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aaa> 증산교 교조 강일순 姜一淳 | Kang Il-soon[1] | |
<colcolor=#fff> 출생 | 1871년 11월 1일[2] |
조선 전라도 정읍현 (現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 |
사망 | 1909년 8월 9일[3] (향년 37세) |
대한제국 전라북도 전주군 (現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 |
호 | 증산(甑山) |
자 | 사옥(士玉) |
본관 | 진주 강씨[4][5] |
종교 | (천지공사) |
아명 | 학봉(鶴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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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증산계통 종교의 교조. 옥황상제를 자처하였으나 39살에 병에 걸려 죽었다. 죽기 직전까지 자기가 만들어낸 도술 주문을 외웠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한다. 구한말의 종교가이자 기인[6]이다.동시대 제자들은 그를 최제우 다음에 온 대선생ㆍ미륵불의 화신ㆍ옥황상제ㆍ한울님 등으로 다양하게 인식했고, 현재 존재하는 증산계통 종교들도 거의 동일하다. 동향 사람들은 강일순을 존경하거나 두려워했고 혹은 미치광이 취급하기도 했으며, 강씨 문중에서는 집안을 망쳤다고 나쁘게 보았다고 한다.
2. 생애
- 아래에서 음력이라고 명시하지 않은 날짜는 모두 양력임.
2.1. 젊은 시절
강일순은 고종 8년(1871), 신미양요가 일어난 해에 전라도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에 있는 외갓집에서[7] 강문회(姜文會) · 권양덕(權良德)[8] 부부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9]에 있는 친가에서 성장하였다.증산종교들의 경전에서는 강일순이 친가가 있는 객망리에서 태어났다고 쓴 경우가 많다. 이상호는 최초로 강일순의 삶을 기록한 경전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1926)를 편찬하면서 강일순이 서산리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서술했으나, 대순전경大巡典經 초판(1929)에서 객망리라고 바꾸었다. 객망리가 강일순이 태어난 곳이라고 쓴 첫 서술이 대순전경 초판이다. 이러한 자료상의 혼란으로 강일순의 삶에 대한 인터넷 글에서는 강일순이 태어난 곳이 서산리 외가/객망리 친가로 내용이 갈린다. 객망리(客望里)라는 이름이 '손님을 바란다/기다린다'는 뜻인데, 이상호는 지명을 강일순과 연계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이미 예언된 인물이라고 신성화하고자, 친가에서 태어났다고 한 듯하다. 이렇게 교조의 고향 지명으로 "우리 종교 교조께선 이미 지명으로 예언된 인물이다!" 하고 주장하는 사례는 우리나라의 신흥종교단체에서 꽤 흔하다. 설령 객망리가 강일순이 태어난 곳이 맞다고 해도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 신송마을 신송길32에 姜甑山上帝降世地(강증산상제강세지)란 현판을 단 가옥이 있어 증산종교인들이 이곳으로 순례하러 오곤 하지만, 동네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강일순이 태어났다고 지목하는 곳이 10여 곳에 이른다고 한다. |
(이후 강일순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나이를 언급할 때에는 세는나이로 통일함.)
양반인 진주 강씨의 자손이라고 하나, 강일순이 태어날 무렵에 그 집안은 사실상 농민이었다.[10] 그 집안이 가난하여 다른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강일순에게 기대를 걸고 글공부를 시켰다.[11] 이후 강일순은 훈장 노릇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지는 한학을 익혔다. 머리가 영민했다고 하지만 집안이 어려워 본가와 근처에 있는 외가를 오가며 생활했다.
1884-5년 무렵, 강일순이 14~15살이 되었을 즈음, 글공부를 중단하고 집에서 나와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를 이곳 저곳 떠돌아다니며 머슴살이를 하거나, 나무를 베거나 하면서 입에 풀칠했다고 한다. 그렇게 이삼 년 떠돌아다니다가 그나마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891년, 21살이던 해, 강일순은 동래 정씨 정치환(鄭致煥)의 딸[12]인 정치순(鄭治順)이라는 18살 난 여인과 결혼했다. 그런데 정씨 부인은 어린 시절에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고 얼굴이 얽었다고 한다. 요새 기준으로도 안 좋은 조건인데,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결혼하기에 큰 결점이었다. 증산계 종교들의 경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머니 권 부인이 며느릿감을 너무 까탈스럽게 고르느라 이런저런 후보들을 다 쳐내니 남는 여자들이 없었다. 그래서 다음에는 누구든 청혼만 하면 며느리로 삼으리라 다짐하였는데 정씨 집안에서 청혼하므로 둘을 결혼시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절름발이 여자와 결혼함은 지나친 감이 있다. 실제로는 강일순네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상당한 악조건을 감수하고 아내를 맞을 수밖에 없었을 공산이 크다. 증산도 등에서는 정치순의 성격이 좋지 않아 시부모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정치순을 중요시하지 않는 증산계 종교에서 그 성품을 의도적으로 깎아내렸을 가능성도 있다.
강일순은 결혼한 이후 김제에 있는 처남 정남기(鄭南基)의 집[13]에 서당을 차려놓고 학동들을 가르치며 생활하였다. 집안이 어려워서 도저히 아내를 친가로 데려올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처남 집에는 책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도술이나 술법에 관한 책도 상당수 있어서 모두 독파했다고 한다.
1894년, 24살이던 해에 동학 농민 운동이 바로 고향인 고부군에서 일어났다.
강일순은 어린 시절부터 주술이나 종교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나 고부군은 전라도 동학의 중심지였으므로, 당시 조선에서 신흥종교로 이름을 떨친 동학과 틀림없이 모종의 연관이 닿았다. 하지만 강일순이 동학과 얼마나 관계가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때 아예 동학의 신도로 입교했다는 말도 있으나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강일순이 동학과 관계가 있다고 해도 얼마간 거리를 두었음이 확실하다. 동학군이 가는 곳을 따라다니기는 하였으나 직접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고 형세를 관망할 뿐이었다. 증산종교들의 경전에서는 이때 강일순이 동학군에 합류하려는 사람들을 말렸다고 한다. 만약 사실이라면, 형세를 관망하면서 동학군이 결국 패배하리라 예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1895년,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을미사변이 일어나 명성왕후가 일본인들 손에 죽었다.
동학 농민 운동의 결과를 지켜본 뒤 강일순이 무엇을 했는지 행적이 분명하지 않다. 처남네 집으로 돌아와 다시 훈장 노릇을 하지 않았나 짐작할 뿐이다. 동학 운동의 결과를 지켜보면서 결정적으로 동학에 회의하였음은 분명하다. 강일순은 최제우가 가르친 주문으로 도통한 사람이 없다고 말하며 도통하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애쓴 듯하다. 실제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도술을 부리길 바랐던 것이다.
일부 경전은 이해에 강일순이 어떤 노인으로부터 비서(秘書)를 받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슨 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14]
1896년, 조선은 양력 1월 1일을 기점으로 양력을 도입하고 건양(建陽) 연호를 제정하였다. 고종이 아관파천하였다.
1897년, 27살이던 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칭제건원하여 연호를 광무(光武)라 정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바꾸었다. 이해에 강일순은 처남 집을 떠나 유랑여행을 시작하였다. 여기저기 떠돌아다녔음은 분명하지만 언제 어디를 방문했는지는 알 수 없다. 증산종교들의 경전에서는 이렇게 유랑하던 시기에 김일부를 만났다고 서술한다.
김일부金一夫(1826-1898)는 충청도 사람으로 본명은 김항(金恒)이고 '일부'는 호이다. 남학(南學) 쪽 전승에 따르면 김일부는 이운규(李雲圭)란 선비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고 한다. 주역을 깊이 파고들어 정역(正易)이란 책을 쓰고 영가무도(詠歌舞蹈)라는 주술적인 춤을 만들자 추종자들이 생겨 충청도에서 교단을 창설하였다. 수정 전에는 김일부가 남학을 만든 것처럼 기술되었으나, 남학의 창시자는 김광화로 전혀 다른 사람이다. 남학 교단에서는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도 이운규 밑에서 공부한 적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말을 따른다면 최제우와 김일부는 동문이 되지만, 남학 계열에서만 주장하는 내용으로 역사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다. 세 사람의 나이와 활동시대도 10-20년 이상 차이가 나므로, 이 설은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증산 신봉단체에서 이 설을 퍼뜨려 정설처럼 굳어졌다. 증산도의 도전에는 김일부가 꿈에서 상제를 만났는데, 이튿날 강일순을 만나자 바로 상제의 얼굴이었으므로 크게 경대했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나온 증산천사공사기 등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강일순을 만나기 전날, 김일부가 꿈을 꾸었는데 두 사람이 같이 하늘에 올라가니 상제가 강일순을 매우 칭찬하였다고 한다. 다음 날 강일순이 찾아왔으므로 김일부가 기이하게 여기고 요운(曜雲)이라는 도호를 지어주며 높이 보았다고 한다. 김일부가 1898년에 타계했으므로 그 전년도에 여행을 시작한 강일순과 만났을 가능성이 전혀 없지는 않으나, 정말로 만났을지 상당히 미심쩍다. 또한 강일순보다 50살이나 많은 70대 노인이었으며, 이미 추종자들이 모여 교주로 지내던 김일부가 강일순과 정말로 만났다고 해도 경대하였을지 더욱 의심스럽다. 결정적으로 김일부 계열 교단의 경전에는 강일순을 만났다는 이야기 자체가 없고, 도전보다 먼저 편찬된 경전들(후술된 대순전경 등)의 기록과도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15] 참고로 증산도 측은 자기네 경전이 증산 관련문헌들 중 가장 잘 정비되었고 가장 정확하다고 주장하지만, 일단 제작연대부터 기존문헌들과 달리 현대라, 강일순 추종자들이 대부분 사망하여 직접 만나본 증인은 얼마 없다. 기껏해야 강일순 생존 당시 10대 남짓이던 김호연(1897-1992)을 비롯한 몇몇을 만난 정도. 거기다 기존 문헌들 역시 여러 차례 증언을 재수집하여 많이 개정증보하였다.[16] 무엇보다도 증산도 도전에선 강일순이 죽으면서 자기가 남긴 글을 다 불태우라 명령했다고 서술하지만, 강일순이 쓴 현무경[17]과 강일순이 구술하고 수제자 김형렬이 받아 적은[18] 중화경이 현존한다. |
1900년, 30살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아내 정씨 부인은 강일순을 붙잡고 "이제 가정에 충실하라." 하고 애원했지만 강일순은 아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아내와 집안을 외면하고 도통을 찾아 바깥으로 돌아다녔다. 고향 동네 앞산 시루봉[19]을 오르내리며 주문[20]을 외우고 큰소리를 지르며 다니자, 동네 사람들이 광인으로 취급하여 상종하지 않았다.
강일순이 산에 있는 동안, 정씨 부인이 밥을 해서 집과 산을 오가며 수발했다고 한다. 비록 시루봉이 해발 100 m밖에 안 되는 야트막한 산이지만, 다리를 저는 아낙네가 음식을 지고 오르내리기는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밤중에 배가 고프면 시루봉에서 내려와 가까이 있는 집에서 물 한 잔에 쥐눈이콩[21]을 얻어 먹었다고 한다.
2.2. 도통과 천지공사
1901년, 31살에 전라북도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大院寺)란 절에 들어가 집중적으로 수도하여, 음력 7월의 어느 날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도통의 경지를 얻었다고 주장하였다.[22]증산종교들이 설명하기를, 도통하게 되면 눈앞에 삼계가 환히 보이며 삼생(三生)이 밝게 비치고 일원세계(一元世界)가 눈앞에 있고 사해중생(四海衆生)이 마음에 나타나며, 모든 이치가 뚜렷이 드러나고 만상(萬象)이 펼쳐지며, 서양에도 마음대로 가고 하늘 끝으로 새처럼 날아오르기도 하며, 풍운조화(風雲造化)가 마음대로 되고 둔갑장신(遁甲藏身)이 하고자 하는 대로 이루어지며, 천지가 내 마음과 일체가 되고 삼교(三敎)를 두루 쓰며,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바가 없게 된다고 한다. 이는 제자 김형렬의 증언이다. 대체로 현대에 생긴 증산교단들은 도통을 후천개벽이 마무리된 후에 얻게 되는 경지라 가르친다.
이후 강일순은 확실히 자기 자신을 어떤 신적 존재라고 생각할 만한 말을 하였다. 옥황상제라고도, 미륵불이라고도 하였다. 관련자료들이 온통 강일순을 신화화하고 각 교단의 정통성을 내세우는 방향으로 윤색되어 강일순이 구체적으로 자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하기 어려우나, 세상을 구제할 힘을 얻었다고 생각했음은 분명하다.
도통했다고 한 그해 겨울, 강일순은 고향집에 머물다가 갑자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나 공명첩 등을 싸그리 불태우며 "족보가 나에게서 다시 시작하며, 모든 공명(功名)이 나에게서 다시 새로워진다."(그러니까 이런 족보 등은 필요가 없다.) 하는 요지로 말했다고 한다. 이 광경을 보고 크게 놀라 부모며 같은 마을 친척들이 달려와 말렸으나 강행했다. 이 일이 강순임이 태어난 1904년, 혹은 죽음을 앞둔 1909년에 있었다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다. |
1902년, 32살에 첫 제자 김형렬(金亨烈, 1862-1932)을 만나 그 집에서 거처하였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아는 사이긴 했지만 이때부터 비로소 완전한 스승-제자 관계가 된 듯한데, 김형렬이 강일순보다 9살이 많았다. 이후 강일순이란 사람이 신통한 도인이라는 소문이 돌아 제자가 될 사람들이 찾아왔다.
강일순은 여러 주문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외우게 하고, 세상의 여러 나쁜 것들, 재앙을 없앤다는 여러 가지 주술적인 행위들을 하였다. 이런 행위를 강일순은 '천지공사(天地公事)'라고 불렀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온갖 재앙이며 원한들이 떠도는데, 원한을 풀어주고 천지공사를 함으로써 개벽의 때가 지나가면 살기 좋은 이상세계가 도래한다고 강일순은 주장하였다.
이듬해인 1903년, 김형렬이 집을 전라도 전주군 동곡마을[23]로 옮기자 역시 동곡으로 따라들어왔다. 이후 강일순은 주로 동곡마을 김형렬 집에서 거처하며 본가와 다른 곳을 오갔다. 강일순이 장남으로서 부모를 봉양하거나 하는 일은 이후로 없었다.
1904년, 34살이던 해에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일본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대한제국은 더욱 상황이 어려워졌다.
이해에 딸 강순임(姜舜任, 1904-1959)이 태어났다.[24] 사실 강일순 부부 사이에는 강순임 이전에도 2남 2녀가 있었으나 모두 일고여덟 살에 사망하였으므로, 강순임이 사실상 강일순의 무남독녀였다.
하지만 바로 이해에 강일순은 아내 정치순과 13년간의 혼인생활을 끝내고 이혼하였다. 증산계 종교의 경전들은 정씨 부인의 성격이 좋지 않고 시부모에게 불손하게 대하므로 부모가 강일순에게 아내를 내치라고 지시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정치순이 시부모에게 불손했고 성격이 나빴는지 객관적으로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후대의 증산계 종교에서 강일순을 옹호하고 자기네 계통의 정통성을 위하여 정치순을 부정적으로 설명했을 수도 있다. 설령 그런 설명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본인은 절름발이에 시가는 가난하고 남편은 가정을 팽개치고 도통한다고 돌아다니니, 정씨 부인이 제대로 가정에 전념하고 시부모에게 순종하는 며느리가 되기를 바라긴 무리였을 것이다. 이혼당한 뒤 정씨 부인은 강일순에게 와서 몇 번이고 다시 받아들여달라고 하였지만 강일순이 거부했다고 한다.
그 뒤 강일순은 부모에게 딸 강순임을 맡기며 키워달라고 하고는 고향집을 나왔다.
정치순을 내친 뒤 강일순이 재혼하려고 하므로 맏제자 김형렬이 자신의 3녀 김말순(金末順)을 추천했다. 이때 김말순의 나이 15살. 이후 강일순은 김형렬을 제자이자 또한 장인으로 대우하였으나, 김형렬의 아내가 "이런 혼인은 인정할 수 없다." 하면서 버티는 관계로 식을 올리길 차일피일 미루었다. 비록 식을 치르진 못하였으나 강일순은 죽는 날까지 김말순을 아내로 생각하였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절대 재가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김말순은 강일순 사후 재가하나 곧 병에 걸려 죽는데, 김말순을 낮춰 보는 증산종교에서는 이를 두고 옥황상제 강일순의 말을 무시하고 재가하여 신벌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정작 강일순 본인은 후천에는 과부와 홀아비가 있어선 안 되며 누구나 나이에 맞는 과부와 홀아비끼리 결혼하리라고 했고[25] 아래에 나오듯 후천에는 일부일처라고 주장한 강일순 본인부터 처를 셋이나 두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하였다. 신통한 힘과 구세제민(救世濟民)을 소망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더욱 쉬운 사회상이 되었고, 강일순의 추종자 또한 증가했다.
1907년, 37살이던 해,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여 상황을 바꿔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하여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이해에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을 만나 제자로 거두었다. 본디 강일순은 차경석을 제자로 거둘 의향이 없었으나 차경석이 강일순에게 반하여 끈덕지게 제자로 받아달라고 따라다녔기에 그 고집에 져서 결국 거두었다고 한다. 이후 차경석은 일제강점기에 보천교 교주가 되었다. 그 외에 박공우(朴公又, 1876-1940)ㆍ안내성(安乃成, 1867-1949)ㆍ문공신(文公信, 1878-1954) 등도 이 즈음에 제자가 되었다.
증산종교들의 일부 경전에 따르면 강일순은 차경석을 제자로 받으면서 "네가 나를 다시 깊은 물로 끌어들이는구나." 하고 한탄하거나, 제자들과 다같이 멱을 감다가 갑자기 차경석의 다리를 붙잡고 "이무기 잡았다!" 하고 외쳤다가 차경석이 "제 다리인데요?" 하자 모르는 척 "어, 그랬냐?" 하며 놓아주거나, 갑자기 분노하여 차경석을 향해 역적 놈이라고 외치는 등, 여러 차례 차경석을 견제하는 돌발행동을 보였다고 한다.[26] 그러나 이와 모순되는 기록도 있다. 차경석이 원래 동학에서 꽤 이름 높은 인물이었으므로[27] 강일순이 처음 차경석을 받아들일 적에 수제자 김형렬 등이 "저런 흉악한 인물을 문하에 받아들이면 저희들이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하며 반발하였으나, 강일순은 "용이 물을 얻으려면 가시밭길도 가야 한다." 하면서 강행했다는 구절이 대순전경과 천지개벽경에 있다. 이런 내용에 따르면 오히려 강일순이 차경석을 적극적으로 제자로 받아들이려 한 듯하다. 천지개벽경 등의 내용은 차경석이 고집을 부리므로 강일순이 마지못해 받아들였다는 경전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강일순이 차경석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는 내용을 믿는 증산종교인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강일순은 미래를 보는 신통력으로 차경석이 어떻게 될지 이미 알았지만, 천지공사의 큰 안배에 따라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통력'을 빼고 생각한다면 (차경석의 사촌누이) 고판례와 재혼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건대, 강일순은 차경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고 생각하는 쪽이 더 자연스럽다. 이렇게 보면 강일순이 차경석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구절들은 후대의 증산종교들이 보천교주 차경석을 깎아내리고자 의도적으로 집어넣은 것일 가능성도 있다. 차경석, 박공우, 문공신 등은 원래 동학의 신도였다. 구세제민을 소망하며 도통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이 강일순을 찾아와 모였다고 할 수 있으나, 반대로 강일순이 그런 사람들을 찾아 모았다는 해석도 있다. 최제우의 못다 이룬 꿈, 동학이 이루지 못한 개벽의 소망을 실현시킬 사람이 자신이므로, 동학에서 실망한 사람들을 찾아 모았다는 것이다. 강일순은 자기 가르침을 참 동학이라고 부를 정도로 동학을 강하게 의식했다. |
역시 같은 해(1907), 강일순이 김말순과 식을 올리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다른 결혼할 만한 여자가 있느냐?" 하고 제자들에게 묻자, 차경석은 자기 이종사촌 누나 고판례(高判禮)[28]를 추천하였다. 고판례가 남편을 사별하고 과부로 있었으므로 적당한 짝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12월 8일에 결혼하였다.[29] 이때 고판례 나이 27살이었다.
재혼한 이후 강일순은 주로 거처하는 장소를 전북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 있는 고판례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강일순의 부모가 아직 살아있었지만, 강일순은 새 아내를 데리고 고향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2.3. 말년
고판례와 재혼한 지 두 달도 안 된 1908년 1월 29일, 강일순은 제자 스무 명과 함께 경찰[30]들에게 체포되어 고부 경무청으로 끌려갔다. 제자들 여럿을 모아 의병 거병을 계획한다는 의혹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도 제자들과 모여서 주문을 외우고 주술을 행했음만 확인할 뿐,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설날(1908년 2월 2일)을 유치장에서 보내고 2월 11일에 제자들이 먼저 석방되었다. 강일순은 3월 6일에 석방되기까지 38일간 조사받으면서 고문을 당했다. 이 일로 강일순은 건강을 크게 해쳐서 이후로는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하였다. 또한 '경찰에게 잡혀서도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을 어찌 믿고 따르겠느냐.'면서 제자들 중 상당수가 이탈하였다.[31] 이후로도 강일순에게 새 제자들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참고로 강일순은 처음에는 다른 제자들과 다같이 한 방에 갇혔다가 같이 갇힌 수제자들 중에 친척이 지역 경찰서에 인맥이 닿은 사람이 있어 강일순과 수제자 몇몇이 좀 더 나은 감방으로 옮겨졌는데도, 석방된 뒤 약방을 차리고 대외활동이 확 줄었음을 보면 건강이 매우 많이 망가졌다고 짐작할 수 있다. 1년 반 뒤 죽을 때도 고문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각종 질환으로 고생하다 숨을 거둔다. 증산계 종교에서는 강일순이 감옥에 갇힌 이유를 임진왜란 이후 사명당이 일본인의 가죽을 3백 장씩 조공으로 매년 받으려 하자 일본 공주가 자결하여 자기 가죽을 바치면서 생긴 원한을 풀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전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척 보면 알겠지만 일본공주랑 사람 가죽 조공 운운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임진왜란 후 민간에서 유행한 소설 임진록의 한 판본에서 나온 야사이다[32][33]
강일순은 고부 경무소에서 풀려나온 뒤, 아내 고판례의 집이 아니라 다시 제자 김형렬의 집에 머물렀다. 고판례는 강일순과 결혼기간도 짧았지만, 시부모를 봉양한다거나 고문 때문에 몸을 망친 강일순을 보살핀다거나 해보지 않았다.
그해(1908년) 음력 4월, 역시 동곡마을에 제자 김준상(金俊相)이 살았는데, 그 집 방 하나를 약방으로 꾸며 동곡약방(銅谷藥房)이라 하였다.[34] 약재를 구비하는 등 약방의 형식은 갖추었으나, 제대로 한의학을 배운 적이 없었으므로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번듯한 의원이라고는 할 수 없는, 주술의(呪術醫)에 더 가까웠다.
실제로 강일순은 치료시 주술적인 방법을 자주 사용했으며 약물을 사용할 때도 사물탕과 하풍단을 자주 언급하며 처방했다. 사물탕은 숙지황ㆍ백작약ㆍ천궁ㆍ당귀로 만들어 어린이나 여자의 보약으로 자주 쓰는 아주 간단한 탕약이고[35], 하풍단 역시 수준 높고 복잡한 약이 아니다.[36] 기생충으로 고생하는 사람에게 담배를 피우게 하기도 했는데, 이는 지금처럼 효과 좋은 구충약이 없는 시절에 의학적 지식이 부족한 민간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임시방편적 민간요법이었다.[37] 강일순은 동곡약방에 약장을 만들어 갖가지 약재를 쌓아 놓긴 했지만[38]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제대로 된 의원이 아니었다. 강일순은 이른바 '천지공사'를 하면서 동곡약방을 도술약국(道術樂局)이나 만국의원(萬國醫院)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도술약국이란 호칭은 강일순이 당시 기준으로도 주술적인 치료를 많이 사용했고, 본인도 이를 의식했다는 증거이다. |
경술국치 직전인 융희 3년(1909), 39살이던 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일본은 대한제국 내 의병들을 뿌리 뽑고자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였다.
이해 봄에 강일순은 제자들에게 태을주와 운장주를 가르쳐주었다. 이치복(李致福, 1860-1944) 등이 제자가 되었다. 강일순이 몸져눕기 전에 고향 동네에 다녀와 집안 어른들을 찾아갔으나 집안을 망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고 한다. 족보를 불태운 일이 이 때 있었다는 자료도 있다.강일순은 가뜩이나 건강이 상했으면서도 7월 26일부터 밥도 먹지 않고 그저 소주만 마셨다. 이 시절 소주는 증류해 만들어 도수가 30도를 넘는다. 강일순이 소주에 꿀을 타 마시느라 김형렬 집안에서 꿀을 많이 준비해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명을 재촉하는 짓이라 당장 몸에 영향이 왔다. 강일순은 어디에 누워도 불편했는지 이곳 저곳 장소를 바꾸어가며 누웠는데, 자기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여 김형렬을 불러 업혀 다녔다고 한다.
소주만 마신 지 꼭 2주일째 되는 8월 9일, 음력으로는 6월 24일에 동곡약방 혹은 김형렬의 집에서 사망하였다.[39] 만 37세(세는나이 39세), 대원사에서 도통했다고 주장한 지 만 7년 11개월, 고부 경무소에서 풀려난 지 만 1년 5개월만이었다.
사망하기 전, 김형렬을 통해 김말순을 불러 시중 들게 하라고 하였으나 역시 김형렬의 아내가 반대하여 오지 못했다. 강일순은 노하여 자기가 죽더라도 김말순을 개가시키지 말라고 말하였다. 증산도 도전이나 다른 교단의 경전에는 강일순이 사망하기 직전에 꿀물 한 그릇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 김형렬을 불러 몸을 기댄 뒤, 자기가 제자들에게 알려준 태을주를 낭송하다 숨을 거두었다고 묘사한다. 제자들이 고판례나 객망리 본가에 연락하여 장례를 치렀는데, 당시 전라도 풍습에 따라 시신을 초빈(草殯)하였다.
강일순이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이능화는 <조선도교사>를 쓰면서 강일순을 따르던 신도들이 직접 전하는 최후를 적었는데, 이야기가 서로 다르다며 3가지를 기록하였다.
"나는 이미 천지공사를 다 마쳤으니 이제 가겠다."라고 말하고 갑자기 죽으니 사람들이 신선이 되어 떠났다고 했다.
꿀 한 동이를 마시더니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소와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데 불경한 짓을 하니 신벌을 받아 피를 토하고 죽었다.
꿀 한 동이를 마시더니 갑자기 쓰러져 죽었다,
소와 돼지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데 불경한 짓을 하니 신벌을 받아 피를 토하고 죽었다.
어느 이야기를 따르든 고운 죽음은 아니다. 강일순 교단의 문헌에서도 미화하는 구절들을 한꺼풀 벗겨 객관적으로 보면 결코 편하게 죽었다고 볼 수 없다. 죽기 전 강일순은 황달ㆍ내종(內腫)[40]ㆍ호열자(콜레라) 증상을 보였고 죽기 직전에는 위아래로 피를 쏟는 등 온갖 병증으로 매우 고통스러워하였다.
강일순 숭배단체들은 이때 강일순이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상의 병을 대속하였다고 주장하지만[41][42] 현실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강일순이 대속했다는 병으로 죽어가며, 내성균이 등장하여 증산종교들의 주장과 달리 치료도 쉽지만은 않다. 전후사정과 결과를 따지면, 고문으로 말미암아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장기는 기능저하에 파열이 되어 앓다가 숨을 거둔 것이고, 요약하면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고 하겠다.
대순전경에 따르면 강일순이 죽기 전날 밤에 제자 박공우(朴公又, 1876-1940)를 침실로 불러 같이 자는데, 한밤중에 공우에게 개벽의 날에 닥칠 질병을 막으려면 필요하다면서 의통인패(醫統印牌)를 주고, 비밀을 지키다가 무진년에 너에게 물어보는 사람에게 전하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대순전경을 쓴 이상호가 무진년(1928)에 박공우랑 만나 의통인패를 전해받았다고 한다. 즉 대순전경을 쓴 이상호가 의통인패의 정당한 계승자라는 것이다. 이 일화 때문에 많은 증산교단들이 저마다 의통인패를 이야기하지만, 강일순이 박공우에게만 한밤중에 주었다면 다른 증인이 있을 수 없으므로 박공우, 혹은 이상호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적어도 박공우가 강일순에게 은밀히 의통인패를 받았다고 주장했음은 사실로 보인다.
강일순이 죽고 만 1년이 지난 1910년에 한일병탄이 이루어졌다. 강일순의 제자들은 일제강점기에 주로 활동하였으나, 장수한 몇몇 제자들은 광복을 볼 수 있었다.
2.4. 사후&무덤
강일순의 허무한 죽음을 보고 제자들은 충격을 받아 뿔뿔이 흩어졌다. 고판례는 강일순의 영혼과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리고 강일순이 가르친 주문을 외우는 등 종교적인 행보를 보였다. 강일순의 삼년상이 끝나고 처음으로 맞는 망자의 생일인 1911년 (음)9월 19일[43][44] 고판례는 강일순의 생일을 맞아 치성을 올리는데 갑자기 쓰러지더니만 몇 시간 뒤에 일어나 강일순의 음성으로 말하며 강일순을 만났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일시적으로 고판례를 중심으로 뭉치긴 했으나[45] 이후로는 차경석이 사실상 교단의 전권을 쥐고 전횡을 부려 일순을 직접 시봉했던 다른 제자들이 모조리 흩어져 저마다 교단을 차리고 고판례도 차경석과 결별하였다.그 뒤 강일순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여러 종파로 나뉘었다. 일제강점기에 크게 흥성했던 보천교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유명하다. 그 외에 강일순의 무남독녀 강순임 여사가 세운 증산법종교, 강일순의 맏제자 김형렬이 세운 미륵불교 등이 있다. 증산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종교를 통틀어 증산종교, 혹은 증산계 종교, 증산교(동명의 종교도 존재하니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라고 부른다.
강일순의 시신은 증산종교들이 싸움박질을 벌이는 원인이 되었으나[46] 최종적으로는 1949년에 전북 김제시에 있는 증산법종교 교단 본부 안에 안장되었다.
강일순 유골 영대 이장식 (1949년 음력 4월 8일) |
강일순의 외동딸이자 증산법종교의 창시자인 강순임은 아버지 유해를 모셔와 석관에 안치하면서, 친어머니 정씨 부인의 유해도 석관에 안치하여 아버지 옆에 모시고, 그 위에 영대(靈臺)라는 한옥식 묘각을 세웠다. 영대는 2005년에 등록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되었다.
증산도, 대순진리회 등 강순임을 무시하는 교단에서는 증산법종교의 영대를 아예 언급하지 않거나, 혹은 그 안에 정말로 강일순의 시신을 모셨을 리 없다는 식으로 그 실체를 부정한다.
3. 부인들
강일순은 부인이 3명이었다. 생애란에도 연대순으로 쓰여 있지만 모아서 정리하면 이러하다.정치순(鄭治順) | 생몰년: 1874-1928 | 비고: 강일순의 첫째 부인이지만 이혼당함. |
1891년에 강일순과 혼인하여 남편이 수행할 때 시종을 들었으나, 이른바 대도통 이후 1904년에 시부모와 불화한다는 이유로 이혼당하였다. 슬하에 딸 강순임(舜任)이 있었는데 훗날 순임은 자기 남편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개창하였다.[47] 정치순은 강일순이 죽은 뒤 가난에 시달리다가 딸과 헤어져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태극도를 창시한) 조철제에게 도움받아 겨우 모녀가 상봉하였다. 그러나 모녀가 증산계 종교단체의 정통성 다툼에 이용만 당할 뿐이라 속앓이를 하다가 병을 얻어, 1928년에 5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강순임은 어머니의 박복한 삶을 무척 원통하게 여겼다. 1911년에 고판례가 강일순의 혼령과 만났다며 종교단체를 세우는 모습을 보고, 강일순의 수제자 김형렬은 1914년에 정치순을 찾아와 주문을 외우게 하여 강일순과 접촉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치순이 주문을 외우던 중 실신하며 실패하자 결국 김형렬 스스로 주문을 외우며 수도한 뒤 미륵불교를 세웠다. 김형렬은 고판례가 종통을 받아서가 아니라, 사후에 그 혼령과 만났기 때문에 종교단체를 세울 수 있었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 ||
김말순(金末順) | 생몰년: 1890-1911 | 비고: 강일순과 나이 차이가 많음. 결혼식이나 실제 부부생활을 하지 못함. |
1904년에 강일순이 이혼한 뒤 수제자 김형렬에게 처음으로 수부(首婦)를 세우기로 종용하자 김형렬이 자기 셋째 딸 김말순을 추천하였다. 김형렬은 이후 장인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말순의 나이가 14세인데 강일순은 34살이므로 조선시대 기준으로도 나이가 너무 차이나는 데다가, 나이 차이를 감수하고 혼인시키기에는 강일순의 집안은 아무 별 볼일 없는 가난한 농부네에 불과했다. 강일순을 신앙하는 김형렬이야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 아내는 당연히 이런 결혼을 인정하지 못한다고 크게 반대하였으므로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였다. 비록 끝내 식을 올리진 못하였으나 강일순은 김말순을 아내로 여겼고, 자기가 죽은 뒤에도 재가하지 말라고 하였다. 김말순은 강일순 사후 얼마 안 되어 재가하였으나 급병이 나서 1911년에 21세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 때문에 일부 증산종교에서는 김말순이 강일순의 말을 어기고 재가했기 때문에 벌을 받아 요절했다고 여긴다. 강일순을 따르는 종교단체에서도 김말순은 존재감이 별로 없다.[48] 김말순의 묘소는 전북 김제시 모악산에 있는데, 소규모 증산종교에서 묘소를 관리하는 듯 말끔하다. 묘소 옆에 있는 비석에는 관세음보살화신안동김수부말순지묘(觀世音菩薩化身安東金首婦末順之墓)라는 글귀가 있다. 일부 증산계 종교에서 김말순을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추앙하는 모양이다. | ||
고판례(高判禮) | 생몰년: 1880-1935 | 비고: 실제로 같이 산 기간이 짧음. 본인이 적극적으로 종교활동을 함. |
1907년에 강일순이 다시 수부(首婦)를 세우기를 명하였으므로, 제자인 차경석은 자기 이종누이 고판례가 남편을 사별한 지 5개월째라 추천하였다. 고판례는 아기 시절에 아버지를 여의고 9살에 어머니 손을 따라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로 이사하고, 15살 되는 해에 같은 동네의 사는 신씨와 결혼하여 딸 하나를 두었다.[49] 28살이 되는 1907년에 남편을 사별하자, 차경석이 주선하여 그해에 강일순과 식을 올려 부부가 된 뒤 이른바 고 수부가 되었다. 수부란 '으뜸가는 부인네'라는 뜻이다. 증산도에서는 고판례가 수부가 됨이 매우 중요한 종교적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후에 고판례와 이상호의 증산교와 차경석의 보천교가 나누어고, 자기네 정통성도 고판례에게서 찾기 때문이다. 강일순과 실제 부부로 같이 산 기간이 매우 짧다. 혼인기간이 만 2년이 되질 않으며, 같은 집에서 함께 산 기간도 처음 결혼하고 약 2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강일순은 고부 경무소에서 풀러난 뒤로 죽을 때까지 주로 제자 김형렬의 집과 동곡약방에서 머물렀다. 다르게 말하면, 고판례는 강일순과 결혼기간 중에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낸 적이 없다. 시부모도 모시지 않았고 남편 병수발도 들지 않았으니... 이 때문인지 고판례는 강일순이 1909년에 죽자 그 영혼과 다시 한번 결혼식을 올렸다. 삼년상이 끝난 1911년에 강일순의 첫 생일을 맞이하여 치성을 드리다가 갑자기 기절하더니, 몇 시간 뒤에 일어나 강일순의 혼령을 만났다며 남자의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강일순의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주변으로 모였다. 이 집단은 종교색이 매우 강하였으나 아직 완전히 종교조직으로 체계화하진 못하였는데, 내부적으로는 선도교(仙道敎) 또는 태을교(太乙敎)라는 이름을 사용한 듯하고, 외부에서는 흔히 훔치교라고 불렀다.[50] 그러나 차경석은 어느 사이엔가 무리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다른 사람들이 고판례와 함부로 만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고판례는 차경석에게 불만을 품고 1918년에 스스로 밖으로 나갔으며, 차경석은 남은 사람들을 조직하여 보천교를 창교하였다. 고판례는 거주지를 김제 백산면 조종리로 옮겨 종교단체를 세우고 태을교(太乙敎)하였다. 후에 이상호는 1928년 보천교에서 분열하여 동화교를 창교하면서 태을교와 연합했으나, 이상호 또한 교단 운영에서 고판례를 배제하였다. 이에 고판례는 다시 동화교를 나와 1933년부터 수제자 고민환이 있는 군산 오성산 성덕리에서 은거하다 1935년에 55세로 사망했다. |
정작 강일순 본인은 후천은 정음정양 시대, 여성 해원 시대라고 주장하며 여성의 권리가 신장된다고 예언하였고 천지공사 행위를 할 때 여성을 참여시키거나, 후천 음양 도수를 정하는 행위를 하면서 하늘도 하나고 땅도 하나라며 아내를 하나만 두길 원한 제자 문공신을 칭찬했으니, 전형적인 언행불일치라 할 수 있다.[51]
4. 제자
강일순을 따른 제자 중 핵심적인 사람을 꼽는다면 김형렬ㆍ백남신ㆍ신경원ㆍ김경학ㆍ차경석ㆍ 박공우ㆍ김병선ㆍ안내성ㆍ문공신ㆍ신경수ㆍ이치복 등 11명이다. 다른 제자들도 많이 있지만 크게 강일순에게 관심을 받거나 이렇다 할 도수[52]를 받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정작 도수를 받았다며 한 행적들을 보면 (차경석을 제외하고) 각자 교단을 차리고 도수란 이름으로 강일순 못지 않은 기행[53]을 벌이며 개벽을 기다리다 죽었다.강일순의 제자 차경석은 일제강점기에 보천교(普天敎) 교주가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54] 순수하게 역사적인 의미로는 강일순보다 차경석이 더 중요한데, 일제강점기의 사회상에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보천교의 자체 주장에 따르면 당시 보천교도는 최대 6백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그 영향력 때문에 일제로부터도 지속적으로 압박을 받았다. 보천교도들은 조선에 널리 퍼졌던 예언서들이 교주 차경석을 가리킨다는 요지로 한문 좀 읽는다는 사람들을 설득하여 보천교 신앙촌으로 옮겨오도록 포교했는데, 개중에는 탄갈자(殫竭者)라고 하여 전 재산을 보천교에 바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55] 차경석을 가리켜 차 천자(天子)라 불렀음은 보천교와 차경석의 위세를 보여준다.
그러나 일제뿐만이 아니라 천도교 등 민족종교 계열,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도 보천교를 경계하여 비난하곤 했다. 전 재산을 바친 탄갈자들과 차경석이 진행하는 천자 등극이 특히 비난거리였다. 차경석은 만주에서 소나무를 수입하여 보천교 본부 안에 십일전(十一殿)이라는 건물을 세웠는데 경복궁 근정전에 가까운, 여러 가지로 건방진(?) 전각이었다. 그러나 차경석이 아무리 수행해도 강일순이 말했던 도통을 얻지 못하였다. 차경석은 점점 신앙심을 잃다가, 급기야 강일순을 기만적인 도인으로 판단하여 거부하고 새로운 교리를 세우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보천교인들은 강일순을 신앙대상으로 삼은 구파와 차경석의 변화를 따르는 신파로 나뉘어 큰 내란을 겪었다.
이렇게 일제의 압박, 내분 등 악재로 점차 교세가 약해지던 중 1936년에 차경석이 병으로 사망하였다.[56] 일제는 차경석이 사망하여 보천교가 중심을 잃자마자 곧바로 보천교의 건물 등을 압수하고 유사종교해체령을 내려 당시의 잡다한 증산계 종교를 같이 해산시켰다. 이때 대순진리회의 전신인 무극도 또한 해산됐다.[57] 그리고 보천교 건물이던 십일전을 대한불교 조계종에서 인수, 해체하여 서울로 옮겨 조계사 대웅전 건물로 삼았다.
보천교가 무너진 뒤[58] 오랫동안 증산계 종교는 그 명맥이 간신히 이어졌다. 현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증산도와 대순진리회 때문에 강일순의 이름이 간신히 망각의 늪에서 벗어났다. 이외에는 사단법인 후암미래연구소장 차길진 법사가 보천교와 강일순을 자주 언급한다.[59]
강일순이 데리고 다녔다는 김호연(1897-1992)을 증산도 답사팀이 만나 그 증언을 기록한 테이프를 남겼다고 한다. 증산도 교단은 김호연이 중요한 증인이라고 주장하며 도전에 김호연의 행적과 주장을 적극 반영하였다. 그런데 김호연의 증언은 강일순의 다른 제자들의 증언과 비교해도 유독 환상적이라 그 진실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증산도 교단이 도전 개정판을 내면서 기존 증인들의 증언을 모아 구성한 이야기 사이에 억지로 김호연의 증언이나 행적을 끼워넣었기 때문에, 도전 개정판은 이야기의 흐름이 부자연스럽다.
5. 사진 및 교단별 어진
오성산교단 어진[60] | 사진1[61] | 사진2[62] |
증산참신앙 어진[63] | 증산법종교 어진 | 증산교 본부 어진[64] |
청도대향원[65] 어진 | 증산도 2차 어진 (1976)[66][67] | 증산도 3차 어진 (1990) |
증산도 4차 어진 (1991) | 증산도 5차 어진 (1997) | 증산도 6차 어진 (2018)[68] |
순천도 어진 | 대순진리회 어진 | |
6. 주문
강일순이 제자들에게 가르치거나 보여준 여러 종교적/주술적 행위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태을주와 운장주를 포함한 여러 가지 주문들이다.[69][70] 증산종교 계통에서는 수련한다느니, 공부한다느니 하는 말이 주문낭송을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일 정도이다.강일순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주문들은 무속이나 도교로부터 영향받았음이 눈에 띈다. 도교나 무속에서 사용하는 주문을 조금 바꾸거나, 편집하거나, 덧붙이거나, 혹은 한 구절만 뚝 떼어 사용하기도 하였다. 강일순이 가르친 주문에 있는 도불습합 형식은 무속인들이 사용하는 경문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만 강일순이 사망하던 해(1909)에 가르쳐 주었다는 운장주는 강일순의 오리지널이다. 일부 무속경문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나 도교적인 용어가 보이긴 하지만, 기존에 있는 주문들을 바꾸지 않고 강일순이 창작하였다. 태을주 또한 강일순이 창작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강일순은 동학의 주문인 삼칠주(三七呪)[71]를 제자들에게 읽게 하기도 했다. 다만 증산계 종교에선 삼칠주를 읽는 순서와 방법이 일반적인 동학 계열과 다르다. 천도교 등 동학 계열 종교들은 '강령주문'(지기금지원위대강)과 '본주문'(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을 구분하고, 강령주문을 읽은 뒤 본주문을 읽는다. 이에 반해 증산계 종교들은 둘을 구분하지 않고 합쳐서 '기도주', 또는 '시천주주'라고 부르며, 본주문을 먼저, 강령주문을 나중에 왼다.[72] 순서와 구분이 정 반대인 것. 강일순은 교리에 대한 이해도 부분은 둘째 치더라도 대놓고 "내 가르침이 참동학이다." 하고 말했을 정도로 동학에 많이 경도된 인물이었다.
이와 별개로 강일순 본인은 당시 조선에서 의학 목적으로 널리 퍼졌던 수련도교 쪽의 내단수련[73]에도 관심이 많았다. 강일순이 비밀리에 소장했던 ≪정심요결(正心要訣)≫이란 책이 있는데, 중국 영보파(靈寶派)에 연원이 닿는 내단 수련서였다. (훗날 원불교의 2대 교주가 되는) 정산(鼎山) 송규(宋奎)[74]가 도를 구한다며 1917년에 전라도로 가서 강일순의 유족들과 추종자를 만난 적이 있다. 원불교 자료에 따르면 이때 강일순의 딸 강순임이 아버지 생전에 "지시가 있었다." 하면서 강일순이 은밀히 소장했던 정심요결을 건네주었다고 한다.[75] 송규가 소태산을 만나 귀의한 뒤, 원불교 교단에서는 1927년에 초기 수양교재인 수양연구요론을 펴내면서 정심요결을 약간 편집하여 ≪정정요론(定靜要論)≫이란 이름으로 수록하고, 다른 도교 계통의 서적과 합본하여 출간하였다. 원불교대사전 링크 1954년에 송규가 정정요론을 다시 편집, 문장을 다듬어 ≪수심정경(修心正經)≫이란 이름으로 출간하였다. 이를 놓고 증산도 측에서 원불교를 강일순 교단의 아류로 폄하하기도 하여 서로간에 마찰이 있다. 강일순은 내단학에 상당히 심취하여 제자들에게 몸을 움직이지 말고 잡념을 때고 정심하라고 정심요결 명상법으로 공부시키기도 하였다.[76][77]
7. 신농
강일순의 집안인 진주 강씨는 가문이 염제 신농씨로부터 유래했다고 주장한다.[78] 신농씨가 스스로 성을 강(姜)씨로 정한즉, 그 혈통이 강태공과 강이식 장군을 통해 진주 강씨로 내려왔다는 것이다.[79] 이 때문에 강일순은 신농씨를 특별하게 여기고 자기의 종교적인 주장에도 신농씨에게 특별한 위상을 부여했으며, 스스로가 신농씨와 태공망의 후신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강일순은 태을주도 신농씨에게 제사를 지낸 후 반포한다며 제자 안내성에게 술을 사오라 했을 정도.기유년(1909) 신농씨 공사를 보실 때 가라사대 "태고에 염제신농씨는 입으로 백가지 풀잎의 맛을 보아 약을 써서 병을 낫게 하였으되, 너희들은 입으로 글을 읽어서 창생을 구출하라." 하시며, 이어서 가라사대 "소가 풀을 먹을 때 입으로 훔처 먹으니 훔치 소리요, 이 또한 천지부모를 부르는 소리니라. 송아지가 어미를 부르는 것과 같으니, 이는 곧 한울님을 부르는 소리요, 낙반사유(落盤四維)가 인의예지(仁義禮智)니, 이 네개의 젖꼭지를 잘 빨아야 살 수 있을 것이니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천지만물이 한울(天)을 떠나면 명이 떠나는 것이니 태을(太乙)을 떠나서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으리요. 태을주(太乙呪)는 곧 약이니 이 약을 먹지 않고는 살지 못하리라." 하시였다 하니라.
정영규 천지개벽경에서 인용
정영규 천지개벽경에서 인용
8. 천지공사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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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공사는 도운(종교)과 세운(정치)으로 나뉜다. 세운은 추종자들 주장일뿐이고 도운이 중요한데, 강일순은 제자들을 데리고 천지공사라는 이름으로 주술행위를 하였을 뿐 따로 조직화된 종교를 만들지는 않았다. 사후에 제자 등 사람들이 종교단체를 세운 것이다. 처음에는 강일순의 셋째 부인 고판례를 중심으로 교단이 형성되었으나 중심인물이 차경석으로 바뀌자, 강일순의 다른 제자들도 저마다 교단을 조직하여 운영한다. 차경석이 보천교라는 이름을 사용했듯 다른 제자들도 저마다 자기 종교의 이름을 지어 사용하였으나, 편의상 창교자의 이름을 따서 부르곤 한다. 대표적으로 안내성 교단, 박인암(박공우) 교단, 문공신 교단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유사종교 해산령을 내리는 등 탄압을 받아 교세가 위축되었으나, 광복 이후로 다시 포교가 활성화되어 많은 교단이 복구되거나 새로 생겼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증산계 종교는 종류는 무척 많으나 대부분 교세가 실로 미미하다. 대순진리회와 증산도를 제외한 증산계 종교 대부분은 적극적인 포교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가족이나 친척 단위로 신앙활동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에 흥성한 보천교도 지금은 간신히 명맥만 잇는 수준. 증산계열에서 가장 교세가 큰 종교는 앞에서 언급했듯 증산도와 대순진리회이다. 증산도에서 대순진리회를 무수히 공격했기 때문에 증산도에서 대순진리회가 분파된 줄 아는 사람들도 많으나, 실상 두 종교는 증산 강일순이 신앙대상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계보상 겹치는 부분이 전혀 없다.
1962년에 발각되어 큰 사회적 물의를 빚은 용화교(龍華敎)도 증산종교의 일파로 강일순을 미륵이라 믿었다. 용화교는 교주 서백일이 여신도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재산을 가로채 경찰에 수배되기도 하면서 유명해졌다. 1966년에 교주가 소윤하(蘇潤夏)라는 당시 20대 청년에게 피살당하여 큰 타격을 받았으나, 교단은 현재 <대한불교 용화종>이라는 불교종파로 존재하고 창교주 서백일을 없는 역사로 취급한다. 소윤하는 출소 이후 쇠말뚝 뽑기 운동을 전개하여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명백한 살인사건이었음에도 교주 서백일이 주변 사람들에게 가한 횡포가 인정되어 처음부터 낮은 형량을 받은 듯하다.
현대에도 새로운 증산종교들이 생기곤 한다. 증산도에서 다른 교단이 분열한 사례로 1980년 배승환의 태을선도회(2004년 태을선도), 1998년 이훈오의 태을도, 2009년 강석봉의 천지조화정부, 2013년 노상균과 이석남의 증산참신앙(2016년 정연준과 이흔순의 증산법륜도, 2017년 노상균의 증산선도), 증산도를 세운 안세찬(안흥찬)의 아들 안병섭과 안정주의 증산도 혁명(증산의 도) 등이 있으나, 그 교세는 여타 소규모 증산계 종교와 마찬가지로 미미하다.
8.1. 강일순 직계제자 혹은 가족이 세운 교단
교명/통칭 | 창교주 | 창교년도 | 비고 |
선도교(仙道敎)? | 고판례 | 1911 | 최초의 증산교단, 보천교로 이어짐. |
1911년에 고판례가 강일순의 3년상 후 첫 생일을 맞아 치성을 드리던 중 일어나 강일순이 혼령의 목소리로 말하면서 성립된 종교색이 매우 짙은 공동체. 고판례의 집이 있는 전북 정읍시 대흥리를 중심지로 삼아, 완전한 종교단체로 조직되지는 못하였으나 종교성이 짙은 집단을 이루었다. 교단 내부적으로 공적인 자기네 교명을 정한 바 없으나 선도교, 또는 태을교(太乙敎)란 명칭을 사용한 듯하다. 외부에서는 흔히 훔치교(吽哆敎)라 불렀는데, 이는 증산종교인들이 흔히 외우는 태을주의 첫 구절이 '훔치훔치'로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우리말 '훔치다'와 연관지은 멸칭이기도 하였다. 고판례를 중심으로 강일순의 제자들과 추종자들이 모였으나, 어느 사이엔가 차경석이 무리의 주도권을 쥐고 고판례와 다른 신도들이 쉽게 만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고판례가 이를 불만스럽게 여겨 1918년에 무리를 벗어나 김제시로 옮겨가자, 남은 사람들은 오롯이 차경석의 사람들이 되었다. 고판례는 1931년에 이상호의 동화교와 합쳐 독립된 교단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1933년에 군산시 오성산 인근에서 제자 고민환의 도움을 받아 은거하다 숨을 거두었다. 본인이 독립된 교단을 세우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나, 고판례를 자기네 정통성의 시작점으로 보는 증산종교들이 존재한다. 고민환, 이기국, 백윤하 등이 고판례로부터 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각자 종교를 세웠다. 고민환의 주변에 모인 신자 집단은 이후 큰며느리 일월당 김순자(金純子)가 시아버지의 계통을 이어 치성을 드리는 종교활동을 이끌었으며, 1996년에 김순자가 사망하자 아들이 몇 안 되는 신자들을 이끈다. | |||
증산대도교 외 | 안내성 | 1913/14 | |
흔히 안내성 교단이라고 부른다. 경만(敬萬) 안내성(安乃成, 1867-1949)은 강일순이 죽던 1909년에 강일순으로부터 현무경을 받으면서 "너는 3년간 자리를 떠나지 말고 태을경을 읽어라." 하는 말을 듣고, 강일순이 죽은 줄도 모르고 집에서 수련했다고 한다. 3년을 채운 1911년에 나와보니 고판례가 선도교를 세웠으므로 함께 하였으나, 차경석과 충돌하여 1913년, 또는 14년에 고향 여수로 돌아와 따로 종교단체를 창교하였다. 1927년에 김제시로 본부를 옮기고 신자들을 불러모아 신앙촌을 만들었다. 안내성은 자신이 강일순으로부터 신통력을 받았다고 말하고, 신자들에게 주문을 지정하여 각 주문을 일정기간 동안 외우게 했으며, 기간을 다 채우면 다른 주문을 외우게 하였다. 1930년 즈음에 보천교의 내분으로 신자들이 떨어져 나오자 흡수하여 교세를 키우고 1931년에 교명을 증산대도교(甑山大道敎)라고 하였다. 이 외에도 여러 번 이름을 바꿔 교단의 이름을 하나로 정하기가 어렵다. 1949년에 안내성이 죽자 교세가 크게 위축되고 여러 파로 나뉘었다. 백운기란 사람이 강일순을 천황(天皇), 안내성을 지황(地皇), 자기를 인황(人皇)으로 칭하여 나온 파와, 이를 거부하고 나간 파들이다. 이중 백운기 집단은 맥이 끊겼고 다른 파도 교세는 미미하다. 홍범초가 저술한 범증산교사에 따르면 현무경을 안내성이 가지고 있었는데 차경석이 인수했다고 한다. | |||
미륵불교 | 김형렬 | 1915 | 강일순의 수제자가 세움. |
강일순의 수제자 태운(太雲) 김형렬(金亨烈, 1862-1932)이 세운 교단. 1911년에 고판례 주변으로 신자들이 모이자, 김형렬은 강일순의 첫 부인 정치순에게 다가가 역시 고판례처럼 강일순의 혼령과 접촉하게 하려고 하였다.[80] 그러나 정씨 부인은 김형렬이 시키는 대로 주문을 외우던 중 기절할 뿐 특별한 영험을 보이지 못하자, 결국 1915년에 자신이 직접 (강일순이 도통을 얻었다는) 모악산의 금강대(金剛臺)에 들어가 백 일간 수련한 끝에 신안(神眼)을 얻었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김형렬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김형렬은 희한하게도 태을주를 사용하지 않고 동학의 삼칠주(21자 주문)를 중시하였다. 또한 강일순을 미륵이라고 말하고, 금산사에 있는 미륵불상에 강일순의 혼령이 깃들었다 하여 금산사에 작은 사무소를 짓고 교단 본부로 삼았다. 이후 금산사에서 치성을 드리다가 독립운동을 모의한다는 밀고로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으며, 신도들 중에 죽은 사람도 나왔다. 보천교가 망하리라 예언하였는데 과연 보천교에 내분이 일어나 갈라지자 예언이 맞았다 하여 입교자가 늘었으며, 보천교 탈퇴자 일부를 흡수하였다. 강일순의 일대기를 기록하려는 이상호를 만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미륵불교는 이렇게 김형렬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럭저럭 발전하였으나, 예언이 틀리자 실망하여 신도들이 나가는 등 부침을 겪고 1932년에 김형렬이 사망하자 교세가 폭락하였다. 이후 교단이 분열하였으나, 그중 일부가 1951년에 미륵불교 법상종(彌勒佛敎 法相宗)이라는 불교종파로 문광부에 등록하였다.[81] 미륵불교 법상종이 대한불교 법상종에 흡수되었단 자료도 있고, 따로 '미륵불교 법상종 총본부'라는 이름을 쓰는 교파도 있어서 확인이 필요하다. | |||
태을교 | 박공우 | 1916? | 의통인패를 받았다고 주장한 사람임. |
인암(仁菴) 박공우(朴公又, 1876-1940)의 이름을 따서 박공우 교단, 혹은 박인암 교단이라고 부른다. 박공우는 강일순이 죽기 전날 밤에 몰래 의통인패를 받았다고 주장하여, 후대의 증산종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강일순이 죽은 뒤 (강일순의 또다른 제자) 김경학이 모악산 금산사 미륵불상 앞에서 기도하여 강일순의 혼령을 만났다고 말하자, 여기에 자극 받아 자기에게도 도움을 달라고 기도하여 힘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정읍에서 포교하다가 1916년에 태인으로 옮겨 ‘태을교’란 이름으로 포교하였으며, 1926년에는 다시 금산으로 옮겼다가 1940년에 숨을 거두었다. 이후 박공우의 맥을 이은 종교단체는 미미하다. 강일순으로부터 사람(이상호)이 올 때까지 입을 곤륜산같이 무겁게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 |||
보천교 | 차경석 | 1918? | 증산종교 역사상 최대종교였으며 일제강점기에 크게 흥성했으나 쇠락함. |
월곡月谷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이 세운 교단. 차경석은 이종 누나 고판례가 1911년부터 모아 생긴 신자단체를 흡수하여 결국 독자적인 교단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6백만 교도를 모았다고 주장했는데, 과장이 섞였다 해도 몇백만 명 정도는 실제로 모은 듯하다. 1918년에 고판례가 무리에서 나가자 남은 신자들을 이끌고 종교단체로 조직하였다. 1921년에는 (오늘날 경상남도 함양시에 있는) 황석산(黃石山)에 올라 천제(天祭)를 지냈는데, 축문에서 나라 이름을 대시국(大時國), 교명을 보화교(普化敎)라 밝히고 제사를 끝낸 뒤 일제의 감시를 피해 달아났다. 이 일로 차경석이 차 천자라 불리고, 교단의 직위가 미래에 조선 땅에 세워질 나라의 계급이라는 소리가 돌았다. 강일순을 천사(天師)라 부르며 교조 겸 신앙대상으로 삼았으나, 훗날 차경석이 강일순에 대한 신앙심을 버리면서 교단이 둘로 쪼개졌다. 1936년에 차경석이 죽자 일제는 유사종교해산령을 내려 교단을 해체하였다. 광복 이후에 교단을 복구하였으나 교세는 미미하다. 자세한 내용은 보천교 항목 참조. | |||
? | 문공신 | ? | |
흔히 이름을 따서 문공신 교단이라고도 하고, 문공신이 강일순에게 영산(瀛山)이라는 호를 받았으므로 문영산 교단이라고도 한다. 그 이름대로 문공신(文公信: 1878-1954)을 중심으로 하였다. 문공신은 전라도 정읍 사람인데 천주교에 입교하였을 때 얼마 되지 않아 구절을 외워 신부가 놀라 대재라고 하였다고 한다. 강일순 사후 수도에 전념하고 7년 천지공사를 보며 소탈하게 살았다고 한다. 문공신 사후에 김동섭(金洞燮)이 교단을 이끌었으나 현존하는 교세는 미미하다. 조철제가 강일순의 시신을 가져갔으므로 추적하여 잡았으나 조철제에게 역신고를 당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강일순의 시신 사건은 조철제의 추종자인 태극도 신자들이 설명하는 바와 다른 증산계 종교 신자들이 설명하는 바가 매우 다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항목 참조. 아무튼 조철제와 시신을 둘러싸고 싸우다 옥고를 진 일로 일부 증산종교인들에게는 의로운 사람이라 존경받는다. | |||
제화교(濟化敎) | 이치복 | ? | |
강일순이 말년에 거둔 제자 이치복(李致福: 1860-1944)이 세운 교단. 이치복은 정심요결을 공부하였다. 삼덕교를 세운 허욱에게도 도를 전해주었다 한다. | |||
증산법종교 | 강순임 | 1937 | 강일순의 무남독녀 강순임이 남편과 함께 세운 교단. |
증산 강일순과 첫째 부인 정치순 사이에서 태어난 무남독녀 강순임이 중심이 되어 1937년에 창교한 단체이다. 강일순이 숨을 거둔 후 시신을 둘러싸고 다툼과 문제가 많았는데, 강순임 생전에 증산법종교의 신앙대상이자 자기 아버지기도 한 강일순의 유해를 증산법종교 내부로 이장하였다. 여러 증산종교인들이 강일순의 무덤에 참배하고 증산미륵존불상을 보고자 증산법종교 중앙본부로 순례하러 오지만, 일부 증산종교에서는 강일순이나 고판례가 했다는 예언적인 발언을 내세워 무덤의 진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경, 화은당실기, 증산법종교 60년사 등 다양한 서적들을 간행하였다. 증산법종교의 건물은 시대의 양식을 파악하는 데 중요하다는 이유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강순임의 남편 김병철(金炳澈)이 전처 사이에서 낳은 김삼일이 양모 강순임의 후계를 주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청도대향원을 세워 분파하였다. 홈페이지 |
8.2. 그 이후의 교단
교명/통칭 | 창교주 | 창교년도 | 비고 |
모악교(母岳敎) | 여처자 | ? | 교단으로 조직화되지 않음. |
경상남도 하동군에서 출생한 여처자(余處子, 1887-1954)의 교단을 흔히 일컫는다.[82] 차경석이 황석산에서 제사를 올릴 적에 자리에 참석하는 등 보천교와 관계가 깊어서 보천교도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여처자가 보천교에 입교한 적은 없다고 한다. 차경석에게 청혼받았으나 거절했으며, 여러 기행과 신기로 추종자들을 많이 모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례로 6.25 전쟁을 예측했다는 일화가 있다. 모악교에서는 여처자를 본주(本主), 인정상관(仁正上觀)이라고 부른다. 증산교 대법사와 마찬가지로 용화동에 본부가 있지만, 지금은 그 세가 미미하다. 여처자가 종교화에 별 관심이 없었고, 추종자들도 여처자가 사망한 이후로 조직을 구성하지 못하고 흩어졌으며, 지금은 나이든 추종자들이 소수 모이는 정도인 듯하다. 여처자의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추종자들이 뭉친 모임 정도였으므로 교단으로 언제 성립되었다고 시기를 말하기가 어렵다. 1995년에 정신세계사에서 박문기(朴文基)라는 사람이 여처자 이야기를 소설화한 책 본주(本主)를 출판하였으나 절판되었다. 저자 박문기는 여처자가 거둔 수양딸 최영단의 아들이라고. | |||
삼덕교(三德敎) | 허욱 | 1920 | 이치복에게서 도를 전해받았다 함. |
1920년 전라남도 보성 출신 허욱(許昱, 1887-1939)이 창교한 종교. 정통성을 강일순의 말년 제자 이치복에게서 찾는다. 창교주 남송 허욱은 1935년에 총독부가 유사종교해산령을 내리자 반일투쟁에 참가하여 독립지사들과 접촉하였으나, 1939년에 일본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1945년에 광복이 되자 허욱의 아내 정미봉(鄭米峰)을 중심으로 삼덕교를 재건하고, 서상범(徐相范)을 교단의 대표로 추대하였으며, 본부를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 아래로 옮겼다. 2012년에 종교법인을 설립하여 등록하였다. 김제시에 본부가 있으며 경전으로는 남송선생실기(南松先生實記), 생화정경(生化正經) 등이 있다. 네이버 카페 | |||
태극도(太極道) | 조철체 | 1921 | |
1918년에 조철제(趙哲濟, 1895-1958)[83]가 세운 교단. 첫 교명은 무극도(无極道) 또는 무극대도(无極大道)라고 하였다.[84] 태극도 경전에서는 조철제의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철제는 식민지가 된 조선의 현실을 견디지 못하여 (오늘날 경상남도 함안에 있는) 고향에서 고리대금업을 하던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인에게 사기를 쳐서 거액을 마련한 뒤, 화약공장을 만들고 무기를 모으다가 들통이 났다. 15살 되는 1909년 6월 15일(음 4월 28일), 일본제국 경찰을 피해 창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만주로 가족들을 데리고 만주로 피신하고자 하였다. 이날 오후 1시가 지나 기차가 대전에 이르렀을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았다. 환상 속에서 웬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대를 기다린 지 오래되었다. 그대는 내 도통을 이어 무극대운의 공사를 이루라. (중략) 그대의 호는 정산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 시루와 솥의 사이)이 되어 도로써 한 몸을 이루리라. 나는 구천(九天)의 천존상제(天尊上帝)니라.” 하고 말했다.[85] 그 뒤 조철제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종교적 수련을 병행하여 강일순으로부터 여러 가지 신통을 받았다 주장한다. 1917년(23살)에 강일순의 신탁을 받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1919년에 강일순의 여동생 선돌부인을 만나, 선돌부인이 사는 집에서 영감이 내려 강일순이 숨겨둔 주문서과 (강일순이 쓴) 부서符書 현무경을 찾아내었다. 1921년(27살)에는 강일순의 유족들과 의논하여 초빈을 파하고 백골을 꺼내어 따로 모시고 조석으로 치성을 드렸는데, 태극도 교단은 이때 비로소 조철제가 교단을 처음 창설했다고 간주한다. 그러나 1922년, 강일순의 제자 문공신 등 일행 스무 명이 들이닥쳐 조철제가 만든 신단을 파괴하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을 두들겨 팼으며, 강일순의 백골을 챙겨 자리를 떠났다. 이때 조철제도 오른쪽 손목을 맞아 뼈가 부러졌다고 한다. 이런 소란에 강일순의 왼손 뼈만 남았으므로 이를 따로 챙겼다. (이 사건에 대해서 다른 증산교단들은 완전히 다르게 주장한다. 다른 교단들 주장에 따르면 조철제는 강일순의 유족들 몰래 초빈을 파헤쳐 시신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공신이 분을 참지 못하고 사람들을 이끌어 시신을 되찾아 왔으나, 조철제가 문공신 등을 고발하여 법원의 판결을 받았는데, 조철제는 뇌물을 먹여 고작 1년밖에 형을 살지 않았으나 문공신은 7년간 복역해야 했다고 한다. 이 사건의 진실 여부를 두고 태극도/대순진리회 사람들과 다른 증산종교인들이 서로 싸운다.) 1935년에 총독부가 유사종교해산령을 내려 교단이 해산되었지만, 광복 후 조철제는 1948년 부산에서 추종자들을 모아 교단을 복구하고, 교명을 무극도에서 태극도(太極道)라고 바꾸었다. 그 뒤로도 교단을 이끌며 종교생활을 하다가 1958년 4월 24일 부산 본부에서 만 62세[86] 숨을 거두었다. 부산 감천동 태극도 마을(감천문화마을)이 바로 태극도 신앙촌이다. 태극도에서 훗날 대순진리회가 갈라졌다. 2001년에는 조철제의 아들과 태극도 교단이 조철제의 무덤 이장을 두고 법정공방을 벌였다. 조철제 사망 이후 교단에서 무덤을 관리했는데, 유족들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나자 무덤 자리가 나쁘서 그런가 싶어서 이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교단이 이장에 반대하자 유족들이 법원에 소송한 것이다. 부산고법은 '태극도 교단이 40여 년간 망인의 분묘를 잘 관리했고, 그 유족들도 여기에 별 이의가 없었으므로 이제 와서 무덤을 이전하거나 인도를 요구할 수는 없다.'고 판결하여 언론에 보도되었다. 연합뉴스 보도내용 홈페이지 | |||
순천도(順天道) | 장기준 | 1920 | |
강일순이 부적 등을 그려 남겼다는 현무경(玄武經)을 중심으로 하는 파. 장기준(張基準)이라는 사람이 강일순의 수제자 김형렬의 밑에서 있었는데 김형렬의 예언 등이 실패하자 크게 실망하여 이탈하였다. 그 후 차경석 집에서 필사한 현무경을 바탕으로 공부하다가, 1917년 고향 순천 쌍암(雙岩)에 있는 제왕봉(帝王峰)에 올라가 서전 서문을 1만 번 읽은 끝에 현무경의 깊은 뜻을 깨쳤다고 한다. 1920년에 강일순의 제자 김경학(金京學)에게 연원을 받아 순천도를 창교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종교단체로 운영되며 신도들은 직접 현무경을 그리며 공부한다. 다른 증산계열 종교와 달리 강일순의 본의가 주문이 아니라 현무경에 있다 하여, 주문에는 관심이 없고 현무경에 집중한다. 1922년에 장기준이 사망한 뒤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 |||
오성산 성덕리 교단 | 김순자 | 1936? | |
강일순의 셋째 부인 고판례는 오성산 성덕리에 사는 수제자 고민환 집에서 1935년에 사망하였다. 1936년부터 1996년까지는 고민환의 큰며느리 일월당 김순자(金純子, 1920-1996)가 고판례를 보고 모인 신자 집단을 이끌었으며, 지금은 고민환의 손자가 이끈다. 편의상 ‘교단’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모악교와 마찬가지로 조직화되지 않았으므로 명확한 성립시기를 말하기가 어렵다. | |||
증산교 본부 | 이상호 | 1945 | |
청음(靑陰) 이상호(李祥昊, 1888-1966), 남주(南舟) 이정립(李正立, 1895-1968) 형제가 1945년 광복 후 세운 교단. 이상호는 한학에 통달한 사람이었고 이정립은 일본에 유학까지 한 지식인이었다. 본디 보천교의 신앙인으로서 월간지 보광을 발간하고 시대일보를 인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이후 강일순의 수제자 김형렬 등을 만나기도 하였다. 형제가 강일순의 둘째 부인 고판례를 모시고 동화교를 창립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탄압을 받아 해산하였다. 광복 후에 증산교 대법사를 창립하였다. 이상호 이정립 형제는 증산계열 종교단체에 필요한 여러 책을 다수 집필하였다. 증산계열의 대표적인 경전인 대순전경을 비롯하여 대순전경의 전신인 증산천사공사기를 비롯하여 고부인신정기(천후신정기)ㆍ대순철학ㆍ증산교사 등 여러 저서를 남겨 강일순의 흔적을 후대에 전했다. 범증산교사를 작성한 홍성렬(범초)교수가 증산교 대법사에서 종령을 역임하였고 이중성의 천지개벽경과 다른 천지개벽경과 선도신정경을 발간한 정영규 선생도 이곳에서 종령을 역임하였다. 아직도 신앙인들이 있어 신앙을 계속 이어간다. 본부는 김제시 금산면 용화동에 있는데, 통천궁을 중심건물로 삼고, 강일순이 박공우에게 전해주었다는 의통인패의 원본을 보관한다. | |||
대순진리회 계통[87] | 박한경 | 1969 | |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증산계열 종교로, 태극도 도전이었던 박한경이 창교하였다. 증산계통 종교에서는 신도수가 가장 많다. 대한민국 인구주택총조사의 종교 항목에서 명시된 8개 종교명에 대순진리회가 있을 정도였다. 즉, 대순진리회 하나만으로도 통계상 대한민국 8대 종교에 해당한다. 1대 교주 박한경 도전이 사망한 뒤 현재 수십 개 방면으로 분열되었는데, 심지어 분열된 방면들도 증산계통 종교 중에서는 규모가 상당할 정도이다. 증산도 신자들도 교리서 표절이나[88] 사칭 등 이유로 대순진리회를 매우 싫어한다. 대순진리회에서는 사회복지, 교육사업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하는데, 대표적으로 대진대학교와 상생복지회 등이 있다. | |||
진혜원(眞慧院) | 장영주 | 1970 | 증산도의 ‘마패’와 얽혀있다. |
호산 장영주가 1970년 경기도 고양군에 처음 세운 종교단체. 지금은 충청남도 서산시로 옮겼다. 강일순을 미륵으로 믿는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
증산도 | 안세찬 | 1978 | 현존하는 가장 활발한 증산계 종교 |
1978년에 대법사 증산교라는 교명으로 창교되었으나 1984년에 '증산도'라는 교명을 확정하였다. 1980-90년대에 유행한 민족주의에 편승하여 역사 바로찾기 운동을 하는 등 포교와 연결지어 활용하여 교세가 빠르게 확장되었다.[89] 이러한 포교전략은 특히 대학생들에게 먹혀서 전국 대학 동아리방에 증산도 학생회가 폭넓게 조직되기도 하였는데, 이때 입교한 대학생들이 나중에 증산도의 중심적인 세대가 되었다. 케이블 방송국(상생방송)을 개국하여 태상종도사 운산 안세찬, 종도사 경전 안중건의 환단고기 북콘서트 등 다양한 컨텐츠를 포교에 활용한다. 증산계통 종교들 중 가장 이론적인 교리 정립에 심혈을 기울인 단체로 평가받는다. 교단에서는 자기네 경전 '도전'이 기존 다른 증산종교들의 경전 내용에 자신들이 답사하고 확인한 내용까지 더하여 내용이 가장 정확하고 풍부하다고 선전하며, 외국어로 번역도 하였다.[90] 산하 출판사 상생출판은 강일순의 사상이나 관련도서, 그리고 환단고기 등을 발간한다.민족주의를 적극 받아들여 환단고기 등 유사역사학적 주장이 교리의 일부나 다름없다. 그 외에도 채널러들의 주장과 지구공동설 등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였다. 본부는 대전광역시 한밭대로에 있는 태을궁 증산도교육문화회관이다. 홈페이지 |
8.3. 여타의 증산계 종교
- 증산진법회
- 태을선도
- 태을도
- 풍류도
- 천지조화정부
- 현무경미륵천도회
- 증산법륜도
증산도에서 나온 노상균과 이석남 등이 2013년에 만든 구 증산참신앙으로 대전에 본부가 있다. 2017년 3월에 증산선도라 개명했으며 2017년 6월에 노상균은 증산선도 대표직을 사퇴하였다. 홈페이지
- 단월드(단학선원)
현대에 들어 새로운 종단을 형성하기도 하지만, 증산계통 종교인들이 종단을 만들지 않고 개인적으로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공부방' 형식으로 운영하는 곳들도 많다. 대표적인 곳이'증산천도현서'를 집필한 방도 김기병이 춘천 퇴계동에서 '천부경과 증산천지공사'를 집필한 현암 석명수가 전라북도 군산시 방축도에서 운영하는 공부방. 이 밖에도 여러 작은 공부방들이 있다.
9. 옥황상제
증산계 종교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말 그대로 옥황상제. 동시에 자신은 세상을 구제하러 온 미륵불이고, 재림한 예수이며, 자신보다 먼저 활동한 최제우에게 계시를 내린 상제도 자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부분에는 논란이 있다. 불교와 동학에서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불경과 용담유사/동경대전에 실린 내용이나 사상의 지향점이 전혀 다르다 보니 이를 인정하지 않으며,[92] 딸 강순임이 세운 증산법종교에서는 강일순을 증산미륵이라 칭하는 동시에 태상상제라는 존재와 더불어 증산과는 별개로 옥황상제를 놓고 둘을 중심으로 하는 대령전이라는 건물을 지어놓고 별도로 제사를 올리며, 초기문헌인 대순전경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충청도 연산에 이르사 역학자 김재일(김일부)에게 들러시니 이때 재일의 꿈에 하늘로부터 천사(天使)가 내려와서 강사옥[93]과 함께 옥경에 올라 오라는 상제의 명을 전하거늘 재일이 상제(강일순)와 함께 천사를 따라서 옥경에 올라가 요운전이라고 액자가 써 붙여진 장려한 금궐에 들어가서 (옥황)상제께 뵈이니 (옥황)상제가 상제(강일순)께 대하여 광구천하 하려는 뜻을 칭찬하며 극히 우대하는 지라 재일(김일부)이 크게 이상히 여겨 이 일을 말한 뒤에 요운이란 도호를 상제(강일순)께 드리고 심히 경대하니라.
<대순전경해의>, 장재진 저, 장신원, 2009. 51쪽.[94][95]
<대순전경해의>, 장재진 저, 장신원, 2009. 51쪽.[94][95]
또한 강일순 본인도 태을주의 효능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자신과 다른 태을천상원군이라는 신격을 주신적 존재로 언급하였다.
태을천(太乙天) 상원군(上元君)은 하늘 으뜸가는 임금이니 오만년 동안 동리동리 각 학교에서 외우리라.
<증산도 도전>, 2008. 7편 75장
<증산도 도전>, 2008. 7편 75장
이 외에 대순진리회에서는 강일순은 구천상제, 조철제를 옥황상제, 박한경을 상제 혹은 박성미륵세존 등이라 부른다. 증산도에서도 강일순을 무극제, 초대교주 안세찬(안운산)을 태극제, 2대 교주 안중건(안경전)을 황극제로 부르는 등 행보가 복잡하다.
10. 비판
10.1. 허점
자신이 옥황상제라면서 기존종교의 성자들을 심판한다고 주장하며 천지공사를 했는데, 여기서 기존종교의 창시자(석가모니, 공자, 예수, 노자)들을 비판하는 부분에서[96] 석가모니가 남의 자식을 유인한다느니,[97] 예수한테 왜 조상제사를 안 지내느냐 하는 식으로[98] 해당 종교의 교리와 사상에 대해 많이 지식이 부족한 부분이 보이며, 비판하는 시각도 당시 조선인들의 사고방식에 바탕하였다.도교에 대해서는 노자를 두고 복중팔십년(腹中八十年) 운운하며 어머니 뱃속에 팔십 년이 넘게 있은 불효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노자 본인의 실존 여부도 문제지만 다른 문제도 있다. 도교 항목에 나오듯 도교에서 노자를 중시하긴 하지만 노자가 직접 도교를 창시하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도교가 성립되면서 도가철학의 영향을 받아 노자를 자신들의 시조로 추앙했을 뿐이다. 그리고 노자가 어머니 뱃속에 80년간 있었다는 이야기는 그저 후대에 생긴 전설에 불과하다. 또한 강일순은 "유가의 인물들이 흠이 많으나 주회암은 흠잡을 데가 없느니라." 하였는데, 이 역시 철저한 조선 유학자들의 관념. 주자와 성리학 항목에 나오듯이 성리학은 불교를 비판하면서 역으로 불교에서 차용한 부분이 상당수 존재하며, 주자는 유교경전의 원문을 자의적으로 손상하는 등 비판점이 엄연히 존재한다. 무엇보다 주자와 성리학만 절대시함은 철저히 조선 유학자의 사고방식이다.
일단 강일순은 그 어떤 정보 예컨데 신화.전설.민담.소설 다 검증하지 않고 믿는 주의다.
또한 강일순은 예수회 사제 마테오 리치(이마두)를 여러 차례 칭찬하는데, 마테오 리치의 공으로 24절 역법을 개정해 때를 밝혔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근세 동양의 역법의 개정은 마테오 리치가 아니라 아담 샬(탕약망)이 하였다.[99] 마태오 리치가 선교사여서 그런지 동서양의 신명들을 처음으로 자유롭게 왕래하게 했다고 주장하나, 이미 실크로드와 해양, 북방 유목민족들을 통한 동서 문화 교류는 고대부터 있었다. 그리스도교 역시 이미 당나라 때 경교라는 이름으로 전래되었고, 이슬람의 확장 이전에는 인도와 동아시아 외에도 페르시아를 중심으로 불교가 널리 퍼졌기에 역사적 사실과 상충된다.[100]
강일순은 고문을 받을 때 제자들에게 자신이 임진왜란 이후 사명당에 의해 죽은 일본 공주를 해원하기 위해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나,(증산도 도전 링크)[101] 전술했듯 그런 공주는 소설에나 나오고 실제로는 당시 일본의 덴노인 고요제이 덴노[102]가 임진왜란을 반대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듣지 않았을 뿐이다.[103]
사실 강일순과 그의 사상/교단에 대한 가장 큰 비판은 지나치게 주술적 행위에 의존했다는 점이다.[104] 제자들에게 곰방대를 매게 하고 군인들이 행군하는 시늉을 내는 원시적 감응주술 행위를 하거나, 가뜩이나 가난한 제자들의 재산을 죄다 긁어모아 제사를 지내거나 무당을 불러 굿판을 열거나 제자들 앞에서 기이한 현상을 보이는 등 주술적인 행위는 매우 많이 발견되지만 정작 그가 실리적이고 현실적인 행동을 취한 부분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전술/후술하듯이 상충되는 부분이 많다. 이는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이 교도들끼리 신분과 나이를 막론하고 맞절을 하게 한 점이나 집의 여노비 둘을 해방해 하나는 며느리로 다른 하나는 수양딸로 삼고 머슴 출신인 최시형[105]을 신앙심과 능력만 보고 후계자로 들인 점과 이후 천도교의 어린이 용어 사용 등 사회활동을 보인 점이나, 원불교의 창시자 박중빈이 개교 초창기부터 엿공장 운영이나 저축조합 설립, 간척 등 실리적인 활동을 펼치면서 교단을 운영하면서 종종 초자연적 현상이 일어나자 제자들에게 입단속을 시킨 것과 너무나 크게 대비된다.[106]
조선시대에 천대받은 노비ㆍ광대ㆍ무당 등이 후천에 대우받고 산다고 주장하거나, "일본 사람이 3백 년 동안 돈 모으는 공부와 총 쏘는 공부와 모든 부강지술을 배워 왔나니 너희들은 무엇을 배웠느냐."[107] 하는 등 상당히 혁신적인 발언은 분명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노비를 풀어주거나 제자들에게 신학문을 배우게 하거나 하위계층의 인권보호 운동을 한 적이 없다. 그저 천지공사라는 이름으로 굿을 하면서 다가올 후천선경 세상에는 이러저러하게 된다고 예언하였을 뿐이다. 강일순의 제자들 역시 주술행위를 하며 개벽과 강일순의 재림만 기다렸을 뿐 딱히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았다.이는 강일순의 사상을 우호적으로 보고 혁신성을 강조하는 학자들도 많이 비판하는 부분이다.
더욱이 강일순은 패륜행위도 저질렀는데, 해원을 해야 한다며 자신의 아버지에게 죄인마냥 짚신을 만들어[108][109] 팔아 먹고 살게 하면서 제자들이 빈궁하게 사는 자신의 부친에게 돈이나 곡식을 보내는 걸 막고[110] 어머니가 간신히 마련한 고추밭을 멋대로 팔아 버렸으나[111] 자기 후처인 고판례는 지극히 아끼면서 고판례의 사촌동생이자 제자인 차경석을 시켜 고판례를 위해 쌀을 팔아 놓으라고 하는 등[112], 부모가 힘들게 강일순을 키웠다는 점을 경전에서 강조하는데도 불구하고 효 따위는 내다버린 행동을 보여준다. 강일순이 죽기 전 집안 어른들을 만났을 때 집안 말아먹은 놈이라는 소리를 괜히 들은 게 아니다. 족보도 불태워버렸지 부모도 박대했지... 또 후천에 월경을 없이하겠다고 매춘부와 자기도 했다.[113]
정말 자신이 자기 주장대로 상제로서 동서양의 모든 신명들을 다스린다면 중립적이지 못한 시각과 여러 오류와 허점, 모순된 행동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증산계 교단들의 통합/교학이 발달하지 않는 한 결론은 요원하다. 그러나 증산계 종교에는 통합적인 교단이 나올 수 있는 시스템이 전무하다. 오히려 강일순의 '대행자', '대두목'[114], "난법을 낸 뒤 진법을 낸다." 하는 발언 때문에 분파를 유도하는 시스템으로 짜여졌다. 괜히 강일순 교단에서 사이비가 우후죽순[115] 나오는 게 아니다.
강일순 신봉자들은 이에 대해 진법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증산종교계가 교리적으로도 경전 내용으로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성교단을 난법으로 몰아붙이고 자신이 진법이요, 강일순이 말한 사명을 받은 대행자/대두목이라 주장하며 새로운 교단을 형성하기 좋고, 대행자/대두목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신도들에게 휘두르기 좋은 구조란 점이다. 체계적인 사상 연구나 교학 발달은커녕 전형적인 사이비 종교 집단이 만들어지기가 너무나도 좋은 형태다. 당장 기독교만 해도 예수의 구원과 심판 구절 하나만으로 얼마나 많은 이단 및 사이비들이 횡행하는지 생각해 보자. 강일순 교단은 이게 더 심하다. 그리고 밑에 후술하듯, 빠져나갈 쥐구멍도 뚫어놓았다.(...)
10.2. 변명
이때 최창조가 이르러 상제님께 문안을 올린 후에 한쪽에 가서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성난 소리로 이를 갈며 말하기를 "이럴 것이 아니라 우리 몇 사람이 결사대를 만들어 저 건너 주점에 가서 한 놈을 죽이든지 해야지 그저 있어서는 못살겠다." 하거늘 박공우가 이르기를 "무슨 일로 그러오?" 하니 창조가 말하기를 "이런 분한 일은 내 생전에 처음이라, 차라리 죽지 못살겠다." 하니라.
본래 공우는 우직한 사람인지라 창조의 말을 듣고 바짝 다가서며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보라. 결사대는 말고라도 내 혼자 하고 혼자 당해야지 공모되면 죄가 크다. 어서 무엇인지 말을 하라." 하니 창조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여러 놈이 나서서 덤비는 통에 나는 혼자라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왔으나 생각할수록 분해 못살겠네." 하고 공우의 귀에 대호 "그놈들이 선생님을 미쳤다 하며..." 하고 말을 하다가 분한 김에 상제님도 들으시게 하려고 "그놈들이 글쎄, '강탈망인지 강삿갓인지 그 강미치광이 따라다니지 말고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술이나 받아 주면 고맙다는 소리나 듣지.' 하고 우리를 모두 '병신 뒷다리 같은 놈들'이라 하며 '참말로 미친놈들이 저놈들이라.' 하니 어디 분해서 살겠소?" 하거늘 공우가 이 이야기를 듣고 코를 한 번 풀더니 나뭇짐에 가서 몽둥이 한 개를 번쩍 들고 "내 그까짓 것들..." 하고 나가니라.
이때 상제님께서 보시고 급히 부르시니 공우가 발을 멈추고 서서 들어오지 아니하는지라 상제님께서 크게 호령하여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너는 금일로써 남이 되려느냐." 하시니 공우가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예?" 하고 들어와 꿇어 엎드리거늘 일으켜 앉히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조금 전에 내가 들었노라. 이놈들아, 강미치광이 오죽이나 좋으냐! 그 사람들 참으로 우리 일꾼 중 상등 일꾼이다. 강미치광이를 누가 따르겠느냐. 참으로 그 소리를 했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공을 갚을까. 옥과 돌을 그 사람들이 가려 주느니라. 사방으로 외대면서 이 말을 못 하면 유감인데 너희들은 그 사람들이 그리 하니 원수로구나.수운가사에 이르기를 '여광여취 저 양반을 따르기만 따를진대 만단설화 한 연후에 수원성취 하련마는 못 만나서 한탄일세.'라 하였나니 내가 미쳤다 하기로 너희가 나를 원 없이 따르게 되지, 만일 세상에서 나를 성인이라 하면 너희들이 처신할까. 모르는 가운데 정성이 깊지, 알고 난 뒤의 정성이야 누군들 못하겠냐. 깊이깊이 생각해 보라." 하시니라.
이에 공우가 백배사죄 드리며 "참으로 공우가 금일에야 사람인가 합니다." 하니 좌우가 모두 기쁘게 웃으며 상제님께 사죄하더라.
본래 공우는 우직한 사람인지라 창조의 말을 듣고 바짝 다가서며 "무슨 일인지 자세히 말해 보라. 결사대는 말고라도 내 혼자 하고 혼자 당해야지 공모되면 죄가 크다. 어서 무엇인지 말을 하라." 하니 창조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여러 놈이 나서서 덤비는 통에 나는 혼자라 어찌할 도리가 없어서 왔으나 생각할수록 분해 못살겠네." 하고 공우의 귀에 대호 "그놈들이 선생님을 미쳤다 하며..." 하고 말을 하다가 분한 김에 상제님도 들으시게 하려고 "그놈들이 글쎄, '강탈망인지 강삿갓인지 그 강미치광이 따라다니지 말고 우리를 따라다니면서 술이나 받아 주면 고맙다는 소리나 듣지.' 하고 우리를 모두 '병신 뒷다리 같은 놈들'이라 하며 '참말로 미친놈들이 저놈들이라.' 하니 어디 분해서 살겠소?" 하거늘 공우가 이 이야기를 듣고 코를 한 번 풀더니 나뭇짐에 가서 몽둥이 한 개를 번쩍 들고 "내 그까짓 것들..." 하고 나가니라.
이때 상제님께서 보시고 급히 부르시니 공우가 발을 멈추고 서서 들어오지 아니하는지라 상제님께서 크게 호령하여 말씀하시기를 "공우야, 너는 금일로써 남이 되려느냐." 하시니 공우가 이 소리에 깜짝 놀라 "예?" 하고 들어와 꿇어 엎드리거늘 일으켜 앉히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조금 전에 내가 들었노라. 이놈들아, 강미치광이 오죽이나 좋으냐! 그 사람들 참으로 우리 일꾼 중 상등 일꾼이다. 강미치광이를 누가 따르겠느냐. 참으로 그 소리를 했다면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공을 갚을까. 옥과 돌을 그 사람들이 가려 주느니라. 사방으로 외대면서 이 말을 못 하면 유감인데 너희들은 그 사람들이 그리 하니 원수로구나.수운가사에 이르기를 '여광여취 저 양반을 따르기만 따를진대 만단설화 한 연후에 수원성취 하련마는 못 만나서 한탄일세.'라 하였나니 내가 미쳤다 하기로 너희가 나를 원 없이 따르게 되지, 만일 세상에서 나를 성인이라 하면 너희들이 처신할까. 모르는 가운데 정성이 깊지, 알고 난 뒤의 정성이야 누군들 못하겠냐. 깊이깊이 생각해 보라." 하시니라.
이에 공우가 백배사죄 드리며 "참으로 공우가 금일에야 사람인가 합니다." 하니 좌우가 모두 기쁘게 웃으며 상제님께 사죄하더라.
공신이 출옥한 뒤에 하루는 고부 주막 주인이 공신의 집에 와서 느닷없이 공신 앞으로 달아 둔 밥값을 내놓으라며 살림살이를 차압해 가거늘 상제님께서 출옥하시면 압수당한 돈과 무명을 찾아 외상을 갚아 주실 줄 믿었던 공신은 큰 돈을 내고도 다시 수저 하나 남김없이 살림살이를 차압당하매 크게 불평을 품고 있더니 얼마 후 상제님께서 집에 찾아오시매 지난 일을 낱낱이 헤어 아뢰며 불쾌한 어조로 폭담을 하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고개를 숙인 채 듣고 계시다가 공신에게 “이제 말 다했느냐?” 하시니 공신이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다 했지요!”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네 말을 들으니 그렇겠도다. 내가 순창 농바우에서 사흘 동안 머물며 너를 처음 만난 뒤로 네가 여러 가지 큰 공사에 참관하여 너에게 이윤(伊尹) 도수를 붙인 바 있고 고부 도수를 보려 하나 가히 감당해 낼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眞主)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어 남의 돈은 따 보지 못하고 제 돈만 잃어 바닥이 난 뒤에 개평을 뜯어 새벽녘에 회복하는 수가 있으니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 네가 고부에서도 밥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만일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으면 내가 주마. 그러나 그리하면 그 도수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야 하느니라.” 하시니 공신이 ‘어차피 돈은 쓴 것인데 도수까지 남한테 뺏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여 여쭈기를 “일이 그와 같을진대 그만두시옵소서.”(...) 하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고개를 숙인 채 듣고 계시다가 공신에게 “이제 말 다했느냐?” 하시니 공신이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다 했지요!”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네 말을 들으니 그렇겠도다. 내가 순창 농바우에서 사흘 동안 머물며 너를 처음 만난 뒤로 네가 여러 가지 큰 공사에 참관하여 너에게 이윤(伊尹) 도수를 붙인 바 있고 고부 도수를 보려 하나 가히 감당해 낼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眞主)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어 남의 돈은 따 보지 못하고 제 돈만 잃어 바닥이 난 뒤에 개평을 뜯어 새벽녘에 회복하는 수가 있으니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 네가 고부에서도 밥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만일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으면 내가 주마. 그러나 그리하면 그 도수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야 하느니라.” 하시니 공신이 ‘어차피 돈은 쓴 것인데 도수까지 남한테 뺏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여 여쭈기를 “일이 그와 같을진대 그만두시옵소서.”(...) 하니라.
해당 구절들은 강일순 신봉 단체에서 실제로 신도들 교육용으로 자주 써먹고, 신도들 역시 비판/공격을 받을 때 자주 되뇌이는 구절들이다. 괜히 근현대 한국 신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강일순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게 아니다. 강일순의 사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신도거나 강일순 숭배집단 소유 연구소 소속이 아니면 최수운이나 박중빈에 비해서 강일순을 낮게 취급하는 경우가 대다수.
참고로 여기서 언급된 강일순의 제자 문공신은 나중에 이렇게 된다.
공신이 독배고개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시키니 이 때 모인 사람들은 채청송, 양인산, 정판진, 김찬숙, 신의균 등이더라. 하루는 공신이 “자네들 선초(仙草) 맛 봤는가?” 하니 제자들이 “얘기로도 못 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공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러면 선초 한 대씩 하세.”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방으로 쑥 들어오니 그는 도꾼을 가장한 밀정 유화숙이라. 화숙의 밀고로 공신과 제자들이 ‘민심을 어지럽힌다.’ 하여 전주형무소에 갇혔다가 3년 후 해방을 맞아 석방되니라. 형무소에 있는 동안 공신과 제자들 모두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하고 몇몇은 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기도 하거늘 이는 독조사가 새벽녘에 개평을 얻어 판을 모두 걷고 후천 상생 세상을 열게 하는 파방(破放) 도수라. 이후에 공신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독조사 도수를 내가 받았노라.” 하니라.
이후 문공신은 강일순의 약방을 모방해 도술약국이라는 약방을 열고 활동하다 죽는다. 비단 문공신뿐만 아니라, 강일순을 신봉하던 사람들 중 그 말로가 좋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수제자 김형렬조차 미륵불교 교단을 차리고 수련으로 신안이 열렸다고 주장하며 여러 예언을 했다가 다 빗나가자 신도들이 와해되었고, 차경석은 전술했듯 보천교라는 거대교단을 만들었다가 형편없이 무너져버렀다.[116] 안내성은 3년 동안 수련에만 빠져 늙은 어머니가 날품을 팔고 우물터에 버려진 음식 찌꺼기들을 주워모아 끼니를 해결하는 등 살림이 완전히 파탄 났고, 오랫동안 비정상적인 삶을 살다보니 엉덩이가 짓무르다 못해 패였으며, 이목구비가 변형되고 여자처럼 가슴이 튀어나오는 기형의 신체가 되었다. 증산계 종교단체는 이를 두고 안내성이 자기더러 "내 도의 어머니가 되어라." 말한 강일순의 뜻에 따라 수행하여 그 결과가 나타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전후 인과관계를 보면 오랜 가난과 기아로 호르몬 이상이 생겨 여성형 유방이 되었다고 해야 타당하다. 실제로 극심한 기아 때문에 호르몬 불균형이 온 남자들은 여성형 유방 증세와 더불어 젖이 나오기도 나오는데, 증산도 도전 주석에 따르면 안내성 가슴에서 여자처럼 젖이 나왔다는 증언이 나온다. 호르몬 이상으로 인한 증상과 전체적인 전후관계가 일치한다.
후발주자인 증산교의 창시자 이상호나, 이상호의 증산교에서 갈라져 나온 안세찬, 태극도를 세운 조철제, 조철제 사후 태극도에서 갈라져 나온 박한경 등도 서로 자신들이 도통을 내려줄 대두목이라고 주장했으나 지금은 모두 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갔고, 그 후계자들은 증산도처럼 환빠가 되거나 대순진리회처럼 수없이 많은 분파로 갈라져버렸다.창시자부터 후계자들까지 제대로 된 교학 발전도 사상 발전도 없이 종말론적 신비주의에 의존하는 종교집단의 전형적인 말로를 반복하고 있다.
이단들의 뿌리 강증산
10.3. 성인?
강일순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가 성인이라고 추종하고 있는데 다음 글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날지 궁금하다. 그가 정말로 '옥황상제'이자 '천지일월'이라면 다음 내용에 책임이 있다.삥뜯기를 정당화함
내 일이 이루어지려면 소를 삼천마리는 잡아야 하느니라.(이중성 천지개벽경)
일본에 조선을 넘김
상제님께서 하루는 "조선 국운을 일본에게 맡기려면 명치(明治)를 불러와야 하리니 이제 명치의 혼을 부르리라."명치를 불러 물으시기를 “네가 조선 일을 보겠느냐?” 하시니
북한을 만듬
하루는 백남신과 함께 전주 남문 누각에 오르시어 글 한 장을 써서 불사르신 뒤한동안 누군가를 기다리시다가 다시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잠시 후 또 한 장의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옥골선풍의 한 아름다운 청년이 상제님 앞에 이르러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며 살려 주시기를 빌거늘 상제님께서 벼락같이 호통치시며 “한 번 부르면 올 것이지 어찌 세 번 만에 오느냐!” 하시고붓에 먹을 묻혀 양미간에 점을 찍으시니 그 청년이 곧 물러가니라. 그 뒤에 김갑칠이 전주 서천교(西川橋) 다릿목을 지나면서 보니 한 옥골선풍 청년이 죽어 있는지라 상제님께 와서 그 사실을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그는 북학주(北學主)로서 무고한 창생을 무수히 살해할 자라. 그러므로 천도(天道)에서 벌을 받음이니라.” 하시니라.
중국의 사회주의화[117]
“아라사 군사가 내 군사니라. 청국은 아라사 군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노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중국은 동서양의 오가는 발길에 채여 그 상흔(傷痕)이 심하니 장차 망하리라. 이는 오랫동안 조선에서 조공 받은 죄로 인함이니라.” 하시고
그 외에도 세계 대전[118]과 한국 전쟁공사 등 우리나라 신이 맞는지 의문이 드는 내용들이 참으로 많다.
11. 어록
증산도 도전(道典)의 내용을 근거로 삼는다. 그외에 대순전경, 천지개벽경 등 경전들과 교차검증을 하였다.나는 옥황상제니라
선천은 상극(相克)의 운(運)이라 상극의 이치가 인간과 만물을 맡아 하늘과 땅에 전란(戰亂)이 그칠 새 없었나니, 그리하여 천하를 원한(怨恨)으로 가득 채우므로 이제 이 상극의 운을 끝맺으려 하매 큰 화액이 함께 일어나서 인간세상이 멸망하게 되었느니라. 상극의 원한이 폭발하면 우주가 무너져 내리느니라. 이에 천지신명이 이를 근심하고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고자 하였으되 아무 방책이 없으므로 구천(九天)에 있는 나에게 호소하여 오매 내가 이를 차마 물리치지 못하고 이 세상에 내려오게 되었느니라.
이제 온 천하가 대개벽기를 맞이하였느니라. 내가 혼란키 짝이 없는 말대(末代)의 천지를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열고 비겁(否劫)에 빠진 인간과 신명(神明)을 널리 건져 각기 안정을 누리게 하리니 이것이 곧 천지개벽(天地開闢)이라.
원래 인간에서 하고싶은 일을 하지 못하면 분통이 터져서 큰 병을 이루나니 그러므로 이제 모든 일을 풀어놓아 각기 자유행동에 맡기어 먼저 난법(亂法)을 지은 뒤에 진법(眞法)을 내이리니 오직 모든 일에 마음을 바르게 하라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靖亂)의 책임을 ‘최 풍헌(崔風憲)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震黙)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기지 않고 송구봉(宋龜峯)이 맡았으면 여덟 달 만에 끌렀으리라.’ 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의 법술(法術)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느니라.
공자,석가, 예수는 내가 쓰기 위해 내려 보냈느니라.
어질 인(仁)자는 너희들에게 붙혀 주노니 오직 어질 인자를 잘 지키라
지금은 혈통줄이 바로잡히는 때니 환부역조 換父易祖 하는자와 환골換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천자(天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꿈만 꾸는 자도 죽으리라.
나는 예언자가 아니로다. 나의 일은 세상 운수를 미리 말함이 아니요, 오직 천지공사天地公事의 도수로 정하여 내가 처음 짓는 일이니라
망하는 세간살이는 애체(愛滯)없이 버리고 새 배포(配布)를 꾸미라 만일 아껴서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몸까지 따라 망하느니라
좋은 복을 내려주어도 이기어 받지 못하면 그 복이 다른 곳으로 돌아가느니라
일의 왕성함이 천지에 있는 것이지, 꼭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이 없으면 천지도 없는 고로 천지가 사람을 낳고 쓰는 것이니라. 천지가 사람을 쓰려고 할 때에 불참한다면 어찌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120]
거짓은 모든 죄의 근본이요 진실은 만복의 근원이니라
나의 일은 실제의 말을 해야지 거짓말로 하였다가는 여지없이 부서지리라
선령신이 짱짱해야 나를 따르게 되나니 선령신을 잘 모시고 잘 대접하라.
후천에는 자식 못 두는 자가 없으리라.
상말에 ‘무척 잘산다’. 이르나니 ‘척(隻)이 없어야 잘산다.는 말이니라. 남에게 원억(冤抑)을 짓지 말라. 척이 되어 갚느니라. 또 남을 미워하지 말라. 그의 신명(神明)이 먼저 알고 척이되어 갚느니라. 앞세상에는 서로의 마음속을 드나들어 그 속내를 알게 되나니, 남을 속이지 말고 척이 있으면 풀어 버리라. 부하고 귀하고 강권을 가진 자는 모든 척에 걸려 모두 콩나물 뽑히듯 하리라.
나의 도는 상생(相生)의 대도이니라. 선천에는 위무(威武)로써 승부를 삼아 부귀와 영화를 이 길에서 구하였나니, 이것이 곧 상극의 유전이라. 내가 이제 후천을 개벽하고 상생의 운을 열어 선(善)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리라. 만국이 상생하고 남녀가 상생하며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화합하고 분수에 따라 자기의 도리에 충실하여 모든 덕이 근원으로 돌아가리니 대인대의(大仁大義)의 세상이니라.
후천에는 만국이 화평하여 백성들이 모두 원통과 한(恨)과 상극과 사나움과 탐심과 음탕과 노여움과 번뇌가 그치므로 말소리와 웃는 얼굴에 화기(和氣)가 무르녹고 빈부의 차별이 철폐되며,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이 바라는 대로 빼닫이 칸에 나타나며 수화풍(水火風) 삼재(三災)가 없어지고 상서가 무르녹아 청화명려(淸和明麗)한 낙원의 선세계(仙世界)가 되리라.
후천에는 천하가 한집안이 되리니 모든 언어동정을 통일하여 조금도 편색(偏塞)함이 없게 하리라. 위무(威武)와 형벌을 쓰지 않고 조화로써 창생을 다스리되 자기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며, 너희들은 환골탈태(換骨奪胎) 되어 키와 몸집이 커지고 옥골풍채(玉骨風采)가 되느니라 후천에는 덕을 근본으로 삼아 이 길에서 모든 복록과 영화를 찾게 되느니라.
천하에 무서운 죄는 저도 모르는 놈이 남을 모아 수하에 넣은 죄같이 큰 죄가 없느니라. 공자(孔子)가 알고 하였으나 원망자가 있고, 석가(釋迦)가 알고 하였으나 원억의 고를 다 풀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제가 모르는 놈이 출세간에 사람을 모은 자는 낮에 난 톳재비 같으니라. 수운가사(水雲歌詞)에 기둥없이 지은 집이 어이하야 장구하리. 성군취당 극성중에 허송세월 다보낸다 하였느니라 (동곡비서)[122]
천고(千古) 이래로 수한도병(水旱刀病)의 겁재가 서로 번갈아서 그칠새없이 세상을 진탕하였으나 아직도 큰 병겁은 없었느니라. 당래에는 병겁이 들어오는데 천하를 진탕을 만들참이나 뉘라서 활방을 얻어 멸망하는 인종을 살리리요. 기사묘법(奇事妙法)을 알라고 하지말고 의통(醫統)을 알아두라. 내가 천지공사를 맡아봄으로부터 이땅에 모든 재앙을 물리쳤으나, 오직 병겁은 그대로 두고 너희들에게 의통을 붙여주리라. 순진한 마음으로 의통을 알아두라. 몸돌이킬 여가가 없고, 홍수에 밀리듯 하리라 (동곡비서)
예수믿는 사람은 예수가 재림한다고 기다리고, 불교믿는 사람은 미륵이 출세한다고 기다리고, 동학신도는 최수운(崔水雲)이 재림한다고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사람만 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 하여 따르리라. 내가 출세할 때에는 천지가 진동하고 뇌성이 대작하리라. 잘못 닦은 자는 죽지는 아니하나 앉을 자리가 없어서 참석하지 못할 것이요, 갈 때에는 따라오지 못하고 엎어지리라. (동곡비서)
성인의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나니, 옛날 자사(子思)는 성인이라. 위후(魏候)에게 말하되 '약차불이면 국무유의(若此不已 國無遺矣)'라 하였으나, 위후가 그의 말을 쓰지 않았으므로 위나라가 참멸하였나니, 나의 말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니 너는 나의 말을 믿어라. 나의 말을 믿는 자가 한사람만 있어도 나의 일은 되리라 (동곡비서)
나는 천지일월(天地日月)이니라[123] (동곡비서)
12. 증산 계열 주요서적
- 동곡비서(銅谷秘書): 강일순의 가장 맏제자인 김형렬이 지었다. 성화진경(聖化眞經)이라고도 한다.
- 대순전경(大巡典經): 대순전경은 증산교 대법사 교주 이상호가 강일순을 직접 겪었던 증산계 8개 종단 원로들의 증언을 수집하여 만든, 강일순에 대한 사실상의 1차 사료이다. 도전[124]이든 전경[125]이든 모두 대순전경을 기본사료로 삼았다. 그러나 증언을 하지 않은 원로들이 많았고(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등), 유교적 관점에서 강일순을 바라보고 표현을 윤색하거나 누락시킨 증언이 많아 강일순을 전적으로 파악하기엔 부족한 자료이다. 판본을 찍어내면서 대법사 교주(이상호, 이청음)의 우상화나 신격화를 시도했기 때문에 오히려 초판본이 가장 정확하다는 의견도 있다. 김제시에 위치한 증산교 대법사에서 구할 수 있다. 이름 때문에 헷갈릴 수 있으나 대순진리회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 천지개벽경(天地開闢經): 강일순에 대한 내용을 다룬 경전. 이중성이 쓴 것과 정영규가 쓴 책이 서로 제목을 같이 한다.
- 중화경(中和經): 강일순에 대한 일반적인 내용의 경전과는 성향이 좀 다르다. 유교적인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저자가 누구인지 논쟁이 있다. 증산법종교에서 구할 수 있다.
- 현무경(玄武經): 강일순이 남긴 부적의 모음집. 홍범초 교수의 범증산교사에 따르면 제자 안내성이 소유했다가 차경석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 화은당실기(華恩堂實記): 강일순의 무남독녀 화은당(華恩堂) 강순임이 세운 증산법종교에서 1960년에 발행한 서적.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강순임의 행적을 중심으로 엮은 기록이라, 아버지 강증산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 증산도 도전(道典): 강일순과 고판례의 언행에 대한 통합경전을 표방하는 증산도의 경전. 분량으로는 역대 증산교 서적중 가장 방대하지만 편찬과정에서 조작 및 왜곡 의혹이 있다.보는곳
- 전경(典經): 대순진리회의 경전.
-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 훗날 증산교 본부를 창교하는 이상호가 아직 보천교 고위간부이던 시절에 강증산에 대해서 쓴 편년체 자료. 내용은 짧으나 강증산의 행적을 기록한 첫 번째 기록이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료다. 보천교의 공식문서기도 했으나, 차경석이 이상호 형제를 파문한 후로는 보천교에서는 증산천사공사기를 자기네 문서로 인정하길 거부했다.
- 진경(眞經): 태극도의 경전.
13. 이야깃거리
- 동네에서 강일순을 '개아범'이라고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동네 개들에게 먹을 거 주면서 잘 대해주니 개들이 잘 따랐다고...
- 김호연뿐만 아니라 증산과 어울리던 동네 아이들이 살아남아서 증언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다. 증산이 자주 쓰던 말투도 기록으로 남겨놓았다고 한다.
- 그의 일대기를 주제로 대순진리회에서 제작한 영화: 화평의 길 이순재가 주연으로 나온다.
- 숫자 13과 묘한 관계가 깊은데 역석달을 채우고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후천개벽 이후 열석자로 다시 온다는 예언 등이다.
14. 관련 문서
[1] 증산 계통 종교에서는 강일순의 제자이며 보천교 창교주인 차경석의 이복동생 차윤경(車輪京)과 혼인한 주판례(朱判禮)라는 여인이 가지고 있다가 증산법종교에 전달한 사진이 원본이라고. 참고 그러나 해당 주장이 담긴 글은 대개 증산 계통 종교 측 자료이고, 여러모로 사진이라 보기엔 의문점이 있다. 아래 사진 및 교단별 어진에서 후술.[2] 고종 8년 음력 9월 19일.[3] 융희 3년 음력 6월 24일.[4] 진주 강씨 박사공파(博士公派)에서 갈라진 통계공파(通溪公派) 43세손.(족보)[5] 강일순의 14대조 강이온(姜利溫)이 연산군 시절 도승지였는데 입바른 소리를 하다 1505년에 목이 베이자, 손자 강세의(姜世義 1492-1547)가 고부로 낙향하여 살았다. 그 후 3백 년 넘게 고부 인근에 후손들이 모여 살았다. 강일순은 13대조 강부(강세의의 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종손이기도 했다.[6] 조선 후기의 4대 기인으로 충청도 김일부ㆍ전라도 강증산ㆍ경상도 박만수ㆍ지리산 문 도사를 꼽는다고 한다.[7] 현재의 주소로는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팔선리 서산마을. 강일순의 본가에서 북쪽으로 4.5 km쯤 떨어져 있다. 강일순의 외갓집 건물은 이미 허물어져 지금은 자취를 찾기 힘들다.[8] 아버지 강문회는 1846년에 태어나 1911-17년 사이에 사망하였다. 어머니 권양덕은 1850년에 태어났으나 사망년도를 알 수 없다.[9] 현 주소로는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 신송마을에서 서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있다.[10] 사실 조선시대의 법적인 기준으로 4대 이상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그 자손은 양반의 자격을 잃는다. 하지만 법적으로 양반의 자격을 잃었다 해도 자신들은 양반이지 천민이 아니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당초에 조선의 법적인 신분은 양천제로 노비인 천민 아니면 양반, 흔히들 상민이라 하는 평민 등을 포함한 양인이 있을 뿐이라 양반 지위를 상실해도 형벌, 채무 등으로 노비가 되지 않는 이상 평민일 뿐으로 그나마도 법적인 신분은 양인으로 같으며 다시 여기서 과거에 급제를 하면 양반이 된다. 즉 '양반-(4대 이상 급제 실패시)-평민-(과거 급제시)-양반' 인 셈[11] 증산도 도전 등을 보면 이런 일화가 있다. 아버지가 옆 마을에서 무리하여 훈장을 초빙하여 글공부를 시키는데, 훈장이 천자문을 펴고 하늘천 따지를 가르치자 거기까지만 읽더니 더 이상 따라 익히려 하질 않았다. 그래서 왜 공부하려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강일순은 "하늘천을 배워 하늘의 이치를 알고, 따지를 배워 땅의 이치를 배웠다면 더 배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늘천 따지, 두 글자만 배우고 혼자서 한학을 익힘은 말이 안 되므로 이 일화는 후대의 증산종교단체들에서 교조 강일순을 미화, 과장한 것일 것이다. 증산천사공사기 등 초기기록에서는 강일순이 매우 영특하여 한학을 쉽게 배웠다고는 해도, 하늘천 따지만 배우고는 더 이상 하지 않았다고는 설명하지 않는다.[12] 진주강씨족보 확인.[13] 현 주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 내광리[14] 어떤 사람들, 특히 원불교 쪽 사람들은 이때 강일순이 받았다는 책이 아래에서 설명할, 강순임이 송규에게 건네주었다는 정심요결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정말로 이때 책을 받긴 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15] 사실 이러한 왜곡/변형 주장은 종교사적으로 흔하다. 전술한 남학의 왜곡도 한 예.[16] 주류학계에서 인정하는 문헌인 대순전경은 13판까지 나왔으나 도전은 2003년에 개정판이 나왔을 뿐이다.[17] 다만 판본들마다 내용 차이가 좀 있어 정본이 무엇인지 논란이 있다.[18] 김호연을 만나 중화경이 쓰여진 배경을 전해들은 우철석 선생 증언[19] 시루산이라고도 부르며, 이 지명을 한자로 번역하면 증산(甑山)이 된다. 강일순은 호를 동네 앞산에서 딴 것이다. 강일순의 부모 강문회 부부의 합장묘도 시루봉에 있다.[20] 증산계 종교의 설명에 따르면 강일순이 시루봉에 있는 동안 외치고 다닌 주문이 진법주(眞法呪)라고 한다. 여러 증산계 종교들이 진법주를 사용하지만, 세부적인 구절은 교단마다 서로 다르다.[21] 한자로 서목태(鼠目太)라고 하기도 하고, 약효가 있다고 약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쥐눈이콩은 특정한 콩 종류가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식용으로 사용하는 검정콩들 중 크기가 작은 것을 싸잡아 부르는 말이라고 한다. 여우콩(Rhynchosia Volubilis)이 대표적인 쥐눈이콩인 듯?[22] 대원사에서 수도한 기간이 자료에 따라 서로 말이 다르다. 어디에서는 21일, 어디에서는 49일이라고 서술하므로, 기간에 대해선 명시하지 않고 그저 대원사에서 수도했다고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또한 도통을 얻은 날짜도 어디서는 음력 7월 5일, 어디서는 음력 7월 7일이라고 주장한다. 아예 수도기간과 정확한 도통일자를 말하지 않고 "음력 7월에 대원사에서 도통하셨다."라고만 서술한 자료도 있다. 강일순은 이때 얻은 경지로는 부족했는지, 추후 비슷한 집중수련을 한 번 더한다.[23] 현재의 주소로는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동곡(銅谷)이란 말이 '구릿골'이란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 증산종교인들이 쓴 글에서는 구릿골이라느니 구릿골 약방이라느니 표현하기도 한다.[24] 증산도 자료는 강일순이 지어준 초명은 이순(二順)이었고, 순임은 결혼한 뒤 남편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강순임 여사가 개창한 증산법종교 교단은 이순과 순임이 모두 강일순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순임이 본명이었다고 주장한다.[25] 증산도 도전 5편 195장 참조. 나이가 맞는 과부와 홀아비가 크게 잔치를 벌이고 재혼해야 한다는 박공우를 칭찬한다.[26] 강일순이 종종 보인 이러한 돌발행동, 기행은 평소 자신의 신비성을 높이려고 자주 사용한 방법이었으므로 제자들은 곧이곧대로 따랐다.[27] 손병희의 천도교에 있었다고도 하고 일진회에 있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동학 출신임은 분명하다.[28] 1880년 5월 5일 - 1935년 11월 1일. 향년 55세, 날짜 표기는 양력[29] 만약 정말로 강일순이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으로 차경석을 경계하였다면, 차경석의 친척인 고판례와 결혼하였을까?[30] 껍데기뿐일지언정 아직 대한제국이 망하진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일본 경찰이 아니라 대한제국의 경시청 소속이었다.[31] 이전까지 강일순은 일대에서 기인으로 유명했고 공무원들을 상대로도 (군수에게 거적에 싼 개머리를 선물이라고 들이미는 등) 상당히 뻣뻣하게 대했으므로, 신도들의 배신감은 더더욱 컸던 모양이다.[32] 이런 배경 때문인지 오늘날에도 강증산을 숭배하는 증산도 신도들 중 일부는 "조선왕조실록은 일제가 왜곡한 가짜 사서이니 믿을 수 없고, 임진록은 조선 민중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온 민간의 지혜가 담긴 책이니 믿을 수 있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애초에 정부가 편찬한 정식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을 부정하고 작성자와 연대도 알 수 없는 소설책인 임진록을 믿는다는 태도 자체가 얼마나 황당한지는...[33] 심지어 어느 종단에서는 엄연한 소설임에도 삼국지연의나 봉신연의, 서유기를 실존했다고 주장한다.[34] 이 건물 뒤에 대나무 밭이 있는데 강일순이 손수 심은 대나무도 있다고 한다. 강일순 사망 이후로 건물주가 바뀌면서 관리하지 않았던 것을 대순진리회 교단이 부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다듬으면서 처음에는 초가집으로 고쳤다가 2005년 기와집으로 개수했다.# 원형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35] 일부 한의원이나 한약방에서는 복용자에 따라서는 약이 아니라 차처럼 마시라고 할 정도. 건강차로도 파는 광경을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부작용도 진짜 체질이 안 맞는 사람이 약간 소화불량이나 설사가 나오는 정도로 가벼우며, 약재를 다양하게 가감할 수 있어 변형도 많다. 유명한 십전대보탕도 사물탕에 사군자탕 처방과 몇몇 약재를 추가한 것.[36] 소화불량과 체증에 주로 쓰는 환약인데, 집에서 간단히 만들어 시골 장에 내다 파는 경우도 많은 간단한 약이다. 만병통치약마냥 각종 통증에 임시방편으로 막 먹기도 한다.[37] 강일순이 정말로 의학에 어느 정도 된 지식이 있다면 당시 의학서적에 나온 대로 해인초를 달여 먹이거나 생강ㆍ비자ㆍ석류를 사용했을 것이다.[38] 이 약장도 강일순의 성물이라고 강일순 교단 사이에서 여러 차례 오갔던 경력이 있다.[39] 강일순의 정확한 사망장소에 대하여 자료들간 설명이 서로 다르다. 어떤 자료는 위치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며, 어떤 자료는 동곡약방, 어떤 자료는 김형렬의 집이라고 한다. 어쨌든 여러 자료들도 저 둘 이외의 다른 장소를 말하지는 않으니 둘 중 하나임은 분명해 보인다.[40] 늑막강 안에 고름이 괴는 병. 농흉(膿胸). 어린이나 노인 등 면역력이 약하거나 약해진 사람이 잘 걸린다.[41] 신적 존재가 지상에서 인간들이 겪는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이를 대속한다는 주장은 매우 그리스도교스러우므로, 증산계 종교의 이러한 주장은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기는 시각도 있다. 애초에 동학이라는 것이 서학에 반대한다면서 서학의 내용을 많이 섞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동학의 계보를 잇는 증산교니 대순진리회니 하는 것들도 기독교의 개념들을 차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42] 병을 대속하겠다는 사람이 살고 싶어서 죽기 전까지 도술 주문을 외웠다.[43] 양력 11월 9일. 증산교단은 특히 음력을 중요시한다.[44] 당시 유교예법에 따라 삼년상을 치르면, 강일순이 죽고 2번째로 맞는 기일인 1911년 (음)6월 24일에 대상을 하고, (음)8월 하순쯤에 담제를 하여 삼년상을 끝냈을 것이다. 남은 것은 초빈한 시신을 거둬 정식으로 무덤을 만들기뿐. 1911년 (음)9월 19일은 강일순의 삼년상이 끝난 뒤 처음으로 맞는 망자의 생일이다.[45] 몇몇 강일순 숭배 교단의 경전에는 죽어서 상여가 나가면서도 강일순이 몇 차례 이적을 보여 제자들이 마음을 다잡았다고 하는데, 정작 그렇게 주장하는 교단들의 경전에도 고판례의 행적을 다룬 부분을 보면 제자들이 허둥대면서 고판례에게 강일순의 사망을 알리려 하지 않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다(...)[46] 강일순 사후 당시 전라도 관습에 따라 초빈을 했는데, 증산계 교단의 창시자들은 그 시신을 정통성을 보증할 성유물로 생각하여 각자 강일순의 유가족들을 끼고 서로 차지하려고 난투극을 벌였다.[47] 강순임의 초명은 이순(二順)이다. 증산도 쪽 자료에서는 순임이라는 이름을 남편이 지어주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증산법종교 측에서는 초명이 이순이었음은 인정하지만, 순임이란 이름도 강일순이 지어준 본명이라고 하여 말이 다르다.[48] 아주 없지는 않은데, 대개는 증산종교계에서도 힘이 약한 소규모 단체에서 추앙하곤 한다. 2004년에 출범한 태을선도(太乙仙道), 2009년에 세워진 천지조화정부, 2013년에 만들어진 증산참신앙 등에서는 김말순을 천지공사 때 정음정양의 맥이 끊어지지 않게 이어준 매우 중요한 인물로 평가한다.[49] 딸 이름은 신태종인데, 이름의 한자를 太宗이라고도 하고 胎種이라고도 한다. 太宗이라고 쓰면 이름이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胎種이 맞을 듯? 도전의 주석에 따르면 1900년에 태어나 1930년에 사망했다고 한다.[50] 태을주의 첫머리가 '훔치훔치'라는 구절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신도들이 태을주를 읊고 다니니 '훔치훔치 하는 주문을 외우는 종교'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다.[51] 증산도 도전에 내용을 보자면, 강일순 본인도 나중에 아차 싶었는지(...) 후천에는 부녀자들 세상이 되려 한다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판대까지야여자에게 주겠느냐. 판대야 남자가 쥐지." 하고 슬쩍 말을 바꾸었다.[52] 度數. 증산 계열에서는 사명을 이렇게 표현한다. 원래는 동학 쪽에서 유래한 한잣말이다.[53] 거지처럼 산다든가, 제사를 지낸다든가, 공공장소에서 고성방가를 한다든가[54] 이름을 남기는건 좋으나신한부 종말론, 교주 우상화, 전재산 헌납 등 사이비 종교가 가지는 많은 특징을 가졌다. 문제는 이게 1세대 증산교단이라는 것이다.[55] 탄갈(殫竭)이란 말이 힘을 몽땅 쏟았다는 뜻이다. 보천교에서는 재산을 교단에 몽땅 쏟아부었다는 의미로 사용하였다.[56] 증산도 도전은 차경석이 자신이 잘못했다고 후회하며 '입에 마약을 털어 넣고' 자살했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신문에서도 차경석이 죽었다고 했을 뿐 자살했다고는 보도하지 않으며, 2001년에 발간된 차경석 전기 ≪차천자의 꿈≫에서도 병이 심해져 사망했다고 설명한다(이 책은 가천대 박종렬 교수가 저널리스트로서 집필하였다). 증산도 도전은 차경석을 나쁘게 보이도록 최후를 왜곡했을 수 있다.[57] 광복 이후 조철제는 태극도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재건했다.[58] 광복 후에 교단을 재건하여 지금도 보천교가 있지만, 교세는 그 시절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도 그럴 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강일순의 경우는 증산계 종교들이 주장하는 옥황상제까지는 아니어도 엄연히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는 인정하는 반면 차경석은 진짜로 "한 때의 문제 인물" 정도의 평가 외에는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의 대상을 강일순도 아니고 차경석으로 바꾼 것이니 예전의 교세를 유지할 수가 없다.[59] 차길진의 아버지 차일혁이 차경석의 서자란 말이 있기 때문에, 차길진은 자기가 차경석의 손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차경석의 유족들은 차일혁을 배다른 형제로 인정하지 않는 듯하다. 또한 차길진은 차경석이 자기로 환생했다고 주장한다. 즉, 몸으로는 차경석의 손자지만 영혼으로는 차경석 본인이라는 것이다. 차길진은 칼럼에서 차경석이 독살당하였다고 여러 번 썼다. 전생에 독살을 당했기 때문에 자기가 현생에서 그 후유증으로 피를 토하고 폐 한쪽을 절개하게 되었다고...[60] 강일순의 3번째 부인 고판례가 최초로 김옥현 화백에게 그리게 한 어진은 전해지지 않으며, 두번째로 고종의 어진을 그린 채용신에게 그리게 하여 현재까지 오성산 교단에 모셔진 최초의 강일순 어진[61] 강일순의 실물을 촬영한 사진이라고 주장된다. 참고 그러나 조금만 유심히 보면 얼굴이 지나치게 평면적이고 그림 같은 질감임을 알 수 있다. 몸의 옷의 질감 및 음영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느낄 수 있다. 당시에는 사진에 그림을 덧칠하거나 오려붙여 사진이라 하는 일이 잦았다.(메이지 덴노나 이봉창 의사 문서에서도 사례를 볼 수 있다) 사진을 흔히 보지 못했던 당대에는 충분히 통했겠으나 현대에 보면 전문가가 아니라도 티가 난다.[62] 시인이자 증산사상연구가 유남계가, 보천교 교주 차경석의 후손이라 알려진 차길진이 만든 언론사 후아이엠을 통해 발표한 사진이다. 다음 링크의 설명에 따르면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두번 찍었다고 한다. 사진1의 의문점을 거의 그대로 공유하고 있다.[63] 사진1을 근거로 증산참신앙의 노상균이 디지털 사진 전문가에게 맡겨 개사했다.[64] 증산교 본부의 통천궁에 봉안되어 있다.[65] 강일순의 무남독녀인 강순임과 함께 증산법종교를 창교한 구암 김병철의 아들 김양호가 증산법종교에서 분리해서 만든 교단[66] #를 보면 1차가 없는것으로 볼때, 전해지지 않는 모양이다.[67] 증산교 본부 어진과 매우 흡사하므로 뿌리가 같음을 알수 있다.[68] 증산도에서 2018년 무술년을 진법도운을 여는 奉正 원년으로 발표하며 새로 개사했다.[69] 그 외에도 칠성경(七星經)ㆍ진액주(津液呪)ㆍ진법주(眞法呪)ㆍ개벽주(開闢呪)ㆍ옥추통주(玉樞統呪)ㆍ서전서문(書傳序文) 등 주문들이 있다. 각 종단마다 읽는 방법, 쓰는 방법, 뜻풀이, 주문의 내용이 다름은 기본이다.[70] 서전서문이란 주문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서전의 서문이다. 주자의 제자 채침(蔡沈, 1167-1230)이 ≪서집전(書集傳)≫이라는 이름으로 서경(書經), 즉 ≪상서≫의 주석서를 집필하여 1209년에 내놓았다. 서전서문이란 채침이 자기가 쓴 ≪서집전≫의 앞에 단 서문을 말한다. 채침이 서집전을 세상에 내놓으며 간단히 자기 바람과 회포를 적은 평범한 글인데, 강일순은 이상하게 서전서문을 중시하여 "서전서문을 많이 읽으면 도통한다." 하거나 "큰 운수를 받으려면 서전서문을 많이 읽어라." 하면서 제자들에게 권하였다. 그래서 서전서문이 본디 주문이 아닌데도 증산계 종교의 신자들에게는 사실상 주문이 되었다.[71] 현 천도교에서는 이 주문을 그냥 주문, 혹은 21자 주문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72]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이라고 읽는다는 뜻이다.[73] 예를 들면 단전호흡이나 기공체조[74] 생몰년도 1900~1962. 본명은 송도군(宋道君)으로 경상북도 성주군 사람이다. 1918년에 원불교 창시자인 소태산을 만나 귀의하면서 법명으로 규(奎), 법호인 정산(鼎山)을 받았다. 따라서 강순임과 만났을 때엔 당연히 속명인 '송도군'이란 이름이었다. 송규는 1943년에 소태산이 사망하자 원불교 2대 교주(종법사)가 되어 원불교인들을 이끌었다.[75] 원불교 자료를 보면 이때 강순임이 송규를 대하는 태도는 좋아하는 오빠를 대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서로 만났을 당시 송규 나이 18세, 강순임 나이 14세인 관계로 실제로 강순임이 송규를 '오빠'라고 불렀다 한다.[76] 강일순의 제자인 이치복과 김형국이 정심요결과 내용상 같은 책이라는 ≪영보국정정론≫'을 (훗날 증산계 종교인 삼덕교의 창교주가 되는) 허욱에게 전해주고 수련시킨 적도 있다 하니, 구한말에 이른바 도인이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보국정정론 계열의 서적이 생각보다 널리 퍼져서, 강일순의 제자들 중에서도 강일순과 별개로 이런 서적을 구하여 참고하려 수련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77] 그래서인지 최근에 나온 증산교단에서는 기공체조나 단전호흡을 중요시하기도 한다. 특히 증산도는 교단 차원에서 자율진동/자발동공 비슷한 것을 도입하여 도공(道功)이라고 부르며 신자들에게 태을주와 병행하라고 가르친다.[78] 또한 강상도 조상이라 여기고 있다.[79] 그래서 중국에 있는 '신농씨의 후손'이라고 자칭하는 가문의 대표들과 함께, 진주 강씨도 대표를 보내 신농에게 제사를 올린 적도 있다.[80] 김형렬이 고판례가 강일순에게 종통을 받아서가 아니라, 사후에 그 혼령과 접촉했기 때문에 영험을 보였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81] 불교에서는 법상종이 미륵신앙과 관계가 깊다 하기 때문에 법상종의 이름을 사용한 듯하다. 또한 법상종을 (강일순도 중요한 인물로 언급한) 진표율사가 창종했다 하므로 더욱 그 이름을 사용하였을 것이다.[82] 처자(處子)란 단어가 미혼여자(처녀)란 뜻이므로 '여처자'는 '여씨 처녀'란 의미지만, 마치 이름처럼 여처자로 알려졌다. 본디 이름은 원월(圓月)이라고 한다.[83] 1895년 음력 12월 4일생인데, 양력으로 환산하면 해를 넘겨 1896년 1월 18일생이다. 그래서 생년을 1895년이라고 할 수도 있고, 1896년이라고 할 수도 있다.[84] 无자는 無의 옛 형태이자 이체자, 즉 모양은 달라도 음과 뜻이 같은 한자이다. 조철제 교단은 无자를 사용하였으나, 어차피 無와 음과 뜻이 같으니 외부의 사람들은 흔히 無자를 쓴 듯하다.[85] 태극도 교단은 이 사건이 일어난 1909년을 도기(道紀) 원년으로 삼아 연도를 헤아린다.[86] 태극도 교단은 음력 기준 한국식 나이로 헤아려 '64세'라고 설명한다.[87] 나무위키에서는 대순진리회에서 갈라져나온 대진성주회나 용화대미륵선도회 등 분파들도 함께 대순진리회로 묶어서 설명한다.[88] 관련도서마다 표절을 금한다는 경고문구가 있다.[89] 증산도의 포교전략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족주의 감정을 자극하였다. (1) 여러분, 우리 민족의 역사가 왜곡되었음을 아십니까? 환단고기에 따르면... (2)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정말 위대합니다! (3) 위대한 우리 민족에게 상제(上帝) 신앙이 있었지요. (4) 우리 민족이 믿던 그 상제님이 바로 강증산이십니다! ..라는 식으로, 민족주의 감정을 포교활동으로 연결하였다.[90] 그러나 탈퇴자들이나 다른 증산계열 종교인들은 도전이 증산도 교단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실었고 왜곡하였다고 비판한다.[91]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종교학적으로 증산 계열 종교로 분류되고 있냐면 상술했듯 생성 과정에서 증산 계열 종교들의 영향을 받았고 모악산을 성지로 삼는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이다.[92] 강일순은 세상의 부조리와 문제들이 기존 역사에서 수없이 쌓인 원한 때문이라 보고 천지공사라는 이름으로 무속적 행위를 하면서 이를 해원(한풀이)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불교나 동학에서는 이런 사상이 없다.[93] 강일순을 말함. 이하 강일순을 뜻하는 부분에는 강일순 표기[94] 대순전경 12판을 기준으로 해설을 단 책이다. 본 위키에 올라온 부분은 원문 부분.[95] 타 사이트에 올라온 대순전경 초판 원문하고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링크 사이트는 증산도와의 마찰과 과도한 비속어 사용 등으로 워닝이 걸려 우회필요.[96] 도전 10편 40장[97] 인도에서 출가문화는 아주 보편적이었고, 석가모니 본인이 출가를 무조건적으로 강요하지도 않았다. 재가자도 얼마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내용은 불경 곳곳에 보인다. 남의 자식을 유인한다는 비판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불교를 공격할 때 쓰던 상투적 공격 중 하나다.[98] 그리스도교 세계관에서 구원은 조상제사와 하등 상관이 없으며, 제사를 안 지낸다고 불효나 패륜이 되지도 않는다. 이 역시 조선인들의 사고방식에 입각한 비판.[99] 아담 샬이 정비하여 탄생한 게 바로 조선 후기 우리나라에서 공식 역법으로 각계각층에서 널리 쓰인 시헌력이다. 마테오 리치가 전한 것은 서양식 수학 계산법/기하학/측량술과 서양식 시계와 천문기구 제작법, 서양금(그리비코드), 삼릉경(프리즘)이다.[100] 유물로만 따지면 스웨덴에서 바이킹들이 부적으로 사용하던 불상이 발굴된 적도 있다. 해당 불상은 스웨덴 우표에도 도안으로 등장한다.[101] 도전 5편 214장[102] 학문을 좋아했으며, 이후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설 때 반대하다 퇴위된다.[103] 사명당의 글을 모은 사명당대사집이 현존하고 번역본도 존재하는데, 만일 이런 내용이 있었다면 진즉에 언급되었을 것이다. 강항이 일본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고 여러 인사들을 만났으며, 그 와중에 일본 내 도요토미에 대한 비판 여론까지 기록한 간양록에도 그런 공주는 언급되지 않는다.[104] 강일순의 사상은 한국 신종교 창시자 중에서도 가장 무속적 도교적 색채가 짙었다.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에게 유교의 틀을 벗지 못하였다고 비판할 정도. 참고로 최제우는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가 합일된 것이라. 그러나 도인즉 같으나 이치는 다르니라." 하고 미리 밝힌 바 있다.[105] 최시형 본인도 신분 차별 반대를 주장하였고, 교단 내에서 교도들이 적서를 차별하면 이를 고치도록 했다.[106] 이 때문에 원불교 경전에서 박중빈과 그 후계자들의 행적에서 여러 기이한 현상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는다. 이는 본문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동학 역시 마찬가지로 초자연적 현상에 관심을 쏟지 않도록 경계하고 행실을 바르게 하며 마음을 바로 닦으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강일순은 제대로 검증되지도 않은 기이한 현상과 주술적 행위를 매우 맹신하였다.[107] 증산도 도전 5편 4장[108] 조선시대 죄인들의 일과 중 하나가 바로 관아에서 쓸 짚신을 만드는 것이었다.[109] 단 정확히 말하자면 강일순이 아버지를 죄인 취급한 것은 맞지만 죄인이 하는 일 중 하나가 짚신을 만드는 것이지 짚신 만드는 일 자체가 천한 일로 취급되지는 않았다.[110] 도전 9편 121장[111] 증산도 도전 5편 80장[112] 도전 6편 47장[113] 도전 5편 288장[114] 초기 기록인 증산천사공사기를 비롯하여 강일순계 문헌 대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나오므로, 특정 교단에서 대두목이란 단어를 창작했다고 보긴 힘들다.[115] 죽순하니까 대나무 11마디 공사가 생각나는데 내용인즉슨 제자들보고 한판씩 차리라는 내용(...)이다.장사인지 포교인지 헷갈리는 부분[116]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기는 한데 세력이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미약하다. 그도 그럴 게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강일순이야 증산계 종단들이 주장하는 '옥황상제'까지는 아니어도 나름대로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으로 보는 반면, 차경석은 진짜로 '한 때의 문제 인물' 정도 평가 외에는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앙의 대상을 강일순도 아니고 차경석으로 바꾼 것이니 신도를 모으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117]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 당시 공산당의 횡포로 중국에서 죽은사람만 수천만단위가 넘는다.[118] 십만냥이라는 거금까지 들여가며 본 공사였다. 도전 5편 23장[119] 다른 버전에는 "앞으로 시두가 대발하면 내 세상이 온줄 알아라." 하는 구절도 있다. 아무튼 천연두가 등장하면 큰 변화가 생긴다는 뜻 같다.[120] 事之當旺 在於天地 必不在人 然而 無人 無天地故 天地生人用人 不參於 天地用人之時 何可曰 人生乎 사지당왕 재어천지 필불재인 연이 무인 무천지고 천지생인용인 불참어 천지용인지시 하가왈 인생호[121] 예를들어 사우디 왕족 빈 살만과 비교해보자[122] 수석제자였던 김형렬 지음[123] 유서[124] 증산도의 경전[125] 대순진리회 교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