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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1:34:07

문국현

파일:국회휘장(9대-19대).svg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제15-17대
이재오
제18대
문국현
[1]
제18·19대
이재오
문국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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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문국현
비대위
송영오
2대
공성경
3대
한면희
4대
선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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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8080><colcolor=#fff> 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문국현
文國現 | Moon Kook-hyun
파일:문국현1.jpg
출생 1949년 1월 12일 ([age(1949-01-12)]세)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성북동
(現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본관 남평 문씨
현직 뉴 패러다임 인스티튜트 대표이사
국민통합위원회 고문단
학력 서울돈암국민학교 (졸업)
동성중학교 (졸업)
중동고등학교 (졸업)
한국외국어대학 외국어학부 (영어학 / 학사)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 석사)
혈액형 O형
종교 천주교 (세례명: 그레고리오)[2]
병역 육군 중위 (학군 10기)
배우자 박수애
자녀 장녀 문지영, 차녀 문지원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8[3]
약력 제18대 국회의원 (서울 은평구 을 / 창조한국당)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
KT 사외이사
창조한국당 대표최고위원
창조한국당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선진과 창조의 모임 원내대표
김광수경제연구소 고문
한솔섬유 CEO

1. 소개2. 생애3. 여담4. 소속 정당5. 선거 이력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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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대한민국기업인이자 전 국회의원·정치인이다. 서울특별시 출생이며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2. 생애

1961년, 서울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동성중학교(서울), 1967년 중동고등학교, 1971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를 졸업했다. 1977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95년부터 유한킴벌리 대표이사 사장이자 킴벌리 클라크 동아시아 총괄사장직, 그리고 KT 사외이사직으로 있었으나 모두 사임하고 2007년 8월 23일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선언을 했다. 10월 30일 창조한국당을 창당하고 11월 4일 당내 경선에서 단독 예비후보로 나선 뒤 대선후보로 추대됐고, 유효득표의 5.8%를 득표하여 낙선했다. 하지만 주요 후보들의 소속 정당 및 이름을 가리고 공약으로만 평가하는 Blind Voting에서는 비록 인터넷 이벤트였을지언정 당당하게 1위를 차지, 정책의 경쟁력이 매우 강한 후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존 정치권의 대안으로 젊은층의 지지를 받았던 점에서 훗날의 안철수가 막 정치권에 진입했을 때와 비슷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안철수는 정치 진입 초창기 때 문국현과 비교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참신하고 깨끗한 이미지를 가지고 대선 출마를 선언했으나 이후 서울 강남에서 부동산 거래로 약 20억의 시세차익을 거둔 사실이 드러났고, 또한 2004년에 본인의 전원주택을 신축하면서 농지를 영농 목적으로 구입한 후 불과 한 달 만에 용도변경허가를 신청한 것까지 알려지게 되어 도덕성에 의구심을 지니게 했다.

게다가 두 딸이 모두 비정규직[4]이어서 약자의 아픔을 안다는 등의 발언을 했으나, 막상 선관위에 신고한 재산 내역에서 증여세를 납부하지 않은 상태로 두 딸에게 약 6억원 가량의 현금과 주식이 분산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에 문국현의 선거운동본부[5]에서는 "펀드매니저의 조언에 따라 재산 분할관리를 했을 뿐"이라며 변명에 급급했다. 그러나 이걸 대선 출마 직후에야 본인의 명의로 황급히 환원시킨 사실이 밝혀져 본인의 이미지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며칠 후에는 또 "아이들의 혼수를 생각해서 그랬다”며 사실상 증여를 시인하는 등의 말바꾸기가 이어지며 상당한 지지 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사실 정계진출 이전 시기에 보수 논객으로 토론에 참여했던 정규재 한국경제 주필의 송곳 질의를 확실하게 논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경제 전문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이미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1위였고 그 남은 자리를 정동영과 이회창이 차지한 상황에서 대중에 비춰질 만한 기회가 현저하게 적어 후보 본인을 알릴 마땅한 기회도 없었다. 그러나 선거 당시 정동영 측에서 후보 단일화 제의를 하며 손을 내밀기도 했지만 끝까지 제3후보의 길을 고수했던 것도 주목할 만한 요소다.

결국 개표 결과 5.83%라는 아쉬운 득표율로 대선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있었다면 출구조사 결과 20대에서는 15.9%라는 상당한 득표율로 3위를 기록했다는 점이다. 이명박도 정동영도 이회창도 불신하는 당시의 20대들에게 문국현이 대안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008년에 열린 18대 총선에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선거구에 창조한국당의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 48,656표(52.02%)를 득표하여 3선 의원인 한나라당이재오 후보를 약 10,492표차로 이기고 당선됐다.[6]

2009년 9월 1일까지 창조한국당자유선진당의 연합 교섭단체인 '선진과 창조의 모임'의 대표를 지냈다.

2009년 10월 22일, 선관위의 지도를 받아 1%의 이자로 발행한 당사랑채권이 시중 금리(당시 5%)보다 낮다는 이유로 4% 차이만큼 당이 잠재적인 금전적인 이익을 얻은 죄를 물어, 당을 처벌할 수 없으니 자연인인 당 대표를 처벌하였다. 다만, 이유가 이것뿐만은 아니고 저리로 발행한 당채의 매입 당사자 중 1명이 비례대표 상위순번자였다는 게 문제였다. 비례대표 2번으로 공천되어 당선된 이한정 전 의원이 당사자로 이 당채를 6억 원치를 매입했던 것이다. 선관위와 법원은, 저리로 발행된 당채를 하필 비례대표 상위순번자가 매입한 것을 일종의 공천헌금으로 해석했다. 당채의 이율이 시중금리 수준이었으면 문제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설사 저리로 발행했어도 당 후보자들이 매입하지 않았으면 역시 문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대법원 판결에서도 4인의 대법관들이 합의를 보지 못하자 전원합의체로 돌려 9:4로 대법원 전원 합의체에서 징역 8월, 집행유예 2년의 형이 확정되어 의원직을 상실했다. 그리고 이 틈을 타 이재오가 이듬해 재보궐선거를 통해 지역구 복귀에 성공했다. 징역형을 받았으므로 2019년까지 향후 10년간 피선거권이 박탈돼 사면되지 않는 한 출마할 수 없으므로 사실상 정계에서는 은퇴한 상태다. 해당판례(2009.10.22. 2009도7436)형사소송법에서 공소장일본주의와 관련하여, 공소장일본주의의 위반의 효과와 위법의 치유에 대한 리딩케이스이다.

정계를 떠난 후 2009년부터 김광수경제연구소 고문을, 2010년부터 뉴 패러다임 인스티튜트 대표이사를 지냈다. 2013년부터는 한솔섬유의 사장을 맡고 있다.

제18대 대통령 선거 국면에서는 비슷한 포지션이였던 안철수 후보를 지지하였다. 박종진의 쾌도난마에 출연해 이런저런 조언을 했지만 안철수 후보가 사퇴를 하면서 문재인 지지로 돌아선 듯.

2015년 1월에는 캄보디아에 위치한 한솔섬유의 자회사 현지 공장에서 노조 간부들이 무더기로 해고되어 구설수에 오르기도 하였다. #

2019년이 지나 피선거권이 회복되었지만 특별히 정치 관련된 대외적인 활동은 하지 않고 있다.

3. 여담

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07 정계 입문


파일:창조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2007 - 2012 창당
정계 은퇴


[[무소속(정치)|
무소속
]]
2012 - 현재 정당 해산

5.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8080><tablebgcolor=#fff,#1c1d1f><tablewidth=100%><rowcolor=#fff><rowbgcolor=#808080>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2007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파일:창조한국당 흰색 로고타입.svg
1,375,498 (5.83%) 낙선 (4위)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은평 을 48,656 (52.02%) 당선 (1위) 초선[9]
역대 선거 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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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07 문국현.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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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선 18대 총선 (서울 은평구 을) }}}}}}}}}
역대 후보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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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7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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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2 한나라당 이명박 당선
3 민주노동당 권영길
4 민주당 이인제
5 국민중심당 심대평 사퇴1
6 창조한국당 문국현
7 참주인연합 정근모
8 경제공화당 허경영
9 새시대참사람연합 전관
10 한국사회당 금민
11 이수성 사퇴2
12 무소속 이회창
1: 무소속 이회창 후보와 단일화.
2: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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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둘러보기

파일:서울특별시 휘장_White.svg 서울특별시 제18대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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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성동 갑 성동 을
박진 공석 진영 진수희 김동성
광진 갑 광진 을 중랑 갑
권택기 추미애 공석 홍준표 유정현
중랑 을 성북 갑 성북 을 강북 갑 강북 을
진성호 정태근 공석 정양석 최규식
도봉 갑 도봉 을 노원 갑 노원 을 노원 병
신지호 김선동 공석 권영진 홍정욱
은평 갑 은평 을 마포 갑
이미경 이재오 이성헌 정두언 강승규
마포 을 양천 갑 양천 을 강서 갑 강서 을
강용석 원희룡 김용태 구상찬 김성태
구로 갑
전여옥 권영세 이범래 박영선 안형환
동작 갑 동작 을 관악 갑 관악 을 서초 갑
전병헌 정몽준 김성식 김희철 이혜훈
서초 을 강남 갑 강남 을 송파 갑 송파 을
고승덕 이종구 공석 박영아 유일호
송파 병 강동 갑 강동 을
김성순 김충환 윤석용
* 중 나경원 사퇴 (2011.9.28.)
* 동대문 갑 장광근 의원직 상실 (2012.3.15)
* 성북 을 김효재 사퇴 (2011.8.24.)
* 노원 갑 현경병 의원직 상실 (2011.6.10.)
* 은평 을 문국현 의원직 상실 (2009.10.22.)
* 강남 을 공성진 의원직 상실 (20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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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 · 서울 · 부산 · 대구 · 인천 · 광주 · 대전 · 울산
경기 · 강원 · 충북 · 충남 · 전북 · 전남 · 경북 · 경남 ·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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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원직 상실.[2] 소아마비 장애인인 여동생이 천주교 영세를 받고 싶다고 해서 같이 받았다고 한다.[3]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의원직 상실.[4] 큰딸은 유치원에서 비정규직 발레 교사로 일하다 그만뒀고, 작은딸은 외국계 은행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하다 대학에 복학했다.[5]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출신의 장유식(서영교 의원의 남편) 변호사가 문국현의 대변인으로서 이 내용을 발표했다.[6] 이 선거는 계파 갈등과 공천 문제 때문에 친박계가 친이계 후보들을 낙선시키기 위해 아예 대놓고 야당 후보를 지원했던 선거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보수 강세 지역인 사천에서 민주노동당 소속의 강기갑이 몰표를 얻어 당선되는 대이변이 발생했다.[7] 물론 당시 원더걸스의 인기와 위상이 워낙에 하늘을 찌르던 터라 다른 대선주자들도 이구동성으로 원더걸스를 꼽았기 때문에 딱히 돋보이지는 않았다.[8] 처음엔 안철수를 지지했으나, 사퇴를 하면서 문재인 지지로 바뀐듯 하다.[9] 2009.10.22. 의원직 상실 (정치자금법 위반).