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letter-spacing: -0.9px; word-break: keep-all" {{{#000,#999 | <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
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
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 |
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
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
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
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
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
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
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 |
※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1. 개요
적국인 독일 국경에 인접한 과수원에서 총을 내려놓은 채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 경계중인 프랑스 병사 |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일어났던 해프닝. 1939년 9월~1940년 5월 초순까지, 선전포고는 했는데 8개월 동안이나 교전이 발생하지 않은 서부전선의 기묘한 시기를 가리킨다.
이에 대해 독일 언론은 Blitzkrieg(전격전)에서 머릿글자만 바꿔 Sitzkrieg(착석전)이라고 비아냥거렸고 프랑스에서는 Drôle de guerre(웃긴/이상한 전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 배경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프랑스는 폴란드 파견군을 편성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상은 영불 어느 쪽도 먼저 독일로 쳐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동원령이 완료되지 않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호전의 악몽 때문이었다.[1] 그리고 양국 모두 독일과 전면전이 될지 국지전으로 끝날지 아직 확신이 없었다.그래서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던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폴란드를 돕는다는 시늉은 해야 했기 때문에 겨우 총동원령을 완료한 9월 초순에서 중순까지 프랑스군이 독일 라인 강 둔치를 따라서 침공하긴 했다. 그것도 자그마치 41개 사단에 전차 2,400대를 몰고 온다. 이 때 해당 방면의 독일군은 무장은 커녕 아직 소집조차 끝나지 않은 22개 사단이 전부였다. 하지만, 독일 영내로 돌입한 프랑스군의 실제 병력조차 서류상 동원 병력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전체적인 전력면에서도 독일군은 영-프 연합군에 밀렸으며, 그나마 무장과 훈련이 충실한 1-2선급 육해공 전력들은 폴란드 침공에 투입된 상황이라 서부전선 방면은 전력으로 쳐주기도 힘든 3선급 애들이었다. 얼마나 무방비한 상태였는지 훗날 히틀러도 이 시기를 두고 "내 인생에서 가장 피말리는 시간이었다" 라고 밝혔을 정도다.
3. 전개
독일군의 전략적 목표는 폴란드를 짓밟는 주력부대가 서부전선으로 재배치될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독일은 폴란드를 한 달만에 석권했지만 독일군은 적지 않은 기갑전력과 상당수의 탄약을 소모한 상태였으며 프랑스를 굴복시키기 위한 작전조차 완성되지 않았다. 프랑스의 마지노선 건축으로 사실상 독일-프랑스 국경은 난공불락이었고 벨기에를 통한 프랑스 북부 공략의 경우 이미 앞선 1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주력이 배치되어 있었으므로 1차 대전의 악몽을 기억하던 독일군 수뇌부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슐리펜 계획 그대로 진행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새로운 작전 계획을 준비해야 했다. 따라서 지크프리트 선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이에 프랑스군은 자의반 타의반 9월 17일까지 전투 한 번 치르지 않고, 그냥 독일 영내로 32km 행군해 들어갔다가 몇몇이 지뢰 사고를 당하자 조용히 나왔다. 한편 독일은 삐라와 확성기 등으로 "우리는 영불과 전면전할 생각은 없다" 라고 떠들어 댔다. 영불 양국도 할 일이 없이 국경 근처에서 비행기로 그냥 삐라나 뿌려대는 것이 군사활동의 전부였다. 이로 인해 3국은 외교적으로 전쟁 상태였지만 정작 전선에서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폭풍전야라는 용어와는 사뭇 다른 것이 독일이 초기 전략적 목표를 모두 달성하는 동안 "영불이 정말로 아무것도 한 게 없다" 라는 점이 주로 꼬집히는 게 바로 가짜 전쟁이기 때문이다.
서부전선의 기묘한 정적이 이어지는 중에 폴란드 전역이 약 한 달 만에 독일의 완승으로 종료되었다. 하지만 이미 겨울이 다가오는 10월이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서방에 바로 공세를 펼치기보단 폴란드 침공 동안 소모된 물자/전력을 보충했다. 그리고, 기갑부대와 공군이 활동하기 좋은 계절이 올 때까지 대기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1939-1940년 겨울 내내 양군은 소강상태를 유지한 채 계속 대치했다.
그리고 1940년 1월 10일 가짜 전쟁뿐만 아니라 이후의 프랑스 침공까지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군 공군 정보장교 라인베르거 소령이 베를린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BF 108 연락기를 타고 가다가 악천후를 만나서 벨기에군에게 붙잡힌 것이 발단이다. 라인베르거 소령은 자신들이 내린 곳이 벨기에 영토[2]인 것을 깨닫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서류를 불태우려고 했지만 급히 달려온 벨기에 군인들에 의해 이 서류는 약간 그을렸을 뿐 멀쩡하게 노획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서류에 당시 독일군의 대(對)프랑스 공격계획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비보를 접한 히틀러는 거의 발광하다시피 했고 참모장 알프레드 요들 장군은 "만약 적들이 그 서류에 기재된 모든 계획을 손에 넣었다면 우리는 끝장이다." 라는 절망 어린 토로를 일기장에 적을 정도였다. 다른 독일군 수뇌부들도 극심한 패닉에 빠져들어 공세 계획에 관해 신경전과 논쟁을 거듭했다. 다만 해당 계획은 당시 독일군의 핵심 전략이 맞긴 했으나 동시에 연합군도 뻔히 예측했던 것이라 내부적으로 비판이 있었던 계획이기도 하였다.
한편 제발 독일군이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고 상상만 하던 작전안을 실물로 확인하게 된 프랑스군은 쾌재를 불렀고 독일군 주력부대가 벨기에로 진공할 것을 확신했다. 상술했듯 당시 연합군은 마지노 선에 의해 독일군의 공격 방향을 1914년과 같은 벨기에 방면으로 상정했었고 오히려 혹시 독일이 딴 생각을 하거나 막강한 국력으로 뭔가 기상천외한 짓을 벌일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렇게 불확실성이 해소되자 안심할 수 있게 되었고 방어에만 집중하다가 독일군이 공세역량을 소모하면 한 방 날려버린다는 원래의 계획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1940년 초봄에는 독일은 발트해의 입구를 확보하기 위해 전격적인 노르웨이 침공을 개시했다. 노르웨이가 연합국에 가담한다면 독일 해군은 발트해라는 호수에 갇힌 신세가 되고 말기 때문에... 이 때도 북유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프랑스 접경지역의 국경에는 아무 일 없었다.
당시 프랑스 영내에는 영국 원정군(BEF)도 진주하여 초기 연합군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된 뒤에도 연합군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독일군과 전면적인 군사적 충돌을 거의 일으키지 않았고 쌍방이 전혀 다른 이유로 적대행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색이 전시상황 중임에도 여러가지로 웃긴 에피소드가 속출했다.
3.1. 전선 에피소드
- 프랑스와 독일과 룩셈부르크 국경에 쌍둥이 같은 두 마을이 있었다.[3] 이 두 마을에 전력을 공급하는 발전소는 독일에 있었는데 어느날 독일에서 송전을 멈추자 프랑스군이 즉시 독일 쪽에 있는 마을을 향해 몇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자 수 시간만에 다시 송전이 재개되다가 다시 뚝 끊긴 지 10여분 후 갑자기 독일 쪽에서 프랑스어로 "포격은 자제해 주십시오. 송전이 중단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기계가 고장났기 때문입니다."라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 방송을 들은 프랑스군 병사들은 한바탕 웃고는 포격을 그만뒀는데 과연 그 방송이 나온 지 2시간 뒤 프랑스 군인들은 독일 발전소가 보내오는 전기를 마음껏 쓸 수 있었다.
- 지크프리트 선과 마지노 선 사이에서는 영국이 폭격기 부대를 동원해서 밤에 삐라를 뿌리고 나면 독일 쪽은 선전 연설과 밴드 연주를 내보내는 식으로 응수했다. 삐라는 독일군도 사용했는데 주요 내용은 "우리는 공격받지 않는 한 절대 귀국을 공격할 의사가 없다.", "지금 여러분이 여기서 이러고 있는 동안 당신의 애인을 누군가가 채 갈 것이다. 그러니 돌아가라." 등이었다. 후자의 내용은 지금도 자주 사용되는 아주 보편적인 탈영 권유 문구다.
- 물루즈 부근에서 프랑스군이 라인 강에 걸려 있는 철교를 폭파할 때 독일 쪽에 "지금 다리를 부술 테니까 조심하세요."라고 경고했다.
- 독일군과 프랑스군 사이의 물물 교환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프랑스군은 암소 고기를 도축해서 독일군에게 넘겨주는 대신에 라디오를 받아왔다.
- 1939년 성탄절 전야에 라인강 국경을 두고 독일군과 프랑스군은 사이좋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대공탐조등(!)으로 야간에 트리를 비추면서 축제를 벌였다.
- 한 프랑스 병사가 실수로 독일국경을 넘어가는 바람에 길을 잃었다. 이 병사는 즉각 독일군에게 체포되었는데, 이를 항의하기 위해 넘어온 프랑스 장교 왈, "이건 지금까지 관례를 어긴 것이다! 나의 책임 지역은 너무나 취약해서 그 병사가 있어야 한다!" 항의를 듣고 독일군은 체포한 병사를 송환해 주었다. 사실, 프랑스 장교의 입장에서는 어쨌든 독일군에게 항의는 해야겠고, 그렇다고 대놓고 독일군과 적대하기 싫은 상황이라는 입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군은 프랑스 장교의 입장을 이해해준 행동이라고 봐야 한다.
- 카를스루에에서 바젤에 이르는 라인강 중상류에서 독일군과 프랑스 군은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수다를 떠는 일이 잦았다. 히틀러 휘하에서 프랑스 전문가로 일하던 오토 아베츠는 서부 전선 전체에서 총소리가 울린 곳은 브라이자흐였는데 선창가에 허수아비를 세워두고 내기 사격을 하는게 전부 였다고 한다.
- 독일군은 프랑스와의 국경 지대에 "독일인은 프랑스인들의 적이 아닙니다. 독일인은 여러분이 총을 쏠 때까지는 결코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적힌 간판을 세웠는데 프랑스군도 이 제안을 받아들여 결국 독일군이 간판을 다 세울 때까지 총소리가 나지 않았다. 또 독일 군악대가 프랑스 유행가를 연주한 적도 있었다.
- 당시 프랑스 군인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들을 보면 '너무나도 고요한 전선', '쥐죽은 듯한 독일군'들이 뭘 꾸미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더욱 불안하다는 식의 서술이 많다. 여러모로 프랑스인들은 1차 대전에서의 엄청난 피해 때문에 전쟁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심했다.
- 가짜 전쟁 당시 영국군에서 만든 군가로 유명한 "우리는 지크프리트 선으로 빨래를 널러 간다네"가 있었다. 심지어, 프랑스군에서도 이 군가에 가사를 붙여서 독일군을 조롱했다. 그리고, 독일군에서는 역으로 같은 곡조로 가사를 개사하여 "어디 한 번 쳐들어와서 빨래 널어보시지? 진짜 빨래 실력이 뭔지 보여주겠다!" 라는 식의 내용으로(...) 영국군과 프랑스군에게 응수하기도 했다.#
- 물론, 가짜 전쟁 말고도 전선이 장기화되어 소강상태에 빠진 곳에서는 교전을 형식적으로 치르는 경우가 존재하긴 했다. 서로 정해진 시각/정해진 위치에 포격을 가하는 사례나 명절에 싸우지 않고 서로 파티를 열었던 이야기는 제법 유명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런 사례는 한바탕 끔찍한 전투를 벌인 뒤라든가 대전략 관점에서 부차적인 전선에서나 간헐적으로 일어나는 사례지 이러한 주요전선 전방위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생한 것은 전례가 없었다.
4. 결과
결국 이 가짜 전쟁은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1차 대전의 황색 작전을 보완한 (Fall Gelb: 낫질 작전)으로 영불 연합군이 아주 개박살나면서 종결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파시즘의 침략전쟁을 방관했기 때문에 영/프 연합군의 패배는 자업자득을 당한 거라는 의견도 있다. 이후의 전개는 프랑스 침공 참조.5. 평가
이 기묘한 전쟁은 이후 프랑스 침공에서 보여주는 독일군의 놀라운 전과만 본다면 마치 독일의 고도한 기만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프랑스 침공 개시까지도 독일군 수뇌부에게 승리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은 없었다. 당시 독일군은 재무장을 한창 진행하는 중이었고 일부 부대는 전투복과 개인 화기조차 충분하게 지급되지 않았다. 사실상 독일은 체코와 폴란드를 점령하고 유럽의 초강대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눈치만 보고 있을 뿐이었고 실제 영국이 대륙 원정군을 조직해 프랑스가 독일 국경을 침공하여 부대를 주둔하는 순간이 아마 독일군에게 최대 위기였을 것이다. 그 시점의 독일군은 무려 항복을 고려해 보기도 하였다. 물론 히틀러도 마찬가지였다.그러나 가짜 전쟁은 실제 전투로 이어지지 않았다. 독일은 상기했듯 전쟁 준비 자체가 되어 있지 않았고 연합국은 적극적인 군사활동을 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연합군의 대독 방침이 수동적이었던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프랑스와 영국의 정치/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에 기인한다. 인명을 갈아넣는 참호전으로 국민들을 내몰던 기득권층에 대한 분노로 당시 연합국은 단호하게 전쟁을 강행할 의지가 없었다. 대공황으로 극심하던 청년실업으로 인해 청년층의 분노는 정치판을 난장판으로 바꿔 놓았다. 장년층에서도 1차대전에서 소모품처럼 죽어나가는 경험을 아래 세대들이 겪는 걸 원하지 않아 되레 반전 분위기는 청년들보다 더 강했다. 그리고 수뇌부들은 독일을 과대평가하는 등 오판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독일의 여론전까지 더해지자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전쟁에 돌입하더라도 정부는 다른 결정을 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 있었다.
군사적 관점으로는 1차대전에서 펼친 공세의 대부분은 막대한 병력 손실을 수반했고 이것은 연합군 지휘부에 20년이 지나고서도 깊이 각인되었다. 즉, 연합군은 독일군을 아주 많이 죽여 놓기 전까지는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또 프랑스는 독일이 자신들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믿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구 및 경제규모에서 독일이 프랑스보다 우세했던 탓이었다. 실제로 당시 독일의 경제규모는 프랑스의 2배에 달하는 수준이긴 하였다. 그러나 그 격차에 압도된 프랑스는 독일이 재무장을 이제 시작했고 끝나려면 앞으로도 3~4년은 더 걸린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4] 이는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라디오와 TV를 동원한 프로파간다와 허세가 대단히 성공적이었음을 입증한다. 실제로 라인란트 진주 당시 독일은 알보병 3천을 보냈지만 프랑스는 독일 주력군 수십만이 왔다 믿을정도로 독일을 과대평가해왔다.
결국 이런 문제로 인해 영-프는 폴란드를 버리고 독일에 대한 공세를 포기했다. 하지만 독일은 폴란드만 잡아먹고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런 독일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무능한 연합국 수뇌부와 박탈감에만 시달리던 국민들의 반전 여론[5]은 이후 프랑스 점령으로 귀결되었고 영국 역시 제국이 해체되는 결말로 이어지고 말았다.
가짜 전쟁은 오스트리아 병합, 체코 합병부터 이어진 연합국의 우유부단한 대처를 또 드러내는 사건으로, 이후 전쟁은 5,000만명 이상의 생명을 빨아먹는 세계대전으로 발전했다.
6. 여담
6.1. 만약 프랑스가 정말로 독일에 총력전을 펼쳤다면?
1940년의 나치 독일은 아직 전시경제에 돌입할 능력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수천대의 프랑스 기갑부대가 독일의 후방을 후려갈겼다면 폴란드도 아슬아슬하게 굴복시켰던 당시 독일로서는 양면전선의 부담을 결코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고 이 경우 전쟁은 1차대전 수준의 규모에도 미치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실제 역사에서 겨우 6주만에 항복한 것을 근거로 정면 싸움으로도 프랑스군이 졸전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애초에 낫질 작전처럼 적의 공백을 찌르는 변칙적인 작전으로 이긴 것, 그리고 독일의 주공 같은 조공인 B집단군과 영프 연합군의 격돌에서 연합군이 꿀리지 않고 잘 버텼다는 것 자체가 총력전 싸움에서 독일군이 프랑스를 압도할 수 없었음을 반증한다. 그래서 아이러니하지만 벨기에에서 황색작전의 초안이 노획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의 항복은커녕 독일의 승전은 1940년에 멈출 가능성도 있었다.
다만 해당 전쟁 이후 총력전태세를 갖춘 소련 vs 서방 연합국 구도의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가능성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후술할 파이크 작전안에서 연합국은 소련도 독일 못지않은 가상적국으로 상정하고 있었고 소련은 독일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적절한 시기를 봐서 독일의 뚝배기를 깨 버릴 가능성이 꽤 높았기 때문이다.
6.2. 파이크 작전
가짜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1월 영국군은 소련의 캅카스 지방의 정유시설에 폭격한다는 대담한 작전을 구상했다. 이러한 계획이 진행된 이유는 독일과 소련이 폴란드를 사이좋게 분할하고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을 지켜본 연합국이 유례 없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로서는 스탈린이나 히틀러 누구도 불가침조약을 파기할 것 같지 않았고 독-소 동맹이라는 최악의 가능성도 고려되기 시작하자 소련도 소련이고, 독일에 대한 견제 필요성이 대두되었다.[6]영국은 독일이 석유 수급을 소련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해당 루트를 차단한다면 독일군의 역량을 크게 감소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소련도 농업/군사 부문의 원동력이 바쿠의 석유에 달린 탓에 이 폭격 작전은 연합국 사이에서 두 국가를 몰락시킬 수 있는 유효한 수단으로 평가되었다. 이 작전을 위해 상당한 규모의 폭격기 편대가 시리아에 배치 예정이었고 1940년 3월~4월 동안 정찰기가 폭격지점을 답사하기도 하였다. 해당 작전에 관한 첩보를 입수한 스탈린은 핀란드와의 전쟁을 급히 마무리짓고[7] 병력들을 해당 지역에 급파하였다.
그러나 1940년 5월 10일[8] 독일의 프랑스 침공이 발발하자 작전은 중지되었고 이어서 6주만에 프랑스 항복함에 따라 완전히 폐기된다.
재밌는 점은 이 작전이 실제로 실행되었다면 연합군에게 더 재앙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소련은 오히려 폭격을 명분으로 세계대전에 추축국 편으로 붙을 가능성이 있었다. 이안 커쇼의 히틀러에 따르면 독일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폰 리벤트로프는 소련을 3자 동맹에 초대하고 싶어했고 실제로 1940년 11월 독일을 방문한 몰로토프에게 영국의 중동 식민지를 미끼삼아 추축국에 들어오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몰로토프는 소련의 관심사는 영국의 중동 식민지가 아닌 발트해와 발칸반도라고 못 박았고, 반 영국 동맹 참가 조건으로 일본의 남사할린 반환, 터키 내 소련군 주둔, 불가리아에 대한 소련의 권리 인정, 핀란드 내 독일군 철군을 요구하며 결렬이 났다.
다른 목표인 독일의 석유 수급 차단은 영-프의 첩보와는 달리 당시 독일은 소련이 아니라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 유전에서 대부분의 석유를 수입해 왔던 것이 밝혀짐에 따라 완전히 뻘짓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했다.
[1] 1차대전 당시 철조망과 참호로 구성된 방어선을 돌파할 군사적 수단이 미비했기 때문에 솜 전투, 베르됭 전투, 파스샹달 전투처럼 공세가 실패하든 성공하든 기본적으로 엄청난 인명손실을 수반했다.[2] 지금의 벨기에 림뷔르흐 주 마스메헬렌 인근. 마스트리흐트는 벨기에가 아닌 네덜란드 영토다.[3] 솅겐 협정이 체결된 솅겐 근방이다.[4] 독일 해군의 경우 1945년은 되어야 어디가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하고 Z 계획을 추진했는데 히틀러가 1939년에 전쟁을 일으킨 덕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때 에리히 레더가 '이제 해군은 멋지게 죽는 일만 남았다'며 절망한 것으로 유명하다.[5] 1941년에 프랑스에서 나온 관련 저술에서는 비겁한 독일놈들이 가짜 서류를 뿌려서 고스란히 속아 넘어갔다는 주장까지 나왔다.[6] 이러한 기책을 열심히 준비할 동안 정작 가장 쉽게 세계대전 발생을 막을 수 있는 서부전선 공격은 끝내 못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7] 파이크 작전 때문에 겨울전쟁 마무리를 지은 것인지, 겨울전쟁 이후 북유럽에 대한 소련 영향력 확대 견제책으로서 파이크 작전이 추진된 것인지는 견해 차이가 있다.[8] 파이크 작전 개시 5일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