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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보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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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보병사단
第一七步兵師團
The 17th Infantry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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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광석화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단
<colbgcolor=#10007c> 창설일 1955년 3월 20일(제33예비사단)
1975년 7월 1일 (제33보병사단)
1982년 8월 16일 (제17보병사단)
상징명칭 번개부대
소속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수도군단
경례구호 충성[1]
규모 사단
역할 인천광역시, 경기도 부천시, 김포시 방위·해안강안 경계
사단장 소장 이광섭 (육사 51기)
부사단장 준장 000
참모장 대령 000
위치 인천광역시 부평구 일신동

1. 개요2. 역사3. 예하 부대4. 과거부대5. 출신 인물
5.1. 사단장5.2. 장교/부사관5.3. 병
6. 기타
6.1. 근무환경6.2. 위치6.3. 사단가
7. 사건 사고8. 여담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인천광역시에 위치한 대한민국 육군 수도군단 예하의 보병사단이다. 상징명칭은 번개부대이며 경례구호충성이다.

수도권 서측방에 대한 방어를 맡는다. 인천, 김포 지역 해안 및 강안을 경계하며 지역방위 임무도 수행한다. 예하부대인 제3경비단은 인천공항을 방어한다.

2. 역사

1955년 3월 20일 강원도 양구군 적리(훗날 21사단 구 63연대 자리)에서 육군본부 직할 제33예비사단으로 창설되어 5월 7일 현 위치인 인천광역시 부평구로 이전하였다. [2] 현 위치로 이전함과 동시에 육군본부 직할에서 2군(현 2작사) 예하 제6군관구사령부 예하로 예속이 변경되었다. 이후 6관구사가 수도군단으로 개편되어 3군 예하로 편제되었다. 예하 99연대가 1975년에 제99보병여단으로 승격하였는데, 그 99여단이 지금의 제51보병사단의 전신이며, 제52보병사단의 사실상 전신이기도 하다.[3] 아무튼 51사단 분리 신설 등으로 관할구역이 변경되기 전에는 인천권 뿐만 아니라 서울특별시 한강이남지역과 광명시, 안양시, 시흥군, 화성군 등지 또한 관할 위수지역으로 삼았고, 시흥군, 화성군 지역의 해안 경계 근무도 담당했다고 한다. 부대 개편 이전에는 해안경계섹터가 아산만까지 걸쳐있었다고 한다.# 당시 부대마크는 숫자 33을 번개로 형상화한 것이다.

옛 수도권 지역 향토사단(30사단, 33사단)에서 각 1대대씩 차출하여 현 수방사 제1경비단의 전신이 되는 수경사 직할부대로 개편된 것 고려하면, 17사단은 간접적으로는 현 수도방위사령부의 아버지라고 할 여지가 존재한다.[4] 33사단에서 1개 대대 병력을 차출하여 수경사 33대대 → 수경사/수방사 33단으로 개편되었고, 1996년에는 33단이 30단을 사실상 흡수 통합하는 식으로 1경비단으로 개편되었으며, 수방사 제1경비단에는 17사단의 피가 흐른다고 볼 수 있다.

1975년에는 제63훈련단(현 55사단)이 창설되면서 한강 이남 수도권 지역에 대한 예비군훈련임무를 그쪽으로 인계하였다.

1976년에는 경기서부 지구에 대한 위수사령부 역할을 수도군단으로부터 인수받았는데, 그것이 사단 정문에 붙어있는 '경기서부지구 위수사령부'의 유래이다.

1980년 5.17 계엄령 당시에는 33사단 예하 101연대[5] 병력들이 여의도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 출동하여 국회 개회를 저지한 흑역사가 있다.

1982년에 사단마크와 부대 번호만 지금처럼 변경되었고[6] 1984년 수방사 개편으로 관할구역이 조정되었으며, 안양시 등 경기 남부권에 주둔하던 일부 예하부대가 인천권으로 이동하였다. 한편 같은 해에 이 부대의 예하였던 제99보병여단이 제51보병사단으로 승격되었다. 인천, 부천, 김포 지역 예비군 훈련과 인천 해안경계를 담당하던 제103보병여단(수도군단)(1993년 17사단으로부터 분리[7])이 2007년 미추홀 제507보병여단[8]으로 17사단에 흡수(사실상 재편입)되었다.[9] 아무튼 17사단 예하 부대들이 파란만장한 개편을 거치면서 17사단을 떠나간 몇몇 부대들의 단대호들은 다른 지역방위사단들이 채갔다.

대한민국 해군 인천해역방어사령부와 함께 인천국제공항 경비를 담당하는 제3경비단도 이 사단의 예하에 있다. 공항 경비 외에도 인천 지역 방어 작전시 해군 인방사와 제2해병사단과 긴밀한 협력 관계에 있다. 다만, 2해병사단은 유사시 17사단과 함께 육군 수도군단의 지휘를 받지만, 인방사는 해군 제2함대 사령부의 지휘하에 계속 남는다.

51사단의 아버지이며 수방사제1경비단또 다른 아버지.#

2020년 국방개혁으로 인해 12월 1일부로 예하 연대들이 여단으로 변경되었다.

3. 예하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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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보병사단 예하부대
제100보병여단 제101보병여단 제102보병여단 제507보병여단
포병여단 제3경비단
※ 군 공통의 직할부대(본부근무대, 의무근무대 등)는 소속 부대 문단 참고


대한민국 육군의 사단 기준 예하 여단급 부대가 6개로, 사단급 부대 중에선 가장 많은 여단급 부대를 거느리고 있다.[10]또한 2020년 말에는 예비군 관리부대인 507여단을 제외한 나머지 전투보병연대를 모두 여단급으로 개편한 최초보병사단이 되었다.

예하 여단의 단대호가 다른 상비사단의 여단과 비교했을 때 숫자가 좀 큰데, 이는 17사단의 향토사단(현 지역방위 사단) 시절이었던 33사단이 남긴 흔적이다.[11]

3.1. 사단 직할대

영내 직할대영외 직할대

3.2. 제100보병여단 백승

3.3. 제101보병여단 승리

3.4. 제102보병여단 북진[15]

3.5. 제507보병여단 미추홀

3.6. 포병여단 천둥

3.7. 제3경비단 용왕

4. 과거부대

5. 출신 인물

5.1. 사단장

볼드체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제17보병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백홍석 예) 소장 육사 3기 사단장 [20]
2대 최경만 예) 준장 육사 2기 사단장
3대 김봉철 예) 소장 사단장
4대 이세호 예) 대장 육사 2기 육군참모총장, 제3야전군사령관
00대 박정인 예) 준장 육사 6기 울산경비사령부 사령관, 제3보병사단 사단장
00대 김윤호 예) 대장 육사 10기 합동참모의장, 제1야전군사령관
21대 안필준 예) 대장 육사 12기 제1야전군사령관 [21]
00대 김택수 예) 소장 육사 19기 사단장
26대 최승우 예) 소장 육사 21기 사단장
27대 서경석 예) 중장 학군 3기 사단장 [22]
32대 임충빈 예) 대장 육사 29기 육군참모총장
35대 심용식 예) 중장 육사 34기 제5군단장
36대 강완구 예) 소장 육사 36기 제103보병여단장
37대 김용현 예) 중장 육사 38기 수도방위사령관
38대 송유진 예) 소장 육사 40기 사단장 [23]
39대 임종득 예) 소장 육사 42기 사단장
40대 김정유 예) 소장 육사 44기 사단장
41대 이규준 중장 육사 46기 육군교육사령관
42대 곽종근 중장 육사 47기 육군특수전사령관
43대 어창준 소장 육사 49기 사단장
44대 이광섭 소장 육사 51기 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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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장교/부사관

5.3.

6. 기타

6.1. 근무환경

17사단 옆에 제10항공단, 수도군수지원단(舊 제3군수지원사령부)가 이웃해 있는데, 동네주민들 대부분이 하나의 부대라고 생각할 정도로 담벼락 하나를 두고 붙어있다[25]. 한 예로 17사단 예하에 있지만 다른지역에 있는 예하 연대나 대대 운전병들이 사단본부로 갈때 정문입구로 가면 좀더 가야하기 때문에 (구)제61보병사단을 통해서 가고(그렇게 하면 훨씬 빠르다) 또 그렇게 선임들에게 교육을 받아왔다. 계속 그러다보니까 2012년에 17사단에서 자체적으로 61사단을 통해서 사단본부로 가는것을 지양하라고 공문이 내려왔다고 한다. 그정도로 17사단 예하의 대대 막사 바로 옆에 담벼락 하나 두고 61사단 시설이 붙어 있을 정도.

우스개소리로 어느 17사단 탈영병이 간신히 담을 넘었는데 61사단 영내로 떨어져서 다시 담을 넘었더니 3군지사 영내였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 사실은 2022년 5월 29일오인용의 전 대표 "데빌" 장석조가 운영하는 유튜브인 오인용데빌 채널에 사연으로 소개되며 실제로 일어났던 일임이 입증됐다. 2007년도에 17사단 신병교육대대 즉 훈련소에서 일어난 일로 훈련병이 벌인 일이었다. 탈영병과 같은 생활관이었던 훈련소 알동기가 제보한 실화였다.

17사단 상근예비역의 경우 무조건 51사단에서 훈련받은 후 자대배치된다. 특히 논산에서 배출되는 인원들은 수송열차를 타는데 신연무대역을 출발한 뒤 안양역 혹은 영등포역에서 하차하게 된다. 역에 도착하면 사단에서 몰고 온 버스가 있는데 그 버스에 탑승하게 된다. 하룻밤[26]을 사단직할 보충중대에서 지내며 그 사이 사단가와 사단의 역사를 교육받는다. 다음날 아침은 부대배치 분류가 완전히 끝나게 되며, 점심식사 후 각자의 부대로 뿔뿔이 이동하게 된다.

6.2. 위치

잘 알려져 있으나, 이래저래 인천, 수도권 서부에 살던 병사들에게는 야전상비사단 중에서는 최상급의 자대다. 그 중에서도 자기가 살던 지역과 가까운 예하부대로 떨어지면 부대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그대로 집까지 갈 수 있는 경우까지 있다.

사단 사령부는 경인선 급행과 특급이 정차하는 송내역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위병소를 나가는 순간 큰 차들과 시내버스가 쌩쌩 지나다니는 대로변이 나온다. 덕분에 이 부대 소속 인천·부천 출신 병사들은 외박을 나가서 집에 들어가도 오전 8~9시인 경우도 꽤 있다.

특히 김포공항과의 거리를 고려해 보았을 때 어설픈 지방도시 출신보다 공항이 있는 지방도시, 특히 제주도에서 날아온 장병들이 휴가를 나가기 편하다. 오전 6시 기상 후 바로 나가면 귀가 보고 전화가 일과 시작 전에 걸려오기도 한다. 또한 예하 101연대 본부[27]는 과거에 부대 앞 서울 지하철 5호선 송정역까지 걸어서 1분 거리였다. 김포공항마곡동까지 걸어가도 몇 분 안 걸렸다.[28]

다만 시설이 후지기는 하지만 연대가 작기 때문에 아기자기한 맛도 있고 다 사람사는 곳이기에 괜찮다는 말도 있었다. (오인용 연예인 지옥의 그 부대와 판박이까지는 아니고 살만하다. 화장실 변기에 앉으면 무릎 앞 두뼘정도 남는다. 유리창이란게 없었다 여름에는 모기장 겨울에는 비닐로 창을 막았다.) 현재는 101연대가 인천 서구로 이전했는데, 역시 인천2호선 역과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해있다. 검암역에서 서울로 이동하기 편하다. 또 다른 예하 100연대는 귤현역 도보 5분내 역세권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병사들은 외박 때 계양역에서 인천공항철도를 통해 집에 올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야전상비사단 중에서다. 육직 기행부대국방부 직할부대를 포함시키면 당연히 밸런스 붕괴다. 가령 육군으로만 한정해도 수도방위사령부 직할부대들은 서울 도심 여기저기 흩어져 있으며[29], 국직을 포함하면 국군재정관리단이태원 경리단길[30]에, 국군서울지구병원삼청동 카페거리에 있는데다 이런 국직 기행부대들은 훈련은커녕 몸 쓸 일 자체가 거의 없다. 심지어 전투복 자체를 거의 안 입는 서울의 모 육군본부 직속부대도 있다. 다만 그런 부대들은 워낙 인원이 적고 희귀하므로 사실상 로또라 봐야 하므로, 인지도 있는 사단급 부대들 중에서는 17사의 근무환경이 그나마 낫기에 17사단이 편하고 좋은 부대의 스테레오타입처럼 된 것이다. 이하 서술된 17사단의 특징들 또한 일반적인 야전사단들 기준으로 작성된 것들이다.

한때 꿈의 17사[31]라 불릴 정도로 느슨한 군기로 유명했으나(17사단 출신 예비역들의 하나같은 말에 따르면) 제3보병사단장 출신과 제8기동사단장 출신의 장군이 연달아 사단장으로 보직하면서 굉장히 빡세졌다. 01년 9월11일 306 보충대군번으로 첫 입영당시 임충빈 소장이 사단장이었고 306보충대에서 기대했던 파라다이스는 전역할 때까지 구경도 못했다. 어느 부대나 힘든 건 마찬가지겠지만 부대 내에 만연한 구타와 내리갈굼과 거기다 일병 달자마자 옆소대 이등병이 근무나가서 자살한 사건과 102 보병연대본부 일병이 침상을 닦던 도중 실세가 핀잔을 먹여 더욱 빨리하란 말에 반대편 침상을 닦으려는 순간 침상 모서리에 머리를 박고 그대로 사망한 사건은 뉴스에 콧배기도 안 나올 정도로 개막장인 부대 분위기였다. 오히려 자살 후 군단검열 나온다고 소초내의 일병이하 군번들 매일 불러내서 정신교육시킨답시고 줘패고 그걸 당연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부대 분위기였다.환상의 17사단이 환장의 17사단으로 변한 것. 당장 17사단의 부대 슬로건이 상승번개인 것만 봐도 그렇다. '상승(常勝)'이라는 표현은 전방 상비사단에선 흔히 쓰이는 것이다. 수도서울 절대사수가 임무인 수방사조차도 그런 표현을 쓰지 않는다. 이렇게 빡세진 것은 상비사단이라서 그렇다.

사실 "누가 사단장으로 와서 빡세졌다더라"는 레파토리는 1990년대 후반이나 2000년대 초반에도 있던 이야기. 사실은 90년대 초반에 제103보병여단(수도군단)이 17사단으로부터 독립하여 17사단이 지역방위사단에서 상비사단으로의 전환(1975년부터 시작)이 완료되면서 훈련 강도가 높아진 것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 제103보병여단(수도군단) 분리 창설로 인천권 지역의 향토방위, 예비군훈련이 그쪽으로 다 넘어가면서 향토사단 시절의 잔재가 없어진 것. 1970년대 후반부터 상비사단으로의 전환이 진행되었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는 향토사단의 잔재가 남아있었던 듯. 꿈의 17사니 뭐니하는 것들은 사실은 향토사단 시절(제33보병사단)의 꿀(?)의 흔적이 지금까지도 말로만 전래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만 507여단은 1994년에 17사단에서 분리되었다가 최근에 재편입된 부대고, 실질적으로는 타 연대와 다르게 향토사단에 가깝기 때문에 과거의 잔재가 다른 예하부대보다는 더 많이 남았을 여지가 있다. 이런 풍문이 지금까지도 퍼지는 것에는 사실 수도권 출신 병사들이 강원도경기도 북부 전방사단에 많이 가다보니 집에서 가깝고 인천 시가지에 사단본부가 있는 17사단이 일종의 선망대상이 된 부분도 있긴 하다.

덧붙이자면 17사단으로 자대배치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무조건 인천, 부천 등 도시와 가까운 곳에서 복무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특히 포병여단 예하 대대들은 보병대대보다 전방에 위치하고 있다. 그 중 306포병대대는 김포시 최북단에 위치해있다.[32] 심지어 북한과 직선거리가 4km 정도다.[33] 17사단의 넓디넓은 작전지역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17사단 걸렸다고 당연히 인천 시가지에서 근무할 거라는 생각을 가졌다가 큰 코 다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는 것.

지역방위사단이 아닌 상비사단 주제에 최우수 향토사단으로 대통령 표창까지 받았다(...).관련 국방일보 기사 하지만 과거에 지역방위예비사단(33사단)이었던 시절이 있었고(당시에는 인천권인 인천, 부천, 김포뿐만 아니라 서울 영등포, 시흥군[34]까지도 이 사단의 관할 위수지역이었다), 지금도 인천, 부천, 김포(동 지역, 고촌읍) 지역에 대한 사실상의 향토사단의 역할까지 담당하기에... 예비군 업무분야에서는 사실상 지역방위사단 취급이기도 하고(...).

이런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언제부터인지(1990년대 후반부터라고 추정) 해안감시대 등의 소수를 뺀 나머지 부대는 교육훈련 위주의 부대가 되었다.[35] 여름이면 핫팬츠를 입은 처자들이 있어서 훈련이 즐겁기는 개뿔. 어쨌든 훈련이야 다른 부대도 다 하는거니까,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외박/외출을 나가도 잘 놀다올 수 있는 메리트는 상당히 편하다고 볼 수 있다.

실상 수도군단의 유일한 상비사단이기 때문에 훈련이든 검열이든 시범케이스든 뭐든 군단 대표로 혼자 뛰는 사단이다. (전투연대가 모두 인천 지역으로 옮겨온 현재는 좀 덜하지만) 아주 가까운 과거까지도 전투연대가 뿔뿔히 흩어진 편제여서, 부대가 사단본부에서 멀면 인천 시내에서 멀어서 이 부대의 장점의 혜택을 못 받고, 가까우면 그만큼 더 자주 시범케이스가 될 것이다.(사단내에서 여러곳에 가 볼 기회가 있던 병사의 의견에 따르면, 여기 병사들은 근무처에 관해선 대부분 먼 곳을 선호한다.) 한마디로 육군에서 수행하는 거의 대부분의 훈련과 작전에 참여한다고 보면 된다. 사단에서 멀고 가깝고 그딴거 없다. 연중 대부분이 훈련과 행군 스케쥴로 빽빽하게 짜여져 있다고 보면 된다.

또한 상당히 영내 환경이 좋다. 건물과 길이 깨끗하고 수목 조성도 잘되어 있는 편. 영화용서받지 못한 자》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사단 본부에 위치한 예하 102연대의 연대본부가 주 촬영지. 그러나 정작 영화에 나온 부대마크는 지금은 해체된 제62보병사단이다.

부대시설은 2014년부터 직할대 위주로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 현재 정비대 통신대는 리모델링이 완료되어 신막사(?)로 들어간 것으로 확인된다. 영외에 있는 부대로는 101연대의 간부숙소만 5층 규모의 신막사이며 다른 병사들 있는 곳은 구막사 그대로다. 참고로 2005년 4월에 100연대 예하 모대대 신막사와 사단 수색대대가 제일 먼저 신막사로 바뀌었으며 사단 최전방인 306 포병대대는 무려 2006년에 신막사가 완공(무려 침대형 생활관이다.)되어 매우 훌륭한 시설에서 군생활이 가능했다. 신막사 건설당시 부대원들이 몇달동안 컨테이너에 살며 노가다에 동원되기도 했다고 한다.

17사단 출신의 전역자들은 우리 사단에 전차나 토우같은 화력장비가 있었나 할 정도로 부대가 수도권 밀집지역에 분포되어 상당수가 없는 걸로 알고 지낸다. 그 이유로 전차대대는 시흥에 위치해 있고, 전시가 아닌 이상 전차가 인천 시내 한복판에 올 일은 없다.[36] 자신이 사단 영내에 전차를 봤다면 그건 정비대대의 교보재이자 부대행사의 전시용인 MF장비(전시에는 보충물자로 전환.)다.

특히 17사단 전차대대는 육군기계화학교를 제외하고 전군 기갑부대 중 최후방에 위치해 있다. 사단 자체가 도심에 있어 기동에 제약이 심해 전방 부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훈련이 적은 편이다.[37] 기갑병과 간부에게는 진정한 파라다이스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전차포 사격을 위해서 상당히 장거리 이동을 한다... 현재도 간혹 부천 시내를 관통하는 송내대로로 전차들이 새벽 기동을 실시한다.

===# 부대영상 #===



6.3. 사단가

서해의 밝은 기상 한 몸에 안고
경인벌 넓은 들에 뭉친 용사들
찬란한 조국 강산 겨레의 앞날
굳세게 길이 지킬 선봉의 대열
아 그 이름 17보병사단
영원히 빛나리 멸공의 맹세

끓는 피 타는 정열 샘솟는 용기
어둠을 뚫고 가는 힘찬 번개 빛
우리가 가는 곳에 승리가 있다
무적을 자랑하는 상승의 대열
아 그 이름 17보병사단
영원히 빛나리 멸공의 맹세

정으로 다진 단결 강한 전우애
우리는 신뢰 속의 번개 용사들
호국의 굳은 의지 뜨거운 가슴
싸우면 이기는 승리의 사단
아 그 이름 17보병사단
영원히 빛나리 멸공의 맹세

7. 사건 사고

7.1. 17사단 종교시설 무단폐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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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사단장 성추행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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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대대장 성범죄 사건

2014년 6월 대대장이었던 이 모 중령이 성희롱 혐의로 보직해임 된 것이 확인되었다.#

해당 대대장은 2010년 화천에서도 심 모 중위를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났으며, 당시 국방부가 성군기 위반을 확인했음에도 구두 경고에 그쳤다.#

게다가 2014년 1월 17사단 군사법원장으로 임명된 것이 확인되었고,# 5월에 성추행 혐의로 조사 후 6월에 보직해임, 8월에 정직 3개월 처분을 받았다.

사건 당시 송유진 前 사단장의 성추행 파문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됐던 시점이라 파장은 더 컸다.

7.4. 제17보병사단 일병 자살시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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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2024년 식중독 사건

2024년 11월 26일, 예하부대 15곳 병사 66명이 식중독 증세를 보였다. 이에 역학조사를 실시한 결과, 노로바이러스로 인한 식중독으로 확인되었다.#

7.6.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이 선포된 다음 날 4일 오전 2시[38] 쯤 제17보병사단 소속 군인들이 인천광역시청에 연락해 시청 홍보 및 인천광역시 관내 구청·강화군 홍보를 담당하는 직원들의 연락처를 확인했다고 한다. 인천광역시청 관계자에 따르면 제17보병사단 군인이 인천시 관계자에게 연락해 "현 상황과 관련해 연락을 했다"며 "인천광역시 관내 구청과 군청 홍보 관계자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이에 인천광역시 관계자는 "(구청과 군청 홍보 관계자)연락처는 없다"며 "누리집을 참고해 달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계엄군은 주요 행정기관, 공공시설, 언론기관 등을 통제할 수 있다. 제17보병사단 관계자는 "확인 중"이라며 말을 아꼈다고 한다.#

김용현 국방부장관이 다름 아닌 여기 사단장 출신이다. 또한 비상계엄 주요인물 중 곽종근 특수전사령관도 17사단장 출신이며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은 예하 101여단장 출신이다.

8. 여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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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5년에는 '진격'과 '멸공'을 경례구호로 사용했다.[2] 인천권 지역에 대한 사실상의 지역방위사단 역할을 하는 17사단을 비롯하여 2작사 예하의 30번대의 지역방위사단들은 전방 지역에서 창설되었다가 후방의 담당 위수지역으로 부대가 옮겨진 경우가 많다. 사실은 30번대 사단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명에 따라 1955년 전후로 창설된 것들이다.[3] 지금의 과림예비군훈련장(당시 17사단 모 연대 1대대로 추정)과 박달예비군훈련장(당시 17사단 모 연대 2대대로 추정)이 과거에는 17사단(33사단) 예하 부대 였다는 설도 있다. 또한 시흥시 무지내동과 안양시 박달동에 예하 부대가 있었고, 동작동 국립묘지와 관악산 등지에서도 훈련한 적 있다고 한다.[4] 현 수방사는 6.25 전쟁 전후의 수도경비사령부, 수도사단과는 계보가 이질적이며, 제6군관구사령부의 피는 현 수도군단이 이어받고 있다.[5] 당시에는 여의도도 연대의 관할 위수구역에 포함되었다.[6] 간첩들이 33사단 경계를 뚫고 월북한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7] 17사단의 상비사단으로의 전환을 완료하기 위해 인천권 향토방위임무를 103여단에 떠넘긴 것이다.[8] 그러나 정작 여단 본부가 주둔하는 곳은 미추홀(원인천)이 아닌 주부토다.[9] 103여단 연혁을 보면, 1983년 17사단 예하 171보병지단 창설 → 이듬해 507보병여단으로 승격 → 93년도 제103보병여단(수도군단)으로 새롭게 창설(17사단 해안경계대대인 102연대 2대대+101연대 2대대와 합쳐져서 창설 - 507여단장 대령에서 103여단 준장), 수도군단 예하 독립여단으로 임무 수행 → 103여단 해체 후 507여단으로 재창설, 17사단으로 배속전환순서다. 103연대가 103여단으로 바뀐 게 아니다. 103연대는 따로 있다고 한다.[10] 일반적인 상비사단은 3개 보병(연대)여단+1개 포병(연대)여단으로 총 4개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단 예하 여단이 6개인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대부분의 지역방위사단은 3개 또는 4개의 지역방위 목적 여단을 예속받았으며, 5개인 곳은 32, 50사단 두 곳이다. 이 둘은 지역방위 사단인 것을 감안하면 상비사단이면서 지역방위 기능이 있는 여단을 가진 17사단은 매우 독특한 케이스이다. 물론, 이는 33사단과의 통합으로 인천광역시를 담당하는 지역방위용 여단(507)과 수도군단의 유일한 상비사단으로써 전투력을 가진 (기존 연대급)여단이 합쳐진 결과이다.[11] 32사단과 35사단의 예하 여단 단대호를 보면 서로 숫자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12] 육군훈련소, 타 사단 신병교육대 및 후반기 교육부대 출신 신병들을 임시로 받는 사단 직할중대.[13] 구 보급수송대대[14] 17사단에서 전역한 병사도 사단에 전차가 없는 걸로 알 만큼 동떨어진 곳에 있다. 위치는 경기도 시흥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정비는 대대에서 하고 사단 정비대대는 멀어서 부대 코앞에 있는 3군지사 80정비대대(현 수도군지단 70정비대대)에 정비를 맡긴다.[15] 북진이라는 상징명에 걸맞게 17사단 내에서 가장많은 훈련량을 자랑한다.[16] 17사단 유일 차륜형 장갑차 보유 대대. 인천국제공항 방위와 영종도 일대의 방어를 위한 목적으로 3경비단 여단포중대로 파견을 나간다.[17] 19.11.01부 창설, 특이점은 기존 연대나 여단 예하의 수색부대인 수색중대가 아닌 기동중대로 새롭게 창설되었다. 기존 사단 직할 수색대대에서 30명의 정예멤버를 선발해 기동중대를 창설. 수색대대에서 30명의 용사가 오기 전 한달가량 먼저 수료하고 온 이등병 7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전설의 7공주'라고 칭한다. 전방 예비부대인 타 연대와 다르게, 이 부대가 사실상 향토사단이나 다름없어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18] 제102보병여단 1대대 차륜형 장갑차 조종수들이 파견오는 곳이다.[19] 55사단이나 상비사단에서 많이 온다.[20]일본육군사관학교 27기 생으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된 인물[21] 마지막 33사단 사단장[22] 대령 시절 제102보병연대장을 역임했다.[23] 2014년 10월 여군 하사를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되었다.[24] 마지막 제1야전군사령관이기도 하다.[25] 영내에 17사단과 수도군수지원단을 연결하는 샛길이 하나 있어 사실 위병소를 통과하지 않고도 걸어서 왕래가 가능하다.[26] 부대 인원 적체 상황 또는 연휴 등으로 인해 배치 일정이 밀리면 길게는 일주일 정도를 보충중대에서 지낼수도 있다.다만, 보충대대 배치 다음날이 공휴일등이면 4시간정도 머물다 바로 자대로 떠난다[27] 원래는 안양시 석수동에 있었는데 1979년경에 서울 강서구로 이전했다가 2019년에 다시 인천광역시 서구로 옮겼다.[28] 수방사 관할 구역(52사단)인 서울에 뜬금 없이 17사단 예하부대가 왜 있는지 싶겠지만, 이 문서 앞부분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이 과거에는 서울 한강이남 지역도 17사단 책임위수지역이었다. 안양 박달동과 시흥, 화성 지역에 있던 17사단 예하부대와 다르게 서울 중에서도 인천권에 가까운 곳에 있다보니 1980년대의 향토사단 개편 당시에 부대 이전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29] 제1경비단에는 부대 담장 바로 옆 아파트에 살던 신병이 들어온 적이 있다.[30] 애초에 경리단길이라는 명칭이 국군재정관리단의 구 명칭인 육군중앙경리단에서 따온 것이다.[31] 일반적으로 (구)제306보충대대에서 갈 수 있는 상비사단으로 꿈의 17사, 17베가스, 환상의 XX사라고 불린다. 뒤의 환상의 XX사는 오만 사단이 다 튀어나오지만 꿈의 17사만큼은 불변의 위치에 있다(...). 세간에는 정수기에 꿀이 나온다는 사단이라 소문나기도... 심지어 2009년 당시 논산 육군훈련소에서도 야전부대 소개 교육에서 17사단을 꿈의 부대라 소개되기도 했었다(...).[32] 이 때문에 여기에서 사단본부로 갈 때는 1시간이 넘게 시간이 걸린다.[33] 그러나 88번 버스를 타면 영등포역까지 논스톱으로 갈 수 있어서 심각한 격오지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17사단에서 입지가 가장 안 좋다는 거지.[34] 지금의 광명시, 안양시, 안산시, 과천시, 시흥시, 군포시, 의왕시, 화성시 등지[35] 17사단 신병교육대에서는 주간행군과 야간행군을 무려 인천대공원에서 실시한다.[36] 전술훈련시 새벽에 김포까지 기동하는데, 송내역, 상동 등 각종 번화가를 통과한다.[37] 당연한 것이 훈련이 없을 수는 없다. 훈련 여건이 좋지 않아 외적으로 드러나기도 어렵고, 밀리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지 훈련 좀 하자 하면 스케일이 좀 커진다... 그리고 군단 유일 전차대대라 훈련 좀 뛰면 당연히 관심 집중이다.[38]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된 지 한 시간 정도 경과되었다...[39] 자매품으로는 환상의 00사단이 있는데, 주로 용인에 위치한 55사단을 부를 때 쓰인다.(환상의 00사단은 도심지에 위치해서 근무환경이 좋으면 한 번씩 붙는 수식어인 데에 반해 꿈의 00사단은 17사단에만 쓰인다.).[40] 바뀐 출타 허용구역에 따르면 서울특별시 전 지역이 가능하며 경기도는 서울특별시와 인접한 지역의 도시(고양시, 의정부시, 성남시, 안양시 등)까지 가능하다.[41] 직할대가 대다수고 본부의 행정업무를 맡는 계원들이 있는 부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침대가 생활관에 보급되지 못했다.[42] 두 부부는 결혼 3년 만에 인공수정으로 임신의 겹경사를 맞았는데 처음에 6쌍둥이인 것을 처음 알고 병원에서는 조산과 선택적 유산에 대해 설명하여 유산도 고민했지만 고민 끝에 모두 낳기로 했다고 한다. 다만 정상적으로 낳았으면 둘째가 될 아기가 성장 속도가 느려 병원에서 사산할 위험이 높다고 했고 결국 먼저 하늘로 떠나보냈다고 한다. 출산할 때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20여명이 넘는 많은 의료진이 투입된 덕분에 5쌍둥이를 무사히 출산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