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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cccc,#323232><colcolor=#20272c,#d3dade> 모기업 관련 정보 | 롯데홀딩스 · 롯데그룹 산하 스포츠단 | |
일본시리즈 우승 ★★★★ | 1950 · 1974 · 2005 · 2010 | |
리그 우승 (5회) | 1950 · 1960 · 1970 · 1974 · 2005 | |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4회) | 1974후기 · 1977후기 · 1980전기 · 1981전기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7 · 2010 · 2013 · 2015 · 2016 · 2020 · 2021 · 2023 · 2024 | |
시즌별 요약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현역 선수 경력 | 이시카와 아유무/선수 경력 · 사사키 로키/선수 경력 · 사와무라 히로카즈/선수 경력 · 마스다 나오야/선수경력 오기노 타카시/선수 경력 | |
핵심 인물 | 구단주 신동빈 · 구단주 대행 다마즈카 겐이치 · 감독 요시이 마사토 · 2군 감독 사부로 선수회장 나카무라 쇼고 · 주장 나카무라 쇼고 | |
경기장 | 1군 ZOZO 마린 스타디움 · 2군 롯데 우라와 구장 | |
홈 중계 채널 | ||
구단 상세 정보 |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집시 롯데 · 10.19 · 칠석의 비극 · 도시락의 저주 | |
틀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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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치바 롯데 마린즈의 역대 선수들과 기록들에 대해 서술한 문서.2. 출신 선수들
2.1. 투수
- 아라마키 아츠시(1950~1961)
퍼시픽리그 최초의 신인왕이자, 50년대 마이니치의 에이스. 사회인야구 시절부터 공이 매우 빠른 것으로 유명해서 일본제 파이어볼러(和製火の玉投手)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저기서 원조 파이어볼러는 밥 펠러. 1950년 마이니치에서 데뷔하자마자 274.2이닝 26승 8패 방어율 2.06을 기록하며 신인왕, 다승왕, 방어율왕을 획득하고 마이니치의 1950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 후 2년차와 3년차에는 1년차의 혹사 때문에 제 기량을 펴지 못하다, 커브를 익히며 4년차때부터 부활, 7년 연속 15승 이상의 기록을 세우는 등 마이니치의 에이스로 활약한다. - 레오 카일리 (1953)
롯데와 그 전신 팀들을 통틀어 최초의 투수용병이었으며, 일본 최초의 메이저리그 출신 용병 선수였다. 1951년에 메이저리그 데뷔를 했으나, 당시 6.25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군대에 징집되어 주일미군으로 1953년까지 복무하게 되었다. 복무 중이던 1953년 8월, 일본 구단의 스카웃 제안을 받고, 경기 당일에만 합류해서 휴일이나 주말에만 경기에 출전하는 조건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뛰게 되었다. 그러나 6.25 전쟁이 휴전하게 되면서 연말에 전역할 예정이었던 것이 9월 전역으로 당겨졌고, 그로 인해 8월 1개월만 뛰고 9월 초 팀을 퇴단했다. 당시 성적은 6경기(5선발) 45이닝 6승 무패 ERA 1.80으로 굉장히 좋았다. 전역 후 메이저리그에 복귀하여 6년간 약 190경기에 등판하였다. 이후 암으로 인해 54세라는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여담으로 타격력도 뛰어났던 게, 당시 지명타자가 없어서 타석에도 들어서야 했는데 19타수 10안타를 쳤다고 한다. 물론 1950년대 NPB와 MLB의 격차는 마치 1980년대의 KBO와 MLB의 격차 같은 느낌이라 상위 리그에서 1군을 밟기도 어려운 선수들이 하위 리그에서 주전을 먹는 그런 느낌이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거기다가 이 사람은 제대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나름대로 버틸 실력을 갖춘 사람이었으니 일본 리그는 그저 사회인야구 느낌이었을 수밖에. - 코야마 마사아키 (1964 - 1972)
일본프로야구 통산 다승 3위[1]인 320승을 기록한 대투수. 정교한 제구력으로 '정밀기계'로 불리며 무라야마 미노루와 함께 한신 타이거스의 에이스 역할을 했으나, 결국 무라야마에게 밀려 오리온즈의 강타자 야마우치 카즈히로와의 맞트레이드로 오리온즈로 이적한다. 오리온즈 이적 후에도 1964년에 30승을 올리는 등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했다. - 나리타 후미오 (1965 - 1979)
롯데 재적 14년동안 통산 169승을 올린 70년대의 에이스.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공헌자였다. 1977년에 어깨 부상을 입고 성적이 급진하락 했고 79 시즌 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 3년 동안 중간계투로 등판했다.(마지막 시즌인 1973년은 2경기 2.1이닝) 슬라이더가 주 특기였던 투수로 미일 야구대회에 참가했던 스티브 칼튼이 그의 슬라이더를 보고 슬라이더를 연마했단 일화가 있다. 2011년에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64세. - 이원국 (1966 - 1967)
1군 등판은 1경기 밖에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이너리그로 떠나게 된다. - 무라타 쵸지 (1968 - 1990)
도끼투구법(マサカリ投法)으로 유명한 '일요일의 남자'로 오리온스 시절을 대표하던 에이스. - 카네다 토메히로 (1974 - 1978)
한국명 김말홍. 카네다 마사이치의 동생. 1974년 다승왕-리그 MVP를 차지하면서 리그 우승,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하였다. - 쿠라모치 아키라 (1972 -1976, 1979 - 1982)
前 AKB48 멤버 쿠라모치 아스카의 아버지 - 키쿠무라 토쿠요 (1975 - 1978)
재일교포로 한국명은 박덕용.[2] 재일교포 신분으로 당당하게 1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원래부터 몸이 약하여 프로 수준의 체력을 만들 수가 없어서 데뷔 초 1군 시범경기에서는 두들겨맞기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강한울처럼 고기를 싫어하고(...) 물을 마시는 것만 좋아할 정도로 입맛도 몸을 쓰는 일과는 상극인 바람에 결국 체력을 만들기는커녕 건강만 나빠져서 4년만에 은퇴를 선언하고 1군 기록 없이 퇴단했다. 이후 현역 복귀를 선언하여 세이부와 킨테츠에서 뛰었으나 1군 데뷔는 실패했고, 프로 1년차 때 한국의 실업구단이자 자매팀인 롯데 자이언트에 임대갔던 경력 덕에 다시 한 번 프로로 전환한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하고 모국에서 프로야구 1군 데뷔를 하게 되나, 거기서도 6경기(4선발) 19이닝 1승 2패 ERA 5.21로 인상적인 기록은 남기지 못하고 은퇴했다. - 니시나 토키나리 (1977~1988)
오가와 히로시 (1985 - 1992)
다른 구단의 흑역사가 된 선수들과는 비교도 못하는 진정한 흑역사이자 일본판 이호성. 1988년 최다탈삼진을 한 차례 기록한 것 외엔 평범 이하의 성적만 거두고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구단 직원으로 10년 가까이 일했으나, 구단 내 파벌싸움에서 밀린데다가 개인적으로 진 빚이 너무 많아서[3] 윗사람들에게 찍혀서 해고당했다. 이후 대만프로야구 코치 제의를 받았으나 월급이 적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일반 회사에 취직했는데, 전처[4]에게 줘야 했던 위자료 등 거액의 빚에 허덕이다가 2004년, 당장 갚아야 할 돈 3만엔을 빌리려고 찾아간 회사 사장의 가정부를 죽이고 175만엔을 빼앗는 강도살인을 저지르고 말았고[5], 결국 체포되어 2006년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치바 형무소에 수감되어 여생을 감옥에서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6] 여담으로 현역 시절 등번호가 26번이었는데, 오가와가 살인사건을 저지른 다음해인 2005년에 등번호 26번이 마린즈의 준영구결번이 되면서 "사건을 잊어보려고 준영구결번 지정을 한 게 아니냐" 는 설이 일본 내에서 퍼지기도 했다. 여담으로 이 사람 선수 시절에는 연봉이 2000만엔이 넘어갔었다. 그러나 선수시절 돈관리를 못해서 버는 대로 다 써버리는 스타일이었고, 은퇴 후에도 월급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흥비와 휴대폰 성인사이트 등으로 엄청난 돈을 썼다고 한다. 말년에 진 빚이 많았다곤 하지만 몇천만 엔 수준이라 선수시절 번 돈을 잘 모았으면 그럭저럭 살아갈만 했을 텐데 자업자득인 셈.[7] 투수코치의 말에 의하면 성격도 끈기가 적고 멘탈이 약해서 한번 무너지면 와르르 무너지는 성격이었다고 하니 큰 인물이 되기엔 그릇이 작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노카와 카즈미(1985~1999)
좌완투수로 현역 시절에는 주로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그가 선수로 활동하던 시절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과 관련된 일화가 2가지 있는데, 첫번째는 1990년 6월 23일 세이부 전에서 소노카와가 세트 포지션 자세를 취하다 보크를 범했는데, 가네다 감독이 보크 여부를 두고 심판인 다카기 도시아키와 언쟁을 벌이다 끝내 다카기 주심을 폭행하고 퇴장하는 사건이 있었다. 두번째로는 1991년 5월 19일 킨테츠 전에서 킨테츠 버팔로즈의 용병타자 짐 트레버에게 사구를 날려 격분한 짐 트레버에게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으니, 벤치클리어링 이후 분을 삭히지 못한 트레버가 롯데 덕아웃으로 돌진하다 롯데의 감독인 가네다에게 머리를 발로 까이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한편 은퇴 이후 2012-2014년 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 인스트럭터 직을 맡기도 하였다. - 우시지마 카즈히코 (1987 - 1993)
- 이라부 히데키 (1988 - 1996)
마크 크룬 이전 일본프로야구 최고속 공인기록(159km/h) 보유자. 후에 메이저리그에 진출했다. - 코미야마 사토루 (1990 - 1999)
일명 고글맨. 빼어난 제구력과 다양한 변화구로 유명했다. 은퇴 후 해설자로 활동하다가 2019년부터 모교 와세다대학교의 감독이 되었다. - 카와모토 야스유키 (1992 - 1999)
좌완투수로 아래의 우완 나리모토와 더블 스토퍼로 활약했다. - 나리모토 도시히데 (1993 - 2000)
고바야시 마사히데가 마무리를 맡기 전까지 활약한 마무리 투수. - 오노 신고 (1994 - 2013)
무라타 쵸지의 뒤를 이은 제2대 '일요일의 남자'로 별명이 '선데이 신고'였다. - 에릭 힐만 (1995 - 1996)
바비 발렌타인 감독을 따라 롯데로 온 메츠 출신의 장신(208cm) 왼손투수로 록 반 밀 이전까지 일본프로야구 최장신 선수였다. 높은 타점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제구력과 변화구를 이용한 완급조절에 능했던 기교파 스타일의 이색적인 투수였으며, 롯데에서의 2시즌 연속 2점대 ERA-두자릿 수 승리를 거두며 1996년 퍼시픽리그 투수 베스트나인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롯데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거액에 이적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어깨 부상에 시달리며 2년간 2경기밖에 등판하지 못한 먹튀가 되었다. - 쿠로키 토모히로 (1995 - 2007)
별명 조니 쿠로키. 우완투수로 팬들 사이에서 '영혼의 에이스'로 불리며 코미야마와 함께 90년대 롯데의 암흑기를 이끌었다. - 야부타 야스히코 (1996 - 2007, 2010 - 2013)
- 마이클 피어리 (1997)
- 코바야시 히로유키 (1997 - 2010)
아래의 고바마사와는 달리 주로 선발 투수로 활동했고, 2010년부터 마무리로 전향(신 YFK-야부타,후루야) - 코바야시 료칸 (1998 - 2002)
고양 원더스에서도 뛴 적 있어서 나름 알려진 투수. 그러나 롯데에서는 1군 기록 없이 방출당해 독립 리그를 전전하다가 대만프로야구와 멕시칸리그에서 뛴 후 고양 원더스로 와서 은퇴했다. - 후지타 소이치 (1998 - 2007)
한때 일본프로야구 한 시즌 최다등판 기록을 가지고 있었던 좌완 셋업맨. 야부타-후지타-고바야시 마사히데는 'YFK'라 불리며 롯데의 2005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반면 원조인 JFK(한신)은... - 코바야시 마사히데 (1999 - 2007)
일본을 대표하는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임과 동시에, 팬들의 똥줄을 타게 만드는 장작쌓기와 방화로도 유명했다.??? : 바카모노 고바야시!그래서 붙은 별명이 '코바마사 극장'. 이렇게만 소개하면 불쇼만 저지른 형편없는 투수로만 생각되겠지만 롯데에 재적한 9년동안 8년연속 20세이브 포함 통산 227세이브를 올린 훌륭한 마무리 투수였다. - 시미즈 나오유키 (2000 - 2009)
2005년 시즌의 에이스였던 우완투수 - 브라이언 시코르스키 (2001 - 2003, 2008 - 2009)
일본에서만 11시즌, 4개의 팀(롯데, 요미우리, 야쿠르트, 세이부)에서 뛴 저니맨 우완 구원투수. 준비동작에서 어깨를 풀며 오른팔을 크게 회전하는 루틴이 헬리콥터를 연상시켰고, 마침 그의 성과 같은 이름의 유명 헬리콥터 메이커인 시코르스키도 있는지라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기도 했다. - 네이선 민치 (2001 - 2004)
롯데와 그 전신 팀 통틀어 유일하게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던 외국인 선수. 이미 히로시마에서 3년간 성과를 내고 연봉 문제로 롯데로 이적하였다. 롯데에서도 최우수 평균자책점도 기록하는 등 에이스 노릇을 해 주었으나 4년차에 성적이 매우 나빠지고 부상까지 생기는 바람에 그 해를 끝으로 롯데를 퇴단하면서 은퇴했다. 사실 롯데 퇴단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오퍼를 했으나 협상이 결렬되면서 은퇴를 택했다. 이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스카우터를 역임. 특이하게도 4일 휴식을 선호했고, 5일이나 6일 휴식을 하면 오히려 성적이 나빠지는 유형이었다. 카프에서도 롯데에서도 4일 휴식 등판 때문에 나중에 트러블이 생겼을 정도였다고 하니.[8] - 와타나베 슌스케 (2001 - 2013)
- 나루세 요시히사 (2004 - 2014)
공은 느리지만, 릴리스 위치를 늦게까지 숨기는 특유의 '마네키네코' 투구법의 디셉션을 무기로 활약했던 좌완 투수. 2014 시즌 후 팀과의 불화로 FA를 선언하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했으나, 이후 먹튀가 되었다... 우쓰요우 (2007 - 2008)
대만프로야구에서 17승을 거두고 아시아 시리즈에서도 호투했던 좌완 선발투수. 그 덕분에 2년 1억엔의 계약을 맺고 롯데에 왔지만 롯데에서는 부상 및 외국인쿼터에서 밀린 것 때문에 2경기 2선발 0승 0패 ERA 2.25에 그쳤다. 결국 사이버투수가 되어 방출당하고 대만으로 돌아갔는데, 돌아간지 1년만에 승부조작을 하는 바람에 영구제명되면서 흑역사화.- 핫토리 야스타카 (2008 -2015)
- 이토 요시히로 (2008 - 2016)
- 키무라 유타 (2009 - 2016)
정말로 특이하게 롯데가 아니면 프로에 가지 않겠다(!)[9]를 선언했던 선수. 고교 시절에는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로부터 270만엔의 영양비를 받았고[10],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부터 1라운드 지명을 해주겠다는 약속도 받았으나 전부 거절하고 사회인야구로 진출하였다. 사회인야구 시절에도 요코하마의 3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11] 롯데에 가고 싶다면서 입단을 거부.[12] 결국 2년 후인 2008년 드래프트에서 롯데의 1라운드 지명을 받으면서 원하던 롯데에 입단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로에서 8년동안 뛰면서 1군 성적이라곤 47경기에 등판하여 1승 6패 1홀드 ERA 5.24에 그쳤고 결국 1라운드 잔혹사로만 남아버린 선수.[13] 2016년 이후 방출당해서 은퇴했고 야구계를 떠나 치바의 부동산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 브라이언 코리 (2010)
- 세스 그레이싱어 (2012 - 2014)
- 후지오카 타카히로 (2012 - 2018)
- 와쿠이 히데아키 (2013 - 2019)
현금 트레이드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 - 차승 백 (2015)
- 이대은 (2015 - 2016)
- 다나카 에이스케 (2015 - 2017)
교토대 출신 최초의 프로야구 선수였으나 3년 동안 1군 2경기에 출장밖에 못 하고 방출당했다. - 사카이 토모히토 (2015 - 2017)
대졸사회인 즉전감으로 롯데에 2라운드로 입단해서 6선발과 필승조를 오갔다. 2019년에는 셋업으로 정착해서 20홀드를 거두었지만 짧은 이닝을 완벽히 막기보다는 적당히 맞으면서 길게 던지는 선발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ERA도 4점대였고 블론도 꽤 많았다.[14] 결국 보상선수 보호명단에서 빠져서 미마 마나부의 보상선수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 - 미야자키 아츠시 (2016 - 2018)
2.2. 포수
- 오오츠카 야스오 (1966 - 1972)
롯데의 역사적인 사상 첫 드래프트 1라운더. 명문 와세다대학 출신 포수였지만 타격이 프로에서 통하지 않아 프로에서는 백업포수로 7년을 뛰고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처가에서 운영하는 회사에 취직하며 야구계를 떠났고 2008년 위암으로 향년 65세로 사망했다. - 다이고 타케오 (1957 - 1975[15])
마이니치 - 다이마이 - 도쿄 - 롯데 오리온즈 시기를 모두 경험한 선수였으며, 데뷔해인 1957년과 도쿄 - 롯데 시대에 정포수로 뛰면서 전시합출장 3시즌, 통산 1132안타 두 자릿 수 홈런도 2차례나 기록한 포수로써 나름 괜찮은 공격력을 선보였다. 은퇴 후엔 여러 차례에 걸쳐 롯데의 코치직을 역임. 2019년 12월 11일에 급성 골수성 백혈병으로 인해 81세의 나이로 별세. - 무라카미 키미야스 (1972 - 1977)
니시테츠 라이온즈에서 1971년 시즌오프 트레이드로 이적해왔으며, 1973년 카네다 마사이치 감독에 의해 정포수로 발탁되어 은퇴하는 1977년까지 정포수로 뛰면서 1974년 롯데 시대 최초의 우승을 이끌었다. - 노무라 카츠야 (1978)
1970~1977년 난카이 호크스의 4번타자 + 주전포수 + 감독 등 많은 역할을 수행하다가 해임당하고 롯데로 넘어와서 1년간 뛰었다. 당시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과 다소 껄끄러운 관계였으며 1978 시즌을 마치고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하여 2년을 더 뛴뒤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 하카마다 히데토시 (1978 - 1990)
80년대 롯데의 정포수. 무라타 쵸지와 함께 배터리를 이뤄 활약하였으며 은퇴 시합도 무라타 쵸지와 함께 치렀다. 무라타와 함께 배터리를 이룰 때 사인 교환 없이 무라타의 공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은퇴 후 롯데에서 장기간 코치를 역임했다. - 마이크 디아즈 (1989~1992)
주로 지명타자로 출장하긴 했지만 때때로 외국인 선수로는 드문 포지션인 포수를 봤었다. 2년연속 30홈런 100타점을 터뜨린 강타자. 실베스타 스탤론을 닮은 풍모에 근육질 떡대로 별명은 람보.그런데 응원가는 요술공주 샐리 였단 반전이 있다. 가사는 '조금 차밍한 여자아이'에서 '조금 난폭한 덩치 큰 사나이'가 되었지만... - 죠즈메 마사히코 (1991 - 1996)
치바 롯데 초창기의 정포수. 강견을 자랑하던 포수였지만, 주전포수이면서 1할대 타율이란 개막장급 타격(...)을 선보이는 바람에 결국 얼마 안가 정포수 자리에서 쫓겨나고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이후 2000년 은퇴. - 하시모토 타스쿠 (1995 - 2009)
사토자키와 번갈아가며 주전포수를 맡던 중장거리형 타자. 실력은 쏠쏠했는데 사토자키에게 밀려서 백업, 좌타 플래툰으로 주로 쓰였다. 결국 주전 자리가 보장되는 팀으로 가고 싶다면서 FA를 선언했고 포수진이 박살난 요코하마에서 데려갔다. 처음에는 꾸준히 주전으로 나왔으나 부상과 노쇠화로 인해 오히려 롯데 시절보다 더 못하면서 먹튀가 되어 은퇴. - 시미즈 마사우미 (1997 - 2004)
한때는 주전 안방마님이던 수비형 포수지만 발렌타인 감독이 공격형 포수인 사토자키와 하시모토를 중용하면서부터 입지가 급격히 좁아졌다. 결국 다른 팀으로 갔는데 그 후에는 거의 나오지 못하면서 쓸쓸히 은퇴. 그 후 코치로 롯데에 돌아왔다. - 사토자키 토모야 (1999 - 2014)
2000년대 두번의 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끈 프랜차이즈 포수. 리그 최고의 수비력과[16] 2할 중후반 타율에 15개 안팎의 홈런을 꾸준히 쳐줬던 공격력을 지닌 다재다능한 포수였다. 현재는 해설가로 지내는 중. - 카나자와 타케시 (2003 - 2018)
- 타나카 마사히코 (2004 - 2012)
- 마토바 나오키 (2010 - 2012)
- 사이토 토시오 (2010)
- 카와모토 료헤이 (2013 - 2015)
- 타니가와 유이토 (2021 - 2023)
1군 기록도 없는 선수지만 방출 이후 2군에만 참가하는 쿠후 하야테에 입단했다가 거기서 상습 무면허 운전이 발각되며 방출되는 바람에 유명해졌다(...). 상습 무면허 운전이라 했으니 롯데 시절에도 무면허 운전을 하고 다녔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또 한 명의 흑역사 선수가 되어버렸다. 1군 기록은 커녕 지배 등록도 된 적 없는 선수이나 사고를 치며 이름을 알려버린 케이스.
2.3. 내야수
- 니시모토 유키오 (1950 - 1955, 감독재적 1954 - 1960)
일본을 대표하는 콩라인 감독. 자세한 건 항목 참조. - 에노모토 키하치 (1955 - 1971)
오랜 선수생활과 기행으로 일본프로야구의 '선인'으로 불렸다. 카와카미 테츠하루에 버금가는 당대 최고의 선구안을 지녔다고 평가된다. - 야마자키 히로유키 (1965 - 1978)
60~70년대 롯데의 2루를 책임진 공수겸장의 내야수로, 1978년 이후 세이부 라이온즈로 이적해 세이부의 황금기 개막에 기여했으며, 통산 270홈런은 역대 2루수 중 최다 홈런 기록이다. - 아리토 미치요[17] (1969 - 1986)
롯데 오리온즈 시대의 간판 3루수로 통산 2057안타, 348홈런 1061타점, 282도루를 기록한 호타준족의 강타자로써, 1969년 퍼시픽리그 신인왕, 1977년 퍼시픽리그 수위타자, 베스트나인 10회, 다이아몬드 글러브 4회를 수상하였으며, 현역 시절 미스터 롯데라는 애칭까지 생길 정도로 팀을 상징하던 프랜차이즈 스타였다. 선수 은퇴 후 바로 이나오 카즈히사의 후임으로 1987년부터 3년간 감독으로 재임했는데, 2년 연속 꼴찌라는 흑역사를 쓰면서 해임되었다. 이 사람의 등번호였던 8번은 현재 롯데의 준영구결번.킨테츠 팬들에겐 자신들의 발목을 잡아 우승기회를 날려버린 천하의 개쌍놈[18] - 미즈카미 요시오 (1976 - 1988)
1980년대 주전 유격수로 활약한 공수겸장의 내야수로, 3년 연속퍼시픽리그 최다 희생타와 베스트나인을 수상하는 등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준 선수였다. 1988년 10.19 더블헤더 2차전에서 아라이 히로마사의 안타성 타구를 다이빙 캐치로 잡아내 킨테츠의 우승을 좌절 시키는 활약을 펼쳤다.[19] 1988년 시즌 종료 이후 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 -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뛰다가 1992년 시즌 개막 이후 은퇴했다. - 레론 리 (1977 - 1987)
롯데를 대표하는 외국인 강타자. 통산타율 .320으로 1993년부터 2018년까지 무려 25년간 일본프로야구 통산타율 1위에 랭크되어 있었다.[20] 2018년에 NPB로 복귀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아오키 노리치카가 4000타수를 채우면서 통산타율 .327로 일단 랭킹 1위의 자리는 내줬지만 향후 아오키가 은퇴할 때까지의 퍼포먼스 여하에 따라서 다시 랭킹 1위로 복귀할 가능성은 있다. - 레온 리 (1978 - 1982)
레론 리의 동생으로 메이저리그 경력이 8년이나 되는 형과는 달리 메이저리그 경력은 없으나 형제가 같은 팀에서 활약하면서 둘 다 빼어난 활약을 했다. 롯데에서만 11년을 뛰면서 프랜차이즈급 외국인 선수로 활약한 형과는 달리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야쿠르트 스왈로즈등 팀을 옮겨다녔지만 일본에서 활동한 10년 동안 통산 타율 .308, 229홈런, 884타점으로 형 못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미국으로 귀국해서는 시카고 컵스의 아시아지역 스카우트 담당 등으로 활동했으며 후에 2003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당시 감독 이시게 히로미치의 해임으로 감독대행을 맡기도 했다.그러나 꼴찌최희섭을 스카우트 한 것과 데릭 리의 아버지로도 유명하다. 롯데 시절에는 이니셜이 형과 똑같기 때문에 형을 성인 「리」를, 본인은 이름인 「레온」을 등록명으로 사용하였다. - 오치아이 히로미츠 (1979 - 1986)
롯데 오리온즈 시절 3번이나 삼관왕을 차지한 전설의 대타자. - 아이코 타케시 (1981 - 1995)
롯데 오리온즈의 말기 - 치바 롯데 초창기 시절 4번타자, 입단시에는 투수로 입단했다가 1984년부터 야수로 전향했고, 대타로 간간히 활약하며 가능성을 보여주다가 1989년 퍼시픽리그 타격 전체 8위(.303)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했고, 535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우면서 롯데 오리온즈- 치바 롯데 초창기의 간판 선수로 활약했다. 그러나 1995년 시즌 타격 부진으로 주니치 드래곤즈로 트레이드 되었고, 그곳에서도 대타로서 무난한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선수 말기때 금지약물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고백한것이 논란이 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사회인야구 팀과 여자 경식 야구팀의 지도자로 활동중. - 니시무라 노리후미 (1982 - 1997)
1986년부터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한 카와사키 시절 고유 1번. 2010년 일본시리즈 우승 감독. 그러나 다음 해인 2011년 최하위.[21] 2012년 5위란 처참한 성적을 남기고 퇴임. 2016년부터 오릭스 버팔로즈의 감독을 맡았으나 2020년 중도 사임. - 호리 코이치 (1988 - 2010)
1번부터 9번 타순까지 모든 타순에서 홈런을 날린 진기록을 가진 타자로써, 2루수를 중심으로 내 외야 가리지 않고 출전한 유틸리티 선수였다. 데뷔부터 은퇴까지 롯데에서만 23년간 활약했다. 롯데 오리온즈 출신으로서는 마지막 현역 선수. - 하츠시바 키요시 (1989 - 2005)
'미스터 마린즈'라는 애칭을 얻을 정도로 치바현 이전 초창기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강타자 3루수. '마쿠하리의 판타지스타'라는 별명도 있는데, 이는 공필성의 '화약고'와 비슷한 맥락으로 열심히는 하지만 좋다고 보기는 힘든 그의 3루수비가 관객들에게 큰 재미를 선사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치바 롯데 마린즈 시대의 선수로써는 역대 최다이자 유일한 200홈런 기록인 202홈런(통산 홈런은 232개)을 기록한 바 있다. 은퇴 후 2013부터 2019년까지 사회인야구 세가 사미의 감독을 역임했다. - 우노 마사루 (1993 - 1994)
- 훌리오 프랑코 (1995, 1998)
일본야구 최초의 외국인 주장. - 김용강 (1996 - 2005)
재일교포. 말이 내야수지 투수로 입단해서 9개 포지션을 모두 경험해본 보기드문 선수였다. - 사카이 타다하루 (1996 - 2002)
암흑기 치바롯데에서 수비만큼은 최고였던 준주전급 2루수. - 코사카 마코토 (1997 - 2005)
- 와타나베 마사토 (1998 - 2012)
1997년 드래프트 1라운더. 탄탄한 수비력을 가졌고 풀 타임을 뛸 시 20홈런 이상이 가능한 거포형 유격수였으나 공갈포를 넘어서서 아예 배트에 공을 갖다대질 못하는 처참한 컨택의 소유자였다. 통산 타율이 .208이었으니. 결국 1차지명 잔혹사만 보여주고 백업자리만 전전하면서 15년 통산 492경기 11홈런밖에 보여주질 못했다. 방출 이후 독립 리그로 가서 2년간 더 선수생활을 하다가 독립리그 팀 감독과 오릭스 전력분석원을 맡았고 2024년 뜬금없이 SSG 랜더스의 수비코치를 맡게 되며 한국에 왔다. - 프랭크 볼릭 (1999 - 2002)
2001년 7월 9일, 다이에 호크스에게 6대 9로 연장 10회말 끝내기 역전 만루홈런을 친 그 선수. 사토자키 토모야의 말에 의하면 김태균과 함께 팀에 적응하지 못했던 선수로 꼽았다. 일본인 선수들하고 말을 안 하려고 하고 거리를 뒀다나. 하지만 마린 스타디움에서 31홈런을 쳐낼 정도로 성적 자체는 훌륭했기 때문에 4년이나 뛸 수 있었다. 4년차를 제외하면 리그 최고의 파워히터 중 하나로 활약하며 치바 이전 이후 최고의 용병타자를 꼽으라면 아직도 이 선수가 꼽힐 정도다. - 아오노 타케시 (2001 - 2013)
- 이마에 토시아키 (2002 - 2015)
2005년, 2010년 롯데가 일본시리즈를 우승할 때 MVP를 차지한 프랜차이즈 3루수. 2015년 오프에 FA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이적. - 니시오카 츠요시 (2003 - 2010)
- 하야사카 케이스케 (2003 - 2015)
2군에서는 도루왕 경쟁만 여러 번 했고 도루왕도 3번이나 따냈던 최고의 테이블 세터였으나 1군만 오면 대주자/대수비 이상 할 수 없는 선수였다. 통산 타율도 1할 대였으니. 결국 2015 시즌 이후 전력외통보를 받고 은퇴. - 호세 페르난데스 (2003)
- 이승엽 (2004 - 2005)
- 오마츠 쇼이츠 (2005 - 2016)
아킬레스건 부상으로 2016 시즌 이후 전력외통보와 코치 제안을 받았지만 거부하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입단 테스트를 보러 갔다. - 아오마츠 케이요 (2005 - 2016)
오마츠 쇼이츠와 입단 동기였고 거포 유망주였으나 2군만 거하게 폭격하고 1군에서는 통산 30경기도 못 뛴 채 2016 시즌 이후 전력외통보를 받고 은퇴. - 야나기타 마사토시 (2006 - 2008)
- 네모토 슌이치 (2006 - 2018)
- 스미 코타 (2009 - 2014)
2014 시즌 이후 전력외통보를 받았다. 현재는 독립 리그의 무사시 히트 베어스로 가서 거기서 감독으로 취임했다. - 체이스 람빈 (2009)
특이하게도 응원가로 빅뱅의 붉은 노을을 사용했다. 한국과는 전혀 연관 없는 선수가 한국 가수의 노래를 응원가로 쓴 케이스. 그러나 실력은 처참해서 54경기에서 1할 9푼 2리 4홈런이라는 백업급 모습만 보이고 퇴출. - 김태균 (2010 - 2011)
기껏 데려왔으나(...) 오오미네 쇼타(2010 - 2018)
오오미네 유타의 동생. 그럭저럭 내야 유틸 백업, 대타로 5년 정도 활동했으나 2016년 때부터 큰 빚을 지는 바람에 그 빚 때문에 빚쟁이들이 구단에 찾아오기까지 이르렀고, 결국 심적 스트레스를 못 이기고[22] 시즌 중인 6월에 은퇴하며 흑역사가 되었다. 구단에서는 은퇴를 만류했지만 본인이 선수를 접겠다고 했다고...은퇴한 다음 해인 2019년에 공갈죄로 체포되면서 역대급 흑역사 확정.[23] 사실 드래프트에 지명된 직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않았음에도 술담배를 하는 모습이 걸리는 바람에 입단식에 참석도 못하고 입단을 거부당할 뻔한 일도 있었다. 또한 상기한 빚 중에서는 롯데의 후배 선수로부터 빌린 돈도 몇십만원 정도 있었다고 한다. 자신보다 어린 선수들에게 달라붙어서 돈 좀 빌려달라는 말을 하고 다녔다고 했으니.[24] 이러한 사건들로 인해 강도살인을 저지른 오가와 히로시, 성범죄를 저지른 멜 홀 바로 턱밑급이고 승부조작을 한 우쓰요우와 비슷한 수준의 흑역사이다.- 스즈키 다이치 (2012 - 2019)
후쿠우라 카즈야의 뒤를 이을만한 몇 안 되는 프랜차이즈 스타였고, 대졸 2년차 때부터 풀타임 주전으로 뛰어와서 명구회 입단 가능성도 꽤 높았던, 롯데 팬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던 인기 선수였으나 2019년 시즌을 끝으로 라쿠텐에 FA로 이적. - 채드 허프만 (2014 - 2015)
- 루이스 크루즈 (2014 - 2015)
- 지미 파레디스 (2017)
- 맷 더피 (2017)
2.4. 외야수
- 벳토 카오루 (1950 - 1957)
- 고 마사유키 (1950 - 1957)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건너와 교진군에 입단하여 전쟁 후 한신을 거쳐 마이니치에 입단한 대만인 외야수. 한때는 투타겸업을 시도해서 1946년 딱 한 해지만 규정타석과 규정이닝을 모두 채우고 14승과 25도루에 ERA 3점대, OPS 7할대를 모두 해냈다. 하지만 1946년을 제외하면 사실상 본업인 외야수로만 활동했고 타격왕을 2회, 도루왕을 1회 차지한 리드오프 자원이었다. 은퇴 후에는 일본에 정착하였고, 60을 넘긴 후 일본인 부인을 따라 일본 국적으로 귀화했다. 1987년 급성 심부전으로 향년 70세로 사망. 대만에서는 오 사다하루만큼은 아녀도 꽤나 야구영웅 취급을 받는다고. 다만 일본 식민지 시절에 태어나서 그랬는지 중국어는 한 마디도 못 했으며(...) 프로야구에 진출하며 일본으로 20살에 건너간 후 죽을 때까지 대만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 야마우치 카즈히로 (1952 - 1963)
- 타미야 겐지로 (1959 - 1963)
- 조지 알트만 (1968 - 1974)
- 히로타 스미오 (1972 - 1983)
1970년대 주전 외야수, 163cm의 작은 체구를 가졌지만 호타준족으로 투지 넘치는 플레이를 보여주었고, 1974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후 베스트 나인과 11년 연속 두자릿수 도루 달성 등 활약을 펼치다 1984년 트레이드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으며, 그곳에서 우승을 맛보고 은퇴했다. - 백인천 (1977 - 1980)
- 장훈 (1980 - 1981)
이 팀에서 프로통산 3000안타를 기록했으며 마지막으로 선수생활을 보냈다. - 타카자와 히데아키 (1980 - 1989, 1991 - 1992)
1988년 수위타자. 이 해, 전설의 10.19 더블헤더 제2경기에서 우승 일보직전에 와서 경기를 확실하게 매듭짓기 위해 구원 투입된 킨테츠버팔로즈의 에이스 아와노 히데유키로부터 동점 홈런을 뽑아내어 긴테쓰의 우승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결정타를 날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 히라이 미츠치카 (1989-2002)
멜 홀 (1993 - 1994)
위의 오가와 히로시와 맞먹는 흑역사. 80년대에 시카고 컵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뉴욕 양키스에서 뛰면서 메이저리그 통산 1171안타, 134홈런의 나름대로의 기록을 남긴 뒤 일본으로 건너왔고, 롯데에서도 30홈런(덤으로 20-20도 기록)을 치는 등 4번타자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시합 중에 자기 타석이 아니면 다른 방에서 게임을 하고 격이 떨어진다며 다른 선수들을 업신여기는 등의[25][26] 방자한 행동가짐과 개차반스런 인간성, 오만한 성격 탓에 팀메이트들과 많은 갈등을 일으켰고 결국 1994년 시즌 종료 후 롯데를 떠나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지만 여기선 부상으로 먹튀가 되었다. 이후 메이저리그로 돌아왔지만 1996년 한 해만 뛴 채 그대로 메이저 경력은 끝. 이후 독립리그를 전전했는데...2007년 무려 3차례의 아동 성폭행, 2차례의 아동 성추행을 저지른 것이 발각되면서 체포. 결국 징역 45년형[27]을 선고받으면서 결국 인간쓰레기 같은 행실로 자기 인생을 망쳐버렸고, 오가와처럼 질기게도 오래 살지 않는 한 여생[28]을 감옥에서 보내게 생겼다.[29] 위에 나오듯 일본 시절 그 개차반스런 인성으로 동료들과 워낙 많은 트러블을 일으킨 탓에 당시 멜 홀과 함께 뛰었던 선수들은 인터뷰에서 멜 홀 얘기만 나오면 마구 비난을 퍼붓는다고 한다. 특히 그에게 많이 시달렸던 헨슬리 뮬렌은 "멜 홀은 정말 싫다. 그런 작자는 두 번 다시 떠올리기도 싫다."라고 했을 정도. 보통 선수들이 사이가 많이 안 좋았어도 은퇴 후엔 같이 늙어가는 입장이란 것도 그렇고, 후에 코치로 다시 만날 수도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서 서로 화해하거나 그렇지 않아도 웬만해선 심한 비난을 삼가는 걸 생각하면 멜 홀이 얼마나 선수들에게 많은 원한을 샀는지 알 만하다.[30][31]- 헨슬리 뮬렌 (1994)
- 오오츠카 아키라 (1994 - 2010)
고교시절엔 투수였으나 프로 입단 후 내야수로 전향, 결국엔 외야수로 자리잡은 선수. 신인때는 2군에서 차기 유격수로 실험해보았으나 잦은 실책으로 나가리, 그래도 호타준족 외야 유망주 소리를 들으며 나름 기대를 받았었으나 끝내 주전이 되진 못하고 준수한 백업 정도로 가늘고 길게 선수생활을 이어나갔다. 사실 툴은 좋았고 은근 장타력, 출루능력이 있었지만 센스가 떨어졌던 선수였다. 은퇴 이후 3루 주루코치를 하는데 홈 아웃이 급증해서(?) 코칭스태프가 된 후에도 주루센스의 부족을 보여주며 욕을 먹고 있다. 근데 후쿠우라 카즈야랑도 친하고[32] 데뷔 이래 롯데 원클럽맨으로 지낸 성골라인이라 한동안은 오래 붙어있을듯. - 모로즈미 켄지 (1994 - 2006)
사회인야구(히타치 제작소) 출신으로 만 25세의 나이에 5라운더로 입단한 늦깎이 무명신인이었지만, 팀의 준주전급 외야수로 자리잡은 숨은 하위픽 성공사례. 전국구 선수라고 보긴 힘들었지만 빠른 발과 허슬 플레이, 쇼맨십 덕분에 치바에서만큼은 큰 사랑을 받았었다.[33] - 오오무라 사부로 (1995 - 2011, 2012 - 2016)
- 데릭 메이 (2001 - 2003)
- 키타 타카시 (2002 - 2006)
도쿄 6대학리그 1시즌 타율 최고기록인 .535를 보유했고, 케이오대학 4년 간 통산 100안타를 쳤던 특급 교타자 유망주였다. 1라운드로 지명받고 프로에서도 1년차 때 2경기 연속 끝내기 안타를 치는 등 기대받았으나 바비 발렌타인으로 감독이 바뀐 후 전혀 1군에 올라오지 못했고, 2006년을 끝으로 1라운드였음에도 불구하고 5년만에 방출당해 은퇴한 비운의 선수. 참고로 사토자키 토모야는 1군에서 2경기 연속 끝내기를 얘기하면서 기대감을 높여놓고 무명 선수라고 평했다(...). - 베니 아그바야니 (2004 - 2009)
바비 발렌타인이 메츠 시절부터 양아들처럼 챙겼던 용병 선수. '하와이안 펀치'란 별명이 있었다. 신조 츠요시와 함께 메츠에서 뛰었던 적도 있고 나름 2000년 시즌에는 클러치 히트를 작렬하며 메츠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공헌한 바도 있었지만 이후에는 메이저에서 자리잡지 못하고 은사 발렌타인을 따라 일본행. 2004년에 3-30-100에 OPS 10할을 했는데 이게 커리어하이였다. 그 후로는 3할도, 20홈런도, 100타점도 기록하지 못했다. 다만 아주 먹튀급으로 못 한건 아니고 2할대 중후반 타율과 OPS 8할 안팎에 15홈런 정도는 쳐줬던 적당한 중장거리 교타자로 6년 동안이나 활약했다. 통산 타율도 2할 8푼에 통산 OPS도 8할 4푼대로 준수했다. 특이점으로는 하와이 출신의 필리핀계 미국인이라 등번호 50번을 고수했고[34] 후쿠우라 카즈야와 친했는지 2019년에 은퇴식을 치르는 후쿠우라에게 영상편지를 보냈으며, 자식의 중간이름도 카즈야라고 지었다. - 타케하라 나오타카 (2005 - 2011)
보기드문 좌투우타 외야수, 현재까지 일본인 선수중에서는 마지막. - 맷 왓슨 (2006 - 2007)
- 코베 타쿠미 (2007 - 2014)
U.N. 오웬은 그녀인가?를 응원가로 쓰던 주인공. 2014 시즌 후 전력외통보를 받았다 - 후안 카를로스 무니즈 (2009 - 2010)
유학파가 아닌 정말 브라질 국적의 외국인 용병. 원래는 쿠바 프로야구 출신이었다. - 오카다 요시후미 (2009 - 2018)
- 이시미네 쇼타 (2011 - 2019)
야마다 테츠토와 야나기타 유키, 아키야마 쇼고, 센가 코다이[35] 등의 쟁쟁한 선수들을 죄다 거르고 뽑은 1라운드 희대의 망픽. 데뷔 시즌이 커리어하이였다. 201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고 1루 주루코치로 롯데에 부임. - G.G.사토 (2013 - 2014)
- 채드 허프만 (2014 - 2015)
- 로엘 산토스 (2017)
2.5.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이라부 히데키 (뉴욕 양키스→몬트리올 엑스포스→텍사스 레인저스→일본복귀 후 한신 타이거스)
- 코미야마 사토루 (뉴욕 메츠→일본복귀 후 원 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 코바야시 마사히데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일본복귀 후 요미우리 자이언츠→오릭스 버팔로즈)
- 야부타 야스히코 (캔자스시티 로열스→일본복귀 후 원소속팀 치바 롯데 마린즈)
- 니시오카 츠요시 (미네소타 트윈스→일본복귀 후 한신 타이거스)
- 사와무라 히로카즈 (보스턴 레드삭스→FA)
3. 역대 선발투수 로테이션
2015년 | |||||
와쿠이 히데아키 | 오미네 유타 | 이대은 | 이시카와 아유무 | 천관위 | 세키야 료타 |
2016년 | |||||
와쿠이 히데아키 | 카라카와 유키 | 제이슨 스탠드리지 | 이시카와 아유무 | 후타키 코타 | 세키야 료타 |
2017년 | |||||
사사키 치하야 | 후타키 코타 | 카라카와 유키 | 와쿠이 히데아키 | 천관위 | 사카이 토모히토 |
2018년 | |||||
이시카와 아유무 | 마이크 볼싱어 | 후타키 코타 | 와쿠이 히데아키 | 아리요시 유키 | 타네이치 아츠키 |
2019년 | |||||
이시카와 아유무 | 마이크 볼싱어 | 후타키 코타 | 니시노 유지 | 타네이치 아츠키 | 오지마 카즈야 |
2020년 | |||||
이시카와 아유무 | 이와시타 다이키 | 미마 마나부 | 후타키 코타 | 오지마 카즈야 | 첸웨인 |
2021년 | |||||
이시카와 아유무 | 후타키 코타 | 미마 마나부 | 사사키 로키 | 오지마 카즈야 | 이와시타 다이키 |
4. 역대 마무리 투수
- 마무리 투수로 3세이브 이상을 기록한 선수만 기입해 주세요.
- 마무리 직책을 완전히 이임한 경우 취소선을 그어주세요. 또한 오래 전 기록의 경우는 집단 마무리인지 마무리 교체인지 애매한 경우가 많아서 확인이 가능하다면 틀린 기록은 수정 바랍니다.
- 전문 마무리가 등장하기 이전[36] 기록에는 세이브가 많은 선수를 기록하고는 있지만 마구잡이 등판으로 세이브가 쌓였을 뿐 사실상 마무리가 아닌 경우도 많으니 감안 부탁드립니다.[37] 또한 1974년부터 세이브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에 1974년부터 기록했습니다.
1974년 |
나리타 후미오 미츠이 마사하루 |
1975년 |
무라타 쵸지[38] 미츠이 마사하루 |
1976년 |
무라타 쵸지 미츠이 마사하루 |
1977년 |
무라타 쵸지 미츠이 마사하루 나리시게 하루오 타나카 요시오 |
1978년 |
무라타 쵸지 야기사와 소로쿠 |
1979년 |
쿠라모치 아키라 |
1980년 |
쿠라모치 아키라 |
1981년 |
쿠라모치 아키라 우메자와 요시카츠 |
1982년 |
카나이 마사요시 쿠라모치 아키라 우메자와 요시카츠 |
1983년 |
스티브 셜리 |
1984년 |
우메자와 요시카츠 니시이 테츠오 |
1985년 |
우메자와 요시카츠 장승슝 오가와 히로시 미기타 카즈히코 니시이 테츠오 사토 마사오[39] |
1986년 |
장승슝[40] |
1987년 |
우시지마 카즈히코 |
1988년 |
우시지마 카즈히코 |
1989년 |
이라부 히데키 히라누마 사다하루 |
1990년 |
장승슝 |
1991년 |
시라타케 요시히사[41] |
1992년 |
카와모토 야스유키 |
1993년 |
카와모토 야스유키 |
1994년 |
나리모토 토시히데 |
1995년 |
나리모토 토시히데[42] 카와모토 야스유키 |
1996년 |
나리모토 토시히데[43] 카와모토 야스유키 |
1997년 |
카와모토 야스유키 |
1998년 |
브라이언 워렌 후지타 소이치 요시다 아츠시 |
1999년 |
브라이언 워렌 |
2000년 |
코바야시 마사히데 |
2001년 |
코바야시 마사히데 |
2002년 |
코바야시 마사히데 |
2003년 |
코바야시 마사히데 |
2004년 |
코바야시 마사히데 |
2005년 |
코바야시 마사히데 |
2006년 |
코바야시 마사히데 |
2007년 |
코바야시 마사히데 |
2008년 |
오기노 타다히로 |
2009년 |
브라이언 시코스키 |
2010년 |
코바야시 히로유키 |
2011년 |
야부타 야스히코 |
2012년 |
야부타 야스히코 |
2013년 |
마스다 나오야 |
2014년 |
니시노 유지 |
2015년 |
우치 타츠야[48] |
2016년 |
마스다 나오야[49] |
2017년 |
우치 타츠야 |
2018년 |
우치 타츠야 |
2019년 |
마스다 나오야 |
2020년 |
마스다 나오야 |
2021년 |
마스다 나오야 |
2022년 |
마스다 나오야 |
5. 역대 외국인 선수
- USA : 미국
- DOM : 도미니카 공화국
- VEN : 베네수엘라
- KOR : 한국
- PRI : 푸에르토리코
- CUB : 쿠바
- TWN : 대만
- MEX : 멕시코
- BRA : 브라질
- PAN : 파나마
2003 | 브라이언 시코스키(Brian Patrick Sikorski) | USA | 투수 | |
호세 페르난데스(1974)[53](José Mayobanex Fernández Rojas) | DOM | 3루수 | ||
나탄 민치(Nathan Derek Minchey) | USA | 투수 | ||
데릭 메이(Derrick Brant May) | USA | 외야수 | ||
릭 쇼트(Richard Ryan "Rick"Short) | USA | 3루수[54] | ||
로버트 로즈[55](Robert Richard "Bobby"Rose) | USA | 2루수, 3루수 | 개막 전 방출[56] | |
2004 | 베니 아그바야니(Benjamin Peter "Benny"Agbayani) | USA | 외야수, 지명타자 | |
이승엽(李承燁) | KOR | 1루수, 좌익수[57], 지명타자 | ||
댄 세라피니[58](Daniel Joseph Serafini) | USA | 투수 | ||
나탄 민치(Nathan Derek Minchey) | USA | 투수 | ||
맷 프랑코(Matthew Neil Franco) | USA | 1루수, 3루수, 외야수 | ||
2005 | 베니 아그바야니(Benjamin Peter "Benny"Agbayani) | USA | 외야수, 지명타자 | |
이승엽(李承燁) | KOR | 1루수, 좌익수[59], 지명타자 | ||
댄 세라피니[60](Daniel Joseph Serafini) | USA | 투수 | ||
발렌티노 파스쿠치(Valentino Martin Pascucci) | USA | 외야수 | ||
맷 프랑코(Matthew Neil Franco) | USA | 1루수, 3루수, 외야수 | ||
2006 | 베니 아그바야니(Benjamin Peter "Benny"Agbayani) | USA | 외야수, 지명타자 | |
맷 왓슨[61](Matthew Kyle Watson | USA | 외야수 | ||
발렌티노 파스쿠치(Valentino Martin Pascucci) | USA | 외야수 | ||
맷 프랑코(Matthew Neil Franco) | USA | 1루수, 3루수, 외야수 | ||
케빈 반(Kevin Patrick Beirne) | USA | 투수 | ||
저스틴 밀러[62](Justin Mark Miller) | USA | 투수 | 시즌 중 영입 | |
2007 | 베니 아그바야니(Benjamin Peter "Benny"Agbayani) | USA | 외야수, 지명타자 | |
훌리오 줄레타(Julio Ernesto Zuleta Tapia) | PAN | 1루수, 지명타자 | ||
호세 오티즈(José Daniel Ortiz Flores) | DOM | 1루수, 2루수 | ||
맷 왓슨[63](Matthew Kyle Watson | USA | 외야수 | ||
우스요우[64](吳偲佑) | TWN | 투수 | ||
2008 | 베니 아그바야니(Benjamin Peter "Benny"Agbayani) | USA | 외야수, 지명타자 | |
브라이언 시코스키(Brian Patrick Sikorski) | USA | 투수 | ||
훌리오 줄레타(Julio Ernesto Zuleta Tapia) | PAN | 1루수, 지명타자 | ||
윈스턴 아브레이유(Winston Leonardo Abreu Soler) | DOM | 투수 | ||
호세 오티즈(José Daniel Ortiz Flores) | DOM | 1루수, 2루수 | ||
우스요우[65](吳偲佑) | TWN | 투수 | ||
2009 | 후안 카를로스 무니즈(Juan Carlos Muniz Armenteros) | BRA[66] | 외야수 | 육성선수 입단[67] |
브라이언 시코스키(Brian Patrick Sikorski) | USA | 투수 | ||
체이스 람빈(Chase Morrow Lambin) | USA | 유격수, 2루수[68] | ||
게리 번햄 주니어(Gary Robert Burnham Jr.) | USA | 1루수 | ||
베니 아그바야니(Benjamin Peter "Benny"Agbayani) | USA | 외야수, 지명타자 | ||
2010 | 김태균(金泰均) | KOR | 1루수 | |
빌 머피(William RW Murphy) | USA | 투수 | ||
브라이언 코리(Bryan Scott Corey) | USA | 투수 | ||
후안 카를로스 무니즈(Juan Carlos Muniz Armenteros | BRA[69] | 외야수 | ||
헤이든 펜(Hayden Andrew Penn) | USA | 투수 | 시즌 중 영입 | |
린옌펑(林彦峰) | TWN | 투수 | 육성선수[70] | |
2011 | 카를로스 로사(Carlos Rosa Mayi) | DOM | 투수 | |
헤이든 펜(Hayden Andrew Penn) | USA | 투수 | ||
밥 맥크로리(Robert Glenn "Bob"McCrory) | USA | 투수 | 시즌 중 방출[71] | |
빌 머피(William RW Murphy) | USA | 투수 | ||
김태균(金泰均) | KOR | 1루수 | 시즌 중 방출[72] | |
호세 카스티요(José Rondon Castillo) | VEN | 1루수 | 시즌 중 영입[73][74] | |
차이센푸(蔡森夫) | TWN | 1루수 | 육성선수[75] | |
린옌펑(林彦峰) | TWN | 투수 | 육성선수[76] | |
2012 | 세스 그레이싱어(Seth Adam Greisinger) | USA | 투수 | |
조시 화이트셀(Joshua S. Whitesell) | USA | 1루수 | ||
카를로스 로사(Carlos Rosa Mayi) | DOM | 투수 | ||
헤이든 펜(Hayden Andrew Penn) | USA | 투수 | ||
윌 레데즈마(Wilfredo Jose "Wil"Ledezma Acosta) | VEN | 투수 | 시즌 중 영입 | |
덕 매티스(Douglas Alan Mathis) | USA | 투수 | 시즌 중 영입 | |
차이센푸(蔡森夫) | TWN | 1루수 | 육성선수[77] | |
2013 | 세스 그레이싱어(Seth Adam Greisinger) | USA | 투수 | |
조시 화이트셀(Joshua S. Whitesell) | USA | 1루수 | ||
카를로스 로사(Carlos Rosa Mayi) | DOM | 투수 | ||
디키 곤잘레스(Dicky Angel González Vallenilla) | PRI | 투수 | ||
윌 레데즈마(Wilfredo Jose "Wil"Ledezma Acosta) | VEN | 투수 | ||
크레이그 브라젤(Craig Walter Brazell) | USA | 1루수, 지명타자 | 시즌중 영입 | |
2014 | 세스 그레이싱어(Seth Adam Greisinger) | USA | 투수 | |
루이스 크루즈(Luis Alfonso Cruz Bojorque) | MEX | 2루수 | ||
카를로스 로사(Carlos Rosa Mayi) | DOM | 투수 | ||
크레이그 브라젤(Craig Walter Brazell) | USA | 1루수, 지명타자 | ||
채드 허프만(Chad Daniel Huffman) | USA | 외야수 | ||
알프레도 데스파이네(Alfredo Despaigne Rodriguez) | CUB | 좌익수, 지명타자 | 시즌 중 영입 | |
2015 | 알프레도 데스파이네(Alfredo Despaigne Rodriguez) | CUB | 좌익수, 지명타자 | |
루이스 크루즈(Luis Alfonso Cruz Bojorque) | MEX | 2루수 | ||
카를로스 로사(Carlos Rosa Mayi) | DOM | 투수 | ||
이대은(李帶溵) | KOR | 투수 | ||
천관위(陳冠宇) | TWN | 투수 | ||
채드 허프만(Chad Daniel Huffman) | USA | 외야수 | 방출 후 재계약[78] | |
차승 백(Chaseung Baek/白蹉承[79]) | USA[80] | 투수 | 시즌중 영입 | |
2016 | 알프레도 데스파이네(Alfredo Despaigne Rodriguez) | CUB | 좌익수, 지명타자 | |
제이슨 스탠드리지(Jason Wayne Standridge) | USA | 투수 | ||
야마이코 나바로(Yamaico Navarro Pérez) | DOM | 2루수 | ||
이대은(李帶溵) | KOR[81] | 투수 | ||
천관위(陳冠宇) | TWN | 투수 | ||
2017 | 지미 파레디스(Jimmy Santiago Paredes Terrero) | DOM | 1루수 | |
맷 더피(Matthew Edward Duffy) | USA | 3루수 | ||
제이슨 스탠드리지(Jason Wayne Standridge) | USA | 투수 | ||
천관위(陳冠宇) | TWN | 투수 | ||
윌리 모 페냐(Wily Modesto Peña Gutierrez) | DOM | 지명타자 | 시즌중 영입 | |
로엘 산토스(Roel Santos Martinez) | CUB | 외야수 | 시즌중 영입 | |
2018 | 마이크 볼싱어(Michael P. Bolsinger) | USA | 투수 | |
에드가 올모스(Edgar Olmos) | USA | 투수 | ||
태너 셰퍼스(Tanner Ross Scheppers) | USA | 투수 | ||
맷 도밍게스(Matthew Scott Dominguez) | USA | 3루수 | ||
천관위(陳冠宇) | TWN | 투수 | ||
프란시스코 페게로(Francisco Peguero Báez) | DOM | 외야수 | 시즌중 방출[82][83] | |
2019 | 마이크 볼싱어(Michael P. Bolsinger) | USA | 투수 | |
조시 레이빈(Joshua Joseph Ravin) | USA | 투수 | ||
브랜든 만(Brandon Michael Mann) | USA | 투수 | ||
천관위(陳冠宇) | TWN | 투수 | ||
브랜든 레어드(Brandon J. Laird) | USA | 3루수 | ||
케니스 바르가스(Kennys Vargas) | PRI | 지명타자 | ||
레오니스 마틴(Leonys Martín Tápanes) | CUB | 외야수 | 시즌중 영입 | |
2020 | 프랭크 허먼(Frank Joseph Herrmann) | USA | 투수 | |
제이 잭슨(Randy "Jay" Jackson Jr.) | USA | 투수 | ||
천관위(陳冠宇) | TWN | 투수 | ||
브랜든 레어드(Brandon J. Laird) | USA | 3루수 | ||
레오니스 마틴(Leonys Martín Tápanes) | CUB | 외야수 | ||
호세 플로레스(Jose Antonio Flores) | VEN | 투수 | 육성선수 입단[84] | |
호세 아코스타(Jose Leonel Acosta Almonte) | DOM | 투수 | 육성선수 입단 |
[1] 코야마의 앞에는 가네다 마사이치와 요네다 테츠야밖에 없다.[2] 적어도 롯데에서 뛸 때까지는 한국 국적을 유지했어서 박덕용이 본명이고 키쿠무라 토쿠요는 통명이다. 일본 위키에는 일단 현재도 한국 국적이라 적혀있다.[3] 1750만엔이었다고 한다.[4] 이 사람 이혼을 한번도 아니고 두번이나 했다(...)[5] 사장이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가정부한테라도 돈을 빌려달라고 하다가 거절당했고, 홧김에 때려서 기절시킨 것. 이후에 발각되는 게 두려워서 기절한 가정부를 아라카와 강에 던져버렸다.[6] 이후 감옥에서 소프트볼 대회가 열리자 프로에서 탈삼진왕도 기록해서 동료 죄수들이 엄청나게 기대했는데, 유격수로 출장하여 무안타를 기록해서 망신을 당했다고 한다(...) 애초에 현장을 떠난 지 15년 이상 됐던 사람이고 당시에 40대 중반이어서 몸이 안 따라준듯.[7] 하다못해 비슷하게 금전 문제로 선수생활과 인생을 말아먹은 팀 후배 오미네 쇼타만 봐도 연봉이 가장 높을 때가 1000만엔 수준이었다. 오가와의 연봉은 오미네의 2배는 됐으니 어마어마한 낭비벽이었던 것.[8] 일본은 6일 휴식이 디폴트이다. 아마 로테이션이 꼬인다는 이유 때문에 싫어했던 것으로 보인다.[9] 사실 이런 케이스는 대부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원하다보니 거의 연구대상 수준. 사실 키무라의 경우는 처음부터 센트럴리그 팀은 입단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도쿄에 대한 열망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도쿄에서 가장 가까운 퍼시픽리그 팀인 롯데를 원했던 것으로 추정.그게 아니면 팜도 망가졌고 구단 시설도 안좋고 프런트도 무개념인데 월급도 짜게 주는 롯데에 가고싶을리가[10] 이로 인해 사회인야구 시절 1년 출전정지도 당했다.[11] 말이 3라운드지 그때는 1~2라운드는 지명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서 1~2라운드에서 선수를 지명하는 구단은 매년 0~1팀이었다. 희망 입단 프레임이 KBO의 1차지명과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3라운드 지명은 KBO의 2차 1라운드 지명과 같은 셈. 요코하마는 심지어 순위가 꼴찌라 12구단 중 전체 1순위로 지명했었다.[12] 이외에 라쿠텐도 희망 입단 프레임(선수가 원하는 팀과 자유계약하는 제도로 팀당 1명씩 대졸/사회인 선수를 이렇게 영입할 수 있었다. 사실상의 1차지명.)으로 지명해 준다고 했으나 거절. 즉 롯데에 가겠다고 히로시마, 세이부, 라쿠텐, 요코하마의 제안을 다 걷어찬 것이다.[13] 앞에서도 말했지만 무려 4팀이 영입제안을 했었고, 그 중 1라운드 지명을 약속한 팀도 있었고, KBO의 1차지명에 해당하는 희망 입단 프레임 입단을 약속한 팀도 있었으며, 한 팀은 KBO의 2차 1라운드 전체 1순위에 해당하는 지명권을 아예 썼었다. 즉 프로에서 이 선수에게 거는 기대가 어마어마했다는 것인데... 현실은...[14] 중간계투 ERA가 4점대 중반이면 보통 1이닝을 던지는 중간계투 특성상 2경기마다 한번씩 실점을 했다는 건데 셋업으로 쓰기에는 그 점이 문제였다.[15] 1군 출장기록은 1974년이 마지막.[16] 특히 포일 실책이 거의 없었다. 일본 신기록을 찍었을 정도로.[17] 재일한국인. 한국명 김유세. 실업야구 국가대표vs재일교포 야구대표 경기를 위해 방한했다는 기사가 있다.[18] 그 전설의 10.19 당시 롯데 감독이 바로 아리토였다. 그리고 아리토는 그 날 2차전 때 8분이나 지연행위를 벌이며 경기를 무승부로 만들어버려 킨테츠의 우승실패에 제대로 일조를 했다(...). 자세한 건 10.19 항목 참조.[19] 또한 이때 더블헤더 두 경기를 모두 중계중이던 테레비 아사히의 아베 노리유키 캐스터는 이 수비 직후 This is 프로야구(フローヤキュウ)!! 라고 소리쳤다. 그야말로 실점을 틀어막아버린 신들린 수비를 펼친 셈이다.[20] 일본프로야구에서 통산타율 랭킹의 기준은 4000 타수이다. 한국의 경우는 3000타석이 기준이다. 이는 경기수가 적었던 80년대 초창기 선수(특히 장효조, 통산타수 3050)에 대한 배려의 성격이 짙다. 타수 기준을 그보다 더 높이면 장효조의 통산 타율(.331)이 그냥 참고기록으로 밀려나버리기 때문에 올드 야구팬들의 반발을 고려해서 기준을 낮춘 감이 있다. 참고로 아오키 이전까지 일본인 규정타수 만족 통산타율 1위는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레전드이자 대선배, 아오키의 신인시절 감독이기까지 했던 와카마츠 츠토무. 이치로는 타석은 4000을 넘었지만 타수가 3619라 통산타율 랭킹에는 들어오지 못한다.[21] 이렇게 일본시리즈 한 팀이 다음 해 리그 꼴찌인 사례는 1961년 미하라 오사무가 이끌던 다이요 훼일즈, 1979년 히로오카 타츠로가 이끌던 야쿠르트 스왈로즈(결국 히로오카는 도중 사임), 그리고 2011년 치바롯데, 2014년 호시노 센이치의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호시노는 건강문제도 있어서 이 해 시즌 종료후 퇴임) 이외엔 없다.[22] 이로 인하여 이혼까지 했다. 빚 자체는 200만엔(약 2천만원) 수준으로 적었지만 오오미네가 1군에 자리잡기 전인 2016년까지는 연봉이 5~7천만원 수준이라 세금을 떼고 자녀 양육비를 제외하면 오히려 돈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렇게 수십, 수백만원씩 빌린 것이 몇천만원까지 돼 버린 것. 그런데 오오미네는 사실 2017~2018년 연봉은 1억원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세금을 떼더라도 2천만원 정도는 일시불로 갚을 수 있을텐데 도대체 그 돈은 어디에 갖다바치고...?(구단 내부 관계자로부터의 빠찡꼬를 좋아한다는 증언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일진 비슷하게 놀았던 것을 감안하면 사생활이 방탕한 것이 아닌가 싶다.)[23] 그것도 은퇴 직후에 인터뷰했던 기자한테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거부당하자 야쿠자를 들먹이면서 40만 엔을 내놓으라고 협박한 것(...).[24] 롯데는 선수끼리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는데도 이랬다![25] 어떻게 게임을 할 수 있었냐면, 롯데 시절에는 딱 한 경기를 빼면 전부 지명타자로 나왔다. 즉 수비 이닝 때는 계속 대기실에 가서 게임만 했다는 것(...) 후술하겠지만 저 행위 때문에 다른 선수와 싸움이 난 적도 있었다. 여담으로 주니치 시절에는 센트럴리그가 지명타자가 없어서 좌익수로 계속 나왔다.[26] 헨슬리 뮬렌 상대로 엄청난 괴롭힘을 한 이유도 뮬렌은 AAA와 메이저를 오가며 메이저에선 백업 정도의 성적을 내고 일본에 왔고, 일본에서도 컨택과 선구안이 떨어지는 공갈포였기 때문. 메이저리그에서 꽤 오랫동안 주전으로 뛰었던 홀과 비교하면 미미한 기록이다.[27] 가석방도 최소 22년 4개월은 경과해야 한다고 한다.[28] 멜 홀은 1960년생이다. 즉 가석방되어도 최소 69세는 넘으며 형량을 다 채우면 무려 92세다. 진짜 질기게 살지 않는 한,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29] 게다가 미국에선 아동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는 같은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자기들보다 더한 쓰레기 취급 받고 심지어 린치까지 당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감옥에서의 여생도 험난하리라 예상된다. 단 이 사람은 유명인에 체격도 크고 싸움 실력도 평균 이상으로 보이며 성깔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처맞을 가능성은 낮다. 아동 성폭행범이 얻어맞는 가장 큰 이유는 체격이 작고 힘이 약하며 심리적으로 깡이 있는 성격도 아니라 만만하기 때문. 거기다가 일반적인 아동 성폭행들은 갱단 출신같이 뒷배가 있는 경우도 아니라 갱단들이 즐비한 미국 교도소에서 몇 없는 자기 세력이 없는 외톨이라는 점도 한몫하는데 멜 홀은 나름 메이저리그에서 잘나갔던 선수였던 만큼 인지도도 높아서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소문이 나서 본보기로 처벌 받을 수도 있다.[30] 헨슬리 뮬렌은 놀림, 폭행, 음료수 셔틀 짓까지 당했다. 은퇴 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 시기의 멜 홀과의 경험을 왕따당하는 것으로 표현했을 정도. 감독이 하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줬으나 전부 묵살당했다고 한다. 심지어 1995년에는 홀은 주니치, 뮬렌은 야쿠르트에서 뛰었는데, 주니치와 야쿠르트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홀이 뮬렌을 찾아가서 괴롭혔다고 한다! 거기다가 주니치에서 1994~1996년까지 3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했던 알론조 파월 역시 메이저리그 커리어가 별볼일없다는 이유로 뮬렌처럼 괴롭힘을 당했다.(이 선수는 메이저리그 기록은 2시즌 71경기에 불과했지만 일본에서 7년이나 뛰었고, 주니치에서 3년 연속 타격왕을 차지하며 2020년엔 순회타격코치로 주니치에 돌아올 정도로 주니치에선 전설급 용병타자 중 한 명이었다.)[31] 그 외에도 벤치클리어링 때 말리러 온 상대팀 포수를 폭행한 적도 있고, 1993년에 롯데에서 뛰었던 맥스 베너블과도 싸운 적이 있었다. 싸운 이유는 덕아웃에서 게임을 하는 것을 보고 베너블이 뭐라 하자 발끈해서 싸움이 난 것.(그 와중에 베너블은 메이저리그 기록이 꽤 있던 선수라 그런지 일방적으로 괴롭힘을 당했다는 언급은 없다.) 또한 일본인 팀메이트인 아이코 타케시, 코미야마 사토루 역시 멜 홀은 역대 최악의 야구선수라고 인터뷰하거나, 멜 홀이랑 있으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 자식만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의 인터뷰를 쏟아낸 걸 보면...[32] 데뷔 동기고 고졸이라 동갑내기였다. 오노 신고, 오오츠카 아키라, 후쿠우라 카즈야 이렇게 3명이서 94년 드래프트 고졸동기로 친하다. 또한 이들 셋 다 현역 시절도 은퇴 후에도 롯데를 떠나지 않은 원클럽맨 프랜차이즈 스타라서 뒷배경이 탄탄하다.[33] 같은 드래프트에서 더 하위픽이었던 오노 신고, 후쿠우라 카즈야에게 묻힌 감이 있지만 이 사람도 롯데에서 은퇴 후 코치와 스카우터를 하면서 원클럽맨으로 버텨오고 있다.[34] 하와이는 미국의 50번째 주이다.[35] 단 센가는 드래프트에 참여할 때는 가능성은 있었으나 당장 전혀 써먹기 어려운 선수였기에 상위지명 가능성은 없던 선수였다. 프로에서 급성장한 케이스. 물론 다른 3명은 상위픽 지명이 유력한 선수들이었기 때문에 롯데가 뻘짓한 게 맞다.[36] 대충 1980년대 이전.[37] 당장 이 시기 시즌에는 세이브가 기록이 돼있다고 해도 1시즌 팀 전체 세이브가 10~15개인 해도 많다.[38] 선발 위주로 뛰고 마무리로는 종종 보직파괴로 등판했는데도(39경기 17선발 191.2이닝을 기록했다. 9승 12패 13세이브 ERA 2.21.) 이 해 최우수 평균자책과 세이브왕을 기록했다.[39] 당연히 나무위키에 항목이 만들어진 짱구 캐릭터 사토 마사오가 아니다.[40] 원래 대만인이었으나 후에 일본으로 귀화한 케이스로 롯데에서는 소 카츠오라는 일본식 독법으로 등록됐다. 5년 연속 10승 달성에 마무리로도 2년 정도 뛰었던 누적기록이 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대만 출신 선수로 일본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던 당시 대만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었다. 거기다가 이 선수는 대학까지 대만에서 나와서 용병 자격으로 뛰어야 했는데도.(당시 일본프로야구는 지금처럼 용병쿼터가 넓지 않았다. 1군에서 가용할 수 있는 용병이 팀당 2명 수준에 2군 무제한 영입 따위는 물론 없었다.)[41] 롯데 오리온즈 최후의 마무리투수.[42] 메인 마무리는 나리모토였지만 셋업이었던 카와모토도 종종 세이브 요건에 올라와서 10세이브를 거뒀다. 사실상 더블 스토퍼.[43] 메인 마무리는 나리모토였지만 셋업이었던 카와모토도 종종 세이브 요건에 올라와서 10세이브를 거뒀다. 사실상 더블 스토퍼.근데 96년에 세이브를 10번이나 빼앗기고도 나리모토는 세이브왕을 거뒀다[44] 당초 마무리였으나 9세이브에 그치고 시즌 중 마무리를 넘겼다.[45] 1998년 대만프로야구에서 준수한 불펜용병으로 뛰다가 시즌 중에 롯데에 입단하여 1999년부터 마무리 용병으로 뛰었으나 2000년 시즌 중 부진해서 마무리를 코바야시에게 넘겼다. 시즌 후 퇴단하고 한화 이글스에서 마무리 용병으로 영입했으나 부진해서 중도퇴출당했다.[46] 원래 마무리 코바야시가 부진하여 중간에 임시 마무리를 맡았다가 다시 코바야시에게 넘겨주었다.[47] 원래 마무리 야부타가 부진하여 중간에 임시 마무리를 맡았다가 다시 야부타에게 넘겨주었다.[48] 니시노가 시즌 후반에 이탈하면서 후반에 한 달 정도 마무리를 맡았다.[49] 니시노 유지가 시즌 중반에 이탈하면서 후반기 마무리를 맡았다.[50] 시즌 중 부진으로 우치 타츠야애게 마무리를 넘겼다.[51] 시즌 중 부진으로 우치 타츠야가 잠깐 2군에 갔을 때 대체 마무리로 뛰었다가 우치가 복귀하자 다시 마무리를 넘겼다.[52] 리두쉬안 같이 국적은 외국이지만 드래프트로 입단하여 일본인 쿼터에 해당하는 선수는 제외.[53] SK 와이번스에 있던 그 호세 페르난데스 맞다.[54] 이름인 쇼트가 일본어로 유격수를 뜻하는 말이다 보니 이 선수가 롯데에서 뛸 때 올스타전 유격수 부문에서 엄청난 표를 받았다고 한다(...). 일본프로야구는 올스타전 투표를 할 때 모든 선수를 포지션 상관없이 투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단 투수를 타자로 투표하거나 타자를 투수로 투표하는 것은 금지.)[55] 요코하마에서 8년을 뛴 장수 외국인 용병. 2년의 공백기를 갖고 롯데에 복귀했으나 흑역사가 되었다.[56] 스프링캠프 도중 야구에 대한 열정이 사라졌다면서 방출을 요구했다.[57] 롯데 시절에 이승엽은 후쿠우라 카즈야에게 밀려 좌익수를 자주 봤다.[58] 2002년 한화 이글스에 영입되어 한국에 입국까지 하였으나 부적격 선수임이 밝혀져서 퇴출되었다. 그 당시에는 직전 시즌과 2년 전 시즌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등록이 되어 있는 선수는 용병으로 데려오면 안 되는데 세라피니는 2년 전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들어 있었기 때문.[59] 롯데 시절에 이승엽은 후쿠우라 카즈야에게 밀려 좌익수를 자주 봤다.[60] 2002년 한화 이글스에 영입되어 한국에 입국까지 하였으나 부적격 선수임이 밝혀져서 퇴출되었다. 그 당시에는 직전 시즌과 2년 전 시즌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등록이 되어 있는 선수는 용병으로 데려오면 안 되는데 세라피니는 2년 전에 메이저리그 확장 로스터에 들어 있었기 때문.[61] 일본을 떠난 후 두산에서 뛰게 된다. 근데 거기선 더 못해서 광속퇴출.[62] 2013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63] 일본을 떠난 후 두산에서 뛰게 된다. 근데 거기선 더 못해서 광속퇴출.[64] 대만 복귀 반 시즌만에 승부조작으로 제명당해 흑역사화.[65] 대만 복귀 반 시즌만에 승부조작으로 제명당해 흑역사화.[66] 쿠바에서 귀화.[67] 입단 한 달만에 지배 등록이 되긴 했다.[68] 사실 투포수 빼고 다 가능한 만능 유틸이었다. 주 포지션이 저 두 개.수비가 유틸이면 뭐해 타격이 1할인데[69] 쿠바에서 귀화.[70]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71] 부상으로 인해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5월에 방출당했다.[72] 사실 계약기간이 남아 있었는데 본인이 공인구 교체로 인한 부진과 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한 심리적 불안감으로 인해 팀에 방출을 요구했다.[73] 사실상 시즌 중 중도퇴단한 김태균의 대체 용병이다. 일본프로야구는 용병이 무제한이라 대체 영입이라는 표현은 없다.[74] 이후 2018년 12월 6일 베네수엘라 윈터리그를 마치고 차량으로 이동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같은 차에 타고 있던 LA 에인절스에서 뛰었던 루이스 발부에나도 사망. 해당 차를 운전했던 카를로스 리베로(2017년 야쿠르트에서 뛰었다.)는 중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졌다.[75]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76]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77] 퇴단할 때까지 지배 등록되지 않았다.[78] 2014년 시즌이 끝나고 기대이하의 퍼포먼스로 자유계약으로 풀렸으나 2015 시즌 전에 다시 롯데와 협상을 하여 재입단했다. 시즌 중 입단도 아니기에 사실상 재계약이라고 봐야겠지만...[79] 한국 국적 시절 이름.[80] 한국에서 미국으로 귀화했다.[81] 일본프로야구 최후의 한국인 용병투수. 최후의 용병타자는 하재훈이며 외국인 취급을 받지 않는 김무영까지 총 3명의 한국인이 2016년 일본프로야구에서 뛰었다. 그 후로 일본프로야구에 입단한 한국인은 없다.[82] 본인이 계약해지를 요구하여 7월 초에 웨이버 공시. 시즌 내내 1군 콜업 없이 2군에서만 뛰어서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83] 이 선수는 2019년 멕시칸리그에서 타율 .380에 31홈런 OPS 1.078로 터졌다. 물론 멕시칸리그가 공인구 교체 이후 미친듯이 홈런이 급증해서 펠릭스 피에보다 OPS가 낮았지만(...) 그래도 일본에서 나름대로 성공했던 자펫 아마도르, 루이스 크루즈보다도 OPS가 높았으니 한번도 안 긁어본 것은 아쉬운 선수.[84] 다만 3월에 지배 등록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