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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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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볼테르 Voltaire | |||
볼테르의 초상화. 니콜라 드라르질리예르 作, 1724~25년경 | |||
본명 | 프랑수아마리 아루에 François-Marie Arouet | ||
출생 | 1694년 11월 21일 | ||
프랑스 왕국 파리 | |||
사망 | 1778년 5월 30일 (향년 83세) | ||
프랑스 왕국 파리 | |||
국적 | [[프랑스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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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파 | 계몽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 ||
모교 | 라세 루이트그랑 | ||
종교 | 이신론 | ||
배우자 | 에밀리 뒤 샤틀레 (1733년 ~ 1749년) 마리 루이즈 미뇨 (1744년 ~ 1778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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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작가, 철학자, 계몽 사상가. 18세기 유럽 문학계의 최고 유명인사이자 당대 계몽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평생을 '종교의 광신과 배타성'을 타파하기 위해 싸웠으며, '종교적 관용'을 뜻하는 똘레랑스를 프랑스 정신의 일부분으로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2. 생애
볼테르의 아버지는 부유한 공증인[1]이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어릴 때부터 파리의 유서 깊은 예수회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의 대부였던 샤토뇌프 신부가 그를 상류 사회에 소개했고, 동창들 덕에 귀족들과 어울렸다. 또한 볼테르는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재치가 있었기 때문에, 12살 때부터 시를 짓기 시작했고 재주를 인정받기도 했다. 20살에는 당시 유명한 사교계 모임인 르 탕플(le Temple)에 출입하면서 당대의 많은 자유사상가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1년 뒤 루이 14세가 죽고 오를레앙 공이 섭정을 시작했을 때, 볼테르는 그가 지은 시구가 문제가 되어 바스티유 감옥에 11개월간 투옥된다. “나는 이 모든 악행을 보았네. 나는 스무 살이 아니었네”라는 별것 아닌 구절 때문이었다. 하지만 볼테르는 감옥에서도 비극 《오이디푸스 (Edipe)》의 초고를 집필하였고, 출옥 후 공연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이때부터 그는 '아루에'라는 자신의 성(姓) 대신, '볼테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1726년, 30살 때 일찍 성공을 하여 거칠 것이 없었던 볼테르에게, 귀족 청년 슈발리에 드 로앙[2]이 볼테르를 ‘성(姓)도 없는 부르주아’라고 빈정대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볼테르는 “내 성은 나로부터 시작하지만,[3] 당신의 성은 당신에게서 끝날 것이오”라고 응수하였고, 화가 난 귀족 로앙은 하인들을 시켜 거리에서 볼테르에게 몽둥이찜질을 퍼부었다. 이에 분개했던 볼테르는 이 귀족에게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르렀는데, 감히 귀족에게 도전장을 던진 그의 오만불손한 태도는 당시만 해도 굳건하던 신분사회 속 귀족들의 심기를 건드리기 충분했다. 자신과 친하다고 생각했던 귀족들이 모두 그 귀족 편을 들었고, 그 바람에 볼테르는 또다시 바스티유에 갇히게 된다.
이미 한 차례 수감 생활을 경험한 볼테르는 모든 인맥을 동원하여 청원하였고, 한동안 영국에 가서 있는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풀려났다. 영국으로 향하는 망명길에서 볼테르가 귀족계급의 횡포에 대해 곱씹은 울분과 분노가, 이후 그의 계몽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이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분의 불평등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느꼈던 볼테르는 재산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뿌리 깊이 새겨져 있었고, 일찍부터 은행가들과 교분을 쌓고 투자와 대출 사업에 참여해 큰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볼테르의 영국 생활은 망명이나 다름없었지만 궁핍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시기에 볼테르는 셰익스피어 공연을 보러 다니면서 카페에 드나들었고 《걸리버 여행기》를 쓴 스위프트와 교류하였으며,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와 과학자 뉴턴의 책에 열광하기도 한다.
1728년 파리로 돌아온 볼테르는 1734년에 영국에서의 경험들을 엮어 《철학 편지》를 발표했고, 검열당국에 의해 "종교와 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가져다줄 방종을 부추기는 위험한 책"으로 지정되어 또다시 쫓기는 몸이 되었다. 이후 자신의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뒤 샤틀레 부인(Madame du Châtelet)의 영지로 도피하여 이때부터 10년간 숨어지냈다. 샤틀레 부인은 자신의 실험실을 갖고 있던 물리학자이기도 했고, 뉴턴의 이론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부인은 볼테르에게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쳐 주었고, 볼테르는 부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여기서 만난 친구 다르장송의 추천으로 국왕의 사료편찬관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볼테르-샤틀레 커플은 파리로 돌아와 파리 중심부에서 남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소(Sceaux)에 자신들의 궁정을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임신한 샤틀레 부인이 아이를 낳다 죽게 되고, 볼테르는 슬픔에 잠긴 채 홀로 남게 된다. 볼테르는 전에 프러시아 왕의 초대를 받았던 일을 생각해내고 모든 것을 잊기 위해 1750년 프러시아의 포츠담으로 떠났다.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왕에게 특별한 호의와 자유를 약속받았음은 물론이다.[4] 볼테르는 여기서 프리드리히 왕이 프랑스어로 시를 지으면 그것을 교정해 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그 대가로 2만 리브르(약 8만 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성격 차가 컸던 두 사람은 3년 후 결별한다. 이후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루이 15세가 파리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볼테르는 이미 상당히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1754년 국경 너머 스위스 제네바 시내에 델리스(délice: 열락이라는 뜻)라고 이름 붙인 집을 짓고는 거기서 살았다. 극장도 지어 연극을 공연하고, 비서와 요리사를 두고 독립적인 생활을 누렸다. 《리스본 대지진에 관한 시》를 출간하고, 디드로가 주도한 《백과전서》에 협력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의 대표작 《캉디드》가 쓰여진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다만 이 시기의 제네바 공화국은 칼뱅주의 하에 연극 등의 공연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볼테르는 제네바 시민들과 종종 마찰을 빚었다. 1758년에는 제네바에서 조금 떨어진 프랑스 영토인 투르네와 페흐네에 토지를 사들여 자신의 성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국경 근처라 스위스와 문제가 생기면 프랑스로 도망가고, 프랑스와 문제가 생기면 스위스로 도피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철학자들은 뒤쫓아오는 개들을 피하기 위해 땅 속에 두세 개의 굴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평소 볼테르의 말이기도 했다. 페흐네는 당시 인구가 50명에 불과한 척박한 땅이었으나, 볼테르가 이곳에 직물 공장과 시계 공장을 세우고, 제네바 공화국에서 빠져나온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정착시켰으며, 훗날 20년 후 볼테르가 이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는 인구가 1200명으로 늘어있었다.[5]
페흐네에 진영을 구축한 볼테르는, 이성과 문명을 옹호하며 부당한 권력과 종교의 광신에 맞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싸우는 지성의 투사 역할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칼라스 사건이 대표적인데, 개신교도인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을 선고받은 일이 발생했다. 소문에 의한 명백한 누명이었지만 판사들은 칼라스가 개신교라는 이유로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이 사건은 억울하게 묻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볼테르는 광신이 빚은 비극임을 알아차리고 그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발벗고 나선다. 고등법원의 사건기록을 입수해 분석하고, 칼라스 가족을 도와 국왕의 재판정에 상고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이 문제에 관한 팸플릿을 써서 주변 지식인들에게 전달하는 등 일련의 노력을 통해 재심을 요구하는 여론을 조성하는데 성공하였고, 결국 3년 뒤 칼라스의 무죄와 복권을 이끌어냈다. 1763년에 발표된 《관용론》이, 이 칼라스 사건을 계기로 쓰여진 것이다.
1778년 무렵, 루이 15세가 사망하자 파리로 돌아갈 결심을 한다. 84세가 된 볼테르가 장장 28년 만에 프랑스로 귀환할 때, 수많은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마치 개선장군처럼 수도로 들어왔다고 하며, 이를 전해들은 루이 16세가 질투심을 느꼈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긴 여행에 따른 피로와 연일 이어지는 환영행사를 이겨내지 못하고 석 달이 못되어 숨을 거뒀다. 사후 프랑스 혁명기에 그의 유해는 프랑스의 역사적 위인들을 모시는 팡테옹에 두번째로 안치되었다. 하지만 판테옹에 첫번째로 안치된 미라보 백작의 묘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팡테옹에서 철거당했기 때문에, 볼테르는 프랑스의 모든 위인 가운데서도 첫번째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현재에 이르러서는 이를 두고 '프랑스는 볼테르의 나라'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것이다.
3. 사상
3.1. 종교적 관용
장 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와 함께 대표적인 계몽 사상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며, 평생을 불합리한 권위와 종교의 비관용에 맞서 싸웠다. 일대기도 거의 대부분 '무슨무슨 책을 내고 무슨무슨 성명을 발표해 누구누구의 분노를 샀으며 투옥되거나 망명했고 철학자 누구누구를 비판했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놀라울 정도로 흥미로운 건, 이런 망명 생활 가운데에서도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이다. 동시대 유럽에서 자수성가한 갑부로는 손에 꼽힐 수준이었다. 쉽게 말해 '가장 부유한 평민'으로서 그 시대 부르주아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그의 인생역정 덕분인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재치 넘치는 말을 많이 남겼으며 이런 말들은 현대에도 자주 인용되지만, 사실 그 중 일부는 그가 직접 한 말이 아니다. 예를 들어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6]는 말은 1906년에 에블린 비어트리스 홀(Evelyn Beatrice Hall)이 『볼테르의 친구들 (The friends of Voltaire)』이라는 볼테르 전기에서 '볼테르의 태도는 이러했다'는 의도로 쓴 글이다. 그럼에도 이 문구는 진정으로 볼테르를 잘 표현해주는 문구이기에 볼테르를 언급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볼테르의 주장은 논리적 체계가 없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철학이 기본적으로 종교와 신화의 비합리적 영역에 맞서는 파괴의 기획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성ㆍ정의ㆍ관용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기보다는, 담론의 힘으로 대상을 공격하는데 열중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는 다음과 같은 확신에서 나온다. 기본 가치로서 '합리주의'와 '관용'과 '사상의 자유'는, 문자주의 성서학자들의 정교하고 편협한 종교적 불관용과 광란하는 야만에 맞서는 선명한 반명제라는 확신이다.
볼테르는 당대에 최고로 유명했던 작가였던만큼 다루지 않는 분야가 없었을 정도로 많은 글을 썼지만,[7] 그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주장을 뽑으라고 하면 '종교적 관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볼테르는 종교적 관용을 최초로 옹호한 사람은 아니다. 그 전에 존 로크가 『관용에 관한 편지』에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로크가 철학자이자 정치이론가의 관점에서 글을 쓴 반면, 볼테르는 당대의 구체적인 사건들로 논의를 시작하여 역사적 사례들에서 상식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어 대중들에게 그 상식을 호소하는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를 취하면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한다.
그의 『관용론』은 그의 의도대로 대중들에게 즉각적 호소력을 발휘했고, 출판되자마자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책에서 가톨릭 신자들의 "광신"을 강조하고, 스물다섯 개가 넘는 후속 장들에서 종교적 관용을 옹호하는 더 넓은 의미의 선언문을 제시했다. 볼테르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고대 그리스 및 로마 그리고 중국의 역사에서 많은 사례를 인용하고, 예수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유대교의 전통 속에도 관용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를 통해 그가 내리는 결론은 관용이 보편적 원칙이라는 것이다.
몇몇의 경우에 그는 "인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데, 이는 수십 년 뒤 프랑스혁명에서 사용될 "인간의 권리"와 똑같은 것은 아니었으나 분명히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볼테르는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내가 믿는 것을 너가 믿지 않는다면 너는 죽을 것이다"고 말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며, 자연은 우리에게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라고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이 "보편적 원칙"에 따르면 불관용은 "인권"의 일부가 될 수 없다.[8]
그래서 그는 그 자신이 비록 예수회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관용이 없던 당시 기독교 교회를 매우 심하게 비판했다. 심지어 로마 가톨릭 교회를 겨냥해서 말한 "파렴치를 박살내라!" (Écrasez l'infâme!)[9]는 슬로건은, 그가 만든 가장 유명한 구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볼테르가 무신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세상을 창조한 신'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신이 인간 세상에 관여하는 '인격적인 신'은 아니라는 것이 볼테르의 입장이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한 가지 구절을 통해 설명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시계 제작자로서의 신이다. 이는 시계 제작자가 시계를 만든 뒤에 관여하지 않은 채 시계가 알아서 잘 돌아 가듯이, 신 역시도 세상을 창조하고 그대로 내버려 두었기에 우리가 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인격적인 신'을 토대로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종교'가 수많은 아집과 독선을 탄생시켰다고 보았다. 특히 기독교의 '배타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많은 분쟁과 증오, 그로 인해 발생하는 피해와 낭비가 인간을 도리어 피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배타성을 박살내야 한다는 것이 볼테르의 주장이었다.
다만 볼테르는 혐오스럽고 심지어 부도덕한 견해들을 제시하기까지 하는 구약성서의 신을 부정하긴 했지만, 신약성서에 대해서는 다소 온건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신약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믿지 않을지언정 그것의 윤리적 원칙들에 대해서는 넓은 의미에서 공감한다.[10] 당시 유럽 사람들의 실질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은 어쨌거나 기독교에서 기원한 도덕 양식에 근거하고 있었고, ''인격적인 신에 대한 믿음"은 하층민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일종의 '유용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4. 일화
굉장히 재미있는 성격(?)이라서 그에 대하여 많은 일화들이 전해진다.- 볼테르에게 편지가 와서 뜯어 보니, "당신이 써댄 헛소리가 웃겨서 당신의 책을 불태우고 있다. 그래 기분이 어떤지 궁금하다."라고 적혀 있었다. 볼테르는 그 즉시 답장을 보냈다. "그것 참 고맙군요. 내 책은 구운 밤[11] 같이 불에 구워야지 제대로 값어치가 있거든요. 그런데 직접 구워주시다니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입니까?"[12]
- 작가로도 유명하다 보니 여러 신인 작가들이 글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루는 한 신인 작가의 글을 봤는데 그 작가가 찾아와서 "어떤가요?"라면서 소감을 물었다. 볼테르는 한마디했다. "고칠 부분이 있어서 하나를 고쳤네." 그 작가가 책을 꼼꼼하게 봤는데 어디에도 고친 부분이 없었다. 그래서 고친 부분이 없다고 하자 "더 자세히 보게나. 난 고친 부분이 있거든." 결국 고친 부분을 찾았는데 맨 마지막에 Fin(끝)이 Fi(피. 비웃을 때 내는 그 의성어, 한국어로는 풉 정도)로 고쳐져 있었다...
- 마녀사냥을 혐오했다. 아예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 '아직도 마녀사냥이란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쓰레기들이 있으니 제발 좀 막아주시죠?'라고 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흡혈귀 사냥 역시 혐오하여 흡혈귀를 잡는다고 무고한 사람, 병자, 장애인을 죽이는 짓을 저지르고 천국간다는 헛소리 말라는 말을 여러 번 하였다.[13] 당시 평신도들은 볼테르의 이런 주장에 치를 떨었으니, 시대를 앞서도 한참을 앞선 셈. 사실 잔 다르크를 비아냥 댄 이유는 그녀가 처음 프랑스를 구원하겠다고 나서면서 댄 이유가 하느님의 계시였기 때문이다. 이성을 그토록 중시하는 볼테르 입장에서 볼 때는 웬 시골 처녀가 갑자기 나타나더니만 뜬금없이 하느님 운운하며 사기극을 벌이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을 거다.
-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 발견에 '사과가 떨어지는 걸 보고 발견한 거 아닐까?'라는 농담을 했더니만 이게 유명해졌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농담은 아니고,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는, 일단은 뉴턴이 말년에 실제로 한 말이긴 하다. 그리고 볼테르가 영국 유학을 갔을 때 뉴턴의 조카딸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조카딸에게 이 사과 이야기를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볼테르는 자신의 책에 그 사과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실었는데 볼테르가 유명해지면서 뉴턴의 사과 이야기도 덩달아 유명해졌고, 급기야 뉴턴을 대표하는 일화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14]
- 아이작 뉴턴이 국장으로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묻히는 것을 본 후 '영국에서는 일개 교수가 자신의 천직에 뛰어났단 이유만으로 위대한 왕처럼 묻히는 일이 벌어진다'는 식으로 말하였다. 1726년 영국으로 유배를 갔을 때 얘기인데, 이외에도 상대적으로 높았던 영국의 종교적, 그리고 표현의 자유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만큼 프랑스에 비해 영국은 과학을 중시했고, 비교적 계급보다는 실리를 추구했다는 이야기. 산업 혁명이 영국에서 발원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15]
- 간판밖에 안 남아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던 당시의 말기 신성 로마 제국에 대해 남긴 신랄한 평이 매우 유명하다. "스스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 칭하였고 아직도 칭하고 있는 이 나라는 딱히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은 더더욱 아니다." (Ce corps qui s'appelait et qui s'appelle encore le saint empire romain n'était en aucune manière ni saint, ni romain, ni empire.) # 이는 일종의 풍자 목적으로 한 발언이며 단순한 조롱의 의미는 아니었다.
- 프리드리히 대왕이 편지로 "[math(\displaystyle {AR\over {CE}})] [math(\displaystyle {P\over {1}})] a [math(\displaystyle {ci\over {san}})]"라고 보내자 답장으로 "Ja(혹은 Ga)"라고 한 일이 있다. 일종의 수수께끼인데 앞의 문장은 'Ce soir un souper à sans soucis(AR 아래 CE(CE sous AR), P 아래 1(1 sous P), a, ci 아래 san(san sous ci)를 프랑스어로 읽은 것)'과 발음이 일치해서 '오늘밤 상수시 궁에서 만찬을'이라는 뜻이 된다. 답장은 독일어로는 물론 Ok라는 뜻이 되지만 프랑스어로 읽으면 'J'ai grand appétit.(큰 J/G, 작은 a(G grand a petit))'와 발음이 일치해서 '엄청난 식욕이 돕니다.'가 된다. 그림 및 자세한 전후 사정은 프리드리히 대왕 문서를 참고하자.
- 1726년 영국으로 유배를 갔을 때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명작들을 인상깊게 읽었다. 나중엔 "조야하고 야만적인 작품이다. 어떤 술 취한 야만인이 쓴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하긴 했지만. 사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그 구성이 워낙 파격적이라서[16] 당대에는 기괴하다, 야만적이다, 괴물 같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특히 프랑스는 고전주의 희곡의 본산이었으니 볼테르의 눈에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괴상하게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닌 셈. 이런 관점을 가진 것이 꼭 볼테르뿐인 것도 아니고, 괴테 같은 인물도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작중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위대한 괴물'이라고 평가한 바가 있다. 위대한 작품이기는 한데 기괴하기도 하다는 것[17]. 그나마 작품의 주인공인 빌헬름 마이스터는 워낙 기괴한 물건이라고 보지도 않았는데, 친구가 '괴상하기는 하지만 걸작이다'라고 한번 볼 것을 권하는 장면이다.
- 볼테르는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은 뒤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인류를 비판하는 선생님의 새 책을 잘 보았습니다... 불행히도 저는 네발로 기어 다니는 습관을 포기했습니다." '문명이 없던 원시 시대 때 사람들은 오히려 더 자유롭고 행복했다'는 루소의 주장을 비꼬는 말이었다.
- 파스칼에 대해서도 이렇게 비판했다. "파스칼은 언제나 자기 의자 옆에 심연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와 같은 식으로 상상해야 하는 걸까요? (...) 결국은 우울 때문에 파스칼의 이성이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기질이 섬세하고 슬픈 상상력을 지닌 파스칼 같은 사람이, 나쁜 건강 탓에 결국 뇌 기관에 탈이 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18] 26번째 『철학 서한』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감히 나는 이 숭고한 인간혐오자에 맞서 인류의 편에 서고자 합니다."[19]
- 커피를 대단히 좋아하는 커피광이었다. 하루에 4~50잔은 기본으로 마셨다. 파리에서 최초로 개업한 카페인 르 프로코프(Le Procope)의 단골 손님으로 그가 애용하였던 자리의 테이블이 아직도 남아 있다.
5. 오해
- 당연하게도 가톨릭인들은 볼테르를 싫어했고 그를 비방하는 책들을 많이 썼다. 그중 대표적인 것으로 볼테르가 노예무역을 통해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악의적인 거짓말이다. 볼테르가 노예를 포함한 각종 재화를 거래한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투자한 것은 사실이지만, 20세기의 일부 학자들은 볼테르가 노예무역에 직접 투자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고 단언해 버림으로써 더 멀리 나아갔다. 알고 보면 이 이야기는 1870년대에 나온 어느 책에 인용된 볼테르의 편지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그 편지에서 그가 노예무역으로 챙긴 이익에 흡족해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은 전투적인 가톨릭 입장에서 쓰인 볼테르 비방서로, 인용된 편지는 완전히 날조된 것이었다.[20]
- 볼테르가 반유대주의를 표방했다는 주장도 자주 되풀이되는데, 이것은 더 복잡하다. 볼테르는 동시대의 편견을 많이 공유했고, 현대 자유주의자를 불편하게 만들 만한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가 유대인의 역사에 특히 관심이 많았으며, 그 이유가 바로 안일한 기독교인들에게 세계사를 구약에 나오는 유대인의 역사로 환원할수도, 환원해서도 안 된다고 일깨워 주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볼테르는 유대인을 포함해 누구라도 종교적인 박해를 받는 사람들을 변호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또한 그는 정치인들이 권력을 위해 대중의 종교적 맹신을 냉소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이 주제들은 오늘날에도 무척이나 유효하기 때문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 이후에 '반유대주의'라는 단어가 갖게 된 의미를 볼테르에게 적용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그를 반유대주의자로 몰아가는 사람들은 공공연하게든 은밀하게든 종종 앙리 라브루가 쓴 저서에 의존하는데, 그 책은 1942년 독일 점령하에 있던 프랑스에서 출간된 친나치주의 저서일 따름이다.[21]
6. 어록
볼테르는 독창적인 사상가라기보다는, 유명인으로서 기존의 사상을 널리 퍼뜨리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재치넘치고 기억에 남은 어록들이 많다. 단, 그만큼 볼테르의 이름을 빌린 거짓 명언들도 많으니 주의를 요한다. |
나는 신을 경애하고 내 벗을 사랑하고 내 적들을 미워하지 않으며 미신을 경멸하면서 죽는다.[23]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24]
삶은 난파선이지만 우리는 구명보트에서 노래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25]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의 전유물이다. 우리는 모두 약점과 실수로 만들어졌으니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자는 것, 이것이 자연의 첫 번째 법칙이다.[27]
진실을 사랑하되 잘못은 용서하라.[28]
나는 행복해지기로 결심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건강에 좋기 때문이다.[29]
인간은 무언가가 되고자 하는 순간에 자유로워진다.[32]
일은 우리에게서 세 가지 커다란 악, 즉 권태, 부도덕, 궁핍을 막아준다.[33]
내 여행이 어디로 이끌든지, 천국은 내가 있는 곳이다.[34]
지루하게 만드는 비결은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다.[35]
잘하려는 것의 적은 가장 잘하려는 것이다.[36]
한 사람의 마음은 그의 대답보다 그의 질문으로 판단하는 것이 더 쉽다.[37]
정직한 사람들의 불행은 그들이 겁쟁이라는 데에 있다.[38]
인생은 저런 가시덤불로 가득 차 있고, 나는 내 정원을 가꾸는 것 외에 다른 치료법은 모릅니다.[39]
책을 읽읍시다. 그리고 춤을 춥시다. 이 두 가지 즐거움은 세상에 피해를 끼치는 일이 결코 없을 겁니다.[40]
7. 주요 저서
제목 | 발간 연도 |
<colbgcolor=#fff,#1f2023> 오이디푸스 Œdipe | <colbgcolor=#fff,#1f2023> 1718년 |
철학 편지 Lettres philosophiques | 1733년 |
자디그 Zadig ou la Destinée | 1747년 |
루이 14세 시대 Le Siècle de Louis XIV | 1751년 |
미크로메가스 [42] Le Micromégas | 1752년 |
캉디드 [43] Candide, ou l'Optimisme | 1759년 |
관용론 [44] Traité sur la tolérance | 1763년 |
철학사전 [45] Dictionnaire philosophique | 1764년 |
랭제뉘 L'Ingénu | 1767년 |
루이 15세 시대 Précis du siècle de Louis XV | 1768년 |
8. 매체에서
9. 여담
-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의 조국을 반복해서 일컬을 때, 흔히 'France' 대신 '볼테르의 나라 le pays de Voltaire'라고 부른다.[46] 그의 영향력이 프랑스에서 얼마나 큰지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47][48]
- 홍종우가 프랑스 유학시절 그의 사상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사실 볼테르 자신도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 대해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 볼테르는 사마천의 사기에 쓰인 일화를 원대 잡극 작가인 기군상(紀君詳)이 재구성한 '조씨고아(趙氏孤兒)'를 번안하여 '중국의 고아(L'Orphelin de la Chine)'라는 희곡 작품을 쓴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 '고려(Corée)'가 등장한다. 희곡에는 중국이 칭기즈칸의 타타르(몽골)에 의해 점령되자, 중국인 주인공들이 고려의 지원군을 기다려 중국 황자를 고려로 피신시키려 한다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작품에 실제로 고려인 역이 등장하지는 않으며 작품 정황상 칭기즈칸의 군대에 패퇴한 것으로 묘사된다. 원작인 '조씨 고아'에는 고려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아 고려의 등장은 볼테르의 완전한 창작인바, 볼테르가 대체 어디서 고려에 대한 이야기를 주워듣고 작품에 썼는지는 불명.
- 볼테르는 다수의 작품에서 한국을 여러 번 언급한다. 그는 정보가 많지 않다는 점, 한국이 유럽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라는 점을 거리낌 없이 인정한다. 그러나 학문적 입장에서 한국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한 것과는 반대로, 문학가로서는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의 책 『중국 고아』에서는 한국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우리는 볼테르의 작품에서 언급된 한국의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우선, 볼테르는 한국을 머나먼 나라, 아시아의 끝에 위치한 나라로 보았다. 그리고 한국은 중국만큼 오랜 역사를 가진 나라이며 중국의 황자를 왕으로 옹립하는 중국의 속국으로 보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 볼테르는 한국인을 용맹하고 충성심 있는 민족으로 그렸으며 이들에게 위기에 처한 중국을 구할 구원자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그 밖에 볼테르 재단의 블로그 글도 참고하면 좋다.
- 라이프니츠, 몽테스키외 등과 함께 17세기 이래 프랑스에서 유행한 중국의 물결(Chinoiserie, 시누아즈리)을 탄 대표적인 계몽사상가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을 기독교를 믿지 않음에도 윤리적으로 올곧은 사회라고 평가하고,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당시 유럽 사회를 비판하였다.
- 볼테르는 몽테스키외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비판했지만, 몽테스키외가 노예제를 비판하자 이를 지지하며 이렇게 말을 했다. "몽테스키외는 배운 것에서 거의 항상 틀렸다. 왜냐하면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광신도와 노예제의 옹호자와 싸울 때는 거의 항상 옳았다."
- 동시대의 인물은 아니지만 쇼펜하우어는 볼테르를 좋아했다. 그의 책에서는 볼테르를 거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알랭 드 보통도 그의 저술서 《불안》에서 쇼펜하우어가 인용한 볼테르의 명언을 다시 인용하기도 했다. 니체도 볼테르를 좋아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니체는 볼테르의 책을 통해 비로소 쇼펜하우어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된다. 니체의 책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볼테르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여 니체가 볼테르에게 바친 책이다.
- 스파르타쿠스 전쟁을 가리켜 "가장 정의로운 전쟁",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 퐁트누아 전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지휘관이 '신사답게' 서로 쏘라는 우스꽝스러운 일화가 있었다는 근거없는 소문을 퍼뜨린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당시 전쟁 양상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수백년이나 이어졌다.
- 볼테르는 잔 다르크를 다룬 『오를레랑의 처녀』라는 자신의 풍자시에서, 잔 다르크의 광신적인 믿음은 샤를 왕세자와의 사적인 사랑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는 외설적인 비꼼을 퍼부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그 작품이 유독 유명해졌고 사람들에게 경멸어린 비판[49]을 받게 되자, 그 뒤로부터 볼테르는 그 작품을 부끄러워 했고 심지어 자신의 원래 작품이 아니고 번역 과정에서 왜곡된 것이라고 변명을 하기도 했다.
[1] 공정증서의 작성 및 사서증서에 대한 인증 등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2] 슈발리에 드 로앙의 본명은 '기 오귀스트 드 로앙-샤보'(Guy Auguste de Rohan-Chabot)이다.[3] 사실 '아루에'라는 본래의 성(姓)은 그 당시로 치면 평민 느낌이 나는 성(姓)이어서, 귀족 느낌이 나는 필명 '볼테르'로 자신의 성(姓)을 바꾼 것.[4] 프리드리히 대왕이 그를 무척 흠모했던 것도 잘 알려진 사실. 그의 초청으로 볼테르는 프로이센에 3년간 머물렀다. 하지만 둘다 성격이 쎈 편이라 다툼이 자주 일었고 얼마 안 가 그곳을 떠난다. 그럼에도 평생 서신을 교환하면서는 지냈는데, 서신을 읽어보면 과연 이 사람이 왕인가 싶을 정도로 프리드리히의 마음이 느껴진다.[5] 페흐네는 볼테르 사후인 1791년 개칭하여 페흐네-볼테르(Ferney-Voltaire)라는 이름을 가진 인구 1만이 조금 안 되는 규모의 코뮌으로 현존한다.[6] 영문으로는 보통 이 문장이 "I disapprove of what you say, but I will defend to the death your right to say it."(당신이 하는 말에는 찬성하지 않지만, 그것을 말할 당신의 권리는 목숨을 걸고 지킬 것입니다.)로 알려져 있다. 볼테르의 명언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볼테르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 말은 『볼테르의 친구들(The friends of Voltaire)』이라는 볼테르 전기를 쓴 작가 에블린 홀(Evelyn Hall)이 볼테르의 사상을 한마디로 설명한 글이다. 『인간 볼테르』를 쓴 볼테르 전문가 니컬러스 크롱크는 이 말이 비록 볼테르가 말한 문장은 아니지만, 볼테르의 사상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 문장이라고 말한다.[7] 옥스퍼드에서 편찬 중이며 곧 완간 예정인 최초의 볼테르 전집은 약 200권에 이른다.[8]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 후마니타스. 2020. p.114~115[9] 영문은 Crush the infamous, 혹은 Crush the horrible thing.[10] 볼테르는 특히 구약성서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대표하는 세계관은 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고대의 이교 신화들로부터 구조적으로 차용된 것임을 보여 준다. 더욱이 구약성서는 신을 부조리하고 잔인한 존재로 그리며, 혐오스럽고 심지어 부도덕한 견해들을 제시하기까지 한다. 볼테르는 구약의 이 같은 세계관이 근대 과학의 발견들과 양립할 수 없고, 앞뒤가 맞지 않으며 모순되는 허구라고 말한다. 반면에 신약성서에 대해서는 다소 온건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신약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믿지 않을지언정 그것의 윤리적 원칙들에 대해서는 넓은 의미에서 공감한다. 그에게 있어 기독교의 초월성 주장은 순환론이며 무의미하며, 중요한 것은 실질적이고 윤리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 후마니타스. 2020. p.117)[11] 프랑스에서도 군밤을 군것질거리로 잘 먹는다.[12] 계몽주의 시대에 급진적 책은 금서나 분서 처분을 당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어떤 책이 금서/분서 처분당했다는 소문이 나면, 계몽주의 지식인들 네트워크에서 "올ㅋ 그거 기똥찬 책인가 보네"하는 반응이 일면서, 요즘으로 치면 노벨문학상 받은 걸로 여겨지고 오히려 대인기를 끄는 경향이 있었다. 즉 볼테르가 이런 소리를 한 것은 상대한테 열 치여서 아무 소리나 지껄인 게 아니고 "야 고맙다 니 덕에 내 책 히트치겠네ㅋㅋㅋ" 하면서 상대를 고단수로 조롱한 것이다. 이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고, 스트라이샌드 효과라는 용어도 있다.[13] 그렇다고 볼테르가 마녀나 흡혈귀 같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사냥만 비웃은 것은 아니고, 지진 같은 자연재해의 원인을 신의 분노로 돌리는 기독교의 미신적인 태도 전체를 비웃었다.[14] "그는 아마 이 이야기를 뉴턴의 조카딸에게서 들은 듯한데,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것이 중력에 대한 뉴턴의 설명이 지닌 명쾌한 단순성을 표현하기에 완벽한 소재라는 점을 깨달았다. 볼테르는 이 이야기를 1727년 『고찰』에 처음 썼고 『편지』에 다시 삽입했다."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 후마니타스. 2020. p.58)[15] 참고로 볼테르가 세상을 떠나고 13년 후인 1791년 7월 11일에 유해가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루이 15세의 쾌유에 감사하며 바쳐진 교회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위인들의 묘지로 바뀌었고, 볼테르는 여기에 안장될 역사적 위인으로 선택된 것.[16] 당시 희곡의 철칙이던 삼일치의 법칙은 완전히 무시해버렸고, 장과 막 구성도 파격적이었다.[17] 사실 괴테는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팬이었고 셰익스피어 문학의 파격성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18] 1741년 6월 1일, 그라브장드 씨에게 보낸 편지 中.[19] 앙투안 콩파뇽 『파스칼과 함께하는 여름』 김병욱 옮김, 뮤진트리, 2021, p.141[20]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 후마니타스. 2020. p.153[21] 니컬러스 크롱크 『인간 볼테르』 후마니타스. 2020. p.154[22] 죽기 전에 가톨릭 교회에서 파견된 성직자가 이신론을 주장한 볼테르를 악마로 몰아가며 회개를 강요했는데, 볼테르는 이에 대해 "이런 이런... 이보게, 지금은 새로운 적을 만들 때가 아닐세..."라고 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이 일화는 거짓으로 확인된다. 인용문의 출처가 사실인지 확인하는 사이트인 Quote Investigator에 따르면, 이 일화의 주인공은 처음에는 아일랜드 사람이었다.(1856년 스프링필드 신문에서 확인) 이후 스코틀랜드인, 볼테르, 윌슨 미즈너, 마키아벨리가 말한 것으로 와전되었던 것.#[23] 원문은 "Je meurs en adorant Dieu, en aimant mes amis, en ne haïssant pas mes ennemis et en détestant la superstition."[24] 원문은 "Si Dieu n'existait pas, il faudrait l'inventer." 해당 말은 볼테르가 편지에서 한 말이다. 한국에서는 이 문장 뒤에 "하지만 자연은 신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를 붙이기도 하는데, 볼테르가 이 말까지 한 것은 아니다.원문[25] 영문은 "Life Is a Shipwreck, But We Must Not Forget To Sing in the Lifeboats"으로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어 원문은 약간 다르다. "Comptez que le monde est un grand naufrage, et que la devise des hommes est, sauve qui peut." (친구여, 세상은 하나의 거대한 난파선이며 인간의 모토는 "할 수 있으면 스스로를 구하라"입니다.) 이는 캉디드를 영어로 번역한 역사학 교수 피터 게이가 이를 인용할 때 "구명보트"를 자의적으로 넣어서 말하기 시작하면서 변한 것이다. 피터 게이는 이렇게 말했다. "if this life is a shipwreck, we must rescue as many as we can, and not forget to sing in the lifeboats." (이 삶이 난파선이라면 우리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하고 구명보트에서 노래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26] 볼테르가 <자디그, 또는 운명>에서 이상적인 사법이 이루어지는 이상향을 묘사하면서 쓴 표현이다. 볼테르는 그 외에도 개인이 아닌 법이 권위를 가질 것, 언로가 막힘없을 것, 재판관이 재량으로 일부 자비를 베풀 것, 재판관이 법이 미비한 부분을 합리적으로 보충할 것, 법은 시민을 겁줄 뿐만 아니라 지키는 자를 치하하기 위해 있어야 함, 진리는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명료하게 공개되어야 함 등을 주장했다. 원문을 전재하자면 Il fit sentir à tout le monde le pouvoir sacré des lois, et ne fit sentir à personne le poids de sa dignité. Il ne gêna point les voix du divan, et chaque vizir pouvait avoir un avis sans lui déplaire. Quand il jugeait une affaire, ce n’était pas lui qui jugeait, c’était la loi ; mais quand elle était trop sévère, il la tempérait; et quand on manquait de lois, son équité en faisait qu’on aurait prises pour celles de Zoroastre. / C'est de lui que les nations tiennent ce grand principe: Qu'il vaut mieux hasarder de sauver un coupable que de condamner un innocent. Il croyait que les lois étaient faites pour secourir les citoyens autant que pour les intimider. Son principal talent était de démêler la vérité, que tous les hommes cherchent à obscurcir.[27] 『철학사전』 관용편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Qu'est-ce que la tolérance? c'est l'apanage de l'humanité. Nous sommes tous pétris de faiblesses et d'erreurs; pardonnons-nous réciproquement nos sottises, c'est la première loi de la nature."[28] 원문 : Aime la vérité, mais pardonne à l'erreur.[29] 원문은 "J'ai décidé d'être heureux parce que c'est bon pour la santé."[30] "On parle toujours mal quand on n'a rien à dire." 사실 이 말은 볼테르가 당시 세간에 쓸데없이 길기만 한 연극(비극)이 많다는 점을 한탄하면서 한 말로서, 연극을 쓸 능력이 안 되는 작가들이 많은 내용을 욕설로 때운다는 의도로 쓴 것이다. (Cette scène est encore aussi glaçante, aussi inutile, aussi mal écrite que toutes les précédentes. On parle toujours mal quand on n'a rien à dire. Presque toutes nos tragédies sont trop longues; le public voulait pour ses dix sous avoir un spectacle de deux heures; il y avait trop souvent une heure et demie d'ennui. 출처: Commentaires sur Corneille, p. 438[31] 영어 번역으로는 One always speaks badly when one has nothing to say. #)[32] 원문 : L'homme est libre au moment qu'il veut l'être.[33] 캉디드에 나오는 말이다. 원문은 "Le travail éloigne de nous trois grands maux, l’ennui, le vice, et le besoin."[34] 원문에서는 여행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Du paradis ont recherché la place: Le paradis terrestre est où je suis." (낙원의 장소를 찾았다. 지상낙원은 내가 있는 곳이다.) 영문으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행'이라는 말이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영문: "Wherever my travel may lead, Paradise is where I am."[35] 원래는 삶의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내용의 시에서, 삶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은 오히려 지루해질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Si du Dieu qui nous fit l'éternelle puissance / Eût à deux jours au plus borné notre existence, / Il nous aurait fait grâce; il faudrait consumer / Ces deux jours de la vie à lui plaire, à l'aimer. / Le temps est assez long pour quiconque en profite; / Qui travaille et qui pense en étend la limite. / On peut vivre beaucoup sans végéter longtemps; / Et je vais te prouver par mes raisonnements... / Mais malheur à l'auteur qui veut toujours instruire! / Le secret d'ennuyer est celui de tout dire. 출전: Discours en Vers sur l’Homme)[36] "Le mieux est l’ennemi du bien." 원래 이 말은 자기 주변 환경에 만족하지 못하는 여인에 관한 시의 첫 문단에 나온 말로서, 완벽에 집착하지 말고, 지금 가진 것을 소중히 여기자는 의미이다. (Dans ses écrits un sage Italien / Dit que le mieux est l'ennemi du bien; / Non qu'on ne puisse augmenter en prudence, / En bonté d’âme, en talents, en science; / Cherchons le mieux sur ces chapitres-là; / Partout ailleurs évitons la chimère. / Dans son état heureux qui peut se plaire, / Vivre à sa place, et garder ce qu'il a! 출전: La Bégueule)[37] 원문: Il est encore plus facile de juger de l'esprit d'un homme par ses questions que par ses réponses. 영문: It is easier to judge the mind of a man by his questions rather than his answers.# 원래는 레비 공작(Pierre Marc Gaston de Lévis)이 1808년 '도덕과 정치의 다양한 주제에 대한 격언과 사유 (Maximes et Réflexions sur Différents Sujets de Morale et de Politique)에서 쓴 말을 볼테르가 인용한 말이다.[38] 원문은 "Un des plus grands malheurs des honnêtes gens, c'est qu'ils sont des lâches."[39] 원문 : La vie est hérissée de ces épines, et je n'y sais d'autre remède que de cultiver son jardin. 여기서 가시덤불은 인생의 고난을 말하는 것이므로, '정원을 가꾼다'는 말은 자신 앞에 놓여진 고난을 헤쳐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캉디드』에도 나온다. "우리는 정원을 가꾸어야 합니다.(il faut cultiver notre jardin)"[40] 원문은 "Laissez lire, et laissez danser; ces deux amusements ne feront jamais de mal au monde. (Voltaire Dictionnaire philosophique portatif (1764))" 언론의 자유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한 말이다.[41] 볼테르가 한 말로 널리 알려져있으나, 사실이 아니다.#[42] 최초의 SF소설 중 하나로서 문학사에 자리매김하고 있는 책이다. 시리우스와 목성에 사는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하여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논하는 내용이 적혀져 있다.[43] 볼테르의 대표작. '인간에게 불합리하게 보이는 악(惡)마저도 신이 계산한 최선의 세계'라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를 조롱한 소설이다. 여기서 볼테르는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모두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마주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44] 개신교도 칼라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아들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선고를 받자, 볼테르는 구명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결국 칼라스는 볼테르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게 되는데, 이후 이 칼라스 사건을 정리하면서 쓴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볼테르는 여기서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는데, 이는 곧 프랑스 '똘레랑스' 정신의 뿌리가 되었다.[45] 철학사전을 만드는 것은 볼테르에게 있어서 평생의 프로젝트였다. 말년까지 다듬어서 출판한 이 책은 볼테르 사상의 정수를 보여준다. 한국에는 『불온한 철학사전』으로 출판되었다.[46] 이동렬 『빛의 세기, 이성의 문학』 문학과지성사, 2008, p.103[47] 다만 2010년 이후부터는 '볼테르의 나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이 줄어들었다. 구글링해도 찾기 힘들 정도다.[48] 프랑스는 이러한 '~(사람)의 ~'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비슷하게, 프랑스인은 모국어를 다르게 표현할 때 '몰리에르의 언어'라고 하기도 한다.[49] 시에서 성적 의도를 느낄 수 있고 변태성욕을 추측케 했기 때문에 비판받은 것이었다. 볼테르는 30년 뒤, 정식으로 출판하면서 논란이 된 부분을 삭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