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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3:04:17

요미우리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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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문서
<colbgcolor=#000><colcolor=#fe5a1d> 모기업 관련 정보 모기업 파일:요미우리 신문 로고.svg 요미우리 신문
일본시리즈 우승
★★★★★★★★★★
★★★★★★★★★★
★★
1951 · 1952 · 1953 · 1955 · 1961 · 1963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1981 · 1989 · 1994 · 2000 · 2002 · 2009 · 2012
리그 우승
(47회)
1936 추계 · 1937 춘계 · 1938 추계 · 1939 · 1940 · 1941 · 1942 · 1943 · 1949 · 1951 · 1952 · 1953 · 1955
1956 · 1957 · 1958 · 1959 · 1961 · 1963 · 1965 · 1966 · 1967 · 1968 · 1969 · 1970 · 1971 · 1972 · 1973
1976 · 1977 · 1981 · 1983 · 1987 · 1989 · 1990 · 1994 · 1996 · 2000 · 2002 · 2007 · 2008 · 2009 · 2012
2013 · 2014 · 2019 · 2020
클라이맥스 시리즈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8 · 2019 · 2021 · 2024
시즌별 요약 2011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현역 선수 경력 사카모토 하야토/선수 경력 · 토고 쇼세이/선수 경력 · 마루 요시히로/선수 경력
경기장 1군 도쿄 돔 · 2군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 · 지방 홈구장 선 마린 스타디움 미야자키 | 과거 고라쿠엔 스타디움
홈 중계 채널 파일:닛폰 테레비 로고.svg 닛폰 테레비
주요 인물 감독 아베 신노스케 · 선수회장 오시로 타쿠미 · 주장 오카모토 카즈마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과거 응원가 · 유니폼 · 순혈주의 · 여담 · 전통의 일전 · 10.8 결전
도쿄 시리즈 · 2022년 센트럴 리그 3위
틀 문서
코칭스태프투수포수내야수외야수육성 선수역대 감독영구 결번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역대 4번 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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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미우리 자이언츠
Yomiuri Giants
[ruby(読売, ruby=よみうり)] ジャイアンツ
<colbgcolor=#000000><colcolor=#fff> 구단 법인명 ㈜요미우리 교진군
(株式会社読売巨人軍)
창단 1934년 12월 26일([age(1934-12-26)]주년)
연고지 변천 도쿄 (1952~)
구단명 변천 대일본 동경 야구 클럽 (1934)
도쿄 교진군 (1935~1946)
요미우리 자이언츠 (1947~)[1]
홈구장 고라쿠엔 스타디움 (1937~1987)
도쿄 돔 (1988~)
2군 구장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 (1985~)
모기업 요미우리 신문
감독 83 아베 신노스케 (阿部慎之助)
주장 25 오카모토 카즈마 (岡本和真)
킷 스폰서 나이키, 뉴에라
마스코트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마스코트(자빗).svg
자빗[2]
구단기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기.svg
역대
한국인 선수
[3]
장훈[4] (1976~1979)
김시철[5] (1978~1979)
조성민 (1996~2002)
정민철 (2000~2001)
정민태 (2001~2002)
이승엽 (2006~2010)
역대
한국인 코치
장훈 (1993)[6]
김기태 (2007[7], 2008~2009[8], 2021[9], 2022[10])
이호준 (2018)[11]
박석민 (2024)[12]
홈경기 중계 채널(CS) 파일:닛테레지타스 로고.jpg
링크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심볼.svgJP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13]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読売ジャイアンツ[14]
파일:유튜브 아이콘.svgDRAMATIC BASEBALL 2024[15]
일본시리즈 우승 (22회 / 최다 우승)
1951, 1952, 1953, 1955,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81, 1989, 1994, 2000, 2002,
2009, 2012
센트럴 리그 우승 (39회 / 최다 우승)
1951, 1952, 1953, 1955, 1956, 1957, 1958, 1959, 1961, 1963,
1965, 1966, 1967, 1968, 1969, 1970, 1971, 1972, 1973, 1976,
1977, 1981, 1983, 1987, 1989, 1990, 1994, 1996, 2000, 2002,
2007, 2008, 2009, 2012, 2013, 2014, 2019, 2020, 2024
일본 야구 연맹 리그 우승[16] (9회 / 최다 우승)
1936 추계, 1937 춘계, 1938 추계, 1939, 1940, 1941, 1942, 1943,
1949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승 (5회 / 최다 우승)
2008, 2009, 2012, 2013, 2019
교류전 우승 (2회)
2012, 2014
아시아 시리즈 우승 (1회)
2012
한일 클럽 챔피언십 우승 (1회)
2009
포스트시즌 진출 (45회 / 최다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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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일본시리즈 1951년, 1952년, 1953년, 1955년,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1961년, 1963년,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1976년, 1977년, 1981년, 1983년, 1987년, 1989년, 1990년, 1994년, 1996년, 2000년, 2002년, 2008년, 2009년, 2012년, 2013년, 2019년, 2020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2007년,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8년, 2019년, 2021년, 202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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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
2.1. 중계 방송사2.2. 마스코트2.3. 팀 컬러
2.3.1. 야구 내적: 타자 및 탈삼진형 투수 중심2.3.2. 야구 외적: 안 좋은 육성 및 영원한 윈나우
3. 인기 및 위상4. NPB 굴지의 안티 구단5. 응원6. 홈구장7. 역사 및 시즌별 요약8. 관중수 추이9. 순수혈통주의10. 유니폼11. 선수단12. 역대 선수13. 역대 감독14. 역대 성적
14.1. 단일 리그 시대14.2. 양대 리그 분리 이후
15. 영구 결번16. 네임드 팬17. 우승 이력18. 여담19. 관련 문서2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소속 프로야구단. 연고지는 일본 수도 도쿄. 홈구장은 일본 최초의 돔구장으로 분쿄구에 위치한 도쿄 돔.[17]

일본프로야구 출범 이후, 팀명을 단 한 번도 바꾸지 않은 유일한 NPB 원년 구단이기도 하다.[18] 팀 컬러는 주황색이다.

2. 특징

일본에서는 보통 요미우리 자이언츠라고 다 부르지 않고, 줄여서 일본식 애칭인 '거인(쿄진・[ruby(巨人, ruby=きょじん)])'이라고 부를 때가 많다. 야구 중계의 스코어 표기에서도 지역명이나 스폰서명의 축약이 아니라 거인의 앞글자인 '巨'를 사용한다.

모회사 이름인 요미우리는 보통 멸칭으로 쓰인다. 타 팀은 물론 자이언츠 팬마저 요미우리를 비하 명칭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정자로 쓰면 그 비하 효과가 더 커져서 요미우리 팬들도 극히 싫어한다.[19] 그 단적인 예가 바로 YOMIURI 유니폼. 이 유니폼이 나오자 팬들이 피꺼솟해서 "우리는 요미우리의 팬이 아니다! 자이언츠의 팬이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며 항의했다. 한국에서는 교진군이나 요미우리로 부르는 경우가 많고 몇몇 한국 매체의 경우는 한자로 거인(巨人)이라 표시한다. 1990년대까지 미국의 보도 매체에서는 미국식으로 TOKYO GIANTS로 표기됐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YOMIURI GIANTS로 표기하는 매체의 비중이 늘고 있다.

일본 주식 시장에 등록된 팀명은 '(株)読売巨人軍'. 그러나 말만 주식회사모기업요미우리 신문으로부터 재정의 대부분을 지원받는다. 모기업이 일본의 유력 보수 신문인 요미우리 신문이라 창립자 및 간부들이 식민지 조선 시기를 미화하는 발언을 한 사례들이 있지만, 역사의 여명기부터 지금까지를 빛낸 구단 OB 중에는 상당수의 재일 한국인이 있고, 지금까지 한국인 선수를 가장 많이 데려간 프로야구단이기도 하다. 가네다 마사이치, 장훈, 조성민, 정민철, 정민태, 이승엽이 대표적. 많은 재일 한국인이 도쿄를 비롯한 간토 지방에 살고 있어서 요미우리의 인기도 은근히 있어서, 야구를 보러 가면 요미우리 경기로 많이 간다. 게다가 도쿄 돔에는 구장 내 '한비제'에서 비빔밥, 김밥, 양념치킨, 치즈 핫도그 등을 판매하는데 줄 서서 먹을 정도로 인기가 좋은 편이다.

2.1. 중계 방송사

2000년대 초반까지는 당연히(?) 요미우리 계열사인 NTV가 대부분의 홈경기를 중계했었다.[20] 그러나 전 경기 중계라고 해도 한국의 케이블 TV처럼 1회 초부터 9회 말까지 완전 중계도 아니었고 정규방송 편성에 따라 3~4회부터 중계를 시작하고 7~8회에 방송을 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21] 대표적인 예가 왕정치가 756호 홈런을 친 경기. 경기가 중계는 됐지만 정작 홈런을 친 순간은 정규 편성 중이던 예능 프로그램 방송 때문에 묻혀버렸다. 중계 방송이 시작된 시점은 이미 왕정치가 홈런을 치고 나서 20분이나 지난 저녁 7시 30분이었고, 전 일본의 야구 팬이 그 해 시즌 시작부터 기다려온 그 순간을 생중계를 하지 않는 만행으로 인해 시청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친 건 당연한 수순. 잠깐 이거 한국에도 비슷한 예가 있는 거 같은데?(송진우 200승 달성 경기)

2000년대 중반 들어 구단의 성적이 중하위권을 맴돌아 시청률이 떨어지자 닛테레도 전 경기 중계를 포기하고 대부분의 경기 중계를 계열 위성 방송사인 G+로 옮겼으며[22], 일부 토요일 홈 야간 경기에 대해서는 경기 종료 시까지 중계한다는 조건하에 NHK 종합 텔레비전에 중계권을 넘겼다.[23] 라디오는 도쿄의 닛폰 방송[24]요코하마시에 있는 RF 라디오 일본(간사이권에선 라디오칸사이)이 전 경기 전담 중계를 담당한다. 대신 여기서는 1회부터 경기 끝날 때까지 완전 중계니까 팬들에게는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인터넷 중계의 경우 GIANTS Live Stream에서 담당하는데 월 1,500엔을 내면 도쿄 돔 홈경기, 원정 한신전, 원정 교류전까지 다 볼 수 있다. 인터넷 중계에 소극적인 야쿠르트, 요코하마, 히로시마, 주니치[25]와는 대조적. 그리고 해외 팬들을 위한 홈경기 중계 서비스를 2017년부터 시작하였다. 일본 국외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는 유료이며 언어는 일본어로만 돼 있으므로 일본어 능력은 필수다. 가격은 1달에 11,200원으로 꽤 비싸다. 그래도 요미우리 팬이고 토쟁이 사이트에서 불법으로 시청하는 건 싫고 돈을 내고라도 합법적으로 시청하고 싶다는 사람에게는 희소식일 수도. 구글에서 '海外専用巨人戦完全中継'를 입력하면 주소가 나온다. 2019년부터는 DAZN을 통해서 인터넷 중계를 시작하는데 요미우리 신문과 포괄적 제휴 협정을 맺었으며 오래전부터 협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히로시마와 야쿠르트는 중계권 문제로 DAZN이 중계하지 못했다.

또한 2019년 이후부터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유튜브 계정 운영에 공을 들이고 있는데, 썸네일이 한국 프로야구단 유튜브와 비교하면 촌스러운 편이지만[26] 있을 건 나름 다 있으며 한미일 프로야구 구단 중 유튜브 구독자 1위를 달성할 만큼 유튜브 운영에 공을 들이고 있다. 편집이나 영상 자체의 퀄리티는 다른 팀들은 물론, 한국 프로야구단 유튜브들 안 부러운 수준. 그리고 니혼 TV는 DRAMATIC BASEBALL 채널을 통해 유일하게 구심 카메라 영상을 제공하고 있으며, 상대팀 활약은 전혀 틀어주지 않는 야쿠르트 공식 유튜브와는 다르게 12개 구단을 공평하게 대우하면서 타팀 선수들의 활약도 놓치지 않고 하이라이트로 제공해 야구팬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27]

요미우리 계열 스포츠 신문인 스포츠호치(スポーツ報知)가 사실상의 자이언츠 전담 매체다. 스포츠 신문에 '거인' 카테고리가 따로 있을 정도지만 1면 기사로 요미우리가 올라오는 비율이 한신 전담 매체인 데일리스포츠보다는 덜하며, 고교야구 전문 잡지를 발행하는 유일한 스포츠 신문사이기도 해서 고교야구 기간에는 고교야구 기사가 더 많이 올라온다. 2000년대 이전에는 블록지를 제외한 다른 스포츠신문도 요미우리 위주의 보도를 했으나 현재는 지역 밀착을 바탕으로 한 퍼시픽리그의 인기 상승으로 균형이 잡혀져 있는 상태.

2.2. 마스코트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로고.svg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마스코트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마스코트 초기형태.svg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마스코트(자빗 패밀리).svg
<rowcolor=#fff> 자빗 초기형태 자빗 패밀리

마스코트는 자빗(Giants+Rabbit)으로 토끼를 소재로 한 마스코트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자에 있는 YG 교차 로고의 형상에서 토끼 모양을 착안해낸 것에서 비롯됐다. 단 요미우리 구단에서는 자빗의 설정상 종족에 대해 우주인이라고 밝혔다. 토끼에서 모티브만 따온 우주인인 셈이지만, 토끼가 모티브라 일본 현지에서도 요미우리가 승리하면 SNS에 우사호(うさほー)가 넘실대곤 한다. 자빗은 Y자의 갈라진 부분이 귀가 되고 G와 교차되면서 얼굴 모양을 형성하고 Y의 받침 부분이 몸통과 발의 형태를 하는 형식으로 디자인되었으며 1992년부터 채택되었다. 야구장에 등장 시 등번호는 333번.

그 이전의 마스코트를 설명하자면 1970년대에는 미스터 자이언츠라는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은 아저씨가 마스코트였고 1980년대에는 쌍방울 레이더스 비슷하게 팔다리가 달린 야구공이 헬멧을 쓰고 마녀 빗자루처럼 야구 배트를 타고 있는 '배트를 탄 소년' 마스코트였다.

2.3. 팀 컬러

2.3.1. 야구 내적: 타자 및 탈삼진형 투수 중심

야구 내적으로는 전통적으로 타선의 힘으로 승부하는 팀컬러를 지닌 구단이다. 이는 홈구장과 팀의 기조와 관련이 있는데, 과거의 홈구장인 고라쿠엔 구장이 매우 작았던 극도의 타자 친화구장이었던 탓에 자연스레 강타자를 중심으로 하는 빅볼로 팀컬러가 맞춰졌고, 현재의 홈구장인 도쿄돔으로 옮긴 이후에도 도쿄돔 역시 타자들에게 유리한 구장이다 보니 이러한 팀컬러가 계속 유지되어 오고 있다. 또한 구단 수뇌진들이 적극 찬성했던 FA 제도의 도입 이후엔 계속해서 쓸만한 FA 매물이 나왔다 하면 가격표 안 보고 쓸어담으면서 투수들뿐만 아니라 그보다 배는 많은 좋은 타자들을 많이 영입하면서 여전히 타자 중심의 이미지가 강하다.

투수는 포지션 특성상 매일 등판도 안 되고 부상도 잦지만 타자, 특히 수비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은 장타 유형의 1루수나 코너 외야수들은 호타준족 스타일이 아닌 이상 구단에서 부상 공백을 우려하여 무리하게 뛰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부상 위험이 적어서 한번 잘하면 매일 시합에 나올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연스레 FA 획득 연차도 빠르게 채운다. 이렇다 보니 FA를 얻는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투수보다는 타자들이 많고, 구단들도 이를 알아서 야수 FA는 2군에 대체할만한 대형 유망주가 있다면 붙잡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투수는 다다익선인데다 워낙 귀한지라 좋은 투수는 아예 FA로 풀리지 않도록 FA전 장기 연장계약을 제시하는 비율도 높다. 덕분에 FA시장에 매물자체가 야수가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FA선수를 계속해서 영입하는 팀은 자연스럽게 강타자들로 타선이 채워지게 되는 것.[28]

용병 또한 요미우리는 비싼 값을 주더라도 일본 내 다른 팀에서 활약을 해서 검증된 선수를 데려오는 것을 선호하는데, 일본에 오는 선수들 중 성공하는 선수는 타자가 많다. 상술했듯 투수는 부상도 많고 매일 던질 수도 없으니 마이너리거들도 기회를 비교적 많이 얻는 편인데 타자는 역시 부상을 안 당하는데다 매일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주전이 잘해버리면 마이너에서 대기하는 선수들은 주전 선수가 팀을 떠날 때까지 기회를 얻을 수가 없다. 이래서 마이너를 전전해서 동양리그를 알아보는 선수들은 투수는 그래도 어느정도 다 긁어볼 만큼 긁어봐서 소위 말하는 견적이 다 나온 선수가 많은 반면, 타자는 실력은 충분한데 정말 주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안 비켜줘서 마이너에서 눈물젖은 빵 씹는 선수들이 종종 있기에 타자 용병이 성공확률이 높은 것. 그래서 성공한 용병을 구입하는 것은 곧 강타자를 구입하게 될 확률이 높고, 이렇게 타자구장인 홈구장과 더불어 FA, 외국인 용병으로 강타자를 많이 사들이니 자연스럽게 타격이 강점인 팀 컬러가 될 수밖에 없다.

다만 어디까지나 타선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을 뿐이지 투수진 역시 항상 리그 탑급 에이스를 꾸준히 갖추어 V9 시대의 에이스 호리우치 츠네오나 전설의 400승 투수 카네다 마사이치, 1980년대의 에가와 스구루니시모토 타카시, 1990년대의 사이토 마사키-쿠와타 마스미-마키하라 히로미의 요미우리 3기둥, 2000년대의 우에하라 코지우츠미 테츠야, 2010년대의 각각 초반-중반-후반을 지배했던 스기우치 토시야, 마일스 마이콜라스스가노 토모유키, 2020년대 현재는 토고 쇼세이, 오타 타이세이 등 투수진 전체가 강하다는 평가는 못 받을지언정 일본을 대표하는 에이스라 할 만한 선수들은 한두 명씩 꾸준히 계속 배출해 왔다.

이런 조금만 세게 맞아도 넘어가는 작은 구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 팀의 투수진은 주로 빠른 구속과 강력한 구위로 타자들이 아예 공에 손도 못 대게 하는 스타일의 탈삼진형 투수가 많은 편이며, 실제로 탈삼진 타이틀 제정 이후 가장 많은 탈삼진왕(11회)을 배출한 팀이다. 비슷하게 크기가 작은 메이지진구 야구장을 사용하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정반대로 많이 맞아도 장타가 되지 않도록 땅볼 유도형 투수가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리그와 구장 특징이 같은 도쿄 구단끼리의 해결점이 새로 대칭되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29]

또한 2020년대 들어 아카호시 유지, 야마사키 이오리 등이 선발 경쟁을 펼치면서 하라 감독도 투수왕국이 될 수 있다고 자신감을 갖춘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다만 이 인터뷰는 어느 정도 걸러 들을 필요가 있는데, 당장 2021-22시즌에 2년 연속으로 투수진 붕괴로 인한 루징 시즌을 경험할 만큼 투수진의 약화가 여실히 드러난 데다 감독이 당연히 자기 팀 투수들이 약해빠졌다고 대놓고 이야기할 수도 없으니 그냥 팀의 분위기를 높이기 위한 립서비스라고 봐야 한다. 다만 2023년에는 야마사키, 아카호시 등이 선발 로테이션에 안정적으로 안착하고 요코가와가 선발 로테에 들어서 첫해 치곤 괜찮은 활약을 선보이는 등 선발진 수준이 강화되었다.

2.3.2. 야구 외적: 안 좋은 육성 및 영원한 윈나우

역사적으로 강팀으로 유명한 팀이지만 동시에 윈나우 지옥으로 손에 꼽힌다. 이는 뉴욕 양키스와도 비슷한 점.[30]

이 팀에서 망가뜨린 유망주가 한둘이 아니다. 상술했듯 돈 많이 쓰는 것으로 유명한 구단에 영원히 윈나우인 공룡구단인지라, 유망주들에 대해서도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다. 일단 좋은 선수만 나왔다 하면 가격표 안 보고 쓸어담는 구단이라 이 선수들이 1군에서 자리를 차지하면 유망주는 실력과는 상관없이 2군에서 눈물 젖은 스시를 먹어야 한다. FA선수가 먹튀가 되면 기회가 있는 거 아니냐고 할 수 있는데, 이 구단은 FA가 먹튀가 되면 다음 해에 또 FA를 사버려서 2000년대 중후반 요미우리 외야는 먹튀파티가 되는 바람에 그 구멍을 카메이 요시유키가 홀로 메꿔야 했다. 그래서 FA가 먹튀가 되더라도 다음 FA가 들어올 때까지 그 짧은 기간밖에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니 신인 크기가 어려운 팀이라, 최근 일본 선수들에게는 당당히 입단 기피팀이 되어가고 있으며 조금만 수틀리면 선수를 육성선수로 돌려버려서 원성이 크다.

또한 야구 외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성장이 힘든 감이 있는데 홈구장은 도쿄 한복판인 도쿄돔에다 2군 구장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오다큐 오다와라선 요미우리랜드앞역 또는 케이오 사가미하라선 케이오 요미우리랜드역 근처에 있어서 도쿄까지 교통편이 너무나도 편리하다. 대략 구장에서 버스를 타거나 걸어나오는 시간을 더해도 오다큐든 케이오든 한 시간 정도면 도쿄 가부키쵸 한복판에 갈 수 있는 접근성에, 자동차로는 길은 다소 막히겠지만 더더욱 편리하게 갈 수 있다. 굳이 거기까지 안 가도 조금만 나가도 번화가와 술집이 있다.[31] 더군다나 프로야구에 어떤 팀이 있는지 잘 모르는 사람도 교진은 알 정도의 대단한 인기팀에다가 유망주들에게 계약금과 연봉도 타 팀 대비 쎄게 주기 때문에, 운동선수라 젊고 키 크고 몸도 좋은데 돈도 많고 술 먹으러 나가기도 편하고 여자들에게 인기도 엄청난데, 이걸 안 놀고 야구에 집중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유독 선수들의 방탕한 사생활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고, 2군 선수도 예외가 아니다.[32] 그래서 대부분 2군 구장과 기숙사는 주변에 놀 거리가 없는 곳으로 지어놓는 경우가 많은데, 교진은 모기업이 운영하는 리조트인 요미우리랜드와 연계하려는 목적으로[33] 2군 경기장을 꽤 교통이 편리한 곳에 지어놓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점. 비슷하게는 과거 1군 구장이었던 나고야 구장 시설을 그대로 쓰려다 보니 나고야 시내 한복판에 2군 시설이 위치한 주니치 드래곤즈[34]나 과거 구리시 LG 챔피언스 파크를 2군 훈련장으로 쓰던 시절 비슷하게 2군 선수들의 사생활 제어에 어려움을 겪던 LG 트윈스 정도가 있다. 영원한 라이벌 한신 타이거스의 2군 구장인 닛테츠코한 SGL스타디움 아마가사키, 오릭스 버팔로즈의 2군 구장 마이시마 베이스볼 스타디움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편이지만, 접근성은 의외로 나쁘지는 않다.[35][36]

타 팀은 비교적 재능이 돋보이지 않는 선수라도 세금 내 가며 어떻게 잘 키워서 스타까진 아니어도 쓸만한 선수를 만들어놓는 경우도 제법 있는데, 교진은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고 이 팀에서는 정말 1년차부터 잘 하는 재능충이 아니면 크기 힘들고, 이러다보니 요시오카 유지[37], 이치오카 류지, 오타 타이시요미우리를 나가서 재능이 만개하는 유망주들도 간간히 보인다. 그래서 육성이 좋지 않은 만큼 그런 가혹한 환경을 뚫고 이 팀에서 주전으로 성장하는 선수들은 어중간한 선수가 없고, 대부분이 일본을 호령하는 대스타들이며, 최근에는 새로 입단한 선수들도 오프시즌에 쉬면서도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개인레슨, 자율트레이닝[38] 등을 받는다.

전국적으로 인기가 많은 팀이고, 구단주의 애정도 강한 팀이기 때문에 V9시대를 거치며 워낙 눈이 높아져서 한 2~3년만 리그 우승에 실패해도 팬들로부터 원성을 사기 시작하고, 구단주로부터는 성적을 내라는 압박을 받는다[39]. 말만 그렇게 하면 모르겠는데 실제로 고액 용병과 FA를 아낌없이 사주면서 성적을 내라고 압박을 하니 안 낼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보니 몇년씩 하위권에서 탱킹하며 유망주를 모으는 것은 꿈도 못 꾸고, 애초에 유망주가 안 모이니 육성도 힘들다. 성적 다 버리고 탱킹하려고 해도 돈 대주는 구단주를 무시할 수도 없을 뿐더러 이미 사둔 비싼 FA 선수가 한 트럭이라 이 선수들 연봉값을 생각해서라도 윈나우를 안 할 수가 없다.[40][41] 이런 제반사정상 리빌딩 내지 육성을 하고 싶어도 불가능한, 항상 윈나우만을 고집하는 팀이다[42]. 이러한 팀 상황에 대해 일본언론에서는 상승군단(항상 이기는 팀)의 숙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최근에는 연습시설이 없는 도쿄돔의 특성상, 1군 선수들도 알아서 2군 구장을 찾아 자율적으로 훈련하기도 하고 1년 내내 선수들이 스스로 자율트레이닝을 받고 있다. 또한 요미우리도 젊은 세대의 알콜 소비 감소에 따라 술을 마시거나 유흥에 탐닉하는 선수가 적어지고, 구단도 2군 구장의 이전, 리모델링을 통해 젊은 선수의 성장을 도우며 도쿄와 가까운 2군구장에 대한 우려는 줄어들고 있다.

3. 인기 및 위상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명문 팀이자,[43] 일본의 모든 스포츠 중 압도적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전국적인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기사 2014년 기준으로 889만 명을 보유하고 있어서 608만 명을 보유하고 있는 한신 타이거스보다도 월등히 많다. 출처(일본어 원문)[44] 한신전도 요미우리 상대로는 시범경기까지 포함해 입장료가 더 올라간다.

이러한 인기의 이유는 역사와 실력, 그리고 모기업. 역사는 상술했듯 모체가 된 팀이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 즉 국가대표팀이고 이 팀이 하는 경기를 더 보고 싶다는 인기 덕에 생겨난 것이 일본프로야구이기 때문이다. 대일본동경야구구락부 창단이 1934년, 일본프로야구 창설이 1936년으로 문자 그대로 리그보다 팀이 먼저 존재했던 것이고 일본의 모든 종목을 통틀어 최초의 프로 스포츠 구단이다.

게다가 일본 야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선수들인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등의 선수가 동시에 전성기를 맞으며 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엔 세계 프로 스포츠에서 유례가 몇 없는 V9를 달성할 정도로 시대를 주름잡은 강팀이었고, 그 전후로도 비밀번호 기간이 없을 정도로 꾸준히 강팀 자리를 유지했다. 그런 과정에서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많이 나타났고, 나중에는 이런 스타들을 보고 자란 어린이들이 커서 선수가 되어 교진에 입단해서 새로운 스타 선수가 되고 다음 세대의 소년들이 또 그걸 보며 꿈을 키우는 선순환을 일으킨 것. 덕분에 이들의 인기는 날로 늘어갈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모기업인 언론사 요미우리 신문 역시 영향을 끼쳤는데, 요미우리 신문은 일본 제일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신문으로 전국적인 영향력이 있고, 이들이 발행하는 신문과 잡지에서는 당연히 자팀인 교진 선수들을 주로 다루었기에 당연히 이들의 인기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시대가 흘러 신문에서 방송으로 미디어의 주도권이 넘어갔으나 요미우리는 전국 단위 방송국인 닛폰 테레비도 가지고 있다. 프로야구가 아직 전 경기 TV중계를 실시하기 전에는 예전 한국에서도 그랬듯 라디오 중계가 기본으로, TV로 야구를 보고 싶으면 가끔씩 지상파에서 중계를 해주거나, 아니면 지역 방송사에서 자기네 연고지 팀 경기 중계를 해주는 것을 볼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되면 지역 방송에서 중계를 해 줄 연고 야구 팀이 없는 지역에 사는 팬은 TV로 야구를 볼 수 없다. 그러나 요미우리는 지상파 TV 채널인 닛폰 테레비를 가지고 있고, 자사 채널에서 종종 자팀인 교진 경기 중계를 해주었다. 시골에 사는 팬들은 야구가 보고 싶으면 야구단이 있는 도시로 나가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TV로 볼 수 있는 야구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경기가 유일한 선택지였던 것. 덕분에 야구단이 있는 지방을 뺀 다른 지역의 야구 팬을 자연스럽게 팬으로 흡수했다. 지금은 케이블 TV와 인터넷으로 자유롭게 보고 싶은 팀 경기를 볼 수 있지만 그때 그 시절 이런 식으로 팬이 된 어린이들이 중장년~노년층이 된 지금도 그대로 팬으로 남아 있어 덕분에 설문조사를 하면 야구 팀이 없는 지역에서는 대부분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인기 1위를 차지한다. 이들 지역에서는 웬만하면 요미우리 경기를 라디오로 중계한다.

또한 이렇게 역사와 인기를 다 가진 명문 팀이다 보니 야구를 넘어 일본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팀이라, 당연히 모기업에서도 구단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가 매우 크다. 자생을 하는 구단이나 지원을 받더라도 열악한 구단도 있는 데 반해 모기업 요미우리 그룹에서도 구단에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어서 당장의 적자를 신경쓰지 않고 좋은 선수들을 많이 사 준다. 특급 선수가 FA로 나오면 목적지 제1순위로 꼽히는 팀은 항상 요미우리 자이언츠이며 매년 겨울 대대적인 FA 쇼핑은 연례 행사로[45], 육성을 강화할 것을 천명한 2010년대 후반에도 FA와 고액 용병들을 매년 사들이는 돈지랄 구단이었다. 수억 엔짜리 고액 FA를 매년 사면서 무슨 육성이냐 싶지만, 교진 기준으로는 이것도 가격표 안 보고 있는 대로 다 쓸어담던 예전에 비하면 많이 자제한 거다. 이렇게 비싼 값을 쳐줘가며 선수를 사모으다 보니, 다른 팀에서 요미우리로 들어오는 일은 허다해도 요미우리 선수가 FA로 타 팀에 가는 일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코쿠보 히로키,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오오무라 사부로와 같은 예외적인 사례가 드물게 나오긴 하나 이 선수들은 전부 다른 팀에서 요미우리로 들어온 사례로써 친정팀 복귀나 출장 기회 확보를 위해 FA를 선언한 것이기에 여전히 요미우리 선수가 방출이나 트레이드가 아닌 이상 자발적으로 FA를 선언해 이적하는 일은 손가락에 꼽는다. 특히 원 클럽 맨 요미우리 선수가 FA로 다른 팀에 이적한 사례는 FA 원년인 1993년 코마다 노리히로가 요코하마로 이적한 것을 빼면 전무하다.[46]

자체적으로 길러내는 스타들도 많은데 이렇게 타 구단에서 최고의 스타들을 돈으로 영입하다 보니 이 스타 선수들의 팬들을 그대로 요미우리 팬으로 흡수해 더더욱 인기가 늘어나는 것. 여튼 이렇게 역사와 성적, 스타성, 미디어와 모기업의 든든한 백업까지 갖추어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인기 팀으로 군림하고 있다.

2010년대 들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페이롤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1.5배를 기록하며 일본 제일의 돈지랄 구단이라는 지위는 빼앗겼고,[47]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일본시리즈를 10년간 7번 우승하며 성적으로도 2010년대 들어 소프트뱅크에게 밀리며[48] 평균 관중 수 1위 자리 또한 관서 제일의 빅 클럽 한신 타이거스에게 빼앗기는 등 2010년대 들어 여러모로 예전만은 못한 침체기를 겪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인기 순위 1위, 팬 클럽 회원 수 1위, 연봉 총액 2위인 빅 클럽이며 역사와 전통, 일본의 수도 도쿄의 제1 구단이라는 상징성으로 여전히 일본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문이자 인기 구단으로 군림하고 있는 팀이다.

2군 경기장인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장의 경우에도 세금 포함 1,200엔 정도의 입장료를 받는다. 대략 일반적으로 1군 경기도 15,000원이면 내야석을 살 수 있고 2군 경기는 공짜인 한국 기준으로는 상상도 못 할 가격이고 내야석이 4~5만 원 하는 일본 기준으로도 2군 경기 치고는 약간 비싼 가격[49]. 자사 방송사를 동원해 방송 중계[50]를 하다 보니 경기장 펜스 광고도 판매하고 있다. 펜스 광고의 경우 지역 밀착 정책을 성실히 수행하는 닛폰햄, 소프트뱅크도 도입하는 추세다.

보다시피 일본 내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요미우리 신문이라는 언론사를 등에 업은 빅 마켓 구단이라는 특성상 국내, 외국 선수 막론하고 끓는점이 굉장히 낮다. 대부분의 초인기 빅 마켓 팀 선수들이 치르는 고역이긴 하지만, 요미우리는 그 정도가 심해서 10년을 잘하다 한 달만 못해도 바로 역적으로 취급해 쫓아내기도 한다는 것이다.[51] 외국인 선수는 본가인 요미우리 신문에서 물어뜯기 시작하면 그 선수는 사실상 퇴출된다고 보면 된다. 이승엽이 "요미우리는 나에게 모든 것을 줬고 또 나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고 표현했을 정도다. 심지어 요미우리 신문, 니혼 TV 외의 미디어에서도 2000년대 전까지 야구 관련 뉴스를 센트럴리그, 특히 요미우리 위주로 보도했던 경우가 많아서 이 '선수 때리기'는 일상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현재는 미디어에서도 12개 구단을 골고루 다루려고 하다 보니 어느 정도는 희석된 편이고, 스포츠호치도 팀별로 담당기자가 있다.[52]

우승에 대한 기준도 남달라 다른 팀의 경우는 리그 우승만 해도 포스트시즌의 졸전 여부와 상관없이 시즌 종료 후 우승 기념 이벤트를 여는 경우가 많지만, 거인은 오로지 리그 우승+일본시리즈 우승의 경우에만 우승 이벤트를 개최한다고 한다. 이때 담당 백화점미츠코시, 킨테츠.[53]

일본 최고의 인기 구단답게 간사이에도 팬이 상당히 있는 편이라 연 1회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홈경기를 치르기도 한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신의 압도적인 인기에 가려서 간사이의 요미우리 팬들은 카쿠레키리시탄[54] 취급을 받았다. 아사히 신문기사에서 요미우리 팬 학생이 한신 응원가 롯코오로시를 모른다고 담임에게 비국민 취급을 받거나 직장에서 어제 야구 이야기가 나오면 당연히 한신 팬이라 간주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기사에 나온 요미우리 응원 이자카야에서도 "간사이에서 장사하려면 한신 응원해라"라고 전화가 와서 주인이 "불만 있으면 우리 점포로 와라"라고 맞불을 놓기도 했다. 그래서 하라 타츠노리 감독이 간사이의 요미우리 팬들을 이 기사에서 '간사이 유산'으로 선정하며 강팀을 응원하는 건 자랑이니 기죽지 말고 요미우리 응원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웃긴 건 간토 지역에 있는 도쿄에도 한신 타이거즈 팬이 많으며, 심지어 요미우리 팀 내에도 나가시마 시게오, 마쓰이 히데키, 아베 신노스케[55], 오카모토 카즈마, 오우타 타이세이 등 한신 팬이 많다(...).[56] 그러나 지금은 간사이에서 요미우리를 대놓고 응원하는 팬들도 많으며, 고베의 라디오칸사이에서 라디오닛폰[57] 중계를 받아 요미우리 편파 라디오 중계도 해 준다.

또한 오키나와현 출신 선수를 꾸준히 영입하고, 나하시에서도 시범경기 및 캠프를 가져서 오키나와에도 팬이 꽤 있는 편이라, 미야자키현에서와 같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함께 인기를 나눠먹고 있다. 하지만 미야자키 내에서 스프링캠프로 쓰는 구장인 선마린 스타디움은 인구 규모에 비해 크기가 무식하게 큰 편이라 베어스포티비로 요미우리-두산의 연습 경기가 중계될 때면 구장이 심각하게 휑하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는 신칸센도 다른 구단은 선수도 일반석을 타면, 요미우리는 스코어러를 비롯하여 선수가 아닌 분석팀도 모두 그린석(특등석)을 탔다고 한다. 다른 구단이 다다미 몇개 정도의 방에서 묶었다면 요미우리는 호텔 리조트에서 잔다든지, 승리수당도 다른 구단의 배를 받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4. NPB 굴지의 안티 구단

일본에서 제일 안티팬이 많은 스포츠 클럽이다. 보통 종목 불문하고 가장 인기가 많은 명문 팀이면 안티도 제일 많다. 당장 같은 야구 리그인 MLB만 봐도 뉴욕 양키스가 팬 숫자와 안티 숫자가 압도적이고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독주하고 있는 축구 클럽 FC 바이에른 뮌헨, 프랑스 리그 1에서 독주하고 있는 축구 클럽 파리 생제르맹 FC, 스페인 라리가의 쌍두마차 레알 마드리드FC 바르셀로나, 이탈리아 세리에 A의 3강인 유벤투스 FC,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AC 밀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빅6에 속하는 리버풀 FC, 맨체스터 시티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아스날 FC, 첼시 FC, 토트넘 홋스퍼 FC도 팬과 안티가 제일 많은 팀이다. 실제로도 요미우리 계열 스포츠지로도 국내에 잘 알려진 스포츠호치에서는 요미우리 담당 기자인데 정작 기자 본인이 안티 요미우리고 오사카 본사 대표가 한신 팬인 사례가 있기도 했다. 기자 칼럼 스포츠호치도 12구단 담당 기자가 엄연히 다 있어서 완전한 요미우리 편파는 아니니 오해는 금물이고, 해당 기사에서도 스포츠호치 12구단 담당 기자들의 기사 및 SNS에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부탁하였다. 실제로도 스포츠호치는 팬들이 트위터에 구단을 막론하고 다뤄 주는 주제가 있으면 SNS에서 검토 후 바로 다뤄 준다. 또한 닛폰 테레비는 더 비범해서 안티 요미우리 연예인이자 히로시마 도요 카프 팬인 아리요시 히로이키를 MC로 요미우리 자이언츠 테마 예능 프로그램 '아리요시X교진'을 만들기도 했다.

한때는 일본 야구계의 독보적인 돈지랄 구단이었는데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요미우리 그룹이 야구 팀에 붓는 애정은 큰 편이라, V9를 달성했던 시절의 과거에는 전국에서 유망주를 데려와서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게 해줬고[58], 드래프트 제도가 생기면서 유망주 풀을 독점적으로 확보하지 못하게 된 뒤로는 FA에 크게 투자하여 타 구단의 A급 선수를 쓸어담으면서 언제나 선수층을 두껍게 유지하였다. 다만 2020년 코로나19 이후로는 FA에 돈을 훨씬 적게 쓰고 GIANTS TOWN 프로젝트 하에 2군 시설을 확충하는 등 육성 기조로 가고 있다.

팬들도 마냥 정상적이지만은 않다. 머릿수를 믿고 기세등등하게 밀어붙이는가 하면, 상대 응원단 상대로 장사행위를 해서 센트럴 리그 응원단이 골머리를 앓기도 했다. 이 같은 민폐행위는 원정석 규정이 만들어져 NPB에서 팬 갈라치기를 하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2015년, 2016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1인당 평균 연봉으로 요미우리를 이겼고, 퍼시픽리그 구단들이 공격적으로 투자를 진행하면서 자력 생존을 목표로 흑자 운영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돈지랄 끝판왕이라는 평가도 점점 옛말이 되고 있다. 게다가 요미우리 신문은 인터넷OTT의 발달로 인해 주요 돈줄이었던 신문 사업 및 방송 사업이 위기를 맞고 있어서 2010년대 들어 요미우리 자이언츠도 자력 생존을 위해 뛰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FA 영입에 있어 요미우리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큰 손으로 군림하고 있는데, 2018년 들어서는 1군에서 만족스러운 성과를 내지 못하는 FA 선수들의 고비용 저효율 악성 계약 및 프랜차이즈 선수의 보상 픽 유출[59]이 이어지고 있어서 인재 육성에서 대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019년에도 히로시마에서 데려온 마루 요시히로는 활약을 해주고 있으나 모리후쿠 마사히코 등이 소프트뱅크의 첩자 역할을 하며 신나게 먹튀 짓을 하고 있다. 또한 2019년, 2020년 일본시리즈의 삽질로 인해 퍼시픽리그 견제는 안 하고 센트럴리그에서 그해 최고의 선수를 FA로 계속 사오다 보니 센트럴리그 타 팀 전력은 약해지고 퍼시픽리그 전력만 더 강하게 해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60]

돈지랄을 한창 해대던 요미우리의 모습 중 대표적인 일화로, 요미우리 회장이 2014년에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로 진출한 '다나카 마사히로'한테 "우리 팀 선수가 된다면 연봉 10억 엔을 주겠다"라는 발언을 한 것을 들수가 있다. 당시 엔 시세를 감안하면 못해도 90억 원 이상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요, 달러로 환산해도 800만 달러는 그냥 넘어가는 큰 금액이다. 그러나 다나카는 그 2배가 넘는 연봉, 그것도 7년이나 보장받고 양키스로 갔다. 아무리 요미우리라도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상대가 안 된다는 적절한 예시. 그것도 요미우리보다 더한 돈지랄의 끝을 보여주는 양키스였다. 그리고 다나카는 2017년 시즌 종료 후 옵트아웃을 행사하지 않고 양키스에 잔류하였다. 하지만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 연봉을 받은 스가노 도모유키는 2020년 메이저리그 진출 시도 실패 후 그대로 먹튀가 되었고, 2021년 MLB 직장 폐쇄 사태로 메이저리그 재진출에도 먹구름이 끼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일본 리그의 좋은 선수란 좋은 선수를 싹 쓸어가는 관계로 타 구단 팬들 중 특히 안티가 많다. 다만 한국에서는 한국인 선수들이 많이 거쳐갔었고 이승엽이 한창 활동하던 무렵에 중계까지 해 줘서 그런지 요미우리 구단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편이고 대만에서도 장첸밍, 양다이강 등 여러 대만 선수들이 활동했던 구단이라 그런지 구단 이미지가 좋은 편이다.[61]

사실 이것이 이들 구단 탓만 할 것이 아닌 게 선수들 입장에서 보면 우승 가능한 구단, 여기에 누구나 알고 있는 명문 구단에서 뛴다는 것은 프로 선수 인생에 있어서 희망 사항 중 하나이다. 당장 야구만이 아닌 타 구기 종목 프로 구단만 봐도 그렇다. 괜히 칼 말론[62]이나 게리 페이튼 같은 명선수들이 단기 계약을 감수하고서라도 LA 레이커스에 입단했던 것이 아니다. 메이저리그에서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리거라면 한번쯤 뛰어보고 싶은 명문 구단이라는 점 역시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우승 후보에 명문이란 두 가지 장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요미우리에 대한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느껴보자. 주니치 팬들의 야유 영상으로, 위 영상 1:00부터 "시네! 시네! 쿠타바레!(死ね死ねくたばれ=죽어! 죽어! 뒈져버려!)"를 외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63] 영상 속에 나오는 노래는 요미우리의 응원가인 "투혼을 담아(闘魂こめて)"인데 후렴구인 "유케 유케 소레 유케(行け行けそれゆけ=가라 가라 나아가라)"가 흘러나오면 원정 팬들은 어느 팀 팬이건 간에 가운데 손가락을 요미우리를 향해 갈기면서 다같이 큰소리로 "시네 시네 쿠타바레"를 외친다. 반면에 요미우리 선수들과 타 팀 선수들은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장으로 유명했으나, 그 요미우리도 2018년 구단에서 공식적으로 조의를 보냈던 호시노 센이치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이 경기 중에는 요미우리와 싸우지만 경기장 바깥에서는 (서로를 동업자 혹은 정당한 라이벌로 보고) 사이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일부 팬들은 돈지랄로 선수 사들이는 것을 비꼬아 "상혼을 담아(商魂込めて)"라며 아예 가사를 요미우리 비하 가사로 바꾸어 노래를 열창한다. 이 때문에 도쿄 돔에서 열린 요미우리 vs 한신 경기에서 "시네 시네 쿠타바레"가 2017년 8월 26일 그대로 NHK 프로야구 중계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2018년 8월 25일에도 똑같이 저 일이 터졌다. 여담으로, 투혼을 담아의 작곡가인 코세키 유지는 주니치의 前 구단가 '드래곤즈의 노래'도 작곡한 바 있다.[64] 마지막에 나오는 "롯데노 파쿠리~(ロッテのパクリ~, 롯데 베낀 뭐시기~)"를 외쳐주면서 마무리하는 것이 포인트다.

이 팀의 응원가 음원 영상 같은 경우에는 2020년 5월 기준으로 조회수 119만 회에 좋아요가 2,238개, 싫어요가 1,225개다. 참고로 같은 업로더가 올린 한신 타이거스의 응원가인 롯코오로시는 2018년 9월 기준으로 좋아요 1,200개에 싫어요 212개다. 일본 제일 안티 구단의 위엄을 보여주는 부분. 중계 방송에서 "시네 시네 쿠타바레"가 원래 응원가를 묻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다. 2019년 클라이막스 4차전(도쿄 돔)에서마저 한신 팬들이 이런 일을 만들어냈다. 정규 시즌의 도쿄 돔에서 그렇다는 건 올스타전엔 더하다는 소리다.

애초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모체가 메이저리그와의 친선 경기라는 사실상 국가 대항전급 이벤트의 선발 팀으로 기획되었고, 요미우리 신문 창립자 쇼리키 마쓰타로가 일본프로야구 창설의 주역이기도 했으며[6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요미우리 때문에 단일 리그였던 일본 프로야구가 양대 리그로 나뉘어졌다.[66] 한 일본 야구 팬은 "일본 야구는 요미우리와 안티 요미우리로 나뉘어진다"라고 말할 정도. 즉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는 곧 '요미우리와 요미우리에 대항하는 나머지 11개 팀'의 역사로 점철될 정도로, 요미우리는 영원한 수장으로서 일본 야구를 이끌어가고 있다.

요미우리가 특유의 돈지랄을 통해 앞서 나가고 나머지 센트럴리그 5개 구단이 그에 반기를 들며 도전하는 양상이며, 안티 요미우리의 수장이자 일본의 뿌리 깊은 관동-관서 라이벌 의식까지 곁들여져 있는 한신 타이거스, 그리고 신문사 라이벌이면서[67] 주부 지역의 대표인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라이벌 구도, 그리고 같은 도쿄 연고 팀임에도 교진의 기에 눌려서 변방 취급받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68]와의 경쟁 구도 등이 주가 된다. 특히 요미우리-한신과의 대결은 전통의 일전으로 불리며, 2016년 시즌부터 양 팀의 레전드인 타카하시 요시노부카네모토 토모아키가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양 구단이 전통의 일전을 공식적으로 더비 매치의 명칭으로 사용하며 공동 마케팅을 통해 이 라이벌리를 다시 띄우는 중이다.

이에 비해 퍼시픽리그는 센트럴리그 자체에 반기를 들면서 "너희가 인기와 기믹으로 먹고 산다면 우리는 야구 실력으로 먹고 산다"라는 식으로 어필해 왔지만, 센트럴리그보다는 관중 동원 면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였다[69]. 이렇게 프로레슬링을 연상케 하는 '스토리성'이 그동안 일본 프로야구를 이끌어온 요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요미우리 구단, 혹은 요미우리 신문의 재정 상태가 나빠져서 특유의 돈지랄을 못 하든가, 아니면 어쩌다 리그 하위권에 오래 머문다든가 하는 경우 위에서 언급한 스토리 라인이 깨지기 때문에 요미우리뿐만 아니라 NPB 자체의 인기가 크게 하락하는 현상이 나타날 정도이다. 안티 요미우리의 선봉에 선 팀들조차 결국은 거인의 인기로 인한 반사이익을 얻기 때문에 프로야구의 판이 깨지는 극단적인 상황은 바라지 않는다. 특히 이 팀의 회장인 와타나베 츠네오의 경우 일본 야구 판도 자체를 좌지우지할 정도이며, 전술되어 있듯 다나카 마사히로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기 전에 '우리 팀이었다면' 연봉 10억 엔을 주겠다고 발언할 정도로 일본 야구계에서 막강한 인사이다.

이렇기 때문에 일본야구기구라는 행정 기구가 있고, 커미셔너가 따로 존재[70]하지만 요미우리의 입김이 매우 강력해서 모든 정책이 요미우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한 예로 1983년부터 2016년까지 KBO에서 사무총장을 포함한 다양한 직을 맡아서 NPB와도 이런저런 협력을 많이 한 이상일의 증언에 따르면 WBC 개최 협력을 위해 한미일 커미셔너들이 모인 자리에서 NPB 커미셔너는 MLB 사무국 쪽 사람들에게 2004년에 퍼시픽 리그가 이미 진행 중인데도 뉴욕 양키스탬파베이 데블레이스[71] 도쿄 돔에서 MLB 개막전을 한 걸 가지고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화를 냈고,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그는 나중에 그것이 요미우리 측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서 된 거였다는 걸 전해들었다고 한다. 아시아 시리즈의 경우도 요미우리 측이 초반 3년간 운영을 전담하고 수익을 대부분 가져가서 한일중대만 협의에서 NPB 사무국 측이 불만을 토로하곤 했고 그런것이 결국 겹쳐서 엎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사실상 NPB 사무국을 따돌리고 자기들끼리 야구계 큰 일을 처리하는 정도의 파워를 가진 것이다. 단, 일본야구기구 외 경기단체의 요청에는 얄짤없어서 요미우리도 도시대항야구대회가 열리는 7~8월에는 일본야구연맹의 요청으로 도쿄돔을 비워야 한다.

요미우리의 인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중 하나는 중계권료인데, 일본프로야구 중계권료는 약 150억 엔이며 이중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중계권료가 전체 중계권료의 약 30%를 차지한다.[72] 라디오 중계도 타 팀 마켓이 커버하지 못하는 방송국은 요미우리 중계 위주로 채우는 편이다. TBS가 빠진 지금은 닛폰 방송 중계로 채우는 편이다.

과거에는 자체적으로 유망주를 키워 V9(9년 연속 우승)을 달성하였으나 90년대 초반부터 FA 제도가 시행된 이후 다른 팀에서 검증된 선수들을 많이 데려갔다. 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오치아이 히로미츠(주니치)를 필두로 히로사와 카츠미(야쿠르트), 이시이 히로오(킨테츠), 키요하라 카즈히로(세이부), 에토 아키라(히로시마), 코쿠보 히로키(다이에)[73] 등 각 팀에서도 4번 타자를 맡았던 프랜차이즈 스타 들을 대거 데려왔다. 단 이시이나 코쿠보는 트레이드로 영입. 투수 영입은 상대적으로는 소박했지만 역시 쿠도 키미야스 등의 빅 네임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검증된 선수들이 이상하게 자이언츠에 입단하면 먹튀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용병들도 싹쓸이 대상에서 예외가 아니다. 코쿠보 히로키, 알렉스 라미레스 등 예외는 있지만, 로베르토 페타지니,[74] 터피 로즈 등 많은 선수들이 요미우리에서 시련을 겪었다. 일본 내의 평가[75] 08 시즌 충격적인 일본 데뷔를 한 임창용도 결국 야쿠르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그 전까지는 요미우리가 데려갈 거라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하라 타츠노리 감독의 2차 집권기부터는 육성 선수 제도 등을 활용해 야마구치 테츠야, 마쓰모토 테츠야처럼 우수한 신인을 발굴하는 등 팀의 자원을 유망주 육성에 더 쓰고 있으며 이를 통해 2000년대 후반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물론 미국의 LA 다저스가 보여주듯 유망주 수집도 돈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며, 쵸노 히사요시, 사와무라 히로카즈, 스가노 도모유키[76] 등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여전히 자금력과 명성, 뒷공작 등을 이용해 드래프트 최대어를 미리 확보해 놓는 등 과거와 같은 패악질을 일삼고 있기도 하다. 물론 스가노의 경우는 자기 외삼촌이 당시 감독이던 하라여서 교진을 가고 싶어했던 면도 있었지만, 닛폰햄 등 퍼시픽리그 선수들이 메이저리그에 성공적으로 진출하는 와중 요미우리가 오히려 해외 진출 족쇄가 되어버린 상황이다.

이 시기에도 FA 시장에 나온 대어급 선수들의 영입이 꾸준히 이루어졌는데 대표적으로 2006년 오가사와라 미치히로[77], 2011년 스기우치 도시야, 무라타 슈이치 등이 있다. 물론 외부 영입 성과가 퍼시픽리그 출신들의 경우 영 좋지 않아 소프트뱅크의 경우 요미우리로 간 모리후쿠 마사히코의 사례는 거의 은퇴 직전 도쿄 효도 관광 수준으로 모리후쿠에 비하면 스기우치, 2013년 트레이드로 이적한 타테오카 소이치로가 훨씬 더 돈값을 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요미우리는 2000년대 혹사로 무너진 츠지우치 타카노부를 필두로 드래프트와 육성 드래프트에서 지명된 선수들이 능력을 펼치지 못하고 박살나는 막장 육성 시스템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어, 트레이드된 선수들이 오히려 더 좋은 활약을 보여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러다 보니 2017년 팀 OB 스즈키 타카히로도 FA 선수에 대한 지나친 의존 및 당장의 성적을 위한 근시안적 운용, 고위 관계자의 지나친 간섭[78]으로 인해 젊은 선수들이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성장도 멈추는 팀내 분위기를 걱정하기도 했다. 그리고 2018년에 오카모토 카즈마가 홈런을 뻥뻥 터뜨리고 두산 베어스KBO 리그의 타격 성적 1위로 키워낸 고토 코지 코치가 돌아오면서 육성에도 조금 희망이 보이는 분위기이며, 2019년 시즌 종료 후에는 FA 영입을 자제하고 있으며, 2021년에는 아예 지갑을 닫아버렸다. 투수쪽에서는 토고 쇼세이가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받고 있다.

선수 스타팅 라인업 발표 시 타악기와 육성만 사용하는 두 구단 중 하나(다른 하나는 치바 롯데 마린즈)로 이쪽은 응원 구호도 타 구단과 크게 차이난다. 다른 구단이 일본 프로야구 범용 구호[79]를 사용하는 데 비해, 자이언츠는 축구 서포터즈의 응원 콜을 사용한다.[80] 또한 일본 야구 하면 생각나는 플라스틱 배트도 외야 서포터즈석으로 가면 잘 쓰지 않으며, 맨손 응원을 많이 하고 있다. 응원 도구를 적극적으로 쓰는 한신과는 크게 대조적인 부분이다. 그 외에는 다른 구단과 응원 스타일 면에서 큰 차이는 없는 편이다. 여담으로 안티팬들이 많다 보니 자이언츠가 자기 팀의 응원을 베꼈다는 의혹이 자주 제기되기도 한다. 굳이 다른 팀에서 볼 수 없는 문화를 꼽자면 적시타가 나올 때마다 머플러를 머리 위에서 돌리는 것인데, 머플러 돌리기 자체는 치바 롯데가 원조다. 또한 이는 1975년부터 시작된 NFL 피츠버그 스틸러스의 <테러블 타월> 문화와도 상당히 유사하다. 응원 타월 문화도 피츠버그가 원조.

<VENUS>라고 불리는 치어리더도 일본프로야구 최고 인기를 자랑하고 1년 단위로 계약하는데, 2023년에는 22명을 선발했으며[81] 매년 쟈니스 사무소처럼 백턴이 되는 인원은 한 명 이상 꼭 들어간다.

5. 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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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홈구장

일본프로야구 연고제 실시 이후부터 도쿄도 연고를 계속 해왔으며 고라쿠엔 스타디움을 거쳐 현재는 도쿄 돔을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우츠노미야 기요하라 구장 등에서 열리는 지방경기도 있고[82], 도쿄돔이 도시대항야구대회 등 여러 행사에 차출되는 까닭에 일정 조정과 경기 후 연습 조정에 가장 어려움을 겪는 팀이다.

전국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구단인 만큼 지방에도 요미우리 팬이 많이 있기에 예전부터 지방 구장 편성 경기를 많이 치러왔다. 현재도 9~10경기 전후를 도쿄도 외의 지역에서 홈경기를 하고 있다. 교류전 실시 전에는 삿포로후쿠오카 등지에서 경기를 치렀으나 교류전 실시 후에는 파리그 홈구장 외 타 지역에서 개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3 구장 시합은 매년 바뀌나 남큐슈와 오사카[83], 기후[84]에서는 매년 제3 구장 시합을 치르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인해 홋토못토 필드 고베에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와의 3연전을 7월 10일~12일까지 주최하기도 했다.

7. 역사 및 시즌별 요약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1992~2005).svg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2006~2010).svg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2011~2017).svg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
1998년~2005년
까지의 엠블럼.
2006년~2010년
까지의 엠블럼.
2011년~2017년
까지의 엠블럼.
2018년~현재
까지의 엠블럼.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2022년 기준으로 리그 우승 47회,[85] 일본시리즈 우승 22회라는 역대 최다 기록을 자랑한다. 일본시리즈 우승 22회는 전 세계 프로야구 역사에서 뉴욕 양키스 다음으로 많은 챔피언십 우승 기록이다. 또한 2004년까지는 퍼시픽리그 전 구단 상대로 일본시리즈 제패를 달성한 기록도 갖고 있었다. 1951년 난카이 호크스(現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시작으로, 1963년 니시테츠 라이온즈(現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1967년 한큐 브레이브스(現 오릭스 버팔로즈), 1970년 롯데 오리온즈(現 치바 롯데 마린즈), 1981년 닛폰햄 파이터즈, 1998년 킨테츠 버팔로즈를 꺾으며 달성한 기록으로, 2005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창단 이후 2013년 일본시리즈에서 만나 다시 기록을 세울수도 있었지만 3승 4패로 패배하였다.

1934년 미국 대표팀과 친선 경기를 치른 전일본 야구팀을 기반으로 창단되었으며, 창단 당시 이름은 대일본도쿄야구클럽(大日本東京野球倶楽部[86])이었다. 그러나 일본 프로야구 리그 출범 전에 시행한 미국 원정 기간에 당시 사용하던 명칭은 너무 길고 미국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필이 안 되는 이름이라 구단 창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뉴욕 자이언츠의 이름을 따서 도쿄 자이언츠라는 이름으로 미국 원정을 돌아다녔고, 귀국 후엔 도쿄 거인군[87]이라는 명칭을 썼으며 이 명칭은 2차대전 종전까지 계속된다. 종전 후 요미우리의 명칭을 표면에 내세우면서 도쿄 요미우리 거인군으로 구단명을 바꾸면서 동시에 영문 명칭 사용이 허용되고, 야구 규약상 타 구단과 같은 방식으로[88] 맞추게 되어 정식 명칭이자 현재까지 사용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명칭이 확정된다.

다만 초창기의 영향으로 이미 없어진 쿄진(거인의 일본 발음)을 팀의 상징으로 병렬 사용하며 팬들이나 언론 보도에서도 쿄진이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중계 때 주로 사용되는 축약어도 . 하지만 공문서에는 야구 규약에 명시된 대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라는 이름만 사용되기 때문에 팬들 사이뿐만 아니라 언론에서 애칭이 정식 명칭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세계적으로 봐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가 정착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 이후 SNS 상에서는 마스코트의 동물에서 유래해 요미우리가 승리하면 승리 축하 메시지로 우사호(うさほー)도 많이 쓰인다.

이후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시리즈 9년 연속 우승(V9)이라는 세계 프로 스포츠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일본의 고도 성장과 함께 컬러텔레비전이 널리 보급되고 일본 야구 사상 최고의 슈퍼스타였던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의 ON포를 위시한 맹타 및 공격, 수비, 주루, 투수진이 두루 어루어진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전국민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V9 시대가 종료된 후에 1975년 구단 창립 이후 사상 처음이자 현재까지 유일한 센트럴리그 꼴찌를 경험하게 되나 1981년부터 2012년까지 총 7번에 매 연대마다 일본시리즈 우승을 달성하며 지금까지도 명문팀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워낙 V9 시대의 이미지가 너무나도 강렬한 탓에 V9 시대 이후에도 여전히 최강 명문팀의 자리를 유지했지만 그 때만큼의 임팩트는 주지 못하고 있으며, 최근엔 리그 우승은 간간히 하지만 일본시리즈 제패와는 멀어진 모습을 보여주며 최강 명문팀으로써의 입지가 흔들리게 되었다.

2007년 이후의 각 시즌별 요약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시즌 참조.

8. 관중수 추이

<rowcolor=#373a3c> 연도별 총관중 일일 평균
2013년 3,008,197명 (+3.6%) 41,781명
2014년 3,018,284명 (+0.3%) 41,921명
2015년 3,001,187명 (-0.6%) 42,270명
2016년 3,004,108명 (-1.3%) 41,724명
2017년 2,958,890명 (-0.1%) 41,675명
2018년 3,002,347명 (+1.4%) 41,699명
2019년 3,027,682명 (+0.8%) 42,643명 (+2.3%)
2020년 492,526명 8,209명
2021년 812,612명 11,286명
2022년 2,318,302명 32,199명
2023년 2,708,315명 38,145명

9. 순수혈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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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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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선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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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역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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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역대 감독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221815><tablebgcolor=#221815>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f49c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555555,#aaaaaa
1934년 ~ 현재
초대
미야케 다이스케
(1934~1935)
2대
아사누마 요시오
(1935~1936)
3대
후지모토 사다요시
(1936~1942)
4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1943)
5대
나카가미 히데오
(1944~1946)
6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1946~1947)
7대
미하라 오사무
(1947~1949)
8대
미즈하라 시게루
(1950~1960)
9대
카와카미 테츠하루
(1961~1974)
10대
나가시마 시게오
(1975~1980)
11대
후지타 모토시
파일:일본 국기.svg
(1981~1983)
12대
오 사다하루
(1984~1988)
13대
후지타 모토시
(1989~1992)
14대
나가시마 시게오
(1993~2001)
15대
하라 타츠노리
파일:일본 국기.svg
(2002~2003)
16대
호리우치 츠네오
(2004~2005)
17대
하라 타츠노리
(2006~2015)
18대
타카하시 요시노부
파일:일본 국기.svg
(2016~2018)
19대
하라 타츠노리
(2019~2023)
20대
아베 신노스케
파일:일본 국기.svg
(2024~)
:일본시리즈 우승 / : 센트럴리그 우승 / : 단일리그 우승
}}}}}}}}}}}}}}} ||
대수이름활동 연도년수
초대 미야케 다이스케 1934 - 1935 2년
2대 아사누마 요시오 1935 - 1936 2년
3대 후지모토 사다요시[89] 1936 - 1942 6년
4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1943 1년
5대 후지모토 히데오[90] 1944 - 1946 3년
6대 나카지마 하루야스 1946 - 1947 2년
7대 미하라 오사무 1947 - 1949 3년
8대 미즈하라 시게루 1950 - 1960 11년
9대 카와카미 테츠하루 1961 - 1974 14년
10대 나가시마 시게오 1975 - 1980 6년
11대 후지타 모토시 1981 - 1983 3년
12대 오 사다하루 1984 - 1988 5년
13대 후지타 모토시 1989 - 1992 4년
14대 나가시마 시게오 1993 - 2001 9년
15대 하라 다쓰노리 2002 - 2003 2년
16대 호리우치 츠네오 2004 - 2005 2년
17대 하라 다쓰노리 2006 - 2015 10년
18대 다카하시 요시노부 2016 - 2018 3년
19대 하라 다쓰노리 2019 - 2023 5년
20대 아베 신노스케 2024 - -

보면 알겠지만 양대 리그 분리 후에는 깔끔하게 한 번도 시즌 도중에 감독이 교체되거나 한 적이 없으며 2015년까지 65년 동안 10대에 걸쳐 단 7명만이 감독으로 재임하여 감독 임기도 평균 6.5년으로 수명도 길다. 물론 나가시마, 후지타, 하라의 경우에는 중간에 한 번 물러났다가 다시 지휘봉을 잡은 케이스이기는 하지만 이들 감독들도 중간의 어떤 흑역사를 제외하곤 장기간 감독 자리에 앉으면서 팀을 안정되게 이끌었다.

14. 역대 성적

­ 리그 우승[91]
­ 2위
­ 3위
B클래스(포스트시즌 진출 실패)

14.1. 단일 리그 시대

<rowcolor=#f49c00> 연도 정규 시즌 순위 최종 순위 구단명 경기 수 승률
1936 봄 [92] 도쿄 교진군 - - - - -
1936 여름 [93] 7 2 5 0 .286
1936 가을 [94] <colbgcolor=#ffd700> 우승[95] 27 18 9 0 .667
1937 봄 1위/8팀 우승 56 41 13 2 .759
1937 가을 2위/8팀 2위 48 30 18 0 .667
1938 봄 2위/8팀 2위 35 24 11 0 .686
1938 가을 1위/9팀 우승 40 30 9 1 .769
1939 1위/9팀 우승 96 66 26 4 .717
1940 1위/9팀 우승 104 76 28 0 .731
1941 1위/8팀 우승 86 62 22 2 .738
1942 1위/8팀 우승 105 73 27 6 .730
1943 1위/8팀 우승 84 54 27 3 .667
1944 2위/6팀 2위 35 19 14 2 .576
1946 2위/8팀 2위 105 64 39 2 .621
1947 5위/8팀 5위 요미우리 자이언츠 119 56 59 4 .487
1948 2위/8팀 2위 140 83 55 2 .601
1949 1위/8팀 우승 134 85 48 1 .639

14.2. 양대 리그 분리 이후

<rowcolor=#f49c00> 연도 정규 시즌 순위 최종 순위[96] 팀이름 경기수 승률 포스트시즌[97]
1950 3위/8팀 3위 요미우리 자이언츠 140 82 54 4 .603
1951 1위/7팀 <colbgcolor=#ffd700> 우승 114 79 29 6 .731 일본시리즈 (4-1 vs 난카이)
1952 1위/7팀 우승 120 83 37 0 .692 일본시리즈 (4-2 vs 난카이)
1953 1위/6팀 우승 125 87 37 1 .702 일본시리즈 (4-1-2 vs 난카이)
1954 2위/6팀 2위 130 82 47 1 .636
1955 1위/6팀 우승 130 92 37 1 .713 일본시리즈 (4-3 vs 난카이)
1956 1위/6팀 우승 130 82 44 4 .646 일본시리즈 (2-4 vs 니시테츠)
1957 1위/6팀 우승 130 74 53 3 .581 일본시리즈 (0-1-4 vs 니시테츠)
1958 1위/6팀 우승 130 77 52 1 .696 일본시리즈 (3-4 vs 니시테츠)[98]
1959 1위/6팀 우승 130 77 48 5 .612 일본시리즈 (0-4 vs 난카이)[99]
1960 2위/6팀 2위 130 66 61 3 .519
1961 1위/6팀 우승 130 71 53 6 .569 일본시리즈 4-2 (vs 난카이)
1962 4위/6팀 4위 134 67 63 4 .515
1963 1위/6팀 우승 140 83 55 2 .601 일본시리즈 (4-3 vs 니시테츠)
1964 3위/6팀 3위 140 71 69 0 .507
1965 1위/6팀 우승 140 91 47 2 .659 일본시리즈 (4-1 vs 난카이)[100]
1966 1위/6팀 우승 134 89 41 4 .685 일본시리즈 (4-2 vs 난카이)
1967 1위/6팀 우승 134 84 46 4 .646 일본시리즈 (4-2 vs 한큐)
1968 1위/6팀 우승 134 77 53 4 .592 일본시리즈 (4-2 vs 한큐)
1969 1위/6팀 우승 130 73 51 6 .589 일본시리즈 (4-2 vs 한큐)
1970 1위/6팀 우승 130 79 47 4 .627 일본시리즈 (4-1 vs 롯데)
1971 1위/6팀 우승 130 70 52 8 .574 일본시리즈 (4-1 vs 한큐)
1972 1위/6팀 우승 130 74 52 4 .587 일본시리즈 (4-1 vs 한큐)
1973 1위/6팀 우승 130 66 60 4 .524 일본시리즈 (4-1 vs 난카이)
1974 2위/6팀 2위 130 71 50 9 .587
1975 6위/6팀 6위 130 47 76 7 .382
1976 1위/6팀 우승 130 76 45 9 .628 일본시리즈 (3-4 vs 한큐)
1977 1위/6팀 우승 130 80 46 4 .635 일본시리즈 (1-4 vs 한큐)
1978 2위/6팀 2위 130 69 49 16 .570
1979 5위/6팀 5위 130 58 62 10 .483
1980 3위/6팀 3위 140 61 60 9 .504
1981 1위/6팀 우승 130 73 48 9 .603 일본시리즈 (4-2 vs 닛폰햄)[101]
1982 2위/6팀 2위 130 66 50 14 .569
1983 1위/6팀 우승 130 72 50 8 .590 일본시리즈 (3-4 vs 세이부)
1984 3위/6팀 3위 140 67 54 9 .554
1985 3위/6팀 3위 140 61 60 9 .504
1986 2위/6팀 2위 130 75 58 7 .610
1987 1위/6팀 우승 130 76 43 11 .639 일본시리즈 (2-4 vs 세이부)
1988 2위/6팀 2위 130 68 59 3 .535
1989 1위/6팀 우승 130 84 44 2 .656 일본시리즈 (4-3 vs 킨테츠)[102]
1990 1위/6팀 우승 130 88 42 0 .677 일본시리즈 (0-4 vs 세이부)
1991 4위/6팀 4위 130 66 64 0 .508
1992 2위/6팀 2위 130 67 63 0 .515
1993 3위/6팀 3위 131 64 66 1 .492
1994 1위/6팀 우승 130 70 60 0 .538 일본시리즈 (4-2 vs 세이부)
1995 3위/6팀 3위 131 72 58 1 .554
1996 1위/6팀 우승 130 77 53 0 .592 일본시리즈 (1-4 vs 오릭스)
1997 4위/6팀 4위 135 63 72 0 .467
1998 3위/6팀 3위 135 73 62 0 .541
1999 2위/6팀 2위 135 75 60 0 .556
2000 1위/6팀 우승 135 78 57 0 .538 일본시리즈 (4-2 vs 다이에)[103]
2001 2위/6팀 2위 140 75 63 2 .543
2002 1위/6팀 우승 140 86 52 2 .623 일본시리즈 (4-0 vs 세이부)
2003 3위/6팀 3위 140 71 66 3 .518
2004 3위/6팀 3위 138 71 64 3 .526
2005 5위/6팀 5위 146 62 80 4 .437
2006 4위/6팀 4위 146 65 79 2 .451
2007 1위/6팀 우승 144 80 63 1 .559 세컨드 스테이지 (0-3 vs 주니치)
2008 1위/6팀 우승 144 84 57 3 .596 세컨드 스테이지 (3-1-1 vs 주니치)
일본시리즈 (3-4 vs 세이부)
2009 1위/6팀 우승 144 89 46 9 .659 세컨드 스테이지 (4-1 vs 주니치)
일본시리즈 (4-2 vs 닛폰햄)
2010 3위/6팀 3위 144 79 64 2 .552 퍼스트 스테이지 (2-0 vs 한신)
파이널 스테이지 (1-4 vs 주니치)
2011 3위/6팀 3위 144 71 62 11 .534 퍼스트 스테이지 (1-2 vs 야쿠르트)
2012 1위/6팀 우승 144 86 43 15 .667 파이널 스테이지 (4-3 vs 주니치)
일본시리즈 (4-2 vs 닛폰햄)
2013 1위/6팀 우승 144 84 53 7 .613 파이널 스테이지 (4-0 vs 히로시마)
일본시리즈 (3-4 vs 라쿠텐)
2014 1위/6팀 우승 144 82 61 1 .573 파이널 스테이지 (1-4 vs 한신)
2015 2위/6팀 2위 143 75 67 1 .528 퍼스트 스테이지 (2-1 vs 한신)
파이널 스테이지 (1-4 vs 야쿠르트)
2016 2위/6팀 2위 143 71 69 3 .507 퍼스트 스테이지 (1-2 vs DeNA)
2017 4위/6팀 4위 143 72 68 3 .514
2018 3위/6팀 <colcolor=#373a3c> 3위 143 67 71 5 .486 퍼스트 스테이지 (2-0 vs 야쿠르트)
파이널 스테이지 (0-4 vs 히로시마)
2019 1위/6팀 우승 143 77 64 2 .546 파이널 스테이지 (4-1 vs 한신)
일본시리즈 (0-4 vs 소프트뱅크)[104]
2020 1위/6팀 우승 120 67 45 8 .598 일본시리즈 (0-4 vs소프트뱅크)
2021 3위/6팀 3위 143 61 62 20 .496 퍼스트 스테이지 (2-0 vs 한신)
파이널 스테이지 (0-3 vs 야쿠르트)
2022 4위/6팀 4위 143 68 72 3 .486
2023 4위/6팀 4위 143 71 70 2 .504
<rowcolor=#373a3c> NPB 통산 87시즌 리그 우승 38회 11164 6266 4540 358 .580 일본시리즈 우승 22회

15. 영구 결번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요미우리 자이언츠
영구 결번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rowcolor=#ccac00> No.1 No.3 No.4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쿠로사와 토시오
<rowcolor=#ccac00> No.14 No.16 No.34
사와무라 에이지 카와카미 테츠하루 카네다 마사이치
}}}}}}}}} ||

16. 네임드 팬

아래와 같은 유명 인사 팬이 있다. 순서는 가나다순.

17. 우승 이력

1951년, 1952년, 1953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50-마이니치 오리온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4-주니치 드래곤즈
1955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54-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6-니시테츠 라이온즈
1961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60-다이요 웨일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2-도에이 플라이어스
1963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62-도에이 플라이어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4-난카이 호크스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64-난카이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4-롯데 오리온즈
1981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80-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2-세이부 라이온즈
1989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88-세이부 라이온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0-세이부 라이온즈
1994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93-야쿠르트 스왈로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5-야쿠르트 스왈로즈
2000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1999-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1-야쿠르트 스왈로즈
2002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2001-야쿠르트 스왈로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3-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2009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2008-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0-치바 롯데 마린즈
2012년 일본시리즈 우승 팀
2011-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3-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1951년, 1952년, 1953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50-쇼치쿠 로빈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4-주니치 드래곤즈
1955년, 1956년, 1957년, 1958년, 1959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54-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0-타이요 훼일즈
1961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60-타이요 훼일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2-한신 타이거스
1963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62-한신 타이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4-한신 타이거스
1965년, 1966년,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64-한신 타이거스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4-주니치 드래곤즈
1976년, 1977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75-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8-야쿠르트 스왈로즈
1981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80-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2-주니치 드래곤즈
1983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82-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4-히로시마 도요 카프
1987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86-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미우리 자이언츠 1988-주니치 드래곤즈
1989년, 1990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88-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1-히로시마 도요 카프
1994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93-야쿠르트 스왈로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5-야쿠르트 스왈로즈
1996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95-야쿠르트 스왈로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1997-야쿠르트 스왈로즈
2000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1999-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1-야쿠르트 스왈로즈
2002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2001-야쿠르트 스왈로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003-한신 타이거스
2007년, 2008년, 2009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2006-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0-주니치 드래곤즈
2012년, 2013년, 2014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2011-주니치 드래곤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5-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12년 아시아 시리즈 우승 팀
2011-삼성 라이온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2013-캔버라 캐벌리
2019년, 2020년 센트럴 리그 우승 팀
2018-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미우리 자이언츠 2021-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18. 여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여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9. 관련 문서

20.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284c>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기네스
세계 기록
}}}
Most Japan Series Wins
(최다 일본시리즈 우승)
<rowcolor=#fff> 대상 기록 장소 등재 시일
<rowcolor=#000,#fff>
요미우리 자이언츠
21회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기네스 세계 기록 설명 페이지

최상단 표에서 보듯 한 번 더 우승했으나 등재 신청을 하지 않아 과거 기록으로 등재되어 있다.
파일:NPB 로고.svg 일본프로야구 역대 왕조팀
★★★★★★
1938추계~1943
도쿄 교진군*
★★★
1951~1953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56~1958
니시테츠 라이온즈
★★★★★★★★★
1965~1973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75~1977
한큐 브레이브스
★★★
1986~1988
세이부 라이온즈
★★★
1990~1992
세이부 라이온즈
★★★★
2017~202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단일리그 시절 기록
다른 틀 둘러보기: 한국프로야구 역대 왕조팀 ·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대 왕조팀
한국프로축구 역대 왕조팀 ·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역대 왕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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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도쿄도 심볼마크_White.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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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일본프로야구 WE리그 B1리그
파일: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엠블럼.svg 파일:요미우리 자이언츠 엠블럼.svg 파일:닛테레 도쿄 베르디 벨레자 로고.svg 파일:alvark.webp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요미우리 자이언츠 닛테레 도쿄 베르디 벨레자 알바르크 도쿄
B1리그 B3리그
파일:sunrockers.webp 파일:도쿄 유나이티드 바스켓볼 클럽 로고.png 파일:시나가와 시티 바스켓볼 클럽 로고.png 파일:어스프렌드 도쿄Z 로고.webp
선로커즈 시부야 도쿄 유나이티드 바스켓볼 클럽 시나가와 시티 바스켓볼 클럽 어스프렌즈 도쿄 Z
도쿄도 타마 지역 연고 프로 구단 보기 ▶
◀ 도쿄도 구부 연고 기타 구단 보기 도쿄도 타마 지역 연고 기타 구단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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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어 표기는 1960년에 讀賣ジャイアンツ에서 読売ジャイアンツ로 바뀌었다.[2] 자이언츠(Giants)+토끼(Rabbit). 등번호는 333번.[3] 정식 선수는 아니지만 2000 시즌부터 전 쌍방울 레이더스 출신 유환진이 21년째 불펜 포수로 근무하고 있다. 핵심 투수들이 훈련이나 컨디션 점검을 할 때 너나없이 유환진 부터 찾는다고 한다. 현재는 불펜 포수 자리를 내려놓고 스카우터로 근무 중이다.[4] 일본식 이름은 하리모토 이사오(張本 勳). 재일교포. NPB 역대 최다 기록인 3085안타 기록 보유자. 이외에도 여러 기록을 가지고 있다. 현재까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5] 일본식 이름은 이시카와 후토시(石川厚). 재일교포. 김시진의 사촌형. 2군 투수였으며 1군 기록은 없고, 이후 KBO 리그 원년에 MBC청룡에서 1년간 뛰었다. KBO 리그 통산 2경기 5⅔이닝 1승 0패 ERA 3.78.[6] 타격 인스트럭터[7] 육성코치[8] 2군 타격코치[9] 2군 수석코치[10] 1군 타격코치[11] 2군 타격코치[12] 3군 육성 코치[13] 비록 늦게 생겼으나 트위터 일본지사와 협력하여 센트럴리그 구단 중 트위터를 열심히 활용하고 있다. 일본지사에서 하는 트위터 Q&A도 선보이며, 오프시즌이나 경기가 없는 날에는 팬들에게 자체적으로 질문을 받아서 올려주기도 하는 편.[14] 2018~2019년 이후 콘텐츠가 베어스포티비와 상당히 유사해졌는데, 고프로를 통해 우승 직후 순간을 중계하기도 했다.[15] 주로 도쿄 돔 홈경기 하이라이트와 감독 인터뷰, 홍보 영상들을 올리며 2020년에는 360도 카메라를 이용한 경기 실황 중계도 했었다.[16] 양대 리그 분리 이전.[17] 하지만 도쿄 돔이 2018년부로 개장 30주년을 지나고, 공연, 스포츠 행사 등으로 인한 구장 노후화와 함께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신구장 에스콘 필드 홋카이도 등의 착공이 확정되며 요미우리 팬들 사이에서도 홈구장 신축 후 이전 계획이 논의되고 있다. 게다가, 도쿄 돔은 엄밀히 말하면 구단 것이 아니라 주식회사 도쿄 돔이 소유하고 있어서 츠키지시장 이전 후 코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딴죽을 놓아 신구장 계획도 좌절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도쿄돔을 당분간 계속 써야 하는 상황이라 2020년 시즌 종료 후 돔 수리 비용만 100억 엔을 투입했는데, 문제는 마쓰다 스타디움 건설비가 140억 엔이라 차라리 토지보상비 문제만 제외한다면 도쿄 23구 외곽 지역에 새 구장 짓는 게 더 싸게 먹힌다. 2023년 미쓰이부동산 측이 이전 후보지인 츠키지시장 부지에 8,000억엔 이상을 투입하여 호텔, 오피스, 다목적 스타디움을 건설하는 안을 도쿄도에 제출했으나 구장 접근성 문제도 있어서 앞으로 15~20년은 구장을 더 쓸 전망이다.[18] 팀명을 2번 바꿨지만, 두 번 다 일본프로야구 출범 연도인 1950년보다 앞서서 일어났다.[19] 단, 대만은 예외. 90주년 기념 경기도 정자로 표기하였으며 오히려 대만에서는 양안관계의 특성상 신자체, 간체자로 쓰면 좋게 보지 않는다.[20] 금요일의 경우, 프로레슬링 중계와 인기 드라마 방송 등이 우선시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금요일 홈경기도 중계하는 경우가 많아졌다.[21] 1980년부터 하술할 사건 때문에 지상파 야간 경기 중계 타임이 저녁 7시~8시 54분으로 정해졌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경기 진행 상황에 따라 최대 30분까지 중계 연장이 가능했다. 게다가 간토권 독립방송국도 요미우리 중계권을 확보하지 않아 선 텔레비전이 있는 한신과는 달리 지상파 완전 중계는 원천적으로 꿈도 꿀 수 없다. 단, 선테레비도 도쿄 돔 경기는 중계 못한다.[22] 다만 토요일 아침 닛테레의 <줌인 새터데이>에서 프로야구 넷케츠(熱ケツ情報)정보라는 이름으로 요미우리 OB인 미야모토 카즈토모가 요미우리 선수들을 대상으로 야구와 관련 없는 주제로 미니 인터뷰를 하기도 한다. 현재는 미야모토가 요미우리 코치로 부임하면서 츠지오카 기도 아나운서가 인터뷰를 맡고 있다.[23] 2023년에는 개막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정규 시즌 야간 경기 중계는 위성 방송에서 전담하며, 닛테레 지상파에서는 주말 낮 경기 위주로 중계를 편성한다.[24] 특히 NRN 망을 통한 전국 중계로 닛폰 방송 경기가 방송되는 경우가 많으며 야쿠르트 홈경기는 닛폰 방송이 단독으로 중계한다. TBS 라디오는 2018 시즌부터 중계권료 상승 등의 문제로 야구 중계를 포기했고 분카 방송은 주말 야간 경기를 중계했으나 2019년부터 평일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편파 중계만 방송한다.[25] 이 4개 구단 중 야쿠르트를 제외한 구단들은 2017년 DAZN, Sportsnavi 서비스로 인터넷 중계를 시작하였다.[26] 이건 일본계 스포츠팀들 모두 그렇긴 하다.[27] 이 때문에, 일본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비공식 센트럴리그 TV라고도 불리며 퍼시픽리그 선수들의 활약도 빼놓지 않고 보여 준다.[28] 이는 리그를 막론하고 돈 많이 쓰는 구단이 보이는 양상으로, 한국의 왕년의 돈성이라 불리던 시절 삼성 라이온즈도 타선의 힘으로 우승했고, MLB의 뉴욕 양키스도 그렇다.[29] 이는 지갑 두께의 차이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 탈삼진형 투수가 가장 이상적이긴 하다. 땅볼도 여러개 맞다 보면 개중 몇개는 안타가 될 수 있고 극단적으로는 주자가 3루에 있다면 땅볼이 병살타가 되어도 1점을 올릴 수 있지만, 애초에 공이 방망이에 맞지 않으면 아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러나 당연히 탈삼진형 투수는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고, 돈 많은 교진은 얼마든지 그런 투수들을 구입할 수 있지만 야쿠르트는 그런 투수들을 살 돈이 없다는 차이다.[30] 그나마 양키스는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로 대표되는 팀 레전드들은 다 자기 팜에서 육성한 인물들이 대부분이나, 문제는 스타인브레너 시기부터는 육성에서 도태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돈 많이 쓰는 빅클럽이 되었다. 그것으로 시작하여 뉴 그레이트 양키스로 불리는 왕조를 1990년대 말에 세웠으나 그 이후로는 21세기 우승이 한 번 뿐인 충격적인 부진을 겪고 있다. 매년 우승은 못하면서 애매하게 가을야구에만 나가는 어정쩡한 전력으로 양키스 팬덤을 화나게 하고 있으나 육성이 썩 좋지 않아 계속 돈을 날리며 매 시즌 가을야구만 가면서 우승을 못하는 윈나우 탱킹을 하고 있는 건 덤. 이는 캐시먼 단장 문제도 있으나, 그가 윈나우 탱킹의 길을 밟은 것은 극성 양키스 빠들의 행패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31] 오다큐쪽은 신유리가오카역이나 노보리토역으로, 게이오쪽은 케이오이나다즈츠미역으로 가면 된다.[32] 유망주는 아니지만 실제로 교진에 유독 FA먹튀가 많은 이유로 이런 생활환경을 꼽는 경우도 많다. 도쿄 한복판이라 끝나고 술 마시러 가기 좋지, 부자 팀에 좋은 대우로 입단해 연봉도 엄청나게 늘었고 인기도 대폭발이니 이렇게 이전에 못 누려봤던 호사에 빠지다 보면 성적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FA라서 야구는 못해도 정해진 계약기간동안은 연봉이 절대 안 깎이지, 어차피 평생 먹고 살 돈은 다 벌었으니 열심히 할 동기부여도 잘 안 되지, 성적이 안 나오는 스트레스를 풀러 술 한잔 하러 다니다 보면 선수 하나 망가지는 건 시간문제다.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유흥 행각은 야구팬들 사이에서 전설적으로 전해진다.[33] 2군 경기장을 유원지에 지어서, 둘다 윈윈한다는 전략이다. 유원지나 휴양시설에 놀러 온 김에 야구도 잠깐 보고 가시라는 식으로 팬을 유입시키고, 반대로 2군 경기를 보러 온 사람도 야구만 보고 갈 게 아니라 보고 나서 유원지와 휴양시설에서 돈 좀 쓰고 가라는 식으로 유도하는 것.[34] 다만 주니치의 경우엔 나고야시가 대전광역시와 비슷하게 노잼도시로 악명이 높다.[35] 닛테츠코한 SGL스타디움 아마가사키에서는 오사카 최고의 번화가인 우메다와 난바까지 전철로 15분 밖에 소요되지 않는다.[36] 오릭스의 2군 구장이 위치한 마이시마는 위치만 오사카시지, 대중교통편이 좋지 않은 편이었다.[37] 투수에서 전향한 장타 포텐이 있는 1루수 유망주 자원이었지만 이 선수가 뛰던 90년대 요미우리의 1루 자리는 오치아이 히로미츠, 키요하라 카즈히로 등 야구계 최고의 슬러거들이 자리하는 곳이었다. 결국 기회를 못 받다 이시이 히로오와의 맞교환으로 트레이드된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에서 주전 1루수를 차지하며 2001년 킨테츠의 마지막 우승에 크게 공헌한다.[38] 일본에서는 마음이 맞는 선수들이 팀을 꾸려 자율적으로 선수들을 초청해 트레이닝을 진행하며, 타이세이는 무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운동을 한다.[39] 공교롭게도 이는 현재 MLB 어느 명문구단 역시 현재진행형으로 겪는 상황이다![40] 애초에 모기업의 눈치고 뭐고 일본야구의 드래프트 구조상 탱킹 자체가 불가능하다. 탱킹을 통해 그 해 최하위를 기록했다 해도 격년제로 돌아가면서 양 리그가 지명 우선권을 얻는 식이라 전체 1픽을 보장받지 못한다. 어떻게 1픽으로 최대어 선수를 내질러 봤자 타 팀에서 그 선수를 중복 지명을 해 버리면 픽 순서는 무의미해지고 오로지 운에 맡기는 추첨을 해야한다.[41] 과거에는 선수들이 요미우리에서 뛰고 싶어 했기에 요미우리가 찜한 1지망 선수는 다른구단이 알아서 기면서 지명을 피하기도 했고, 사와무라 히로카즈, 스가노 도모유키 등이 요미우리 or MLB와 같은 협박 아닌 협박으로 요미우리 입단을 쟁취했다. 이런 식으로 육성도 필요없는 특급 유망주만 주웠으니 성적과 리빌딩을 모두 잡을 수 있었다. 문제는 요미우리가 더이상 선호구단이 아니게 되면서 다른 구단들이 요미우리의 눈치를 아예 보지 않게 되었고, 선수들도 요미우리를 고집하지 않아 이 고리가 끊어지자 바로 부실한 시스템이라는 치부가 드러난 것이다.[42] 문제는 그렇게 해서 우승을 한다는 보장도 할 수 없을 뿐더러 FA로 영입한 선수들은 어느 정도 정점에 서있는 선수들이거나 이제 곧 하향세로 접어든 선수들이라 전력에 당장은 보탬이 될 수 있을지 언정 장기적으로는 이들 역시 노쇠화에 따른 기량저하가 나타나기 때문에 영입 이후 몇 년 뒤에는 세대교체가 불가피해진다. 더욱이 이렇게 윈나우만 고집하고 검증된 선수만 쓰겠다는 행태로 인해 유망주 육성에서도 이렇다 할 성과가 잘 나오지 않고 있다. 계속된 우승 실패로 인해 프로와 아마추어 선수들 사이에선 자이언츠는 영원한 우승후보란 인식이 옅어져 이전만큼 요미우리 구단을 선호하는 선수들이 줄어들었고 차라리 타팀으로 이적해 빛을 보겠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단적인 예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경우, 21세기에 들어 최다우승을 기록하고 있는 강호이기에(무려 8회) 굳이 요미우리가 아니어도 훌륭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었으나 소프트뱅크도 4군까지 선수단을 운영하다 보니 2023년부터는 1군 선수들이 지적할 정도로 선수단의 동기부여가 안 된다는 점이 공론화되고 있다.[43] 하지만 최근 들어서 성적만큼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밀리는 중이다. 물론 NPB 역사 전체로 따졌을 땐 요미우리가 압도적 우위다.[44] 참고로 팬덤 수에서 3위~5위까지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292만 명), 주니치 드래곤즈(288만 명),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279만 명) 순이다.[45] 타팀 팬들은 '강탈'이라고 부르지만 요미우리 팬들은 FA와 현금 트레이드로 선수를 쓸어담는 걸 '구제'라고 부르며 쉴드를 치는데 예외로 코쿠보 히로키는 다이에가 소프트뱅크 인수 직전엔 구단 기강이 해이하여 그 구제 드립이 진짜였다. 그러나 최근엔 고액 먹튀들이 늘어나면서 제발 좀 선수 키워쓰라고 하는 편.[46] 같은 해 마찬가지로 원 클럽 맨이었던 마키하라 히로미가 FA를 선언했으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설득으로 요미우리에 잔류했다. 여담으로 이 FA 선언 때문에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마키하라가 요미우리에 지도자로 복귀하지 못한다는 카더라가 있을 정도.[47] 다만 소프트뱅크는 요미우리와는 달리 외부 FA에 집착하는 돈지랄이 아니라 자체적인 내부 육성으로 키워낸 선수에게 다년 계약을 제시하는 식의 돈지랄로 페이롤을 올렸다. 이외에도 2군과 3군에 투자하는 비용도 상당했으나, 2020년대 들어서는 교진이 하는 것과 똑같은 FA 마구 사들이기로 페이롤을 올려 교진의 1.5배가 넘는 페이롤을 자랑하고 있다.[48] 자이언츠는 호크스에게 일본시리즈에서 2019, 20년 8전 8패를 기록 중이다.[49] 다만 2023년 기준으로는 상당수의 2군 구장에서 입장료를 받고 있어서 옛날 이야기가 되었다. 2023년 기준으로 2군 구장에서 입장료를 안 받는 구단은 히로시마, 한신, 치바 롯데 뿐인데, 이들 구장의 경우 시설이 워낙 열악하여 입장료를 받을 수 없다.[50] 이 때문에 2020년 코로나19가 터지기 전 베어스포티비 등으로 KBO 구단들이 진행한 일본 스프링캠프 중계에 요미우리 팬들이 보이기도 했다.[51] 표적이 되는 선수들 대부분은 외부 영입이거나 외국인 선수이다. 이들은 좋은 기량을 지속적으로 유지해도, 기량이 쇠퇴하기 시작하거나 부상을 당하게 되면, 기다리지도 않고 바로 주요 전력에서 배제되고, 주전 경쟁이 치열한 요미우리의 특성상, 이후에 주요 전력으로 복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쉽게 말하면, 한번 삐끗하는 순간 끝이고, 실수가 일체 용납 되지 않는다.[52] 오사카본사에서는 오릭스 소식도 상세히 다루어 주는데, 심지어 한신 담당 기자도 있다.[53] 2005년 킨테츠 구단 해체 이후로 오릭스 버팔로즈의 우승 세일은 AEON이 담당한다. 2008년 한신난바선 개통 이후 요미우리 우승 기념 세일 광고가 고시엔 구장을 지나가면 심히 난감해지기도 한다.[54] '숨은 크리스천'이라는 뜻으로 일본의 에도 시대 무렵, 극도의 종교 탄압에 가톨릭 신자들이 음지로 숨어들어, 사제가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비밀리에 종교 생활을 지속한 것을 의미한다.[55] 프로 진출을 하게 된다면 한신에 입단하고 싶었다고 한다. 당시 드래프트 제도상 역지명 제도가 존재하던 때라 한신을 선택 할 수 있었지만 이미 확고한 주전 포수를 구해놓은 당시 한신의 구단 상황 탓에 한신 측은 아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서지 않았고 결국 많은 계약금을 들고서 적극적으로 교섭에 임한 요미우리를 택했다. 그래서인지 고시엔에서 열린 마지막 경기에서는 한신 팬들이 아베 신노스케의 이름을 부르면서 레전드를 보냈는데 정작 상대투수 후지카와 큐지는 요미우리 팬이었다(...).[56] 정작 한신에도 후지나미 신타로, 후지카와 큐지, 우에모토 히로키, 이와타 미노루 등 요미우리 팬들이 많아서 후지나미는 신년 골프대회에 요미우리 마스코트 굿즈를 가져오기도 했다. 아베 신노스케가 2019년 프로야구 열혈정보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한신 팬이었던 오카모토는 어렸을 적 아베가 안타를 칠 때마다 탄식했다고 하며 이를 아베가 그대로 오카모토에게 따라하고 있다고 밝혔다(...).[57] 간사이에서 웬만하면 TV, 라디오를 막론하고 요미우리-한신전 경기는 도쿄 쪽 방송국이 아닌 오사카 방송국에서 직접 제작해서 중계한다.[58] 물론 예외도 있어서 1979년 성적이 하위권으로 하향된 뒤 실시된 지옥의 시즈오카현 이토 전지훈련도 있는데, 당시 참여한 선수들에 의하면 토 나올 정도로 운동했다고 한다. 휴일에도 쉬느라 숙소 바깥으로 나가질 못했다고 한다.[59] 특히 타카기 하야토의 경우 세이부 이적 이후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고 방출되었다.[60] 다만 이는 어느정도 감내해야 할 부분인 것이, FA는 대부분 같은 리그 선수를 사오는 경우가 많다. 이게 백엔 이백엔 과자 사는 것도 아니고 수억 엔이 드는 큰 일이기 때문. 정말 이 선수를 사와도 실패가 없도록 검증에 또 검증을 거듭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당연히 같은 리그 선수일 수밖에 없다. 같은 리그 선수면 매일같이 직접 바로 옆에서 보면서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체크할 수 있는데, 타 리그 선수일 경우 교류전이나 일본시리즈 정도가 아니면 현장의 감독이나 코칭스태프가 직접 연습하는 모습을 보며 검증할 수 없기 때문에 당연히 같은 돈이면 같은 리그 선수를 많이 영입한다.[61] 참고로 대만에서는 비디오랜드 스포츠 채널(緯來體育台)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 홈경기를 2014년과 2017~2020년에 독점 중계한 바 있다.[62] 유타 재즈의 유명 파워 포워드이자 통산 득점 2위.[63] 참고로 죽어버리라는 말은 일본에서는 방송에서 나오면 안 될 정도로 심한 욕으로 취급되며, 한국에서는 프로축구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악명높은 안티콜인 '나뒤송'으로 불리는 나가 뒤져라'에 대응된다.[64] 한때는 구장에서 반주곡까지 틀어줄 정도로 자주 쓰였으나 '타올라라 드래곤즈'가 유명해진 후 저절로 사라져버린 비운의 곡이다.[65] 일본프로야구에서 야구인에게 주는 최고 권위의 상 이름부터가 쇼리키 마쓰타로상이다.[66] 요미우리가 당시 팀의 열악한 대우에 불만을 가졌던 난카이 호크스의 에이스 투수 벳쇼 타케히코를 물밑영업 끝에 빼돌리는 일명 벳쇼 빼내기 사건을 저질렀으며, 또한 요미우리를 위시한 마이니치 오리온즈를 거부하는 팀들이 센트럴 리그를, 가입에 동의하는 팀들이 퍼시픽 리그를 출범하게 만들어버린 것도 바로 요미우리가 단초를 제공했다.[67] 신문 및 방송 사업에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주니치와는 지방 방송국 지분을 가진 동업자이기도 하다. 지방 방송국에서 서로의 지분을 뺀다면 방송사 경영이 어려워진다.[68] 이쪽은 응원가인 도쿄온도에 팬들이 "쿠타바레 요미우리(뒈져버려 요미우리)"라는 추임새를 넣는다. 이 노래를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신 팬이다.[69] 당장 센트럴리그 소속 팀들을 봐도 요미우리 외에 히로시마 도요 카프, 주니치 드래곤즈, 그리고 칸사이 최고의 인기구단인 한신 타이거스가 있다. 게다가 칸토와 칸사이간의 대결이면서 최고의 더비전이라고 불리는 요미우리와 한신간의 전통의 일전 역시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한다.[70] 2000년대 들어 세토야마 류조를 비롯한 퍼시픽리그 출신들이 커미셔너에 취임하면서 요미우리의 힘은 조금 줄어든 상태다.[71] 당시 이름 기준[72] 하지만 TV 시청, 라디오 청취 환경 변화와 함께 요미우리의 성적이 떨어지는데도 중계권료가 너무 높아 요미우리 경기 중심으로 중계하던 TBS라디오가 2018년부터 야구 중계를 그만두었다.[73] 코쿠보의 경우는 경영 위기를 겪었던 다이에의 프런트가 심히 개판이라 참다 못해 본인이 트레이드를 직접 요청한 케이스로, 2006년 FA로 소프트뱅크에 인수된 호크스에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래서 코쿠보의 경우 요미우리보다는 호크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이미지가 훨씬 강한 편이고, 요미우리 팬도 이런 내부사정으로 인하여 코쿠보의 이적에 대해서도 이해하는 분위기. 실제로 전술한 프랜차이즈 스타 영입 사례 중 친정 팀으로 돌아와 은퇴식을 치른 선수는 코쿠보뿐이다.[74] 페타지니의 경우 기존 1루수 키요하라 카즈히로를 쓰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좌익수로 출장시켰다가 무릎 부상을 당했던 바 있다.[75] 준수한 활약을 펼친 선수라도 워낙 투자한 액수가 커서 적자로 평가한 사례들도 있다.[76] 그러나 스가노는 다음해 요미우리의 1차지명을 받은 오타니 쇼헤이와 다르게 요미우리 입단 이후 일본시리즈 우승이 없다.[77] 요미우리의 수많은 FA 영입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 중 하나였다. 4년의 계약 기간 내내 평균 140경기에 출전, 3할 30홈런 OPS 9할 이상을 기록하며 MVP 1회, 정규 시즌 리그 우승 3회, 일본시리즈 우승 1회의 주역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찾아온 급격한 노쇠화를 피할 수는 없었다.[78] 선수, 코치를 불문하고 히로오카 타츠로를 필두로 한 OB 출신들의 간섭이 심각한데, 이에 대해 야구선수들과 팬들이 정면 충돌한 게 2020년 이하라 하루키의 하라 타츠노리 선수 기용 저격 논란으로 이하라는 요미우리 팬들뿐만 아니라 일본 야구 팬들에게도 까였다. 심지어 장훈도 이 건에 대해선 OB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이하라에게 동의하지 않았다.[79] 범용 구호는 "오~ 소레! ○○○(선수명)". 참고로 치바 롯데 역시 범용 구호 사용하지 않고 한국 야구에서 쓰는 콜을 주로 쓴다.[80] "(짝짝짝) ○○○!(선수명)". K리그의 경우를 들면 한 선수당 두세 번 사용하는데, 자이언츠는 이들 중 세 번을 외친다.[81] 특히 2023년에는 소방관 출신 치어리더를 선발했다.[82] 요미우리의 경우 일본프로야구 구단 중 가장 많은 지방 홈경기를 치렀으며, 2010년~2016년에도 27개 도도부현에서 경기를 치렀다.[83] 라이벌인 한신 타이거즈 제2 홈구장이자 오릭스 버팔로즈의 홈구장인 교세라 돔 오사카에서 치른다.[84] 나고야시는 주니치 드래곤스의 홈경기 지역이므로 위성도시인 기후에서 개최.[85] 센트럴 리그 우승 38회, 양대 리그 성립 이전 리그 우승 9회를 합해 총 47회이다.[86] 참고로 한자로 되어 있는 구락부는 '클럽'의 음차자이다. 과거 일본에서는 거의 이 표기로 썼으며 현재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음차이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다 이렇게 음차한 듯하다.[87] 일본프로야구 신설 당시엔 모든 구단들이 영어 표기를 썼으나 얼마 안가 팀명을 XX군(軍) 식의 한자로 바꾸고 유니폼에도 한자가 들어갔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으나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 체제에서 영어를 사실상 금지시킨 것으로 추정. 그래서인지 일본공산당의 신문 아카하타에서는 거인군이란 명칭을 쓰지 않는다.[88] 지역명+고유명이나 기업명+고유명 등 최대 2단 구조로만 맞추고, 축약명 1단으로 하는 것. 2단 구조를 처음으로 깬 구단은 1968년에 토요공업 체제 하의 경영일원화로 원래 표기인 지역멍+팀명 사이에 모기업명을 넣은 히로시마 토요 카프이며, 1단 축약명 규칙을 깨부순 건 1978년 요코하마시로 연고이전하면서 이전 카와사키시 시대와의 구분을 위해 약칭인 타이요에 연고지명을 덧붙인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다.[89] 사실상 교진군에서 공인하는 초대 감독이다. 일본프로야구 공식전이 시작된 1936년부터 감독을 맡았기 때문. 후일 퍼시픽/타이요 로빈스, 킨세이-다이에이 스타즈, 한큐 브레이브스, 한신 타이거스의 감독을 맡았으며, 1962년에 한신을 양대 리그제 실시 이후 최초의 센트럴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그 뒤 1964년에도 또다시 우승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일본시리즈에서 62년엔 도에이 플라이어즈에게, 64년엔 난카이 호크스에게 패배한 콩라인이기도 했다.[90] 요미우리 역사상 둘밖에 없는 외국인 감독(다른 한 명은 왕전즈)인데 왜 그런지는 문서 참조. 6.25 전쟁 이후에 일본으로 귀화했다.[91] 볼드체는 일본시리즈 우승.[92] 1936년 봄에 열린 「제1회 일본 직업야구 리그전」에는 미국 원정으로 불참.[93] 3개의 토너먼트로 나누어 열었고 각 대회에서 우승한 팀에게 승점을 주어 승점이 많은 팀을 우승팀으로, 승점이 같다면 우승팀을 결정할 플레이오프를 열 계획이었으나 경기장을 구하지 못해 우승팀 없음.[94] 리그 오사카 대회 우승, 토너먼트 오사카 대회 우승, 리그 오사카 대회 오사카 타이거스와 공동 우승. 승점 2.5점으로 오사카 타이거스와 연도 우승 결정전 진출.[95] 연도 우승 결정전 오사카 타이거스에게 2승 1패로 승리.[96] 클라이맥스 시리즈 이전에는 승률 1위라도 다승을 못하면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고, 거기서 지면 2위로 떨어졌다.[97] 2006년까지는 리그 우승만 일본시리즈로 진출, 2007년부터 A클래스는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 괄호 안은 상대 팀.[98] 일본시리즈 역사상 최초의 리버스 스윕이 일어난 시리즈이자 최초로 투수 1명에게 4승을 허용한 시리즈. 일명 '이나오 시리즈'.[99] 전년도에 이어 2년 연속으로 투수 1명에게 4승을 허용한 시리즈.[100] 그 유명한 V9 시대의 시작이다.[101] 모든 경기가 고라쿠엔 구장에서만 치러졌다.[102] 우리나라에서 가장 비슷한 케이스가 자매 구단인 삼성 라이온즈가 기록한 2013년 한국시리즈.[103] 일본판 2007년 한국시리즈다. 실제로 홈에서 2패를 당하고, 그 이후 4연승을 하였다.[104] 이로써 같은 팀에게 2번 스윕패를 당한 굴욕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