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6:22:05

정세균/생애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정세균
{{{#!wiki style="margin:-10px"<tablebordercolor=#152484> 파일:정세균-투명2.svg정세균
관련 문서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152484,#008ccd> 생애 및 활동 <colbgcolor=#fff,#1f2023>생애 및 정치 경력
20대 대선 미래경제캠프
비판 및 논란 비판 및 논란
기타 정세균계 ·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 ||

1. 개요2. 출생 및 성장3.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3.1. 열린우리당 시절3.2. 통합민주당~민주당 시절3.3. 민주통합당 시절3.4. 새정치민주연합 시절3.5. 더불어민주당 시절3.6. 20대 전반기 국회의장
3.6.1. 새누리당과의 반목(反目)3.6.2. 특검법 직권상정3.6.3.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
3.7. 국회의장 퇴임 이후3.8. 제46대 국무총리 시절
3.8.1. 지명 및 인준 과정3.8.2. 2020년 1월 14일 총리 취임3.8.3. 총리 취임 이후
3.9. 국무총리 퇴임 이후3.10. 제20대 대통령 선거3.11.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3.12. 이후 전망

1. 개요

정세균의 생애를 정리한 하위문서이다.

2. 출생 및 성장

1950년 11월 5일 (음력 9월 26일)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남덕유산 자락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정병남(丁炳南, 1925. 8. 17 ~ 1993. 12. 5)과 어머니 금산 한씨(錦山 韓氏) 한순배(韓順培, 1924. 8. 26 ~ 2004. 1. 16)[1] 사이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직후 진안군 동향면 능금리 능길마을로 이주했으며, 1963년 진안 동향국민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대신 주천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고, 1966년 고등학교 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중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신설학교였던 무주 안성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면학 분위기가 좀처럼 형성되지 않아 6개월 만에 중퇴했다. 이후 전주공업고등학교에 입학생 전체 8등으로 진학했으나, 4년제 대학에 진학하고자 결심하고 전주신흥고등학교(69회)로 전학을 갔다. 이때 일화가 하나 있는데, 전주신흥고등학교 교장에게 대학교는 가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대신 본인을 장학생으로 입학시켜달라는 배포 큰 편지를 보낸 것. 하지만 현실은 동화가 아니라서 교장은 장학생 대신 매점 일을 맡겼고, 그 알바[2]로 돈을 벌면서 공부를 해 이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방송에 소개되기도 했다.

1969년 전주신흥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1년 3월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71학번)에 진학했다. 1학년 때 고대신문 기자로 활동하는 한편, 법과대학 법학과 대표를 지냈고, 이를 바탕으로 1973년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74년 8월 총학생회장 임기를 마친 뒤 1975년 2월 고려대학교를 졸업했다. 1975년 7월 4일 육군에 입대하여 전주시 소재 제35보병사단 신병교육대대에서 신병교육을 받은 뒤 수도경비사령부에 배치되었다. 그곳에서 운동권에 대한 학원사찰을 수행하는 보직을 부여받았는데, 이 임무를 수행하느니 차라리 영창을 가겠노라하며 버텼다. 결국 이후 경상북도 안동시에 있던 제36보병사단으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정훈병으로 복무했고, 1978년 1월 17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였다.

1978년 1월 1일, 쌍용그룹에 입사했고, 1982년부터 1990년까지 미국 뉴욕로스앤젤레스에서 주재원으로 일했다. 그 사이 1986년 뉴욕 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고, 1988년 8월에는 페퍼다인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1990년 4월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0년에는 상무이사로 승진하여 수출 업무를 맡게 되면서[3][4] 실물과 이론을 두루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1994년 통합선거법 제정에 대한 소식을 듣고 정계 진출을 결심했고, 이듬해인 1995년 6월 쌍용그룹에서 퇴사하였다. 이때 김석원 당시 쌍용그룹 회장은 "회사 최고위직도 오를 수 있는데 뭣 하러 정치하러 나가느냐, 사장까지 하고 나가면 좋지 않냐"고 만류했는데, 정세균은 "한창 일할 때 국회로 가는 게 맞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은 안하고 권력만 누리게 됩니다."라고 정중히 거절하였다고 한다.[5]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의 제안을 받고 정치에 입문했다. 1996년 4월 11일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출생지인 장수군과 오래 살아온 고향 진안군이 포함된 전라북도 진안군·무주군·장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제14대 국회의원 출신의 신한국당 정장현 후보 등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후 새정치국민회의에서 정책위원회 제3정책조정위원장을 지냈다. 2000년 4월 13일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진안군·무주군·장수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5선 국회의원 출신의 자유민주연합 김광수 후보 등을 꺾고 재선에 성공했다. 2003년에는 열린우리당 정책위원회 의장, 2004년에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위원장[6] 한편, 2000년 3월 경희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2004년 2월 마케팅 전공으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열린우리당 후보로 전라북도 진안군·무주군·장수군·임실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천년민주당 양영두 후보를 꺾고 3선에 성공했다. 2004년 10월 1일 전북대학교 상과대학 초빙교수임용되어 2007년 3월까지 재직했다. 2005년에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겸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 열린우리당 의장 대행 등을 지냈고, 2006년 2월 10일부터 2007년 1월 4일까지 제62대 산업자원부장관, 2007년에는 열린우리당 제2기 의장을 맡았다. 2008년 4월 9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통합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진안군·무주군·장수군·임실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장용진 후보, 자유선진당 박병관 후보 등을 꺾고 4선에 성공하는 등 12년간 한 지역구에서만 내리 4선을 역임했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쉽게 당선될 수 있는 자신의 지역구에 불출마를 선언한 뒤 서울특별시 종로구로 지역구를 옮길 것을 선언한 뒤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하였고, 새누리당 홍사덕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7] 2014년 8월 22일 전북대학교로부터 정치학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시 대권주자로 거론되던 前 서울특별시장 출신의 새누리당 오세훈 후보를 제치고 종로구에서 재선하였다.[8] 그 동안 여의도 안팎에서 정세균의 선거전 역량에 의문을 품었던 사람들도 보수계의 거물급 정치인을 두 번이나 압살하는 것을 보고 의심을 모두 버렸다고...

더불어민주당의 원내1당 등극과, 여야 두루 적을 만들지 않는 스타일 덕에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여유롭게 선출되었다. 당시 당 내의 경쟁 상대는 문희상이었다.[9]

3. 정치인으로서의 행보

파일:/image/025/2016/04/14/htm_20160414154229813811_99_20160414200324.jpg
▲ 2016년 4월 14일 선거 유세용 차량인 '소독차'를 타고 당선 사례를 하는 중.[10]
파일:external/img.khan.co.kr/l_2016062101002924100222364.jpg
▲ 기타 항목에 언급된 세균맨 인형을 가져다 함께 찍은 사진. 의장 임기 내내 항상 올려두고 있었다.[11][12]
정치권 입문 후에는 국회 재정경제위원을 지냈고, 민주당과 열린우리당, 통합민주당, 새정치민주연합에서 정책위의장, 원내대표, 당의장, 당대표 등을 역임했다. 대기업 근무 경험 및 해외 체류 경험이 어우러져 실물경제에 밝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에 유능한 경제 대통령 및 가계 부채 부담을 줄이겠다는 캐치프레이즈로 민주통합당 제18대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였다.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SNL 코리아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가 출연한 부분 여기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세균'이란 이름은 '세상을 형있게 만들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청년 실업에 관한 대안을 정책으로서 개발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도 하며, 실물 경제에 밝다는 장점을 십분 이용하여 가계 부채를 완화하고자 하는 정책을 끊임없이 개발하는 중이다. 정세균, 청년세(稅)법 발의…'과표 1억 초과 기업에 1% 법인세' 이 밖에도 나름대로 젊은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가발 쓴 정세균

3.1. 열린우리당 시절

열린우리당에서 정책위의장, 국회 예결특위위원장을 거치며 주로 경제분야에서 정책역량을 과시했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1월 열린우리당 원내대표를 역임하였다. 당시 사학법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 처리 실패로 흐트러진 당의 전열을 추스르면서 야당의 반대에 부딪혔던 주요 법안을 통과시키는 역할을 맡아 수행하였다.

2005년 3월에는 한나라당의 반대를 뚫고 행정복합도시특별법, 과거사진상규명법을 통과시켰다. 2005년 10.26 재보선에서 열린우리당이 패배한 이후 3개월 동안에는 임시 당의장을 겸임하며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006년 2월부터 2007년 1월까지는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을 역임했다. 재임 기간 동안 수출 3천 억 달러를 달성하기도 했다.

2007년 2월, 열린우리당이 위기에 처하자 각 계파의 합의에 의해 당 의장에 추대되었다. 그 후 6개월 동안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의장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3.2. 통합민주당~민주당 시절

2008년 7월 6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대철[13], 추미애 등과의 경선에서 승리하여 통합민주당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18대 국회가 민주당 최악의 참패였음에도 불구하고 당대표를 맡아 원내대표였던 원혜영과 당을 수습했다는 점에서 구원 투수 역할을 제대로 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정세균 대표는 범 친노계열의 대표 역할을 민주당 내에서 했다.

그의 대표 시절 첫 선거인 2009년 4월 재보선에서 민주당은 텃밭인 전북에서 무소속 후보들[14]에게 패배했으나 수도권 선거구인 인천 부평을에서 의석을 추가했으며[15], 같은 해 10월 재보선에서는 수원시 장안구, 안산시 상록을, 충북 증평군[16]을 잡아 3:2로 한나라당에 승리했다. 당시 민주당은 이 결과를 MB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심판으로 해석하는 논평을 냈으며, 한나라당은 "패배를 인정한다"면서도 "참패는 아니라 국민들에게 감사하다"는 논평을 냈다.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는 민주당이 노무현 대통령 추모 바람과 진보 야당들과의 선거 연대, 무상급식(의무급식) 등 복지 공약을 적절히 조합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 친노 성향 후보가 출마한 인천(송영길), 강원(이광재), 충남(안희정)을 모두 가져왔고, 특히 충북(이시종)을 가져오며 민심의 바로미터인 충청도의 과반을 차지하기도 했다.[17] 이 밖에 당선은 되지 못했지만 부산의 김정길 후보가 45%의 득표율을 올리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18] 서울의 경우 시장 자리는 오세훈 후보에게 근소한 차(0.6%)로 패배했지만 의회 의석의 상당수를 점유하였다. 이걸 보고 몇몇 기자들은 그때까지 이른바 관리형 정치인으로 불리던 정세균을 가리켜 '구원투수'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이후의 2010년 7.28 재보선에서는 민주당이 참패한다. 당시 야권은 재보선 대상의석 8석 중 총 6석(민주당 5석+창조한국당 1석)을 점하고 있었으나, 선거 결과 민주당은 단 3석만을 건진 것이 전부였다. 또한 그중 1석은 텃밭인 광주였으며, 그 광주조차 민주노동당 후보가 40%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였다. 진보 3당과 야권연대를 한 창조한국당 문국현 전 대표의 지역구였던 서울 은평 을에서도 후보를 워낙 약하게 내서(....)[19] 패배한 것도 꽤 컸다. 결과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실세 중 하나이자 입으로 불렸던 이재오를 재기시켰기 때문. 불행 중 다행으로 강원도 선거구 3개 중 2개를 이기며 소위 '이광재 효과'를 이어가긴 했으나, 각각 충북도지사, 인천시장에 출마하기 위해 사퇴한, 심지어 당선되었던 이시종 지사, 송영길 시장의 지역구에서도 패배하는 등[20][21] 당시 잘나가던 민주당으로서는 체면을 구긴 선거가 되었다.

이후 정세균은 2010년 8월 2일에 당 대표를 사퇴하고 박지원 원내대표가 민주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었다. 동년 10월에 열린 전당대회에 다시 출마하여 당 대표 복귀를 노렸으나 손학규, 정동영에게 밀린 3위로 낙선, 민주당에는 손학규 체제가 출범한다.[22] 이후 최고위원직 사퇴를 고심하다가 측근들의 만류로 당무에 복귀했다.

3.3. 민주통합당 시절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쉽게 당선될 수 있는 자신의 지역구를 마다하고, 격전지이자 정치 1번지인 종로구에 출사표를 던졌다. 종로구는 역대 대통령만 3명이나 배출한 곳으로서 정치적 상징성이 매우 높은 곳이지만[23], 1998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보궐선거 승리를 빼고는 1990년대 이후 모두 보수 정당 후보가 당선됐던 지역이라 야당 의원들에게는 험지(險地)에 속하는 곳이었다. 더욱이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는 민주당에서 손학규 대표가 출마했다가 한나라당 박진 후보에게 패해 고배를 마셨으니,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느냐는 반응이 나왔다. 원래 이명박 前 대통령 및 친이계는 종로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친이계 최측근이자 소위 MB키즈로 불리는 이동관을 공천하려 했으나[24], 이동관은 선거로 정계에 처음 입문하는 인물인데다[25], 상대가 친박의 좌장인 홍사덕인지라 홍사덕에게 밀려 공천에서 탈락했다.[26] 어찌됐든 상대 후보는 친박의 좌장 중 한 명이자 6선 경력의 홍사덕으로, 워낙 지명도가 높은 데다 당시 새누리당의 차기 당대표로 지목될 만큼 주목을 받는 인물이어서 아무래도 불리할 것으로 예상되었다.[27]

하지만 결과는 5천 표 이상의 압승이었다. 득표율은 52.27%. 승리의 원인으로는 종로의 밑바닥을 거의 훑다시피했던 선거운동과 특유의 스킨십이 꼽혔다. 관련 동영상 이로써 정치 1번지인 종로구에 안정적으로 둥지를 틀었고, 5선 고지 등정에 성공했으며, `호남 정치인`에서 벗어나 `전국구 정치인`의 위상을 갖게 됐다. 어찌 됐든, 서울 도심이자 서울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종로에 입성하면서, 정세균은 점차 정계의 거물급 인사 중 한 명으로 성장하게 된다. 여기서 이 선거결과를 봤을 때, 이명박의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이동관이 종로구에 새누리당 후보로 공천돼서 정세균과 붙었어도 득표율을 추정해 봤을 때 여전히 정세균이 무난하게 당선되었을 것으로 보인다.[28]

그렇게 종로에서 압승한 기세로 제18대 대통령 선거당내 경선에서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나 전북에서만 1위를 했을 뿐, 전국적으로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면서, 결국 문재인 후보에게 패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상당한 선전이 기대되었으나, 의외로 경선주자 4인 가운데 꼴찌를 마크하였다. 경선 패배의 원인은 역시 대중성의 부족, 그리고 카리스마의 부족, 당시 같이 친노계의 좌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친노 진영이 대부분 노무현의 후계자라 불리는 문재인에 결집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 시절에 김연경 흥국생명 이적 파동이 발생하자, 김연경을 위해 힘을 써주었다.
당시 저와 동료의원들이 기자회견까지 열어 대한배구협회에 국제이적동의서를 발급해달라는 요청을 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합니다

3.4. 새정치민주연합 시절

2013년부터는 문재인과 연대하였고, 새정연 비주류 의원들이 문재인 대표를 흔들자, 문 대표를 옹호하기도 하였다.[29] 2015년 2월의 새정연 당직인선에서는 정세균계 의원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는데, 정책위원장은 강기정(정세균계)[30], 사무총장은 최재성(정세균계), 전략홍보본부장은 안규백(정세균계)이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또한 2015년 8월에는 정세균계의 김성주가 정책위원회 수석부의장이 되었다.

이후 정세균은 "유능한 경제정당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정세균계의 다른 활동과 함께 활동을 병행하였다. 여담으로 정세균은 청년정책에 특히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자신의 아들도 취업을 못하고 있는 취준생이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었다. 청년 정책 강연 자리와 인터뷰에서도 스스로 밝혔고 정청래의 개인 팟캐스트에 게스트로 출연해서 말했다.기사

그리고 다음 총선에 당선되면 대권을 노려보겠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3.5. 더불어민주당 시절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명이 더불어민주당으로 바뀐 후 그의 당내 세력은 허무할 정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비상대책위원회 체제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관한 공천심사 2, 3차 컷오프에서 오영식, 전병헌, 강기정을 비롯한 정세균계 의원들이 대거 컷오프당한 것이다. 불출마를 선언한 최재성까지 포함하면 친노 주류에 이어 당내 다수파를 점유하던 정세균계가 사실상 몰락해버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자르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시선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문재인을 위한 견제라는 설이다. 4월 총선 이후 치를 당내 전당대회에서 정세균이 당 대표로 복귀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뿐 아니라, 2017년 대권 경쟁에서 정세균이 문재인에게 치대거나 박원순과 연대하지 않도록 염두에 둔 비대위의 이중포석이라는 의견. 실제로 박원순 서울시장과 가까운 임종석, 민병덕 등이 공천에서 모두 탈락한 것과 연결해 이 의견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친노계 내에서 문재인과 최고 좌장 자리를 다투던 이해찬을 날려버리고 범친노 내에서 문재인계와 경쟁하던 정세균계도 좌장 정세균을 제외한 주변 인물을 모두 낙천시킴으로써 소위 '친문체제'를 구축했다는 주장. 관련 기사 참조

또 다른 하나는 문재인에 대한 견제라는 설이다. 비대위를 점하고 있던 박영선 등의 비노 세력이 총선 이후의 당권, 대권 경쟁에서 문재인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문재인 본인의 중심 세력이었던 친노계와 그에 대해 우호적이었던 정청래, 정세균계 의원들을 컷오프해버렸다는 의견. 실제로 당시 공천권을 비롯한 비상대책위원회의 전권을 쥐고 있던 김종인 위원장은 '친노계'에 대해 상당히 불쾌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고, 비대위에서 문재인 전 대표와 대립하였던 위원들은 단수공천을 받았다.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총선 이후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는 문재인에 대한 확고한 지지인이 사실상 없어진 상태라 사실상 박영선, 이종걸 같은 비노계가 새로운 결집 카드인 김종인 위원장을 중심으로 완벽하게 문재인의 수족을 잘라낸 것이라는 주장.

정세균은 현재 지역구인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다시 공천을 받았고, 새누리당 후보로 공천된 오세훈 전 서울시장과 대결하게 됐다.
파일:external/scontent.cdninstagram.com/10953323_976461942401602_2098439322_n.jpg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1950588_STD.jpg
▲ 당연히 이때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이를 정치인 특유의 흔한 허풍이라면서 코웃음을 쳤다.
3월 21일의 여론조사에서 ‘오세훈 45.1% : 정세균 32.6%’로 크게 밀리는 등 당선이 어렵겠다는 평가를 받았다. 관련 기사 참조 3월 23일에는 '오세훈 45.8% : 정세균 28.5%'로 차이가 더 벌어져, 이미 대세는 굳어졌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관련 기사 참조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597635040db8782e85d24dc9b2eaf23331d5464b__mn377583__w800__h450__f74997__Ym201604.jpg
▲ 거창한 문구는 아니지만, 오세훈의 아픈 과거를 찌르는 인상적인 슬로건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31]
선거전에 돌입한 후에는, 오세훈의 플래카드 바로 아래에 걸어 놓은 플래카드에서 깨알 같은 디스로 유권자들의 웃음을 자아내었다. 본 사진의 소재지는 혜화동로터리 우리은행 앞이다. 그 외에도, 흥부자 유세단을 조직하여 유쾌한 춤판을 벌이는 등 관련 동영상 참조 센스만점의 선거운동을 전개하여, 대어를 낚을 조짐이 보였다.

그 후 4월 7일 발표된 (4월 3~5일 기준) KBS 여론조사에서 오세훈 후보와의 격차가 불과 1%도 안 되는 초박빙의 접전으로 나타났다. 불과 2주일 전, 같은 조사기관에서 집계한 여론조사에서 17% 이상 밀렸던 것을 생각하면, 격차가 급속히 좁혀진 것이다.

그리고 4월 13일 총선당일, 최종적으로 52.6%의 지지를 받아 39.7%에 그친 오세훈 후보를 꺾고 6선(종로구에서는 재선)에 성공했다. 위에서 언급해왔던 지지격차를 생각해본다면 대단한 일이다. 역전으로 증명하겠다는 트윗에 코웃음을 쳤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지지자들마저도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선거 전에 이뤄진 여론조사의 신뢰도에 대한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선거기간 당시 두 후보의 유세 스타일을 비교해보면, 충분히 납득이 되는 결과로 평가할 수 있다. 정세균은 골목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밑바닥 정서를 폭넓게 파고 드는 디테일에 강한 "저인망" 스타일이었던 반면, 오세훈은 번화가 거리 사거리쪽에 앰프 트럭 크게 틀고 유세한 게 전부였다.. 한편으로 오세훈은 새누리당의 서울시 선거위원장을 맡으면서 인근 동대문구를 비롯한 다른 선거구로도 유세를 나갔는데, 그만큼 종로 내에서의 활동은 뜸했던 게 사실이었다. 이를 두고 종로구민들은 "벌써부터 대권 행보냐"며 부정적 시선을 감추지 않았던 것.

이에 대해 정세균은 "오세훈은 강남 스타일을 하지만, 종로 스타일은 따로 있다."라고 한마디 했는데[32], 이 말이 종로구 유권자들에게는 상당히 먹힌 게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오세훈이 아무래도 예전에 그렇게까지 큰 사안이 아닌 무상급식 건으로 서울시장직을 사퇴하면서 버린 적[33]이 있다보니 신뢰를 그리 많이 못 받기도 했다.[34]

종로 선거구 내의 동별 지지도를 보더라도, 정세균이 오세훈을 얼마나 확실하게 압도를 했는지 알 수 있다. 오세훈 후보의 지지율이 더 높은 곳은 평창동과 사직동뿐이었다. 반면 정세균 후보는 본래 지지율이 높은 지역인 이화동, 창신동[35], 혜화동[36] 등을 모두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접전지로 구분되었던 무악동, 가회동에서도 우세를 보였다.
파일:external/www.businesspost.co.kr/26238_38372_917.jpg
▲ 승리를 만끽하는 정세균과 부인 최혜경
결국 호언장담 했던대로 오세훈을 13% 가까운 차이로 박살내고 종로구 국회의원에 당선되는데 성공한다.

3.6. 20대 전반기 국회의장

파일:external/file.dailian.co.kr/news_1465461225_576240_m_2.jpg
▲ 임시 국회의장 서청원과의 만남[37][38]
제20대 국회에서 더민주가 원내 제1당으로서 국회의장을 맡는 것이 확정되면서, 6월 9일 20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사진에서 정세균에게 의장석을 넘겨주는 인물은 20대 국회 최다선(8선)이면서 표결 당시 임시 의장을 맡았던 새누리당의 서청원이다. 새누리당이 20대 총선에서 이겼다면 의장이 될 수도 있었던 인물이라서 묘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당시 의장 선출 표결에서는 박영선이 민주당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사실상의) 반대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세균의 최종 단독 후보 찬/반 투표였다. 20대 국회의원이 287명 중 273표가 찬성표가 나왔는데, 이는 새누리당이나 국민의당 의원들도 대부분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찬성표를 던졌다는 말인데, 박영선만 사실상의 반대표를 행사했다는 말이다. 참고로 이를 목격한 것은 한겨례 이세영 기자라고 한다. 박영선은 투표를 하자마자 혼자 차 타고 떠났다고...[39]

사실 종로에서 기록한 압도적 승리를 바탕으로 다시 한번 대권에 도전해볼 만도 하였으나, "대권 도전과 국회의장직 중에서 고민하고 있다."는 의사를 내비친 뒤 결국 대권은 접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40] 국회의장을 지낸 국회의원은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고 정계를 은퇴하는 관례로 미루어볼 때 매우 명예로운 퇴장을 준비하고 있다는 평.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은 의전서열 2위로, 이보다 높은 자리는 대통령밖에 없기 때문.

그러나 차기 대통령이 민주당에서 나올 경우 민주당을 꿀꺽한 친노파가 어떻게든 호남을 달래기 위해서 호남출신에게 한 자리를 줘야 하는데, 명분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계파적으로 보나 민주당에 남은 호남측 인물들 중에서 정세균은 어떻게든 다음 정권에서 역할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평가도 많다. 사실 이 관례는 16대 국회 후반기 의장인 박관용 의장이 만들어낸 관례이지만, 말 그대로 관례일 뿐 국회의장을 지냈던 국회의원이 차기 총선에서 출마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일례로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장을 두 번이나 지냈다. [41]

국회의장이 되자마자 의장 직권으로 국회운영위원회를 야당 의원 60% 상임위로 만드는 노련함을 보였다. 참고로 우리 국회에서는 상임위원회 재적 의원의 60% 이상이 찬성할 경우, 특정 안건을 신속처리 안건으로 지정해서 본회의에 상정할 수 있게 하는데,[42] 여기서 핵심은 국회 운영위다. 원래는 운영위가 더민주 11명, 국민의당 4명이라 야권 비율이 60%에 미달했으나, 정세균 의장이 운영위에 정의당 노회찬, 야권 성향 무소속 홍의락[43]을 배정해서 야권 비율이 60%를 넘게 하였다. 새누리당도 나름 머리 써서 야당 의원들이 60%를 넘는 상임위를 최소화했는데, 국회의장이 이렇게 비교섭단체 의원을 상임위로 배정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

2016년 6월 15일에는 국회에서 그간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청소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한나라당 출신 박희태 국회의장이 처음 공론화한 문제였지만 정작 한나라당 - 새누리당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더불어민주당 쪽에서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44] 그간 새누리당이 국회 주도권을 장악해 왔기에 이 문제가 지지부진했지만 20대 총선을 거치면서 더불어민주당도 상당한 주도권을 잡게 되자 이 문제가 크게 탄력을 받아 마침내 성사된 것이라고 한다. 12월 5일 약속을 지켜 2017년 국회 예산안에 청소용역을 위한 예산을 배정하고 청소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직접 고용했다.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탄핵 소추안에 국회의장으로서 그 존재감을 발휘하였다.

3.6.1. 새누리당과의 반목(反目)

2016년 9월 1일, 제20대 국회 본의회 개회사에서 우병우 민정수석의 사퇴와 THAAD 국내 도입 논란 등을 언급해 새누리당 의원들의 심한 반발을 사 해당 의원들이 국회의장 사퇴를 촉구하며 논란이 됐다. 개회사 전문 이 논란이 더욱 불거져서 현재 새누리당 의원들이 국회의장실 앞에서 정세균 의장직 사퇴와 사과, 사회권을 부의장에게 넘기라 요구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조응천 의원의 증언에 따르면 국회에서 퇴장할 때 친박계 의원들만 퇴장하고 비박계 의원은 남았다고 한다.

결국 9월 2일 박주선 부의장에게 사회권을 넘기는 것으로 한 발 물러나게 되었다. 5일부터 다시 진행할 예정.

2016년 9월 23일에는 야당이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해임 건의안'을 단독으로라도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시키기로 하자, 새누리당박근혜 정부는 의원 총회로 고의성 지각을 하고, 국무위원들은 대정부 질의를 할 때 일부러 답변을 길게 하고, 새누리당 의원들은 그것도 모자라 국무위원들에게 식사할 시간을 주자고 강하게 요구하는 등의 시간을 최대한 질질 끌어 본회의를 못 열게 하려는 꼼수를 부렸다. 그러자 정세균 의장은 밤 11시 50분경 국회법 제77조[45][46]에 따라 국회 일정 차수를 변경해 대정부 질의를 중단시키고 바로 본회의를 개의해 김재수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해임 건의안을 본회의에 상정시켰다. 물론 새누리당격렬하게 반발했다. 결국 새누리당 의원들이 집단 퇴장한 가운데, 야당 의원들과 무소속 의원들 170명이 해임 건의안 찬반 투표를 실시했다. 투표 결과, 찬성 160표가 나와 김재수 장관 해임 건의안은 가결되었다.

새누리당은 모든 국회 일정을 보이콧하겠다고 선언했고 9월 25일, 김재수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해임 건과 관련해 정세균 국회의장을 직권 남용으로 형사 고소하기로 했다. 이에 정 의장 측은 모든 절차가 합법적이었다고 반박했다.

훗날 우상호 의원은 김재수 해임건의안으로 인해 국회 주도권이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으로 넘어왔고 탄핵정국을 이끌게 되었다고 회고했다.[47]

그리고 이 일로 인해 이정현 새누리당 당대표는 정세균 의원이 국회의장에서 물러날 때까지 무기한 단식 투쟁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 공개 단식이 아니라 비공개 단식을 하겠다고 해서 비웃음을 샀다. 당대표실 문을 걸어 잠그고 새누리당 의원들이나 기자들만 잠깐 들여보내 주는 식이라 솔직히 단식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부자가 아닌 이상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정세균탕수육짜장면을 먹는 사진을 올리면서 이정현에게 약을 올렸다.

이에 대한 분노가 쉽게 사라지지 않았는지 새누리당은 2016년 9월 28일에 같은 당 소속 국회의원을 비롯한 3000여명 가량의 당원들이 국회로 모여 정세균 규탄결의대회까지 했다.#

결과적으로 야당 단독으로 최순실 관련 의혹에 대한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는 덕에, 야당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상임위의 감시를 받는 국가 기관들은 쉴드를 쳐 줄 여당 없이 야당 의원들만 상대하려니 당연히 죽을 맛이다.[48][49][50]

종편을 비롯한 언론에서는 국정감사 때 떡밥을 던져주는 게 야당뿐이니 야당이 제시한 의혹만 꾸준히 방송을 태우고 있다.

한편 새누리당정세균 의장의 사과와 사퇴를 요구하는 건 그렇다 쳐도 국정감사에는 복귀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쪽과 절대로 가면 안 된다는 쪽끼리의 내부 분열이 일어났다.

국감 복귀를 주장하던 대표적인 새누리당 인사인 김영우 국방위원장을 같은 당의 몇몇 의원들이 의원실에 3시간 20분 동안 감금하는 초유의 사건도 있었고, 이정현 대표가 국감에 복귀하라는 요청을 의원 총회에서 거부하고, 이 문제로 새누리당 의원 총회에서 국감 복귀 반대를 외치는 친박계와 국감 복귀 찬성을 주장하는 비박계가 서로 고성과 욕설을 주고 받는 등 새누리당도 상처가 많이 나는 듯하다. 가뜩이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박근혜 퇴진 운동으로 골치가 아픈데 내우외환이 따로 없다.

파일:external/image.newsis.com/NISI20161209_0012480348_web.jpg

의사봉을 두드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를 발동[51]하는 모습

3.6.2. 특검법 직권상정

황교안특검 연장을 안 해주자 야권에선 특검법을 직권상정해서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범야권이 직권상정을 요구했음에도 끝끝내 거절했다. 특검의 연장을 바라는 여론에서는 정세균이 쫄보 아니냐는 비아냥을 듣기는 했으나, 사실 원론적으로 살펴보면 정세균 의장이 맞는 말이다. 직권상정의 요건이 맞지 않기 때문. 자유한국당의 비토로 인해 원내교섭단체간의 합의가 되지 않았고, 국가비상사태라는 말은 자의적인 해석의 소지가 다분한 말이다. 테러방지법 당시 정의화 의장의 직권상정으로 인해 논란이 커졌는데 이의 재발을 막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동안 이 직권상정 때문에 국회가 얼마나 소란스러웠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결과론적이지만 황교안이 특검의 연장 요청을 거부했는데 연장법을 시행해줄 리가 없다는 점도 있었다. (박근혜정부의 일원으로서 자기도 수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만큼)

3.6.3. 문재인 대통령 당선 이후

정세균 의장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 선서를 위해 국회에 온 미래의 상관 문재인 대통령을 맞이해 의장실에서 비공개 환담을 나눴다. 그러고는 선물로 웬 책을 줬다고.

노무현 前 대통령 서거 8주기 때 초청 받은 후, 추모하러 봉하마을에 가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떠나가셨을 땐 한없이 원망스러웠으나 이제서야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점차 노무현 대통령님이 원하시던 사람 사는 세상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남은 저희들이 대통령님의 뜻을 잘 받들어 노무현의 꿈을 반드시 이루겠습니다."라고 연설하였다. 이를 봤을 때 정세균이 노무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정세균은 확실한 친노계임을 알 수 있다.

2017년 9월 4일, JTBC 비정상회담에 한국대표로 출연했다.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에서 2017년 한국시리즈 2차전 시구자로서 시구를 했다. 하지만 시구를 한 뒤 비난의 말들도 많다. 대통령에 이어 국회의장이 시구했으니 KBO 한국시리즈 시구는 의전서열 순서로 7차전까지 시구하냐며 야빠들에게 시구를 주관한 한국야구위원회와 함께 까임을 받았다. 다만 정세균 의장은 과거 해태 타이거즈 시절부터의 올드팬으로 특히 수석코치 조계현의 광팬으로 알려졌으며, 이 날 시구에서 입은 KIA 유니폼에도 조계현의 선수 시절 넘버인 17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어느 정도 납득이 간다는 말도 나왔다.[52]

자유한국당 의총(제354회)에 11시간이나 늦고 적반하장으로 나서자, 화를 냈다. 정세균은 부드러운 성품으로 유명한 사람이지만, 이것만큼은 참지 못했는지 결국 터지고 말았다.

2017년 12월 22일, 매니 파퀴아오 필리핀 상원의원과 국회의사당에서 만남을 가졌다.

2018년 5월 29일, 국회의장 임기를 마무리 했다. 여권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정 의장은 ‘의장직이 끝나도 정치은퇴는 하지 않는다. 다만 자리를 탐하지도 않을 것’이란 말을 자주했다고 한다. 아무래도 의장 임기를 마무리 하고 정계 은퇴 수순을 밟은 전직 의장들과는 다른 길을 걸을 것으로 예상된다.[53]

3.7. 국회의장 퇴임 이후

국회의장 임기 만료 3일 후인 2018년 6월 1일, 민주당 복당 절차가 마무리 되어 민주당에 복당하였다. 후임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은 문희상이 역임하게 됐다.
2019년 6월, 전라북도교육청상산고등학교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재지정 탈락 결정에 대해 페이스북을 통해 비판하였다. 정 전 의장은 "개인적으로는 고교 평준화 정책 찬성론자"라면서도 "전북지역의 학생들에게 상산고는 수십 년간 미래인재의 산실로 자리매김해왔고 무엇보다 4차 산업혁명을 주도할 인재육성의 길이 막힌다는 것에 우려가 크다"고 하였다. 정세균 의원의 지역구는 종로구이나, 고향은 전북이며 과거에 전북에서 4선 의원을 한 바 있다. 정 의원 뿐만 아니라 민주평화당 박주현[54] 수석대변인과 바른미래당 정운천 의원[55] 등 전북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들이 상산고 탈락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

국회의장 퇴임 후 외부 정치활동을 줄여나가던 이전 의장들과 달리 외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는데, 2019년 8월 일본의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와 함께 시작된 한일 무역 분쟁이 날이 갈수록 격화되자, 더불어민주당 소재부품장비인력발전특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주요 소재 및 부품 자립 등 추진을 위해 힘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회의장을 하고 나면 다음 총선은 불출마를 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정세균의 경우는 재출마 의지가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지역구 크고 작은 행사에 계속 참가하는중. 한편 정세균이 정계 은퇴를 선택할 경우 후임자로 종로 출마가 점쳐졌던 임종석은 이런 문제로 출마를 포기하고 아예 정계 은퇴를 선택했다.

이러던 와중에 청와대에서 정세균을 차기 총리로 검증에 돌입했다고 한다. 김진표 의원이 청와대에 총리 후보자 고사 뜻을 전했다고 한다.[56] 또, 이낙연 총리의 향후 행보도 같아 나왔는데, 정세균이 총리로 지명될 경우 정 의원의 지역구인 종로구에 총선 출마할 가능성이 높다고도 한다. 그러나 국회 내년도 예산안 처리 이후 조만간 총리 후보자가 발표될 것이라는 기존 예상과는 달리 문재인 대통령의 막판 숙고가 길어질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

12월 16일, 유력 언론들을 통해 당일이나 다음 날 중으로 정세균 전 의장이 이낙연 총리의 후임으로 지명될 것이라는 속보가 전해졌다.# 민주당 내 경제통이면서 6선 국회의원이자 전직 입법부 수장으로 국회와 협치를 부각할 수 있는 정 전 의장을 임명하는 것으로 집권 3년차 국정동력을 확보하려하는 문 대통령의 포석이 깔려있다는 평.## 다만 자유한국당 등 야당 측에서는 전직 국회의장의 국무총리 임명이 3권 분립 파괴 소지가 있다며 일부 반발 의견이 있는 것이 임명 과정에서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

3.8. 제46대 국무총리 시절

3.8.1. 지명 및 인준 과정

결국 12월 17일부로 문재인 대통령이 이낙연 총리 때와 마찬가지로 직접 춘추관에서 정세균 전 의장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정식 지명하였다.# 국가의전서열 2위인 국회의장 출신이 의전서열 5위[57]인 총리로 가는 것은 해석에 따라 한직으로 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데다가, '입법부 수장을 역임한 인물이 어떻게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의 밑으로 들어가냐'며 삼권분립의 정신에 위배되는 인사지명으로 보일 수 있다라든가 하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58][59][60] 2006년 참여정부에서 정 의장(산자부장관)[61]과 같이 장관(법무장관)을 지낸 대안신당 천정배 의원[62]의 경우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공언한 상태. 후보자 시절 야당에 크게 미움을 안 샀던 이낙연 현 총리 인준투표[63]에서 나온 찬성표는 164표[64]인데, 여소야대 상황에서 선거법 문제로 인해 4+1 협의체에서도 내부 파열음이 커지는 상황에서 이탈표가 발생하면 사실상 인준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도래할 수도 있다.

현재 국회의 재적 과반은 148석[65]이며, 민주당 의석은 129석이다.[66] 민주당 출신 손혜원, 문희상 의원 표에 정의당 6석, 민주평화당 4석, 민중당 1석, 그밖에 광주광역시 지역구의 무소속 김경진, 민주평화당과 함께하는 박주현 비례대표 의원, 민주당계 정당에서 커리어를 쌓아온[67] 박선숙 비례대표 의원[68] 표를 합쳐도 145석에 불과해 9석짜리 대안신당[69]에서 이탈표를 최소화하거나, 김관영 의원을 위시한 바른미래당 호남계[70]손학규계 당권파[71]에서 표를 어떻게든 끌어와야 한다.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서두에 언급하였듯 정세균 의장은 국민의당으로 갈라져 나간 호남계 (중진) 의원들[72]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이들의 표를 어렵지 않게 확보하는 것도 충분히 현실성이 있다. 당장 저 사람들 다수가 정 의장과 10년 넘게 같은 정당 국회의원으로 활동한 사이다. 위에서 언급한 정파 의원들의 의석수[73]를 모두 합하면 163석으로, 이낙연 총리 인준당시 범여권의 이탈표 최대값인 8표를 제하면 155표로서 인준 통과가 가능하다.

의전서열 문제 또한 당장 제1야당 자유한국당의 원내대표를 맡고 있는 심재철 원내대표 역시 국가의전서열 순위 8위이자 부총리급 대우를 받는 국회부의장에서 16위인 교섭단체 야당 원내대표로 8순위나 자청에서 내려간 마당에 보수 야당 중심으로 터져나온 의전서열 논란도 의미가 커보이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 단, 입법부 수장을 했던 사람이 행정부의 2인자로 들어가는 것과 국회부의장 했던 사람이 정당의 원내대표를 지낸다는 것은 차이가 있다는 반론도 있다.

국회 인준을 받는다면 헌정사상 최초의 의장 출신 국무총리이자 의장과 총리를 모두 역임한 3번째 정치인이 된다. 이전의 선례는 백두진정일권인데, 두 사람 모두 먼저 국무총리를 역임한 뒤에 국회의장을 지냈다. 반면 정세균은 먼저 국회의장을 역임한 뒤에 국무총리에 지명되었다.

23일 YTN 의뢰로 리얼미터를 통해 발표된 정세균 국무총리 임명에 대한 국민 여론 조사에서 찬성이 50.4%, 반대가 36.6%로 나와 일주일만에 찬성 여론이 과반을 넘어선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 결과에서는 최근 들어 문재인 정부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커진 PK와 중도층에서도 찬성 여론이 우세한 상황.

1월 5일, 증인 및 참고인 소환에 대한 합의가 완료되면서 여야는 7일부터 이틀간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인사청문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청문회에서는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삼권 분립 위배, 동탄 개발과정에서의 개입의혹 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지만 전반적으로 큰 한 방이 없이 끝났다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이 끝내 청문보고서 채택을 거부하면서 결국 임명 동의안이 본회의로 직권 상정됐다.

1월 13일 열린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찬성 164, 반대 109, 기권 1, 무효 4로 지명 29일만에 국무총리 임명 동의안이 가결되었다.# 표결에 앞서 가결의 키를 쥐고 있던 대안신당찬성 당론을 결정하면서[74] 임명 동의에 파란불이 켜졌고, 실제 표결 결과에선 임명에 반대하던 자유한국당 내지 새로운보수당 내에서도 반란표가 나온듯 164표라는 넉넉한 수치가 나왔다. 실제로 우리공화당(!!) 홍문종 의원은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파악[75]된다.

3.8.2. 2020년 1월 14일 총리 취임

▲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수여받는 정세균 총리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을 마친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안을 재가하면서 공식적으로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은 임명장 수여식에서 국회의 극한 갈등을 비판하면서 정세균 총리에게 통합의 정치와 협치를 이끌어달라며 당부했다.

3.8.3. 총리 취임 이후

▲ 정세균 총리 현충원 방문 방명록 적는 모습
1월 15일, 취임 직후 다음 날 현충원에 방문하였다. 현충원 방명록에는 "국민에게 힘이되는 정부"라고 기록하였다. 이어서 바른미래당 손학규, 정의당 심상정 등 국회 원내 정당 대표들을 예방하였지만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는 만나지 못했다. 황 대표 측에서 지방 일정 때문에 만날 수 없다고 거부하였기 때문. 결국 17일 따로 자유한국당을 방문해 황 대표와 자리를 가졌다.
▲ 취임 후 첫 국무회의 주재하는 모습
예방 일정이 마무리된 후에는 취임 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였다. 이 날 정세균 총리는 장관들에게 "일하는 방식을 과감히 바꿔달라" 라고 조언을 하였고 정부에 "실질적 변화" 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경제에 대해서도 강조를 하였다. "경제활성화와 민생 안정에 매진해달라" 라고 장관들에게 지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부가 대화와 소통의 행정을 펼쳐야 된다" 라는 말을 하였다.

7월 19일, 코로나19 대책 회의에서 의료진에게 휴식을 부여하고 내수 회복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8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제안을 했고#, 21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되었다.## 이로서 토요일 광복절부터 월요일 임시공휴일까지 사흘 연휴가 됐는데, 언론사에서 주로 사용한 '사흘'이라는 표현을 두고 때아닌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11월을 즈음하여서는 추미애 법무부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이 극한 대립하는 과정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동반 퇴진론을 건의하고#, 영남권을 두루 방문해 지역 현안을 챙기는 등 본격적으로 대권 행보를 보이고 있는게 아니냐는 보도가 나왔다.# 총리실에서는 방역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라 선을 그었다.

2021년 1월 20일, 범여권 대선주자 중 지지율 3위에 오르자[76] 기자가 직업정치인 복귀에 대해 질문했는데 나는 총리직을 그만두면 정치인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여의도로는 가지 않겠다. 라고 말해서 4월 재보선 이후 대권행보를 본격화 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정세균과 이미지가 겹치는 유력 대선주자였던 이낙연의 지지율 침체로 현재 정세균이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민주당에서 거론되고 있는 제3후보론의 주인공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로서 거론되고 있다. 정세균 본인의 대선 행보도 점점 노골적이게 변하고 있는데 지하철 안내방송에 본인의 음성 메세지를 박아놓고 사상 최초로 총리브리핑이라는 이름의 총리 기자회견을 수어번 여는 등 본인을 알리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2021년 3월 들어 정세균의 대선 출마가 기정사실화되면서, 후임 총리로 김부겸 , 유은혜 등이 거론되고 있다. #

4월 15일, 이란 방문을 마친 후 문재인 대통령에게 총리직 사의 의사를 밝혔다. 후임 총리 인준 시까지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업무를 대행한다.#
3.8.3.1.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관련

3.9. 국무총리 퇴임 이후

2021년 4월 16일, 후임 국무총리에 김부겸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 내정되면서 1년 3개월간의 임기를 마쳤다. # 정 총리는 이임사에서 "문재인 정부의 국무총리로서 매 순간 최선을 다했지만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다"며 "앞으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정의롭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완성을 위해 소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실제 상영은 퇴임 이후긴 했지만 세월호 참사 7주기 기억식 행사에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해 국무총리 명의로 추도 영상을 보냈다.

앞으로 행보로는 제20대 대통령 선거 출마를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여의도(국회)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만큼 정치인으로서 마지막으로 도전할만한 자리가 대통령밖에 없기 때문.#

4월 20일, 「수상록」이라는 이름의 에세이를 발간하는데 지난 30년간의 본인의 정치 행보를 돌아보면서 향후 국정 운영 목표 및 포부를 밝히는 내용을 담아 사실상 대권 경쟁에 뛰어들겠다는 신호탄으로 평가받는다.#

4월 23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 출연해 대선후보 선호도 1, 2위를 달리고 있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과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 모두 쓴소리를 내놨는데 평소 스마일맨으로 유명한 정 전 총리답지 않은 강한 발언으로 평가받았다. 유력 후보군에 견제구를 날리며 존재감 강화를 시도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4월 30일, YTN '황보선의 출발 새아침' 인터뷰에서 "합리적인 논쟁은 언제든 환영하지만, 사회 혼란을 부추기는 과도한 방역의 정치화는 지양해야 한다"고 밝혔는데 이번에도 이재명에게 견제구를 날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동시에 그 전날에는 광주대 강연에서 사회 초년생에게 20년 적립형으로 1억씩 지원하는 방안에 대하여 공약을 설계중이라고 밝혔다.#

5월 11일, 여의도 한 호텔에서 열린 광화문포럼 공개행사에 참석해 기조연설을 하면서 ‘담대한 회복, 더 평등한 대한민국’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대권 행보에 시동을 걸었다.#

5월 29일, 일본의 2020 도쿄 올림픽 조직위원회 사이트 독도 및 쿠릴열도 표기 논란에 대해 고약하고 치사하다고 평가하며 개정이 안 되면 국민 동의를 받아서 올림픽을 보이콧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3.10. 제20대 대통령 선거

3.10.1. 후보 경선

파일:PYH2021061717160001300_P4.jpg
강한 대한민국, 경제 대통령
6월 17일, "강한 한국의 경제대통령이 되겠다"라며 20대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다.# 출마 선언이 기존 출마 방식들과는 많이 달랐는데, 대체로 국회의장, 국무총리를 지낸 경륜에 청년들의 젊음까지 더한 출마선언이었다고 평가받는다.##

후원회장으로 배우 김수미를 위촉했다. 두 사람은 같은 전북 출신으로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도우며 30년 넘게 친분을 쌓아 왔다고 한다. #

6월 16일, 김민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정세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고# 7월 1일, 전국 113개 대학의 전·현직 교수 1260명으로 이루어진 바른 대통령 찾기 전국교수 1260인 모임이 정세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 이들은 "국민이 냉철하게 검증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우리 지식인의 역할"이라며 "바른 대통령은 정세균 후보뿐"이라고 강조했다. 7월 8일, 전북 전현직 도의원 82명이 정세균 후보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6월 28일, 친노 정신을 앞세워 이광재 전 강원지사와의 단일화를 약속했고 함께 김대중 대통령 묘소를 방문하며 공동 행보를 이어오다 7월 5일, 이광재와의 단일화 논의 끝에 정세균으로 단일화가 결정됐다.# 이광재는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의 허락 없이 단일화를 결정했다며 미안하다고 입장을 밝힘과 동시에 정세균 후보에게 힘을 실어달라고 부탁했다. 정세균은 "우리 두 사람은 미래를 향한 경제 정책 공조, 혁신과 통합의 정치 창출을 위해 하나가 될 것"라고 밝혔다.

7월 1일, 이재명 경기 지사가 대선 출마를 선언하자 "제가 한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 같다"라며 비판했다.# 7월 6일, 이번 대선에서는 대통령의 도덕성 검증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

7월 8일, 이재용 부회장 사면에 대해 "국민적인 공감대가 만들어질 경우 경제 일선에 복귀할 수 있다고 본다"라며 긍정적으로 답변했다.# 7월 10일, 내년 대선에서 대통령 4년 중임제 등의 내용을 담은 헌법 개정 국민투표도 동시에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11일, 민주당 대선 예비 경선에서 본경선에 진출했다. #

그러나 대구·경북 경선에서부터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에게 3위 자리를 뺏기고 강원 경선과 1차 슈퍼위크에서도 추 전 장관에게 밀리는 등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결과[79]가 나오자 모든 일정을 취소 및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논의에 들어갔다.

결국 2021년 9월 13일 오후 4시에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평당원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히고 민주당 경선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민주당 본경선 후보 중에는 최초인데 사퇴하면서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 의사는 표명하지 않은채 자리를 떴다.#[80]

2021년 10월 10일, 경선 결과 50.29%를 득표한 이재명 후보가 결선투표 없이 민주당의 최종 후보로 선출되면서 이재명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 선임이 유력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하지만 선대위원장으로 선임되지는 않았고, 이후 2022년 2월 8일, 이낙연 전 총리가 그 자리를 수락하게 되었다.

이후 전북 지역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이재명 후보를 위한 유세를 지원하였으나 2022년 3월 9일 개표 결과, 불과 0.7%p 차로 국민의힘 윤석열 당선인에게 패하면서 빛이 바랬다.

3.11.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

2022년 3월 14일, 유시민 전 이사장의 뒤를 이어 노무현재단 제6대 이사장으로 선출됐다. 임기는 2022년 3월 18일부터 2025년 2월 21일까지다.#

3.12. 이후 전망

일단 이사장 임기인 2025년까지는 잠행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나이도 나이고 정치와 별 관련없는 자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을 맡은 것으로 봤을 때,[81] 진짜로 정계 은퇴의 가능성도 매우 높아지고 있다. 본인도 대선 출마 선언을 하면서 여의도(국회)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한만큼 대선 경선 패배 이후 중앙정치에 큰 뜻을 두고 있지 않기도 하다.

2022년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세균 본인의 지역구를 물려받은 자타공인 정세균계 안호영 의원이 전라북도지사 경선에서 옛 김한길계 였던 국민의당 출신 김관영 전 의원에게 패배하며 체면을 구겼다. 수장이 정계를 떠난 상황에서 정세균계 의원들의 행보도 관전포인트 중 하나일 듯.

역사상으로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직은 정계 원로가 은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역임하는 자리 정도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제도적 민주화가 자리잡은 대한민국 제6공화국 이후에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하다. 그 점에서 국회의장 퇴임 이후 국무총리직을 역임하고 대통령 경선까지 나섰던 정 의장의 사례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82]


[1] 한혁기(韓爀基)의 딸이다.[2] 매점에서 빵을 파는 '빵돌이'로 3년 내내 근로장학생으로 전액 장학금을 받았고, 학생회장을 지냈다.[3] 앞에서 서술했다시피, 이런 경험 덕분에 정세균은 이명박, 이상득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커리어 유형이 일정부분 이상득 및 이명박과 겹치는 점을 생각하면 영남이 고향인 이들과 달리 호남이 고향이라는 것을 감안해도 성격상 이들과 통하는 부분이 꽤 있었을 것이다.[4] 이명박과 이상득은 형제임에도 정치 입문 과정이 다르다. 이상득은 본래 육사 14기로 입학했으나 건강 문제 때문에 1년만에 자퇴를 한 이력이 있다. 그래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었던 시절에 이미 민정당 정치인들과 가깝게 친분이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이춘구와 친구였던 덕분에 그 추천으로 민정당에 입당했는데, 1988년에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13대 총선에서 민주정의당 후보로 고향 포항시에 출마하여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하였다. 이명박은 1992년 14대 대선을 앞두고 전설의 재벌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통령을 노리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정주영이 영입한 정치인들이 14대 총선에서 선전한 것 때문에 위기 의식을 느낀 김영삼이 정주영에 맞서기 위한 현대 고위직 출신 인사로 민주자유당에 영입한 것이므로 두 형제가 이후에 소속한 당 자체가 같았어도 이상득은 군부 인맥으로 시작된 정치로 3당 합당 이전 전두환 - 노태우 시절의 정통 군부 민정당 라인, 이명박은 3당 합당 이후 경제 인맥으로 들어온 김영삼 영입 라인이라는 큰 차이가 있다.[5] 정작 이 말을 했던 김석원 본인도 95년에 회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주고 15대 총선에 출마해서 같은 시기에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그리고 오너의 정치 외도와 무리한 사업 확장이 원인이 되어 쌍용그룹은 해체되고 말았는데 결과적으로 정세균이 김석원의 말을 듣고 쌍용에 남았다면 IMF의 파고에 휩쓸려 커리어를 망쳤을 것이니 정계 진출은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되었던 셈이다.[6] 이 당시 경합했던 사람이 정동영계였던 김한길인데 정세균이 예결위원장, 김한길이 건설교통위원장직을 맡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7] 당시 새누리당 현직 의원은 박진(3선)이었는데 박연차 게이트에 연관된 인물이어서 스스로 지역구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래서 이동관 전 홍보수석과 조윤선 비례대표 의원이 종로구 출마를 선언한 상황이었는데, 민주통합당정세균 전 대표를 공천해버리자 새누리당도 맞불 작전으로 당에게 자신의 거취를 위임한 친박계 6선 중진인 홍사덕 전 원내대표를 데려와서 공천을 준 것이다.[8] 이 선거에서의 당선까지 모두 합치면 총 6선이다.[9] 당시 문희상은 당내 공천위원회 기준 의정 활동 점수 미달로 공천 컷오프를 당했다가, 후보최종결정 직전에 전략공천으로 들어간 것이라서 제대로 면이 서지 않아 불리했던 부분도 있다. 물론 이후로는 정세균의 후임으로 20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역임했다.[10] 본인의 이름인 '세균'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한다. 여담 항목 참조.[11] 언젠가부터 뽀로로의 루피 인형도 나란히 놓여 있다. 자세한 건 하단 여담 참조.[12] 심지어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전날 3당 원내대표들이 모여 의장실에서 발표를 할 때에도 그대로 있었다. 의장직 초기에 새누리당 의원 수십 명이 의장실에 쳐들어와 겁박할 때도 있었고, 썰전 200회 축하 인사 때도 같이 있었으며, 문재인 정부 이후 임종석 비서실장이 예방할 때도 여전히 있었다.[13] 2003년에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지낸 이력이 있었다. 다만 열린우리당 창당에 동참했으나 이후 정치자금법 위반이 때문에 정치 일선에는 나서지 못 하고 참여정부 말기에 사면을 받아서 간신히 복귀한 상황이었다.[14] 전주 덕진구에는 직전 대선 후보였던 정동영이 탈당하여 무소속 출마했으며, 완산구 갑에는 전 국정원장 신건이 무소속 출마해 정동영의 지원을 받았다.[15] 홍영표가 이 때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6] 손학규 前 대표의 참모였던 이찬열이 사실상 손학규를 대신해 출마하여(...) 원내에 입성했으며,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을 맡아 탄핵을 주도했던 김영환과 정계를 떠나있던 정범구가 다시 5년 만에 국회로 돌아갔다.[17] 이를 계기로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가 사퇴하고, 원내대표였던 김무성 의원이 비상대책위원장이 되어 안상수 대표 취임까지 당을 이끌었다.[18] 또한 경남에서는 민주당 소속은 아니지만 친노 성향 무소속 후보였던 김두관 후보가 승리하며 한나라당의 텃밭을 점령하기도 했다. 이후 김두관 지사는 민주통합당에 입당, 경남지사를 사퇴하면서 대선 예비 후보로 경선에 출마하나 문재인 후보에게 패배한다.[19] 김대중 대통령 말기에 국무총리 후보자에 올랐던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을 올렸으나, 지역 정치인인 이재오에게 크게 졌다. 문국현 지역구를 제대로 털린 창조한국당은 독자행보를 펼치는 비례대표 의원 2명만 남아서 식물정당이 되었다가 결국 19대 총선에서 해산되었다.[20] 특히 충주시는 아예 보수진영에 표를 주는 지역으로 변신했다. 윤진식 의원이 내리 재선을 하다가 충북지사 출마를 이유로 중도에 사퇴했는데, 이후 이종배 전 시장이 국회의원 자리에 올라 내리 3선을 지냈다.[21] 인천 계양구 을이야 원래부터 송영길 VS 이상권 대결에서 송영길이 2번의 승리를 거둘 정도로 민주당 강세였던 동네인 만큼 이 때 당선된 이상권 의원은 이후 19대 총선에서 최원식에게 밀려 재선에 실패하고 공기업 사장을 맡은 후 정계를 떠났다.[22] 정세균 의원과 측근들은 정동영에게도 밀린 3위라는 결과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 특히 정세균 체제에서 민주당은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의 지역구를 조금씩 가져오고 있었고 지방선거 역시 4년 전 정동영이 이끌었던 역대급 참패와 달리 한나라당과 겨룰 수 있는 수준까지 좋은 결과를 거뒀었다. 그런데 18대 총선에서 패하고 칩거하던 손학규가 대표가 되고, 당 대표 시절에 지방선거를 시원하게 말아먹은 정동영에게도 밀렸으니 충격이 클 터.[23] 윤보선 전 대통령은 종로에서 3선을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도 여기서 지역구 의원을 지냈다.[24] 실제로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 및 이명박의 최측근들이 이동관을 종로구에 공천시키기 위해 노력했고(이 당시 친이계가 이동관을 얼마나 밀어줬냐면, 이동관이 종로구에 예비후보 사무실을 차렸을 때도 친이계의 수뇌부로써 최상위 서열에 위치한 이재오와 최시중이 직접 이동관을 방문해서 격려하기까지 했다.), 이동관은 이 때 각종 종로구 행사에 정세균과 같이 참여해서 나름 각을 세우면서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25] 19대 국회 때 친이계가 친박의 세에 눌려 다소 공천을 받은 인물이 적어졌지만 당시에는 이명박이 대통령이었던지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이계의 최측근급 인물들은 거의 다 공천을 받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MB키즈로 불리는 정계 입문 희망자가 친박의 좌장으로 불리는 인물을 경선에서 이기고 공천받을 확률은 낮았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낮아진 상황에 이명박의 최측인 이동관을 공천했다면 오히려 정세균에게 대패하고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까지 타격을 입는 굴욕을 당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26] 이 당시 새누리당의 종로구 국회의원 후보 공천은, 그 당시 지역구를 담당했고 현역 국회의원이었던 비박계의 박진, 친이계가 강력 지지한 이동관, 친박 중진에 속했던 홍사덕의 3파전이었다.[27] 다만 홍사덕은 지역구를 자주 옮긴데다가(11~12대 영주-영양-봉화, 13~15대 강남구 을, 16대 전국구, 17대 일산동구/광주시, 18대 대구 서구, 19대 종로 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의 주역이라는 점이 페널티였다.[28] 거기다가 친박의 홍사덕은 차라리 유명한 정계 중진이기라도 했지, 친이계의 이동관은 새누리당에서 확정해서 출마를 시켰다고 해도 초선도 아닌 정치 경력이 전무한 인물이었다.(설사 당선되었다 쳐도 초선 의원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다.) 또한 그 시기는 이명박 정부 말기인지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상당한 시기였던만큼 이명박의 최측근인 이동관과 붙었다면 오히려 정세균이 홍사덕과 붙은 것 이상으로 이동관을 득표율에서 찍어 누르고 당선됐을 것으로 보이며 이명박 대통령 후반기 임기 당시의 지지율에도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이러나 저러나 이 제19대 국회의원 총선은 정세균이 정계의 중진으로 입지를 크게 넓히는 데 발판이 된 선거였다.[29] 이 때문에 정세균과 정세균을 따르는 국회의원들을 일컬어 무조건 친노라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하자면 정세균은 친노가 아니다. 정세균은 김대중의 권유로 정치를 시작한 사람이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 재임 시절 노 대통령을 도와 산업자원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만 그를 들어 범친노계로 분류하는 경우는 매우 많다. 대체로 친노에 대한 우호 세력으로 보는 편. 뭐 사실 친노라는 범위 자체가 워낙 들쭉날쭉해서...[30] 강기정은 정세균이 당 대표이던 시절 비서실장을 맡은 바 있다. 대표적인 정세균계 의원.[31] 또한 과거 이야기가 되어 버린 이것에 대해 오세훈이 해명이나 반박을 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뜨렸다는 면에서도 고평가를 받았다.[32] 오세훈의 16대 국회의원 시절의 지역구가 강남 을이었다.[33] 이 건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임기 2기 무렵 야당소속이 상당수 점유했던 서울시의회와 구청장 간의 마찰과 갈등과 큰 연관이 있었다. 당시 특히 서울시의회 시의원으로부터 여러 번 청문회 및 질의에 소환되면서 그야말로 탈탈 털렸던 적이 많았는데, 오세훈 자신은 이러한 처신에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34] 한국의 유권자들은 투표로 선출된 자리를 중간에 박차고 나가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일례로 김두관 전 경남도지사도 대선 경선에 나서기 위해서 도지사 직을 그만두고 나갔다가 아예 대선 후보군에서 날아가 버린 전례가 있다. 오세훈 전 시장은 시장직을 중간에 그만둬버린 데다가 자신의 지역구인 종로에 집중하지 않고 마치 대선후보라도 된 것 마냥 거만하게 다른 지역 후보들 지원유세를 다니는 행태가 종로 유권자들의 시선이 고깝게 보여서 도저히 좋을 수가 없었다.[35] 창신동과 숭인동 지역의 경우는 특히 오세훈 전 서울시장에 대한 반감이 굉장히 강하다. 과거 종로구 숭인동과 창신동에 뉴타운 관련건에 주민들 상대로 사기를 치고 제대로 빅엿을 먹인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세균은 19대 의정활동을 하는 동안 비교적 지역구 관리를 잘 해왔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아왔다.[36] 혜화동을 비롯해 명륜동, 연건동 등 대학로 지역은 성균관대학교, 서울대학교 의대/치대/간호대 등 대학생들이 많이 거주해서 대체로 야권성향이 더 강하다.[37] 서청원 의원이 20대 국회 최다선 의원(8선)이었기 때문에 임시 국회의장직을 맡았었다. 실제로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승리했다면 가장 유력한 후보이기도 했지만 새누리당이 폭망하면서 그 꿈은 사라져버렸고, 설상가상으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까지 터져버리면서 친박계의 수장이었던 서청원은 박근혜 탄핵선고와 홍준표와의 반목 등을 통해서 20대 하반기 의장으로서의 가능성과 차기 21대 총선에서의 공천가능성마저 잃고 말았다.[38] 2000년 16대 국회 개원 당시에는 5선 의원으로서 국회의장 선거에 도전했으나 8선의 이만섭(새천년민주당)에게 밀려서 당선에 실패한다. 16년 만의 도전이었음에도 또 떨어진 것.[39] 2016.06.10. 언니가 보고 있다 22회 새누리의 파안대소, 더민주의 쓴웃음 00:37:15쯤에 나온다. 관련 팟캐스트[40] 호남계가 잔존했던 민주당 경선에서도 패배했는데, 이제 그것도 국민의당으로 쪼개진 상황에서 상당히 적절한 판단이라고 볼 수가 있다.[41] 한편, 직전 의장인 정의화가 다선의원의 점유율을 강조하는 항아리론을 내세우며 관례를 깨고 차기 총선 출마를 피력했으나, 무위에 그치고 자신의 지역구(부산 중-동)가 분할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42]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상시청문회법도 바로 본회의에 상정할 수가 있음.[43] 이후 2017년 5월 더불어민주당에 복귀했다.[44]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한 의원은 차후 국회의장이 되는 우원식 을지로위원회 위원장이다.[45] 국회의장이 각 교섭단체 대표 의원과 협의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의장은 회기 의사 일정의 일부를 변경·안건 추가·순서변경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46] 말장난 같겠지만, '합의하여'가 아니라 '협의하여'이기 때문에 국회의장이 통보식으로 의사 전달을 해도 국회법 77조에서 말하는 '협의'에 해당이 된다고 한다. 헌법재판소가 이 문제를 여러 번 다루었는데, 그때마다 헌법재판소는 정세균 의장과 비슷한 결정을 내렸던 과거 국회의장들의 손을 들어줬다. JTBC 뉴스룸의 팩트 체크가 이 문제를 다루었다.[47] 당시부터 최순실에 대한 실마리를 잡고 있었다고. 박지원 당시 국민의당 대표가 김재수 해임건의안을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묻자 우상호는 그런게 있다면서 말을 아꼈다고 전해진다.[48] 우리나라 국가 기관들은 국회에 있는 각 상임위원회의 감시를 받는다. 상임위의 위원장 자리는 20석 이상의 의석을 가진 교섭단체끼리 협의하여 나눈다.[49] 그런데 상임위는 사회권을 가진 상임위원장이 없으면 열리지 않는다. 따라서 새누리당 소속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상임위는 국방위원회를 제외하고 열리지 않고 있었다. 반면 야당 소속 의원이 위원장을 맡고 있는 상임위는 열렸기 때문에 야당 의원들만 참석한 상태에서 국정감사가 실시되었던 것이다. 최근에는 여당 상임위원장이 갖고 있는 사회권을 야당 간사들이 넘겨받아 국정감사를 강행하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한다.[50] 사실 야당 단독 상임위 진행의 가능성과 그때 흐를 분위기는 8월 29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이하 교문위) 소속 야권 의원들이 누리과정(3세~5세 유아 무상보육) 예산 등 교문위 소관 추경 예산을 단독 처리와 그 이후의 전개에서 이미 예고되었고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다. 교문위 소속 야권 의원들이 누리과정(3세~5세 유아 무상보육) 예산 등 교문위 소관 추경 예산을 단독 처리했는데 위원장이 유성엽 국민의당 의원이라서 가능했다. 이에 반발한 새누리당 의원들이 조윤선 당시 문화체육관광부장관 내정자의 청문회 참여를 거부했고 결국 야3당 의원들만 참여했는데 이 때 조윤선 내정자는 청문회 내내 멘탈 붕괴에 이를 수도 있는 야권의 대대적인 공세에 시달려야 했고 그걸 혼자서 억지로 버텼다. 이는 여당의 보이콧과 야당 소속 상임위원장의 상임위에서 야권의 수적 우위를 이용한 대정부 및 대여공세가 맞물렸을 때 생기는 결과가 어떤 것이며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려준다고 할 수 있다.[51] 다만 박근혜의 대통령 권한은 이 순간이 아닌, 정세균 의장이 서명한 탄핵소추의결서가 청와대에 송달된 순간에 정지되었다.[52] 다만 문재인경상남도 거제시 출신에 롯데 자이언츠 팬. 사실은 어떤 팀들이 한국시리즈를 치르던 간에, "대통령에 당선되면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시구를 하겠다."는 공약 비슷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1차전에 문재인 대통령이 시구를 했다.[53] 다만, 정세균과 타 국회의장을 역임했던 정치인들은 입지가 상당히 다르다. 전직 국회의장과 비교를 하자면, 정세균을 제외하고 그나마 정치인으로서 입지가 강하다고 평가받는 정의화 前 국회의장도 대권주자로서의 임팩트는 약했으며, 김형오는 어째 선수도 5선으로 애매한데다가, 특유의 날치기 국회 탓에,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약했다. 나름 당에서 중진이었던 박관용(舊 상도동계)이나 박희태(舊 민정계)의 경우는 국회의장 퇴임 직후는 사실상 정계에서 자리를 유지하기 힘든, 은퇴할 연령대였다. 그러나 정세균의 경우, 이들보다는 나이가 젊어 아직까지는 충분히 활약할 수 있는 연령대이며, 더불어민주당과 범 친노계의 주요 계파를 이끌고 있는 수장격인데다, 더불어민주당의 차기 대선주자로서도 거론되는 인재이니, 예전에 국회의장을 역임했던 인물들과 상황이 다르니 성격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54] 군산시 출신이다. 바른미래당 소속이지만 민주평화당에서 당직을 맡고 있다.[55] 상산고가 위치한 전주시 을 지역구 국회의원이다.[56] 그 전부터 진보진영과 여당&정부 지지층에서 보수성향이 강한 김진표 의원을 반대하는 성향이 강해, 애초에 어려운 카드였다는 평도 자자하다.[57] 1위 대한민국 대통령, 2위 국회의장, 공동 3위 대법원장 및 헌재소장 다음이다.[58] 이회창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현직 대법관 신분에서 (대통령 산하) 감사원장으로 지명될 당시에도 삼권분립 위반 이야기가 나왔다.[59] 프랑스에서는 프랑수아 드 루지 하원의장이 환경장관로 입각하거나 로랑 파비우스 전 국회의장이 재무장관, 외무장관 등을 맡는 등 국회의장의 입각 사례가 있긴 하다. 프랑스는 제3공화국 초기에 삼권분립을 위해 대통령의 의회 방문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한 바 있다. 미국에서는 과거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 대통령(1909년 ~ 1913년)이 연방 대법원장으로 임명된 사례가 있다. 실제 정세균의 인사청문회 때 민주당 측은 태프트의 사례를 들어 야당의 비판에 대응했다.[60] 다만 문재인 정부는 비교적 친문이 당의 장악력을 보였던 극초반을 제외하면 당을 장악했던 이해찬계나 이재명계가 자신의 사람들을 집어넣으려고 했고, 이들의 주요적인 기반이 NL계나 운동권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됐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당시 국무총리의 경우에도 김진표와 정세균 사이에선 운동권이 '자유한국당과 조중동이 환영하는 총리를 반대한다.'같은 논리를 내세우며 김진표의 임명을 반대했다. 후술하겠지만 정작 정세균도 자유한국당의 표를 받아서 임명됐단 점은 아이러니.[61] 이 당시에도 비대위원장이기는 하지만 원래 부총리급 의전을 받는 여당(열린우리당) 대표를 맡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요청을 받고 장관으로 입각했던 상황. 원래 직책은 여당 원내대표로, 국회운영위원회 위원장을 겸하며 장관급 예우를 받는 자리다. 물론 당연히 여당 원내대표가 장관보다 끗발은 높다. 당장 이완구도 현직 여당 원내대표 신분에서 장관 말고 국무총리로 지명된 전례가 있다.[62] 이 분도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임기를 마친 직후 입각한 케이스.[63] 예상하겠지만, 이 당시 의장 자격으로 표결 결과를 선포한 사람이 정세균 당시 의장이다.[64] 당시 의석수는 민주당 120석, 한국당 107석, 국민의당 40석, 바른정당 20석, 정의당 6석이었다. 민주+정의+국당 거의 전원이 찬성표를 던졌던 셈. 자유한국당 김현아#, 바른정당 하태경 의원은 찬성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민중당을 창당하는 윤종오 김종훈 의원, 민주당을 당시 탈당했었던 서영교 의원과 정세균 의장을 범여권으로 카운트해 준다면 범여권 연합에서 나온 이탈표는 최대 8표다. 참고로 이 때는 이해찬 홍의락 의원이 민주당에 다 복당한 시점이었다.[65] 재적 295석.[66] 현직 국회의장인 문희상 제외.[67]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에서 공직을 지냈다.[68] 지금은 당 활동을 하지 않고 독자행보 중.[69] 호남 지역구 8명 + 장정숙 의원[70] 김관영, 김동철, 박주선, 주승용(국회부의장)[71] 이찬열, 임재훈, 채이배, 김성식, 최도자[72] 지금은 바른미래 호남계 당권파와 민주평화당, 대안신당으로 갈라져 있다.[73] 민주 129 + 정의 6 + 평화 5 + 민중 1 + 바른미래 당권파 9 + 대안신당 9 + 민주당 출신 무소속 2 + 김경진, 박선숙[74] 5당 협의체의 신의 문제도 있고, 국민의당 시절 호남 출신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후보 임명 동의안을 주도적으로 부결시켰다가 크게 데인 적이 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호남 인사인 정 후보 인준을 반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75] 이쪽은 박근혜의 조기 사면 및 석방을 노리고 찬성표를 던진 경우라는 말도 있으나 정세균이 워낙 호감 이미지에다 여야를 막론하고 친분이 있다보니 기존의 인연에 의해 표를 준 것으로 보인다.[76] 1위 이재명 경기도지사, 2위 이낙연 당 대표[77] 신도들이 검사 권고를 거부하고 동선을 밝히지 않는 등 역학조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는데다가 아예 조직적으로 은폐를 시도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78] 아스트라제네카사의 AZD1222 백신을 위탁 생산하고 있다.[79] 추미애 캠프는 현역 국회의원을 비롯해 정치인들의 참여가 거의 없었다. 반면 미래경제캠프엔 정 전 총리와 발을 맞춰왔던 수많은 정치인들이 참여했는데, 놀랍게도 그에 반하는 결과가 이어진 것.[80] 다만, 자신의 캠프에 있던 대부분의 인사가 이재명 캠프에 합류했다.[81] 유승민처럼 지선 경선에 나서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송영길의 빈자리인 계양구 을이나 안철수와 대적할 분당구 갑의 공천을 신청하지도 않았다. 총리나 국회의장보단 급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정치를 이어갈 생각이었으면 전북도지사, 서울특별시장이라도 미련을 보였을 텐데.[82] 박관용 의장 이후 해당 국회의원 임기까지만 마친 후 정계 은퇴를 하는 것이 관례로 자리잡은 바 있다. 실제로 정 의장의 후임으로 국회의장을 맡았던 문희상 의장 역시 제20대 국회의원 임기까지만 마친 후 정계를 은퇴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1030
, 2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1030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

문서의 r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