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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3:48:29

고판례

<colbgcolor=#aaa> 고판례
高判禮
파일:고법륜-증산참신앙.jpg
<colcolor=#fff> 성명 고판례(高判禮)
법륜(法輪)
본관 제주 고씨
출생 1880년 4월 22일[1]
사망 1935년 10월 19일[2] (향년 54세)

1. 소개2. 생애
2.1. 출생과 성장기2.2. 강일순과의 만남2.3. 종통전수와 강일순의 사망2.4. 고판례의 도통과 선도교 개창
3. 사후
3.1. 유해 도굴과 안장3.2. 평가와 영향3.3. 고판례 송덕문
4. 사진 및 교단별 진영5. 관련 경전 및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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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판례는 조선 말 후기의 여성 종교인으로, 종교인 강일순의 3번째 부인이자 보천교 교주 차경석(車京石)의 사촌누나이다.

2. 생애

2.1. 출생과 성장기

고판례는 1880년(고종 17년) 전라도 담양도호부 무이동면 도리[3]에서 부친 고덕삼(高德三)과 모친 박씨의 딸로 태어났다.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해 가세가 기울자 박씨는 딸과 함께 외외가(어머니의 외가)가 있던 암자에 갔다. 고판례는 어머니와 함께 몇 년간 불목하니[4] 노릇을 했을 것이다.

고판례가 9세때 박씨 모녀는 암자를 떠나 전북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5]의 이모부 차치구(車致九, 1851-94)[6]에게 의탁한다. 차치구는 동학 접주로서 남다른 기개로 유명했던 인물이었고 훗날 동학농민운동의 현장에서 전봉준을 보좌했다. 고판례는 차치구를 따라 당시 인근에 널리 퍼져있던 동학을 믿었다.

1894년 15세 고판례는 같은 동네에 사는 동학신도 신씨에게 시집간다. 고판례의 혼인 직후 동학군이 패배하여 전봉준은 물론 차치구도 사망한다. 차치구의 사망은 아들 차경석은 물론 고판례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고판례는 남편과의 사이에 태종이라는 딸 하나를 두었고, 남편은 결혼한 지 15년 만인 1907년 6월 사망했다. 이때까지 고판례는 동학 관련 수련을 했을 뿐 종교인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2.2. 강일순과의 만남

고판례의 삶은 강일순을 만나기 전후로 나눌 수 있다. 그 유명한 강일순과의 만남은 대략 다음과 같다. 남편 신씨가 사망하고 얼마 후, 차경석의 집에 스승 강일순이 찾아왔는데 방석이 없어 사촌누나인 고판례에게 방석을 빌려왔다. 강일순은 차경석이 바친 감주를 마시다 방석에 엎질렀고, 가지고 있던 붉은 손수건으로 감주를 닦으니 방석에 붉은 얼룩이 져 버렸다. 신통력을 부렸다고 알려진 강일순이니 고판례와의 만남을 내다보고 일부러 그랬던 것일 수도.

실제 둘의 만남은 며칠 후였다. 당시 강일순은 수부공사[7]를 맡을 여인을 천거해라고 제자들에게 요구했는데, 맏제자 김형렬은 그의 셋째 딸 말순을 수부로 추천했지만, 아내가 그런 결혼을 인정할 수 없다고 결사반대했기 때문에 정식으로 혼인식을 올리지 못하였다. 그러던 터에 차경석은 스승 강일순에게 수부감 천거를 재촉받고 마침 남편과 사별한 사촌누나 고판례를 떠올렸다.

그러나 차경석은 차마 이 말을 꺼내기 어려워 고판례에게 옷 손질을 부탁하며 강일순과의 우연한 만남을 계획했다. 강일순은 고판례를 보고 '수부를 지척에 두고 못 정했구나'라고 하며 차경석에게 속히 주선하기를 지시했다. 차경석은 고판례에게 자신의 스승이 수부감을 찾고있음을 전하고 수부공사를 맡기를 권하니 뜻밖에 고판례가 흔쾌히 승낙했다고 한다.

2.3. 종통전수와 강일순의 사망

내가 너를 만나려고 십오년 동안 정력精力을 들였나니 이로부터 천지대업天地大業을 네게 맡기리라
대순전경 제3판 31~32절
[ruby(君吾合德, ruby=군오합덕)] [ruby(三界改造, ruby=삼계개조)] 라 하시다.
그대와 나의 합덕으로 삼계를 개조하느니라.
선정원경
강일순은 누운 채 고판례에게 자신의 위에 올라탄 채 칼을 쥐게 하여 목을 겨누며 "나를 일등一等으로 정하여 모든 일을 맡겨 주시렵니까?" 하는 요구에 다짐을 해주는 의식으로 고판례를 부인이자 후계자로 선언했다고 한다.[8] 그러나 어디까지나 고판례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교단의 이야기이고,이를 믿지 않는 교단에서는 다르게 이야기한다. 사실 강일순의 '천지공사'에 대해서는 교단마다 자신들의 정통성을 뒷받침하는 내용으로 윤색하여 실제로 강일순이 어떤 의도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파악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강일순이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경찰서에 끌려가자 고문을 받은 뒤 풀려나오자 둘은 따로 살았다. 강일순은 고판례와도 벌거하여 동곡마을에 있는 제자 김형렬과 다른 제자의 집을 번갈아 오가며 고문후유증으로 약해진 몸을 추스리려 했으나 실패하고 끝내 사했다. 고판례와 식을 올린 지 2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2.4. 고판례의 도통과 선도교 개창

1911년 음력 9월 19일, 강일순 탄생일을 주관하던 고판례는 갑자기 기절했다가 깨어난다. 그런데 살아생전 강일순의 목소리로 차경석에게 자신과 교단을 운영하자고 말했고, 이후 강일순에 버금가는 정도의 신통력을 부렸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듣고 뿔뿔이 흩어졌던 강일순의 제자들이 다시 모여서 선도교라는 이름으로 교단을 개창한다. 이 시기는 증산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강일순 사후 최초의 증산교단이자 김형렬, 차경석, 문공신, 박공우, 안내성 등 주요제자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모인 교단이기 때문.

야망이 컸던 차경석은 교단을 장악할 욕심을 품고 고판례와 다른 제자들과의 접촉을 차단했다. 이에 주요 제자들 대부분이 선도교를 떠나 각자의 교단을 설립했고, 고판례 역시 차경석이 장악한 선도교를 떠났다. 이후 차경석의 행로에 대해서는 차경석, 보천교 문서 참조.

고판례는 여러 번 거처를 옮기며 강일순의 9년 천지공사를 이은 10년 천지공사를 집행했고, 1935년에 오성산[9]에서 사망했다.

3. 사후

3.1. 유해 도굴과 안장

고판례의 유해 또한 강일순과 마찬가지로 도굴되는 사건을 겪었다. 용화교의 교주 서백일은 부하 최정현에게 지시해 고판례의 유해를 도굴해 용화교 인근에 암장했다.

고판례를 모시며 동화교를 운영했던 이정립은 유해의 위치를 수소문해 찾았으나, 당시 아직 용화교의 교세가 남아 쉽게 이장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판례의 딸 신태종의 남편을 찾아가 장모의 유골을 이장해야 함을 알리고 그를 앞세워 유해를 수습해 제비산에 안장해 현재까지 증산교 본부에서 묘소를 관리한다. 참고

3.2. 평가와 영향

일제강점기의 사회상에도 영향을 끼쳤던 보천교는 고판례의 선도교 내부에서 차경석이 세력을 키워 만든 종교인데,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증산교 본부증산도, 그리고 증산도에서 갈라져 나온 교단인 태을도[10], 증산참신앙, 증산법륜도 등은 고판례를 강일순과 함께 동격으로 모신다.[11]

3.3. 고판례 송덕문

이정립이 아꼈던 후배이자 훗날 증산교 종령을 역임한 홍성열이 고판례의 송덕문을 지었고, 무덤 옆에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전문은 다음과 같다.
수부고부인송덕비首婦高夫人頌德碑

수부首婦 고부인高夫人 판례判禮님은 조선왕조 고종 17년 3월 26일 전라도 담양군潭陽郡 무면武面 성도리成道里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의 휘諱는 덕삼德三이요 모친은 박씨朴氏이시다. 모친께서 절에서 기도할 때 꿈에 높은 산에 올라 웅장한 집에 들어가니 한 선관仙官이 붉은 책과 누런 책 한권씩을 주거늘 받고 이로부터 잉태하여 딸을 나셨다. 나신지 여섯달 만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 아홉 살에 모친을 따라서 정읍군井邑郡 입암면笠岩面 대흥리大興理로 이사하고 여기서 이모부 차치구車致九를 좇아 동학東學을 믿으셨다. 약년弱年에 같은 마을 신씨申氏 집으로 출가하여 딸 하나를 두고 상부喪夫하여 홀몸이 되셨다. 대순 37년 정미丁未 동짓달 초이튿날 상제上帝께서 태인泰仁 행단杏壇에 이르사 종도從徒 차경석 車京石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 네가 일을 하려거든 수부首婦를 들여 세우라 하시므로 차경석이 상제를 모시고 집에 돌아와서 그의 이종누님인 님을 천거하였다. 상제께서 님을 수부로 맞이하실 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만나려고 15년 동안 정력精力을 들였다니 이로부터 천지대업天地大業을 네게 맡기리라 하시고 매양 님의 등을 어루만지시며 너는 복동福童이라 장차 천하 사람의 두목頭目이 되리라 하셨다. 이와 같이 삼계대권三界大權을 주재主宰하여 만고에 없는 천지공사를 행하신 상제께서 님을 수부로 택정擇定하심에 님이 천지공정天地公庭에 참여하여 후천後天 5만년 운수運數를 여는 여러 공사公事에 끼친 공덕功德이 무량無量하셨다. 상제께서 차윤칠車輪七에게 말씀하시기를 수부가 눈물을 흘리면 천하사람이 눈물을 흘리고 수부가 기뻐하면 천하사람이 기뻐하리라 하신 것은 님이 수부로써 신문神門에서 보인 혈성血誠이 신명神明과 사람을 감동感動케 한 것을 밝히신 것이다. 님은 상제께서 억음존양抑陰尊陽하던 선천先天의 그릇된 이치를 뜯어고쳐 여인女人도 각기 닦은 바를 따라 존신尊信하는 후천 여인상女人像의 표상表象이시다. 상제께서 화천化天하신 해 9월에 님이 상제를 애모哀慕하여 새벽에 홀로 80리 길을 달려 초빈에 존尊을 드리고 그 두 이듬해 4월에 대원사大願寺에 가서 49일 동안 진법수련眞法修鍊을 행하였고 그해 대순절大巡節에 대흥리大興里에서 상제의 성령聖靈에 접응接應되어 종도들을 불러 교단개창敎團開創을 선언하고 포교를 명하니 이로써 상제께서 화천하신 후後에 후천선계後天仙界을 개벽할 증산종단甑山宗團의 첫 교단敎團인 태을교太乙敎가 서게 되었다. 님이 태을교를 창립하여 수년간 교화敎化를 폄으로써 이 대지大地위에 상생대도相生大道가 발전할 기초基礎가 굳어졌고 대순 48년 무오戊午 9월에 대흥리를 떠나 조종골에 이르러 법소法所를 짓고 십삼년간 신정神政을 베풀어 중생衆生을 건졌으며 다시 대순 61년 신미辛未 동짓달에 용화동龍華洞을 이거移居하여 조종祖宗골 교단과 동화교東華敎를 통합하고 2년간 따뜻하게 도인道人들을 가르치시다가 오성산五聖山 수양소修養所로 은거한 뒤 대순 65년 을해乙亥 10월 6일 쉰다섯의 연세로 선화仙化하셨다. 님의 일생은 상제께서 지워주신 후계사명後繼使命을 받들어 여느 규중의 부녀婦女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도문道門의 큰 살림을 하면서 신도적神道的으로 그 문도門徒들에게 큰 기운을 불어넣어 천하 만민을 선도善導해 나갈 새로운 도장道場을 열게 하고 대도大道가 꽃필수있는 대덕大德을 쌓아 온 거룩한 삶이었다. 님의 탄신 백아홉돌 되는 해에 님을 숭앙崇仰하는 도인道人들이 성심聖心을 모아 여기 작은 돌을 세우고 무딘 붓으로 삼가 그 위업偉業을 기린다.

대순大巡 119년 음력 3월 열엿새
洪凡草 글 짓고
金芳鉉 글씨 쓰고
증산종단연합회 후원하여
증산교본부 세움

4. 사진 및 교단별 진영

파일:고법륜-오성산교단.jpg파일:고법륜-선도신정경.jpg파일:고법륜-증산참신앙.jpg
오성산교단 진영[12]선도신정경 진영[13]증산참신앙 진영[14]
파일:고법륜-증산교본부컬러.jpg파일:고법륜(jsd).jpg-
증산교 본부 진영 컬러본증산도 진영-

5. 관련 경전 및 기사

선정원경, 고부인신정기, 천후신정기, 선도신정경

참고기사


[1] 음력 3월 26일.[2] 음력 10월 6일.[3] 現 전라남도 담양군 무정면 성도리[4] 사찰에서 땔나무를 베고 물을 긷는 사내 종노[5] 현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 대흥마을. 행정구역상의 대흥리는 사라졌다.[6] 보천교 교주 차경석의 아버지이자, 고판례의 어머니 박씨의 아래 아래 동생의 남편[7] 수부首婦란 으뜸가는 여인네라는 뜻이다. 강일순은 천지에 여성의 한이 가득차 있다고 진단했고, 여성을 해원시키기 위해 부인이자 후계자가 될 여인을 찾고 있었다.[8] 여성이 남성의 위에 올라탄 이 모습이 지천태괘를 상징한다는 것이 고판례 종통을 믿는 교단의 해석.[9] 전북 군산시[10] 태을도 대종장 이훈오는 증산도 신도였음.[11] 보통 천지부모라고 호칭한다.[12] 제자 고민환이 채용신 화백에게 의뢰하여 그렸다.[13] 선도신정경 앞부분에 "위에 모신 진영은 오성산 교단의 이용기 계에 이봉구가 국회의원 출마를 하였을 때에 이 진영과 대순전경을 도인 이우인에게 전하여 현금까지 봉안하고 있는 유일의 사진을 공개하니 혹시 훼손의 불경을 범하지 말라."는 문구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14] 선도신정경의 사진을 근거로 증산참신앙의 노상균이 디지털 사진 전문가에게 맡겨 개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