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참신앙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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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 (안중건) |
증산참신앙(증산선도)
신옥단소
안원전의21세기담론
증산도혁명
1. 소개
주로 증산도에서 탈퇴한 신도들로 구성된 증산계통 종교다. 증산계통 종교에서 자리를 굳힌 증산도를 상대로 형사고소를 하여 교주 안중건을 경찰, 검찰에 출석시키는 등의 일을 하였으나 분열로 인해 현 교세는 미미하다.2. 탄생 배경
2.1. 안세찬 사후 증산도의 형제의 난
안세찬은 슬하에 7남 2녀를 두었고 대부분이 증산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나 3남 안중건(경전), 4남 안병섭(원전), 5남 안정주가 교단 발전에 크게 힘썼다. 안세찬은 2011년에 3남 안중건에게 후계를 맡기고 2012년에 만 89세(91살)를 일기로 사망했다.그러나 안병섭과 안정주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형 안중건에게 반란을 일으킨다. 당시 증산도 내부는 이른바 '대두목'이자 '태극제'[1]로서 강증산ㆍ고판례와 더불어 거의 신앙의 대상이나 다름없던 안세찬이 개벽도 보기 전에 사망하자, 증산도 신도들은 큰 실망과 충격에 휩쌓였다.안정주는 안병섭이 운영하고 있던 안원전의 21세기 담론 사이트의 증산도 게시판에 '혁명가'라는 닉네임으로 증산도를 혁명하겠다고 선포하고 증산도 신도들에게 동참을 호소했다. 증산도가 바뀌길 바라는 舊ㆍ現 신도들이 다수 있었으므로, 신도들이 받은 충격을 틈타 안정주는 잠시나마 일부 신도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또한 증산도의 초창기 시절부터 신앙해온 노영균[2], 노상균[3] 형제가 안정주의 쿠데타에 가세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노상균은 증산도의 수석간부를 역임한 경력자이며 대내외적인 교리강사였으므로 증산도 내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2.2. 창교주 논쟁과 증산참신앙 태동
한창 기세등등하게 증산도의 문제점을 성토하던 2013년 4월 중반경, 안정주의 곁에서 쿠데타를 돕고 있던 장○○는 아내 신○○가 옛날 증산도 본부에서 근무하던 시절 증산도 초대교주 안세찬에게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는 글을 양심선언 형식으로 올렸다.안세찬의 성추문 소문은 2000년대 초, 증산도에서 갈라진 김준걸[4]의 풍류도에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당시 풍류도는 자기네 주장을 입증하지 못해 주요 구성원 상당수가 처벌받았고 일부는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성추행 피해자의 남편이 직접 글을 올린 것이다.이것을 계기로 증산도 쿠데타는 안정주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2대 교주 안중건만이 아니라 초대 교주 안세찬까지도 공격의 대상이 되자, 안중건과 같은 핏줄인 안정주ㆍ안병섭이 증산도를 근본부터 개혁할 수 없다는 생각에 상당수가 공감했다. 안정주는 자신에게 불리한 분위기로 상황이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취중에 자신이 죽었으며 장례식은 모 병원이라는 장난문자를 보냈다. 사망문자 사건 때문에 역시 안 씨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광주 출신 이석남은 대학 시절부터 증산도를 믿었고 안세찬 사후 신앙에 회의를 느끼다 안정주의 쿠데타에 동참했다. 이석남은 안정주를 지켜보다 그 역시 증산도를 제대로 바로잡을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노상균 역시 같은 생각을 했으므로, 안면만 있던 둘은 의기투합하여 전국을 돌며 안정주에게 동조했던 사람들을 만나서 안정주를 버리고 새롭게 종교운동을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노상균과 이석남이 주도한 이 모임은 안정주에 동조한 이들의 80% 가량을 흡수했다. 처음에는 가칭 '참신앙 바로세우기 운동'으로 시작했으나, 곧이어 이석남을 대표로 하여 '증산참신앙'이라는 교명을 확정했다.한편, 증산참신앙 태동으로 인해 증산도 내부신도는 물론 증산도에 등을 돌린 신도들에게도 인망을 잃은 두 형제는 현재 안병섭은 그대로 안원전의 21세기 담론에서, 안정주는 여러 번 사이트를 옮긴 끝에 증산도 혁명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고 있다.안병섭ㆍ안정주 형제가 어떤 방향으로 증산도를 혁명하려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증산도의 문제점을 폭로해 최대한 이탈자들을 모아 재단법인 증산도유지재단 접수를 노린 듯하다. 또한 두 형제의 시도가 실패했으므로 '증산도 쿠데타'라고 기술한다.3. 증산참신앙의 성장과 안중건 형사고소
3.1. 이흔순, 정연준의 합류
경북 구미시에는 성금 수억 원을 증산도에 바친 이흔순이라는 약사가 있었다. 대구에 거주하는 정연준은 증산도 초창기에 입교해 30년 가량을 신앙한 경력자였다. 둘은 안세찬 사망 이후 형제의 난에 이어 증산참신앙의 태동에 이르기까지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다 노상균과 이석남에게 접촉해 증산참신앙에 합류했다.이흔순은 증산도의 역사를 통틀어 성금을 많이 내기로 열 손가락에 들었던 열성 신도였고 경북ㆍ대구 지역에서 인망도 있어 영향력이 컸기에, 이흔순의 탈 증산도 선언은 노상균의 탈 증산도 선언에 이어 전국적인 파급을 일으켰다.3.2. 노상균의 교리 재해석과 성지답사
노상균은 약 30년간 증산도를 신앙하며 대중강연과 교리연구를 해 왔다. 증산도의 강사였던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김형렬[5][6]의 묘소 참배를 시작으로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단과 성지들을 답사하며 자신이 맹목적으로 믿었던 것들의 진위를 하나하나 조사하고, 그 내용을 증산참신앙 사이트에 동영상 또는 글로 게재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강일순과 고판례의 영정 개사
*강일순과 고판례의 무덤
*교운 3변역사 재해석
증산도의 3변 교리 | |||
단계 | 1변 | 2변 | 3변 |
교단 | 보천교 | 증산교 본부 | 증산도 |
교주 | 차경석 | 이상호·이정립 안세찬 | 안세찬·안중건 |
주관자 | 차경석 | 안내성 + 문공신 | |
도수 | 12점 도수 | 팔선녀 도수 + 정음정양 도수 |
증산참신앙의 3변 교리 | |||
단계 | 1변 | 2변 | 3변 |
교단 | 보천교 | 증산교·증산도 대순진리회 통일교 | 증산참신앙 |
교주 | 차경석 | 이상호·이정립·안세찬 조철제·박한경 문선명 | - |
주관자 | 차경석 | 안내성 | 문공신 |
도수 | 12점 도수 | 팔선녀 도수 | 정음정양 도수 |
*태을주의 태을천상원군太乙天上元君 주송법
*용봉 독존석가불 재발견
3.3. 증산도 교주 안중건 민·형사고소
위 3변교운 재해석에서 알 수 있듯이, 증산참신앙은 안세찬 사후 2변 교운인 증산도가 끝나고 3변 교운의 주인공이 자신들이라 인식했다. 노상균과 이흔순 등 증산참신앙의 운영진들은 증산도에 대한 형사고소 소송단 모집을 공고하고 1996년부터 출간된 월간개벽지, 증산도 교리 서적, 안세찬·안중건 부자의 강의 동영상 등을 분석했다. 약 반년간의 준비 끝에 고소인 128명을 모아 2014년 11월 5일, 대전지방경찰청 앞에서 성명서 발표와 동시에 고소장을 접수했다.증산도 교주 안경전 형사고소 (2014.11.5 대전지방경찰청) |
*가. 살인교사[11]
*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 (사기)
*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 (횡령)
*라. 강간
*마.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집단, 흉기등 협박) 교사
*바. 사기
*사. 강제추행
3.4. 플랜카드 재판
증산참신앙 운영진 노상균 및 회원 강동훈이 증산도 신도가 일으킨 살인사건에 대해 증산도의 사과 또는 해명을 요구했다가 명예훼손 행위로 기소되었지만 완승했다. 홍성렬 교수 피살사건 참조.3.5. 진혜원 교단의 발견과 도관vs마패 논쟁
2014년 겨울, 증산도 종도사 안중건은 강일순이 직접 만들었다는 '마패'를 2014년 동지대치성(2014년 12월 21일)을 맞아 공개하겠다고 선언했다. 강일순이 100년 후 대두목에게 전해질 신물을 제작했다니, 수많은 증산계 종교인들이 이목을 집중하였다. 2014년 동지절에 공개된 마패는 다음과 같다. 진혜원眞慧院 조화정造化定 남방객南方客 | 정正 세世 도道 존尊 광光 영永 명明 세歲 생生 불佛 |
이 마패를 보고 증산참신앙 회원들은 분명히 강일순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만들었다고 확신했다.[12] 남방객ㆍ정도광명생이라는 글자를 단서로 조사하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미륵님 말굴레≫라는 책을 찾았으며, 이 책을 통해서 그 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진혜원이란 또다른 증산교단을 발견했다. 진혜원 참조.
3.6. 마패검증 패배와 2기 운영진 출범
당시 증산참신앙 운영진들은 마패가 틀림없이 진혜원에서 만든 것이라 확신하고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마패를 공개하자마자 벌어진 상황에 증산도 간부들은 마패냐 도관이냐 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증산참신앙 운영진과 접촉해 진위를 가리자고 요구했다. 증산참신앙에서는 도관이 옳다면 증산도 종도사의 사퇴 및 대국민 사과 등을 요구했고, 증산도에서는 마패가 옳다면 소송 취하 및 사이트 폐쇄, 공개사죄 등을 요구했다.증산참신앙 운영진들과 증산도 간부들은 마패도관의 너비와 두께를 대조해 오차가 크면 마패가 옳고, 오차가 작으면 도관이 옳다는 대조법으로 진위를 가리기로 합의하였고 검증 결과, 도관과 마패의 치수 차이가 예상보다 컸기에 증산도의 승리로 끝났다. 마패검증 패배의 책임을 지고 노상균ㆍ이석남ㆍ이흔순ㆍ정연준이 운영진에서 사퇴했고, 김우재가 새롭게 대표를 맡되 김일환ㆍ이대학ㆍ조정국ㆍ배종우 등이 공동대표가 되었다.증산도는 증산참신앙이 고소 취하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계룡산 인근 산장에서 열린 증산참신앙 행사에 난입해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증산도 간부 4명이 예배방해죄로 벌금을 받았다. 경찰도 마패검증의 결과를 알았지만 안중건의 혐의는 반의사불벌죄가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조사를 진행했고 2015년 4월 9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3.7. 이흔순의 옥단소 사이트 개설
2015년 2월 경, 이흔순은 독자적으로 '옥단소'라는 사이트를 만들었다. 이 사이트가 오픈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증산도 여자 간부였던 유○○과 강○○이 1990년대 후반에 서로 통화하는 녹음파일이 올라왔다. 당시 강○○은 미국으로 갔던 국제포교사인데 선배 신앙인 유○○에게 신앙의 괴로움을 토로했다. 그런데 그 괴로움이란 다름아닌 자신이 한국에 있을 당시 직접 겪은 성추문에 관한 내용이었다. 강○○의 육성 녹음에 일부 사람들은 성추문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다.증산도는 진작부터 누가 옥단소를 만들었는지 파악했다. 이흔순은 자신이 옥단소를 만들지 않았다고 강변했지만, 증산도 간부들은 감을 잡고 구미에서 이흔순이 운영하는 약국을 여러 번 찾아와 항의했다. 그 와중에 이흔순은 로그인 실수로 인해 자신이 옥단소 운영자임이 발각되었다. #(댓글참조)
3.8. 대전 중앙도장 개창
증산참신앙은 2015년 9월 13일, 대전 중구 선화동에 도장을 개창했다. 그러나 이 날 직후, 증산참신앙의 몰락이 시작되었다.4. 민·형사고소 패배와 증산참신앙의 분열
4.1. 검찰의 불기소 처분서
2015년 9월 24일, 검찰은 안중건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내렸다.*가. 살인교사 - 혐의없음
*나.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 (사기) - 혐의 없음
*다.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위반 (횡령) - 혐의 없음
*라. 강간 - 공소권 없음
*마.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집단, 흉기등 협박) 교사 - 공소권 없음
*바. 사기 - 혐의 없음
*사. 강제추행 - 공소권 없음
기사, 정정보도
4.2. 노상균의 3대 대표 선출과 증산법륜도의 분파
민,형사고소가 모두 패소한 분위기 속에, 2016년 1월 조직쇄신을 위한 3대 대표를 선출했다. 증산참신앙의 회원 상당수가 모인 가운데 대표 후보로 노상균ㆍ정연준이 나섰으나 정연준이 사퇴해서 3대 대표로 노상균이 뽑혔다. 그런데 이흔순ㆍ이석남ㆍ정연준 등이 절차를 승복하지 않고 격렬히 반발해 증산참신앙은 분열의 위기에 몰렸다.당시 증산참신앙 사이트 소유자는 이흔순이었기에, 그는 일방적으로 노상균 및 노상균에게 동조하는 이들을 증산참신앙에서 퇴출한다고 공지했다. 곧이어 단체명을 증산법륜도로 바꾸고 증산참신앙의 도장을 점유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업장으로 무단 등록해 허위로 사업자등록증을 발급받았다. 증산참신앙은 이에 반발해 민원을 제기했고, 세무서는 증산법륜도의 사업자등록증을 말소하였다.4.3. 증산법륜도의 증산도교육문화회관 방문 사죄와 단체 해산
증산법륜도가 분파된 이후 이흔순ㆍ이석남이 피소된 재판은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증산도는 이흔순ㆍ이석남의 부동산, 동산을 가압류하였다. 2017년, 결국 이흔순ㆍ이석남ㆍ정연준ㆍ김일환 4인은 증산도교육문화관을 방문해 무릎을 꿇고 사죄문을 낭독하며 자신들은 노상균에게 속았으며 증산참신앙ㆍ옥단소에서 주장했던 내용들이 전부 허위이니 용서해달라고 사죄했다. 증산도는 사죄동영상의 편집본을 2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 2달간 유튜브에 올리고 증산법륜도의 공지로 띄우라고 요구했다. 결국 동년 3월 31일을 홈페이지를 삭제하였으나, 동년 6월, 또는 7월 초에 소리소문 없이 다시 홈페이지를 개설하였다. 증산법륜도가 해산되자 증산참신앙은 교명을 '증산선도'로 변경하되, 당분간 '증산선도'와 '증산참신앙'이란 교명 2개를 동시에 쓴다고 발표했다. 웹에서 증산참신앙ㆍ증산법륜도 등 단어로 검색하면, 노상균의 증산참신앙이 증산법륜도에서 갈라졌다고 잘못 기재된 글들이 많다. 증산참신앙을 지탱해온 교리가 상당수 노상균에게서 나온 점, 증산법륜도가 초기의 주장을 모두 포기하고 증산도교육문화회관을 찾아가 무릎 꿇고 사죄한 것, 분열되기 이전 합심하여 세운 도장이 증산참신앙의 차지가 된 것, 증산법륜도 사이트 및 조직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볼 때 증산법륜도가 증산참신앙에서 갈라져 나온 것에 가깝다.4.4. 신옥단소 출범
증산법륜도 운영진들이 모두 굴복했으나, 미국에 거주하는 마달숙은 포기하지 않았다. 마달숙은 증산도에 사죄함을 용납할 수 없었으므로 증산법륜도 운영진들과 마찰을 빚다가 제명당했다. 마달숙 역시 미국 소재의 증산도 법인에 고소를 당했으나 미국은 한국과 법체계가 다르므로 재판에서 나름 분전하던 마달숙은 신옥단소 사이트를 열어 자신의 재판상황을 공유하고 증산참신앙 사이트에 올라왔던 글들을 다시 게시하며 증산도를 비판하고 있다.4.5. 김일환의 청주 도방 개창
증산참신앙 2기 공동대표이자 증산법륜도 부대표였던 김일환은 독자적으로 청주에서 도방을 개창하고 충북, 경기지역 신앙인들을 어느 정도 흡수했다.4.6. 노상균의 실체가 유튜브를 통해 밝혀짐
사회 정의를 외치며 많은 사람들을 선동하던 노상균의 실체가 유튜브 밝혀졌다. 그 동안 노상균이 유튜브에 올린 교리 해석이 모두 자신이 대두목, 노천자임을 말하기 위한 큰그림이였으며, 그 큰그림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였음이였다. 유튜브가 올라가자 증산참신앙의 몇 안되는 남은 소수의 인원들은 노상균을 증산참신앙에서 재명하였다. 이후 증산 참신앙은 '증산선도'로 명칭을 변경하였으나, 큰 의미 없는 일이다. 증산참신앙은 노상균이 증산도의 비리를 주장하며 노상균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지고 운영된 모임이었으나, 노상균의 실체가 들어남으로써 이 모임의 모든 명분은 사라졌다.
[1] 증산도는 동양우주론의 무극, 태극, 황극의 삼극설을 차용해 무극은 강증산과 고판례, 태극은 안세찬, 황극은 안중건이라고 내부적으로 가르친다. 안세찬 영결식 당시 관에는 '태극제 안운산 종도사'라는 명정이 덮여 있었다. 증산도 참조.[2] 경희대 졸, 강증산이 '알음은 강절의 지식이 있나니'라고 평했던 소강절의 책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의 번역자.[3] 1961년생, 성균관대 졸, 현 증산참신앙 대표. 한때 증산도 산하 상생방송의 메인 강사였다.[4] 1970년생, 호 단예, '大道에 이르는 書' 등의 저자[5] 1862~1932, 호는 태운장太雲長. 강일순의 수석제자. 증산도의 증산도 도전, 대순진리회의 전경 등 주요 증산계통 교단 경전의 뿌리되는 '대순전경'의 저자 이상호에게 강일순의 행적을 증언해주었다. 불교로 말하면 아난다쯤 된다고 볼 수 있다.[6] 참조[7] 서적 '용화도장지킴이' 참조[8] 홍성렬 교수 피살사건 참조.[9] 삼변성도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데, 삼변성국이 맞다.[10] 이때 한자가 獨尊釋迦佛이 아니라 獨尊釋伽佛이다. 가(迦/伽)자가 다른데, 석가모니의 한자표기에서는 주로 迦를 쓰긴 했으나 伽를 쓴 사례도 없잖이 있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부석사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에서도 釋伽라는 글자를 사용하였으며, 조선시대 용재총화에서도 釋伽란 표기를 몇 번 사용하였다. 1921년에 나온 잡지 개벽 제14호에 실린, 임노월(林蘆月)이 쓴 '미지의 세계'란 글에서도 釋伽란 표기를 사용하였다. 강일순이 釋伽佛이란 표기를 사용해도 무슨 깊은 이유는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11] 홍성렬 교수 피살사건 참조[12] 일단 '마패'의 제작기법이 절대 조선시대 대장간에서 가능한 수준이 아니다. 또한 가로로 씐 글귀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조선시대식이 아니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는 현대식이었다. 이러니 구한말 사람인 강일순이 만들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