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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23:27:37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파일:Portrait_of_Honoré-Gabriel_Riqueti_-_Fiesinger_1798.jpg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 미라보 백작
Honoré Gabriel Riqueti, comte[1] de Mirabeau
1749년 3월 9일 ~ 1791년 4월 3일 (향년 42세)

1. 개요2. 초기 생애3. 프랑스 혁명 이후4. 기타

1. 개요

프랑스의 정치가. 프랑스 혁명 초기의 중심 인물 중 하나였다.

혁명 초기에 구성되었던 국민 의회의 의장을 맡았다.

2. 초기 생애

1749년 3월 9일에 프랑스의 하급 귀족이자 경제학자인 미라보 후작 빅토르 리케티[2]의 아들로 태어났다. 3살 때 천연두를 앓아 얼굴에 흉터가 남았으며 몸집은 크고 땅딸막했다고 한다. 이후 아버지의 손에 의해 18살 때 군사학교로 보내져 조제프루이 라그랑주 등에게 지도를 받고 길버트 엘리엇[3] 등과 같이 수학한다.

그는 당시의 귀족들 중에서는 드물게 자유주의적 견해를 지니고 있었으며, 비상한 웅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고 방탕하고 낭비가 심한 성격 덕에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심지어는 아버지의 손에 의해 귀족 사회에서 추방당하기도 했다.[4] 이후 그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각종 신문에 글을 기고하였고, 옆 나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의 궁정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문인 길버트 엘리엇, 벤자민 프랭클린[5], 등의 인사들과 사상적인 교류를 나누었다. 이후 1788년에는 자주 드나들던 프로이센을 바탕으로 한 '프리드리히 대왕 하의 프로이센 군주국에 대해'라는 책을 내놓으면서 '더욱 완전한 자유'가 국가의 번영에 도움이 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 삼부회의 3신분의 대표 자리를 획득한다.[6] 이후 1789년에는 '프로방스 신문'을 발간하여 본인의 사상을 기고하기 시작한다.

3. 프랑스 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진행되면서 3신분의 대표에 있던 미라보는 혁명의 중심 인물로 떠오르게 된다. 그는 국민 의회의 수장이 되었으며,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의 작성과 가결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영국식 혁명을 지향하였으며, 프랑스 혁명이 이에 기반하여 온건하게 진행되기를 원하였다. 한편으로는 그렇기에 폭동에 대해서는 강경한 진압을 하였다.

하지만 1790년이 되면서 프랑스의 상황은 안 좋아지기 시작한다. 주위의 여러 나라들이 왕을 권좌에서 끌어낸 프랑스의 상황을 시시각각 지켜보고 있었고, 프랑스 내에서도 자코뱅당을 비롯한 과격 세력들이 슬슬 정치력을 갖추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라보는 자코뱅당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온건파에 속했으며, 정작 이후의 과격파들은 그를 당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국민위병의 사령관으로 군사력을 갖고 있던 라파예트와 연대하여 힘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지만, 최대한 의회의 범위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 루이 16세 측에서도 미라보에게 손을 쓰기 시작한다. 부녀자들의 베르사유 행진이 벌어지자 왕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구를 통해 미라보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미라보는 왕당파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그 대신 왕과 의회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수행해냈다. 미라보는 루이 16세가 베르사유를 떠나지 못하도록 보호하였는데 이는 파리에서 왕이 분쟁에 휘말림을 막는 동시에 왕이 혁명을 피해 피신하는 것을 막는 의도도 있었다. 이는 미라보의 식견을 알 수있는 부분이자 절대 괜한 우려가 아닌 걸 알 수 있는 부분인데 미라보 백작이 죽고 몇달도 안되어 여러가지 사건이 터져 말그대로 대환장 파티가 발생하였고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루이 16세가 선택한 게 바렌 사건이다. 한편으로 그는 의회에서 주장하는 봉건제 폐지를 지지했으나 왕정의 폐지에는 반대하였다. 그의 뛰어난 언변을 바탕으로 미라보는 이 역할을 의장을 맡은 동안 잘 수행해냈다. 하지만 그는 왕을 혁명의 편으로 돌아서도록 설득하기 위한 일종의 '당근'으로 성직자들이 교회가 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성직자의 특권을 폐지하는 법안을 제출하게 되고, 이는 성직자들이 국민 의회에 등을 돌리는 결과가 되어 국민 의회를 크게 분열시키고 만다. 여기서 더 나아가 미라보는 군사를 동원하여 이를 강제로 수행하게 함으로써 성직자들을 지지하던 지방 농민들이 반혁명운동에 가담하는 결과까지 낳고 만다.[7]

이러한 혼란 속에서 그 동안의 방탕한 생활이 독이 되어 그는 1791년 4월 2일 밤에 파티를 벌이고 다음 날에 42세의 나이로 급사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부재는 왕과 의회 사이의 대화 창구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했으며, 그 결과 프랑스 혁명은 본격적으로 과격화되기 시작한다.

사후 팡테옹에 안장되었으나, 라이벌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 의해 그와 왕실 사이의 연결 관계가 발각되어[8] 1793년 11월에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서 철거되고 만다. 그 후 유해의 소재는 현재까지도 불명이다. 참고로 역대 팡테옹 매장자중 장폴 마라와 더불어 유해가 강제로 철거된 몇 안되는 인물이다.

4. 기타



[1] 프랑스어로 백작을 뜻한다.[2] 대표적인 중농학파 경제학자 중 하나로 경제학의 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학파'를 이루었던 사람 중 하나.[3] 당대 영국의 거물 정치가로, 의회 의장을 맡았다.[4] 심지어는 사드 후작과도 친했다고 한다![5] 미국 독립 전쟁이 한창이던 시점이며, 당시 그는 프랑스에 외교관으로 머물고 있었다.[6] 그의 태생은 귀족이었으나 앞서 언급된 여러 이유로 그는 귀족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고, 본인도 귀족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7] 사실 방법이 과격했다는걸 제외하면 이 판단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였다. 미라보 사후 루이 16세가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선택한게 바로 바렌 사건 이였고 만약 미라보가 계속 살아있거나 미라보가 아니더라도 계속 자신에게 지지를 표하고 자신을 보호해주며 중재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줄 사람이 있었다면 바렌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왕도 국민 의회를 지지했을 가능성도 크다.[8] 루이 16세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한다. 이때 오고간 편지가 튈르리 궁에 숨겨져 있다가 밝혀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