서 국제통화기금에게 돈을 빌려서 쓰고 있는 마당에 그만한 돈을 보전해주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김우중의 치밀한 분식회계부정부패에 대한 인식의 도덕적 해이를 잘 생각해보면 어떻게든 대우그룹을 살린다 해도 김우중만 부자가 되고 국민들은 여전히 손가락을 빨고 깡통을 차며 살아가는 궁핍한 생활을 했을 가능성도 크다.

그랬기에 정부는 대우그룹의 도산 및 해체를 용인하는 것 말고 대안이 없었다. 하지만 정부는 그룹 해체 이후에 대우 계열사들에게 총 29조 8천억원이라는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등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다. 외환위기 때문에 다년간 투입된 정부의 공적자금이 총 180조원 가량이었는데 그중 6분의 1이나 대우에 들어간 것이다. 대우그룹을 온전히 살리기엔 도저히 부실의 정도가 무지막지했기에 그룹을 조각내서 회생 가능성이 있는 우량 계열사들만이라도 겨우 살려내어 다른 기업집단에 파는 방법으로 공적자금 회수를 기대하는 것이 그나마 가능한 현실적인 대안이었다. 그 덕분에 오늘날 한화오션, 대우건설, 미래에셋대우, 포스코엔지니어링, 포스코인터내셔널, 위니아전자, 타타대우상용차. KG모빌리티 등이 정상화되어 대한민국 경제에서 일익을 담당하는 기업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38]

더구나 외환위기라는 역대급 사태 중에도 김우중 본인의 현실인식이 매우 낙관적이었던데서 그룹해체의 연유를 찾을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관리 체제에 속했던 김대중 정부의 초기정책에는 국제통화기금과의 권고 및 협약을 이행하는 방안이 많이 반영되었는데, 개중에는 대기업의 구조조정으로 부채비율을 200% 이하를 두는 강수가 있었다.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최대한 슬림하게 만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30대 재벌 중 대우를 제외한 29개 재벌들은 이 구조조정 시행을 전제로 하는 계획서를 5일만에 제출 완료하였지만, 김우중회장은 그러기는 커녕 오히려 IMF 사태 초기인 1998년 2월, 김대중을 만나 500억 달러의 무역흑자론을 내세운 국가 프로젝트를 내세웠으며, 3월에 전경련 회장을 맡으며 수출론을 주장하였다. 김우중은 현 경제위기 및 정권의 강한 구조조정 권고는 일시적이고, 대출을 더 받으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아 위기 중에도 세계 경영 및 국내 시장에 과감하게 뛰어드는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것이다. 대표적으로 1998년에 (주)대우 한회사 부채만 22조원으로 국가예산의 30% 차지하는 상황에서도 구조조정은 고사하고 쌍용자동차 인수로 판을 벌이며 쌍용차의 설비를 담보로 정부의 추가대출을 기대한 일이 있다. 그야말로 당시 구조조정으로 자기살을 깍아내던 다른 재벌들과는 다르게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행동한 것이었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이런 과감한 모습이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만, 90년대 중후반부터 김우중의 과감한 투자 여파로 대우그룹 실적이 조금씩 악화되어 지난날 김 회장 및 대우그룹에서 경영성과로 홍보해온 해외 회사들(예, 벨기에 Universal, 영국 자동차 연구소[39])이 하나둘씩 부실화되던 상황에서 IMF 사태라는 환란은 그런 방식으로 넘기에는 그 벽이 너무 높은 것이었다. 마침내 노무라 증권<대우 그룹에 비상벨이 울리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보고서를 내기에 이른다.

또한 팔리지 않는 제품을 해외법인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장부상으로만 수출실적을 내는 밀어내기식 수출과 손해보면서 파는 적자수출로 수익 구조를 악화시켜 그룹 전체 영업이익은 1998년 기준으로 6천억 원 적자를 기록하고 금융비용의 증가를 초래시키며, 그 규모는 끝내 조 단위를 넘어갔다.

이 상황에서 대우는 삼성과의 빅딜로 타개를 시도하였지만 대우의 빚더미를 파악하고 놀란 삼성측이 자기들까지 같이 동귀어진의 수렁에 빠져들것 같아서 거부의사를 통보하였고, 급기야 몰린나머지 1999년 4월에 자동차만 남기고 나머지는 다 팔아버린다는 구상의 구조조정을 실시하지만 아무도 부채덩어리 계열사들을 사려고 하지는 않아 역시 실패한다. 결국 8월, 계열사 전부 워크아웃으로 들어가게 되고, 11월 초에 대우 사장단은 사퇴를 제출하고 그룹은 공중분해된다.

9.2. 해체 관련 음모론

대우그룹 해체에는 모종의 세력이 관여하고 있다는 음모론이 있기도 한데, 그 모종의 세력에 관해서 음모론은 대체적으로 국내관련설과 외국관련설, 두 설로 양분된다.

9.2.1. 유대인 배후자본설

당시 대우그룹은 국제적으로 마이너한 분야에서 잘 노는 플레이어로 정평이 나 있었다. 유대계열 자본이 지배하고 있는 에너지자원이라든지 건설, 금융 분야에서 한 켠 비껴가 있는 마이너한 곳들을 잘 공략해서 수익을 올리던 알짜기업이었지만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유대 자본이 환율 공격을 비롯한 각종 수단을 동원해 한국 정부와 대우를 압박했고 마침 분식회계 등 각종 악재가 겹친 상태에서 대우그룹은 이로 인해 결정타를 맞아 몰락하고 말았다는 설이다.

이에 관련한 내용이 2010년 11월 8일자 조선일보 칼럼에도 기재되었다. 이 칼럼에 따르면 이는 김우중 회장의 생각으로, 생전에 김 회장이 환율공부를 했던 이유라 한다. 이 논리는 유대계 자본의 공격자체에는 신빙성 여부가 갈릴 수 있으나, 외환위기 이전 달러당 평균 600-700원대의 환율이 IMF 관리체제 직후 2100원 가까이 폭등했음을 볼 때, 해외 법인이 1998년 말 기준 396개에 달할 정도로 많아 현지에서 자금을 조달했던 대우의 입장으로는 순식간에 갚아야 할 부채가 3배는 늘어난 꼴이기에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유대계 자본이 대우를 대놓고 공격했다기 보다 유대계 자본이 달러를 아시아에서 회수하는 과정에서 한국이 유탄을 맞았고, 그 여파가 대우그룹에 미쳤다고 보는것이 정확할 것이다.

9.2.2. 대북사업 비협조설

당시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하던 대북사업 자금이 모자라 기업에 협찬금을 요구했고 이에 삼성, 현대 등은 정권이 요구한 금액을 납부했지만 대우그룹은 이를 거부해 정권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힌 대우그룹에 마침 악재가 터지자 본보기로 정치보복을 하였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김우중 회장이 군사정권 시절 정치자금을 여당에 몰빵했던[40] 일부 기업과는 달리 여2 : 야1 의 방식으로 김대중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해 DJ와 친분을 쌓았으며, 무엇보다 김우중은 1990년대 초반에 김일성과 만나 독자적으로 대북 커넥션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다.[41] 그리고 협찬금을 냈다던 삼성그룹이나 현대그룹[42] 등 대우그룹을 제외한 30대 재벌 전원이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어 5일만에 시행 계획안을 제출한 사실이 있다.

더구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장치혁 고합그룹 창업주와 더불어 대북경협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현대그룹(1989년)보다 2~3년 늦게 대북사업에 뛰어들었지만, 빠른 행동력으로 초창기 남북경협을 대우그룹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1992년 1월 남한 기업인으로는 두 번째로 북한을 방문해 무려 100만평 규모의 '남포공단' 투자 합의를 이끌어냈는데, 남포는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북한의 수도이자 핵심부인 평양의 위성도시이며, 서해로 나가는 관문이다. 남포공단을 조성하고 남한기업을 대규모로 유치하겠다는 결정은 남한으로 치면 인천을 통째로 북에 개방한 것과 마찬가지다.

사실 김대중 정권이 추진하던 개성공단도 위치만 남포에서 개성으로 바뀌었을뿐, 사업 내용이나 추진방식은 1992년 남포공단 합의와 똑같다. 민간 기업으로서 최초의 남북경제협력 사업으로 이후 북핵문제가 불거져 유야무야됐다가 1994년 제네바 합의 후 1995년 미국의 대북제재 1단계 해제가 이루어지면서 대북사업을 재개해 1996년 북한 조선삼천리총회사와 합자로 '민족산업총회사'를 세웠지만, 1999년 그룹 부도 후 이듬해 북한측이 직영하면서 철수했다. 이후에도 김우중은 독자적인 대북커넥션을 유지하면서[43] 남북경협에 대단히 적극적인 인물이었는데, 대북사업에 소홀했다고 정권의 보복을 당했다는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다만 대우그룹은 이미 1996년부터 남포공단에 회의를 느끼고 철수를 고려했고, 김일성과 달리 김정일은 대우에 협조적이지 않은 태도가 있었다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또한 정몽준16대 대선에서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 토론 중 현대그룹이 대북 사업을 하는 대가로 시중에서 자금을 회수당하던 대우와 달리 34조원에 육박하는 공적자금을 지원받았다는 점을 지적받기도 했다.

9.2.3. 정부와의 악연설

정부가 기업어음(CP) 발행 한도 제한 조치와 회사채 발행 한도 제한 조치를 통해 1998년의 매출액은 62조원, 전년대비 24.7% 증가했지만 매출채권(9조 2천억 원)의 증가로 실질적인 현금 유입이 이루어지지 않아 부채 비율이 높아져가게 만들었다는 주장. 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부정적으로 보는 보수 진영 일부, 심지어 진보진영에서도 나오는 얘기다.

하지만 대통령인 DJ(김대중)는 1980년대 90년대 야당 시절에 김우중의 자금 지원을[44] 받았던 사람이다. DJ나 그 측근들이 굳이 대우 그룹만을 겨냥한 저격용 조치를 만들만큼 김우중을 미워할 이유는 사실 없었다.

1998년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에 경제 부총리로 한때 김우중 회장이 거론될 정도로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쪽에선 김우중과 대우그룹에 호의적이었다. 결국 입각은 하지 않았지만, 당시 경제분야 민관협력 회의는 거의 김우중 회장이 주도하는 상황이었다. 재벌쪽에서도 김우중 회장을 국민회의 정권과의 의사소통 창구로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우중 회장의 경기고 동창이자 절친인 이종찬국가정보원장으로 발탁되면서 정권의 핵심 실세로 떠올랐다. 비록 김우중 회장의 부총리 임명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당시 탱크주의 광고로 화제를 모으고 있던 배순훈 대우전자 사장이 정보통신부 장관으로 입각하고 새정치국민회의 박정훈 의원이 김우중의 경기고 후배로 정계 입문 전 대우그룹 임원을 지냈을 정도로 국민회의 정권과 대우그룹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그리고, 김우중 회장의 형인 김덕중씨를 대우그룹이 해체되는 와중에도 국민의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으로 임명했는데, 정부와 사이가 좋지않다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다만, 대북사업을 대놓고 포기했다는 점에서 갈등이 없었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강봉균 경제부총리로 대표되는 일부 경제 관료들은 구조조정을 하지않고 추가 대출이나 신규투자를 기대하는 김우중의 모습을 막강한 부채를 빌미로 정부를 위협한다고 간주하며 대우그룹을 좋지않게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당시 재계 2위인 대우그룹이 문제가 생길 경우 감당해야 할 후폭풍이 제2의 IMF 사태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만큼 컸기 때문에 함부로 대우를 건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부 자금을 투입 가능한 법정관리안을 제시하였다. 다만 법정관리안은 오히려 정부의 기만술로 보일수도 있는게, 이헌재가 1999년 5월 당시 김우중 회장이 법정관리를 고려한다는 첩보를 듣자, 법정관리로 갈 경우 대우를 털어 형사처벌 하겠다는 이야기를 내뱉은 적이 있다. 링크[45]

별개로 현대그룹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게 자금지원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기타 삼성그룹이나 LG, SK도 자구안 외에 어느정도 특혜를 받았으나 이에 비헤 대우는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는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이 심도있게 조사해 2002년에 폭로하기도 했다. 기사

10. 부채

1999년 당시 대우는 약 86조 원 가량의 대내외 을 가지고 있었다. 링크 동년 대한민국 국가예산이 84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부채 규모가 한 기업이나 심지어 국가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46][47] 또한 대마불사를 외치며 앞뒤도 보지 않고 30년간 사업규모만 확장하면서 규모만 늘리던 성향이었다.[48]

파산 규모도 68조 원인데, 이는 비공식적으로 2024년 기준 세계 파산 규모 8위에 듦과 동시에 당대에는 세계 최대 규모 파산으로 꼽힘과 동시에[49]미국 기업 중 파산규모 1위를 기록하는 수준이라고 한다.[50] #

11. 부활 가능성? (무산)

2009년에는 부활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나왔었고 2015년에는 대우인터내셔널이 대우차 브랜드를 돌려달라고 GM을 상대로 상표권 반환을 요구했으나 무산되었다. 그러나 "대우자동차" 상호를 제외한 그룹의 CI와 상호는 대우그룹의 중심이었던 포스코인터내셔널(구 대우인터내셔널)이 아직도 보유하고 있는지라, 대우맨들과 현재 대우 이름을 달고 있는 회사들의 임직원들이 동의만 한다면 다시 그룹이 부활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각 기업들로 쪼개진 대우출신 기업들의 재결합부터, 다양한 변수들이 산재하기에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고 대우인터내셔널은 사명을 포스코인터내셔널로 바뀌었다.

또한 그룹 창업주인 김우중 회장 또한 생전에 그룹 재건을 바라지 않는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었고[51] 2019년 12월 타계함에 따라 현재는 가능성이 사라졌다.

한편 2021년에 포스코인터내셔널이 튀르키예의 가전회사 베스텔과 상표권 계약을 체결하였다. 베스텔은 총 10년간 상표를 사용할 수 있다. 부활이라기 보단 예토전생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지만 적어도 대우라는 브랜드의 명맥을 이어갈수 있다는 점에선 나름 긍정적으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12. 계열사 목록

12.1. 전자·정보통신

12.2. 건설

12.3. 자동차·중공업

12.4. 섬유·화학

12.5. 무역·서비스

12.6. 금융

12.7. 공익사업

12.7.1. 스포츠단


이외에도 스폰서로 UC 삼프도리아 (1997~1999), FC 한자 로스토크 (1996~1997), AC 페루자 (2000~2002) 등을 후원했다.

12.8. 관계사

12.9. 관련 단체

1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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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놀타 | 컨티넨탈 항공
다른 로고와 폰트 사용 대우건설, 대우산업개발
폰트만 사용 타타대우상용차
로고만 사용 대우학원, 대우세계경영연구회
로고와 폰트 모두 사용 대우전자부품, 대우재단, 베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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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대우 ITMD 수단 광고 (한글자막)

14. 대중매체에서

15. 참고 자료



[1] IMF 외환 위기의 영향이 컸다.[2]서울특별시 중구 한강대로 416[3] 현재 이 도메인은 대우그룹 계열사였던 SNT모티브(구 대우정밀)가 소유하고 있다.#[4] 삼성그룹, 현대그룹, LG그룹, 대우그룹. 4대 그룹 독주시절 당시에는 SK(당시 선경)는 장학퀴즈와 유공, SKC, 한화그룹빙그레라는 과자회사로 유명했지만 지금과 같은 순위급 재벌은 아니었다.[5] 김우중 회장의 선친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대구사범학교 은사였다. 그리고 애초에 집안 자체가 원래 돈이 많아서 친척들이 도와주기도 하였다.[6] 당시에는 럭키(또는 금성)그룹[7] 다만 쌍용자동차 인수만 안 했어도 최소한 그룹 자체는 남아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하지만 외환 위기 속에서 대우의 쌍용차 인수에는 매우 복잡한 정치적 및 금융적 목적이 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표적인 설은 쌍용차의 모든 자산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대우의 위기를 해결하는데 사용하려 했다는 설이다. 쌍용차를 깡통으로 만들어 대우를 살리자는 건데 당시만 해도 기업가치 산정 수준이 지금처럼 정교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을 수 있다.[8] 1997년까지만 해도 현대그룹이 압도적인 1위, LG와 삼성이 2~3위, 대우는 4위였다.[9] 당시 한보철강, 아시아자동차, 기아자동차, 동아건설 등 총 4개 대기업들의 분식회계 규모가 6조원 가까이 됐는데, 대우그룹 혼자서 사기대출 10조원41조 원에 달하는 거대한 분식회계를 저질렀다. 사실 아시아자동차는 기아자동차가 속한 기아그룹 산하였으니 어떻게 보면 3개 대기업이지만. 참고로 김우중이 도피하고 대우그룹이 해체된 1999년 기준으로 국가예산이 84조원이었는데 그 국가예산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였다.[10] 삼성그룹은 국내의 압도적 재계 서열 1위이자 글로벌 경쟁력도 갖춘 세계적인 거대 기업으로 자리매김했고, 현대그룹은 여러 그룹으로 나뉘어도 2등 유전자를 갖고 있으며, 대우그룹은 원래 책상이 없던 것마냥 완전히 증발했다.[11] 대우자동차의 더블D 로고와 꽤나 비슷하다.[12] 현재의 해운대 메가센텀 한화 꿈에그린 아파트 자리이다.[13] 여담으로 대도섬유는 1970년, 도재환 사장이 김우중 회장과의 갈등 끝에 투자금을 전부 회수하고 절연하면서 대우와의 관계가 없어졌고, 현재까지도 살아남아 섬유를 생산하고 있다. 도재환 사장은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되고 4개월 뒤인 2000년 8월 9일 세상을 떠났다. 1993년 4월 7일매일경제 기사에 따르면, 형식상 5:5 공동출자였을뿐, 자본금만 따지면 10:0으로 도재환의 전액 출자였다고 한다. 김우중은 자본 출자 없이 판매 책임자로 지분 50%를 가졌을 뿐이었다.[14] 예를 들어, 한국기계공업→대우중공업→대우종합기계→두산인프라코어→(현)현대두산인프라코어.[15] 이쪽은 알짜 계열사인 웅진코웨이를 팔고 근근히 버티고 있기에, 완전히 망해버린 대우그룹, STX와는 비견될 정도는 아니다.[16] 이곳은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된 후 메가스터디에서 시설을 인수하여 2011년에 기숙학원인 '양지메가스터디기숙학원'으로 재개장했다.[17] 1976년에 설립된 영국 톰 월킨쇼 레이싱 소속의 연구소로, 마티즈누비라의 아이디어를 낸 곳이다.[18] 자사의 승합차인 루블린을 대한민국에 수입할 계획이었던 자동차 회사.[19] 이 와중에도 쌍용자동차 인수를 그대로 질렀다.[20] 결국 삼성자동차는 2000년 르노에 인수되었고 현재는 르노코리아로 존속중이다.[21] 물론 둘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은 전혀 없다. 대우가 지으려던 마천루는 오직 계열사들이 사용할 업무용이었을테고 인천타워는 업무와 호텔, 아파트까지 결합된 복합시설이다. 쉽게 생각하자면 글로벌비즈니스센터롯데월드타워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22] 원래는 동년 12월 27일 상장폐지 예정이였으나 사업 부문을 모두 별개의 회사로 분할하고 남은 영업활동이 없는 페이퍼컴퍼니라는 이유로 증권거래소에서 빠른 상장폐지 조치를 내렸다. 대우중공업도 마찬가지다.[23] 그룹 지주회사 겸 사업회사인 (주) 대우의 무역 부문 대표이사 사장 자격으로 그룹 회장 직무대행을 맡았다.[24] 탱크주의 광고 이후 탤런트 조문정은 그 다음해인 1994년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며, 또한 배순훈 사장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정보통신부 장관을 맡았다.[25] 탱크주의를 내세우기 전인 1991년에는 당시 대우 IC 냉장고란 제품을 구입한 몇몇 소비자의 경우엔 구입하자마자 몇 달만에 냉장고가 고장이 나고 냉각이 제대로 안 되면서 걸핏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현상을 겪었고 이후에 수차례 AS를 불러도 개선이 되지 않는 터에 결국 이사갈 때 대우 냉장고는 그냥 두고 가는 게 낫겠다며 이사 간 집에서 멀쩡히 대우 IC 냉장고가 있던 웃지 못할 상황도 발생했을 정도. * 이것이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적지 않은 집에서 연출된 상황이니 그 당시 대우전자 생산의 냉장고의 품질은 알고도 남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를 겪었지만 살아남은 삼성이나 금성(LG) 냉장고는 아직까지도 꿋꿋한 현역이다.[26] 경찰과 대한전선 측이 제시한 결과도 황당했는데, 경찰 측은 동반자살이라 단정짓고, 대한전선 측도 광고에서까지 안전성까지 강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27] TV를 예로 들면 보통 스위치 키고 채널 돌리고 볼륨 조절하면 끝이었으나 자동화면 조정 기능, 예약 ON/OFF 기능, 리모콘 채널 기억 등 갖가지 쓸데없고 복잡한 기능들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종이장 몇 개 정도였던 사용 설명서가 점점 두꺼워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28] 물론 그러한 전략 자체가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었다. 무인양품 참조.[29] 아이러니하게도 유로 6 이후 현재의 MAN 엔진은 잔고장이 많기로 악명높다.[30] 의외로 대우는 1978년 새한자동차 인수 이후 파워 트레인 쪽 기술 개발을 단행해, 1981년에 독자적으로 XQ엔진을 개발하였으며, 이후에도 후신 격 되는 엔진인 론지 엔진을 개발한 바 있다. 이들 엔진의 경우 기본 베이스는 제법 괜찮았지만, 적용대상이 하필 소형차 뿐만이 아니라 중형차까지라 욕먹은 케이스다. 소형 급인 맵시에서는 제법 좋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해외 유수의 기업에서도 한계라고 느껴지던 세계 최초의 횡치 직렬 6기통 엔진인 대우 XK 엔진을 개발해 양산에 성공한 바 있다.[31] 당시 부평공장에서 일했던 직원의 말에 따르면 주물한 부품의 규격이 정밀하지 않아 조립이 잘 되지 않으면 해머로 때려서 억지로 끼워넣었다고 한다. 그만큼 튼튼하면서도 정교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사실 이 문제는 부평 연구소와 부평 공장의 연구 인력과 노동자들의 경험이 숙련되기 시작하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해결된다.[32] 비록 1년 뿐이었지만 1999년 폴란드에서는 그동안 이어졌던 피아트의 점유율 1위 독주를 끝내고, 폴란드 국영 자동차업체인 FSO 인수와 현지 생산 거점 확보 및 공격적인 판매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폴란드의 자동차시장 점유율 1위를 대우가 차지했다. 또 중앙아시아의 경우에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현지 정부와 함께 설립한 '우즈 대우'의 인기가 가히 폭발적이어서, 공장이 가동된 1996년부터 대우 브랜드가 사라진 2017년 현재까지도 부동의 점유율 1위를 기록 중이다.[33] KBSMBC 보도자료 참고.[34] KBSMBC 보도자료 참고[35] 임원 5명에게 부과된 금액을 합치면 총 23조원이다.기사 링크[36] 참고로 엔론의 분식 회계 규모는 15억 달러인데 우리나라 돈으로 약 2조 원 정도였다. 2006년 김우중의 항소심에서 최종 인정된 대우의 분식회계 금액은 분식회계 21조, 사기대출 9조, 외화밀반출 23조였다.기사[37] 국내 약 60조원과 해외 약 30조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38] 그나마 위의 기업 중에도 대우조선해양은 사실상 20년 가까이 한국산업은행의 관리체제에 놓여 사실상 20년 가까이 공적자금이 투입되었고 한화그룹으로 넘어간 현재도 부채규모가 상당해 대기업 치고 재정상태가 좋지 못한 편이다. 대우건설과 위니아전자 역시 매각 이후에도 주인이 여러번 바뀌는 수난을 겪었던 만큼 대우그룹 계열사 하나하나에 수백조원 규모의 국가예산이 투입되고도 정상화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는데 대우그룹 전체를 공적자금 투입으로 살린다는 발상 자체가 현실적이지 못한 발상이다.[39] 중형 승용차 레간자가 이곳에서 개발한 작품이다.[40]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맹희 전 삼성그룹 부회장 회고록에는 정치권에 댈 "줄을 찾는" 과정에서 힘을 소모해 타격을 입은 몇몇 기업의 사례가 나와있다[41] 김일성이 특히 김우중을 마음에 들어해 "김우중 같은 사람 5명이 있으면 그 나라가 일어날 수 있다"는 덕담을 해주었다고 한다[42] 현대그룹은 김대중 정부가 대북사업에 직접 나서기 이전인 1989년부터 대북사업을 추진했다.[43] 김우중은 대우그룹이 해체되고 해외를 떠돌던 2000년대에도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는 등 대북사업에는 대단한 열의를 보인 인물이다.[44] 야권에도 손을 내미는 기업들이 대개 여권 2 : 야권 1의 비율로 정치자금을 조심스레 지원하는데, 친화력 9단인데다 선친이 호남과 인연이 닿은 김우중은 이런 행보를 밟아도 별 탈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45] 참고로 당시 한국 정부와 동업자였던 제너럴 모터스가 동시에 대우에 손을 내밀었는데, 김우중은 정부의 제안을 받은 와중에도 GM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개인의) 성세가 끝나가는 상황에서는 이해관계가 얽힌 쪽보다는 일처리가 분명한 쪽에 의탁하는 것이, 오히려 생명이나 세(勢)를 유지하는데 유리한 경우가 있다.[46] KBSMBC 보도자료 참고.[47] 1999년 한국의 GDP는 592조 원도 되지 않았다. 당시 한국 GDP의 14.5%를 차지하는 엄청난 수준이었던 셈.[48] 비슷한 시기 쓰려졌던 쌍용그룹의 부채가 3조원 수준이였던 것을 감안하면 대우의 부채규모는 바교 불가한 수준이다. 심지어 썽용은 만악의 근원 썽용자동차 정도만 제외하면 다른 계열사들은 비교적 재정상태가 괜찮았다는 평이 많지만 대우그룹은 계열사 하나하나가 쌍용차 급의 부채를 가지고 있는 수준이였다.[49] 대우보다 파산 규모가 큰 그룹들은 다 대우 이후에 파산한 그룹들이다.[50] 참고로 비미국 기업 중 2위는 2000년 파산한 일본의 생명보험행사 일본협영생명으로, 버블경제 당시 고위험 상품판매로 4조 5,290억 엔(46조 1,900억 원) 규모의 파산을 기록해 규모는 대우의 2/3 수준, 순위는 10위에 그쳤다. 파산 이후 일본협영생명은 미국 푸르덴셜 파이낸셜이 인수했다.[51] 게다가 아들과 같은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본인이 직접 부활 시키는 것은 애초부터 생존 당시의 이건희 회장의 재산을 다 털어도 감당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추징금 때문에 자금 자체가 확보될 수가 없어서 사실상 불가능하기도 했다.[52] 그 외에 경기도 시흥시 대야동에도 공장을 두었으나 2000년부터 대한제분 등 여러 기업에 소유권이 넘어가며 의류 창고정리 판매장으로도 쓰이다가 2017년에 철거되어 2019년에 대림 e편한세상 단지가 들어섰다.[53] 모회사인 오텍은 응급 의료장비 전문업체로, 앰블런스, 특수 구급차, 이동건강검진차, 장애인차, 들것 등을 취급한다.[54] 그 외에도 LG산전 자판기사업부를 인수해 캐리어LG란 회사를 설립했다.[55] 세계 3대 유리 생산 회사로 매출이 10조를 넘으며 한국에도 공장을 세우고 진출해 1조원 가까운 매출을 올리고 있다.[56] 삼성, 현대, 대우, GS, DL[57] 사실 쌍용그룹이 망한 것도 원인을 보면 쌍용자동차 때문이다.[58] 폭스바겐과도 제휴관계인데 이쪽은 냉전시기인 1984년부터 제휴했다.(법인 설립년도 기준. 실 제휴는 70년도 후반이다.) GM과는 냉전종식과 개혁개방 이후이자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이한 년도인 1997년이다.[59] 쌍용차의 경영상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마힌드라 그룹이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아 경영위기에 직면한 것이 원인이다.[60] 2020년 12월 10일, 현대중공업이 두산인프라코어를 인수하기로 결정하였다[61] 두산그룹의 경영 위기로 인하여 두산인프라코어에서 공작기계 부문을 2016년에 사모펀드에 분리매각했다. 2022년 현재는 디티알오토의 자회사로 편입.[62] 참고로 대우조선해양도 대우조선해양건설이라는 이름으로 건설사를 휘하에 두고 있던 적이 있다. 다만 이 쪽은 대우산업개발보다도 대우그룹과의 연관성이 없는데, 이건 대우조선해양이 대우그룹에서 나온 이후, 2003년에 진로그룹에서 정리한 진로건설을 인수하면서 사업 다각화를 추구한 경우이기 때문이다.[63] 이 파업은 1985년 구로동맹파업으로 이어진다.[64] 정확히는 특수목적법인 롯데백화점마산으로 매각됐다.[65] 이한구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원장, 사장을 지냈었고 그의 밑에서 일하던 인물들은 안종범, 강석훈 등이 있다.[66] 서울특별시 종로구 소격동 소재. 경상북도 경주시의 선재미술관과 소유주만 같았고 다른 곳이었다.[67] 대신 첨단기술로도 닿지 않았던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지역에 특화된 낮은 수준의 적정기술을 매우 중요시했다.[68] 사실 이곳 이외에도 포스코의 광양제철초와 광양제철남초가 섬에 있긴 하다. 다만, 이곳은 섬 대부분이 제철소로 이루어져 있다. 참고로 섬 유일의 국립 초등학교는 제주대학교 교육대학 (구 제주교육대학교) 부설초등학교이다. 더나아가 섬 유일의 국립 중학교도 제주대학교 부설학교이다. 여담으로 농촌지역 유일의 사립 초등학교는 남양주에 있는 심석초등학교.[69] 참고로 한화그룹과는 연관성이 없다. 대우조선해양 시절에 이뤄진 인수인계이기 때문.[70] 대우그룹의 부도로 2001년 해체된 후 2007년에 미래에셋대우에서 '토네이도 탁구단'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창단을 했다.[71] 1983년 신규 팀인 대우전자 테니스단에 흡수 후 재창단된 전적이 있다.#[72] 정확한 해체 시기는 불명이나, 대우중공업의 분할매각과 함께 지원이 끊기며 해체 된 것으로 추정된다.[73] 국내 법조계에서 최고의 파산전문가로 뽑는 법조인으로 서울지방법인 파산부 부장판사를 역임했다. 경기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연수원을 10기로 수료했다.[74] 2011년 미국 유나이티드 항공에 합병되어 사라졌다.[75] 2016년 대우 시절 임직원들이 세운 중소기업 지원업체.[폰트] 대우 폰트 로고만 사용.[폰트] [78] 비슷한 사례로 舊 동부그룹도 '동부'의 상표권을 갖고 있었던 그룹의 모체인 동부건설을 매각하면서 그룹명을 現 DB그룹 변경한 경우가 있다.[79] 구 대우인터내셔널. 포스코가 인수했음에도 꽤 오랫동안 모기업 사명이 안 들어갔다. 예전 대우맨들은 아직도 '(주)대우'라고 부르며 대우그룹의 중심이었던 '주식회사 대우'에서 일했다는 프라이드를 드러내고 있다. 이 회사는 대우 상표권을 소유하고 있기도 하다.[80] 구 KDB대우증권.[81] 자일대우버스의 공식 AS용 이동차량도 올란도가 주력 모델이다.[82] 여담으로 2019년에 포스코인터내셔널은 임원 관용차를 현대자동차 그랜저에서 쉐보레 임팔라로 교체했는데, 모기업인 포스코와 현대자동차그룹의 계열사인 현대제철은 라이벌 관계이기 때문에 바꿨다는 이야기가 있다.[83] 사내 내규에 의해 대한항공 이용시 항공료 미지원.[84] 물론 인수한 모기업에서는 이런 점을 싫어하기도 한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한참 전에 망한 회사인데 자사 소속 임직원들이 해당 모기업의 문화에 융화되기보다는, 이미 사라진 옛 대우의 아이덴티티를 고집한다는 게 달가울 리가 없다[85] 여담으로 산울림의 막내이자 드러머인 김창익이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대우차에 입사했다.[86] 당시 삼성그룹서울대학교를 필두로 하여 명문대 출신들이 많이 합격했는데, 대우그룹은 삼성그룹도 울고 갈 정도로 학력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다. 삼성그룹 역시 비수도권 대학은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지금도 경북대학교는 삼성 임원을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으로 명성이 있다. 현대그룹LG그룹 역시 비수도권 대학은 거의 경북대학교, 부산대학교 출신이 많았으며, 지금도 LG전자경북대학교 전자공학부 출신들이 많이 합격한다.[87] 영남대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대기업 합격자가 소수이지만 꾸준히 나오는 반면, 계명대학교는 그렇지 못하다. 특히 계명대학교는 대우그룹 합격자는 전혀 없었으며 현대자동차는 윤갑한 前 현대자동차 사장만 입사에 성공하였다.[88] 원래 이름은 대우정밀이었다. 대우통신이랑 한때 합병되었다 분할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SNT모티브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89] 금호그룹 같은 경우에는 대우그룹과 똑같은 수준으로 망했다. 오너 일가 앞으로 남은 회사는 금호고속, 금호건설, 죽호학원이 끝. 물론 금호석유화학그룹이 분리되었다는 점을 감안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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