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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 1961년 3월 1일 | ||
국가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
본부 | 미국 워싱턴 D.C. | ||
단장 | 캐롤 스판(Carol Spahn) | ||
링크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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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은 개발도상국에게 국제적인 경제사회적 지원을 하기 위해 설립된 미국의 독립 행정기관으로, 자원자에게 필요한 기술이나 지식을 전문적으로 교육하고 필요한 곳으로 파견하는 업무를 맡는다. 현재 2020년 기준 미국 주정부로부터 연 41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받으며,[1] 우크라이나를 포함하여 아프리카, 중남미, 동남아시아 등 40개국에 농업ㆍ보건ㆍ교육 등의 지원을 하고 있다.#2. 배경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은 식민지 내의 탄압과 이에 대한 저항을 새로운 '전쟁'이라고 보았고 이런 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제1세계를 전쟁 국가로 규정지었다.[2] 그들은 넓은 의미의 반전 및 반핵을 주창하는 동시에 세계 공산주의 정책에 따라 저개발국가에게전문 인력을 파견하여 탈식민지 및 국가 건설을 원조하여 '전세계적 반제국주의 투쟁'을 선도하고 있었다.반면 미국은 반전ㆍ반핵 평화론 의제에 대항하여 다양한 국가에 군사적 지원과 핵우산을 펼쳐줌으로서 평화를 지켜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50년대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유엔총회에서 발표한 '평화를 위한 원자력(Atoms for Peace)'은 이런 미국의 태로를 직접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이런 정치ㆍ군사적 협력에만 초점을 맞추는 대외 정책은 공산 블록이나 저개발국가에게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고, 저개발국에서 현지인들의 찬동을 얻으며 유능하고 숙련된 외교활동을 펼친 소련과 대조되는 미국인 외교관들의 오만과 무능함을 조명해준 소설 <The Ugly American> 등이 유명세를 얻으며[3] 민간 차원의 교류와 미국의 소프트파워 전략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1960년 대선에서 존 F. 케네디는 이를 수용하여 인도주의적 원조 프로그램을 제안하였고 당선 이후 1961년 3월 1일 미 의회에 행정명령 10924호를 발령하여 라틴 아메리카의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 및 새로운 아프리카(New Africa)와 함께 평화봉사단을 창립하였다.
3. 활동
3.1. 대한민국
제1차 파한협상(1961~1962)[4]은 잠정보류되었으나, 제2차 파한협상(1965~1967)[5]은 성공적으로 채결되어 1967년부터 1981년까지 추진되었다.한국은 초창기 평화봉사단의 파한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두 가지 비전을 내놓는다. 먼저 한국의 근대화전략과 경제개발계획에서 평화봉사단의 지원이 직접적인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두 번째는 한국 청년이 미국 청년에게서 시민의식을 배워 사회개혁을 하는데도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 국제협조제(USOM)은 회의적인 입장을 내놓는다. 한국에 우선적으로 필요한 전문가 대신 실용경험이 없는 대학생이나 졸업생만이 다수 지원하여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으며, 이미 기술자ㆍ선교사ㆍ미군이 상당한 규모로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의 개발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제1차 파한협상은 결렬되었다.
1964년 4월 베트남 전쟁의 수렁에 빠진 미국이 '더 많은 깃발 캠페인(More Flags Campaign)'을 시작으로 요청한 동맹국의 베트남 참전을 대한민국이 적극적으로 응하면서 한미관계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한국은 정치ㆍ경제적으로 안정화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에 기존의 회의론은 많이 사그라들었고 1965년 5월 박정희 방미 때 한미 회담의 안건으로 선정되면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된다. 제2차 파한협상은 한미관계의 상징으로서 단기간에 진행되었으며, 파월의 대가로서 한국은 "1.5억 달러의 차관과 민간 차원의 지원"을 미국으로부터 약속받는다.[6]
1967년 9월 16일 첫번째 평화봉사단 그룹 100여명이 한국에 파견되었으며, 총 1700여명이 봉사단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주로 영어 교육[7], 보건, 농촌 지역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으며, 이에 대한 보답으로 한국국제교류재단은 매년 평화봉사단원을 초청하여 교류를 해왔다. 현재는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연기되고 있지만 대신 KF방역키트를 보내는 등 여전히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출처]
[1] "Agency Financial Report – FY 2020". Peace Corps. Retrieved July 30, 2020.[2] 정용욱, 2014 「6・25전쟁~1950년대 후반 북한의 평화운동」 역사와 현실[3] 오드 아르네 베스타 지음, 옥창준 옮김, 2020 앞의 책, 26・55~62쪽[4] 「1962년 3월 2일에 있었던 4자회담 경과보고」 한・미 간의 평화봉사단에 관한 협정, 1966, 1962년 3월 3일[5] 「평화봉사단협정」 동아일보 1966년 9월 15일 ; 문교부, 1981 美平和奉事團活用白書, 8쪽[6] RG 59, Entry A1 5419, Box 8, “Memorandum from Brown” 1966.3.4., pp. 51~53 ; RG 59, Lot File 73D360, Box 4, “Report on Agreed Measures No. 2 – 18, Brown Memorandum” pp.45~53[7]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가 충남 예산에서 영어 원어민 교사로 활동했었다. 그 덕에 주한미국대사 중 최초로 한국어를 원어민 급으로 구사가 가능하다. 외교관 은퇴 후에도 한국 외교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출처] 윤성민,"주한 미 평화봉사단(PeaceCorps Korea) 협상과정의 성격과 1960년대 초중반 한미관계", 역사와 현실, 2021.6, pp. 231~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